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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디게아 교인들에게 보내는 편지

SOSTV, 강병국 목사

나를 어렵게 만드는 궁지

저는 세계 각지에 있는 수많은 우리 신실한 기독교인들과 사귈 기회를 가졌고, 여러 교회에서 집회를 인도해 왔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마음을 훈훈하게 하는 경험이었습니다. 그러한 과정에서 많은 교인이 영적인 문제들로 투쟁하는 모습을 목격할 수 있었고, 제 마음은 그들을 향한 동정심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들은 마지막 시대를 위한 예언의 주역이 될 수 있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의 믿음 때문에 짐승의 표 환난에서 핍박을 받게 될 사람들입니다. 비록 요한계시록은 마지막 시대의 교인들을 라오디게아 교인들이라고 부르면서 지구 역사의 모든 교회 중에서 가장 심한 책망을 하고 있지만, 지금 이 시대의 기독교회는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존재하게 될 교회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계 3:14- 18)

라오디게아 교회는 하나님께서 마지막으로 당신의 백성을 불러내실 때 사용하는 통로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사도 요한에 의해 아주 생생하게 묘사된 라오디게아 교인들의 특성을 인정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영접했다는 사실만을 말하면서 요한계시록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라오디게아 교인들에게 주는 경고를 무시한다면, 우리는 이상한 영적 혼돈 속에서 깊은 잠을 자게 될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라오디게아 교회를 설명하면서 육적인 것과 영적인 것이 이상하게 혼합된 교회라고 묘사했습니다. 영적 눈이 너무나 어두워져 있기 때문에 교회는 자신의 구역질 나고도 뜨뜻미지근한 상태를 제대로 인식하지도 못한다고 했습니다. 가장 가난하고 헐벗은 상태이지만 가장 부요하다고 생각하며, 차지도 덥지도 않고 뜨뜻미지근하여 하나님께서 토하여 내치고 싶은 그런 상태가 예수께서 재림하시기 직전의 교회 상태입니다.

하나님의 진단

우리는 사도 요한을 통해서 미리 경고를 받아왔을 뿐 아니라 라오디게아 교회의 치명적인 상태를 치유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제공하시는 치료제 또한 소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눈먼 것을 보게 할 안약과 벌거벗은 것을 가릴 흰옷과 가난한 것을 부요하게 할 금을 제공하십니다. 다른 말로 하면, 아무도 뜨뜻미지근한 라오디게아 교인으로 남아 있을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주는 기별의 끝 부분에 다음과 같이 말씀이 나옵니다.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 3:19,20) 이 성경 절에서 저를 가장 흥분케 하는 것은 라오디게아 교회가 비록 자기기만에 빠지고 두 마음을 품은 봉사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교회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서 모든 질병을 고쳐 줄 치료제를 받아들이라고 호소하십니다.

그분은 아주 평범하고 단순한 언어로 회개하라. 내가 그대의 마음에 들어갈 수 있도록 문을 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완전한 회복을 가져올 모든 처방을 얻는 길을 발견합니다. 예수님을 마음에 받아들이면 그분께서 의와 믿음과 성령을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비참하고 가련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우리를 당신의 보좌에 아버지와 나란히 함께 앉도록 하는 승리의 경험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약속입니까!

문제의 핵심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내는 기별을 받아들이는 것은 선택에 달렸다는 사실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우리가 무엇을 회개해야 할까요? 깊은 마비 상태에 빠진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죄를 짓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부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아무것도 필요치 않다고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미지근한 온도는 사람을 이완시켰다가 나중에는 무력하게 만듭니다.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자신의 처절하고 잃어버려진 상태를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네 곤고한 것과 &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계 3:17) 바로 그것이 라오디게아 교회의 진짜 문제입니다. 이기심 속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자신의 비참한 상황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교인들이 내는 헌금과 봉사에 만족하고 있습니다.

진리가 무엇인가를 생각하기보다, 다수 사람이 무엇을 원하는가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라오디게아 교회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이런 지긋지긋한 죄들을 회개할 필요에 대해서 역설한 책과 글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상황은 더욱더 악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냐하면 회개의 기별이 라오디게아 교인들의 주의를 끌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적 눈이 멀었기 때문에 회개의 호소들도 별다른 반응이 없습니다. 그들은 죄를 분별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죄가 무엇인지 정의되고 설명되어서, 죄에 대한 명확한 개념을 갖게 되는 것이 필요합니다.

죄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죄를 범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식의 설명으로는 그들을 더욱 깊이 잠자게 할 뿐입니다. 단순히 죄를 버리라고 설교하거나 글을 쓰면, 나머지 세밀한 것들은 성령께서 그들의 양심 속에서 구체적으로 지적해서 알려줄 것이라고 막연한 생각도 버려야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선지자들과 개혁자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죄를 담대하게 지적하였으며 지도자와 백성의 죄를 분명하게 질책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시대의 파수꾼들에게 분명한 경고의 나팔을 불도록 명하고 계십니다. 눈멀고 꾸벅꾸벅 조는 라오디게아 교인일지라도 하나님의 뜻과 진리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아차리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예수께서 곧 재림하시는 이 시대는 하나님의 종들에게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분명한 소리로 나팔을 불어서 라오디게아 교인들을 크게 흔들어대며 깨우는 일이 필요합니다.

곧바른 설교에 반대하는 사람들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자신의 죄를 지적받을 때 반대하여 일어섭니다. 간음과 거짓말은 십계명을 범하는 죄입니다.라는 말씀에 대항하여 일어설 교인들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 설교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반대 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내는 기별에 대항하여 사람들이 반대하는 이유는 죄를 지적하는 회개의 호소가 교회 안에 있는 어떤 사람들과 직접적으로 연관되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단순히 기쁜 소식으로 전하는 설교에는 어떤 사람도 일어나서 반대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설교에는 아무런 저항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부드러운 설교를 듣기 원합니다. 사람들의 그러한 요구에 굴복한 목사들은 성도들의 감정을 상하게 할까 봐, 예의 바르지 못하다는 말을 들을까 봐 두려워서 진리의 표준을 낮추고 죄를 죄로 지적하지 않게 됩니다. 침례 요한은 비천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나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죄를 견책하였습니다. 그는 왕들과 귀족들이 기별을 듣든지 거부하든지 간에 진리를 선포하였습니다.

죄를 지적할 때에 개인적으로 말하였으며 노골적으로 말하였습니다. 또한, 바리새인들의 신앙이 외식으로 가득 차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헤롯 왕이 헤로디아와 결혼한 것에 관하여 그 여자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고 말하였습니다(마 14:4). 예수께서 다시 오시는 길을 준비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의 설교와 가르침도 침례 요한의 기별처럼 단도직입적이어야 합니다.

분열을 일으키는 기별

어떤 사람들은 이 글을 읽으면서 불평할 것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내는 기별은 듣는 사람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기별이 아닙니다. 만일 사람들이 설교와 말씀을 편안한 마음으로 들을 수 있게 될 때까지 설교를 깎고 다듬는다면 그 말씀은 더 이상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내는 참된 기별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내는 기별의 특징은 기별을 듣는 사람 중 어떤 사람들이 분노하여 일어서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시대를 위한 하나님의 참 기별은 때로는 교회의 분열을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교회 안에서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사람들을 골라서 분리해 내는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종들에게 기별을 주셔서 교회를 향하여 외치도록 하는데, 그때 탐욕과 이기심과 잘못된 복음을 포기하지 않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반대하여 일어서게 됩니다. 어떻게 하면 교회 안에 있는 죄에 대하여 곧바르게 경고하지만, 교회를 공격한다는 비난을 받지 않을 수 있을까요? 저는 오랫동안 이러한 문제에 관하여 투쟁하고 기도해 왔습니다.

이 문제를 깊이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뜻에 대한 확신이 더욱 깊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확신은 나 자신의 평판과 인기를 포기하고, 진리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뜨뜻미지근한 라오디게아 교회의 근본적인 문제를 분명하게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완전히 세상으로 빠져들었거나 차가워지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완전히 그리스도 안에 있거나 뜨거운 것도 아닙니다. 교회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거룩한 것과 세속적인 것, 찬 것과 뜨거운 것이 반반씩 섞인 상태로 있는 것이 라오디게아 교회입니다.

가장 큰 염려

저는 현대 기독교회가 세상과 타협한 모습과 그 타협의 진정한 원인을 밝히는 말씀을 전해 왔습니다. 라오디게아 교인들을 비참하게 살아가게 한 신학적 이유는 자유주의적이고 세속적인 복음입니다. 죄를 죄로 지적하지 않는 값싼 복음입니다. 거룩한 것과 세속적인 것이 섞인 복음 때문에 일반 성도들과 목회자 모두에게 엄청난 영적 재난이 닥쳐왔습니다. 가장 큰 염려는 제가 전하는 기별이 동료 목회자들을 향한 공격으로 오해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드리는 기도는, 깊은 잠에 빠진 교회들을 흔들어서 깨울 수 있는 강력한 복음을 전할 때 사람들이 제 동기와 목적을 오해하지 않게 되기를 도와달라는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이 SOSTV에서 나오는 모든 책자와 말씀들을 접하실 때, 하나님께서 제게 보여 주신 교회의 문제에서 저와 같은 공감을 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저는 여러 교파에 속한 교회와 지도자들 그리고 성도들을 사랑합니다. 왜냐하면 라오디게아 교회는 예수 재림을 통하여 하늘 왕국에 올라갈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눈동자이며, 이 세상에 있는 그분의 가장 큰 관심과 사랑의 대상입니다. 여러분이 SOSTV에서 발간하는 책자들과 설교들을 읽고 들으신 후에 이전보다 더욱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며, 우리를 사랑하는 구세주에게서 분리시키는 죄들을 미워하게 되기를 기도드립니다. 우리가 모두 간과하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는데, 그것은 사단은 교회에 역사하여 교회 전체를 지옥으로 끌고 가려는 큰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단의 목적은 교회를 교리와 영적 경험 면에서 바벨론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진리의 성채가 되어야 할 교회를 무너뜨리려고 사단이 개발해 온 전략들은 무엇일까요? 사단은 자신의 목적을 이룩하고자 어떤 때는 사람들을 멋지게 홀리기도 하고, 어떤 때는 사람들 마음속에 두려움을 심어 주기도 합니다. 사단이 이미 여러 곳에 잠식해 들어갔고, 진리를 얼마만큼 흐려놓는 데 성공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가진 모든 지옥의 힘을 다하여 대항할지라도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를 이길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사람들이 정통이라고 인정하는 특정 종파가 아니고, 조직이나 건물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진리를 온 마음을 다하여 따르는 사람들이 모여서 예배드리는 곳입니다. 두세 사람이 신령과 진정으로 모여서 기도하며 말씀을 읽으면 그곳이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사단은 교회를 결코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수많은 교회가 타락하고 사단의 편에 서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들은 참 교회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참 교회는 땅에 떨어진 진리를 회복시키는 자들이고, 쓰러질 수도, 쓰러지지도 않을 교회입니다. 사단의 최후 발악 때문에 교회가 마치 소멸할 것처럼 보일지라도 하나님의 참 교회는 쓰러지지 않습니다. 참 교회는 살아남을 것이며 승리할 것입니다. 고난과 시련의 경험을 통과하면서 충실하게 진리 위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참 교회와 함께 승리할 것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 가는 길

점점 세속적이 되어가는 현대 기독교는 이제 세상과 별 차이가 없어진 것 같습니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세속적인 사람들과 별 차이가 없이 살아가고 있는 것이 요즈음의 현실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번 신앙 기사는 이 시대의 선지자라는 평판을 들었던 A.W 토저(Aiden Wilson Tozer, 1897~1963) 목사님의 글을 편집해서 구성해보았습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바른 신앙의 자세를 이 기사를 통해 배우는 독자들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 –편집실-

우리는 타락한 시대에 살고 있다. 현대 기독교는 세상의 편한 방법들과 적당히 타협하면서 세상과 마찰 없이 지내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깊은 잠에 빠진 기독교에게 이제 깨어나라고 말씀하신다.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이 세상을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함께 생각해 보자.

세상의 비웃음과 따돌림을 두려워하지 말라

1. 세상과 타협하며 미지근하게 살지 않는다

과거에 세상이 교회를 따랐던 적이 있었다. 교회가 주도권을 쥐고 앞장서 나갔으며, 세상은 교회를 뒤따랐다. 하지만 지금은 전혀 반대이다. 지금은 교회가 무릎을 꿇고 세상을 흉내 내고 있다. 과거의 교회는 어린양의 아름답고 혈색 좋은 신부였으나, 지금의 교회는 쪼글쪼글한 늙은 걸인 같다. 지금의 교회는 세상의 거리로 나가 세상 사람들에게 동전 한 닢을 구걸하기 위해 손을 내밀고 있다. 한때는 교회가 세상을 향해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행 3:6)고 말했다. 그러나 오늘날은 어떤가?

오늘날 교회는, 제발 우리를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다른 모든 면에서 당신들과 똑같습니다라고 말한다. 오늘날 기독교가 그 많은 시간과 돈과 노력을 쏟아 부으면서 세상에 전하는 것은 무엇인가? 성경적 기독교와 세상을 섞어놓은 기독교, 즉, 혼혈(混血) 기독교를 전하지 않는가?

명심하라. 십자가의 기독교는 세상의 비위를 맞추려고 아첨하지 않는다. 과거의 교회는 세상의 비위를 맞추려고 애쓰지 않고 오히려 십자가를 지고 하나님, 우리가 여기 있나이다. 우리가 의지할 분은 하나님뿐이오니 우리를 도우소서라고 기도했다. 교회는 자신의 성경적 원리 위에 우뚝 서서 세상에게 성령님의 음성을 들려주어야 한다. 그러면 세상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올 것이다. 당신은 세상에 적당히 적응하면서 현재의 미지근한 상태에 계속 머물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만일 그렇게 생각한다면 나는 당신에게 이렇게 묻지 않을 수 없다. 현재의 미지근한 상태에 계속 머물면서 당신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진리를 깨닫고 신앙의 열매를 맺고 또한 편안히 죽어서 그리스도를 떳떳하게 만날 수 있다고 믿는가? 당신은 그렇게 할 수 없다. 솔직히 말해서 당신 자신도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미지근한 신앙 상태를 벗어날 수 있을까?

2. 미지근한 신앙 상태를 벗어나려면?

성령충만을 받아야 한다: 미지근한 신앙상태에서 벗어나려면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한다. 성령충만의 경험을 한 사람은 그런 경험이 있기 전에 누구나 자기를 비우는 단계를 거쳤다. 이 단계에서 그들은 공허감을 느꼈을 수도 있다. 위대한 설교가 중 하나였던 무디는 성령님의 강력한 능력에 의지하여 많은 사람들을 주님께 인도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다. 하지만 그는 사역 초기에 자신에게 있는 텅 빈 공허감에 시달렸기 때문에 더 성령 충만을 사모했고, 그 결과 그는 큰 영적 능력의 소유자가 되었다. 많은 사람들은 시험과 불안과 공허감이 찾아올 때, 감정의 기복에 따른 신앙을 하기 때문에 그 기회를 하나님을 사모하고 그분의 성령으로 마음을 채우는 경험을 하지 못하고 불안해 한다.

공허감이 찾아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에 찾아 오셔서 쟁기질을 하셔서 돌밭 같은 우리의 마음을 옥토로 만드시는 작업을 하신다는 증거이다. 때로는 여러 가지 사건이나 싫은 사람을 통하여 우리 마음을 쟁기질 하시며 우리 마음 밭을 엎으신다. 다윗은 이런 체험 후에 밭 가는 자가 내 등에 갈아 그 고랑을 길게 지었도다(시 129:3)라고 고백했다. 우리를 비우시고 마음을 뒤엎으시는 하나님의 작업을 깨닫고 그 시련의 기회를 성령 충만함을 받는 기회로 삼는 사람은 하나님께 사랑 받는 사람이 될 것이다.

날마다 죽어야 한다: 사도 바울의 간증처럼 기독교는 날마다 죽어야 하는 종교이다. 신앙 생활은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삶이다. 그렇다고 우리의 얼굴에서 항상 슬픔이 베어 나와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육체적으로는 고난이 있을지 몰라도 영적으로는 기쁨이 충만한 것이 그리스도인의 정상적인 삶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교회는 이런 영적 즐거움을 모르기 때문에 세상에서 싸구려 기쁨을 사다가 거기에다 예수 라는 이름을 붙인 다음 예수 안에서 기뻐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세속적이고 세상적인 기쁨으로서, 육신을 죽이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치고 난 후에 주님의 임재와 동행함으로 얻는 하늘의 평안한 기쁨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육신을 죽이는 것은 자아를 비우는 것이다. 우리 속을 비우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우리 속을 그분의 성령으로 채우실 수 없다. 우리의 뜻과 육신의 욕망을 버리고 대신 하나님의 성령으로 채우심을 받고 그분의 뜻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사람만이 뜨거운 그리스도인인 것이다.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을 두려워한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마땅히 두려워해야 할 만큼 두려워한다면, 그 무엇도, 그 누구도 두렵지 않을 것이다. 칭찬을 받든 비판을 받든 우리는 주위 사람들에 의하여 좌우되지 말고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분의 뜻대로만 살도록 결심해야 한다.

1. 능력을 얻는 비밀

만군의 여호와 그를 너희가 거룩하다 하고 그로 너희의 두려워하며 놀랄 자를 삼으라(사 8:13). 어떤 시대이든 간에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만을 두려워하며 그분의 음성만을 들었던 소수의 사람들이 있었다. 위대한 선지자 이사야에게 하나님께서는 이 백성의 길로 행치 말 것(사 8:11)을 강력하게 경고하시며 이사야에게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는 자가 되라고 명령하셨다.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는 자가 되라는 말을 오해하지 말라.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주신 말씀은 너는 대다수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는 방향으로 가지 말라. 그들의 행동 방식을 따르지 말라. 대신 여호와를 거룩하다 하라 그리하면 내가 네게 거룩한 피할 곳이 될 것이다라는 뜻이 담겨 있다. 이사야는 능력을 얻을 수 있는 비결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우리가 능력을 얻을 수 있는 비밀은 바로 여호와를 거룩하다 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것이 되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는 것이다. 그 시대의 흐름이 어떻든지 하나님의 뜻과 음성에만 순종하고 따르는 사람만이 능력의 사람이 될 것이며,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은 흐름에 맞지 않을지라도 과감히 버리는 사람이 참된 그리스도인인 것이다.

2. 하나님을 체험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체험해야 한다. 성경적인 지식이나 진리 위에 서지 않고 이상한 감정적인 체험만을 고집하는 위험스러운 사람들 때문에 신앙적 체험 이라는 말이 거부감을 준다. 나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성경의 진리를 가르친다. 그러나 개인적인 체험 없이 성경만을 아는 것은 하나의 지식으로 끝나는 것이다. 하나님을 체험적으로 알고 그분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체험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런데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그 의미가 무엇인가? 하나님은 그리스도로서 이 땅에 오셔서 행동하고 느끼고 일하셨다. 만일 하나님 자신이 직접 이 땅에 오셨다 할지라도 그분은 성경에 기록된 그리스도와 똑같이 행동하고 느끼고 일하셨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성찬식에서 떡을 먹는 것처럼 생명의 떡이신 그리스도를 우리는 날마다 먹어야 한다. 즉,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소유하고 나의 영혼 안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의 입이 음식물을 섭취하여 위로 넘기듯이, 우리의 영혼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이 신앙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이 되신다. 그리스도이신 하나님을 소유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체험적으로 알게 될 것이다.

3. 사람들의 손에서 벗어나라

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말하고 싶다. 특히 목회자나 선교사가 되려는 젊은이들에게 당부하고 싶다. 사람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라. 하나님은 우리가 사람들을 추종하는 자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 다만 하나님은 우리가 사람들을 사랑하고 존중하고 화목하게 지내기를 원하신다. 이 세상에서 가엽고 보기에 안쓰러운 일은 신학교를 갓 졸업한 젊은 목회자가 가장 좋은 일자리를 구하려고 지역의 유명한 목회자를 찾아다니면서 식사를 대접하는 것을 보는 일이다. 필요한 교육을 받고 하나님을 위해서 준비되었다면 다만 하늘을 바라보며 기도 드리라. 오 하나님! 제가 준비되었습니다라고. 그런 다음 하나님이 어디로 인도하시든지 간에 그곳에 가서 일하라. 윗사람을 찾아다니며 비위를 맞추려고 애쓰지 말고...

사람들의 아첨에 넘어가지 말고 그들의 비판에 흔들리지 말라. 정당한 비판도 있지만, 남을 비판하기를 좋아하는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의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해 그렇게 한다. 칭찬을 듣든, 비판을 받든 우리는 사람들의 손에 놀아나서는 안 된다. 우리의 미래와 우리 자신을 사람들의 손에 맡기지 말라.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은밀한 대화를 나누는 것이며 주님의 지도와 인도하심을 구하는 일이다. 사람들의 의견이나 판단이나 평판에 자신을 맡기지 말고 진리와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맞으면 무슨 일이든지 두려움 없이 착수하며 그분 안에서 확신 있는 삶을 살아가라.

4. 모든 것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사랑하라

오늘날 종교 세미나나 여러 가지 종교 행사에 참석해 보면 많은 지식들을 얻는 듯이 생각된다. 예언, 유대의 역사, 기독교 교리들을 다루며, 심지어 헬라어나 히브리어까지 곁들인 세미나들은 우리들 스스로가 유식해졌다는 착각에 빠지게 만든다. 그러나 세미나, 교리, 성경지식, 종교적 형식들이 중요하지만, 만일 우리가 그 속에서 그리스도를 만날 수 없다면 그런 것들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숭모하기 위한 종교이다. 기독교는 단지 죄의 형벌에서 건짐을 받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기독교는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실현시키는 종교인데,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이란 하나님을 닮은 자녀들이 창조주를 깊이 사랑하여 진정으로 그분을 섬기고 예배드리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다. 그분은 모든 문제의 해결자이시며, 지혜가 되신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아들을 사랑하라. 그분을 모르는 사람들은 모든 것을 그분 밖에서 찾겠지만, 우리는 모든 것을 그분 안에서 찾아야 한다. 다윗은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 결국을 내가 깨달았나이다(시 73:17) 라고 고백했다. 우리에게 가장 큰 깨달음이 주어지는 곳은 바로 성소이다. 그곳, 중세의 저술가들이 페너트레일리어 (penetralia)라고 불렀던 곳에서, 당신의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드러내실 것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자신에 대하여 드러내기를 원하시는 것을 모두 당신에게 드러내실 것이다. 그리스도께 가장 좋은 자리를 내어드리라. 당신 자신을 그분께 드리라. 온 정신과 마음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고, 당신을 얽매어 그분에게서 멀어지게 만드는 모든 줄들을 끊어버려라. 그분만이 당신의 모든 것이 되게 하라. 예수님은 모든 것이다. 당신은 예수님을 찾았는가? 예수님은 교회가 아니다. 예수님은 종교가 아니다. 우리의 생명이신 예수님께 당신을 온전히 바치지 않겠는가?

깨끗한 인격으로 성령과 동행한다

우리가 성령님과 동행하려고 한다면, 우리의 인격을 깨끗하게 유지해야 한다. 성령님은 거룩한 분이시다. 그러므로 우리의 머릿속을 채우고 있는 것이 언제나 거룩하고 순수해야 한다. 그분은 깨끗한 마음의 성소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그런데 성령님과 동행하려면 조건이 있다. 두 사람이 의합지 못하고야 어찌 동행하겠느냐(암 3:3).

동행의 조건

  • 첫째, 가는 방향에 대해 합의해야 한다. 만일 가려고 하는 방향이 다르면 동행하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 둘째, 목적지에 대해 합의해야 한다.
  • 셋째, 그들은 어떤 길을 택할 것인지에 대해 합의해야 한다.
  • 넷째, 서로 동행할 의사가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

1. 천국 가기 위한 보험?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과 동행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성령님과 동행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은 보험을 드는 심정으로 기독교를 믿는 것 같다. 그런 사람들이 기독교에서 원하는 것은 죽어서 지옥에 가지 않고 천국으로 무사히 들어가는 것이다. 그들이 지불하는 보험료는, 주일에 불편하지만 참고 교회에 출석하는 것이다. 그들은 헌금을 드리고 저질스러운 쾌락을 삼간다. 그들은 보험이 무효 되지 않도록 나름대로 작은 불편들을 감수한다. 그러면서 그들은 자신이 죽으면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진리를 자기들 편한 대로 해석한다. 성경에 나온 엄하고 두려운 말씀들은 그들의 손에 의해 제거된다. 이런 사람들은 참된 신앙을 하기 위한 준비를 갖추지 못한 사람이다.

어떤 사람들은 영적인 목적이 아니라 사교적인 목적을 위해 교회에 출석한다.

2. 성령님은 깨끗한 사람 안에 거하신다

성령님은 살아계신 인격체이시다. 하나님은 인격체이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구체적인 인격으로 다가오신다. 가장 구체적인 설명을 우리는 성경에서 얻을 수 있는데, 성경은 추상적으로나 공상적으로 말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성경이 증거하는 성령님을 붙들면 된다. 성부와 성자와 하나이신 성령님은 우리에게 예수님을 알리신다. 우리의 생각들은 그분의 성소이다.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곳은 우리의 사고요, 의지요, 감정이요, 지성이다.

만일 우리가 성령님과 동행하려고 한다면, 우리의 인격을 깨끗하게 유지해야 한다. 그분은 악의, 이기주의, 속임, 어리석음, 교활함, 음란한 말을 용납하지 않으신다. 만일 당신이 이런 것들에 빠진다면 그분은 침묵하실 것이며, 당신은 그분의 은혜롭고 아름다운 임재를 느끼지 못할 것이다. 그분은 당신을 도와주지 않으실 것이다. 그분이 당신 안에 계속 머물고 계시지만, 그분은 상처받은 채 거기에 계실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이 성령님과 동행하려고 한다면 성령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아야 한다. 성령님은 거룩한 분이시다. 그러므로 당신의 머릿속을 채우고 있는 것이 언제나 거룩하고 순수해야 한다. 그분은 깨끗한 성소를 원하신다. 그분은 그분의 처소를 영광스러운 곳으로 만들기를 원하신다. 성령님은 불경스럽고 더러운 전에 거하시지 않는다.

3. 문제가 되는 것은 끊어라

당신의 영적인 진보를 방해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버려야 한다. 이것이 영적 생활을 위한 실제적이고 유용한 원리요 성경의 교훈이다. 영적으로 건강 하려면 영적으로 해가 되는 것을 끊으면 된다. 당신은 성령님과 즐거운 교제를 나누면서 하나님과 동행하기를 원하는가? 그러면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으시는 것들을 버려라. 사람들은 이제까지 즐기던 것들을 끊으면 불편할 뿐 아니라 남들에게서 비웃음과 따돌림을 당할 까봐 망설이는 것 같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얼마나 겁쟁이가 되어버렸는가?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고, 야고보는 칼로 죽임을 당했고, 바울은 목이 잘렸고, 또 많은 제자들이 순교를 당했다. 교회의 역사는 냉대와 핍박과 순교의 역사가 아닌가? 그런데도 그리스도인이라는 우리가 이런 교회의 역사를 뻔히 알면서도 사람들의 따돌림을 두려워하는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십자가를 지고 남들과 다르게 살아라라는 말에 놀라서 비웃음을 당하기 싫으니 내게 편한 길을 좀 보여주세요라고 말하려는가?

4. 말씀을 묵상함

하나님과 동행하려면 우리는 성경말씀 안에서 그분을 찾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분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성경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분의 말씀을 묵상해야 한다. 우리가 범하기 쉬운 잘못 중의 하나는 묵상보다 연구를 중요시 하는 것이다. 연구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묵상이 더 중요하다. 머리로써 성경에 접근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마음으로써 접근하는 것은 더 중요하다. 진리가 그리스도인의 삶을 변화시키지 않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변화 없는 그리스도인의 삶과 믿음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려면 하나님께서 주신 책을 깊이 묵상해야 하며 진리로 변화되어야 한다.

5. 하나님의 임재를 연습하라

우리는 어디에서나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 니콜라스 헤르만(Nicolas Herman, 1605~1691,하나님의 임재 (연습의 저자)은 그의 저서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연습해야 한다. 짧은 시간이 주어질 때 그것을 놓치지 말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라고 했으며, 심슨 박사는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에 대해 이렇게 비유했다. 어떻게 쉬지 않고 기도할 수 있는가? 그것은 나침반의 바늘이 항상 북극을 가리키고 있는 것처럼, 바쁜 생활과 와중에서 복잡한 삶을 살아갈 때에도 우리의 주의를 빼앗기지 말고 늘 하나님을 향하는 것이다.우리는 결코 혼자 있는 것이 아니다. 어디를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삼위일체 하나님이 계신다. 원하기만 하면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과 대화를 나눌 수 있다. 그분의 임재를 연습하며 항상 동행하라.

 

 

 

 

 

 

 

십자가에 대한 커다란 오해

십자가에 대한 커다란 오해

왜 십자가가 필요하게 되었을까?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서 또 다른 방법이 없었을까? 무한한 지혜를 가지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희생 시키지 않고도 인간을 구속 하실 수 있는 다른 계획을 생각해 내실 수 없으셨을까?

우주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도로 사시기 위하여서 다른 선물을 마련하실 수가 없으셨을까? 천사가 인류를 대신하여 죽을 수는 없었을까?

예수께서 갈보리로 가신 것은 전혀 다른 길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이유는 이 세상의 인류들을 저들의 죄에서 구속하시기 위한 목적뿐만이 아니었다. 거기에는 사단 마귀와 싸우는 우주적인 전쟁의 의미도 내포 되어 있는 것이다. 하나님과 사단 사이의 전쟁은 십자가에서 최고도에 달하였다. 그 전쟁은 십자가에서 시작되거나 끝나지 아니했다. 십자가는 창조 이전 부터 하나님의 마음 속에 감추어져 있었다. 혹시 인간이 자유 의지의 선택을 통하여 하나님을 반역하고 범죄하게 될 경우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과 은혜를 통하여 다시 구속할 것에 대한 계획이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마음 속에는 있었던 것이다.

 

십자가가 생긴 이유

십자가가 생긴 이유는 사단이 하늘에서 반역하여 전쟁을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원래 아름다운 그룹 천사 중 하나였다. 에스겔은 마귀의 타락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계시의 말씀을 기록하였다. “네가 옛적에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있어서 각종 보석 곧 홍보석과 황보석과 금강석과 황옥과 홍마노와 청옥과 청보석과 남보석과 홍옥과 황금으로 단장하였었음이여 네가 지음을 받던 날에 너를 위하여 소고와 비파가 예비 되었었도다. 너는 기름 부음을 받은 덮는 그룹임이여 내가 너를 세우매 네가 하나님의 성산에 있어서 화광석 사이에 왕래하였었도다. 네가 지음을 받던 날로부터 네 모든 길에 완전하더니 마침내 불의가 드러 났도다.” 에스겔 28:13-15.

또한 이사야는 다음과 같이 사단의 타락을 설명하고 있다.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Lucifer, 루스벨)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 하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 그러나 이제 네가 음부 곧 구덩이의 맨 밑에 빠치우리라.” 이사야 14:12-15.

위의 말씀들을 미루어 보아 그의 타락은 교만에서부터 비롯된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피조물 가운데서 가장 아름다운 존재였던 것 같다. 그는 하나님과 자신을 비기면서 하나님처럼 높아지겠다는 마음이 생겨서 다른 천사들을 꼬이면서 하늘에서 반역을 시작한 것이다. 그가 천사들 중 삼분의 일 정도를 미혹하는데 성공한 사실을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데, 요한 계시록 12장의 말씀이 그것이라 할 수 있다. “그 꼬리가 (용의 꼬리-필자 주) 하늘 별 삼분의 일을 끌어다가 땅으로 던지더라 ...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으로 더불어 싸울새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 이기지 못하여 다시 하늘에서 저희의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 큰 용이 내어 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 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 쫓기니라.” 요한계시록 12:4,7-9. 여기에서 미가엘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용은 말씀 그대로 사단을 상징하고 있다.

 

하나님을 향한 사단의 도전장

이 전쟁에서 사단이 인류를 꼬인 수법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거짓말로 사람들을 꾀이는 것이었다. 오늘날도 꼭 마찬가지이다. 그는 해와에게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하신 실과를 따 먹어도 괜챦다고 꼬였다. 즉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지 않고 거역해도 별 문제가 없는 것이며 영원히 살 수 있다고 거짓말을 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해와에게 다른 모든 실과들은 먹을 수 있지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만은 먹지 말라고 하신 이유는 선악과 자체에 독이 들어있기 때문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권위를 상징하고 우주의 조화와 질서를 성립하는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존중성을 위하여 주신 명령이었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존경의 마음이 이 세상의 평화와 생명을 영원히 아름답고 질서 있게 보존 할 수 있는 것이다. 법이 없는 사회가 있을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사단은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해와에게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말하면서 그들을 미혹하고 기만한 것이다.

더 나아가서 마귀는 하나님을 이기적인 분이라고 고소하였다. 그 사실은 창세기 3장에서 발견할 수 있게 되는데, 사단은 아담과 해와가 그 금단의 과실을 먹으면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처럼 될 것이라고 말하고, 이것을 아는 하나님이 그것을 먹지 못하도록 금지시키신 것이라고 거짓말을 해 준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이기적인 분이시기 때문에 선악과를 먹지 못하게 하셨다고 말한 것이다. 그러한 기만술에 인류의 조상은 그만 넘어가 버리고 말았다. 그들의 불순종이 이 세상을 이러한 파멸로 몰고 오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다시 회복되어 에덴 동산으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길은 다시 하나님을 사랑하고 존경하며 그 분의 율법을 존중하여 순종하는 사람들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은 그렇게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 마음이 악하여 지고 불순종에 익숙하여졌기 때문이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로마서 8:7. 그러므로 하나님께 두가지의 사단의 고소를 침묵시키셔야 할 필요가 생기게 된 것이다. 그것은 곧 첫째로 A 하나님은 이기적인 분이 아니고 인류의 평화와 영원한 행복을 원하시는 크신 사랑의 존재인 것을 증명해 주어야 하는 것이고, 두번째로 B 하나님의 계명은 우주의 질서와 평화를 위한 것으로서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요, 그것을 무시하고 깨뜨리는 날에는 세상의 파멸과 슬픔이 온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이셔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응전, 십자가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내려 오시어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 가신 것이다. 십자가는 에수께서 우리의 죄 값을 대신 지불하신 속죄의 의미 이외에도 또 다른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이기적인 분이 아니라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참 사랑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증명해 준 것이다. 그리하여 마귀의 속임수에 넘어가 버린 모든 인간들이 당신의 품으로 다시 돌아 올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신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계명은 폐할 수 없는 것으로서 인류의 평화와 질서를 위하여 지켜야 할 것을 증명하신 것이다. 이미 하나님의 율법을 범한 결과가 어떠한지는 이 세상의 타락의 모습을 통하여서 지난 수천년간 증명되어 온 바이다. 예수님의 지상 생애 동안이 하늘의 천사들과 거민들에게 있어서는 하나님과 사단 사이의 품성의 차이점을 너무도 명백하게 살펴 볼 수 있는 귀한 기회가 되었다. 사단의 본성이 얼마나 악한 것이며, 그의 주장들이 얼마나 거짓된 것인가를 온 우주가 더 확실하게 알게 된 것이다. 십자가에서 인간들을 충동질하여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려 하는 악랄한 마귀의 성품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이다. 이제는 아무도 그의 주장을 인정하는 자들이 없어졌다. 십자가에서 악한 마귀의 본성과 용서를 위하여 기도하시는 거룩한 하나님의 품성의 큰 대조가 드러난 것이다.

십자가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영원히 서게 되었다. 십자가는 사단의 운명에 종지부를 찍은 것이다. 그는 영원히 패배자가 되었고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후에는 영원히 멸망 당할 수 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다. 십자가는 영원히 인류를 구원하는 표상이 되었다. 마귀가 예수를 십자가로 죽이려 했으나 예수께서는 오히려 사랑을 통하여서 영원한 승리를 거두신 것이다. 사단은 그래서 십자가를 미워한다. 그렇다고 그는 십자가를 없이 할 수가 없다. 십자가의 상처가 예수 그리스도의 손바닥에 영원히 남아 있게 될 것이다.

 

기독교회 속에 들어온 사단의 기만

그러나 우리가 한가지 기억하고 지나가야 할 것이 하나 있다. 선악간의 전쟁이 십자가에서 결정지어지긴 했으나 아직 끝나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다. 마귀는 자기가 십자가를 없이 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십자가의 능력과 의미를 없애 버리기 위하여 또 다른 작전을 세운 것이다. 십자가를 그리스도인들이 믿더라도 십자가의 참 뜻을 오해시켜 버리면 십자가를 믿지 않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는 사실을 사단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아주 미묘한 작전을 세웠는데, 그것은 오히려 아예 믿지 않는 것보다 더 무서울지 모르는 기만술인 것이다.

그는 자기가 십자가를 없앨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십자가의 의미를 자기의 주장에 맞게 색칠을 하여 자기가 원하는 바대로 사람들이 믿고 따르도록 만들 계획을 세운 것이다. 그는 원래 인간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율법은 꼭 순종할 필요가 없는 것이며, 하나님의 법을 폐해도 큰 문제가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사람들을 꼬여 왔다. 그것이 바로 마귀가 인류의 조상들을 기만한 방법이 아니였던가!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를 찬양하고 설교하며, 갈보리에 대하여 많이 말하는 것에 대하여 두려워하지 않는다. 어떤 의미에서 사단은 그리스도인들이 감정적으로 십자가에 대하여 많이 말하고 찬송하며 설교하기를 원한다. 십자가의 그 참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한 그리스도인들이 드리는 예배나 찬송은 사단에게 조금도 두려움이 되지 않는 것이다.

사단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십자가에서 율법이 폐하여졌다고 가르치며 믿게 하고 있다. 십자가의 보혈과 은혜가 마치 인간의 불순종에 대한 좋은 핑게가 되도록 믿게 하고 있다. 십자가를 믿는한 하나님의 계명은 더 이상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믿도록 권한다. 십자가를 믿는한 죄를 계속 지어도 충분한 용서 속에 있으니 염려 할 필요가 없다는 듯이 믿고 살도록 격려 한다. 사단은 갈보리의 십자가가 우리를 하나님의 율법에서 해방하였다고 믿게 만든다. 십자가가 마치 우리들을 죄로부터 구해낸 것이 아니라, 그 죄 가운데서 구원을 준 것으로 믿게 만들려 하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그리스도의 보혈이 우리를 죄에서부터 해방하여 낸 것이 아니라 죄를 짓는 일에 자유케 해 주신 양으로 생각케 하고 있다는 말이다. 십자가의 보혈에는 능력이 있다. 죄를 용서하는 능력 뿐만 아니라, 죄인들을 그 죄에서부터 해방하여 다시는 그 죄를 반복하지 않게 하는 힘이 있는 것이다. 나아가서 십자가는 죄인의 마음을 변화시켜 하나님의 계명과 말씀대로 순종하며 사는 자로 만들어 주는 초자연적인 능력이 있는 것이다.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히브리서 9:14.

만일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계명을 폐하신 것이라면, 무엇 때문에 예수께서 그 위에서 돌아가실 필요가 있었겠는가? 율법을 그렇게 쉽게 폐해 버리실 수 있으셨다면, 예수께서 무엇 때문에 율법을 범한 인류들의 죄를 대신하여 그 값을 치루실 필요가 있었겠는가 말이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율법이 있기 때문에 죄가 성립되는 것이고, 죄에 대하여서 하나님의 율법은 사망을 선고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인간들의 죄값을 대신 지불하셨다는 사실 자체가 하나님께서 당신의 율법을 폐하시는 것이 아니라 존중하시고 높이신다는 사실을 드러낸 것이다. 그냥 쉽게 율법을 폐하여 버리실 수 있는 일이었다면 무엇 때문에 그렇게 고통스러운 죽음을 통하여서 인간들의 죄를 용서하셔야만 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에서 하나님께서 율법을 폐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완전케 세우신 사실을 알 수 있게 된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마태복음 5:17).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로마서 3:31). 사도 바울이 설명한 예수께서 십자가로 폐하셨다는 것은(골로세서 2:14-16 참조) 하나님의 계명이 아니라, 의문의 율법 곧 유대인들이 지키던 모세의 율법 즉, 절기들이나 종교 의식적인 절차들을 가르켜 말한 것이었다.

십자가를 찬송하자! 그것은 우리의 구원의 상징이다. 십자가를 감사하자! 그것은 우리 하나님의 크신 사랑의 표상이다. 그러나 십자가의 참 목적을 잊지 말도록 하자. 오늘날, 십자가에 대한 커다란 오해가 범람하고 있다. 그것은 마귀가 뿌린 씨들이다. 십자가는 인간의 죄를 용서해 줄 뿐만 아니라 인간의 마음을 변화시켜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순종하며 사는 착하고 아름다운 그리스도인들로 바꾸어 주는 것이다. 십자가에는 죄인들을 변화시키어 하늘에 있는 거룩한 천사들과 같이 살 수 있기에 안전한 자들로 만들어 주는 힘이 있다. 예수께서 우리를 용서 하시고 구속하시는 것은 우리를 거룩하고 깨끗한 자들로 만드시기 위하여서 구원하신 것이다. 십자가에는 능력이 있다. 십자가는 우리들에게 죄를 짓는 면허증을 주는 것이 아니라, 죄를 이기고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십자가는 율법을 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케 해 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순종하며 사는 사람들로 만들어 준다. 이것을 경험하는 자들이 참된 그리스도인들이라 하겠다.

 

 

성소 구속의 청사진

성소가 주어진 이유와 그 중요성

마음을 정하고 성경통독을 시작하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창세기는 잘 읽어 나가는데 출애굽기와 레위기를 읽으면서 어렵고 지루함을 느껴 대충 읽어 나가거나 그 부분을 읽지 않고 넘어가는 경우가 있다.

그 이유를 생각해 보면 출애굽기 중반을 지나면서부터 레위기 전체가 이해하기가 어려워 보이는 성소의 기물들과 각종 제사에 대한 설명들이 계속해서 나오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성경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 3:16,17절) 라고 말하고 있다. 모든 성경 말씀은 분명 하나님의 감동으로 쓰여진 것이고 한 말씀 한 말씀이 우리를 교육하여 온전케 만들도록 쓰여진 것임을 부인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성경의 첫 부분의 책인 출애굽기와 레위기에 자세히 반복하여 설명되어 있는 성소에 대한 기록을 무시하거나 구약에 쓰여진 것이니 이미 지나간 것이라고 덮어 둘 수 있겠는가? 그럴 수는 없다. 성소제도에는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이상의 놀라운 구속의 섭리가 있다. 성소는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는 과정이 세밀하게 그려져 있는 청사진이다.

사실 성소제도의 시작은 창세기에 기록되어 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난 뒤 하나님께서 지어주신 가죽옷을 통해 희생이 필요한 제사제도를 보여 주셨다. 그러므로 성소제도는 하나님께서 죄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시는지, 어떻게 범죄한 죄인이 다시 죄의 문제에서 회복하여 하나님 앞에 설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 때문에 희생된 동물은 예수님을 상징한다. 그리고 모세시대 당시 죄로 인해 희생당한 동물들도 또한 예수님을 상징한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성소의 의식 하나 하나는 예수님의 봉사의 생애와 사역을 의미하는 동시에 하나님을 믿는 자들의 구원의 경험과 단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설명해 주고 있다.

이번 호는 성소제도가 시작된 이유와 성소의 중요성, 성소의 모형이 주는 의미, 성소 기구들이 갖고 있는 의미, 성소에서 이루어진 제사 제도들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 그리고 성소를 통해 예수님의 과거 현재 미래의 사역, 그리고 우리가 현재 서 있는 곳과 서 있어야 할 곳, 등을 자세하고 쉽게 설명해 놓았다. 앞으로 읽어 나갈 글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성소를 통해 보여주신 놀라운 구원의 길을 찾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찾고 그 길에 들어서서 마음에 참된 평안을 찾기를 바란다.

1. 성소 제도가 주어진 이유

인류의 타락

인류의 구원은 인류의 타락에서 연유되었다. 사람이 죄를 짓지 않았다면 영원히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았을 것이다. 사망, 질병, 슬픔, 고통, 늙음과 같은 죄의 결과들도 물론 이 지구상에 전혀 없었을 것이다. 거기에는 사랑과 화평과 행복과, 영원토록 전진 되는 기쁨과 발전만이 존재했을 것이다. 그러나 인류의 시조인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하므로 그 모든 조화는 깨어지고 엄청난 어두움과 재난의 그림자가 이 세상에 드리우기 시작하였다. “죄의 삯은 사망”이다 (로마서 6:23). 그런데 성경은 인류의 조상 아담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이 다 죄를 범하였다고 선고하고 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사도 바울은 말하였다 (로마서 3:23). 물론 죄를 시작하고 그 결과로 죄에 대하여 약하여진 본성을 유전하여 준 총체적인 책임은 아담과 하와에게 있다고 하겠지마는 그러나 그들의 모든 후손들도 한결같이 자기들의 선택을 통하여서 죄들을 짓게 되었고 그리하여 사망이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이 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왜 인류가 타락하게 되었는가? 그 이유는 간단하다.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죄는 어떻게 성립되는 것인가? 성경은 죄에 대한 정의를 다음과 같이 내려 주고 있다.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요한일서 3:4. 다시 말해서 죄란 하나님의 율법인 계명을 범하는 것이다. 이 우주에는 법칙이 있다. 하나님의 창조물들이 존재하는 데는 원칙이 있다. 별들이 회전하는 괘도가 있고 생물들이 호흡하는 생성 원리가 있는 것이다. 이 법칙을 깨어 버리면 질서와 평화와 행복이, 아니 더 나아가서 그 생명의 존재 자체가 파괴되어 버리게 되는 것이다.

자연계와 마찬가지로 도덕적 그리고 영적인 세계에도 법칙이 존재한다. 그 법칙은 어떠한 면에서 천연계의 법칙보다 더 중요한 것이다. 도덕적이고 영적인 법칙이 또한 자연계를 지배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인간이 잘못된 도덕적인 법칙을 세우고 원자 폭탄을 만들면 자연계에 엄청난 파멸을 초래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 도덕적인 법칙을 어기게 되면 이웃들에게 내지는 온 세상 사람들에게, 아니 더 나아가서는 온 우주에 큰 슬픔과 고통을 불러 오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일들인 사기, 절도, 강간, 살인, 불효, 시기, 질투 등의 두려운 결과들을 주목하고 살지 아니하는가! 사람들은 하나님의 정부, 곧 우주의 헌법인 계명을 무시하는 죄를 범하였기 때문에 타락하게 된 것이고, 그 결과로 무서운 사망에 이르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선택과 계획

하나님께서 선악과만은 먹지 말라고 하신 분부는 에덴 동산의 눈에 보이는 계명이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그 분의 지배를 받는 데에만 안정과 평화와 행복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류의 시조는 그 계명을 어기고 사단의 꾀임을 더 신뢰하였다. 마귀는 하나님을 이기적인 분으로 고소하였다. 불공평한 분으로 고소하였다. 이 과실을 먹으면 하나님 자신처럼 눈이 밝아질 것이기 때문에 먹지 말라고 하신 것이라고 말하며, 하나님의 계명을 어겨도 괜찮은 것이며 결코 죽지 않을 테니까 염려하지 말라고 기만하였다. 인류의 시조는 마귀의 말을 하나님의 말보다 더 신뢰하고서 우주의 하나님의 정부의 기초인 계명을 어기고 반역하기로 선택한 것이다.

인간의 타락은 하나님의 가슴에 너무나 커다란 슬픔과 고통을 안겨 주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 이제 선택을 하셔야만 하게 된 것이다. 범죄한 인간을 그저 대수롭지 않은 듯 용서해 주어 버리면, 온 우주에 거하는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게 될 것이고, 그 결과로 엄청난 반역과 파괴가 우주를 휩싸게 될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실 수가 없으셨다. 그렇다고 인류를 그저 영원히 소망 없이 죽어 가도록 내버려 두실 수는 도저히 없으셨다. 그러한 갈림길에서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죄 값을 대신 치루어 주시고 두 번째의 은혜의 기간을 가지고 다시 살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여 주시기로 선택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시면서 자유 의지와 자유 선택권을 주시었다. 자유 의지와 선택이 없는 인간은 로보트요 사람이라 할 수 없는 것이요, 또한 자유 의지와 선택이 없이는 성품의 발전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아울러서 인간에게 자유 의지와 선택권을 주셨을 때에는 인간이 반역과 불순종할 수도 있는 위험을 무릅쓰신 일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창조 계획 속에는 인류의 타락의 가능성과 그 사후 대책에 대한 계획이 이미 마련되어 있었는데, 그것은 다름아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범죄한 인간들을 위하여 인간이 되어 오셔서 그들의 죄를 대신하여 돌아가시고 또한 그들에게 의로운 삶의 모본을 보여 주시는 일이었다. 그 일은 엄청난 고통을 수반하는 일이요, 하나님의 생명의 댓가를 치루는 어마어마한 값을 지불해야 하는 일이었다. 인간이 타락한 이후에 하나님께서는 그 사랑의 선택을 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생명을 바치기로 선택하신 것이다. 그것은 쇼(Show)가 아니었다. 성소 제도의 속죄제를 공부해 보면 알게 될 것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은 참으로 우리의 두뇌로는 도저히 이해 할 수 없는 놀라운 사랑이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하여 인류는 두 번째의 기회를 얻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통하여 태어나게 될 수많은 자손들을 보시고 차마 인류를 그냥 죽도록 내버려 두실 수가 없으셨다. 바로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 여러분들을 하나님께서는 내어다 보신 것이다. 우리가 구원을 받아 영원히 살게 된다면 현재 우리가 가지고 태어난 이 생명의 가치야 말로 이루 형용 할 수 없을 정도로 무한한 가치가 있는 것이 된다. 우리의 지식과 성품이 계속적으로 영원토록 발전하여 나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앞으로 태어날 아담의 후손들에게, 구원을 선택하는 사람들의 그 적당한 숫자가 차기까지, 또한 죄악의 역사를 용납하실 수 있는 기간까지 이 땅에 태어 나도록 허용하신 것이다. 그러나 인류에게 두 번째 기회를 주시면서 하나님께서 허용하셔야 할 일이 있었는데, 그것은 이 지구상에 죄의 결과가 그대로 임하도록 허용하시는 일이었다. 그것은 공평한 처사였고 또한 사단과의 전쟁에서도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이 온 천하에 드러날 때까지 그 공정성을 지키셔야만 하시기 때문이었다. 또한 죄와 반역은 악한 것이라는 사실을 그 결과를 보여 주심으로 공개하실 필요가 있으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기는 하지만 잠깐 살다가 죽게 되어있고 또한 죄의 결과인 슬픔과 질병과 늙음의 영향 속에서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는 유일한 이유와 목적은, 사는 동안 더듬어서 진리와 하나님을 찾아 발견하여 구원의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기회를 주시는데 있는 것이다 (사도행전 17:25-28 참조).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생명은 얼마나 고귀한 것인지 모른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 발견하고 구원의 선물을 받으면 우리는 영원히 사는 삶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현재 우리의 환경이 어떠하든지, 아무리 어려운 시련들을 당하게 되든지 간에 불문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이 놀라운 기회에 대하여 영원토록 감사와 찬송을 돌려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이 은혜의 기회는 놀라운 것이기 때문이다.

2. 아담과 하와로부터 시작된 성소 제도

인간을 다시 살게 해 주신 후에 하나님께서 제일 먼저 아담과 하와에게 주신 계시가 바로 성소에 대한 계시였다. 그것은 창세기 3장에 나타나는데, 에덴 동산에서 내어 쫓기는 인류에게 하나님께서는 가죽 옷을 해 입히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가죽 옷을 해 입히시기 위해서는 동물을 죽이셔야만 했던 것이다. 그래서 성소의 의식 속에는 반드시 소나 양이나 염소 등 제사에 바치는 동물의 희생이 수반되어야만 하는데, 그 동물의 죽음은 바로 장래에 십자가에서 돌아 가실 속죄제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성소 제도야 말로 하나님께서 인류를 어떻게 구원하실 가에 대하여 자세하게 설명하여 주신 하나님의 구속에 대한 유일한 계시였다. 그러므로 죽음의 선고를 들은 아담이 이러한 하나님의 구속에 대한 설명을 듣고 성소 제도의 제사 제도에 대하여 알고 난 후에 감격하여 자기 아내의 이름을 “하와” 라고 지었는데, 그 뜻은 “산자의 어미”라는 의미였다. 지금 방금 사망의 선고를 받은 아담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청사진인 성소 제도에 대한 계시는 그에게 커다란 소망을 안겨다 준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기 아내를 산자의 어미라고 불렀다. 시편 77:13은 다음과 같이 선포하고 있다. “오 하나님이여, 주의 길이(道-필자 주) 성소에 있으니 누가 우리 하나님처럼 그렇게 위대한 하나님이리이까?” (킹 제임스 성경 번역).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직후의 에덴 동산으로 돌아가 보자. 그리고 인류의 시조와 하나님 사이에 있었을 법한 다음과 같은 대화를 상상하여 보도록 하자. 이 이야기는 필자가 만든 것이지마는 분명히 그러한 내용의 말들이 오갔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범죄한 후 떨고 서 있는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아담아! 네 뒤에 있는 동물들을 보느냐?” “예! 하나님! 두 마리의 어린 양들이 뛰 놀고 있군요! 우리가 가장 사랑했던 동물들 중 하나입니다.” “그 양들을 불러보렴!” 아담과 하와가 휘파람을 불자 그 두 마리의 어린 양들은 껑충 껑충 뛰어와 한 마리는 아담의 품으로 또 다른 한 마리는 하와의 품속으로 안긴다. 그 때 하나님의 아들께서 다시 명령 하신다.

“아담아! 저기에 있는 돌 두개를 집어 오너라!” 영문도 모르고 돌들을 집어오는 아담에게 다시 말씀하신다. “아담아! 그 돌들을 서로 부딪쳐서 깨뜨려라!” 아담이 돌들을 깨뜨리자 하나는 칼처럼 날카롭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다시 명령하신다. “아담아! 이제 그 돌로 그 어린 양의 머리를 힘있게 내리 치거라!” “하나님! 저보고 이 양을 죽이라는 겁니까?” 놀라서 쳐다보는 아담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더 엄숙하게 말씀하신다. “그렇다!” 어떻게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 할 수 있는가! 아담은 명령에 따라 돌을 들어 양의 머리를 내리 쳤다. “더 세게!” 더 세게 내려친 돌을 맞은 죄없는 양이 바르르 떨면서 눈을 크게 뜨며 피를 흘리며 죽어 간다. 죽음의 장면을 처음으로 목격한 아담은 두려움에 질려서 양의 시체를 땅 바닥에 떨어 뜨리며 이렇게 묻는다. “하나님! 우리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이렇게 비참하게 죽어야 하는 겁니까?” 그 때 하나님께서 아담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담아! 아니다. 너희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앞으로 너희를 위하여 내가 저렇게 비참하게 죽게 될 것이야!” 구속의 계획을 한 눈으로 알아차린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이렇게 외친다. “하나님! 오, 하나님! 그렇게 하시지 마십시오! 우리는 그러한 사랑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오, 주님! 우리 죄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무참한 죽음을 당하셔야 속죄가 가능하게 되는 것이라면, 우리는 이제부터 죄를 정말로 미워합니다. 어떻게 주님의 마음에 고통을 다시 가져다 드릴 수가 있겠습니까! 오, 하나님! 우리는 우리가 지은 죄를 정말로 미워합니다! 다시는 그러한 일을 반복 할 마음이 없습니다!”

성소의 의식 속에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간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는 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들어있다. 성소 제도는 인간들이 직접 그 의식에 참가하여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속하시는 방법에 대하여 생생하게 보고 느끼도록 계획하셨다. 그러므로 성소에 대한 연구의 중요성은 우리들의 구원의 문제 만큼이나 중요한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3. 모세가 지은 지상 성소는 하늘 성소의 모형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성소를 지으라고 명령 하실 때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을 시켜 나를 위하여 짓되 무릇 내가 네게 보이는 식양대로 장막의 식양과 그 기구의 양식을 따라 지을지니라.” 출애굽기 25:8,9. 이 성소는 하나님께서 인류와 다시 같이 사실 수 있는 계획을 보여 주시기 위하여 고안 되었다. 이 성소 제도 전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지상 생애와 그 분의 사역 그리고 하늘로 승천하여 올라 가셔서 하실 봉사 사업까지를 상징하는 기구들과 예식으로 가득 차 있다. 그 속의 기구들 하나 하나, 의식 하나 하나, 그리고 색깔 하나 하나 마다에 인간을 구속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가르침과, 또한 예수를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이 경험해야 할 구원의 단계들을 상징하는 표상들이 알알이 맺혀져 있다. 이 성소의 모형은 하나님의 지혜에서 나온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하늘에 있는 성소의 모양을 계시 가운데 보여 주시고 그 모형대로 짓도록 모세에게 지시 하셨다고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가라사대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좇아 지으라 하셨느니라.” 히브리서 8:5. 그러므로 우리는 하늘에도 모세가 지었던 성소 모양 비슷한 참 성소가 있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이 성소 제도야 말로 하늘이 내어 주신 우리 인류들을 위한 하나님의 구원의 청사진이 아닐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성소를 통하여 당신의 구원을 인간들이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도록 계획 하심으로써, 인류가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방법을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이제, 몇 기사에 걸쳐서 이 중요한 문제에 대하여 함께 연구해 보도록 하자!

4. 성소의 세부분과 구속 사업의 세 국면

성소는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구원을 세 단계의 사역을 통하여서 이루신다는 뜻이다. 바울은 예수께서 우리의 대 제사장이시라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우리가 이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 가나니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가셨느니라 ...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라 ... 이제 하는 말의 중요한 것은 이러한 대 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라. 그가 하늘에서 위엄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니 성소와 참 장막에 부리는 자라. 이 장막은 주께서 베푸신 것이요 사람이 한 것이 아니니라.” 히브리서 6:19,20; 7:24,25; 8:1,2.
예수께서는 우리의 대제사장으로서 성소 뜰에서, 첫째 칸인 성소에서 그리고 둘째 칸인 지성소에서 죄인들을 위하여 속죄 사업을 이루시는 것으로 표상 되어 있다.

성소 뜰
성소 뜰에서 죄인이 끌고 온 희생 제물을 죽이고 번제단 위에 태우는 것은, 예수께서 이 땅에 내려 오셔서 인류를 위하여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 되시어 십자가에 대속제물로 돌아 가실 것을 상징한 것이요,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고전 5:7,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히 10:12

성소 첫째칸 (성소)49
첫째 칸 성소는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늘 성소로 가시어 당신께서 흘리신 피를 힘입어 회개하며 나아오는 자들을 위하여 중보 기도하시며, 죄를 사하시고, 나아가서는 성령의 은혜와 능력을 나누어 주시는 일을 행하신 사실을 나타내 주는 것인데, 그 일은 예수께서 하늘로 승천하신 해인 A.D. 31년 부터 진행해 오셨다고 보아야 한다. 사도 바울은 그 사건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 히브리서 9:11-12.

성소 둘째칸 (지성소)
둘째 칸 지성소는 예수께서 결국 하나님 아버지의 보좌 앞에서 인간을 심판하시는 마지막 구속의 국면을 상징해 준 것이다. 그러므로 성소의 세 부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우리들을 위한 구속 사업의 세가지 국면들을 상징하고 있다.

 

10분 안에 찾는 성서적 구원론

나는 왜 사람들이 자신이 나가는 교회에 계속해서 다니게 되는지에 대한 이유를 분석해본 적이 있다. 사람들과 이야기 해보면 그들이 어떤 특정한 교회에 나가게 된 이유들을 알게 된다. 모태로부터 교인이 된 사람들의 경우, 그들은 대개 이렇게 말한다.

    “내가 이 교회의 교인이 된 것은 나의 부모님이 이 교회에 다니셨기 때문이지요. 나뿐만 아니라 우리 가족 모두가 이 교회의 교인입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 등에 업혀서 이 교회에 다녔고 단 한번도 이 교회가 성서적으로 올바른 토대 위에 서있는 참 교회인가 라는 의문을 가져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만일 여러분이 스스로의 연구와 선택에 의해서 교회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단지 모태로부터 교인이 되었기 때문에, 또는 부모님께서 그 교회의 장로내지 권사이기 때문에 그 교회의 교인이 된다는 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올바른 선택 방법이겠는가? 여러분 자신을 불교 신자라고 가정해 보자. 내가 불교 신자인 여러분 앞에 성경을 펼쳐 놓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거룩한 아들이라는 분명한 증거들을 소개했을 때, 여러분이 “나는 절에 다니는 불교 신자이고 나의 부모님도 불교 신자이기 때문에 비록 내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증거를 분명하게 깨달았을지라도 나의 종교와 신조는 바꿀 수가 없습니다”라고 말하겠는가? 어떤 사람이 특정 종교를 모태로부터 받았다는 사실이 그 종교가 참된 종교라는 것을 보증하지 못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다.

    밀림 속에 사는 식인종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만일 우리가 그들에게 가서 영광스러운 예수님의 은혜에 대하여 설명해 주었을 때, 그 식인종이 이렇게 말했다고 가정해 보자. “우리는 조상 대대로 식인종이었습니다. 나의 할아버지도 식인종이셨고 또 그 위의 할아버지도 식인종이셨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당신의 종교가 유일한 참 종교라고 할지라도 나는 나의 종교와 내 부족들의 전통을 버릴 수 없습니다.” 이런 경우, 우리는 그에게 “당신의 모든 조상들이 식인종이었으므로, 당신 역시 식인종의 전통을 떠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라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결코 그럴 수 없다. 내가 어떤 교회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또는 나의 부모님이 그 교회의 교인이기 때문이라는 단순한 이유가 아닌 더욱 분명한 성서적인 이유를 가지고 있는 교인이 되어야 한다. “당신은 어떤 이유 때문에 그 교회에 다니고 있습니까?” 라는 질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대답을 하는 사람들도 꽤 많이 있다. “내가 이 교회의 교인이 된 것은 이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좋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대답 역시 결코 그리스도인다운 대답이라고 말할 수 없다. 여러분은 직장 동료를 좋아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여러분의 믿음을 그 사람의 믿음과 일치시켜야만 하는가? 여러분은 어떤 상점의 점원이 좋기 때문에 그 상점의 단골 손님이 되어줄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점원이 행하고 믿는 바를 여러분이 모두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어떤 교회의 교인들이 좋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의 영혼과 구원에 깊은 영향을 미치는 교회를 부주의하게 선택한다는 것은 너무나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참 교회와 진리의 관계

    어떤 이들은 단순히 자기 집 가까이에 있는 교회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어제까지만 해도 장로 교회에 다니던 사람이 이사를 간 다음에는 가까운 곳에 있는 침례 교회에 다니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요즘처럼 교통이 복잡한 때에 멀리 운전하지 않아도 되고, 또한 비싼 휘발유도 절약할 수 있으므로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다시 한번 여러분에게 묻는다. “집과 교회 사이의 거리가 자신이 어떤 교회를 다니기로 결정할 수 있는 확실한 이유가 될 수 있는가?” 성경은 그리스도인이 자신과 가족이 다녀야 할 교회를 선택하는 일에 있어서 매우 분명한 지침을 제시해 주고 있다.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 딤전 3:15

    교회는 진리의 터가 되어야만 한다. 우리가 어떤 특정 교회에 참석하는 유일의 이유는 부모님이 그 교회의 교인이시기 때문도 아니요, 우리 가족들이 다니기 때문도 아니요, 집 근처에 교회가 있기 때문도 아니요. 우리가 평생동안 다녔기 때문도 아니요, 그 곳에 다니는 사람들이 좋기 때문도 아니요, 그 교회 목사님의 인격이 좋기 때문도 아니다. 그보다는 내가 다니고 있는 교회가 성경의 교훈과 진리에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기 때문이어야 한다. 만약 자신이 다니고 있는 교회가 성경이 가리치는 바와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다면, 우리는 어떤 대가를 치루고서라고 참된 진리를 가지고 있는 교회를 찾아야만 한다.

    이떤 분들은 종종 이런 질문을 던진다. “오늘날, 기독교계에 300여개 이상의 많은 교파와 교단이 존재하는데, 그토록 많은 교회들 중에서 어떤 교회가 하나님께서 이 마지막 시대에 세워 놓으신 유일한 참 교회인가를 아는 일이 가능합니까?” 우리는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을 성경 속에서 찾을 수 있다. 예수님은 당대의 서기관과 바라새인들로 더불어 말씀하시면서 다음과 같은 원칙을 주셨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doctrine, 교리)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요 7:l7). 이것이 참 교회를 찾는 방법이다. 어떤 사람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행하기 원한다면, 그는 “교훈”, 즉 성경의 교리(doctrine)를 먼저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여러분은 진실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는가? 그렇다면, 여러분은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만 한다. “주님, 나는 지금 주님께 내 마음을 완전히 열고자 합니다. 주님께서 내게 원하시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따르겠습니다. 혹시 내 생애에 변화를 원하신다면 나는 즐겨 그 변화를 받아들이겠습니다.”

    어떤 분들은 또한 이런 질문을 한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가르침과 교리가 각 교단이나 교파에 산재해 있는데, 어떻게 어떤 가르침과 교리가 성서적인지 분명하게 구별할 수 있습니까? 정말로 하나님께 마음을 열어 놓기만 한다면, 진리를 알 수 있나요?” 선지자 예레미야는 다음과 같은 약속과 보장의 말씀을 기록해 놓았다.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렘 29:13) 여러분이 진리를 알기 원하고, 진심으로 진리를 추구하며, 하나님께서 진리를 보여주실 때에 기꺼이 여러분의 생각과 사상과 생애를 고치기 원한다면, 여러분은 진리를 알게 될 것이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덧붙이고 싶은 것은, 하나님께서는 진리로 드리는 예배를 가납하신다는 사실이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spirit, 성령)과 진정(truth, 진리)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 4:23)

참 교회를 구성하는 그리스도인들의 특성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각 시대를 통해서 하나님의 유일한 참 교회를 통해서 진리가 전수되어 내려왔다는 사실이다. 이 세상에 하나님의 참된 증인이 없었던 시대는 결코 없었다. 그러므로 참 교회는 눈에 보이는 건물이나 조직으로 구성된 교회가 아니다. 참 교회란 비록 각각 다른 신조와 교파 속에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진리에 마음과 생애를 바친 그리스도인들로 구성된 교회를 뜻한다. 모든 교회마다 그 속에 하나님의 충성된 남녀들을 갖고 있다. 나는 이것을 보이지 않는 교회라고 부른다. 하나님께서는 보이지 않는 교회의 정직하고 충성된 남녀들을 하나님의 진리 속으로 인도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참 교회를 찾기 위하여 자동차를 몰고 시내를 돌아다니면서 “어느 교회가 가장 클까?”를 살펴 보아서는 안된다. 성경 역사를 통해 참 교회는 종종 매우 작았다. 참 교회의 특성은 그 규모의 크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분의 진리에 대한 충성됨에 있다.

    요한계시록은 마지막 때에 하나님을 진실된 마음으로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을 두 종류로 압축하여 묘사하고 있다.

1) 여자의 남은 무리 : 각종 상징을 사용해서 기록된 요한계시록에서 용은 마귀 곧 사단을 의미하는데(계 12:9), 마지막 시대에 사단은 여자의 남은 무리 즉, 하나님이 참 백성(참 교회)와 싸우는 장면이 요한계시록 12:17에 묘사되어 있다.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위에 섰더라” 이 말씀에서 보는 바와 같이 마지막 시대에 마귀가 상대하여 싸우는 하나님의 참 교회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의 특징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 증거를 가진”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러한 특징은 마지막 시대에 전 세계적으로 강요될 짐승의 표를 거절하고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않는 무리들에게도 그대로 반복되어 나타난다.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계14:11,12

2) 바벨론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백성 : 비록 잘못된 교리와 비성서적인 가르침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바벨론이 되어 버린 교회 속에도 나름대로 진리를 굳게 붙잡고 양심에서 들려오는 성령의 음성을 들으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참 백성들이 존재한다.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시대에 그들을 바벨론 교회들로부터 불러 내어 하나님의 참 교회와 연합하기를 촉구하시는 모습이 요한계시록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힘센 음성으로 외쳐 가로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하늘로서 다른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예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을 받지 말라” 계 18:2,4.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예수 증거를 가진” 여자의 남은 무리들이 진리를 전파하고 참된 복음을 전하면서 바벨론의 교회들이 무너졌음을 경고할 때, 바벨론에 속해 있던 하나님의 참된 백성들은 여자의 남은 무리들이 전하는 진리의 기별을 듣고 자신들이 속해 있던 바벨론 교회로부터 나와 하나님의 참 교회와 연합하게 된다는 것이 요한계시록이 말하는 바이다.

    지금까지 살펴 보았던 바와 같이, 마지막 시대에 나타나는 참 교회의 특성은 눈에 보이는 화려한 건물이나 조직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그리스도인들을 뜻한다. 오늘날 많은 교파와 교단에서 제각기 다른 모습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그 수많은 구원론들 중에서 어떤 것이 이 마지막 시대에 여자의 남은 무리들이 전하는 구원론인가? 어떤 구원론이 요한계시록이 분명히 지적하고 있는 여자의 남은 무리의 특징과 조화를 이루는 가르침인가? 이 중요한 질문에 대한 답을 하기 앞서, 나는 이런 제안을 하고 싶다. “어떤 가르침이 하나님의 계명을 올바르게 다루고 있으며, 어떤 구원론이 요한계시록에 나타나 있는 여자의 남은 무리의 특성과 올바른 조화를 이루고 있는가를 주의깊게 살펴 봅시다!”라고...

    성경이 말하는 참된 구원론, 우리는 신학적으로 그것을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라고 부른다. 다시 말하자면, 믿음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의를 얻어 구원 받는 길을 제시하는 가르침인 것이다. 이번 호에서는 여자의 남은 무리가 믿고 가르치는 구원론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겠다. 특별히, 오늘날 기독교계에 난무하고 있는 잘못된 구원론이 생겨난 역사적인 배경과, 그 비성서적인 가르침들의 문제점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참된 성서적인 구원론과 비교하여 살펴보기로 하겠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글들이 독자 여러분들의 구원과 영생에 놀라운 이정표가 되기를 바란다.

 

그리스도인이 진리와 원칙에 불평하는 이유

사람들이 종교에 관하여 가장 자주 하는 불평 가운데 하나는 종교가 너무 제한하는 것이 많고 까다롭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한이 없고 엄격한 원칙이 없는 교회일수록 많은 사람이 몰리게 된다.

술을 먹어도, 담배를 피워도 아무런 제재가 없는 종교일수록 인기가 많다. 구원은 받되, 신앙은 내가 원하는 대로 하고 싶다는 태도가 교회 안으로 들어왔다. 이제는 그리스도인들 마저도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방해 받기 싫다는 말을 공공연하게 한다. 그래서 어떤 것을 포기하라 는 성경의 요구를 강조하는 목회자나 교회는 사람들에게 인기가 없다.

현대 그리스도인은 너무 "유별난 사람이라는 사회적 낙인이 찍히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성경이 말하는 어떤 원칙과 진리들에 대해서는 매우 비판적이 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교회가 너무 율법주의적이고 옹졸하게 되면, 많은 훌륭한 사람이 실망하여 교회에 들어오지 못하게 된다는 이론을 종종 전개한다.

어떤 원칙과 표준의 옳고 그름을 논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원칙과 표준을 사람이 만들었는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만드셨는가를 살펴보는 것이다. 인간에 의해서 독단적으로 만들어진 금기 사항인지 아니면 하나님께서 인간의 행복을 위해 세우신 사랑의 규제인지를 분별해야 한다. 영생으로 인도하는 길은 부드럽고 안이한 장미꽃 길이 아니다. 너무나 많은 성경 말씀이 좁은 길을 강조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고 말씀하셨다. (마 7:14)

그리스도인이 되는 첫 번째 원칙 중 하나는 자아부정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 (눅 9:23)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완전한 굴복을 의미한다.

마태복음에 나오는 값진 진주의 비유는 영생이라고 불리는 어마어마한 상급을 얻기 위해서는 하나라도 남김없이 모두 투자할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 (마 13:45~46)

많은 사람의 입에서 하나님께서 정하신 길이 너무나 좁고 협착 하다는 불평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다. (눅 14:33)

또한 예수께서 부자 청년 법관에게 하늘나라를 얻기에는 한 가지가 부족하다는 말씀을 하셨지만, 부자 청년 법관은 그 한 가지 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는 주님보다 다른 어떤 것을 더욱 사랑했고 순종하기를 거절함으로써 구원을 잃어 버리게 되었다. 이러한 면에 있어서 예수님의 입장은 언제나 분명했다. 심지어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은 말씀까지 하셨다.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마 10:37) 어떤 물건이나 사람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결국에는 사단의 미혹을 받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등지고 떠남으로써 구원을 잃어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거듭나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기 위해서 언제나 변명하고 핑계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으므로 하늘의 진리와 원칙을 제시할 때에는 사랑스럽고 지혜롭게 해야 한다. 그러나 아무리 사랑스럽고 지혜롭게 말씀을 전할지라도 듣는 사람의 마음 속에 진리에 대한 사랑이 없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진리는 자아부정을 요구하기 때문에 진리에 대한 반역적인 생각과 무관심한 마음을 갖고 있는 사람의 입에서는 불평하는 말과 태도가 나오게 된다.

사랑하면 불평이 없어진다

결혼은 엄격한 원칙이 가장 많이 포함된 관계이다. 결혼하는 사람은 자신이 전에 좋아하던 많은 것을 포기하기로 약속해야 한다. 남편이 될 사람은 이제는 더 이상 다른 여자들과 데이트할 자유를 포기해야 하며, 자신의 남은 생애를 오직 한 여성을 위해 묶어 놓는 결정을 하게 된다.

신부도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을 남편에게 바치고 이전에 사귀어 온 다른 남성들은 버리기로 동의하는 서약을 해야 한다. 결혼 서약이야말로 사람이 자신의 인생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좁고도 협착한 길을 걷기로 맹세하는 서약이다. 제한이나 규칙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삶이 불행해지는 것이 사실이라면, 결혼이야말로 가장 비참하고 불행한 것이어야 한다. 그렇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결혼은 가장 행복한 사건이다. 왜 그럴까? 왜 결혼식장에서 신부가 자신의 생애를 신랑에게 바치기로 서약할 때 그토록 빛나고 행복해 보일까? 왜 신랑은 자신의 남은 생애 동안에 자신의 행위가 매우 까다롭게 제약 받을 것이라는 서약을 하면서 그렇게 행복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간단하다. 그들은 서로 사랑하기 때문이다. 결혼에 따르는 제약들이 그들에게 기쁨이 되는 이유는 배우자를 향한 마음과 감정 때문이다.

결혼식이 끝난 후에 불평하는 신부의 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아아, 이젠 내가 더 이상 다른 남자와 데이트를 못하게 됐어. 이건 너무 불공평해. 결혼에 관한 법과 원칙은 나에게 남편에게만 충실 하라고 강요하고 있어. 결혼하는 것은 너무 제약이 많아라고 불평하는 신부를 본 적이 있는가? 또한 새 신랑이 이제부터는 봉급을 아내와 나눠 써야 한다고 불평하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는가? 결혼에 관한 법칙과 규칙이 너무나 까다롭고 엄격해서 그것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으면 감옥을 갈 수도 있지만, 신랑 신부는 그런 것에 대해서 전혀 불평하지 않는다.

신부가 간음을 하면 법에 의해서 신부는 체포되어 감옥에 가지만, 신부는 그러한 법에 대해서 전혀 걱정하지 않는다.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하고 있다. 사랑은 두 사람을 붙잡아 매고 있는 모든 원칙과 규칙들에 대해서 불평하지 않게 하며, 오히려 그러한 것들이 자신들의 결혼 생활을 보호해 주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자신이 잘못하면 처벌 당할까 봐 두렵기 때문에 서로에게 충실한 것이 아니다. 깊이 사랑하는 상대방을 기쁘게 하기 원하기 때문에 서로에게 충실한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남녀는 결혼은 하였지만 더 이상 서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것이야말로 문자 그대로 이 땅의 지옥이다. 그들은 자신에게 가해진 제약과 부담들에 대해서 신경질을 내며 불평을 한다.

진리에 대해서 불평하는 진짜 이유

이와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교인은 침례를 통해 그리스도와 결혼하였지만 그분을 사랑하지 않는 교인이다. 그는 종종 자신에게 좁고 제약이 많은 종교의 짐을 얹혀 주려고 하는 교회와 설교자를 심하게 비난한다. 그러나 문제가 교회나 설교자에게 있는 것일까?

문제의 진짜 원인은 불평을 하는 그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와 개인적인 사랑의 관계를 가져보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예언을 잘 알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와 개인적으로 만나는 경험을 하고 있지 못하면 진리와 성경이 말하는 원칙에 대해서 불평하게 된다.

거듭나지 않은 교인의 마음 속에는 받아들이지 않기로 결정한 교리들이 이곳 저곳에 쌓여 있다. 받아들이지 않아서 먼지가 쌓인 교리 뭉치나 규칙과 신조의 목록이 마음 속에 쌓이게 될 때, 영혼은 힘을 잃고 죽어가게 된다.

참된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와 개인적으로 사랑의 관계에 들어가되 성경이 말하는 진리와 원칙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지점까지 깊은 관계에 들어가는 것이다.

대부분의 교인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은 신앙 생활을 하는 그들의 동기가 단순히 교회의 교인이 되는 것에 있다. 그들은 천둥과 벼락을 피하기 위해서 종교를 가진다. 지옥 불을 피하기 위해서 주님을 섬긴다. 그래서 그들이 늘 못마땅한 듯한 찌푸린 표정을 짓고 다니게 되는 것이다.

아! 그리스도 교회의 신앙이 얼마나 왜곡되었는가!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주님을 믿기로 결정한 사람은 결혼식을 방금 끝내고 나오는 새 신랑과 신부보다도 훨씬 더 행복한 사람이어야 한다.

어떤 부인이 남편이 좋아하는 음식을 하지 않으면 이혼당할까 봐 매일 남편이 좋아하는 음식을 준비해야 한다면 그 가정이 행복한 가정이 될 수 있을까? 그와 같은 긴장 상태에서 결혼 관계는 순식간에 붕괴되고 말 것이다.

아내는 남편을 사랑하고 그를 진심으로 기쁘게 하기 원하기 때문에 남편이 좋아하는 음식을 만든다. 또한 남편은 아내의 생일이 가까워 오면 아내가 무엇을 갖기 원하는지 주의 깊이 살펴보고 귀를 기울인다. 아내는 남편에게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게 하기 위해서 아침마다 출근하는 남편을 붙잡아 놓고 반복해서 알려줄 필요가 없는 것이다. 남편은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서 정확한 날짜를 기억했다가 기쁜 마음으로 선물을 산다.

이와 마찬가지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방법을 찾기 위해서 날마다 성경을 탐구하게 된다. 그는 자신이 최고로 사랑하는 분을 어떻게 하면 기쁘게 해드릴 수 있는지를 알기 위해서 끊임없이 예언과 교훈들을 탐구할 것이다.

20세기역 성경에는 이와 같은 표현이 있다. 무엇이 주님을 가장 기쁘시게 해드릴 수 있는 것인지를 발견하기 위해 언제든지 애를 쓰십시오.(엡 5:10) 그리스도인을 위한 얼마나 멋진 표어인가! 이 표어야말로 주님을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들의 최상의 소원이 아니겠는가! 그리스도께서 십계명 중에서 처음 네 계명을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요약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 째 되는 계명이요. (마 22:37~38)

성경이 말하는 규칙과 엄격함에 대해서 불평하는 진짜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을 사랑하지는 않고, 자신의 구원만을 위해서 신앙 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종류의 신앙으로는 구원도 받을 수 없고 행복한 삶을 살 수도 없다. 그러한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지킬 수 있다고 생각되는 몇 가지 규칙들을 지키려고 애쓰는 노력 자체가 그리스도 교회의 신앙이라고 착각한다. 그러나 사랑이 빠진 노력과 투쟁을 신앙으로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은 무언가 심각한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의 모든 원동력은 사랑으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사도 요한은 다음과 같은 말씀을 남겼던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요일 5:3)

하라와 하지 말라의 신앙

사내 아이를 키우는 어머니는 강해진다. 세 명의 아들을 키우는 한 어머니가 있었는데, 그 어머니는 아들들이 항상 말끔하고 청결한 용모를 갖추어야 한다는 원칙을 매우 엄격하게 요구하였다. 대부분의 다른 소년들처럼 그 세 아들도 세수하고 머리를 빗고 구두를 깨끗이 손질하는 따위의 규칙들을 매우 귀찮아 했다. 학교에 가는 아침마다 어머니는 자신이 세운 법을 따르도록 하기 위해서 아들들에게 어머니의 권위로 법을 강요하였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사춘기에 들어선 맏아들이 흠잡을 데 없는 깔끔한 모습으로 등교 길에 나서는 것이었다. 머리카락은 잘 빗질되어 있었으며 구두는 반짝반짝 빛이 났다. 어머니는 너무나 놀랐다. 놀라움과 기쁨을 억누르며 그녀는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 났는지를 알기 위해서 관찰해보기로 했다. 수수께끼는 금새 풀렸다. 학교에 새로 전학 온 여학생이 있었는데 그 여학생으로 인하여 맏아들의 태도가 완전하게 변화되었던 것이다.

그리스도인 생애가 단지 "하라"와 "하지 말라" 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물론 그리스도와의 영적인 결혼에 있어서도 실제적인 육신적 결혼에서와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 규칙과 제약들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은 상대방을 진심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하게 되는 것들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일하고 봉사하고 희생하는 것은 자신에게도 깊은 행복을 가져다 준다.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행복해야 할 그리스도인 생애가 고역스러운 것을 억지로 하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하고, 보고 싶은 것을 보지 못하며, 먹고 싶은 것을 먹지 못한다고 울상을 지으며 불평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들은 자신들이 너무나 많은 것들을 "포기"하도록 강요 당한다고 불평한다. 진리에 대한 감사와 기쁨이 없는 그들의 삶 때문에 기독교 신앙은 온갖 금지 조항들을 모아서 강요하는 종교로 보이게 된다.

서로 사랑하면 그들은 상대방을 위협하거나 최후 통첩을 보낼 필요가 없다. 그들은 끊임없이 자신의 사랑을 보여주고 서로를 기쁘게 해 줄 방법들을 찾는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순종을 짐으로 느끼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에 기록된 진리를 끝까지 따를 사람들을 찾고 계신다. 하나님께서는 무지한 말이나 노새 같은 그리스도인을 원하지 않으신다. 내가 너의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 너희는 무지한 말이나 노새같이 되지 말지어다. 그것들은 자갈과 굴레로 단속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가까이 오지 아니하리로다. (시편 32:8~9)

그리스도 교회의 신앙은 "자갈과 굴레"로 단속 받는 신앙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이 너무나 감사하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내가 그분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 있을까?라는 한 가지 목표를 가지고 성경을 탐구하는 자들은 빛이 밝아질 때마다 더 밝은 곳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과 감사의 정신이 온 영혼을 뒤덮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드러내 주신 진리와 원칙들이 굴레가 될 수 없다. 이것이 좁은 길을 걷는 성도들의 참된 경험이다.

어떻게 믿는 것이 진실로 믿는 것인가?

길거리나 지하철 역에서, 그리고 상점들 앞에서 열심히 전도하는 분들이 쉽게 눈에 뜨인다. “예수 믿으세요?” “하나님 믿으십니까?” “믿고 천당 가세요!”

미국에서는 큰 길이나 하이웨이를 달려가다 보면 다음과 같은 간판의 글씨들을 종종 보게 된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그저 믿기만 하시오! 오늘 예수를 개인의 구세주로 받아 드리시오! 그리하면 구원을 얻습니다!”

그렇다. 예수를 믿으면 구원이 있다.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구원을 얻으리라고 성경에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 것이다. 그러나 한가지 우리가 심각하게 생각하고 지나가야 할 문제가 있다. 그것은, 어떻게 하는 것이 진정으로 성경이 말하는 대로 믿는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믿으라는 성경의 말씀을 받아 드렸으면, 같은 성경이 어떻게 믿으라는 말씀까지도 받아 드려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 자신에게 솔직해 보기로 하자. 오늘날 얼마나 많은 교회들이, 얼마나 많은 목회자들이, 또 그 교인들이, 하나님을 믿고 있다고 말하면서 주위의 이웃들과 친구들에게 여전히 좋지못한 감화를 변함없이 끼치며 살고 있는가? 우리 주위에서 교회들의 숫자는 점점 늘어가 수많은 십자가의 야광들이 밤거리들을 밝혀 주고 있지만, 정말 우리 주위의 삶이 더 깨끗하게 달라져 있는가? 더 정직하며 진실한 모습으로 변화되고 있는지 그리스도인들은 스스로 질문해 보아야 할 문제이다. 교인이라고 믿었다가 사기를 당했다는 말을 간혹 접하게 된다. “저런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라면 나는 하나님을 믿지 않겠습니다!”라고 내뱉는 말들을 가끔 듣게 된다. 그것은 많은 경우에 정말로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신자들에게서 비롯되는 일들이다. 믿을 때는 우리 마음에 어떠한 일이 일어 나게 되는 것이며, 어떠한 변화가 수반되게 되는 것인지를 제대로 가르침 받지 못한 신자들의 경우에, 자신의 생활에 진정한 변화없이 구원 받았다고 주장하는 모순에서 발생되는 일들이다.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지마는 행함의 열매가 따르지 않으면 우리는 그 믿음을 참된 믿음이라고 말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이 문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분명한 말씀을 제시하고 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 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태복음 7:21-23

한번은 가장 순수했던 초대 교회에 신학적인 위기가 발생한 적이 있었다. 사도 바울의 말씀을 듣고 일부 교인들 가운데 오해가 발생하여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개념에 차질이 생기게 된 것이다. 사도 베드로께서 베드로 후서 3장 14절에 점도 흠도 없이 깨끗하게 되기를 힘쓰라고 강조한 다음에 그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법을 순종하지 않아도 된다는 가르침-필자 주)너희 굳센데서 떨어질까 삼가라.” 베드로후서 3:15,16,17 

오해된 사도 바울의 말씀들을 예로 들어 보자면 다음과 같은 말씀들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로마서 3:20.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하시는 이를 믿는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로마서 4:5.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갈라디아서 5:4. 위의 말씀들은 사도 바울이 특히 하나님의 백성이 되려거든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다니는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의 잘못된 가르침을 책망하는 의미에서 기록한 말씀들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자기의 말씀 때문에 잘못된 오해가 빚어질까봐 다음과 같은 말씀들을 섞어가면서 기록하신 것을 볼 수가 있다.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굳게 세우느니라.” 로마서 3:31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로마서 6:15, 16.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뿐이니라...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갈라디아 5:5,6,13. 초대 사도 교회 당시에 위와 같은 가르침의 위기가 왔을 때에 예루살렘 총회의 지도자로서 위치하고 있던 예수님의 형제였던 야고보는 각 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써야 할 필요가 있음을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성령의 감동하심을 통하여 야고보서를 기록하게 되었고, 그는 자기의 편지 가운데서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교회 안에 존재하게 된 오해에 대하여 그리스도인들을 책망하고 격려 하기에 이른 것이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보이리라.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 것인줄 알고자 하느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이에 경에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야고보서 2:14, 17-24

야고보의 말씀은 그 당시 교회 안에 오해된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는 가르침에 대하여 균형지게 설명을 해 주고 있다. 그는 마귀도 하나님을 믿고 떨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그러므로 믿음이 하나님의 존재와 그분의 진리를 알고 인정하는 것으로 그친다면 그것은 마귀가 하나님을 인정하는 정도의 믿음과 무슨 차이가 있겠느냐는 말씀이다. 참된 믿음이란 우리의 인정과 동의를 지나서 우리의 마음과 사상과 생활을 바꾸어 주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순종 하는데까지 이르러야 하는 것이라고 야고보는 우리에게 설교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믿음과 행함과 구원의 삼각관계를 설명하기 위하여 아브라함의 예를 들어서 말씀하고 있다. 아브라함은 이미 아들 이삭을 낳기 이전에 자신과 자기의 아내 사라가 너무 늙어서 아이를 전혀 가질 수 없는 형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듬해에 다른 여인을 통해서가 아니라 늙은 자기의 본처 사라를 통하여서 아들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다. 하나님께서 그 약속의 아들을 통하여서 택함 받은 한 나라를 이루시고 그를 통하여서 메시야를 이 땅에 탄생하게 하시겠다는 약속, 자기의 자손들이 큰 민족을 이루어 그 수가 하늘의 별 처럼 바다의 모래 처럼 많게 하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언약을 그는 굳게 믿었다. 그것을 믿는 일은 엄청난 믿음이 필요한 일이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의롭게 여기어 주셨다고 성경은 말한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 사실을 그저 머리로만 인정하고 동의한 것이 아니다. 믿음은 머리로 어떠한 사실이나 가르침을 인정하거나 동의하는 수준 이상을 의미한다. 믿음이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을 인정하고 받아 드린 후 온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그 말씀대로 따라 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믿었을 때에 자기의 이름을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바꾸었다. 아브람이란 이름은 “높아진 자”라는 뜻이었고 아브라함은 “열국의 아버지”라는 뜻을 가진 이름이었다. 자식이 하나도 없던 아브라함이 만나는 사람들에게 자기의 이름을 “열국의 아버지”라고 소개하고 다닌 사실은 굉장한 믿음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이삭이 태어나고 그가 20세가 되었을 때에 청천 벽력같은 말씀이 다시 하나님께로 부터 온 것이다. 자기의 독자 이삭을 모리아 산에 가서 죽여 제사로 바치라는 것이었다. 살인하지 말라고 명령하신 사랑의 하나님께서 과연 그러한 명령을 하실 수가 있을까?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그는 몹시 고민하여 떨었다. 그러나 성경은 아브라함이 그 말씀도 믿고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하여 이삭을 아침 일찍 깨워 모리아 산으로 데리고 간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이나 말씀이 아무리 이치에 맞지 않는 것 처럼 들릴 때에라도 믿고 순종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최선을 다 아시고 당신의 사랑과 뜻을 따라 행하신다는 그 분의 권위를 인정한 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드릴 때에는 그 분을 우리는 우리의 왕과 주인으로 받아드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구세주로 믿을 때에는 하나님의 뜻과 그 말씀과 진리와 그 분의 모든 계명을 다 받아 드리는 것을 의미한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고 칼을 들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멈추도록 명하시고 그가 진실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이제 알았다고 말씀하여 주셨다. 그 감동적인 이야기는 창세기 22장에 잘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참된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 없는지를 시험하셨던 것이다. 아울러 후 세대에 사는 우리들에게도 참된 믿음이란 무엇인지를 설명하여 주시기 위하여 그러한 시험을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것이었고, 그렇게 함으로 하나님께서 그를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러 주셨던 것이다.

야고보는 아브라함의 바로 이 경험을 실례로 들어서 믿음이란 무었인가를 설명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는 심지어는 아브라함이 믿음만 가지고 의롭게 된 것이 아니라 행함으로도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고까지 강조해 주고 있다. 그러므로 구원에 있어서 믿음과 행함은 떼어 놓을래야 떼어 놓을 수가 없는 삼각 관계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배를 저을 때에 한 쪽 노만 저으면 배가 제자리를 맴돌게 되는 것 처럼 믿음과 행함이 함께 병행하여야 구원의 배가 하늘 포구까지 무사히 도착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행함으로가 아니지마는 동시에 성경은 다음과 같이 행함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값아 주리라.” 마태복음 16:27.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로마서 2:6.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린도 후서 5:10)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리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요한계시록 2:23 여기에서 한가지 살피고 지나가야 할 문제가 한가지 있다. 우리 인간들은 우리의 힘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그의 계명을 지킬 수가 없다. 우리는 타락한 본성을 가지고 이땅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악하고 불순종하는 마음이 우리의 본 마음이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듭나야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새 마음을 받아야 한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린도 전서 5:17. 우리는 매일 자신이 하나님 안에서 죽고 매일 그리스도의 성령의 지배를 받아서 사는 경험을 통해서 만이 하나님의 뜻과 율법을 지켜 순종하는 생애를 살 수가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선을 행하는 것이 아니다. 성령의 힘으로 가능케 되는 것이다. 이 일은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이루어 지는 것이다. 나를 위해 속죄의 피를 흘리며 돌아가신 주님을 사랑하게 될 때에 우리는 그 사랑이 강권하는 힘이 되어서 주님의 말씀을 다 순종하며 살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요한복음 14:15).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순종이나 행함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공로가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구원 받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피로 우리의 죄의 값을 지불하셨기 때문이지 우리의 행함의 쌓은 공으로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사람이 하나님을 순종하며, 진리를 따라 깨끗하고 진실된 변화받은 생활을 살지 않는 것은 그 사람이 하나님을 참으로 믿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여 주는 것이다. 참 믿음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순종을 낳게 되어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부모를 순종하고 존경한다고 해서 그 부모의 자식이 되는 것은 아니지마는 순종과 존경이 없는 사람은 그 부모의 자식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히브리서 11장은 우리가 흔히 믿음장이라고 부른다. 거기에서 사도 바울은 역대 믿음의 조상들의 이름을 나열하며 그들의 믿음과 함께 그들의 믿음을 증거하는 행함도 동시에 적고 있는데 예를 들어 보자면 다음과 같다. 노아는 믿음으로 방주를 지었다고 하였다. 비를 본적이 없던 시대에,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홍수가 온다는 사실을 믿었을 뿐만 아니라 그 일을 예비하기 위하여 그 분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여 방주를 지었다고 하였다. 그렇게 함으로 노아는 그 당시의 사람들에게 많은 조롱과 손가락질을 당하였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어디로 갈지를 몰랐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여 그 우상의 땅을 떠나 나갔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며, 믿음으로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 보다 더 좋아 했다고 믿음 장은 기록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믿음으로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행했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가르침이 말틴 루터나 요한 웨슬레나 롸저 윌리암스, 리챠드 백스터, 요한 칼빈, 진센돌프 같은 훌륭한 종교 개혁자들이 살고 가르쳐 온 기별이었다. 그런데 요즈음에 와서는 믿기만하면 된다는 이상한 가르침이 기독교 안에 들어 와 꽤 판을 치고 있으니 도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지 이상한 일이 아닐 수가 없다.

그대는 물 위를 걸을 수 없는가?

1). 물 위를 걷는 믿음

그대는 물 위를 걸을 수 없는가? 물론 그대는 걸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대 스스로 걸을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대가 물 위를 걸을 수 없다고 믿는 그 믿음이 그대로 하여금 물 위를 걸을 수 없도록 만들고 있다. 그대는 예수께서 그대에게 물 위를 걸을 수 있는 믿음을 주실 수 없다고 생각한다. 새벽 미명의 갈릴리 바다를 살펴보자. 희뿌연 회색 빛을 뚫고 다가오는 희미한 존재가 있다. 배 위에는 무서워 떨고 있는 열두 명의 남자들이 있다. 그때, 파도를 가르며 상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니 두려워 말라! 갑자기 생기를 얻은 베드로가 말하기를, 주여, 만일 당신이시거든 나로 물 위를 걸어 당신께 가게 하소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오라. 베드로는 차갑고 시퍼런 파도가 치솟아 오르는 것을 보았다. 그는 자신과 예수님과의 거리를 측정해 보았다. 그는 생각하기를, 아니, 내가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거야! 내가 어떻게 물 위를 걸어. 그는 망설였다. 순간적으로 의심이 그를 삼키어 버렸다. 지금까지 어떤 사람도 물 위를 걸었던 적이 없었어.

이 장면은 베드로에게 일어난 사건이었다. 만일 베드로가 파도 위로 그의 발걸음을 내밀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그가 물 위를 걷는 장면을 통해서 믿음에 관한 놀라운 교훈을 배울 수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믿음은 물 위를 걷는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2). 길들여진 가짜 믿음

서커스단에서 길들여진 코끼리는 어릴 때부터 쇠사슬에 묶어 놓는다고 한다. 한쪽 다리를 얇은 쇠사슬에 묶여 자유스럽게 다니지 못하며 자란 코끼리는 커서 거대한 코끼리가 되어도 한쪽 다리에 얇은 쇠사슬만 묶어 놓으면 아무데도 가지 못하고 그 한 곳에만 매여있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 코끼리는 모든 구속력, 즉 울타리와 쇠사슬을 극복하고 도망할 수 있는 충분한 힘을 소유하고 있지만, 자신이 그런 일을 결코 할 수 없다고 생각하도록 어릴 때부터 길들여져 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커서도 쇠사슬과 말뚝을 힘없이 뽑아버리고 달려나갈 수 있지만, 그렇게 하기엔 자신을 구속하고 있는 힘이 너무나 크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러한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고 한다. 실제에 있어서 코끼리는 쇠사슬과 말뚝에 의해서 구속 당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믿음에 의해서 구속 당하고 있는 것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 역시, 작고 연약한 쇠사슬과 말뚝이 코끼리의 자유를 빼앗은 것처럼, 그들의 삶에 있어서 반신반의 하는 믿음으로 인해서 죄에 대한 승리를 빼앗기고 있다. 다음에 서술하는 한 사람의 경험은 자유를 빼앗긴 코끼리의 모습을 우리에게 연상시키기에 충분할 것이다.

나는 20살이 채 되기 전인 소년기에 침례를 받았는데, 그 당시 나는 매우 신실하여서 100% 진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소원했었다. 나는 다니엘서까지 연구를 했으며, 그 공부는 예수님에 관한 믿음과 어떻게 그리스도인의 생애를 살 수 있는가에 대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다. 나의 이름은 교회의 녹명책에 기록되었으며, 자아와 죄에 대한 투쟁이 시작되었다. 사단의 강력한 동맹자인 자아와 죄는 진짜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하는 나의 결심을 쉽게 허물어뜨렸다.

환멸과 실망이 그 뒤를 이어서 찾아왔다. 나의 젊은 시절 동안, 나는 계속 교회 안에 머물러 있었는데, 그 동안 나의 실망과 좌절의 곡선은 위 아래로 오르내렸다. 어떤 때는 심하였고, 어떤 때는 약하게.... 그러나 여전히 나는 신실하였고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하는 나의 소원은 계속되었다. 그러는 동안에 나는 신학교의 학생이 되었고, 후에 목회자가 되었다. 내가 성경을 연구할 때에 때때로 나는 모든 죄를 정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엿보았지만, 유혹에 대한 만성적인 패배감으로 인한 고통과 내 주변에 있던 사람들과의 신앙 상담에서 들은 말 - 죄, 즉 이기심, 질투, 불인내 등등은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실 때까지 우리 생애에서 계속될 것이라는 위로의 말 - 은 죄를 승리하지 못하는 나 자신을 스스로 합리화하도록 확신시켰다.

나는 마음속으로는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가운데 최선을 다하여 투쟁하겠다고 결심했지만, 실제적인 생애에 있어서 죄에 대한 충실한 승리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쇠사슬은 만들어졌으며, 말뚝은 땅에 꽂혀지기 시작하였다. 나는 죄에 대한 승리를 약속하는 성경절들을 읽었지만, 그 약속의 글은 오히려 나를 혼돈케 만들었으며, 결국에는 그 글이 말하고 있는 바는 다른 의미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승리의 가능성을 이해할 수 없었다. 성경의 글들은 자유를 약속하고 있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 안에 있는 믿음일지라도 죄를 승리하게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 나의 신조에 의해서 나는 묶여지고 철저하게 길들여져 있었다.

3). 지식보다 먼저 가는 믿음

다시 처음 장면으로 돌아가 보자. 나는 물 위를 걸을 수 없었는데, 왜냐하면 물 위로는 걸을 수 없다고 단정지었기 때문이다. 성경 말씀을 통하여, 나도 걸을 수 있다는 충분한 증거를 보았을지라도, 나는 그것들을 믿을 수 없었다. 나는 그 약속과 증거들을 받아들일 수 없었는데, 왜냐하면 과거의 나의 육적인 경험을 통하여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았었기 때문에.... 나는 성경의 약속과 증거보다는 내 자신의 경험과 신조를 더욱 신뢰하였다. 오랜 후에 많은 연구와 갈등을 거쳐 진리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힘입을 때,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우리는 믿음이 지식을 앞서간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만일 베드로가 예수께서 명하신 대로 행함으로써 믿음을 활용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물 위를 걸을 수 있다는 지식을 소유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믿음을 실행에 옮김으로써 지식을 얻게 되었다. 인간의 마음은 이와는 다른 길을 요구한다. 인간은 항상 먼저 나에게 증거를 보여 주십시오! 그러면 믿겠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믿어라, 그리하면 내가 네게 증거를 주겠다라고 말씀하신다. 이러한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는 성경을 통해서 되풀이되고 있는 장면이다.

성경을 보면, 두 명의 눈먼 자들이 예수님을 소리질러 부르며 따라왔던 것을 알 수 있다.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마태복음 9:27). 예수께서 당신의 능력으로 그들에게 치유를 베풀기 전에 그분께서는 그들의 믿음에 대한 확신을 이끌어 내셨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능히 이 일을 할 줄을 믿느냐? 대답하되 주여 그러하오이다 하니 이에 저희 눈을 만지시며 가라사대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신대 (상동 28절).

한번은 귀신들린 소년의 아버지가 예수께 나와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마가복음 9:22) 라고 말하는 가운데 자신의 가진 의심을 드러내었다. 예수께서는 그의 믿음이 부족함을 보여주시면서,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한 일이 없느니라 (상동 23절) 라고 말씀하셨다. 그의 의심이 자기 아들을 치유 받지 못하게 하고 있음을 깨달은 소년의 아버지는 열정적인 갈망으로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상동 24절) 라고 예수께 외쳤다. 그 장면에서 믿음이 포기되거나 취소되었다면, 예수께서는 당신의 능력을 행사하실 수 없으셨을 것이다.

오라!

오라! 만일 주님이시거든 내게 물 위를 걸어 오라고 말씀하소서. 베드로의 호소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허락이 아니라, 명령이었다. 오라!

예수께서는 그 이상의 어떤 다른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그분께서는 베드로로 하여금 물 위를 걸을 수 있을 만한 확신을 주시지 않으셨다. 주님의 제자,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명령에 의존하여서 확신을 이끌어내야만 하였다. 거룩한 확신이 가득 찬 주님의 명령은 베드로에게 영감적인 확신을 불러일으켜 주었으며, 그리하여 베드로는 신속하게 순종하게 되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주 사용하시는 방법 중의 하나이다. 그분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에, 그것은 자주 구체적이 아닌 부르심으로 우리에게 들려온다.

1) 명령으로 들리는 하나님의 음성

네 아들, 곧 네가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이제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산중에서 내가 네게 알려 줄 한 산에서 그를 번제로 드려라(창 22:2). 이 성경절에는,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알아차릴 수 있을 만한 내용이 담겨져 있을 뿐이다. 그 이상의 어떤 것도 없다.

예수께서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을 던지는 것을 보시니 저희는 어부라,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마 4:18,19). 이것이 그 사람을 부르신 말씀의 전부이다.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지나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 (마 9:9). 여기서는 오직 두 단어만을 말씀하셨다.

38년 동안, 한 앉은뱅이가 베데스다 연못으로 매일 들려져 왔는데, 그는 연못이 요동칠 때에 치유를 얻고자 하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요 5:6-9). 잠시 후에 그가 자신을 고쳐준 사람을 찾아보니, 예수께서는 이미 자리를 피하신 후였다. 이 모든 경우들을 보면, 예수께서는 그분에 대한 믿음을 활용해서 그분의 명령을 수행하도록 각 사람들을 남겨둔 채 그 자리를 떠나신 것을 알 수 있다.

2) 믿음을 요구하심

우리가 성경에 나타난 이러한 예화를 생각해 볼 때, 예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큰 믿음을 요구하신다는 사실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그 대표적인 예로서, 주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제외하고는 어떤 사람도 경험한 적이 없는 불가능한 행동을 당신의 제자인 베드로에게 요구하셨던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주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의 길을 쉽고 평탄하게 만들기 위해서 어떤 특별한 노력도 기울이지 않으시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가 앞서 보았던 것처럼, 그분께서는 베드로가 물 위를 걸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내포하는 어떠한 확신을 주는 언급도 하지 않으셨다. 그분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이삭의 생명을 취하지 않으시겠다고 미리 보장하지 않으셨다. 그분께서는 베드로와 안드레와 마태에게 먹고살 만한 적당한 수준의 월급을 지급하겠다는 보증을 하지 않으셨다. 그분께서는 의도적으로 거의 불가능한 믿음을 당신을 따르고자 하는 자들에게 요구하셨는데, 예수께서 요구하시는 믿음을 충족하기 위해서 그들은 자신들이 전적인 헌신과 굴복을 해야만 했다.

그분의 명령은 그때와 마찬가지로 오늘날도 길고 구체적인 설명을 포함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음성을 직접 귀로 들을 수 없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다. 그것은 우리의 양심을 통해서 영혼을 울리는데, 그 소리는 흔들리지 않는 권위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매우 조용하고 은은하게 우리의 귀를 울린다. 우리가 이러한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게 될 때, 우리는 아브라함, 베드로, 안드레, 마태, 중풍병자, 그리고 바울처럼 주님의 말씀에 즉시 순종하여, 배에서 내린 다음 물 위를 걸어야 한다.

주님께서 조용히 나를, 또는 그대를 찾아와서 나를 따르라!고 지금 말씀하신다면, 그대와 나는 그분의 말씀을 믿고, 굴복하여, 순종하겠는가? 바로 이러한 것들이 주님께서 그대와 나에게 요구하시는 믿음이다. 믿음과 헌신, 또는 굴복은 결과적으로 동일한 것이다. 믿음은 그대가 그리스도께 모든 것을 의탁할 수 있는 그분께 대한 전적인 신뢰인데, 그것은 굴복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대가 믿음이 있다면, 그대는 굴복하게 될 것이고, 그리고 그대가 굴복한다면, 그대는 더 큰 믿음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 계속적인 굴복없이 계속적인 순종을 주장할 수 없다. 굴복은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

3) 믿음은 순종을 통해 나타남

베드로의 믿음은 그의 순종에 의해서 시험 받았다. 믿음은 언제나 순종을 통해서 시험 받는다. 사실, 참된 순종만이 참된 믿음을 시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야고보는 다음과 같은 올바른 지침을 말할 수 있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런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뇨?(야고보 2:14). 야고보의 질문에 대한 답은 결코 못한다 이다. 야고보는 또 다시 다음과 같은 도전을 던지고 있다.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상동, 8절). 야고보는 구원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행함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믿음과 굴복의 결과로서 나타나게 되는 행함과 순종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의혹이나 타협하는 일 없이 당신께 순종할 수 있는 충분한 확신을 소유하기를 요구하신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에 대한 증거들을 보여주시고, 들려 주신다. 당신을 찾고자 하는 자들이 그분께 대해서 확신을 가질 수 있을 정도로 풍성한 증거들을 주신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에게 물위를 걸으라고 말씀하실 때, 우리는 우리의 눈 앞, 또는 우리의 손 안, 또는 우리의 발 아래와 같이 가까운 곳에서 항상 확실한 증거들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직 우리가 순종할 때만 그러한 증거들을 받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베드로가 실제로 물 위를 걸었을 때까지 그가 물 위를 걸을 수 있다는 보증을 받았었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신뢰할 만한 명령인 오라!라는 말씀의 증거 외에 어떤 다른 증거도 없었다. 가끔 주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에 대한 완전한 신뢰심을 가지고 물 위를 걸을 것을 요구하시는 데에는 오직 한 가지의 이유가 있다. 그것은 우리가 물 위를 걷지 않는다면, 우리의 발 밑에서 느껴지는 물을 결코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순종을 통한 경험에서 우리로 하여금 귀중한 체험을 소유하게 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순종을 통해서 얻게 되는 경험은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신뢰와 믿음을 더욱 더 깊고 높은 수준으로 이끌어 간다.

4) 순종을 통해 시험을 받음

예수께서는 사람들에게 단순한 마음의 동의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는 행동인 순종을 요구하신다. 또한 그러한 행동을 하는 데에는 믿음이 요구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러한 행동을 하는가 또는 하지 않는가에 따라서 그리스도에 대한 한 개인의 믿음의 상태가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가끔 어떤 그리스도인들을 만나게 되는데, 그들은 죄에 대해서 승리하기를 소원하며, 믿음과 평화와 사랑 같은 거룩하고 영적인 요소들을 소유하기를 원하지만, 어쩐 일인지 그러한 것들을 소유하게 되는 기쁨을 맛보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주여, 나로 하여금 물위를 걸어 당신께 가게 하소서 라고 입으로 외치고 있지만, 주님께서 오라!고 명령하시는 호소에는 결코 응답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있지만, 배 위를 서성거리면서 불분명하고, 두려워하면서, 의심을 품고 있다. 그들은 그들 자신 안에서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의 원천을 찾으려고 하지만, 자신 안에 그러한 원천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대한 순종은 우리 자신의 능력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힘으로 결코 물 위를 걸을 수 없다. 주님의 부르심은 우리 자신이 가지고 있는 어떤 것을 근거로 해서 순종하는 것이 아니고, 그분의 부르심과 명령에 순종할 수 있는 원천을 제공해 주시는 그분을 온전히 신뢰함으로써 순종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믿음은 순종에 의해서 시험 받게 된다.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그가 무슨 말로 변명할지라도 믿음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디트리취라는 사람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오직 믿는 자만이 순종할 수 있고, 오직 순종하는 자만이 믿음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순종으로 나타나는 믿음을 요구하신다. 왜냐하면 그분께서는 오직 믿음이 있는 자만이 행할 수 있는 순종을 요구하시기 때문이다.

오직 믿음으로 행하는 순종만이 베드로로 하여금 물 위를 걸을 수 있게 하였다. 그와 같은 믿음이 없이는, 그는 파도 위에 서있는 그분을 신뢰할 수 없었는데, 왜냐하면 물 위를 걷는다는 것은 너무도 바보스럽게 보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그때 그가 순종하지 않았다면, 그는 자신이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다는 사실을 드러내었을 것이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직 믿음으로 행하는 순종만이 우리로 하여금 죄에 대해서 완전한 승리를 얻을 수 있게 해준다.

로마서 8:2-4 을 통해서, 우리는 믿음으로 행하는 순종을 이렇게 설명할 수 있겠다. 더 높은 법에 의거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적인 능력은, 우리로 하여금 물 위를 걸을 수 없도록 하였던 물의 수압에 대한 물리적인 법칙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켰다. 세상에서 인정받고 있는 보편적인 수압의 법칙에서 해방된 자들만이 물 위를 걸을 수 있는 것이다. 율법이 육신이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육신으로 보내어 물 위를 걷게 하셨다. 그리하여 우리도 그분처럼 물리적인 수압의 법칙이 아닌 하늘의 믿음의 법칙에 의거하여 물 위를 걸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불가능한 것을 할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해서 ....

영적인 경험에 있어서 우리는 물 위를 걷지 못할 뿐만 아니라 확신을 잃어버리고 아예 배를 포기하고 떠나려고까지 한다. 우리는 즉시로 죄의 물결과 싸워야 한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미 그러한 죄의 물결을 감당할 만한 믿음이 없다. 우리가 이러한 상황과 상태에 처하게 될 때, 우리는 종종 이렇게 생각한다. 죄를 완전히 정복한다는 것은 정말 불가능한 일이야. 물 위를 어떻게 걸을 수 있겠어? 그리하여 그러한 믿음을 가지고 그리스도인의 생애를 살고자 할 때, 우리는 계속해서 물속으로 빠져들어갈 수 밖에 없다. 너희의 믿음대로 될지니라라는 주님의 말씀은 그런 사람들에게도 적용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순종해야만 한다. 그러나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할 수 없다.

우리는 이러한 사상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는데, 그것은 순종에 관한 모든 책임은 우리에게 있지만, 순종을 위한 모든 능력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이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걸었을 때, 그리스도께서는 베드로가 할 수 없는 모든 일을 해주셨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베드로가 할 수 있는 것은 어느 것이라도 그를 대신해서 해주시지 않았다. 베드로는 스스로 배에서 뛰어 내릴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한 발걸음을 내디딜 수 있었고, 계속해서 걸을 수 있게 되었다. 그는 물의 부력을 전혀 이용할 수 없었다. 그러나 베드로는 믿음을 가졌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그 믿음을 근거로 해서 베드로를 위해서 일하실 수 있었던 것이다.

5) 믿음은 언제나 물 위를 걷는 것

베드로는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것을 현실화하였다. 그는 그 이전이나 후에 어떤 사람도 하지 못했던 것을 성취했다. 그는 세상에서 인정하는 과학적인 견지에서 보면 절대 불변의 물리적 법칙에 대항하여 걸었던 것이다. 어떤 사람도 물 위를 걸을 수는 없다. 수력학 법칙은 인간이 물 위를 걷는 것을 절대적으로 금하고 있다.

무엇이 베드로로 하여금 물 위를 걸을 수 있게 하였을까? 조그만 개구리의 무게조차도 가라앉아 버리는 물의 표면 위에서, 성장한 인간의 무게를 버티게 하였던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에 대한 대답은 믿음이다. 믿음이란 자신의 확신이 이루어내는 자기달성이 아니다.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서 소유하는 완전한 확신인데, 이것을 근거로 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적을 창조해 내시는 것이다. 한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그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 저에게 불가능한 것을 행하도록 말씀해 주십시오. 물 위로 걸어서 당신에게 가도록 명하여 주십시오. 만일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인의 생애를 이런 식으로 이해하고 있지 않다면, 그는 아직 그리스도인의 참된 생애를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경험 속에서 불가능한 것들이 일어나지 않고 있는 사람은 아직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만일 그리스도인 생활이 단순히 종교적인 형식을 유지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일종의 자아훈련을 통해서 그것을 성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생활은 전혀 실질적인 그리스도인 생애가 아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란 마음속에 내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모든 죄와 악한 것을 이기고 정복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다. 진실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예수께 다음과 같이 호소하는 것이다. 주님, 나를 명하사 물 위로 걸어오라 하소서. 그리고 우리는 이렇게 기도해야 할 것이다.

주님, 저는 저의 생애에서 죄를 극복하기를 원합니다. 저는 질투심, 원망, 분노, 조절되지 않는 식욕, 그리고 원한을 버리기를 원합니다. 저는 이 지긋지긋한 죄의식으로부터 해방되기를 원합니다. 주님, 저는 제 자신의 힘으로 물 위를 걷기를 원하지만, 제 스스로 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제 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입니다. 주님, 저를 주님께 가도록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오라! 이런 소원에 대한 주님의 대답은 항상 오라!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하지만, 이러한 호소를 주님께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불가능한 것을 원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예수 그리스도 없이 물 위를 걸으려고 애쓰는 것과 같다. 그대는 그리스도 없이 물 위를 걸을 수 있는가?

 

아마겟돈 전쟁은 언제, 어떻게 일어날까요?

아마겟돈 전쟁이 언제쯤 어떻게 일어날 것인가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요한계시록에 기록되어 있는 마지막 사건들의 순서를 정확하게 이해해야만 한다.

마지막 사건들이 어떠한 순서로 일어날 것인가를 알면, 아마겟돈 전쟁의 전후에 어떤 일들이 일어날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으며, 그것이 어떤 배경을 가지고 일어날 것이라는 사실도 예측할 수 있다. 그러면, 요한계시록이 말하고 있는 마지막 사건들의 순서를 살펴보도록 하자.

1) 짐승의 표 강요

마지막 사건은 짐승의 표를 강요하는 사건으로 시작된다. “또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 저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빈궁한 자나 자유한 자나 종들로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하고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13:15~17. 이 말씀은 사단과 그의 지상 대리자들에 의해서 전 세계적으로 짐승의 표가 강요되고, 그 표를 받지 않는 사람은 사고 파는 매매를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누구나 죽임을 당하게 된다는 사형 명령이 세계적으로 발표될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경고해 주고 있다.

오늘날에는 마치 하나님과 사단 중간에 서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짐승의 표가 세계적으로 강요되는 그 날이 오면, 모든 사람은 하나님을 경배하던지 사단을 경배해야 하는 마지막 선택을 해야만 하는데, 그 때에 세상은 완전히 두개의 진영으로 나누어 지게 된다. 하나님의 참 백성들은 하나님을 경배하게 될 것이고, 사단에게 속한 무리들은 짐승을 경배함으로써 그의 표를 받게 될 것이다. 안타깝게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짐승의 표를 받을 뿐 아니라,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기를 거절하고 그 표를 받지 않는 소수의 참된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나아가서는 그들을 죽일 것인데, 바로 이것이 지구 역사의 마지막에 있는 선과 악의 마지막 대쟁투이다.

그런데 한 가지 특이할 만한 사실은, 온 세계가 둘로 나누어지는 배경에는 누구를 경배(worship, 예배)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가 깊이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경배라는 단어는 종교계에서만 사용되는 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무리 뿐만 아니라, 짐승을 경배하는 무리들도 그리스도인들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양쪽 다 그리스도인들이 중심 세력을 이루게 될 것인데, 한 무리는 하나님의 참 백성들로만 형성될 것이며, 다른 무리는 거짓 그리스도인들과 이방 종교, 그리고 세상 사람들의 연합으로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 사항은어떻게 이방 종교와 세상 사람들이 거짓 그리스도인들과연합하게 될 것인가?” 라는 점이다. 요한계시록 13장에는 이 의문에 대한 힌트가 기록되어 있다. “큰 이적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하고 짐승 앞에서 받은바 이적을 행함으로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하며 13:13,14. 바로 여기서 우리는 사단이 이방 종교인들과 세상 사람들을 하나로 끌어 모으는 방법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놀라운 거짓 그리스도인들이 행하는 놀라운기적과 이적이다. 사단은 자신의 대리자인 거짓 그리스도인들에게 능력을 줌으로써 온갖 기적을 행하게 하는데,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하고 짐승 앞에서 받은바 이적을 행함으로세상 사람들이 경이로운 마음을 가지고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도록 미혹할 것이다.

 

2) 은혜의 시간의 끝과 7재앙의 시작

마지막 시대를 위한 가장 두려운 경고의 말씀이 요한계시록 14:9~10에 나타나 있다. ?다른 천사 곧 세째가 그 뒤를 따라 큰 음성으로 가로되 만일 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 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 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

이 말씀은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가 짐승의 표를 받고 그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에게 로 부터 완전히 거두어 지면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진노의 잔이 부어지게 될 것을 경고하고 있다. 사단의 세력은 짐승의 우상을 세우고 온 세상 사람들에게 경배케함으로써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최종적으로 거절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참 백성들을 핍박하고 죽이는 일들을 자행함으로써, 인류의 반역과 죄악은 그 한계를 채우게 된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에 대한 은혜와 자비의 손을 거두실 수 밖에 없게 되고, 이로써 마지막 7재앙은 시작된다. “일곱 천사가 일곱 재앙을 가졌으니 곧 마지막 재앙이라 하나님의 진노가 이것으로 마치리로다 15:1

온 세상이 사단의 대리자들이 일으키는 기적과 이적에 기만당하여 짐승의 우상을 경배하지만, 하나님의 참 백성들은 목숨을 걸고 짐승의 우상에 대한 경배와 짐승의 표를 거절한다. 이러한 거절이 하나로 연합된 사단의 대리자들과 세상 사람들의 마음 속에 핍박의 정신을 불타오르게 만든다. 수많은 성도들이 순교자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마지막 대쟁투는 선과 악의 쟁투이다. 마지막 대쟁투는 짐승의 표를 받은 악인들과 그것을 거절한 의인들 사이의 쟁투이다.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숫자가 훨씬 더 많고, 하늘의 놀라운 기적과 능력이 자신들과 함께 하는데, 왜 너희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킨다는 이유로 짐승에게 경배하지 않는가 라고 말하면서 의인들을 핍박하며 죽이려고 달려들 것이다. 이 때, 하나님의 참 백성들은 온 세상 사람들에게 비난과 조롱과 오해의 대상이 될 것이다.

바로 이러한 장면에서, 하나님께서는 일곱 재앙을 악인들에게만 내리도록 하심으로써 당신의 백성들을 보호하신다. 악인들은 재앙의 원인을 의인에게로 돌림으로써, 박해의 불길을 더욱 드높힐 것이지만, 계속되는 재앙들을 통하여 악인들의 마음에왜 우리와 연합하지 않는 저 소수의 사람들에게는 재앙이 내리지 않는데, 우리들에게는 온갖 재앙이 내릴까?”라는 의혹이 생기게 될 것이다. 물론, 7재앙이 의인들에게도 불편과 어려움을 줄 것은 사실이지만, 악인들에게는 직접적으로 가해질 것이다.

짐승의 표 강요 사건이 세계적으로 일어날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받은 악인들에게 내리는 일곱 재앙 역시 세계적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일곱 재앙의 순서와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재앙: “첫째가 가서 그 대접을 땅에 쏟으매 악하고 독한 헌데가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에게 나더라지금은 의인과 악인이 공히 질병과 전염병의 피해를 당하지만, 이 때부터는 오직 짐승의 표를 받은 악인들에게만 재앙이 집중적으로 내린다.

둘째 재앙: “둘째가 그 대접을 바다에 쏟으매 바다가 곧 죽은 자의 피같이 되니 바다 가운데 모든 생물이 죽더라

세째 재앙: “세째가 그 대접을 강과 물 근원에 쏟으매 피가 되더라

네째 재앙: “네째가 그 대접을 해에 쏟으매 해가 권세를 받아 불로 사람들을 태우니 사람들이 크게 태움에 태워진지라

다섯째 재앙: ” “다섯째가 그 대접을 짐승의 보좌에 쏟으니 그 나라가 곧 어두워지며 사람들이 아파서 자기 혀를 깨물고 아픈 것과 종기로 인하여 하늘의 하나님을 훼방하고 저희 행위를 회개치 아니하더라다섯째 재앙은 짐승의 보좌가 있는 장소를 암흑으로 둘러치는 재앙이다. 이 재앙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짐승의 세력의 정체와 그가 존재하고 있는 장소를 밝히 드러내실 것이며, 누구 때문에 일곱 재앙을 내리게 되었는지를 나타내 보이신다. 이 때부터 하나님께서는 누가 진짜 하나님의 백성이며, 어떤 무리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무리인지를 온 세상 앞에 드러내기 시작하실 것이다.

여섯째 재앙: “여섯째가 그 대접을 큰 강 유브라데에 쏟으매 강물이 말라서 동방에서 오는 왕들의 길이 예비되더라 또 내가 보매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니 저희는 귀신의 영이라 이적을 행하여 온 천하 임금들에게 가서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전쟁을 위하여 그들을 모으더라 보라 내가 도적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세 영이 히브리 음으로 아마겟돈이라 하는 곳으로 왕들을 모으더라요한계시록 16:12~16

 

바로 이것이 우리가 지금 공부하고 있는 주제인 아마겟돈 전쟁이다. 요한계시록은 아마겟돈 전쟁은 일곱 재앙 중에서 여섯번째로 내리는 심판으로 소개하고 있다. 아마겟돈 전쟁은 사단의 편과 하나님의 편 사이에 벌어지는 대쟁투인데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이 참여하게 되는 영적 전쟁이다. 사단의 편에서 전쟁을 주도하는 세력은세 더러운 영귀신의 영들이고, 하나님의 편에서는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 즉 하나님께 목숨을 다하여 충성을 바치는 진짜 이스라엘인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이다.

일곱째 재앙: “일곱째가 그 대접을 공기 가운데 쏟으매 큰 음성이 성전에서 보좌로부터 나서 가로되 되었다 하니 번개와 음성들과 뇌성이 있고 또 큰 지진이 있어 어찌 큰지 사람이 땅에 있어옴으로 이같이 큰 지진이 없었더라 큰 성이 세 갈래로 갈라지고 만국의 성들도 무너지니 큰 성 바벨론이 하나님 앞에 기억하신바 되어 그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잔을 받으매 각 섬도 없어지고 산악도 간데 없더라 또 중수가 한 달란트나 되는 큰 우박이 하늘로부터 사람들에게 내리니 사람들이 그 박재로 인하여 하나님을 훼방하니 그 재앙이 심히 큼이러라.” 이러한 일곱 재앙을 통과하면서 지구는 황폐하게 될 것이고, 그 때에 예수께서 재강림하셔서 의인들을 구원하실 것이다.

 

질문에 대한 답변

자 이제, “아마겟돈 전쟁은 언제, 어떻게 일어날까요?”라는 질문에 대한 정확한 대답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먼저,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의 표를 강요하는 무리와 그것을 거절하는 무리 사이에 마지막 대쟁투가 세계적으로 시작되고, 짐승의 표를 거절하는 성도들이 핍박과 순교를 당하는 사건들이 생기게 되며, 이러한 와중에 내리는 일곱 재앙 중에서 다섯번째 재앙이 내린 직후에 세계적으로 아마겟돈의 대쟁투가 일어난다.

꺼져가는 적그리스도에 대한 진리

중세기에 종교개혁자들은 로마 천주교회가 적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증명하였다. 그 것은 그 당시에 큰 개혁과 부흥을 일으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그 사실이 거의 감추어지고 말았다.

수 백만의 그리스도인들이 종교 개혁운동에 참여하였다. 로마 천주교회는 종교 개혁자들을 이단자라고 지명하였고 그들을 없애기 위하여 천 여년 이상 동안 성공적 이라고 증명된 계략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깊은 자연의 요새 속에 숨어서 격리되어 있던 몇 몇의 충실한 그리스도인 단체들을 제외하고는 로마 천주 교회의 핍박은 놀라울 정도로 성공적이었다. 이 성공은 국가의 강력한 군대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로마 천주교회의 권위에 복종하지 않은 수 백만의 사람들은 무자비하게 죽임을 당하였다. 역사 학자들은 순수한 성경의 진리를 지키기 위해서 고문을 당하거나 순교를 당한 사람들의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에 대해서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대략 5천만명에서 1억명으로 추정된다. 교황권이 지배하던 중세기 시대에 남자들은 물론이거니와 여자들과 어린아이들까지도 성경을 따른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하였다. 이 일은 거의 모두가 교황권을 추종하는 세속적인 국가들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16 세기에 들어와서는 그 판도가 달라졌다. 교황권의 부패와 만행에 질려버린 많은 군주들과 왕들은 종교 개혁자들의 선언을 받아 들였고, 더 이상 교황권의 모든 명령에 복종치 않게 되었다. 그리하여 로마 천주교회의 절대권을 수행 할 유럽 국가의 군대들이 줄어들게 되었다. 이런 상황들은 자연히 로마 천주교회를 놀라게 하였다. 교황권은 이런 상황들에 익숙해 있지 않았다. 그러므로 유럽을 휩쓸고 있었던 종교 개혁의 빠른 확산에 대항하기 위하여 새로운 계책이 고안되어야 하였다.

이 새로운 계책의 발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14세기의 사건들을 살펴 보아야만 한다. 그 때에는 사방에 종교적인 투쟁이 있었다. 새로운 교황, 얼반 6세가 프랑스의 아비뇽에서 7년 동안의 망명 생활을 마치고 교황의 위치를 회복하여 로마로 돌아왔다. 그러나 추기경들 중 많은 이들이 얼반의 완고한 통치에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아비뇽으로 되돌아 가서 제네바의 주교인 켄바레이의 로버트를 교황 크레멘트 7세로 추대했다. 이리하여 그 당시에 두 교황이 존재하게 되었다. 그 때가 1378년 이었다. 그 후 31년 동안 로마와 아비뇽에서 서로 자기들의 교황이 절대무오이며, 베드로의 계승자이고, 그리스도의 대리자라고 주장하며 상대방의 교황이 적그리스도라고 선언 하였다. 영국 루터월트 교구의 목사이며 유력한 성직자인 존 위클립은 그들 서로의 주장에 동의하였다.
"사단은 더 이상 한 교황 안에서 군림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제 두 명의 교황 안에서 역사하므로 사람들이 더 쉽게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들을 이길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적 그리스도는 나누어 졌고, 한 교황이 다른 교황을 대항하여 싸우고 있다." (Emma H. Adams, John Wycliffe, Pacific Publishing Association, Oakland, 1890)
교황권의 과세에 반대한다는 이유 때문에 위클립은 위험에 처할 뻔 하였지만 그의 친구들과 영국 왕가와의 특별한 친분으로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40여년 후, 보헤미야의 위대한 개혁자인 존 허스와 프라하의 제롬은 교황권에 대항하다가 결국 화형을 당하였다. 그들은 위클립에게 아주 큰 영향을 받았다. 교황권이 적그리스도라는 사실의 입증은 종교 개혁의 변함없는 주제가 되었다. 마틴 루터는 교황 개인에 한한 것이 아니라 교황권 전체가 적그리스도라고 믿었다. 쯔윙글리, 칼빈, 낙스, 그리고 다른 종교 개혁자들도 마틴 루터와 같은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다음은 몇 몇의 종교 개혁자들의 언급이다. 그들의 의견들은 놀라울 정도로 일치한다.

적그리스도에 대한 종교 개혁자들의 입장
1) 마틴 루터 "바울이 데살로니가 후서 2장 3,4절에 '하나님이나 숭배함을 받는 자 위에 뛰어나 자존하여 하나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하느니라'고 기록하였던 그 존재가 여기에 있다. 적그리스도인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있는데, ... 그는 하나님의 법을 폐지하였으며, 하나님의 계명 위에 자신이 만든 계명을 높였다. 우리는 여기서 교황권이 진짜 적그리스도의 권좌에 앉아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는 바이다." (LeRoy Froom, The Prophetic Faith of Our Fathers, Volume 2, page 281)
2) 요한 칼빈 "나는 교황이 그리스도의 대리자 됨을 부인한다. ... 그는 적그리스도이다. - 나는 그가 교회의 머리 됨을 부인한다" (John Calvin Tracts, Volume 1, pages 219, 220).
3) 요한 낙스 "수 세대에 걸쳐서 교회 위에 군림해 온 교황권이 바로 바울이 말한 적그리스도요 멸망의 아들이다." (The Zurich Letters, page 199)
4) 필립 멜란톤 "로마 교황권이 거대한 조직과 왕국을 가지고 있는 적그리스도라는 사실은 전혀 의심할 여지가 없는 명백한 진리이다. ...데살로니가 후서 2장 2절에서, 바울은 죄의 사람이 자신을 하나님보다 높임으로써 교회를 지배하게 될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하였다." (LeRoy Froom, The Prophetic Faith of Our Fathers, Volume 2 page 296-299)
5) 이삭 뉴턴 경 "교황권은 나머지 열 뿔과는 다른 종류의 왕국이었다. ...로마 교회는 선지자 노릇을 하였으며, 동시에 왕이었다." (Sir Isaac Newton, Observations of the Prophecies, page 75)
6) 요한 웨슬리 "로마 교황권이 바로 죄의 사람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바이다." (John Wesley, Antichrist and His Ten Kingdoms, page 110)
7) 사무엘 리 (17세기의 유명한 성직자) "로마 교황권이 적 그리스도라는 사실은 영국에 있는 모든 주요 교단들 사이에서 공통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가르침이다." (Samuel Lee, The Cutting Off of Antichrist, page 1)
장로교회에서도 채택되었던, 영국교회의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에서 인용한 다음의 내용은 참으로 중요한 자료이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사람이 교회의 머리가 될 수 없다. 특히 로마의 교황은 어떤 면에서든지 교회의 머리가 될 수 없다. 교황은 바로 그 불법의 사람이고 멸망의 아들로서 범사에 일컫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위에 자기 자신을 높이는 적그리스도이다." (The Westminister Confession of Fatih, Section 6, Chapter 24)
스위스의 헬베트 회의에서 교황권이 바로 성경에서 예언된 적그리스도라고 언급하였다. 스말칼드(Smalcald) 조항에 있는 루터 교회의 성명서에 교황은 자신을 스스로 높이고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바로 그 적그리스도라고 언급하고 있다. 1680년의 "뉴 잉글랜드 신앙의 고백"은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이시지, 멸망의 아들이며 적그리스도인 로마의 교황이 아니라고 말한다.
"교황권을 적그리스도와 동일시 하는 것은 종교 개혁의 중심을 이루는 사상이었다. 이러한 견해는 루터와 다른 종교 개혁자들에게 교황권을 대항할 수 있게 하였던 큰 원동력이 되었다. " (Encyclopedia Brittanica, 1962 edition, Volume 2, page 61)
초창기에 힘있게 밀고 나가던 종교 개혁운동 이 점차적으로 약화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적어도 19세기말까지는 거의 모든 개신교 교단들이 여전히 교황권과 적그리스도를 동일시 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세계적으로 이루어 지고 있는 교회(종교) 연합운동에 의해서 조성된 분위기 속에서는 교황권과 적그리스도를 동일시 하는 것은 매우 보기 드문 일이 되어 버렸다. 몇몇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은 오늘날 현대 사회에서 별로 중요시 할 문제가 아니라며 이 문제를 무시해왔다.

적그리스도에 대한 여러가지 오해들

적그리스도의 개념은 선지자 다니엘이 "작은 뿔" 이라고 불렀던 배교의 세력에 대하여 예언했을 때인 기원전 6 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다니엘서7:8-11, 24-26; 8:9-12, 23-25). 그리스도께서 탄생하기 전 시대에 살았던 유대인들은 이 세력을 적메시야의 출현으로 적용하였다. 기원전 2세기에는 세레시드의 왕, 안티커스 에피파네스가 예루살렘 성전을 강제로 재 봉헌하게 하여 예루살렘 성전을 더럽히고 신성을 모독한 사건이 있었다. 그 시대에 강력한 유대 족속의 한 부류였던 마카비 집안은 이 사건에 의해 이 작은 뿔(적메시야)의 예언이 이루어 졌다고 오해하였다. 또한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로마에 있던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무자비하게 죽인 네로 황제(A.D 68에 죽음)가 이 다니엘의 예언을 성취시킨 작은 뿔이였을 것이라고 오해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의 말씀을 볼 때, 안티커스 에피파네스나, 또는 네로 황제를 적그리스도로 보기에 부적합 하다는 것이 입증된다. A.D 1세기가 거의 마쳐갈 즈음에 쓴 사도 요한의 말씀은 적그리스도가 한 사람이 아닌 많은 사람들이고, 또 그 중 어떤 이들은 사도 요한의 시대에 존재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아이들아 이것이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이르겠다 함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 (요한 일서 2:18)
적그리스도의 이름이 성경에서 단지 다섯 번만 언급되었고, 게다가 오로지 사도요한에 의해서만 기록되었다는 사실은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그러나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구원과 진리에 가장 강력한 원수는 적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부인하게 하지 못한다. 그 동안 각 시대를 거쳐 오면서 적그리스도를 다른 것으로 적용하려는 노력이 계속되어 왔었다. 참혹했던 2차 세계대전 당시에 어떤 이들은 아돌프 히틀러가 적그리스도라고 주장했다. 다른 이들은 강력한 무슬람 세력이, 또 그 후에는 무신론의 공산주의가 적그리스도라고 주장하였다. "적그리스도"라는 말은 성경에서 자주 사용되지 않은 반면에, "배교의 세력"이라는 말은 성경에서 폭 넓게 사용되고 있다. 사도 바울은 "불법의 사람" 과 "멸망의 아들" 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그는 적그리스도의 출현이 그리스도의 재림 이전에 있을 것을 정확하게 지적한다.
"누가 아무렇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하지 말라 먼저 배도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이르지 아니하리니 저는 대적하는 자라 범사에 일컫는 하나님이나 숭배함을 받는 자 위에 뛰어나 자존하여 하나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하느니라"(살후 2:3-4)
요한 계시록에서 사도 요한은 정결하지 못한 여자인 (음녀) 바벨론은 짐승을 타고 있는 존재로 설명하면서 적그리스도를 나타내고 있는데 여러 가지 다른 상징들을 사용한다
"저가 먼저 나온 짐승의 모든 권세를 그 앞에서 행하고 땅과 땅에 거하는 자들로 처음 짐승에게 경배하게 하니 곧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은 자니라"(계 13:12) "큰 성이 세 갈래로 갈라지고 만국의 성들도 무너지니 큰 성 바벨론이 하나님 앞에 기억하신 바 되어 그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잔을 받으매"(계 16:19) "곧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광야로 가니라 내가 보니 여자가 붉은 빛 짐승을 탔는데 그 짐승의 몸에 참람된 이름들이 가득하고 일곱 머리와 열 뿔이 있으며 그 여자는 자주 빛과 붉은 빛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 손에 금잔을 가졌는데 가증한 물건과 그의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하더라 그 이마에 이름이 기록되었으니 비밀이라, 큰 바벨론이라,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 하였더라"(계 17:3-5)
먼저 언급한 것처럼, 구약의 선지자 다니엘은 적그리스도를 작은 뿔이라는 상징으로 묘사한다.
"그가 장차 말로 지극히 높으신 자를 대적하며 또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를 괴롭게 할 것이며 그가 또 때와 법을 변개코자 할 것이며 성도는 그의 손에 붙인 바 되어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지내리라"(단 7:25)
과연 적그리스도는 누구이며 또 무엇일까 라는 질문은 세기에 걸친 의문이다. 이것은 한 개인일 것인가? 혹은 계승되는 것인가? 아니면 한 국가나 어떠한 세력인가? 과연 적그리스도는 이미 과거에 나타났는가? 지금 현재에 존재하는가? 아니면 미래에 나타날 것인가? 복음주의 교회의 많은 사람들은 세상 마지막 바로 직전에 나타나 예루살렘에 다시 지어진 성전에 앉아서 참람되이 성전을 모독하며 무자비한 핍박을 자행할 악마와 같은 한 사람으로의 적그리스도가 나타날 것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해석은 종교 개혁주의의 전체적인 복음의 이해를 무시하는 것이다. 1841년에 장로교회 협의회 출판소에서 출판된 "The Church of Rome, The Apostasy"라는 책에서 윌리웜 커닝햄은 로마 교황권을 불법의 사람과 적그리스도로 특별히 명시한다. 그는 로마 천주교회가 사단과 신상 숭배와 마리아의 숭상과 우상숭배의 죄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지적한다. 그는 또한 로마 천주교회에 의해서 이루어진 수 없이 많은 신성모독의 실례들을 지적한다. 그는 바벨론에서부터 나오라는 외침(계시록 18:4-5)을 로마 천주교회에서 나오는 외침과 동일시 한다. 버지니아의 놀폴크의 장로교회 목사이었던 사무엘 제이 카설스는 1846년에 "그리스도와 적그리스도"라는 책을 썼다. 이 책은 로마 천주교회가 적그리스도임을 이해하기 쉽게 증명한 책들 중 하나이다. 이 책은 그 당시 장로교회, 감독교회, 감리교회와 침례교회의 지도자들에게 완전히 인증되었다.

빗나가기 시작한 과녁

그러나 19세기 말이 되어서, 교황권이 적그리스도라는 사실이 간과되기 시작하였다. 사무엘 앤드류는 그의 책 "Christianity and Anti-Christianity in Their Final Conflict"에서 요한 계시록 13장에 묘사된 짐승을 압제하는 세속적인 정부로 명시하고 있다. 20세기 전의 신교도들이 이 짐승을 교황권으로 증명한 것과는 반대로 그는 이 짐승을 교황권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20세기 초반에 와서 미래주의적 예언 해석이 거의 모든 신교도들에 의해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몇몇 소수의 신교도들은 여전히 정확하게 교황권과 적그리스도를 동일시했다. 1920년 경에 "The Present Antichrist"라는 책을 쓴 프레드 제이 피터스가 바로 그들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왈덴스인들과 허스, 제롬, 루터, 칼빈, 아이작 뉴튼 경, 라티머, 번얀, 무디, 스펄젼과 같은 헌신적인 그리스도인들이 모두 불법의 사람이 바로 적그리스도인 교황이라는 사실에 의견을 같이한다고 언급했다. 피터스는 다니엘서 9장에 있는 70주일 예언이 하나님의 택함 받은 백성으로 유대인들에게 남겨진 490년의 기간이라는 것과 그 기간이 A.D 34년에 끝났다는 것을 정확하게 해석했다.

바로 로마 교황권이 성경에 예언된 적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입증하며 드러내는 일이 더 이상없기 때문에 심지어 보수적인 개신교도들까지도 천주교도들과 감히 손을 잡고 연합하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만일 종교 개혁자들이 이런 일들을 본다면 큰 슬픔에 빠질 것이다. "역사적인 선언"이라고 불리어 지는 가운데 팻 로버트슨과 척 콜슨을 포함한 개신교의 복음주의자들이 로마 천주교회의 지도자들과 함께 전국에서 가장 크고 정치적으로 영향력이 있는 종교단체를 만들어 연합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들은 카톨릭교도들과 개신교의 복음주의교도들에게 낙태와 포르노를 금지하는 데에 노력을 기울이며, 가치 있는 교육을 양성하는데 힘을 기울일 것을 촉구하였다. 반면에 서로에게 교리적인 대립을 피하고 서로의 교인들에게 적극적인 개종의 권유를 금하라고 촉구하였다. 미국, 동유럽과 남미에 있는 카톨릭교도들과 개신교의 복음주의교도들사이에 있는 긴장관계의 주된 원인을 언급하면서, 그 선언문은 서로 다른 그리스도 종교 단체의 현 교인들을 자신의 단체로 개종 시키려는 것은 교리적으로 합법적인 것이 아니요, 지혜로운 재원의 사용이 아니라고 명시하였다. (The San Bernardino Sun, March 30, 1994, p 42)

예언의 미래주의로 성공한 천주교회의 시도

로마 카톨릭 교회는 교황권이 적그리스도 세력이라는 명백한 성경적인 증거를 없애 버리겠다고 결심을 하였다. 그들은 적그리스도는 단지 세상 마지막 때에 나타날 한 개인이며, 그는 실제적 기간인 3년 반이라는 기간동안 기독교회에 재난을 가져올 것이라고 주장한다.

오늘날에는 로마 천주교회의 예수회(Jesuit)에 의해서 만들어진 미래주의의 사상이 개신교도들에 의해 받아들여지고 있다. "His Apocalypse" (1924)라는 책에서 쟌 퀸시 아담은 적그리스도가 세상 마지막 때에 나타날 악마적인 세력이라고 하는 미래주의의 견해를 제시했다. 이 잘못된 개념은 또한 "The Coming Superman" (1928)이라는 책을 쓴 F.M. 메신저에 의해 지지 되었다. 최근에 이 미래주의 견해가 무디 출판사에서 1969년에 나온 헤르만 홀트의 책 "The End Time"에 의해서 지지 되었다. 그러나 적그리스도에 대한 사도 요한의 묘사는 적그리스도가 한 개인일 것이라는 가능성을 배제한다. 시간은 걸렸지만, 예수회(Jesuit)는 성공적으로 일을 성취시켰다. 1545년에서 1563년 동안 열린 트랜트 회의에서 로마 천주교회의 주교들이 가졌던 가장 무거운 부담 중에 하나가 바로 적그리스도를 교황권과 동일시 하는 개신교도들의 영향을 파괴하는 것이었다. 결국 그 일은 정선된 지식인들로 새롭게 구성된 예수회 (The Jesuits)에게 주어졌다. 프랜시스코 리베라는 미래주의 예언해석을 1585년에 고안해 내었다. 적그리스도는 미래에 있을 한 사람으로써 세상 마지막에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큰 핍박을 주는 개인이라는 것이 그의 이론이었다. 영국 국교회 안에서 카톨릭 부흥 운동이 19세기 초기에 일어났다. 옥스퍼드 대학교의 교수인 S.R 마이트랜드, 제임스 토드, 그리고 윌리암 벌은 로마 천주교회와의 재연합을 반대하는 충실한 영국 국교회원들의 항의를 무마하기 위해서 리베라의 미래주의의 사상을 들여와 가르쳤다.
종교 개혁의 선구자들은 단지 보복을 위해서 로마 교황권을 성경 예언의 큰 적그리스도의 세력으로 지적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영감적인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분별하였던 것이다. 왜 적그리스도의 신분을 입증하는 것이 마지막 시대를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그렇게 중요한지 다음에 몇 가지 이유들을 지적한다.

적그리스도를 정확하게 지적해야만 하는 3가지 이유

1. 적그리스도의 신분을 입증하므로 이 적그리스도의 세력이 자기의 깃발 아래로 온 세계를 연합 시키려 할 때에 그 기만에 우리가 속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계시록 13:8)
2. 계시록 18장 4,5절에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그 배교의 세력에서 나와 하나님의 충만한 진리 가운데로 나오라는 그 부르심의 기별을 우리가 진지하게 받아들이기 위해서이다. 진정한 복음주의 개신교도들은 교황권이 적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을 증오와 복수심으로 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류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이 진리를 전한다. 위탁된 복음 선포의 중요한 사명은 남녀들을 구원으로 이끌어 죄의 기만과 속박에서 그들을 자유케 하는 일에 있다. 지구 역사의 어느 시대보다도 바로 이 시대에 적그리스도의 정체를 확인하는 것과 바벨론에서 사람들을 나오라고 초청의 기별을 전하는 일이 꼭 이루어 져야 한다.
3. 요한 계시록 14장 8-12절에 있는 둘째와 셋째 천사의 기별은 이 적그리스도의 세력과 그 것을 따르는 자들에게 다가올 멸망과 몰락에 그 초첨을 맞추고 있다. 온 세상에 경고하기 위해서 이 세력의 정체를 밝히는 것이 필요하다. 만일 복음주의 개신교도들이 예수님께서 재림하시기 전에 사람들에게 중요한 경고의 기별을 전하는 책임감을 가지고 있다면, 그들이 지난 수 십년 동안 적그리스도의 정체를 밝히는 일에 태만히 했던 태도를 바꿔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로마 교황권인 적그리스도와 그의 만행에 대해서 경고하기를 요구하신다. 이 일을 하기 위해서 복음주의 개신 교도들이 추구하는 현 정책을 완전히 개정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이 지금 걷고 있는 길에서 돌아선다면, 그들은 루터와 16세기의 종교 개혁자들에 의해서 이루어 졌던 본래의 복음주의의 자리로 돌아갈 것이다.

적그리스도의 정체를 알려 주는 성경절 모음

다니엘 7:1~7 바람이 바다로 몰려 불면서 네 짐승이 출현

요한계시록 17:15 예언에서 물은 백성(많은 사람들)을 의미하며, 또한 렘 49:36,37에 의거하여 바다 : 큰 무리 바람 : 싸움과 전쟁

다니엘 7:17,23 네 짐슴 : 네 나라, 네 왕(바벨론, 메데 바사, 헬라, 로마)

다니엘 7:7,8 네째 짐승에 달린 열뿔 사이에서 하나의 작은 뿔(적그리스도 세력)이 나옴

다니엘 7:24 열뿔 : 네째 나라(로마)에서 일어날 열 왕(열 나라) 작은 뿔 : 열국 시대에 강력한 세력으로 나타난 로마 교황권

다니엘 7:8,20,24 작은뿔이 먼저 나온 열뿔 중에서 세뿔을 뽑아버림. 교황권의 영향력으로 인하여 세나라(헤룰리, 반달, 동고트)가 제거됨

다니엘 7:25 작은뿔의 역할 1. 하나님을 대적하며 자칭 하나님의 대리자라고 주장함 2. 성도를 괴롭힘: 수많은 성도들을 죽임 3. 때와 법을 변개: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십계명을 변경시킴

데살로니가후서 2:3,4 사도 바울이 때와 법을 변경시키는 불법의 사람(교황권)의 출현을 예언

다니엘 7:25 하단 겔 4:6에 의거하여 작은 뿔의 활동 기간인 한때와 두때와 반때 즉, 3년 반(1260일) 이라는 예언적 기간은 1260년으로 환산할 수 있다.

요한계시록13:3 중세기 종교암흑시대의 끝에 죽었던 교황권의 세력이 다시 회복되는 예언. 현재 거의 완전히 회복되어 있다.

다니엘 7:27 결국 하나님의 백성이 승리를 하게 된다.

마태복음 7:22,23 불법을 행하는 자들은 모두 멸망할 것임

살아남는 이들 16호와 33호를 꼭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적그리스도의 9가지 특징과 역사적 증거

종교 개혁자들은 다니엘 7장과 요한계시록 13장에 나오는 작은 뿔과 첫번째 짐승의 모습을 어떻게 이해했길래, 그 둘 모두가 로마 교황권을 가리킨다고 지적하였을까? 이 기사를 끝까지 읽고 나면, 종교개혁자들의 견해에 독자 여러분들도 전적으로 동의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자세와 편견없는 마음으로 적그리스도의 정체를 연구하는 사람마다 모두 동일한 결론을 얻을 수 있도록 예언을 기록해 두셨다. 왜냐하면 그 분께서는 성경을 진지한 마음으로 연구하는 그리스도인마다 적그리스도의 정체를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예언을 풀 수 있는 열쇠들을 성경 속에 감추어 두셨기 때문이다. 선지자 다니엘과 사도 요한이 기록한 예언, 그리고 세계 역사를 통하여 성취된 예언의 자취를 살펴보면, 로마 교황권 이외에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종교, 정치, 사회 세력도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이 말하는 9가지 특징들을 완전하게 만족시킬 수 있는 단체나 세력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다니엘서 7장이 설명해 주는 요한계시록 13장

요한계시록 13장의 초반에는 첫번째 짐승이바다에서 올라오는 모습이 그려져 있으며(1), 중반에는 두번째 짐승이에서 올라오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고(11), 중반 이후부터 13장 끝까지는 마지막 시대에 이 두 짐승이 서로 협력하여 성도들을 핍박하고 짐승의 표를 강요하는 사건이 전개된다. “(두번째 짐승)가 먼저 나온 짐승(첫번째 짐승)의 모든 권세를 그 앞에서 행하고, 땅과 땅에 거하는 자들로 처음 짐승(첫번째 짐승)에게 경배하게 하니 ...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 ...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12,15,17. 이 두 짐승은 누구이며, 그들의 목적은 무엇인가? 이 중요한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는 먼저 첫번째 짐승의 정체를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첫번째 짐승을 알면, 두번째 짐승의 정체가 보이기 때문이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예언을 해석할 때, 우리는 다니엘서에 기록된 예언과 병행하여 연구함으로 놀라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요한계시록에는 역사적 계시가 4번 반복해서 나오는데, 다니엘서에도 세계 역사가 네번 반복해서 예언되어 있다. 예언을 연구하면 할수록 많은 점에 있어서 요한계시록은 다니엘서와 예언적 내용이나 그 패턴에 있어서 유사하며, 두 예언서가 종말에 관한 예언에 있어서 서로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다니엘서에는 종말에 관한 예언이 기록되어 있는데, 요한계시록은 그 종말에 관한 예언의 의미를 펼쳐 보이고 공개해 주는 계시서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두 예언서를 함께 비교 연구함으로써, 종말에 관한 계시들을 풀이할 수 있는 예언적 열쇠들을 발견할 수 있다.

한가지 깜짝 놀랄만한 놀라운 사실은, 서기 1세기 경에 사도 요한이 기록한 첫번째 짐승에 대한 계시는 구약 성경의 다니엘 선지자가 기록한작은 뿔에 대한 계시와 정확하게 일치한다는 것이다. 구약과 신약의 위대한 두 선지자가 목소리를 같이하여 지목하고 있는 이 세력은 누구인가? 다니엘 7장에는작은 뿔로 상징된 세력이, 요한계시록 13장에서는 무서운 모습을 지닌짐승으로 등장한다. 다음의 비교표는 다니엘 7장의 작은 뿔과 요한계시록 13장의 첫번째 짐승의 배경, 연대, 활동 상황에 대한 특징들이 동일하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월간지, 살아남는 이들 제16호에서 이미 다니엘 7장에 나오는작은 뿔세력에 대하여 상세하게 다루었으므로, 여기서는 다니엘 7장에 나오는 작은 뿔과 요한계시록 13장에 나오는 첫번째 짐승의 특징과 역사적 증거들을 살펴봄으로써, 마지막 시대에 짐승의 표를 강요하는 사건과 연관된 예언의 실마리를 하나씩 풀어가 보도록 하자;

 

 

1. 첫번째 특징: 작은 뿔과 첫번째 짐승은, 로마제국의 분열 이후에 서 유럽에서 일어난다

 

다니엘 7장의 작은 뿔: “네째 짐승은 ... 열 뿔이 있으므로 내가 그 뿔을 유심히 보는 중 다른 작은 뿔이 그 사이에서 나더니 먼저 뿔 중에 셋이 그 앞에서 뿌리까지 뽑혔으며” 8.

요한계시록 13장의 첫번째 짐승: “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 그 뿔에는 열 면류관이 있고 ... 내가 본 짐승은 표범과 비슷하고 그 발은 곰의 발같고 그 입은 사자의 입 같은데 용이 자기의 능력과 보좌의 큰 권세를 그에게 주었더라” 1,2.

 

교황권이 확립되는 시기와 장소

언제: 로마제국의 분열 이후, 어디서: 서부 유럽

 

예언 해석

작은 뿔: 다니엘 7장에는 계시를 기록한 선지자 다니엘 시대로부터 시작해서 역사적 순서로 나타나는 네개의 제국이 네 짐승으로 표상되어 있다. “그 네 큰 짐승은 네 왕이라 세상에 일어날 것이로되 ... 네째 짐승은 곧 땅의 네째 나라인데 7:17,23. 월간지, 살아남는 이들 제16호에서 자세히 공부했던 것처럼, 네 짐승은 각각 사자(바벨론), (페르시아), 머리 넷을 가진 표범(그리스), 그리고 열 뿔을 가진 놀라운 짐승(로마제국)인데, 선지자 다니엘은 이 네번째 짐승(로마제국)이 다시 열 나라로 분열되고, 그 분열된 열 나라 가운데서 작은 뿔 세력이 일어나는 모습을 보았다. “네째 짐승은 곧 땅의 네째 나라인데 ... 열 뿔이 있으므로 ... 열 뿔은 이 나라에서 일어날 열 왕이요 그 후에 또 하나(작은 뿔)가 일어나리니 그는 ... 세 왕을 복종시킬 것이며” 24. 그렇다면 네째 짐승으로 표상된 로마제국이 열 나라로 분열된 것은 언제인가? 역사는 서기 476년에 로마제국이 열 나라로 분열된 사실을 증거한다. 로마의 멸망과 함께 열 조각으로 분열된 부족들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앵글로 색슨, 프랑크, 알레마니, 벌건디언, 반달, 수에비, 동고트, 서고트, 헤룰리, 롬바르드. 그러므로 작은 뿔은 서기 476년 이후, 로마제국이 분열된 열 나라가 있던 지역에서 세 나라를 제거하면서 서부 유럽에서 부상한 세력이다. “그 후에 또 하나(작은 뿔)가 일어나리니 그는 ... 세 왕을 복종시킬 것이며” 23,24.

첫번째 짐승: 다니엘 7장에서 작은 뿔로 표상된 세력이, 요한계시록 13장에서는 다니엘 7장에 나온 네 짐승의 혼합 형태로 등장한다.

사도 요한은 이 첫번째 짐승을 사자의 입+곰의 발+표범의 몸+일곱머리+열 뿔을 가진 괴상하고 무서운 모습으로 묘사했는데, 이것은 이 짐승이 다니엘 7장에 나오는 바벨론, 페르시아, 그리스, 그리고 로마 제국의 권세와 하나님의 백성을 핍박하는 성격을 복합적으로 지니고 있는 세력이라는 사실을 말해 준다. 요한계시록 13장의 첫번째 짐승은일곱 머리를 가지고 있는데, 이것을 보아서도 이 짐승이 다니엘 7장에 나오는 네 짐승의 복합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사자 머리(1)+곰 머리(1)+표범 머리(4)+무섭고 놀라운 짐승 머리(1)=”일곱 머리특히, 이 짐승의 열 뿔 위에 면류관(왕관)이 있는 것을 볼 때, 이 복합적 짐승이 강력한 왕권을 가지고 출현하는 시기가 로마 제국이 멸망하여 열 뿔(열 나라)로 나누어진 이후(서기 476)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역사적 증거

역사는 교황권이 로마제국이 열 나라로 분열된 이후에 서부 유럽에서 등장하였던 사실을 증거한다. “로마제국의 무너짐으로부터 로마 교회의 거대한 종교적 왕국이 일어났다” A.F. Flich, The Rise Of The Medival Church, 1900년도판 15. “교황은 로마 황제가 가졌던 권력과 명성, 그리고 이교의 명칭들을 물려받음으로써 공석이 된 로마 황제의 자리를 차지하였다스텐리의 역사, 40

로마 교황권은 언제 일어났는가? 로마 카톨릭 교회가 강력한 세력으로 등장하는 역사적인 연대가 이 첫번째 특징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교황권은 로마제국이 열나라로 분열된 서기 476년 이후에 강력한 세력으로 등장하였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서기 538년에 저스티니안 황제는 로마교회에게 막강한 권세(종교, 정치, 군사권)를 주기로 선포했는데, 이로서 교황권이 세상을 지배하는 중세기의 종교암흑시대가 열리게 되었된 것이다.

역사는 교황권이 등장하는 지리적 위치를 서부 유럽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 교황권은 서부 유럽에서 발생되었는데,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로마 제국의 심장부인 이태리 반도의 로마시에서 일어났다.

 

 

2. 두번째 증거: 작은 뿔과 첫번째 짐승은 종교적 세력이다

 

다니엘 7장의 작은 뿔:이 작은 뿔에는 ... 또 입이 있어 큰 말을 하니라 ... 그가 장차 말로 지극히 높으신 자를 대적하며” 8, 25.

요한계시록 13장의 첫번째 짐승: “용이 짐승에게 권세를 주므로 ... 짐승에게 경배하여 ... 또 짐승이 큰 말과 참람된 말하는 입을 받고 ... 짐승이 입을 벌려 하나님을 향하여 훼방하되 ...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4~6, 8

 

교황권은 종교적 세력이다. 경배를 받으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말을 한다

 

예언 해석

작은 뿔: 다니엘 7장에 나오는 작은 뿔은말로 지극히 높으신 자(하나님)을 대적한다고 했으므로 이것은 종교적 세력임에 틀림없다. 다니엘 선지자는 작은 뿔 세력은 그 이전에 존재했던 열 뿔 즉, 열 나라와 다른 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열 뿔은 이 나라에서 일어날 열 왕이요 그 후에 또 하나가 일어나리니, 그는 먼저 있던 자들과 다르고.” 24. 다니엘은 무엇이 어떻게 다르길래 작은 뿔을먼저 있던 자들과 다르고라고 표현하였는가? 열 뿔은 단순히 정치적인 왕권을 가진 나라들이었지만, 작은 뿔은 정치적인 왕권 뿐만 아니라, 종교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첫번째 짐승: 계시록 13장의 첫번째 짐승은 작은 뿔처럼큰 말과 참람된 말을 하며,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들의경배를 요구하며, 또한 입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종교적 세력이다.

 

역사적 증거

교황권은 이전에 존재했던 어떤 왕국이나 국가와 전혀 다른 성격인 종교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이전의 열나라들은 모두 정치적 군주국가였으나, 교황 로마는 종교적 군주국가라는 점에서 크게 다르다. 이전의 왕국들은 사람의 몸을 다스렸으나 교황은 사람의 영혼까지 다스렸다” Daniel By Ford, 152

교황권은 종교적 세력으로 시작되었으며, 지금까지 거대한 종교적 단체로 남아 있다. 교황권은 단일 교단으로서는 이 세상에서 가장 크고 영향력 있는 종교단체이다. 교황권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나라는 이 세상에 없을 정도로 세계적인 종교 단체이며, 지금은 종교연합운동의 거센 바람 하에 개신교회에도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3. 세번째 특징: 작은 뿔과 첫번째 짐승은 크고 참람된 말을 한다

 

다니엘 7장의 작은 뿔: “이 작은 뿔에는 ... 또 입이 있어 큰 말을 하니라” 8.

요한계시록 13장의 첫번째 짐승: “또 짐승이 큰 말과 참람된 말하는 입을 받고 “ 5

 

교황권은 크고 참람된 말을 하는 세력이다.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시하며, 스스로 죄를 사할 수 있는 권세가 있다고 주장한다

 

예언 해석

작은 뿔과 첫번째 짐승이 하는큰 말과 참람된 말이란 무엇인가? 성경에서, “큰 말은 그 의미에 있어서참람된 말과 함께 사용되는 낱말이다. 그러므로 어떤 세력이큰 말을 한다는 것은, 그 세력이참람된 말을 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참람된 말이란 어떤 것을 말하는가?

신약 성경에는참람이라는 단어가 다음과 같은 두가지 의미로 사용되는데, 첫째는 인간이 자기 스스로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세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고( 5:21), 둘째는 인간이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에 올려 놓는 것을 말한다(10:33). 요한복음 10장에는, 예수께서 자신과 하나님이 하나라고 말씀하시자,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참람되다고 말하면서 그분을 향하여 돌을 던지려고 하는 장면이 나온다( 10:30~33). 또한 마가복음 2장에는참람에 대한 또 다른 정의가 나온다. 예수께서 문둥병자에게소자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시면서, 당신께서 가지고 계신 죄를 사하는 권세를 말씀하시자, 유대인들이 주님을 향하여 참람되다는 말을 하였다( 2:5,6). 물론, 예수께서는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시기 때문에 당신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되다고 말씀하실 수 있으며, 죄를 사하실 수 있는 권세를 가지고 있다고 말씀하실 수 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어떤 사람이나 세력이 스스로 하나님과 동등하다는 말을 하거나, 죄를 사할 수 있는 권세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면, 그는 하나님을 대적하는참람된 말, “큰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작은 뿔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큰 말을 하는데, 즉 스스로 하나님과 동등함을 주장하며 죄를 사할 수 있는 권세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특징을 가진 세력이다.

 

역사적 증거

과연, 교황권은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시 하고, 스스로 인간의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세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크고 참람된 말을 함으로써, “지극히 높으신 자를 대적하는가? 바티칸 교황청에서 공식적으로 발행된 문서들의 내용을 중심으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보기로 하자;

 

A. 교황권은 교황을 하나님의 자리에 두거나 동등시하는 주장을 한다.

“교황은 너무 존엄하고 높기 때문에 단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과 같은 존재로서 하나님의 대리자이다.” 천주교회 백과사전에 기록된교황에 대한 정의 (교황 레오 13세의 말 중에서 발췌)

“교황들은 이 지구상에서 전능한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한다.” 1894 6 20일 교서 중에서

“교황은 하늘의 왕, 지상의 왕, 연옥의 왕으로서 삼층 면류관을 쓴다.” Feraris , Prompta Bibliotheca 6, p.26 (바티칸에서 발행한 공식 서적)

“교황은 단지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자일 뿐만 아니라, 그는 육신의 베일 속에 감추어진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다.” 1895 7월호, The Catholic National

“성경에서 교회의 머리되시는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모든 명칭들과 그분의 최상권에 관한 모든 내용은 모두 다 교황에게도 적용된다.” Bellarmin, Authority of Councils, 2 17

“교황만이 가장 거룩하다고 불릴 수 있으며 ... 거룩한 군주, 지고한 황제, 그리고 왕중왕이라고 불릴 수 있다. 교황은 그토록 큰 위엄과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동일한 심판을 구성할 수 있다. 그래서 교황이 행한 바는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발해진 것처럼 여김을 받는다. 만일 천사들이 신앙을 가진다면, 그들을 심판하고 파문에 처할 수 있다” Article on the Pope, Ferraris, Ecclesiastical Dictionary.

“우리(: 교황들)는 이 땅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Pope Leo XIII, Encyclical Letter, 7/20, 1894.

“교황은 너무나 위엄이 있고 지고하기 때문에 그는 단순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인 동시에 하나님의 대리자이시다. 교황은 지상의 하나님이시며, 왕중의 왕이시고, 최고의 권세를 가지고 계시다.” Prompta Bibliotheca, vol. VI, p. 25-29.

지금 현재에도 이러한 교황권의 사상은 변치 않고 계속되고 있는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대관식 때에, 교황의 머리에 삼층관을 얹으면서 드린 오타비아니 추기경의 기도는 그들의 사상이 전혀 변치 않고 계속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세 관으로 꾸며진 이 삼층관을 받으소서. 당신은 군주들과 제왕들의 아버지이며, 세계의 주교요,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대리자임을 생각하소서. 주의 명예와 영광이 영원하실지어다.”

 

B) 교황권은 자신들이 죄를 용서할 수 있다는 참람된 주장을 한다.

“하나님 자신도 신부들이 용서해 주거나 용서하기를 거절하는 사제들의 판단에 따라서 행하시며, 신부들의 선언이 선제한 후에야 하나님께서 그것에 의해 판단하신다.” 신부의 존엄성과 의무들, 12, P.27

“교황은 그의 권세가 사람에게서가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율법을 수정할 수 있고 땅 위의 대리자로서 그는 그의 양들을 매고 푸는 가장 큰 권세를 가지고 행동한다.” Ford, p.151

“용서는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임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자주 신부들에게 죄를 고백해야만 하는 것이다.” 1984 12 11일 요한 바오로 2세의 교서 137페이지에서

성경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인간의 위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 2:5. 바울은 이러한 진리를 허물어 뜨리는 적그리스도의 모습에 대해서 좀더 자세한 기록을 남겼다. “(불법의 사람, 적그리스도)는 대적하는 자라 범사에 일컫는 하나님이나 숭배함을 받는 자 위에 뛰어나, 자존하여 하나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하느니라.” 살후 2:4.

 

 

4. 네번째 특징: 작은 뿔과 첫번째 짐승은 정치적 세력이다

 

다니엘 7장의 작은 뿔: “작은 뿔에는 사람(a man)의 눈 같은 눈이 있고 “ 8.

요한계시록 13장의 첫번째 짐승: “온 땅이 이상히 여겨 짐승을 따르고 ... 각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받으니” 3,7.

 

교황청은 강력한 중앙집권적 제도를 가진 도시 국가이며, 정치적 세력이다

 

예언 해석

작은 뿔: 적그리스도 세력을 상징하는 다니엘 7장의 작은 뿔의은 이 세력이 정치적 세력임을 증거해 준다. “은 성경에서 왕권을 상징하므로, 작은 뿔은 국가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는 세력이다. “열 뿔은 ... 열 왕이요 7:24. , 작은 뿔은 왕권과 같은 조직을 가지고 있는 세력이어야 한다. 왕권과 같은 조직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한 사람(a man)”이 작은 뿔로 상징된 세력의 지도자로서 군림한다. 그러므로 작은 뿔은 왕권과 같은 중앙집권적인 조직을 가지고 있고, 한 사람이 조직의 지도자로 군림하는 군주국가의 모습을 가지고 있는 정치적 세력이다.

첫번째 짐승: 계시록 13장의 첫번째 짐승 역시각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를 다스리는정치적 권세를 가졌을 뿐 아니라, 전 세계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세력임에 틀림없다. “온 땅이 이상히 여겨 짐승을 따르고” 3.

 

역사적 증거

피라밋 형태의 강력한 조직을 가지고 있는 교황권의 형태는 강력한 왕권을 연상케 하기에 충분하다. 실제에 있어서도, 로마의 바티칸은 지금도 교황이 군주로서 군림하는 하나의 독립된 국가인 동시에 절대적 군주 국가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 세상의 어떤 나라도 교회 자체가 국가로서 군림하는 형태는 없다. 교황권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의 종교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바티칸은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독립된 나라로서, 현재 전 세계 150여 국가와 대사를 교환하고 있다.

교황권은 세계 정치와 종교계를 감독하고 판단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교황권은 중세기에 천년 이상 동안이나 유럽을 정치적으로 위압하였으며, 16세기초에 일어난 종교개혁운동에 의하여 한 동안 개신교회들에 밀려서 주춤했지만, 지금은 다시 온 세계에 절대적인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교황권은 영토와 민족을 초월하여 영향력을 행사하는 범세계적인 세력이다.

교황권이 유럽 전체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종교암흑시대 동안에, 교황은 유럽 여러 나라의 황제들을 세우고 폐할 정도의 권세를 휘둘렀는데,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수 많은 역사가들의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교황 그레고리 7세의 세력에 반발하였던 신성로마제국의 헨리 4세 황제를 교황이 파문시키자 당황한 헨리 4세는 이탈리아의 카놋사에서 교황에게 용서를 간구하였다조좌호저, 세계사 7. “교황은 최고의 재판장으로 왕과 황제들을 마음대로 폐지시킬 수 있다” 교황 그레고리 1(서기 590~604)의 말

“다른 나라들은 자국의 영토 내에 있는 백성들만 다스렸지만, 교황 로마는 영토와 민족에 관계없이 각 족속과 방언과 나라를 다스리는 범세계적 국가라는 점에서 크게 다르다” Daniel By Ford, 152

 

 

5. 다섯번째 특징: 작은 뿔과 첫번째 짐승은 성도들을 핍박한다

 

다니엘 7장의 작은 뿔: “내가 보니 이 (작은)뿔이 성도들로 더불어 싸워 이기었더니 ...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를 괴롭게 할 것 이며” 22,25

요한계시록 13장의 첫번째 짐승: “또 권세를 받아 성도들과 싸워 이기게 되고” 7

 

교황권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핍박하였다

 

예언 해석

성경 말씀이 뜻하는 바대로, 다니엘 7장의 작은 뿔과 요한계시록 13장의 첫번째 짐승은 모두 성도들을 핍박한 세력이다.

 

역사적 증거

우리는 지나간 중세기의 역사 속에서 교황권이 수백만의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순교시켰던 역사의 장면들을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다. 중세기의 세계사에 대한 지식이 조금이라도 있는 지성인이라면, 수백만의 그리스도인들이 종교암흑시대 동안에 종교재판을 통해서 이단이라는 죄목 하에 잔혹하게 죽어간 이야기를 기억할 것이다.

“로마 교황은 자신이 양심적으로 믿는 신앙 때문에, 로마교회가 강요하는 가르침과 우상숭배를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성서를 높이 쳐들며, 죽음도 불사하면서 죄를 대항하여 피로서 항거한 5천만의 남녀들을 종교암흑시대 동안에 살상한 것으로 추산된다.” H.G. 게이네쓰, 시대의 임박한 종말, 204.

“로마교회는 일찌기 인간 가운데 존재했었던 어떤 제도보다도 더 많은 무죄한 사람들의 피를 흘리게 했다는 사실을 역사에 대한 완전한 지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의문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William Lecky, History of the Rise and Influence the Spirit of Rationalism in Europe, 2 p.35,37

교황권의 그러한 핍박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다음과 같은 신학적 신조에서 비롯된다. “이단자란 누구인가? 이단자란 카톨릭 교회가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것으로 가르치는 특정한 진리를 분명히 알면서도 이를 고집스럽게 반대하고 자기가 원하는대로 믿을 것과 안 믿을 것을 택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으로 그리스도 교회의 신앙을 받아들였다고 공언하는 영세받은 신자이다” M. 뮤럴, 카톨릭 교회의 전통적 해설 4, p.170

1998 5 28,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자신의 사도 서신에서 다음과 같은 천주교회 법령을 발표하였다. “진리 곧 거룩한 카톨릭 신앙을 부인하거나, 의심하거나, 그리스도인 신앙을 완전히 거부하거나, 법에 의하여 경고받은 다음에도 본인의 입장을 바꾸지 않는 자는 출교시킴으로써 이단자 또는 배도자로 처벌해야 한다. 성직자의 경우에도 예외없이 기타 다른 벌금형에 처한다.” 작은 뿔과 첫번째 짐승이 가지고 있는 핍박의 정신은 지금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질문 : 왜 교황권은 중세기에 하나님의 백성을 핍박했나요? 답변 : 종교암흑시대 동안에 교황권은 자신들과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제거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안타까운 사실은 그들의 그러한 사상이 지금도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만일 그들에게 다시 중세기와 같은 군대와 경찰력이 주어진다면, 그들은 또다시 다음과 같은 그들의 신학에 의거하여 핍박을 재개할 것이다. "영적인 검과 물질적인 검 모두가 교회의 권한 안에 있기 때문에 물질적인 검도 교회를 위하여 사용되어야 하며 영적인 검도 교회에 의하여 사용되어야 한다. 비록 물질적인 검은 왕들과 병정들에 의하여 사용되지만, 그것 역시 사제의 뜻과 승낙에 의하여 사용되어야 한다. 공공연히 이단임을 공언하고 말이나 행동으로 다른 사람들을 그릇되게 인도하려고 시도하는 자들은 반드시 출교뿐만 아니라 마땅히 사형에 처해야 할 것이다." Lepicier, De Stailitate et Progressu Ddogmatis, 211, 213

 

 

6. 여섯번째 특징: 작은 뿔과 첫번째 짐승은 1260년 동안의 권세를 누린다

 

다니엘 7장의 작은 뿔: “성도는 그의 손에 붙인바 되어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지내리라.” 25.

요한계시록 13장의 첫번째 짐승: “또 짐승이 큰 말과 참람된 말하는 입을 받고 또 마흔 두달 일할 권세를 받으니라” 5.

 

교황권은 1260 년 동안의 권세를 누렸다

 

예언 해석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또는마흔 두달은 모두 예언적 기간을 나타낼 때에 사용되는 상징적 표현으로서, 적 그리스도 세력인 작은 뿔과 첫번째 짐승이 얼마나 오랫동안 전성기를 구가할 것인지를 나타낸다.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가 얼마나 긴 기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결정적인 단서가 요한계시록 12장에 나와 있다. 요한계시록 12 6절과 14절에는 여자로 표상된 하나님의 참 교회가 사단의 세력이 가하는 핍박을 피하여 깊은 산과 계곡으로 피신하는 장면이 다음과 같이 두가지로 표현되어 있다; “여자가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 광야 자기 곳으로 날아가 거기서 그 뱀(사단)의 낯을 피하여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양육받으매.” 12:14. “여자가 광야로 도망하매 거기서 일천 이백 육십일 동안 저를 양육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예비하신 곳이 있더라.” 12:6. 요한계시록 12:14절에서는 여자가 광야로 피신하여 있는 기간을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라고 말하였는데, 동일한 사건에 대해서 6절은 여자가 광야에 피신하여 있는 기간을 “1260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한 때와 두 때와 반 때 “1260과 동일한 기간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다(한 때와 두 때와 반 때=1260).

그런데한 때와 두 때와 반 때에서(time)”는 얼마나 긴 기간인가? “”(time)는 원어로 “iddan”인데, 이것의 의미는” (year, )이다. 다니엘 11:13에 기록된 같은 표현을 보아서도의 의미를 알 수 있다. “북방왕은 돌아가서 다시 대군을 전보다 더 많이 준비하였다가 몇 때(time) 곧 몇 해(year) 후에 대군과 많은 물건을 거느리고 오리라.” 이 성경절에서(time)”(year)”를 의미하는 상징적 표현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1+2+반년=1260=42달이 된다는 상징적 기간에 대한 예언 해석 공식을 얻을 수 있다(성경에서 언제나 한달은 30, 일년은 360일로 계수됨).

월간지, 살아남는 이들에서 이미 여러번 공부했던 것처럼, 어떤 예언이 상징적인 표현으로 묘사되었을 경우, 그 상징적 예언 가운데 있는 기간을 계산할 때는 1일을 1년으로 환산해야 한다(1=1, 에스겔 4:4과 민수기 14:34 참조).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에 나오는 상징적 기간인한 때와 두 때와 반 때, 1260, 그리고 42은 모두 실제에 있어서 1260년이라는 긴 기간을 의미한다는 성서적 결론을 내릴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작은 뿔과 첫번째 짐승이 1260년 동안 권세를 가지면서 성도들을 핍박하며 진리를 변조시킬 것에 관한 예언을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 전체에 7번이나 반복하여 기록하여 두심으로써, 당신의 백성들을 적그리스도의 기만과 공격으로부터 보호하고자 하셨다.

 

1. 다니엘 7:25 : “성도는 그의 손에 붙인 바되어,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지내리라.”

2. 다니엘 12:7 : “한 때, 두 때, 반 때를 지나서, 성도 의 권세가 다 깨어지기까지.”

3. 요한계시록 11:2 : “저희가 거룩한 성을 42달 동안 짓밟으리라.”

4. 요한계시록 11:3 : “저희가 굵은 베옷을 입고, 1260 일을 예언하리라.”

5. 요한계시록 12:6 : “그 여자가 광야로 도망하매, 거 기서 1260일 동안 ... 있더라.”

6. 요한계시록 12:14 : “그 여자가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 광야 자기 곳으로 날아가 거기서 그 뱀의 낯을 피하여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양육받으매.”

7. 요한계시록 13:5 : “또 짐승이 큰 말과 참람된 말하는 입을 받고, 42달 일할 권세를 받으니.”

 

역사적 증거

이 예언도 교황권에게 역사적으로 정확하게 이루어졌는가? 그렇다. 우리는 이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 중세기의 역사를 들추어 보아야 한다. “서기 538년도에, 로마 교회의 감독은 세상 모든 교회들의 머리가 되었고, 이단자들을 처벌하는 자가 되었으며, 또한 그 해에 1260년 간의 교황의 통치가 시작되었다” History of the reformation by J.A. Wylie.

1260년의 기간은 언제 시작해서 언제 마쳐지는 기간인가? 먼저, 교황권이 언제, 어디서 일어나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로마제국이 열나라로 분열한 이후, 즉 서기 476년 이후에 그 세력이 강성해졌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476년 이후 어느 때에 로마교회가 권세를 장악하는 계기가 만들어 졌는가? 서기 533년은 매우 의미심장한 해이다. 이 해에, 저스티니안 황제는 로마 교황권에게 강력한 권세를 준다는 조서를 반포함으로써, 교황권이 교회의 머리로서 모든 성도들을 장악할 수 있는 권한을 공인해 주었는데, 우리는 이 사실을 바로 그 다음 해(서기 534)에 편찬된 저스티니안 법전에서 확인할 수 있다.

1260년 기간의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교황권은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운동을 만나게 되었고, 프랑스 혁명의 여파를 통하여 결정적인 타격을 입게 되었다. 1260년이라는 운명의 기간이 끝마쳐지는 정확한 해인 1798년에 이르자, 놀라운 사건이 일어나게 되었는데, 당시 프랑스 혁명정부의 명령을 받은 버티어 장군이 군대를 이끌고 로마 교황청으로 쳐들어가서 교황 피우스 6세를 그의 권좌로부터 끌어내리는 사건이 일어났던 것이다. 교황 피우스 6세는 말할 수 없는 수모 속에서 로마로부터 프랑스의 감옥으로 압송되어 투옥된 후, 감옥 속에서 병으로 옥사하였으며, 교황권의 모든 재산은 압류되었는데, 바로 그 해가 1260년의 종점인 1798년인 것이다. 참으로 놀라웁게도, 요한계시록 13장에는 1260년이 끝나는 시점에 발생되는 교황권의 종말의 모습에 대해서도 이렇게 예언되어 있다. “누구든지 귀가 있거든 들을지어다 사로 잡는 자는 사로 잡힐 것이요 칼로 죽이는 자는 자기도 마땅히 칼에 죽으리니 13:9,10. 서기 538년에 교황권의 권세가 확립됨으로써 시작된 1260년의 예언은 1798년에 버티어 장군의에 의하여 교황권이 붕괴됨으로써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게 성취되었다. “1798년 로마에서의 한 불란서인 살해 사건은 불란서인들에게 영원의 도시, 로마를 정복하고 교황의 세속적 권력에 종지부를 찍을 구실을 마련해 주었다. 늙은 교황은 발렌스로 유배당했다교회역사, 24

 

 

7. 일곱번째 특징: 작은 뿔은 하나님의 십계명을 변경시키고자 하였다

 

다니엘 7장의 작은 뿔: “그가 또 때와 법을 변개코자 할 것이며 성도는 그의 손에 붙인바 되어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지내리라” 25.

 

교황권은 종교 암흑 시대 동안에 십계명을 변경시켰다

 

예언 해석

요한계시록 13 6절에는짐승이 입을 벌려 하나님을 향하여 훼방하되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다니엘 7장에는 이 예언에 대한 좀더 자세한 묘사가 기록되어 있다. 적그리스도 세력은 종교암흑시대 동안, 하나님의인 십계명을 변경시켰는데, 특히, 시간과 관련된 계명을 변경시킴으로써, 하나님을 훼방하였다.

 

역사적 증거

교황권은 자신들에게 하나님의 법을 변경하거나 삭제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고 믿는 믿음을 카톨릭 백과사전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여 두었다. “베드로와 그의 후계자(: 교황을 뜻함)들은 교훈이나 금지에 관한 율법을 부가할 수 있는 권세를 가졌음과 아울러, 이러한 율법들로부터 면제해 주는 권세도 있고, 필요하다면 폐지시키는 권세도 있다 ... 이러한 사법상의 권한은 심지어 죄까지라도 용서할 수 있는 권세를 포함하고 있다.” Pope, The Catholic Encyclopedia, vol. XII, 265, col. 2. “카톨릭교회는 안식일을 주일 중 일곱째 날인 토요일에서 첫째날인 일요일로 변경시킨 후, 십계명의 네째 계명을 고쳐서 일요일을 주일로 지키라고 명하였다카톨릭 사전 4, 153.

이러한 신학적 배경하에서 카톨릭 교회는 자신들의 교리문답과 교리책에서 두번째 계명을 삭제하였는데, 그 이유는 십계명에 기록되어 있는우상을 만들거나 섬기지 말라는 두번째 계명은 그들이 숭배하는 마리아 상이나 각종 성자들의 상을 정죄하기 때문이다. 두번째 계명을 빼버리는 대신에 열번째 계명을 둘로 나눔으로써, 10개의 계명을 가진 십계명의 형태를 유지시켰다. 이렇게 십계명을 변경시킴으로써, 카톨릭 교회가 가르치는 십계명에는 우상숭배에 대한 계명이 없고, 탐심에 대한 계명이 두개로 중복되어 있다. 또한 네번째 계명인 제칠일 안식일(토요일)을 제일일(일요일)로 변경하여 준수하기 시작하였다. 천년 이상 동안이나 교황권은 하나님의 법과 때(시간)를 변경시키고자 노력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신실한 백성들을 통하여 당신의 법을 보존해 오셨다. 하나님의 법에 대한 사단의 끊임없는 공격에도 불구하고,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선언은 오늘날까지 불변하며 유효하다( 5:18). 종교개혁의 선봉이었던 마틴 루터는 교황권이 하나님의 십계명을 변경시킨 문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후서 2 4절에하나님이나 숭배함을 받는 자 위에 뛰어나 자존하여 하나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하느니라고 기록하였던 그 존재가 여기에 있다. 적그리스도인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있는데, ... 그는 하나님의 법을 변경하였으며, 하나님의 계명 위에 자신이 만든 계명을 높였다 ... 우리는 여기서 교황권이 진짜 적그리스도의 권좌에 앉아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는 바이다.” The Prophetic Faith of Our Fathers, vol.2, P.291,256

여기서 잠깐, 교황권이 하나님의 법을 변경시키게 된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자. 살아남는 이들 제14 22페이지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태양신을 섬기는 이교도였던 로마 제국의 콘스탄틴 황제는 그리스도인들의 지지를 얻음으로써 자신의 정권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그리스도 교회로 개종하면서 기독교회를 로마의 국교로 삼았는데, 이것을 기점으로 해서 수많은 정치인들과 이교도들이 황제의 뒤를 따라 그리스도 교회 안으로 밀려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기독교회로 새로 개종한 황제는 이교도들의 반발을 막기 위하여 그들의 풍습과 전통인 우상을 만들어서 신전에 세우는 관습과, 그들이 태양신에 예배드리는 날을 기독교회가 수용해 줄 것을 요구하였는데, 교황권의 지도자들은 황제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친히 기록하신 십계명을 변경시킴으로써 황제의 요구를 수락하였던 것이다.

다음에 나오는 교회 역사가 본 모쉐임의 증언은 그 당시의 교회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교회의 감독들은 이전에 희랍과 로마의 이방 종교를 믿던 사람들이 자신의 신들에게 존경과 신앙심을 표현하기 위해서 마련하였던 종교 의식들과 제도들을 조금씩 고쳐서 그리스도 교회 안으로 끌어 들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새로 개종한 이교도들은 자신들의 조상 때부터 전래되어 온 의식들이 그대로 존재하는 것처럼 느끼게 되고, 그리스도와 순교자들도 자신들이 섬기던 신들과 같은 방법으로 숭배되는 것으로 생각하게 될 것이며, 그 결과 수많은 이교도들이 좀더 쉽게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라고 교회 지도자들은 생각하였다 ... 이교도였던 콘스탄틴 황제가 그리스도 교회로 개종하자마자, 곳곳에 굉장한 성전들이 즐비하게 서게 되었는데, 성전마다 여러가지 그림들과 조각된 우상들로 단장함으로써, 외관상으로나 내면적으로 이교도들의 신전과 흡사한 것이 되었다.” J. L. Von Mosheim, Ecclesiastical History, I, 369.

실제로, 8세기에 이르러서는 거의 모든 카톨릭 교회들이 각종 성상들로 가득 차게 되었고, 이것들에 입맞추고 기도하며, 분향하고, 절하는 일이 극에 달해서, 오히려 우상을 섬기지 않는 회교도들로부터 우상숭배자라는 조롱을 받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이러한 배도의 길을 걷던 로마교회는 결국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는 둘째 계명을 하나님의 법에서 삭제한 다음에 성경에 없는 천주 십계를 만들 수 밖에 없었다(천주교 교리 제1, 28절 참조).

 

 

8. 여덟번째 특징: 첫번째 짐승은 죽게 되는 상처를 입었다가 회복된다

 

요한계시록 13장의 첫번째 짐승: “그의 머리 하나가 상하여 죽게 된 것 같더니, 그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으매 온 땅이 이상히 여겨 짐승을 따르고” 3

 

교황권은 1798년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다가 회복되었다

 

예언 해석

이 장면은 첫번째 짐승이 누린 1260년의 권세가 끝났다가 부활하는 장면에 대한 예언인데, 짐승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때에는 다음과 같이 3가지 단계를 거치면서 자신이 1260년 동안에 누렸었던 엄청난 권세와 힘을 회복함으로써, 온 세상이 그를 따르게 된다; 1) “그의 머리 하나가 상하여 죽게 된 것 같더니”, 2) “그 죽게 된 상처가 나으매”, 3) “온 세상이 이상히 여겨 짐승을 따르고” 3.

사도 요한은 요한계시록 13장에서 첫번째 짐승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장면을 반복하여 강조하였다. 10절에, 첫번째 짐승이 1260년 동안 성도들을 핍박한 후에 죽게 되는 상처를 받는 장면을사로 잡는 자는 사로 잡힐 것이요 칼로 죽이는 자는 자기도 마땅히 칼에 죽으리니라고 묘사하였고, 12절에는 첫번째 짐승이 마지막 시대에 부활하여 다시 권세를 누리게 되는 장면을땅에 거하는 자들로 처음 짐승에게 경배하게 하니 곧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은 자니라” 고 기록하였다.

 

역사적 증거

1) “그의 머리 하나가 상하여 죽게 된 것 같더니”: 역사는 교황권이 1798년에 죽게 되는 상처를 입었음을 증언하고 있다. “1798년도 2 10일에 불란서 버티어 장군이 로마시에 입성하여 교황을 체포하였다대영백과사전 1941년판 The Church History, p.24 (죠셉 릭커비 신부의 저서, 현대 교황 중에서). 1798년은 1260년이라는 운명의 기간이 끝마쳐지는 해였다. 그 당시 프랑스 혁명정부의 명령을 받은 버티어 장군이 군대를 이끌고 로마 교황청으로 쳐들어가서 교황 피우스 6세를 그의 권좌로부터 끌어내리는 사건이 일어났던 것이다. 교황 피우스 6세는 말할 수 없는 수모 속에서 로마로부터 프랑스의 감옥으로 압송되어 투옥된 후, 감옥 속에서 병으로 옥사하였으며, 교황권의 모든 재산은 압류되었는데, 바로 그 해가 1260년의 종점인 1798년인 것이다.

2) “그 죽게 된 상처가 나으매”: 치명적 상처를 입었던 교황권이 놀라웁게도 회복되어 다시 온 세상의 주목을 받는 존재로 성장하였다. 세계1차대전 직전에 이태리의 독재자였던 뭇소리니는 교황권을 독립된 국가로 인정하고 그들에게 땅과 재산을 돌려주는 라테란 조약을 1929 2 12일에 맺음으로써, 드디어 교황권은 죽게 된 상처를 회복하였다. Los Angeles Times, 1929 2 12일자에서는죽게 된 상처가 나음이라는 특집기사를 실음으로써, 놀라운 예언의 성취를 온 세상에 보도하였다.

3) “온 세상이 이상히 여겨 짐승을 따르고”: 그 이후로 교황권은 서서히 성장하더니, 1965 10 4일에는 교황 바오로 6세가 드디어 미국을 방문하여 존슨 대통령에게 축복 기도를 드렸으며, 양키즈 야구 경기장에서 미사를 드리는 모습이 온 세상에 중계되는 위치에 올라섰다.

1979년에 이루어진 교황의 미국 방문에 대하여 미국의 언론은 다음과 같은 기사를 실었다. “교황이 미국을 방문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러나 ... 이제 역사상 최초의 폴란드 교황 바오로 2세가 그의 놀라운 선거를 치룬지 1년 후에 온 세계의 하늘에 빛나는 별로서 만 7일간을 우리와 함께 지내겠다는 약속 아래 우리 미국에 오게 되었다. 정치가들은 앞을 다투어 그를 맞을 준비를 하고 있다. 6개 도시의 시장들은 그들의 업무를 실제적으로 중단하고 교황을 맞이할 행사를 열렬하게 준비하고 있다워싱턴 스타지, 1979 9 18.

세계 각 나라들이 바티칸에 그들의 대사관을 두고 있을 뿐 아니라, 심지어는 교황권의 핍박을 피하기 위하여 신대륙으로 와서 온갖 고생을 했던 청교도들의 후예인 세계 최강국, 미국까지도 바티칸에 대사를 파견함으로써, 서로 손을 잡기 시작하는 또 하나의 놀라운 예언이 성취되기 시작하였다. 또한 1980년대 말엽부터 시작된 동구권의 몰락과 소련의 붕괴 뒤에는 교황권과 미국의 긴밀한 협조가 있었다는 사실이 타임지에 보도되어 세상을 놀라게 하였다.

 

 

9. 아홉번째 특징: 첫번째 짐승의 이름의 수는 666이다

 

요한계시록 13장의 첫번째 짐승: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 있는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보라 그 수는 사람의 수니 666 이니라” 17,18

 

교황의 공식 이름의 수를 세어보면 666이 된다

 

예언 해석

이 수수께끼 같은 예언의 의미를 어떻게 풀 수 있을까?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를 가지고 첫번째 짐승의 이름에 담겨져 있는 숫자를 세어보는 자들은 짐승의 이름의 수가 666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천주교회의 잡지인, “Our Sunday Visitor” 1915 4 18일자에는 교황의 공식 명칭은 교황이 특별한 행사 때에 쓰는 삼층관에 새겨져 있는 “Vicarius Filii Dei”인데, 그 의미는하나님의 아들의 대리자이라는 기사가 발표되었다. 그런데 라틴어는 각 철자마다 고유한 수치가 주어져 있으므로, “Vicarius Filii Dei”라는 교황의 공식 이름이 가지고 있는 철자의 수치를 합산하여 그 결과가 666이 되면, 바로 그것이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가 된다.

666이라는 숫자 자체가 짐승의 표는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짐승의 정체를 드러내기 위하여 주신 짐승의 9가지 특징 중에 하나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서, 666짐승의 이름의 수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므로 어떤 물건이나 컴퓨터의 바코드의 숫자의 합이 666이 된다고 해서 그것을 짐승으로 볼 수 없다. 또한 성경은 짐승의 이름의 수를 사람의 수라고 설명하고 있다는 사실도 잊지 말아야 한다. “짐승의 이름의 수를 세어 보라 그 수는 사람의 수니 육백육십육이니라” 계 13:18.

 

 

결론

지금까지 우리는 다니엘 7장의 작은 뿔과 요한계시록 13장의 첫번째 짐승은 모두 교황권을 지목한다는 사실을 역사를 통하여 확인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히틀러나 모슬렘 교회, 그리고 공산주의나 컴퓨터를 짐승이라고 믿고 있지만, 그들 중 어떤 것도 성경이 말하는 9가지 특징을 모두 만족시키지는 못한다. 지구 상에 존재하는 오직 한 세력만이 9가지 특징을 완전하게 만족시킬 수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 본 교황권이다.

1) 교황권은 서기 476년 이후에 로마제국이 열나라로 분열된 지역인 서부 유럽에서 세력을 확보했으며, 2) 교황권은 정치적인 도시 국가이고, 3) 교황권은 종교적인 교단이며, 4) 교황권은 크고 참람된 말 즉,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시하고, 스스로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세를 가지고 있다고 공공연하게 말했으며, 5) 교황권은 하나님의 법을 변경시켰고, 6) 교황권은 중세기에 성도들을 박해했으며, 7) 교황권은 1260년 동안 권세를 누렸고, 8) 교황권은 죽게 되는 상처를 입었다가 다시 부활하여서, 이제는 온 세계에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는 세력이 되었으며, 9) 교황권을 대표하는 교황의 공식 이름의 수는 666이다.

교황권에 대한 성경의 예언은 교황권이 다시 회복되는 장면에서 끝나지 않는다. 요한계시록 13장 후반에는 세상 역사의 종말에 첫번째 짐승인 교황권이두번째 짐승과 손을 잡고 엄청난 핍박을 가하는 장면이 전개된다. “내가 보매 또 다른 짐승(두번째 짐승)이 땅에서 올라오니 새끼 양같이 두 뿔이 있고, 용처럼 말하더라. 저가 먼저 나온 짐승의 모든 권세를 그 앞에서 행하고 땅과 땅에 거하는 자들로 처음 짐승에게 경배하게 하니 곧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은 자니라 ... 칼에 상하였다가 살아난 짐승(첫번째 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라 하더라 ... (두번째 짐승)가 권세를 받아 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그 짐승의 우상으로 말하게 하고 그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요한계시록 13:11~15 “에서 올라오는 새끼 양같은 짐승, 그러나 결국에는용처럼 말하는 무서운 세력, 이 두번째 짐승은 누구이며 그것은 첫번째 짐승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다음 기사에서는 이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 살펴 보기로 하겠다.

 

사탄이 그리스도인에게 기적을 주는 이유

성경에 계시된 가장 분명한 마지막 시대의 징조 중의 하나는, 모든 영혼들의 운명을 종결지을 최후의 전쟁을 위해서, 사탄의 세력이 가시적으로 출현하는 것이다.

성경은 마지막 시대에 사단은 세상 전체를 자기 진영으로 끌여 들이는 기만적인 작전을 펼치기 위해서 온갖 방법을 동원할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사도 요한은, “마귀가 자기의 때가 얼마 못 된 줄을 알므로 크게 분내어 ... 내려갔”다고 기록했다(계 12:12). 지구 역사 전체를 통하여 준비해온 이 마지막 전쟁을 위해서, 사단은 정치적 세력과 종교적 힘을 모두 이용할 것이다. 머리가 비상한 사단은 사람들을 구원받지 못하게 하는 전략을 세워왔다. 그의 최종적 목표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하늘에 가지 못하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그들이 계속해서 율법을 범하는 죄를 짓게 만들면 되기 때문이다.

이 최후의 기만을 위한 그의 전략은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하늘의 권위에 도전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첫째로, 모든 교파에 속해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율법을 범하면서도 아무런 가책을 느끼지 못하도록 만들어야 하며, 둘째로는 하나님의 뜻 안에 살고 있지 않으면서도 자신이 행하는 기적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하신다는 강력한 감정적 확신을 갖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계획을 성취하기 위해서, 사탄은 신앙 문제에 있어서 성경을 최종적인 권위로 받아들이던 전통적 견해를 무너뜨리고, 그에 걸맞는 다른 권위를 확립하려고 하였다. 사탄은 모든 교파 간에 존재하는 어떠한 종류의 견해 차이도 극복할 수 있는 전략을 세웠는데, 그러한 전략을 통하여 사단은 자신이 원하는 방향대로 전체 그리스도인들을 유도하려고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다음과 같이 경고하고 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 7:21~23. 주님께서 주신 이 경고의 의미를 잘 생각하여 보자. 이 성경절에 나오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이라고 자처하고 있으며 심지어 예언하고 병고치며 귀신을 쫓아내는 일에 엄청난 능력을 행사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을 모른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리스도의 능력을 힘입어 그런 영적 은사들을 행사한 것이라고 말 할 수 없다. 그렇다면 누가 그들에게 이러한 초자연적 능력을 주어서 그런 기적을 행할 수 있도록 하였을까? 그러한 능력이 나올 수 있는 근원은 오직 하나님과 사단 이외에는 없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 그들이 불법의 창시자 사단의 능력으로 병을 고치고 예언했던 것임에 틀림없다.

이 말씀은 마지막 때에 성령의 은사를 받은 것처럼 보이는 기만적인 기적들이 있을 것임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 외부적으로 그것들은 정말 참된 은사와 유사하게 보일 것이며, 신앙적 열성이 충만한 분위기 가운데서 예수의 이름으로 행해질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요한복음 16:13)라고 하셨다. 성령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모든 진리 또는 모든 것”은 죄를 지적하시는 성령의 사업부터 시작된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요 16:8). 어떤 사람도 자신이 율법을 범한 일에 대한 성령의 책망을 받고 십자가로 인하여 용서와 성화의 경험을 하지 못한다면, 진짜 성령의 충만함을 경험할 수 없다. 거짓말, 도둑질, 간음.... 등을 행하면서도 성령 충만함을 바라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아니라 참람된 요구이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마 12:31,32. 사도 누가는 성령을 받을 수 있는 원칙에 대해서 분명하게 선언하였다.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를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행 5:32. 하나님께서는 진리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성령을 주신다.

이 성경절들을 통하여 우리는 왜 기적을 행하였던 자들을 예수께서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배척해 버리셨는지 알 수 있다. 그들은 하늘의 능력을 요구하였지만, 하늘 아버지의 뜻과 그분의 율법을 거절하는 삶을 살았으므로, 그들은 성령의 능력을 받지 못하고, 사단의 속임을 당한 것이었다.

성령의 은사를 구하기 전에, 성령의 9가지 열매인 사랑, 희락, 화평, 오래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가 자신의 성품과 생애 속에 충만하게 맺히고 있는가 생각하여 보자. 성령의 열매들이 충만하게 맺히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성령의 능력이 부어질 수 있다는 것은 사단의 속임수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하나님의 진리를 고의적으로 부인하거나 거절하는 사람들에게 성령의 능력과 은사가 내려질 수 없다. 만일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하고 부인하는 사람도 성령의 침례를 받을 수 있다면, 어떤 사람들이 성령의 은사와 능력을 받을 수 없겠는가? 성령의 은사와 능력이 그것을 받아서 이기적으로, 무례하게 사용할만큼 변화되지 않은 자들에게도 주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방언이 신앙적인 만족감을 주기 위하여 내려진다고 생각하는가? 한국 사람이 한국 청중들에게 설교하는데, 방언을 사용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한국 사람이 한국사람들에게 설교하는데 통역을 두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방언을 하는 사람 자신도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알지 못하며 듣는 사람들도 이해하지 못하는 묘한 상황이 성경적으로나 합리적으로 납득이 되는가?

그대는 하나님의 기적을 간구하는 것만큼, 하나님의 진리를 중요한 것으로 생각하는가? 그대는 예수를 사랑할 뿐만 아니라 예수의 진리와 계명을 사랑하고 순종하는가? 그대 자신의 신앙적인 경험이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하지 않을 경우, 그대는 자신의 경험을 부인할 만큼 성경 말씀의 권위를 인정하는가?

방언은 현대 기독교회에서도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있어서 꼭 필요한 은사이다. 만약 그대가 방언의 은사를 받았다고 느낀다면, 그 은사를 주장하기 전에 기도와 성경연구를 통하여 그 은사의 진실성을 먼저 점검해야 할 것이다. 거짓 선지자와 참 선지자가 있는 것처럼, 거짓 방언과 참 방언이 있으며 이 모든 것들의 진실성은 성경으로 판단되어져야 할 것이다.

문 : 성령을 받는 순간에는 그 능력에 의하여 이성을 잃고 쓰러져서 뒹굴게 됩니까?

답 : 우리는 성령이 임하는 사람이 어떤 태도를 나타내게 되는지에 대하여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영의 침을 당한 사람은 땅에 뒹굴며 방언을 중얼거려야 한다”는 사상은 하나님의 신을 모욕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는 목적은 그의 형상을 복원하기 위해서이지, 인간의 존엄성을 잃게 하고 자신을 제어할 수 있는 이성을 잃게 하기 위함이 아니다.

구약시대에 갈멜산에서 이방신의 예언자들은 제단 주위를 뛰며 신음소리를 내며 소리를 질렀다. 그들은 예언을 하면서 자신들의 몸을 자학하였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엘리야는 조용히 무릎을 꿇고 단순한 기도를 올렸다.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고전 14:33. 우리가 성령을 받을 때, 우리 자신을 제어할 수 없게 된다는 생각은 성경 말씀과 어울리지 않는다. “예언하는 자들의 영이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나니” 고전 14:32. 예수께서 갈릴리 맞은 편 거라사인의 땅에서 귀신들린 사람을 고치셨을 때에 그 고침을 받은 사람은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예수의 발아래 앉”아 있었다(눅 8:35). 하나님께서는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고 초청하신다.

이 글을 읽는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당신은 그런 말을 할 수 있습니까? 나는 여러해 동안 방언을 하였고 이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내가 알고 있습니다”라고 반문할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느낌으로 결론을 내려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사단은 우리의 감정과 느낌을 통하여 접근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되어야 한다.

방언을 자주 하였던, 열심 있는 오순절파 교인인 나의 한 친구는 방언에 관하여 공부한 후 자신의 방언이 정말로 올바른 영으로부터 왔는지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진정한 마음으로 “주여 만약 이것이 당신의 뜻이고, 만약 내가 참 방언의 은사를 받지 못했다면 이것을 내게서 제하여 주소서”라고 기도하였다. 그가 내게 말하기를 그 시간으로부터 무아경의 중얼거림은 다시 그에게 오지 않았다고 하였다. 진정한 기독교인이라면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모든 생각과 행함들을 하나님의 제단 위에 올려 놓고 포기할 줄 알아야 하며, 이것들이 어떠한 인기를 가지고 있거나, 얼마나 많은 기독교인들이 좋아하는지에 상관없이 진리의 말씀에 일치하지 않는 모든 것들을 버릴 줄 알아야 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 눅 16:15.

 

죽은 사람들은 무덤 속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죽은 자들은 부활의 순간까지 무덤 속에서 어떤 상태로 있을까? 성경은 죽음 후의 상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A) 죽음 이후의 상태

1. 자식이 잘되고 못되는 것도 전혀 느끼지 못할 정도로 현실과 완전히 단절된 상태이다 : “그 아들이 존귀하나 그가 알지 못하며 비천하나 그가 깨닫지 못하나이다.” 욥기 14:21

2. 일체의 감정과 의식이 없다 : “죽은 자는 아무 것도 모르며.” 전도서 9:5,6.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plan, 계획)가 소멸하리로다.” 시편 146:4

3. 아무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는 무활동의 상태이다 : 전도서 9:10

4. 고통도 느끼지 못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찬양할 수도 없는 무감각의 상태이다 : “사망 중에서 주를 기억함이 없사오니 음부(무덤, grave)에서 주께 감사할 자가 누구리이까시편 6:5. “내가 무덤에 내려갈 때에 나의 피가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어찌 진토가 주를 찬송하며 주의 진리를 선포하리이까.” 시편 30:9. “죽은 자가 여호와를 찬양하지 못하나니 적막한데 내려가는 아무도 못하리로다.” 시편 115:17. “음부가 주께 사례하지 못하며 사망이 주를 찬양하지 못하며 구덩이에 들어간 자가 주의 신실을 바라지 못하되 오직 산 자 곧 산 자는 오늘날 내가 하는 것과 같이 주께 감사하며 주의 신실을 아비가 그 자녀에게 알게 하리이다.” 이사야 38:18,19.

 

B) 잠이라고 불리우는 죽음 이후의 상태

성경은 위와 같은 죽음 이후의 상태를”(sleep) 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러한 성경의 단순한 표현은 죽음에 대하여 일어날 수 있는 여러가지 다른 이론들을 잠재우고 있다.

다니엘은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하여 예언하면서, 흙으로 돌아간 죽은 자들이 잠에서 깨어 날 것이라고 말했다. “그 때에 네 백성 중 무릇 책에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을 얻을 것이라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다니엘 12:1,2.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저자들이 죽음을 잠이라고 말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은 죽은 자의 상태를 가장 완전하게 묘사할 수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몹시 피곤에 지쳐서 밤에 잠자리에 누으면, 눕자 마자 깊이 잠들게 되는데, 이러한 경우에 다음 날 아침에 깨어날 때까지의 시간은 마치 한 순간이 지난 것처럼 느껴지게 된다. 그는 자기가 잠든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를 전혀 모르는 상태로 깊은 무의식 세계 속에서 잠을 잔 것이다. 죽음이라고 불리우는 잠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성경이 죽음을 잠이라고 부르는 또 하나의 이유는, 죽음은 마치 잠과 같아서 시간과 공간과 주변 사물을 전혀 의식할 수 없으며, 아침이 되어 잠에서 깨어나는 것처럼, 언젠가는 죽음이라는 잠에서 깨어나 부활할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죽음을의 동의어로 사용한 경우가 66번이나 기록되어 있는데, 다음에 열거하는 성경의 위인들은 모두 죽음을으로 표현하였다;

: 욥기 3:13 ; 7:21 ; 14:12 ; 17:16

모세 : 신명기 31:16

다윗 : 시편 13:3 ; 사무엘하 7:12 ; 열왕기상 1:21, 2:10

솔로몬 : 열왕기상 11:43

예레미야 : 예레미야 51:39,57

다니엘 : 다니엘서 12:2,13

예수 그리스도 : 마태복음 9:24 ; 마가복음 5:39 ; 누가복음 8:52 ; 요한복음 11:11

마태 : 마태복음 27:52

베드로 : 베드로후서 3:4

누가 : 사도행전 7:60, 13:36

바울 : 고린도전서 11:30, 15:6,18,20 ; 데살로니가전서 4:13~15, 5:10

 

영감을 받은 성경의 기자들이 가장 자주 언급한 죽음의 성격은, 죽으면 아무 것도 모르는 무의식 상태가 된다는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계 뿐만 아니라 여타의 모든 종교계에 공존하는 대표적인 사상은죽음 이후에도 생명이 있다는 가르침인데, 이러한 가르침은 성경의 어느 곳에서도 발견할 수 없는 사상이다. 중세기 때에 이방 종교인들이 믿고 있는 가르침이 그리스도 교회에도 스며 들어왔던 것이다.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plan, 계획)가 소멸하리로다고 말했던 시편의 말씀은 죽음을 매우 단순하고도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다(시편 146:4). 솔로몬도 죽음에 대한 시편의 기록에 다음과 같이 동의하고 있다. “무릇 산 자는 죽을 줄을 알되 죽은 자는 아무 것도 모르며 다시는 상도 받지 못하는 것은 그 이름이 잊어버린 바 됨이라 그 사랑함과 미워함과 시기함이 없어진지 오래니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에 저희가 다시는 영영히 분복이 없느니라 ... 무릇 네 손이 일을 당하는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어다 네가 장차 들어갈 음부(무덤)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전도서 9:5,6,10.

죽음 이후의 상태에 대한 사람들의 편견과 선입관은 너무나 깊이 뿌리 박혀 있기 때문에, 매우 분명한 성경 말씀을 눈 앞에서 읽어주어도 그 말씀을 받아 들이지 않는 경향이 있다. 만일 솔로몬이 다음과 같이 말한 사실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고 가정한다면, 죽음에 대한 모든 논쟁은 이미 오래 전에 확실하게 끝났을 것이다. “그 사랑함과 미워함과 시기함이 계속될 것이니 네가 장차 들어갈 음부에는 일도 있고 계획도 있고 지식도 있고 지혜도 있음이니라.” 누가 감히 그러한 성경절에 맞서서 자신의 주장을 펼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정말 믿기 어려운 일들이 기독교회 안에서 펼쳐지고 있는데, 성경에는 그러한 기록이 전혀 없을 뿐아니라, 오히려 그와 정반대되는 사실에 대해서 거듭 거듭 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믿기 원하는 것만을 고집하고 있다. 죽음에 대한 진리를 증언하고 있는 수 많은 성경절들을 보면서도, 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유교와 불교에서 가르치는 유전을 맹목적으로 따르고 있다.

죽음에 대한 진리를 다시 한번 읽어 보자! “음부(무덤)가 주께 사례하지 못하며 사망이 주를 찬양하지 못하며 구덩이에 들어간 자가 주를 찬양하지 못하며 구덩이에 들어간 자가 주의 신실을 바라지 못하되 오직 산 자 곧 산 자는 오늘날 내가 하는 것과 같이 주께 감사하며 주의 신실을 아비가 그 자녀에게 알게 하리이다이사야 38:18,19. 만일 죽은 의인들이 자신들이 죽는 순간에 하늘나라로 인도된다면, 그들은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겠는가? 다윗은 죽음에 대한 진리를 이렇게 기록하였다. “죽은 자가 여호와를 찬양하지 못하나니 적막한데 내려가는 아무도 못하리로다시편 115:17.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함이 없사오니 음부에서 주께 감사할 자가 누구리이까?”시편 6:5.

C) 사도 바울의 장례식 설교

신문에 가끔 실리는 장례식의 부고 광고문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글을 보게 된다. “홍길동 님께서는 향년 70세의 나이로 1998 1 16 0 55분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천국으로 가셨기에 이에 부고합니다.” 또한 장례식장에서도 이와 비슷한 설교들이 흘러 나오고 있는데, 형체도 없는 죽은 사람의 영혼이 훨훨 날아서 하늘로 올라갔으니, 후에 하늘에 가서 다시 만날 수 있다고 위로하는 목사님들의 설교를 듣게 된다. 그런데 과연 신문에 나오는 부고문이나 장례식장에서 쉽게 들을 수 있는 전형적인 장례사들은 성경이 말하는 진리와 일치하는가? 정말로 죽은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아들 딸들은 하늘로 올라갔는가? 이 질문에 대한 확실한 대답을, 우리는 데살로니가전서 4장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장례식 설교에서 찾을 수 있다.

데살로니가전서 4:16~18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장례식 설교에서, 바울은 유가족들을 위로하는 말씀으로 그의 설교를 끝맺는다. “그러므로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 우리는 데살로니가 전서 4장에 나오는 바울의 설교만이 유가족들에게 완전하고도 참된 위로를 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그러면 이제, 바울의 장례식 설교문을 함께 읽어보도록 하자.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그러므로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16~18.

여기서 바울은 하늘에서 예수님과 함께 있을 수 있는 방법과 수단을 말하고 있다. 그의 설교 가운데 나오는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란 말을 쉽게 간과하지 말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그 말은이런 방법을 통해서만 주와 함께 있을 수 있다라는 뜻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주님과 함께 있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과 수단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성도들의 부활을 제시한 다음에, 유가족들에게 말하기를그러므로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고 말했던 것이다. 사람이 죽었을 때에 어떤 보이지 않고 만질 수 없는 연기같은 형체가 몸을 떠나서 천국에 가거나 지옥으로 떨어진다는 식의 설교는 유가족들에게 아무런 위로가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도 어긋나는 설교이다. 사랑하던 사람을 사별했을 때, 그가 하늘나라에 먼저 가서, 지상에 남겨두고 온 가족들이 세상에서 겪는 온갖 마음 아픈 상황들을 내려다 보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유가족들에게 참된 위안을 가져다 줄 수 있는가? 바울은 사람이 죽은 후에 주님과 함께 있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을 설명하면서, 예수님의 다시 오심과 부활을 지적하였던 사실을 기억하도록 하자.

바울의 말은 죽음과 무덤이 끝이 아니라는 영광스러운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바울은 유가족들에게 죽음의 잠으로부터 깨어나는 부활을 말하면서 위로하였던 것이다. 의인들은 불멸의 몸을 선물로 받을 것인데, 그 일은 순식간에 일어날 것이다.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고전 15:51~53. 모든 죽은 자들은 완전한 무의식 세계 속에서 잠을 자다가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는 최종 선고를 듣기 위해서 일어날 것이다. 그들이 1000년 전에 잠들었든지 또는 예수께서 오시기 5분 전에 잠들었든지 간에, 그들에게 있어서 부활하는 순간까지의 시간은 1/100초도 안되는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어떤 분들은 예수께서 오래 전에 죽었던 모든 사람들의 갈갈이 헤지고 썩은 시체들을 어떻게 회복시키실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서 염려한다. 물론, 어떤 시체들은 폭탄에 맞고, 또 어떤 시체들은 불에 타고, 또 많은 사람들은 깊은 바다에 빠졌다. 그러나 모든 생명의 근원이신 창조주께서 각 사람의 개성을 완전하게 회복시키는데에 어떤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하나님께서는 각 개인을 완전하게 부활시키는데에 아무런 문제도 없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

몸을 빠져 나간 죽은 사람들의 혼은 살아 있는 가족들과 친지들을 도와주기 위하여 공중을 이리저리 날아다니고 있을까? 죽은 영혼들은 제사 때마다 자신의 집에 찾아와서 제사상 위에 차려진 음식들로 배를 채우면서 만족한 미소를 띄우고 있을까? 성경은 죽은 자들은 완전한 무의식 속에서 부활의 시간까지을 자고 있다고 선언하고 있다. 이제 다시 독자들이 대답할 차례가 되었다. “죽은 사람들은 무덤 속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누가 진짜 교회인가?

"교회란 무엇인가? 건물인가? 조직인가? 교단인가? 교회란, 어떤 조직이나 교단이나 건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태초에 아담과 하와에게 가르쳐 주셨던 진리, 곧 변하지 않는 영원한 복음을 이해하고 믿는 사람들,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하나님의 참 자녀들이 교회이다. 교회는 노아가 전파하였던 진리, 아브라함이 믿었던 진리, 엘리야가 경고하였던 진리, 다니엘과 사도 요한에게 계시되었던 예언,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제자들이 가르쳤던 가르침을 정확하게 보존하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 즉 남은 무리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참 교회란 참 진리를 보존하고, 그 진리대로 살기 위해서 자신의 생애를 바치는 그리스도인들을 의미한다.

1) 교회는 남은 자손이다

성경은 마지막에 사단의 공격 목표가 될 하나님의 참 교회, 즉 참 백성에 대하여 이같이 말하고 있다.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계 12:17). 성경은 마지막에 사단이 교회와 싸우려고 한다고 표현하지 않는다. 사단은 바로 하나님의 남은 자손과 최후의 전쟁을 벌리려고 한다고 말하고 있다.

성경에 나타난 역사와 초기 그리스도 교회사와 중세기의 역사를 살펴볼 때, 우리는 항상 성경의 진리를 그대로 전수하며 생애 하였던 하나님의 교회, 즉 남은 무리가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각 가정에 족보가 있듯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도 엄연히 족보가 존재한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남은 자손들이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진짜배기 자손들이 있다는 말이다. 그 사람들을 성경은 남은 자손이라고 부른다.

2) 남은 자손과 그 역사

우리의 조상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한 후에, 그들이 이제 죽을 수 밖에 없다는 선고를 내리신 즉시부터 하나님께서는 여자의 자손과 뱀의 자손들이 서로 원수가 될 것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서로 원수가 될 것이라는 말씀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그들 사이에 적개심을 두시겠다는 뜻이다. 이 세상 역사는 항상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 사이에 끊임없는 전쟁이 있어 온 사실을 여실하게 드러내 주고 있다. 사단은 범죄한 인간을 구원 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알아차리고 하나님의 참 백성들을 죽이려고 사력을 다하여 싸워 왔다. 성경의 역사를 살펴 보면 우리는 그 사실을 금방 알게 된다. 먼저 사단이 가인을 통하여 아벨을 죽인 역사를 보자. 사단은 여인의 후손, 즉 하와의 아들인 가인을 자기의 자손으로 삼아, 하나님께 충성하며 하나님의 명령대로 행하는 동생 아벨을 미워하여 죽이게 하는 일에 성공하였다. 가인은 여인의 자손이었으나 실상은 뱀의 후손 즉, 마귀의 후손으로 바뀐 것이다. 이렇듯이 뱀의 후손과 여인의 후손 사이에는 전쟁이 항상 있었다.

그 후에 아담은 셋을 낳고 기뻐하였으며 셋은 아벨을 대신하여 여인의 후손 즉, 참 하나님의 교회가 된다. 그 후로 셋의 후손들과 가인의 후손들은 서로 떨어져서 살게 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가인의 후손들로부터 오염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창세기 6장에 가서 슬픈 역사가 기록되어 있는데 그것은 마귀가 셋의 후손과 가인의 후손들이 서로 섞이게 만드는 일에 성공했다는 사실이다.

마귀는 여자의 남은 자손들 즉, 하나님의 참 백성들을 다 죽일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그가 간구해낸 묘책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 속에 들어와 그들을 타락시키는 것이었다. 그는 셋의 후손들이 가인의 딸들과 결혼하게 함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을 타락시키는 일에 성공하였다. 그 결과 비참한 노아 홍수가 임하게 된 것이다. 노아 홍수 후에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참 백성들을 구별하여 놓으셨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이었다.

우상 숭배가 만연했던 갈대아 우르 지방에서 아브라함을 불러내신 하나님께서는 그를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로 삼으신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신 이유를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창 18:19). 그것은 곧 아브라함을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을 지키는 의로운 백성으로 삼으시려는 하나님의 의도였다. 이것이 여자의 후손 곧 하나님의 참 백성들을 구별하여 두시는 이유다. 노아에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보자.노아가 그와 같이 하되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가 이 세대에 내 앞에서 의로움을 보았음이니라.(창 6:22-7:1).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남겨 두시는 이유가 얼마나 꼭 같은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따르는, 즉 계명을 순종하는 한 백성을 가지시기를 원하신다. 선과 악의 대 쟁투에서 하나님의 의로움을 변호하고 증인이 될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한 백성을 하나님께서는 필요로 하신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계시록 12장이 여자의 남은 자손들의 특징을 설명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계 12:17).

3) 남은 자손의 특징

성경은 마지막에 사단이 싸우려고 하는 남은 자손의 특징을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는 자들이 바로 여자의 남은 무리, 하나님의 참된 남은 자손들이다. 그 사람들은 예수를 그저 머리로만 믿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을 순종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과 말씀을 그들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하게 삼는 사람들이며, 또한 주님의 말씀을 듣고 이해만 하는 자들이 아니라 그 말씀대로 따라 사는 자들이다. 자기의 목숨을 잃어 버리게 되는 상황에 처하게 될지라도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더 높이는 자들, 하나님의 명령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자들, 먹고 사는 일보다 주님의 명령이 더 중요한 자들, 그러한 자들이야 말로 참된 하나님의 남은 자손들이 아니겠는가!

또한 하나님의 남은 자손들의 결론적 표현은 14만 4천이란 단어로 계시록에 표현되어 있는데, 그들은 여자, 즉 음녀로 더불어, 다시 말하면, 바벨론의 오류의 가르침들인 바벨론의 포도주에 더럽히지 않은 자들이다. 바벨론의 잘못된 가르침들은 하나님을 오해시키고 잘못 이해하게 만드는 취하게 하는 가르침들이다. 참 교회인 초대 교회의 후손들은 이러한 음녀의 가르침으로 더럽히지 않은 자들이며, 그러한 가르침들에서 나온 자들이다.

과거의 모든 시대를 통하여 하나님의 참 교회인 소수의 남은 무리가 항상 존재해 왔듯이, 마지막 시대에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참 교회인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신실한 무리를 가지고 계실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생애에 하나님의 성품을 온전히 들어내고 반사하며, 성령의 능력으로 죄를 승리하는 경험을 하며 사는 사람들이다. 그리하여 그 사람들은 선과 악의 대 쟁투에서 하나님을 증거하는 산 증인들이 될 것이다. 성경은 마지막에 구원 받을 하나님의 남은 자손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 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롬 9:27).

남은 사람들이 돌아올 것이다. 야곱의 자손 가운데서 남은 사람들이 전능하신 하나님께 돌아올 것이다(사 10:21, 표준 성경).

당신도 하나님의 참 교회, 남은 무리가 되지 않으려는가? 하나님의 참 교회가 되는 독자들이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