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누룩과 같으니라

Living the Life of the Lifegiver 에서 발췌

수많은 사람들이 갈릴리로 몰려 들어왔다. 가난한 자, 무식한 자, 장사하는 자, 교양있고 세력있는 자, 그리고 불구자와 같은 각계 각층의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모여 들었다.

그 중에 교양있고 세력이 있는 사람들은“과연 하나님의 나라는 이렇게 누추한 사람들로 구성될 것인가? 어떤 종류의 사람들이 하늘을 들어가게 될 것인가?”라는 의혹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의 의문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마태복음 13:33. 성경에서 누룩은 경우에 따라서 죄를 상징하기 하고, 바리새인들의 위선적 신앙을 표상하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에 나오는 누룩은 하늘나라를 상징하기 위해서 사용한 표상이다. 이 비유에서 누룩은 하나님의 은혜 속에는 그리스도인에게 생명력을 주고 동화작용을 일으키는 능력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변화되지 못할 정도로 비천하고 타락한 인간은 하나도 없다. 성령의 음성에 복종하는 모든 사람에게 새로운 생명이 스며들어 가서,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형상이 다시 회복될 수 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의 힘과 의지력을 의존해서 자신의 생애와 마음을 변화시키려고 하는 사람은 도무지 이루어질 수 없는 일에 도전하는 것이다. 누룩을 가루에 섞지 아니하면 결코 크고 부드러운 빵을 만들 수 없다. 이와같이 죄인이 하나님의 은혜를 마음 깊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는 결코 하늘에 들어갈 수 있는 아름다운 성도로 변화될 수 없다. 이 세상에서 배울 수 있는 예의와 교육과 윤리만으로는 하늘을 얻을 수 없다. 오직 성령을 통해서 죄인의 마음 속 가장 밑바닥에 있는 동기가 변화되어야 하며, 삶의 모든 목적과 계획이 바뀌어야 한다. 그러므로 자신에게 임하는 성령의 역사를 단순한 마음으로 순복하는 자들만이 하늘을 얻게 된다.

가루에 섞은 누룩이 안에서부터 밖을 향하여 작용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생애를 변화시키는 것도 마음 속이 새로와짐으로 가능하게 된다. 성경이 말하는 변화된 생애란 눈에 보이는 외부적인 개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악습, 저런 악습을 교정함으로써 자신의 품성을 개선해 나가려고 애를 쓰면서, 이러한 방법을 통하여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들이 어느 정도의 유익을 가져올 수는 있지만, 죄인을 변화시키지는 못한다. 그런 사람들은 잘못된 출발점에서 그들의 신앙을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 신앙의 출발점은 마음에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입으로 신앙을 고백하는 것과 심령에 진리를 품는 것은 전혀 다른 별개의 것이다. 진리를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비록 우리가 진리를 올바로 안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사상과 마음의 가장 밑바닥이 변하지 않을 수 있다. 하나님의 명령과 계명을 다만 의무감으로만 지키는 자는 결코 순종의 기쁨을 맛볼 수 없다. 사실상, 이런 사람은 순종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요구하는 바가 자신의 본성이 원하는 바와 다르다고 해서, 그것을 무거운 짐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아직 참된 그리스도인의 생애를 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진정한 순종은 마음 속에 새겨진 원칙을 따라서 행하는 것을 말하는데, 그것은 의를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그분의 율법을 사랑하는데서 생긴다. 모든 의의 진수는 구세주에 대한 사랑과 충성에 있다.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의를 행하게 하는 유일한 원동력이 되어야 한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마음이 거듭나다는 위대한 진리는 그리스도께서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 가운데 나타나 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 .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으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요한복음 3:3~8. 가루 속에 감추인 누룩은 사람이 모르는 사이에 밀가루 반죽을 부풀린다. 이와 같이 진리의 누룩도 사람이 모르게 조용하고 끈기있게 심령을 변화시킨다. 누룩의 영향력에 의해서 타고난 악한 성질이 부드러워지며, 양심의 소리에 제어받게 된다. 새로운 사상과 새로운 감정과 새로운 동기가 영혼 깊숙히 새겨진다. 그리하여 새로운 표준 즉, 그리스도의 생애와 품성을 닮고자 하는 소원이 마음을 가득 채우게 된다. 마음과 사상이 변화되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능을 새롭고 거룩한 방향으로 활용하기 시작한다. 둔한 양심이 각성되어서 하나님과 이웃을 위하여 봉사하고자 하는 열심이 솟아오른다.

우리는 흔히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한다;“매 주말마다 교회에 나가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노라고 하면서, 말과 품행에 있어서 전혀 변화의 흔적을 볼 수 없는 사람들이 교회를 가득 채우고 있는 까닭이 무엇입니까? 자신의 이기적인 목적과 계획을 포기하지 않으며, 온유하지 못하고, 그 하는 말이 거칠며 거만하고 적은 일에 화를 잘 내는 자들이 많은 것이 어찌된 일입니까? 그리스도인들의 생애 가운데서 세상 사람들의 특성인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과 이기심과 급한 성미, 성급한 말, 쉽게 오해하는 성질 등을 볼 수 있습니다. 진리를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처럼 교만하고 과민하며 괴팍한 성질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도데체 이것이 어찌된 일입니까?” 이 모든 질문에 대한 유일한 대답은 “그들이 거듭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이다. 그들은 진리의 누룩을 마음 속에 간직하지 못하였다. 누룩이 그들 속에서 일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다. 그들이 선천적 또는 후천적으로 타고난 나쁜 성벽이 누룩의 변화시키는 능력에 굴복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의 생애를 통하여 품성을 변화시키는 그리스도의 은혜가 결핍되어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게 되는 것이다.

성경은 믿는 자들의 품성을 변화시키는 진리를 강조하고 있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이니이다.”요한복음 17:17. 하나님의 말씀의 의미를 연구하고 그 뜻에 순종하면, 그것이 마음 속에 작용하여 모든 거룩하지 못한 성벽을 하나님의 말씀 아래로 복종시킨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진리의 핵심은 거듭남의 경험이다. 거듭남은 경험이 너무나 순결하고 거룩한 것이기 때문에 이 더럽고 복잡한 세상에서는 그것을 실천하면서 살기가 너무나 어렵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진리의 살아있는 감화력이 사람의 마음에 역사하면, 그것은 마음과 생각을 변화시키는데, 이러한 상태에서는 진리가 일상 생활의 작거나 큰 모든 일에 쉽게 침투되게 된다. 진리대로 사는 일이 너무나 당연한 일이 되며, 가장 가치있고 보람있게 생각되기 때문에 진리를 거절하고 죄를 범하는 것이 도리어 어렵게 느껴지게 된다. 진리의 누룩을 마음 속에 받아들이면, 그것은 우리의 욕망을 조절하고 사상을 순결하게 하고 성미를 부드럽게 만들어 준다. 또한 진리의 누룩 즉, 변화시키는 능력은 우리의 정신을 유쾌하게 만들며, 신령한 활기를 주어서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신령하고 밝은 감화를 끼친다. 세상은 이러한 진리의 원칙에 젖어 있는 사람을 이상하게 여기게 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자신들과 너무나 다른 동기와 목적을 가지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은 세속적인 재물과 명예와 쾌락을 위해서 살아가지만, 그들은 이러한 것들에 몰두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일하고 희생함으로써 구세주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구원하고자 애쓰시는 그리스도의 사업에 헌신한다. 세상은 이런 사람들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사랑이 마음 속에 들어오면, 그 사랑은 모든 다른 동기들을 정복하고 부패한 세상의 영향력을 초월하게 만든다는 진리를 그들이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누룩에 의해서 변화된 사람은 사람의 칭찬에 의해서 좌우되지 않으며, 자신을 내세우려고 애쓰지도 않는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칭찬하고 좋아하기 때문에 그들을 사랑하지 않으며, 그들이 그리스도의 피로 사신 바된 소유물이기 때문에 사랑한다. 간혹 자신의 말과 행동과 동기가 오해를 받거나 잘못 전하여져서 부당한 대접을 받을지라도, 노여워하지 아니하고 여전히 자기의 예정된 길을 걸어간다. 다음과 같은 사도의 권면을 들어보라.“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베드로전서 1:15. 그리스도의 은혜가 우리의 성품 뿐만 아니라 음성까지도 주관해야 한다. 우리에게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의 은혜가 형제사이의 예의 있고 동정적인 대답과 친절하고 용기와 위안을 주는 말에서 드러나야 한다. 그리스도의 은혜는 우리의 가정을 천사들이 머물고 싶어하는 가정으로 만들어 주며, 우리의 가정에서 풍겨나오는 향기가 아름답고 거룩한 향기가 되어 하나님께 올리워질 수 있도록 도와준다.

누룩의 변화시키는 은혜를 맛본 사람은 친절하고 온유하며 오래 참는 일로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낸다. 그 용모는 언제나 밝고 환하게 빛나게 된다.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의 얼굴에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인정해 주신다는 확신과 평화가 깃들게 되며, 그들의 마음 속에 계시는 그리스도의 영에 의해서 외모가 단정하고 평화롭게 나타난다. 천진스럽고 단순한 온유함이 그들의 표정과 말과 행동에 나타나게 된다. “천국은 . . . 누룩과 같으니라.”

 

변화와 승리를 향한 선택


가정과 자녀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마다, 먼저 하나님께서 시험과 유혹 속에서 어떻게 우리 인간들을 구원하시는가에 대한 문제를 설명해야 될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왜냐하면 이 구원의 문제가 정확하게 이해되지 않으면, 우리는 가정에서 참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자녀들에게 보여줄 수 없으며, 자녀들은 두가지 양면을 가지고 살아가는 부모의 위전적인 모습을 보면서 부모의 신앙을 거절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는 부모에 대한 존경심을 잃어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구원에 대한 문제는 자녀교육 문제에 있어서 그 중심에 자리잡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성경 전체에서 시종일관 강조되는 한가지 주제가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는 계획이다. 타락한 인간을 그리스도와 같은 성품을 가진 그리스도인으로 변화시키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그분의 방법에 대한 주제야말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이해해야 할 주제이다. 그런데,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의 계획은 실제 생활 속에서도 적용될 수 있는 것인가? 만일 그것이 실제적으로 가능하다면,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에 있어서 내가 해야할 몫은 무엇인가?

최근에 있었던 한 부흥집회에서, 나는 자신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참된 변화의 경험을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매우 깊은 좌절감에 빠져 있는 사람을 만나서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그는 경건한 그리스도인 가정에서 성장하였으며,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으며,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구원을 발견할 수 있다는 진리를 인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이 그리스도의 성품처럼 아름답게 변화될 수 있다는 진리에 대해서는 깊은 확신을 가지고 있지 못하였다. 그는 자신이 처하는 거의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영께서 들려주시는 음성을 듣기 보다는 자신의 육체가 원하는대로 굴복하여 끌려다니는 생애를 살고 있었다. 모든 사람은 시험과 유혹을 당할 때마다 양심을 통하여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조용한 음성에 순종하든지, 아니면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육체의 요구에 따라서 굴복하기로 결정하는 선택을 해야만 한다. 우리의 선택과 결정에 따라서 우리에게 다가온 시험과 유혹이 죄가 될 수도 있고, 우리에게 승리의 경험을 가져다 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나와 대화를 나누었던 그 사람은 승리의 생애를 갈망하였지만, 그에게 있어서 성경이 말하는 변화와 승리의 경험은 너무나 비현실적인 문제로 느껴졌다. 왜냐하면 그는 일상 생활에서 변화와 승리를 경험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성경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거듭남과 변화의 경험을 구원받을 수 있는 자격 요건으로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이해하고 있었지만, 그러한 경험들이 실제적으로 자신의 생애 가운데 이루어지지 않자 매우 깊은 좌절감에 빠지게 되었던 것이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 . .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요한복음 3:3~7. 무엇이 문제인가? 왜 십자가를 바라보고 변화되었던 사도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의 경험이 그에게는 실현되지 않는 것일까? 오늘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질문을 자기 자신에게 던지고 있지만, 이 엄숙한 질문에 대하여 분명한 답을 찾은 사람은 별로 많지 않다. 두려운 사실은, 만일 우리가 이 질문에 대하여 개인적으로 답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결국에는“성품이 변화되지 않아도 믿기만 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라는 거짓 복음을 찾아서 참된 복음을 떠나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참 복음을 개인적으로 발견하고 경험하지 못하기 때문에 주변에서 쉽게 들을 수 있는 거짓 복음을 붙잡고 안전감에 도취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신실하게 믿는 그리스도인들을 장차 지옥의 유황불로부터 구원해 주실 뿐만 아니라, 이 땅에 사는 동안에도 사단의 권세로부터 구원해주신다는 것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의 약속이 아닌가? 그런데 왜 그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유혹과 시험의 순간마다 사단의 권세로부터 구원받지 못하고 죄의 종이 되어 끌려다니고 있는 것일까? 무엇이 문제인가? 하나님의 약속에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일까? 아니면, 그에게 문제가 있는 것일까?

진짜 믿음을 통한 승리의 경험

나는 그와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 그의 믿음에 문제가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가 가진 믿음은 진짜 믿음이 아니었다. 그의 믿음은 자신의 영혼을 순결하게 하고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 아니었다. 그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서 자신이 해야할 의무와 몫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지 못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은 믿고 받아들였지만, 그 약속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자신이 해야할 선택과 결정에 대해서는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어떻게 자신의 생애 속으로 이끌어 들일 수 있는가를 모르고 있었다. 그리스도인이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선물인 구원을 받아들일 때, 자신의 죄를 아무런 댓가나 요구없이 용서해 주시고 구원해주시는 하나님께 대하여 감사와 사랑과 충성으로 응답하는 진짜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자신과 같은 죄인을 구원해주시는 하나님을 보면서 갖게 되는 그분께 대한 감사와 사랑과 충성이야말로 구원의 방정식을 푸는데 있어서 우리가 해야할 몫이다. 하나님의 영께서는 그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기 위해서 오랫동안 역사해 오셨지만, 그는 자신의 의지를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굴복시키지 않았다. 하나님의 뜻과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기로 선택하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은혜를 거절할 수 있을까? 그렇다. 쉬운 예를 들어서 이 문제를 설명해 보자. 하나님께서 이른 아침에 우리를 깨워주시면서“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여 내게로 오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라고 속삭이실 때, 그리스도께 대한 감사와 사랑과 충성의 믿음을 가지고 잠자리에서 일어나 구세주의 말씀을 읽고 그분과 대화함으로써, 그 날 하루 동안의 시련과 유혹을 대항하여 승리할 수 있는 힘과 도움을 간구하는가? 아니면,“난 잠을 자야 해! 말씀은 읽지 않아도 살 수 있지만, 잠을 더 많이 자지 않으면 살 수 없어!” 라고 외쳐대는 육체의 요구에 굴복하여 이불을 끌어당겨 얼굴을 덮음으로써 그리스도의 은혜를 거절하는가? 그리스도께서는 매일 아침마다 당신의 아버지를 만남으로써 그날 하루를 살아갈 힘과 능력을 받으셨다. “새벽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마가복음 1:35. 진짜 믿음은 하루 동안 자신을 죄와 유혹으로부터 지켜줄 수 있는 능력 즉,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능력을 간절히 필요로 느끼는 믿음을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그러한 믿음이 우리의 믿음이 되어야 한다. 자신의 연약함을 절실히 느끼며, 자신의 육체가 얼마나 연약한 것인지를 분명하게 인식함으로써, 하나님께 육체의 요구를 거절할 수 있는 능력을 달라고 간구하는 믿음 말이다.

계속적인 굴복과 계속적인 승리

아침에 일어나서 우리가 무릎을 꿇고 기도드림으로써 주님과 연결되면, 그 다음에는 우리의 발과 손과 입으로 주님과의 연결을 유지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루를 지내는 동안 계속해서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그분께서 들려주시는 음성에 굴복시킬 것을 요구하신다. 우리 모두가 온 마음을 다하여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은,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주님의 음성에 순종하고, 육체의 요구를 거절하기로 결심하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아름다운 그리스도인 경험을 잃어버리는 이유가 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에 있는 교인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통해서 다음과 같이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다.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느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갈라디아서 3:3. 많은 사람들이 성령의 음성을 거절하고 육체의 요구에 굴복함으로써 아름다운 그리스도인의 경험을 잃어버리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하루에 한번만 우리를 부르시는 것이 아니다. 그분께서는 하루 종일 성령을 통하여 우리가 해야 할 말과 생각과 행동을 가르쳐 주시면서, 그분의 인도하심대로 따라올 것을 호소하신다. 우리가 그때마다 그분의 호소에 사랑과 감사하는 믿음으로 응답하면서 따라간다면, 우리는 하루를 승리로 마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앞에 원수가 나타나서 우리의 마음을 자극하고, 마귀가 던져 놓은 돈과 세속의 덫을 보면서 유혹받으며, 나보다 못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으로부터 무시와 조롱을 받았을지라도, 하나님의 영께서 우리의 영혼 속에 들려주시는“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하라”는 말씀에 순종함으로서 승리를 쟁취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여전히“내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니라”라는 약속을 지키시고 계신다(마태복음 28:20).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날마다 그리고 매순간마다 인도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지만, 우리가 마땅히 해야할 우리의 역할을 대신해주시겠다고 말씀하지는 않으셨다. 우리의 믿음 속에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끝까지 따라가고 싶다는 소원이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 우리에게는 성령의 음성과 육체의 음성 중에서 어느 한가지를 택해야 하는 선택이 놓여져 있는데, 이것이 구원을 위해서 우리가 해야할 유일한 몫이다. 물론,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그 은혜를 받아들이거나 거절하는 선택은 전적으로 우리에게 맡겨져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의사를 무시한채 강제적으로 우리를 구원하지 않으신다. 그분의 은혜를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기로 선택하는 자는 결국 구원을 받을 것이고, 거절하기로 선택하는 자는 결국 멸망에 이르게 될 것이다. 하나님을 대적하여 싸울 것인가 아니면 육체를 대항하여 싸울 것인가에 대한 선택이 우리 앞에 놓여 있는데, 오직 감사와 사랑과 충성으로 꼴지워진 진짜 믿음을 가진 사람만이 의로운 선택을 하게 될 것이다. 사도 바울 역시 우리와 같은 육체를 지닌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기 위해서 다메섹으로 가는 도상에서 그리스도를 만났는데, 거기서 그는 중요한 선택을 할 기회를 가졌다. 그는 그리스도의 음성을 거절하고 육체의 요구에 굴복할 수도 있었다. 그때 그가 가졌던 그러한 선택의 기회는, 우리 모두가 매일의 생활에서 가지게 되는 선택의 기회와 동일한 것이다. 사도 바울은 어떤 반응을 나타냈는가? “주여 내가 어떻게 하기를 원하나이까?”사도행전 9:6, 킹제임스 성경역. 참으로 아름다운 반응이 아닐 수 없다. 이 장면이야말로 성경이 말하는 변화를 설명하기 위한 좋은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바울이 그리스도의 음성에 굴복하였을 때, 그의 성품은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변화되어졌다. 그는 더 이상 육체에 속한 사람인 사울이 아니라, 영에 속한 바울이 되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라는 바울의 간증을 통해서, 우리는 바울의 굴복이 다메섹 사건 이후에도 계속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두려워 해야 할 것

이러한 변화의 역사가 우리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애를 그분께 바치라고 부르실 때, 그리고 계속적으로 자아에 대해서 죽으라고 요구하실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이 육에 속한 삶에서 영에 속한 삶으로 변화되는 과정으로 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성령께서는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우리 모두를 격려하시고 계신다. “여호와를 쫓는데서 돌이키지 말고 오직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섬기라.”사무엘상 12:20. 우리가 은혜스러운 이러한 격려를 받아들이기로 선택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과 성품을 변화시키는 일을 계속하실 수 있다. 바로 이것이 빌립보서 2:12~13절의 의미이다. “항상 복종하고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이 말씀은 우리를 구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흔들리거나 부족할 것에 대해서 염려하고 두려워하라는 말씀인가?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두려워 하라는 말씀인가? 우리의 의지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지 않을 것을 두려워 하며, 우리의 타고난 성벽이 우리의 생애를 지배할 것을 두려워 하라는 말씀이다. 우리의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자아가 발동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혼 속에 들려주시는 음성을 거절하지 않도록 조심하라! 자신의 힘을 의존하기 쉬우므로 그것을 두려워하라. 그리스도를 잡은 손을 놓고서 자기 혼자 인생의 길을 걸을 수 있다고 착각하는 교만을 두려워하라.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인내와 동정과 사랑은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왜냐하면 그러한 생각은 육체와의 무서운 싸움을 싸우는 우리에게 커다란 위로와 격려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도 모르게 멋대로 솟구쳐 오르는 육체의 요구를 경계하라. 그러나 스스로의 힘으로 조심하고 경계한다고 해서 육체의 요구를 거절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뼈져리게 느끼는 자만이 구세주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자신을 이기심과 자존심과 미움과 원망과 불만의 정신에서 구원해 줄 구세주를 간절히 찾는 자들을 하늘은 결코 외면하지 않는다. 이러한 자들은 악한 생각과 죄을 더럽고 추한 것으로 여기게 될 것이며, 따라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변화의 기쁨을 맛보며 승리의 경험을 누리게 될 것이다. 잘못된 기질과 느낌은 변화될 것이며, 새로운 원칙이 자신의 삶에 적용될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게 된다. 날마다 하나님의 음성에 대해서는 “예”라고 답하고, 육체의 요구에 대해서는“안돼”라고 거절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매우 단순한 구속의 과학이다.“양심 속에 들리는 하나님의 음성에 복종함으로써 그분의 뜻이 인간의 마음에 새겨지는 것.” 바로 이것이 죄의 권세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구원의 원칙이다. 이것은 행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을 전적으로 신뢰하는데서 나오는 진짜 믿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믿음을 행사하는 그리스도인만이 가정에서 자녀들에게 아름다운 향기를 발할 수 있다. 우리의 자녀들은 양심 속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음성에 굴복하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보면서 높은 존경심을 갖게 될 것이다. 육체가 화를 내고 짜증을 내라고 요구할 때, 성령의 음성에 따라서 온유하게 인내하기로 선택하는 부모의 모습은 자녀들에게 가장 강력한 모본으로 인상지워질 것이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도록 하라.로마서 12:2

부모의 기도

오, 하늘에 계신 아버지,
저로 하여금 예수님을 닮은 부모가 되게 해 주소서.
자녀들을 이해하며 그들이 하는 말을 끝까지 인내하며 들어주고
그들의 모든 질문에 친절한 정신으로 대답할 수 있도록 저를 변화시켜 주소서.

저의 이기심에 가득 찬 교육으로 인하여
그들에 대한 당신의 목적이 무산되지 않게 하옵시고
그들에게 경쟁하고 싸워서 이기는 교육을 하지 않게 지도하여 주옵소서.

그들이 제게 예의 바른 자녀가 되기를 원하는 것처럼
저도 그들에게 예의 있는 부모가 되게 해 주옵소서.
그들의 실수를 비웃지 않게 하옵시고
그들이 부모의 잘못을 당돌하게 지적하였을지라도
겸손하게 저의 잘못을 인정할 수 있게 하옵소서.
그들에게 수치와 부정직한 부모의 모습을 보이지 않도록 하옵시며
날마다 그들에게 당신의 형상을 나타내는 부모가 되게 하옵소서.

제 자신의 권위를 세우기 위함이나, 노한 마음으로 자녀들을 처벌치 않게 하옵시고
그들의 죄와 연약함을 동정하고 교훈하는 심령으로 매를 들 수 있게 하옵소서.
결코 거짓말을 하거나 도적질을 하지 않아야 된다는 가르침을 가정에서 배울 수 있도록 하옵시고
제가 행하는 모든 것을 보면서 정직이 참된 행복을 가져온다는 교훈을 배울 수 있게 하소서.

제게서 비굴함이나 치졸함을 제거해 주옵시고
순간을 위해서가 아니라 영원을 위해서 살게 하옵소서.

저희 가정에 사랑과 원칙이 항상 살아서 움직일 수 있도록 저희를 교육시켜 주옵소서.
제게 용기와 지혜로운 판단력을 주셔서
자녀들의 부당한 요구에 대해서 “안돼.”라는 대답을 할 수 있게 하소서.

가정에서 항상 친절하며, 공정하고, 의롭게 말하고 생각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자녀들에게 깊은 사랑과 존경을 받을 수 있는 부모가 되게 도와주옵소서.
저희 부부의 성품과 생활이 자녀들 앞에 가장 매력적이고 고귀한 모본이 될 수 있게 하여 주옵소서. 아멘.

 

피곤하십니까?

아가타 트레쉬 의사

“피곤해”라는 말은 이제 현대인의 언어 습관이 되었다. 집과 사무실과 그 외의 시설들이 점점 편리하게 디자인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대인들은 점점 더 많은 피로를 느끼면서 살고 있다. 우리는 100년 전에 힘든 노동을 많이 하면서 살았던 사람들보다 훨씬 피곤한 세상에 살고 있다.

오늘날에 있어서 피곤증은, 몸을 너무 많이 움직였기 때문에 생기기 보다는 몸을 너무 적게 움직였기 때문에 생기는 경우가 많다. 그러한 경우에는 신체 운동의 양을 늘림으로써 피곤증을 효과적으로 치료할 수 있다. 피로의 원인은 대개 신체적인 피로와 정신적인 피로, 두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정신적인 피로는 권태감, 우울증, 스트레스, 그리고 분노 등과 같은 현상들을 동반한다.

또한 생리학적인 원인에서 오는 피곤증도 많이 있는데, 이것은 박테리아나 인플루엔자 감염, 심장질환, 내분비의 장애, 빈혈, 양양부족증, 암, 그리고 파킨슨병과 같은 신경계통의 장애로 인한 질병들, 관절염, 류마티즘, 간염, 결핵, 당뇨 등과 같은 질병과 함께 동반된다. 생리학적 피곤증은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악화되며, 일반적으로 아침에 일어날 때에 느끼게 된다.

천연 치료법

1. 수분의 부족은 종종 피로를 야기시킨다. 수분이 부족할 경우에는 음식물을 부족하게 섭취했을 경우보다 일의 효율이 급속하게 떨어진다. 갈증을 느낄 때에만 물을 마시면, 인체가 필요로 하는 물의 양을 충족시킬 수 없다. 전혀 갈증을 느끼지 않는 상태에서도 인체는 수분의 부족으로 고통당할 수 있다.

2. 운동은 매우 효과적으로 피로를 치료하는 방법이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휴식이 피로에 대한 해결책이 될 수 없는데, 그 이유는 피로는 종종 몸의 상태가 좋지 않은 결과 때문에 생기기 때문이다. 혈액순환이 좋지 않을 경우, 인체의 대사작용의 결과로서 생기는 독소들을 제거하는 능력이 저하된다. 운동부족이야말로 피로를 야기시키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중의 하나이다.

3. 주로 실내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피로를 더 많이 느끼게 된다. 왜냐하면 신선한 산소를 충분하게 공급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날마다 옥외에서 신선한 공기를 마시면서 운동하는 것이야말로 피로를 치료하는 첫단계이다.

4. 과식은 피로를 야기시킬 수 있다. 필요 이상의 음식물을 소화하기 위해서, 인체는 필요 이상의 에너지를 사용해야 한다. 또한 과식으로 인하여 위장이 커지면, 횡경막에 부담을 주게 되고, 이것은 곧 호흡에 지장을 주게 된다. 그리하여 산소의 공급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못하게 된다.

5. 어떤 종류의 의약품들은 피로를 야기시키는 부작용을 가지고 있다. 암피타민, 진정제, 이뇨제, 몇몇 혈압약 등등.

6. 피로는 알러지의 증세로 나타날 수도 있다. 알러지를 일으키는 식품류를 제거한 식단을 짜서 식사를 해보라. 대표적인 알러지 식품 : 우유, 쵸코렛, 카페인 함유식품, 가공처리된 고기류, 사탕, 계란, 돼지고기 외 몇몇 식물성 식품.

7. 미공군 병원에 피곤증으로 입원한 30명의 어린아이들에게 TV를 전혀 보지 말라는 의사의 처방이 내렸다. 그 결과 2~3주 후에 모든 아이들에게 피곤증이 사라지는 결과가 나타났다.

8. 성격적으로 자신이 해야할 일을 끝마치기 전에는 휴식을 취할 수 없는 사람이 있다. 심한 피로를 느끼면서도 일을 끝마치기 전에는 휴식을 취하지 않는 사람의 경우, 피곤증에 시달리게 된다. 절제과 규칙적인 생활이 이러한 사람들을 위한 적절한 처방이다.

9. 잘못된 식생활은 피로를 야기시킨다. 정제된 음식(흰쌀, 흰밀가루), 색소와 첨가물이 많이 함유된 식품, 설탕과 지방이 많이 함유된 식품 등은 인체로 하여금 최고의 기능을 발휘할 수 있게 만드는 고품질의 연료를 공급하지 못한다.

10. 이상적인 혈당치를 유지해야 한다. 너무 높거나 낮은 혈당치는 피곤증을 유발한다. 빈약한 아침식사는 오전 중에 혈당치가 떨어져서 피로를 느끼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 이러한 경우 사람들은 설탕이 많이 함유된 간식을 함으로로 문제를 임시적으로 해결하려고 하지만,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에는 설탕을 먹기 전보다 더욱 더 낮은 혈당치를 갖게 된다. 그러므로 아침식사 때에 현미밥과 신선한 채소를 든든하게 먹음으로써,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11. 저혈압은 피로를 느끼게 만든다. 저혈압에 대한 최고의 처방은 물을 많이 마시고, 옥외에서 운동을 하는 것이다. 저혈압은 종종 만성적인 수분부족으로부터 온다. 과일과 채소를 많이 섭취하고, 과식과 고농도의 식품을 삼가하는 것이 좋다.

12. 살충제와 방사선은 피로를 야기시킨다.

13. 불소화합물, 납, 수은, 카드뮴, 구리와 같은 것들은 피로를 야기시킨다.

14. 권태감은 인체의 에너지를 급격히 저하시켜서 만성적인 피로를 유도한다. 새로운 취미와 새로운 일을 함으로써 권태감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반 시간정도 심한 권태감에 빠져 있는 것이 하루종일 일을 한 것보다 더 많은 신경에너지를 소모한다. 그리스도께 나아가 새로운 정신과 새로운 마음을 갖게 해 달라고 기도하라.

15. 정신 노동을 하는 사람이 자연환경에서 육체노동을 하는 사람보다 더 많은 피로를 느끼게 된다. 육체적인 에너지의 회복을 위해서는 4시간의 수면이 요구되지만, 정신적인 에너지를 보충하기 위해서는 8시간 이상의 수면이 요구된다. 그러므로 정신노동자들의 피로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신선한 공기가 실내에 유입되어서 뇌에 충분한 산소가 공급되게 하는 일이 필수적이다.

16. 설탕과 당분을 많이 섭취하면 쉽게 피로에 빠질 수 있다.

17. 정상보다 무거운 체중은 순환 계통과 근육에 과중한 부담을 주게 되므로 피로를 촉진시킨다.

18. 고단백질, 특히 동물성 단백질은 피로와 연관이 있다. 육류 속에는 동물이 죽기 전에 미처 배출하지 못한 소변과 대사작용의 결과로 생긴 쓰레기들이 축적되어 있다. 1파운드의 소고기에는 약 0.91그램의 요산과 소변성분이 함유되어 있다. 이러한 쓰레기 들은 채소나 과일의 단백질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들이다.

19. 커피, 비타민, 술, 수면제 등은 일시적인 해결책에 불과하며, 많은 경우에 있어서 인체에 오히려 해를 준다. 커피와 같은 카페인 함유 음료수를 과다하게 마실 경우, 오히려 피로를 가중시킨다.

20. 우울증과 피로는 함께 오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경우는 우울증을 먼저 치료하는 것이 급선무이다.

21. 스트레스와 피로는 많은 경우에 있어서 함께 따라 다닌다. 천연계 속에서 운동하는 것이야말로 스트레스를 제거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이다.

22. 제시간에 식사하고 제시간에 잠자리에 드는 습관은 인체가 가지고 있는 에너지를 효과적으로 사용하게 도와준다.

23. 피로를 느끼는 많은 사람들은 많은 경우에 있어서 급하게 서두르는 습관이나 게으르고 나태한 습관이 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안정되고 균형있으며, 합리적인 생활 태도는 피로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다.

24. 여성들이 날씬해 지기 위해서 무리하게 체중감량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로 인하여 비타민, 미네랄, 또는 단백질 부족현상을 일으킬 수 있다. 이러한 경우에, 피로를 느끼게 된다. 체중조절은 합리적이고, 균형있는 방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25. 하나님께서 인체에 세워 놓으신 생명의 법칙을 준수해야 한다. 일주일에 하루는 육체적으로, 그리고 정신적으로 안식(휴식)해야 한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그날을 거룩하게 지키라. 일곱째 날은 주 너의 하나님의 안식일이니 그 날에는 . . . 아무 일도 하지 말지니라.”출애굽기 20:8~10

26. 소음은 피로를 증가시킨다. 조용한 자연 환경으로 주거환경을 바꾸는 것이야말로 피로를 해결하는 근본적인 방법이다.

27. 흡연과 커피는 동물실험 결과 피로를 30%이상 증가시키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28. 환경에 따라서 피로도가 달라진다. 지저분한 환경과 좁은 공간은 과로보다 더 많은 피로를 가져다 준다. 흰색, 보라, 갈색, 오렌지색은 피로를 가져온다. 약간 연한 녹색과 노란색은 휴식을 가져다 주는 색깔이다. 쇠로된 테이블에서 일하는 것은 피로를 가중시킨다.

육류를 정밀 분석한다!

Freedom of Health 에서 발췌

오늘날, 현대인들은 엄청난 양의 육류를 섭취하고 있다. 미국인의 경우, 한 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21마리의 소, 14마리의 양, 12마리의 돼지, 900마리의 닭, 그리고 1000파운드의 물고기와 새종류를 먹는 것으로 집계되었다.

매해마다 참으로 엄청난 양의 육류가 인간의 식탁 위로 올라오고 있는데, 경제적으로 부유한 나라들의 경우 대개 미국과 유사한 육식 현황을 나타내고 있다. 광우병과 같은 동물계의 질병이 그 한도를 넘어서고 있는 이 때에 동물의 고기를 정밀 분석하여 그 안전도를 검사하는 일은 매우 긴요하다고 말할 수 있다. 과연 고기는 안전한 식품인가?

고기 비지니스

24시간마다 약 십만마리의 소가 도살되어 사람들의 식품으로 만들어진다. 통계에 의하면, 7살난 어린 아이는 일주일에 약 1.7개의 햄버거를 먹으며, 13살의 소년은 일주일에 약 6.2개의 햄버거를 먹는 것으로 나타났다. 매해마다 6억 7천만개의 햄버거가 팔리고 있는데, 이것은 매초마다 200명의 사람들이 햄버거를 사먹는 것이 된다.

이토록 인기있는 식품인 햄버거에 사용되는 고기(ground beef)에 각종 화학 첨가제들이 채워져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사람들의 숫자는 별로 많지 않다. 만일 고기를 자연그대로 슈퍼마켓에 내놓으면 아무도 그것을 사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고기의 색깔이 보기 흉하게 변색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고기의 붉은 색을 유지시키고 변색을 방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색소와 화학물질들이 사용되는데, 붉은색 색소로는 양홍, 변색을 방지하는 화학물질로는 아질산염(소디움 나이트라잇), 방부제로는 안식향산염(benzoate), 그리고 아황산염 등과 같은 첨가제들이 사용된다. 이러한 화학물질들은 고기가 점차로 부패될 때에 나는 악취를 제거해주며, 신선하게 보일 수 있도록 붉은색의 유지를 도와준다. 아황산염은 비타민 B를 파괴하는 독성물질로서 소화기와 다른 기관에 상당한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그러나 전문 음식점에서 파는 햄버거의 경우, 니코틴에잇(nicotinate)이라는 화학물질이 고기의 붉은색을 유지시키기 위해서 햄버거 고기에 섞이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화학물질들이 어떤 시에서는 자치적으로 금지되어 있지만, 미국내 37개주에서는 이러한 화학물질들의 사용이 허가되어 있다. 고기를 먹을 때에 함께 따라서 인체 내에 들어가는 아질산염 같은 화학물질들은 대표적인 발암물질 중의 하나로 분류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고기 속에 숨어 있는 항생제

1974년, 미국인들이 먹고 있는 식품 중에 포함되어 있는 화학물질인 식품첨가제의 양이 약 십억 파운드에 육박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러한 양은 한사람에게 약 5파운드 이상의 식품첨가제가 분배된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데, 지난 20년 동안 식품첨가제의 양과 종류는 급속도로 증가해왔다.

식용 동물을 짧은 시간에 더 많은 무게를 나가게 만들어서,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각종 홀몬을 이용하여 정해진 시간 내에 보다 빠른 성장과 더 많은 고기를 얻어내는 기술이 급진되어 왔다. 1970년 한해 동안, 미국내에서만 약 1300톤의 항생제가 가축들에게 투여되었다. 오늘날 사용되는 동물 사료의 99% 에는 각종 화학적 첨가물이 함유되어 있다.

세계보건기구에서 발간한 책자에 의하면, 이제는 항생제가 물고기와 닭고기를 장기간 보존하기 위한 방부제로도 사용되고 있다. 도살 공장에서 도살된 닭들은 즉시로 약품 속에 담그어지며, 물고기들은 바다에서 잡히는 즉시 항생제 용액이 담긴 통에 보관된다. 때때로 육우들은 도살되기 직전에 항생제를 주사맞음으로써, 고기와 피에 항생제가 스며들어가게 만들기도 한다.

만일 사용된 약품과 항생제들이 완전하게 제거되지 않는다면, 식품으로 포장된 고기 속에 이러한 약품과 항생제들이 남아 있게 된다. FDA에 의해서 허가된 약 1000여종 이상의 약품들과 화학물질들이 동물의 고기를 식품화 하는 과정에 사용되고 있다. 동물의 고기가 상업화 되고, 엄청난 이윤이 육류 산업에서 발생되기 때문에, 정부와 식품회사들은 여러가지 위험을 무릅쓰고서라고 이러한 약품과 항생제들의 사용을 밀고 나가고 있다. 그러나 1974년~1976년 사이에 미 농림부에서 임의로 선택한 육류의 14%에서 한도 표준을 넘어선 양의 약품과 살충제들이 확인되었다는 보고서가 발표되었다. 그 보고서에서도 동물의 고기를 식품화하는 과정에 사용되는 약품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였다.

암과 육식

지난 100년 동안, 육류의 사용량이 4배나 증가되어 왔다. 우리의 인체는 우리의 입으로 섭취하는 것들로 유지되고 구성되는데, 대부분의 질병은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먹는가에 따라서 발생된다. 현대인의 무서운 질병인 암 역시 우리가 먹는 식품과 깊은 관련이 있다. 오늘날 현대인들이 선호하는 동물성 식품에는 몇몇 종류의 발암물질들이 포함되어 있다. 육류에 포함되어 있는 화학물질들은 신체내에서 여러가지 부정적인 결과들을 초래하는데, 특히 고기의 변색을 방지하기 위해서 사용되는 아질산염(sodium nitrite)은 신체의 건강에 치명적인 해를 가할 수 있는 것으로 분류될 수 있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식품 속에 함유된 아질산염과 암의 발병에 사이에는 분명한 연관이 있다는 사실이 동물 실험을 통해서 확인되고 있다는 것이다. 아질산염은 핫도그, 햄, 베이컨, 그리고 포장된 육류에 사용된다.

질병에 시달리는 가축들

사람들의 질병의 종류가 급속하게 늘어나는 것처럼, 동물계도 여러가지 질병에 시달리고 있다. 도살장에서 도살되는 소들 중 약 10~30%에 해당하는 소의 간에서 종양이 발견되고 있다. USDA에서 발표한 보고서에 의하면, 눈암에 걸려 있거나 각종 종양에 걸려 있는 소들의 고기가 수백만 파운드씩 슈퍼마켓으로 나오고 있다. 도살된 소는 눈으로 판별하여 병든 부위만을 제거한 다음, 나머지는 그대로 슈퍼마켓의 매장으로 나가게 된다. 정부와 도살업자들은 병든 부위를 제거하면, 나머지 부분은 인체의 건강에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는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과학적으로나 의학적으로 전혀 설득력이 없는 설명이다. 정부 보고서에 의하면, 한해 동안, 암에 걸려 있거나 결핵에 걸려 있는 2백 4십만마리의 소들이 병든 부위만을 제거한채 그대로 식품으로 팔려나가고 있다고 한다.

육식을 하지 말아야 할 이유

1) 혈압을 올린다: 채식주의자의 식단에 고기를 첨가하였더니, 11일만에 혈압이 올라가는 현상을 발견하였다. 첫번째 실험을 마친 후, 다시 원래의 채식으로 돌아간 결과, 다시 혈압이 정상으로 회복되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2) 소화시키기 어렵다: 모든 종류의 동물성 단백질은 소화시키기 어렵다. 동물성 단백질의 소화가 어려운 이유가 몇가지 있지만, 가장 분명한 이유는 고기를 먹는 육식 동물은 체내에서 요산분해효소를 분비하지만, 사람은 체내에서 요산분해효소를 분비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고기를 소화시키기 위해서는 채식으로 식사를 하였을 경우보다 약 2배 이상의 시간이 소요된다.

3) 요산: 고기에서는 특이한 냄새가 나는데, 이것은 고기에 요산이 함유되어 있기 때문이다. 요산은 관절염의 일종인 통풍을 일으키는 주요 원인이다. 요산이 콩팥에 의해서 신속하게 체내에서 제거되지 않으면, 그것은 신체내에 축적되어서 결국에는 통풍을 일으키거나 콩팥이나 담낭에서 결석화 될 수 있다.

4) 독성 쓰레기: 동물의 죽은 시체에는 대사작용의 결과로서 생기는 많은 양의 쓰레기들이 죽은 세포내에 축적되어 있다. 1파운드의 소고기에는 약 0.91그램의 요산과 소변성분이 함유되어 있다. 이러한 쓰레기 들은 채소나 과일의 단백질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들이다. 이러한 쓰레기들은 유해한 성분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신체에 유익을 주는 대신에 해를 끼친다. 의사들이 중병에 걸려 있는 환자들에게 육식을 금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여기에 있다.

5) 10배나 많은 살충제의 양: 고기에는 과일이나 채소에 뿌려진 살충제보다 10배나 많은 양의 살충제가 함유되어 있다. 이러한 살충제들은 동물들이 살아 있을 동안에 먹었던 것들을 통해서 들어와서 축적된 것인데, 동물의 고기에서 발견되는 살충제의 양이 점점 더 많아질 뿐만 아니라 그 농도도 증가하고 있다.

6) 고기에는 섬유질이 부족하다: 과일, 채소, 그리고 각종 곡물에는 풍부하게 많은 섬유질이 고기에는 너무나 부족하다. 그러므로 육식은 대변을 딱딱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대변이 비정기적으로 배설되게 만들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변비에 걸리게 만든다.

7) 고기에는 포화지방의 양이 높다: 물고기를 제외한 모든 동물성 지방과 우유 제품에는 많은 양의 포화지방이 함유되어 있다. 포화지방은 혈중 콜레스테롤을 높일 뿐 아니라, 혈관의 경화현상을 가속화 하고, 심장마비나 뇌일혈을 야기시킨다.

사람은 초식 동물인가? 육식 동물인가?


무엇을 먹어야 하는가?

육식이 건강과 체력의 유지를 위해서 꼭 필요하다는 낡은 견해가 급속하게 꼬리를 감추어 가고 있다. 고기를 먹어야 힘이 세다는 말을 많이 듣게 된다. 정말 그런가? 황소를 생각해 보라. 완전한 채식주의자인 황소는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다. 그 외에 말, 낙타, 하마, 순록, 코끼리 등은 고기를 전혀 먹지 않지만, 강인한 체력과 힘을 가지고 있다.

건강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만, 건강한 인생을 누릴 수 있다. 고기 맛을 잊지 못해서 고기를 먹는 것이 아니라, 고기를 먹어야 힘을 얻고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육식을 선호한다면, 지금이라고 당장 육식을 중단하라. 왜냐하면 고기는 그대의 건강에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육식가와 채식가를 비교 연구한 실험 결과들이 많이 있는데, 전체적으로 채식을 하는 사람들이 인내력과 지구력에 있어서 크게 앞선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올림픽에 참여하는 많은 선수들이 자신의 식사를 채식 위주로 전환하고 있는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고기는 채식으로 마련한 식사보다 실제로 소화되는 영양적 가치가 적을 뿐만 아니라, 인체에 부담을 주는 독소를 가지고 있다. 고기에 독소가 있다는 말의 의미를 이해하는가? 모든 생물은 살아있는 동안에는 대사작용을 통하여 체내의 찌꺼기를 정리하는 일을 계속하게 되는데, 소나 돼지나 닭이 도살공장에서 죽으면 대사작용과 찌꺼기를 정리하는 일은 일시에 멈추게 되어서, 혈관을 통하여 신장을 향하여 가던 찌꺼기들이 그냥 피속에 머물러 있거나 조직 세포 안에 남아 있게 된다. 동물의 시체 속에 남아 있는 찌꺼기들이 여러가지 모습으로 요리되어서 우리의 식탁 위로 올려지게 되는 것이다.

육식을 함으로써, 우리는 너무 많은 단백질을 섭취하게 되는데, 과잉섭취된 단백질은 신장에 많은 부담을 지우게 된다. “우리는 무엇을 먹어야 하는가?” 라는 문제는 일시적인 감각이나 입맛을 위주로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우리 몸이 건강을 유지하는데에 어떤 것이 유익한가를 합리적이고 과학적으로 판단해야 한다. 건강을 잃어버린다는 말은 곧 질병을 얻게 된다는 말과 통한다. 그런데 우리의 건강을 측정하는 가장 정확한 판단 기준은 피가 얼마나 깨끗한가에 따라서 결정된다. 몸이 아파서 병원에 가면, 대부분의 경우에 피검사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피를 검사해 보면, 그 사람이 얼마나 건강하며, 어떤 문제를 가지고 있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피야말로 건강의 판단 기준이며 생명의 근원이다. 그런데, 피는 무엇으로 만들어지는가? 그것은 우리가 섭취하는 음식물에 의해서 만들어 진다. 신선하지 못하고 빈약한 영양을 가진 음식물은 피의 질을 떨어뜨린다. 기를 섭취하면, 피의 질이 크게 저하된다. 채식가와 육식가의 피를 비교해 보라. 그대는 채식가가 가지고 있는 맑고 깨끗한 피를 부러워하게 될 것이다.

채식주의는 우리가 깊이 연구할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 왜냐하면 무엇을 먹느냐 하는 문제는 우리의 인생의 밝고 어두움을 결정하는 문제와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건강하고 웃음이 넘치는 가정이야말로 모든 사람들이 바라고 원하는 가장 행복한 가정이 아닌가?

무엇이 하나님께서 주신 음식인가?

하나님께서 인간의 건강과 행복을 위해서 제정해 주신 첫번째 식단은 채식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어떤 음식이 인간의 몸에 가장 유익한지를 알고 계셨다.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식물이 되리라.”창세기 1:29. 비록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후 영원히 살 수 있는 특권을 상실하였지만,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음식물을 먹었던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의 수명은 오늘날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길었다. 아담으로부터 노아 홍수 전까지의 평균 수명은 912살이었다. 그러나 노아 홍수 후, 지면에 먹을 수 있는 식물들이 없어졌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식물을 얻을 수 없게 되자, 하나님께서는 동물의 고기를 먹도록 허락하셨다. 분명한 사실은, 인체의 생리적 구조에 어떤 변화가 생겼기 때문에 육식을 허락하신 것이 아니라, 갑작스런 환경적 변화 때문에 동물의 고기가 인간의 식탁 위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어쩔 수 없는 환경 때문에 육식이 허락되기는 했지만, 그 결과는 분명하게 나타났다. 노아 홍수 이후, 사람의 수명은 급격히 감소되어서 노아의 아들 샘은 600세까지만 살았고, 아브라함은 175세에 죽은 것으로 성경은 말하고 있다. 육식이 인간의 식단에 등장한 이후, 인간의 몸은 급격하게 쇠약하게 되어서 다윗은 70세까지 살았는데, 그것은 오늘날에도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수명의 한계이다.

채식을 하도록 창조된 인체 구조

해부학적 소화기능을 볼 때에도 인간은 채식을 하도록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확인된다. 초식 동물은 과일, 채소, 풀, 곡식류 등을 먹으면서 살고, 육식 동물은 다른 동물의 고기를 먹으면서 살며, 잡식 동물은 모든 것을 다 먹으면서 산다. 고기를 먹는 동물들의 치아를 살펴보면, 고기를 찢을 수 있도록 길고 날카로운 송곳니를 가지고 있으며, 치아들이 드문드문 나있고, 어금니는 톱니 모양을 하고 있다. 그러나 사람의 치아는 실질적으로 길이가 고르며 치아 사이에 아무런 공간도 없는 완전한 아치형을 이루고 있다. 치아의 수나 형태나 배열을 보아도 사람은 초식 동물의 치아와 동일하며, 육식 동물의 치아와는 전혀 다르다.

육식 동물의 소화기관은 짧아서 코끝부터 등뼈끝까지 길이의 약 3배인데 반하여, 초식 동물의 소화기관은 자기 몸 길이의 12배에 달한다. 사람의 소화기관을 아래와 같은 특성들과 비교해 볼 때, 사람은 채식을 하도록 창조받았다는 진리를 다시 한번 확신하게 된다.

육식동물
1) 장의 길이가 5~6미터 이다.
2) 장의 길이가 짧아서 많은 영양분을 순간적으로 흡수처리 해야한다.
3) 육식동물은 맹장이 없다.
4) 어금니가 없다.
5) 고기에서 나온 독소들이 대장벽에 정체되면 질병에 걸리기 쉽기 때문에 대장 모양이 파이프처럼 원통형으로 되어 있다.
6) 내장이 동물성 단백질을 소화하기 쉽도록 설계되어 있다.
7) 성질이 잔인하다.

초식동물
1) 장의 길이가 10미터 이상이나 된다.
2) 장의 길이가 길어서 영양분을 지속적으로 흡수할 수 있다.
3) 맹장이 잘 발달되어 있다.
4) 어금니가 잘 발달되어 있다.
5) 대장의 구조가 꾸불꾸불한 원통형으로 되어 있다.
6) 성격이 온순하다.

사람의 소화기관은 초식동물의 소화기관 매우 흡사하다. 그러므로 사람은 육식을 하기에 부적당한 소화기관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 인체의 구조를 잘 이해하고 있는 과학자들 사이에 채식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있다. 그들의 주장은 인체는 채식을 하도록 디자인되어 있으므로, 우리가 가진 몸에 알맞는 음식물을 먹자는 것이다.

자동차 엔진 구조에 따라서 사용하는 연료가 다르듯, 육식동물과 초식동물도 각자의 소화기관 구조에 따라서 먹은 음식물이 다르다. 개솔린 엔진에 디젤유를 넣어서 사용하면, 엔진이 어떻게 되겠는가? 초식동물인 소나 코끼리가 죽은 시체를 뜯어 먹는다는 일이 있을 수 있는 일인가? 그런데 사람은 자신들이 가진 세치 혀의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고기와 야채에 많은 양의 감미료를 섞어서 먹는 복잡한 잡식을 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원래에 설계하신대로 살아가지 않는 결과가 너무나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지 않은가? 의학과 식품산업은 최고로 발달되었지만, 몸의 저항력은 급속하게 떨어지고 있으며, 그 결과 수많은 질병들이 난무하게 되었다. 무엇이 문제의 핵심인가? 이 질문에 대답은 독자들의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판단 하에 남겨두기로 한다.

구원에 대한 잘못된 가르침의 근원과 그 역사


A.D. 4세기 경, 기독교계는 신학적 깊은 혼란 속에 빠지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세주로서의 위치가 흔들렸으며, 그리스도와 사도들에 의해서 가르쳐지던 진리가 거의 사라져갔다.

거의 모든 종류의 교리들이 그 원래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방황하게 되었다. 교회는 여러차례와 회의와 결의문을 통해서 정설을 정립하려고 했지만, 그러한 것들은 교회를 점점 더 그리스도의 단순한 복음으로부터 멀어지게 하였다. 이러한 신학적 혼돈 속에서 한사람이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면서 나타났는데, 그의 이름은 어거스틴이다. 그는 당대에 가장 영향력 있는 신학자였으며, 천주교회가 가지고 있는 신학적 오류 중의 상당 부분이 그에 의해서 시작되었거나 수립되었다. 슬픈 사실은, 그의 가르침과 신학적 영향력의 그림자가 오늘날까지 기독교 전체에 드리워져 있어서 거의 모든 교회를 어둡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성장 과정이 미친 영향

어거스틴은 A.D. 354년 북아프리카에서 태어났다. 그의 모친은 기독교인이었고. 그의 부친은 마니교도였다. 마니교는 3세기경에 마니라는 사람에 의해서 창설되었는데, 이 종교는 고대 페르시아의 종교인 배화교(조로아스터교)의 지류로서, 빛과 어두움(선과 악)의 대립을 강조하였다. 즉, 선과 악이 인간의 생애를 함께 다스리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악을 행하면서 살 수 밖에 없다는 교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것을 받아들인 사람은 자신이 범한 죄에 대해서 스스로 합리화하고 핑계를 댈 수 있는 논리적 근거를 가지게 되었다.

어거스틴은 이렇게 이단적 신앙의 배경을 가진 부모의 영향 아래에서 성장하다가 20세가 될 무렵에 이태리 밀란에서 비로서 기독교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하였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기독교인이 된 이후에도, 자신이 어렸을 때에 받았던 이교도적 개념을 머리 속에서 지워버릴 수 없었으며, 어린 시절에 마음 속에 뿌리를 내렸던 사상이 후에 그의 신학적 사상에도 크게 영향을 미쳤다. “인간은 결코 죄를 승리할 수 없다”는 어거스틴의 신학적 견해는 어거스틴 이후 700년 동안이나 계속되어 오면서 수많은 성직자들과 신학자들을 교육시키는 지배적인 사상이 되었다. 중세기의 교회 안에서 형성된 수많은 신학적 오류들은 거의 모두 어거스틴에 의해서 시작되었거나 그를 추종하는 신학자들에 의해서 발전되고 확산되었다. 어거스틴에 의해서 만들어진 잘못된 오류를 받아들인 많은 신학자들은 어거스틴의 세워놓은 오류를 전제로 해서 또 따른 오류를 발전시켜 나가게 되었던 것이다. 한가지 오류가 또 다른 오류를 이끌어 들였다. 한가지 오류를 진리로 입증하기 위해서 또 다른 오류를 만들어 내는 잘못을 범했던 것이다.

예정론이 시작된 배경

이교의 사상에 물들은 어거스틴은 성경에 나타난 중요한 사상, 즉 모든 사람은 자기의 의지를 자유롭게 사용해서 선과 악 중에 어떤 하나를 택할 수 있다는 사상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버지가 가졌던 이교의 영향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절대적이고 독재적인 신으로만 이해했던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인간에게 선택의 자유를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은 받아들이기에 너무나 어려운 사상이었다. 그는 성경에서 어떤 사람은 구원을 받고, 어떤 사람은 구원을 얻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러한 장면을 자신이 가지고 있던 신학적 개념에 끼워 맞추기 시작하였는데, 바로 이것이 예정론의 시작이 되었다.

예정론은 어거스틴의 생존하고 있을 당시에도 많은 도전을 받았는데, 어거스틴은 도전에 대한 응답으로서 누가 구원을 얻던지 간에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일 뿐이며, 연약한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심판과 공의에 대해서 질문할 자격조차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자신의 이러한 주장을 합리화시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에게는 영원한 구원을 지정해 놓으셨으며, 어떤 사람에게는 영원한 저주 가운데 있도록 지정해 두셨다는 예정론을 세울 수 밖에 없었다.

예정론이 만들어낸 또 하나의 오류

어거스틴이 세운 잘못된 견해는 예정론을 만들어 내는데에서 그치지 않았다. 예정론의 오류는 논리적으로 또 다른 오류를 만들어 내었다. 즉, 예정론은 한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게 된다는 개념(once saved, always saved)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초석이 되었다. 예정론은 “절대적인 군주인 하나님께서는 누구를 구원할 것인가를 독단적으로 결정하신다. 그러므로 한번 구원받은 사람은 결코 잃어버림을 당하지 않는다”는 논리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오류를 받아들인 사람들은 자신의 구원에 대해서 거짓 안전감에 도취되게 된다. 현재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고 비도덕적인 죗된 생활을 살고 있으면서도, 자신은 구원받았다는 깊은 자기 기만 속에 빠지게 만든다. 예정론은 복음을 전파하는 면에 있어서도, 설명할 수 없는 여러가지 의문을 제기한다. 만일 모든 사람들의 구원이 하나님의 절대적인 결정에 의해서 이미 결정되었다면, 복음을 전파해야 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전도를 해야 하는 이유와 목적이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 예정론을 받아들인 사람들의 대답은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라는 궁색한 설명을 한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선언하고 있다(디모데전서 2:4).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구원에 이르게 되기를 원하시지만, 인간인 우리의 죗된 선택과 이기적인 결정으로 인하여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는 것이다.

한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는다는 오류는 죗된 생활을 살면서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이론으로 발전되어 나갔다. 한가지 오류에 대한 믿음이 또 다른 오류를 받아들이도록 만든 것이다. 이러한 오류를 받아들인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구원과 죄에 대한 승리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문제가 되며, 경건한 그리스도인의 삶 역시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 되어 버리고 만다. 그리하여 비록 그리스도인이 거듭나고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 안에 있다고 할지라도 결코 죄를 이길 수는 없다고 주장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오류들은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선택의 자유를 부여하지 않았다는 이단적 견해에 근거를 둔 어거스틴의 주장으로부터 나온 망상에 불과하다.

자신의 죗된 경험을 합리화시키기 위해서 수립된 신학

어거스틴은 성(sex)을 원죄라고 주장하였는데, 그의 그러한 주장은 자신의 죗된 생활을 합리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사생아를 낳음으로써 불법적인 아버지가 되었는데, 이것은 그의 사생활이 경건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폭로한다. 어거스틴의 생활 속에 있는 이러한 약점은 그로 하여금 자신의 죗된 생활을 합리화 시킬 수 있는 신학적 핑계를 찾도록 유도하였다. 자신의 생애에서 죄에 대한 승리의 삶을 살지 못했던 어거스틴은 원죄의 폭을 점차적으로 넓혀서 다른 문제에까지 적용하기에 이르렀다. 즉, 태어나기를 악하게 태어났기 때문에 죗된 생활을 살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그의 신학을 지배하게 되었다. 어떤 목사나 신학자도 자신이 경험하고 있는 것 이상의 설교와 신학적 이론을 발전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어거스틴의 생애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어거스틴은 육과 영 사이에 무서운 투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였다. 그는 영이 육을 이길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사랑을 보았을 때에 생기는 마음의 놀라운 변화 즉, 거듭남의 경험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마음이 새롭게 거듭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죄에 대한 승리는 너무나 자연스런 결과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죄에 대한 승리의 경험을 하지 못했던 어거스틴, 참된 거듭남의 경험을 소유하지 못했던 어거스틴은 자신의 죗된 경험에 맞추어서 자신의 신학을 발전시켜 나갔다. 사람이 태어나면서 유전적으로 물려받는 타락하고 이기적인 본성 자체를 죄로 생각하였던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죄는 결코 이길 수 없는 것이 되어 버렸다. 그리하여 그는 죄란 우리가 태어나는 타락한 상태를 죄라고 정의하게 되었다. 그러나 죄란 우리가 태어나는 죗된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을 마음과 행위로 범하는 불순종을 말하며, 성령께서 양심 속에서 들려주시는 조용한 음성을 거절하면서 선택하는 우리의 부도덕한 결정을 말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온전히 마음을 바치고 성령의 능력을 힘입으면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죄를 승리하고 정복하는 순종의 생애를 살 수 있다. 성령께서 인도해 주시고 깨닫게 해주시는 의로운 선택과 의로운 결정을 통해서 말이다.

첫번째 딜레마

그러나 죄에 대한 승리의 경험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던 어거스틴은 육체를 취하시고 이 땅에 태어나셔서 승리의 생애를 사셨던 그리스도를 생각할 때마다 딜레마에 빠지게 되었다. 왜냐하면 자신과 동일한 육체를 취하셨던 그리스도께서는 승리의 생애를 사셨는데, 자신의 생애에는 승리의 경험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어거스틴은 그리스도께서는 인간과 전혀 다른 몸을 가지고 태어나셨다는 억지 논리를 펼치게 되었다. 그러나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육체를 가지고 태어나신 성육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아니하는자가 아니요 모든 점에서 우리와 마찬가지로 시험을 받으셨지만 죄는 없으신 분이요.”히브리서 4:15(킹제임스 성경 역). “자녀들이 피와 살을 나누는 자가 되는 것같이 그 역시 같은 모양으로 동일한 것을 함께 나누는 자가 되심은. . . 주께서 진실로 천사들의 본성을 입지 않으시고 아브라함의 씨를 입으셨음이라. 그러므로 그가 모든 일에 마땅히 자기 형제들과 같이 되셔야 했으니” 히브리서 2:14~18(킹제임스 영어 성경역). 그리스도께서는 천사의 육체를 취하신 것이 아니라, 마리아를 통하여 아브라함의 혈과 육을 유전적으로 받고 태어나셨던 것이다.

어거스틴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타락한 육체를 취하고 태어나셨다는 성육신에 대한 가르침을 뒤집어 엎음으로써, 천주교회를 깊은 암흑 가운데로 이끌어간 무염시태설의 기초를 놓았다. 어거스틴은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신 몸은 우리 인간들의 육체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어머니의 몸 역시 인간의 타락한 본성이 전혀 없는 완전무결한 상태로 바꾸어야만 하였다. 그러한 가르침에 기초하여 교회는 점차적으로 무염시태 즉, 성령께서 마리아의 육체를 완전하게 변화시킨 상태에서 아기 예수를 잉태하였다는 주장을 교리화하게 되었던 것이다. 마리아의 육체가 흠이 없는 완전무결한 상태였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육체도 인간적인 연약함이 전혀 없는 완전 무결한 상태에서 태어날 수 밖에 없다는 논리를 전개했던 것이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대한 진리를 영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곧 예수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라.”요한일서 4:2. 성경에서 육체라는 말은 항상 동일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도덕적으로 연약한 본성을 가진 몸을 의미한다.

어거스틴은,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와는 전혀 다른 육체를 가지고 이 땅에 오셨음을 증명하려고 애썼는데, 그 이유는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와는 전혀 다른 육체를 가졌다는 사실을 입증함으로써,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승리하는 생애를 살 수 있었지만, 그분과 전혀 다른 육체를 가진 우리 인간들은 결코 죄를 승리할 수 없다는 주장을 논리적으로 증명하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신학적 궤변을 통하여 자신의 죗된 생애를 신학적으로 변명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주께서 진실로 천사들의 본성을 입지 않으시고 아브라함의 씨를 입으셨음이라”고 말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진리를 분명하게 세우고 있으며(히 2:14~18), 그분의 모본을 따라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경건하고 승리하는 생애를 살 것을 요구하고 있다.“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요한계시록 3:21

두번째 딜레마

어거스틴이 예수는 인간과는 다른 완전한 육신을 가지고 오셨다는 기상천외한 이론을 세워 놓았지만, 그는 또 하나의 딜레마에 빠지게 되었다. 어거스틴의 이론 때문에 이제 그리스도는 인류로부터 멀어져 버렸다. 그리스도의 육체를 인간의 육체보다 훨씬 높은 자리에 놓음으로써,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이 당하는 시험과 유혹을 당한 일이 없는 분이 되셨다. 왜냐하면 어거스틴의 관점에서 본다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인간들이 시험받고 유혹받는 생애와는 전혀 다른 생애를 사셨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결론은 인간은 결코 죄를 이길 수 없다는 또 하나의 치명적인 결론으로 이끌어 간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다”히브리서 4:15. 어거스틴이 만들어낸 이러한 이론들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면에 있어서 더 이상 인간의 모본이 될 수 없으셨으며, 그 결과 인류를 위한 중보자로서의 자리를 빼앗기게 되셨다. 그리하여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이외의 다른 중보자를 만들어 내게 되었던 것이다. 교회는 신학적으로 완전한 논리를 정립하기 위해서, 다른 인간들처럼 유혹을 느낄뿐만 아니라, 유혹에 굴복하여 죄를 짓기도 하는 중보자를 만들어 낼 수 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교회는 성경이“하나님은 한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라고 선언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어머니인 마리아를 인류를 위한 새로운 중보자로 교인들에게 소개하기에 이르렀다(디모데전서 2:5). 나중에는 이것이 더욱 발전되어 나가서, 수많은 성인(saints)들을 제정하게 되었으며, 사제들과 신부들에게 중보자의 역할을 맡김으로써 신자들로부터 죄의 고백을 받아서 하나님께 중보하게 만들었다. 교회는 어거스틴의 잘못된 사상과 신학에 기초를 둔 교리의 헛점을 메꾸기 위해서 한번에 한계단씩 오류에 오류를 더해갈 수 밖에 없었다. 원죄가 인간을 영원한 생명으로부터 분리시킨다는 교회의 신조 때문에 임신이 되는 순간 태아는 영원한 멸망의 정죄를 받게 되었다.

오류에서 오류로!

그런데 이러한 논리는 또 하나의 질문에 부딪히게 되는데, 그것은 “어떻게 하면 원죄에 대한 죄책감을 벗어날 수 있는가?”라는 교인들의 질문이었다. 이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제시된 것이“세례(영세)라고 불리우는 의식에 의해서 원죄의 정죄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이다. 교회 지도자들의 답변에 뒤이어 또 하나의 질문이 들어 왔는데, 그것은 “세례(영세)받지 않은 자의 운명은 어떻게 되는가?”이다. 여기에 대한 답변은 참으로 끔직한 것이었는데, “세례(영세)를 받지 못한 사람들은 저주를 받아서 영원히 타는 지옥불에 떨어진다.”는 것이었다. 생각해 보라. 세례(영세)를 미처 받기 전에 죽은 어린아이를 가진 부모들에게 있어서 교회의 그러한 답변은 참으로 충격적인 것이었을 것이다. 중세기는 어린아기의 사망률이 매우 높던 때였다. 자신들의 아기가 영원한 지옥불에서 끝없이 고통당하고 있을 것을 상상하는 진실하지만 무지한 그리스도인 부모들의 고뇌는 정말 견딜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교회는 즉각적으로 교인들의 고뇌를 해소시킬 수 있는 설득력 있는 해결책을 강구해야만 하였다. 그래서“연옥”과“림보”라는 기상천외한 것들이 발명되게 이르렀다. 연옥은 하늘도 아니며 지옥도 아니다. 그것은 하늘과 지옥의 중간에 해당하는 곳이며, 림보는 천당은 아니지만 연옥이나 지옥처럼 불타는 고통은 전혀 없는 곳이다. 교회는 이러한 연옥과 림보를 교인들에게 소개함으로써 그들의 마음을 달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교회가 제시하는 그러한 해결책으로도 아기를 잃어버린 부모의 아픈 심정을 완전히 달랠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교회는 드디어“유아 세례”라는 의식을 만들어 내기로 결정하였다. 출산의 고통 속에서 죽어가는 산모의 배 위에 신부가 물을 뿌리면서 이제 유아와 산모가 모두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선언하는 유아 세례야말로 교인들의 요구를 완전하게 만족시켜 주는 것이었다. 이런 식으로 해서, 한 신학자의 잘못된 사상이 오류에서 오류로 발전되게 되었는데, 결국에는 그러한 오류들이 교회의 정식 교리로 채택되기에 이르렀다.

아퀴나스와 바벌라드 같은 신학자에 의해서 어거스틴의 이론이 잠시 주춤거리기도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16세기 초에 위대한 종교 개혁 운동이 일어나고 개혁자들이 교회의 부패와 오류에 대해서 대항하였지만, 천년에 걸쳐서 뿌리 깊이 박혀있던 오류의 근원을 송두리채 뽑아내는 일에는 부족함이 있었다. 구교를 대항하여 개신교 운동이 전개되었지만, 어거스틴의 이론은 개신교회 중심부까지 들어와서 깊이 자리 잡게 되었다. 루터가 죽고 나서 그의 동료 개혁자인 멜랑톤이 루터 교회를 예정론에서 끌어냈지만, 장로교회를 수립한 요한 칼빈이나 요한 낙스는 예정론을 받아 들였다. 그 후에 감리 교회의 창시자인 요한 웨슬리에 의해서 예정론이 거절되고, 한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는다는 가르침이 오류로서 지적되었지만, 여전히 현대 기독교 안에 이러한 가르침들이 넘실거리고 있다. 이기적이고 거듭나지 못한 인간의 본성은 이러한 오류들을 선호할 뿐만 아니라, 성경의 분명한 진리를 거절하게 만든다. 그리하여 어거스틴과 그의 후예들이 수립한 거짓 교리들이 소위 정통이라고 주장하는 교파에서도 공식적인 가르침으로 채택되고 있는 실정에 있다. 오늘날 교파가 갖는 의미는 거의 사라져 버렸다. 자신이 어떤 교파에 속해 있다는 소속감 보다는 자신이 정말 하나님의 진리를 올바로 믿고 있는지를 확인하면서 살아가야 할 때가 되었다.

예정론과 한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는다는 가르침, 그리고 십자가에서 율법이 폐하여졌으므로 십계명은 더 이상 그리스도인들이 지켜야 할 도덕률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도덕률 폐기론,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일지라도 결코 죄를 이길 수 없다는 가르침이야말로 교회를 세속적이고 무능력하게 만들어 가는 장본인이다. 누가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진리를 넘어뜨리려고 하는가? 마지막 시대에는 진리 위에 굳건히 서있는 그리스도인들만이 살아남게 될 것이다. 구원에 관한 진리는 이렇게 믿어도 되고 저렇게 믿어도 되는 가르침이 아니다. 인간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진리는 오직 하나뿐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라. “너희가 믿음 위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린도후서 13:3

1부 - 기독교회를 움직여 온 일곱 교회 예언

도전과 응전 속의 투쟁의 역사

요한계시록 1장 11절 이하부터 일곱 교회에게 보내는 기별의 서문이 기록되어 있다.

“가로되 너는 보는 것을 책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일곱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 촛대 사이에 인자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그 오른손에 일곱별이 있 ... 그러므로 네가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네가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별의 비밀과 일곱 금촛대라 일곱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11~20절.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20절.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와 교회에서 비쳐나오는 진리의 빛을 빛나는 금촛대로 상징해 보이셨다. 사도 요한은 일곱 금촛대 즉, 일곱 교회 사이를 거니시면서 진리를 위해서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계시 중에 보았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일곱 교회에 대한 예언을 주시면서,“네가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고 말씀하셨다. 즉, 일곱 교회에 대한 예언은 사도 요한의 시대부터 계속해서 이어질 그리스도 교회의 역사와 성도들의 경험에 대한 예언이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셨다. 교회를 통하여 계속해서 이어지는 하나님의 진리에 대하여 공격하는 사단의 도전과, 사단의 도전에 대한 응전으로서 진리를 보호하고 그것을 통하여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그리스도의 역사가 일곱 교회의 예언이 말하는 욧점이다.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 즉, 교회에게 보내지는 기별자들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께서 시작하신 복음 사업은 그의 부르심을 입은 증인들을 통해서 수행된다. 빛과 어두움의 세력이 투쟁하는 교회사에 있어서, 참 진리의 빛을 가진 교회가 세상에서 거의 사라진 것처럼 보였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각 시대마다 당신의 사자(기별자)들을 통해서 진리와 참된 믿음을 보존해 오셨다. 과거 2천년 동안 그들을 통하여 진리의 횃불은 이어져 내려왔으며, 이 시대에도 진리를 이어가는 당신의 종들이 있다. 빛과 어두움의 대쟁투는 마지막 때가 가까울수록 그 투쟁이 극심해질 것이지만,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에게 당신의 사자들을 보내심으로써, 교회를 붙잡아 주셔왔고 또한 주실 것이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모습은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이미 약속되었다.“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태복음 28:20. 일곱 교회는 그리스도의 승천 이후 즉, 사도 시대부터 예수께서 다시 오시는 재림 때까지 하나님의 교회가 사단의 끊임없는 도전과 공격 속에서 걸어나가는 과정을 그 시대적 특성에 따라서 일곱으로 나눈 것이다.

14일곱 교회에 대한 성경 학자들의 견해

“일곱 교회는 세상에 있는 하나님의 거룩한 교회를 대표한다... 사도 요한이 일곱 교회에게 보낸 편지는 각 시대마다 교회의 영적 상태와 도덕적 수준이 어떻게 변천하여 나갈지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캠브리지 바이블.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의 형편은 사도 요한이 계시를 통하여 보았던 교회의 변천 역사를 묘사하기에 가장 적당하다. 일곱 교회는 각 나라와 민족 사이에 펼쳐져 있는 그리스도 교회를 대표하는 것으로써, 세상 마지막까지 교회의 역사와 상태가 어떻게 변화될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의 입회 하에서 온 세상의 교회가 변천되어 나가는 모습이 밧모섬의 요한에게 펼쳐졌으며, 요한은 각 시대의 교회마다 하나님의 축복이 부어지는 장면을 기록하였다.” 윌리엄 밀리건, 계시의 책.
“일곱 교회는 모든 교회와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하는 모든 사람들을 대표한다. 각 시대마다 세상에 펼쳐져 있던 그리스도인들의 상태와 그들의 신앙을 완전하게 묘사하고 있다.” Seiss, 130페이지.

일곱 교회에 대한 이러한 해석은 가장 합리적이고 논리적일 뿐 아니라, 이 계시가 주어진 목적과 요한계시록이 전하고 있는 전체적인 기별과도 잘 부합된다. 일곱 교회는 그리스도의 초림부터 재림까지의 모든 교회들을 대표할 뿐 아니라, 그 사이의 시간을 일곱 부분으로 나누어서 그리스도 교회의 역사적 변천을 설명해 주고 있다. 일곱 교회에게 보내는 서신의 내용은 각 시대마다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교회의 상태를 설명하고 있다. 성경 학자들 사이에서 가장 공통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일곱 교회에 대한 해석을 다시 살펴보자.”사도 요한이 일곱 교회에게 보낸 서신에 대한 가장 적절한 분석은, 일곱 교회는 연속적으로 전개되어온 그리스도 교회 역사에 대한 예언적 묘사라는 것이다. 즉, 일곱 교회는 그리스도의 승천부터 재림까지 이어지는 교회의 타락과 회복 그리고 실패와 회개의 연속적인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A.J. 골든, The Sprit of Ministry 132페이지.

“일곱 교회에게 보낸 사도 요한의 서신을 반드시 그 당시 즉, 1세기에 존재했던 일곱 교회에게만 적용시켜서는 않된다. 왜냐하면 그 편지들은 예언적인 내용들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일곱 교회에게 보내는 서신은 지상에 있는 그리스도 교회의 역사를 일곱으로 나누어서 설명하고 있으며, 아울러서 일곱으로 나누어진 각 시대마다 특징적으로 나타나게 될 교회의 상태를 묘사하고 있다.” 윌리엄 멕카렐, 교회에게 보내는 그리스도의 일곱 서신.

일곱 교회의 순서가 지니고 있는 의미

왜 요한은 일곱 교회의 이름을 순서에 맞추어서 기록하였는가? 그 순서에 어떤 의미가 담겨져 있는 것은 아닐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거룩한 예언을 인간에게 주실 때, 무질서하거나 부주의하게 주시지 않으신다. 밧모섬에서 계시를 통하여 예언을 받던 요한은 그 기별이 전달되어지는 순서에 따라서 교회의 이름이 불리워지는 것을 들었다. 일곱 교회는 에베소 교회를 시점으로 하여 로마로 가는 길을 따라서 원형을 이루고 있었다. B.C. 130년 경에 지중해 연안을 따라서 지나가는 로마제국의 하이웨이가 건설되었는데, 그 길은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지방을 통과해서 지나갔으며, 로마제국의 우편물을 배달하는 길이 그 지방의 수도인 버가모로부터 시작해서 동쪽으로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그리고 라오디게아 지방을 통과하여 지나가고 있었고, 에베소로부터 직접 라오디게아로 연결되는 또 하나의 우편물 운송로가 있었다. 이 길은 그 당시 로마제국 사람들이나 상인들에게 잘 알려진 길이었다. 요한계시록을 기록할 당시, 밧모 섬에 유배중이던 요한은 각 지방에 있는 교회들에게 그리스도께 받은 계시의 내용을 전할 때에 밧모섬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던 에베소로부터 시작되는 원형의 순환도로를 이용하였다고 보는 것이 가장 논리적이고 타당성이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계시해주신 일곱 교회의 이름의 순서대로 그리스도 교회의 역사가 전개되었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다. 또한 요한계시록 2~3장에서 일곱 교회에 대하여 개별적으로 교회의 상태를 서술할 때에도 그 순서에 맞추어서 기록된 것으로 보아서도,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계시해 주신 일곱 교회의 순서가 그리스도 교회의 역사적인 순서라고 확신할 수 있다.

물론, 요한이 계시를 통해서 본 일곱 교회에 대한 예언이 기독교회 역사의 일곱 시대를 상징하는 것이긴 하지만, 특별히 마지막 일곱번째 시대의 기독교회(라오디게아 교회, 현대 기독교회)를 위해서 기록되었다는 증거가 요한계시록 전체에 걸쳐서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일곱 교회에 대한 예언이 주어진 가장 중요한 목적은 세상 역사의 마지막 때에 있을 그리스도의 재림을 위하여 마지막 남은 무리 즉 마지막 시대의 하나님의 참 백성들을 준비시키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을 연구해야 하는 중요성은 마지막 종말이 가까울수록 증가된다. 한 세기가 끝나고 다시 새로운 세기가 시작될 때마다 성경의 마지막 결론부인 요한계시록을 연구해야 하다는 도전이 심각하게 증대되어 왔다. 마지막이 가까운 지금 이 시대야말로 요한계시록을 연구해야 된다는 요구가 가장 강력하게 강조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그 설득력을 더해가고 있다. 요한계시록 1장 3절에 기록된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라는 말씀이 가장 크게 부각되어야 할 때가 되었다.

 

2부 - 기독교회를 움직여 온 일곱 교회 예언


제1부에서 살펴본 것처럼, 소아시아 지방에 있던 일곱 교회에게 보내어졌던 서신은 각 시대에 살았던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서 기록되었던 그리스도의 기별이다.

일곱 교회에 대한 예언은 그리스도의 초림부터 마지막 시대의 재림 때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그리스도 교회의 역사를 말한다. 요한이 그의 서신을 보내기 위해서 이용하였던 로마제국의 우편물 운송 하이웨이는 그리스도 교회가 지나게 될 시간의 하이웨이를 묘사하는데 있어서 얼마나 적합한 상징적 표현인가!

만일 우리가 로마제국의 우편물 운송로를 통하여 요한의 서신을 받아 보았던 당시의 소아시아 지방에 있던 일곱 교회의 배경과 형편을 좀더 자세히 살펴본다면,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주신 일곱 교회에 대한 예언의 의미를 좀더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다. 요한계시록 2~3장에 기록된 일곱 교회에 대한 기별을 다음과 같은 6항목으로 나누어서 분석해 보자; 1) 기간, 2) 교회 이름의 의미, 3) 칭찬의 말씀, 4) 책망의 말씀(일곱 교회 중 다섯 교회에게 보내는 서신에 책망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음), 5) 권면의 말씀, 6) 이기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약속의 말씀. (각 교회에 대한 성경절을 성경에서 찾아가시면서 읽으시면 더욱 분명하게 이해하실 수 있음)

각 시대마다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을 통하여 연연히 이어지는 순결한 진리와 믿음의 대장정은 일곱교회의 예언을 공부하는 그리스도인의 마음 속에 교회 안에 역사하는 사단의 도전과 그리스도의 응전을 보다 분명하게 그릴 수 있게 될 것이다.

1. 에베소 교회(요한계시록 2:1~7)

1) 기간: A.D.34~100년(사도교회 시대; 십자가 이후부터 마지막 사도가 죽을 때까지)

2) 이름의 의미: 에베소라는 이름은“바람직한, 흠모할만한”이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 사도들과 제자들이 생존해 있어서 그들로부터 직접 설교를 듣고 온갖 오류와 잘못된 가르침으로부터 보호를 받았고, 그리스도의 사랑과 성령을 체험하였으며, 복음전파를 위한 위대한 업적을 남겼던 에베소 교회 시대야말로 가장 바람직한 시대라고 말할 수 있다.

3) 칭찬의 말씀: 에베소 교회는 로마 제국의 네로 황제의 핍박 속에서도 지칠줄 모르는 열심과 수고를 다하여 일하는 교회였다. 또한 성경 말씀에 기록된 진리에 충성스러웠으며, 에베소 교회의 교인들은 그들을 가르치는 사람들을 진리로서 시험하였다.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 3절

에베소 교회는 니골라당의 가르침(영지주의, Gnosticism)을 반대하였는데, 니골라당에 속한 사람들은 도덕률에 순종하기 위해서 구태어 육체의 욕구를 자제할 필요가 없다고 가르쳤다. 또한 물질과 육체는 악하고 영은 선하기 때문에 육체의 방종이나 죗된 행위는 영의 구원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가르쳤다. 어떤 의미에서 니골라당은 현대 그리스도 교회에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자유주의적인 가르침 즉, “그리스도를 지적으로 인정하고 믿기만 하면 구원받으므로, 하나님의 율법에는 순종할 필요가 없다”라는 가르침의 시조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니골라당의 가르침에 대항하여 일어선 에베소 교인들을 칭찬하셨다. “네가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6절

4) 책망의 말: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4절). 에베소 교회의 열심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첫사랑을 잃어버렸다. 처음 그리스도 교회의 신앙을 받아들였을 때에 가졌던 순결한 사랑의 정신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식어갔다.

5) 약속의 말씀: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7절. 인간이 범죄한 이후, 사람은 생명의 나무에 더 이상 접근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성령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회개학고 죄를 승리하는 자들에게는 다시 생명 나무의 과실을 먹을 수 있는 영원한 특권이 약속되어 있다. 오직 성령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진 그리스도인들만이 이기심과 죄로부터 승리할 수 있으며, 진리를 분별할 수 있다. 교회 안에 그리스도인들이 가득차 있지만, 성령의 음성을 들을 수 있을 만큼 양심이 순결한 참 그리스도인들의 숫자는 많지 않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7절

2. 서머나 교회(요한계시록 2:8~11)

1) 기간: A.D. 100~313년(핍박과 순교의 시대; 사도 시대 이후~로마 제국의 콘스탄틴 황제가 그리스도 교회로 개종하기 전까지)

2) 이름의 의미 : 서머나 라는 이름은 향수의 일종인 “몰약”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서머나 교회는 로마제국이 가하는 극렬한 핍박을 통과하였지만, 그 핍박은 교회를 파괴시키는 대신에 하늘의 복음이 온 세상에 향수처럼 번져나가는 계기가 되었다. 서머나 교회 시대는 핍박의 시대였지만, 오히려 그 고통을 통하여 신앙이 승화되고 복음이 온 천하로 전파되는 시대였다.

3) 칭찬의 말씀 : 두번째 교회인 서머나 교회에 대한 핍박은 로마제국의 콘스탄틴 황제가 A.D. 313년에 그리스도 교회로 개종하기 직전까지 계속되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서머나 교회에게는 어떠한 책망의 말씀 대신에, 위안과 위로의 말씀만을 남겨 두셨다. 왜냐하면 그분께서는 서머나 교회가 환란과 핍박 속에서도 인내하면서 충성할 것을 아셨기 때문이다. 서머나 시대 동안에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의미는 고난을 위해서 부르심을 받는다는 뜻을 포함하고 있었다. 교회에 가해졌던 고난과 핍박은 교회를 순결하게 정화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서머나 교회 중에는 “자칭 유대인”이라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었지만, 그들은“사단의 회”였다(9절). 그리스도인들을 시기하고 미워하던 유대인들은 로마 정부와 결탁하여 그리스도인들을 잡아주고 죽이는 일에 앞장섰다. 사도 바울은 진정한 의미의 유대인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로마서 2:28. 오직 성령을 통하여 거듭난 그리스도인만이 참된 하나님의 백성이다.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갈라디아 3:29

4) 권면의 말 : 그리스도께서는 서머나 교회가 당면할 가난과 궁핍을 아셨다. 그러나 그러한 어려움은 그들의 신앙을 부요하게 만들었으며, 그들을 사랑과 봉사의 그리스도인들로 변화시켰다. 그들은 가난하였지만 부유하였고, 부유하였지만 가난한 사람들이었다.“내가 네 환란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네가 장차 당할 고난을 두려워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 몇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란을 받으리라.”9~10절. “십일”이라는 기간은 예언 해석 원칙에 의해서, 10년으로 환산된다(1일은 1년으로 환산된다. 민수기 14:34, 에스겔 4:6, 살아남는 이들 제5호와 9호 참조). 그러므로 “십일 동안의 환란은“십년 동안의 환란”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서머나 교회 시대 동안, 사단은 로마제국의 핍박을 통해서 그리스도 교회를 제거하려고 노력하였다. 로마제국은 그리스도 교회의 신앙이 사람들 사이에 인기있는 사상이 될 것을 두려워 하였다. 그들은 그리스도 교회를 하나의 위험한 경쟁자로 생각하였던 것이다. 수많은 핍박이 가해졌지만, 디오클레시안 황제 치하에서 이루어진 마지막 10년간의 핍박 즉, 차기 황제인 콘스탄틴 대제가 그리스도 교회로 개종을 하면서 그리스도 교회에게 자유를 주기 전까지인 A.D. 303~313년 사이의 10년간의 핍박이 가장 극심하였던 사실을 역사는 증거하고 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10절. 핍박과 순교의 시대를 통과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이 말씀은 얼마나 커다란 격려와 위로가 되겠는가! 이 말씀을 입술로 되새기면서 사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순교자들의 모습을 상상해 보라.

3. 버가모 교회(요한계시록 2:12~17)

1) 기간 : A.D.313~538년(타협의 시대; 로마 황제인 콘스탄틴 황제가 그리스도 교회로 개종한 이후, 그리스도 교회는 로마제국의 국교가 됨에 따라서 사람들의 인정과 인기를 추구하기 시작하였고 갑자기 수많은 이교도들이 콘스탄틴 황제를 따라서 개종하게 되었다. 교회는 새로 개종한 이교도들과 국가의 요구에 따라서 진리를 타협하게 되었다)

2) 이름의 의미: 버가모라는 이름의 뜻은 “성채, 요새”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핍박의 시대 동안에도 굳건하게 지켜지던 믿음의 순결함이 정치와 종교가 서로 손을 마주 잡음으로써 핍박이 중단되고 세속과 권력이 교회 안에 들어오자, 믿음의 성채는 무너지고 그 순결함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A.D. 313년, 콘스탄틴 황제가 그리스도 교회를 국교로 선포한 이래 교회는 세속과 타협의 길을 걸었다. 그리스도께서는 버가모 교회를 위기로부터 구하기 위해서 일하시는 당신의 모습을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이”로 나타내셨다(12절).

버가모 도시는 사단이 지배하는 종교의 본부지였다. 그리스도께서는 버가모 교회에게 말씀하시기를“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단의 위(seat, 보좌)가 있는데라.”13절. 페르시아가 바벨론을 정복한 후, 페르시아는 바벨론에 속해 있던 버가모 도시의 시민들에게 자유를 허용하였다. 그리하여 바벨론이 멸망한 후에도 바벨론의 종교는 계속되었으며, 바벨론 신전의 제사장들도 그들의 신앙을 계속 이어갈 수 있었다. 바벨론의 종교는 버가모를 통하여 나중에는 로마에까지 전달되었다. 버가모는 고대 바벨론과 로마제국을 연결하는 중간 고리 역할을 하였다.

4)칭찬의 말씀: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단이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13절. 비록 버가모 도시가 사단이 주도하는 바벨론 종교의 중심지이긴 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신실한 백성들을 가지고 계셨다. 안디바(Antipas)는 버가모에서 순교당한 그리스도인들 중에 대표적인 인물이다. 안디바(Antipas)라는 이름에는“Anti-대항하는, Papas-교부(교황)”라는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에, 그 당시“교부에 대항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일컬어 안디바(Antipas)라고 불렀다. 로마제국이 그리스도 교회를 국교로 인정하면서 교회는 사람들에게 더 많은 인정을 얻고 권력자들의 요구에 순응하기 위해서 타협의 길을 걸었다. 이러한 때에 안디바라고 불리우던 소수의 그리스도인 그룹은 교회의 지도층 즉, 교황권에 대해서 저항하였던 것이다. 타협과 세속의 길을 걷던 버가모 교회에 있어서, 안디바는 하나님의 남은 백성(참 백성)을 대표하였다.

5) 책망의 말씀: 배도는 참으로 신속하게 발전해 나갔다! 제1세기 교회인 에베소 교회에 나타났던“니골라당의 행위”가 버가모 교회에 와서는“니골라당의 교훈”(doctrine, 교리)으로 발전되었다. “네게도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15절. 니골라당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리이스와 로마의 관습과 철학 위에 세우려고 노력하였다. 니골라당의 인간적인 가르침은 교회 안의 부유층과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에게 특히 많은 영향을 미쳤다. 니골라당의 가르침은 하나님의 말씀이 요구하는 고결한 표준을 사람들의 미묘한 철학적 논리와 이교 사상과 혼합시킴으로써, 하나님의 진리가 요구하는 바를 논리적으로 부인하도록 유도하였다. 인간의 의와 논리 위에 세워진 니골라당의 가르침이 버가모 교회 시대에 만연되었다. 사단은 에베소 교회시대 이후 계속해서 니골라당의 핵심 교리인“복음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의무로부터 그리스도인을 해방시킨다”라는 도덕률 폐기론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교회를 공격해 왔던 것이다.

6) 권면과 약속의 말씀: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돌을 줄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할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17절. 만나는 신약 성경에서 그리스도와 그분의 말씀을 상징한다(요한복음 6:26~63). 우리가 날마다 그리스도께 나아가면, 그분께서는“생명의 떡”을 우리에게 나누어주셔서 우리의 품성과 생애를 그분과 같이 변화시켜 주신다. 우리가 생명의 떡인 그리스도의 말씀을 읽을 때, 우리는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키는 하늘의 만나를 먹는 경험을 하게 된다.

“흰 돌”에는 깊은 의미가 담겨 있다. 그 당시 법정에서 재판을 할 경우, 흰 돌과 검정 돌을 사용해서 재판 결과를 나타내었다. 흰 돌은 무죄 석방을 의미하였고, 검정 돌은 유죄를 의미하였다. 또한 노예가 자유인이 되었을 때에는 그에게 흰 돌을 주었는데, 때때로 새로운 이름이 그 돌 위에 새겨졌다. 그리고 흰 돌은 싸움에서 15번 이상 승리한 투사에게도 주어졌다. 흰 돌은 자유와 명예의 상징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므로“흰 돌”은 그리스도 안에서 죄와 세상을 승리한 그리스도인이 죄의 사슬에서 해방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명예를 얻게 되는 것을 상징한다. 오늘날에도 오직“흰돌”을 받는 경험을 하는 사람만이 구원의 약속을 받게 될 것이다.

4. 두아디라 교회(요한계시록 2:18~28)

1) 기간 : A.D.538~16세기초(종교 암흑시대의 교회, 광야로 피신한 교회; A.D. 538년, 유럽의 국왕들을 지배할만큼 강력한 교황권의 세력이 확립됨에 따라서, 교황권은 교회가 제시하는 교리와 지시를 거절하고 성경이 말하는 진리를 고수하기로 선택한 그리스도인들을 직접적으로 핍박할 수 있게 되었다. 교회사 중에서 이 시기에 진리가 가장 많이 왜곡되고 변질되었다. 두아디라 교회는 16세기 초에 종교개혁 운동이 시작하기 전까지의 교회를 말하는데, 중세기의 종교 암흑시대 동안에 하나님의 참 백성들은 산과 계곡으로 피신하여 진리를 고수하였다)

2) 이름의 의미: 두아디라의 이름이 가진 의미는“통탄스러운 희생”인데, 이것은 이 시기를 대표하기에 너무나 적합한 의미이다. 교회 안으로 밀려 들어온 배도로 인하여 믿음의 단순성이 외적인 행함과 고행으로 대치되고 희생되었다. 교회 역사의 4번째 시기인 두아디라 교회 시대에 와서,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주신 단순한 복음을 떠나서 복잡한 종교 의식과 인간 중보자와 인간 제사장 제도를 만들었다. 이 시기는 그리스도 교회에 있어서 참으로 깊은 상처를 가져온 시기였다. 교회는 마음의 중심으로부터 우러나오는 회개의 신앙을 저버리고 죽은 행위과 의식을 신앙의 기초로 만들어 나갔다.

3) 칭찬의 말씀: 두아디라 교회에게 보내는 기별을 말씀하신 분은“그 눈이 불꽃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로 묘사되었다(18절).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른 사실에 주의를 기울여 보자. 요한계시록 전체에서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른 곳은 바로 여기 뿐이다. 중세기의 종교암흑시대 동안에 하나님의 아들인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인류를 위한 중보자의 위치를 교회 지도자들에 의해서 빼앗기셨다. 마리아라는 인간 중보자가 등장함으로써, 사람들은 그리스도께 직접 나가는 대신에 마리아라는 여인을 바라보도록 가르침 받기 시작했다.

두아디라 교회는 약 천년에 이르는 가장 긴 기간의 교회의 역사를 차지하고 있는데, 역사가들은 그 기간을 종교 암흑시대라고 부르고 있다. 종교개혁운동에 의해서 두아디라 교회 시대는 그 종말을 고했다.

그리스도께서는 교황권의 핍박을 피하고 진리를 고수하기 위하여 광야로 도망간 그리스도인들을 칭찬하시면서, 특히 그들의 “나중 행위”를 칭찬하셨다. “내가 ...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19절. 두아디라 교회 시대가 끝나갈 무렵, 위대한 개혁자들 즉, 루터, 낙스, 칼빈, 쯔윙글리 등과 같은 성직자들이 유럽의 이곳 저곳에서 일어나서 개혁운동을 이끌어 나가기 시작하였다.

4) 책망의 말씀: 7개의 서신 가운데 가장 길고 강력한 책망의 말씀이 두아디라 교회에게 보내졌다.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20절. 세속화되고 변질된 교회를 표상하기 위해서 이세벨 만큼 적절한 표상은 없을 것이다. 이세벨은 페니키아의 여제사장이었는데, 이스라엘의 왕인 아합은 이세벨과 결혼함으로써, 바알신이 이스라엘로 들어오는 문을 열어 놓았다. 이세벨은 결국 국권을 사용해서 이스라엘의 전체가 우상숭배를 하도록 유도하였다. 바로 그러한 상황에서 엘리야 선지자가 아합왕 앞에 나타나서 이스라엘의 배도를 책망하면서 3년 반 동안 이스라엘 땅에 비가 내리지 않는 대기근이 있을 것이라고 말하였지만, 아합왕과 이세벨의 추종자들은 엘리야의 개혁의 호소를 듣지 않았다.

이스라엘의 왕인 아합과 이세벨의 결혼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전체가 배도에 빠지게 되었던 것처럼, 우상숭배와 이교 사상을 받아들인 두아디라 교회의 지도자들은 중세기 동안 교회에게 주어졌던 엄청난 권력을 이용하여 각종 우상숭배와 잘못된 교리를 백성들에게 강요하였다. A.D. 538년, 저스티니안 로마 황제는 로마 교회의 주교를“이단자들을 교정하는 자”로 세웠는데, 교회는 이단을 박멸한다는 명분을 앞세워서 교회의 지시와 가르침을 거절하는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을 투옥하고 사형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해서, 교회가 정치의 권력과 손잡고 사람들의 양심의 자유를 탄압하는 종교 암흑시대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약 천년 동안 교회는 영적인 대기근에 들어가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높은 산과 계곡의 토굴 속으로 당신의 백성들을 인도하셔서 보호하셨으며, 그들을 통하여 진리를 보존하고 개혁의 기별을 전파하시면서 두아디라 교회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셨지만, 끝내 회개치 아니하였다.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그 음행을 회개치 아니하는도다.” 21절. 오히려 교회는 개혁 운동에 참여한 개신교도들에 대항하여 반 개신교 운동을 전개함으로써, 하나님께서 보내신 기별을 보지 못하도록 수많은 사람들의 눈을 가리우고 말았다.

5) 권면의 말씀: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25절. 이 말씀은 계시록에 나오는 첫번째 재림에 대한 약속이다. 이 시기 동안, 어거스틴과 같은 사람은 성경의 위대한 진리인 부활에 관한 가르침을 크게 왜곡시켰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재림시에 죽었던 몸이 실제적으로 부활하는 것으로 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거스틴은 죽은 영혼이 몸을 빠져나와 부활하는 것으로 왜곡하여 가르쳤다.

6) 약속의 말씀: 이기는 자에게 그리스도께서는“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약속하셨다(26절). 교회가 엄청난 배도로 인하여 가장 길고 어두운 밤을 통과할 때에, 그리스도의 영께서는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개혁자들을 일으키셨다. 위클립, 허스 등과 같은 개혁자들은 종교 개혁의 아침을 불러온 새벽별이었다. “또 내가 그에게 새벽별을 주리라.” 28절.

5. 사데 교회(요한계시록 3:1~6)

1) 기간: 16세기 초~18세기 말엽(종교 개혁과 분열의 교회; 종교개혁운동과 함께 진리와 단순한 믿음이 되살아 나는듯 했지만, 개혁의 정신이 사라지면서 개혁자들의 후예들은 각기 다른 교파를 만들어서 안주함으로써 개신교 운동이 분열되기 시작하였다)

2) 이름의 의: “사데”라는 이름은“남아 있는 것들”또는“새로운 것”을 의미한다. 사실상, 천년이라는 길고 긴 배도와 박해의 시간을 통과하면서, 그리스도 교회는 참된 신앙을 거의 모두 잃어버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정하신 시간이 되자, 광야에 피신하였던 소수의 남은 무리(참 백성)와 개혁자들은 개신교회의 아침을 열었다. 이 시대에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이“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로 표현된 것은 그리스도께서 성령과 당신의 개혁자들을 통하여 무너졌던 진리를 회복할 것을 말하기 위함이다(1절).

3) 칭찬과 책망의 말씀: 사데 교회에 대한 칭찬의 말씀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사데 교회는 과거에 개혁자들이 이루어 놓은 영광에만 의존하여 존속하였다. 몇몇 살아있는 것들도 거의 죽어가고 있었다. 외적으로는 아직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내적으로는 죽어가고 있었다. 종교 개혁 이후, 여러 개신교회들이 그리스도 교회의 신앙을 회복하는듯이 보였지만, 내적으로는 생명력을 잃고 죽어가고 있었다.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을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1절. 종교 개혁의 선구자들 덕분에“살았다는 이름”을 가졌지만, 거의 죽게 된 상태에 이르렀다. 한 때 그들이 개혁자들에게 들었고 받았던 신앙이 잊혀져 가고 말았다.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를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3절. 그러나 그러한 사데 교회 안에도 몇몇 소수의 그리스도인들은 부패되지 않은 신앙을 유지하였으며, 의의 흰 옷을 입고 있었다.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몇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4절. 대부분의 개신교회들이 내리막 길을 달릴 때에도, 모라비안 교도(개혁자 허쓰의 후예)와 퀘이커 교도(영국의 죠지 폭스의 후예)와 청교도들은 개혁의 정신을 유지해 나갔다.

사데 교회는 한 때 진리의 빛과 약속을 가지고 시작하였지만, 곧 신학과 교리 분쟁에 골몰함으로써, 형식주의에 빠지게 되었고 개혁 사업은 중단되고 말았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믿음을 통하여 마음과 성품을 변화시킨다는 성경의 대진리가 신학적 분쟁과 논쟁에 의해서 깊이 파뭍히고 말았다. 우리가 아무리 루터와 칼빈과 웨슬러의 후예라고 할지라도, 그리고 세상이 우리를 정통이라고 인정해 줄지라도, 우리 안에 살아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임재해 있지 않으면 그러한 인정과 역사들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종교 개혁자의 후예들은 자신들이 천주교회와의 투쟁에서 승리하였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조직과 교단을 만들어서 안주하기 시작하였다. 루터와 낙스와 같은 개혁자들에 의해서 시작된 위대한 개혁 사업이 이제는 사람들의 돈에 의해서 운영되는 공공단체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하나님의 말씀을 소유하고 있다는 자만심이 영혼을 병들어 가게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데 교회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저버리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는 영국에서 청교도들을 일으키셔서 신대륙인 미국에서 완전한 종교 자유를 가지고 그리스도 교회의 신앙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열어 주셨다(살아남는 이들 제5호 참조).

6. 빌라델비아 교회(요한계시록 3:7~13)

1) 기간:  18세기 말엽~19세기 중엽(세계를 향하여 나간 선교 교회)

2) 이름의 의미: 빌라델비아는 “형제의 사랑”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3) 칭찬과 책망의 말씀: 빌라델비아 교회에는 전혀 책망의 말씀이 없다. 빌라델비아 교회의 이름이 의미하는 바처럼, 이 교회는 정열과 아름다움으로 채워진 교회이다.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8절. 사데 교회에게는 전혀 없던 칭찬의 말씀이 빌라델비아 교회에게 기록되어 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영혼을 채우고 나가서 선교에 전념한 교회였다.

4) 권면의 말씀: 빌라델비아는 그리스도 교회의 역사상 가장 전도 설교가 성한 시대였다. 요한 웨슬리, 조지 휫트휠드, 요나단 에드워드 등과 같은 수많은 전도자들이 나와서 복음을 전파하였다. 특히, 웨슬리는“세계가 나의 전도 지역이다”라고 말함으로써 열렬한 선교 정신을 표현하였는데, 그는 칼빈이 주장한 구원받을 자는 이미 예정되었다는 “예정론”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반대함으로써, 그리스도 교회의 신앙을 올바른 길로 회복시켰다. 그들의 이러한 전도 활동은 18세기의 끝을 밝혀 주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기간의 교회를 위하여, 세계를 향한 선교의 문이 열릴 것이라는 허락의 말씀을 남겨두셨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닫을 사람이 없으리니”8절. 유럽의 산업혁명 이후로 교통 수단이 발달하기 시작하였으며, 공산주의가 미처 뿌리를 내리기 전인 이 시기야말로 온 세상의 문이 복음을 위해서 열려져 있던 때이다. 하나님의 섭리를 통하여 이 기간 동안에 거의 모든 지역에 선교사가 파송될 수 있었다. 윌리엄 캐리가 1793년에 인도에 갔으며, 로버트 모리슨이 1807년에 중국에 갔고, 리빙스턴에 뒤이어서 로버트 모펫은 1817년에 아프리카로 떠났다. 각 대륙에서 성서 공회가 조직되기 시작했으며, 주일 학교 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한 때도 이 무렵이다. 세계 선교를 위해서 교파와 국경을 초월해서 형제의 사랑을 나타낸 때가 바로 이 때이다.

1780년 5월 19일이 암흑일(dark day)로서 세계를 놀라게 만들었고, 1833년에는 수많은 별들이 떨어짐으로써 다시 한번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든 후, 세계는 그리스도의 재림과 말세에 대한 관심이 크게 고조되었으며, 성경이 말하는 예언에 대해서도 큰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이것은 그리스도 교회의 복음이 전파되는 일을 크게 도와 주었다.

7. 라오디게아 교회(요한계시록 3:14~22)

1) 기간: 19세기 중옆 이후~ 예수 재림까지(마지막 교회, 현대 기독교회)

2) 이름의 의미: 라오디게아의 뜻은 “백성을 심판하심”이다. 이 교회는 지구 역사의 마지막에 나타나는 교회를 말한다. 그 이름이 의미하듯이,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기 전에 하나님을 믿는다고 공언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심판하는 시대의 교회가 라오디게아 교회이다.

3) 칭찬의 말씀: 두려운 사실은 마지막 교회인 라오디게아 교회에는 칭찬의 말씀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세속적인 자기 만족의 정신에 빠져 있으며, 영적 혼돈 속에서 방황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당신의 책망을 표현하셨다.“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15절.

4) 책망의 말씀: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17절. 이 마지막 교회가 가지고 있는 가장 치명적인 문제는 그리스도께서 보시기에는 너무나 비참한 상태에 놓여 있는데, 라오디게아 교인들 자신은 너무나 부요해서 부족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영적으로 완전히 죽어 있는 상태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이미 구원받았다는 생각에 도취되어 있다. 성경을 가지고 있지만, 성경이 말하고 있는 진리에 대해서는 눈이 멀어 있으며, 신앙은 병들어 죽어가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라오디게아 교회인 현대 기독교회의 신앙을 보시면서“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고 경고하고 계신다(16절).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앞두고 가장 뜨거워야 할 이 마지막 교회가 가장 미지근한 상태 가운데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라고 말씀하시는데, 라오디게아 교인들인 우리는 자기 자신의 상태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부족과 필요를 느껴야 구조의 도움을 요청할텐데, 거의 완전한 자기 만족과 자기 기만 속에서 종교를 즐기고 있는 것이다. 이보다 더 위험한 비극이 있을까?

5) 권면의 말씀: 마지막 교회에 속한 교인들의 이러한 치명적 상태를 치료하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는 다음과 같은 3가지 처방을 내려 주셨다.“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18절.

불로 연단한 금: 용광로에서 연단되어 나온 금은 시련을 통하여 연단된 순결한 믿음을 의미한다.“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베드로전서 1:7.“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기 23:10.

흰옷: 성도들의 의를 나타냄.“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라.”요한계시록 19:8.

안약: 양심을 민감하게 하고, 진리를 식별하고 깨닫게 하는 성령을 의미한다.“너희 마음눈을 밝히사...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에베소서 1:18~19.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라.요한복음 16:13.

결국, 이 3가지 처방을 종합하여 보면, 순결한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깨끗한 의를 옷입어서 성품이 변화되고 의로운 생활을 살며, 성령의 감화를 통하여 진리를 분별하는 영적 눈을 뜨며, 양심이 순결한 그리스도인이 되라는 치료의 말씀인데, 바로 이것이 마지막 시대에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비결이다.

6) 약속의 말씀: 구원은 언제나 개인적인 문제이다. 예수께서는 우리 각 개인에게 찾아오셔서 우리의 마음문을 두드리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리스도의 책망과 권면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마다 그리스도께 대하여 마음의 문을 열게 될 것이다.“내가 문밖에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20절. 예수께서 다시 오시기 전에 우리는 그분께서 우리에게 개인적으로 들려주시는 음성을 들어야 한다. 마지막 시대인 라오디게아 시대에도 오직 이기는 자들에게만 구원의 특권이 주어진다.“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귀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21~22절.

교회에 보내는 기별


라오디게아 교회는 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들 중에서 제일 마지막 교회이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이 세상 역사의 제일 마지막 시대에 존재하는 교회를 상징하고 있다.

이 교회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교회를 상징한다. 바로 우리가 지금 그 안에서 예배하고 찬미하며, 그리고 기도하며 활동하고 있는 이 교회를 상징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 일곱번째 교회에 대한 예언은 우리에게 큰 심각성을 지니게 된다. 바로 나의 교회, 더 나아가서는 바로 나 자신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먼저 하나님께서 기록해 두신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한 예언과 책망의 내용이 도대체 무엇인지를 먼저 알아 보도록 하자.

“라오듸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토하여 내치리라.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내가 너를 권고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 지어다”(계 3:14-22).

라오듸게아 교회의 특징은 가장 잘못되어 있으면서도 가장 잘 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치명적인 착각의 상태이다. 자기의 형편을 솔직하게 알고 인정하면 치료가 쉬워진다. 그러나 지기의 처지를 전혀 알지도 못하면서 스스로 건강하다고 고집을 부리는 환자를 치료하는 것처럼 힘든 일이 없는 것이다.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내는 기별은 “아멘”이신 분으로부터 오는 기별인데, “아멘”은 기도의 마지막에 하는 말인 것처럼 일곱 교회 중 가장 마지막 교회에게 주님께서 보내시는 메세지인 것을 의미하고 있다. 예수께서 이 지구상 역사의 마지막 시대에 존재하는 교회를 향하여 애소하시고 있는 것이다. “라오디게아”란 단어 자체가 “백성을 심판하심”이라는 뜻을 가진 낱말로서 하나님께서 마지막 시대의 교회를 심판하시고 계신 엄숙한 사실을 깨우쳐 주고 계시다. 이 기별이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신 분께로 부터 온다고 기록하신 것은 이 말씀이 전혀 틀림이 없는 정확한 진단이라는 사실을 거듭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뜨겁다”라는 뜻은 하나님의 사랑과 진리에 의하여서 움직이는 진지한 열심이 있다는 뜻이다. “차다”는 뜻은 그 반대로 추워서 떨고 있는 상태로서 자기 자신의 영적인 위험 상태를 인식하고 따뜻한 하나님과 진리의 곁으로 오고 싶은 강렬한 소원이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그러한 상태들에는 희망이 있다. 그러나 라오디게아 교회 교인들의 상태는 뜨겁지도 차지도 아니한 그 중간 상태에 있다고 하나님께서 경고하시고 계시다. 그들은 “뜨뜻 미지근한” 상태에 있는 것이다. 그들의 상태는 하나님의 사랑과 진리와 의에 대하여서, 하나님의 사업에 대하여서 불타는 열심이 없는 상태에 있으며, 자기의 처절한 상태를 고침 받아야 할 아무런 필요도 느끼고 있지 않고 있는 상태를 말하고 있다. 이 상태가 그대로 계속되면 그들은 더 이상 희망이 없는 입장에 처하게 되어 버리는 것이다. 라오디게아로 상징된 현대 교회는 일곱 교회들 중에 가장 깊이 병들어 있고 가장 크게 부족한 상태에 놓여 있다는 것이 이 예언의 말씀의 진단이다. 그래서 이 교회는 하나님께서 입에서 토하여 내치고 싶으실 정도로 메시꺼운 상태에 있다고 성경은 고발하고 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렘 17:9)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마지막 교회의 교인들의 마음의 상태를 드러내어 주시고 있는 것이다. 20세기 말기에 살고 있는 현대 기독교회는 나는 부자라 부족한 것이 없다고 말을 하고 있다. 그러한 표현을 공개적으로 하지 않을지는 모르나 진정한 회개와 개혁의 필요를 느끼지 못한채 자족한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는 눈먼 상태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실상 이 교회는 곤고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상태에 있는 교회이다. 그 중에서 가장 치명적인 병은 자기가 그러한 상태에 있다는 사실을 여전히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정말 오늘날 현대 교회들은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외치고 있다. 크고 화려한 대형 교회들이 속속 세워지고 있으며, 많은 구제 활동들과 선교활동들이 전개되고 있으며, 교회 계통의 서적들과 신문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하나님의 교회가 이렇게 부요하며 자부심을 느끼면서 전 세계에 퍼져 났던 때가 또 언제 있었던가! 초기에 교회를 세우던 시대나 핍박당하던 시대와는 달리 오늘날의 현대 교회는 얼마나 큰 대조를 이루고 있는가! 참으로 겉으로는 부요하여 부족함이 없다고 자부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현 시대의 교회에 보내시는 진단은 보이지 않는 마음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영적인 상태를 해부하시는 경고장이다. 회개하고 열심을 내지 아니하면 토하여 내칠 수 밖에 없다는 말씀이다. 참으로 심각한 말씀이다. 이렇게 부요한 현대 교회가 하나님께 버림 받기 직전에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책망은 사랑하시기 때문에 주시는 책망이다. 부모가 자식을 위하여 탄원하는 것과 같은 사랑의 징계로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아직도 희망이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경고를 듣고 회개하고 열심을 내어 주님의 뜻대로 순종하기만 하면 말이다.

예수께서는 이 병든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세가지 치료약을 제공하시고 계신다. 그 세가지 약은 1. 불로 연단한 금과, 2. 흰옷과, 3. 안약이다. 왜 이 세가지 치료제를 제공하시는 것일까? 그 이유는 우리들의 병이 영적으로 1. 가난함과, 2.벌거벗음과, 3. 눈 먼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에수께서 제공하시는 이 세가지 치료약에 대하여 잠간 살펴 보기로 하자.

불로 연단한 금 :

용광로를 통하여 나오는 “불로 연단한 금”이란 시련을 통하여서 이기적이고 세속적인 불순물들이 제거된 순결한 믿음을 상징하는 것이다.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말씀하였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벧전1:7). 시련을 통과한 후에 여전히 가지고 있는 믿음은 그 신자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섬기는 동기가 보상을 받기 위한 어떤 이기적인 기복 신앙의 동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진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주님을 섬긴다는 순결한 믿음, 즉 사랑의 동기를 보여 주는 것이다. 여러분은 혹시 믿음의 시련을 당하고 있지는 않는가?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셨는가하는 느낌을 가지고 있지는 않는가? 우리는 기억하여야 한다. 하나님께서 진실된 신자들에게도 시련과 고통을 허락하시는 이유가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여러분을 정결한 의인으로 품성을 준비시켜 하늘에 살기에 합당한 자로 만드시기 위함이다. 성경의 위인들은 항상 고난의 학교를 통하여 참된 하나님의 종들이 되었던 사실을 우리는 기억한다. 여러분이 지금 하나님을 경배하는 동기가 어디에 있는가?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워 왔다. 우리는 지금 우리의 마음을 살펴야 할 시간에 살고 있다. 오늘날 교회가 순결한 동기와 순수한 믿음에 있어서 너무나 가난한 입장에 있다. 우리는 예수께로부터 금을 사야 한다. 하나님께 참된 믿음을 달라고 기도하여야 한다. 우리의 믿음을 순결케 하시기 위하여 시련을 보내실지라도... 얼마있지 않아서 하나님께서는 교회 안에서 알곡과 가라지를 갈라 내시기 위하여 크게 체질하시는 환란이 닥쳐올 것이다. 그때에는 누가 참된 신자인지 드러나게 될 것이다. 알곡처럼 보이던 수 많은 쭉정이들 구름떼 처럼 불려 나가게 될 것이다.

흰옷 :

옷은 우리의 벌거벗은 수치를 가리기 위하여 입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가 벌거 벗었다는 수치를 느끼기 전까지는 옷을 입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이 자기가 영적으로 벗은 상태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전까지는 옷의 필요를 느끼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죗된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악함들을 솔직하게 인식하여야 한다. 더러운 죄악들을 인정하여야 한다. 깨끗한 정장을 차리고 교회를 오가며 선하고 좋은 일을 한다고 내세우는 우리들의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진정한 나의 모습을 인정하여야 한다. 가증 스럽고 외식적인 영적으로 벌거벗은 모습을 말이다. 하나님의 의로 가리움을 받지 못하고 있는 벌거벗은 형편을 말이다. 아무도 자기의 참 모습을 보고 예수의 의로 가리움 받지 못하고 있는 상태를 인정하지 않는한 예수께로부터 흰옷을 살 수가 없다. 앞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들이 준비되었을 때에 구원 받을 성도들이 입을 흰옷을 계시록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우리가 즐거워 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되었으니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계 19:7,8). 회개하여 변화된 성도의 성품 곧 옳은 행실이 흰 세마포 옷이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설명하여 주고 있다.

안약 :

눈은 우리 마음의 빛이다. “사람의 영혼은 여호와의 등불이라 사람의 깊은 속을 살피느니라”라고 잠언 20:27은 말씀하고 있다. 사람의 양심이 무뎌지고 딱딱해져 있으면 영적인 일을 식별하지 못하게 되며 무엇이 진리이며 무엇이 오류며 죄인지를 잘 분간하지 못하는 상태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영적으로 눈이 먼 상태가 되는 것이다. 우리들의 마음 속에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책망하시고 깨닫게 하시는 분은 성령님이시다(요 16:8 참조). 히브리서 4:12절은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성경 말씀의 진리는 우리의 영적인 눈에 안약이 되어 우리의 죄와 오류들을 지적하여 보여주고 우리를 밝은 진리의 길로 인도하여 주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 성경은 성령의 영감을 통하여 기록된 책이다. 하나님의 말씀 진리는 우리의 어두워진 영적 눈을 뜨게 해 주는 성령의 안약이다. 오류를 믿던 것을 깨닫고 성령께서 진리의 말씀을 통하여 밝혀 주는 안약을 발라 보고 순종하며 나가지 아니하면 우리는 영원히 어두움의 세력에 사로잡히고 말게 되는 것이다. 성령의 안약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사물을 보시는 것 처럼 보게 하여 준다.

한가지 주목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이 세가지 치료제들을 사라고 말씀하시고 있다. 그냥 주시겠다고 말씀하시고 있지 않다. 값없이 영생을 주시는 하나님께서 왜 우리더러 이것들을 사라고 말씀하시고 계실까? 그 이유는, 우리가 이 치료제들을 사기 위해서 우리 편에서 댓가를 지불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바로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굴복하여야 한다. 우리가 품고 있는 죄악들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영적인 질병을 치료받기 위해서 우리의 모든 것을 주님께 굴복하여야 한다.환자가 의사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수술대 위에 올라가 누워야 수술할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성품과 의지를 강제적으로 마음대로 하실 수 없다. 여러분이 하나님께 굴복하기로 선택하여 온 마음을 그분께 맡기기 전까지,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강제 하시지 않으신다.

예수께서는 라오디게아를 사랑하고 계신다. 그래서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 하노니”라고 말씀하시고 계신다. 그러나 교회와 교인들이, 즉 오늘날 20세기의 끝을 살아가고 있는 이 마지막 교회가 예수님을 문 밖에 세우 두고 있다. 예수님이 없는 교회! 감히 상상이 되는가! 예수님을 마음 문 밖에 세워 둔채 살고 있는 교인들이 오늘날 현대 교회의 교인들이다. 많은 종교 행사들과 각종 훌륭한 사업들을 교회 안에서 벌이고 있지만 예수님이 없이 일하고 있는 것이다. 주님께서 얼마나 슬프시겠는가! 예수가 없는 교회! 그것이 라오듸게아 교회이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해 두셨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 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그러므로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과 같으리니”(마 7:21-23). 그들이 그렇게 훌륭한 일들을 하였지마는 주께서는 그들을 불법, 곧 악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부르셨다. 그들은 예수를 위하여서 일하는 자들이었으나 실상은 예수를 모르는 자들이었다. 진정한 개심의 경험이 없었던 것이다.

지금, 예수께서는 우리 각자의 마음 문 밖에서 두드리고 계신다. 누구든지 문을 열면 주님께서 들어 오셔서 우리와 푸짐하게 같이 식사를 나누시겠다고 호소하시고 계신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생명의 만나의 말씀으로. 우리의 생애를 풍성하게 하시는 당신의 임재로 말이다. 우리는 예수를 믿으면서도 예수가 누구인지를 모르는 불쌍한 자들이 되지 말아야 하겠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칭찬이 없는 교회이다. 그러나 가장 큰 약속과 보상을 허락 받은 교회이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신 것 처럼 우리도 하늘 아버지의 보좌에 함께 앉게 해 주시겠다는 어마 어마한 약속이다. 그러나 그 조건은 분명하다. “이기는 자”에게 그러하다는 조건이다. 자기와 세상과 죄를 이기고 승리한 자들에게만 이 약속이 이루어 질 것이다. 일곱 교회는 모두가 다 “이기는 자들”에게만 그 보상과 구원의 약속을 허락하고 있다. “이기는 자에게는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 같이 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하늘에서 하나님의 보좌 앞에 서려면 예수께서 이기신 것처럼 이겨야 한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지 아니하는 자들은 참된 제자가 아니다. 예수께서 이 세상을 사실 때 경험하신 죄와 세상을 이기는 경험을 이해하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라오디게아 교회 교인들이다. 귀있는 자들은 성령께서 하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자! 주님께서는 라오디게아 교회 교인들을 무척이나 사랑하시고 계신다. 이러한 책망의 말씀을 간절하게 호소하고 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