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비어 있는 궁전과 그분의 편지

말리저 로이드

이 이야기는 상상을 통해서만 그려볼 수 있는 모습이다. 그러나 그대가 이 이야기를 읽노라면, 이것이 단순한 상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자, 이제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어느날 저녁이었다(만일 하늘나라에 저녁이 있다면).... 두 사람이 금으로 만든 거리를 나란히 말없이 걷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들은 주님과 가브리엘 천사였다. 지금, 그들은“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는 아름다운 세계를 걷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날 저녁, 하늘의 아름다움은 그 둘 사이에 있는 이상한 침묵으로 인하여 그 의미를 잃어버린 듯 하였다. 그들은 사람이 살지 않는 광활한 지역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 도성의 거리에는 아름다운 집들이 줄지어 있었지만, 거기에는 아무도살고 있지 않았다. 각 집들을 볼 때마다 탄성이 흘러 나왔다. 아름답고 단정한 정원, 신선한 색색의 꽃들, 감미로운 향기를 품어내는 나무들과 과일들.... 이러한 것들을 사모하면서 소망의 그날을 기다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감사의 눈물로 얼룩진 생애를 이 땅에서 살게 될 것이다.

마침내 가브리엘이 침묵을 깨뜨렸다. “주님, 당신의 손으로 만드신 이 모든 것들은 정말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습니다.”

“ 저 저택들이 비어있지 않으면, 얼마나 더 아름다울까”라는 주님의 대답이 들려온다. 다시 침묵의 시간이 흐른다. 가브리엘이 다시 말을 꺼낸다. “주님, 언제 지구성 사람들을 하늘 집으로 데리고 오실 겁니까?” “아직은 ....” 이라고 대답하시는 주님의 얼굴에는 깊은 그리움이 스쳐 지나간다. “벌써 오래 전에 그들을 데리러 가시려고 하셨죠?”“그래”라고 대답하시는 주님의 음성에서 슬픔을 느낄 수 있다. 또 다시 침묵이 흐른다. “주님, 저 아래 지구에는 집이 모자라는 현실을 아시지 않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집도 없이 살고 있습니다. 집을 구하기 위해서 평생을 노예처럼 일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그런데, 조그마한 집이라도 갖고 있는 사람들은 낡아빠진 지구에 사는 것을 대단히 만족해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들에게는 하늘의 저택이 별로 필요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지구성에서 가장 아름다운 집일지라도 하늘의 궁전에 비하면 초라한 헛간보다도 못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것같아요.” 주님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시기만 한다.

더 깊고 무거운 침묵이 둘 사이에 흐른다. 이윽고 주님께서 침묵을 깨뜨리신다.

“가브리엘아, 저기 각 나라들마다 무릎 꿇고 있는 소수의 사람들의 무리가 보이니?“예, 주님.”
“저 무리들이 나의 백성이란다. 가브리엘, 그들은 나를 신실하게 기억하며, 나의 말을 순종하고, 또 내 말을 사랑한단다. 그들은 내가 다시 올 것이라고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면서‘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라고 기도한단다.” 주님께서는 잠시 머뭇거리시다가 말을 이으신다.
“그런데 가브리엘아, 어떤 때는 내 백성들의 얼굴에 수심과 근심이 가득차서 일그러지는 모습을 보게 된단다. 마치....” 주님께서는 당신의 마음 속에 있는 말씀을 마치실 수 없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가브리엘은 주님께서 끝마치지 못한 말씀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다. 그는 주님을 쳐다볼 수가 없어서 고개를 돌렸다.

가브리엘은 경외와 존경이 가득한 눈으로 주님을 바라보면서“예수님”하고 부른다. 갑자기 구세주의 얼굴은 환하게 밝아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분께서 타락한 세상을 위해서 보내어졌을 때, 당신의 사명을 표현한 특별한 그 이름은 구세주께서 항상 듣기 원하시는 이름이다.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못 자국난 그분의 손을 바라보면서, 가브리엘은 잠시 말을 멈춘다. 그리고는 자신의 두손으로 그분의 상처난 두손을 가슴에 안으며, 구세주의 이름을 다시 부른다.

“예수님, 당신은 저들을 위해서 너무나 큰 것을 주셨습니다.” 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한다. 하늘의 천사장이라도 그같은 무한한 사랑을 표현할 수 있는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하는 것이다. “가브리엘, 저들은 이 하늘집으로 돌아오고 싶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

사랑하는 그리스도인들이시여, 구세주의 마음에 흐르고 있는 그리움과 실망의 눈물은 결코 상상으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를 위하여 예비한 하늘의 궁전들이 텅 비어 있는데, 왜 우리는 이 더럽고 허물어져 가는 지구성에 우리의 애정을 붙잡아 매고 있는가? 그대들은 우리 모두의 본향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는가?

지금도 예수께서는 비좁은 지구의 거리 위를 배회하는 그대에게 사랑과 그리움의 편지를 보내고 있다. 그대는 성경에 기록된 그리스도의 편지를 읽고 있는가? 날마다, 아침마다, 저녁마다 그분의 편지를 꺼내어 읽는 사람만이 그리스도의 그리움과 슬픔과 사랑을 깊이 느끼게 될 것이다.

예수님의 편지

그동안 어떻게 지냈니? 내가 이 편지를 네게 보내는 것은 그저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며 돌보고 있는지를 표현하고 싶어서야. 어제 나는, 네가 친구들과 함께 걷고 있는 모습을 보았단다. 난 어제 종일토록 네가 내게도 말을 걸어주기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단다. 나의 마음은 온 종일, 항상 너에게 가 있었는데, 너는 나에게 너무도 무관심 하더구나. 저녁이 되었을 때, 나는 너를 조금 쉬게 하려고 시원한 미풍과 함께 장미빛 황혼을 네게 선사하며 너를 기다렸단다. 그런데 넌 내게 눈길도 주지 않더구나. 아, 그것이 내 마음을 얼마나 아프게 했는지....

어젯 밤, 곤히 잠든 너를 바라 보면서, 나는 네 이마를 좀 쓰다듬어 주기를 원했단다. 그래서 나는 달빛을 너의 베개와 얼굴로 흘려 보냈지. 그리고는 우리가 서로 이야기를 많이 나눌 수 있는 시간이 오기를 얼마나 고대했는지.... 나는 널 위해 많고 많은 선물을 준비하고 있었단다. 그런데 너는 느지막히 일어나서는 허둥지둥 네 일을 시작하느라고 바빠서, 밤새워 옆에서 기다리던 나를 쳐다보지도 않더구나. 오늘 아침에 내리던 빗방울은 나의 눈물이었던 것을 너는 알고 있니? 오늘 너는 무척 슬프고 외로워 보이더구나. 너의 그런 모습이 내 마음을 아리게 했단다. 왜냐하면 나 역시 너와 같은 경험을 했었기 때문이지. 나의 친구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나의 마음을 아프게 했으며, 나를 외롭게 만들었었지.

친구야, 내가 너를 여전히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너는 알고 있니? 느끼고 있니? 넌 내가 고요함과 푸른 잔디를 통해서 너를 사랑한다는 말을 하려고 애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니? 잎새와 나무들 사이에서 사랑의 말을 네게 속삭이며, 가지각색의 꽃 향기로 그 말을 전하고, 산과 계곡을 따라서 흐르는 시냇물로 그 사랑의 말을 외치며, 새들의 사랑 노래로 네게 이야기 하려던 나의 움직임과 소리와 냄새들을 너는 느끼고 있니? 나는 항상 너를 따스한 햇빛과 신선한 대기의 향내로 옷입히고 있단다. 네가 필요로 하고 얻고자 하는 어떤 것도 너를 향한 나의 사랑에 비하면 얼마나 보잘 것 없고, 무가치한 것인지를 알고 있니?

너만 허락한다면, 너와 나, 우리는 함께 하늘에서 영원한 세월을 즐길 수 있단다. 나는 이 땅에서 사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구차하며 힘겨운 일인지 잘 알고 있단다. 왜냐하면 나도 너처럼 이 땅에서 살았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지. 나는 이기심과 욕심으로 가득찬 이 낡고 초라한 지구가 얼마나 살기 어려운 곳인지를 잘 알고 있단다. 나는 너를 돕고 싶단다. 나의 아버지께서도 널 돕기를 원하신단다. 나와 나의 아버지에게 도움을 청하렴. 나의 이름을 부르면서 네가 원하고 찾는 것을 구하렴. 나에게 부디 이야기 해다오. 너의 문제와 슬픔과 고민과 아픔을 .... 네가 원하기만 한다면, 나의 이름으로 구하는 모든 것에 대해서 가장 선한 것으로 받게 될 것이란다.

나는 오래 전에 너를 택했단다. 이제 네가 나를 택하기로 결정하는 일만 남아 있단다. 너의 택함과 선택을 나는 지금도 기다리고 있단다. 어쩌면 너는“왜 나를 기다리세요?”하고 물을 수도 있겠지. 왜냐하면 나는 너를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이란다. 아, 너에 대한 나의 사랑의 참 가치를 네가 볼 수 있다면....

너의 답신을 기다릴께. 기억해라. 언제나, 항상, 어디선가, 내가 너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너의 진실한 친구, 예수

유혹과 싸워서 이기는 비결

사단의 공격 목표

그리스도를 신실하게 믿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유혹에 대해서 두려워하고 염려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예수께서 이 땅에 재림하시는 순간까지 계속적으로 유혹을 받으면서 살게 된다.

유혹은 각 사람에게 각기 다른 모습으로 접근하는데, 우리가 썩어 없어질 타락한 육체를 가지고 있는 한, 우리는 항상 유혹을 느끼면서 살 수 밖에 없다.

어렸을 때에 나는 과수원이 있는 조그만 마을에서 살았는데, 과수원의 과일이 잘 익을 때가 되면, 동네 아이들이 나무에 열린 과일을 보면서 “자, 이제 다시 열매를 따먹을 시간이 됐다” 라고 말하곤 하였다. 사단은 그 동네 아이들보다 훨씬 머리가 좋은 존재이다. 그리스도인의 생애와 성품에 맺히는 영적 열매가 너무 시어서 먹을 수 없거나 쓰디 쓴 맛을 낼 때에, 사단은 그러한 그리스도인들을 그대로 내버려 둠으로써, 그들을 깊은 잠에 취하게 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의 영적 열매가 충만하게 익어 가는 기미가 보이기만 하면, 사단은 그 열매를 제거하기 위해서 혼신의 힘을 다한다.

이 말은, 가장 영적으로 깨어 있는 그리스도인이 가장 극심한 유혹과 시험을 받게 된다는 의미이다. 그리스도께 마음을 바치면서 그분의 십자가로 가까이 나아가려고 하는 영혼이야말로, 사단의 가장 집중적인 공격 목표가 된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전적인 믿음을 가지고 순종하는 생애를 살아가는 참 그리스도인들은 사단이 가하는 계속적인 공격을 받게 되지만, 그리스도 교회의 신앙을 형식과 의무감에서 지키는 거짓 그리스도인들은 사단과의 전쟁에 있어서, 아무런 영적 투쟁도 느끼지 못한 채 안락함과 안일함 속에서 살아가게 되는데, 그 이유는 사단은 그러한 거짓 그리스도인들에게 시험과 시련을 줌으로써 그들을 깊은 잠에서 깨우기를 원치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일 그대가 사단으로부터 시험과 시련을 받고 있다면, 그것은 축하받을만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대가 영적으로 올바른 길을 걷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단이 던지는 극심한 유혹을 받고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온 마음을 다하여 따라가고 있다는 증거이며, 동시에 그것은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갖게 되는 특별한 명예이기도 하다. 도둑이나 강도가 우리가 사는 집에 침입하여 들어 왔다는 사실은, 적어도 우리가 많은 돈과 재물을 소유하고 있다는 평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만일 우리가 영적으로 귀한 열매를 맺고 있다면, 사단은 우리 앞에 온갖 시험과 유혹을 던져 놓음으로써, 우리에게 맺힌 영적 열매를 파괴하고 빼앗아 가려고 노력할 것이다.

자, 여기서 성경에서 가장 이상한 성경절 중의 하나를 읽어보자.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야고보서 1:2. 분명, 이 성경절은 시험을 좋은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시험을 당하는 사람은 매우 어려운 고난의 터널을 통과하게 된다. 시험과 유혹을 만나는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즐거워 할 수 있는가? 유혹이 하나님의 구속 사업에 있어서, 어떤 역할을 하는가에 대하여 분명한 이해를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인만이 유혹과 시험을 “온전히 기쁘게 여”길 수 있다. 유혹은 우리가 어떤 신앙을 가지고 있으며, 도덕적으로 어떤 입장에 서있는가를 드러내 준다. 유혹을 당하는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의지가 담겨진 선택과 결정을 하게 된다. 옳고 그른 것에 대한 분명한 결정과 선택이 이루어져야 한다. 죄와 유혹의 문제, 그리고 진리와 오류의 문제에 접하는 경우에, 불투명하고 회색적인 선택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을 중심으로 펼쳐지고 있는 선악 간의 대쟁투를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모든 사람들은 선과 악의 투쟁을 싸워 나가는 일에 있어서, 예민한 양심적 자각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사람과 같은 양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단과 그리스도 사이에서 벌어지는 대쟁투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다. 위대한 종교 개혁자인 마틴 루터는 글을 쓰던 중에 사단의 시험을 너무나 실제적으로 느끼고 직면하였기 때문에, 사단을 향하여 잉크병을 던졌을 정도이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치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고린도전서 10:13. 이 말씀은, 유혹과 싸우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놀라운 위로와 격려가 된다. 어떤 사람도 이 말씀이 주는 약속으로부터 제외되지 않는다. 자신이 받고 있는 시험이 다른 사람이 받는 시험보다 무겁고 큰 것으로 느끼기 쉽지만, 하나님께서는 “감당치 못할 시험”을 누구에게도 허락치 않으시며,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열어 주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자신이 당하는 시험이 다른 사람보다 어렵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유혹과의 전쟁에서 패배하였을 경우, 쉽게 자신의 패배를 합리화하게 된다. 사실상, 거의 모든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말로 자신의 죄를 합리화 한다; “나는 예외이다.”

유혹이 가져오는 유익

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고통을 안겨다 주는 시험들을 허락하시는가? 왜 우리들에게 모든 시험을 제해 주시지 않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야고보서 1:2~4 에 나온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시험과 유혹은 영적인 승리와 성장을 위한 기회를 제공한다. 그러므로 유혹을 받는 것은 불명예나 창피한 일이 아니다. 투쟁이 없다면, 거기에는 강력한 결정을 통한 승리 또한 없을 것이며, 성품이 고상하게 변화되는 일도 없을 것이다. 성품은 시련을 통하여 다듬어진다. 시련이 없는 상태에서의 선이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다른 사람과의 접촉을 피하기 위하여 동굴에서 일주일 동안 고독하게 은거함으로써, 외형적으로는 단 하나의 죄도 범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그 한 주일 동안 선하게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게 말할 수 없다. 참된 그리스도인 신앙은 단순히 잘못된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을 의미하는데, 그것은 적극적으로 선을 실천하는 것을 포함한다. 동굴 안에서 있었던 일주일 동안, 남에게 해를 가하지도 받지도 않았지만, 그것은 아무 의미도 없는 선한 삶이었다.

그렇다면,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라는 말씀은 무슨 뜻인가? 그 말씀의 의미는, 우리의 도덕과 신앙을 시험하는 모든 시련의 과정 속에서 우리에게 대책을 마련해 주시겠다는 의미이다. 시험과 유혹을 당할 때마다, 우리는 두 길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하나는 악으로 향한 매력적인 길이고, 다른 하나는 선을 선택할 것을 호소하는 좁은 길이다. 우리는 유혹을 받을 때마다 두가지 방향으로 뻗어 있는 두 길이 우리 앞에 놓인 것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가 화를 내면서 소리를 지르라는 사단의 목소리를 들을 때, 우리는 자신을 제어하라는 성령의 음성도 함께 듣게 된다. 부도덕하고 불명예스러운 죄를 범하라는 악한 유혹을 받을 때, 동시에 우리는 고결하고 순결한 삶을 선택하라는 선한 유혹을 받게 된다.

한번은, 한 소년이 가게에서 침을 삼키면서 사탕을 만지고 있었는데,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가게 주인이 그에게 다가와서 “얘야, 너 혹시 사탕을 훔치려고 생각하고 있니?” 라고 물었다. 그 소년은 깜짝 놀라서 “아니요, 나는 훔치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는 중 입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우리는 그 소년의 정직하고 순진한 대답을 통해서, 그 소년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우리 모두는 두 음성과 두 선택의 갈림길에서 투쟁하고 있다. 비록 우리가 그러한 현실을 정확하게 분석하며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지 몰라도, 우리는 악의 세력에 의해서 유혹받고 있는 것만큼 선의 세력에 의해서도 강력한 이끌림을 당하고 있다.

물건을 훔치라는 충동을 받고 있던 소년이 정직하고 선한 대답을 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주목하라. 간음을 범하려는 죗된 욕구에 시달리는 사람도 순결하고 도덕적인 선택을 통하여 간음에 대한 유혹을 물리칠 수 있다. 이러한 원칙을 매일의 삶 속에 적용시키는 것이 복음의 비밀인데, 이 복음의 비밀을 이해하면 우리는 더이상 유혹을 두려워 하거나, 그것에 압도되어서 살아가는 삶을 살지 않을 수 있다. 거듭난 마음을 가지고 있으며, 성령에 사로 잡힌 사람은 두가지 음성 사이에서 항상 선하고 순결한 것을 선택하는 삶을 살게 될 뿐만 아니라, 마음 속에서 들리는 선한 음성의 호소에 훨씬 더 강력한 매력을 느끼게 된다. 그리하여 사단의 유혹은 그에게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하고 자취를 감추게 된다.

자, 이제 사단의 유혹과 성령의 호소에 대한 결론을 맺도록 하자. 시험과 유혹을 통과하면서, 어떤 결정과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성품은 순결하게 형성될 수도 있고, 비열하고 부도덕한 성격으로 꼴지워질 수도 있다. 인간의 성품을 형성하는 불변의 원칙이 있는데, 그것은, 사람은 시험과 유혹을 통과하는 경험을 통하여 반드시 선하거나 악하게 변화된다는 것이다. 사단의 시험에 굴복하고, 성령의 호소를 거절할 경우,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상처가 우리의 영혼과 성품에 깊이 남는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우리는 유혹에 대하여 승리를 쟁취함으로써, 다음에 다가오는 시험과 유혹에 대해서 더욱 더 강력한 도덕적 힘을 얻을 수도 있고, 그와 반대로 시험과 유혹에 굴복하는 삶을 살 경우, 우리의 의지력은 점점 더 약화된다. 우리의 성품은 우리가 하는 선택과 결정에 따라서 거룩한 방향으로 성장해 갈 수도 있고, 악하고 이기적인 방향으로 뒤틀릴 수도 있다. 계속적인 선한 선택은 선한 습관을 형성시키며, 선한 습관은 선한 성품을 형성시킨다.

그렇다면 스스로 유혹과 시험을 받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가?

여기서, 어떤 사람들은 이런 의문이 마음에 떠오를 수 있다. “유혹과 시련을 통하여, 우리의 성품이 계발되고 향상된다면, 우리는 더 많은 유혹과 시련을 받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는가?” 이 질문은 매우 중요한 교훈을 우리에게 일깨워 주는 논리적 질문이다. 유혹에 대한 승리가 우리의 신앙에 선한 유익을 가져오므로, 사단과 접전하게 되는 기회인 유혹을 찾아 나서야 하는가?

만일 유혹이 성품의 도덕적 스테미너를 향상시킬 수 있는 기회라면, 왜 예수께서는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며” 라고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는가?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치 아니” 한다는 말씀을 기억하라. 오직 하나님께서만이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유혹의 정도를 아신다. 우리 스스로 시험을 자초할 경우, 우리는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시험과 유혹에 의해서 압도될 수 밖에 없다. 불이 난로 속에서 제어당할 때에는 유익한 것이지만, 그것이 집기둥에 옮겨 붙어서 제멋대로 탈 경우에는 무서운 결과를 만들어 내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도덕적 힘과 연약한 육체의 본성에 대해서 잘 이해해야만 한다. 또한 우리를 시험에서 건져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도 올바른 이해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시고.” 벧전 2:9.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계3:10. 하나님께서는 시험에 든 모든 사람들을 구하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 지시하는대로 경건한 선택과 결정을 하는 사람만이 시험과 유혹으로부터 건짐을 받을 수 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가 시험받는 상태와 환경을 결정해 주실 수 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지혜와 섭리에 따라서, 우리가 감당할 수 있으며, 또한 우리에게 가장 최선의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시험과 유혹을 허락하신다. 각 사람은 각기 다른 성품의 약점을 가지고 있다. 사단은 우리의 약점을 잘 알고 있으며, 우리가 연약해져 있는 순간을 잘 포착한다. 사단이 가장 자주 사용하는 전략은 우리가 가장 연약해 있을 때에 성품의 약점을 찌르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사단의 교묘하고도 무서운 전략을 진정으로 잘 안다면, 우리는 더 이상 자신의 힘과 꾀를 의지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 우리 모두가 반드시 이해해야 하는 진리가 있는데, 그것은 우리 자신의 연약함을 진정으로 깊이 깨달아야만, 유혹에서 승리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는 것이다. 자신의 부족과 연약함에 대해서 깊이 절감하는 사람만이 자신을 시험에서 구해 줄 구세주의 필요성을 인식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자의 도덕적 힘과 영적인 필요에 따라서, 우리에게 유익을 가져다 줄 시험과 유혹의 정도를 측정하신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믿음과 인내를 시험할 수 있는 환경을 당신의 목적과 시간에 맞추어서 조성해 주신다. 그러므로 사도 야고보는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를 신뢰하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말씀을 기록하였던 것이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야고보서 1:2.

유혹이 죄로 변하는 순간

유혹과 시험은 항상 마음을 공격한다. 거의 모든 죄는 그것이 행동으로 나타나기 오래 전에 이미 마음과 생각에서 시작된다. 죄를 겉으로 드러난 죗된 행위로만 오해하였던 바리새인들과 율법주의자들에게, 예수께서는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 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죄의 원천지를 그들에게 분명하게 가르치셨다(막 7:21~22). 그러므로 죄는 마음에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죄가 마음에서 일어난다면, 우리의 마음 속에 있는 모든 욕망(desires)이 죄란 말인가? 여기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개념을 이해해야만 하는데, 그것은 욕망 그 자체는 결코 죄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본성 안에 식욕과 여러가지 경향들을 넣어 주셨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것을 추구하고 바라면서 살게 되어 있다. 그러한 욕망들이 올바른 방향으로 제재되고 인도되는 한, 욕망이나 욕구 자체는 잘못된 것이 아니다. 사도 바울은 욕망을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이라고 구체적으로 설명하였다(엡 2:3). 욕망이 하나님께서 그어 놓으신 경계선 밖으로 벗어나서 탐욕으로 변질될 때, 그것은 죗되고 정욕적인 죄가 된다.

좀더 실제적으로 이 문제를 살펴보자. 날마다 우리는 여러가지 그림, 책, 글들을 보면서 살게 되는데, 그러한 것들은 우리의 마음에 각기 다른 자극을 가져다 준다. 그러한 감정적 자극들을 통하여 우리의 마음에는 거룩하지 않은 욕망이 일어나게 된다. 그러한 욕망들로 인하여 유혹을 느끼게 되지만, 아직 그것은 죄가 아니다. 그것은 유혹일 뿐이다. 다시 말해서, 어떤 잘못된 것을 느끼거나 인식하는 것 자체는 죄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나 더럽고 추한 욕망을 느끼는 순간, 모든 사람은 그것에 대해서 분명한 반응과 선택을 하게 되는데, 바로 여기가 유혹이 죄로 변하는 순간이다.

그러므로 야고보는 유혹을 받아서 죄를 범하는 과정을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설명하였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야고보서 1:14,15. 여기서, 야고보는 유혹이 죄로 변하는 과정을 다음과 같이 3단계로 분석하였다; 1. “시험을 받음”, 2.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 3. “욕심이 잉태되어 죄를 낳음.” 이 3단계를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1)각 사람은 거룩하지 않은 사물을 보았을 때에 마음과 생각이 유혹을 받게 된다. 2) 바로 그 순간, 육체 속에 숨어 있던 욕심(본성)은 꿈틀거리면서 발동하게 되고 죗된 요구를 하기 시작한다. 3)그 육체의 요구에 굴복하여 더러운 생각과 더러운 욕망을 마음 속에 품기로 결정하면, 바로 그 순간 죄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유혹을 거절하고 물리치기로 선택하면, 사단이 던진 유혹을 이기고 승리하는 것이다. 종교 개혁자인 마틴 루터는 유혹과 죄에 대한 승리의 문제를 다음과 같이 명확하게 표현하였다. “새가 머리 위를 날아가는 것은 막을 수 없지만, 머리 위에 둥지를 트는 것은 막을 수 있다.” 사단이 점령한 이 세상에 살고 있는 한, 그가 시시때때로 던지는 유혹을 느끼지 않을 수는 없지만, 그 유혹을 마음에 받아들여서 간직하지 않기로 선택할 수는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유일한 안전은 유혹이 마음으로 들어오는 문을 어떻게 잘 지키는가에 달려 있다. 유혹이 들어오는대로 마음문을 활짝 열고 허용하는 사람은 결국에는 유혹에 굴복하여 죗된 욕망에 사로잡히게 되며, 반면에 자신에게 접근해오는 유혹을 마음의 문에서부터 거절하고 물리치는 사람은 승리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유혹이 우리의 마음을 향하여 접근해 올 때마다, 우리의 양심과 지성을 통하여 조용한 경고의 음성을 들려 주심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의로운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

타락한 육체를 가지고 있는 인간이 더럽고 불순한 욕망을 품도록 유도하는 유혹을 물리치고 정복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해서, 성경은 “그렇다” 라고 대답한다. “우리가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고후 10:4,5.

가장 강한 유혹일지라도 죄에 대한 핑계가 될 수 없다. 아무리 그 세력이 크게 압도한다고 해도, 죄는 우리 스스로의 선택의 결과이다. 지상이나 지옥의 어떤 세력도 인간에게 짓도록 강요할 수 없다. 우리의 의지가 먼저 동의되고, 마음이 그 유혹을 받아들이기로 선택해야만 죄를 범할 수 있는 것이다.

마음의 문을 지키라

유혹에 대항하여 싸우는 문제에 대해서 조금 더 생각해보자. 죄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자세와 정신으로 유혹에 대처해야 하는가? 예수님의 대답을 들어보자.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마 5:29,30.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적용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상식적으로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잘못을 범한 신체의 일부분을 잘라 버린다고 할지라도, 그 사람의 마음이 여전히 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말씀에서, 예수께서는 손이나 눈 자체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손이 하는 일과 눈이 보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어떤 일을 하거나 무엇을 볼 경우, 그것이 마음 속에 유혹을 불러들이는 창문 역할을 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잘라 버려야” 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직장이나 일터가 죄를 범하기 쉬운 장소나 환경이라면, 우리는 그곳을 떠나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유혹의 문턱 위에서 고의적으로 서성거리는 사람의 기도에 응답하실 수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예수께서는, 영혼을 파멸로 이끄는 죄에 의해서 압도당할 수 있는 환경을 피하기 위해서는, 매우 결정적인 조치가 취해져야 한다는 사실을 말씀하신 것이다. 만일 우리가 죗된 생각과 행동을 하기 쉬운 장면을 보고 있다면, 예수께서는 우리가 그 장면으로부터 돌아서거나 눈을 가려야 한다는 사실을 말씀하신 것이다. “눈을 빼어 내버리라”는 표현은 그만큼 확실하고 강력하게 유혹에 대처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매일 밤마다, 흥분과 관능으로 가득찬 텔레비젼 광고와 프로그램들을 보는 사람이 유혹에 대항하여 승리할 수 있을까? 그 대답은 너무나 분명하다. 만일 텔레비젼이 우리에게 도무지 극복할 수 없는 유혹과 시험거리가 된다면, 우리는 그것을 “던져 버려야” 한다. 자신의 영혼을 파멸로 이끌기 보다는 차라리 세상 지식과 정보를 포기하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런 말을 할지 모른다; “그것은 지나치게 편협한 생각이 아닙니까?” 영혼을 잃어버리기 보다는, 차라리 주변 사람들에게 “편협하고 좁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는 별명을 들으면서 영생을 지키는 것이 지혜가 아니겠는가? 만일 그대가 텔레비젼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텔레비젼이 그대를 지배하기 때문에 온갖 더러운 장면들이 그대의 영혼을 더럽힌다면, 그대는 텔레비젼을 버려야 한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눅 9:23.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그분의 제자가 되기 위한 댓가를 치루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자신이 좋아 하는 것이 본인을 죄로 인도하는 시험과 유혹거리가 된다면, 그것을 버리는 것이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마땅히 지불해야 하는 댓가라는 의미이다.

진정, 우리가 죄에 대한 승리를 얻기 원한다면, 보지 말아야 할 장면, 읽지 말아야 할 글, 듣지 말아야 할 음악, 가지 말아야 할 장소가 있다는 사실에 동의하게 될 것이다. 만일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진리와 그분의 영이 거하신다면,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구별해 주는 매우 분명한 음성을 듣게 될 것이다. 오늘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믿기만 하면 된다”고 말하면서, 마음의 문을 세속적인 것들에 대하여 활짝 열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유혹과 시험에 대하여 승리를 경험하지 못한 채 죄의 종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기만 하면 구원 얻는다”는 가르침으로 인하여, 그들의 마음은 거짓된 안정감 속에서 만족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사단은 세속적이고 정욕적인 것들을 온 세상에 뿌려 놓음으로써, 사람들의 마음을 강력하게 유혹하고 있으며, 동시에 구원에 대한 거짓된 가르침을 교회 안에 뿌려 놓음으로써,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죄와 유혹에 대하여 무방비 상태로 살아가도록 기만하고 있다.

몸무게 때문에 고민하십니까?

머조리 발드윈 의사

비만은 오늘날 많은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큰 문제가 되고 있다. 비만증이란 정상 몸무게에서 20% 이상이 초과한 상태를 말한다.

심장 혈관 질환을 갖고 있는 환자들 중 1/5, 인셜린을 의지하지 않는 당뇨병 환자들 중의 1/2, 담낭 질환을 갖고 있는 환자들 중의 1/3이 비만증으로부터 그 질병이 시작되었다는 통계가 나와 있다. 뿐만 아니라, 비만증이 있는 암환자의 사망율은 그렇지 않은 암환자보다 2~3배 가량 더 높다. 비만이 우리에게 가져다 주는 문제는 겉 모습이 날씬하지 않다는 것보다는, 생명에 더 큰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혹시, 몸무게를 줄이는데 문제가 있는가? 아니면 지난 몇해 동안에 계속해서 몸무게가 늘어나고 있는가? 혹시 자녀 중에 체중을 줄이지 못해 고심하는 아이들이 있는가? 이러한 문제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결코 절망할 필요 없다. 극단적으로 보기 드문 생리학적인 문제나 홀몬의 분비에 문제가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의 체중 초과 문제는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무엇이 비만의 원인인가?

물론, 우리가 필요로 하는 양 이상으로 칼로리를 섭취하면 몸무게가 증가한다. 그러나 이것이 다는 아니다. 유전자, 홀몬, 영양분의 공급 상태, 운동, 스트레스, 그리고 신체의 전반적인 건강 상태 역시 우리가 섭취한 칼로리를 태워 버리는데 영향을 주시 때문에, 이러한 인자들의 조화를 통하여 몸무게가 유지되는 것이다. 이러한 요소들 중 어떤 것들은 우리가 조절할 수 없는 것이며, 어떤 것들은 우리의 자제와 노력으로 조절할 수 있는 것들이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쉽게 체중이 증가하는 경향을 갖고 태어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낮은 신진대사 비율을 갖고 있기 때문인데, 낮은 신진대사 비율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는, 신체의 기능을 유지하기 위해서 사용되는 칼로리의 소모량이 다른 사람보다 적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람들은 평생동안 뚱뚱하게 살도록 운명 지워졌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 우리의 몸무게를 조절하는데 있어서, 영향을 줄 수 있는 요소들이 많이 있다. 이 기사에서, 우리는 특별히 영양과 운동에 초점을 맞추려고 한다. 이러한 요소들이 적절하게 잘 지켜진다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유전적인 문제에도 불구하고 체중을 조절할 수 있다. 계속적으로 자신의 입맛을 자제하고, 게으른 몸을 일으켜서 운동하는 습관을 계속적으로 유지해야 한다는 조건 하에서 가능한 이야기이다. 이러한 요소들을 계속해서 조절한다는 뜻은 단순히 새로운 생활 방식을 자신의 습관으로 받아 들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날, 몸무게를 줄일 수 있다고 광고하는 여러가지 상품들이 소개되고 있지만, 영양과 운동과 라이프 스타일을 바꾸지 않은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살 빼는 방법은 결코 안전하거나 바람직한 방법이 아니다.

얼마나, 그리고 어떻게?

만일 예금한 금액이 인출한 금액 보다 많으면 잔고가 남게 되지만, 인출한 금액이 예금한 금액 보다 많으면 수표가 부도가 나는 것과 같은 문제가 생기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먹는 음식의 양을 조절해야 한다. 음식을 먹으면, 위에 있는 감각 수용 기관 (sensory receptor)이라는 신경은, 우리가 얼마나 많은 양의 음식을 먹었는지를 되에 전달해 줌으로써, 포만감 느끼게 된다. 우리가 만일 결단력을 가지고 우리 식욕을 자제한다면, 음식의 섭취량을 조절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우리의 뇌가 “약간 부족하다”고 느낄 때, 숫가락을 놓고 식탁에서 일어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식사법이다. 그러나 음식의 섭취량을 조절하는 것이 체중을 줄일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아니다. “얼마나 많이 먹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 만큼 중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어떠한 것을 먹어야 하는가” 이다.

어떤 종류의 지방을 먹어야 하는가?

체중을 조절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가장 먼저 신경을 써야 할 영양분은 지방이지만,체중을 줄이기 위한 목적만을 위하여 무지방식(oil free diet)을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지방은 체중을 증가시킬 수 있는 요소이지만, 지방을 소화시키는데 소요되는 시간이 길기 때문에, 오랜 시간 동안 공복감을 느끼지 않게 해주는 이점이 있다. 그렇다면, 어떤 종류의 지방을 섭취해야 하는가? 지방이 많이 함유되어 있는 동물성 식품에는 섬유질이 없고, 많은 양의 포화 지방이 함유되어 있기 때문에, 건강에 해로울 뿐만 아니라, 비만의 주요 원인으로 지적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인체가 필요로 하는 지방을 어떻게 공급할 수 있는가? 가장 이상적인 지방은 견과류, 싸앗류, 올리브와 아보카도와 같이 천연 식품에 함유되어 있다. 식물성 지방이 동물성 지방보다 좋다고는 하지만, 섭취하는 전체 음식 중에서 10% 이상을 차지 하지 않아야 한다. 올리브 기름과 같은 식물성 기름이라고 할지라도 가능하면 적은 양을 사용하여 요리를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어떤 식품을 먹어야 하는가?

체중을 조절하고자 하는 많은 사람들이 채식을 하지만, 올바른 채식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에 좋은 결과를 거두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흰쌀, 흰빵, 흰 국수, 시중에서 파는 대부분의 시리얼 (cereals)과 크랙커 그리고 쿠키류 그리고 흰 밀가루로 만들어진 식품들은 칼로리만 많고, 영양소가 부족하기 때문에 체중을 증가시키는 중요한 원인이 된다. 이러한 음식들은 과식을 조장하는데,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두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입맛을 자극시키는 여러가지 감미제가 들어 있기 때문에,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과식을 하게 되며, 둘째는 우리의 위장으로 하여금 포만감을 느끼게 해주는 섬유질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음식들을 과식할 경우, 우리의 몸은 불필요하게 많이 섭취한 칼로리를 지방으로 바꿔서 체내에 저장한다. 또한 이러한 음식은 영양분이 부족하기 때문에, 우리의 몸은 인체의 기능유지에 필요한 영양분을 채우기 위하여 식욕을 증가시키게 된다. 다시 말하자면, 영양가가 부족한 음식은 우리가 식욕을 조절하는 것을 더 어렵게 만든다. 그러므로 적당한 체중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영양분을 골고루 섭취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다면, 어떤 종류의 식품을 섭취해야 하는가? 정제하지 않은 곡식과 그것을 원료로 해서 만든 식품을 섭취해야 한다. 예를 들면, 흰밀가루 대신에 통밀을 섭취하고, 흰쌀 대신에 현미쌀을 섭취해야 한다. 이러한 곡식들은 표면이 깍여진 정제된 곡식들 보다 더 많은 섬유질과 풍부한 영양소들을 함유하고 있기 때문에, 적은 양으로 신체의 욕구를 충족시켜 줄 수 있다.

경계해야 할 당분의 섭취량

설탕은 체중을 증가시키는 중요한 원인이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당분과 비만과의 관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비만증을 해결하려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방의 함유량에만 관심을 두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체가 필요로 하는 양보다 많은 양의 당을 섭취할 경우, 당은 체내에서 지방으로 전환되어 저장됨으로써, 체중이 증가되게 된다. 동물 실험 결과, 당분을 섭취한 동물들은 전분을 섭취한 동물들 보다 포도당이 지방으로 전환되는 과정이 두 배나 빠르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러므로 사탕수수, 설탕, 꿀과, 시럽과 같이 당분을 많이 함유하고 있는 식품의 섭취량을 제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아이스크림, 쿠키, 케익, 파이와 같은 후식 대신에, 과일을 먹는 것이 바람직하다. 과일에 있는 당분은 후식에 있는 함유되어 있는 설탕보다 천천히 흡수된다. 과일들 중에 감귤류, 사과, 배, 살구, 복숭아, 그리고 딸기류의 과실들은 바나나와 망고보다 적은 양의 당분을 함유하고 있다. 상업용 식품 속에는 설탕이 여러가지 다른 이름으로 표현되기 때문에 주의해야 한다. “오스 (ose)?라는 글자로 끝나는 글루코스 (glucose: 포도당), 수크로스 (sucrose: 자당), 덱스트로스 (dextrose: 우선당), 프럭토스 (fructose: 과당)와 같은 이름의 성분은 당분과 동일한 역할을 하므로 조심해야 한다. 토다토 케찹에는 후식으로 먹는 음식들 보다 더 많은 양의 설탕을 함유하고 있다. 소다수와 과일 쥬스에도 많은 양의 설탕이 첨가 되어 있으므로 조심해야 한다.

운동

운동은 체중을 줄이는데 있어서, 매우 효과적인 방법 중의 하나이다. 코넬 대학의 연구원들은 식사 후에 운동을 하면, 과도하게 섭취된 칼로리가 보다 빠른 시간 내에 소모되는 유익을 얻을 수 있다. 식사 후 2시간 내에, 20분 동안 활기차게 걷는 운동을 하는 것은 칼로리를 보다 빨리 소모시키기 위한 매우 좋은 방법이다.

운동이 식욕을 증진시키는 것은 사실이지만, 적당한 운동은 사람들의 불필요하게 과식하려는 식욕을 감소시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앉아서 일하는 사람들이 활동적인 생활을 사는 사람들 보다 음식을 더 많이 먹고, 체중도 더 높다는 통계가 나와 있다. 살기 위해 먹지 않고, 먹기 위해 사는 사람들에게는 비만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질병들이 찾아오게 된다. 의지력을 활용하여, 올바른 음식을 적당량 섭취하고, 꾸준한 운동을 통하여 체중을 줄일 뿐만 하니라, 식욕을 정상으로 유지하게 하는 것을 매우 중요하다.

체중을 조절하기 위한 식사 방법

1. 아침에 충분한 양의 식사를 하고, 적당한 양의 음식을 점심에 하며, 저녁 식사는 매우 가볍게 한다. 만일 아침과 점심에 충분한 양으로 채식을 올바로 했다면, 저녁식사를 하지 않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활동량이 많은 시간에 많은 양의 음식을 섭취하고, 잠자리에 드는 시간인 저녁에는 식사량을 최소로 줄임으로써, 내장에 음식물이 정체되지 않도록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건강 원칙이다.
2. 간식은 절대로 하지 말 것. 만일 배가 고프다고 느껴지면 많은 물을 마시라.
3. 식사를 할 때, 음식을 꼭꼭 씹어서 천천히 먹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음식을 천천히 먹으면, 적은 양의 음식으로도 만복감을 느끼게 된다.
4. 식사 할 동안에 대화를 즐기면서 느긋하게 식사를 한다. 이것 역시 음식을 천천히 먹도록 도와 줄 것이다.
5. 꼭 먹어야 할 양을 식기에 담아서 식사를 한 다음에, 추가로 더 이상 먹지 않는다.

“식욕을 정복한 사람에게는 정복하지 못할 것이 없다”는 격언이 있다. 먹는 것은 가장 큰 유혹거리 중의 하나이다. 단순히 우리의 식욕을 만족하기 위해서 식사를 하지 말고, 우리의 양심 속에서 올바른 길이라고 생각되는 방법으로 식사를 해야 한다. 체중을 조절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생활 방식을 조절해야 하는데, 이 일에는 결정적인 노력과 결심이 요구된다; 아무리 우리가 올바른 식사법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매 상황마다 옳고 그른 것을 선택해야 한다. 한 조각의 쵸코파이에 대한 유혹을 물리치고, 본성적인 게으름을 극복해야 하고 옥외에서 운동을 하며, 불필요하게 텔레비젼을 보는 습관을 버리기 위해서 벌이는 자신과의 싸움은 마음 속에 매우 치열한 투쟁을 가지고 올 것이다. 단호한 결심을 하지 않는한, 우리의 본성은 옛 습관으로 돌아가고 싶어한다.

체중을 조절하고 싶은가? 먼저, 건강에 관한 올바른 원칙들을 이해한 다음, 그 원칙들을 꾸준하고 지속적으로 실천해 보라.

산화방지제로 건강을 회복하세요!

윈스턴 크레이그 박사

질병이 생기는데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다. 아직도, 어떤 질병들은 그 원인을 현대 의학이 정확히 규명하고 있지 못하지만, 대부분의 질병은, 일상 생활에서 우리가 결정하는 적은 선택들에 의해서 시작된다.

특히, 과도하게 지방을 섭취하는 것, 과식을 하는 습관, 충분한 휴식을 취하지 않는 것, 음주와 흡연을 하는 것, 충분하게 운동하지 않는 것 등과 같은 선택들이 질병의 주요 원인인데, 이러한 나쁜 생활 습관과 잘못된 선택들은 인체에 매우 유해한 영향을 미치는 프리 레디칼(free radical)의 과잉 현상을 가져온다.

프리 레디칼(free radical)

프리 레디칼은 분자로부터 전자가 빠져 나감으로서 야기된 분자의 불안정한 상태를 말하는데, 이러한 프리 레디칼은 살충제나 오염된 대기와 같은 환경적인 요인들과 식품을 통하여 외부로부터 들어 올 뿐 아니라, 체내에서 자연적으로 만들어 지기 때문에, 결코 완전히 피할 수는 없는 존재이다. 프리 레디칼이 인체에 미치는 유해한 영향을 한마디로 간단하게 표현하자면, 그것은 세포의 산화이다. 프리 레디칼은 체내에서 단백질과 DNA, 그리고 세포를 이루고 있는 구성 요소들을 손상시킴으로써,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건강을 악화시킨다. 프리 레디칼의 과잉 현상으로 인하여, 노화가 빨리 진행되며, 동맥경화증으로부터 시작해서 백내장 및 암에 이르는 50가지 이상의 질병들에 대한 발병 가능성이 증대된다.

프리 레디칼의 위험에 대한 연구들이 발표되면서, 그것을 억제하거나, 그것이 주는 유해한 영향으로부터 세포들을 방어할 수 있는 방법들은 크게 두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첫째는 프리 레디칼이 세포를 산화시키는 것을 방지하는 산화방지제가 많이 함유되어 있는 식품을 많이 섭취하는 것이고, 둘째는 프리 레디칼의 생성을 억제하는 생활 습관을 가지는 것이다.

산화방지제

산화방지제는 프리 레디칼의 형성을 억제하는 “경찰력”과 같다. 그러므로 식품을 통하여 많은 양의 산화방지제를 섭취한 사람들의 경우, 심장혈관성 질환이나 암에 걸릴 위험률이 크게 저하된다. 여러 종류의 산화방지제가 있는데, 가장 중요한 산화방지제는 비타민 C, 비타민 E, 그리고 베타 캐라틴(beta caratene)이다. 이러한 산화방지제들은 특별히 과일과 채소에 풍부하며, 정제되지 않은 곡류(완두콩, 강낭콩), 그리고 견과류와 씨앗에도 함유되어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현대인들이 과일과 채소를 통하여 필요한 산화방지제를 공급받고 있는 실정이다.

어떤 사람들은 산화방지제를 비타민 정제나 영양제로부터 공급받으려고 하지만, 미국 심장협회와 암협회에서는 그러한 것들을 권장하는 대신에, 천연 식품을 통하여 산화방지제를 섭취할 것을 권장하고 있다. 왜냐하면, 비타민 정제를 통하여 충분한 항산화제를 공급받을 수 있다는 확실하고도 일관성 있는 연구 결과가 아직 발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채소와 과일에는 산화방지제 이외에도 인체를 각종 질병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는 복합물질들이 함유되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항산화제를 다른 복합물질들과 섞어서 채소와 과일에 균형있게 넣어 주셨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어떤 식품에서 산화방지제를 풍부하게 얻을 수 있는가를 알 수 있다면, 그러한 식품들을 섭취함으로써 최적의 건강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식품에 많이 들어 있는가?

우리 주변에 있는 식품들을 통하여 산화방지제를 충분히 얻을 수 있다. 예를 들어서, 중간 크기의 오렌지 한 개는 미국 정부에서 권장하는 비타민 C의 일일 요구량을 충족시킨다. 중간 크기의 당근 한 개에도 베타 캐라틴의 일일 요구량을 훨씬 초과한다. 호박, 고구마, 서양 호박, 그리고 짙은 오렌지 색의 채소들 속에도 매우 높은 수준의 항산화제가 담겨져 있다. 비타민 E는 거의 모든 천연 식품에 골고루 산재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원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섭취할 수 있다. 비타민 E의 섭취량을 증가시키기 원한다면, 한 줌의 견과류와 씨앗류를 먹음으로써 얻을 수 있으며, 짙은 색의 채소잎, 현미쌀, 옥수수, 가루, 귀리 가루, 콩, 고구마, 미나리, 밀, 그리고 맥아에서 충분한 양을 얻을 수 있다.

결론

프리 레디칼은 우리 몸에 유독한 영향을 미치는데, 특히 가장 섬세한 세포에 손상을 준다. 우리 몸은 환경적으로나 생리학적으로 프리 레디칼에 항상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완전히 피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프리 레디칼을 대항하거나 억제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프리 레디칼의 과잉생산을 억제하거나 그것에 대항하여 싸울 수 있는 산화 방지제를 증대시킬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들은 다음과 같다;

1. 가장 중요한 것은, 프리 레디칼을 생산하는 잘못된 생활 습관을 버려야 한다.
2. 동물성 지방(포화지방)의 섭취를 중단하고, 천연식품을 통하여 필요한 지방을 섭취해야 한다.
3. 음주와 흡연을 금해야 한다.
4. 대기가 심하게 오염되어 있는 대도시를 떠나서 조용한 소도시나 시골로 주거 환경을 바꾸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
5. 충분한 양의 산화방지제를 섭취해야 하는데(특히, 비타민 C와 E, 그리고 베타 캐로틴), 짙은 오렌지색과 짙은 초록색의 과일과 채소 속에는 산화방지제가 많이 저장되어 있다. 또한 적당한 양의 씨앗류와 견과류, 그리고 정제되지 않은 곡류를 섭취한다면, 프리 레디칼의 노출로부터 많이 보호받을 수 있다.

암, 심장병, 고혈압, 백내장, 그리고 노년시력퇴화증세와 조기 노화현상은 프리 레디칼이 체내에 과도하게 형성되었기 때문에 생기는 질병들이다. 자신의 생활 방식이 프리 레디칼에 많이 노출된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은 철저하게 생활을 개선하고, 태초에 하나님께서 과일과 채소 속에 넣어두신 “천연치료제”들을 풍부하게 섭취해야 한다. 그러나 흡연, 음주, 육식, 운동부족과 같은 나쁜 습관들을 개선하지 않은채, 하나님의 “천연치료제”을 먹을 경우에는 나쁜 습관들로 인하여 천연치료제의 좋은 효과들이 무력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올바른 생활습관과 건강의 중요한 원칙들을 습관화 하면, 하나님의 “천연치료제”는 우리의 건강을 놀라운 방법으로 회복시킬 것이다. 우리의 생활은 변화되어야 하며, 믿음으로 그분의 치료의 약속을 붙잡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천연치료제

깨끗한 공기, 햇빛, 절제, 휴식, 운동, 적당한 식사, 물의 사용,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는 것, 바로 이러한 것들이 참된 치료제이다. 환자는 치료를 시작하기 전에 무엇이 질병의 원인이며, 어떤 것들이 그 원인들의 뿌리를 치유할 수 있는지를 깊이 생각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천연치료제를 자신의 생활 깊숙이 받아들이는 것을 꺼려하는데, 그 이유는 결정적인 개혁과 노력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생활하는 모든 점들을 개선하기 보다는 가까운 약국에 가서 약을 사먹음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만, 그것은 표면에 나타난 증세를 잠시 잠재움으로써, 문제를 더욱 심각하게 만드는 요인이 될 수 있다.

하나님께서 모든 인류에게 주신 생명의 법칙 속에는 단순한 천연치료제들이 포함되어 있다. 균형있는 지성과 깨끗한 양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마다, 건강과 치료에 관한 참된 지식을 이해할 수 있다. 건강은 우연히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유지하거나 회복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타락한 본성과 끊임없이 투쟁하는 일이 요구된다. 부절제하고자 하는 유혹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는 사람만이 건강과 치유의 경험을 쟁취할 수 있다.

 

식욕에 속지 마세요!

아가타 뜨레쉬 의사

사자가 시원한 나무 그늘 아래에 널찍하게 누워 있습니다.
정글의 왕다운 여유가 그의 모습에서 풍겨 나옵니다.

윤기 흐르는 암소가 저 앞에 지나가는데도
그냥 쳐다보고만 있지요.
아마 지금은 배고프지 않은 것같아요.

그러나 일단 아침 식사 때 위장에 들어간
제브라나 들소나 멧돼지가 위장을 빠져 나가버리면,
그는 침을 흘리면서 또 다른 사냥감을 찾아서 일어나죠.
그가 수염을 닦으면서 일어서는 자리에는
남은 찌꺼기를 기다리는 하이애나들만 서성거리죠.

그러나 사람은 사자와 다르죠.
음식을 먹어야 할 시간이 되면,
그는 식탁에 앉는데,
대개 배가 고파서 앉는 것이 아니죠.

음식이 위장의 꼭대기를 넘어서야
사람은 배를 문지르면서 만족한 느긋함을 즐기죠.
그러나 이어서 나오는 후식을 보면서
또 다시 입안을 적시죠.
사람은 건강을 위해서가 아니라,
혀끝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음식을 먹지요.

그런데 돼지와 소와 닭 같은 동물들도
배가 고파서 먹는 것이 아니랍니다.
눈앞에 무엇인가가 있으면,
아무 생각없이 계속해서 입 속에 넣어버리죠.

우리는 사자의 식욕을 따라가야 하나요?
우리는 돼지나 소의 식욕을 따라가야 하나요?
아니면, 우리는 입 속에 숨어 있는 혀끝의 요구를 따라가야 하나요?
언제, 어떻게, 무엇을, 그리고 왜 먹어야 하나요?

무엇을 갈망하는 것, 우리 모두는 그러한 욕망을 가지고 있다. 우리 모두는 “무엇인가를 원하는” 강력한 느낌을 가질 수 있다. 음식, 마약, 술, 커피와 같은 것들을 지금 당장이라도 입 속에 집어 넣어야만 된다는 느낌이 우리의 마음을 갑자기 사로잡을 때가 있다. 하루 중에서 조용하고 느긋한 시간이 되면, 지난 밤에 굉장히 맛있게 먹었던 “밤참”을 연상하게 된다. 그리고는 불과 몇 분도 지나지 않아서, 우리는 지금 하고 있는 일을 관심 밖으로 밀어두고, 지난 밤에 우리의 혀를 촉촉히 적신 그 맛을 다시 한번 더 만끽하고자 흥분하기 시작한다.

무엇을 갈망하는 느낌은 음식물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다. 흡연, 음주, 그리고 심지어는 친구를 만나고 싶어하는 감정도 우리에게 강력하고 밀도 높은 느낌을 가져다 주는데,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즉시로 어떤 목표를 정하게 하여서, 그것을 매우 빠른 시간 내에 손이나 입에 넣도록 자극한다. 요즈음 나오는 소설들은 대개 책을 읽는 독자들의 이러한 느낌과 감정을 자극하기 위하여 이야기를 전개해 나간다. 우리가 우리의 느낌이 요구하는 것을 만족시키고 있는 동안, 우리는 느낌의 종이 되어 가며, 결국에는 어떤 것에 대하여 “중독” 현상을 나타내게 된다. 일단 우리가 어떤 것에 대해서 “갈증”을 느끼게 되면, 원하는 그것을 반드시 가져야 된다는 생각이 우리의 온 마음을 점령하게 되며, 결국에는 도저히 저항할 수 없게 된다.

음식에 대한 강렬한 욕망은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게 문제를 일으키는 원인이 되고 있다. 일단 그것이 발동되면, 우리는 우리의 건강과 신체의 필요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상태에서 음식을 마구 입으로 집어 넣게 된다. 음식을 탐하는 욕구는 우리로 하여금 신체가 갖게 되는 부담과 질병에 대해서 전혀 생각하지 못하게 만들며, 위장에서 고통을 느끼거나 식욕이 바닥으로 떨어질 때까지 밥상에서 일어서지 못하게 만든다.

물론, 식욕은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어야 하는 정상적인 것이며, 우리 몸을 유지하는 기능을 수행하지만, 그것이 잘못 사용되면 실로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우리가 좋아하는 어떤 음식들은 음식에 대한 욕망을 더욱 더 강력하게 자극한다. 많은 경우에,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알러지 반응을 일으키는 음식을 더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쵸코렛은 우리의 입맛을 자극시킬 뿐아니라 알러지를 일으키는 음식이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어떤 욕구가 채워지지 않을 때,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배고픔을 느끼도록 만들 수 있다.

우리는 어떤 것에 대해서도 욕구를 느낄 수 있다. 직업에 대해서, 보다 나은 집에 대해서, 몸무게를 조절하는 것에 대해서, 각종 스트레스 등등 .... 많은 경우에, 우리가 느끼는 여러가지 욕구들이 요구하는 바를 정확하게 구별하지 못하거나, 오해하게 되는데, 그러한 경우에는 욕구 그 자체가 비정상적인 식욕으로 돌변되어 음식물을 요구하는 배고픔으로 느껴질 수 있다. 이렇게 잘못 전달된 메세지가 우리로 하여금 과식하게 하며, 간식하게 만들고, 몸에 유익하지 않은 여러가지 것들을 위장에 넣게 만든다.

어떤 것에 대한 우리의 갈망과 욕구가 아무런 제재없이 채워질 때, 그것은 “중독”으로 변한다.

지나친 과식을 통하여, 우리는 자신의 욕구 불만을 무의식 중에 채우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어떤 욕구와 욕망들은, 때때로 우리가 먹는 음식물에 의해서 조장되는 경우가 있다.

우유나 우유로 만든 가공품들은 잠자고 있는 욕구와 욕망을 불러 일으킬 수 있다. 설탕은 우리의 식욕을 혼돈 상태에 빠뜨리게 되며, 이로 인해서 식사를 끝마쳐야 할 시기를 놓치게 만든다.

설탕은 우리의 혀로 하여금 더 많은 설탕, 더 많은 고기, 더 많은 소금, 더 많은 술을 요구하도록 유도한다. 설탕은 우리로 하여금 거짓 배고픔을 느끼게 만든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 더 많은 양의 설탕을 먹으려고 하게 된다.

짠 음식은, 그것이 인스탄트 음식이든지, 아니면 집에서 요리한 음식이든지 간에 위벽을 자극하게 되며, 식욕을 증폭시킨다.

하루에 8컵의 물을 마시고, 음식에 들어가는 소금의 양을 줄이면, 위장을 편하게 해줄 수 있으며, 비정상적인 식욕의 증가를 예방할 수 있다. 인스탄트 음식이나, 고기나 커피의 대체 식품에 들어가는 화학 물질들은 우리의 뇌를 자극하거나 우울하게 만들 수 있다. 자극적인 물질은 욕구를 증대시키며, 우울하고 낙담스러운 느낌은 욕구를 조절하고자 하는 마음을 약화시킨다. 그러므로 이러한 화학 물질은 과식의 원인이 되는데, 그것의 영향력은 며칠이 지나도 계속될 수 있다.

어떤 것을 원하는 갈망이나 욕망은 때때로 마약이나 술이나 또는 어떤 유해한 것들을 원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흰쌀과 같이 정련된 곡물류, 운동 부족, 과식의 후유증, 지나치게 빨리 먹는 식사 습관, 정해진 시간과 정해진 장소에서 먹지 않는 습관, 간식, 긴장 등은 비정상적이고 억제하기 힘든 식욕을 유발시킬 수 있다. 식사를 너무 빨리 하거나, 긴장 상태에서 식사를 하거나, 또는 식사 중에 무엇에 의해서 방해를 받아 식사가 자주 중단되면, 음식의 맛을 즐길 수 없게 되어서 음식에 대하여 만족감을 느낄 수 없다. 또한 음식이 균일하게 부수어지고 깨어져서 크림처럼 될 때까지 씹지 않는다면, 과식을 피할 수 없다.

음식을 잘 씹는 것이 원활한 소화를 위한 첫번째 단계이다. 적당하게 소화되기 위해서는 음식이 입속에서 타액과 잘 섞여야 한다. 만일 화가 난 상태에서 식사를 하게 되면, 우리 몸의 화학적 균형이 깨져서 소화불량을 일으키게 되며, 변비가 생길 수 있고, 어떤 것에 대한 욕구가 발동될 수 있다.

습관과 직업이 욕구를 일으킬 수도 있다. 요리하는 직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나 가정에서 식사를 준비하는 사람은 식사 시간 이전에 미리 위장이 채워질 수 있다. 직장이나 가정에서 음식에 대해 생각하는 동안에, 식욕의 포로가 되는 습관을 가질 수 있다. 이러한 습관은 음식물을 아무 때나 돌발적으로 먹는 심각한 문제로 발전될 수 있다. 우리는 오직 정해진 시간에만 음식을 먹는 습관을 갖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

우리들 주변에는, 비정상적인 식욕과 욕구를 일으키는 것을 좋은 것으로 대체할 수 있는 음식물이 얼마든지 있다. 우리의 소화 기관과 신경 계통을 자극하지 않는 부드러운 대체물이 있다. 그런 대체물들을 우리의 식탁 위에 매일 올리며, 음식이 크림처럼 될 때까지 잘 씹음으로써 과식을 피하고, 정해진 시간과 정해진 장소에서 편안하게 식사를 해보라. 그리고 채워지지 못한 욕구나 욕망이 있는가를 잘 생각해 보고, 그것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건설적인 방법과 인생의 질을 높일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보라! 그대의 생애에 놀라운 결과가 생길 것이다.

서론 - 마지막 때가 되었습니까?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말세가 되었다고 말을 하면서, 세상이 그 종점을 향하요 달려가고 있음을 염려한다. 그러나 그 반면에 다른 한편에서는 “우리 할아버지 때부터 말세가 되었다고 했는데, 아직도 이 세상은 여전히 번영하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된 일이요?”라는 말로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조롱한다.

도대체 “말세”란 언제인가? 그것은 과거에 시작 되었는가? 아니면, 미래의 어느때를 말하는가?만일 “말세”가 과거에 이미 시작되었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말세 (마지막 때)일 것이지만, 만일 그것이 미래의 어느 때에 시작될 것이라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를 아직 말세라고 부를 소 없을 것이다. 이번 호에서 다룰 공산권의 몰락에 대한 예언은 “마지막 때”의 시작과 매우 깊은 관련이 있는데, 이것에 관한 예언 연구야말로 현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성경 연구라고 말할 수 있겠다.

 





위의 차트를 통하여 살펴 본 바와 같이, 다니엘서 2장, 7장, 11장은 한결같이 1798년을 전후로 해서 “마지막 때”가 시작되었음을 증거하고 있다. 그런데, 마지막 때에 관한 징조들과 사건들이 성경의 다른 곳에도 기록되어 있는가? 그렇다. 성경에는 “마지막 때”가 되었음을 알려주는 하늘과 땅의 징조들이 기록되어 있으며, 또한 마지막 시대의 하나님의 참 백성의 특징과 적 그리스도의 세력의 부활에 대해서 예언해 주고 있다.

1. 징조

먼저, 예수님과 사도 요한이 말씀하신 마지막 때의 징조들에 대해서 살펴 보도록 하자; “그 날 환란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앞에 이른 줄 알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 마태복음 24:29,32,33,34. 예수께서는 중세기의 “환란 후에” 즉, 종교암흑시대 이후부터 시작되는 “마지막 때”의 징조로서 천체에 기이한 현상이 일어날 것을 말씀하셨는데, 과연, 역사는 1798년을 전후로 해서 그분의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졌음을 증거하고 있다. 사도 요한 역시 엄청난 지진과 하늘의 이적들을 “마지막 때”의 징조들로 예언하였다. “내가 보니 여섯째 인을 떼실 때에 큰 지진이 나며, 해가 총담같이 검어지고 온 달이 피같이 되며,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선 과실이 떨어지는 것같이 땅에 떨어지며.” 요한계시록 6:12,13.

이러한 징조들은 “마지막 때”가 시작된 1798년을 전후로 해서 크게 성취되었는데, 예수께서는 당신께서 재림하시기 직전에 이러한 징조들이 다시 한번 엄청난 규모로 일어날 것이라는 사실을 마태복음 24:33절에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 여기서 “환란 후에 ...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는 말씀의 의미는, 중세기의 종교암흑시대 이후부터 시작하여 예수 재림 전까지의 세대에 이 모든 징조들이 “다 이루”어 질 것이라는 뜻이다. 이제 “마지막 때”가 시작되었던 무렵에 일어났던 지진과, 해와 달과 별의 징조들을 역사 속에서 확인하여 보자;

1755년 11월 1일, 10만명의 사상자를 낸 포르투칼의 리스본 지진을 기점으로해서, 마지막 시대가 되었음을 알리는 하늘과 땅의 징조가 시작되었다. 1780년 5월 19일에는 “암흑일”(Dark Day)이라고 불리는 암흑현상이 미국의 동부지역에서 광범위하게 일어났는데, 역사는 그 사건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미국 동부 전 지역이 이해할 수 없는 암흑으로 뒤덮혔다. 그래서 그 날을 암흑일이라고 부른다.” 웹스터 사전, 1969년도판. “암흑일 날 밤에 떠오른 달은 핏빛같이 붉었다. 그러나 잠시 후에 달은 시야에서 사라졌다. 어둠이 너무 짙어서 사람들과 말들은 길을 잃었다. 18인치 밖에 있는 흰색 종이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칠흙같은 어둠이었다.” 메사츄세츠 역사 모음집 p.97, 1792년도판. 1833년 11월 13일에는 엄청난 유성의 소나기가 미국에 떨어졌다. 밤 9시에 시작된 유성의 낙하가 다음날 아침까지 퍼붓듯이 계속되었다. 한 관측소의 기록에 의하면, 시간당 이십만개의 별똥들이 5~6시간 동안 계속되었다고 한다.

왜 1789년을 전후로해서 시작된 하늘과 땅의 징조들이 미국을 중심으로 집중적으로 이루어져 왔는가? 왜냐하면, 미국은 마지막 시대에 복음의 중심지이며, 모든 예언 성취의 중심지가 되기 때문이다. “마지막 때”가 되었음을 말해 주는 사건들 중에서, 다음에 소개하는 두가지 사건은 요한계시록 속에 담겨져 있는 가장 강력한 증거들이 될 것인데, 이 두 사건 모두 미국과 깊은 관련을 가진 “마지막 때”의 징조들이다.

2. 미국으로 피신하는 여자의 남은 자손과 그들의 특징

이미 살아남는 이들 제5,7호에서 이 문제를 상세히 다루었지만, 여기서 다시 간단하게 복습해 보기로 하자. 요한계시록 12장에는 진리를 고수하면서 면면히 이어지는 참 교회를 상징하는 여자(참 교회)의 투쟁과 피신에 관한 예언이 나온다. 1절은 참 교회의 모습과 특성이며, 2~5절은 사단의 공격과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탄생과 죽음과 부활의 장면이고, 6,13~14절은 중세기의 종교암흑시대 동안에 핍박당하는 참 교회의 모습이며, 15~16절은 1260년간의 종교암흑시대가 끝나갈 무렵, 종교와 양심의 자유를 지키기 위하여 종교개혁자들과 청교도들이 하나님께서 미리 준비해 두신 신대륙으로 피신하는 모습이다.

요한계시록 12장의 마지막 절인 17절에는 미국으로 피신한 여자의 남은 자손들의 정체와 그들을 향하여 분노하는 마지막 시대의 사단의 모습이 나온다.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

3. 마지막 핍박을 위하여 부활하는 작은 뿔의 모습

우리는 살아남는 이들 제16호에서 작은 뿔의 정체와 그 역사에 대해서 자세히 살펴보았다. 종교암흑시대의 종말을 고한 해인 1798년에는, 무신론주의를 신봉하는 불란서 혁명정부의 버티어 장군에 의해서 교황 피우스 6세가 로마교황청으로부터 불란서 파리로 압송되어 감옥에서 옥사하는 역사적인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로서 작은 뿔 세력인 교황권은 “죽게 되는 상처”를 입어서 무기력한 존재가 되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 13장에는 다니엘 7장에 나온 작은 뿔 세력이 “짐승”의 모습으로 재등장하면서, 그 “죽게 되었던 상처”가 다시 회복되는 놀라운 사건이 묘사되어 있다. “그의 머리 하나가 상하여 죽게 된 것같더니, 그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으매 온 땅이 이상히 여겨 짐승을 따르고.” 계 13:3.

그렇다면, 작은 뿔 즉, “짐승”은 언제, 어떻게 “죽게 되었던 상처”로부터 회복되었는가? 1929년, 이태리의 뭇쏘리니는 교황청과 라테란 조약을 맺었는데, 그 조약에 의해서 교황청은 100에이커에 달하는 영토를 회복하게 되었고, 독립된 주권국가가 되었으며, 이태리는 로마 천주교회를 국교로 인정하였다. 이 사건을 기점으로해서 교황권은 나날이 성장하게 되었으며, 오늘날에는 교황권이 모든 도덕적 문제의 표준을 설정하고 있으며, 모든 종교 지도자들의 존경을 받고 있고,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요한계시록 13장의 중반부터 끝까지는 교황권이 미국과 손을 잡고, 전세계적으로 짐승의 표를 강요하는 놀라운 예언이 기록되어 있다.

 

 

 


 

1부 - 다니엘서에 나타난 남방 왕과 북방 왕의 전쟁


남방왕과 북방왕 사이의 투쟁의 역사인 다니엘 11장 예언

다니엘 11장은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난관에 빠지기 쉬운 어려운 예언장이다.

그 이유는 그 속에 기록된 예언들이 너무나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상에 있어서 다니엘 11장의 구조는 간단하게 되어 있다. 다니엘 11장은 역사를 통하여 전개되는 남방왕과 북방왕의 투쟁을 묘사하고 있다. 다니엘 11장에 등장하는 남방왕과 북방왕의 정체와 그 흐름을 중심으로 예언을 분석한다면, 모든 문제를 쉽게 풀 수 있다. 다니엘 11장의 예언에서 가장 흥미있는 것은 세상 역사를 통하여 남방왕과 북방왕 사이에서 벌어지는 전쟁들과 사건들이 바로 현대 공산주의의 몰락을 예언하고 있는 놀라운 성경 예언의 실마리가 된다는 사실이다. 어떤이들에게는 이 예언 문제가 좀 어려운 것일지 혹 모르겠다. 그러나 이 문제에 온 관심을 기울여서 연구한다면, 세상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미래를 내다보시고 간섭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를 가질 수 있는 동시에, 지금 우리가 세상 종말에 얼마나 가까이 다가와 있는지를 알 수 있다.

다니엘서의 각 장들은 어떠한 시기에 계시를 받았으며, 어떠한 시점에서 그 예언된 사건들이 시작되는지를 언급하면서 시작되는데, 11장도 예외없이 메데 페르샤(메데 바사) 시대에 계시가 임했다는 사실과, 페르샤 시대(B.C. 6세기 중반) 부터 그 받은 계시의 사건들이 진행된다는 사실이 11장 1~4절에 기록되어 있다. 다니엘 11장에는, 다니엘 2장(금신상)과 7장(네 짐승과 작은 뿔)에 묘사되었던 세상 역사에 대한 예언이, 북방왕과 남방왕 사이의 투쟁으로 재조명되고 있다.


시대에 따라서 변화되는 남방왕과 북방왕의 정체

선지자 다니엘은 남방왕과 북방왕을 팔레스타인 지방을 중심으로 북쪽에 있는 세력은 북방왕, 남쪽에 있는 세력은 남방왕이라고 불렀다. 예를 들어서, 예레미야 선지자도 렘 1:13,14,15; 6:1; 25:9,26; 46:2,6,10에서 바벨론을 북방에서 오는 왕으로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팔레스타인 지방을 중심으로 남쪽에 있는 나라는 애굽이다. 그래서 다니엘은 애굽을 남방왕이라고 지칭하고 있는데, 11:8절 하단에서는 “...그 은과 금의 아름다운 기구를 다 노략하여 애굽으로 가져갈 것이요 몇해 동안은 그가 북방왕을 치지 않을 것이요”라고 하여 남방왕의 정체를 구체적으로 “애굽”이라고 밝혀 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한가지 이해하고 지나가야 할 중요한 원칙이 있는데, 그것은 팔레스타인 북쪽에 위치한 북방왕과 남쪽에 위치한 남방왕이 항상 같은 시대의 어떠한 특정한 나라에게만 국한 될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그 이유는 다니엘 11장 예언들이, 세계 역사의 흐름을 따라 시대적으로 어떠한 사건들이 일어날 것이며, 마지막 시대에 가서는 과연 세상이 어떠한 식으로 끝나게 될 것이고, 또한 이러한 역사적 사건들이 하나님의 교회와 무슨 관계를 가지게 될 것인지를 보여주는 방대하고도 기나긴 역사를 계시하는 긴 예언이기 때문이다. 나라들이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흥망성쇠의 역사를 반복하면서, 팔레스타인의 북쪽과 남쪽에서 시작된 북방왕과 남방왕의 대결은 그것이 벌어지는 투쟁의 시기와 장소와 양상이 변화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특정한 나라가 전체 긴 예언의 주인공으로 계속 남아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니엘 11장의 초반부터 끝까지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북방왕과 남방왕을 어떤 특정한 나라에만 한정시킬 수가 없으며, 그 당시 마다 북방에 위치한 세력들을 살펴 보아야 하며, 또한 나아가서는 북방나라와 남방나라의 영적인 특징들을 살펴가며, 영적인 입장에서 적용시켜야 한다. 다니엘 11장 전체에 남방왕과 북방왕은 4번에 걸쳐서 그 정체와 투쟁의 양상이 변화되는데, 이제 그 모습을 차례대로 살펴 보도록 하자.

 

 


첫 번째 북방왕과 남방왕

다니엘 11장 1~4절까지의 해석은 거의 모든 성경학자들간에 일치하는데, 3절은 그리스의 알렉산더 대왕이 일어나는 모습이며, 4절은 알렉산더 대왕의 사후에 그리스가 네 명의 장군에 의해서 “사방”(셀류쿠스 왕조, 카산드로스 왕조,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리시마쿠스 왕조)으로 나누어지는 것에 대한 예언이다. 이 중에서, 셀류쿠스 왕조는 팔레스타인 북쪽으로 영토를 확장해 나가면서 시리아를 세웠으며,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팔레스타인의 남쪽으로 영토를 넓혀 나가면서 애굽을 세웠다. 그러므로 첫번째 등장하는 북방왕과 남방왕은 그리스로부터 빠져나온 시리아와 애굽을 가리키는데, 이 둘 사이의 전쟁이 5절~7절까지 기록되어 있다.


두 번째 북방왕과 남방왕

8절 이후부터 시리아와 애굽의 투쟁이 묘사되며, 그러한 와중에서 힘있게 일어서는 로마제국이 북방왕으로서 세력을 잡게 되고 나아가서는 팔레스타인까지 침공하여 들어가서 힘을 과시하는 장면이 16절에서 소개되더니, 17~29절에서는 드디어 북방왕 로마와 남방왕 애굽이 투쟁하는 모습이 자세하게 예언되어져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러므로 서두에 벌써 북방왕의 세력이 시리아에서 로마로 넘어간 사실을 우리는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이 흥미진진한 예언들은 17~19절에서 심지어 클레오파트라와 유명했던 로마의 씨이저와 안토니오 장군 사이의 삼각관계까지도 다루고 있으며, 20절에 가서는 로마가 자기 복속국가들에게 세금을 내게할 것이라는 예언(그래서 요셉과 마리아가 로마의 명령에 따라 호적하기 위하여 베들레헴에 갔다가 예수를 낳게 됨)도 담고 있는 놀라운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 이외에도 예언의 확실성을 입증할 수 있는 여러가지 예언들이 다니엘 11장 속에 들어 있으나, 혹시 독자들에게 지루함이나 혼돈을 주지 않기 위해서, 이만큼 하고 간단하게 지나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세 번째 남방왕과 북방왕

다니엘 11장에 나타나고 있는 북방왕의 세력은 시리아에서 로마제국으로 넘어가더니 나중에는 28절부터 시작하여 38절까지 이르는 예언에서는 기독교 로마(교황 로마)로 탈바꿈하는 장면을 다시 목격하게 된다. 30절과 31절에 “..그가 낙심하고 돌아가며 거룩한 언약을 한하고 임의로 행하며 돌아가서는 거룩한 언약을 배반하는 자를 중히 여길 것이며 군대는 그의 편에 서서...” 라고 예언함으로, 로마의 콘스탄틴 황제가 낙심하여 수도를 콘스탄티노풀로 천도하여 돌아갈 것과 교황에게 로마의 군대를 맡길 정도로 그를 도와 주며 교회의 머리로 그를 존중하여 높일 것에 대한 사실을 계시하였고 그 예언은 정확하게 성취된바 있다. 그 후에 32절부터 35절까지는 교황권이, 다시 말해서 기독교 로마가 종교 개혁자들과 종교 자유를 부르짖는 참된 하나님의 종들을 핍박하고 죽일 것에 대한 예언을 기록하고 있으며 중세기 동안에 그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진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는 것이다.(살아남는 이들 16호 참조). “백성중에 지혜로운 자가 많은 사람을 가르칠 것이나 그들이 칼날과 불꽃과 사로잡힘과 약탈을 당하여 여러날 동안 쇠패하리라”(33절).

그런데 11:40절에서 우리는 정말로 놀라운 예언을 보게 된다. 이 예언은 보통 예언이 아니다. 예언이란 그 예언된 사건이 성취되어 가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의 믿음을 더욱 더 고취 시키고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말씀에 더욱 더 전적으로 우리 자신을 맡길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기록되었다. 또한 아울러 예언된 사건들의 성취를 바라 보면서 하나님의 시간표가 어디까지 와 있으며, 다음에는 무엇을 기대할 수 있으며, 또한 언제쯤 주님께서 이 세상에 임하실지를 짐작할 수 있게 된다.

40절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마지막 때에 남방왕이 그를(북방왕-필자주) 찌르리니, 북방왕이 병거와 마병과 많은 배로 회리바람처럼 그에게로 마주와서 그 여러 나라에 들어가며 물이 넘침같이 지나갈 것이요.”

이 성경절에서, “마지막 때에 남방왕이 그를(북방왕-필자주) 찌르리니” 의 의미를 먼저 살펴보도록 하자. 이 예언의 말씀에 나오는 “마지막 때” 란, 앞에 나왔던 서론, “마지막 때가 되었습니까?”에서 살펴보았던 것처럼, 1798년의 전후 즉, 불란서 혁명의 결과로 인하여 종교암흑시대가 끝나가는 때를 가리키는 것으로써, 바로 그 무렵에 남방왕이 북방왕(교황권)을 치겠다는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교황 로마가 종교 개혁자들과 개신교인들을 핍박하고 죽일 때에 애굽은 더 이상 강대국으로 존재하지 않고 있었으며, 애굽이 교황 로마를 공격한 적이 역사에 없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방왕이 어떠한 방향으로 변천되어 갔는지를 역사 속에서 찾아내어야 한다. 북방왕이 시리아에서 이교 로마로, 이교 로마에서 교황 로마로 그 세력이 옮겨간 것처럼 말이다.

첫번째와 두번째 남방왕의 자리를 지켰던 애굽은, 성경에서 대표적인 무신론 세력으로 등장하고 있다. 애굽왕 바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참람되게 말하고 하나님을 대적한 대표적 인물로 유명하다. 요한 계시록 11:8절에서도 애굽은 영적으로 무신론 세력으로 상징되고 있는데, “저희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곳이니라”라고 말씀하였다. 애굽은 하나님을 공개적으로 부인하는 무신론 세력을 말한다.

워터 스캇(Walter Scott)경은 그의 저서 “나폴레옹의 생애” 제1권 17페이지에서 다음과 같이 놀라운 역사적인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1793년도 불란서 혁명 당시에 이 세상은 역사상 처음으로, 유럽에서 가장 훌륭한 나라 가운데 하나인 불란서의 지적인 국민들이 모여서 한 마음과 한 목소리로 인간의 영혼속에 받아들여져야 하는 가장 엄숙한 진리를 부인하고 만장일치로 신에 대한 믿음과 예배를 부인하여 버리는 장면을 목격하였다.” 1870년도 11월호 Blackwood Magazine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지금까지 존재하는 역사적인 기록에 의하면, 이 세상에서 불란서가 국가로서 우주의 창조주를 대항하여 공개적으로 반역하고 일어나 손을 든 유일한 나라이다.” 그러므로 남방왕은 애굽으로부터 불란서로 그 세력이 넘어간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게 된다. 남방왕은 무신론 세력을 대표하는 것으로서, 애굽에 이어서 불란서가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로마제국이었던 북방왕이 영적인 세력인 교황권의 세력으로 바뀌었던 것처럼, 남방왕의 자리가 애굽의 무신론 세력으로부터 불란서의 무신론 세력으로 넘어갔던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마지막 때(1798년)”가 되자 남방왕인 불란서가 북방왕인 교황권을 쳐서 찌름으로써, 종교암흑시대의 종말을 고하게 만드는 사건을, 우리는 역사 속에서 정확하게 목격하게 된다. 나폴레옹의 휘하 장군 버티어는 로마에서 교황 피우스 6세를 잡아다가 파리 감옥에 가두었는데, 그 감옥에서 교황이 옥사함으로써 1260년 동안의 교황권의 세도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 사건은 온 세상에 큰 충격을 주게 되었고 여러 나라의 성경 학자들과 신문기자들은 계시록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짐승이 죽게되는 상처를 입었다고(계시록 13:3참조)입을 모아 말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니엘 11:40절에 나타나는 북방왕을 찌르는 남방왕을 불란서로 해석하여 볼 때에 그 너무나도 정확한 성취에 가히 놀라지 않을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살아남는 이들 제16호-31페이지 참조). “마지막 때에 남방왕이 그를(북방왕-필자주) 찌르리니” 40절


네 번째 남방왕과 북방왕

그런데 역사가 흐르면서 남방왕의 세력이 다시 한번 탈바꿈을 하게 되는데, 그 무신론 세력이 이번에는 불란서에서 공산주의로 변모해 감으로써, 공산주의가 네번째 남방왕으로 등장하는 모습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보게 되는 것이다. 공산주의의 태동에 관한 학자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보면, 여러분들도 필자의 견해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1989년도 7월 22일자 주간 한국 신문은 “프랑스 혁명 200주년, 혁명은 아직도 계속 중인가?”라는 기사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마르크시스트 역사가들은 1789년 불란서의 부르조아 혁명이 19세기 유럽에서의 연속적 혁명의 요소를 불러일으켰다고 말하고 있다. 부르조아 혁명은 1848년 6월과 1871년 3월 프랑스에서 프로레탈리아 혁명이 일어나는 밑거름이 되었으며,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혁명이 전 세계로 퍼져 나가게 했다. 1871년 파리 꼼뮨은 공산주의 혁명운동의 효시였으며 1917년 10월 러시아 혁명, 1949년 중국의 공산화가 뒤를 이었고 쿠바에서 에티오피아에 이르기까지 세계 여러 나라에서 공산혁명은 승리를 구가했다. 혁명에 대한 마르크시스트의 이러한 모델은 최근까지도 프랑스의 역사학자들에 의해 널리 보급되었다.”

또한 막스 엥겔스는 그의 저서 “프랑스 혁명 연구 III” 3페이지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1891년 3월 18일, 파리의 노동자들은 부르조아 지배자들을 축출하고 그들의 수중에 권력을 장악하였다. 이것은 잊혀질 수 없는 빛나는 업적이었다. 며칠 후인 3월 29일 그들은 세계 최초의 프로레탈리아 국가인 파리 꼼뮨을 창설하였다. 이것은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해 지배되는 완전히 새로운 정치 형태이며 근로인민대중, 그중에서도 특히 노동자 계급의 이익을 위한 사회로서의 정치적 제반 조치들을 수행하는 그러한 국가였다. 꼼뮨은 72일간이나 지속되었으며, 내외의 반동세력들의 공격에 영웅적으로 저항하다가 붕괴되었다. 그러나 꼼뮨의 경험들과 거기서 얻은 교훈들은 세계의 혁명운동에 거대한 영향을 미쳤다. 레닌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꼼뮨은 유럽의 프로레탈리아들에게 사회주의 혁명의 임무들을 올바로 설정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전집 13권, p.477). 그리고 후에 그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파리의 대포들의 내는 포성은 프로레타리아의 가장 미온적인 분자들을 그들의 깊은 잠으로 부터 깨어나게 했으며, 또 도처에서 혁명적인 사회주의자들의 선전이 성장하는데 커다란 자극이 되었다.(전집 17권,p. 143). 파리에서의 혁명은 전세계를 통해 강력한 반향을 불러 일으켰으며 강력한 국제적 연대운동을 촉진시켰다.”

이쯤되면 우리는 불란서에 있던 무신론주의인 남방왕의 세력이 공산주의로 전환되어 갔다는 예언 해석에 동의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이러한 이해를 가지게 되면, 드디어 성경에 나타난 공산주의의 몰락에 대한 예언을 이해하기 위한 기초가 준비되었다고 생각된다.

죽게 되었다가 살아난 북방왕의 반격과 공산주의의 몰락

“마지막 때에 남방왕이 그를(북방왕-필자주) 찌르리니.” 40절. 우리는 앞에서 세번째 남방왕인 불란서에 의해서, 교황권(북방왕)이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던 장면을 역사 속에서 확인하였다. 1917년 볼쉐비키 혁명으로 시작하여 일어난 공산주의 혁명은 러시아는 물론 발칸 반도의 나라들과 동구 유럽, 그리고 일부 아프리카와 남 아메리카 지역의 나라들에 퍼져나갔는데, 흥미있는 사실은 그러한 나라들이 대부분 천주교인들이 대다수인 국가들이었다. 불란서의 무신론주의에 의하여 “죽게되는 상처” 를 한번 이미 받은 바 있는 교황권(북방왕)은 네번째 남방왕인 공산주의에 대해서 분노의 칼을 갈게 되었다. 그러므로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낫기 시작하게 되자(이태리의 뭇쏘리니가 100여 에이커의 바티칸을 교황에게 선물로 주면서 독립국가로 인정해 준 1929년도의 라테란 조약으로부터 시작하여 상처가 나아가기 시작한 것임), 천주교회의 교황권은 공산주의를 무너뜨리기 위한 계획을 암암리에 세워나가기 시작하게 된 것이다.

계속되는 40절의 후반부에는, 상처가 나은 북방왕이 남방왕에 대해서 대반격을 가하는 장면이 나온다. “북방왕이 병거와 마병과 많은 배로 회리바람처럼 그에게로 마주와서 그 여러 나라에 들어가며 물이 넘침같이 지나갈 것이요.” 다니엘서 11:40. 때가 되자 교황 요한 바오로 II세는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과 비밀스러운 신성 동맹을 맺고서 협력하여 공산세력을 무너뜨리기 위한 놀라운 계획을 수립하기에 이른 것이다. 폴란드에서 시작한 노조운동을 비밀리에 지지해 주면서 시작한 공산권의 붕괴는 실로 놀라운 세기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북방왕이 남방왕을 칠 때에는 “병거와 마병과 많은 배로 회리바람처럼 ... 여러 나라”에 들어 갈 것이라고 예언되어 있는데(40절), 이 또한 기가막힌 예언이 아닐 수 없다. 교황권 자체에는 군사력이 없지 아니한가? 그러므로 다른 세력의 군사력과 경제력을 빌려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미국의 세력이었다. 또한 마지막 시대에 남방왕은 “여러 나라”라고 성경은 언급하고 있다. 북방왕이 남방왕에게 복수하면서 마주나와 “여러 나라”에 들어 갈 것이라고 단 11:40절은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예언이 말하는 바 그대로, 공산주의 나라들은 하나가 아니라 여러 나라들이었다. 그러므로 마지막 때에 북방왕이 남방왕을 칠 때에는 여러 나라에 들어 갈 것이라는 예언이 얼마나 정확한 예언인가! 다음에 계속되는 기사들을 읽으시면서 독자들은 어떻게 공산주의가 성경이 예언한 그대로 정확하게 무너지게 되었는지에 대한 세기적인 예언 성취에 대하여 자세하게 배우게 되실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의 정확성은 다시 한번 우리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하지 아니한가! 다음 페이지의 기사들을 주의 깊게 읽으시기를 간절히 바란다.


 

2부 - 성경이 말하는 공산주의의 몰락


지금까지 배운 것의 복습

1. 북방왕인 교황권의 시작 : 제1부에서는, 역사 속에서 전개되는 남방왕과 북방왕의 대결과 그 투쟁이 전개되는 장면을 보았는데, 그러한 와중에서 두번째 북방왕 세력인 로마제국의 황제가 그리스도교회로 개종하면서 교황권에게 엄청난 세도를 넘겨주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때부터 교황권이 세번째 북방왕의 권좌를 차지하게 되었고, 온 유럽은 캄캄한 종교암흑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

“거룩한 언약을 배반한 자를 중히 여길 것이며 ... 멸망케 하는 미운 물건을 세울 것이며.” 30,31절. 계속해서 나오는 32,33절에는 중세기의 종교암흑시대 동안에 교황권이 하나님의 계명과 진리를 훼파하고, 성경적인 믿음을 고수하는 종교 개혁자(“지혜로운 자”)들에 대한 핍박과 박해의 장면이 나온다. “그가 언약을 배반하고 ... 백성 중에 지혜로운 자가 많은 사람을 가르칠 것이나 그들이 칼날과 불꽃과 사로잡힘과 약탈을 당하여 여러 날 동안 쇠패하리라.” 그러나 35절에는 중세기 동안의 핍박과 박해를 통과하는 하나님의 참 백성들에게 커다란 용기를 가져다 주는 희망의 빛이 나온다. 즉, 하나님의 예언에 의해서 “작정된” 기간인 1260년(종교암흑시대)의 끝인 1798년을 기점으로 “마지막 때”로 돌입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의 말씀이 나온다. “또 그들 중 지혜로운 몇 사람이 쇠패하여 무리로 연단되며 정결케 되며 희게 되어 마지막 때까지 이르게 하리니 이는 작정된 기한이 있음이라.” 35절.

2. 무신론 세력인 남방왕의 권좌가 바뀌는 역사의 과정 : 북방왕이 로마제국에서 교황권으로 바뀌면서, 무신론 세력을 대표하는 남방왕의 자리도 세계사에서 그 세력을 완전히 잃어버린 애굽으로부터 불란서로 바뀌었다. 1260년의 종교암흑시대의 끝이 가까워오자, 유럽에서는 교황권의 압제적인 신본주의에 대한 저항으로써, 르네상스와 인본주의 사상이 불타올랐는데, 특히 불란서에서는 이러한 사상을 배경으로 해서 성경과 신의 존재를 부인하는 세력들에 의한 혁명이 일어나게 되었고, 이로써 불란서는 무신론을 공식적으로 주창하는 세번째 남방왕의 자리에 앉게 되었다. 그러므로 40절에 나오는 “마지막 때” 란, 세번째 북방왕(교황권)과 남방왕(불란서 무신론주의)의 대결이 시작되는 시점을 말하는데, 바로 그 때에 불란서 혁명정부를 상징하는 남방왕이 북방왕인 교황권의 세도를 무너뜨리는 역사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마지막 때에 남방왕이 그를(북방왕, 필자주) 찌르리니.” 단 11:40. 하나님의 예언의 시계가 종교암흑시대의 끝인 “마지막 때” 즉, 1798년을 가리키자, 불란서 혁명정부의 버티어 장군이 교황 피우스 6세를 로마로부터 파리로 압송하여 감옥에서 옥사시킴으로써, 1260년 동안의 길고 긴 종교암흑시대가 그 종말을 고함과 동시에, 지구 역사의 마지막 시대가 그 막을 열게 되었다.

3. 네번째 남방왕인 공산주의의 탄생 : 불란서 혁명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지만, 그들이 주창하였던 무신론 사상은 마르크스, 엥겔스 등과 같은 사회주의자들로 하여금 공산주의의 이론을 생성시킬 수 있게 만든 근거를 제공하였으며, 레닌은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만들어 놓은 혁명적 사회주의 이론을 바탕으로, 러시아에서 노동자층을 주축으로 해서 공산혁명을 일으키는데에 성공하였는데, 이로써 남방왕의 자리는 불란서의 무신론주의에서 신의 존재를 부인하는 공산주의로 또 다시 옮겨지게 되었다.

다니엘 11장 40절이 말하는 공산주의의 몰락

A) 40절 초반부 : 이제, 우리는 다니엘서 11장에 전개되는 남방왕과 북방왕의 투쟁의 역사 가운데, 마지막 국면에 와 있다. 앞에서 공부한대로, 40절의 초반부인 “마지막 때에 남방왕이 그(북방왕)를 찌르리니” 라는 예언 속에는 무신론주의를 대표하는 불란서 혁명정부가 교황권의 세도를 무너뜨리며, 그 불란서의 뒤를 이어서 등장하는 네번째 남방왕인 공산권이 동유럽, 남미, 러시아 등과 같이 천주교회가 극성한 국가들을 차례로 공산화시키는 놀라운 역사의 모습이 함축되어 있다.

B) 40절 후반부 : 그렇다면, 40절의 나머지 부분인 “... 북방왕이 병거와 마병과 많은 배로 회리바람처럼 그에게로(남방왕, 필자주) 마주와서 그 여러 나라에 들어가며, 물이 넘침 같이 지나갈 것이요” 는 무엇을 의미하는 예언인가? 우선, 한눈에 알 수 있는 것은 북방왕이 남방왕에게 복수하는 장면에 대한 예언 임을 알 수 있다. 북방왕인 교황권이 천주교회의 국가들을 공산화시켰던 남방왕(공산권)에게 복수하기 위하여 치밀하고도 강력한 모습으로 반격을 가함으로써, 드디어 마지막 네번째 남방왕인 공산주의가 몰락되는 역사적 장면이 적나라하게 묘사되어 있는데, 이로써 거의 2000년 간에 걸쳐서 전개된 북방왕(교황권)과 남방왕(무신론주의)의 대결은 북방왕의 최종적인 승리로 끝나게 된다. 그렇다면, 군사력이 없는 교황권이 어떻게 세계 최대의 군사강국인 소련과 그의 위성국가들을 무너뜨릴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다니엘 11장 40절은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는데, 우리는 2500년 전에 기록된 이 예언의 성취를 불과 몇 년 전에 발간된 세상 신문과 뉴스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제부터, 성경과 대공 군사전문가와 뉴스 미디어가 말하는 공산주의의 몰락을 하나씩 차례대로 살펴보면, 그들이 각각 공산주의의 몰락 원인과 그 과정에 대해서 동일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1. 성경이 말하는 교황권의 회복과 공산주의의 몰락

A) 공산주의가 몰락되는 시점 : 성경은 공산주의가 몰락되기 전에 다음과 같은 사건들이 선제되어야 공산주의가 무너질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다; 1) 교황권이 공산주의를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먼저, 북방왕인 교황권이 과거에 두 남방왕들(무신론주의인 불란서 혁명정부와 공산주의)에게 입었던 상처가 회복되어야 한다. 우선, 상처가 회복되어야 원수와 다시 싸울 수 있지 않겠는가? 요한계시록은 교황권의 상처가 회복되는 사건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그의 머리 하나가 죽게 된 것 같더니 그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으매 온 땅이 이상히 여겨 짐승을 따르고.” 계 13:3. 성경이 예언한 바대로, 교황권이 입었던 치명적인 상처가 이태리의 뭇쏘리니에 의해서 주도된 라테란 조약(1929년)에 의해서 크게 회복되기 시작하였으며, 그 이후로 계속해서 과거에 잃어버렸던 영화를 서서히 되찾게 되었다. 그리하여 1980년대에 이르러서, 교황은 세계적인 정신적 지도자가 되었으며, 모든 정치와 도덕 문제에 있어서 최후의 해결사 역할을 할 정도로 그 상처가 회복되었다.

과연 교황권이 세계적으로 종교적, 도덕적, 정치적으로 지도적 역할을 회복한 후인 1980년대 말기부터 동구 유럽의 공산권이 무너지기 시작하였으며, 드디어는 공산권의 머리인 소련이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B) 공산주의를 몰락시키는 교황권의 전략 : 40절에는 북방왕인 교황권이 남방왕인 공산주의를 공략하는 전략이 적나라하게 묘사되어 있다. 먼저, 북방왕의 공격 장면을 상징적으로 묘사한 단어들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살펴 보도록 하자. “... 북방왕이 병거와 마병과 많은 배로 회리바람처럼 그에게로(남방왕, 필자주) 마주와서 그 여러 나라에 들어가며, 물이 넘침 같이 지나갈 것이요.” 40절

상징어 의미 관련 성경절
병거와 마병 군대, 무력 왕상 1:5, 왕상 20:1
배 경제력 시 107:23, 잠 31:14, 계 18:17~19

이제, 이러한 표상적 의미를 염두에 두고 40절을 다시 읽어보면, “마지막 때”에 공산주의가 교황권에 의해서 어떻게 무너지게 될 것이라는 예언의 의미가 좀더 분명해 진다. 즉, 북방왕인 교황권이 남방왕인 공산주의를 몰락시키기 위해서, “병거, 마병, 배”를 공격 수단으로 사용하여 “회리 바람처럼” 신속하게 공격할 것이다. 여기서 “병거와 마병”은 군사력을 의미하며, “많은 배”는 엄청난 경제력을 의미하는데, 이러한 것들을 기반으로 해서 공산권에 속한 “여러 나라”를 물밀듯이 공격할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어떻게 교황권이 초강대국인 구 소련을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 쓰러뜨릴 수 있는가? 인간의 지혜로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도무지 찾을 수 없다. 그러나 역사의 시작과 끝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남방왕인 공산주의의 몰락을 가장 확실한 언어로 예언하셨는데, 과연 하나님의 예언대로 역사의 시간이 1989년을 가리키자, 마지막 시대의 예언을 깊이 연구하는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의 눈 앞에는 다니엘 11장 40절의 의미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정도로 분명하게 펼쳐졌다.

2. 군사 전문가가 증거하는 마지막 남방왕의 몰락

1981년, 미국의 대통령에 당선된 로날드 레이건 대통령은 “위대한 미국”을 그가 대통령으로 재임하는 동안에 성취할 최고의 목표로 선언하였다. 그리하여 미국은 더 이상 공산 진영에 대해서 부드러운 회유정책을 펴지 않고, 소련에 대해서 정면으로 도전하겠다는 발표를 하였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미국은 공산주의를 격멸시키기 위해서, 두 가지의 전략을 세웠는데, 하나는 엄청난 규모의 예산을 군사력 증강에 투자함으로써, 이미 경제적으로 기울어져 가고 있는 소련을 군사력에서 압도할 뿐만 아니라, 소련으로 하여금 미국과 경쟁하기 위하여 무리한 예산 투자를 하도록 유도함으로써, 소련을 경제적으로 위기에 몰아 넣는 전략이다. 그래서 군사력 증강 계획을 세우면서, 엄청난 예산이 소요되는 우주 방위 계획(S.D.I.- Strategic Defence Initiative, 일명 “별들의 전쟁”) 을 발표하였던 것이다. 우주 방위 계획이란, 우주에 강력한 레이저 발사 기능을 갖춘 기지를 만든 다음, 미국을 향하여 날아오는 모든 종류의 미사일에 레이저를 발사함으로써, 미사일이 미국 땅에 도달하기 전에 태평양과 같은 대양의 상공에서 미리 격추시킨다는 방어 시스템을 말하는데, 이것은 상상하기 조차 어려운 막대한 예산이 소요되는 군비 계획이다. 미국의 이러한 군비증강계획의 발표는 소련을 매우 당황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미국이 세운 또 하나의 전략은 세계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는 공산주의와의 대결 현장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약소 국가들이 더 이상 공산화되는 것을 저지하는 것인데, 아프카니스탄, 니카라구아, 앙골라, 캄보디아와 같은 지역에서 일어나는 반 공산주의 세력을 뒤에서 후원해 주었으며, 그라나다 섬의 경우에는 미국 군대를 직접 동원하여 그 지역을 공산주의자들의 손으로부터 구출하였다. 미국은 경제적으로 침몰해 가는 소련을 세계 도처에서 맞상대 함으로써, 소련으로 하여금 막대한 자금을 지출하도록 유도하였던 것이다.

레이건 대통령 당시 미국 CIA 정보부장이었던 애머럴드 바비 인맨은, “레이건 대통령은 소련에 대해서 매우 단순하고도 강력한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다가오고 있는 공산주의의 붕괴를 예견하고 있었으며, 그 일을 위하여 5개의 전략을 추진시켰는데, 그 전략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라고 말하였다. 다음에 소개하는 레이건 대통령의 전략은 미국이 교황권과 손을 잡고 공산주의를 무너뜨리는 일에 함께 연합할 수 있었던 근본 이유들이다.

1. 레이건 대통령이 취임 후 제일 먼저 취한 조치인 군사력 증강 계획은 엄청난 자금이 소요되는 S.D.I.(별들의 전쟁)이기 때문에, 소련의 경제력으로서는 도저히 경쟁할 수 없는 대규모의 군사력 증강 계획이었다. 바로 이것이 핵심 전략이었다.
2.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에서 개혁 운동을 비밀리에 고무시킨다.
3. 바르샤바 조약 국가들에 대한 재정지원을, 그들이 인권문제, 정치의 자유, 그리고 자유경쟁 체제를 받아들이는 태도에 따라서 조절한다. 즉, 동구 공산권 하에서 인권을 옹호하는 세력이나 인물들에 대한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4. 소련을 경제적으로 고립시키며, 서구 유럽과 일본의 기술이 소련으로 유입되지 못하도록 방지한다. 소련이 21세기 최고의 희망을 걸고 있는 시베리아의 천연가스가 대륙 횡단 파이프 라인을 통하여 서구 유럽 국가에 공급되지 못하도록 방해 공작을 펼친다.
5. 공산 진영을 향한 대공 라디오 방송을 증가시킨다. 미국의 소리, 라디오 자유 유럽과 같은 방송을 동구 유럽에 전파한다.

3. 뉴스 미디어가 보도한 공산주의의 몰락

1981년에는 두 번의 저격 사건이 있었는데, 먼저 미 대통령이 저격을 당하였으며, 그로부터 6주 후에 교황이 저격을 당했다. 물론, 두 번의 저격 모두 미수에 그치고 말았지만, 후에 두 사람은 한 회담 석상에서 “자신들이 살아남은 것은 서로 연합하라고 주신 신의 섭리이다”라고 말하였다. 레이건 미 대통령은 소련을 무너뜨림으로써, 세계 평화에 위대한 기념비를 세우기를 원했으며, 교황은 지상 최대의 무신론 세력인 소련을 격멸시키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자유 진영의 정치적 지도자와 온 세상의 정신적 지도자가 공산주의의 몰락을 목적으로 연합하였던 것이다.

1992년 2월자, 타임(Time)지는 그러한 두 사람의 연합에 대한 이야기를, “거룩한 동맹 : 미 대통령과 교황은 어떻게 폴란드의 노조운동을 도왔으며, 공산주의의 몰락을 촉진하는 일에 동조하였는가?” 라는 제목으로 교황과 미국 대통령의 “거룩한 동맹”을 대서특필 하였는데, 그 기사에는 지난 몇 년 동안 미국과 교황청이 공산주의를 무너뜨리기 위해서 연합 전선을 펼쳤던 비밀스런 이야기가 적나라하게 소개되었다. 또한 1989년 12월 25일자, 뉴스윅(Newsweek)지는 소련의 붕괴 과정을 파헤친 글인 “회오리 바람의 시대” 라는 특종 기사를 실으면서, 다니엘 11:40에서 북방왕이 남방왕을 매우 신속하게 공격하여 제거하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묘사한 단어인 “회리 바람처럼” 을 그대로 기사의 제목으로 인용하기도 하였다. 1989년과 90년대 초기에 실렸던 신문의 정치기사와 시사지를 읽어보면, 마치 다니엘서 11장 40절에 대한 예언 해석집을 읽고 있는 듯한 착각을 갖게 된다.

다니엘 11장 40절에 대한 최종 분석

지금까지, 우리는 공산주의의 몰락에 얽혀 있는 종교적, 군사적, 경제적 배경들에 대해서 살펴 보았다. 그러한 배경들을 바탕으로 해서 지금부터는, 다니엘 11장 40절에 나오는 단어들을 하나씩 분석함으로써, 40절이 의미하는 바를 좀더 분명하게 살펴 보도록 하자. “... 북방왕이 병거와 마병과 많은 배로 회리바람처럼 그에게로(남방왕, 필자주) 마주와서 그 여러 나라에 들어가며, 물이 넘침 같이 지나갈 것이요.” 40절

1) “북방왕” : 4번째 나오는 마지막 북방왕으로서, 죽게 되었던 상처를 완전히 회복한 교황권을 의미한다.

2) “병거와 마병과 많은 배” : 앞에 나온 표에서 살펴 보았던 것처럼, 성경에서 “병거와 마병”은 “군사력 또는 무력”을 상징하며, “많은 배”는 경제력을 상징한다. “병거와 마병”은 성경적으로나 상식적으로 군사력을 의미한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으므로, 여기서는 성경이 “배”의 의미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를 찾아보기로 하자. “선척(ship)을 바다에 띄우며 큰 물에서 영업(business)하는 자는.” 시편 107:23. “그러한 부가 일시에 망하도다 각 선장과 각 처를 돌아다니는 선객들과 선인들과 바다에서 일하는(trade) 자들이 멀리 서서 ... 화 있도다 큰 성이여 바다에서 배(ship)부리는 모든 자들이 너희 보배로운 상품을 인하여 치부(rich)하였더니.” 요한계시록 18:17,19. 이 두개의 성경절은 “배”가 부와 경제력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설명해 준다.

하나님의 예언이 북방왕은 남방왕을 “병거와 마병과 많은 배”로 와해시킬 것이라고 지적하였던 것처럼, 레이건 미국 대통령은 “위대한 미국” 이라는 목표 하에 군사력을 엄청난 규모로 증강시킴으로써, 소련으로 하여금 막대한 군비를 소비하도록 유도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소련은 경제적으로 더욱 깊은 딜레마에 빠지게 되었다. 또한 미국이 소련을 경제적으로 자유 진영으로부터 고립시킴으로써, 공산권에 대해서 강력하게 대처하기로 결정한 미국의 대 소련 전략을 이용하여, 교황권은 미국과 연합하여 남방왕인 공산주의를 군사력과 경제력을 사용하여 와해시키는데 성공하였다.

3) “회리 바람처럼” : 회리 바람은 매우 빠른 돌개 바람이다. 그러므로 교황권은 미국의 군사력과 경제력, 그리고 교황권 자신이 공산권 내에 가지고 있는 종교적인 지도력을 이용하여 회오리 바람처럼 신속하게 공산주의를 몰락시켰다.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소련과 동구 공산국가들은 공산화 되기 이전에 천주교회가 극성했던 나라들이었기 때문에, 공산화가 된지 수십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들 국가들에게 있어서 교황의 영적 지도력은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미국의 군사력과 경제력, 그리고 교황권의 영적인 영향력이 “회리 바람처럼” 돌면서, 신속한 속도로 공산주의를 공격하자, 거의 백여년간 지속되었던 공산권의 철의 장막이 아무도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짧은 시간 내에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4) “여러 나라” : 이 예언적 단어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하나님의 예언의 정확성에 대해서 감탄을 금할 수 없게 된다. “회리바람처럼 그(남방왕)에게로 마주와서 그 여러 나라에 들어가며.” 여기서, 남방왕이 “여러 나라”로 표현된 이유는 공산주의는 어떤 한 나라에 국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나라에 퍼져 있기 때문이다.

5) “물이 넘침 같이 지나갈 것이요” : 물이 잔에서 넘칠 때에 그것을 막을 수 없는 것처럼, 북방왕의 분노에 찬 마지막 공격이 무신론주의인 남방왕에게 가해질 때, 그것은 도무지 걷잡을 수 없는 힘으로 임하였다. 무신론을 신봉하는 한 나라가 무너지자, 그 물결은 동일한 사상을 신봉하던 주변의 여러 나라를 삽시간에 파급되었다. 물론, 중공이나 북한과 같은 공산권이 남아 있지만, 그들은 더 이상 과거에 있었던 공산 국가가 아니다. 그들은 이미 자유 경제의 물결 하에 있으며, 심지어는 종교를 인정하고 있지 않은가? 그들은 더 이상 성경이 말하는 남방왕이 아니다.

이제, 다니엘 11장이 말하는 마지막 사건들에 대한 예언은 여기서 끝나는가? 아니다. 지금, 우리는 겨우 마지막 사건들이 시작되는 지점에 와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다니엘 11장 1절~40절은 이미 과거에 지나가 버린 예언이기 때문이다. 40절부터 마지막 45절까지에 전개되는 예언은, 조만간에 우리의 눈으로 분명하게 보고, 경험하게 될 최후의 사건들에 대한 예언이다. 다음에 계속되는 제3부, “최후의 대쟁투”에서 독자들은 또 하나의 놀라운 하나님의 계시를 접하게 될 것이다.

 

3부 - 최후의 대쟁투


이 글은, 지금까지 서론과 제1, 2부의 기사를 읽으면서, 하나님의 영이 여러 독자들의 지성과 양심에 깊은 인상을 남겨주셨으리라 믿는다.

이제부터 전개되는 다니엘 11장 41절부터 끝까지의 이야기는 지금 현재 우리들 앞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며, 또한 매우 가까운 장래에 그대로 이루어질 예언을 다루고 있다. 특히, 다니엘 11장과 요한계시록 12~13장을 함께 연구해 가면서, 여기에 전개되는 마지막 시대의 미국과 교황권의 동맹, 그리고 그들에 의해서 강요되는 짐승의 표에 대해서 심도있게 파헤치려고 한다. 부디, 하나님의 진리의 영께서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의 지성과 양심을 깊이 감동시킴으로써, 마지막 시대에 벌어지는 하나님과 사단의 최후의 대쟁투를 이해하게 되길 기원한다.


역사의 종말에 펼쳐질 하나님과 사단의 대쟁투

우리는 이번 호에서, 성경에 나오는 “마지막 때”의 의미는 1798년의 전후를 가리킨다는 사실을 배웠으며, 마지막 때의 징조와 사건들이 실제적으로 그 무렵에 하늘과 땅에서 이루어졌던 사실들을 확인하였다. 또한 마지막 때가 되었음을 말해주는 다음과 같은 두가지의 중요한 예언들이 1789년을 전후로 해서 성취된 사실을 확인하였다; 첫번째 사건은 하나님께서 마지막 시대에 벌어질 사단과의 대쟁투를 위하여 당신의 참 백성을 준비시키는 역사이고, 두번째 사건은 사단이 종교암흑시대가 끝나면서 입었던 “죽게 된 상처”를 회복시킴으로써, 하나님과의 마지막 대쟁투를 위하여 준비하는 일이다. 여기서 말하는 마지막 대쟁투란, 사단의 세력이 예수께서 재림하시기 직전에 전세계적으로 “짐승의 표”를 강요할 때에 그것을 거절하는 하나님의 참백성과 사단의 세력 사이에서 벌어지는 최후의 투쟁을 의미한다. 이 두 사건을 좀더 자세히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A) 첫번째 사건 : 이 사건은 종교암흑시대가 끝나갈 무렵에 일어나는데, 하나님께서는 태초 이후로 감추어 두셨던 신대륙을 드러내신 다음 미국의 건국을 섭리하셨다(1776년). 또한 개혁자들과 청교도들이 양심과 종교의 자유를 위하여 미개척지인 신대륙으로 건너가도록 인도하신 다음, 그 곳에서 마지막 시대의 참 교회인 “여자의 남은 자손”을 준비시키고, 그들을 통하여 참 진리를 회복시키시는데, 바로 이 “여자의 남은 자손”과 그들이 믿는 진리가 마지막 시대에 하나님과 사단 사이에서 벌어지는 대쟁투의 잇슈(issue)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미국에서 마지막 대쟁투를 위해서 준비되는 하나님의 용사들과 사단의 세력이 강요하는 “짐승의 표”를 거절하고 승리하는 참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다음과 같은 공통점이 있음을 제시해 줌으로써, 마지막 시대에 하나님의 참된 백성들의 특징과, 그들이 가져야 할 신앙의 좌표를 보여주고 있다(살아남는 이들 제5호 참조).

미국에서 마지막 대쟁투를 위해서 준비되는 하나님의 용사들 :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 계 12:17.

“짐승의 표”를 거절하고 승리하는 참 그리스도인들 :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계 14:11,12

B) 두번째 사건 : 사단이 마지막 대쟁투를 위하여 준비하는 과정으로써, 사단은 마지막 시대의 네번째 북방왕의 세력을 이용하기 위해서 북방왕인 교황권의 세력을 회복시킨다. 불란서 혁명정부와 공산주의에 의해서 받았던 “죽게 되었던 상처”를 입었던 교황권의 권세를 회복시키는 첫번째 단계로써, 이태리에서 파시즘을 주창하던 뭇쏘리니가 그의 정책에 대한 교황권의 적극적인 협조를 얻기 위해서, 교황권과 라테란 조약(1929년)을 맺음으로써, 교황청은 바티칸시의 100여 에이커를 양도받았으며, 바티칸은 하나의 독립된 국가로 인정받았고, 로마 천주교회가 이태리의 국교로 공인되었다. “그의 머리 하나가 죽게 된 것 같더니 그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으매 온 땅이 이상히 여겨 짐승을 따르고.” 계 13:3.

그 후부터 교황권은 각 나라에 대사를 파견하고, 거의 모든 나라들의 대사를 바티칸에 주재시켰으며, 나아가서는 대표적인 개신교국인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 재임시에 대사를 서로 교환함으로써 마지막 시대에 벌어지는 대쟁투의 중심부인 미국을 파고 드는데 성공하였다. 그리하여 사단은 네번째 북방왕인 교황권과 미국이 서로의 공통적인 원수인 공산주의를 함락시키기 위해서 서로 손을 잡도록 유도함으로써, 초강대국인 소련을 무너뜨렸으며, 동유럽의 여러 나라들을 “회리바람처럼” 휩쓸어 버림으로써, 마지막 시대에 다시 한번 교황권은 미국과 손을 잡고 그를 앞장 세워서 전세계적으로 “짐승의 표”를 강요할 수 있는 확실한 기반을 마련하였다.

다니엘 11장 41절 : 계속되는 교황권과 미국의 동맹과 짐승의 표

교황권과 미국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는 요한계시록 13장에 매우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그 곳에도 교황권이 미국과 손을 잡은 다음, 미국의 강력한 힘을 이용하여 짐승의 표를 강요하는 모습이 나타나 있다. 이미 살아남는 이들 제5호에서 살펴 보았던 것처럼, 요한계시록 13장에는 두 짐승이 나오는데, 1~10절까지에 나오는 짐승은 교황권을 말하며, 11절의 “또 다른 짐승이 땅에서 올라오는데, 새끼양 같이 두 뿔이 있고”에 등장하는 “또 다른 짐승”은 신대륙인 “땅”에서 올라오며, 처음에는 “새끼양”처럼 순결한 청교도 정신으로 시작되지만, 후에는 기독교와 도덕이 깊이 타락하면서 “두 뿔”이 달린 짐승으로 변화되는 미국의 드라마틱한 변화를 상징한다. 그리고 12절부터 15절 전반부까지는 첫번째 짐승(교황권)이 두번째 짐승(미국)과 손을 잡고, 그의 힘을 이용하여 짐승의 표를 온 세상에게 강요하기 위한 준비 과정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저(두번째 짐승, 미국을 뜻함)가 먼저 나온 짐승(첫번째 짐승, 교황권을 뜻함)의 모든 권세를 그 앞에서 행하고 ... 땅에 거하는 자들로 처음 나온 짐승(교황권)에게 경배하게 하니 곧 죽었던 상처가 나은 자니라 ... 칼에 상하였다가 살아난 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라 ... 저가 권세를 받아 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15절 후반부터 마지막 절까지는 짐승의 표를 거절하는 사람은 모두 죽이라는 사형 명령이 예언되어 있다. 참으로 두렵고도 놀라운 예언이지만, 바로 이것이 성경이 지구의 종말에 대해서 예언하는 바이다. 마지막 남방왕인 공산주의의 몰락에 대한 예언이 놀라운 방법으로 정확하게 이루어졌던 것을 생각하면, “짐승의 표”에 대한 예언도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 밖에 없다.

1) 영화로운 땅, 미국 : 이제 다시, 다니엘 11장 41절을 어휘별로 세밀하게 분석해 보자; “그가 또 영화로운 땅에 들어 갈 것이요 많은 나라를 패망케 할 것이나 오직 에돔과 모압과 암몬 자손의 존귀한 자들은 그 손에서 벗어나리라.” 41절. 요한계시록 13장에 묘사된 첫번째 짐승과 두번째 짐승의 동맹 관계가 다니엘서 11장 41절에도 나오는데, 여기서는 그것이 “그가(북방왕), 교황권을 뜻함) 또 영화로운 땅에 들어갈 것이요” 라는 상징적 표현으로 묘사되어 있다. 사단은 북방왕을 통하여 짐승의 표를 강요하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먼저, 북방왕을 “영화로운 땅” 즉, 미국에 상륙시킴으로써, 짐승의 표를 온 세상에 강요하기 위한 준비 작업을 할 것이다.

41절 이전까지 전개되어 온 예언의 문맥과 논리를 보아서도, 교황권을 도와서 공산주의를 붕괴시켰던 미국 이외에는 영화로운 땅이 다른 곳이 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다니엘 11:16절에도 “영화로운 땅”이 나오는데, 16절에 나오는 “영화로운 땅”은 문맥상으로, 역사적으로, 그리고 지리적으로 이스라엘 지방을 말하는 것임에 틀림이 없다. 고대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과 진리를 보존하기 위하여 특별히 선택한 국가이었으며, 그 지역은 인류의 문명이 싹트기 시작한 곳으로서, 주변에 바벨론, 이집트와 같은 강대국들이 융성하였기 때문에 세계 문명과 교통의 중심지에 자리 잡고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접하기 쉬운 지리적인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미국은 종교암흑시대 이후에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한 피난처로 선택된 국가이며, 모든 문명과 교통과 과학의 중심지이기 때문에 온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한 조건을 골고루 갖추고 있는 현대의 “영화로운 땅”이다. 사단은 과거 고대 이스라엘 시대에도 그러했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마지막 시대를 위해서 특별히 마련해 놓은 “영화로운 땅” 미국을 또 다시 공격 목표로 삼고 있다.

2) “저가 또 영화로운 땅에 들어 갈 것이요” :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미 미국과 교황청이 대사를 교환하고 서로 왕래하고 있는데, 새삼스럽게 교황권이 미국에 들어간다니, 그것이 무슨 뜻입니까?” 여기서 “들어 갈 것이요”란 말은, 구교인 교황권이 신교인 미국과 종교적, 정치적으로 하나가 되어서 동일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하여 동맹한다는 의미이다. 마치 공산주의의 몰락을 위해서 둘이 하나로 연합했었던 것처럼 말이다.

불과 백여년 전만해도 천주교회는 철저한 개신교국인 미국에서 질시의 대상으로 푸대접을 받았지만, 오늘날에는 단일 종교로서는 천주교인들의 숫자가 모든 기독교파 중에서 가장 많다. 따라서 미국 국회에서 단일 종교로서 가장 많은 의석수를 확보하고 있는 종교는 천주교회가 되었다. 그러므로 이제는 미국의 국회의원들과 정치인들이 천주교인들의 투표 숫자를 크게 의식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처했다. 더우기 1993년 3월에는 천주교회 대표자들과 개신교회 대표들이 모여서, “복음주의자들과 캐톨릭의 단결” 이라는 선언문을 채택함으로써, 이제는 선거 때마다 미국의 국회의원 뿐만 아니라 대통령 후보들까지도 천주교인들과 개신교인들의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종교적 세력이 정치인들을 지배하고, 정치인들은 종교적 세력의 영향력을 이용하여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는 것이, 오늘날 미국 정치의 현실이다.

지금, 미국은 정치적으로 뿐만 아니라, 도덕적으로 종교인들의 도움을 절실히 요구하고 있다. 각종 범죄, 이혼, 미혼모, 동성연애, 음화, 마약 등과 같은 도덕적 가치 기준이 바닥에 떨어져 있는 미국의 현실은 수많은 미국인들의 마음에 불안함을 가져다 주고 있는데, 이러한 상황은 어떤 위대한 지도자의 영적인 지도력을 기대하고 있다. 사실상, 미국 뿐만 아니라, 온 세상이 군사적, 경제적 지도자로서는 미국을 바라보고 있으며, 종교적, 영적 지도자로서는 교황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현실이 아닌가? 세상이 경제적으로, 도덕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어려워지면 질수록, 사람들은 교황의 영적 지도력을 유일한 문제 해결책으로 바라보게 될 것이다.

이제, 미국에서의 천주교회는 더 이상 소수의 종교가 아니라, 최대 다수의 종교가 되었다. 아이러니칼하게도, 천주교회는 초강대국인 미국에 대하여 정치적으로, 도덕적으로, 그리고 종교적으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단체가 되었다. 이제, 교황권은 미국과 형식적으로 대사를 교환하는 것 이상을 넘어서, 미국 안에 “들어” 와 있으며, 앞으로 계속해서 깊숙히 파고 들어 갈 것이다. 지금까지 설명한 미국 내에서의 교황권의 종교적, 정치적, 도덕적 영향력의 놀라운 증대가 “그가 또 영화로운 땅에 들어 갈 것이요”의 진정한 의미이다. 이러한 예언 해석을 신뢰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이유는, 요한계시록 2,3장에 나오는 일곱교회에 대한 예언(살아남는 이들 제14호 참조)과 앞서 공부한 제1,2부의 내용을 볼 때, 중세기 이후부터 지금까지 걸어 온 교황권의 역사에서 나타나는 한가지 뚜렷한 특성은, 교황권은 항상 정치와 연합하여 그의 세력을 확장시킨 후에, 자신의 목적하는 바를 성취시키는 일을 반복해 왔다는 사실이다. 중세기 때에 로마 제국의 정권과 결탁하여 그 세력을 확장시키고, 그 권력을 이용하여 종교개혁자들과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던 것처럼, 그리고 마지막 시대에 초강대국인 미국과 동맹하고, 미국의 힘을 이용하여 공산주의를 몰락시켰던 것처럼, 교황권은 가까운 장래에 미국에 대하여 강력한 영향력을 정치와 종교의 배후에서 행사함으로써, 미국의 힘을 이용하여 짐승의 표를 온 세상에 강요하게 될 것이다. “저(미국)가 먼저 나온 짐승(교황권)의 모든 권세를 그 앞에서 행하고 ... 땅에 거하는 자들로 처음 나온 짐승(교황권)에게 경배하게 하니 곧 죽었던 상처가 나은 자니라 ... 칼에 상하였다가 살아난 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라 ... 저가 권세를 받아 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요한계시록 13장 12~15

3) “많은 나라를 패망케 할 것이나” : 교황권이 미국과 동맹하여 짐승의 표를 온 세상에 강요할 때, “많은 나라”에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짐승의 표를 받게 될 것이다. “저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계 13:16. (참고 - 영어 성경에는 “많은 나라”로 번역되어 있지만, 히브리어로 된 성경 원본에는 “나라”라는 단어가 없기 때문에, “많은 나라”를 “많은 사람”으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보아야 한다)

4) "에돔과 모압과 암몬 자손의 존귀한 자들은 그 손에서 벗어나리라.” : 먼저, “에돔과 모압과 암몬 자손의 존귀한 자들”이라는 상징적 표현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생각해 보자. 성경에서 에돔과 모압과 암몬 자손들은 어디에 나오며, 어떻게 생성된 부족들인가? 창세기 19:30~38에는 롯이 소돔과 고모라를 피해서 나온 다음에 두 딸과 불륜의 관계를 맺음으로써, 불의한 자손을 낳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두 딸이 낳은 아이들의 이름이 “모압”과 “암몬”이다. 바로 이들이 모압족과 암몬족의 조상인데, 이 두 부족은 나중에 타락하여서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가장 많이 괴롭힌 부족들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또한 “에돔”은 에서의 자손으로서, 그 역시 불순종과 패역함으로써, 하나님의 백성을 탄압하는 부족이 되었다. 그러므로 “에돔과 모압과 암몬 자손들”은 처음에는 진리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나중에는 진리를 저버림으로써 하나님의 백성들을 핍박하는 종교적 연합 세력을 상징한다. 구약시대에도 이들 세 부족은 서로 연합 전선을 형성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계속해서 괴롭혔었다.

  



자, 이제 이 예언의 의미가 좀더 분명해 졌다. 짐승의 표가 강요될 때에 거의 모든 사람들이 짐승의 표를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세속과 거짓 복음에 의해서 타락한 개신교회와 마지막 북방왕인 교황권이 서로 연합하여 미국 정부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함으로써, 짐승의 표를 온 세상에 강요하게 될 것인데, 그 때, 비록 그들의 기만적인 가르침과 세속적인 영향력 하에 있었을지라도, 오직 순결한 믿음을 지키면서, 진리의 빛에 순종하는 생애를 사는 “존귀한 자들”은 하나님의 기적적인 도우심을 받아서, 짐승의 표를 강요하는 세력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비록 교황권과 세속화된 기독교의 악한 영향력 하에서 교회를 다니는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도, 소수의 하나님의 백성이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므로 자신이 어떠한 교파나 교단에 속해 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진리를 올바로 이해함으로써, 사단의 기만에 빠지지 않고, 자신이 알고 있는 진리의 빛에 온 마음을 다하여 순종하는 생애를 사는 자들만이 구원을 받게 될 것이다. 요한계시록은 짐승의 표를 거절하고 최후의 승리를 거두는 자들인 “에돔과 모압과 암몬 자손의 존귀한 자들”의 정체를 이렇게 소개해 준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계 14:11,12

다니엘 11장 42절 : “그(북방왕)가 열국에 그 손을 펴리니 애굽 땅도 면치 못할 것이므로”에 대해서 살펴 보도록 하자. 공산주의가 몰락된 직후, 미국의 조지 부시 대통령은 “이제, 미국은 새로운 세계의 질서를 주도할”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왜냐하면 소련이무너진 이상, 더 이상 미국을 상대할 만한 나라가 없기 때문이었다. 교황권이 초강대국인 미국과 동맹하여 짐승의 표를 “열국” 즉 온 세상에 강요할 때에, 중국과 같은 “애굽(무신론주의자들) 땅도” 제외되지 않을 것이다.

다니엘 11장 43절 : “그(북방왕)가 권세로 애굽의 금과 은과 모든 보물을 잡을 것이요, 리비아 사람과 구스 사람이 그의 시종이 되리라.” 43절은 짐승의 표가 강요될 즈음, 유사이래에 없었던 경제 파탄이 온 세상을 덮칠 것이라는 예언이다. 왜 이것을 경제적인 위기로 해석해야 되는가? 구약시대에 애굽이 “금과 은과 보물”을 잃어버렸던 때를 생각해 보면, 43절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애굽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서, 계속적인 재앙을 애굽땅에 보내셨다. 그리하여 결국에는 바로왕과 모든 애굽인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보물들을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주면서, 애굽을 떠나달라고 애원하였다.

마찬가지로, 사단이 온 세상에 짐승의 표를 강요하는 종말의 시간에는,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표시하는 일곱재앙(계 16장)이 내려지면서 지구의 대기와 땅과 바다에서 엄청난 천연 재해가 덮칠 것인데, 이 때에 세계 경제는 파탄을 맞이하게 될 것이고, 이러한 상황은 사단에 의해서 한층 악용되어서 결국에는 “짐승의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할 정도로 악화될 것이다(계 13:17). 그러한 때에 온 세상은 고대의 애굽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진노의 재앙을 막아 보려는 인간적인 생각으로 교황권의 영적인 권세 아래에 엄청난 “금과 은과 모든 보물”을 가져다 놓을 것이다.

그렇다면, “리비아 사람과 구스(에디오피아) 사람이 그의 시종이 되리라”는 무슨 의미인가? 구약시대에 구스(에디오피아)는 애굽과 함께 부자 이웃 나라였으며, 반면에 리비아는 매우 가난한 나라였다. 그러므로 이 예언은 부자 나라나 가난한 나라 모두가 교황권이 강요하는 짐승의 표를 받게 될 것이라는 의미이다. “모든 자 곧 부자나 빈궁한 자나 자유한 자나 종들로 그 오른 손이나 이마에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 계13:16~17. 다니엘 11:43(경제적인 문제)은 요한계시록 13:16,17절(경제적인 문제)과 매우 유사한 의미를 가진 예언이다.

다니엘 11장 44절 : “그러나 동북에서부터 소문이 이르러 그로 번민케 하므로, 그가 분노하여 나가서 많은 무리를 다 도륙하며 진멸코자 할 것이요.” 성경에서 동쪽과 북쪽은 항상 하나님의 보좌의 위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는 방향, 그리고 심판을 상징한다(사 41:25,27; 마 24:27, 렘 1:14,15). 그러므로 “동북에서부터 소문이” 온다는 것은, 하나님의 예언을 정확히 이해하고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킴으로서(계 14:12), 짐승의 표를 거절하고 승리한 자들이 예수께서 곧 재림하신다는 복음과 함께 심판의 기별을 놀라운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온 세상에 전파하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용사들을 보면서 사단은 교황권을 선동하고, 교황권은 다시 미국의 힘을 이용하여, 짐승의 표를 거절하는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사형 명령을 내리는데, 이것은 중세기의 종교암흑시대 동안에 진리를 고수하고 오류와의 타협을 거절하였던 참된 그리스도인들에게 가해졌던 핍박의 재현이 될 것이다. “그(북방왕)가 분노하여 나가서 많은 무리를 다 도륙하며 진멸코자 할 것이요.”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 계 13:15

다니엘 11장 45절 : “그(북방왕)가 장막 궁전을 바다와 영화롭고 거룩한 산 사이에 베풀 것이나 그의 끝이 이르리니 도와 줄 자가 없으리라.” 다니엘 11장 마지막절인 45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사단이 마지막 시대에 교황권을 통하여 어떻게 사람들을 기만하는가를 보여주고 계신다. “장막 궁전”은 전쟁시에 군인들의 막사로 사용하는 “텐트(tent)”인데, 북방왕은 마지막 전쟁을 치루기 위해서, 자신의 활동 거점을 “바다와 영화롭고 거룩한 산 사이에” 세운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바다와 영화롭고 거룩한 산” 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성경에서 “물”은 “사람들”을 말하며(계17:15), “거룩한 산”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곳을 뜻한다.

“영화롭고 거룩한 산” : “영화롭고 거룩한 산”은 고대 이스라엘에 있던 시온산의 또 다른 표현으로서, “영화롭고 거룩한 산” 또는 “시온 산”은 모두 하나님의 교회를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단어이다. “영화롭고 거룩한 산”을 현재의 이스라엘로 볼 수 없는 이유는 이스라엘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진리를 거절함으로써, 국가로서의 그들의 은혜의 기간이 끝났으며(살아남는 이들 제9호에서 자세히 설명하였음), 지금도 한 국가로서 메시야의 초림을 부인하고 있기 때문에, “영화롭고 거룩한 산”이 될 수 없다.

“영화롭고 거룩한 산”이 하나님의 교회일 수 밖에 없는 증거들을 여러 곳에서 찾을 수 있는데, 문자적 이스라엘 시대가 끝나고 영적 이스라엘 시대가 시작된 신약 시대에,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인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 ...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라고 말함으로써 “시온 산과 교회”를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인 하나님의 참 백성들로 표현하였고(히12:22), 갈라디아 6장에서는 교회를 “하나님의 이스라엘”로 불렀다(갈 6:16). 요한계시록 11:2에는 “저희가 거룩한 성을 마흔 두달 동안 짓밟으리라”라는 예언이 나오는데, 이것은 교황권이 “거룩한 성” 즉, 하나님의 참 교회를 1260년 동안 핍박하겠다는 내용이다. 여기서 한가지 이해해야 할 사실은, “하나님의 백성” 또는 “거룩한 성”이라는 표현이 어떤 문맥에서 어떻게 사용되었는가에 따라서 그 말이 의미하는 바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천사가 다니엘 선지자에게,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은혜의 기간을 계시하여 주는 장면인 다니엘 9:24의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칠십이례로 기한을 정하였나니”에서는,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은 다니엘의 백성인 유대인들과 다니엘의 교회인 유대교회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재림하시기 직전에 관한 예언인 다니엘 12:1의 “그 때에 네 민족을 호위하는 대군 미가엘이 일어날 것이요” 에 나오는 “네 민족”은 다니엘의 혈통적 이스라엘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때에 짐승의 표를 거절하고 승리하는 하나님의 참 교회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지막 시대를 배경으로 나오는 “영화롭고 거룩한 산”은 하나님의 참 교회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마지막 시대에 사단은 교황권을 “물”(온 세상 사람들)과 “영화롭고 거룩한 산”(하나님의 교회) 사이에 넣어서 가로 막은 다음에, 하나님의 교회에서 퍼져 나오는 마지막 심판과 재림의 기별, 그리고 짐승의 표의 정체를 파헤친 중요한 진리가 사람들의 영혼을 깨우지 못하도록 방해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재림을 위해서 준비되지 못하도록 역사하고 있다. 그런데, 어떻게 교황권이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교회에서 흘러 나오는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도록 막을까? 그것은, 종교암흑시대 동안에 교황권에 의해서 조작된 오류가 종교개혁자들의 개혁에 의해서 어느 정도 교정되었지만, 중요한 진리들이 왜곡된 상태 그대로 현대 개신교회 속으로 잠입되어 들어왔다. 마지막 북방왕은 오류에 의해서 사람들의 눈과 귀를 막아 버렸으며, 짐승의 표를 거절하도록 만드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의 믿음”(계 14:12)에 대한 편견과 오해를 온 기독교계에 가득 퍼트려 놓는데 성공하였다.

이제, 11장의 끝인 45절의 후반부에는 교황권의 최후의 종말이 나온다. “그의 끝이 이르리니 도와 줄 자가 없으리라.”45절. 예수께서 재림하시기 전에 북방왕의 종말이 먼저 오는데, 그 때에는 누구도 교황권의 편에 서지 않을 것이며, 그를 도와줄 자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마지막 시대의 하나님의 용사인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들이 교황권의 기만과 그들의 참된 정체를 폭로할 때에, 온 세상이 그 동안 교황권에게 당했던 기만을 생각하면서, 복수의 칼을 교황권에게 들이댈 것이기 때문이다. 요한계시록 17장에는 “음녀”로 상징된 교황권이 “참람된 이름”을 가지고 있으며, “일곱머리와 열뿔”을 가진 “붉은 빛 짐승” 위에 타고 앉은 모습으로 등장하는데(계 17:3), 16절에서 천사는 세상 사람들에 의해서 처절하게 복수당하는 음녀(교황권)의 최후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내가 본 바 열 뿔과 짐승이 음녀를 미워하며 망하게 하고 벌거벗게 하고 그 살을 먹고 불로 아주 사르리라.”


생애의 빛 가족들에게 드리는 말씀

마지막 벌어지는 시대에 사단과 하나님의 마지막 투쟁에 있어서 그 쟁점이 되는 “짐승의 표”는 무엇일까요? 앞으로 계속해서 나올 월간지, 살아남는 이들은 이 문제를 보다 단계적이고, 심도있게 파헤침으로써, 요한계시록에 나타나 있는 마지막 시대의 비밀을 모든 독자들 앞에 분명히 제시할 계획입니다.

이 글은 어떤 특정한 교파를 정죄하거나 지지하기 위해서 준비된 글이 아닙니다. 이 글은 온 세상과 교회 안에 퍼져 있는 잘못된 가르침과 오해에 대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계몽함으로써, 다가오는 심판과 종말에 대해서 사람들을 준비시키기 위한 글입니다.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예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을 받지 말라”는 기별입니다(계 18:4).

그러나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성도들의 영생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성경에 기록해 두신 마지막 기별을 온 교회와 세상 앞에 펼치려고 할 때, 사단은 모든 사력을 다하여 이 일을 방해할 것입니다. 사단은 마지막 시대인 지금,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서 있습니다. 생애의 빛은 사단의 도전과 공격을 피하지 않을 것입니다. 생애의 빛은 여러분들이 저희와 함께 싸우면서, 최후의 승리의 날까지 함께 전진할 것을 간절한 마음으로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