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하나님의 마음 우주의 마음

 그렇게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좁은 마음과 신앙과 사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참 이상한 일이다. 또 그렇게 사랑이 많고 자비로운 하나님을 섬기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사랑이 없고 자비롭지 못하다는 것 역시 이상한 일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늘 생각하고 명상하는 사람만이 자신이 묵상하는 그 하나님을 닮을 수 있게 된다. 당신은 크신 하나님, 사랑이라는 한 단어로 표현되는 하나님에 대하여 얼마나 묵상하고 있는가? 그런 하나님을 알기 위하여, 그리고 닮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이고 있는가?

이해되는 만큼만
 우리는 우리의 조그만 두뇌로 이해되는 부분만큼의 하나님만을 알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두뇌 속에, 우리의 표현 속에, 우리의 글이나 문자 속에 담을 수 없을 만큼, 크고 놀라우신 분이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눈앞에 바로 보이는 것, 가까이 있는 것, 머리로 이해되는 것, 그런 것들만이 다인줄 알고 살아간다. 우리가 보지 못하는, 알지 못하는, 이해하지 못하는 무한한 세계가 하나님께서 창조한 우주와 세상 만물에 숨겨져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한 채... 그리고 그 너머엔 그 모든 것들을 설계하시고 고안하신 무한하시고 위대하신 사랑의 창조주가 계시다는 것을 잊어버린 채...

 만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눈에 보이는 것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한다면, 아니, 빙산에 일각에 불과하게 나타나 있을 뿐인 눈에 보이는 작은 세상의 현상들에서 눈을 돌려 보이지 않는 무한한 세계의 현상들을 생각한다면, 보이지 않는 무한한 세계를 지으시고, 유지하시고, 사랑의 법칙으로 그것들을 운영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마음과 같은 넓은 마음을 가질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보이지 않는 것들을 생각할 수 있는 사람들만이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히 11:27) 살 수 있게 될 것이다.

함께 떠나는 우주 여행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또 얼마나 크신 분이신지 알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우주에 대하여 연구하는 것이다. 또한 좁은 육신의 마음속에 갇혀 하나님을 뵐 수 없는 사람이, 그 좁디좁은 육체의 마음을 벗어나 무한히 넓고 크신 하나님을 맛볼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그 광활한 우주로 여행을 떠나보는 것이다. 잠깐이라도 번잡한 세상에서 눈을 돌려 무한하고 끝없는 우주에 대하여 탐험해 본다면, 우리의 마음은 마치 끝없는 우주 창공에 떠있는 푸른 은하수처럼 맑아질 것이다.

 우주는 얼마나 크며, 우주의 별들은 얼마나 될까? 이 우주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은하계들이 있다. 은하계란 태양계를 포함한 많은 항성과 성단(星團 : 별의 무리들), 그리고 별들 사이의 성간물질(星間物質)로 이루어진 은하를 뜻한다. 그런데, 그 하나 하나의 은하계 안에는 또 셀 수 없이 많은 태양계가 존재하는데, 한 태양계 안에는 태양과 같은 별이 2,000억 개가 존재한다고 한다. 보통 태양계는 태양을 중심으로 수성, 금성, 지구, 화성, 목성, 토성, 천왕성, 해왕성, 명왕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행성에는 행성 주위를 도는 위성들이 있고 그밖에 많은 소행성과 혜성들이 있다.

 우리가 사는 지구가 포함되어 있는 태양계가 있는 은하를 우리 은하계라고 부르는데, 이 은하 하나만의 가장자리 끝으로 가려고 해도 기하학적인 수의 시간이 요한다. 이 큰 우주를 우리의 생각이나 계산에 다 담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생각할 수 있는 만큼의 한계에서 우주의 광대함을 잠깐 생각해 보기로 하자.

우주의 광대함
 빛의 속도인 광속 (빛이 1초에 가는 속도, 곧 초속 18만 6천 마일의 속도를 광속이라고 부른다) 으로 지구를 떠나서 여행을 하면 이 우주의 끝까지 가는데 얼마나 걸릴까? 광속으로 4분 30초를 가면 화성을 지나가게 되고, 5시간 30분을 가면 명왕성을 지나게 되는데, 1초에 18만 6천 마일을 가는 광속으로도 하루를 가야 우리가 사는 태양계를 지날 수 있다.

 5광년을 간다면, 우리는 25조 마일을 여행한 것이 되는데, 그러면 우리는 겨우 태양계에서 가장 가까운 별을 지나게 된다. 그래도 아직 우리가 속한 은하계를 볼 수 없는가? 아직 볼 수 없다. 빛의 속도로 100광년을 가야 비로서 우리는 은하계의 날개 부근에 있는 가스들과 먼지들이 있는 곳을 지나게 되고, 1,000광년을 가야 은하계의 날개 부분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10만 광년을 가야 은하계 전체가 눈에 들어오게 되는데, 여기서부터 보여지는 모든 불빛들은 별들이 아니라, 수백억 개의 별들로 구성된 각각의 다른 은하계들이다.

 그뿐이 아니다. 500만 광년을 빛의 속도로 가야 우리의 은하계가 최소 30개 이상의 은하들로 구성된 은하 성단의 하나로 보이기 시작할 뿐이다. 이 30개 이상으로 구성된 은하 성단 안의 은하계들 사이의 거리는 300만 광년 정도 된다. 만일 우리가 1,500만 광년을 간다면, 우리는 2,000개 이상의 은하계들로 구성된 큰 은하 성단들을 지나게 되며, 거기서 더 나아가 1억만 광년, 5억만 광년, 이렇게 계속해서 가야 이런 큰 은하 성단들을 지나 더 큰 우주의 세계로 달려갈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14억만 광년이 지난 후에야 우리는 비로서 지금까지 알려진 우주 전체의 크기를 겨우 가늠할 수 있다. 우주는 적어도 1,000억개 이상의 은하계들이 우주 전체에 퍼져서 상상할 수 없는 크기의 우주를 구성하고 있기 때문에...

창백한 푸른 점(Pale Blue Dot)
 우주 과학도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감동과 깊은 성찰을 일으키는 사진 한 장이 있다. 그 사진의 별칭은 창백한 푸른 점(Pale Blue Dot)인데, 이 사진에 영감을 받아 천문학자 칼 세이건이 쓴 책의 제목이기도 하다. 이 사진은 탐사선 보이저 1호가 1990년 6월 명왕성 부근에서 촬영한 사진인데, 이 사진 속에서, 지구는 희미한 빛을 내는 작은 푸른 점에 불과하다. 17년 전 40억 마일(약 64억 km) 밖에서 촬영한 지구 사진이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거듭 잡아 끄는 이유는 깊은 성찰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칼 세이건은 이 창백한 푸른 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것이 우리의 고향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이들,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 존재했던 모든 사람들이 그곳에서 삶을 영위했다. 그곳이 바로 우리의 기쁨과 고통이 총합된 곳이며, 수많은 종교, 이데올로기들, 모든 영웅과 비겁자, 문명의 창조자와 파괴자, 왕과 농부, 모든 아버지와 어머니, 희망에 찬 아이들, 발명가와 탐험가, 모든 타락한 정치인들, 모든 최고의 지도자들, 인간 역사 속의 모든 성인과 죄인들이 저기 푸른 한 점 - 태양 빛 속에 부유하는 먼지의 티끌 위- 에서 살았던 것이다. 이 지구의 한 장의 사진인 창백한 푸른 점은 인간 존재와 인류 역사, 그리고 지구가 얼마나 작은지 깨닫게 하고, 사소한 욕망이나 분노 따위가 얼마나 덧없는 것임을 절실히 느끼게 만든다.

오늘 밤은 잠깐 시간을 내어 밖으로 나가자!
 어두운 밤 하늘에 셀 수 없이 총총히 박혀 빛나는 별을 보며 그 광활한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생각해 보면, 문득 이 좁은 세상이 다인 것처럼 바둥대며 살던 우리의 모습이, 그리고 그렇게도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었던 우리의 마음이, 세상에 있는 어떤 것이나 대상에 대해 부리던 우리의 애착이 얼마나 부질 없는 것인가를 깨닫고 부끄러워질 것이다. 또 하잘데 없는 인간의 인정과 명예를 얻기 위해 얄팍한 자존심을 부리는 못난 자신들의 모습이, 또 그렇게 크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렇게 넓으신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과 성품을 닮지 못한 우리 자신들이... 그리고 저 높고 높은 별을 넘어 이 낮고 낮은 땅위에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그 크신 창조주가 손수 인간이 되셔서 오신 그 큰 사랑에 눈시울이 뜨거워질 것이다! 오늘 밤에는 꼭 밤 하늘의 별을 세어 보자.

권두언

강병국 목사
 성경은 참으로 놀라운 책입니다. 읽는 사람들로 하여금 악을 버리고 의롭게 살도록 교육시키며 영원한 하늘의 사물들을 사모하도록 만들어 줍니다.

 성경 속에는 사람들이 현세에서도 적합하고 내세에서도 적합한 자가 되기 위하여 깨달아야 할 모든 원칙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원칙들은 누구에게나 이해될 수 있도록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구나 의로움을 사모하며 가난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자라면 다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가끔 무성의하게 읽는 단편적인 연구로서는 성경의 귀중한 교훈을 배울 수가 없습니다. 성경을 급히 또는 부주의하게 읽는 사람에게는 성경의 큰 진리 체계가 깨우쳐지지 않습니다. 진리의 보화는 대부분 표면 아래 깊이 파묻혀져 있기 때문에 열심 있는 탐구와 끊임없는 노력으로써만 얻을 수 있습니다.

 성경은 광범위한 주제들을 가지고 있어서 모든 각양의 사람들의 심금을 울려 줍니다. 성경은 역사와 과학과 교훈들과 시들을 담고 있는데, 이 모든 내용들은 타락한 인류를 그들의 죄악에서 구원하시려고 애쓰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성령의 영감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성경 전체 가운데 논의된 중심 주제는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며, 이 구속의 계획은 사람의 심령 가운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게 하는 일입니다. 구속의 과학은 과학 중의 과학입니다.

그 런데 한 가지 가슴 아픈 사실은 성경 중에 어떤 구절들이 잘못 번역되고 편찬된 까닭에 교회들 안에 잘못된 오류의 가르침들이 많이 생겨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중세기 동안에 생겨난 많은 의도적인 잘못된 성경 번역들은 후세대에 참으로 큰 악영향을 끼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번 호는 하나님의 말씀 성경을 올바른 번역의 사상을 토대로 하여 올바른 각도에서 이해해야 할 것을 설명하는 기사들로 채웠습니다. 중요한 진리의 주제들을 올바른 번역으로 읽어 볼 때에 얼마나 조화 있는 진리로 다가오는지를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실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성경을 기록하신 같은 성령님의 역사가 함께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당뇨병, 확실하게 알아야 확실하게 치료할 수 있다!

- 에너지 부족이 일으키는 병 -
당뇨병이란 글자 그대로 당이 소변에 섞여 나오는 병이다. 당뇨병에 걸리면 제일 먼저 오는 증세가 피로감이다.
피로하다는 것은 에너지가 없어서 기운을 차리지 못한다는 뜻이다. 당뇨병을 가진 사람은 너무나 피곤하여서 손끝 하나 움직이는 것도 귀찮아 한다. 사람이 그토록 피곤에 지치게 되는 것은 체내에서 에너지가 제대로 생산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당뇨병이라고 하면 에너지가 생산되지 않는 병으로 생각할 수 있다. 물론 여러 가지 병이 에너지 생산에 문제가 있어서 생기는 것이지만 그중에서 당뇨병이야말로 가장 근본적으로 에너지 생산에 문제가 있는 병이라고 할 수 있다. 피곤증 외에도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증세가 있는데, 그것은 목이 말라서 자주 물이 마시고 싶고 또한 배가 자주 고파진다. 특히 몸이 너무나 피곤하기 때문에 만사가 온통 짜증스럽기만 하다. 피곤과 짜증은 당뇨병의 대표적인 증세이다.

아주 작은 일에도 신경질적이 되며 참을성도 없어진다. 사람이 사랑스럽고 친절하며 너그러운 데에도 적당한 에너지가 공급되어야 한다. 사랑, 친절, 용서, 자비와 같은 정신적인 요소들도 인체의 에너지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러므로 몸이 건강해야 마음도 건강해진다는 말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지나치게 바쁘고 피곤한 삶을 살게 되면 이웃을 사랑하고 돕는 일을 부담스럽게 생각하게 되어 상대방에게 미안한 마음과 심할 경우에는 양심의 가책을 갖게 되는데 이러한 경우에는 죄책감으로 해결할 일이 아니다. 우선 생활에 여유를 가짐으로 피로와 스트레스를 줄이는 것이 먼저이다. 에너지가 없으면 아무리 좋은 일이라고 할지라도 하기가 싫다. 반대로 에너지가 충분하게 공급되고 있으면 자신이 지금하고 있는 일을 즐기게 된다. 만일 어떤 그리스도인이 체내에서 적당한 에너지를 공급받지 못하고 있는데, 자신이 다른 사람들을 위한 봉사 활동과 교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하고 있다는 양심의 가책 내지 죄책감을 계속해서 느끼게 된다면 결국 그러한 상황은 병으로 이어지게 될 것이다.

왜 피곤해질까?
왜 당뇨병에 걸리면 에너지가 생산되지 않는 것일까? 병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지려면 병의 원인을 하나하나 추적해 보아야 한다. 당뇨병에 걸리면 소변에 당이 나오기 시작하는데 이것은 혈당이 높기 때문이다. 혈중 당분이 너무 많아서 소변으로 나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핏속에 당분이 많다는 것과 에너지 생산이 안 되는 것은 긴밀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당은 인체 내에서 에너지를 공급하는 주요 성분인데 당이 소변을 통하여 빠져 나가기 때문에 에너지 부족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장작을 태워야 난로가 열, 즉 에너지를 낼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세포 난로도 장작인 당분을 적당하게 받아들여야만 에너지를 생산할 수 있다. 즉 혈액 속에는 당분이 충분하게 있는데 그것이 세포 속으로 들어가지 못함으로써 시작되는 병이 바로 당뇨병이다.

그렇다면 왜 장작인 당분이 난로인 세포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것일까? 난로에 장작을 넣을 수 있는 문이 있는 것처럼, 세포에도 당분이 들어갈 수 있는 문이 있다. 그러면 당뇨병 환자의 세포에는 문이 없는가? 그렇지 않다. 당뇨병 환자의 세포에도 문이 있다. 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분이 세포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문이 존재하고 고장난 것도 아닌데 왜 당분이 세포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혈액 속을 떠돌다가 소변을 통하여 몸밖으로 빠져나가고 마는 것일까? 과학자들은 고민을 하다가 환자에게 인슐린 주사를 놓아 보았다. 그랬더니 문이 열리고 혈당이 적당하게 떨어졌다. 혈당이 떨어졌다는 것은 당분이 세포 속으로 들어갔다는 뜻이다. 이로써 인슐린이 세포의 문을 여는 역할을 한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밝혀졌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당뇨병은 인슐린이 부족해서 생긴 병이라는 결론을 내놓게 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이 밝혀지던 때만해도 체내에서 분비되는 인슐린의 양을 측정할 수 없었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는 인체에서 생산하는 인슐린의 양을 측정할 수 있게 되어서 당뇨병 환자들의 인슐린 생산량을 측정해 보았더니 건강한 사람의 인슐린 생산량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물론, 지금 언급하고 있는 당뇨병은 성인 당뇨병을 대상으로 하는 이야기이다. 소아 당뇨병의 경우는 인슐린의 생산량이 확실히 적다. 그래서 현대 의학에서는 성인 당뇨병을 인슐린 생산과는 상관없는 당뇨병이라고도 부른다.

세포의 문에도 이상이 없고 인슐린도 정상적으로 분비되는데 세포의 문이 열리지 않아서 당이 그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니 참 답답한 일이였다. 고민을 하던 과학자들은 세포를 자세하게 연구하던 중 세포에 스위치와 같은 구조가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세포에 리셉터(receptor)라고 불리우는 스위치가 있어서 그 스위치에 의하여 세포의 문이 열리거나 닫힌다는 사실을 밝혀 내었다. 이 스위치를 눌러주어야만 비로소 세포의 문이 열린다는 사실을 알아낸 것이다. 성인 당뇨병 환자의 경우, 인슐린 생산의 문제가 아니라 리셉터, 즉 스위치가 고장난 문제라는 것을 발견하였다.

발견된 문제점들
1. 세포에 달려 있는 스위치의 숫자가 부족하였다. 예를 들어 건강한 사람들의 세포에는 100여 개의 스위치가 있다면 당뇨병 환자들의 세포에는 20여 개 정도밖에 없었다. 스위치 숫자가 적기 때문에 당분이 세포 속으로 충분하게 들어갈 수 없게 되어 인슐린을 인위적으로 체내에 넣어주게 된다.

2. 스위치가 있긴 있지만 예민하지 못하기 때문에 강하게 눌러주어야만 세포문이 열렸다. 쉽게 말하자면 세포문을 열어서 당분이 세포 속으로 들어가는데 인슐린이 정상인보다 더 많이 필요하기 때문에 인슐린 주사를 맞아야 하는 상황이 생기게 된다.

스위치가 있긴 있지만 예민하지 못하기 때문에 강하게 눌러주어야만 세포문이 열렸다. 쉽게 말하자면 세포문을 열어서 당분이 세포 속으로 들어가는데 인슐린이 정상인보다 더 많이 필요하기 때문에 인슐린 주사를 맞아야 하는 상황이 생기게 된다.왜 스위치의 숫자가 줄어들었을까?

당이 들어가는 세포의 문을 열고 닫는 스위치에 문제가 생긴 것이 당뇨병이다. 세포의 스위치는 세포의 유전자 속에서 생산해 내는데, 유전자 중에서도 특별히 스위치를 만들어 내는 유전자에 문제가 생겨서 건강하고 충분한 숫자의 스위치를 생산해 내지 못함으로 생긴 병이 당뇨병이다.

그렇다면 왜 스위치를 생산하는 유전자에 문제가 생겨서 건강하고 충분한 스위치를 만들어내지 않게 되었을까? 그것은 스위치 생산 유전자가 스위치를 생산해 낼 의욕을 상실해 버렸기 때문이다. 이것이 무슨 뜻인가? 사람이 일을 하지 않고 운동을 하지 않으면 근육은 현격하게 감소하게 된다. 왜냐하면 근육을 사용할 일이 없기 때문에 유전자는 근육 세포를 생산해 낼 의욕을 상실하게 되고 따라서 근육은 힘을 잃어버리고 현저하게 줄어들게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영양소를 태워서 에너지를 만들어 낼 필요가 없는 생활, 간단히 말해서 운동을 하지 않는 생활을 오랜 기간 동안 살다보면 당분이 세포 속으로 들어가서 에너지로 변할 필요가 없게 된다. 그 결과 세포는 애써 문을 열고 닫을 필요가 없게 되고 유전자는 불필요한 스위치를 생산해 낼 이유가 없어지게 된다. 그리하여 세포의 문을 열고 닫는 스위치의 숫자는 점점 더 줄어들게 된다.

당뇨병에 걸리지 않으려면?
당뇨병에 걸리지 않으려면 우리의 유전자로 하여금 스위치를 계속해서 생산해 내어야만 되는 이유와 동기를 부여해 주면 된다. 당뇨병 환자의 유전자를 조사해 보면 그 구조가 비정상적으로 망가져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래서 혈중 당분의 농도가 높아서 세포가 당분을 받아들여 에너지를 만들어 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유전자는 스위치를 생산해 내지 못하는 것이다. 한 가지 정말 감사해야 할 사실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유전자를 창조하실 때에 비록 유전자가 망가지고 그 구조에 문제가 생길지라도 다시 회복되고 재생될 수 있도록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유전자는 재생되어야만 할 필요가 생길 때에는 스스로 치료하고 회복되어 완벽하게 재생된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다시 정리해 보자. 당뇨병은 운동하지 않는 생활을 사는 사람, 에너지를 필요로 하지 않는 삶을 사는 사람의 유전자가 비활성화되어 스위치를 생산해 내지 않음으로써 생기는 질병이다. 그런데 매우 희박한 경우이지만, 운동을 많이 했던 사람에게도 당뇨병이 생기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경우에는 지나친 스트레스가 원인이 된다. 그러므로 당뇨병에 유익을 가져다 주는 운동은 스트레스를 받지 않으면서 즐길 수 있는 운동이다. 운동이 좋다고 해서 지나치게 많은 양을 하게 되면 그것이 오히려 스트레스로 작용해 해를 가져다 줄 수 있다.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산책을 즐기는 것은 가장 바람직한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에게 알맞는 운동을 지속적으로 하는 것이 건강의 비결이다. 스위치를 생산하는 세포의 유전자가 운동을 느껴도 편안함과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면 최고의 치료 효과를 기대할 수 없다. 당뇨병 치료의 첫째 비결은 운동이고, 그 다음은 스트레스의 감소이며, 세 번째는 음식물의 조절이다.

음식물과 당뇨병 치료
기름기가 있는 음식은 당뇨병에 치명적이다. 왜 그럴까? 지방이 체내에 들어가면 유전자가 세포의 스위치를 생산해 내지 않기 때문이다. 지방이 몸 안에 들어가면 유전자는 세포의 스위치를 생산해 낼 의욕을 다시 잃어버리게 된다. 지방의 혈중 농도가 높아지면 피가 끈적끈적해져서 산소가 원활하게 공급되지 못하게 되고 유전자의 생산성이 떨어지게 된다. 이것은 마치 불을 때려고 난로에 장작은 넣었는데 충분한 산소를 공급하지 않아 충분한 화력이 나오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불이 제대로 타지 않으니까 더 이상 장작이 들어올 필요가 없어지게 되고 그 결과 유전자는 세포의 스위치를 만들어 낼 필요를 느끼지 못하게 되어 생산 활동을 중지하게 된다. 지방이 있는 음식물이 당뇨병에 치명적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많은 사람들은 당뇨병 환자에게 당분이 치명적인줄로 생각하지만, 이런 생각은 고쳐져야 한다. 물론 당분을 먹으면 혈당이 올라가는 것은 사실이지만, 당뇨병에 대하여 올바른 이해를 갖고 운동과 스트레스와 음식물에 대한 올바른 치료를 하게 되면 과일도 먹고 단 것을 먹는데도 불구하고 혈당이 잘 올라가지 않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켄터키 의과대학에서 흥미있는 실험을 했다. 의과대학 학생들을 둘로 나누어 한쪽에는 단 것만 먹게 하였고 다른 한쪽에는 설탕은 전혀 주지 않고 감자 튀김, 새우 튀김, 스테이크, 버터를 많이 섭취하게 하였더니 단 것을 먹은 학생들은 혈당이 나오지 않았는데 지방을 많이 섭취한 학생들은 48시간 만에 당뇨가 나오기 시작하였다. 당뇨병 환자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당뇨가 나온 것이다. 지방이 많은 음식물을 섭취하면서 운동을 하지 않고 당분을 먹으며 과식을 하고 스트레스를 받는 삶을 살면 그것은 자살행위이다.

당뇨병과 과식 및 과로
무엇이든지 지나치면 모자람만 못하다. 과식과 과로는 당뇨병을 치료하는데 있어서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대상이다. 당뇨병을 치료하기 원하면 과식하지 않는 식습관을 가져야 한다. 과식하는 음식물 중에도 칼로리가 많은 식품이 특히 문제가 되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지방이 많은 식품이다.

과로와 스트레스와 과식, 이런 것들이 한국의 30대와 40대의 일상 생활 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다. 생활 수준이 높아지고 지방과 인스턴트 식품의 섭취가 늘어남에 따라서 당뇨병이 급증하기 시작하였다. 예전에는 당뇨병은 부자들만 걸리는 병이라고 했는데, 이제는 모두 부자처럼 먹고 살기 때문에 당뇨병이 생긴다.

당뇨병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대부분의 성인병들이 치료될 수 있다. 왜냐하면 당뇨병의 치료법은 인체가 가지고 있는 생명의 법칙을 그대로 따라가는 원칙이기 때문이다. 세포와 유전자에게 최고의 환경을 제공해 주는 치료법을 찾아야 하는데,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마음과 육체를 치료하는 길이다. 조그만 채소밭을 만들고 씨를 뿌리고 열매를 거두면서 보람을 느끼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기도하면서 원수를 사랑하고 이웃에게 따뜻한 마음을 나누어 주며 사는 것, 바로 이것이 하늘의 치유의 은사를 받는 비결이다.

1부 - 성경은 어떤 책인가?

어디 가든지 흔하게 눈에 띄는 성경... 손쉽게 우리의 손에 들어오는 오늘날의 성경... 그러나 누가 그 성경을 읽으면서 그 성경이 많은 신실한 사람들의 피의 대가가 치루어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읽겠는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보존하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생명을 희생했는지 누가 알겠는가?  성경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와 보호로 지금까지 보존될 수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성경을 편찬하는 과정과 번역하는 과정에서 어떤 구절의 내용이나 뜻이 변조되고 바뀌는 일이 있게 되었다. 그러나 어떻든 모든 종류의 성경은 하나님의 진리의 보화가 고스란히 감추어진 밭임에 틀림이 없다. 이번 호 신앙 기사에는 성경의 역사와 성경의 변조된 내용, 그리고 특별히 성경 중에서 가장 정확한 번역과 진리의 말씀이 간직된 킹 제임스 성경에 대하여 포커스를 맞추어 보았다. 깊이있는 연구가 되기를 바란다. - 편집실 -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 3:16).  성경은 어떤 책인가? 성경은 신뢰할 수 있는 책인가? 먼저 짧은 이야기부터 시작해 보며 함께 연구기로 하자.

미국의 루 월리스 장군은 벤허라는 책의 저자로 유명한 사람이다. 그는 교회에 다니는 맹목적인 사람들을 깨우치고, 예수라는 인물의 허구성을 파헤치기 위하여, 또 예수에 대한 믿음을 반대하고 성경이 말하는 바가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검증하기 위하여 미국과 유럽 등지에서 2년 간 성경을 연구하게 되었다. 2년간의 성경 연구와 검증을 마친 끝에 그는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오히려 그리스도의 승리를 찬송하는 벤허라는 작품을 저술하게 되었다.

성경만큼 사랑과 미움, 존중과 저주를 받은 책이 없다.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위해 목숨을 버렸다. 어떤 이들은 이것 때문에 사람을 죽였다. 성경은 인간을 고무시켜 가장 위대하고, 가장 고상한 행동들을 하게 했으며, 또한 가장 몹쓸 짓과 퇴보적인 행위들을 유발시켰다고 비난을 받았다. 성경으로 인해 전쟁들이 일어났으며, 성경의 갈피 속에서 혁명들이 성숙되었고, 성경의 사상들 때문에 왕국들이 힘없이 무너져 버렸다. 역사가 증명하고 또 역사 속에 나타난 놀라운 책, 성경... 성경은 과연 어떤 책인가?

성경, 곧 신약과 구약은 신적 영감에 의해 주어진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들이 성령의 감동을 받은 대로 말하고 기록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범죄하여 하나님과의 교통이 끊어지게 되자,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인간이 가장 이해하기 쉽게 인간의 언어로 하나님 자신의 생각과 말씀을 기록해 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성경이다. 성경은 어떻게 하면 인간이 죄로부터 다시 구속을 받아 하나님과 함께 살 수 있는지, 또 그렇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구원에 필요한 모든 지식을 인간에게 가르쳐 준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귀중한 사실은 성경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라는 것, 즉 하나님의 성품과 인격에 대하여 계시되어 있다는 것이다. 성경처럼 하나님 자신이 당신의 인격과 성품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말한 경전은 아마 없을 것이다.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 속에 있는 영감의 말씀이 그 사람을 변화시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에 충분하게 만든다. 이렇듯 영원히 살 수 있는 영생의 비결을 가르쳐주는 진리의 성경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절대 무오류(絶對蕪誤謬)의 계시이다. 그리고 성경은 유일한 신-인(神人), 곧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세상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이기도 하다.

1) 성경의 저자
성경은 그 기원 때문에 권위를 갖는다. 성경의 기자들은 이것을 성경(롬 1:2), 신성한 저서(딤후 3:15, RSV), 하나님의 말씀(롬 3:2; 히 5:12)으로 언급했다. 성경의 독특성은 그 기원과 근원에 있다. 성경기자들은 자기들 스스로 기별을 고안해 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기별을 받아 기록한 것이다. 그들은 성령의 계시를 통해서 하나님의 진리를 볼 수 있었다(사 1:1; 암 1:1; 미 1:1; 합 1:1; 렘 38:21 참조).

구약과 신약 성경을 기록한 기자들은 성령을 선지자를 통해 백성과 교통하시는 분으로 가리켰다(느 9:30, 슥 7:12, 막 12:36, 행 28:25 참조). 또한 신약과 구약을 저술하는 일에 있어서의 성령의 역할을 인정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역사 속에서 성경을 통해 자신을 계시하셨다. 당신의 손으로서가 아니라 약 40명의 손을 통해 1,500여 년에 걸쳐 기록하셨다. 그러나 성령 하나님께서 기자들에게 영감을 주셨으므로 하나님이 성경의 저자이시다.

2) 성경의 영감성
바울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것(딤후 3:16)이라고 말한다. 감동으로 번역된 헬라어 데오프뉴스토스(theopneustos)의 문자적 의미는 하나님이 숨을 불어 넣으신(God-breathed)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속에 진리를 불어넣으셨다. 그러므로 감동, 혹은 영감은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이 당신의 영원한 진리를 전달하시는 과정이다.

하나님의 계시는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영감을 통해 주어졌다(벧후 1:21). 이 계시들은 제한성과 불완전성을 지닌 인간의 언어로 표현되었으나 여전히 하나님의 증언이다. 하나님은 낱말에 영감을 주신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사상에 영감을 주신 것이다. 어떤 경우에 기자들은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를 표현하도록 명령을 받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 하나님은 그들이 보거나 들은 것을 자신의 재능을 다해 표현하도록 지시하셨다. 그러므로 기자들은 자신만의 언어 양식과 표현 방식을 사용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단어와 논리와 수식어들 가운데 당신 자신을 두어 하나님 자신의 사고 방식과 표현양식을 기록하신 것이 아니다. 성경의 저자들은 하나님의 필자들이었으며 하나님의 필촉이 아니었다. 영감은 인간의 언어나 표현 방법에 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인간 자신에게 작용하는 것이며, 그는 성령의 감화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상에 물들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언어는 개인의 정신적 특징을 지니게 된다. 비록 그것이 거룩한 정신으로 물들여진다해도 그 개인과 그 시대의 특성이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3) 성경의 기록의 형식
1. 계시의 형식
성령은 자주 이상과 꿈을 통해 신적 지식을 전달하셨다(민 12:6). 때때로 성령은 들을 수 있도록 말씀하시거나 내적 감각에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사무엘의 귀에(in his ear, 삼상 9:15) 말씀하셨다. 스가랴는 상징적인 것을 제시받은 후 설명까지 들었다(슥 4). 바울과 요한이 받은 하늘의 이상들은 구두 지시를 동반했다(고후 12:1-4; 계 4, 5). 에스겔은 다른 장소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들을 보았다(겔 8). 어떤 기자들은 자신의 이상에 참여하여 그 이상의 한 부분으로서 특정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계 10).

2. 역사적 기록
하나님은 특정 인물들에게 당신께서 이스라엘을 취급하신 역사를 기록하도록 명령하셨다. 세속 역사와는 다른 관점에서 기록된 이러한 역사 이야기들은 성경의 중요한 부분을 구성한다(민 33:1, 2; 수 24:25, 26; 겔 24:2 참조). 하나님의 관점에서 본 이러한 역사 이야기들은 우리에게 정확하고 객관적인 역사를 알려준다. 성령은 기자들에게 특별한 통찰력을 부여하여, 선악 간의 쟁투 속에서 벌어진 사건들을 기록할 수 있도록 하셨다. 이러한 사건들은 하나님의 품성을 드러내고, 구원을 찾는 백성들을 인도한다.

역사적 사건들은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한 표상 혹은 실례이다(고전 10:11). 바울은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안위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롬 15:4)고 말한다.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은 본(本) 혹은 경고의 역할을 한다(벧후 2:6; 유 7). 아브라함의 칭의 체험은 모든 믿는 자에게 본이 된다(롬 4:1-25, 약 2:14-22). 깊은 영적 의미가 가득 찬 구약의 민법까지라도 오늘날 우리의 유익을 위해 기록되었다(고전 9:8, 9). 그러므로 하나님은 성경 기자들을 인도하여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 수 있는 방식으로 역사를 제시하도록 하셨다.

3. 전기
성경 인물들의 전기는 하나님의 영감성에 대한 또 다른 증거이다. 이러한 설명들은 그들의 품성의 약점과 장점을 모두 세심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것들은 그들의 성공뿐 아니라 그들의 죄까지도 솔직하게 기술하고 있다. 성경은 추호도 그들의 실수들을 변명해 주거나 그들의 범죄를 극소화시키지 않는다. 성경은 그들이 어떤 인물이었으며, 하나님의 은총으로 어떤 인물이 되었는지, 또는 어떤 인물이 되기에 실패했는지를 남김없이 보여준다. 하나님의 영감이 없었더라면 그 어느 전기 저술가도 그토록 지각력 있게 분석한 글을 기록하지 못했을 것이다.

 

2부 - 성경은 신뢰할 만한 책인가?

지금 우리가 번역하고 복사되어 가지고 있는 성경이 변질되지 않았고 성경의 원본과 같다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 성경이 원본 그대로 전수되도록 어느 정도까지 보호하셨는가?
고대 사본들은 차이가 있는 것이 분명하나, 필수적인 진리들은 보존되어 왔다. 필사자들과 성경의 번역가들이 실수들을 저지를 수 있는 가능성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오류라고 주장되고 있는 많은 것들이 사실은 학자들편의 오해였음이 성서 고고학을 통하여 얻어낸 증거로부터 확실히 드러나고 있다. 이러한 문제들 중 상당수가 서구적 안목에서 성경의 역사와 풍습을 읽었기 때문에 발생하였다. 성경을 파괴하려는 사단과 인간의 시도들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놀랍고도 신기스러울 정도의 정확성을 지닌 채로 보존되었다. 사해 두루마리와 후기의 구약 사본들을 비교해 보면, 그것이 얼마나 조심성 있게 전수되었는지를 확실하게 알 수 있다. 그것들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절대 무오류의 계시로서, 성경을 확실하게 신뢰할 수 있음을 확증해 준다.

1). 사해사본이 증명하는 성경의 정확성

프레드릭 케뇬은 다음과 같이 구약 성경의 신빙성에 관하여 질문을 던졌다. A.D 100년경에 만들어졌다고 추측되는, 마소레틱이라고 부르는 히브리 사본이 정말로 구약 성서의 저자들이 지은 그 히브리 성경 원본의 내용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사해사본이 발견되어지기 전에는 현존하는 성경 사본들의 정확성에 관하여 이와 같은 많은 의혹들이 끊이지 않았었다. 그러나 사해사본은 이러한 질문들에 관하여 정확한 답변을 주고 있다.

우리가 갖고 있는 히브리어 성경 사본은 주후 900년부터 복사된 것인데, 이 사본들이 예수님 당시인 A.D 32년경에 쓰였던 성경과 같은 것이라고 증명하기는 어려웠었다. 그러나 사해사본을 발견한 고고학자들에 의하여 우리가 보아왔던 구약 성서가 그 원본과 같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게 되었다. 특별히 이 사해사본들 가운데는 이사야서 전권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것은 B.C 125년경에 쓰여진 것으로서 1,000년 이상의 역사를 갖고 있으며, 지금까지 우리가 읽고 있었던 마소레틱 사본에 의한 이사야서와 동일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었다. 사해 사본으로 인하여, 지금 우리가 보는 성경과 예수께서 지상에서 봉사하시면서 사용하시던 성경이 동일하다는 증거를 확보하게 되었다.

2). 사해사본이란 무엇인가?
1947년 5월 어느 날 사해의 북서부 사막의 구릉지대 쿰란에서 베두인(아랍계 유목민) 소년이 양과 염소를 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무리에서 이탈한 한 마리의 염소를 찾기 위하여 그 소년이 반쯤 허물어진 벼랑의 동굴에 돌을 던졌더니 무엇인가가 깨어지는 소리가 났다. 이튿날 그 소년은 사촌 형제와 함께 그 동굴로 기어 올라가 보니 좁은 동굴 속에는 항아리의 파편이 흩어져 있으며 안쪽에는 뚜껑이 덮인 항아리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항아리 속에는 큰 두루마리 한 권과 작은 두루마리 두 권이 들어 있었다.

이 두루마리는 베들레헴의 고물상에게 넘어가게 되었고, 그 해 12월에 예루살렘의 헤브라이 대학이 이 세 두루마리를 사들이게 되었는데, 이것은 나중에 구약 성경의 사본인 것이 밝혀졌다. 그 후 사해의 서북 연안의 동굴은 베두인들이나 고고학자들에 의하여 답사되고 매년 이 인근 지역의 많은 동굴들에서 성경의 사본들이 계속해서 발견되었다. 와디, 쿰란 지역의 동굴 발견은 1956년 봄까지 11개 곳(1956년에 발견)이었으며, 발견의 순서에 따라서 1(1Q,Qumran Cave1)에서 11까지 번호가 매겨졌다. 이것들을 사해사본이라고 부른다. 사해사본은 약 4만 개의 작은 단편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 조각들로부터 500개 이상의 책들을 엮을 수 있었다. 이 사본들에서 성경에 포함된 책들 외에 다른 성서들도 발견되었고, 성경 주석에 도움을 주는 여러 중요한 문서들도 발견되었다.

많은 학자들은 사해사본의 연대가 주전 150년에서 주후 70년경의 것으로 추정하는데, 기존의 다른 성경 사본들보다 1,000년 이상 오래된 것이었다. 발견된 사본들에는 초기의 이사야서 사본 전체와 구약 대부분의 책들의 단편들이 포함되어 있었고, 사무엘 상하권의 조각난 사본과 함께 하박국의 두 장이 거의 훼손되지 않은 채 발견되었다.

학자들은 사해 사본과 다른 사본들을 비교하면서 우리가 보고 있는 현대의 성경들이 얼마나 정확한 것인지에 대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대부분의 경우에 극히 사소한 철자상의 차이만이 있었다. 사해 사본의 발견은 성경이 얼마나 믿을 만한 것인가에 대한 중요한 외적 증거를 우리에게 제공해 주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귀중한 진리를 보존하시기 위하여 특별하게 섭리하셨고, 고고학적인 증명을 통해 성경의 내용들의 정확성이 증명되었다.

 

3부 - 피로 얼룩진 킹 제임스 성경

과거의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진리의 말씀인 성경을 보존하시기 위하여 특별히 섭리하셨다.

저 영적으로 캄캄하고 무서웠던 종교 암흑시대를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많은 신실한 종들의 생명을 바치는 헌신을 통해 성경은 우리에게 안전하게 전수될 수 있었다. 성경의 필수적인 진리는 간직되었지만, 그러나 인간들의 많은 번역 작업과 보존 작업들을 거치면서 성경의 어떤 부분의 내용들이 조금씩 변조된 것은 확실하다. 그렇다고 우리는 성경이 하나님의 진리가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다.

성경 중에 가장 원본의 뜻과 내용이 잘 간직된 성경은 킹 제임스 성경이다. 킹 제임스 성경에는 번역에 있어서도 거의 원본의 내용이 그대로 전수되고 있다. 그러므로 보통 성경에 빠진 구절들도 이 성경에는 그대로 보존되어 있으며, 다른 성경과는 달리 성경을 번역하던 신학자들의 신조와 사상에 따라 변조된 성경구절들이나 내용이 없이 원본의 사상을 그대로 담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여 주신 정확한 진리를 연구하고 깨우치기 위하여 성경을 연구할 때 킹 제임스 성경을 꼭 참조하고 연구하는 것이 중요하다.

1). 역대의 번역된 성경들

1. 최초의 성경; 존 위클리프의 성경
최초로 성경을 번역한 사람은 존 위클리프이다. 그는 1392년 영국의 북부지방 요크셔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당대 최고의 명문 옥스퍼드대학에서 특대 교비 연구생으로 공부하였다. 당시의 성경은 일반인들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고어(古語)로만 되어 있었기 때문에 학자들은 진리의 근원으로 나아갈 방법이 있었으나 무지한 사람들은 성경을 읽을 수 없었다.

위클리프는 학교에서 학과를 공부하는 것 못지 않게 열심히, 그리고 철저하게 성경을 연구함으로써 철학이나 교회의 가르침에서 얻지 못했던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1345년, 옥스퍼드 대학을 졸업한 후 위클리프는 모교의 신학 교수로 초빙되어 강단에서 강의와 목회를 하게 되고 거기서 학장까지 지내게 되었다.

중세 교회는 교황을 중심으로 하는 성직자 계층으로 되어 있었다. 위클리프는 교회의 법은 성경이지 교황이 자의적으로 만든 법이 아니라고 강하게 교황의 권위에 맞섰다. 로마 교회가 사람의 유전을 받아들이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는 것을 보고 성경을 저버린 신부들을 담대하게 질책하고 성경을 백성들에게 돌려줄 것과 성경의 권위를 교회 안에서 다시 한번 확립시킬 것을 요구하였다.

위클리프의 온 생애를 통하여 최대의 사업이라고 할 만한 것은 성경을 영어로 번역한 것이었다. 종교 개혁 이전에는 아주 적은 부수의 성경밖에 없어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극히 드물었다. 더욱이 유식한 사람들만 알 수 있는 언어로 여러 시대 동안 기록되어 있었다. 위클리프는 오류와 미신의 쇠사슬을 끊어 버리고 오랫동안 속박되어 있는 사람들이 자유를 얻기를 원했다. 그렇게 하여 드디어 위클리프의 말대로 최초의 영어 성경이 나오게 되었다.

권세있는 귀족들과 영국 왕의 비호 아래에서 위클리프는 과감하게 성경의 첫 번째 번역판을 만들어내었다. 만일 귀족들과 왕의 지지가 없었다면 그는 화형대 위에 설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 하나님의 말씀을 일반 평민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번역한다는 것은 교회에 대한 반역행위로 간주되었다. 육체의 연약함으로 인한 고통과 교황권의 성직자들에 의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위클리프는 그의 기념비적인 업적을 완성시켰다.  그러나 위클리프가 번역한 성경은 많은 잘못된 내용들을 포함하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그는 5세기경에 제롬에 의해서 편찬된 라틴어 벌게이트(Latin Vulgate)성경, 즉 로마 천주교회가 사용하던 성경을 번역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성경으로 인해 로마 천주교회가 평민들에 대해 쌓아 놓았던 높은 장벽이 무너지기 시작하였고, 결코 소멸될 될 수 없는 빛이 공개되기 시작하였다. 드디어 성경은 영국 전국에 공개 되었고, 성경이 번역되어 모든 사람들이 자국어로 된 성경을 가질 수 있는 시대가 왔다. 위클리프는 감옥이든지 화형주든지 두려워할 것이 없었다. 그는 결코 꺼질 수 없는 진리의 빛을 영국 국민의 손에 쥐어 주었다. 그는 자기의 동포들에게 성경을 줌으로 무지와 죄악의 사슬을 끊어 버리는 것 이상의 것을 줄 수 있었음을 기뻐했다.

2. 에라스무스의 성경
1516년, 에라스무스가 헬라어 표준 원본을 사용하여 새로운 라틴어 성경을 만들었는데, 이 성경에서 로마 천주교회가 사용하던 라틴 벌게이트 성경의 많은 잘못된 점들이 올바르게 교정되었다. 이 성경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재발견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으며, 사람들이 자신들의 영적인 운명을 성경을 해석하고 풀이하는 자들에게 의지하는 영적인 노예 생활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그는 이 성경의 신약 역본 주석에서 그 당시 신학자들의 잘못된 성서 해석과 형식화된 논리를 공격적으로 비판했다. 그에 의하면 당시의 신학자들은 마음대로 밀가루 반죽 이기듯이 성서를 뜯어 고치고 거기서 나온 그들의 결론만이 유일불가침의 것임을 인정했다. 그리스어 원문에서 라틴어로 번역한 이 성경은 1516년에 많은 부가설명과 주역을 달아서 직접 번역한 최초의 것이라는 점에 그 의의가 있다.

3. 틴데일의 성경
윌리엄 틴데일(William Tyndale, c. 1494-1536)은 영국의 종교개혁가이자 영어 성경번역가로 우리에게 낯설지 않는 인물이다. 그러나 그가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기 위해 당시 영어에는 없는 새로운 여러 단어들을 만들고 구어적인 소박하고 우아한 영역성경을 출판함으로써 후일 흠정역(KJV)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는 점을 아는 이는 많지 않는 것 같다.

그는 성경을 번역했다는 이유로 화형을 당했다는 점은 그가 살았던 시대가 얼마나 숨 막히는 암흑의 세월이었던가를 짐작하게 된다. 바로 그 암흑에서 자유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자국어로 번역되고 읽혀져야 한다는 일념 때문에 그는 성경번역가의 길을 갔고, 성경 출판은 아무도 기꺼이 할 수 없었기에 스스로 출판업자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성경번역은 당시 교회에서 칭송받을 일이 아니라 금지된 일이었으므로 조국을 떠나 독일로 향했다. 함부르크와 비텐베르크를 오가며 비밀히 히브리어와 헬라어 원문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구약의 일부, 곧 창세기에서 역대상까지의 일부, 요나서와 신약을 번역했고, 1525년 퀘른에서 최초로 신약성경을 비밀히 인쇄했다. 인쇄공의 배신, 도피, 경제적인 어려움 등 숱한 방해와 난관 가운데서도 그는 비밀히 인쇄한 성경을 출판했다.

그는 번역한 성경을 영국으로 수출되는 술통과 밀가루, 혹은 짐짝 등에 숨겨 영국으로 반입했다. 그러나 밀반입된 성경이 영국교회 당국에 의해 발각되어 1525년에서 1528년 사이에 신약성경 18,000권이 소각되고 현재는 단 2권이 남아 있다. 영국에서 소각 운동이 일어나는 동안 틴데일은 화란 안트웹으로 피신하여 숨어 있으면서 신약번역본 수정작업을 했고, 구약 모세 오경을 번역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영국교회의 비밀요원 헨리 필립스(Henry Philips)의 제보로 체포되었고 헨리 8세에 의해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이단이라는 죄목으로 심문을 받고 1536년 최고형인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리고는 그가 공인된 라틴어 판 벌게이트(Vulgate)를 사용하지 않고 히브리어와 헬라어 원전에서 성경을 번역했다는 이유로 목이 잘린 그의 시신은 화형용 기둥에 묶여져 다시 불태워졌다. 윌리엄 틴데일이 번역한 틴데일역(Tyndales Version, 1524-34)은 원어성경을 대본으로 사용한 최초의 번역 성경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인쇄된 최초의 영어성경이라는 점에서 영어성경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 그가 헬라어 원전 신약 성경을 영역할 때는 에라스무스에 의해 헬라어 성경이 출판된 지 불과 9년이 지났을 때였다. 틴데일의 성경은 1611년에 공인된 성경으로 출판된 흠정역(KJV)에도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4. 마일스 커버데일의 성경
틴데일이 이단으로 처형된 지 약 10년이 지난 후 마일스 커버데일(Coverdale, 1488-1596)은 틴데일역을 좀 더 보충하여 1535년 최초의 완역판 영어성경을 출판했는데 이것이 커버데일 역(Coverdale Version, 1535)이다. 이것은 번역판이라기보다는 틴데일역의 수정판에 가깝다.

2). 성경의 수난 시대와 핍박의 역사
1538년경, 모든 성직자는 교회 안의 편리한 장소에 영어로 된 성경 한 권을 비치해야 한다는 법령이 선포되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5년 후 강력한 교권의 압력으로 인해서 국회는 다시 한번 틴데일 성경을 법으로 금지시켰으며, 성경은 또 다시 평민들의 손으로부터 제거당해야만 하였다. 또 로마 천주교인인 영국의 메리 여왕 시대 동안에는 마태 성경의 편집자들인 토마스 크래머와 존 리절을 포함하여 수백 명의 신실한 개신교도들이 화형대 위에서 연기로 사라졌다.

그런데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1세 때에는 개신교가 복구됨에 따라서 다시 성경은 대중들이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1560년경 틴데일 성경의 개역본인 유명한 제네바 성경이 편찬되었는데, 이것은 메리 여왕 시대의 박해를 피해서 제네바로 피신한 개혁자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제네바 성경은 많은 부분이 올바르게 번역되었고,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읽혀지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서 상당한 숫자의 그리스도인들이 영국 교회의 형식주의를 거절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같은 거절과 저항은 청교도들과 영국 국교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에게 핍박을 가져오게 했으며, 이러한 핍박은 그들로 하여금 종교의 자유를 찾아서 신세계인 미국으로 이주하도록 만들었다. 엘리자베스 1세 때에 또 다른 중요한 성경이 영국 교회의 주교들에 의해서 등장했다. 이 성경은 1568년에 여왕에게 바쳐진 것으로서 비숍 성경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한편 청교도 운동이 강력하게 펼쳐져서 1593년에는 영국 교회에 의해서 그들을 불충성한 사람들이라는 낙인이 찍히게 되었고, 그들에게는 영국을 떠나라는 추방명령이 내려졌으며, 이에 불복하는 자들은 사형에 처해지게 되었다.

3). 킹 제임스 성경의 탄생
1603년 엘리자베스 여왕이 죽자, 스코틀랜드의 킹 제임스 6세가 그 후계자로 선정되어 대영 제국의 제임스 1세 왕(King James)이 되었다. 청교도들은 총력을 기울여 새로운 왕에게 그들의 처지를 호소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왕이 런던으로 즉위식을 거행하러 가는 도중에 그들의 처지와 형편을 자세히 기록한 밀리너리 청원서를 왕에게 전달하게 되었다.

1. 킹 제임스 성경 편찬
1604년 1월 14일, 제임스 1세 왕 (킹 제임스 1세)은 영국 국교의 주교들과 존 레이놀드가 이끄는 4명의 청교도 지도자들, 그리고 옥스포드 대학의 학장이 참석한 가운데 회의를 개최했다. 이 회의에서 왕은 새롭고 보다 정확한 성경을 편찬해 낼 것을 결정하였다. 킹 제임스 1세는 성경에 대한 깊은 지식이 있었다. 그는 고전 언어에도 능통하여서 요한계시록을 해설하는 글을 쓸 정도였으며, 또한 시편의 일부를 번역하기도 하였다.  왕은 성경을 번역하는 일을 맡게 될 번역자들을 선정하는데 있어서 매우 주의깊었는데, 성경을 개인적으로 연구하는데 있어서 고통을 감수했던 사람들이어야 한다는 것이 번역자들을 선택하는 자격 조건이었다. 이 역사적인 놀라운 사명을 위해서 선택된 사람들은 당시 청교도들의 지도자이었던 존 레이놀드 박사를 포함해서 모두 47명이었다.

2. 킹 제임스 성경 편찬 과정
이 엄선된 47명의 사람들은 이 사업을 하는데 있어서 어떤 금전적인 댓가도 받지 않을 정도로 경건한 학자들이었다. 그들은 성경을 편찬하기 위한 첫 번째 단계로서, 번역사업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 여섯 팀으로 나누어 일하기로 했다. 그 여섯 팀은 크게 두 그룹으로 대변할 수 있었는데, 한 그룹은 히브리어에 정통한 전문가들로서 이들은 구약 성경을 번역하였고, 또 한 그룹의 사람들은 헬라어의 전문가들로서 신약 성경을 번역하였다. 3년에 걸쳐서 각 학자들은 개인적으로 자신에게 할당된 부분을 번역하였는데, 이때 그들은 번역의 순수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제정한 15개 항목의 번역의 원칙을 준수해야 되었다.

두 번째 단계로서, 각자가 번역한 성경을 자신이 속한 팀의 다른 사람이 번역한 것과 비교하는 작업이 조심스럽게 이루어졌다. 이런 식으로 한 팀에서 자신들에게 할당된 번역이 완성되었으면 그것을 다른 두 팀으로 보내서 다시 비교 검토하는 작업을 하였다. 이렇게 정성스러운 작업 끝에 감추어졌던 성경이 펼쳐지자, 틴데일과 커버데일이 끼친 영향력이 얼마나 지대했던가가 분명히 드러났다. 커버데일은 산문의 대가였고, 킹 제임스 성경은 커버데일 주교의 문학적 특출함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제임스 왕의 주도하에 착수되었던 성경 전체의 번역이 일단 완성되자, 각 팀에서 두명의 학자들이 차출되어서 마지막 교정과 검토에 들어갔다. 그들은 한 사람이 자신들이 번역한 성경을 크게 소리내어 읽으면 다른 학자들은 다른 언어, 즉 프랑스어, 스페인어, 이태리어로 된 성경을 듣고 보면서 자신들이 번역한 영어 성경을 재검토하였다. 만일 그들이 어떤 문제를 발견하면, 모두 함께 모여서 그것에 대하여 토의를 하였다. 가장 정밀한 검토의 과정을 거친 후에 새로운 번역본은 인쇄소로 보내지게 되었다. 이런 검토와 확인의 과정을 거치는데 총 9개월이 소모되었고, 그 당시의 낙후된 인쇄술에 의해서 드디어 1611년, 킹 제임스 성경은 대중들의 손에 들려지게 되었다.

3. 킹 제임스 성경의 개정
킹 제임스 성경의 초판 이후에도 계속적이고 부분적인 개역이 이루어졌는데, 이 중에는 언어의 변화로 인해서 이루어진 개역도 있었다. 1629년 첫 번째 개역이 있었고, 이어서 1678년에 캠브리지 대학에서 좀더 상세한 개정이 이루어졌다. 18세기에 들어서 언어의 현대화를 위해 개정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762년 캠브리지 트리니티 대학의 토마스 파리스 박사는 킹 제임스 성경의 개정본을 만들었다. 또 7년 후에는 옥스포드 대학의 벤쟈민 블레이미 박사에 의해서 다시 한번 개정판이 나왔는데, 이 두 개정판이 오늘 날의 성경의 권위있는 개정판으로 인정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원어에 없는 표현은 이탤릭 체로 성경에 표시했으며, 65,000개의 관주 해석을 삽입했는데, 그 중 절반은 유사한 성경절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게 하기 위한 것들이다. 세계의 성경 역사 가운데 킹 제임스 성경만큼 원어에 충실하고 깊은 주의와 기도로서 이루어진 성경은 존재하지 않는다.

È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편히 앉아서 읽을 수 있게 되기 위해서는 위대한 개혁자들과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피가 화형대 위와 고문대에 바쳐지는 숭고한 헌신이 있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의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에 의해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무관심하게 다루어지고 있는 것을 보는 것은 얼마나 슬픈 일인가! 진정 우리가 과거에 성경의 보존을 위해 자신들의 생애와 목숨을 바친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깊은 감사의 정신을 마음에 품은 채 성경을 대한다면 우리는 좀더 성결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4부 - 일반 성경과 킹 제임스 성경의 보존 역사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인간이 거듭남을 체험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영생의 길을 발견하기 때문에, 선과 악의 전쟁터인 이 지구에서 성경을 향한 사단의 많은 공격과 핍박이 존재했다.

사단은 사람들이 성경의 올바른 뜻을 이해하지 못하도록 꾀하고 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오해할 때, 구원의 온전한 역사가 사람들의 생애에 이루어지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원본과 가장 가깝고 변조되지 않은 성경을 가지고 연구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며, 특히 번역하는 과정에서 그 뜻이 변조되어 하나님의 말씀의 올바른 뜻과 중요한 교리가 바뀐 것을 찾아내어 연구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하겠다.

1). 변조된 성경의 유래
초대 교회 이후로 성경 번역과 편찬 과정에는 많은 거짓 신학자들이 관여되어 성경의 어원이나 뜻이 변개되는 일이 생기게 되었고, 이를 바로 잡으려는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보존하기 위해 성경을 변개시키는 세력들로부터 숱한 박해를 받았으며, 또한 이 말씀을 지키기 위해 수많은 주의 종들이 목숨을 잃었다.

구약 성경은 히브리어 맛소라 원문으로 큰 논란 없이 보존되어 왔으나, 신약 성경은 A.D 250년 경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아버지 하나님과 동등하게 인정하지 않는 필로(Philo, B.C 20-A.D 50)와 오리겐(Origen, A.D 184-254), 또 그의 추종자들에 의해 상당 부분이 변개되었고, 그들에 의해 변개된 성경에서 유세비우스가 콘스탄틴의 명을 받고 50권의 사본을 복사한 것이 확산되어 변개된 사본의 씨가 되었다. 유세비우스가 복사한 사본에서 제롬이 라틴 벌게이트를 만들어냄으로 카톨릭 성경의 원문이 되었고, 이 변개된 사본들은 주로 북아프리카의 알렉산드리아에서 변개된 후 로마로 들어갔는데, 이 가운데 대표적인 사본으로 손꼽히는 것이 바티칸사본과 시내사본으로 모두 4세기 때의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이 연대는 유세비우스가 복사한 50권의 사본이 제작된 연대와 같다.

바티칸사본이 발견된 것은 1481년이었고, 시내사본이 발견된 것은 1844년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이들 두 사본이 원문을 전승했다고 하는데, 이러한 말은 원문비평학적 근거가 없다. 바티칸사본은 전통원문과 비교할 때 무려 5,788군데나 변개되어 있으며, 삭제시킨 부분도 상당수 있다(마 19:9; 20:16; 20:22; 21:43; 23:19; 28:9, 막 6:11; 9:44; 9:46; 9:49; 10:21; 11:26; 13:14; 15:28, 눅 2:33; 4:4; 4:8; 4:41; 23:38, 요 1:14; 1:27; 3:15; 5:4; 6:69; 9:35, 행 2:30; 8:37; 9:6).

2). 킹 제임스 성경의 역사
신약 성경의 원문은 사도 시대 이후 주로 소아시아의 지역 교회들과 성도들에게 산재되어 있었고, 이 사본들이 신실한 성도들의 손에 의해, 믿는 사람들이 최초로 그리스도인이라 불렸던 안티옥에서 발칸 반도를 거쳐 알프스를 넘어 유럽으로 옮겨졌고, 독일에서 영국으로 들어갔다. 이 원문은 악한 세력들의 성경 변개 시도와 갖은 박해 속에서도 한 번도 그 맥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옴으로써 전통원문(Traditional Text)이란 명칭이 붙게 되었다.

초대 교회에서 사용된 이 성경은 A.D 157년 북부 이태리 교회에서, A.D 177년에는 프랑스 가울 교회에서, A.D 200년경에는 시리아 교회에서(Peshitta) 사용되었고, 특히 A.D 312-1453년까지 비잔틴 제국 기간 동안에 희랍 교회에서 1천 년 이상 사용되었으며, 에라스무스(Erasmus, 1522). 콜리네우스(Colinaeus, 1534), 스테파누스(Stephanus, 1550), 베자(Beza, 1598), 엘지버(Elzevirs, 1633) 등을 통하여 표준원문(Textus Receptus)으로 편수되었다. 이 원문에서 독일어로는 종교개혁 성경인 독일이 1534년에 나왔고, 영어로는 이 1611년에 나왔다.

3). 한국어 성경
개역 한글판 성경은 외국 선교사들이 와서, 성경 없이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실감하고, 원문 비평학적 지식이나 필사본 증거에 대한 식견 등이 미비한 상태에서 만들어낸 성경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한국의 사회적 형편에 비추어 볼 때, 그나마 성경이 번역되어 나올 수 있었던 것은 관련 인사들이 막중한 사명감과 열정 때문에 가능했으리라 믿어진다. 이 성경 중 특히 1938년 판이 1956년 판 한글 맞춤법 통일안에 따라 개정되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독보적으로 성경의 자리를 지켜 왔다. 그러나 이 성경은 한국에서 하나밖에 없는 성경이었기에 64번의 개정에도 불구하고, 성경 독자들은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이 부득이 쓸 수밖에 없었던 처지에 있다. 한편 대한 성서공회는 이 성경을 대체시켜 볼 의욕을 가지고 1977년 개신교와 천주교의 합작으로 공동번역을 내놓아 공동 번역 성서라고 이름 붙였으나, 내용상에 있어서 원본의 뜻과 달라진 부분들이 있으며, 또한 이 성경은 천주교인들을 제외하고는 별로 많이 애용되어지지 못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대한 성서공회는 다시 시도하여 1993년 을 만들었는데, 이 성경 역시 많은 부분에 있어서 바른 원본인 킹 제임스 성경과 다른 것이 발견 된다.

4). 한국어 킹 제임스 성경
반가운 일은 1994년 한국에도 한국어로 킹 제임스 성경이 번역되어 출간된 일이다.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성경이 원본의 뜻 그대로 1534년 독일어로 번역되어 루터 성경이 만들어졌고, 1611년 영어 킹 제임스 성경이 만들어진 이래로 수백 년이 지난 후에야 한국어 킹 제임스 성경이 출간되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성경을 구입해서 연구하여 성경의 원본의 올바른 뜻을 연구하면 영적으로 큰 도움이 될 것이다.

5부 - 킹 제임스 성경과 기존 성경의 비교 연구

*본 월간지 살아남는 이들은 성경 연구에 있어서 원본의 뜻이 가장 잘 전수된 킹 제임스 성경을 참고하고 이용함을 알려드립니다. 그리고 그 외의 다른 성경이 비록 번역상의 문제에 있어서 오류가 생길 수 있고, 몇 부분들에 있어서 원래의 성경 구절의 뜻과 달라지긴 했지만, 그 성경들을 사단의 것이라고 부르지는 않고 있습니다. - 편집실 -

제5부에서는 한국어 킹 제임스 성경과 종전의 개역 한글판 성경의 같지 않은 성경 몇 구절, 소위 로마 카톨릭에 의해서 변조되었다고 제기되고 있는 성경 구절들을 함께 비교하여 연구해 보기로 한다. 이 성경 구절들은 교리에 대한 잘못된 신학 사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번역하면 완전히 다른 뜻으로 번역되기 때문에, 성경이 원래 가르치는 교리에 큰 차이를 낳게 되며, 올바른 구원의 도리를 깨우치는데 심각한 걸림돌이 된다. 그러므로 원본이 말하는 올바른 구절의 의미를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함께 연구하여 보자.

1). 히브리서 2장 16절 비교 연구

1. 예수 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한 서로 다른 가르침
히브리서 2장 16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입증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성경 구절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이 구절의 뜻이 번역상 잘못되어 성경 교리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 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한 진리가 왜곡되게 되었다. 비교 연구하여 보자.

¶·¶ 개역 한글 성경: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 킹 제임스 한글 성경: 이는 주께서 진실로 천사들의 본성을 입지 않으시고 아브라함의 씨를 입으셨음이라.
¶·¶ 킹 제임스 영어 성경: For verily he took not on him the nature of angels; but he took on him the seed of Abraham.

예수 그리스도는 성육신 하실 때 어떤 본성을 입으셨는가? 킹 제임스 성경 히브리서 2장 16절은 이 주제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천사의 본성을 입지 않으시고, 우리 인간과 같은 본성, 즉 아브라함과 같은 본성을 취하셨다고 말한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는 성육신 하신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신성을 가지셨다. 그러나 그분의 인성에 대하여 연구할 때, 예수께서 입으셨던 인성은 우리와 다른 인성이 아닌, 똑같은 인성, 아브라함의 인성을 입으셨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이 교리는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교리이다. 왜냐하면, 이 주제를 어떻게 알고 믿고 있느냐에 따라 우리의 신앙 생활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한 가르침은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어렵고 혼돈되는 교리로 인식되고 있으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별로 신경을 기울이지 않는 주제이다. 그러나 이 주제는 그리스도인들이 꼭 알아야 할 중대한 주제인데, 그 이유는 이것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구원론)와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인성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느냐에 따라서 우리가 어떻게 구원받게 되는가에 대한 이해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예수님의 인성은 타락한 우리 인간의 본성과는 다른, 아담이 타락하기 이전의 본성, 곧 천사 같은 본성을 취하셨다고 믿는다면 그 사람은 예수께서 죄를 승리하시고 우리의 모본되는 삶을 사셨던 것처럼, 우리도 그분의 모본을 따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죄를 승리할 수 있다는 성화의 가르침을 거절하게 된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인성은 우리와 다르기 때문에 그분께서는 죄를 승리하실 수 있어도 우리는 죄를 승리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람은 자신이 범하는 죄에 대하여 분명한 핑계거리를 가지게 된다.

그러나 예수님의 인성은 우리와 같은, 즉 아담이 타락한 이후의 본성을 가지고 있다라고 믿는 사람은 예수께서 죄에 대하여 승리하셨으므로 우리도 승리할 수 있다는 성화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게 되고, 또한 그러한 가르침에 일치하는 생애, 곧 죄를 승리하는 생애를 살기 위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며 최선을 다하게 된다. 이러한 사람에게는 죄에 대한 어떠한 핑계도 있을 수 없다.

2. 우리와 같은 본성을 취하심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인성을 입으실 때, 우리의 죄된 타락한 본성을 취하셨다. 그렇지 않으시다면 주께서는 당신의 형제들과 같이 되신 것이 아니요, 우리와 한결같이 모든 면에서 시험을 받지 않으신 분이라면 또한 우리가 이겨야 하는 것처럼 승리하시지 않으신 분이라면 그분은 인간에게 필요한 완전하고 온전한 구세주이실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죄의 본성이 없이 어머니를 통하여 무염시태(죄의 본성이 없는 상태)로 나셨기 때문에 죄로 기울어지는 아무런 경향을 타고 태어나지 않으셨다고 말하는 것은 주님을 타락한 세상으로부터 제거하는 일이요, 우리가 꼭 필요한 바로 그 지점으로부터 주님을 없애는 일이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인성면에 있어서는, 모든 아담의 자손들과 똑같이 죄의 본성을 타고서 태어나셨다. (죄의 본성이란 궁극적으로 연약성을 말하기 때문에 죄의 본성 자체가 죄가 아니라는 것을 주지하기 바람-필자 주). 그러나 그의 신성의 면에서는 그분께서 잉태되실 때부터 성령에 의하여 잉태되시고 출생하신 것이다. 이러한 모든 일들은 인간을 유리한 입장에 놓으시기 위하여 행하신 것이요, 그와 똑같은 방법으로 성령으로 다시 거듭태어난 모든 사람들도, 주님께서 자신의 죄된 육체 가운데서 승리하신 것과 같이 승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하여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각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승리하신 것 같이 승리해야 하는 것이다(계 3:21). 이러한 거듭남이 없이는 유혹에 대한 승리가 있을 수 없고 죄로부터 구원이 없는 것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께서 우리와 같은 죄된 본성을 타고 나셨다고 하면 의아하게 생각한다. 사실 죄된 본성이란 단어가 듣기에는 좀 거북스럽고 우리 주님과는 어울릴 수 없는 단어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그 말의 뜻은 실제로 우리가 조상들로부터 유전법칙을 통하여 타고나는 육신적, 정신적, 도덕적 연약성들을 말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한 번도 죄를 지어 본 일이 없으셨다.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히 4:15).

주님께서는 태어나실 때부터 거듭나신 분으로 태어나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에게 모본이 되시는 것이지 거듭난 경험이 없는 모든 사람들의 표준은 아닌 것이다. 왜냐하면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은 하려고 해도 도저히 이룰 수 없는 타락한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의 원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같은, 아브라함의 본성을 입으셨다고 말하고 있다. 인간의 본성을 입으시고 신성을 가지셨던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구세주로 오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도 성령의 은혜로 거듭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갈 때,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모본으로 보여주시기 위하여 오셨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리하신 것처럼 승리할 수 있다.

2). 로마서 8장 1절 비교 연구

¶·¶ 개역 한글 성경: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 킹 제임스 한글 성경: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그들은 육신을 따라 행하지 아니하고 성령을 따라 행하느니라.
¶·¶ 킹 제임스 영어 성경: There is therefore now no condemnation to them which are in Christ Jesus, who walk not after the flesh, but after the Spirit.

원문의 뜻이 그대로 담긴 킹 제임스 성경과 다르게 번역된 성경 구절의 또 다른 예는 로마서 8장 1절이다. 이 성경절은 성경이 가르쳐주는 구원의 교리 중에 매우 중요한 부분을 담당하고 있는 구절인데, 번역의 과정에서 그 전체적인 의미가 변조되고 빠져 버렸다. 이 성경절은 우리의 구원이 칭의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성화가 반드시 수반되어야 구원을 받는 것에 대해 시사하고 있다. 함께 연구하여 보자.

보통 한글 성경은 로마서 8장 1절을,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라고 번역하므로, 단순히 누구든지 예수 안에 있기만 하면, 예수를 믿는다고 말만 하면, 곧 예수를 믿는다고 시인만 하면, 정죄함이 없고 구원을 얻게된다고 은연 중에 사람들이 믿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성경절을 이용하며 말하기를, 예수 안에 있기만 하면 정죄가 없고 구원을 받는다라고 한다. 그러나 킹 제임스 성경이 말하고 있는 이 구절의 뜻은 그것과는 다르다.

킹 제임스 성경의 원래의 뜻을 연구해 보면 이렇다. 즉, 그 원어를 그대로 직역해 보면 이런 뜻이 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여기에 나오는 정죄함을 받지 않는 자는 누구인가? 어떤 자들인가? 그들은 예수 안에 있다고, 예수를 그냥 믿는다고 말만 하는 자들이 아니다. 원어를 보면, 그들은 육신을 따라 걷지 않고 성령을 따라 걷는 사람들 (영어; who walk not after the flesh, but after the Spirit)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육신을 따라 행하지 않고 성령을 따라 행하는 사람들만이 정죄함을 받지 않고, 그 다음 8장2절에 나오는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라는 선고를 받게 되는 것이다.

이 뜻을 가만히 살펴보면, 정죄함을 받지 않고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함을 받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육신을 부인하고 매 순간 성령을 따라 행하며 사는 사람, 즉 성령을 따라 사는 생애가 진행형으로 계속 이어지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킹 제임스 성경이 아닌 보통 성경에는 완전하지 않은 번역과 후반부 구절의 내용의 탈락으로 인해 이 성경구절이 뜻하는 중요한 교리가 온전하지 않게 되어버렸고, 그렇게 변조된 채로 그 구절이 실려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A.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기독교인들은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생각하며 예수를 믿고 있다. 또한 그리스도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예수 안에 있고, 입으로 주를 시인했기 때문에 벌써 구원을 받았으니 그 구원을 그냥 즐기기만 하면 된다고 말하고 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보통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 행함은 율법주의이다. 믿음만이 구원을 위한 필수 요건이다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정말 이러한 말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증명될 수 있는 진리인가?

믿음에 대한 오해가 많은 사람들에게 퍼져나가고 있다. 우리는 그냥 막연한 믿음이 아닌 우리 자신의 영혼을 구원할 수 있는 믿음을 소유해야 한다.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라는 가르침 속에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세속적이고 이기적인 생활 속에서 편히 안주하게 만드는 위험이 포함되어 있다. 교회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동의하기만 하면 자신에게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는, 그리고 그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이 있다.

B. 그리스도 예수 안에 거한다는 것
그리스도인의 신앙 속에는 믿음과 행함이 반드시 균형지게 이루어져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 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많은 것을 요구하며 포함한다. 예수 안에 있다는 뜻에 대해 잘 설명된 성경절은 예수께서 요한복음 15장 4,5절에 하신 말씀이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예수 안에 거한다는 것은, 육신의 죄된 자아가 완전히 죽고 새롭게 거듭나며 포도나무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접붙혀져서 온전히 예수님의 뜻대로만 사는 것을 말한다. 그렇게 될 때, 그 사람은 마치 사도 바울이 간증한 것처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고 말할 수 있게 되며, 그 사람의 생애와 성품에는 성령의 열매가 풍성하게 열리게 되는 것이다.

성경은 또 이 문제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사실 하늘 아버지의 뜻(성경 말씀)과 그것에 대한 순종(행함)에 대한 설명 없이, 믿으라, 믿으라,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라고 외치는 것은 매우 위험천만한 가르침이다. 그것은 그저 반쪽 믿음일 뿐이다.

C. 성화; 성령을 따라 지속적으로 행하는 것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속죄와 용서를 믿으며 이렇게 말한다. 십자가에서 구원이 다 이루어졌으니 믿기만 하면 된다! 나는 구원을 받았다! 그러나 이것은 복음을 반쪽만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믿음으로 받은 칭의를 계속 유지해야 할 것을 말해주고 있다. 이것을 우리는 신학적인 용어로 성화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난 후, 계속 성령을 따라 걷고 행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회개와 믿음을 통하여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들이고 회개할 때, 주님은 죄를 용서하시며 우리를 의롭다 칭하시고 율법을 범함으로 받게된 형벌을 되돌리신다. 그리하여 죄인은 하나님 앞에 의로운 사람으로 서게 된다. 이것을 칭의 - 의롭다고 칭해주시는 것 - 라고 한다. 그러나 그것이 다가 아니다.그 후에 성취되어야 할 중요한 일이 남아 있는데, 그 일은 영혼이 진리를 통하여 성화되어야 하는 일이며, 그것이 로마서 8장 1절의 원어가 말하는, 예수 안에 매 순간 거하여 있고, 또 성령을 따라 매일 매 순간 행하며 사는 것이다.

회개하여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은 그분과 같이 되어야 한다. 또한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믿는 믿음으로, 그리고 매일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가운데 거룩한 율법의 원칙과 일치하는 품성과 생애를 가져야 한다.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성화(거룩함)이다. 성경은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았을 때에 성화의 역사가 시작된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칭의는 변화를 요구한다. 하나님의 은혜와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 완전한 회개의 경험을 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받아들여 그와 함께 새로운 삶을 시작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고 있다는 증거가 그 생애에서 나타나야 한다. 그러므로 성화를 쉽게 풀어 말하자면 예수님과 함께 살기 때문에 삶 속에 성령의 열매가 풍성히 나타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성화는 매우 중요하다. 그 이유는 성화된 사람만이 하늘에서 하나님과 조화되어 살 수 있기 때분이다. 진정으로 회개한 사람은 죄를 싫어하고 미워하게 되며, 과거의 어두움 가운데서 살던 생활이 너무 싫기 때문에 다시는 과거의 생활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진다. 그리고 새롭게 주님과 시작한 생활이 너무 좋고, 또 순결하고 거룩한 삶을 너무나 사랑하게 되므로 다시는 죄된 생애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진다. 그런 사람은 매일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게 되며 혹시 연약하여 쓰러졌을지라도 다시 하나님과 화목한 생애를 이어가게 된다. 거룩한 하나님과 함께 하늘에서 살 사람은 거룩하게 성화된 사람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로마서 8장 1절에 나타난 예수 안에 있는 경험, 매일 성령을 따라 걷고 행하는 사람만이 정죄함이 없는 구원에 이르며,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어 생명의 성령의 법 속에서 기쁘게 살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성경 구절을 올바르게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3). 요한 계시록 22장 14절 비교 연구

¶·¶ 개역 한글 성경 :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 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
¶·¶ 킹 제임스 한글 성경 : 그의 계명을 행하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이는 그들이 생명 나무에 대한 권리를 가지며 또 문들을 통하여 도성 안으로 들어가게 하려 함이니라.
¶·¶ 킹 제임스 영어 성경 : Blessed are they that do his commandments, that they may have right to the tree of life, and may enter in through the gates into the city.

보통 성경과 킹 제임스 성경의 확연히 다르게 번역된 부분 중에 하나인 이 성경 구절은 성경에 나오는 아주 중요한 교리를 별로 중요하지 않게 만들고 있으므로 이 원어의 뜻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계시록 22장은 새 하늘에 대한 묘사가 기록되어 있는 장이다. 여기에 보면, 마지막 이 지구의 선악의 대쟁투가 끝나고 새 하늘에 들어갈 사람들의 자격을 말하고 있는데, 그 사람들은 킹 제임스 성경을 보면, 계명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변조된 성경에는 이 그의 계명을 행하는 자들이란 말 대신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이라고 번역되어 있다. 이 원래의 구절의 뜻과 변조된 구절의 의미는 완전히 다른 것을 알 수 있으며, 그 뜻의 차이는 매우 크고, 원래의 뜻이 완전히 사라진 것을 알 수 있다.

새 하늘에 들어갈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성경의 원문은 분명히 우리에게 하늘 나라에 들어갈 사람들의 자격에 대하여 이렇게 말해주고 있다. 그의 계명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계명을 행하는 자, 즉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만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 그만큼 계명을 지키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그러므로 계시록의 마지막 장, 제일 중요한 마지막 시점에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계명을 지키는 것에 대하여 우리에게 언급해 주신 것이다.


A. 계명은 십자가에서 폐했는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요한복음 3장 16절을 읽으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 계명은 십자가에서 폐했다라고... 정말 십자가에서 계명이 폐했을까? 그렇다면 왜 계시록 마지막 부분에, 예수님의 십자가 이후의 기록인데도 불구하고 계명을 행하는, 계명을 지키는 일에 대하여 언급되어 있는것일까?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에서 계명이 폐했다고 주장한다. 그들의 주장하는 바와 같이 만일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계명을 폐하신 것이라면 무엇 때문에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필요가 있었겠는가? 계명을 그렇게 쉽게 폐해버리실 수 있으셨다면 그렇게 폐해버리시고 그냥 슬쩍 눈감아서 죄인을 구원하시지 예수께서 무엇 때문에 율법을 범한 인류들의 죄를 대신하여 그 고통을 당하시며 죄 값을 치루실 필요가 있었겠는가 말이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계명이 있기 때문에 죄가 성립되는 것이고, 죄에 대하여서 하나님의 율법은 사망을 선고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인간들의 죄 값을 대신 지불하셨다는 사실 자체가 하나님께서 당신의 계명을 폐하시는 것이 아니라 존중하시고 높이신다는 사실을 드러낸 것이다. 쉽게 계명을 폐하여 버리실 수 있는 일이었다면 예수께서 무엇 때문에 그렇게 고통스러운 죽음을 통하여서 인간들의 죄를 용서하셔야만 했겠는가 다시 한번 생각해 보라.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에서 하나님께서 율법을 폐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완전케 세우신 사실을 알 수 있게 된다.

예수께서는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 3:36)고 하셨다. 이 말씀은 믿음과 행함에 대한 균형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음으로써 영생을 얻지만, 그분의 말씀을 순종(행함)하지 않을 때,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된다는 말씀이 오해할 수 없게 설명되어 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도 바울의 지적을 경시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 앞에서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롬 2:12,13). 사도 바울은 명확하게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구원을)을 얻는다고 말하고 있다.


B. 계명과 구원
구원은 믿음으로만 얻게 되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그런데 구원이 믿음으로만 이루어진다면 계명은 필요 없는 것이 아닌가? 아니다. 율법이 없이는 구원을 논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율법의 정죄 때문에 구원의 필요성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러면 왜 성경 어떤 곳에서는 마치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율법을 폐하시고 우리가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 것처럼 표현하고 있는 것일까? 이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Æ 율법의 목적
바울의 신학의 정수인 갈라디아서는 믿음으로 얻는 구원에 대해 아주 간단명료하게 설명하고 있다. 다음은 바울의 일문일답이다.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갈3:19 상단).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이유가 무엇이냐고 질문한다. 그리고 이에 대한 바울의 대답은 우리가 율법을 범하고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죄를 짓지 않았다면 율법을 주실 필요가 없었다. 다음의 성경절을 보자. 중보는 한편만 위한 자가 아니나 오직 하나님은 하나이시니라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을 거스리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갈3:20, 21). 여기서 바울은 참 흥미로운 말을 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율법을 주신 이유는 율법을 지킴으로서 구원받으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죽이려고 율법을 주셨다는 것이다. 이것이 도대체 무슨 뜻일까?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갈3:24).

Æ 율법은 몽학선생
몽학선생은 학생을 도와주는 가정 교사이다. 몽학선생의 할 일은 학생들이 학교 선생님에게 가기까지 도와주는 것이다. 우리를 예수께로 인도하는 것이 율법이 가지고 있는 가장 중요한 기능이요 목적이다. 그러므로 율법은 우리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 깨우침을 줄 뿐이지 우리를 구원해 줄 수는 없다. 만일 우리가 율법으로 구원받을 수 있었다면 예수께서 돌아가실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율법의 직분은 죽게 하는 것이다. 율법은 죄를 심히 죄되게 하기 위하여 주신 것이다.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되게 하려 함이니라 (롬7:13).

그러므로 바울은 율법을 지켜서 구원얻을 자가 아무도 없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이 율법주의에 빠져서 방황하다가 그 반대의 극단에 빠져들어가고 있다. 그들은 마음에 이기심과 욕심을 가득 가진 채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하다가 안 되자, 결국에는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정반대의 극단적 가르침을 붙잡게 되었는데, 그것이 무조건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가르침이다. 그들은 무조건 예수님만 믿자는 식으로 신앙 생활을 하는데, 이것이야말로 율법주의자들의 종말이다. 율법을 지켜서 구원받으려고 노력하다가 안 되니까 포기하고 그와 반대의 극단으로 뛰어들게 되는 것이다.


C. 구원하는 믿음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율법을 지킬 수 있단 말인가? 우리에게는 순종할 힘이 없는데 어떻게 행함이 따르는 참된 믿음을 가질 수 있다는 걸까? 그러면 여기서 성경이 말하고 있는 참된 믿음에 대해서 알아 보자. 믿음, 곧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께서 나의 구원을 위해 이미 이루어 놓으신 역사를 믿는다는 뜻이다. 로마서 1장 16절에 보면 이런 믿음에 관하여 말씀한 아주 중요한 구절이 하나 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이 성경절에 나오는 능력이라는 단어는 다이너마이트 라는 뜻인데, 헬라어의 두나미스에서 유래된 말이다.

그런데 이 능력이라는 단어는 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묘사하기 위하여 성경에서 자주 사용하는 수식어 중의 하나이다. 바울은 복음을 소개하며 말하기를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두나미스)이라고 했다. 만약에 바울의 말이 사실이라면, 복음을 믿고 소유한 그리스도인은 놀라운 능력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한다. 즉, 율법을 행할 능력을 충만히 갖춘 사람들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말로만 입으로만 믿는다고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말과 행실까지 믿음과 완전히 일치되는 사람들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오늘날 기독계 안에 있는 가장 큰 문제는 복음을 잘못 이해하는 데에서 기인한다. 사람들은 복음 속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너무도 자주 넘어지게 되며, 자신들의 연약한 믿음으로 해낼 수 없기 때문에 성경에 있는 진리들을 반쪽만 언급하며 그냥 믿기만 하라고 외치고 있다. 믿음에는 그에 맞는 행함, 곧 계명을 지키는 일이 수반되어야 한다.

D. 강권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
성경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하나님께서 무엇을 주시겠다고 약속하고 있는가?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고 받아들이는 순간,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에 임하셔서 율법의 요구를 이루는 순종의 열매를 우리의 삶 속에서 생산해 내신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았다는 사람이 믿음이 없고, 믿음을 가진 사람이 성령이 없다면 그것은 거짓말이고 어딘가 잘못된 믿음이다. 그래서 우리는 믿을 때 우리 속에 성령(그리스도의 영)이 계신지 확인해 봐야 한다. 그래서 바울은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로마서 8장 9절에서 말하고 있다.

우리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역사하신다면, 곧 성령께서 우리 마음속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부어주신다면, 우리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계명이 쓰여지게 된다. 그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거듭나므로 악한 것을 싫어하게 되고, 남을 용서하고 사랑하게 되며, 하나님의 사랑과 성품의 사본인 하나님이 계명을 지키지 말라고 해도 지키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 된다. 즉, 하나님의 마음을 새롭게 받음으로 그 생애에서 하나님의 계명이 저절로 지켜지는 생활을 살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살 수 있도록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매일 우리를 강권하고 계신다.

이렇게 하나님의 계명이 마음에 쓰여진, 새겨진 사람, 그리하여 생애에 자연히 하나님의 성품인 계명을 지키는 생애가 이루어지는 사람, 그런 사람이 바로 거듭난 사람이며, 하나님의 계명을 행하는 자들이며, 그 사람들만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자격을 갖추게 되는 것이다.


4). 베드로 전서 3장 19절 비교 연구

¶·¶ 개역 한글 성경 :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 킹 제임스 한글 성경 : 그가 성령으로 감옥에 있는 영들에게도 가서 전파하셨으니
¶·¶ 킹 제임스 영어 성경 : By which also he went and preached unto the spirits in prison

벧전 3:18~20: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한글 성경에 번역된 이 말씀을 언뜻 잘못 읽으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직후에 영으로 연옥이나 지옥 어디에 내려가셔서 노아 당시에 구원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고통당하는 사람들의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셨다는 것으로 오해하기 쉽다. 그리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성경절을 그렇게 믿고 있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연옥 같은 곳이 정말 있어서 죽은 후에도 구원을 받을 수 있는 두 번째 기회가 있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두 번째 구원의 기회가 있다는 가르침은 없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히 9:27) 라는 말씀을 비롯하여 죽는 순간에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도 끝난다는 말씀이 여러 곳에 나와 있다(마 16:27 ; 롬 2:6 ; 겔 18:24 ; 계 22:12). 두 번째 구원의 기회가 있다는 사상은 죽음 이후에는 일체의 의식이 없다는 성경의 일관된 가르침과도 크게 상반된다. 만약 두 번째 기회가 주어진다면, 왜 하필이면 노아 홍수 당시에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게만 그런 특권이 주어져야 하는가?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이 말씀의 참된 의미는 무엇인가? 이 말씀을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누어서 분석해 보자;

전반부; 육으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이 말씀의 뜻을 자칫 오해하여, 예수께서 죽으셨을 때에 육체는 죽었지만, 영혼은 육체에서 분리되어 살아난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 말씀의 의미는, 예수께서 이 땅에서 지니셨던 연약한 인간의 속성은 십자가에서 죽었지만, 성령을 통하여 부활하심으로써 원래에 하나님으로서 지니셨던 영적인 속성이 회복되었다는 사실을 뜻한다. 그러므로 한국어 성경에는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라고 잘못 번역된 말이, 영어 성경에는 made alive by the Spirit(성령으로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라고 되어 있다. 즉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성령을 통하여 부활하여 영원한 생명을 받으셨고, 성령으로 그들을 가르치셨다는 뜻이다.

이 아들로 말하자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롬 1:3~4.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부활하셨던 그리스도께 일어난 이러한 변화는 그리스도뿐만 아니라 그분과 같이 고난에 동참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그대로 일어나는데, 성경은 그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롬 8:10,11.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시면, 비록 육체는 죽을지라도 성도들에게는 부활이 보장되며 영원한 생명이 약속된다. 바로 이것이 육으로는 죽임을 당하나 영으로는 살림을 받는다는 말의 의미이다.


후반부 :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옥에 있는 영들은 누구이며, 옥은 어디를 말하는가? 여기에 나오는 옥은 감시를 통하여 행동을 속박받는 뜻의 감옥(phulake)을 뜻한다. 또한 영들의 헬라어 원어는 프뉴마 로서 생명 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옥에 있는 영 들이란 옥에 갇힌 사람들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옥은 어디를 말하는가?  그것은 지옥을 의미하는 말씀이 아니라, 영적으로 어두운 이 세상을 뜻한다. 이사야 선지자도 옥을 어두운 세상이라는 의미로 사용하였다. 네가 소경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처한 자를 간에서 나오게 하리라.사 42:7. 또한 시편에서는 옥을 영적인 어두움을 묘사하는 표현 방법으로 사용하였다. 내 영혼을 옥에서 끌어내사 주의 이름을 감사케 하소서.시 142:7. 예수께서 침례를 받으신 후에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으시고, 옥에 갇힌 사람들, 즉 흑암에 앉은 백성과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복음을 전하셨듯이(마 4:15,16), 노아 홍수 당시에도 예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죄에 속박되어 영적인 암흑에 갇힌 옥에 있는 영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셨다. 이것이 이 성경 구절의 올바른 뜻이다.

옥에 있는 영들이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계속해서 이어지는 성경절에서도 분명하게 밝혀 진다. 그들(옥에 있는 영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 이다(벧전 3:20). 여기에 옥에 있는 영들의 모습이 나오는데, 성경은 그들의 정체를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예수께서 노아 홍수 당시에 멸망을 당해서 지옥에 간 혼백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셨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께서 성령을 통하여 노아 홍수 당시에도 영적인 어두움 속에서 불순종하던 사람들에게도 복음을 전파하셨다는 사실을 뜻한다.


5). 베드로 후서 2:9 에 대한 번역의 문제점

¶·¶ 개역 한글 성경: 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시고 불의한 자는 형벌 아래 두어 심판 날까지 지키시며.
¶·¶ 킹 제임스 한글 성경: 주께서는 경건한 자들을 시험에서 구해 내시고 불의한 자들을 형벌에 처할 심판의 날까지 가두실 것을 아시느니라.
¶·¶ 킹 제임스 영어 성경: The Lord knoweth how to deliver the godly out of temptations, and to reserve the unjust unto the day of judgment to be punished:

번역된 본문의 차이를 읽기만 해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잘못된 한글 성경은 악인들이 마치 심판 날이 오기까지 어떤 형벌을 받는 장소에 가서 계속 불타고 있으며, 미리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게 만든다. 그러나 그러한 번역은 로마교회의 오류의 잔재로서 연옥과 잘못된 지옥설에 대한 오해 때문에 기인된 것이다. 모든 악인들도 죽어서, 나중 예수께서 오셔서 마지막 집행 심판을 행하실 때까지 무덤 속에서 아무 것도 모른 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후에 형벌에 처하게 될 그 심판 날까지 무덤 속에 가두어져 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지, 지금 현재 형벌 속에서 고통 하면서 심판 날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씀한 것이 아니다.

È 마치면서

지금까지 연구한것들 외에도 원문과 다르게 번역되어 뜻이 바뀐 여러가지 성경 구절들이 더 있으며, 아주 빼 버려 없음이라고 표기되어 있는 것들도 많다. 지면상 그런 것들을 다 밝힐 수는 없고, 또 성경에서 어떻게 이런 중요한 성경의 교리들이 바뀌게 되었는지 그 경위를 다 따질 수는 없지만, 성경의 원문과 성경에 쓰여진 진리를 바로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른 성경을 보존해 주시고, 그 진리를 밝히 보여 주시는 것을 감사하며, 그 진리대로 성화되어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독자들이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