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편지: 거기 그렇게 있어야 했던 것들

영적으로 눈을 떠서 보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모든 것이 제자리에서 빛을 내고 있는 아름다운 세상인 것을 알게 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있으라고 한 그 자리에서 자기의 몫을 다 하는&&.

한 해가 지나 또 다른 해가 시작되고, 계절이 지나 또 다른 계절이 시작되고, 우리의 삶이 닥치는 수많은 시련과 눈물과 고통 속에서 뒤틀려 엉켜있는 것처럼 보여도, 문득 시간이 지나 뒤를 돌아보면 우리의 인생에는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룬 조화롭고 아름다운 삶만이 가득했던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지요. 좋으신 하나님께서는 어떤 일도, 어느 사건도 우연히 우리 생애에 일어나게 하시는 법이 없으십니다. 꼭 그 일을 통해서만이, 꼭 그 사건을 통해서만이, 꼭 그 사람을 통해서만이 배워야 할 교훈과 깨달아야 할 지혜와 이루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에, 그 일이, 그 사건이 우리 주위에 일어나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람이 우리 곁에 있는 것입니다.

무한한 우주를 한 번의 궤도의 벗어남 없이 운행하시는, 한 치의 오차도 없으신 정확하신 하나님은 한 번도 우리 생애에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이 일어나도록 허락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자신을 바친 사람들에게 우연히 일어나는 일이란 없답니다. 그렇게 생각해 보면 우리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하나님의 섭리의 사건들은 얼마나 감사하고 값진 선물들인지요! 어느 일 하나 원망할 것도, 어느 한 사람 미워할 것도 없는, 얼마나 아름답고 조화로운 세상인지요!
      
재미있는 우화를 하나 들려드리지요.

한 농부가 있었답니다. 흉년이 들자 이 농부는 이렇게 투덜거렸습니다. 하나님이 날씨를 조절할 수 있는 힘을 내게 주었더라면 농사가 정말 잘 되었을 텐데&&. 그러자 하나님이 농부에게 말하셨습니다. 앞으로 1년 동안 날씨를 조절할 수 있는 권한을 그대에게 주겠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하라.

농부는 뛸 듯이 기뻤습니다. 농사를 지을 때, 농부가 햇볕이 나면 좋겠다라고 말하자마자 해가 나왔고, 비가 내렸으면 좋겠다라고 말하면 비가 쏟아졌습니다. 일 년 내내 원할 때마다 햇볕이 나고 비가 내렸습니다. 씨앗이 무럭무럭 자라 농작물은 더없이 푸르고 크고 풍요해졌고, 드디어 수확의 때가 되어 농부는 신이 나서 낫을 들고 곡식을 수확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농부는 크게 낙담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 이유는 속이 들어찬 낟알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날씨를 다 조절할 수 있게 해주었는데, 올 해의 수확은 어떤가?라고 하나님이 물으시자, 농부는 울 것 같은 한 표정으로 비를 원하면 비가 내리고 햇볕을 원하면 해가 나왔는데도 농사는 엉망이 되고 말았어요. 이유가 뭐죠?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답니다. 그대는 작물의 뿌리를 튼튼하게 만들고 공기를 정화시키는 바람이나 폭풍우, 눈 같은 것을 부르지 않았다. 그대는 오직 비와 햇볕만을 원했을 뿐, 작물을 알차게 만드는 궂은 날씨는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작물에 알이 들지 않은 것이지!
      
시련과 고통은 우리의 연단을 위해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고마운 일꾼들입니다. 우리 인생에 닥치는 폭풍우와 바람이 있기 때문에 우리의 설익은 품성이 하나님의 아름다운 품성으로 꼴 지워지는 것입니다. 시련과 고난이 없이는 우리는 속이 꽉 찬 사람이 되지 못합니다. 비바람 궂은 날씨를 견딘 작물이 알이 잘 영근 곡식이 되듯이, 알갱이 없는 빈속을 가진 쭉정이 같은 연약한 사람이 되지 않으려면, 우리는 연단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십니다(예레미야 애가 3:33). 그분께서 시련과 환난을 허락하시는 것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하시(히 12:10)기 위함입니다.

감당하기 너무 어렵고 가혹하게 보이는 시련이라도 일단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축복임이 판명되고, 행복과 즐거움을 앗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혹독한 재난이 오히려 우리의 눈을 하늘로 향하게 하는 수단이 됩니다. 왜냐하면, 고난 속에서 겸손하게 굴복하는 일이 없었다면, 슬픔을 당하여 예수님 안에서 위로를 구하는 일이 없었더라면, 결코 하나님을 참되게 알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고난은 우리 성품에서 불순물과 거친 것을 제거해 내는 하나님의 유용한 도구들입니다. 이들에 의해 채석되어 깎이고, 끌로 새기어지고, 갈리고 다듬어지는 것은 고통스런 과정이지요. 또, 돌아가는 회전 연마기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도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그 속에 들어가 곱게 갈려진 돌은 하늘 성전의 제자리를 채우는데 부족함이 없는 아름다운 돌로 준비되어 나옵니다. 쓸모없는 물건을 위해서는 주님께서 그처럼 신중하고 철저한 작업을 하지 않으신답니다. 오직 그분의 보석이 될 사람만이 궁전의 식양대로 다듬어지지요.
      
날지 못하는 새에 대하여 들어 보신 적이 있나요? 뉴질랜드에는 키위라는 새가 있는데, 그 새는 깃털만 있을 뿐 날개가 없어 날 수가 없답니다. 그런데 조류학자들이 연구해 본 결과, 이 키위 새는 천적이 없고, 너무 쉽게 먹이를 구할 수 있는 안일한 환경 덕분에 날아다닐 필요가 없어져 날개가 퇴화되어 날 수 없게 되었다고 합니다. 또 남태평양의 카구라는 작고 예쁜 새가 있는데, 이 새도 날지 못한다고 하네요. 이 새 역시 천적이 없는 안일한 생활과 먹이를 구하려고 애써 날지 않아도 먹이를 구할 수 있는 환경 때문에 사용하지 않은 날개가 퇴화되어 날지 못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영적인 비상을 원하십니까? 하늘까지 다다르는 비행을 하기 원하십니까? 독수리처럼 힘 센 날개를 갖고 싶으십니까? 어떤 시련의 폭풍우 속에서도, 고통의 비바람 속에서도 흔들려 떨어지지 않고, 힘차게 그리고 유유히 구름 위로 날아오르게 만드는 날개를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시련은 우리로 힘센 날개를 갖게 합니다. 시험을 이긴 사람만이, 시험을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음으로 믿고 그 믿음을 활용하는 사람만이 영적인 튼튼한 근육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그 날개와 근육들은 우리를 더 높은 영적인 차원을 향해 가도록, 한 계단 더 성숙한 사람이 되도록 도와줍니다.
      
낙심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감사하십시오. 우리를 그렇게 괴롭게 했던 그 사람들은, 그 사건들은, 그 환경들은, 우리의 연단을 위해, 우리의 영적인 성숙을 위해, 거기 그렇게 있어야 했던 것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그리고 그렇게 하라고 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그들의 몫을 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사람을 통해서, 그 사건을 통해서, 그 환경과 상황들을 겪으면서 변해갔습니다. 때때로 우리 개개인들을 너무 잘 아시는 하나님의 지혜에 전율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그렇게 잘 아실까요? 어떻게 그 과정을 겪어야만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을 온전하게 반사하는, 온전히 굴복한 겸손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그렇게 잘 아셨을까요?

살다가 뒤돌아보면, 우리는 문득 알게 됩니다. 모든 것들은 거기 그렇게 있어야 했던 것들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우리에게 일어났던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담뿍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생애의 빛에서


강병국 목사

목사는 영어로 Pastor입니다. Pastor라는 단어는 원래 양을 치는 목자(Shepherd)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흔히들 목양자라고도 부르지요.

목사는 양들을 돌보며 인도하는 자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예수님을 목자장 이라고 언급한 곳도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0장에서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군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고 말씀하신 부분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선하신 목자 즉, 좋은 목자라고 했습니다. 선한 목자께서 선한 목자들을 훈련해 내고 계시는 것이지요. 그래서 주님은 목자들의 대장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삯군들이 존재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목자장 되신 예수님의 모본을 따라 양들을 치지 아니하면 삯군이 되는 것입니다. 위험이나 유혹을 당할 때에 자기 자신의 유익이나 안전을 위하여 양들을 버리고 도망하기 때문에 양들이 이리들에게 노출되어 해를 입고 죽게 만든다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참된 진리를 가르치지 아니하는 자들은 양을 헤치기 위하여 다른 문으로 들어오는 도둑이 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내 양을 먹이라!고 하셨지, 내 양을 먹으라! 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그의 책 3장 15절에 다음과 같은 말씀을 기록하였습니다. 내가 또 내 마음에 합하는 목자를 너희에게 주리니 그들이 지식과 명철로 너희를 양육하리라.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목자가 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는 것이 참된 목자의 일을 하는 것입니까? 양들을 멸하거나 흩어 버리지 아니하는 목자. 충분한 영적 꼴을 먹여 하나님을 보여 주어서 그분께로 양들이 갈 수 있도록 인도해 주는 목자. 어떻게 해야 그러한 목자가 될 수 있을까요?

다윗은 하나님을 왕 또는 장군, 혹은 창조주라고 부를 수 있었지만, 구태여 주는 나의 목자시니라고 불렀습니다. 양을 치는 목동이었던 다윗은 자상하고 사랑스러운 목자의 심정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늘의 하나님이 자기에게 목자 같은 분이 되어 주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이번 호는 목회하시는 교역자님들을 위하여 편집하였습니다. 평신도들의 눈도 함께 열어 주는 글들을 발견하실 것입니다.

가정과 영성: 교회를 떠나야 할 때입니까? - 제2부

* 이 글은 지난호(106호)의 가정과 영성 기사로부터 이어지는 글입니다.

먼저 이 글은 교인들로 하여금 교회와 목회자들에게서 등을 돌리게 하려고 준비된 글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드립니다. 이 글은 자신이 걷던 길을 잠깐 멈추고 서서 신앙과 진리에 대해 생각해 볼 기회를 주기 위해 마련된 글입니다. 세상과 교회가 너무나 가까워진 모습을 보면서 이 글을 준비하였는데, 이 글이 독자들에게 깊은 명상의 계기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생애의 빛 편집실-

내가 그리스도인이 된 것은 교회나 목사가 나를 그리스도인이라고 인정해 주어서 된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와 성직자가 나에게 죄를 강요한다면 나는 교회와 성직자를 떠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내가 교회를 떠나고 성직자의 인정을 받지 못하면 고독하고 외로울 것입니다. 교회를 떠나면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 내 육체의 욕망이 채워지지 않기 때문에 몹시 괴로울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에서 일어나는 온갖 불의를 보면서 교회의 한 자리를 지키고 있느니 차라리 자유와 평안을 찾아서 교회를 떠나겠습니다.

주일마다 교회에 모여서 형제자매들과 교제를 나누는 것은 즐거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 즐거움보다 영혼의 맑음이 더 귀중하기에 어려운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만일 주일마다 교회에서 잘못된 가르침이 흘러나오고 세속적 설교와 사람의 마음을 흥분시키는 예배와 음악에 참여해야만 한다면 나는 교회를 떠날 것입니다. 만일 교회가 나에게 하나님의 의를 가르치기 보다는 도리어 적당한 타협과 배도를 가르친다면 나는 단연코 교회의 출입을 그만두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교회는 영혼을 죄에서 구원하는 곳이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내가 완전하기 때문에 교회를 떠날 것을 고민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 역시 하나님 앞에 설 때마다 언제나 죄인 중의 죄인이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나는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로 온 몸을 씻습니다. 죄를 치료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치유를 날마다 구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내 자신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내가 현대 기독교회를 싫어하는 이유는 교회 안에 죄인들을 죄로부터 구원하는 힘이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교회가 마땅히 가지고 있어야 할 기능과 목적을 거의 상실해 버렸습니다. 교회는 성도들의 사교장이 되었고 단순한 자선 단체가 되었으며 부도덕함이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교회는 더 이상 영혼을 죄로부터 구원하는 장소가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나는 두려움을 느낍니다. 심령 속에 더러운 죄들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각종 은사와 방언에 매달리는 모습을 보면서 두려움을 느낍니다. 진리를 올바로 알지 못하는 맹목적인 교인들과, 아첨과 인간적인 수단으로 자신의 위치를 지키고자 하는 집사와 장로들을 보면서 두려움을 느낍니다. 무지한 양들을 적당하게 이용하여 자신의 힘과 권한을 더욱 크고 높게 구축해 가는 거짓 목자들을 보면서 두려움을 느끼게 됩니다.

오늘날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에 너무나 익숙해 있습니다. 너무나 익숙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것이 은혜인지도 모르고 받아가고 있습니다. 은혜를 입고도 감사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 이상의 것들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죄와 세속에 파묻혀 살고 있으면서도 나는 구원받았다고 주장하는 대담한 그리스도인들로 교회는 가득 채워졌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죄인을 죄와 세속으로부터 넉넉히 구원할 수 있다는 진리는 거의 사라졌습니다.

교회 안에서조차 원칙과 의를 주장하기 매우 어려운 상황이 되었습니다. 원칙과 의를 주장하면 교회는 그 사람을 율법주의자나 낡은 보수주의자로 매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서 원칙과 의를 주장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받아들여질 것을 기대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단지 그것이 주께서 주신 의의 원칙이기 때문에 그렇게 해야 합니다. 진리와 의는 최후에 승리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승리하는 방법은 세상 사람의 기대와는 다릅니다. 그것은 패배함으로 승리하고 거절당함으로 승리합니다. 만일 진리와 의가 인위적으로 승리를 얻기 위하여 세속적 수단을 이용한다면 사람들은 진리와 의의 힘을 믿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시여, 주저 말고 일어나서 의와 원칙을 교회 안에 세우기 바랍니다.

신앙은 교회 가는 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어떤 목사들은 사람들을 교회에 묶어두려고 합니다. 이런 교회에서 양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목사에게로 인도함 받게 됩니다. 복음의 전파를 통하여 자신의 영향력을 확장하고자 하는 사람은 복음 그 자체를 깨뜨리는 사람입니다. 예수께서는 두세 사람이 모여서 기도하는 곳에 함께 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회는 건물도 아니고 조직도 아닙니다. 교회란 진정한 마음과 진리로 예배드리는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이 산에서 저 계곡에서 그리고 허름한 가정집에서 예배드릴지라도 하나님은 그들과 함께 하실 것이며 그곳이 하나님의 거룩한 교회가 될 것입니다. 목사가 없고 성가대가 없을지라도 하나님의 임재하심만이 교회를 구성하는 유일한 요소입니다.

이제 세상은 교회 안까지 들어와서 교회를 점령했습니다. 큰 교회를 세우고 교세를 확장하고자 하는 무서운 정신이 교회를 집어삼키고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이러한 교회를 가야 합니까? 아니면 이러한 교회에서 떠나야 합니까? 지금 나는 고민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은 교회를 바라보시며 눈물을 흘리고 계십니다.

돈 때문에 교회에 가기 싫습니다!
장사꾼과 정치인뿐 아니라 그리스도인들도 재물의 신을 섬기고 있습니다. 모든 교회가 돈의 신에게 무릎을 꿇은 것처럼 보입니다. 돈의 신이 내놓은 다음과 같은 제안에 교회 전체가 넘어간 것처럼 보입니다. 네가 나에게 절하면 이 모든 것을 너에게 주리라. 돈의 신이 던지는 만일 네가 나를 섬기지 않으면 너의 처자는 길거리로 내몰릴 것이고 결국에는 너의 신앙도 흔들리게 될 것이니라는 협박에 못 이겨 하나님의 진리와 원칙을 타협하는 목사들의 숫자가 점점 더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돈을 사랑한다고 말하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사업을 확장하기 위해서는 돈에 굴복하고 부자에게 아첨할 수도 있다고 믿는 듯합니다. 돈 때문에 지옥에 던져질 집사와 장로와 목사들의 숫자가 점점 더 늘어가고 있습니다. 돈 때문에 예루살렘이 소돔과 고모라로 변해 가고 있습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느니라 (딤전 6:10). 한때 경건했던 사람들마저도 돈을 사랑하다가 치욕의 늪에 빠져서 그 영혼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돈의 신에게 이렇게 경고해야 합니다. 돈의 신이여 나는 너와 절교하련다. 나에게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혹시 다른 사람의 입을 빌려서 내게 접근하려 할지라도 나는 너를 물리칠 것이다. 만일 네가 장사꾼으로 위장하면 나는 그 장사꾼을 멀리 하겠고, 친구를 통하여 접근하면 그 친구를 멀리할 것이다. 만일 네가 목사나 전도사의 모습을 하고 내 사업장을 찾아와서 돈과 세속적 성공의 복을 빈다면 나는 주님의 이름으로 너를 내쫓고 대문을 닫으며 다음과 같이 소리칠 것이다. 사탄아 물러가라! 돈의 신이여, 네가 나를 유혹할 때마다 다음과 같은 기도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드릴 것이다. 주여, 제 소원을 들어주옵소서! 당신의 능력을 통하여 21세기의 악마를 이길 수 있게 하옵소서. 저로 하여금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굶어 죽는 한이 있더라도 돈 때문에 진리를 타협하지 않게 하옵시고 당신이 허락하지 않는 돈을 구하기 위하여 시간을 낭비하지 않도록 지켜 주옵소서. 가증하고 비천한 돈 귀신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저를 구원하여 주옵소서. 아멘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히 13:5).

그런 기적이 싫어서 교회를 떠납니다!
나는 기적을 믿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가나의 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든 사실과 다섯 개의 떡과 두 마리의 물고기로 오천 명을 먹이신 사실 또한 확실히 믿습니다. 그러나 기적은 자신의 위력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람들을 끌어 모아서 큰 교회를 세우기 위한 야심으로 사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한 것들도 기적이라고 부를 수 있지만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기적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지 알 수 있습니까? 어떻게 마귀의 기적과 하나님의 기적을 구별할 수 있습니까? 바로 왕의 술사들도 모세 못지않은 기적을 행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 정신과 마음으로 기적의 진위를 구별할 수 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사랑의 기적을 행하였고, 바로의 술사들에게는 그러한 사랑의 동기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기적은 그 마음과 생애가 성결한 자들을 통해서만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복권을 통해서 일확천금을 꿈꾸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기적이 나타나지 않는 것처럼, 기적을 통하여 자신의 영력을 과시하려고 하거나 교세 확장을 염두에 두는 사람에게 결코 하나님의 기적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만일 그런 사람에게 기적이 나타났다면 그것은 마귀로부터 온 기적이겠죠. 참된 기적은 헌신, 희생, 자기를 잊고 하나님의 영광과 사람의 선을 간구하는 사람에게만 주어집니다. 기적의 진위를 분별하는 가장 분명한 판단 기준 중의 하나는 이사야 8장 20절의 말씀입니다.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좇을지니 그들이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이 정녕히 아침빛을 보지 못하고. 기적을 행하는 자의 믿는 바와 가르침이 성경 말씀과 일치하지 않는다면 그의 기적은 지옥의 세력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정신과 마음을 가진 자에게는 기적과 은사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적에 매달리고 그것을 행하려고 애쓰는 마음은 이미 그리스도의 정신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기적을 행하시는 일에 매우 조심하셨습니다. 사람들의 시선과 관심이 기적에 쏠리는 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기적 이외의 것들에서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이 인정되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예수께서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베들레헴의 마구간에서 태어나기로 결정하신 것입니다. 기적은 참 신앙의 결과로서 나타날 수 있지만 기적을 목적으로 삼는 신앙은 이미 잘못된 신앙입니다.

하나님께서 계시다면 기적 또한 있어야 합니다. 기적을 믿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기적은 사사로운 욕심으로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기적은 모두 사랑의 발로였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자연 현상은 모두 기적으로 해석하게 됩니다. 뿌리에서 물을 빨아올려서 수십 척 높은 잎사귀에 양분을 주는 현상, 손가락이 절묘하게 움직이는 현상, 어린아이가 태어나서 커가는 현상, 이 모든 자연 현상이 하나님의 창조에서 시작된 기적이란 사실을 깨닫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기적에 매달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기적이 온 우주에 가득하게 펼쳐져 있다는 사실을 아니까요.

가정과 영성: 두 교회


두 교회

노아 시대에 두 교회가 있었습니다.
진리보다는 외관을 중시하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화려하고 웅장한, 그리고 안전하게 보이는 교회에
그들의 운명을 맡겼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노아의 단순한 설교와
초라한 방주를 손가락질하며 조롱했습니다.
그러나 홍수가 시작되자,
노아의 교회가 참 교회였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소돔 시대에 두 교회가 있었습니다.
진리보다는 외관을 중시하던 대부분의 소돔 시민들은
화려하고 웅장한, 그리고 안전하게 보이는 교회에
그들의 운명을 맡겼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롯의 경고를 노망난 할아버지의 허탄한 이야기로 조롱했습니다.
그러나 하늘에서 유황불이 내리자,
롯의 교회가 하나님의 참 교회였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엘리야 시대에 두 교회가 있었습니다.
진리보다는 외관을 중시하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합왕과 이세벨이 이끄는 화려하고 웅장한,
그리고 안전하게 보이는 교회에 그들의 영혼을 맡겼습니다.
그래서 엘리야의 경고와 호소를 코웃음으로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갈멜산 위의 제단에 불이 내려오자,
엘리야의 교회가 하나님의 참 교회였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두 교회가 있었습니다.
진리보다는 외관을 중시하던 대부분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제사장들이 주관하는 화려하고 웅장한,

그리고 안전하게 보이는 유대 교회에 그들의 영혼을 맡겼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비웃음과 조롱으로 침례 요한의 목을 자르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러나 오순절에 성령이 내리자, 제자들과 다락방에 모여 있던
소수의 사람들의 교회가 하나님의 참 교회였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중세기의 종교 암흑시대에 두 교회가 있었습니다.
진리보다는 외관을 중시하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화려하고 웅장한, 그리고 안전하게 보이는
교황권의 교회에 자신의 운명을 맡겼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화형대의 불붙는 장작 위에 세워진
왈덴스인들과 개혁자들을 보면서 조롱하고 비웃었습니다.
그러나 16세기 종교 개혁이 일어나자,
왈덴스인들과 순교자들의 교회가 하나님의 참 교회였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오늘날에도 두 교회가 있습니다.
진리보다는 외관을 중시하는 현대 기독교인들은
화려하고 웅장한, 그리고 안전하게 보이는 거대 교단에
그들의 운명을 의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여자의 남은 무리들을 비웃고 조롱합니다.
그러나 짐승의 표가 강요되고, 십사만 사천인의 이마에
하나님의 인이 쳐질 때,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던 소수의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참 교회였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어떤 목사의 병상 일기

불치의 병으로 인하여 자리에 누워 있는 내게 있어서 세상은 더 이상 유쾌하고 즐거운 것이 아니었다. 힘겨운 노동을 하는 사람이 어서 빨리 해가 져서 밤이 오기를 기다리듯 나 역시 힘겨운 생활이 끝나고 죽음이 오기를 기다리게 되었다. 꽃을 보아도 즐겁지 않았고 새가 노래하는 소리를 들어도 감흥이 없었다.

목사인 내가 다른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할 수 없다면 더 이상 가족과 친지들을 괴롭히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다음과 같은 욥의 절규가 나에게도 있었다. 어찌하여 곤고한 자에게 빛을 주셨으며 마음이 번뇌한 자에게 생명을 주셨는고 이러한 자는 죽기를 바라도 오지 아니하니 그것을 구하기를 땅을 파고 숨긴 보배를 찾음보다 더하다가 무덤을 찾아 얻으면 심히 기뻐하고 즐거워하나니 하나님에게 둘러싸여 길이 아득한 사람에게 어찌하여 빛을 주셨는고 (욥 3:20-23).

누워서 천장을 쳐다보면 지난날의 내 생애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너무나 많은 실패와 잘못된 결정들을 생각할 때마다 숨이 막혀 왔다. 무익하게 낭비한 세월, 생각 없이 지나쳐 버린 기회, 알면서도 고의로 범한 죄들, 무관심하게 지나친 선의 기회들로 인하여 내 고통은 육체에 그치지 않았다. 하나님과 사단의 영적 전쟁은 아직도 한창인데 나는 쓸모없는 군인으로 방에 홀로 누워서 군마가 동서로 치닫는 소리, 화살이 날아가는 소리, 적군의 북소리를 듣고 있었다. 나는 깊은 절망의 늪에 빠져 있었다.

불치의 병에 걸렸을 때 내게 두 가지 실망이 찾아왔는데, 하나는 나는 결코 다시 회복될 수 없다는 것이고 둘째는 나는 폐인이 되었으므로 하나님과 세상에 아무 쓸모도 없다는 것이었다. 그때 내게 성령께서 찾아 오셔서 다음과 같은 생각을 주셨다. 너는 어떻게 네 병이 불치라는 것을 아는가? 의사와 병원이 네게 불치의 선고를 내렸기 때문에 네가 스스로 좌절하고 주저앉아 있는 것이지? 우주를 창조하고 너를 만든 것이 하나님인데 어찌 너는 세상의 과학과 통계와 사망률에 의존하느냐? 의사는 창조주가 아니다. 이 세상의 의사와 병원이 너를 버렸을지라도 의사 중에 의사이신 하나님께 가라. 그분께는 세상이 알지 못하는 치료법과 처방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라. 현대 의학이 발전됨에 따라서 사람들은 의학을 신으로 만들었는데, 너도 의학이 할 수 없는 것은 하나님도 할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니?

물론 지붕에서 떨어져서 다리가 부러졌는데 의사에게 가지 않고 기도만 하는 것은 미련한 일이요 하나님을 믿는 바른 신앙이 아니다. 하나님은 열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천연계 속에 키니네를 주셨다. 사람이 그것을 알면서도 사용하지 않는 것은 미련한 짓이다. 외과 수술을 받을 때에 사용하는 마취제에 대하여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의사와 약품에만 의존하는 것은 잘못된 신앙이다.

내가 발견한 신앙 치료법
나는 하나님을 믿는 목사로서 내 불치의 병을 위하여 신앙 치료법을 사용하고자 한다. 신앙 치료법이란 기도와 위생과 하나님께서 천연계 속에 넣어두신 단순한 약초들을 사용하는 치료법을 말한다. 어떤 극단적인 그리스도인들이 말하는 것처럼 의사는 마귀의 사자요 약품은 마귀가 준 독극물이라고 믿지는 않지만, 그리스도인의 신앙 치료법은 난치병의 치료에 매우 효과적임을 나는 믿는다. 여기서 말하는 신앙 치료법이란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처럼 부처에게 절을 하거나 신령한 물을 마시는 것과 같은 우매함이 아니다. 신앙 치료법이란 몸을 자연의 창조주와 그 법칙에 맡기고 온 마음과 영혼을 그분께 의지하여 내 몸의 상태를 생명의 법칙하에 두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미신이 아니라 과학적 진리이다. 세상 의사들이 말하는 불치의 병에 걸렸을 때,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신앙 치료법에 몸과 마음을 맡겨야 한다.

병을 고치기 위하여 신앙을 갖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신앙 치료법은 무익하다. 깨끗한 공기보다 더 좋은 강장제는 없으며 깨끗한 물보다 더 좋은 해열제는 없다. 특히 평안한 마음과 영혼은 최고의 회복제이다. 그리스도인이 식물과 자연과 신앙에 의지하여 치료에 힘쓸 때 불안과 좌절과 고통은 사라지고 하늘로부터 놀라운 치료의 은혜가 내려온다.

목사로서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침대에 누워 있을 때 마귀는 내 귀에 다음과 같이 속삭였다. 너는 이제 아무 쓸모도 없는 폐인이 되었다. 이제 포기해라. 그러나 성령께서는 즉시로 내 마음속에 이러한 음성을 주셨다. 어떤 일을 해야만 마음의 평안이 생긴다면 그것은 참된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어떤 공로가 없어도 그리스도인의 마음속에는 평안이 있어야 한다. 네가 목사의 일을 하지 못한다고 해서 실망하고 좌절한다면 너는 아직 그리스도인의 참된 평안과 행복을 알지 못하는 거야. 선교 사업은 단순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의 제물이어야 한다. 그 이상의 다른 의미가 있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네가 하는 선교 사업보다 상한 마음,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 있는 그대로의 마음을 원하신단다. 네가 만일 네 병마로 인하여 목회 사업을 하나님께 드릴 수 없다면 네 마음을 바쳐라. 어쩌면 하나님께서 너에게 이러한 병마를 허락하신 것도 네 마음을 얻기 위함이 아니겠니? 베다니의 마르다의 심정으로 열심히 동분서주하면서 뛰어다녔지? 이제 하나님께서는 너에게 말씀을 사모하는 마리아의 심령을 주기 위하여 너를 바삐 뛰어다니지 못하게 만드셨단다. 네가 항상 부르던 찬송가 빈손 들고 십자가를 의지하네의 진정한 의미를 이제부터 배워보렴.

나는 이제 손발을 놀릴 수도 없다. 강단에 서서 설교도 할 수 없고 바다 건너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배를 탈 수도 없다. 계속해서 주의 영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해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눈여겨보지 않는 너의 초라한 병실 안에서도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실 수 있단다. 불치의 병을 가진 환자의 얼굴에 나타나 있는 평안과 겸손, 그리고 인내와 정숙에서 나오는 미소는 네가 지금까지 한 모든 설교보다 힘 있는 것이 될 것이다. 방문객의 손을 잡고 드리는 너의 기도 소리에 사람들은 이 병실에서 천사의 임재를 느끼게 될 것이다. 네가 그러한 투병의 삶을 살 때 너는 사람들에게 짐이 되는 대신에 오히려 위로가 될 것이다. 지치고 외로운 자들은 너를 찾아오게 될 것이다. 그들은 너에게서 천사의 얼굴을 보고 말을 들으며 위로받게 될 것이다. 네가 멋진 설교를 할 때는 교인들에게 깊은 감화를 주지 못했지만 지금 네가 나누어 주는 말씀은 다른 사람들을 생명으로 인도하고 있단다.

즐거움이 없다고 말하지 말라. 동물적인 너는 병들었지만 천사적인 즐거움이 네게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병든 자가 너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병으로 죽어가고 있으며 1년에 수십만의 사람들이 무덤에 들어가고 있다. 너를 낳은 육신의 어머니도 너와 같은 고통을 겪으면서 세상을 떠났고 너보다 나이 어린 누이동생도 부모님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면서 불평 없이 눈을 감았다. 너만 불행하고 너만 고통스러운 것처럼 생각하지 말라. 하나님은 당신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서 사람이 당하는 최대의 고통을 겪고 죽도록 하셨다. 당신의 아들이 십자가에 매달려서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치욕의 시간을 보낼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침묵하시고 눈에 보이는 어떤 도움이나 기적도 베풀지 않으셨다. 지금 네가 통과하는 이 시간이야말로 하나님과 그분의 아들의 아픔을 조금이라도 맛볼 수 있는 특별한 기회란다. 무덤에 들어가는 것은 하루의 일을 마치는 것에 불과하다. 무덤이란 깊고 캄캄한 터널이 아니라 완전한 쉼 속에서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이란다. 완전한 쉼 속에서 영광의 부활의 아침을 기다리는 것이 어찌 고통이 될 수 있겠는가!

무엇보다도 좋은 것은 하나님께서 지금 나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을 가졌는데 무엇이 더 필요하겠는가! 불치의 병은 두려움이 될 수 없다. 하나님 안에서 회복될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이 좁은 병실 속에서도 하나님이 영광이 드러날 수 있다면 그것으로 나는 만족한다.

목사에게 보내는 조언
하나님의 뜻을 두려운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목사들에게 소중한 진리를 나누고 싶어서 이 조언을 드린다.

인간의 마음은 육체와 깊이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마음이 병들면 육체가 병들고 육체가 약해지면 마음 또한 연약해지기 쉽다. 질병이 생기는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부절제이다. 부절제의 결과로 병이 든다. 대부분의 목사들은 절제 원칙을 따라 생활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자연의 법칙과 영적 법칙을 마음대로 무시하면서 하나님께서는 목사인 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병을 고쳐 주실 것이야라고 생각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어리석은 추측에 불과하다. 생명의 법칙과 어긋나는 나쁜 습관을 고집하고 마음대로 식욕을 방종하는 그리스도인이 드리는 기도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셔서 기적적으로 그런 사람의 건강을 회복케 하신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부절제를 조장하신다는 이상한 말이 된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에서 인간을 창조하시면서 생명의 법칙 또한 함께 주셨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식물이 되리라 (창 1:29)

누구든지 이 법칙에 순종하면 건강의 축복을 받고 불순종하면 그 복을 누리지 못하게 된다.

어떤 목사들은 그들의 식사 습관에 대해서 각별한 주의를 하지 않는다. 그들은 한 끼니에 너무 많은 음식과 너무 여러 가지 음식물을 취한다. 과식과 간식 그리고 과다한 지방은 영적인 마음을 유지하는데 어려움을 주며 동물의 죽은 고기는 피를 더럽게 하고 뇌를 둔하게 한다.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직전에 하는 식사에는 깊은 주의가 요한다. 목사는 가벼운 위장과 맑은 정신을 가지고 강단에 올라가야 하기 때문이다.

스트레스와 과로로 몸과 마음이 힘들 때에는 식사를 거르는 것이 훨씬 좋다. 그리하면, 인체는 스스로 체력을 회복할 기회를 얻게 된다. 목사들은 설교를 하는 것보다 실제적인 모본을 보임으로써 양들을 인도해야 한다. 목사가 맛있는 요리와 양념이 많이 든 음식과 또 카페인이 든 차나 커피를 좋아하고 많은 시간과 돈을 낭비하는 골프와 같은 운동을 즐긴다면 교인들은 그런 목사의 설교에 깊은 감화를 받지 못할 것이다. 오늘날의 교인들은 설교를 듣기 원하는 것이 아니라 보기 원한다. 중대한 책임을 지고, 특히 영적인 문제들을 다루는 목사들은 감각이 예민하고 지각이 영민하여서 하나님의 조용한 음성을 잘 들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음식물의 섭취를 절제해야 할 뿐 아니라 결코 식탁에 값비싼 음식이나 양념이 복잡하게 들어간 음식물을 올려놓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목사들은 날마다 자신 또는 다른 영혼들을 위하여 중대한 결정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적당한 운동은 많은 유익을 가져다준다. 노동과 산책은 목사들의 마음에 여유를 주고 활기를 준다. 앉아서 정신적인 노동을 하는 사람들을 위해 한 가지 제안이 있는데 매 식사 때마다 단순한 음식 두세 종류만을 취하고 시장기를 면할 정도의 소량의 음식을 섭취해 보기 바란다. 그리고 매일 규칙적으로 운동하면서 그 결과가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살펴보라.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의 영혼 깊은 곳까지 내려가서 놀라운 일들을 이루실 것이다.

식욕의 방종은 정신을 흐리게 하고 속박하며 거룩한 마음을 무디게 한다. 목사들 중 어떤 사람들은 부적절한 식사를 하며 육체적 운동을 하지 않음으로서 정신적 및 도덕적 능력이 약화되는 위험에 처해 있다. 식욕을 완전히 만족시키려고 하지 말고 근육이 활발하게 움직이는 노동을 하면 두뇌 활동은 매우 자유스럽게 될 것이다. 과식은 신체 각 기관의 능력을 빼앗아 위장의 소화력에 집중하도록 만들기 때문에 전신이 피로하고 지치게 된다.

목사들은 건강에 관한 올바른 지식이 있어야 한다. 생명을 지배하는 법칙을 알아야 하며, 또한 정신과 영혼의 건강을 올바로 돌보는 방법을 잘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주신 놀라운 인체의 법칙에 대하여 무지하며 또 그것을 어떻게 돌봐야 할 것을 알지 못하는 영적 지도자들이 너무도 많다. 대단치 않은 세상 문제들에 대해서는 깊은 관심과 열정을 나타내면서 영혼의 강건함에 직결되어 있는 생명의 법칙에 대해서는 너무나 무관심하고 무지하다. 바로 여기에 목사가 해야 할 일이 있다. 만일 목사가 이 문제에 대하여 올바른 태도를 나타낸다면 영혼 구원사업에서 많은 성과를 거두게 될 것이다. 목사는 가정에서나 자신의 생애에 있어서 생명의 법칙에 순응함으로써 몸과 마음의 건강을 유지해야 하며 또한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이 이 문제에 대한 분명한 가르침과 경험을 나누어 줄 수 있게 된다.

복음을 전하는 일과 건강을 돌보는 일은 항상 병행되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에 있어서도 이 두 가지는 완전한 균형을 이루었다. 예수께서는 설교하는 일보다 환자를 치료하고 돌보는 일에 더 많은 시간을 보내셨다. 복음이 참된 건강의 원칙들과 함께 묶여짐으로써 하나님의 진리는 실제 생활 속으로 좀더 가깝게 다가오게 된다. 성경적인 참 신앙은 타락한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실제적 도움을 주는 삶을 살아야 한다. 건강과

생명의 원칙을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가르침으로써 사람들의 관심을 하나님의 진리로 이끌어 오는 것은 매우 중요한 목사의 책임이다.

1부 - 하나님의 도구로 선택된 목사

목사는 하나님의 도구로 선택된 특별한 사명을 받은 사람이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지만, 그분께서 일하시려면 인간이라는 도구가 반드시 필요하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다가가실 수 있는 길은 사람을 통해서이다. 천사가 아닌 인간만이 다른 인간에게 다가가 하나님의 구속의 계획을 전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보면, 하나님께는 모든 인류가 사랑스럽고 귀중하지만, 인간에게 다가가 하나님의 구원의 소식과 복음을 전하는 가장 효과적인 도구인 목사만큼 하나님께 소중한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 목사들은 측량할 수 없이 놀라운 하나님의 구속 사업에 얼마만큼 동참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렇다.

목사가 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영혼을 구원하는 사역의 일을 생애의 본업으로 삼는다는 것은 세상의 안정된 길과 안락함을 버리고 영혼을 구원하는 사투의 길에 들어서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리고 그 길은 고난과 역경의 길임을 감지할 수 있기 때문에, 목사가 되기로 결정하고 그 길을 걷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먼저 목회의 일을 하는 모든 분들에게 존경을 표하는 바이다. 다음의 기사는 목사에게 도움이 되고 새로운 결심을 촉구할 만한 주제들에 대하여 살펴본 것들이다.

그러나 또한 이 기사들은 비록 직접 목사의 길을 걷지는 않지만, 진리를 먼저 깨닫고 이 빛을 가족이나 형제나 동료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사명을 마음에 지닌 채 살아가는 모든 독자들과 하나님의 일꾼들에게 힘과 격려를 전달하기 위해 쓰인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 글을 읽을 때, 목회자나 목사라는 단어 대신 자신의 이름이나 호칭을 넣어 읽어 보도록 하자. 그리고 우리 모두 하나님의 선택된 도구가 되도록 하자.

1) 늘 각오를 새롭게 하는 목사
목사에게 있어서 가장 필요한 것은, 자신을 처음 하나님의 종으로 바치던 때의 새로운 각오와 결심을 잃지 않고 늘 새롭게 하는 것이다. 생각해 보라. 처음 주님을 위해 일하겠다고 결심할 때의 그 불타던 열정과 헌신을&&. 부르심에 대한 사명감을 잃는 순간, 목사는 더 이상 진정한 목사가 될 수 없다. 비록 오랜 시간 동안 계속되는 목회사업과 사람들을 다루고 상대해야 하는 업무에서 오는 중압감에 힘들고 지치더라도, 하나님의 종이 되겠다고 서원하던 맨 처음의 결심과 각오를 늘 새롭게 상기하며 영혼을 구원하려고 하는 사명감을 잃지 말자.

목사는 먼저 자신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대속의 은혜를 깊이 체험하고 감사하는 가운데, 자신에게 임한 구원의 경험을 다른 영혼들에게 나누어주고자 하는 열망으로 불타야 한다. 그러므로 한 영혼, 한 영혼을 대할 때마다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하여 값으로 산 바 된 영혼의 가치를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고귀한 대속의 피가 그 한 영혼을 위해 흘려졌다는 생각은, 어떤 영혼이라도 소홀히 여기지 못하게 만들 것이요, 한 영혼이라고 더 하나님께로 인도하고 싶은 열망과 소원을 일으킬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영접하고 그분과 산 관계를 유지하고 체험하는 모든 목사는 자신의 재능을 하나님을 섬기는 데 사용할 수 있는 특권을 감사하며, 예수님과 그분께서 값으로 사신 영혼들에 대하여 사랑을 나타내 보이길 원할 것이다. 그리하여 수고와 고난과 희생을 자진하여 받아들일 것이며, 자아를 부정하고,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름으로 자신의 충성과 사랑을 나타내 보이는 것을 특권으로 생각할 것이다.

늘 처음 목회를 시작하던 당신의 새로운 결심을 상기하면서 그리스도를 위한 열성을 가지고 일하도록 하라. 만일 당신이 진실로 예수님과 연합했다면, 자아는 그리스도 안에 삼켜진 바 될 것이며, 위대한 사도의 간증이 당신의 매일의 간증이 될 것이다.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2) 스스로 구원의 경험을 잃지 않는 목사
교회의 목회 사업과 양들을 돌보는 가운데 너무 바쁜 나머지, 목사는 자신이 하나님과 맺고 있는 구원의 관계와 경험을 잃어버리기가 매우 쉽다. 그러나 사업이 바빠지면 바빠질수록 하나님과 더욱 더 긴밀한 개인적인 교통을 해야만 하나님께서 목회자들이 갖기를 바라시는 영적인 힘과 영성을 유지할 수 있다. 많은 목사들이 바쁜 업무와 사역 때문에, 양떼들을 돌본다는 명목 아래 스스로의 구원의 경험을 위해 하나님을 찾을 시간도 없고, 성령의 기름 부음 받기를 구할 개인적인 시간도 없다는 것은 매우 아이러니한 일이다.

목사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생명력이 없는 맥 빠진 설교를 하는 원인은 그들이 여러 가지 세상일에 마음을 쓰고 시간을 소비하는 까닭이다. 은혜 가운데 항상 자라가지 않으면 때에 따라 적합한 말을 할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자기의 마음을 살피고, 하나님과 은밀하게 교제하는 신령한 시간을 갖는 일에 게으르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깊은 영적인 경험 속에서 개인적으로 성령의 가르침을 받고 진리에 입각하여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전해야 할 것이다.

만일, 목사가 하늘의 풍성한 하늘의 보배를 양떼들에게 전달하고자 한다면, 그리고 하늘의 풍성한 꼴을 양떼들에게 먹이고자 한다면, 먼저 자신이 하나님과의 산 관계를 가져야 한다. 만일 이렇게 하지 않으면, 옛날에 길보아산에 우로가 내리지 않았던 것처럼 마음에 성령이 내리지 않을 것이다. 목사가 만일 이 일 저 일로 너무 분주하고 너무 할 일이 많아 하나님과 이야기할 시간을 갖지 못한다면, 어떻게 그 하는 일에 하늘의 능력을 바랄 수 있겠는가?

목사도 날마다 회개하는 경험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다. 매일 골방에서 개인적으로 회개하는 경험이 깊어져야 한다. 또 목사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 가운데 죄를 승리하고 극복하는 경험을 해야 한다. 자신의 속에서 이루어지는 구원의 경험이 확실해야 다른 영혼들에게 구원의 도를 가르칠 수 있기 때문이다. 주님의 사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다른 많은 사람들이 가졌다고 생각하는 경험보다도 더 높고 깊고 넓은 영적인 경험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하여 목적하신 바는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 가운데 끊임없이 향상하고 자라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날마다 그리스도인의 품성을 완전히 형성하는 가운데 영적으로 자라나고 향상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성령께서는 그분의 역사를 받아들여 성령께서 꼴 짓는 대로 순종하고 굴복하는 일꾼과 함께 역사하신다. 매일 매 순간 힘써 신령한 주님과 거룩한 교제를 갖도록 하라. 그러면, 겨우 주님의 영광의 희미한 새벽빛만을 보던 경험에서 원만하고 환한 영광의 빛을 보는 경험, 곧, 의인의 길은 돋는 햇볕 같아서 점점 빛나서 원만한 광명에 이르(잠 4:18)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며, 그 영광스러운 경험을 양 떼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게 될 것이다.

3) 성경을 연구하는 목사
모든 목사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매일 부지런히 성경을 연구하고 묵상하는 것이다. 양떼들에게 꼴을 먹이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자신의 영성을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를 매일 탐구하고 먹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피상적인 지식 밖에 모르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진리를 가르치는 목사는 다른 영혼에게 생명을 나누어 줄 수 없다. 목사 자신이 먼저 진리를 연구하여 이해하고, 또 그 진리로 성화되는 경험, 즉 진리가 실제 생활에서 베어 나오는 깊은 경험을 하지 않으면, 진정으로 영혼을 살릴 수 있는 목회를 할 수 없다.

만일 목사들의 마음이 항상 그리스도의 귀한 교훈으로 채워져 있다면, 어느 때, 어떤 위기 속에서도 새 것과 옛 것을 지식의 보물 창고로부터 꺼내어 하나님의 교회를 먹이고, 각 사람에게 때를 따라 그 양식을 나누어 줄 수 있을 것이다. 자기의 마음속에 빛을 많이 받으면 받을수록 하늘의 광명을 다른 사람들에게 더 많이 나누어 줄 수 있다. 예수께서 영혼의 성전 속에 거하시는 경험을 하는 목회자들의 마음속에서 그분께서는 생명 샘, 곧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요 4:14)이 되실 것이다.

목회 사업에 헌신하고자 하는 사람이나 목회자들은 성경의 모든 교훈들과 예언과 역사 및 그리스도께서 주신 모든 교훈에 통달하여야 한다. 정신력은 활용함으로써만 능력이 생기며, 폭이 넓어지고 또 예민하여진다. 늘 생각하는 습관을 가지도록 스스로를 훈련하며, 영적으로 예민한 마음을 갖기 위해 애쓰며, 하나님의 말씀의 깊은 뜻을 깨닫고 맛보기 위해 노력하라. 목사가 성경의 위대한 진리를 부지런히 연구할 때에, 직접적이며 명확한 기별이 담긴 설교를 할 수 있게 될 것이며, 그 설교를 듣는 사람들이 옳은 길을 택하도록 만드는 위대한 설교를 할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될 것이다.

누구나 온 마음을 다하여 성경을 연구하면 반드시 새 힘을 얻을 것이다. 또 성경을 연구할 때 하나님께 간절히 도움을 구하면, 하나님의 능력이 인간의 노력과 결합하여 그 성경의 교훈이 말하는 바를 뚜렷이 깨닫게 하실 것이다. 영혼을 구원하는 사업에 있어서 효과적으로 일하기 원하는 목사는 부지런히 성경 연구하는 연구자는 자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 연구하기를 등한히 하면서 다른 사람을 가르치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 불경한 일이 될 것이다.

영혼의 가치를 깨닫는 목회자들은, 하나님의 지식을 얻는 일에 유의하지 않는다면 자신과 양들에게 큰 손해가 될 것을 알기 때문에, 진리의 요새이신 하나님께로 도피하여 지식과 지혜를 얻으며 하나님의 사업에 활동할 능력을 얻을 것이다. 그들은 위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기까지는 잠시도 쉬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종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항상 벗으로 삼으면 영적인 능력이 점점 더하여지고, 지식이 계속 증가하여 언제나 그리스도를 더욱 잘 대표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목사 자신이 성경 말씀을 부지런히 연구하여 점점 더 믿음이 강하여지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와 사랑의 충만함을 사람들에게 더 잘 증거할 수 있고, 그런 목사는 다른 사람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꺼내 줄 수 있는 보고(寶庫)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목사의 마음에 먼저 새겨진 진리는, 그가 진리를 전하는 사람들과 그들의 장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곧 사람들을 영생을 위하여 준비시키는 복 있는 일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목사들은 많은 사람을 의로운 길로 인도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상을 받을 것이다.

기도와 성경 연구와 자성(自省)하는 시간을 엄중히 지키라. 날마다 일정한 시간을 내어 성경을 연구하며 하나님과 교통하라. 그렇게 할 때에 신령한 힘을 얻고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점점 자라날 수 있을 것이다. 그대에게 큰 소망을 주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며, 신과 같은 성품을 조성해 주실 수 있는 분도 하나님뿐이시다. 열렬한 기도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목사인 그대의 마음을 고상하고 거룩한 목적으로 채우시고, 또 그대의 사상을 깨끗하고 정결하게 하고자 하는 간절한 열망으로 가득하게 하실 것이다. 

2부 - 목회자여, 표준을 높이라

여호와의 기구를 메는 자여 스스로 정결케 할지어다(사 52:11). 이 말씀은 하나님을 섬기는 그리스도인 누구에게나 해당될 수 있는 말씀이지만, 특별히 거룩한 사물을 맡아 일하는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엄숙한 명령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사업을 하거나 돕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갖추어야 할 올바른 태도와 실생활의 덕목들에 대하여 생각해 보기로 하자.

1) 경건한 생활과 언행
하나님의 자녀들과, 또 하나님의 특별한 사업을 맡은 사람들은 말과 행동을 신중히 하여야 한다. 그리스도의 종들은, 의로운 행실을 하는 경건한 사람, 순결하고 진실한 말로 사람들을 향상시킬 수 있는 믿음이 두터운 사람, 어떠한 세상 유혹에도 동요되지 않는 사람, 의지가 굳고, 성실한 목적을 가지고 영혼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함을 최고의 목적으로 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특별히 목회 사업에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생애에서 거룩한 직분을 받을 만한 증거를 보여야 한다.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벧전 1:15). 바울은 기록하기를, 믿는 자에게 본이 되(딤전 4:12)라고 하였고, 다시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삼가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딤전 4:16)고 기록하였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행실이 바르고 깨끗한 생애를 보내기 위하여 깊이 주의해야 하며, 타락한 이 시대의 죄에 물들지 않도록 항상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스도의 종들은 경건하지만 또 생활에서 모든 사람에게 사교적이며 친절하고 예절 있게 대하여야 한다. 사람들과 교제할 때에 늘 정숙하고 품위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며, 쓸데없는 농담을 하거나 이성에게 너무 가까이 하지 않도록 조심하며, 고상하지 못한 교제는 피하여야 할 것이다.

말 하나하나와 행동 하나하나가 인격을 높이며, 사상을 고상하게 할 수 있는 것이 되어야 하며, 자기의 말과 행실이 접촉하는 사람들에게 생명의 향기도 되고 혹은 사망의 냄새도 된다는 것을 기억하고, 말과 행동의 근본이 되는 마음과 생각을 늘 깨끗하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하늘의 깨끗하고 탁월한 사물들을 명상하라고 권고하였다. 이런 권고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크게 필요하다. 모든 목회자들은 모든 생각과 행위가 깨끗해야 할 것이다. 사교성을 기르되 오락을 위해 하지 말고 더욱 고상한 목적을 위해서 해야 할 것이다.

진리를 가르치는 사람들은 그 언행에 깊이 주의하는 현명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때를 따라 하나님의 백성에게 양식을 나누어 주는 사람, 조금이라도 인생의 표준을 낮추는 일에 결코 찬성하지 않는 사람, 사랑으로 행하고 모든 육체의 생각과 정욕으로부터 영혼을 깨끗하게 하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어야 한다. 이런 목회자들은 결코 세상일에 정신을 빼앗기거나, 사단의 유혹에 빠지는 일이 없을 것이다. 늘 시선을 의의 태양이신 그리스도께 향하고, 모든 더러움에서 벗어나 영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조금도 불결함이 없는 경지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현시대는 도처에 타락한 사람들과, 가족 제단이 깨어지고 파괴된 가정들을 볼 수 있다. 원칙이 깨어지며 도덕의 수준이 점점 낮아지고 있다. 노아와 소돔의 때의 죄악이 날로 급속히 증가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진리의 빛을 받은 사람들은 모든 죄악에서 떠나며, 조금이라도 하나님의 사업에 해를 끼치거나 그 거룩함을 더럽힐 염려가 있는 모든 정욕과 습관을 쳐서 이기고, 경건한 길로 행해야 한다.

자기의 앞길에 가로놓인 모든 유혹을 물리치며, 정신력을 저하시키는 모든 것들을 헤치고 나가는 것은 목사의 직무이다. 목사는 항상 깨어 기도함으로써 자기의 가장 약한 점들에 대해서 방심하지 않게 되고, 그의 약한 점들이 그의 가장 강한 점들이 되도록 해야 한다. 사람은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로만 도덕적 원기와 의지력과 굳센 목적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늘 깨어 기도하고 모든 생각을 그리스도께 굴복시키도록 하라. 하나님의 은혜는 사단의 교묘한 유혹을 물리치고 충성되고 성실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는 능력이 될 것이다.

2) 예절의 미덕
그리스도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정직하고 신뢰할 만하며 원칙에 굳게 서서 흔들리지 않는 동시에 친절과 예의를 갖추어야 한다. 예의도 성령의 은사 가운데 하나다. 요즈음은 교인들 위에 마치 왕처럼 권위로 군림하려는 야망을 가진 목사들이 많이 있다. 목사는 불쌍히 여기며 겸손(벧전 3:8)하라 하신 하나님의 명령에 유의하며 양떼들에게 접근해야 한다. 사랑은 이론으로 하지 못하는 일을 능히 성취한다. 한순간의 성급한 행동, 한마디의 거친 대답, 어떤 조그마한 일에 그리스도인의 예의와 예절을 지키지 않는 것 같은 작은 일들이 목사의 감화력을 잃어버리게 할 수 있고 교인들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

목사는 예수님께서 지상에 계셨을 때에 행하신 것처럼 행동하기 위하여 힘써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순결하고 흠이 없으셨을 뿐 아니라 인내, 온유, 쾌활 등 모든 일에 있어서 우리의 모본이시다. 그분은 당신의 생애로써 참된 예의를 나타내 보이셨으며, 불쌍하고 억눌린 자들에게 언제나 친절한 얼굴로 대하시고 또 위로의 말씀을 하여 주셨다. 주님께서 유하시는 가정마다 신선한 공기가 감돌았고, 또 그분의 생애는 사람들 속에 마치 은혜의 누룩처럼 작용하였다.

깨끗하고 흠이 없으신 주님께서는 무지하고 무례한 백성들과 부정직한 세리, 불의한 사마리아 사람,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의 군대, 무례한 농부, 그 밖의 여러 무리들 속에서 생활하시며 어느 곳에서나 늘 동정의 말씀을 하여 주셨다. 주님께서는 무거운 짐을 지고 애쓰는 사람을 보실 때에 그 짐을 함께 져주시고, 그에게 천연계에서 배운 하나님의 사랑과 친절과 선하심에 관한 교훈의 말씀을 거듭거듭 말씀해 주셨다. 그분은 가장 사납고 전혀 장래성이 없어 보이는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의 자녀로 부끄러움이 없는 품성에 달할 수 있음을 제시하시고, 그들에게 희망을 주려고 힘쓰셨다.

신앙은 아무리 완고하고 거친 성격이라도 유하게 만들며, 행실이 아무리 괴벽할지라도 상냥하게 만든다. 또한, 말과 태도를 온순하고 우아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에게서 순결하고 고결한 정신과 명랑한 기질을 결합시키는 법을 배우도록 하자. 그리스도인의 친절과 예의는 그리스도교를 옹호하는 가장 힘 있는 논증이다.

친절한 말은 사람의 마음에 내리는 고요한 이슬과 부드러운 빗줄기와도 같은 것이다. 성경은 그리스도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의 입술에 은사를 주심으로 그가 곤핍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사 50:4) 하셨다고 하였고, 또 주께서 우리들에게 명하시기를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르게 함(골 4:6)같이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엡 4:29) 하셨다.

만나게 되는 많은 사람 중에는 전혀 예의가 없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목사는 예의를 저버려서는 안 된다. 함부로 다른 사람의 자존심을 상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는 것은 목사가 주의하여 지켜야 할 법칙이다. 우리가 예의 있게 행동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희망이 없는 것같이 보이는 자들에게 어떤 희망을 가지고 계신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을 하나님의 자녀로서 고상하고 신중하게 대하여야만 한다. 그리스도교는 사람으로 신사가 되게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을 핍박하는 자들에게까지도 예의를 나타내셨다.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그와 같은 정신을 드러내야 할 것이다. 복음은 세상에서 널리 행하여지고 있는 형식적인 예의를 장려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의 참 사랑에서 우러나는 예의를 장려한다.

아무리 외양적 예절을 잘 지킬지라도, 그것만으로는 모든 불평과 비평의 말을 억제할 수가 없다. 자기를 최고의 자리에 두려고 생각하고 있는 한, 참된 예의는 결코 나타나지 않는다. 사랑은 마음속에 있어야 한다. 철저한 그리스도인은 주님께 대한 마음속 깊은 사랑에서부터 모든 행동을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에 대한 그의 애정의 깊은 뿌리로부터 동포에 대한 이기심 없는 관심이 솟아나게 된다. 사랑은 그 소유자에게 우아함과 예절과 단정한 품행을 심어 준다. 사랑은 얼굴을 밝게 해주며, 음성을 부드럽게 하며, 그의 전 인격을 향상시키며 고상하게 해준다.

3) 사교 관계와 농담
목사는 사교 관계에 있어서 특별히 유의하여야 할 면이 있는데, 그것은 이성과의 관계에 조심하여야 하는 것이다. 이성의 지나친 관심 때문에 목사의 유용성이 손상되는 일이 종종 있게 되는데, 조심성 없는 여성들은 그들의 행동이 그 목사의 감화력을 손상시키는 것임을 알지 못하므로 목사를 난처하게 하며, 또 다른 사람들의 오해를 받게 한다.

이 문제에 대한 책임은 어느 누구보다도 그 목사 자신에게 있는 것이다. 그는 조심성 없는 이성들의 그런 행동에 대하여 현명하게 대처해야 한다. 하나님께 불명예를 돌리지 않기 위해, 목사는 무뚝뚝하다는 말을 듣는 한이 있더라도 조심성 없는 여성들을 단호하게 막고 지혜 있게 가르치며 훈계해야 할 것이다.

유쾌한 유머는 사람들을 즐겁게 하지만, 지나친 농담과 세속적 이야기는 다 세상에 속한 것이다. 마음속에 하나님의 평화를 간직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경솔한 언동을 하지 않더라도 기뻐하고 즐거워한다. 그들이 깨어 기도하고 있는 한, 마음 가운데 세상의 모든 무용한 모든 것들을 초월한 참 평화와 안정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

목사가 마음에 경건의 오묘를 간직하고 있으면, 세속적이며 육체적인 모든 쾌락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될 것이다. 그가 하나님과 깊이 교통하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뜻을 풍부히 깨달아 사람들에게 소개할 수 있는 실제적 설교들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며 신령적인 주제들을 설교하고, 사람들을 들뜨게 하며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설교 대신에,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하게 하며, 그 말씀을 듣는 사람들이 영생을 위하여 온전히 변화되도록 만드는 말씀을 전할 수 있을 것이다.

목사가 강단 위에서 배우와 같이 단순히 효과만을 위한 태도와 말을 하는 것은 전혀 용납될 수 없다. 목사는 배우가 아니요 진리의 교사이다. 경망스러운 말과 행동은 전하는 진리를 힘 있게 하지 못한다. 진정한 목회자는 영구히 지속될 중대한 사업을 하도록 하나님께로부터 사명을 받은 하나님의 사자임을 항상 자각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조금이라도 자기 자신이나 혹은 자신의 학식 또는 재능을 자랑하려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그는 다만 죄인들을 회개시키며 저들에게 말과 행실로써, 세상 죄를 지고 가신 하나님의 어린양을 소개하는 것을 유일한 목적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쾌활하더라도 결코 쓸데없는 농담이나 경솔한 행동에 빠지지 말라. 경솔한 언행은 배우들에게나 적합하며 신성한 강단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주의 종들이 그 태도와 말과 복장으로 진리의 원칙과 그 직분의 신성함을 유감없이 드러내기를 바라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종들은 사람들이 높은 수준에 도달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모본을 보일 것이다. 목사들이 자기에게 철저한 개혁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할 때, 자기가 더욱 높은 표준에 도달해야 한다는 것을 느낄 때, 그들은 향상시키고 품위 있게 하는 영향력을 교회에 끼치게 될 것이다.

구하면 반드시 주시는 하나님의 성령을 주리고 목마른 것같이 간절히 사모하라. 목사는 먼저 자기 자신이 생수를 마시기 전에는 결코 다른 사람을 생수의 근원이신 예수님께로 인도할 수 없다. 흩어진 생각들을 다시 모아 하나님께로 집중시키며 그의 뜻에 온전히 복종시키라. 지나치게 사람에게 아부하거나 칭찬하는 것을 삼가며 또 바라지도 말아야 할 것이니, 대개 칭찬은 겸손한 마음 대신에 자만심을 길러 주며, 깨끗하게 하는 대신에 부패하기 때문이다.

목사들이 회심하지 않는 한, 교회는 병들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만이 인간의 심령을 변화시킬 수 있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그 속에 불어넣을 수 있다. 하나님의 능력만이 정욕을 바로잡고 정복할 수 있으며, 애정을 성결하게 할 수 있다. 하나님께 봉사하는 모든 사람은 마음을 겸비하게 하고, 하나님의 뜻에 자신의 뜻을 굴복시키며, 자신의 생명을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숨겨야 한다. 

3부 - 목사의 가정

하나님께서는 목사의 가정에서 그가 평소에 가르치는 진리가 실제로 나타나기를 바라신다. 하나님의 종의 사람됨이 끼치는 감화는 그가 하는 말보다 훨씬 크다.  가정의 일상생활에 걸쳐서 나타내는 목사의 태도와 믿음은 다른 사람들에게 설교보다 유력한 증언이 된다. 인내와 진실함과 사랑은 설교로써 감화시킬 수 없는 사람의 마음에 힘 있는 감화를 줄 것이다.  목사의 가정은 실천적인 경건에 관한 효과적인 설교가 되어야 한다. 잘 훈련된 목사의 가정은 이웃에게 원대한 감화를 끼치는 선에 대한 능력이 될 것이다. 목사의 가정에는 화목함과 질서가 있어야 한다. 세상은 위대한 사상가보다는 오히려 가정에 축복이 되는 선한 사람을 더 요구하고 있다. 목사의 가정의 화목은 실제적으로 믿음을 증거 하는 힘 있는 설교이다.

1) 목사와 자녀
목사의 의무는 광범위하다. 그러나 그의 첫째 의무는 자기 가정과 자녀에게 대한 것이다. 목사는 밖의 일에 너무 골몰한 나머지 자기의 자녀를 교훈하는 일에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목사가 가정 밖에 있는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가정 안에 있는 적은 사람들을 소홀히 한다는 것은 적당한 핑계가 될 수 없다. 자기 가정의 영적 상태를 돌아보는 것은 목사에게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목사는 그의 아내와 더불어 가정에 대한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며, 자녀들의 잘못을 제지하고 교정하며, 또한 충고하고 지도하는 모든 일을 함으로써 모범적으로 가정을 이끌어야 한다. 이런 목사의 가정의 좋은 감화는 널리 미친다. 자녀들을 마음대로 하게 버려두고 잘 교육하지 못하는 목사는 강단에서 행하는 그의 감화가 자녀들의 불미한 행위 때문에 손상되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의 가족을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교회를 잘 다스려 어지러움과 다툼이 없도록 기도하기가 어려워진다.

어떤 때에 목사의 자녀들이 문제성이 많은 경우가 종종 발견되는데, 그것은 목사의 사업이 너무 바쁜 나머지 그 자녀들이 아버지와 같이 있는 시간을 많이 갖지 못하고 마땅히 받아야 할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마음대로 놀도록 버려졌기 때문이다. 목사는 자녀들을 결코 전적으로 어머니의 손에만 맡기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어머니에게 너무 과중한 짐이 된다. 그러므로 아버지가 그들과 함께 있어서 그들의 친구가 되어 자녀들이 나쁜 친구와 사귀지 못하게 하고 유용한 일을 하도록 돌보며, 자녀들을 하나님께 인도하기 위하여 전력을 다해야 할 것이다.

잘 교육된 목사의 자녀들은 그 아버지의 단상에서의 설교의 훈계를 실증하여 줄 것이다. 그러나 만일 목사가 자녀들을 그릇되게 교육시킴으로써 다스리고 지배하는 데 무능함을 나타낸다면, 그가 하나님의 양 무리의 목자로서의 의무를 행할 수 있기 전에 그에게 주어진 자녀들을 합당하게 훈련시키기를 하나님께서 요구하고 계신다는 것을 배워야 한다. 목사들이 자신의 집안을 잘 통솔하지 못할 때에 그는 잘못된 본으로써 많은 사람들을 그릇 인도하게 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복음을 전할 밭은 세상이다. 그러나 목사는 먼저 가정이라는 작은 땅을 위임 받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자신의 앞마당은 엉겅퀴와 가시가 자라도록 방임해 두면서 다른 사람의 마당에 있는 잡초를 뽑기 위하여 몰두하고 있다면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가정을 돌보는 것은 작은 일이 아니라 중대한 일이다. 목사는 친절과 예모로 자기 자녀들을 대하여야 한다. 그는 자녀들이란 작은 어른이요 주님의 가족의 어린 식구라는 것을 늘 명심해야 한다. 또한 목사는 신자들에게 자녀들을 다스리고 교육시키는 일에 관하여 가르쳐야 하며 그의 자녀들은 합당한 순종의 본이 되어야 한다.

2) 목사의 아내
목사의 아내가 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목사의 사모가 된다는 것은, 예수님이 가셨던 것처럼 인내와 희생, 겸손과 섬김의 길을 걸어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목사의 아내도 남편과 함께 하나님의 종으로서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목사의 아내로서 필요한 자질들에 대하여 함께 생각해 보자.

1. 동역자로서의 아내
목사의 아내는 매우 중요한 조력자로서 남편에게 큰 축복을 끼칠 수도 있고 그의 사업에 방해가 될 수도 있다. 목사가 그의 영적인 유용성의 범위를 확대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평범한 수준으로 내려앉고 마느냐 하는 것은 대부분 아내에게 달려 있다. 하나님께 헌신하지 않는 목사의 아내는 남편에게 도움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짐이 된다. 아무리 남편이 십자가를 져야 할 필요를 강조하는 설교를 한다 해도, 그의 아내의 잘못된 매일의 모본은 설교의 힘을 소멸시켜 버린다. 영적이지 않은 아내는 목사에게 큰 방해가 되어, 그의 남편을 그의 의무와 하나님에게서 떠나가게 한다.

사모의 소명은 매우 엄숙하며, 그 배우자에게 큰 축복 혹은 저주가 될 수 있다. 아내들은 목사인 남편이 하나님의 사업을 하다가 낙심할 때 용기를 북돋아 주며, 넘어질 때 위로하고, 믿음을 잃을 때 격려하여 남편들이 위를 쳐다보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도록 만드는 동역자가 되어야 한다. 사모는 남편과 함께 양떼들을 돌보는 일에 조력하여야 한다. 특별히 사모는 남자인 목사가 할 수 없는 세밀한 부분, 즉 마음에 상처를 당한 교우가 있는지, 어려움에 당면한 교우가 있는지, 어떤 고민에 빠진 사람이 있는지 자세히 살피어 그들을 치료하고 보살피는 역할을 해야 한다. 만일 목사의 아내가 생애의 어두운 면만을 바라보고, 어려움과 고난에 처해 있다고 생각하며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행사하는 대신, 남편에게 시련과 불신에 대해 이야기하고 원망하며 불평의 정신을 드러내면, 아내는 남편에게 동역자가 아니라 무거운 짐을 지워주는 사람이 된다. 하나님의 신성한 사업을 하는 남편의 동역자가 되기 위하여 목사의 아내는 기도를 많이 하며 헌신적인 마음을 늘 잃지 않도록 해야 한다.

목사의 아내가 자아 희생의 정신을 소유하고 영혼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그는 거의 남편과 동일하게 유익한 일을 할 수 있다. 목사의 아내들은 헌신적이고 경건한 생애를 살며, 늘 기쁜 마음으로 십자가를 지고 극기와 희생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 목사의 아내는, 남편이 아내인 자기에게만 관심을 주기를 원하고, 자기의 불만에 찬 감정을 만족시켜 주기 위하여 남편을 영혼구원 사업으로부터 관심을 돌리게 해서는 안 된다.

사모는 영혼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남편과 함께 열렬하고 성실하게 하나가 되어 일해야 한다. 자신의 욕망과 소원을 강하게 주장하거나 남편의 활동에 대한 관심의 부족을 표현하지 말고, 또 불만의 감정에 사로잡히지 않으며, 모든 육신적 감정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는 남편과 함께 성취시켜야 할 인생의 목적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만일 영혼들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사업에 자신의 육신의 감정과 쾌락과 취향 등이 상치된다면, 그것들은 즐겁고 기꺼이 희생되어야 한다.

그리고 영적으로 남편을 의지하는 대신 자기 스스로 굳게 서서 강한 믿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며, 모든 애정을 예수님께 바치고 자신의 삶을 산 포도나무이신 그리스도께 의탁하면, 신자들과 이웃들에게 많은 도움을 끼칠 것이며, 남편에게 큰 조력자가 될 것이다. 종말에 목사의 아내들이 받을 상급은 매우 클 것이다. 그들의 모든 수고를 아시는 예수께서는 마지막 날에 그들의 귀에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는 아름다운 음악과 같은 말을 하실 것이다.

2. 언행
교회 안에 일어나는 많은 문제들은 신도들 사이에 도는 험담이나 쓸데없는 말들 때문에 야기되는 것들이다. 특히 그런 문제의 말들은 여자 신도들 사이에서 많이 일어난다. 목사의 아내가 갖추어야 할 덕목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적당한 때에 침묵을 지킬 줄 아는 지혜로움이다. 성급하게 자신의 의견을 나타내거나 지혜롭지 못한 반응을 나타내는 일에 사모는 매우 주의할 필요가 있다. 사모의 덕스러운 인내와지혜는 교회의 신도들 사이에 일어나는 많은 문제들을 잠재울 수 있게 만든다.

어떤 말을 듣든지 그 말의 무덤이 되라. 한번 사모의 귀에 들어간 말은 다시 옮겨지지 않는다는 신뢰를 받을 수 있을 만큼 사모는 입이 무거워야 한다. 신뢰할 수 없는 인간의 귀에 말을 쏟아놓는 대신, 모든 비밀을 다 들어주시고 결코 누설하지 않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귀에 쏟아놓으라. 답답할 때 주님께 드리는 기도는 마음속에 하늘의 위로로 가득 채움을 받게 하는 좋은 방편이 될 것이다. 그리고 사모가 늘 주위를 하늘의 분위기로 채울 수 있는 신앙의 역군이 된다면, 쓸 데없는 대화나 문제점들을 일으킬 여지를 만들지 않게 될 것이다.

요즈음의 사모들은 성도들을 섬기기보다 자신이 섬김을 받으려는 강한 의지를 가진 사모들이 많고, 그런 사모들은 약한 교우들의 마음을 곧잘 상하게 한다. 사모는 특별히 예수님의 온유하심과 사랑을 많이 배양하여야 한다. 혹시 자신의 성품이 그런 면에 부족함을 느낀다면, 예수님의 사랑과 온유하심을 배우기 위해 많이 기도하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참된 겸손은 십자가의 사랑을 깊이 깨달은 사람들의 성품 속에 나타나는 특징이다.

목사의 아내들은 남편의 수고를 덜어 주고 그들이 어떤 감화를 끼칠 것인가에 대해서 신중하여야 하는데, 그 이유는 목사의 아내들은 주목을 받고 있고, 다른 사람들에게서 큰 기대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사모의 복장은 본이 되어야 하며, 그들의 생애와 대화는 죽음에 이르는 냄새가 아니요 오히려 생명에 이르게 하는 향기가 되는 그런 모본이 되어야 할 것이다. 마음을 하늘로 향하지 않게 하는 사물들에 대해서는 담화를 하지 말고, 어떻게 하면 다른 영혼을 구원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목사의 아내의 중요한 질문이 되어야 할 것이다.

3. 훌륭한 어머니의 역할
자녀를 둔 목사의 아내는 자기의 가정을 자기의 선교지로 알고 끈기 있는 정력과 다함이 없는 열심으로 자녀들을 위해 일하며, 그 결과는 영원에까지 이른다는 것을 생각하고 늘 기쁜 마음으로 가정교육에 힘써야 한다. 자녀들의 마음과 품성을 꼴 지우고 이 세상에서 유능한 인물이 되도록 교육하며, 장차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기 위해 영적으로 자녀들을 교육시키는 어머니의 일은 매우 엄숙하고도 중대하다고 할 수 있다.

어머니는 가정 신앙의 힘과 그 탁월함을 세상에 나타내 보여야 할 큰 책임을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와 밀접히 연합한 어머니의 감화는 무한한 가치가 있다. 어머니는 가족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드는 하나님의 대리자이다. 그러므로 자녀를 가진 어머니는 날마다의 의무 수행을 즐거움 가운데서 하며, 신앙의 감화가 실생활에서 어떻게 나타나야 하는지를 보임으로써 성서적 신앙을 몸소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리스도인 어머니의 유용성의 범위는 가정생활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목사의 아내이자 아이들을 가진 어머니가 가정에서 발휘하는 좋은 감화는 이웃과 하나님의 교회에서 더욱 큰 유익이 되며, 빛날 것이다. 다른 어떤 사업도 어머니의 역할의 중요성과 비길 수 없다. 그 일은 화가와 같이 화폭 위에 아름다운 형상을 그리거나 조각가와 같이 대리석에 형상을 아로새기는 것은 아니지만, 어머니의 임무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힘입어 인간의 마음에 하나님의 형상을 계발시키는 것이다.

이것을 이해하는 어머니는 자신의 기회를 매우 귀중하게 여기며, 자녀들을 교훈하고 교육하는 데 최선의 노력을 기울일 것이다. 밖의 선교지와 교회 사업에 일하는 남편은 때때로 사람들에게 칭찬을 듣는 때도 있으나, 가정에서 수고하는 아내는 아무에게도 그 한 일에 대하여 칭찬 듣는 일이 별로 없다. 그러나 만일 가정의 유익을 위하여 최선을 다해 일하며 자녀들의 성품이 거룩한 모본이신 그리스도와 같이 되도록 힘쓰면, 기록하는 천사는 그 어머니의 이름을 세상의 가장 위대한 선교사 중의 하나로 기록할 것이다.  

4부 - 우리의 모본이신 예수 그리스도

아무리 하나님의 사업을 위해 헌신했다고 하지만, 목사도 인간이기 때문에 지치고 낙심될 때가 있다. 때때로 지치고 힘들 때는 우리의 모본이신 예수님의 생애를 묵상해 보는 것이 좋다. 하늘의 왕이셨지만,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셔서 많은 고난과 시련들을 당하신 예수님의 생애는 하나님의 사업에 헌신하고 있는 목사들에게 큰 격려가 될 것이다. 영혼과 육신의 온전한 회복을 위해 봉사하시던 예수님의 생애에 대하여 함께 생각해 보며 용기를 얻도록 하자.

1. 병자를 고치시며
예수께서는 하나님이셨지만, 인간을 어떻게 돕고 이해해야 할지 더 잘 아시기 위해 인성을 쓰시고 우리 인류에게 가까이 다가오셨다. 주님의 일생은 인간을 구원하시는 것에 온 목적과 뜻을 두신 헌신과 희생과 사랑의 생애였다. 주님께서는 온전한 하늘의 진리를 가르치셨지만, 그 마음이 진리를 받아들이기에 적합하게 되도록 준비시키기 위해 먼저 사람의 몸의 질병들을 고쳐주시며 마음을 여는 일을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오셔서 모든 사람의 필요를 채워주시기 위하여 봉사하셨지만 피곤함을 알지 못하셨다. 그분의 마음은 인류를 위한 사랑과 동정으로 가득 차 있어서 자신의 필요를 느낄 틈이 없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모든 필요를 돌보시기 위하여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 지셨(마 8:17)다. 인류를 완전히 회복시키는 것이 주님의 사명이었고, 인류에게 건강과 평화와 품성의 완전함을 주시는 것이 그분의 목적이었다. 주님의 도움을 구하러 온 사람들의 요구는 각각 달랐지만, 도움을 받지 못하고 돌아간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주님께로부터 치유하는 능력이 강처럼 흘러나와 사람의 영혼과 심신을 온전하게 하였다.

구주의 사업은 때와 장소의 한정이 없었고, 주의 동정에는 제한이 없었다. 질병을 고치고 가르치는 주님의 사업은 대규모적이었으므로, 주님께로 모여 온 수많은 군중들을 다 받아들일 만한 건물이나 장소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갈릴리의 푸른 언덕,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큰 길이나 바닷가, 회당, 그 외의 어디든지 병자를 데려온 곳은 주님의 병원이었다. 도시나 시골 어디든지, 주님께서는 통과하시는 곳에서 고통당하는 병자 위에 손을 얹고 병을 고쳐 주셨고, 또한 어디서라도, 주의 기별을 받을 준비가 된 사람에게는 하늘 아버지의 깊은 사랑을 이야기하며 영생을 가져오는 진리를 들려주셨다. 질병을 고치시는 일은 진리를 전하시기 전에 하시는 주님의 전초 작업이었다.

2. 사명감을 가지시고
예수님께서는 인류를 구원할 책임과 사명을 가지고 이 땅에 사셨다. 그분은 인류들의 원칙과 목적에 단호한 변화가 있지 않으면 모든 인류가 잃어버리게 될 것을 아셨으며, 이것은 당신의 마음에 무거운 짐이 되었다. 그러나 아무도, 주님께서 지신 짐이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소년 시절이나 청년 시절이나 또는 성년이 된 때에라도, 주님은 언제나 고독하게 지내셨다. 그러나 주님께서 계신 곳은 천국이었다. 주님께서는 날마다 여러 가지 시련과 시험을 당하시고 여러 가지 악을 만나셨고, 복을 주고 구원 하려는 자들 위에 죄의 세력이 나타난 것을 보셨지만, 그분은 활기를 잃거나 낙담하지 않으셨다.

그분께서는 어떤 일에 있어서도 당신의 사명 앞에서는 욕망을 엄격히 통제하셨다. 또한, 모든 일을 하늘 아버지의 뜻에 복종시킴으로 그의 생애로 아버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셨다. 예수님이 어렸을 때에, 어머니 마리아는 그분이 랍비들과 함께 문답하고 있음을 보고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하였다. 그분은 대답하기를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눅 2:48, 49) 하셨다. 이 대답은 그분의 사명과 평생 사업의 요지가 된다.

그리스도의 생애는 계속적인 자아 희생의 생애였다. 친절한 친구들이 나그네 예수님을 위해 호의로 베풀어준 유숙할 곳 이외에는 이 세상에 거할 집이 없었다. 그분은 오셔서 우리를 위하여 가장 가난한 생애를 사시고, 가련하고 고난당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생애하며 일하셨다. 그토록 많은 선행을 베풀어 준 자들에게서도 그분께서는 인정과 존경을 받지 못한 채 일하셨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명감에 가득 차서 항상 인내와 기쁨으로 지내셨고, 그분이 구원하러 오신 영혼들을 섬기는 일에서 희열을 느끼셨다.

3. 가르치시며
예수님께서는 봉사 기간 동안에 설교보다도 병자를 고치는 일에 더욱 많은 시간을 보내셨다. 주님의 이적은, 사람을 벌하러 온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왔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구주께서는 병 고치는 일을 하실 때마다 그 심령에 하나님의 원칙을 심는 기회로 삼으셨다. 그리하여 기회가 있을 때마다 사람들을 가르치셨다. 이것이 그분의 사업의 목적이었다.

예수께서 다녀가신 곳에서는 주의 동정과 치료를 받은 사람들이 활력을 되찾은 기쁨으로 새로 얻은 힘을 시험해 보고 있었다. 주님께서 행하신 기사를 그들에게서 직접 들으려고 많은 무리들이 그들 주위로 몰려들었다. 많은 귀머거리가 고침을 받은 후 처음 들은 것은 주의 음성이요, 벙어리가 말을 시작하여 처음 불러 본 이름이 주의 이름이며, 소경이 눈뜨자 처음 본 것은 주의 얼굴이었다. 사람들이 어떻게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으며 그분을 찬양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주님께서 도시와 촌락을 지나실 때에는 마치 생명의 전류처럼 생명과 기쁨을 발산하였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복음을 보다 쉽게 받아들이게 하려고 예수님께서는 병자들을 고쳐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유대 나라의 교사들 중에 가장 높은 지위를 차지하실 수 있었으나 오히려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일을 택하여, 곳곳으로 다니면서 큰 길과 작은 길에 있는 자들에게 진리의 말씀을 전파하셨다. 성경의 말씀들을 설명하시는 주의 음성이 바닷가나 혹은 산비탈에서 또는 도시의 복잡한 거리에나 혹은 유대인의 회당에서 들렸다. 또한, 주님께서는 이방인들도 당신의 말씀을 듣게 하기 위해서 성전 뜰 밖에서도 종종 가르치셨다.

그리스도의 가르치심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성경 풀이 하는 것과는 같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다. 랍비들은 유전과 사람의 이론과 추측을 중히 여겼으며, 성경에 관하여 사람들이 가르치고 기술한 것이 때때로 성경을 대신하는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교훈의 주제는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그분은 질문하는 자들에게 기록되었으되, 성경에 무엇이라 하였느냐, 네가 어떻게 읽느냐하고 단순한 말씀으로 대답하시고, 말씀에 대하여 호의를 가진 사람이나 혹은 반대하는 사람들이 흥미를 나타낼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소개하셨으며 복음의 기별을 분명하고 힘 있게 전파하셨다. 예수님의 말씀은 부조들과 선지자들의 교훈에 한층 더 빛이 되었고, 성경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계시로 나타났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자들은 전에 하나님의 말씀에 담긴 그런 깊은 뜻을 깨달은 일이 없었다.

4. 단순한 교훈을 전하시며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전도인은 일찍이 없었다. 주님께서 하늘의 왕이셨으나 자기를 낮추어 우리 인간의 성정을 취하신 것은, 인류가 거하는 곳에서 인류를 만나려고 하신 이유에서였다. 부자나 가난한 자나 자유로운 자나 종들을 막론하고 모든 백성들에게 그리스도께서는 구원의 소식을 전하셨다. 병자들은 도움을 구하기 위하여 주께서 지나시는 곳으로 왔다. 또한, 어느 곳이든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의 손길이 자기의 몸에 닿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주님께서 가르치실 때, 하늘의 지혜의 창고에서 보물을 취하여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며, 단순하고 평이한 말을 쓰셨으므로, 아무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없었다. 모든 교사의 교사이신 그리스도는 사람들과의 가장 친밀한 교제를 통하여 그들과 접근하셨다. 그리고 진리를 전하실 때 그 진리를 듣는 무리가 그 말씀을 듣고 감명을 받아 그 기억 속에 깊이 뿌리박히도록 하셨다. 그 교훈은 직접적이었고, 그 예증은 적절하였으며, 그 말씀은 감명과 기쁨을 주었으므로 듣는 무리가 황홀하게 되었다. 단순하게 하신 주님의 말씀 한마디 한마디에는 열정과 심오한 뜻이 담겨 있었지만, 그 깊은 진리는 단순함 속에 숨겨져 있었고, 어느 계층의 어떤 사람이 듣든지 모두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었다.

5. 빈부와 계층의 구별 없이
그리스도께서는 매우 바쁜 생활을 사셨다. 그분은 가난과 슬픔에 처해 있는 보잘것없는 작은 집에 들어가 낙담한 자에게 희망을, 고민하는 자에게 평화의 말씀을 전하지 않으시는 날이 없었다. 자비하고 인정과 동정심이 많으신 그리스도께서는 여러 지방을 다니시며 용기를 잃어버린 자들을 일으켜 주시고 슬픔 당하는 자를 위로하셨다. 그분이 가시는 곳에는 언제나 축복이 뒤따랐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힘쓰시는 한편 부한 자들을 인도할 방법도 연구하셨다.

그분께서는 부하고 학식 있는 바리새인과 유대의 귀족, 로마의 관리들과도 교제하셨다. 그들의 호감을 사서 하늘의 선물과 부를 소개하시려고 그들의 초대를 거절하지 않으시고 잔치에 참예하셨으며, 또한 그들의 직업과 흥미도 익숙히 아셨다. 그리스도는 민족이나 계급, 또는 신조에 있어서의 차별을 인정하지 않으셨다. 당시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하늘에서 주신 선물을 자신들의 국가와 민족만의 이익을 위해 사용하고 세계의 다른 하나님의 가족들은 그 특전에서 제외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막힌 장벽을 무너뜨리기 위해 오셨다. 또한, 주님은 당신의 자비와 사랑의 선물이 공기나 빛 또는 땅을 촉촉이 적시어 주는 소나기처럼 어느 한 곳에 제한되어 있지 않음을 보이기 위해 오셨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생애로, 계급 제도가 있지 않으며,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자주 자나 종이나 다 동등한 형제라는 것을 보이시고,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계급이나 차별이 없다는 종교를 설립하셨다. 그분의 활동은 어떠한 정치의 영향도 받지 않았다. 그분께서는 아는 사람이나 모르는 사람, 또는 자기편이거나 자기편이 아니거나 간에 차별 없이 대하셨으며, 생명수를 갈망하는 영혼에 대한 연민의 정이 마음에 가득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어떤 사람이든지 무가치한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으시고 각 영혼에게 적절한 치료를 하기 위해 힘쓰셨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하늘의 능력을 받아 흠 없는 생애를 살 수 있음을 보이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 주님은 다함이 없는 인내와 동정심에 가득한 도움으로 인간의 필요를 채워 주셨다. 또한, 인자하신 은혜의 손길로 사람의 가슴 속에 불안과 의심을 소멸시키셨으며 미움을 사랑으로, 불신을 믿음으로 변하게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성질이 아무리 난폭하고 장래성이 없는 사람일지라도 하나님의 자녀로서 부끄럼이 없는 성품에 도달할 수 있다는 확증과 격려를 주시며 희망을 그들에게 넣어 주기 위해 노력하셨다. 종종, 주님께서는 사단에게 사로잡혀 그의 올무에서 벗어날 힘이 없는 자를 만나셨다. 낙망하고 병들고 시험당하고 또는 타락한 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가장 부드러운 동정의 말씀과 또 그들에게 꼭 필요한 말씀을 주셨다.

예수님께서는 세리의 청함을 받아 귀한 손님으로 저희의 식탁에 나아가셨을 때에 동정과 사교적인 친절을 보이심으로 당신께서 인간의 존엄성을 인정하고 계심을 나타내셨으며, 그런 대접을 예수님께로부터 받은 사람들은 주님의 신임 받는 새로운 사람이 되기를 갈망하였다. 주님의 말씀은 그들의 갈급한 심령에 축복과 생명력을 주었고 새로운 마음의 충동을 일으켜 주었다. 그리하여 사회에서 배척당하는 이들에게도 예수께서는 새 생애의 길을 열어 주셨다.

예수님은 비록 유대 사람이었으나 바리새인들이 엄중히 가르치는 그 당시의 풍속을 따르지 않으시고 사마리아인들과 자유로이 교제하시었다. 바리새인들의 편견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천대 받는 사마리아인들의 호의를 받아들이셨다. 그리하여 그들의 집에서 함께 주무시고, 그들과 한 식탁에 앉아 그들이 손수 장만하여 차려 놓은 음식을 같이 잡수시며, 그들이 사는 거리에서 가르치시기도 하여 최대의 친절과 예의로 그들을 대하셨다. 또한, 인간의 동정의 끈으로 그들의 마음을 이끄시는 한편, 당신의 거룩한 은혜로 유대인들이 거절한 구원을 그들에게 가져다 주셨다.

6. 예수님만이 올바로 나타낼 수 있었던 하나님
하늘이 이 땅에 내려온 듯하였다. 하늘의 존귀한 왕이시고 창조주셨지만, 작은 꽃을 사랑하시고, 어린 아기들을 향하여 무릎을 굽히시며 축복하신 사랑의 예수님!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 이 땅은 하나님에 대한 오해의 어두움으로 캄캄하게 둘려 싸여 있었다. 오랫동안 이 세상에 드리워진 죄악의 그늘, 하나님을 두렵고 무서운 심판자와 같은 분으로 오해하고 불신하게 한 어두움의 그늘은 벗겨져야 했다. 사단은 자기의 악한 특성을 사랑의 조물주께 씌우고, 천사들과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게 하고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불신하게 하였다. 하나님은 공의와 지대한 위엄의 하나님이신 까닭에 사단은 하나님을 가혹하고 용서하지 않으시는 분으로 생각하게 하였다. 그러나 오랫동안 세상을 내려 덮은 캄캄한 비애(悲哀)의 밤은 예수님 때문에 환하게 동터오기 시작하였다.

하나님에 대한 오해로 어두워지고 음울한 그늘이 덮인 세상이 하나님께로 돌아가도록 하기 위해서는 사단의 기만적 세력이 깨어져야 했다. 이것은 힘으로는 할 수 없었다. 폭력을 사용하는 것은 하나님의 정부의 원칙과는 배치된다. 하나님은 사랑의 봉사만을 원하시는데 사랑은 명령으로 강요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힘이나 권위로 얻을 수 없다. 사랑은 오직 사랑으로만 일깨워진다. 하나님을 알게 되면 그분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품성이 사단의 품성과 대조되어 드러나야 한다.

이 일을 하실 분은 온 우주에 오직 한 분밖에 없었다. 하나님의 사랑의 높이와 깊이를 아시는 분, 하나님의 사랑의 성품을 세상에 그대로 보이실 분은 예수님, 그분 한 분밖에 없었고, 그분은 사랑으로 이 땅에 오셔서 구원을 주시고 그분의 사명을 성취하셨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시자, 비로소 하나님의 사랑의 성품이 드러났다. 성육신하셔서 인간에게 다가와 하나님을 손수 보여주신 예수님 때문에 온 세상은 하나님에 대해 드디어 잘 알게 되었던 것이다! 

5부 -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목자

하나님의 크신 종 사도 바울은 목사의 임무를 맡은 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호소하였다.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딤후 4:1-5)

지금은 사도 바울이 때가 이르리니라고 표현하신 바로 그 때이다. 사람들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는 시기이다. 참으로 목사의 일을 하기가 힘든 때임에 틀림이 없다. 많은 교인들이 너무나 오랫동안 잘못된 가르침과 사상으로 교육을 받아 온지라, 진리와 오류를 분별하는 귀가 어두워진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세속적인 마음, 즉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을 지닌 채 교회의 자리만을 채우고 있는 교인들을 대상으로 설교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너무나 많은 교인들이 자기의 편리함이나 안정감을 건드리는 이야기를 듣기를 원치 않는 분위기에서 설교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지금은 사람들이 허탄한 이야기를 쫓고 있는 시대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믿지 않는 사람들과 똑같이 세상을 사랑하고 있다. 불신자들과 똑같은 종류의 음식을 먹고, 똑같은 종류의 옷을 입으며, 같은 성공과 번영을 사랑한다. 같은 인기를 사모하며, 같은 경쟁 속에서 이기기를 다투며, 같은 농담들 속에서 같은 유행가를 부르며 지내는 세속적인 사람들이 교회에 모여와 하나님의 축복도 원하면서 자리를 채우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분위기에서 성경 말씀대로 설교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자기가 원하는 말씀을 해 주기를 바라며 가려운 귀를 긁어 줄 목사들을 찾고 있을 때에 그들에게 곧바른 진리를 가르친다는 것은 거의 자살 행위에 가까울 정도다. 그러나 이러할 때에, 참된 목자,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목자들이 구분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여전히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말씀이란 하나님의 말씀 성경을 말하는 것이다. 인간의 논리나 개인적인 이해, 또는 철학을 강의하라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 성경을 가르치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종 목사들은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가르치는 자들이다. 거기에 인간의 견해나 타협을 섞으면 안 된다. 하나님의 말씀에 나타난 하나님의 마음을 전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들이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종들은 그 당시 교회들에서 인기 있는 자들이 아니었다. 사실상 대중적인 인기가 있을 리가 없었다. 진리란 거의 모든 경우에 있어서 그 당시의 대중이나, 교인들의 주류나, 일반적인 흐름에 역행하는 말씀들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고 또한 교회를 개혁하기 위하여서 보내신 선지자들은 항상 핍박과 냉대를 받아왔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종들이 대중적으로 또한 교회의 주류들에게 인기를 얻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사실상 성경적이 아니다. 교회들이 진리를 타협하고 세속적으로 달려가고 있는 중인데, 그러한 속에서 인기를 누리고 있다는 자체가 어떻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일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성전으로 들어가는 교인들을 향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라고 지시하셨다. 여호와께로서 예레미야에게 말씀이 임하니라 가라사대 너는 여호와의 집 문에 서서 이 말을 선포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경배하러 이 문으로 들어가는 유다인아 다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로 이곳에 거하게 하리라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너희가 만일 길과 행위를 참으로 바르게 하여 이웃들 사이에 공의를 행하며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말며 무죄한 자의 피를 이곳에서 흘리지 아니하며 다른 신들을 좇아 스스로 해하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를 이곳에 거하게 하리니 곧 너희 조상에게 영원 무궁히 준 이 땅에니라 너희가 무익한 거짓말을 의뢰하는도다 너희가 도적질하며 살인하며 간음하며 거짓 맹세하며 바알에게 분향하며 너희의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을 좇으면서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에 들어와서 내 앞에 서서 말하기를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 하느냐 이는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려 함이로다. (렘 7:1-10)

옛날에 유대인들이 우상 숭배에 빠졌던 사실을 읽으며 우리는 의아해 한다. 어떻게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그렇게 할 수 있었는가라고. 그러나 현대 교인들이 오히려 더한 우상 숭배들에 빠져 살면서도 전혀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한 사실을 알지 못하는가?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돈의 신, 탐욕의 신, 인기의 신, 자랑과 유행의 신, 간음과 음란함의 신, 명예와 쾌락의 신들을 숭배하며 살고 있다. 고대의 우상 숭배하는 자들도 저희의 신들을 눈에 보이는 물질로 조각하여서 자기들이 원하는 것들을 제공해 주는 신, 자기들이 원치 않는 것들이나 심판을 막아 주는 신들로 새겨 놓고 자기들이 만들어낸 신들에게 경배하였던 것이었다. 사실은 자기들이 원하는 바를 가시적인 모양으로 만들어 놓고 그것을 추구하며 예배하는 것이 바로 우상 숭배였다. 그렇다면 오늘날 현대 교회들 안에도 우상 숭배들이 있는가? 물론이다. 너무나 우상 숭배가 만연한 것이 사실이 아닌가? 자기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성경의 가르침과 복음을 바꾸어 놓고 거기에 절들을 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일들을 많은 목사들이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불이 아니라 아론의 아들들이었던 나답과 아비후가 드린 것과 같은 다른 불을 가지고 성전에 드리고 있는 것이다. 시내산 아래서 군중들의 요구에 못 이겨 금송아지를 만들어 준 아론과 같은 연약한 모습의 목자들이 너무나 많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성전으로 들어오는 교인들을 향하여 이렇게 외쳤다. 이곳이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성전이라는 거짓말을 믿지 마시오. 당신들이 진리를 말하지 않고 진리대로 살지도 않으며 하나님의 율법대로 순종하여 살지도 않으면서 교회에 와 예배만 드린다는 것은 우상 숭배와 다를 바가 없는 것이오. 집에서는 우상을 숭배하면서 교회 와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구원 얻었다고 말하는 것은 가증한 일이오. 그러한 거짓말을 믿지 마시오. 그렇게 외친 예레미야를 교회의 교인들과 성직자들이 목을 잡고 현장에서 그를 죽이려고 했던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들이다. 교회에 오는 자들을 평안하게 해 주라고 부름을 받은 자들이 아니다. 엘리야가 그 당시 교회의 교인들을 그저 위로하고 다독거리기 위하여서 말하고 설교하였더라면 우리가 성경에서 읽는 부흥과 개혁은 결코 없었을 것이다. 만일 침례 요한이 사람의 권위나 비난을 두려워하여 부드러운 말들로 가르쳤다면 결코 회개하는 일들이 있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는 그 당시에 만연하였던 잘못된 구원론을 지적하며 곧 바른 설교를 하였다. 요한이 침례 받으러 나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 (눅 3:7-9) 독사의 자식들이란 거듭나지 못한 자들이란 의미이다. 침례 요한 당시에 교회에서 가르치고 있는 평안한 구원론을 정죄한 것이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여전히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오늘날 대형 교회 주의는 결코 성경적일 수가 없다. 큰 교회로 성장시키겠다는 프로그램들은 오히려 인간적인 욕심이요 성령의 역사가 아니다. 많은 교인들을 모으려면 곧바른 진리를 말 할 수가 없다. 대중들이 좋아하는 말을 해 주어야 한다. 그들이 선호하는 주제들을 설교해 주어야 한다. 그래야 많은 사람들을 불러 모을 수가 있지 않겠는가? 어떻게 하면 복을 받을 수 있으며, 어떻게 하여야 돈이 잘 벌리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해주어야 하고, 재미있고 신나는 이야기들을 해 주어야 한다.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말들은 삼가 해야 한다. 심지어는 스트레스를 풀어 주기 위하여 개그맨과 같은 웃기는 이야기들을 많이 섞어서 설교를 해 주어야 한다. 그래야 대중이 모일 것이 아닌가?

우선 사람들을 많이 모아야 되지 않느냐고 역설을 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잘못된 동기를 가지고 모여든 자들을 오히려 다 쫓아 보내셨다. 인간적인 기대를 가지고 왔던 자들이 실망하여 다 돌아가는 뒷모습을 보시면서 예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 줄 믿고 알았삽나이다. (요 6:67-69)

사람만 많이 모이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다. 쭉정이들을 많이 모아 놓으면 결국에 알곡들도 함께 망하게 되는 일이 생기게 된다. 잘못하다가는 우리를 핍박하는 자들을 많이 모아 놓게 되는 격이 되고, 진리와 의의 표준을 타협시키는 길을 쉽게 만드는 통로가 되는 것이다.

교회는 진리를 가지고 하나님을 경배하며 섬기는 곳이며, 성경 말씀을 있는 그대로 가르쳐서 거룩한 하늘에 들어 갈 자들을 준비시키는 곳이 교회이다. 교회란 인간의 권위나 정치를 통하여 마련된 장소가 아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믿는 자들과 또한 그렇게 믿으려고 결심하는 자들이 모인 곳이다. 내 이름으로 두 세 사람이 모인 그 곳에 내가 그들과 함께 하시겠다고 예수께서 말씀하시었다. 바로 그것이 교회이다.

목사들은 진리를 가르쳐야 한다. 목사들은 성경 말씀을 설교하여야 한다. 영혼을 구원하는 참된 복음과 영혼의 꼴을 먹이는 진리를 가르쳐야 한다.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나 하며, 신문 사설들이나, 혹은 사회 개혁 운동, 정치 운동 등을 설교하라고 목사로 부름 받은 것이 아니다. 교인들을 배꼽을 잡고 웃도록 만들면서 어떻게 진실된 회개를 전할 수 있으며, 또한 대형 교회로 성장할 꿈을 꾸면서 어떻게 죄를 지적하며 하나님 앞에 굴복할 것을 촉구 할 수 있겠는가!

참으로 무언가 잘못되어 있다. 교회 목회가 상업주의로 흐르고 있다. 목회자들이 모이면 큰 교회 건물과 많은 교인 숫자들을 자랑하고 있다. 만일 예수님께서 현대 시대에 목회하고 계시다면 필시 주님은 이단자요, 실패한 목회자라는 판단을 받을 것임에 틀림이 없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침례 요한을 그 당시 랍비 학교에 보내시지 않고 조용한 광야에서 성령을 통하여 따로 교육을 시키셨던 것이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였다. 주님께서도 랍비 학교에 다니시지 아니하셨다. 경건한 어머니와의 교제와 조용한 성령의 역사와 성경 말씀을 읽고 명상하는 것이 예수님의 교육이었다. 겸손하게 육신의 아버지 요셉의 목수간에서 일하시는 것이 그 분께서 참석하셨던 학교였다. 좋은 학점을 받으려고 경쟁하고 서로 높은 자리나 더 큰 교회를 물려받으려고 싸우는 그러한 가르침을 받지 않으셨다.

그뿐인가? 오늘날 설교학은 주석 설교라고 해서, 성경 말씀들을 너무나 많은 갈래로 토막을 내어놓고 나중에는 이것이 과연 하나님의 말씀인가를 의심할 정도로 복잡하게 해석하여 설명을 한다. 그러다 보니 단순하고 잘 연결되어 있는 성경 말씀들의 직접적인 진리보다는 인간들이 자기 의견들을 가져다 붙이고, 자기의 사상들을 집어넣은 말씀들을 전하기 일쑤다. 설교가 실제 생활을 개혁시키고 마음의 변화를 가져오는 식으로 가르쳐지는 것보다는 학문적이고 지식적인 이해를 주는 식으로 행하여지게 되었다. 예수님 당시의 랍비들은 기가 막힌 학자들이었다. 그들의 고대 주석 책들을 읽노라면 놀라울 정도로 학문적이고 논리적인 가르침들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가르침들에는 경건의 모양은 있었으나 경건의 능력은 없는 것들이었다. 사람의 마음을 회개시키고 변화시키는 능력이 그 안에는 없었다. 그러한 가르침을 받았던 교인들이 결국에는 성경이 예언한 메시아를 거절하고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았지 않았는가!

진리를 있는 그대로 전하지 않기 때문에 참 성령의 역사가 드물게 되었다. 그래서 생긴 빈 공간을 채우기 위하여 웃기는 개그 형식의 설교나 교인들의 실생활을 도와주는 프로그램들이나, 또는 조직적 능력으로 사람들을 붙들어 매어 놓기 위하여 고안된 구역반 조직들로 교회를 성장시키려고 애쓰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심지어는 거짓 성령 운동이나 치유의 은사 운동을 통하여, 그리고 더 나아가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시끄러운 예배 형식들을 도입하여 마치 성령이 임한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어 교인들을 감정적인 신앙을 하도록 만들어 놓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지 않는가?

이제는 반성 할 때가 된 것 같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선포하여 교회에 참된 부흥을 가져와야 할 때가 되었다. 진리를 통하여 참된 성령의 역사를 불러 와야 할 때가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주님의 마음에 합한 목자들을 찾고 계신다! 하나님의 종들이 받을 축복과 보상은 놀라운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그들이 받게 될 심판 또한 클 것이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 이렇게 기도하자! 주님 지금 제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종입니까? 저의 생각과 묵상이 주님께 가납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6부 - 사라져 가는 목회자의 기도

사랑하는 주님!
제가 남들에게 그렇게 되라고 설교하는 대로 제 자신이 거듭나고 실천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지도자로서 갖게 되는 평판과 명예의 종이 되지 말게 하여 주옵소서.  영혼들을 저에게로 이끄는 이기심으로부터 저를 보호해 주시고, 그들을 하늘로 이끄는 주님의 마음을 제게 주소서. 영원한 생명에 접촉하는 이들을 사려 깊고 친절하게 도와줌으로써, 영혼들의 시선을 주님께로만 이끌게 도와주소서. 저로 결코 거칠게 되지 않게 하옵시고, 불필요하거나 가혹한 말을 하지 않게 하시며, 예민한 영혼들에게 불필요한 고통을 주지 않게 도와주소서. 저로 용기 있고 명랑하고 열심 있는 종이 되게 하시고, 주님의 부르심에 거룩한 열성으로 답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주님!
저에게 게으름과 죄를 예민하게 느끼는 양심을 주옵소서. 저를 세속으로부터 지켜줄 보호의 방벽을 제 앞에 높이 세워 주소서. 저로 하여금 이것이 안전한지, 저것이 행정적인지 또는 이것이 인기 있는지를 생각지 않게 하옵시고, 이것이 옳은 길인가를 주님께 여쭈게 하여 주옵소서. 저로 제 주위에 있는 다른 사람들의 가치를 높이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저에게 큰마음을 주셔서, 사소한 일들을 간과하도록 도와주시고, 고의적인 것이나 부지중인 것이나 그들의 허물을 잊어버리도록 도와주옵소서. 제게 은혜를 베푸사 보복하거나 변명하려는 입을 막아 주옵시고, 무엇보다도 저를 반대하거나 저에게 상처를 입힌 자들에게 제가 가진 영향력이나 지위를 사용하지 않게 도와주시옵소서. 그리고 저로 제 동료 일꾼들의 사업을 위하여 진심으로 기도하게 하옵소서. 저로 사소한 일을 피하고, 진리와 원칙에 위배되지 않는 모든 일들에서 양보의 정신을 나타내게 하여 주옵소서. 저로 저보다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을 대할 때에라도 제 윗사람에게 하듯 존경과 예의로 대하게 하여 주옵소서. 저를 도우사 일이 잘되지 않을 때, 그 핑계를 찾는 대신에 결과에 대한 책임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제가 할 수 있지만, 나 자신이 하고 싶지 않을 일들을 남에게 요구하지 않도록 도와주소서.

사랑하는 주님!
저로 언제나 형제의 성공을 참으로 기뻐하게 하시고, 그것이 나에게 손해가 될지라도 그의 성공을 위하여 기도하게 도와주소서. 저로 다른 사람의 실패나 어리석음의 껍질을 벗기지 않게 하시고, 제가 형제에게 대하여 좋은 것을 말할 만한 것이 없을 때에는 입을 다물도록 도와주소서. 그의 입을 지키는 자는 그의 생명을 지키려니와 입을 크게 여는 자는 파멸을 당하느니라고 하신 말씀을 하루에도 여러 번씩 기억하게 하소서.  현인의 말씀대로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분을 일으킨다는 말씀을 기억함으로써, 분노의 신이 저를 유혹할지라도 참게 하여 주옵소서. 제 형제가 제 계획이나 제 견해를 밝히 이해하지 못할 때에라도, 항상 은혜를 베풀도록 하옵시고, 다만 원칙과 진리가 위기에 처했을 때에만 하늘이 무너져도 굳게 서게 하옵소서. 주님!

저로 경솔하거나 성급한 판단을 하지 않게 도와주소서. 갑작스런 일에는 즉각적인 관심과 행동을 취해야 하지만, 대부분의 일은 먼저 기도를 드리고 결정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하여 주소서. 그릇 행한 이들을 다룰 때에, 저로 사랑과 자비와 참된 공의를 시행케 하사, 제가 제 자신이 취급 받기를 원하는 대로 그에게 행하게 하소서. 오! 주님이시여, 저를 도우사 기도의 사람, 말씀의 사람이 되게 하시고, 최선보다 못한 것은 아무것도 주님과 당신의 사업에 바치지 말게 하옵소서.  그리고 저로 그리스도를 모든 일의 처음과 나중 그리고 최선으로 삼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