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편지: 진동, 그 감격스런 떨림

 "이 또 한 번이라 하심은 진동치 아니하는 것을 영존하게 하기 위하여 진동할 것들 곧 만든 것들의 변동될 것을 나타내심이니라(히 12:27).
 이것은 흔들릴 수 있는 것들은 모조리 없애 버리시겠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흔들리지 않는 것들만을 남기려는 것입니다(새 번역 성경, 히 12:27). 모든 것의 시작은 진동이었습니다. 이 세상이 처음 존재하게 된 것도 진동 때문입니다. 태초에 말씀으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그 말씀은 진동이었습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진동으로 다가오십니다. 수많은 떨림과 흔들림으로&&. 그 진동 때문에 적나라하게 드러나기도 하고, 사라져 없어지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속에 있는 것을 모조리 진동을 통해 진동하게 하시고, 더 이상 흔들리지 않고 진동하지 않을 것들만을 남게 하십니다.  당신은 아십니까? 그 수많은 진동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다가오심을&& 때론, 살았고 운동력이 있는 말씀으로, 때론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는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게(히 4:12,13) 하시는 성령의 역사로, 그리고 섭리의 사건과 일들로, 우리의 형편없는 모습을 드러내시려고 다가오심을&&. 그리고 그 진동 때문에 비로소 우리가 가난한 모습으로 내려앉을 수 있음을&&.

진동, 그 우주의 시작
 진동은 우주의 시작이었습니다. 종전의 과학자들은 우주를 구성하는 가장 작은 단위를 원자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원자는 원자핵과 전자로, 또 원자핵은 양성자와 중성자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것들은 더 작은 최소의 구성 물질인 쿼크로 구성되어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근래에 들어 물리학자들이 새롭게 주장하는 흥미로운 발표들이 생겨났는데, 그 이론은 초끈 이론(super string) 으로서, 우주의 최소 구성 물질인 쿼크는 아무 것도 없는 빈 공간이 아니라 입자들이 진동하는 가느다란 끈, 초끈(super string)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이론입니다.

 이 초끈 이론은 우주의 최소 단위가 쿼크처럼 보이면서도 이보다 훨씬 작고 가는 끈으로 이루어져 있어, 1차원적인 끈의 지속적인 진동에 의해 우주 만물이 만들어진다고 가정하는 이론입니다. 1970년대 초부터 등장하기 시작해, 1980년대 미국의 이론물리학자 J.슈바르츠와 영국의 M.그린에 의해 본격적으로 대두되었습니다. 대표적인 학자로는 1995년 초끈 이론의 여러 가지 이론을 단일 체계로 통합시켜 M이론을 제시한 미국의 위튼(Edward Witten) 박사와 게이츠(Jim Gates) 박사, 스탠퍼드의 실버스타인(Eva Silverstein) 박사, 영국의 수학자 아티야(Michael Francis Atiyah) 등이 있습니다.  우주의 최초의 생성을 진동으로 생각하는 과학 이론은 흥미롭다고 생각됩니다.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던 하나님의 그 말씀은 소리의 진동이었을 테니까요. 그리고 우리 몸의 가장 기본 단위인 세포의 원자핵 속에 있는 쿼크 안에도 하나님의 진동으로 함께 울릴 수 있는 진동으로 가득 차 있을 테니까요.

진동이 미치는 영향
 요즈음 음악과 진동으로 심리적인 질병을 치료하는 음악 치료법이 의학계에 등장했는데, 그것은 음향과 음악적 자극들을 통해 신체 작용에 효과적인 영향을 끼치는 치료 방법입니다. 음악 치료는 자폐와 정서 장애 아동, 정신 지체 아동과 성인, 수감자, 중독자, 의료 환자, 종말기 환자, 신경증 환자 등 넓은 대상을 상대로 사용되고 있으며, 이 치료에는 진동, 소리, 음악의 보편적 특성들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음악과 소리의 진동은 인체뿐만 아니라 식물계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최근 한국의 농촌 진흥청의 이완주 박사가 발표한 음악에 의한 식물 생육 촉진 및 성분 함량의 변화라는 논문이 국내외 음악 치료 전문가들의 비상한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는데, 그 논문에 따르면 비록 귀가 없는 식물이라도 음악을 들려주면 더 잘 크고, 병충해에 더 강하고, 당도가 더 높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 박사는 논문에서 경남 농촌 진흥원 시설 화훼 시험장에서 미나리, 오이, 심비디움, 양란 등 10여 가지의 식물을 대상으로 소리 진동에 대한 식물의 반응 실험을 실시한 결과, 음악을 들려준 식물군은 그렇지 않은 식물군에 비해 무려 30% 이상의 생육 촉진을 가져왔다.고 밝혔습니다. 음악의 진동은 식물 세포에 공명을 일으켜 잎 뒷면의 기공(숨구멍)이 열리고 광합성이 증대되어 생육 촉진은 물론 양분도 많이 빨아들이게 된다는 것이 이 박사의 설명입니다.

하나님의 진동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매일의 생애에 진동으로 다가오십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기 위해, 우리와 만나시기 위해 다가오실 때, 우리는 그 진동의 흔들림을 피할 수 없습니다. 빛을 통해서이든,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이든, 우리의 가련한 모습이 드러나게 하는 고난을 통해서이든,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있는 모습 그대로를 드러나게 하시기 위하여 사용하시는 그 흔들림의 진동은 아무도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날 때 인간은 진동을 느낍니다. 다니엘은 주님을 만났을 때 흔들려 쓰러져 내 몸에 힘이 없어졌고 호흡이 남지 아니하였(단 10:17)다고 고백하였고, 이사야와 에스겔 역시 진동 속에서 주님을 만났으며, 사도 바울도 주님을 만날 때 빛과 천둥과 우레의 진동 가운데 떨며 만났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만나 진정으로 그분의 진동을 경험한 사람들은 변했습니다.  무릇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눅 20:18).

 하나님과 진정한 만남을 한 사람은 깨어집니다. 깨어지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진동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부딪혀 깨어지는 충격은 두렵고 무섭고 아프지만, 사정없이 흔드시는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는 육신의 자아를 산산이 깨어 부숴뜨리고, 흔들릴 것은 다 흔들려 나가게 하여 다시는 진동하여도 변하지 않을 것들만 남게 합니다. 영혼이 깨어지는 과정은 죽음의 터널을 통과하듯이 괴롭고 고통스럽지만, 그러나 한치의 착오도 없이 미세하고 정확한 이 하나님의 진동은 영혼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

함께 울리는 행복한 진동
 진동은 새로운 것을 탄생하게 합니다. 지혜로운 하나님께서는 두려운 떨림만으로는 우리 영혼이 완전히 소생할 수 없음을 잘 아십니다. 때리시고 아프게 하신 후, 하나님께서는 사랑으로 영혼을 치료해 주십니다. 여호와께서 그 백성의 상처를 싸매시며 그들의 맞은 자리를 고치시는 날에(사 30:26)는 마음속에 일곱 깔 무지개처럼 아름다운 행복이 떠오를 것이며,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사 61:1)시는 하나님께서 고통 후에 주시는 평안은 쓴 약을 먹은 후에 삼키는 꿀물처럼 달콤할 것입니다.  두려운 진동이 한차례 지나가고, 이제는 더 진동하여 떨어져 나갈 것이 없이 조용해진 심령 속에, 고난을 통해 겸손하고 낮아진 영혼 속에, 마치 현악기의 줄을 타는 연주가의 능숙한 손놀림처럼 부드러운 손길로 쓰다듬으시며 하나님께서는 비로소 그 알 수 없었던 시련의 이유를 가르쳐 주십니다. 그리고 그분의 임재의 아름답고 황홀한 울림으로 영혼을 행복하게 해 주십니다. 

 서로의 영혼을 함께 울리는 진동이 있기 때문에 사랑은 그 사랑을 하는 사람들을 행복하게 합니다. 이제 진동치 못할 나라가 마음속에 이루어진 사람의 마음속의 현 하나 하나는 하나님의 손길로 만들어진 그 행복한 진동과 울림으로 가득 차 떨립니다. 그리하여 그 아름다운 음악은 이제 마음속에만 담아두기가 힘든, 이웃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 무한히 퍼져나가는 또 다른 진동이 됩니다.  하나님의 진동, 그 감격스러운 떨림이 당신에게도 왔습니까?

생애의 빛에서

강병국 목사
 산다는 것은 죽는 것보다 더 두려운 일입니다. 죽으면 우리의 모든 인생이 마감되는 것이며 더 이상 유혹을 받는 일도 없을 것이요, 더 이상 죄와 실수를 범하는 일도 없게 될 것이지만, 계속 산다는 것은 여전히 영적인 전쟁과 삶의 선택이 지속될 것이기에 그러한 것이지요.

 사실상 죽어 버리면 무덤으로 우리를 인봉하여 버리는 것이기 때문에 사단도 더 이상 우리를 건드리거나 괴롭힐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산다고 하는 것은 특권이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찬스입니다. 아울러 아직도 숨쉬고 있다는 것은 하늘에서 영원히 살 수 있는 성품과 자격을 준비할 수 있는 놀라운 기회를 더 가지고 있다는 뜻이 되겠지요.

 아무리 보아도 이 세상은 오래가지 못할 것 같습니다. 자연계의 파괴와 도덕적인 부패,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 예언들의 성취는 우리에게 그 이외에 다른 생각을 갖지 못하도록 코너로 몰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곧 오실 예수님의 재강림을 위하여 준비하는 길일까요? 감정적인 예배나 눈물로 드리는 기도만으로 준비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실재적이며 확실한 헌신의 생애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알아야 합니다. 무엇이 나를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이며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충성스러운 청지기로 살아가는 것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현재 나의 삶의 모든 부분들을 현명하게 사용하며 계발하는 일과, 내가 가지고 살아 가는 모든 것들을 하나님을 위하여 사용하여 나가는, 마치 장사를 하여 이윤을 남기는 신실한 종과 같은 태도가 필요합니다. 어떤 면에서 그렇게 하여야 하냐고요? 이번 호는 이러한 중요한 이슈를 다루고 있습니다. 여러분께 큰 은혜가 되기를 바랍니다.

가정과 영성: 그대는 들소인가? 연어인가? - 제1부

 교회 안에 들소가 있고, 연어가 있다. 교회 안에 두 종류의 그리스도인이 있는데, 한 종류는 들소의 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고, 다른 하나는 연어와 같은 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다. 들소와 같은 사람은 어떤 사람이고, 연어와 같은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이제부터 이 문제를 살펴보도록 하자.

아프리카 들소 이야기
 한번은 아프리카의 넓은 평원에 수백 마리의 아프리카 들소 떼들이 풀을 뜯고 있었다. 그런데 뱀이 그 중 한 마리의 발목을 물었다. 들소는 깜짝 놀라서 껑충 뛰더니 갑자기 뛰기 시작하였다. 한 마리가 뛰기 시작하니까 옆에 있던 들소들도 영문도 모르고 함께 뛰기 시작하였고 나중에는 수백 마리의 들소 떼 전체가 한 방향으로 뛰기 시작하였다. 수많은 들소 떼들이 뛰고 있는데 뛰는 이유를 아는 들소는 오직 한 마리뿐이다. 왜 나머지 들소 떼들은 정확한 이유도 모르면서 뛸까? 다 뛰는데 나만 혼자서 가만히 있으면 괜히 불안하기 때문에 뛰는 것이다. 마음의 안정과 평안을 위해서 뛰는 것이다. 수백 마리의 들소 떼들이 함께 뛰기 때문에 혼자만 가만히 있을 수도 없다. 뛰지 않으면 다른 들소 떼들 발에 밟혀 죽기 때문이다.  얼마 후에 절벽이 나타났는데 선두에 서서 뛰던 들소가 멈추어 서려고 했지만 뒤에서 밀려드는 들소 떼에 밀려서 절벽 아래로 떨어져 수많은 들소들이 죽고 말았다.

 이것이 군중 심리이다. 군중 속에 있으면 판단력을 잃어버리고, 비판의 능력을 잃어버린다. 개인적인 책임감을 잃어버린다. 한 마리의 들소가 뛰기 시작하니까 다른 수백 마리의 들소들이 아무런 생각없이 뛰다가 낭떠러지에 떨어져 죽는 것처럼, 사람들도 군중 속에서는 판단하지 않고, 생각하지 않은 채 사람들이 걸어가는 대로 걸어간다. 내가 왜 이 길로 걸어가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도 없고, 나를 따라오는 사람들에 대한 책임감도 없다. 아무도 이 길을 걸으면 안 된다고 외치지 않는다. 그냥 입을 다물고 끝까지 가는 것이다. 남들이 다 뛰는데 혼자 가만히 있으면 눈총을 받고 따돌림을 당하게 된다. 함께 뛰지 않는 자는 그 사회에서 매장당하게 된다.

 내가 왜 장로교회를 다녀야 하는지, 내가 왜 침례교회에 다녀야 하는지, 내가 왜 수많은 교회를 놔두고 이 교회를 다녀야만 하는지에 대한 개인적인 판단이 없다. 그냥 다수의 사람들이 그 교회를 다니니까 나도 그 교회에 나가는 것이다. 내가 왜 지금 여기서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명확한 이유와 목적이 없는 그리스도인은 한번 자문해 보아야 한다. 혹시 내가 들소 같은 그리스도인이 아닌가 하고 말이다.
 낭떠러지에 떨어져 수많은 들소들이 죽었지만 어떤 들소도 그것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았던 것처럼, 군중 심리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잃어버리고 멸망하지만 누구도 그것에 대하여 책임을 지지 않는다. 이것이 들소 같은 그리스도인들이 당하게 되는 위험이다. 들소 같은 그리스도인들 속에 있으면 그들과 함께 따라가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이 가는 대로 따라가지 않으면 주변 사람들에게 따돌림 받고 눈치 받게 되는데 그들 중 대부분은 결국 군중의 뜻에 굴복하게 된다.

연어와 같은 그리스도인
 들소와 같은 그리스도인이 있는가 하면 연어와 같은 그리스도인이 있다. 군중들의 요구와 기대에 맞추어서 사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군중들과 충돌하면서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있는데 그들이 연어와 같은 그리스도인이다. 이제 연어의 삶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한번은 텔레비전에서 연어의 일생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미국 서북부의 포트랜드에 있는 강의 상류에는 연어 부화장이 여럿 있는데, 연어가 그곳에서 알을 낳아 새끼들이 자라면 그것들을 강에 방류시킨다. 수백만 마리의 연어 새끼들이 강을 따라서 바다로 나가는 장면은 정말 장관이다. 과학자들은 그들을 추적하여 몇 년 후에 그들이 다시 돌아오는 장면을 취재하였다. 성인이 된 수많은 연어들이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장면은 정말 놀라웠다. 다른 물고기들은 물의 흐름과 먹이감을 따라다니느라고 정신없는데 연어들은 강을 거슬러 역행하는 것이다. 댐이 나오면 댐을 헤엄쳐 오르고, 물살이 매우 빠른 바위 계곡이 나오면 10번, 20번 실패하더라도 헤엄쳐서 빠져나간다. 그래서 결국에는 자신이 태어난 부화장을 찾아가서 그곳에서 알을 낳고 자신은 죽는다.

 연어의 삶의 목적은 본향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는 군중 심리와 역행하는 삶도 마다하지 않는다. 연어의 삶 속에는 전혀 군중 심리가 없다. 연어는 주변에 다른 물고기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어디로 가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다. 아무도 그에게 강요하지 않지만 땀을 흘리며 줄기차게 강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간다. 연어는 오직 하나님께서 그의 두뇌 속에 넣어 주신 뜻을 따라서 살아갈 뿐이다.  천신만고 끝에 부화장으로 다시 돌아온 어미 연어들을 보면 깜짝 놀라게 된다. 그들의 온 몸이 상처투성이기 때문이다. 물줄기를 역행하여 오면서 바위에 부딪히고 댐을 헤엄쳐 올라오는 동안 여기저기 찢겨서 성한 데가 없다. 그런 연어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것은 본향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피 흘리며 투쟁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다.

 아무나 연어처럼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뜻이 마음속에 새겨진 그리스도인만이 연어처럼 살 수 있다. 반드시 본향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소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만이 연어처럼 살 수 있다. 연어와 같은 그리스도인은 세상이 흘러가는 방향과 반대 방향으로 거슬러 살기 때문에 세상과 충돌하면서 살게 된다. 세상과 함께 흘러가는 것이면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부딪치게 된다. 그것이 세상이든지 교회든지 상관하지 않는다. 연어는 늘 충돌하기 때문에 그 삶이 고달프다. 오해하지 말라. 세상이나 군중과 충돌한다는 말은 사람들의 멱살을 잡는다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거스르는 정신을 깨뜨리면서 앞으로 나간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뜻에 거스르는 군중의 요구나 기대에 굴복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그리스도인이 있는데, 하나는 군중을 따라서 세상과 함께 흘러가는 사람들이고 다른 하나는 세상(군중)과 충돌하면서 거슬러 올라가는 그리스도인이다. 두 종류의 그리스도인들이 있는데, 하나는 들소와 같은 그리스도인이고 다른 하나는 연어와 같은 그리스도인이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들소와 연어
 사도 바울은 연어 같은 그리스도인과 들소 같은 그리스도인에 대한 정의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갈 1:10).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서 사는 것, 바로 그것이 연어 같은 그리스도인이고 하나님께 내 자신을 바친다는 말의 진정한 의미이다. 사람을 만족시키는 것이 아니다. 사람도 만족시키고 하나님의 뜻도 따라가려고 어중간하게 애쓰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만을 만족시키면서 사는 사람이다. 사도 바울의 이 말씀에 의하면 들소 같은 그리스도인은 어떤 그리스도인인가? 사람들을 기쁘게 하며 사람의 요구를 만족시키려고 애쓰는 사람들이다. 들소란 군중의 요구와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는 사람들이다.

 교회가 군중 심리에 휩쓸려가기 시작하면 그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음성이 더 이상 나오기 힘들다. 왜냐하면 군중 심리에 취해 있는 목회자나 장로나 교회 지도자는 결코 군중의 요구나 기대에 역행하는 설교나 원칙을 세울 수 없기 때문이다. 교회 안에 연어 같은 지도자가 없고 들소 같은 사람들이 모여 있으면 그런 교회에는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수 없다. 사람의 눈치를 살피면서 주변 사람들의 기대를 만족시키고 기쁘게 하고자 하는 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수 있겠는가?

성경에 나오는 연어들
 이 세상과 오늘날 현대 교회에는 아프리카 들소들이 너무나 많이 있지만 성경에는 연어와 같은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 중에서 누가 연어처럼 살았으며 누가 들소처럼 살았는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노아 : 노아는 연어처럼 살았다. 왜 노아를 연어처럼 살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왜냐하면 노아는 세상에 충돌하면서 살았고, 그 당시 세상과 함께 흘러가고 있던 교회와 충돌하면서까지 하나님의 기별을 전했기 때문이다.  홍수가 나기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담과 하와 그리고 에녹과 같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 생존해 있었다. 므두셀라는 홍수가 나던 해까지 살아 있었다. 진리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널리 퍼져 있었던 때였다. 그러므로 노아의 때에도 많은 교회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있었다. 왜 하나님께서는 그 당시 수많은 교회 지도자들을 놔두고 노아를 택하셔서 홍수에 대한 기별을 주셨을까? 하나님께서 그 당시 가장 인기 있던 지도자에게 기별을 주셨다면 보다 효과적으로 전파될 수 있었을 텐데 왜 노아에게 기별을 주셨을까? 왜냐하면 심판의 기별은 연어만이 전할 수 있는 기별이기 때문이었다.
 들소 같은 사람은 결코 심판의 기별을 전할 수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군중에게 굴복하지 않는 사람, 하나님의 진리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세상과도 충돌할 수 있는 사람을 찾으셨던 것이다. 아무리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할지라도 연어와 같은 특성이 없으면 결코 하나님의 기별자가 될 수 없다. 만일 노아가 교인들의 눈치나 보면서 그들을 기쁘게 하려고 애쓰는 들소 같은 사람이었다면 결코 심판의 기별을 있는 그대로 전할 수 없었을 것이다.

 노아 방주 이야기는 군중 심리에 대한 가장 극적인 예증이다. 그는 군중의 요구나 기대와 정면으로 충돌하였다. 만일 노아가 군중 심리를 조금이라도 따랐다면 산 중턱에 방주를 짓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관심은 오직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에만 집중되었다. 온 세상 사람들이 그를 조롱했지만 그는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일에만 골몰하였다. 그는 세상과 충돌하며 살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의 군중들은 어떠했는가? 노아를 미친 할아버지 취급하였다. 방주가 완성되자 하나님께서는 초자연적인 기적을 통하여 동물들을 방주 안으로 불러 모았지만, 군중 심리에 붙잡혀 있던 사람들은 서로 눈치만 보았지 방주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그때 사람들의 마음은 매우 크게 흔들렸지만, 아무도 노아의 손을 잡고 방주로 들어가지 않았다. 자칫 잘못하여 노아의 지지자로 낙인 찍히면 그것은 그 사회에서 매장되는 것이었다. 군중의 압박은 초자연적인 현상이나 기적보다도 훨씬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결국 군중 심리에 붙잡혀 있던 아프리카 들소 같은 그리스도인들은 멸망했고, 연어 같은 그리스도인만 방주에 들어가서 구원받았다.

 예수님 : 예수님의 생애는 태어날 때부터 군중의 기대를 깨뜨리면서 시작되었다. 하늘 왕이 이 땅에 오셨는데 베들레헴의 말구유에 거적 같은 포대기를 깔고 태어나셨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방식으로 이 땅에 오시지 않았다. 그렇게 태어나셨기 때문에 4천 년 동안 메시아를 기다려 오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거절하게 되었던 것이다.  영광의 왕께서 자기를 낮추시고 인성을 취하셨다. 그분이 거했던 지상에서의 환경은 거칠고 열악하였다. 예수께서는 모든 외적 장식을 피하셨다. 왜냐하면 재물, 세상의 명예, 인간적인 위대함은 결코 영혼을 사망에서 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군중은 이 세 가지, 즉 재물, 명예, 인간적인 위대함을 매우 좋아한다. 그래서 교회 안에 이 세 가지가 들어오면 교회는 들소 떼들로 가득 차게 된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교회가 정결하게 되어서 이 세 가지 정신이 교회 안에서 사라지게 되면 그런 교회에는 연어들이 몰려들게 된다. 예수께서는 연어만이 그 진정한 가치를 알아볼 수 있는 모습과 방법으로 이 땅에 오셨다. 예수께서는 철저하게 군중들의 취향과 충돌하면서 당신의 생애를 시작하였다.

성안과 성밖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는 예루살렘 성밖에서 시작되어 성밖에서 끝났다. 천사들이 메시아의 탄생 소식을 가지고 가장 먼저 어디를 찾았을까? 예루살렘 성안을 먼저 찾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곳에 유대교회의 지도자들이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천사들이 하늘의 소식을 가장 반대 없이 효과적으로 전파되기 위해서는 성밖에 있던 이름없는 목동들보다는 예루살렘 성안의 대제사장에게 전해야 했을 것이다. 천사들이 성안을 살펴보았지만 거기에는 들소 같은 군중들밖에 없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성밖으로 나가 연어들을 찾았던 것이다.

 메시아를 영접할 수 있는 기회는 성안과 성밖에 똑같이 주어졌다. 예수살렘 성안에도 메시아의 탄생에 대한 소식이 전해졌지만, 그 소식은 철저하게 무시당했다. 왜 무시당하게 되었는가? 메시아의 탄생 소식이 성밖 사람들에게 먼저 전해졌기 때문이다. 성안의 지도자들과 군중들은 자존심이 상했던 것이다. 어떻게 하늘의 천사가 우리를 제껴두고 성밖의 저들을 찾아갈 수 있는가? 라는 생각 때문에 메시아의 탄생 소식을 무시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당시 예루살렘 성밖에 어떤 사람들이 살았는가? 가난한 목동들, 문둥병자 같은 전염병 환자들과 같이 그 당시 유대 사회로부터 철저하게 무시당하던 사람들이 성밖에 살고 있었다. 그래서 구속의 위대한 사건은 철저하게 성밖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어린 아기를 메시아로 인정하는 것은 이스라엘 교회 전체의 핍박을 자초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4천 년 동안 기다려왔던 일이 이루어졌지만 예루살렘 성안이 그렇게 조용했던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도 성밖에 세워졌다. 대제사장 집 앞마당에 세워지지 않고, 산헤드린 회당 앞에 세워지지 않았다. 성안 사람들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조롱과 조소의 대상이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성밖에 사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 되었다. 가난한 목동들과 문둥병자들, 멸시받던 사람들을 위한 것이 되었다.  그 당시에 누구도 허물어뜨릴 수 없는 유대교회의 전통이 있었는데, 그것은 하늘의 기별은 오직 예루살렘 성안에 있는 교회 지도자들, 즉 하늘과 지상을 연결하는 공식 채널을 통해서만 내려온다는 것이었다. 그 공식 채널을 벗어나서 전달되는 어떤 기별이나 기적도 유대교회 안에서 인정받지 못했다. 그러한 편견에 사로잡혀 있던 사람들에게 있어서 메시아의 탄생과 십자가는 완전히 가리워졌다. 성안의 지도자가 이끄는 대로 아무 생각 없이 따라다니던 아프리카 들소 같은 군중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하였다.

 예루살렘 성안에 있던 들소 같은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의 초림을 맞이하는 데 철저하게 실패했던 것처럼 마지막 시대에도 들소 같은 군중들은 재림을 준비하는 일에 있어서 철저하게 실패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연어로 살지 않고 철저하게 자신이 소속되어 있는 교단의 높은 곳에서 들려오는 소리만을 의지하면서 아무 생각 없이 따라가는 들소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마지막 시대에 자신이 소속된 교단을 예루살렘 성으로 생각하여 성밖에서 들려오는 기별과 진리에 귀를 막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말세에 당신을 사랑하는 백성들에게 주시는 기별을 거절하게 될 것이다.  군중 심리에 굴복하지 않고 세상과 충돌하면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께서는 그 길을 인도해 주실 것이다. 어떤 경우와 상황 속에서도 성경에 기록된 진리만을 찾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게 된다. 우리 모두 연어와 같은 정신과 신앙으로 살아가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하자!

 다음 호에서 연재되는 제2부 마지막 시대의 군중심리를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건강: 불치의 병도 나을 수 있는 이유

 아는 것이 힘이다.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차이는 매우 크다.
 한번은 이스라엘 육군성에서 군인들의 행군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서 실험을 한 적이 있다. 100km 행군을 하는 군인들을 두 그룹으로 나누어서 한 그룹에게는 행군할 거리와 스케줄 그리고 목적지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주었고, 다른 그룹에게는 행군에 대한 정보를 전혀 주지 않았다. 두 그룹은 결과에 있어서 커다란 차이를 나타냈다. 아무것도 모르고 명령에 따라서 움직인 부대원들은 약 40%가 중간에서 낙오하였으나 모든 정보를 사전에 알고 출발한 부대원들은 한 사람의 낙오도 없이 행군을 무사히 끝마쳤다. 이 실험은 군인들의 행군뿐 아니라 질병과의 투쟁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사실을 시사해 준다. 사람은 자기가 처한 현실에 대해 분명히 알고 있을 때 자신의 체력과 안정을 유지해 나간다.

 우리의 몸은 하루아침에 갑자기 나빠지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몸이 나빠지는 것을 느끼면서 서서히 나빠지게 된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저런 이유로 몸이 우리에게 나타내는 자각 증세들을 무시하면서 살아가게 된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그 증세가 심각해지면 그제서야 병원을 찾게 된다. 의사로부터 너무 늦었다는 통보를 받으면 성급하게 낙담하거나 좌절하고 포기해 버린다. 대부분의 환자들의 문제는 인체가 우리에게 주는 신호를 무시하거나 너무 쉽게 단정 짓고 포기함으로써 인생을 비극으로 몰고 간다. 그러므로 몸의 상태와 질병에 대해서 올바로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예를 들면 암에 걸리면 무조건 죽는다는 잘못된 상식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은 그 잘못된 상식 때문에 공포에 짓눌려서 죽음을 앞당기게 된다. 우리 주변에는 암에 걸렸다가 나은 경우도 분명히 존재한다. 질병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 환자의 투병에 있어서 가장 큰 적이 될 수 있다.

 암에 걸리면 죽는다.는 상식은 의사들이 집계한 통계 숫자에 불과하다. 통계 숫자에만 매달려 정확하게 알아야 할 것은 모르고 몰라도 되는 것에는 집착함으로써 투병의 방향이 빗나가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그러므로 통계 숫자에 매달리지 말고 투병의 방향을 올바로 잡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 현재 투병 중인 사람이든지 건강한 사람이든지 인체에 대하여 정확하게 알아야만 건강한 생활을 누릴 수 있다.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말은 조건적인 진리이다. 올바로 알아야만 힘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원인을 치료하는 것이 참된 치료이다
 우리 몸은 스스로 건강을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그렇게 만드신 것이다. 그런데 사람이 잘못된 생활을 오랜 세월 동안 고집하면 병이 나거나 약해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창조주 하나님께서 우리의 몸을 지으면서 넣어 주신 원래의 그 법칙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간다면 몸은 다시 건강을 되찾게 된다는 것이 생명의 법칙이다. 병이 낫다는 말을 정확하게 표현하면 세포의 병이 낫다고 해야 한다. 간이 나빠졌다는 말은 간세포가 변질되었다는 뜻이고, 폐암은 폐 세포가 암세포로 변했다는 말이다. 모든 병은 세포의 병이다.

 무슨 문제이든지 그 원인을 알아야 근본적인 해결이 가능해진다. 질병도 마찬가지이다. 병의 원인을 알고 치료를 해야만 병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간이 나빠졌다고 걱정하면서 병원에 다니면서 약을 먹는다면 그러한 투병은 매우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러한 치료법은 원인을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증세를 치료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치료법들은 증세만을 치료한다. 머리가 아프면 머리 아픈 증세를 가라앉히는 두통약을 먹고, 배가 아프면 복통을 호전시키는 약을 먹는다. 증세를 관리하다가 병의 깊이가 깊어지면 병이 낫지 않는다고 절망하면서 신세를 한탄한다. 병의 원인이 무엇인가를 알려고 하는 대신에 증세를 다스리면서 건강을 얻기 원한다. 바로 이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이다.

 간을 건강하게 하려면 간세포를 건강하게 해야 되며 간세포를 건강하게 하려면 간세포의 유전자의 건강을 회복시켜 주어야 한다. 유전자를 회복시켜 주는 것, 바로 이것이 질병의 원인을 치료하는 문제에 있어서 핵심이다. 현대 의학은 유전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병들었다는 것은 세포가 변질되었다는 뜻이고 세포 중에서도 세포의 성질을 정하는 유전자에 문제가 생긴 것이 질병의 근본 원인이다. 병의 근본을 알아내고자 할 때 여기서 멈춰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왜 유전자가 비활성화되는 문제가 발생했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야 진정으로 질병에 대한 핵심 원인에 접근하게 된다.

 사람의 세포 안에는 46개의 염색체가 있고, 지금까지 보고된 바에 의하면 10만 종류의 유전자가 있다고 한다. 이 유전자가 세포의 활동을 결정한다. 따라서 유전자가 죽으면 세포가 죽고 세포가 죽으면 조직과 기관이 죽어서 결국에는 생명을 위협받게 된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유전자병이다. 만성병은 모두 유전자병이다. 병에 걸리지 않으려면 유전자가 정상으로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 주어야 하는데 바로 이것을 우리는 생명적 환경이라고 부른다. 문제가 생긴 유전자일지라도 생명적 환경이 계속적으로 유지되면 유전자는 다시 회복된다.  이것을 재생이라고 부르는데 변질된 유전자라고 할지라도 생명적 환경하에서 일정한 시간 동안 치료의 과정을 밟으면 정상으로 회복된다는 것이 창조주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유전자 속에 넣어두신 원칙이다. 환자는 이러한 법칙을 믿어야 회복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유전자 속에 넣어 두신 재생의 법칙을 믿음으로 다시 활기찬 생명을 얻기 위하여 강력한 투병 의지를 불태우게 된다.

유전자가 재생되는 최적의 환경
 병에 걸리기 위해서는 매우 어렵고 긴 과정을 통과해야만 한다. 당뇨병이나 암도 매우 오랫동안 사망적 환경 속에서 힘겹게 살아온 결과로 나타나는 질병이다. 일주일 전에 암 진단을 받았을지 모르지만 실제로 그 암은 15년 내지 20년 전에 시작된 것이다. 세포 하나가 암세포로 변질되는 것은 아주 쉽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정상 세포를 오랫동안 지독하게 괴롭혀야만 암세포로 변질되게 된다. 그런데 변질된 세포에게 생명적 환경을 제공해 주면 그다지 긴 시간이 소요되지 않고도 정상 세포로 돌아온다. 변질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재생은 빠른 속도로 진행된다. 유전자의 이러한 성질을 볼 때마다 창조주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간 경화증이나 신부전증과 같은 병에 걸리면 아, 콩팥은 재생되지 않는데&. 또는 아, 간은 재생되지 않는데&.라는 생각을 갖게 되는데 과학적으로 볼 때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물론, 통계적으로 볼 때 그것은 사실이지만, 유전자의 재생 특성을 통해서 보면 간 경화증이나 신부전증은 회복될 수 있는 질병이다. 그러나 그러한 병에 걸린 환자의 간이나 콩팥이 재생되지 않는 이유는 간이나 콩팥에 심각한 문제가 생기도록 만든 사망적 환경은 그대로 두고 증세만 치료하려고 매달리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통계 숫자가 가리키는 대로의 결과를 거두게 된다. 콩팥을 나빠지게 만든 환경은 그대로 둔 채 재생을 기대할 수는 없다. 사망적 환경을 생명적 환경으로 바꾸어야만 유전자의 재생을 바랄 수 있는 것이다.

 간 경화증 환자가 계속해서 술을 마시면 간세포가 살아야 할 이유가 없어지기 때문에 간세포는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술 대신에 깨끗한 물과 맑은 공기가 들어오고 필요한 영양소들이 신선한 상태로 공급되면 세포는 활력을 되찾기 시작하게 되면서 유전자도 재생 작업을 시작하게 된다. 사망적 환경이란 미움, 원망, 슬픔과 같은 정신적 스트레스와 술, 담배, 고기, 커피, 운동 부족, 공해 등과 같은 육체적 스트레스를 말한다. 이러한 사망적 환경을 제거하고 생명적 환경 속에서 생활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신선한 야채와 과일과 곡류로 채식을 하고 인체에 부담을 주는 것들을 금하고 깨끗한 공기를 마실 수 있는 생명적 환경을 유전자에 제공해 주어야 한다. 또한 창조주 하나님께 마음을 열어야 받을 수 있는 기쁨과 평화가 각 세포들에게 전달될 때 유전자는 매우 급격하게 재생된다. 유전자는 재생될 수 있는 조건이 제공되고 그 필요가 생길 때 반드시 재생된다.

잠자고 있던 유전자도 재생된다
 최근 미국에서 놀라운 연구 결과가 발표되었다. 난소를 완전히 제거한 여성의 몸에서 여성 호르몬이 생산되고 있다는 사실이 발견된 것이다. 난소 제거 수술을 받은 여성에게 의사들은 일반적으로 여성 호르몬약을 먹도록 처방해 주는데, 환자들에게 종종 그 처방을 무시하고 약을 먹지 않는 상황이 일어난다. 그런데 여성 호르몬약을 먹지 않는 환자의 혈액을 검사한 결과 여성 호르몬이 여전히 체내에서 분비되고 있다는 놀라운 사실이 발견된 것이다. 도대체 난소도 없는데 어디서 여성 호르몬이 생성되고 있는지 의사들은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그 호르몬이 생산되는 출처를 알아냈는데 그것은 콩팥 위에 있는 부신 피질이라는 기관이었다.  물론 부신 피질에서 처음부터 여성 호르몬을 생산했던 것은 아니다. 난소가 떨어져 나가니까 부신 피질 세포 속에 있던 여성 호르몬 생산 인자, 즉 그동안 잠들어 있던 유전자가 깨어나서 활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세포는 처음에 난자와 정자가 결합함으로써 생긴 하나의 세포에서 출발된다. 그러므로 모든 기관을 구성하고 있는 세포는 각각 하는 일이 다르고 성질이 다른 세포이지만 본질적으로는 동일한 세포이다. 예를 들면 여성 호르몬을 생산하는 유전자는 어느 세포에나 똑같이 존재하지만, 그 세포가 뇌신경 세포인가 간세포인가 난소 세포인가에 따라서 어떤 유전자는 깨어서 활발하게 움직이고 나머지 다른 유전자는 죽은 듯이 잠들어 있다.

 이것을 뒤집어서 말하면, 어떤 유전자가 깨어나서 일을 하고 어떤 유전자가 잠을 자고 있는가에 따라서 그 세포의 성질과 역할이 결정된다. 뇌신경 세포 속에서는 뇌의 일을 하는 유전자만 깨어 있고 간이나 위장 같은 세포 속에서 일하는 유전 인자들은 다 자고 있는 것이다. 반면에 난소에서는 여성 호르몬 생산 인자가 활발하게 움직이고 다른 일을 할 수 있는 유전자들은 다 잠을 잔다. 부신 피질에서는 부신 피질 호르몬 생산 인자만 활발하고 여성 호르몬을 생산하는 유전자는 난소에서 그 일을 하니까 비활성화되어 있다. 그런데 이렇게 비활성화되어 있던 유전자가 난소가 없어짐으로써 깨어나게 된 것이다. 여성 호르몬이라는 필요가 생기니까 잠자고 있던 유전자가 깨어나고 재생된 것이다. 우리 몸은 이러한 재생 원칙이 철저하게 적용되고 있다.

파괴된 세포도 재생된다
 교통사고로 인하여 췌장의 90%를 잃어버린 사람이 있었다. 췌장 중에서도 인슐린을 가장 많이 생산해 내는 부분을 거의 다 잃어버렸기 때문에 결국 그 사람은 교통 사고의 후유증으로 인하여 당뇨병에 걸리고 말았다. 인슐린 주사를 정기적으로 맞아야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사람은 세포는 재생된다는 진리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생활 전체를 사망적 환경에서 생명적 환경으로 바꾼 후 희망을 갖고 열심히 생명의 원칙들을 준수하며 살았다. 그 결과 놀랍게도 인슐린 생산 세포가 재생되었다. 췌장의 크기가 조금씩 자라면서 인슐린 생산 세포가 재생된 것이다. 만일 그 사람이 췌장을 잃어버렸다고 포기하고 계속해서 사망적 환경에서 생활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는 지금쯤 당뇨병의 후유증으로 인하여 매우 어려운 입장에 있을 것이다. 세포에 대한 올바른 인식은 매우 중요하다. 세포는 정직하다. 받은 만큼 되돌려 준다.

창조 교실: 독수리와 항공 공학

 비행기가 처음 만들어진 초기에는 비행기에 문제가 많았다. 비행기가 수평으로는 잘 날았지만, 급강하를 하게 되면 공기의 흐름 때문에 날개에 심한 진동이 생겨 날개의 기능이 효과적으로 수행되지 않아서 잘 추락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항공 공학자들이 많은 연구를 했으나 한동안 쉽게 해답을 찾지 못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제안하기를, 독수리나 매가 공중에서 먹이를 찾다가 그것을 발견하면 시속 100Km 정도의 고속으로 급강하하여 먹이를 채 가는데, 간혹 먹이를 놓치는 일은 있어도 급강하하다가 땅바닥에 부딪혀 죽는 독수리는 없으니, 이것을 연구해 보면 해답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래서 과학자들이 독수리의 비행술을 면밀히 조사한 결과, 독수리가 급강하할 때 날개 깃털 중 맨 앞의 단 하나의 깃털이 위로 들려서 그 사이로 약간의 공기의 흐름이 생기고, 이 흐름이 전체 깃털의 진동을 방지하여서 완전한 날개의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이 원리를 비행기에 적용하여 비로소 성공적인 급강하가 가능하게 되었다. 현재 비행기 날개의 앞부분에 장착되어 있는 전연 장치가 바로 그것이다.

 이와 같이 항공기가 자유롭게 비행하게 된 것은 항공 공학자들이 독수리의 비행술에서 아이디어를 얻어온 결과인 것이다. 새들은 무언가 더 나은 생물체로 진화해야만 하는 존재가 아니고, 오히려 항공 공학자들이 배워야 할 정도로, 하늘에서 생활하기에는 완벽하게 설계되어 있는 것이다. 항공 공학자들이 오히려 배워야 할 항공 기술을 가진 독수리, 공중의 새들 중 왕인 독수리에게 항공 공학의 기술을 가르치시고 설계하신 분은 누구실까?

신앙: 서론 - 달란트 비유와 예수 재림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과 현상들이 예수님의 재림의 가까움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재림을 맞이하는 우리의 올바른 자세는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는 감람산 위에서 당신의 재림의 때에 나타날 징조를 말씀해 주시며 그분의 자녀들에게 깨어 준비하라고 하셨습니다.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 그리고 아울러 그분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보여 주셨는데, 이러한 교훈을 달란트의 비유를 들어서 흥미 있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올바른 자세는 무엇일까요? 달란트의 비유를 함께 공부하시면서 올바른 자세로 재림을 준비하는 독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천국은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제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각각 그 재능대로 하나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두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두 달란트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저희와 회계할새(마 25:14~19).

 달란트의 비유는 예수님께서 감람산 위에서 들려주신 비유의 이야기입니다. 세상 끝에 있을 징조에 대하여 질문하는 제자들에게 여러 가지 재난과 마지막 징조들에 대해 경고하시며 주님께서는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마 24:44)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다가올 천국을 위해 준비되기를 원하셔서 천국에 대한 여러 비유들을 말씀하셨는데, 그 비유들 중에 이 달란트의 비유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달란트의 비유는 특별히 주님의 재림을 위해 우리가 어떤 자세로 기다려야 하는지에 대하여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곧, 주인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돌아오실 때에 하나님의 종이며 청지기인 우리들이 주님을 어떻게 기다리고 있어야 하며, 어떤 사람이 된 상태에서 기다려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고 있는 비유인 것입니다. 달란트를 현대말로 하면 탤런트(talent) ; 재능, 소질, 수완입니다. 마치 한편의 연극을 보는 것같이 흥미로운 이 예수님의 달란트의 비유를 공부하면서 함께 귀한 교훈과 깨달음을 얻어볼까요?

맡겨진 달란트
 어떤 주인이 먼 나라로 가게 되어 종들을 불렀습니다. 주인은 자기의 소유를 종들에게 맡기면서 잘 돌보아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종들에게는 각각 그들의 능력에 맞게 주인의 소유물을 돌보도록 달란트들이 주어졌습니다. 한 종은 금 다섯 달란트를 받았고, 또 다른 종은 두 달란트, 그 다음 종은 한 달란트를 받았습니다. 주인이 타국에 간 사이 종들은 열심히 그들에게 맡겨진 달란트를 활용하고 장사도 하여 수익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다섯 달란트를 받은 종은 그 배인 또 다른 다섯 달란트를 남겼고, 두 달란트 받은 종은 두 달란트를 더 남겼습니다. 그런데 한 달란트를 받은 종이 문제였습니다. 그는 그 달란트를 활용하지 않고 땅에 묻어 놓아 사장시켜 버렸습니다.

 얼마 후 주인이 돌아왔습니다. 받은 달란트를 활용하여 배의 이익을 남긴 종들은 주인으로부터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니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라는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를 받았던 종이 주인에게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라고 말하자, 주인은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라고 하며 그 종에게서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명령을 내리기를,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라고 하였습니다.  달란트의 이야기는 이렇게 끝이 납니다. 그런데 여기에 나오는 주인과 종들과 달란트는 과연 무엇을 비유하는 것일까요? 한번 살펴보며 공부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달란트의 비유에 나오는 주인은?
 이 비유에서 주인, 즉 타국으로 가는 어떤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대표합니다. 이 비유를 말씀하시던 때는 바로 조금 후에 예수께서 세상을 떠나 하늘로 가시려던 때였습니다.

달란트의 비유에 나오는 종들은?
 이 비유에 나오는 종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을 대표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값으로 산(고전 6:20) 사람들이며, 또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벧전 1:19) 사신 바 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후 5:15)는 말씀처럼 주님만을 위하여 주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다 무한한 값으로 산 자들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은 다 주님의 소유입니다.

종들에게 맡기신 일
 주인에게 속한 종들인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위해 살며 봉사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주인인 주님께서 오시는 시간을 기다리며, 주인과 회계하기에 충실한 종이 되고, 맡겨진 달란트와 선물들을 활용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도움이 필요한 이웃들을 섬기고 베풀며 살아야 하는 것이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할 의무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종들에게 자기 소유, 곧 주님을 위하여 사용해야 할 것들을 맡겨 주셨습니다. 이 사명과 요구에 어떻게 응했느냐에 따라 큰 심판 날에 그것에 대해 회계(會計)하게 될 것입니다.

달란트의 의미는?
 이 비유에 나오는 주인이 종들에게 맡긴 달란트는 성령이 나누어 주시는 선물과 축복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이에서 더 나아가 달란트는 선천적이고 후천적인 것에 관계없이, 또 육적인 것과 영적인 것에 관계없이,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선물과 재능을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엡 4:7)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각각 그 재능대로 나누어 주셨습니다. 달란트는 아무렇게나 나누어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각 사람에게 달란트를 나누어 주신 분께서는, 그것이 크거나 작거나 간에 각자가 그 맡은 달란트를 잘 활용할 때 그 사람으로부터 영광을 받으십니다. 다섯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다섯 달란트를 사용해야 하고,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한 달란트를 사용해야 합니다.

신앙: 1부 - 달란트의 활용

 재림을 준비하며 기다리는 자세는 어떤 위대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일상 생활에서 행하는 작은 일들에 충실하며, 신앙으로 매일의 생활에서 사단의 모든 시험을 이기는 승리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자신의 삶으로 재림이 가깝다고 증거하고 사는 것입니다.
 아무리 신앙이 좋다고 말로 공언을 한다 해도, 그 사람의 일상 생활의 태도가 흐트러져 있거나 질서나 절제가 없는 마구잡이의 태도로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면, 그것은 참 신앙이 아니며, 또 올바로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나 공적인 장소에서 주님을 믿는다고 증거하는 것이 다가 아닙니다.
 교회를 떠나 일상생활에서, 가정생활에서, 친구나 교우들 사이에서 말하고 행동하고 사는 모습이 진짜 그 사람의 신앙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삶이 곧, 재림을 기다리고 사모하는 자세와 태도를 가지고 있는지 아닌지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상생활에서 주어진 달란트들을 어떻게 사용하며 살고 있는가 하는 관건은 주님의 재림을 위하여 어떤 자세로 기다리고 있는가 하는 것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무익하고 게으른 종처럼 가만히 앉아 주님의 재림을 기다려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재림을 위하여 자신이 먼저 열심히 준비할 뿐 아니라 많은 영혼들을 주님의 재림에 서게 하기 위하여 준비시켜야 할 것입니다.

 비유에는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두 달란트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다고 나옵니다. 달란트는 아무리 적을지라도 사용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통하여 이루어야 할 큰 사업을 가지고 계십니다. 주님께서는 그분을 위하여 일할 대리자들을 택하시고, 그분의 뜻과 경륜을 이루고자 교육하고 계십니다. 주어진 달란트를 잘 활용하기 위하여 우리는 스스로를 교육해야 합니다. 이 교육은 거룩한 봉사를 위하여 육체와 정신과 영혼을 훈련시키는 것이며, 이것이 곧 영생에 이르게 하는 교육인 것입니다. 달란트는 얼마나 많이 받았느냐 하는 것이 아니고, 받은 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달란트의 사용과 활용
 주님께서는 우리가 가진 모든 선물을 다 사용하기를 원하십니다. 즉, 우리의 재능과 이해력과 능력을 다 활용하여 진리를 탐구하고, 그 깨달은 진리를 전하며 영혼들을 구원하며, 더 많은 영혼들이 재림을 위해 준비되도록 최선을 다하여 일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 노력도 하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부족한 재간을 이적을 통해 채워 주지 않으십니다. 우리에게 있는 것들을 우리 스스로가 활용할 때, 그분은 우리의 온갖 능력을 증가시키고 강하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굴복할 때,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도우심으로 옛 습관과 좋지 않은 성질을 극복하게 하시고 새 마음과 새 습관을 갖게 하시며, 우리로 주님의 유익한 도구와 종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능력을 받으면 잠자고 있던 우리의 능력이 각성되고 마비되었던 기능이 새 생명을 받게 되어, 아무리 능력 없고 연약한 사람도 얼마나 강하고 쓸모 있는 자가 되는지 놀라게 될 것입니다.

한 달란트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었습니다. 자기의 달란트를 활용하지 않은 사람은 가장 적은 달란트를 받은 사람입니다. 이 사실에는 사람이 자기가 받은 재질이 적다고 예수님을 위하여 봉사할 의무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는 경고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어떤 큰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면 큰 기쁨을 가지고 그 일을 하는 사람일지 모르지만, 작은 일에서 봉사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자기의 달란트를 활용하는 데 등한히 한 사람은 자기 자신이 불성실한 종임을 증명했습니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눅 16:10)됩니다. 사람이 지극히 작은 의무에 불충실함으로써 창조주께 마땅히 돌려야 할 봉사를 돌리지 않게 됩니다.

 작은 일에 바른 원칙을 따라 살지 못하면 큰일에 있어서도 하나님을 순종하지 못합니다. 생애의 사소한 일을 취급하는 데 나타나는 결점은 훨씬 중요한 일, 영생에까지 미칩니다. 행동이 반복되면 습관이 되고, 습관은 품성을 이루게 되어 그 품성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현세적인 또는 영원한 운명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큰 진리는 작은 일에도 적용되어야 합니다. 실제적인 신앙 원칙이 매일의 생애의 사소한 일에도 실천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주어진 달란트가 아무리 적을지라도 하나님께서 쓰일 곳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 한 달란트가 지혜롭게 사용된다면 그 달란트에 부과된 사업이 성취될 것입니다. 우리의 달란트를 바르게 사용함으로써 우리 자신을 더욱 고상한 세계와 연결시킬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참된 성화입니다. 성화란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순종함으로써 매일의 의무를 기쁜 마음으로 행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큰 일이 맡겨지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들의 야망을 만족시킬 큼직한 일을 얻지 못했다고 해서 생애의 평범한 의무를 신실하게 행하지 않는 사람은, 항상 어떤 큰일을 기다리는 동안에 생애의 목적을 이루지 못한 채, 한평생이 지나가 버립니다.

반환된 달란트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저희와 회계할새. 주님께서 당신의 종들과 회계하실 때에 달란트에 대한 반환금을 엄밀히 따지실 것입니다. 이루어진 일이 그 일을 한 사람의 품격을 나타내게 됩니다.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저희가 받은 원금과 남긴 이익금을 모두 주님께 돌려드렸습니다. 즉, 그들은 주님의 재림을 위하여 충실히 준비했으며, 다른 영혼들이 구원을 얻게 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자신들이 세운 공로를 주장하지 않는데, 이 이유는 그들의 달란트는 주인으로부터 받은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들은 다만 자기들의 의무를 행한 것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하늘의 선물을 등한히 여긴 것을 핑계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잘 알지 못했고, 그분을 잘못을 찾아내서 벌을 주시려고 끊임없이 감시하시는 각박한 분으로 생각하였으므로 그분을 세상에 제대로 나타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주시지 않은 것을 요구하시는 분이요, 심지 않은 데서 거두려고 하시는 분이라고 비난합니다. 그런 사람은 자신의 한 달란트도 빼앗겨 버릴 것인데 즉, 자신도 구원하지 못하고, 남들도 구원을 얻지 못하도록 걸림돌만 제공한 격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재림의 큰날에 그리스도를 위하여 일하지 않은 자들과, 자신만을 생각하고 자신만을 기쁘게 하면서, 표류하는 생애를 산 자들을 세상의 재판장께서는 악한 일을 행한 자들로 취급하실 것입니다.

신앙: 2부 - 재림과 시간 관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엡 5:16). 당신이 가지는 모든 순간을 소중히 여기십시오. 시간은 아무도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것은 평범한 진리입니다. 어제는 이미 지나간 역사이며, 미래는 알 수 없습니다. 오늘이야말로 당신에게 주어진 선물이며, 그래서 우리는 현재(present)를 선물(present)이라고 부릅니다.

 이 말은 네빌 아이스델이 코카 콜라 회사 회장으로 취임하면서 한 연설문의 일부분입니다. 인간은 시간 앞에 평등합니다. 부자이든지 가난하든지, 바쁜 자든지, 여유로운 자든지, 하나님께서 공평하게 주신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시간입니다. 모든 사람들에게는 누구에게나1,440분이라는 똑같은 시간이 주어집니다. 우리는 주어진 시간 동안 주님의 재림을 위해 준비하며, 재림을 맞기에 적합한 사람이 되도록 그 시간들을 사용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목적을 위하여 우리에게 시간을 주셨습니다. 시간은 재림을 준비하기 위하여 사용해야 할 엄숙한 의무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소중한 시간의 사용
 시간은 일단 낭비하면 소멸되는 것이며, 지나간 시간은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진정한 어려움은 시간의 부족에 있다기보다는 주어진 시간에 우리가 무엇을 하는가에 있습니다. 사용하지 않으면 바람처럼 사라져 버리는 것이 시간이기 때문에 오늘은 나의 인생에 있어서 최절정의 순간입니다. 그래서 주어진 현재는 최고의 선물입니다. 인생은 헛되이 보내기에는 너무 짧습니다. 우리는 낭비할 시간도, 세속적이고 이기적인 오락을 위하여 쓸 시간도, 죄에 방종할 여가도 없습니다. 내세, 즉 영생을 위하여 품성을 개발해야 할 때는 바로 지금입니다. 앞으로 오는 심판을 위하여 준비할 때도 바로 지금인 것입니다.  모든 시간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은 하늘 집과 불멸의 생명을 위하여 자기를 적합한 자가 되도록 준비하는 사람입니다. 시간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까요?

자신의 영생을 위해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 동안 우리는 하나님을 더듬어 발견하고,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알며, 하나님의 성품을 이루기 위해 성령의 능력과 협력하여야 합니다. 사실, 성경에 사용된 세월을 아끼라는 말씀의 원어의 의미는 물리적인 시간을 절약하고 아끼며 살라는 의미보다는, 하나님의 때, 즉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기회들을 소홀히 하지 말고 붙잡으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일시적이고 세속적인 사물, 곧 영원한 사물과 비교할 때에 하나의 작은 원자에 불과한 일들을 이루고 붙잡기 위하여 근심하고 걱정하는 일에 온 정신을 쏟기에는 인생은 너무나 엄숙한 것입니다.

품성의 건설을 위해
 우리는 품성이라는 건물에 쓸 단단한 재목을 구하기 위해 단호한 노력을 해야 합니다. 하늘은 영적인 진보를 추구하고 그리스도와 같은 형상을 받으려고 노력하는 자들에게 능력을 주기 위하여 기다리고 있습니다, 인간이 그리스도께 복종할 때 성령은 그를 위하여 위대한 사업을 성취해 줄 것입니다. 우리는 자아를 하나님께 복종하고 예수님의 임재를 마음속에 초청하며, 자신의 뜻과 의지를 따라 행하려는 인간의 권리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대로만 살려는 강한 의지와 헌신으로 매 시간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사람들은 자아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지고 오로지 아름다운 하나님의 성품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영혼 구원 사업을 위해
 또한 시간은 동료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사용하라고 주어졌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영혼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일에 시간을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일분일초에는 영원한 결과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 부름을 받든지 봉사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는 비상 대기병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은 도움이 요구되는 사람에게 생명의 말씀을 전할 기회가 있지만 그런 기회가 다시 주어지지 않을는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태만으로 인하여 그 사람이 주를 만날 준비를 갖추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재림의 날에 우리가 하나님께 뭐라고 대답하겠습니까?

신앙: 3부 - 재림과 재물 관리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부자를 보며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생각합니다. 약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막 10:25).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니요! 그러나 이 말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오해가 생기기 쉽습니다. 그 당시 예루살렘에 들어가려면 통과해야 하는 좁은 문이 하나 있었는데, 그 문의 이름은 바늘귀라고 불렸고, 짐을 많이 실은 큰 약대가 바늘귀라고 불리는 좁은 문을 통과하는 것은 쉽지 않았던 것입니다. 정말 부자는 천국에 가기 힘든 것일까요?

맡겨진 재물
 사람들에게 재물을 맡겨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사람들에게 재산을 얻을 능력을 주십니다. 물론 인간의 노력과 근면함이 거기에 병행되어야 하겠지만&&.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금도 은도 내 것이라고 하십니다. 모든 것은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께 속해 있는 것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을 재물의 청지기로 삼으셨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돈을 주신 것은 우리 자신을 높이고 영화롭게 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우리는 신실한 청지기로써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돈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데 사용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의 손에 위대한 영혼 구원 사업을 추진하기 위하여 돈을 위탁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업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하나님의 사업의 요구에 응답하기를 거절하는 것은 저들이 불 충성스럽고 게으른 종이라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것은 다 주님의 것이며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사용했는지에 대하여 하나님 앞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돈을 사용하는 출처를 보면 우리가 하나님을 최상으로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지 아닌지의 여부가 나타날 것입니다.

돈의 가치와 사용

 돈은 큰 선을 행할 수 있기 때문에 매우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돈이 하나님의 자녀의 수중에 있을 때는 그것이 주린 자의 양식이 되고, 목마른 자의 마실 물이 되고, 헐벗은 자의 옷이 됩니다. 그것은 또 압제 받는 자에게 방어물이 되고, 병든 자에게 도움의 방편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돈을 생활필수품을 마련하고, 다른 사람을 축복하고, 그리스도의 사업을 전진시키는 목적 이외에 지나친 방종에 사용할 것 같으면 그 돈은 모래와 마찬가지로 쓸모없는 것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재물을 쓸데없이 낭비하고 조심성 없이 쓰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요 6:12)고 하신 절약에 대한 그분의 교훈은 그를 따르는 모든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자기가 가진 돈이 하나님께서 주신 달란트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 돈을 경제적으로 사용하고 또 다른 사람에게 주기 위하여 절약하는 것을 자기의 의무로 생각할 것입니다. 시간과 돈의 사용에 있어서 절약하는 법을 배우는 것은 하나님의 사업에 관계하는 모든 사람들의 의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근면의 습관을 배우고 일편단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일하는 법을 우리는 배워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하여 먹고 마시고 입는 것만으로 만족히 여길 때 우리는 이기적이고 자신만을 위하여 사는 평범한 사람이 되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보다 더 고상한 어떤 일을 우리 앞에 두십니다.
 우리는 즐겨 우리의 이기적 욕망을 버리고 마음과 정신의 능력과 재물을 하나님을 위하여 그분의 사업에 바칠 때, 예수님의 재림을 올바로 기다리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신앙: 5부 - 재림과 감화력

 우리들의 삶은 계속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주는 무제한의 감화력을 가졌다는 것을 아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 수 없게 하는 감화력을 주셨습니다. 개인적으로 우리는 우리의 동료 인간과 연결되어 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대가족의 일원이 되어 있으므로 상호간에 의무를 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분위기로 다른 사람들을 구원하는 데 기여를 하든지, 멸망시키는 데 이바지 하든지 둘 중에 한 가지의 일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각각 자신의 분위기, 곧 생명력을 주는 믿음과 용기와 소망으로 가득 찬 분위기에 둘러싸여 있거나, 아니면 이와 반대로 불만과 이기심으로 침울하고 어두운 분위기에 둘러싸여 있으며, 때로는 품고 있는 죄로 인하여 몹시 오염된 유독한 분위기에 둘러싸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두르고 있는 분위기로 우리와 접촉하는 사람들에게 은연중에 영향을 줍니다.

 이런 감화에 대해서 우리는 벗어날 수 없는 책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말과, 행동과, 의복과, 품행과, 심지어는 안색까지도 각각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그렇게 끼친 감화가 선악 간에 사람이 판단할 수 없는 영원한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는 것을 생각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사람에게서 사람으로 전달된 충동은 반드시 수확하게 될 씨앗이 됩니다. 이 충동은 우리가 그 범위를 알 수 없는 인간의 삶의 긴 사슬의 하나의 고리가 됩니다.

 만일 우리가 모본으로써 다른 사람에게 선한 원칙을 실행할 수 있도록 도와주면 그것은 마치 그들에게 선을 행할 능력을 주는 것과 같으며, 이 능력을 받은 사람이 그 같은 감화를 다른 사람에게 끼치게 되고, 또 그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선한 감화를 끼치게 되어, 우리가 무의식 중에 주는 감화로 인하여 여러 사람이 축복을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조약돌을 호수 가운데 던지면 하나의 파문이 생기고, 이어서 다른 파문들이 생기게 되어, 그 파문의 원은 점점 넓어져서 마침내는 그 호수의 가장자리까지 이르게 되는 것같이 우리의 감화도 그러합니다. 우리의 감화력은 우리가 알고 조종할 수 있는 이상으로 멀리 퍼져서 다른 사람들에게 축복이 되거나 저주가 되기도 합니다.

품성의 힘
 품성은 힘입니다. 참되고 이기심 없고 경건한 생애가 나타내는 무언의 증거는 소멸할 수 없는 감화력을 발산합니다. 우리의 생애 가운데 그리스도의 품성을 나타냄으로써 우리는 영혼 구원 사업에서 그리스도와 협력하게 되는 것입니다. 삶 가운데 그리스도의 품성을 나타냄으로써만 우리는 주님의 훌륭한 대사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노라고 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모본을 따라 그들의 생애에 계명의 원칙인 사랑을 실천할 때, 그들의 모든 행동이 하나님을 최고로 사랑하고 저희의 이웃 사람을 제 몸과 같이 사랑한다는 것을 증거할 때, 복음과 진리는 세상을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될 것입니다.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품성은 복음의 산 증거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품성을 닮은 사람들이 준비될 때에 예수님의 재림은 촉진되는 것입니다.

악의 감화력
 감화력은 선한 힘도 되지만, 악에 대한 힘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 자신의 영혼을 잃어버리는 것도 두려운 일이지만 다른 사람의 영혼을 잃게 하는 것은 더욱 두려운 일입니다. 우리의 감화력이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가 된다면 그것은 매우 슬픈 일이며, 그리스도와 함께 모아들인다고 하는 많은 사람들이 오히려 그분으로부터 양들을 흩어 버리는 것은 매우 무서운 일입니다. 교회는 이런 사람들 때문에 힘이 연약해집니다.
 많은 사람들이 거리낌 없이 남을 비평하고 비난하며 의심과 질투와 불만을 표시하므로 결국은 자기 자신을 사단의 도구가 되게 할 뿐 아니라, 그들의 제어되지 못한 혀와 반역적 마음의 감화 때문에 다른 무고한 사람들을 시험에 빠져 타락하게 만듭니다.오직 하나님의 은혜로써만 우리는 이 감화력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에게는 다른 사람에게 선한 감화를 끼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부족을 깨닫고 하나님의 능력의 필요를 느끼게 된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힘을 의지하지 않게 될 것이며, 하루나 한 시간이나 한순간의 일도 예측할 수 없으므로 단 하루도 우리의 길을 하나님께 맡기지 않고는 그 날을 시작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들을 주님께로 이끌든지, 아니면 주님으로부터 더 멀어지게 하든지, 분위기를 통하여 우리는 두 가지 중 하나의 일을 하게 됩니다.  재림을 위하여 준비시키든지 재림을 부인하게 하든지 우리는 우리의 분위기를 통하여 증거하고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당신이 가지고 있는 감화력은 오늘도 주위로 이웃으로 멀리 퍼져 간다는 것을&&. 그리하여 우리의 감화가 비록 소리도 없고 의식되지 않을지라도 다른 사람을 그리스도와 천국으로 이끄는 큰 힘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당신의 분위기와 감화력은 영혼을 재림을 위하여 준비시킬 수도 있고, 그 반대의 일을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신앙: 6부 - 재림과 건강

 건강은 사람들이 별로 그 가치를 깨닫지 못하는 축복 가운데 하나이며, 우리에게 주어진 중요한 달란트들 중의 하나입니다. 
 
 건강에는 우리의 정신적, 육체적 능률이 달려 있습니다. 또한 우리의 정신력과 의지력과 어떤 일을 추진하는 우리의 동기와 정서가 우리의 신체 속에 자리잡고 있으며, 육체의 건강에 따라 그것들이 좌우되고 유지되기 때문에, 타고난 건강을 잘 유지하며 최선의 건강을 소유하기 위하여 모든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본분입니다. 육체적으로 건강해야 영적으로 강건할 수 있으므로, 우리의 육체를 가장 양호한 상태로 보존하여 영적 감화를 가장 잘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하며, 그것이 주님의 재림을 위하여 준비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건강해야 승리하기 쉽다
 육체는 품성의 발전을 위하여 정신과 심령을 계발시켜 주는 유일한 매개체입니다. 마음과 육체 간에 존재하는 관계는 매우 밀접합니다. 그 중 하나가 병에 걸리면 다른 하나가 동정하게 되어 함께 병이 들게 됩니다. 정신과 마음의 상태는 많은 사람들이 깨닫고 있는 것보다 건강에 훨씬 더 큰 영향을 미치며, 육체의 건강 또한 마음과 정신에 지대한 영향을 끼칩니다. 건강이 좋지 않거나 병에 걸려 몸이 약해졌을 때, 정신력이나 감정도 연약해져서 죄의 유혹에 쉽게 굴복하여 쓰러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건강이 나빠지면 약한 몸에 따라 자연히 우리의 생각이나 감정도 부정적이 되고, 쉽게 낙심하거나 용기를 잃고 실망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건강한 정신과 영적인 힘은 건강한 육체에 깃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사단이 자기의 유혹을, 육체적 힘을 약화시키고 퇴화시키는 쪽으로 집중시키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그가 여기에서 성공하게 되면, 전 존재를 악에 굴복시키기 쉽게 됩니다. 육체가 건강해야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더 강건할 수 있으며, 육체가 건강할 때 우리는 더 유혹을 저항할 힘을 얻게 되고 죄를 승리하는 생활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건강이 좋지 않으면 의지력이 약해지고, 따라서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끈기 있게 붙들며 나아가 끝까지 죄와 싸워 이기는 경험을 하기 어렵게 됩니다. 체력을 약화시키는 것은 모두 정신력을 약화시켜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있는 판단력을 감소시키며, 선을 택할 힘과 우리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행할 의지력도 약해지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건강을 돌보고 지키며 우리의 몸을 건강하게 유지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건강 법칙
 우리의 조물주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그분은 우리의 신체를 지으신 분이십니다. 우리 몸을 창조하실 때, 그분께서는 우리의 신체를 건강하게 유지하기 위하여 지켜야 하는 신체의 법칙, 곧 건강법칙을 만드셨습니다. 그분은 이 법칙을 사람의 모든 신경과 근육과 기관(器管)에 친히 기록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체 조직의 어떤 부분이든지 간에 그것을 잘못 사용할 때에는 그 법칙을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건강 법칙에 유의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사는 것이 되지 못합니다. 건강 법칙은 우리의 섭취하는 음식물, 의복, 생활 습관, 절제 생활 등에 골고루 적용되어야 합니다. 자기 육체의 생명과 건강에 관한 습관과 행실에 대하여 부주의하는 사람은 창조주 하나님께 대하여 잘못을 범하는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한다고 하는 많은 사람들이 영원한 사망에서 구원하시려고 생명을 바치신 그분께 합당한 경의와 존경을 보이지 않는데, 그것은 바로 신체와 건강의 법칙을 어기고 자신의 몸에 입힌 손상으로 나타납니다.  사람이 자신의 몸이 하나님의 성전, 곧 그분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한 거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면, 건강과 육체적 능력을 보존하고 발달시키기 위하여 노력할 것입니다. 창조주께서는 인간의 신체 구조를 놀랍고도 훌륭하게 만드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분께서는 우리가 그것을 연구하고, 그 필요를 이해하고, 그것을 해치거나 더럽히는 일을 방지하는 일에 우리의 몫을 다하도록 명령하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체력을 잘못 씀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될 수 있는 우리의 삶의 기간을 단축시킵니다. 그뿐 아니라 그것은 우리로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사업을 완수하지 못하게 합니다.

 자연의 법칙, 신체의 법칙을 무시함으로 자기들의 수명을 짧게 하고 봉사할 수 있는 자격을 상실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강건함과 기회들을 도둑질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저희 동포들에 대한 의무도 등한히 하는 것이 됩니다.  다른 사람에게 축복을 나눌 수 있는 기회와 하나님께서 그들을 세상에 보내어 이루려고 하셨던 목적과 일이, 건강을 소홀히 하고 신체의 힘을 남용하므로 줄어든 육체의 힘과 수명, 질병으로 인해 중단되고 맙니다. 만일 우리가 세상에 줄 수 있었던 유익을 우리의 나태와 방종으로 인해 주지 못하게 된다면, 마지막 심판 때에 하나님께서 올바로 사용하지 못한 건강의 달란트에 대하여 우리에게 물으실 것입니다. 육체적 생명을 잘 보존하고 발달시킴으로써 인간을 통하여 신의 성품이 잘 드러나게 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입니다.

 신체 조직과 영적 생애의 관계는 우리가 연구해야 할 가장 중요한 과목 가운데 하나이며, 누구나 다 자기의 신체 조직과 그것의 활동을 지배하는 법칙을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생명과 건강을 가장 양호한 상태로 보존해야 하는 것이 우리가 받은 달란트를 잘 활용하는 것입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19, 20).

신앙: 7부 - 재림과 교육

 하나님께서 맡기신 선물인 자녀들을 영생을 위하여 교육시키는 것은 부모들의 가장 중요한 의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녀를 교육시키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이 진정으로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는지 아닌지를 알 수 있습니다. 자녀를 세상을 위해서 교육시키는지, 아니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교육시키는지를 보면, 정말 그 사람이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게 됩니다.

 자녀는 부모의 소유물이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이고, 부모들은 다만 맡겨진 하나님의 자녀를 돌보는 일을 하는 베이비 시터(아이를 돌보는 사람)에 불과한 것입니다. 부모들은 하나님의 선물인 자녀들을 하늘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성품대로 꼴 지워 참 부모이신 하나님께 바쳐야 합니다. 곧 하나님과 함께 하늘에서 살 수 있는 하늘에 적합한 사람으로 길러 하나님 앞에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영원한 구원과 영생을 위하여 자녀들을 준비시키기 위해 부모들은 자녀들을 영적으로 교육시킬 수 있는 좋은 환경을 선택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자녀들은 그들이 자라나는 주위 환경과 지역 사회의 영향력과 감화력에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에 영적으로, 또 좋은 성품을 가진 아이로 길러 내려면 어떤 환경에서 자라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장소에 가정이 위치해야 할 것인가 하는 자녀의 영생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문제를 신실한 부모라면 심사숙고할 것입니다.

도시의 아이들
 대도시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은 인위적인 환경과 경쟁적인 사회가 주는 스트레스와 긴장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바쁘고 쫓기고 경쟁하는 그런 사회와 환경 속에서는 하나님의 품성을 닮은 아이로 키우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도시 어느 곳에서나 죄악에 대한 것을 쉽게 보고 듣게 되며, 어느 곳에나 육신의 정욕과 세속으로 이끌어가는 유혹들을 쉽게 만날 수 있습니다. 또 도시의 생활은 허위적이고 인공적이 되기 쉽습니다. 돈을 벌려는 강한 열망, 흥분과 쾌락, 자랑과 사치와 낭비에 대한 욕구 등은 많은 청년들을 인생의 진정한 목적에서 돌아서게 합니다.

 도시에서 아이들은 학교 수업을 끝마친 후에는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으며, 오직 거리의 교육을 받아들이기 쉽게 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친구들과의 세속적인 교제로부터 좋지 않은 습관들을 얻고 있으며, 그런 교제의 결과들을 부모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들 중의 극소수만이 자녀들에게 육체적, 정신적, 영적으로 나쁜 영향을 미치고 있는 모든 교제와 접촉을 가능한 한 멀리 피해야 한다는 사실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도시의 모든 구석마다 죄악적인 광경과 소리들이 점령하고 있으며, 관능과 유흥으로 유혹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또한 부패와 범죄의 물결이 전례 없이 높아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도시 생활은 수많은 죄악에 대한 문을 활짝 열어 놓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자녀들뿐 아니라 성인들에게도 강한 세력으로 다가옵니다.

 또한 도시의 물리적인 환경은 건강에 해로운 것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질병과 오염, 공해와 냄새나는 공기, 그리고 화학 물질로 처리한 수돗물이나 환경오염 물질들과의 계속적이고 피할 수 없는 접촉 등이 도시에서 날마다 발생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도시 가운데로 들어와서 사는 것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계획이 아니라는 것은 너무도 분명한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태초에 우리의 첫 번째 부모에게 아름다운 자연과 천연적인 소리가 있는 장소를 마련해 주셨는데, 오늘날에도 그분께서 우리에게 생활하기를 바라시는 장소는 태초와 마찬가지로 시골입니다.

어떤 곳이 좋을까요?
 부모들이 도시의 혼잡함과 경쟁으로부터 떨어져 있는 조그만 시골에 안식처를 마련한다면, 약간의 숲과 나무가 있는 조용한 전원이나 시골, 조그만 땅과 신선한 공기를 호흡할 수 있는 공간에 가정을 둔다면, 이 일은 자녀들과 가족의 정신적, 육체적, 영적인 면에 많은 유익을 줄 수 있을 것이며, 자녀들을 하나님을 닮은 올바른 성품으로 키우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한적하고 조용한 시골, 부에 대한 욕망이 조장되지 않을 만한 순수한 곳, 유행과 사회의 관습에 지배를 받지 않을 만한 곳, 정신과 육체, 그리고 영적인 건강과 인생의 참된 가치를얻게 하는 데 도움이 될만한 장소에서 가족이 함께 살 수 있다면, 그것은 영원한 삶에 있어서 큰 가치를 가져다 줄 것입니다.

 만일, 인간의 업적들밖에 볼 수 없는 인공적인 것들로 가득한 곳, 소란과 피로와 불안을 가져오는 그런 곳에 사는 대신에 하나님의 작품들을 볼 수 있는 한적한 전원이나 시골, 신앙에 도움이 될 수 있을 만한 곳에 살며 자녀들을 키운다면, 자녀들의 성품 형성에 해를 끼쳤던, 조절할 수 없는 이웃과의 교제로부터 자녀들을 보호하고 해방시킬 수 있게 될 것이며, 또한 자녀들이 도시의 악과 세속에 대한 신비와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거리를 방황하는 대신에 자연의 신비를 탐험하게 되며 천연계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찾게 될 것입니다.

재림을 위하여 가족들을 준비시키는 일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워 오는 이 시점에 우리의 신앙과 재림을 준비하기 위해 우리는 조용한 곳으로 가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성경 창세기는 아브라함과 롯의 생애에 대해서 자세히 이야기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우상 숭배하는 사람들의 영향으로부터 떠나서 가나안 땅에서 거주할 것을 지시하셨습니다. 롯도 아브라함과 함께 떠났으나 그는 평야에 있는 도시에 거주했습니다. 롯은 의로운 사람이었지만 악한 도시 소돔은 롯의 가정의 몰락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 끝이 가까운 이때에 재림을 준비하는 생활을 살기 위하여 우리가 도시를 떠나시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선물인 자녀들의 영생의 교육을 위해 조용한 시골 생활을 시작하는 것은 어떨까요?

신앙: 8부 - 재림과 열 처녀

 서산에 해가 넘어가고 붉은 노을도 서서히 사라지고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감람산 위에 앉아 계셨습니다. 거기서 내려다보이는 한 집에서는 무슨 잔치가 베풀어지는지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습니다.  열린 창문을 통해 흘러나오는 불빛과 집 주위에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는 것으로 보아 멀지 않아 혼례 행렬이 나타나게 될 것을 능히 짐작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 당시 동양의 많은 나라에서는 혼인 예식을 밤에 행하는 풍습이 있었는데, 그것은 신랑이 신부 집에 가서 그를 자기 집으로 데려오는 것이었습니다. 혼례 행렬은 횃불을 앞세우고 신부 집을 나와 신랑 집으로 가는 것입니다. 신랑의 집에서는 초대받은 손님들을 위하여 피로연을 준비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내려다보시던 장면 역시 한 무리가 혼례 행렬에 참가하기 위하여 행렬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장면이었습니다. 그 장면을 보신 예수께서는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 열 처녀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어떤 자세로 기다려야 하는지에 대하여 가르쳐 주셨습니다.


신랑을 기다리던 열 처녀
 신부의 집 가까이에는 흰옷을 입은 열 처녀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각각 불이 켜진 등과 기름을 담은 작은 병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다 신랑이 나타나기를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랑은 빨리 오지 않았습니다. 한 시간이 가고 두 시간이 지났습니다. 그러자 신랑을 기다리던 처녀들은 그만 피곤해서 잠이 들고 말았습니다. 한밤중에 갑자기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는 부르짖음이 들려왔습니다. 졸고 있던 처녀들은 황급히 깨어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횃불을 환히 밝히고 음악에 맞춰 즐거운 혼례 행렬이 다가오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열 처녀는 얼른 등을 들고 나갈 준비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중 다섯 처녀는 등잔에 기름을 채우는 일을 등한히 했습니다. 그들은 신랑이 그렇게 오래 지체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비상사태를 위하여 아무 준비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절박하여 기름을 준비한 슬기 있는 처녀들에게 우리 등불이 꺼져 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고 애원했습니다. 그러나 슬기 있는 다섯 처녀는 이미 병의 기름을 다 등잔에 부은 후였으므로 그들에게 나누어 줄 것이 없었습니다.

 미련한 처녀들이 기름을 사러 간 동안에 혼인 행렬은 그들을 버려 둔 채 지나가 버렸습니다. 불이 켜진 등을 가진 다섯 처녀는 그 무리와 합세하여 그 행렬과 함께 집에 들어갔고 문은 닫혀 버렸습니다. 미련한 처녀들이 피로연이 열리는 집에 다다랐을 때에 그들은 입장을 거절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주인은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문밖 캄캄한 거리에 울며 서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신랑을 기다리는 무리를 내려다보시면서 하신 열 처녀의 이야기는 예수님 재림 직전에 있을 사람들과, 교회의 경험과 형편을 설명하신 비유였습니다.

열 처녀는 누구?
 신랑을 맞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두 종류의 처녀는 주님을 기다린다고 자칭하는 두 종류의 사람들을 대표합니다. 그들을 처녀라고 부른 것은 그들이 순결한 신앙을 지킨다고 공언하기 때문입니다.

등불은 무엇?
 등불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표합니다. 시편 기자는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 119:105) 라고 말했습니다.

기름은 무엇?
 기름은 성령을 표상합니다. 성경 스가랴서에도 성령이 기름으로 설명되어 있습니다. 내가 보니 순금 등대가 있는데& 그 등대에 일곱 등잔이 있으며& 그 등대 곁에 두 감람나무가 있는데 하나는 그 주발 우편에 있고 하나는 그 좌편에 있나이다 하고 내게 말하는 천사에게 물어 가로되 내 주여 이것들이 무엇이니이까&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금 기름을 흘려내는 두 금관 옆에 있는 이 감람나무 두 가지는 무슨 뜻이니이까& 가로되 이는 기름 발리운 자 둘이니 온 세상의 주 앞에 모셔 섰는 자니라(슥 4:1~14).

 위의 성경 절을 보면, 두 감람나무 (여기서 두 감람나무는 성령의 감동으로 쓰인 성경 구약과 신약을 가리킴)에서 금 같은 기름이 흘러나와 금관을 통해서 등대 기름통으로 들어가고 거기서부터 금 등잔으로 들어갑니다. 기름부음을 받은 두 사람의 사명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늘로부터 온 은혜를 나누어 주는 것인데, 이 하늘로부터 오는 은혜, 곧 성령만이 주의 말씀이 우리 발에 등이 되게 하고, 우리 길에 빛이 되게 할 수 있습니다.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슥 4:6).

기다리던 사람들의 차이
 비유 가운데 신랑을 기다리던 열 처녀는 모두 다 등과 기름 담을 그릇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처음 얼마 동안은 그들 사이에 별다른 차이를 볼 수 없었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재림 바로 전에 사는 사람들도 그렇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성경의 지식을 가지고 있고,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가 가까웠다는 기별을 들었으며, 그분이 오실 것을 확신하며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비유에 나타나는 것처럼,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고 부르짖을 때에 준비되지 못한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등은 가졌으나 기름 그릇에 기름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성령이 결핍되어 있습니다.

기름이 없는 등잔은...
 하나님의 성령이 없이 하나님의 말씀만을 아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성령의 감화가 없는 진리의 이론만으로는 사람의 심령을 깨우치고 마음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우리가 비록 성경의 말씀과 교리에 정통해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영이 진리를 깊이 깨닫게 하지 않을 것 같으면 우리의 품성은 변화되지 않을 것입니다. 성령이 마음을 밝혀 주지 않을 것 같으면 사람들은 진리와 오류를 분간할 수 없게 될 것이며, 진리를 깨닫지도 못하고 그에 알맞는 영적인 경험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미련한 처녀들
 이 비유의 이야기를 읽고 미련한 처녀들을 예수님과 진리를 믿지 않는 믿음 없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만은, 미련한 처녀로 대표된 사람들은 믿는 다고 공언하는 사람들이며 외식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진리를 존중히 여기고, 진리를 옹호해 왔으며, 또 진리를 믿는 사람들에게 매혹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성령의 역사에 순종하지 않았고, 반석되시는 예수님 위에 떨어져 그들의 옛 성질을 깨뜨리려 하지 않았습니다. 말로만 믿는다고 말하기를 좋아하고 입으로만 믿음을 시인하고 간증하지만, 진정한 마음의 변화나 품성의 변화가 수반되지 않았습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의 씨 뿌리는 비유에서 돌밭에 떨어진 씨로 묘사된 청중을 대표합니다. 그들은 주저하지 아니하고 말씀은 받았지만 그 말씀의 원칙을 실천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그 말씀의 감화력은 순간적이었습니다.

 성령이 마음속에 역사하게 되고, 이 역사에 동의하게 될 때, 사람의 안에는 새로운 품성이 심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미련한 처녀로 대표된 계급은 단지 피상적이고 표면적인 행위만으로 만족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진정으로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품성을 연구하지도 않고 하나님과 교제하지도 않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의지할 줄도 모르고 하나님을 쳐다보고 살줄도 모르며, 입으로만 믿는다고 말하는 형식적인 신자들입니다. 네게 나아오며 내 백성처럼 네 앞에 앉아서 네 말을 들으나 그대로 행치 아니하니 이는 그 입으로는 사랑을 나타내어도 마음은 이욕을 좇음이라 (겔 33:31).

 사도 바울은 이런 상태가 예수 재림 직전에 사는 사람들의 특성이 될 것이라고 밝히 말했습니다.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 3:1~5). 이런 사람들은 자신도 예수님의 재림을 위해 준비하고 있지 않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준비하지 못하도록 위태로운 때에 평안하다 안전하다고 부르짖는 자들입니다.

기름 좀 빌려주세요! 
 기름을 준비하지 못했던 미련한 처녀들은 혼수상태에서 깨어났을 때에 그들의 부족을 깨닫고 다른 사람에게 가서 그들의 부족을 채워 달라고 간청합니다. 그러나 영적 경험에 있어서는 아무도 다른 사람의 부족을 보충해 줄 수 없습니다. 품성은 남에게 나누어 줄 수 없는 것입니다. 아무도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믿을 수 없고 아무도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성령을 받을 수 없습니다. 곧 아무 사람도 성령의 역사의 결과로 이루어지는 품성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줄 수 없는 것입니다. 성령은 마음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의 원칙을 심어 주심으로써 사람들 속에 하나님의 속성을 계발시켜 줍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빛인 그분의 품성은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에게서 비춰 나와야 합니다.

 품성은 위기의 때에 나타납니다.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는 외침이 들리고 졸던 처녀들이 잠을 깨었을 때에 누가 준비되었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기다리는 처녀들은 나와 맞으라는 소리를 갑자기 듣게 되었습니다. 갑자기 임한 신랑의 오심은 임박한 재림을 가리키는 것이지만, 또 한편으로 인생 중에 닥치는 뜻밖의 재난이나 고난, 죽음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급작스런 비상사태에 직면하게 될 때에, 과연 그 사람이 참으로 믿음이 있는 사람인지, 하나님의 약속을 참으로 믿고 있었는지, 또 그의 마음이 은혜로 말미암아 잘 보존되어 있는지 아닌지가 드러날 것입니다.

 은혜의 시기가 끝나고 최후의 큰 시련이 임하게 될 것인데 그때 가서 심령의 부족을 채우기에는 너무 늦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보라 신랑이로다라는 소리를 듣고 비로소 깨어나 텅 빈 기름병을 잡고 기름을 넣으려고 하는 그런 방법으로는 주님을 맞을 준비를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 지상에 살 동안 그리스도를 멀리 떠난 생애를 살았다면 하늘에 가서도 그분과 교제하며 살기에는 적합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대수롭지 않게 여기기 쉬운 하나님의 성령과의 교제가 혼인 잔치 때에 기뻐하는 무리에 참가할 수 있게 해 줄 유일한 것입니다.
 지상에서 하나님과의 동행을 하지 않은 사람이 만일 천국에 간다면, 그곳의 사랑과 기쁨은 세속으로 마비된 마음에 아무런 즐거움도 일으킬 수 없을 것입니다. 천국에 들어가 어울려 살기에 부적합한 사람은 천국에서 제외될 것입니다.

신앙: 9부 - 재림과 진리

 처녀는 이 세상 역사의 저녁에 신랑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다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합니다. 모두 다 초청을 받고 기름과 등을 가지고 있으며 모두 다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들 모두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중 다섯은 준비되지 않았습니다.
 그 다섯은 놀라고 당황하면서 연회장 밖에 있게 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의 나라에 들어갈 권리를 주장하면서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눅 13:26).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마 7:22). 가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마 25:12~13).  일찍이 인간의 귀에 들린 모든 말 가운데 가장 슬픈 말은 곧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하는 운명의 선고일 것입니다.

가장 큰 달란트; 진리를 이해하는 달란트
 신랑이 온 때는 가장 캄캄한 때, 즉 밤중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재림도 영적으로 이 지상 역사의 가장 캄캄한 시대에 있을 것입니다. 노아와 롯 시대의 형편은 인자가 오시기 직전의 세상 형편을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를 예언하는 성경 절들은 사단이 모든 힘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살후 2:9, 10) 활동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의 활동은 마지막 날에 급속도로 증가하는 어둠과 오류와 이단과 미혹으로 명백해지고 있습니다. 지금 기독교회 안에서 전해지고 있는 복음은 반쪽만의 위험한 복음들이 대부분이고, 마지막 재림을 위하여 준비시키는 진리의 기별을 찾아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정도이며, 오류의 가르침들이 교회 안에 가득 차 있습니다.

 이런 때에 성령의 가르침에 눈을 뜨고 진리를 찾아 연구하고 이해하는 일, 진리와 오류를 분별할 수 있는 성령의 능력을 가진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고 가장 큰 달란트를 가지는 것이며, 또 그 깨달은 진리로 성화되는 경험을 하는 사람은 그처럼 중요한 달란트를 잘 활용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교회 안에 일어나는 영적 퇴보와 타락의 어두움은 점점 짙어져 광선이 통과할 수 없는 캄캄한 지경에 이르게 될 것이지만, 주어진 달란트로 장사하여 더 많은 것을 남긴 충실한 종처럼, 영적으로 깨어 있는 하나님의 참 백성들은 더 밝은 진리의 깨달음 속에서 점점 원만한 광명(잠 4:18)에 이를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충실한 종들을 통하여 어두운 밤으로부터 하나님의 빛이 비치게 될 것입니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사 60:1).

 신랑의 오심을 기다리는 자들, 올바로 재림을 기다리는 자세를 가진 사람들은 주어진 달란트, 곧 진리를 이해하고 깨닫는 달란트를 활용하여 더 밝은 진리를 연구하고, 그 진리를 자신의 것으로 소화하고 경험하여 자기의 생애와 품성으로 하나님의 품성을 나타내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위하여 전혀 준비되지 않은 자신의 벌거벗은 모습을 깨닫고, 진정으로 회개하며 예수님의 의의 옷을 덧입는 사람, 성령의 역사에 굴복하여 하나님의 영광의 아름다운 품성으로 변하는 사람, 이 사람들은 예수님의 재림을 맞이하기 위해 진정으로 준비하는 사람들이며, 이런 사람들이 재림을 올바로 기다리는 자세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당신은 주님의 재림을 올바로 기다리는 그리스도인입니까?

질문과 답변 :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될까요?

 사람이 죽은 다음에는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될까요? 이 질문에 대하여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하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순절 날 베드로는 죽은 지 1000년 이상 되는 다윗에 대해서 매우 강력한 발언을 했습니다.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행 2:34). 이 말을 잠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다윗은 죄를 범하였었지만, 용서와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죽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가 죽고 난 후 1000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천국에 가서 사는 복을 즐기고 있지 못했을까요? 베드로는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29절에서 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서 말하기를, 다윗은 지금 자기 무덤 속에 있으며, 아직 하늘로 올라가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흥미로운 사실입니까? 하나님께서 그토록 사랑하시던 다윗이 죽은 지 1000년이 지났어도 상급을 못 받고 있었다면, 그때까지 살다가 죽은 모든 다른 선한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들도 역시 무덤에서 쉬고 있으면서 부활의 날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의인들의 부활 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니라 (눅 14:14). 계속해서 다음과 같은 그분의 말씀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 (마 16:27). 이 성경 절에는 모호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주 단순하고 직접적인 언어로서 당신의 재림 시에 있을 부활 때까지는 아무도 상급을 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죽은 이들은 무덤 속에서 심판과 세상의 마지막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의 마지막 장에 보면, 이 사실을 재확인시켜 주는 말씀이 있습니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 (계 22:12).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53절에서 이 마지막 날에 있을 상급에 대해서 더 자세히 묘사했습니다.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한 것을 입겠고.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부활과 함께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51절)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이제, 의인들이 받을 상급에 대한 문제는 속 시원히 해결되었습니다. 그러면 악인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언제 그들이 지은 죄 때문에 죽는 순간에 바로 지옥불의 형벌을 받게 됩니까? 이 질문에 대한 성서적 답을 원하시는 분들은 성경으로 돌아가는 길잡이 제1호 지옥을 보셨나요?를 공부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