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편지: 아름다운 죽음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언젠가 반드시 죽어야 한다는 것과 죽음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은 우리가 모두 잘 아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죽음에는 여러 가지 다른 의미의 죽음이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은 살았지만 죽어 있고, 또 어떤 사람들은 죽었지만 살아 있습니다.

살았지만 죽은 사람
성경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계 3:1)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육체적으로 살아 있는 것을 살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영적으로 살아 있어야 산 것으로 간주합니다. 많은 사람은 죽어 있습니다. 밥을 먹고, 물을 마시고, 일을 하지만, 영적으로 죽어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깨닫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고, 듣고 깨어나지도 못한 채, 육신의 생각과 감정과 욕망이 이끄는 대로, 자아가 좋아서 허락하는 대로 그냥 사는 것을, 육신으로는 살았으나 영적으로는 죽었다고 말합니다.

성경 요한복음에는 예수님께서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요 9:41)고 하신 말씀이 나옵니다. 본다고 하지만 보지 못하는 사람, 안다고 하지만 알지 못하는 사람은, 마치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아직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것처럼, 자아가 죽지 않고 그대로 펄펄하게 살아 있는, 영적으로 죽은 사람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는 땅에 떨어져 썩고 죽어서 많은 열매를 맺는 사람을 진정으로 살아 있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2:24). 자아가 살아 있는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자아가 죽은 사람만이 진정으로 살아 있는 사람입니다.

한 번도 산 적이 없는 사람
기독교를 부활의 종교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부활 전에 반드시 죽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에 대하여는 잘 알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딤후 2:11)라고 하며, 살려면 먼저 죽어야 한다는 진리에 대하여 가르쳐주고 있지만, 많은 사람은 이 문제에 대하여 별로 깊이 생각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한 번도 제대로 죽은 적이 없고, 그리하여 한 번도 진정으로 산 적이 없는 사람들로 남아 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은 부분적으로만 죽습니다. 한 부분이 죽은 후, 한참 있다가 다른 부분이 죽습니다. 그래서 죽는 데 여러 해가 걸립니다. 진리의 말씀이 가슴에 와서 버려야 할 무엇을 지적해 주실 때, 마음속에 간직한 우상들을 보여주실 때, 우리는 어떤 부분은 쉽게 버리고 포기하고 죽지만, 어떤 부분에는 결코 죽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죽지 않은 사람은 한 번도 산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한 번도 장사된 적이 없는 사람은 한 번도 진정으로 살지 않은 사람입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예수님은 단번에 죽으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여러 차례에 걸쳐서 주저하며, 육신의 욕망을 포기하기를 애석해 하며, 자아의 죽음을 서러워하며, 자기 연민에 겨워 머뭇거리며 여러 번에 걸쳐 죽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셨습니다.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롬 6:10).

한 번도 죽은 적이 없는 사람
엘리자베스 퀴블러라는 여의사와 그의 동료 의사가 저술한 인생 수업이라는 책은, 800여 명의 죽어가는 사람들을 인터뷰한 후 쓴 것인데, 아름다운 감동 속에서 많은 사람에게 죽음에 대해 또 다른 의미를 던져주고 있습니다. 그 책에는 자신에게 찾아온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들의 심리 상태와 태도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는데, 죽음을 앞두고 사람들이 느끼는 고뇌와 사는 날 동안 하지 못했던 일들에 대하여 가지는 후회, 그리고 생의 마지막 문턱에 다다라서야 증오하던 사람들을 용서하며 화해하는 과정을 밟아가는 것에 대해, 그리고 마지막으로 회복하는 사랑의 감정에 대해 그리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죽음이 자신의 앞에 닥치기 전까지는 가슴에 둔 어떤 것을 버리거나 포기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생의 벼랑 끝에 서는 극한 상황이 되어야만 진정으로 자신을 보게 되며, 그제야 비로소 모든 것을 내려놓고 포기합니다. 죽음이 바로 눈앞에 다가왔을 때에야만 무엇인가를 포기할 수 있다는 것은, 사실 전에 한 번도 죽은 적이 없었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것은 전에 한 번도 자신에 대해 죽은 적이 없다는 것을, 그리고 자아가 한 번도 무덤에 들어가는 경험을 한 적이 없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며, 또 그것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라는 어떤 사람의 간증의 의미를 한 번도 깨닫지 못하고 일생을 살았다는 증거입니다.

죽는다는 것
죽음은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막연한 어둠 속으로 떨어져 존재도 없이 사라진다는 두려움에 떠는 것입니다. 온몸이 해체되어 없어지는, 있음에서 없음이 된다는 무서운 고통에 둘러싸이는 것입니다. 너의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고전 15:36). 영적으로 살아나려면 자아가 부서지는 고통스러운 죽음을 경험해야 합니다. 육의 사람을 벗는 것은 마치 자아가 산산이 부서져 존재조차 없어져 버리는 것과 같은 아픈 과정을 겪는 것입니다.

죽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는, 자아에 붙어 있는 자존심과 교만과 인정받고 싶은 욕구와 세속과 안일에 대한 사랑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사도 바울의 절규를 외쳐보지 않은 사람은 누구나 진정한 죽음을 위해, 그리고 진정한 영적인 살아남을 위해 사투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롬 7:24).

영원한 삶을 살기 위해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고전 15:44).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고전 15:53).

진정한 죽음이 있어야 진정한 삶이 있습니다. 진정한 죽음을 경험해야 진정한 삶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진정한 삶을 위해 죽는 것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 아름다운 죽음을 경험하지 않으면 아무도 불멸의 삶을 얻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겟세마네와 십자가의 경험은 육신의 자아가 죽는 고통을 잘 예증해 주고 있습니다. 끝까지 자신의 의지를 하나님의 뜻에 맡기신, 그리하여 우리 앞에 철저한 굴복의 예표를 보여 주신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은, 환희와 영광스러운 불멸의 삶, 빛나는 부활을 기약하는 아름다운 전주곡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롬 6:5).

아름다운 죽음이 날마다 당신에게 일어나기를, 그리하여 아름다운 부활의 환희가 날마다 당신에게 있기를&.

생애의 빛에서

강병국 목사
오늘날 많은 현대인이 성경을 읽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그리스도인들은 물론이요, 교인들이 아닌 사람들도 호기심에서 성경을 가끔 읽어 보곤 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들 중에 꽤 많은 사람이 이 성경을,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구원의 길을 보여 주시려고 기록해 주신 진리의 책으로서 보다는 오히려 하나의 도덕적인 경전으로서 읽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 해 전에 미국에 있는 바나 설문 조사 연구소가 틴데일 종교 출판사의 의뢰로 실시한 연구에 의하면 거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을 소유하고 있으며 또한 이 책이 인류 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책이라는 사실을 믿고 있으면서도, 50% 이상이 이 책은 실제로 내게는 해당이 되지 않는 것 같으며 너무 어려워서 이해가 되지 않으므로 거의 읽지 않고 있다고 대답하였고 또한 60%는 시간이 없어서 읽지 못한다고 답변하였습니다. 더 충격적인 사실은 몇 년 전 미국의 Red book 잡지사의 통계에 의하면 현재 미국의 그리스도인 중 64%가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의 말씀보다는 하나의 도덕적인 지침서라고 믿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과연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적인 말씀입니까? 이 책이 과연 여러분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진리를 말하는 신뢰할 수 있는 책일까요? 오늘날 기독교에 위기가 발생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믿는 기본적인 신앙에서부터 흔들리고 있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요, 여러분에게 영생의 진리를 가르쳐 주는 책으로 믿고 계시는지요?

성경은 선지자들이 하나님께서 불러 주시는 말씀을 그대로 받아 적은 책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 즉 사람들을 감동하시어 그들의 언어로 기록하도록 하셨습니다. 날이 가면 갈수록 성경은 참된 확실성과 그 진실성이 점점 더 빛나고 있습니다. 성경은 과학적으로, 고고학적으로, 역사적으로 그 정확함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이번 호를 통하여 많은 자료를 얻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가정과 영성: 펭귄과 들소 그리고 연어 - 제2부

 지난 호에서 우리는 교회 안에 존재하는 들소와 연어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아프리카 들소처럼 아무런 판단이나 비판 없이 군중심리에 끌려다니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살펴보았고, 하늘 본향으로 돌아가려고 세상과 충돌하며 필요할 때는 교회와도 충돌하면서 살아가는 연어 같은 그리스도인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군중심리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거기에는 두 단계의 패턴이 있는데 첫 번째 단계는 다수에 속하고자 하는 정신이고, 두 번째 단계는 일단 다수에 속한 다음에는 그 안에 존재하는 소수의 엘리트 그룹에 속하고자 하는 정신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먼저 다수가 가는 방향으로 자신의 방향을 결정한 다음, 그 다수가 인정하는 소수 그룹에 들어가고자 하는 정신이 군중심리이다. 나는 내 생각을 갖고 살아간다.라고 말하지 마라. 현대인들은 직장, 자녀 교육, 신앙생활 등 거의 모든 면에서 이러한 두 단계의 패턴을 따라가고 있다.

 지난 호에서 군중심리를 설명하고자 아프리카의 들소 이야기를 예로 들었었지만, 사회학자들이 군중심리를 설명할 때에 가장 흔히 사용하는 예증은 펭귄 이야기이다.

남극의 펭귄 이야기
 남극에는 수많은 펭귄 떼들이 살고 있다. 멀리서 보면 많은 사람이 얼음 위에 까만 신사복을 입고 서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들을 남극의 신사라고 부른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참 이상한 장면이 가끔 나타난다. 그중에서 한 마리가 갑자기 바다로 들어가면 그것에 뒤이어 수백 수천 마리의 펭귄들이 줄을 서서 차례로 바다로 들어간다. 아무 생각도 없이 목적도 없이 주변에 있는 친구들이 바다 속으로 들어가니까 덩달아 들어간다. 왜 들어가느냐고 묻지도 않고 대답하는 펭귄도 없다. 거기에는 경고의 음성도 없고 책망의 음성도 없다. 그 줄에서 한발만 옆으로 슬쩍 빠져 나와서 다른 곳으로 가도 될 텐데 그런 펭귄들은 없다.

 이러한 현상을 GROUP THINK (단체 생각)라 하는데, 한 그룹이 똑같은 생각을 갖고 한 방향으로 나가는 것을 뜻한다. 어떤 교회나 그룹에도 다 GROUP THINK가 있는데 이것이 잘못 세워지면 완전히 잘못된 방향으로 가게 된다. GROUP THINK가 잘못 결정된 예가 있는데, 얼마 전에 미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텍사스 주의 한 몰몬 분파의 경우이다. 그들은 일부다처주의를 믿는다. 아브라함이 일부다처였고, 여러 믿음의 조상들이 둘 이상의 아내를 가졌다. 그들은 성경 속에 있는 그러한 사실들을 보면서 그들의 신앙 속에 일부다처를 GROUP THINK로 받아들였다. 그들 사회 속에서는 일부다처가 아닌 사람은 비정상이 되어 버리고 만다. 이것이 GROUP THINK가 가진 무서운 함정이다.

 이유는 잘 모르지만 남들이 그렇게 하니까 나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군중심리이다. 왜 그렇게 하는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괜히 불안하고 뒤처지는 것 같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군중심리에 쉽게 빠져드는 이유는 군중 속에 있을 때 안전감과 평안을 느끼기 때문이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침례 요한과 헤롯의 경우를 잘 살펴보면 들소가 되고 싶지 않았지만 들소로 전락되고 마는 교훈을 배울 수 있다.

 침례 요한 : 침례 요한은 연어인가? 펭귄이나 들소인가? 물론 연어이다. 어떻게 침례 요한이 연어인 것을 알 수 있는가? 우리가 어떤 사람을 연어라고 부르려면 다음과 같은 연어의 속성이 있어야 한다. 연어는 자신이 태어난 본향으로 돌아가고자 어떤 희생과 고통을 치르고서라도 강의 흐름과 충돌하는 속성이 있다. 침례 요한 역시 세상과 충돌하였으며 세상을 따라가는 교회와도 충돌하며 살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침례 요한을 연어로 분류할 수 있다.

 요한은 태어날 때부터 연어적 운명을 가지고 태어났다. 누가복음 1장에는 늙은 어머니가 기적적으로 요한을 수태한 이야기가 나오고 천사들의 말에 불신을 나타냈던 아버지 사가랴의 혀가 굳었다가 풀어지는 기적의 이야기들이 나온다. 이런 놀라운 이야기들이 이상하게도 예루살렘 성안에서는 전혀 인정되지 못했다. 이 모든 말이 온 유대 산중에 두루 퍼지매(눅 1:65). 왜 성 밖에 있는 유대 산중에는 두루 퍼진 소문이 예루살렘 성안에는 퍼질 수 없었는가? 그 당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진리처럼 여겨졌던 전통이 있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기별과 기적은 반드시 예루살렘 성안의 지도자들을 통해서만 전달된다는 것이다.
 예루살렘 성안의 지도자들만이 하늘과 유대교회를 연결하는 유일한 통로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이 온 유대교회를 사로잡고 있었다. 그 결과 이 통로 이외의 다른 곳에서 나오는 모든 기별과 기적들은 철저하게 배척되고 무시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유대 산중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두루 널리 퍼진 침례 요한의 출생에 대한 소문이 예루살렘 성안 사람들에게는 철저하게 무시되었던 것이다. 침례 요한은 태어날 때부터 성안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을 수 없었기 때문에 결국 성에서 멀리 떨어진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로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생명의 빛이 유대교회 지도자들에 의하여 배척당하였던 것과 같이 그 후의 각 세대에 있어서도 그 역사는 반복됐다. 침례 요한이나 예수께서 유대교회에서 핍박받고 물러나신 것과 같은 역사가 거듭거듭 반복되었다. 중세기 개혁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에 그들은 기성 교회(천주교회)에서 분리될 생각은 조금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교회 지도자들이 새로운 빛을 받아들이는 대신에 가혹한 핍박을 가하자 어쩔 수 없이 교회를 떠나 빛을 받아들이는 새로운 사람들에게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 마지막 시대에도 종교 개혁자들의 발자취를 따르는 사람들은 하나님 말씀의 명백한 가르침을 선포하려면 그들이 사랑하는 교회를 불가불 떠나가지 않을 수 없는 경우들이 생긴다. 성령의 음성을 귀담아 듣고 진리가 어떤 모양으로, 누구에 의해서 제시되든지 마음을 열고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의 숫자가 매우 적다.  하나님만을 바라보면서 그토록 예리한 기별을 전했던 침례 요한도 헤롯에 의해서 허무하게 목이 잘려 죽었다. 헤롯은 개인적으로 침례 요한을 존경하던 사람이었다. 그런 헤롯 왕이 왜 침례 요한의 목을 치라고 명령했을까? 이 문제를 살펴보도록 하자.

 헤롯 : 헤롯은 연어인가? 펭귄이나 들소인가? 교회 안에서 들소가 되고 싶은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헤롯 역시 들소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들소가 되고 말았다. 마가복음 6:17-26을 읽어 가면서 들소가 되어 가는 과정을 살펴보도록 하자.  17절부터 나오는 상황을 살펴보면 헤롯이 요한의 부활에 대한 허망한 소원을 갖게 된 이유가 나온다. 17절부터는 장면이 과거로 돌아가 헤롯이 요한을 죽였던 과정이 나온다.

 전에 헤롯이 자기가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에게 장가든 고로 이 여자를 위하여 사람을 보내어 요한을 잡아 옥에 가두었으니 이는 요한이 헤롯에게 말하되 동생의 아내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 하였음이라 헤로디아가 요한을 원수로 여겨 죽이고자 하였으되 하지 못한 것은(막 6:17-19). 침례 요한은 헤롯 왕에게 동생의 아내를 취하는 것은 명백한 죄라는 사실을 말해 주었다. 이것 때문에 헤롯의 정부인 헤로디아는 요한에게 깊은 원한을 갖게 되었다.

 헤롯이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여 보호하며 또 그의 말을 들을 때에 크게 번민을 느끼면서도 달게 들음이러라. (막 6:20). 헤롯은 요한을 깊이 존경하던 사람이었다. 그의 말을 들을 때에라는 표현을 보아서 요한과 헤롯의 관계는 이 사건 이전부터 알고 있던 사이임이 틀림없다. 오래전부터 요한은 헤롯에게 조언을 해왔고 그때마다 헤롯은 요한의 말을 두려운 마음으로 그의 조언을 달게 받아들였다.  이런 헤롯이 왜 침례 요한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리게 되었을까?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21-24절 마침 기회 좋은 날이 왔으니 곧 헤롯이 자기 생일에 대신들과 천부장들과 갈릴리의 귀인들로 더불어 잔치할새 헤로디아의 딸이 친히 들어와 춤을 추어 헤롯과 및 함께 앉은 자들을 기쁘게 한지라 왕이 그 여아에게 이르되 무엇이든지 너 원하는 것을 내게 구하라 내가 주리라 하고 저가 나가서 그 어미에게 말하되 내가 무엇을 구하리이까 그 어미가 가로되 침례 요한의 머리를 구하라 하니.
 요한을 죽이기 위한 기회를 노리던 헤로디아에게 좋은 기회가 왔다. 헤롯의 궁전에서 왕의 생일을 축하하는 연회가 열리고 유대 사회의 지도자들이 모였는데, 이때 헤로디아의 딸이 헤롯과 많은 군중 앞에서 춤을 추게 되었다. 술이 거나하게 취한 헤롯 앞에서 살로메는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을 만큼 춤을 잘 추었음이 틀림없다.
 헤롯은 살로메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지 말해 보라고 호기를 부렸다. 헤로디아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살로메는 엄마인 헤로디아에게 가서 무엇을 달라고 요구할지 물어보았을 때, 헤로디아는 자신의 부정한 관계를 지적한 침례 요한의 목을 달라고 하라고 딸에게 말했다.

 사람들 관계에서 곧바른 말을 하는 사람은 언제나 원수가 생긴다. 그래서 사람들은 듣기 좋은 말만을 골라서 하게 되는 것이다. 침례 요한도 자신이 했던 곧바른 말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된 것이다. 헤로디아의 딸이 헤롯에게 나아가 요한의 목을 달라고 요구했다. 헤롯은 얼마나 괴로웠겠는가? 나이 어린 여자 아이가 기껏해야 새로 나온 마차 정도를 요구할 줄 알았는데 자신이 존경하는 요한의 목을 요구한 것이다. 헤롯은 어떤 결정을 했을까?

 막 6:26 왕이 심히 근심하나 자기의 맹세한 것과 그 앉은 자들을 인하여 저를 거절할 수 없는지라. 왜 침례 요한을 죽였는가? 자신의 곁에 앉아 있는 자들의 기대를 맞추고자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요한을 죽이고 싶어서 죽인 게 아니다. 그들의 눈치를 보면서 요한의 목을 참수하라고 명령했던 것이다. 헤롯의 곁에 앉아 있는 자들이 누구인가? 그들은 21절에 나온 대신들과 천부장들과 갈릴리의 귀인들 즉, 유대교회의 상류 지도층이었다.

 바로 이것이 군중심리를 극복하지 못한 사람의 모습이다. 군중의 압력에 굴복하고 세속적인 교회와 충돌을 피하려고 하는 사람은 언제나 위기의 순간에 진실을 말하지 않고 침묵을 지킴으로써 선지자를 죽이고, 그의 기별을 땅에 묻게 된다. 군중심리, 이것이 위기의 순간에 그리스도인이 진리를 외면하게 되는 이유이다. 교회 안에 배도가 들어오는 위기의 순간에 지도자가 입을 다물면 선지자가 죽고 그 기별이 땅에 묻히게 된다.

 헤롯은 요한의 삶이 의롭고 그가 했던 설교가 진리였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곁에 있는 사람들의 눈치를 보면서 입을 다물었고 그 결과 메시아의 길을 예비하였던 선지자의 목이 떨어졌다. 왜 요한을 죽이라고 명령했는가? 침례 요한의 편을 드는 말을 할 경우 평생을 침례 요한의 파로 낙인 찍혀서 자신의 생애를 망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스도의 초림을 준비하기 위한 기별을 전했던 침례 요한에게 일어났던 이러한 일들이 그리스도의 두 번째 오심을 위해서 준비하는 사람들에게도 정확하게 반복된다. 마지막 시대에 하나님의 기별과 진리를 있는 그대로 전하는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 어떠한 보호도 받지 못하고,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하게 될 것이다.

 군중의 눈치와 비위를 살피는 자는 결코 연어처럼 살 수 없다. 아프리카 들소나 펭귄 같은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말하지 못한다. 그들은 그저 주변 군중이 뛰면 같이 뛰고 주변 사람들이 물에 빠지면 같이 빠질 뿐이다. 교인들이 싫어할까 봐, 교회 장로님이 싫어할까 봐, 교회 목사님이 싫어할까 봐 양심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이 주시는 기별과 음성에 귀를 막는 것, 바로 그것이 라오디게아 군중의 특징이다. 그들은 사람을 기쁘게 하지만 하나님의 진리 앞에서는 비겁한 사람들이다. 마지막 시대의 라오디게아 교회는 그런 군중으로 가득 채워져 있는 교회이다(요한계시록 3장은 마지막 시대의 교회를 라오디게아 교회로 상징하였음).

라오디게아 교회의 형편
 구원을 잃어버렸지만 주변 사람들의 인정 속에서 완전한 안전감을 느끼고 사는 것, 이것이 라오디게아 교인들의 삶이다. 가장 위험하지만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그들이 라오디게아 교인들이다. 깊은 기만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계 3:13,17).
 마지막 시대의 교회인 라오디게아의 교인들은 가장 가난하지만 부자라고 생각하고 가장 부족한 상태에 있으면서도 부족한 것이 전혀 없다고 생각하며, 벌거벗고 있지만, 옷을 입고 있다고 생각한다. 정말 놀라운 기만이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다 가난하기 때문에 자신이 가난하다고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다 벌거벗고 있기 때문에 자신이 벌거벗고 있다고 생각하지 못한다. 벌거벗은 사람들이 정상으로 받아들여지는 교회가 라오디게아 교회이다. 주변 사람들이 다 눈멀어 있기 때문에 자신이 눈멀었다고 생각하지 못하게 된다. 눈을 뜬 사람들이 오히려 비정상으로 취급받는 교회가 라오디게아 교회이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군중은 사람이 시키는 대로 행동하고 결정한다. 목사가 하는 말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든지 다 받아들인다. 죄를 이길 수 없다고 가르치면 그것을 받아들이고, 예배드릴 때 손뼉치고 드럼을 치라고 말하면 그대로 따른다. 라오디게아의 군중은 사람의 뜻만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지 않는다.

 마지막 시대의 참된 그리스도인은 요한계시록이 말하는 대로 어린양이 인도하는 대로 따라가는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계 14:4-5).
 마지막 시대의 군중은 다수의 사람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방향으로 이리저리 옮겨다닐 뿐이다. 그들은 라오디게아의 벌판을 떠돌아다니는 들소들이다. 자신이 고민하고 내리는 판단과 양심적 저항이 없다. 구원도 개인적이고 심판도 개인적으로 이루어지지만 라오디게아 사람들은 군중의 판단에 모든 것을 맡기고 살아간다. 그들은 군중 속에 있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고 믿는다.

 군중 심리의 특징 중의 하나는 경고를 무시하는 것이다. 라오디게아 교인들도 철저하게 경고를 무시한다. 당신은 부자가 아닙니다.라는 경고도 무시하고, 당신은 눈이 멀었습니다.라는 경고도 무시하며, 당신은 옷을 벗고 있습니다.라는 경고도 무시한다. 그리하여 기만에서 벗어날 모든 기회를 잃어버리게 된다.

누구의 책임인가?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왜 이렇게 완벽한 기만 속에 있을까? 왜냐하면 그들의 형편을 정확하게 알려주는 사람들이 너무나 적기 때문이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들의 숫자가 너무나 적다. 라오디게아 교회를 위한 기별을 침례 요한처럼 곧바르게 전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너무나 적다. 라오디게아 교인들이 옷을 벗고 있고, 눈멀어 있고, 가난하고 헐벗었다는 사실을 알려주어야 하는데, 그것을 말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너무나 적어서 그 목소리가 군중에 의하여 묻혀버렸다.

 그런데 왜 실제로 라오디게아 교회에 경고의 기별을 전하는 사람들을 보기가 어려운가? 왜냐하면 군중의 눈총과 압력에 굴복하였기 때문이다. 다수에 속하고자 하는 군중심리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군중이 싫어하는 설교는 하지 않고 군중이 싫어하는 가르침은 피해 다니는 교회 지도자들 때문에 라오디게아 교인들이 기만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은혜와 섭리를 통하여 복음을 이해하도록 인도해 주셨고 라오디게아 교회의 형편을 정확하게 볼 수 있는 눈을 주셨지만, 당신이 종들은 군중의 눈치를 살피면서 입을 다무는 것이다. 이것이 지금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 갖고 계신 딜레마이다. 그래서 성경은 그런 지도자들을 가리켜 벙어리 개라 부르고 있다. 그 파수꾼들은 소경이요 다 무지하며 벙어리 개라 능히 짖지 못하며 다 꿈꾸는 자요 누운 자요 잠자기를 좋아하는 자니(사 56:10).

 신학적인 측면에서 볼 때, 라오디게아 교회를 깊은 기만의 잠에 취하게 한 장본인은 하나님의 진리와 계명을 무시하고 믿음만을 강조하면서 십자가 보혈의 피를 값싼 은혜로 만들어 버린 자유주의 복음이다. 세속과 죄에 대하여 승리를 하지 않고도 구원받는 길을 열어 놓은 자유주의 복음 때문에 라오디게아 교회 교인들은 깊은 잠을 자는 것이다. 자유주의 복음을 믿으면 잠을 자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죄를 승리하지 않고서도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막연한 기대를 하게 되기 때문이다.
 값싼 은혜를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피 흘리기까지 죄와 싸우라.라는 사도 바울의 권고는 무의미해진다. 그 말씀이 별 의미가 없게 되면 그리스도인은 바로 잠들게 된다.  그러나 라오디게아 교회가 그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마지막 시대에 하나님께서 교회에게 주신 기별과 복음을 올바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의 비겁한 침묵 때문이다. 소위 스스로 보수주의자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침묵 때문에 라오디게아 교인들이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교회가 깊은 잠에 빠진 원인은 자유주의 복음을 설교하는 사람들이 제공했지만, 그 기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진리와 원칙을 올바로 이해하고 있는 보수주의자들에게 있는 것이다. 크게 외치지 않고 깨우지 않는 보수주의자들, 바로 그들이 라오디게아 교회가 가진 문제의 중심에 있는 사람들이다. 현대 기독교회가 이렇게 된 것이 누구의 책임인가? 우리는 모두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해야만 한다.

 옛 신앙을 지킨다고 말하는 자들이 연어적 특성들을 잃어버리는 것이 지금 현재 기독교회가 가진 가장 큰 문제 중의 하나이다. 성경의 진리를 올바로 이해하고 있지만 교회를 위하여 말하지 않는 당신의 종들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 바로 이것이 라오디게아 교회를 바라보는 하나님의 고민이 아닐까?

 예레미야 시대에도 이스라엘의 죄와 배도에 대해서 정확하게 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예레미야와 비슷한 설교를 하고 예레미야와 같은 가르침을 가르치기를 두려워했다. 왜 그들은 침묵을 지켰을까? 두려움 때문이었다. 예레미야가 전했던 기별은 예레미야 자신이 만들어낸 기별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당시의 유대교회를 깨우고 개혁하려고 주신 기별이었다.

 노아가 전했던 기별, 예레미야가 전했던 기별 그리고 침례 요한이 전했던 기별과 같은 말씀이 라오디게아 교회 안에서 들리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 사람의 눈총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교회 지도자들과 군중으로부터 따돌림받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라오디게아 교회 속에서 경고의 기별이 사라진 이유이다.

 지금 드리는 이 말씀을 잘 기억하기 바란다. 옛날 유대교회는 예루살렘 성안 사람들의 군중심리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고 메시아를 거절했지만, 마지막 시대에는 라오디게아 교회의 군중심리 때문에 성령의 음성이 거절당하고 있다. 노아 시대에 들소 떼가 온 교회와 세상을 뒤덮었을 때 물로 심판하셨던 것처럼, 마지막 시대에도 들소 떼들과 펭귄 떼들이 온 교회와 세상을 덮으면 그때 예수께서 세상을 심판하려고 재림하실 것이다. 지금 거의 덮여가는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은가?

의를 아는 자들아 마음에 내 율법이 있는 백성들아 너희는 나를 듣고 사람의 훼방을 두려워 말라 사람의 비방에 놀라지 말라 그들은 옷같이 좀에게 먹힐 것이며 그들은 양털같이 벌레에게 먹힐 것이로되 나의 의는 영원히 있겠고 나의 구원은 세세에 미치리라(사 51:7, 8).

창조 교실: 사막의 배, 낙타

성경 창세기에 처음 등장한, 아주 신기한 동물인 낙타에 대해 한번 알아볼까요?
 낙타가 성경에 제일 처음 나타난 곳은 창 12:16입니다. 이에 바로가 그로 말미암아 아브람을 후대하므로 아브람이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낙타를 얻었더라.
당시에 이집트 사람들이 낙타를 길렀다는 증거가 있거나 동물군 그림에 설명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비평가들은 성경을 신뢰하기 어렵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지역에 낙타가 존재한 것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B.C. 1800년 초엽, 낙타는 메소포타미아와 팔레스타인 사이의 사막을 횡단하는 교통수단으로 이용되었던 사실이 역사에 나옵니다. 그리고 B.C. 16세기 정도에는 이 지역에 널리 분포되었습니다.

 낙타는 사막의 배라고 불립니다. 낙타는 말이 들어오기 이전에 아라비아나 이집트에서 승용(乘用), 또는 짐 운반용 가축으로 사육되었습니다. 혹이 하나인 낙타는 B.C. 3000년경에 이집트에서 사육되었지만, B.C. 1400년 무렵까지 낙타에 대한 기록이 없다가 그 후에 다시 등장하였습니다.

 많은 동물이 살기조차도 어려운 사막에서 낙타는 어떻게 무거운 짐을 운반하며 생존할 수가 있을까요? 낙타는 신체 구조가 사막의 거친 기후에 잘 견디도록 설계되어 있답니다. 심한 모랫바람으로부터 눈을 보호하도록 눈썹과 눈두덩이 길고 두꺼우며, 허파를 보호하도록 코에는 예민한 근육이 있어 모래가 들어오는 것을 방지한답니다. 또 두꺼운 가죽과 털은 뜨거운 낮의 태양과 추운 밤으로부터 보호해주며, 넓은 말굽은 뜨거운 모래 위를 걷기에 적합하게 되어 있습니다. 낙타 등에 있는 큰 혹에는 지방이 저장되어 있어서 오랫동안 음식을 섭취하지 못할 때 분해해서 에너지원으로 사용하게 되어 있습니다.

 낙타는 상당 기간 물을 마시지 않고도 살 수 있는데, 낙타에게는 소변의 요소의 농도를 높여 밖으로 배출하는 물의 양을 줄이는 기전이 있습니다. 또 낙타는 특수한 순환계를 가지고 있어서 수분이 부족해 혈액이 진해지면 주위에 있는 조직으로부터 물을 흡수해 보충하게 되어 있습니다. 심한 경우에는 전 체중의 25%까지 물을 혈액에 빼앗기고도 살 수가 있답니다. 이처럼 건조하면서 일교차가 심한 사막 기후에 적합하게 만들어진 신기한 동물 낙타, 낙타는 인간의 범죄 이후, 세상에 생길 사막 지역을 위해 하나님이 창조하신 놀라운 피조물이 아닐까요?

건강: 사랑, 유전자, 생명

 과학자들은 쥐들에게서 매우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하였다. 쥐는 새끼를 낳으면 어미 쥐가 새끼 쥐를 열심히 핥아 준다. 처음에는 새끼 쥐가 더러우니까 핥아 준다고 생각했는데, 깨끗한 새끼 쥐들도 계속해서 핥아 주는 것을 보게 되었다.

 이것을 이상하게 여긴 과학자들은 그 이유에 대해서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과학자들은 실험 대상으로 뽑은 열 마리의 새끼 쥐들 가운데 다섯 마리는 어미 쥐와 함께 머물게 하였고 나머지 다섯 마리는 어미 쥐로부터 떼어 놓았다. 그런 후에 두 그룹의 새끼 쥐들에게 같은 음식물을 주면서 그들의 성장 과정을 비교해 보았다. 결과는 놀라운 것이었다. 어미 쥐와 함께 있던 다섯 마리의 쥐들은 성장했는데 어미 쥐로부터 분리시켰던 새끼 쥐들은 더는 자라지 않았다.

 어미 쥐와 분리된 새끼 쥐들의 피를 뽑아서 검사해 보았더니 성장 호르몬의 양이 많이 저하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어미 쥐와 함께 있으면서 어미 쥐가 열심히 핥아 준 새끼 쥐들은 성장 호르몬이 매우 많이 분비되어 있었다. 이 실험은 새끼 쥐를 핥아 주는 어미 쥐의 행동, 즉 사랑의 행동이 성장 호르몬 분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어미 쥐가 핥아 주면 성장 호르몬을 생산하는 유전자가 활성화되어 매우 활발하게 움직이게 되고 그 결과 성장 호르몬이 많이 분비되는 것이다. 결국, 새끼 쥐들의 유전자 활동성은 어미 쥐의 사랑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이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과학자들은 어머니의 사랑을 인정하기보다는 어미 쥐가 새끼 쥐의 피부를 자극해 주면 모세 혈관이 자극을 받아서 확장되고 그래서 혈액이 잘 순환되니까 성장 호르몬이 많이 나오게 되었다는 과학적(?) 추측을 하였다. 과학자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증명하려고 어미 쥐의 혀와 비슷하게 생긴 붓을 만들어서 그것을 따뜻한 물에 적신 후에 새끼 쥐들을 붓질해 주었다.
 그 결과 새끼 쥐들에게서 성장 호르몬이 분비되었다. 그러나 며칠 후에 과학자들은 실망하고 말았다. 왜냐하면, 계속해서 붓질을 해주었는데도 불구하고 3-4일이 지나면서 새끼 쥐들에게서 성장 호르몬이 분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처음에 붓질을 해주었을 때에 성장 호르몬이 나왔던 것은 조건 반사에 의한 현상이었던 것이다. 이 실험을 통해서 단순한 접촉이 아니라 어미 쥐의 마음에서부터 나오는 보이지 않는 사랑과 관심의 에너지가 새끼 쥐의 유전자를 자극하여 성장 호르몬이 나왔다는 결론을 다시 확인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과학자들은 사랑과 관심이라는 에너지를 믿지 못했다. 그들은 사랑 때문이 아니라 다른 어떤 과학적 이유 때문에 성장 호르몬이 분비되었을 것으로 추측하였다. 그래서 이번에는 새끼 쥐들에게 성장 호르몬을 주사로 넣어 주었는데도 불구하고 새끼 쥐들이 자라지 않는 것이 아닌가! 혈액 속에 성장 호르몬이 많아졌는데도 세포들이 성장 호르몬을 받아주지 않으니 자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세포에는 모든 종류의 호르몬을 세포 속으로 받아들이는 수용기가 있다. 혈액을 통하여 주사된 성장 호르몬이 세포 앞에서 기다려도 세포의 문을 열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수용기가 문을 열어주지 않기 때문에 성장 호르몬이 세포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여 그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어미 쥐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쥐들은 호르몬을 생산하지 못할 뿐 아니라 호르몬을 받아들이는 수용기가 망가져 있기 때문에 성장 호르몬을 인위적으로 넣어 준다고 할지라도 성장하지 못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놀라운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아무리 좋은 음식, 좋은 호르몬을 공급해 준다고 할지라도 그 마음이 닫혀서 하나님과 사람의 사랑과 용서와 관심을 느끼고 감사하지 못한다면 건강과 행복의 길을 걸을 수 없다. 사랑, 용서, 회개, 고백, 믿음 등은 과학적인 방법으로 측정할 수 없지만, 그것은 분명히 존재하는 생명력이다. 자신의 삶에 이것을 도입하는 사람만이 이 세상을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다.

신앙: 1부 - 검증되어야 할 성경

 성경은 정말 믿을 만한 책인가? 성경에 나오는 사건과 지명들과 나라들의 이름과 이야기들이 정말 비평가들의 비판처럼 허구적인 것들인가? 만일 성경이 믿을 만한 책이라면 그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가? 이번 호 신앙 기사에서는 성경의 신빙성과 정확성을 고고학과 그 외의 역사적인 사실들로 증명해 보았다. 이 기사를 함께 공부하면서 성경에 대한 독자들의 신뢰도가 전에 없이 확실하고 높아지기를 기도드린다. - 편집실 -

1. 성경 비평가들의 도전
 전 세계적으로 최대의 독자들을 가지고 있고, 한 번도 인기상품의 목록에서 빠진 적이 없으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알려진 위대한 책이지만, 성경은 종종 그 권위와 신빙성에 대하여 도전을 받는다. 성경을 읽으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깊이 감동하게 되고, 골수에까지 스며드는 영감의 힘이 느껴지며, 인간의 저작이 아무리 기교면에서 잘 다듬어졌다 해도 성경만큼 큰 감동을 줄 수 없다는 사실에서 성경의 특수한 힘이 분명히 증명될 수 있지만, 그리고 무엇보다 성경의 감화를 통해 새로운 삶을 시작한 수많은 사람이 성경의 능력을 간증하지만,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의 시대적 환경이나 지명, 또는 국가 이름과 단어들이 역사적으로 증명되기가 어렵다는 평가 때문에, 오랜 세월을 두고 많은 비평가들이 성경은 허구라고 말해 왔다. 또한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나 사건의 내용이 과학적으로 증명하기가 어렵다는 주장으로 비판론자들은 성경의 영감성을 부인하고 있다.

2. 위기에 처한 기독교의 성경
 여러 해 전에 바나 설문 조사 연구소가 틴데일 종교 출판사의 의뢰로 한 연구에 의하면, 거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을 소유하고 있으며, 또한 이 책이 인류 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책이라는 사실을 믿고 있으면서도, 50% 이상이 이 책은 실제로 내게는 해당이 되지 않으며 너무 어려워서 이해가 되지 않으므로 거의 읽지 않고 있다고 대답하였고, 또 60%는 시간이 없어서 읽지 못한다고 답변하였다. 더 충격적인 사실은 몇 년 전 미국의 Red book 잡지사의 통계에 의하면 현재 미국의 그리스도인 중 64%가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의 말씀보다는 하나의 도덕적인 지침서라고 믿고 있다는 사실이다. 성경은 이제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구원을 주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기독교인들조차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믿는 기본적인 신앙에서부터 흔들리고 있다.

3. 성경을 검증하는 방법들

  고서 검증법
 어떤 책을 아무 선입관 없이 객관적으로 검증하는 방법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고서 검증법이다. 이것은 옛날에 기록된 책이 얼마나 가치 있고 정확한 책인가 하는 것을 검증하는 방법이다. 그 방법에 의하면 원본이 없는 기록문서의 경우에 현재 가진 사본만을 가지고, 원본과 사본과의 정확성 정도를 검증해서, 지금 가지는 사본이 어느 정도 믿을만한 것인가 하는 것을 평가하는 것이다. 이 방법을 통해서 고서들을 검증하는데, 예를 들어 호머의 일리아드라든가, 셰익스피어의 희곡 같은 것들을 검증할 수 있으며, 또한 이 방법으로 성경을 검증할 수 있다.

고고학적 검증법
 고고학이 성경의 신성성을 증명할 수는 없으나 성경에 나타나는 사건들과 이야기들을 역사적으로 증명할 수는 있다. 고고학은 성경 비판론자들의 이론들에 반하여 큰 공헌을 했다. 성경에 나타난 사건들이 실제적이고 논리적이었다는 것을 고고학을 통하여 알게 되므로 성경 말씀의 정확성을 판단할 수 있으며, 이러한 경위를 통하여 성경의 영감성을 이해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길을 열고 있다.

예언 성취를 통한 검증법
 성경을 연구해 보면, 성경에 예언된 수많은 예언이 역사적인 사건과 지리적인 입지에서 정확하게 성취된 것을 발견할 수 있는데, 성경의 정확성은 예언의 성취에 의하여 확실하게 증명된다. 이 외에 인간의 마음에 일어나는 변화와 개혁을 통하여 성경의 영감성을 검증할 수 있으며, 또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와 사건들을 과학적으로 충분히 검증할 수 있다. 계속 이어지는 기사에서 위에 언급한 몇 가지 검증법에 따른 성경의 정확성과 신빙성에 대하여 더 자세히 연구해 보기로 하자.

4. 고서 검증법
 우리가 현재 가진 사본이 얼마나 원본에 가까운지를 검증하는 방법으로 고서 검증법(Bibliographical Test)이라는 방법이 있다. 이 방법은 고고학자들이 성경의 신뢰도를 측정할 때 사용하는 방법으로서 많은 고고학자 사이에 사용되고 있는 방법이다. 이 고서 검증법은 원본이 없는 경우 현재 가진 사본들끼리 서로 비교하여 보아, 원본과의 정확성 정도를 알아보는 방법이다. 이 방법에 의하면 사본의 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사본이 원본으로부터 만들어진 시간적인 차이가 작으면 작을수록, 또 사본과 사본 사이에 오류가 적으면 적을수록, 그 사본은 원본과 가까운 사본이 된다.

 이것은 고고학에서 널리 이용되고 있는 방법인데, 원본이 없는 대부분 모든 사본에 대하여 이 방법이 응용되고 있다. 우리가 가진 성경은 구약은 물론 신약 성경도 최초의 원본이 만들어진 시간이 지금부터 무려 4,000년 또는 2,000년 전에 만들어진 것이므로, 지금까지 남아 있는 원본은 하나도 없다. 그러므로 성경의 신뢰도를 알아보는 객관적인 방법으로는 고고학자들이 이용하고 있는 고서 검증법을 이용하여 그 정확성 정도를 가늠할 수가 있다.

 성경과 비교하는데 가장 좋은 대조 서적으로는 호머(Homer)의 일리아드(Illiad)가 이용되고 있다. 신약 성경이 많은 사람에게 읽히고 암기되고 또 비문에 적히기도 하며 후세 사람들에게 베껴져 전해졌듯이, 호머의 일리아드도 많은 사람에게 애송 되어 지금까지 전해 내려왔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의 역사 문학가인 호머가 지은 일리아드는 그리스의 유명한 대서사시이다. 신약 성경과 호머의 일리아드를 고서 검증법으로 한번 비교해 보면, 고서 중 가장 신빙성이 높은 역사적 기록으로 인정되고 있는 일리아드를 정확도 1로 잡았을 때 신약 성경은 8,000배나 더 정확한 책이라는 결론이 나왔으며 이 사실에 대하여 모든 고고학자들이 동의하고 있다.

 일리아드는 사본의 수가 643개이고, 최초의 사본은 500년 후인 기원전 400년에 기록되었고, 책과 책 사이의 오류가 5%이다. 그 반면에 신약 성경은 사본의 수가 무려 24,633권이나 되고, 원본이 만들어진 A.D.100 년으로부터 최초 사본이 나타난 것은 불과 25년 후에 바로 나타난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사본 사이의 오류의 정도는 0.5%에 불과하다. 그래서 결국 일리아드의 정확성과 신약 성경의 정확성을 비교해 보면, 일리아드를 정확도 1로 잡았을 때 신약 성경은 8,000배나 더 정확한 책이라는 결론이 나오는 것이다. 이것은 객관적인 검증 결과이다.

5. 성경에 나타난 오차의 이유
 성경이 인간이 가진 책 중에서는 제일 정확한 책인 것은 알았는데, 0.5%는 왜 오차가 있느냐 하는 것을 문제 삼는 사람들이 있다. 그 오차의 내용을 분석해 보면, 0.5% 중에서 80%에 해당하는 0.4%는 철자의 잘못으로 밝혀졌다. 즉, 예를 들어 모든 교회에게 문안하노라 하는 내용이 모든 고회에게 문안하노라 하는 식의 철자법 잘못이다. 이것은 누가 봐도  교회 를  고회 로 잘못 쓴 것이라는 사실을 금방 알 수 있고, 이것 때문에 문장을 잘못 이해하는 일은 없다는 것이 밝혀졌다.

 나머지는 접속사의 오류로 밝혀졌는데, 즉  A 그리고 B 그리고 C라는 내용이  A 콤마(,) B 콤마(,) C  하는 식으로 접속사가 생략된 것이다. 이것 역시 이 일로 문장을 잘못 이해하는 일은 거의 없다는 것이 밝혀졌으며, 비록 오류 자체는 0.5%이지만 사실은 오류가 없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고 고서 검증법으로 판정되었다.

성경 복사의 규칙들
 성경이 천 년이나 지나도록 한 자의 오차 없이 정확하게 보전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그것은 유대인의 풍습 속에서 발견된다. 유대인 중에는 오로지 성경만을 필사하는 전문가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탈무디스트(Talmudist)라고 불리었다. 그들은 성경을 필사하는데, 열아홉 가지의 규칙을 가지고 있었다. 그 중에 몇 가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항상 같은 옷을 입고 복사를 하라: 이 옷 저 옷 바꿔 입으면, 마음도 바뀌고 태도가 바뀔 수가 있다.
2. 검은색 잉크만을 써라: 이 색 저 색 쓰면 마음이 산란해진다.
3. 복사를 할 때는 깨끗한 동물 가죽 위에다 복사하고, 글씨 사이의 간격은 가능하면 좁게 써서 머리카락 하나 정도 들어갈 정도로 빡빡하게 써라: 나중에 생길 수 있는 엉뚱한 결과를 방지하고자.
4. 외워서 쓰지 마라: 평생 성경을 베끼다 보면, 한 예로 시편 23편 같은 경우는 완전히 외었을 것이지만, 아무리 잘 아는 구절도 암기력에 의존하지 말고 반드시 원본을 보고 써야 했다.
5. 하나님, 즉 야훼나 엘로힘 같은 말을 쓸 때는, 왕이 들어올지라도 절대 다른 데를 쳐다보지 말라: 이유는 하나님의 이름을 혹시 잘못 쓰면 큰일 나기 때문이었는데, 그래서 실제로 탈무디스트들이 성경을 복사하다가 앗시리아, 바빌로니아 등이 침공하였던 당시, 야훼 이름을 쓸 때 일어나지 않아서 칼에 맞아 죽은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6. 두 번째 베낄 때는 방금 베낀 사본을 보고 베끼지 말고 원래 베꼈던 원본을 보고 베끼라.


 위와 같은 철저한 규칙 속에서 복사했기 때문에 사해 사본이나 마소라 사본의 기록이 똑같이 유지되었던 것이다.

신앙: 2부 - 성경의 정확성

고고학이란?
 고고학이란 인간이 남긴 유적이나 유물과 같은 물질 증거와 그 상관관계를 통해 과거의 문화와 역사 및 생활 방법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그 중 기독교 고고학은 기독교와 관계가 깊은 유물이나 유적을 연구하여 성경의 정확성과 허구성을 가려내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으며, 성경의 정확성과 신뢰도를 높이는 데 있어서 지대한 공헌을 한 학문이다.
 고고학은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나 사건, 또는 지명이나 인물들의 이름이 실제로 존재하던 것이었는가, 아니면 허구적인 이야기에 불과한 것이었는가 하는 중대한 문제를 발굴작업이나 탐사나 연구를 통하여 밝혀내므로 많은 성경 비평가들의 비판을 종식 시키고 있으며, 성경의 정확성에 대한 신뢰도를 높이고 있다.  고고학은 성경에 대한 불신과 의심을 종식 시키시려고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의 학문이라고 말해도 손색이 없는데, 그 이유는 고고학적 증명을 통하여 밝혀지는 성경의 정확성을 보고 많은 사람이 성경을 신뢰하고 성경의 저자이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더 강화되었기 때문이다.

로제타석의 발견
 성경의 정확성을 고고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지평을 여는데 대단한 공헌을 한 사건이 1798년에 생겼다. 그것은 바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증명해 주는, 성경 고고학적 발견의 길잡이가 된 진기한 물건인 로제타석의 발견이었다. 이 덕분에 성경의 정확성의 입지가 굳어졌으며, 성경의 고고학적 증명이라는 새로운 지평을 열게 되었다.
 1798년도에 나폴레옹은 성경에서 애굽이라고 불리던 이집트를 공격하였다. 그는 이집트에 가서 그들의 굉장한 문화적인 고적들을 보고 큰 감동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이듬해에 약 100여 명의 언어학자를 대동하여 가서 그들의 역사를 연구하도록 하였다. 그러던 중에 그들은 한 이상한 돌을 발견하였는데, 그 돌에는 세 가지 언어 즉 애굽어, 고대 상형문자, 헬라어로 된 글이 기록되어 있었고, 그것이 바로 그 유명한 로제타석이었다. 그 로제타석은 같은 글을 세 다른 언어로 기록하고 있었다. 그래서 프랑스 학자 쟌 폴 샴폴리옹씨는 헬라어를 기준으로 하여서 드디어 고대 상형문자를 판독하는 데 성공하게 되었고, 이 일로 인하여서 고대 유적들의 발굴에서 찾게 된 수많은 기록을 이해하게 되었다. 이 중 특별히 이집트의 고대 문자였던 상형문자의 판독은 성경 말씀의 정확성을 증명하는 큰 계기가 되었다.

사해 사본이 증명하는 성경의 정확성

 우리가 가진 히브리어 성경 사본은 A.D.(주후) 900년부터 복사된 것인데, 이 사본들이 성경의 원본과 같은 것이라고 증명하기는 어려웠었다. 그러나 사해 사본을 발견한 고고학자들에 의하여 우리가 보아 왔던 구약 성서가 그 원본과 같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게 되었다. 특별히 이 사해 사본들 가운데는 이사야서 전권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것은 B.C. 125년경에 쓰인 것으로서 1,000년 이상의 역사를 갖고 있으며, 지금까지 우리가 읽고 있었던 마소레틱 사본에 의한 이사야서와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었다.
 사해 사본 덕분에, 지금 우리가 보는 성경과 예수께서 지상에서 봉사하시면서 사용하시던 성경이 같다는 증거를 확보하게 되었다. 1940년대까지만 해도 가장 오래된 구약 성경 사본은 기원후 900년경에 기록된 마소라 사본뿐이었다. 구약 성경의 마지막 책인 말라기서가 기원전 400년경에 기록되었고, 마소라 사본은 그로부터 1,300년이나 후에 쓰인 사본이므로 많은 오류가 포함되었을 것이라는 의심을 받아 왔다. 그런데 1940년대 중반에 일어난 위대한 발견, 곧 성경 사해 사본의 발견으로 그 의심은 종식되게 되었다.

사해 사본이란 무엇인가?
 1945년 어느 날, 이스라엘 동부지역 사해바다 부근의 쿰란 언덕에서 베드윈이라는 목동이 잃어버린 양을 찾다가, 어떤 동굴을 발견하고 동굴에 들어갔을 양을 찾으려고 돌을 던져 보았다. 그런데 그 안에서 쨍그랑 소리가 났다. 호기심에 들어가 보니 그 동굴 속에는 여러 항아리가 있었고, 그 안에는 쓸데없어 보이는 가죽 두루마리가 여러 개 있었다. 목동은 이 두루마리들을 아주 싼 값에 골동품상에게 팔았고, 그것이 무엇인지 잘 몰랐던 골동품상도 이것을 팔았는데, 이스라엘 구약학자의 집념 연구 끝에 이것들이 BC 125년경에 기록된 구약 성경의 사본, 즉 사해 사본이라는 것이 밝혀지게 되었다.

 사해 사본은 말라기서가 기록된 지 불과 270여 년밖에 되지 않은 때 기록된 것이었다. 마소라(마소레틱) 사본이 1,300년이나 후에 기록되었다고 비난이 심했는데, 사해 사본의 발견 덕분에 공백기를 1,100년이나 줄여 놓게 되었고, 구약 성경 마지막 책 말라기서 원본이 쓰인 후 270여 년으로 사본의 연대를 좁히게 되었다. 그 이후에 많은 고고학자가 사해 바다 부근 쿰란 지역의 11개의 동굴에서 구약 성경 사본뿐 아니라 신약 성경사본도 일부 발견하게 되었다. 사해 사본은 약 4만 개의 작은 단편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 조각들로부터 500개 이상의 책들을 엮을 수 있었다.

 사해 사본과, 1,025년 후에 만들어진 마소라 사본, 이 두 개가 얼마나 비슷한가를 비교해 보았더니 놀랍게도 두 사본은 완전히 일치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마소라 사본은 사해 사본과 똑같은 성경이었고, 그 이전 성경의 원본과도 똑같을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우리가 가진 성경은 모세가 기록하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 성경과 똑같은 성경이다.

신앙: 3부 - 고고학이 증명하는 구약 성경

1) 고고학자들과 고전학자들의 증언
1. 메소포타미아 고고학의 가장 대표적인 학자인 올브라이트 박사는 이렇게 기술하였다. 고학에 의하면 구약 전승 대부분이 역사적 사실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18세기와 19세기의 중요한 역사학자들은 성경에 대한 과다한 의심을 품고 있었다. 그 의심들은 지금도 종종 제기되고 있는데, 그러한 의심들이 점차 근거가 없는 것들임이 밝혀지고 있다. 고고학적 발견들이 거듭되면 될수록 성경의 내용을 더욱 뒷받침하고 있어서 역사적 사실로서의 성경은 점점 더 확실해지고 있다.

2. Yale 대학의 Millar Burrows : 고고학은 여러 사례를 통하여 근대 비평가들의 논리가 가상적이고 실제적이 아니며, 역사적 발전 단계를 인위적으로 적용했음을 증명했다&.

3. Merrill Unger : 구약 성경 고고학은 모든 나라들을 다시 발견했으며, 중요한 인물들을 다시 소생시켰다&.

4. Frederic Kenyon : 지난 19세기 후반기를 휩쓸었던 성경 회의론자들의 비판에 관하여 고고학이 그 허구성을 증명함으로써 고고학은 그 권위를 확립하였다&.

5. 고고학자로서 명성을 떨치는 F. Albright : 고고학이 실제로 구약 성경의 역사를 증명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6. 마찬가지로 팔레스타인의 고고학 전문가인 넬슨 글루엑 박사도 평생 성경 고고학을 연구하고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성경의 기록을 부인한 고고학적 발견은 전혀 없었다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수많은 고고학적 발견물들이 성경의 역사적 진술들을 개괄적으로, 혹은 세세하게 확증하고 있음은 명백하다.

2) 가장 최근에 발견된 그다랴의 인장
 구약 성경에 기록된 인물인 그다랴 (게달리아 벤 파슈르)의 이름이 새겨진 인장이 이스라엘 예루살렘에서 완전한 형태로 발굴됐다고 일간 예루살렘 포스트가 2008년 8월 19일 전했다. 보도에 따르면 히브리대의 에일라트 마자르 교수팀은 최근 예루살렘 성벽의 남쪽 출입구인 분문(Dung Gate) 근처 지하에서 구약 성경의 예레미야서(38장 1절)에 나오는 그다랴의 점토 인장을 찾아냈다. 2천600년 전에 사용된 지름 1㎝ 크기의 이 인장이 출토된 지역은 마자르 교수팀이 2005년 유갈(예후칼 벤 셸레마야후)의 인장을 찾아낸 곳이기도 하다.

 예레미야서에 함께 나오는 그다랴와 유갈은 고대 유다 왕국의 마지막 왕인 시드기야(제데키아) 휘하에서 장관직을 지낸 인물들로 전해지고 있다. 마자르 교수는 성경의 같은 절에 등장하는 두 인물의 이름이 새겨진 인장들이 같은 장소에서 출토되기는 이스라엘 고고학 발굴 사상 처음 있는 일이라고 자평했다.  유갈의 인장은 마자라 교수가 다윗 왕 궁전으로 추정하는 석조 구조물 지하에서 발굴됐고, 그다랴의 인장은 같은 구조물의 외벽 밑에서 출토됐다.

3) 창세기의 사실을 밝혀낸 고고학
 성경의 창세기는 특별히 많은 비평가의 도전을 받아온 책이다. 창세기 4장 22절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동철로 각양 날카로운 기계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이었더라. 이 구절은 라멕의 아들 두발가인이 청동과 쇠로 물건을 만드는 최초의 금속 세공인이 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역사가들은 오랫동안 청동기 및 철기 시대를 더 최근의 시대로 잡았기 때문에 이 기록이 심한 도전을 받았다. 그러나 고고학자들은 기원전 3,000년부터 철제 무기와 도구들이 등장했음을 발견했고, 텔 아스마르에서는 기원전 2,700년 경의 철제 단도 손잡이를 찾아냈다. 이 발굴로 성경의 기록과 연대가 얼마나 정확한 것인지가 입증되었다.

4) 아브라함은 실재의 인물인가?
 성경 창세기에는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믿음의 조상으로 불리는 성경의 유명한 인물로서, 성경을 읽어보면,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70여 년을 살아온 본토 우르를 떠나 가나안으로 가게 되었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75세 되던 해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하여 믿음으로 떠났다(창 11:31~32, 12:1~5, 히 11:8). 그때는 기원전(B.C.) 1875년경으로 이 일이 성경에 나오는 구속 역사의 기원이 되었다. 이때부터 215년 후인 기원전 1660년에는 아브라함의 손자였던 야곱이 애굽에 들어갔고, 그 후 215년 후인 기원전 1445년에는 출애굽이 있었다(갈 3:7; 출 12:40). 아브라함의 살던 도시 우르는 1853년 영국인 테일러(J. Taylor)에 의하여 텔텔 엘-무카이야(Tell el-Muqayyar)를 발굴함으로써 드러났다.

1. 우르의 생활 모습
 고고학자들이 우르를 발굴한 결과, 아브라함 시대에 해당하는 기원전 1900년 경의 거주지에서 성경의 사실과 조화되는 여러 가지 유적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 당시 태양빛에 말린 고운 흙가루로 만든 진흙 벽돌로 지은 이층집의 폐허를 발견해 내었으며, 그 외에 흙을 구워 만든 도기로 깐 안뜰, 물통과 대야가 놓인 로비, 붉은 도기 배수관을 가진 수세식 화장실, 화로와 맷돌이 놓인 부엌, 이 층으로 오르는 계단식 층계 등등을 발견하였다. 그리고 10여 개의 방을 가진 이층집들의 흔적도 발굴되었다. 그 모든 것으로 미루어 보아 아브라함 당시의 집들은 현대식 문화 주택처럼 편리한 구조였다는 것이 고고학자들의 의견이었디. 이러한 편리한 도시와 안락한 집에서 살던 아브라함이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2. 아브라함의 애굽 피난
 성경에 보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우르를 떠나 가나안에 들어온 후에 그 가나안 땅에 큰 기근이 있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때 아브라함은 기근을 피하고자 애굽으로 내려갔다(창 12:11). 그런데 이러한 성경의 사실을 밝혀 주는 역사적인 증거가 고고학을 통해 밝혀졌다.
 아브라함과 같은 시대(기원전 1900년경)에 살던 애굽(이집트)의 동부 쪽 사막 지방의 고급 관리였던 크놈헤텝 (Khnumhetep)의 무덤을 고고학자들이 발견하게 되었다. 그 무덤은 베니 하산이라는 곳에 있었는데, 그 무덤 속에는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그 무덤 벽화는 천연색으로 그려져 있는데 37명의 셈족 계통의 아시아 사람들이 이브샤라고 부르는 지도자를 따라 팔레스타인 쪽에서 이집트로 들어오는 그림이었다. 크놈헤텝은 자기 생전에 겪은 인상 깊은 사실을 자신의 무덤 벽화로 남긴 것이다.  또한, 큰 강이 없는 가나안 지방에 기근이 들면 아시아 사람들은 나일 강의 혜택을 누리는 이집트의 동부 쪽으로 들어오는 일이 많았음이 여러 기록에서도 밝혀졌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이집트로 들어왔다는 사실은 당대의 역사의 사실들과 정확하게 일치된다(창 43장 참조).

3. 함무라비 법전이 밝힌 아브라함의 가족 문제
 모르강(Jaques De morgan)이 지휘하는 프랑스 발굴단은 1901년 12월과 1902년 1월 사이에 페르시아의 옛 수도 수사에서 8피트 높이에 검은색 섬록암 입석으로 된 돌을 발굴하였는데, 그것은 저 유명한 함무라비 법전이었다. 그것에는 39단, 3,624행으로 된 282조의 고대 법문이 새겨져 있었다.

 바벨론의 아모리 왕이었던 함무라비(1728~1686 BC)의 법전은 바로 아브라함 시대를 전후해서 모세의 법보다 200년 이상 앞선 것이다. 이 법전이 발굴됨으로써 아브라함 등 족장 시대의 사회적 배경과 후에 쓰인 모세의 율법(민법)의 역사적, 사회적, 법적 타당성이 상대적으로 입증되었다. 함무라비 법 145조에 보면 아내가 임신하지 못하면 남편은 그와 이혼하든지 낮은 신분의 다른 부인을 얻을 수 있으며, 아내 스스로 자기 여종 중의 하나를 택하여 남편에게 첩으로 주라는 규정이 있다. 아브라함의 부인 사라가 그의 여종 하갈을 남편에게 첩으로 준 것은 후자를 택한 당시의 사례인 것이다(창 16:1~3). 후에 야곱의 부인 라헬이 자기의 여종 빌하를 남편에게 준 것도 같은 사례이다(창 30:3).

 메소포타미아 여러 곳에서는 기원전 2천 년 안팎의 연대가 쓰인 점토 계약 문서에서 아바라마(Abarama), 아바암라암(Abaamraam) 등으로 불리는 당대의 사람들의 이름이 나타났다. 아브람(창 12:1), 후에 개명된 이름인 아브라함(창 17:4, 5)은 모두가 당대의 구음에 어울리는 실제적인 인명이었음이 입증되었다.

5) 성경에 나오는 헷 족속(Hittites)은 정말 존재했었는가?
 그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워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 곧 겐 족속과 그니스 족속과 갓몬 족속과 헷 족속과& (창 15:18-20). 성경 비평가들은 아브라함 당시에는 헷 족속이 존재하지 않았었다고 주장하였다. 왜냐하면, 구약 성서 외에는 이 족속에 관한 기록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고고학적 발굴에 의하여 지금은 1,200년의 헷 족속의 역사가 밝혀지게 되었다.

 성경에는 헷 족속에 대한 기록이 28번 이상이나 나타나는데, 세계 역사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성경은 믿을만한 책이 되지 못한다고 그동안 회의론자들이 조롱해 왔다. 그러던 중 이집트의 한 무덤의 벽화에서 상형문자로 기록된 헷 족속에 대한 기록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거기에는 애굽이 헷 족속들과 20여 차례나 전쟁을 했다는 사실까지 기록하고 있었다. 최근에 와서는 고고학자들이 팔레스타인 남서쪽에 있는 헷 족속의 나라, 즉 영어로 발음해서 히타이트(Hittite) 나라의 수도를 발견하기에 이르렀다.

 아브라함이 그의 아내 사라가 죽자, 헤브론 지역의 막벨라에 있는 헷 족속 에브론이 소유하고 있던 굴을 샀던 기록이 성경에 나온다. 아브라함은 그곳에 자기 아내를 묻고, 후에 자기와 후손들이 쓸 무덤으로 사용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이 밭을 아브라함에게 팔았던 사람들이 바로 헷 족속이었다. 그런데 고고학적으로 이 히타이트 족속이 있었다는 것이 밝혀진 것은 지금부터 100여 년 전이다. 그전까지 수천 년 동안 사람들은 히타이트 족속이라는 것은 하나의 전설에 불과한 것으로 간주하였고, 그 때문에 성경은 허무맹랑한 책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러다가 히타이트 족속에 대한 고고학적 증거들이 나타나고, 그들의 찬란했던 문명이 밝혀지면서 성경이 진실임이 증명된 것이다.

6) Ebla 서판 발견
 시리아 북쪽 Tell Mar- dikh라고 불리는 이 지역에서 1964년부터 발굴이 시작되었는데, 거기서 1968년 Ibbit-Lim 왕조의 상이 발견되었다. Ebla는 B.C. 2300년경에 세력을 펼치던 나라로서 약 260,000명의 인구를 갖고 있었으며, B.C. 2250년에 Nara-Sim에 의하여 멸망되었다.
 1974년 이래로 17,000개의 Ebla와 관련된 서판들이 발견되었다. Ebla 서판이 성경학적으로 가진 의미는 아주 중요하다. 왜냐하면, 모세 시대에는 쓸 수 있는 문자가 제정되기 전이라고 성경 비판론자들이 주장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세가 살았었던 그 지역에 존재하였던 Ebla 나라의 서판은 모세가 나기 1,000여 년 전의 법과 풍습에 대한 기록이기 때문에 이러한 주장이 단순한 가상이었음이 밝혀지게 된 것이다. 특별히 이 서판에 기록된 법률들은 신명기에 기록된 규율들과 비슷한 형태를 보이고 있기 때문에, 법률적인 구조를 가진 구약의 신명기가 다른 책들보다도 더 늦게 기록되었었다는 주장이 틀렸음이 밝혀졌다.  또한 Ebla판이 밝힌 중요한 또 하나의 사실은 창세기 14장을 증거한 것이다.  당시에 시날 왕 아므라벨과 엘라살 왕 아리옥과 엘람 왕 그돌라오멜과 고임 왕 디달이 소돔 왕 베라와 고모라 왕 비르사와 아드마 왕 시납과 스보임 왕 세메벨과 벨라 곧 소알 왕과 싸우니라 (창 14:1,2).
 창세기 14장은 최근까지만 해도 믿을 수 없는 이야기라고 주장되어졌었다. 아브라함이 그돌라오멜과 다섯 도시의 왕들과 싸워서 이긴 이야기를 하나의 소설처럼 여겼었다. 그런데 Ebla 서판은 위에 기술된 다섯 나라의 이름을 창세기에 기록된 그 순서대로 기록하고 있으며, 그 나라들이 있었던 지역의 풍습과 연대들도 기록하고 있어서 창세기 14장의 기록이 얼마나 정확한 것이었는지를 증명하였다.

7) Mari 서판
 마리 서판의 발굴이 Andre Parrot의 지도 아래 1933년에 시작되었다. 유프라테스 중부에 있는 마리는 북서쪽 지방의 셈족 부조들의 생활 중심지였다. 1936년 M. Parrot은 B.C.1700년경의 것으로 확인되는 수천 개의 설형문자 서판들을 발견하였는데, 이 서판들에는 창세기 24장 10절에 나오는 나홀 성의 이야기가 하란과 같이 마리 서판에 기록되어 있다. 또한 마리의 왕이었던 Arriyuk은 실제로 창세기 14장의 아리옥과 같은 사람이었으며, 벤쟈민도 마리의 한 족속의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다(William F. Albright).

8) 요셉의 역사

 창세기 37장 28절에 보면 요셉이 은 20개를 받고 팔리는 이야기가 나온다. 은 20개가 그때 당시 노예를 파는 적절한 값이었을까? K. A. Kitchen의 연구에 의하면 은 20개는 B.C. 18세기 때 노예를 파는 평균값이었다고 하며, 그 전에는 주로 은 10-15개 정도로 노예 값을 매겼다고 한다. 그러므로 은 20개에 요셉이 팔렸다고 하는 기록은 시대적 정확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흉년이 들어 요셉의 가족들이 이집트로 이사갔다는 성경의 기록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Beni Hasa의 무덤에 셈 족속을 방문하는 사람들의 그림이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이것이 가능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요셉이 노예에서 수상으로 올라가는 사건은 그 당시에 가능하지 않았던 일이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으나 고고학적 연구에 의하여 나일 지방에서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음을 발견하였다. 
 가나안 사람 Meri-Ra는 왕의 갑옷 드는 사람이 되었고, 또 다른 가나안 사람 Ben-Mat-Ana는 통역관의 높은 직위를 얻었으며, 셈 족속의 Yanhamu는 Amenhotep의 부수상 직위를 얻어 삼각주 지역의 곡창 지대를 관리하는, 흉년 때에 요셉에게 부여된 비슷한 일을 하게 되었다. (Howard Vos)  또한 그 무덤에서 발견된 벽화의 그림과 상형문자들은 7마리의 살진 소와 7마리의 마른 소에 대한 그림과 이집트에 있었던 7년 동안의 풍년과 7년 동안의 흉년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었다. 거기에는 성경 창세기 41장에 기록된 말씀 그대로를 묘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일 강가에서 발견된 한 돌에는 놀라운 기록이 새겨져 있었는데, 그 기록을 고고학자 조지 배론 씨가 해석하여 그의 저서 고고학과 성경이란 책 306페이지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나는 옥수수를 모아 들였다&. 나는 씨를 뿌리는 시기 동안 잘 주시하여 보았다. 기근이 발생하여 여러 해를 계속하였을 때, 나는 옥수수를 나누어 주었다. 나일 강이 7년 동안이나 범람치 않았고, 식물들이 말라붙었다&. 창고들이 지어졌다&. 그 속에 있는 것들이 다 나누어졌다. 이 기록을 읽은 학자들과 사람들은 깜짝 놀랐고, 비평학자들은 이 사실에 대해 더는 비웃지 못하게 되었다.

9) 에돔 족속
 성경에 나오는 에돔 족속에 관한 고고학적 발굴에 대하여 살펴보자. 창세기 36장 8, 11절, 기타 여러 곳에 보면 에돔 족속이 있었고, 에돔 족속의 최초의 조상은 이삭의 아들인 에서라고 되어 있다. 에서는 에돔이라고도 불리었고, 세일 산이라는 곳에 거했다. 그리고 그 자손들이 어떻게 대를 이어 내려왔다는 것이 성경에 상세히 나와 있다. 에서라는 말이나 에돔이라는 말이나 모두 붉다는 말이다. 에서가 털이 많고 붉게 생겼기에 이런 말이 나온 것이다. 그런데 이 에돔 족속이라는 것도 성경에만 기록되어 있었지 다른 아무 데도 없었다. 그래서 수천 년간 성경이 허위라고 비난을 받아 왔다. 그런데 이것도 역시 중동의 고고학적 발견이 붐을 일으킴에 따라서 세일 산이라고 불리는 지역을 탐사하다가, 에돔 족속이라는 집단이 그곳에서 수천 년간 거주했다는 사실이 발굴되었다.  그들은 바위산을 파 들어가 조각한 아름다운 집 페트라라는 유명한 건축 구조를 가지고 살았는데, 나바티안 상인들이 거금을 투자해서 유명한 조각가들을 초청해서 이런 집들을 조각했다고 한다.

10) 히스기야 왕과 앗시리아의 침공 이야기는 정말 꾸며낸 이야기인가?
 기원전 722년에 북방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성경에 나오는 앗시리아라는 국가는 당시 매우 강력한 국가였다. 그런데 이 엄청난 앗시리아의 침공 때에 남방 유다는 힘이 약한 나라임에도 약 136년을 더 견뎌 내었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에 대해 많은 비평가가 허무맹랑한 이야기라고 비난을 하였고, 고고학자 대부분도 믿지 않았다. 그 시대에 앗시리아가 얼마가 강력한 나라인데, 힘도 없는 히스기야 왕이 어떻게 그 나라를 이기겠느냐고 믿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앗시리아의 수도 니네베에서 발굴된 실린더처럼 생긴 앗시리아의 비석에서 성경의 기록과 똑같은 내용이 발견되었다. 즉, 앗시리아 왕 산헤립이 예루살렘을 침공하러 갔다가 실패했다는 기록이 발견된 것이다.

 성경 열왕기하 20장 20절에 보면, 산헤립의 침공 때 히스기야 왕이 땅을 파고 수로를 만들어서 물을 성안으로 끌어들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이 고고학적으로 그대로 발굴되었다.  왼쪽 사진에 나오는 히스기야 왕 시절에 급히 판 수로는 완전히 암석층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성안과 바깥에서 각각 400m씩 파 들어가서 총 800m의 수로를 판 것이다. 성 바깥의 기혼이라는 샘으로부터 성안의 실로암 못으로 물이 흘러 들어오도록 하였다. 그리고 기혼 샘 윗부분은 막아 버렸다. 히스기야 왕은 이 수로를 급히 만들었는데, 다행히 산헤립의 침공 전에 완성하여 성안에 물이 있으므로 앗시리아의 침공에 끝까지 버텨내게 된 것이다. 그래서 성을 에워싼 앗시리아 군은 대치 상태에 있다가 여호와의 신이 그들을 쳐서 패배하여 도망을 치게 되었다고 열왕기하 19장 35절에 기록되어 있다.

11) 바벨론과 다니엘

1. 다니엘서의 예언은 언제 기록되었는가?
 구약 성경에는 바벨론에 끌려간 다니엘이 기록한 다니엘서가 있는데, 다니엘서의 예언이 너무나 정확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이 다니엘서가 그 사건들이 다 이루어진 후에 기록된 책이라고 생각하였다. 즉, 후대에 기록하고 이름만 다니엘서라고 하였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다니엘서에 대한 신빙성이 많은 공격을 받았다. 다니엘서에는 헬라어(그리스어) 단어가 세 개 들어 있다. 이것 때문에 다니엘서가 바벨론 시대에 쓰인 것이 아니고 알렉산더가 지배하던 헬라 즉, 그리스 시대에 쓰인 것이라는 주장이 나오게 된 것이다. 그러나 고고학적 증거를 통해 보니, 그리스와 바빌로니아는 느부갓네살 시대 이전부터 이미 광범위한 무역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말(言)도 서로 오고 갔다는 것이 밝혀졌으며, 그 세 개의 단어들은 모두 그리스의 악기 이름이었다.

2. 풀무 불은 정말 있었던 것일까?
 다니엘서에는 금신상에 절을 하지 않는다고 다니엘의 세 친구를 용광로에 집어넣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풀무 불은 다니엘의 세 친구를 던져 넣은 군병들을 죽게 할 만큼 강했으나, 세 사람은 머리카락 하나 그을리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고고학적 조사 결과 거대한 용광로가 발굴되었는데, 그 용광로의 용도에 대해 쓰인 비석에 보면 바빌로니아의 신에게 절하는 것을 거부하는 자들을 화형시키는 데 사용되는 용광로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성경의 이야기 그대로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3. 사자 굴이 발견되다
 다니엘서에 또 많은 비난을 받았던 부분은, 다니엘이 왕의 칙령을 따르지 않아서 사자 굴에 떨어졌는데, 사자들이 다니엘을 잡아먹지 않고 가만히 있다가, 다니엘을 고발했던 사람을 잡아넣었더니 뼈까지 뜯어 먹었다는 이야기이다.  고대 바벨론 지역에 대한 고고학적 조사 결과 거대한 웅덩이가 발견되었는데, 이 웅덩이는 왕의 칙령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을 사나운 짐승의 먹이로 떠밀어 넣던 데에 사용된 웅덩이라는 것이 밝혀지게 되었다. 그리고 거기에서 잡아먹힌 사람들의 이름까지 다 기록되어 있었는데, 하나님의 천사의 보호로 살아났던 다니엘이라는 이름은 없었다. 다니엘서에 기록된 이 사건은 적어도 사실에 근거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4. 미쳤던 느부갓네살 왕의 이야기
 성경에는 느부갓네살 왕이 미쳤던 이야기가 있다. 그런데 느부갓네살 왕이 정신을 차려 돌아온 후에 자신의 이야기를 기록해 두었던 것 같다. 바빌로니아의 고고학적 발견 가운데 느부갓네살 왕 자신에 의해 만들어진 명각이 발견되었는데, 그 명각에는 이 이상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었다. 그 이야기는 다니엘서에 기록되어 있는 왕이 미친 시기와 일치하는 것으로 밝혀졌고, 성경의 기록이 실제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신앙: 4부 - 고고학이 증명하는 신약 성경

신약 성경의 사본들
 신약 성경 문서는 고대의 어느 책보다 더 많은 사본 증거를 가지고 있고, 그 저작과 사본 사이의 가장 가까운 시간 간격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가장 이른 시기에 다른 언어로 번역되었다.  문서를 다른 언어로 번역하는 일은 고대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많은 다른 언어로 번역된 사실은 신약 성경의 영향력과 영감성을 입증하기에 이로운 점이다. 번역판의 수는 18,000 ~ 25,000개(추정)에 이른다. 이것들은 신약의 본문을 확증하도록 돕는 많은 증거가 된다.

 신약의 본문을 그 저작으로부터 250년 이내에 재생시킬 수가 있었던 이유는,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저술에 의해 그렇게 할 수 있었는데, 주석서와 서신 등에서 교부들과 저술가들은 성경의 본문을 인용했기 때문이다. (Quadratus, Aristides, Justin Martyr, Tatian, Tertullian, Origen, Cyprian 등의 저술가들에 의하여)  죤 버곤(John  Burgon)은 초대 교회 교부들의 저술에서 86,000개가 넘는 신약의 인용문을 분류해 냈다. 이들 교부는 모두 A.D. 325년 전에 살았던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고대 세계의 다른 모든 저술에 비해 신약 성경 본문의 신빙성의 증거는 비교할 수 없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예수의 부활에 관한 사실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것과, 돌아가신 후 3일 만에 부활하실 것을 제자들에게 예언해 주셨다. 이러한 선언은 4복음서 전체를 통하여 나타나고 있다. 부활에 관한 역사적인 사실은 기독교 신앙의 가장 중요한 기반이다. 초대 교회는 사실을 기초로 한 믿음을 갖고 있었기에 강한 신앙을 유지할 수 있었다. 예수께서도 죽음에서 부활하신 후 자신을 제자들에게 나타내심으로 그들에게 실제적인 부활에 대한 증거를 주셨다. 누가는 tekmerion이라는 단어를 썼는데 제시할 수 있는 증거라는 의미가 있다.

1. 큰 돌

 마태복음 27장 60절에 마태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후 예수의 몸이 장사된 무덤 입구를 큰 돌을 굴려 막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마가는 마가복음 16장 1~4절에 이 돌이 아주 큰 것이었다고 기록하였다. 영국 케임브리지 도서실에 소장된 Bezae 비문에 적힌 마가복음 16장 4절에 관한 삽입구에는 예수가 무덤에 누여지니, 요셉이 무덤의 문을 20명의 남자도 굴릴 수 없는 큰 돌로 막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미국 조지아 공업 대학교수들이 이스라엘에 가서 직접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예수님 당시 쓰였던 무덤의 문의 크기는 4-1/2에서 5피트 정도이고 이 정도의 입구를 막으려면 적어도 1-1/2이나 2톤 무게의 바위가 필요하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렇게 큰 돌을 어떻게 요셉 혼자서 옮겨서 막았을까? 그 당시 무덤을 막을 돌은 무덤 입구를 바라보는 조금 경사진 곳에 쐐기를 써서 고정해 놓았기 때문에, 단지 쐐기를 빼면 저절로 무덤 입구로 굴러 내려가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무덤의 돌은 막으려고 굴리기는 쉽지만, 다시 열기는 매우 어려웠는데, 그렇게 하려면 수십 명의 남자 장정들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몇 명의 제자들이 밤에 예수의 시체를 훔쳐갔다는 주장은 신빙성이 없는 주장이라는 것이 증명되었다.

2. 로마 군인들의 경계
 유대 지도자들은 수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는 것을 보고 공포에 빠지게 되었다. 정치적 문제가 일어나지 않게 하려고 유대 지도자들과 로마 행정자들 모두가 예수를 영원히 무덤에 있게 하고자 하였다. 주여 저 유혹하던 자가 살았을 때에 말하되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노니 그러므로 분부하여 그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하소서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도적질하여 가고 백성에게 말하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면 후의 유혹이 전보다 더 될까 하나이다 하니 빌라도가 가로되 너희에게 파수꾼이 있으니 가서 힘대로 굳게 하라 하거늘 저희가 파수꾼과 함께 가서 돌을 인봉하고 무덤을 굳게 하니라 (마태복음 27:63~65).  만약 이 파수꾼들이 성전 호위병들이었다면 이들은 모두 270명이었다. 성전 호위군은 10명으로 구성된 27개의 소대로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앉아 있거나 기대어 있을 수도 없었고, 만약 근무 중 조는 경우에 발각되면 심하게 매 맞고 옷에 불을 지르는 형을 받을 정도로 성전 호위군의 규율은 엄격하였다.

 헬라 학자 A.T. Robertson는, 너희에게 파수꾼이 있으면이라고 빌라도가 한 말은 오직 로마 군병들을 가리키며 성전 호위병들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 이유는 라틴어 형태를 보이는 koustodia는 Oxyrhynchus 파피루스에 기록된 대로 로마 군병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로마 군병들은 우리가 보통 성경 이야기 책에서 볼 수 있는 그림에서처럼 무덤 옆에 한두 명의 군인들이 치마를 입고 서 있는 정도가 아니었다. 로마 호위병들은 4~16명 단위의 소대를 이루고 있으며 한 명이 6피트 지역을 방어하도록 훈련받았다. 16명 소대원이 한쪽에 4명씩 사방을 지켜 총 36야드를 지키게 하였다.

3. 인봉
 저희가 파수꾼과 함께 가서 돌을 인봉하고 무덤을 굳게 하니라 (마태복음 27:66). 이 기록은 다니엘 6장 17절의 기록과 비슷하다. 이에 돌을 굴려다가 굴 아구를 막으매 왕이 어인과 귀인들의 인을 쳐서 봉하였으니 이는 다니엘 처치한 것을 변개함이 없게 하려 함이었더라 (다니엘 6:17).
 케임브리지 대학의 교수였으며 인도 최고 위원회 회원인 Henry Sumner은 인봉하는 것은 실제로 법적 권위를 제정하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인봉하는 작업이 가진 또 다른 중요성은, 이 인봉하는 일이 로마 정부가 그 안에 있는 시체를 확인했다는 증거를 표시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인봉은 아무나 함부로 뗄 수 없게 되어 있었다.

4. 빈 무덤
 예수의 부활을 증명하는 한 사실은 바로 빈 무덤이다. 유대와 로마, 모두 빈 무덤에 관한 기록을 갖고 있다. 이 기록들은 역사가 요세푸스의 글에서와, 15세기 Toledoth Jeshu라고 불리는 유대 문학에서도 발견된다. Justin Martyr의 Dialogue With Trypho에는 예루살렘 지도자들이 지중해 연한의 곳곳에 사람들을 보내어 제자들이 예수의 시체를 훔쳐갔다는 소문을 퍼뜨려 무덤이 비었다는 사실을 왜곡시키려 했었다고 적고 있다.

 파수꾼 중 몇이 성에 들어가 모든 된 일을 대제사장들에게 고하니 그들이 장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하고 군병들에게 돈을 많이 주며 가로되 너희는 말하기를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에 그를 도적질하여 갔다 하라. 만일 이 말이 총독에게 들리면 우리가 권하여 너희로 근심 되지 않게 하리라 하니, 군병들이 돈을 받고 가르친 대로 하였으니 이 말이 오늘날까지 유대인 가운데 두루 퍼지니라 (마태복음 28:11~15).


 실제로 이 소문은 총독의 귀에 들어갔다. 로마 황제는 이 소문을 듣고 팔레스타인에 법령을 발표하였는데, 이 포고는 라틴어로 쓰인 후 헬라어로 번역되어 유대의 모든 도시들에 붙여졌다. 1878년에 나사렛에서 흰 대리석 판에 다음과 같이 쓰인 글귀가 발견되었다. 시저의 법령이라. 모든 무덤들과 묘지들은 & 어떠한 장애 없이 영원히 보존되어야 한다. 그런데 만약 어떤 자가 그것들을 무너뜨리거나 매장된 것을 빼내거나, 악의를 품고 다른 곳으로 옮기거나, 또는 무덤의 문을 바꾸면, 우리의 신들과 제사를 존중하는 의미에서 법정이 세워져 이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고 선언한다&. 모든 방해는 절대적으로 금지되어야 하며, 만약 이 법을 범하면 중형에 처할 것이다.

 이 비석은 1세기 초의 글씨 체제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학자들은 이것이 A.D. 50년경에 쓰여진 것으로 보고 있다. 글라디우스가 A.D. 41년부터 54년까지 총독으로 있었으므로 그가 이 글을 쓴 것이 확실하다.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의 시체가 없어진 그날부터 많은 염려를 해 왔는데, 그리스도인의 증가를 염려하고 있던, 그리고 유대인 지도자들로부터 영향을 받은 글라디우스가 후에 위와 같이 작은 일에 전에 없는 중형을 부과하는 포고를 내리게 된 것이다.

5. 부활하심
 어떤 사건의 기록을 역사적으로 증명하려면 가장 중요한 요소는 그것이 기록될 당시에 그 안에 기록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살아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처음 사람들에게 나타나심을 고린도전서 15장에 바울이 기록하고 있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 있고 어떤 이는 잠들었으며 (고전 15:3~6). 바울의 기록을 보면 예수의 부활 후 그를 본 사람들의 대부분이 위의 글이 쓰일 당시에 살아 있었다고 하였으므로 이 기록은 역사적 사실성을 동시에 가진 것이다.

 또 다른 중요한 사실은 예수께서 여러 곳에서 여러 종류의 사람들에게 나타나셨다는 것이다. Wheaton 대학의 교수 Merrill C. Tenney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렇게 나타나심이 평범한 일이 아니다. 이들 중 어느 두 명도 비슷하지 않다. 막달라 마리아에게는 이른 아침에 나타나셨고, 엠마오로 가는 여행자에게는 오후에, 제자들에게는 저녁에 나타나셨다. 마리아에게는 밖에서 나타나셨으나 그때 마리아는 혼자 있었으며, 제자들에게 나타나실 때는 제자들이 한곳에 모여 있었다. 또한, 바울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오백여 명의 사람들에게 나타나시기도 하였다. 그 반응도 각각 달랐다. 마리아는 감정에 휩싸였으며, 제자들은 놀라움에 두려웠고, 도마는 처음에 믿지 않았으나 직접 본 후에 그를 경배하였다. 모든 경우가 각각 다른 분위기를 갖고 있으며 예수의 부활에 대한 다른 성격의 반응을 나타내었다. 이러한 사실은 부활 후 사람들에게 나타나신 사실이 단지 평범한 전설이 아님을 입증하는 것이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예수께서 믿지 않는 사람들과 적의를 품고 있었던 사람들에게도 나타나셨다는 것이다. 어느 사람도 사울이 예수를 믿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사울은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예수께서 그에게 나타나심으로 그는 인생을 바꾸는 일이 일어났다. 바울은 그때 예수의 제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예수의 부활에 관한 힘 있는 증인이 될 수 있었다.

 또 다른 흥미로운 사실이 있는데, 그것은 예수의 처음 나타나심이 여인들에게라는 사실이다. 예수의 제자들이 아니고 막달라 마리아와 또 다른 한 여인에게 먼저 나타나신 것은 아마 예수의 제자들에게 질투심을 일으켰을 것이며, 또한 유대 법으로 여인들은 법정에서 증인도 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예수께서 여인들에게 먼저 나타나신 것은 이 나타나심이 부활을 꾸미려고 일부러 조작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신앙: 5부 - 예언 성취와 성경의 정확성

1. 두로의 멸망 예언의 성취
 두로야 내가 저를 대적하여& 열국으로 와서 너를 치게 하리니(3절), 그들이 두로의 성벽을 훼파하며 그 망대를 헐 것이요&. 말간 반석이 되게 하며(4절), 바다 가운데 그물 치는 곳이 되게 하리니(5절), 내가 열 왕의 왕 곧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로 북방에서 말과 병거와 기병과 군대와 백성의 큰 무리를 거느리고 와서 두로를 치게 할 때에(7절), &네 돌과 네 재목과 네 흙을 다 물 가운데 던질 것이라(12절), 너로 말간 반석이 되게 한즉 네가 그물 말리는 곳이 되고 다시는 건축되지 못하리니(14절), 내가 너를 패망케 하여 다시 있지 못하게 하리니 사람이 비록 너를 찾으나 다시는 영원히 만나지 못하리라(21절). 에스겔서 26장에는 두로의 멸망에 대하여 예언되어 있다. 이 예언은 B.C. 592~570년 사이에 주어졌다.

 두로의 멸망이 예언되고 3년이 지난 후, 정말로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두로를 포위하였다. 영국 대백과사전은 느부갓네살에 의하여 13년 동안(B.C. 585-573) 포위되었던 두로는 마침내 침몰되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느부갓네살의 침공 이후로 알렉산더의 공격 (B.C. 332)이 이어진 사실은, 열국으로 와서 너를 치게 하리니(3절)라는 예언을 성취시켰다. 역사가 Philip Myers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알렉산더 대제의 공격은 두로가 멸망되기까지 계속되었다. 이 공격 후 폐허가 된 두로는 조금 그 상태를 회복할 수 있었으나 다시는 그전과 같은 나라로 재건되지는 못했다. 한때 크게 번창하였던 그 땅은 이제 바위의 표면처럼 썰렁해졌고, 지금과 같이 어부들이 그물을 펼쳐서 말리는 장소가 되어버렸다. 또한 알렉산더가 파괴된 잔해들을 물속에 던져서 둑길을 만든 사건은 26장 12절의 예언을 성취하였다. 네 돌과 네 재목과 네 흙을 다 물 가운데 던질 것이라.(12절)는 에스겔의 예언은 알렉산더의 기술자들이 두로의 부서진 파편들을 물 가운데로 던져서 방파제를 만든 사건으로 성취되었다.라고 역사가 Joseph Free는 말하였다.

2. 시돈에 관한 예언의 성취
 너는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시돈아 내가 너를 대적하나니 네 가운데서 내 영광이 나타나리라 하셨다 하라&. 내가 그에게 염병을 보내며 그의 거리에 피가 흐르게 하리니 사방에서 오는 칼에 상한 자가 그 가운데 엎드러질 것인즉&. (에스겔 28:22~23).

Floyd Hamilton은 주전 4세기에 일어난 사건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페르시아의 가신으로 있었던 시돈은 B.C. 351년에 페르시아 왕을 반역하고 그들의 도시를 페르시아의 침공에서 방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마침내 시돈 왕은 자신의 목숨을 살리려고 시돈을 배반하였다. 시돈 사람들은 페르시아 왕의 보복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 줄 알았기에 40,000명의 시민이 자신의 집들에 불을 질러 자살을 하였다. 정말로 그의 거리에는 피가 흐르게 되었다.

George Davis는 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십자군 당시 시돈은 적들에 의하여 여러 번 공격당하였다. 십자군에 의하여 3번 사로잡혔으며, 3번은 모슬렘 군대에 의하여 공격당하였다&. 시돈의 역경은 현대까지 계속되어 1840년 영국과 프랑스, 터키의 연합 군대에 의하여 폭격당하였다.

3. 사마리아에 관한 예언의 성취
 사마리아가 그 하나님을 배반하였으므로 형벌을 당하여 칼에 엎드러질 것이요 그 어린아이는 부서뜨리우며 그 아이 밴 여인은 배가 갈리우리라.이러므로 내가 사마리아로 들의 무더기 같게 하고 포도 심을 동산 같게 하며 또 그 돌들을 골짜기에 쏟아 내리고 그 지대를 드러내며 (호세아 13:16, 미가 1:6).

 선지자 호세아는 사마리아 성이 형벌을 당할 것이라고 예언하였고, 미가는 사마리아가 들의 무더기같이 되어 포도밭으로 변할 것이며, 성을 쌓았던 돌들은 골짜기에 던져질 것이고 그 지대를 드러 낼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국제 표준 성경 백과에 따르면 사르곤이 B.C. 722년과 331년에 사마리아를 정복한 사실을 볼 수 있다. 또한 알렉산더 대제와 또 B.C. 120년에 하이르카누스에 의하여 정복당했는데 이때에도 수많은 사마리아 시민들이 죽임을 당하였다.

John Urquhart는 Henry Maundrell이 1697년에 목격한 사실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을 남기고 있다. 사바스테는 다윗의 집으로부터 반란을 일으킨 열 지파를 따라서 세워진 옛 사마리아 왕국이다. 이 훌륭했던 도시가 지금은 들의 밭으로 변하였으며,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은 오직 기둥으로 둘러싸여 있는 도시 북쪽의 사각 광장과 동쪽에 흩어져 있는 교회의 잔해뿐이다. 또한  Van de Velde의 기록은 미가서의 기록을 다음과 같이 입증하고 있다. 약탈자들의 소굴이 되었던 누추한 집들로 이루어진 비참한 촌락, 몇 기둥만이 남아 있어 옛 시절의 자리만 알리고 있는 곳, 사마리아는 지금 단지 커다란 돌들의 무덤이다. 도시의 토대는 발견되었으나 거리는 쟁기에 갈렸고 옥수수밭과 올리브 농장으로 변한 사마리아! 도시는 파괴당하였고 쓰레기들은 골짜기에 던져졌으며 도시의 초석이었던 오므리와 아합의 사각기둥들은 골짜기 비탈에 흩어 버려졌도다.

4. 에돔에 관한 예언의 성취
 성경은 6명의 선지자 -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요엘, 아모스, 오바댜 - 를 통하여 에돔의 멸망을 예언하고 있다. 선지자 이사야는 에돔이 피의 역사를 거쳐서 무역이 끊어지고 완전히 멸망할 것이며, 야생 동물들만이 그 자리를 채울 것이라고 하였다(이사야 34:6-7,10,13-15). 예레미야는 에돔에 다시는 사람이 살게 되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고, 또한 놀라운 곳이 되리라고 예언하였다(예레미야 49:17-18). 에스겔은 에돔이 이스라엘과 또한 이교도들에 의하여 정복당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앗시리아 제국의 멸망은 에돔의 멸망에 관한 성경 예언의 종결을 표시하고 있다. Nabeans 사람들이 바로 에스겔 25:4에 말한 동방의 사람들이었으며 주전 6세기에 그들이 에돔의 공격을 저지하고 에돔의 수도 페트라를 정복하였다. 이스라엘이 에돔을 정복한 사실에 대하여 Bernard Ramm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유대인들이 에돔을 정복한 사실은 I Maccabees 5:3과 Josephus Antiquities가 증명하고 있다. 유대인들은 John Hyrcanus와 게레사의 시몬의 지휘 아래 에돔을 공격하였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에돔을 정복할 것이라는 성경의 예언이 성취되었다.

 예수님 탄생 당시 에돔의 수도 페트라는 번영한 도시였다. 그 당시에 살고 있었던 Citing Strabo는 페트라는 크게 번영된 도시였으며 아시아로 통하는 상업의 중심지였다. 이곳은 또한 아랍인들이 그들의 향신료와 유향을 파는 상업 지역이었다.라고 기록하였다. 로마 제국 시절의 에돔은 유대인들과 합병한 상태였었다. 그 당시 에돔은 그리스와 로마 사람들에 의하여 이두메아(Idumaea)라고 불렸으며 에돔 사람들은 로마 장군 타이터스가 예루살렘을 포위하기 바로 직전에 예루살렘에 들어가 강도질와 도둑질로 많은 사람의 피를 흘렸다. 이때로부터 에돔 사람들은 분산된 민족으로서 역사에서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Ungers Bible Dictionary).

 오늘날 에돔의 모습은 어떠한가? 성경에 나타난 에돔에 관한 모든 예언들은 정확한 성취를 보았다. 에돔을 방문하였던 Mangles 장군은 현대 에돔의 광경을 보고 기록하기를 독수리들의 울부짖음과 매, 부엉이들만이 공중을 나르며 외로운 자신들의 둥지를 지키고 있었다.라고 하였다. 이방인들이 에돔을 정복하리라는 성경의 예언은 A.D. 6세기에 모슬렘 군대가 에돔을 침으로 완전히 성취되었다. 제일 먼저는 앗시리아가 에돔을 쳐서 종속시켰으며, 그다음 느부갓네살이 공격하였다. Nabateans의 이주민들도 에돔을 약하게 하였으며 Judas Maccabeus에 의하여 수천의 에돔인들이 몰살당하였다.

5. 고레스 왕에 대한 예언
 성경 이사야 45장 1절에는 놀라운 예언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것은 페르시아 나라의 고레스 왕에 대한 예언이다. 그에 대한 예언은 그가 태어나기 150년 전에 기록되었고, 그의 이름과 그가 행할 업적에 대하여도 예언되어 있었다. 나 여호와는 나의 기름 부음 받은 고레스의 오른손을 잡고 열국으로 그 앞에 항복하게 하며 열 왕의 허리를 풀며 성문을 그 앞에 열어서 닫지 못하게 하리라 내가 고레스에게 이르기를 내가 네 앞서 가서 험한 곳을 평탄케 하며 놋 문을 쳐서 부수며 쇠 빗장을 꺾고.

 같은 책 44장 26~28절에는 고레스 왕이 유프라데스 강물을 빼돌려 마르게 한 다음에 바벨론을 공격하여 정복할 것과, 유대인들을 해방해 주어 예루살렘 성을 다시 재건하도록 해 줄 것에 대한 자세한 일들이 예언되어 있다. 이 예언은 놀랍게도 고레스 왕이 태어나서 할 업적들에 대하여 그가 태어나기 150년 전에 벌써 설명하여 놓았던 것이다. 

 내 종의 말을 응하게 하며 내 사자의 모략을 성취하게 하며 예루살렘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거기 사람이 살리라 하며 유다 성읍들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중건될 것이라 내가 그 황폐한 곳들을 복구시키리라 하며 깊음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마르라 내가 네 강물들을 마르게 하리라 하며 고레스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그는 나의 목자라 나의 모든 기쁨을 성취하리라 하며 예루살렘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중건되리라 하며 성전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네 기초가 세움이 되리라 하는 자니라 (이사야 44:26~28).


 그는 예언된 대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유를 주어 그들이 고국으로 돌아가 그들의 성전과 성읍을 건축하도록 하였다.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가 없다. 런던에 있는 대영 박물관에 가면 Cyrus Cylinder 라고 불리는 돌을 볼 수 있게 되는데, 그 돌 위에는 성경이 예언한 대로 고레스 왕에 대한 업적이 기록되어 보관되어 있다.

6. 알려지지 않은 예언들
 신약 성경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성취된 예언들이 있다. 대부분 성경 독자들은 예루살렘 멸망에 관한 성경 예언에 대하여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이 예언은 A.D. 70년에 성취되었다. 그런데 성경에는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예언들이 있다. 신약 성경에는 갈릴리 바닷가에 있던 옛 도시들-가버나움, 고라신, 벳새다-의 멸망에 관한 예언이 나온다.

 마태복음 11장 20-24절에 예수께서 고라신과 벳새다가 두로와 시돈보다 더 큰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하셨다. 성경에는 이 도시들이 어떠한 방법으로 멸망할 것인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주어지지 않았으나, 역사적으로 이 도시들이 성경 예언대로 멸망되었음을 정확히 증명할 수가 있다.  George Davis는 그의 책 Bible Prophecies Fulfilled Today에서 가버나움이 A.D. 400년경에 지진으로 멸망 받았음을 기록하고 있는데, 고라신과 벳새다도 그때 멸망되었다.  
 고대 벳새다는 갈릴리 바닷가 기슭에 있었던 아름다운 도시였으며, A.D. 700년경 Albalid 1세가 겨울 왕궁을 지으려고 했던 곳이다. 15년간 그의 일꾼들이 성을 쌓았지만 왕이 죽음으로 말미암아서 완성되지 못하였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자리는 폐허가 되어버렸다. 오늘날에는 몇 기초석들과 미완성된 모자이크 바닥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Davis는 가버나움의 상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오랜 세월 동안 회당은 폐허가 된 도시의 잔여물들과 같이 땅속에 매장되어 있었다. 어떤 사람이 이 고대 회당을 다시 재현시키려 하여 몇 개의 벽들이 다시 세워지고 기둥들이 원래 있던 곳에 다시 건설되었지만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다시 폐허가 되어버렸다.

신앙: 6부 - 현대 과학과 성경

성경은 지구가 둥글다고 말했다.
 성경은 인간이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발견하기 천 년 전에 이미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말하였다. 욥기 26:7에는 지구가 우주의 공간 안에 매달려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는 북편 하늘을 허공에 펴시며 땅을 공간에 다시며. 지구가 우주의 공간 안에 매달려 있으려면 이 지구를 붙잡는 어떠한 힘이 존재해야만 한다.
 성경에는 매달려 있다고 함으로 어떠한 끈이 이 지구를 잡고 있다는 인상을 풍기지만 이 말씀은 바로 모든 항성들을 그 궤도에 잡는 힘이 우주에 존재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26:10에는 그가 수면에 둥근 경계(circular horizon)를 그으셨으며.(영문직역)라고 지구가 둥글다고 표현하고 있고, 이사야 40:22에는 둥근 지구 (circle of the earth)라고 표현하고 있다. 또한 잠언 8:27에도 궁창(circle)으로 해면을 두르실 때에라고 말씀하고 있다.

성경이 말하는 우주의 법칙
 이사야 55:9에는 끝없는 우주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의 생각보다 높으니라. 하나님의 생각과 우주와 비교하고 있는 이 말씀은 셀 수 없는 은하계로 수놓은 우주의 끝없음을 말하고 있다.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 바 되어.(벧후 3:7)라고 하였다. 간수한다는 것은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들이 없어지지 않고 그 상태를 유지한다는 것이다. 즉, 다른 말로 말하면, 이 성경 절은 땅과 하늘에 있는 모든 물질들과 에너지는 어떤 상황에서도 없어지지 않고 계속 순환되어 그 근본 상태를 유지한다는 질량 보존의 법칙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성경은 심지어는 태양도 자기 괘도를 따라 엄청난 속도로 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오래전에 이미 기록하고 있다. 시편 19:5,6은 말씀하기를, 해는 그 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고 그 길을 달리기 기뻐하는 장사 같아서 하늘 이 끝에서 나와서 저 끝까지 운행함이여&. 라고 하였다. 또 하늘에서 어떻게 비가 형성되는지 아직 알려지지 않았던 시대에 성경은 물이 어떻게 순환하는지도 설명하고 있다.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연하여 흐르느니라 (전도서 1:7). 영어 성경에는 모든 강물은 바다로 흐르지만, 바다는 완전히 채워지지 않고, 이 물은 다시 그 왔던 곳으로 되돌아간다.라고 쓰였다. 즉, 이 말씀은 바다로 흘러들어간 물이 다시 증발되고 비가 되어 다시 강물을 만든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피는 생명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레위기 17:11). 피가 생명을 유지한다는 것은 당연히 모든 사람들이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의학이 발달하지 못하던 고대나 중세 사회에서는 이러한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성경은 레위기 17:15~16을 통하여 피를 통하여 병균이 옮긴다는 사실도 말하고 있다. 세상에 병균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된 때는 겨우 몇백 년 전이다. 중세 시대에 의사들은 사람을 수술할 때에 손에 묻었던 피를 하나의 영광스러운 상징으로서 생각하였고, 그 피를 씻지도 않고 다른 사람을 수술함으로 더 많은 사람이 전염병으로 숨지게 되었다는 기록들이 있다. 성경은 이미 오래전에, 피를 묻히거나 죽은 짐승들을 만졌을 때에는 그 부위를 깨끗이 씻고 저녁까지 다른 사람들과 접촉을 피하라고 경고하고 있다. 이 말씀은 태양 광선이 균을 죽인다는 의미도 포함하고 있으며, 병균이 접촉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될 수 있다는 의학적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마치면서
 지금까지 고고학과 몇 가지 검증법들을 이용하여 성경의 정확성을 검증해 보았다. 그런데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은, 의심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리 훌륭한 증명 방법을 사용하여 어떤 것을 증명한다 해도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경은 검증해 보아야 믿을 수 있는 책이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사람들을 영생으로 인도하는 진리를 담은 책인 것이다.

 예수께서 요한복음 5:39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 하는 것이로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계시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속하시는 이야기이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언제 어떻게 탄생하실 것과, 인류의 죄를 대신 지시고 어떠한 죽음을 당하실 것과, 어떻게 부활하시어 승천하실 것에 대한 정확한 예언이 기록되어 있고, 또한 그대로 성취되었다. 또한, 이 책은 바로 그 하나님께서 어떤 방법으로 인간들을 구원하실 것에 대하여, 또 이 세상을 심판하시려고 곧 두 번째 강림하실 것에 대하여 말해 주고 있으며, 그때가 언제쯤 될 것이며, 또한 어떠한 사건들이 일어나게 될 것에 대하여 예언하고 있다.

 성경은 시대와 환경과 개성이 각각 다른 40명의 저자를 통해서 1,500년이란 긴 기간에 걸쳐서 기록되었지마는 놀랍게도 한결같이 같은 진리와 같은 하나님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 성경을 쓴 기자들은 1,500년이란 긴 기간에 서로 모르는 가운데서, 다른 환경과 다른 시대에 살았으면서도, 같은 진리의 말씀들을 기록하였다. 그것은 성경을 기록한 저자가 사람이 아니라 인간을 통하여서 기록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말해 주는 것이다.

 이 성경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수많은 사형수가 이 책을 통하여 아름다운 사람들로 변하였고, 자살을 기도하며 인생을 비관하던 자들도 이 성경 말씀을 통하여 다시 생애의 빛과 의미를 발견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하여 사람들을 이끌고 계시며, 성경의 진리를 통하여 인간이 구원을 받기를 원하고 계신다. 하나님께서는 과학적이고 역사적이며 고고학적인 증거를 통하여 이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란 사실을 증명하셨다. 성경은 겸손한 마음으로 이것을 읽고 연구하는 사람마다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이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쓰인 책이기 때문이다. 이 놀라운 역사가 독자들의 생애에도 일어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질문과 답변 : 첫째 사망과 둘째 사망의 차이를 아시나요?

 아담이 죄지은 후, 하나님께서는 즉시 여자의 후손(창세기 3:15,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실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함)을 통한 구속의 경륜을 발표하시고 그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셨습니다.

 이 두 번째 기회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형벌을 대신 짊어지시고 돌아가신 그리스도를 그들의 구세주로 받아들이는 것을 조건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 두 번째 배려를 통하여 아담과 그의 모든 후손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준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첫 시험에 실패한 결과를 변경하거나 없애버리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이해해야만 합니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매우 엄숙한 질문을 던집니다. 어떻게,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첫 번째 실패에 대한 형벌인 죽음을 집행하심으로써 당신 자신의 존엄성과 권위를 유지하시며, 동시에 또 한 번의 기회를 아담과 그의 후손들에게 제공하심으로써 모든 사람들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실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매우 놀랍고도 단순한 방법으로 이 어려운 문제에 대처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의롭게 살든지, 또는 악하게 살든지를 불문하고, 제한된 일정한 삶의 기간을 가진 후에 죽을 수 있도록 계획하셨습니다.

 첫 번째 죽음은 첫 시험에서 아담이 실패한 결과로 주어진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첫 번째 죽음(그들 자신의 잘못으로 말미암은 죽음이 아님)으로부터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 서서 죽기 전 자신들의 생애 동안에 개인적으로 지은 죄에 대해서 답변하게 될 것인데, 이것에 대해서는 그들이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들의 영원한 운명은 두 번 째 시험이었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조건을 그들이 어떻게 충족시켰느냐에 따라서 결정될 것입니다.

 만약 인류가 두 번째 시험에서 실패한다면, 그들은 더 이상의 시험의 기회를 얻지 못할 것이며, 그들의 죽음은 둘째 사망이라고 불리는 최종적인 영원한 죽음이 될 것입니다. 이제, 사도 바울의 말이 더욱 잘 이해되실 겁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린도전서 15:22). 하나님께서 세우신 구속의 계획 속에는 첫째 사망으로부터 모든 사람들이 부활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들의 행동과 선택에 기초한 심판을 받을 수 있게 하려고 그 일이 필요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단지 유황불 못에 던져 죽이려고 악인들을 부활시키시는 것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은 너무 잔인하고 독재적이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왜 그들을 그냥 첫째 사망의 권세 아래 놔두시지 않느냐고 묻습니다. 그 이유는, 첫째 죽음은 아담의 후손 자신들의 죄에 대한 형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행위와 결정에 따라 심판받는 것이 공정한 처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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