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편지: 새해, 하늘 빛 시온의 대로에 서서


강영은

주여!
다시
한 해가 시작됩니다.
올 한 해는 또 어떤 기적으로 채워 주시렵니까?
지난해
당신 제단 위에 무엇 하나
제대로 바치지 못한 날들이 부끄러워지다가도
어린아이처럼 잊어버리고는
아름다운 지혜로 지난날의 삶을 채우신 당신께서
올해는 어떤 선물 펼쳐 주실까
가슴 설렙니다.

입을 다물고 참아야 했던
서러움이었을지라도,
뼈마디 시리도록 아픈
시련이었을지라도,
몸을 떨며 이겨내야만 했던
쓰라린 고통이었을지라도,
그것은
삶에 찬란한 빛깔을 만들어 내고자
당신께서 덧입히셨던
아름다운 채색의 과정이었던 것을&.

지나간 삶의 빛깔들을 익히다가 알게 되었습니다.
그 기적들 때문에
온통 삶의 색깔이 바뀌었다는 것을&.
섭리의 거친 자갈밭 지나
가파른 은총의 돌층계 오르다가
쓰러질 듯
생의 무게에 휘청거릴 때,
힘껏 잡아 주셨던
핏줄 돋은 당신의 사랑의 손

힘겨운 삶의 무게 하늘로 날려 버리고
눈물 어린 눈으로 둘러본 세상은
자리 없도록 가슴에 채워진 당신 사랑만큼
은총으로 가득 찬 것을 알았습니다.

삶이 온통 기적이라는 것을&.
감사할 것으로 빼곡히 둘러싸인
삶은 온통 사랑이라는 것을&.

주여!
이제
새로운 한 해가
열리고 있습니다.
올 한 해는 또 어떤
섭리로 생의 페이지를 장식해 주시렵니까?

작은 들꽃 하나 피우시려고
아주 작은 열매 하나 맺으시려고
하염없는 세월 흘러도
끈질기게 앉으시어 삶의 물레를 돌리시는 주님,
당신의 오랜 기다림이 오늘을 만들고
당신의 눈물겨운 믿음이 지금을 있게 하셨습니다.

고통으로 등불의 심지를 돋우시어
더 밝게 빛나게 하시고
슬픔의 날줄과 씨줄을 섞어
더 아름다운 천을 짜시는 주님이시여,

찬란한 빛이 오기 전
새벽의 어둠이 가장 짙다는 것을,
고난의 올들이 짜여
결국
빛나는 흰 세마포가 만들어진다는 것을,
많은 날을 보내고서야 깨달아
부끄럽지만
인제야 흩어진 진주 알 같은
감사의 기도를 모아 올립니다.

주여!
다시 써 가야 할 새하얀 페이지를 연 채,
새로운 손님을 맞이하는 여인숙 주인처럼
겸허하게 새해 벽두에 서 있습니다.

언제 어떤 모습으로 당신 선물이 와도,
어디서 어떻게 당신 섭리의 손길이 다가와도
알아볼 수 있도록 마음을 연 채&.
당신께서 보내시는 모든 선물을 모든 손님을
기꺼이 받아들이고자&.
그 선물이
그 손님이
그것들이 혹 고통이라 해도&.

잔뜩 움켜쥐고 달려와
무엇인가 쥐고 있을 것 같은데 비어 있는
잡은 것 없이 허공만 쳤던 빈손
하지만 고마워하며 손을 폅니다.
많은 것을 놓쳐도
모든 것인 하나를 잡으려&.

주여!
이제 막 떼어놓는 첫 발자국을
감사의 노래로 채우며
온기 어린 따스한 당신의 손 잡고
하늘빛 시온의 대로를 걸어갑니다.

껄끄러운 모래
발가락 사이를 찌르던 길도
당신 함께 가면
무지개 꽃길 되기에&.

이렇게
내 가슴 가득 당신 모습 담고
내 영혼 깊이 당신 사랑 채운 채
하늘빛 시온의 대로를 걸어갑니다.

생애의 빛에서

하나님의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인간적인 편리와 아이디어대로 운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유전과 전통이 우위를 차지해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분부하심을 따라서 일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교회란 하나님의 진리를 지키고 주의 말씀을 따라 사람들을 인도하고 가르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들의 눈에 보기 좋게 만드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에 맞게, 주님의 구속의 계획에 맞도록 운영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맞지 아니한 인간의 계획들과 방식들로 교회가 운영되면, 그 안에 있는 신자들은 영적으로 잠자게 됩니다. 사람들의 표준과 인간의 눈에 보기 좋은 비즈니스적인 생각들이 판을 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세상에서 불러내어 따로 세우신 교회가 다시 세상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하나님의 진리의 방식대로, 성경이 말씀하는 진리의 좌표대로 믿고 가르치고 운영되어야 할 자리에서 세상의 비즈니스가 성공하는 방식이 환영을 받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영적으로 거듭나지 아니한 자들이 와서 즐거워하며 교회 지도자들이 되어 군림하는 곳이 됩니다. 이것이 오늘날 많은 우리 교회들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죄를 책망하며 회개케 하는 일과 진리대로 개혁시키는 일들을 등한히 하게 됩니다. 그러한 일들은 교회의 성장을 방해하는 것이라고 여겨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세상의 종말이 가까웠습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되었습니다. 교회의 성공보다는 영혼들의 구원과 준비가 더 중요합니다. 교인들의 진정한 회개와 생활의 참된 변화가 더 시급합니다. 교회 안에서 잠자는 영혼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많은 사람이 교회 안에서 예수의 이름을 부르다가 멸망 당하게 될 것입니다. 깨어나야 할 때입니다. 교회의 사업과 직무들을 하나님의 뜻대로 개혁하여야 할 때입니다.

이번 호를 읽으시면서 우리들의 참모습을 보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가정과 영성: 당신은 공평한 구원을 원하십니까?

오해
 성경은 하나님의 예정을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기독교회가 가진 중요한 교리 중의 하나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구원을 예정하셨다. 그러나 그것은 불공평한 예정이 아니라 공정하고 자비로운 예정이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어떤 기독교인들은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을 자들을 이미 예정해 놓으셨다고 믿음으로써 하나님을 매우 불공평한 분으로 몰아간다. 하나님 자신만이 가지는 주권을 사용하여 모든 사람의 구원과 멸망을 사람이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정해 놓으셨다는 것이 예정론의 중심 가르침이다.

 예정론은 중세기에 어거스틴에 의해서 처음 이 세상에 나왔을 때부터 다음과 같은 반대와 의문에 부딪혔다. 만일 모든 사람의 구원과 멸망이 하나님에 의해서 이미 결정되어 있다면 전도할 필요는 무엇이며 성경을 공부할 필요는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멸망 받을 사람들을 이미 예정해 놓으셔서 각 사람이 그 예정대로 멸망을 받는 것이라면 왜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악인의 죄를 책망하고 심판하는 말씀이 나오는가? 어차피 모든 사람의 구원과 멸망이 이미 결정되어 있다면 넓은 길을 걷지 말고 좁은 길을 걸어야만 구원에 이른다는 경고의 말씀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을 필요가 어디 있는가?
 예정론이 이 세상에 나온 지 수백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이러한 도전과 질문에 대한 명백한 답을 내놓고 있지 못하다. 그럼에도 많은 그리스도인이 비 성서에 따른 예정론을 따라가는 현실을 보면서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다.  그러나 성경은 여전히 하나님의 예정을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예정은 무엇일까? 하나님의 예정 하심 그 중심에는 온 인류에 대한 깊은 사랑과 동정이 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예정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주의 약속은 &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 3:9).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예정은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사람 즉 누구든지 주를 믿으면 구원을 받게 하려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던 것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이것이 하나님의 예정이다. 참으로 공평하고 자비로우며 사랑이 충만한 예정이다.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예정이야말로 다른 어떤 가르침보다도 하나님의 성품을 정확하게 반사하는 교리이다. 하나님의 예정을 올바로 이해해야만 하나님의 사랑과 십자가의 희생이 분명하게 우리의 가슴에 와서 닿을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의 예정에 대한 진리를 올바로 알면 감사의 정신을 가지고 좁은 길을 끝까지 걸어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 있게 된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시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구원받을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은 멸망하게 될 것을 이미 아신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미리 그렇게 되라고 강제로 정하신 것이 아니라 다만 미리 아시는 것일 뿐이다. 하나님의 예정은 강제적인 예정이 아니라 공평한 예정이며 또한 우리의 인생 전체를 한 눈에 보시는 예지(豫知)이다. 불공평한 예정을 믿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성경 절을 가지고 자신들의 믿음을 주장하지만, 이 말씀은 불공평한 예정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지하시고 당신이 종을 미리 선택하시는 모습이다.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렘 1:5).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한평생의 삶을 미리 내다보실 수 있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진리를 받아들여서 구원을 받게 될 것이지만 어떤 사람은 끝까지 구세주를 거절하거나 소홀히 여김으로써 멸망 받게 될 것을 아신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어머니 복중에 있는 태아를 당신의 선지자로 선택하는 예도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인정한다면 이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전혀 어렵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생사고락과 구원과 멸망을 모두 아시지만 우리 모두에게 십자가의 은혜를 허락하시고 그것을 붙잡고 믿을 기회와 선택의 권리를 주심으로서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되기를 간절히 원하신다(요 3:16). 구속의 역사가 이렇게 이루어져야만 각 사람은 마지막 심판의 날에 자신이 범하기로 선택한 죄와 그리스도를 등진 반역과 진리를 거절한 것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될 때 아무런 원망이나 불평을 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예정은 참으로 공평한 예정이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의 구원을 미리 정해 놓으셨다는 불공평한 예정론을 믿게 되면 그것은 곧바로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오해로 이어진다. 내가 원해서 태어난 것도 아닌데 혹시라도 하나님께서 이미 정해 놓으신 구원의 예정에 포함되지 않았을 때는 지옥의 유황불 속에서 엄청난 형벌을 받아야 하는 상황을 상상해 보라. 그런 상황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자비와 공의를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온 마음을 다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섬길 수 있단 말인가? 자신의 구원과 멸망에 대해서 전혀 선택의 여지를 남기지 않은 하나님을 생각할 때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왜 하나님은 이렇게 불공평하게 우리를 취급하실까?라는 음성을 듣게 되지만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 때문에 아무런 질문이나 의문도 표현하지 못한 채 살아가게 된다.

 불공평한 예정을 믿는 사람은 어차피 자신의 구원과 멸망 여부는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결정되었기 때문에 성경에 기록된 수많은 경고와 권고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게 된다. 그 결과 그의 삶과 신앙 속에는 철저한 순종과 말씀을 깊이 연구하는 열심이 일어나기 어려워지며 점점 더 세속적인 모습으로 살아가게 된다. 하나님의 예정에 대하여 오해를 한 사람들은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 한 번 구원받았으면 영원히 구원받는다. 한 번 받은 구원은 결코 잃어버릴 수 없다.와 같은 교리에 아주 쉽게 넘어가게 된다.

 한 가지 두려운 사실은 수많은 사람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예정보다는 불공평한 예정론을 믿기 원한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왜냐하면 불공평한 예정론은 구원을 매우 쉽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불공평한 예정론은 누구든지 예수를 믿고 교회에 다니기만 하면 단번에 자신의 구원을 확정 지을 수 있을 뿐 아니라 한 번 얻은 구원은 결코 잃어버릴 수 없다고 믿게 하기 때문이다. 예정론을 가르치는 설교자들은 항상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 한 번 구원받았으면 영원히 구원받는다. 한 번 받은 구원은 결코 잃어버릴 수 없다.와 같은 말로써 예정론을 매혹적으로 포장하고 있다. 얼마나 매혹적인 교리인가?
 믿기만 하면 구원은 바로 결정되고 한 번 얻은 구원은 자신의 삶과 신앙에 관계없이 항상 보장된다는 식의 설교가 얼마나 아름답게 들리는가? 아무리 심한 죄를 범하고 배도 하며 진리를 부인하더라도 이미 결정된 구원 속에서 평안과 안전감을 느끼면서 사는 길을 누가 거절하겠는가? 이런 이유 때문에 불공평한 예정론을 가르치는 교회마다 교인들이 가득 차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오랜 세월 동안 하나님을 믿으며 구원을 경험했던 사울 왕도 교만과 이기심에 빠져 배도의 길을 고집함으로써 결국에는 멸망하게 되었던 사실을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성경은 사울에 대하여 그가 새사람이 되 었다고 기록했다. 

 네게 여호와의 신이 크게 임하리니 그도 그들과 함께 예언을 하고 변하여 새사람이 되리라 (삼상 10:6).
그러나 사울은 그의 높이 들린 위치에서 뒷걸음질쳐서 하나님을 거역하고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삼상 31:1-6). 사울 왕은 새사람이 되었으나 뒤로 물러나서 죄악 속에 빠지게 되었고 끝까지 하나님께 반역하며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다가 결국에는 아무런 회개도 하지 못한 채 죽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도 바울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한 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히 6:4-6).

진실로 하나님의 예정속에 포함되기 원하는가?
 오늘날 불공평한 예정론은 교회에서 가장 인기 있는 가르침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만일 성경 학자들과 목사들이 하나님의 예정을 올바로 교인들에게 설교하고 가르친다면 예정에 대한 가르침은 교회에서 가장 인기 없는 가르침이 될 것이다. 만일 이 글을 읽는 독자 여러분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예정을 참으로 이해한다면, 여러분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예정 하심을 앞에 놓고서 고뇌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구원받게 될 사람들은 가시밭길을 걷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진리의 좁고 가파른 길을 걸어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핍박과 박해, 가난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 교회로부터 쫓겨남, 악인으로 취급받음, 그리고 모든 의무를 짊어지고 인생의 길을 걸어가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걸으셨던 그 길을 걷게 될 것인데 이것이 하나님의 예정을 받은 자들의 삶이 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예정을 받은 자의 모습일진데 누가 하나님의 예정을 받으려고 할 것인가? 하나님께서 자신의 구원을 예정하셨다고 마냥 좋아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예정이 가진 나머지 절반의 모습을 보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예정에 의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에 들어가는 특권을 누릴 뿐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리는 고통도 참여해야 한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고통이 먼저 오고 영광이 나중에 온다. 좁은 길이 먼저 나타나고 하늘 도성이 나중에 나타난다. 만일 불공평한 예정론을 믿는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그들 중의 대부분은 하나님의 예정 속에 포함되지 않게 해 달라고 간절히 원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하늘의 예정을 받았던 예수 그리스도마저도 십자가의 고통을 목전에 두시고 아버지여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시지 않았던가! 옛적부터 지금까지 하늘의 예정을 받은 사람들의 삶을 성경 속에서 살펴보아라. 그런 다음에 나는 하나님의 예정에 의해서 구원이 확정되었다!라고 말하라. 세상은 하늘의 예정을 받았던 사람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부러워하거나 흠모했던 적이 없다. 아니, 오히려 하나님께 예정 받지 않았음을 다행으로 여기고 그것으로부터 가능한 한 멀리 떨어져 있으려고 애를 썼다.  예정 받은 자들은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속한 자들이 아니므로 세상은 그를 미워한다. 예정 받은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주인인 그리스도를 닮아서 다음과 같은 모습으로 보일 수 있다.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사 53:2-3).


 불공평한 예정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구원과 멸망을 결정하시기 때문에 구원을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별로 없는 것처럼 생각하게 한다. 구원을 위하여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할 몫이 있다.라고 말하면 예정론을 믿는 사람들은 곧바로 그렇다면, 구원을 위하여 우리가 무엇을 행하여야 한다는 말인가? 그것은 행함으로 말미암는 의가 아닌가?라고 질문한다. 우리는 그리스도께 대한 우리의 믿음을 고백해야 하고, 그분께 계속해서 붙어 있어야만 한다.  그분께 확고부동하게 붙어 있으면 그 결과로 우리의 성품과 생애 속에 아름다운 열매가 맺어진다.
 그리스도를 붙잡는 것, 바로 그것이 구원을 위하여 우리가 해야 할 분명한 몫이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내쫓지 않으신다. 그분에게서 우리 자신을 분리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 자신을 그분에게서 스스로 끊어 버리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그렇게 할 수 있는 선택권이 주어져 있다. 우리는 지성을 사용해서 취사선택할 수 있는 도덕적인 존재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해서 우리의 의지와 판단력이 한순간에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생활하는 동안에도 우리는 언제든지 하나님과 하늘의 사물들 대신에 세상의 사물들을 선택하기로 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선택과 결심을 통하여 우리의 믿음을 나타내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은 단순한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우리 사랑의 표현이다.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고 옳은 일을 하기로 선택하는 것은 단지 성령께서 마음속에서 역사 하신 결과이다. 우리는 구원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받았기 때문에 그런 일들을 행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온 마음을 다해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그분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분께 순종하고자 하는 열망이 끊임없이 샘솟는 것이다. 이것이 참된 복음을 경험하는 그리스도인에게 일어나는 변화이다. 

건강: 유전자의 법칙과 건강의 법칙

 사람들은 간이 매우 나빠졌다.라고 말하지만 간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 간을 구성하고 있는 간 세포가 나빠진 것이다. 그런데 세포의 성질을 결정해 주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유전자이므로 간이 나빠진 원인을 찾으려면 간 세포의 유전자에 생긴 문제를 살펴보아야 한다. 유전자에 왜 그러한 문제가 생겼는가를 찾고 이해하는 것이 질병의 치료에서 가장 중요한 첫걸음이다. 그러므로 질병의 원인을 이해하려면 유전자의 성질을 잘 이해해야만 한다.

의미에 반응하는 유전자
 유전자의 성질을 연구하기 위한 여러 가지 실험과 연구가 여러 방면에서 진행됐는데, 그 가운데 한가지 실험을 살펴보도록 하자. 개에게 먹이를 줄 때마다 종을 쳤다. 처음에는 종소리가 개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종을 먼저 치고 개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먹이를 주는 일을 일주일 동안 반복하자 개에게 매우 흥미 있는 변화가 생기기 시작하였다. 종을 치면 개는 꼬리를 흔들고 다가와서 침을 흘리면서 먹이를 기다렸다. 종소리가 침을 분비하는 유전자에 사랑과 먹이를 주는 의미를 가져다준 것이다. 그러나 먹이는 주지 않고 종소리만 들려주는 행동을 여러 번 반복하게 되면 개의 입에서 분비되는 침의 양은 점점 줄어들다가 결국에는 화를 내면서 짖게 된다.

 침을 생산하는 유전자가 종소리에 더는 반응하지 않게 되었다는 뜻이다. 침이 나온다는 것은 침을 생산하는 유전자가 활성화되었다는 뜻인데 종소리가 더는 사랑과 먹이의 의미를 상실하였기 때문에 유전자가 비활성화된 것이다. 유전자는 이렇듯 철저하게 의미에 반응한다. 그 의미가 생명 적이면 생명 적으로 반응하고 사망 적이면 사망 적으로 반응한다. 그러므로 세포에 생명 적 환경을 공급해 주면 유전자는 활성화되어 생명 적으로 반응하기 시작한다.

부정적인 마음이 유전자를 해친다
 물잔에 물이 반정도 담긴 모습을 보고 어떤 사람은 물이 반이나 남아 있네!라는 말로써 긍정적 마음과 태도를 나타내지만 어떤 사람은 물이 반밖에 없네!라고 말하면서 부정적 마음과 태도를 보인다. 이러한 부정적 마음과 태도는 유전자에 부정적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은 유전자에 사망적 환경을 제공하게 된다. 그래서 마음이 우울하거나 부정적이 되면 건강에도 우울하고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밝은 생각, 진리에 대한 확신, 감사함, 용서, 낮은 마음과 같은 생명적인 요소들은 유전자에 생명적인 의미를 부여하게 되고 그 결과 유전자는 생명력 있게 활동하게 된다.

 마음이 건강하면 몸도 건강해진다는 말은 진리이다. 건강을 회복하는 데 있어서 어떤 마음가짐을 가지는가 하는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최근에 발표되고 있는 과학은 유전자가 인간의 마음가짐에 따라서 반응한다는 사실을 매우 분명하게 밝힌다. 건강을 회복하고 질병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또 하나의 중요한 문이 열리게 된 것이다.

 오랫동안 술, 담배, 육식, 스트레스, 원한, 미움, 분노, 부절제와 같은 사망적 환경 속에서 살아가게 되면 유전자는 상처를 받거나 비활성화가 되어 질병에 걸리게 된다. 이렇게 해서 생기는 질병들이 암과 같은 것들이다. 그런데 망가진 유전자도 다시 활성화되어 건강을 되찾을 수 있는데 그것은 모든 사망적 환경을 버리고 생명적 환경을 유전자에 공급하는 것이다. 이것이 건강을 회복하고 불치의 병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어떻게 하면 사망적 환경을 생명적 환경으로 바꿀 수 있는가? 육식을 버리고 채식으로 식사하고, 술과 담배를 버리고 맑은 물을 마시며, 스트레스를 버리고자 규칙적으로 운동하고, 미움과 원한을 버리고 사랑과 용서를 나누며, 모든 부절제를 버리고 절제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이러한 생명적 삶을 살아갈 때 유전자는 다시 활기를 찾게 된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에 인체 속에 세워놓으신 원칙이다. 그러므로 우주를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께 나아가 모든 짐과 멍에를 벗어버리고 그분을 신뢰함으로써 마음의 평안을 찾는 것이야말로 모든 환자들에게 있어서 놀라운 치유의 능력이 된다. 하나님께 나아가 영혼의 자유와 평안을 얻는 것이야말로 유전자를 크게 움직이게 하는 위대한 에너지원이 된다.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아내는 질병에 걸리기 쉽다. 아내에게 불만을 품고 살아가는 남편도 질병에 걸리기 쉽다. 왜 그럴까? 사망적 환경이 유전자에 사망적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사랑과 행복이 없는 부부관계는 스트레스와 불만과 미움을 만들어 내게 되며 이러한 것들은 유전자에 매우 해로운 사망적 환경이 된다. 유전자의 법칙은 생명의 법칙인데, 이것은 성경이 말하는 구원과 매우 긴밀한 관계가 있다. 죄로부터 구원받고 질병으로부터 구원받기 원하는가? 생명적 환경 속에서 살아가라! 물질적 가난함 속에서도 영혼의 부유함을 누리고, 고난과 불행 속에서도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를 찾음으로써 영혼의 만족을 얻는 사람만이 치료와 건강의 길을 걸을 수 있다.

우울증과 유전자
 우울증에 걸리는 것도 유전자의 문제이다. 우울증 환자들은 아무것에도 관심이 없다. 마음이 안정되지 않고 늘 불안하다. 우울증이라는 증세가 나타나는 이유는 뇌신경 세포에서 생산되는 호르몬에 이상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뇌신경 세포에서 생산되는 호르몬 중에는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호르몬이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세로토닌이다. 멜라토닌은 밤에 잠을 편안히 자도록 해주지만, 세로토닌은 낮에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우울증 환자의 경우, 여러 가지 호르몬이 영향을 미치지만 가장 심각한 영향을 주는 것은 세로토닌이다. 세로토닌이 제대로 분비되지 않으면 마음이 불안해지고 결국에는 우울증에 걸리게 된다.

 우울증과 깊은 관계가 있는 또 하나의 호르몬은 엔도르핀이다. 왜냐하면, 엔도르핀이 정상적으로 생산되지 않기 때문이다. 즐겁고 행복한 삶은 내가 원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해주는 호르몬이 나와야 한다. 내가 잠을 자고 싶다고 해서 자는 것이 아니라 멜라토닌이라는 호르몬이 나와 줌으로써 잠을 잘 수 있는 것처럼, 세로토닌과 엔도르핀을 생산해 내는 유전자가 활발하게 활동을 해야만 우울증에 빠지지 않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 그러므로 우울증이란 행복과 기쁨을 느끼게 해주는 호르몬을 생산해 내는 뇌신경 세포의 유전자에 문제가 생겼거나 비활성화되었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왜 세로토닌과 엔도르핀을 생산하는 유전자가 비활성화되었을까? 이 두 호르몬을 생산하는 유전자가 활발하게 일을 할 필요가 없는 사망적 환경에서 오랜 세월 살았기 때문에 결국에는 비활성화가 되어 버리고 만 것이다. 병원에 가면 우울증 환자에게 세로토닌 대용품을 약으로 주지만, 인체에서 자연적으로 만들어 내지 않고 몸 밖에서 인위적으로 넣어주는 대용품들은 거의 모두 부작용이 있다. 그러므로 우울증에서 벗어날 수 있는 참된 치료법은 세로토닌과 엔도르핀을 생산하는 유전자를 활성화하는 것이다.
 모든 것에 긍정적으로 반응하면서 새롭고 행복한 의미를 부여하는 생명적인 삶을 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잠자고 있던 유전자가 깨어나서 세로토닌과 엔도르핀을 생산해 내게 된다. 유전자에 생명적 환경을 제공하면서 긍정과 행복의 의미를 부여하면 유전자는 그것에 반응하여 움직이기 시작한다. 미움 때문에 우울증에 걸린 사람은 미움을 버려야 한다. 슬픔 때문에 우울증에 걸린 사람은 슬픔을 버려야 한다. 어떻게 그러한 사망적 환경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사랑을 느끼면서 살면 된다. 가족의 사랑과 하나님의 사랑이야말로 우울증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치료제이다.

사랑이 유전자에게 생명을 준다
 과학자들은 쥐들에게서 매우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하였다. 쥐는 새끼를 낳으면 어미 쥐가 새끼 쥐를 열심히 핥아 준다. 처음에는 새끼 쥐가 더러우니까 핥아준다고 생각했는데 깨끗한 쥐 새끼들도 계속해서 핥아 주는 것을 보게 되었다. 이것을 이상하게 여긴 과학자들은 그 이유에 대해서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과학자들은 실험 대상으로 뽑은 열 마리의 새끼 쥐들 가운데 다섯 마리는 어미 쥐와 함께 머물게 하였고 나머지 다섯 마리는 어미 쥐로부터 떼어 놓았다. 그런 후에 두 그룹의 새끼 쥐들에게 같은 음식물을 주면서 그들의 성장 과정을 비교해 보았다. 결과는 놀라운 것이었다. 어미 쥐와 함께 있던 다섯 마리의 쥐들은 성장했는데 어미 쥐로부터 분리시켰던 새끼 쥐들은 더는 자라지 않았다. 음식만 준다고 해서 성장하는 것은 아니다. 성장 호르몬이 체내에서 분비되어야만 성장하는 것이다.

 어미 쥐와 분리된 새끼 쥐들의 피를 뽑아서 검사해 보았더니 성장 호르몬의 양이 많이 저하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어미 쥐와 함께 있으면서 어미 쥐가 열심히 핥아 준 새끼 쥐들은 성장 호르몬이 매우 많이 분비되어 있었다. 이 실험은 새끼 쥐를 핥아 주는 어미 쥐의 행동, 즉 사랑의 행동이 성장 호르몬 분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어미 쥐가 핥아 주면 성장 호르몬을 생산하는 유전자가 활성화되어 매우 활발하게 움직이게 되고 그 결과 성장 호르몬이 많이 분비되는 것이다. 반면에 어미 쥐의 사랑을 받지 못한 새끼 쥐들은 성장 호르몬 유전자가 활동하지 않아서 성장을 멈춰버리고 만 것이다. 결국 새끼 쥐들의 유전자 활동성은 어미 쥐의 사랑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이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과학자들은 어머니의 사랑을 인정하기보다는 어미 쥐가 새끼 쥐의 피부를 자극해 주면 모세 혈관이 자극을 받아서 확장되고 그래서 혈액이 잘 순환되니까 성장 호르몬이 많이 나오게 되었다는 과학적(?) 추측을 하였다. 과학자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증명하려고 어미 쥐의 혀와 비슷하게 생긴 붓을 만들어서 그것을 따뜻한 물에 적신 후에 새끼 쥐들을 붓질해 주었다. 그 결과 새끼 쥐들에게서 성장 호르몬이 분비되었다. 그러나 며칠 후에 과학자들은 실망하고 말았다. 왜냐하면 계속해서 붓질을 해주었는데도 불구하고 3-4일이 지나면서 새끼 쥐들에게서 성장 호르몬이 분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처음에 붓질을 해주었을 때에 성장 호르몬이 나왔던 것은 조건반사에 의한 현상이었던 것이다. 이 실험을 통해서 단순한 접촉이 아니라 어미 쥐의 마음에서부터 나오는 보이지 않는 사랑과 관심의 에너지가 새끼 쥐의 유전자를 자극하여 성장 호르몬이 나왔다는 결론을 다시 확인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과학자들은 사랑과 관심이라는 에너지를 믿지 못했다. 그들은 사랑 때문이 아니라 다른 어떤 과학적 이유 때문에 성장 호르몬이 분비되었으리라 추측하였다. 그래서 이번에는 새끼 쥐들에게 성장 호르몬을 주사로 주입했는데 그 결과 더욱 놀라운 일이 생겼다. 성장 호르몬을 주사로 넣어 주었는데도 불구하고 새끼 쥐들이 자라지 않는 것이 아닌가! 혈액 속에 성장 호르몬이 많아졌는데도 세포들이 성장 호르몬을 받아주지 않으니 자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세포에는 모든 종류의 호르몬을 세포 속으로 받아들이는 수용기(Receptor)가 있다. 혈액을 통하여 주사된 성장 호르몬이 세포 앞에서 기다려도 세포의 문을 열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수용기가 문을 열어주지 않기 때문에 성장 호르몬이 세포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여 그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어미 쥐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쥐들은 호르몬을 생산하지 못할 뿐 아니라 호르몬을 받아들이는 수용기가 망가져 있기 때문에 성장 호르몬을 인위적으로 넣어준다고 할지라도 성장하지 못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놀라운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아무리 좋은 음식, 좋은 호르몬을 공급해 준다고 할지라도 그 마음이 닫혀서 하나님과 사람의 사랑과 용서와 관심을 느끼고 감사하지 못한다면 건강과 행복의 길을 걸을 수 없다. 사랑, 용서, 회개, 고백, 믿음 등은 과학적인 방법으로 측정할 수 없지만, 그것은 분명히 존재하는 생명력이다. 자신의 삶에 이것을 도입하는 사람만이 이 세상을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다.

창조 교실: 공처가, 해마

 하나님께서 창조해 놓으신 창조물들을 보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재미있는 분이신지 알게 됩니다. 해마라는 생물이 있는데, 해마는 정말 흥미 있는 하나님의 창조물입니다.

 해마는 물속에 사는 어류인데, 모습이 말처럼 생겨서 해마라고 불립니다. 해마는 몸길이 6<10.5cm 정도의 실고기 과에 속하는 어류로서, 등지느러미의 기저길이가 매우 짧으며, 가늘고 긴 주둥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머리가 거의 직각으로 구부러져 있으며 몸은 많은 골판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해마도 다른 물고기들처럼 헤엄을 치기는 하지만, 수영할 때 몸을 꼿꼿이 세우고 수영을 합니다. 해마는 물고기들이 헤엄칠 때 필요한 기관인 배지느러미와 꼬리지느러미가 없고, 전진하는 데 필요한 1개의 등지느러미, 몸의 균형과 방향을 잡는 데 이용되는 2개의 가슴지느러미, 그리고 추진력을 감소시키는 역할을 하는 1개의 뒷지느러미를 갖고 있습니다.

 해마는 수컷이 임신하고 알을 낳는다고 항간에 알려졌기도 한데, 사실, 해마의 수컷은 알을 낳는 것이 아니라 암컷의 출산 행동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암컷의 역할을 분담하는 특이한 습성 때문에, 해마는 공처가로 유명하게 알려진 물고기입니다. 해마의 암컷은 단지 산란만 하고 수컷은 새끼를 산출하는 것이지요.

 암컷과 수컷이 교미할 때 수컷이 육아 주머니의 구멍을 열면, 암컷이 그 속에 알을 산란하게 됩니다. 육아낭(育兒囊)은 수컷의 꼬리 배 쪽에 있으며, 수컷이 육아낭에서 알을 부화시켜 기릅니다. 알은 한 번에 10개 정도 산란하지만 드물게는 수백 개를 산란하는 예도 있다고 합니다. 이때 알이 수정되면 산란한 알은 수컷의 육아낭 속에서 약 2주일 만에 부화합니다. 출산할 때 육아낭에서는 먼저 꼬리가 나오며, 이로부터 7~20초간의 굴곡 운동 후 1마리가 산출되고, 그 후 조금 쉬었다가 똑같은 행동을 반복하며 1분간 3~4마리 정도가 산출됩니다.

 흥미 있게도 암컷이 성숙한 알을 가지게 되면 주변의 수컷들이 암컷으로부터 알을 받으려고 치열한 경쟁을 벌이게 되는데, 몸 색깔이 변하면서(종에 따라 kuda는 흰색 또는 진한 노란색으로, Barbouri는 짙은 자주색으로 변함) 열열한 프러포즈를 한답니다. 그러나 암컷은 알을 쉽게 아무 수컷에게나 주는 게 아니고 쫓고 쫓기는 추격 활동을 하다가 마음에 드는 수컷에게 알을 전달하지요. 이 전달은 암컷의 수란관이 수컷의 육아낭 입구에 정조준 되면서 매우 짧은 시간에 이루어집니다. 그러면 수컷은 육아낭 속의 알이 부화할 때까지 보호하면서 출산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공처가 물고기 해마를 통해 부성애를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것은 아닐까요?

신앙: 1부 - 교회에게 보내는 글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은 무엇일까요? 교회는 많지만,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뜻과 소망에 맞는 교회는 드문 것 같습니다. 교회는 교회의 주인 되신 하나님을 잃어버린 채 깊은 잠에 빠져 있습니다. 이번 호 신앙 기사는 잠자는 교회에 보내는 충고들로 구성해 보았습니다. 이 기사가 독자들을 하나님의 참 교회, 참 백성이 되는 데에 큰 도움을 주게 되기를 바랍니다. - 편집실 -

 기독교의 성행으로 말미암아 현대에는 수많은 교회가 존재하고 있다. 거대한 비즈니스같이 어마어마한 조직을 가진 대형 교회가 있는가 하면, 변두리 시골에 미미한 존재로 자리 잡은 작은 교회도 있다. 그중 한국은 세계에서 으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한국인들의 종교심 덕분에 세계에서 교회가 가장 많은 나라로 손꼽히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수많은 교회 중에 진정으로 하나님의 뜻과 진리에 맞는 교회, 그리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완전히 드러내는 교회는 몇이나 될까? 교회는 왜 존재해야 하며,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뜻과 목적은 과연 무엇일까? 함께 생각해 보자.

교회의 존재 목적과 사명이 분명해야 한다
 교회는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세우신 기관이다. 교회의 존재 목적은 하나님의 복음을 세상에 효과적으로 전파하며 교회가 전하는 복음의 능력을 입증하는 산 증인이 되기 위함이다. 교회의 존재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하나님의 백성을 통해 온 세상에 드러나는 것, 사람들을 어둠에서 불러내어 기이한 빛 가운데 들어가게 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세상에 나타내는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통하여 드러난 하나님의 뜻과 원칙을 보고 사람들이 구원을 얻도록 하신 것이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이다.

교회는 하나님을 대표하는 사람들의 모인 곳
 성경이 고대 이스라엘에 대하여 언급했던 말씀은 오늘날의 하나님의 백성에게도 해당한다.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신 7:6). 교회는 하나님의 성민들이 모인 곳이 되어야 한다. 교회를 구성하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을 대표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가 실현되는 장소로서, 하나님은 교회 안에서 심령을 변화시키는 그분의 능력을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신다. 마음속에 그리스도께서 거하시는 사람, 그리스도의 사랑을 세상에 나타내는 사람은 모두 다른 사람에게 축복을 위하여 하나님과 동역 하는 동역 자들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려고 주님께로부터 은혜를 받은 사람의 생애에서는 영혼을 살리는 영적 생명의 조수가 흘러나온다.

 교회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와 공의와 진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성품을 세상에 전시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의 법칙이 교회를 구성하는 사람들의 생활 가운데 나타나야 하며, 교인들은 생애와 품성에서 하나님의 원칙과 뜻을 나타내고자 세상의 습관, 습성 및 행습에서 분리되는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 모든 교인은 하나님의 나라를 발전시키기 위하여 거룩하게 임명된 하나님의 대리자들이다.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참 교회인 참 백성,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믿음을 가진 자들인 남은 무리가 되는 것이다.

교회는 진리를 보존하는 도피성이 되어야 한다
 교회는 부패한 세상에서 하나님이 보유하고 계시는 요새이며 도피성이다. 인간의 역사가 시작될 때부터, 하나님의 백성은 지상에 교회를 설립하였다. 시대마다 하나님께서는 진리를 지키는 파수꾼들을 가지고 계셨는데, 그들은 자신들이 살았던 그 세대에 하나님의 증인들로서 진리를 간직하고 전수하였다. 이 진리를 지키는 자들은 하나님의 영원한 복음과 경고의 기별들을 전하였으며, 그들이 갑옷을 벗고 물러날 때는 다른 사람들이 그 일을 물려받아 대신 일하였다.

 박해와 투쟁과 흑암의 세기를 통하여서도 하나님은 교회를 보존하셨고, 교회는 하나님의 진리를 보존하는 도피성이 되었다. 순결한 하늘의 진리는 시대에 시대를 이어 계속 그다음 세대로 전수되었고, 사람들은 보존된 진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의 원칙과 구속의 경륜을 깨닫고 세상에서 구원을 받았다.

 교회는 진리를 간직하고, 보존하고, 전하는 기관이 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그 보존된 진리, 영원한 복음을 통하여 사람들이 구원을 얻도록 해야 한다. 복음이나 가르침에 타협이 있어서는 안 된다. 진리가 올바로 제시되어야 사람들이 그 진리로 성화 되고 구원을 얻을 수 있다.

교회는 영혼들의 편안한 쉼터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실 때,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하며 또 무슨 비유로 나타낼꼬(막 4:30)라고 사람들에게 물으셨다. 세상의 나라와 사회는 하나님의 나라와 비교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비유로 들기가 어려우셨던 것이다. 세상의 나라들은 물리적 힘이나 권력과 부로 다스리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에서는 모든 세상의 무기와 탄압 도구가 제거되고 사랑과 화평이 다스리는 도구가 된다.

 하나님의 사랑과 영광이 드러나야 하는 교회에는 사람들 사이에 최상권을 잡으려는 야망이나 술수가 없어야 한다. 권력이나 부로 사람을 다스리는 일이나 차별과 독점으로 사람들을 억압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교회는 다양한 은사와 성령의 능력을 충만하게 받은 여러 성도가 모인 곳이다. 그러므로 서로 높이고, 서로 도와주고, 서로 축복하는 중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하여 성취하려고 하시는 목적은 치유의 강에 대한 에스겔의 이상 가운데 잘 나타나 있다.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 강 좌우 가에는 각종 먹을 실과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실과가 끊어지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실과를 맺으리니 그 물이 성소로 말미암아 나옴이라 그 실과는 먹을 만하고 그 잎사귀는 약재료가 되리라(겔 47:9~12). 물론 이 이상은 마지막에 완전히 회복된 하나님의 교회를 가리키기도 하지만, 이 시대의 교회에도 적용되어야 한다. 교회는 모든 사람이 풍성한 생명수와 꼴을 먹으며 편안히 쉴 수 있는 쉼터가 되어야 한다.

교회는 하나님의 인을 받아야 한다
 에스겔서 9장 1, 3~6절을 보면 하나님의 백성이 인(표)을 받는 것에 대한 묘사가 나온다. 여호와께서 그 가는 베옷을 입고 서기관의 먹 그릇을 찬 사람을 불러 이르시되 너는 예루살렘 성읍 중에 순행하여 그 가운데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인하여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하라 하시고 & 너희는 그 뒤를 좇아 성읍 중에 순행하며 아껴 보지도 말며 긍휼을 베풀지도 말고 & 다 죽이되 이마에 표 있는 자에게는 가까이 말라 내 성소에서 시작할지니라 하시매 그들이 성전 앞에 있는 늙은 자들로부터 시작하더라(겔 9:1, 3~6). 이마에 표를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이 사람의 이마(전두엽: 인간의 의지와 이성과 선택과 결정을 관장하는 뇌의 부분)에 온전히 실현되어 나타나는 것을 말하는데, 그것이 실제로 하나님의 인을 받는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인을 받아야 한다. 하나님의 인을 받지 못하는 사람은 엄밀히 말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다. 아무리 교회를 크게 늘리고, 선교 사업을 많이 하고, 헌금을 많이 드린다 해도, 성품이나 생활이 하나님의 품성을 닮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의 인을 받을 수 없고, 하나님의 인을 받지 못하는 사람은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 교회의 대세를 이루는 사람들이나 교회 안에서 특권을 누리는 사람들 그리고 교회 대다수 사람이 경건함을 버리고 세상의 죄악을 따라갈 때에, 하나님의 진리를 사랑하는 적은 숫자의 사람들은 교회의 죄악을 인하여 탄식하며 기도할 것이다.

하나님의 인을 받는 교인들
 교회에 영적인 침체가 올 때, 경건한 사람들은 세상과 교회에서 일어나는 죄악된 일로 인하여 탄식하게 될 것이다. 자기 자신의 영적 쇠퇴에 대하여 슬퍼하지 않고, 세상에 일어나는 죄악적인 일들을 보고 탄식하며 울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인을 받지 못하게 될 것이다. 이 탄식하고 우는 자들은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낮추며, 또 주위의 다른 사람들을 충고하고 권유하며 상한 심령으로 교회를 위해 중보의 기도를 드린다. 비록 많은 사람이 종교의 형식을 여전히 지속하고 있다 해도 그 속에 하나님의 능력과 임재가 결핍된 것을 그들은 알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심판이 세상에 나타날 때, 하나님의 인을 받는 사람들은 교회를 향한 애정과 염려, 사랑과 탄식으로 표현되는 그들의 마음의 고민에 의해 다른 사람들과 구분될 것이다. 많은 사람이 존재하는 악을 가리려고 애쓰는 동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열성과 영혼들에 대한 사랑을 가진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호감을 사고자 침묵을 지키지 않을 것이다. 진리와 복음이 퇴색되고, 교만과 탐욕과 이기심이 교회 안에 있는 것 때문에 그들은 탄식하고 운다. 또한 자신을 살피는 가운데 회개하는 심령으로 교회를 위해 기도하며 경고할 것이다.

 하나님의 인을 맞는 일이 진행될 때, 주님께서는 그분의 사자들에게 명령하신다. 성전 앞에 있는 늙은 자들부터 심판을 시작하라고&. 여기서 우리는 교회 곧 여호와의 성소가 하나님의 심판을 제일 먼저 받게 되리라는 것을 보게 된다. 늙은 자들이라는 의미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들 곧 목사나 장로, 교회의 지도자들이나 교회 생활을 오래한 책임을 가진 신자들을 뜻한다.

 하나님의 인은 가증한 일로 인하여 탄식하며 우는 자들의 이마에만 찍힐 것이다. 우리 자신의 행동 방향이 우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인을 받을 것인지 심판을 받을 것인지를 결정할 것이다. 교회의 직책이나 명예나 연륜은 사람을 구원하지 못한다. 하나님 영광의 성품을 가진, 하나님 아버지를 닮은 사람들만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인을 받을 것이고 구원을 받을 것이다. 지금은 교회가 하나님의 인을 받고자 회개하고 개혁해야 할 때이다.

 

신앙: 2부 - 목회자에게 보내는 호소

 당신은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목사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친히 뵙고, 핀 숯으로 입술의 정결함을 받고,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대답한 이사야처럼, 당신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기 위해 사명을 띠고 보내진 하나님의 귀한 종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대변자로서 말이나 행동이나 생각에서 주님을 대표하며, 주님의 뒤를 따라 겸비한 마음으로 복음을 전하는 매우 엄숙하고 신성한 사업에 종사하는 하나님의 증인입니다. 당신이 겪는 고통과 수고를 하나님께서는 다 알고 계십니다. 누구에게도 마음 놓고 얘기할 수 없는 혼자만의 갈등과 외로움을, 인간관계에서 오는 쓰라린 실망과 어려움을, 공의와 자비, 원칙과 사랑 사이에서 겪는 당신의 갈등을, 복음 전파가 가져오는 투쟁의 치열함을, 그리고 교회를 받들면서 겪는 맘 아픈 비난을 하나님은 아십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감내하면서 묵묵히 사명의 길을 걸어가는 당신의 충성을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십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고난에도 앞으로 나가라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상과 표준을 더 높이는 하나님의 종이 되라고 권면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거듭난 목사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진정으로 회개하고 거듭난 목사에게 따르는 능력과 힘은 교회를 변화시키며, 많은 영혼을 구원하게 합니다. 목사가 매일 주님 안에서 거듭나지 않으면, 예수님께서 하셨던 복음의 사역처럼 진리를 전할 수 없고, 영혼들을 개심시킬 수 없습니다. 목사는 진리를 전하기 전에 먼저 자신이 거듭나는 경험을 해야 하며, 진리로 성화 되고 순결해지는 경험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누구보다도 목사의 모본이 됩니다.

 모든 사람이 그들의 집으로 돌아가고, 한밤중의 잠으로 마을이 조용해졌을 때, 목회자의 모본 되시는 그리스도께서는 감람 산으로 가셔서, 그곳 그늘진 나무들 사이에서 온 밤을 기도로 보내곤 하셨습니다. 그분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만이 아니고 그분께서 구원하러 오신 영혼들을 위해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절히 구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손에서 새로운 능력을 구하고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새로운 활력을 얻으실 때까지 그분은 온 밤 동안 하나님과 영적인 교통을 계속하셨습니다. 예수님처럼 목사들은 매일 하나님과 씨름하는 가운데 영적인 경험과 거듭남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거듭나지 않은 목사들은 자신의 지혜롭지 못한 행동들이 영혼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볼 수 있는 분별력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성급하고 지혜롭지 못한 일을 하므로 영혼들을 낙심시킵니다.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돌아가신 귀한 영혼들을 사려 깊게 돌볼 수 있는 지혜는 매일 주님과의 교통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영혼을 잃어버리는 것이 두려운 일이지만, 다른 영혼들을 잃어버리게 하는 것은 훨씬 더 두려운 일입니다. 목사는 자신의 생각과 말, 습관과 성향을 누구보다도 더 큰 열성으로 주 안에서 지켜야 합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성품을 드러냄으로만 목사는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주님과 협력할 수 있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당신의 영혼 속에 거하시면, 그분이 마음속에 생명 샘, 곧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요 4:14)이 되셔서 당신은 많은 영혼을 살릴 수 있는 목사가 될 것입니다.

당신이 성경을 연구하고 기도하는 목사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목사님들이, 사도 바울이 디도에게 준 명령에 유의한다면 참 좋겠습니다. 너는 이와 같이 젊은 남자들을 권면 하여 근신하게 하되 범사에 네 자신으로 선한 일의 본을 보여 교훈의 부패치 아니함과 경건함과 책망할 것이 없는 바른말을 하게 하라 (딛 2:6~7). 목사들이 성경 연구와 진리 탐구를 열심히 하므로 마음이 제대로 훈련을 받고 그리스도의 귀한 교훈으로 채워져 있다면 어느 때, 어떤 위기 속에서도 새것과 옛것을 지식의 보물 창고로부터 꺼내어 하나님의 교회를 먹이고, 각 사람에게 때를 따라 그 양식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목사는 먼저 자신을 위해 영적인 꼴을 먹어야 합니다. 단순히 설교 준비를 위한 연구가 아닌 자신의 영혼을 위해서 열렬히 말씀을 연구할 때에 거기서 얻은 감화는 자신을 먼저 살리고 영혼들을 살리는 생명의 능력이 될 것입니다. 설교로 영혼들에게 꼴을 먹여야 하는 목사들이 비유에 나오는 미련한 처녀처럼 등잔에 빛을 내는 성령의 기름이 부족한 것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영혼에 대한 엄숙한 부담을 가지고,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는 목사, 나누어줄 꼴을 먹고자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구하는 목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입니다.

 목사들은 바쁜 사무 때문에 시간을 내어 기도하는 일에 때때로 실패합니다. 하나님의 사업에 너무 열심히 일하는 나머지, 성령의 깨우치심에 반응하도록 자신을 조용히 주님께 마음을 바치며 하나님과 교통하는 시간을 내기가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복음 사업이 바쁜 중에라도 시간을 내어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의 발아래 앉는다면, 자기 자신을 신뢰하지 않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가운데 맡겨진 거룩한 사명을 잘 감당해내는 목사가 될 것입니다.


당신이 결점과 죄악을 정복하는 목사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목사들도 평신도들처럼 정복해야 할 많은 결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극복해야 할 죄의 성벽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기 때문에 고쳐야 합니다. 우리의 죄가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것을 생각하고 죄와 결점을 주님의 은혜로 예수님의 능력 안에서 극복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사랑하는 주님을 죽게 한 죄를 고집하지 않을 것이며, 은밀한 결점과 잘못들을 하나님의 은혜로 정복하여 생활과 품성 속에 개혁을 이룰 것입니다.

 만일 목사가 죄 속에 빠져 있다면,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자신의 죄를 하나님께 고백하지 않는 한, 죄를 버리고 자아가 반석 위에 떨어져 깨어지지 않는 한, 하나님의 사업에 성령의 임재와 부흥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성품과 생애의 열매를 맺음으로써만 우리는 그분을 영화롭게 할 수 있습니다. 목사님들이시여!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스스로 그 일을 시작하십시오. 당신의 성화 되지 않은 생애 때문에 자녀와 교회의 신자들 앞에 거치는 돌을 놓지 마십시오. 충동대로 하며, 정욕과 편견에 따라 움직이는 성향을 버리십시오! 그리스도의 은혜로 도덕적 더러움으로부터 영혼을 정결하게 하는 영적인 일을 시작함으로써 하나님의 교회의 진영을 먼저 깨끗하게 하십시오!

 혹시, 당신이 원칙에 충실한 올바르고 정직한 목사인지는 모르지만, 만약에 신자들로 하여금 당신의 태도에서 사랑을 볼 수 없게 만든다면, 또한 그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합니다. 영혼들을 거만하거나 거칠고 불친절하게 대하는 것,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에게 냉정하게 대하는 것, 자신과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들을 비난하며 참을성 없게 대하는 태도, 동정이 없는 가혹한 마음을 가지고 하는 뾰족한 말 등은 하나님의 은혜로 극복되어야 할 것입니다. 목사들은 진정으로 부드러운 마음과 친절과 예의를 길러야 합니다. 만일 목사가 예의 바르지 않다면, 그는 영혼들을 그리스도로부터 내어쫓을 수 있습니다. 당신의 한마디 말과 목소리의 어조까지도 위기 속에 빠져 있는 영혼들에 대하여 관심과 동정을 표현하는 것이 되도록 하십시오.

 하나님의 사자라고 자부하는 목사들의 말과 태도와 품성 속에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 동정과 인자하심이 빠져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진리를 말하고, 진리의 이론을 설교하지만, 영혼을 녹이는 예수님의 사랑이 그들의 품성 속에서 살아 있는 활동적 힘이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품성 속에 있는 모나고 거친 모든 면은 고쳐져야 하며, 자신의 심령 속에 예수님의 사랑을 가져야만 당신이 전하는 진리가 영혼들을 회개시키고 성화 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당신이 인간에게 영광을 돌리지 않는목사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바울은 고린도인들에게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 4:7)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연약하고 실수하는 인간에게 복음이 의탁 된 이유에 대하여 목사들과 백성의 마음에 인상을 끼치고 싶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목사들은 특히 하나님께만 돌려야 할 영예와 영광을 취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며 하나님께서 모든 영광을 받으시도록 해야 합니다. 또한 마치 자기 자신의 능력으로 일을 성취하기라도 한 것처럼 하나님과 명예를 나눠 갖고자 해서도 안 됩니다. 대사는 자축하거나 성공에 따르는 명예를 스스로 취해서는 안 되는데, 목사는 하나님께 임명을 받고 보내진 대사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분수를 넘어 칭송을 받으려고 손을 뻗는 사람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목사가 아닙니다. 어떤 훌륭한 일을 성취해내었다 할지라도 목사들은 자신에게 어떤 영광도 돌리지 않도록 주의하며, 그 일은 그리스도께서 인간 심령에 역사 하신 결과이지 자신의 힘으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하나님 앞에 겸손히 인정해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업이 점점 성공적으로 발전해 나가면 나갈수록 더 주님의 임재하심과 능력을 구하며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역에 갑절의 축복을 더하실 것입니다.

당신이 다른 사람의 양심을 억압하지 않는 목사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때때로 지도자들이 본의 아니게 자신의 권위로 다른 사람들을 억압하거나 다른 사람의 양심의 역할을 대신하게 되는 때가 있습니다. 요즈음 교회에 들어온 잘못된 일 중 하나는, 목사가 섬기러 온 종이 아니라 다스리는 권위자로서 군림하는 것입니다. 목사나 목사 사모의 말이나 행동이 진리와 원칙에 맞지 않는다고 혹시 신자가 이의를 제기하거나 지적을 하면, 그 일은 마치 하나님의 눈동자를 범한 것과 같은 심각한 죄로 여김을 받고, 또한 하나님의 종을 거역한 반역죄로 취급을 받게 되어 있어서 양심적인 신도들이나 마음이 약한 신자들이 속으로 종종 시험을 받는 일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태도는 현대의 권위적인 목사의 태도와 상반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든 교역자의 큰 본이신 예수께서는 자신을 목자로 비유하셨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참 목자는 자신의 권위나 명예를 세우고자 연약한 양을 몰아세우지 않습니다. 명령하고 권세를 부리기 전에 참 목자는 겸손하게 양들을 섬깁니다. 참 목자는 예수 그리스도와 협력하여 양들의 고통을 나눠서 지고, 근심을 위로하며, 심령의 기갈을 면하도록 양들을 보살핍니다. 그런 목사가 양들을 하나님께 인도하는 참 목자입니다.

당신이 올바른 복음을 전하는 목사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마지막 말씀은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들은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것을 가르쳐야만 합니다. 여기에는 그분께서 개인적으로 가르치신 것뿐만 아니라 구약의 모든 선지자와 교사들을 통하여 가르치신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요즈음 교회를 휩쓰는 신신학(새로운 사조의 신학)은 성경이 가르치는 진리와 다르며 온전한 복음과 일치되지 않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이루어진 예수님의 속죄의 돌아가심이 구속 사업의 전부이며, 예수께서 온전한 순종을 포함한 모든 것을 대신 다 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저 믿음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는 가르침은 반쪽 복음입니다. 순종을 구원의 조건에서 완전히 분리시키거나, 오직 입혀 주시는 칭의의 공로를 믿고 받아들이는 것만이 구원의 전부인 것처럼 말하며, 성화나 진정한 순종, 개혁과 변화를 촉구하지 않는 복음은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복음과 일치되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는 스스로, 성경 말씀이 제시하는 변하지 않는 올바른 복음을 깨닫고, 그런 복음을 영혼들에게 전해야 합니다. 또한 자신이 전하는 그 복음의 능력을 스스로 경험하여 변화되어야 하며, 자신을 변화시킨 그 복음의 능력을 사람들에게 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목사들이 혼돈된 신학 곧 인간이 만들어 놓은 이론과 유전으로 얼룩진 그릇된 사상에서 벗어나, 오류가 섞이지 않은 순수한 하나님의 복음, 온전한 진리의 복음을 가르치기를 원하십니다. 성경이 말하는 복음은 생애를 변화시키는 능력의 복음입니다. 그 복음은 예수님이 가지셨던 믿음을 우리도 가지게 하여 죄를 이기고 승리하게 하며, 온전한 주님의 성품으로 변화하게 하는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목사가 먼저 복음의 능력과 은혜를 경험하고 그 복음의 능력의 증인이 되어 또 다른 증인들을 키워내는 것이 목사의 의무이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입니다.
 

신앙: 3부 - 집사와 장로들에게

 예수님 당시의 사도들과 집사들 그리고 초대 교회 시대의 장로와 감독들과 오늘날의 목사나 장로, 집사들은 영적인 질이나 사명감과 사역에서 엄청난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옛날의 집사들이나 감독들은 복음과 진리를 전파하고 가르치며, 한 교회를 완전히 책임지고 이끌어 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핍박 속에서 굳건하게 서서 복음을 전수했으며, 신자들을 복음에서 떠나가지 않도록 돌보며 보살피고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었습니다. 기독교 역사에 보면 너무 훌륭하고 경건한 장로와 감독과 집사들이 많았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옛날에 신앙의 부흥과 개혁을 가져왔던 하나님의 위대한 종들처럼, 현대의 장로와 집사들이 하나님과 교회를 위하여 헌신한다면 기독교의 역사는 달라질 것입니다.

장로님들께
 성경에서 감독은 오늘날 교회의 장로를 의미합니다. 옛날의 초대 교회의 교부들은 감독과 장로를 동일시하여 사용했습니다. 감독의 뜻은 헬라어로 에피스코포스(episcopos)인데, 이것은 밀접한 참여와 끊임없는 관찰을 암시하는 단어로서 장로가 영혼들과 교회를 끊임없이 살피고 섬겨야 한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으며, 또 이 단어는 장로, 혹은 교회의 지도자들을 지칭하고 있습니다. 성경 디모데전서 3장에는 장로의 자격과 자질에 대하여 이렇게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근신하며 아담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오직 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하며 돈을 사랑치 아니하며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로 모든 단정함으로 복종케 하는 자라야 할지며(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아보리요) 새로 입교한 자도 말지니 교만하여져서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 빠질까 함이요 또한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라야 할지니 비방과 마귀의 올무에 빠질까 염려하라 (딤전 3:2~6)

복음과 진리를 올바로 가르치는 장로가 되십시오
 요즈음, 스스로 성경을 연구하여 하나님의 복음과 진리를 올바로 깨달아 아는 장로를 찾아보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장로는 목사와 마찬가지로 영혼을 살릴 수 있는 올바른 복음을 알고 있어야 할 뿐 아니라 그런 복음을 사람들에게 가르칠 줄 알아야 합니다. 장로는 요즈음 기독교에 침투한 잘못된 복음과 혼돈된 신학과 인간의 유전을 알고 있어야 하며, 사람들이 미로 속에서 방황할 때에 변하지 않는 순수한 복음과 올바른 진리를 제시하며 영혼들을 밝은 빛 가운데로 인도해야 합니다.

 장로 자신이 먼저 진리를 깨달아 알고 영적으로 충만한 경험을 해야 신자들을 올바른 영적 경험 속으로 인도하며 교회를 올바로 섬길 수 있습니다. 또한 장로는 먼저 자신이 거듭나는 경험을 해야 하며, 그 거듭남의 비밀을 사람들에게 어떻게 가르칠지를 알고 있어야 합니다. 말씀으로 거듭나고 말씀의 능력이 변화시킨 자신의 변화된 생애로 영혼에게 본을 보이고 영혼들을 하나님께 인도해야 하는 사명이 장로들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성숙한 장로가 되십시오
 교회는 알게 모르게 당신에 의해서 영향을 받습니다. 장로님들의 태도는 교회의 분위기를 결정짓는 일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단지 권위 의식에만 사로잡힌, 명예만을 탐내는 장로는 교회에 분란을 가져오는 주모자가 될 뿐입니다. 장로는 권위를 부리고 교회를 좌지우지하라고 주어진 직책이 아닙니다. 오히려 양 떼들을 섬기고 잘 돌보라고 주어진 직책입니다. 장로는 성경과 진리의 지식에서뿐만 아니라, 인격과 성품에서 성숙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무마시키는 화평케 하는 자가 되어야 하며, 경솔한 말을 하지 말아야 하며, 목사님을 보필하고 협력하여 교회의 복음을 확장시키는 일에 전심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장로가 목사는 아니지만, 그 책임과 사명은 목사 못지않습니다. 지혜와 겸손과 용기로 무장한 진정한 믿음을 가진 장로를 교회는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조그만 일로 쉽게 감정을 상하지 않는 성숙한 인격을 가진 장로가 되십시오. 자신의 감정이나 명성을 수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교회의 덕과 영혼 구원을 위해 살아가는 장로가 되십시오. 하나님의 진리가 전파되는 일과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관심을 두게 되면, 사람들과 교제할 때 흔히 생기는 사소한 불화를 개의치 않게 될 것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생각할지라도 그것 때문에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일에 방해받지 말고, 장성한 분량에 이른 믿음으로 살아갈 때에 교회는 당신과 같은 장로 때문에 축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사랑과 동정이 많은 장로가 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무정하고 완고하고 사랑이 없는 사람과 함께 일하지 않으십니다. 이러한 사람은 그리스도인 상(像)을 망쳐 버립니다. 하나님의 지도자들은 어떤 종류의 일을 하든지 자비와 양선과 사랑을 나타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오는 진리와 평화와 기쁨으로 세상을 가득 채울 빛의 전달자들을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사람들, 자신의 연약함을 인식하며 하나님 교회의 사업이 자기들에게 달렸다고 자만하지 않는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위한 봉사에 필요한 예절 있는 말과 행동과 언행이 일치하는 삶을 주위의 사람들에게 보이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입니다.

 감사하고 유쾌하고 기뻐하는 정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사람이 마땅히 가져야 할 태도입니다. 마음을 부드럽고 차분하게 해 주는 하나님의 사랑의 감화력이 실생활에 작용할 때, 그 사람은 생명에서 생명에 이르는 향기를 주위에 풍길 것입니다. 남을 비난하는 무정한 정신은 많은 사람을 진리로부터 떠나게 합니다. 주님의 사랑과 자비와 동정 어린 마음에서 나오는 말과 행동은 잃은 양들을 구원하는 일에 큰 몫을 담당할 것입니다.

칭찬해 주는 사람이 없어도
 잘하였다.고 칭찬해 주는 사람이 없어도 성심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받드는 장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사람의 인정을 구하는 대신 하나님의 인정만을 바라며 신앙의 원칙대로 살아가는 장로는 하나님 앞에 소중한 사람입니다. 거짓 없고 성실한 생애, 선한 말을 하고 신중한 행동을 하는 생활, 온유와 겸손을 나타내는 일에 충실한 생애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삶입니다.
 지나친 아첨, 과도한 칭찬이나 불필요한 비판을 삼가고, 또한 인간의 영광을 구하지 않는 장로는 모든 사람에게 득이 되며, 인내심을 가지고 자신의 심령을 자제할 줄 아는 장로는 교회에 좋은 본이 됩니다.

 주님의 사업의 위대함은 떠들썩하며 인간 자신의 힘으로 열렬하고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교회의 사업의 가치는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생기며 성령의 능력을 얼마나 구하느냐에 달렸으므로, 장로는 하나님의 능력을 증진시켜 주고 주님의 능력 안에서 강해지며 마음속에 거룩한 사랑의 불길이 타오르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끊임없이 기도 드려야 합니다.

가르치는 진리에 합당한 생활
 세속적인 장로들의 숫자가 늘어 가는 추세에 있습니다. 교회를 자신의 사업의 연장선으로 생각하고 교회에서 사심을 가지고 세력을 확장하려는 장로가 늘어 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종들은 자신들이 믿고 가르치는 교리와 그들의 생활이 일치해야 합니다. 가르치고 믿는 대로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장로들은 자신들이 보이는 모본과 교제하는 주위 사람들에게 끼치는 영향력에 대하여 큰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다운 성품을 더럽힐 모든 사업에 얽매이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받드는 영적 사업에 헌신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영적 향상을 저해할 직업이나 사업에 종사해서는 안 됩니다. 사도 바울이 우리가 너희 믿는 자들을 향하여 어떻게 거룩하고 옳고 흠 없이 행한 것에 대하여 너희가 증인이요 하나님도 그러하시도다고 말했듯이 장로들도 이런 간증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집사님들께
 이와 같이 집사들도 단정하고 일구이언을 하지 아니하고 술에 인박이지 아니하고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고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할지니 이에 이 사람들을 먼저 시험하여 보고 그 후에 책망할 것이 없으면 집사의 직분을 하게 할 것이요 여자들도 이와 같이 단정하고 참소하지 말며 절제하며 모든 일에 충성된 자라야 할지니라 집사들은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 자녀와 자기 집을 잘 다스리는 자일지니 집사의 직분을 잘한 자들은 아름다운 지위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에 큰 담력을 얻느니라(딤전 3:8~13).

그리스도께서 전하신 것처럼
 옛날 초대 교회의 집사들의 책임과 사명은 매우 엄숙한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 집사들은 한 교회를 책임져 이끌고 섬기며 돌보는 일들을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 그분께서 하시던 일들을 했습니다. 집사들의 사명 중에 가장 중요했던 것은 복음과 진리의 빛을 세상에 비추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진리와 다른 가르침들이 교회 안에 침투할 때, 거짓 교사나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교회를 어지럽힐 때, 집사들은 교회의 양 떼들을 보호하고 올바른 길로 이끌고자 분투했습니다.

 그들의 신앙의 투쟁은 투철했으며 스데반처럼 순교도 불사하는 집사를 양산해내기도 했습니다. 예수께서 가르치신 복음과 진리에서 떠나지 않도록 양 떼들을 먹이고 돌보는 일이 집사들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요즈음의 집사들에게도 신앙을 지키고 복음과 진리를 받드는 일에 초대 교회의 집사들 못지않은 열성과 헌신이 요구됩니다.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것처럼 가르치고 교회를 지키는 일이 집사에게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일하신 것처럼
 집사님들은 봉사와 헌신을 위해서 택함을 받았습니다. 집사들은 교회를 위하여 봉사하고 영혼들을 섬길 때에 그리스도께서 일하신 것처럼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집사들은 그리스도께 영혼을 인도하기 위해 아무리 큰 희생이 요구될지라도 그것을 지나치게 큰 희생이라고 생각하지 말 것이며, 자신의 말이나 음성이나 손의 봉사가 주님을 섬기는 목적으로 사용되는 것에 대하여 기뻐해야 할 것입니다. 영혼들에 대하여 이러한 사랑을 가진 모든 집사는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런 사람들은 언제나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기를 원하며, 원줄기에서 흘러나오는 사랑의 영양분이 자신의 영혼뿐만 아니라, 사랑의 통로를 통해 시들어 말라 버린 다른 영혼들로 흘러가게 할 것입니다.

 주님의 종으로서 해야 할 봉사에 관하여 분명한 사명감으로 헌신하는 집사들을 가진 교회는 축복받은 교회입니다. 그런 집사들을 소유한 교회는 생명과 활기를 갖게 될 것입니다. 주린 자를 먹이고, 벗은 자를 입히며, 고통받는 자와 슬퍼하는 자들을 위로하고, 절망하는 자들을 위하여 봉사하고, 소망이 없는 자들에게 소망을 고취해 주는 집사들의 사명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이런 고귀한 사명에 충실한 사람들에게 네 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사 58:8)라는 약속이 성취될 것입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조력 사업에 종사해 온 사람들이 바로 주님께서 이루고자 하신 그 일을 행하는 것이며, 주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을 그분의 사랑하는 집사라는 칭호로 부르시며 그들의 수고를 기쁘게 받아들이실 것입니다.

믿음의 청지기들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이 자기의 일을 하도록 하셨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주님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라고 달란트를 부여받았습니다. 우리의 재능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가지고 장사해야 할 주님의 재산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청지기로서 주님의 소유를 사용하는 일과 남용하는 일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합니다. 청지기들은 각자에게 맡겨진 처지에서 의무를 다함으로 자신의 재능을 하나님께 바쳐야 합니다.

 주어진 재능과 능력을 발휘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하면 할수록 더욱더 많은 재능을 얻게 될 것이며, 더욱 훌륭한 일을 더 많이 행할 수 있는 더 큰 능력을 얻게 될 것입니다. 순결하고 진실한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주님을 위해 바친 모든 봉사와 노력은 그분께 향기로운 제물과 같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자신의 보혈로 사신 예수님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하여 그분을 힘써 섬기며 우리의 행동을 통해 우리가 그분의 은혜의 청지기라는 것을 나타내 보여야 하겠습니다. 선한 청지기는 자기 달란트를 그 이익금까지 붙여서 되돌려 드리면서도 주인으로부터 아무것도 바라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충실하게 자신의 청지기 직분을 다하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 택함을 받은 집사입니다.

생활에 나타나는 열매
 선한 행동은 우리 생활의 열매입니다. 선한 행동의 열매란, 불쌍한 자와 가련한 자와 고통당하는 자들에 대해 건넨 우리의 자비스럽고 친절한 행동과 말과 위로입니다. 낙담과 비애에 싸인 마음을 동정하고, 가난한 자에게 자선을 베풀며, 헐벗은 자를 옷 입혀 주고, 방황하는 행인을 집으로 맞아들일 때에, 그 생활에 맺히는 열매를 보고 하늘에서는 천사들의 화답하는 노래가 울려 퍼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베푼 공의와 긍휼과 자비의 모든 행위는 하늘에서 노래가 됩니다. 보좌에 계신 하늘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자비의 행위를 보시며 그런 사람들을 그분의 가장 귀중한 보물로 여기십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나의 정한 날에 그들로 나의 특별한 소유로 삼(말 3:17)으리라.

 가련한 자와 고통당하는 자들에게 행한 모든 자비의 행위는 곧 예수께 행한 것으로 간주합니다. 그대가 가난한 자들을 도와주고, 고통과 억압당하는 자들을 동정하며, 고아의 편이 되어 줄 때에,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소개할 좋은 기회를 얻게 됩니다. 타락한 자들을 향상시키고, 고통당하는 자들을 위로하는 것은 하늘에 기쁨이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누구의 마음속에 거하든지 간에, 그 사람의 생애는 그분과 같은 모양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며, 그런 생애를 사는 사람은 어디서 살든지, 또 어디서 활동하든지 주위에 복을 끼치게 될 것입니다.

 이타적인 마음과 봉사에 나타난 사랑은 악한 사람을 개혁시키는 일에서 칼이나 공의의 법정이 할 수 있는 것보다 더욱 효과적인 일을 할 것입니다. 칼이나 공의의 법정은 체벌과 훈련을 위하여 필요하지만, 사랑의 마음으로 봉사하는 선교는 그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때때로 견책 때문에 굳어진 마음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녹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집사들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타내도록 세상에 보내진 하나님의 사랑의 대사들입니다.

여집사들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자아 희생적인 여자 집사들을 통하여 하실 일들을 가지고 계십니다. 여자 집사들은 남자 집사들이 할 수 없는 일 곧 내면적 생활에 접촉하는 더 섬세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남자들이 접촉할 수 없는 사람들의 마음과 접촉할 수 있으므로 하나님을 위하여 고상한 일을 할 수 있는 여인들을 주님께서는 필요로 하고 계십니다. 여자 집사들은 거룩한 봉사를 하는 하나님의 의의 도구들이 되어야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으로 전파한 사람은 마리아였습니다. 그러므로 지금도 고상하게 하고 부드럽게 하는 그리스도인 여성의 감화가 진리를 전파하는 위대한 사업에 필요한 것입니다. 만일 영혼 구원을 그들의 소중한 일로 삼는 여인이 더 많이 존재한다면 더욱 많은 사람이 진리로 돌아오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열심 있는 여자 일꾼들 곧 분별력이 있고, 온정적이며, 부드럽고, 원칙에 신실한 일꾼들을 부르십니다. 만일 여자들이 먼저 예수님으로부터 매우 중요한 공과를 배울 것 같으면, 그들은 하나님을 위하여 선한 일을 성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일하는 모든 여인은 마르다와 마리아의 특성 곧 즐겨 봉사하는 마음과 진리를 진지하게 사랑하는 마음을 겸해서 가져야 합니다.

 그리스도인 여성은 숙녀입니다. 그런 여자의 입술에는 인애의 법이 있어서 성급한 말을 하지 않습니다. 가혹한 비판이나 쓸데없는 잡담에 빠져드는 습관을 저지하고 진실과 선과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균형진 마음과 성품을 계발하십시오. 여성은 여성 특유의 부드러움과 온유로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큰 조력자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 4부 - 교세의 확장인가? 복음의 전파인가?

 대형 교회가 우후죽순으로 세워지고, 비즈니스같이 거대한 조직을 가진 산업형 교회들이 고개를 들고 일어나고 있다. 교회가 늘어 가고 교회가 성장해 가는 듯이 보이지만, 그런 현상들이 교세의 확장을 위한 것인지, 진정한 복음 전파의 정신을 띠고 생겨나는 것인지 의아해질 때가 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맡기신 소명은 이것이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19,20). 교회가 생긴 것은 바로 이 소명을 완수하기 위해서였다. 이 소명을 다 완수하고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면 예수님께서 오실 것이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 24:14).

복음의 전파
 먼저 우리는 무엇이 복음을 전파하는 것인지 알아야만 한다. 복음을 전파한다는 것이 다만 교리를 설파하는 것인가? 교회들을 세우는 것인가? 아니면, 구호 사업을 통하여 질병을 치료하고 빈궁한 자들에게 의복과 음식을 주는 것인가? 물론 복음의 전파에 이 모든 요소가 포함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들만으로는 진정한 복음 전파라고 말할 수 없다.

 많은 교파의 교회들이 침례를 주고, 교회들을 설립하며, 병든 자들을 치료하고, 빈궁한 자들을 돕지만, 성경상 의미로 볼 때에 그것은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아니다. 복음 전파는 진리를 설교하는 것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활동, 그리스도인 봉사 활동 이상의 것을 의미한다. 복음은 단순한 말씀의 전파나 행위의 실천 이상의 것이다.

 신약 교회의 위대한 복음 전파자인 바울은 말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고전 2:4). 엄격하게 말하면, 하나님의 능력이 죄인들의 생애를 온전히 변화한 생애로 만들기 전까지는 복음은 아직 온전히 전파된 것이 아니다. 바울이 지적한 것처럼, 복음은 오순절 때처럼 사람들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 죄를 자백하고 회개하게 되는 성령의 능력의 나타남을 말한다.

 성령이 없이는 어떠한 복음도 존재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각각 다른 개성을 소유하고 있지만, 복음을 세상에 전하도록 교회의 신자들에게 성령을 부어 주기를 원하신다. 교회의 모든 신자는 하나님의 동역자라 불려야 한다(고전 3:9). 모든 교인은 기별을 전파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복음 전도 활동은 그것이 진정한 복음 전도가 될 수 있도록 성령의 역사에 따라 능력을 받아야만 한다.
 
 각 개인과 교회로서, 우리가 우리 가운데서 죄와 이기심을 없애고, 성령의 부어 주심을 간절히 사모하며,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사업에 바칠 때, 우리는 효과적인 복음 전도를 위하여 필요한 성령의 능력 있는 은사를 받게 될 것이다.

복음 전도의 목적
 복음 전도의 목적은, 주님께서 그분의 백성을 데리러 다시 오실 수 있도록, 예수님의 재림을 맞이할 수 있도록 영혼들을 준비시키는 데 있다. 그렇다면 그 복음 전파의 명백한 목적이 현대 교회의 목적이 되고 있는가? 복음 전도가 영혼들을 구원하는 자체의 목적보다도 교회를 성장시키기 위한 정책이 되고 있지는 않은가? 혹시 영혼 구원 사업이 이기적인 동기로 행해지거나 교회의 성공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지는 않은가? 
 
 잘못하면, 영혼 구원 사업은 개인들에게뿐만 아니라 교회 전체로 봐서도 이기적인 목적과 노력으로 행해지기 쉽다. 교인 명부에 교인의 숫자가 더 많이 적혀 있을수록 교회 교인들의 숫자를 늘리려는 정책은 더욱 강화되고, 교회가 커지면 커질수록 그 교회는 더욱더 유명한 교회가 된다. 영혼 구원 사업이 정책적인 방편으로 수행될 때 그것은 진정한 목적을 잃어버리고 교회의 탁월함을 증명하기 위한 수단이 되기 쉬우며, 오히려 그것은 복음의 진보를 저해하는 것이 될 수 있다.

 예수님의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보면, 가라지가 원수에 의해 뿌려진 것을 알 수 있다(마 13:25). 마찬가지로, 진정한 복음 전도가 교회의 목적이지만, 다만 숫자를 늘리려고 회심하지 않은 자들을 무조건 교회로 끌어들이는 것은 자칫 사단이 교회에 틈탈 수 있는, 모조 복음 전도가 될 수 있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많은 경우에 사단의 가장 큰 목적은 사람들을 교회 밖으로 내보내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교회 안으로 더 많이 끌어들이는 것이다. 교회의 표준이 더 많은 사람을 끌어들이려고 낮아질 때마다 교회는 능력을 잃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가능한 한 많은 회심한 영혼들을 끌어들이는 것에 큰 관심을 두고 계신다. 그러나 주님은 단순히 숫자만 늘리는 식의 전도는 원하지 않으신다. 그분께서는 진심으로 회심한 모든 개인을 받아들이기를 기뻐하신다. 예수님께서는 공중 봉사 기간에 그분을 따르는 자들의 숫자를 늘리려고 하는 대신에 숫자를 감하려고 종종 애쓰셨다.

 그분은 그분을 따르는 많은 자가 진정으로 회심한 자들이 아니라는 사실과, 회심하지 않은 자들이 실제로는 그분의 사업을 강화시키기보다는 약화시킬 것을 아시고 오히려 사람들을 돌려보내셨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전파하는 데 있어서 단지 반만 회심한 미지근한 자들 수천 명보다 진정으로 회심한 사람 소수가 더 효과적으로 일을 수행할 것을 아셨던 것이다.

교회의 표준을 높이는 일
 영혼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교회는 할 수 있는 모든 지혜와 친절을 발휘해야 하지만, 진리의 표준을 결코 낮추어서는 안 되며 오히려 높여야 한다. 물론, 모든 진리의 표준들을 단번에 제시할 수는 없지만 그리스도인의 헌신적인 생애, 올바른 생활 태도, 청지기 직분, 복음과 진리에 관하여 바르게 이해하는 것 등등에 관해서 한 계단씩 가르쳐 영적으로 자라나게 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을 한 번에 한 계단씩 가르쳐야 하지만, 침례를 받기 전에 철저하게 가르치고 그들이 실천에 옮기도록 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자신들이 구원받았다는 거짓 희망 속에서, 다만 믿음으로! 라고 주장하며, 순종과 자아의 굴복을 멀리한 채 살다가 뒤늦게 자신들이 구원받지 못한 것을 발견하게 될 수백 명의 사람을 갖는 것보다, 진정으로 회심한 사람 소수를 갖는 것을 더 기뻐하실 것이다. 겉으로 명목상으로만 회심한 사람들의 숫자가 많은 것은 교회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 예수님께서 만일 진리의 표준을 낮추셨다면 그분께서는 수많은 회심자를 얻으실 수 있었을 것이다.

 젊은 부자 청년 법관이 예수님께 왔을 때 그는 표준이 너무 높은 것을 발견하였다. 오늘날 많은 사람은 예수님께서 그 유망한 젊은이를 그분의 제자로 받아들였어야 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음속에 여전히 죄를 품고 있으면서 그분과 연합하는 것이 마음을 강퍅하게만 할 것이라는 것을 아셨다. 바로 가룟 유다의 경험에서 우리는 그것을 볼 수 있다.

 유다는 예수님과 함께 헌신하는 시간을 보냈다. 그는 그분께서 설교하시는 가장 위대한 설교들을 들었다. 그는 복음을 나타내는 일에서 그분과 동참하였다. 그는 구원받기를 원하였으나 예수님께 굴복하지는 않았다. 그가 예수님과 더 오래 있으면 있을수록 그 마음이 더 강퍅해졌는데, 마침내 주님을 배반하기에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교회는 회심에 대하여 가르쳐야 한다
 자신들의 마음이 그저 교회와 연관을 맺음으로 변화될 것이라고 희망하는 모든 사람도 유다와 같다. 침례를 주기 전에 목사는 그 사람의 헌신과 결심을 보아야 한다. 물론 침례 받을 때에 아직 그 사람의 생애에 성장과 성숙이 필요한 많은 부분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 사람의 생애에 나타나는 굴복은 완전해야 한다. 많은 사람이 침례 받으려고 침례 요한에게 왔을 때, 그는 그들에게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말하였다(마 3:8).
 
 어떤 목사들과 교회들은 교인들이 증가하는 것을 너무도 바라기 때문에 비 그리스도인 적 습관과 행실을 지적하는 성실한 증언을 하지 않는다. 새 교인들이 그리스도인이 되어서도 세상 사람처럼 행동하는 것이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가르쳐야 함에도 말이다.

 일반 대중은 교인이라는 호칭과 공언에 호감을 느낀다. 경건의 모양을 옷 입고 교회의 명부에 이름을 등록하는 데는 자아 희생이나 헌신이 별로 요구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은 먼저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일 없이 교회에 소속된다. 세속적인 사람들에게 편안함을 주려고 그리스도인의 길을 넓고 유쾌하게 만들려고 노력하는 것은 헛된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거칠고 좁은 길을 평탄하게 하시거나 넓히지 않으셨다. 우리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이 걸어가신 것과 같은 길, 겸손과 극기와 희생의 길을 따라가야 한다.

 교회는 진리의 표준을 결코 낮춰서는 안 되지만, 또 반면에 종교를 행위에 의존하게 하여서도 안 된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고 말씀하셨다. 죄인은 반드시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와서 자신의 마음을 사랑의 구세주께 굴복시켜야 한다. 주님께서는 새로 태어나는 회심의 경험 속에서 변화를 가능하게 하신다. 침례 받기 전에 헌신과 회심과 열매를 볼 수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실 것이다.

반쪽 복음 전도의 결과
 교회가 숫자에 그 강조점을 두기 시작하고, 숫자에 중점을 둔 프로그램들을 계발하며, 숫자를 크게 과시하기 시작할 때, 회심하지 않은 목사들과 지도자들은 이런 것을 표준 삼아 교회를 마치 이 세상의 사업처럼 통계 숫자를 늘리려 애쓰기 시작한다. 세상의 사업에서의 이익과 같이 교인의 증가와 침례를 주는 숫자가 발전의 표준이 된다. 현대 교회는 이런 시스템이 최고라는 정책을 만들어 놓음으로써, 교회들은 회심하지 않은 교인들로 차게 된다.

 이런 교회는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신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딤후 4:3,4)는 예언을 성취하게 한다. 종종 곧바른 기별을 전하는 설교자는 이러한 회심하지 않은 교인들에 의해 거절당한다. 그들이 총회에 그런 설교자들에 대한 불평을 말하면 충실한 목사들은 교회에 소동을 가져왔다는 비난을 받게 되며, 회심하지 않은 교인들을 계속 즐겁게 하는 자들이 칭송과 인기를 얻지만, 진리와 원칙에 충실한 목사들은 마땅히 설 자리가 없어진다.

 교회가 뜨뜻미지근한 사람들로 차게 되면 교회의 영적인 상태 또한 뜨뜻미지근해진다. 그러나 교인들은 자신들이 뜨뜻미지근한 상태에 있는지조차 알지 못하며, 오히려 자신들의 숫자와 교회의 성장을 가리키며 교회가 영적인 면에서 부유하게 증가하였다고 믿는다. 이런 모든 일의 시작은 교인의 숫자를 늘리는 데 중점을 두는 데서 시작된 것이다.

성장보다는 진정한 선교를
 만일 교회가 인기를 얻고 숫자를 늘리려고 복음의 표준을 낮추고 숫자의 증가를 교회의 성공으로 삼는다면, 만일 숫자가 성공의 증거라면, 어쩌면 사단은 승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세상 대다수가 그를 따르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교회의 번영은 바로 교회의 영적 그리고 도덕적 능력의 정도와 질이다. 자랑스러워해야 할 것은 교회를 구성하는 교인들의 영적인 수준과 덕과 경건이지 그 숫자가 아니다. 숫자를 강조하는 교회의 정책이 교회를 그 교회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과 분리시켜 왔다.

 진정한 개심을 백성에게 가르치고 변화와 거듭남과 개혁을 강조하여 진정한 하늘 백성,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참 백성을 양산해내는 것이 진정한 선교이다. 교회 안에 진정한 복음 전도의 정신이 일어나고 단지 숫자가 아닌 진정한 회심이 성공의 증거가 되는 참된 부흥이 교회에 있어야 할 것이다.

신앙: 5부 - 잠자는 신부, 신랑을 기다리지 않는 교회에게

 신랑을 기다리던 아름다운 신부, 교회가 잠들었습니다. 신랑을 맞기 위해 준비하는 일이 전부였던 신부가 세상을 바라보며 주의를 빼앗기기 시작했습니다. 신랑이 오신다는 소망은 가슴 속에서 더는 불타지 않고, 기다리는 지루함에 지쳐 조금씩 졸다가 이제는 아예 깊은 잠에 빠져 자고 있습니다.

 시간이 많이 흘러 신랑의 오시는 발걸음 소리가 점점 가까워 오고 있는데, 깊은 잠에 빠진 하나님의 사랑하는 신부 교회는 언제나 깨어 신랑을 맞을 준비를 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재림이 매우 가까웠습니다. 곧 산 자의 심판이 시작되고, 각 사람의 귀에 다음과 같은 선고가 발해질 것입니다.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되게 하라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계 22:11~12). 당신은 곧 임박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을 생각하며 살고 있습니까? 머지않아 미구에 닥칠 큰 심판의 날을 염두에 두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비록 재림의 날이 오래 지체되었으나 이제 그 시기가 문 앞에 이르렀으며 또한 급속히 다가오고 있습니다.

마지막 교회, 라오디게아 교회
 예수께서 오시기 바로 직전에 있는 마지막 교회는 라오디게아 교회입니다. 곧 오실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깨어 준비하고 있어야 하는 교회가 마지막 교회인 라오디게아 교회입니다. 그러나 라오디게아 교회는 자신의 영적인 상태를 망각한 채 깊이 잠들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예언을 통하여 마지막 교회인 라오디게아 교회의 상태를 진단하시고, 그 증상들을 치료할 방법까지 마련해 놓으셨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가 가진 깊은 질병을 치료받지 않으면 주님의 재림을 위해 준비될 수 없기에&.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내는 기별은 두려운 경고이며 오늘날의 하나님의 백성에게 적용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주신 권면을 함께 살펴봅시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덥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덥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덥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계 3:14-17).

 라오디게아 교회는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자랑하는 교회 곧 마지막 시대의 교회인 현대 교회를 가리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내는 기별을 보면, 하나님의 백성은 육신적으로 평안한 형편에 처해 있는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그들은 영적으로 높은 수준에 도달했다고 스스로 믿으며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이 전혀 잘못되어 있는데도 스스로 옳다고 확신하는 것보다 더 큰 기만이 세상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이 교회를 보실 때,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상태를 보십니다. 가장 무서운 영적인 형편은 자신이 부족한 것이 없다고 느끼는 상태 곧 가장 잘못되어 있으면서 가장 올바르다고 느끼는 상태입니다. 이 라오디게아 교회는 자신의 영적인 참모습과 상태를 모르는 교회로서, 자기의 상태를 모르기 때문에 고침을 받으려 하지 않는 교회입니다. 이 시대의 교회는 자신들이 영적으로 완전히 죽어 있는 상태에 있음에도 자신들이 이미 구원받았다는 생각에 도취하여 있으며, 성경을 가지고 있지만 성경이 말하는 진리에 대해서는 눈이 멀고 병들어 죽어 가는 교회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교인들이 스스로 높은 영적 수준에 처해 있다고 자부할 때, 참된 증인의 기별은 그들이 영적으로 눈멀고 가난하고 곤고한 상태에 있다고 날카롭게 책망합니다. 자신이 성취한 것으로 만족을 느끼며 스스로 영적 지식에 부유하다고 믿는 자들이, 자신이 기만당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은혜로 치료받지 않으면 가망이 없다는 기별을 받아들이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겸손한 마음으로 이 권면을 받아들이고 고침을 받는 자들만이 재림을 맞이할 준비가 되고, 하나님의 신부가 될 자격을 가지게 됩니다.

증상과 치료
 그리스도께서는 라오디게아 교회인 현대 기독교회의 신앙을 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미지근하여 덥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계 3:16).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앞두고 가장 뜨거워야 할 이 마지막 교회가 가장 미지근한 상태 가운데에 놓여 있는 것을 보고 그리스도께서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자신들의 상태에 대해서 전혀 모른 채, 자신의 부족과 필요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도움을 요청하지 않고 그저 자기만족과 자기기만 속에서 종교를 즐기고 있습니다.

 마지막 교회에 속한 교인들의 이러한 치명적 상태를 치료하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는 다음과 같은 3가지 처방을 주셨습니다.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계 3:18).

È 불로 연단한 금: 용광로에서 연단되어 나온 금은 시련을 통하여 연단된 순결한 믿음을 의미합니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벧전1:7).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욥 23:10).

È 흰 옷: 흰 옷은 성도들의 의를 나타냅니다.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라(계19:8). 예수님의 임재와 그분의 능력은 우리에게 의의 옷을 입게 합니다.

È 안약: 양심을 민감하게 하고 진리를 식별하고 깨닫게 하는 성령을 의미합니다.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1:18~19).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라(요 16:13).안약을 발라 보게 하라는 뜻은 양심을 민감하게 하고 진리를 식별케 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은혜로 우리의 비참한 상태를 먼저 볼 수 있게 되어야 고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한 영적인 상태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자족한 상태에서 깨어나서 우리의 참된 영적 형편을 볼 수 있어야 하고 의의 옷이 없이 벌거벗은 형편을 보아야만 합니다. 결국, 이 세 가지 처방을 종합하여 보면, 순결한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깨끗한 의를 옷 입어서 성품이 변화되고 의로운 생활을 살며, 성령의 감화를 통하여 진리를 분별하는 영적 눈을 뜨며, 양심이 순결한 그리스도인이 되라는 치료의 말씀인데 바로 이것이 마지막 시대에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비결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 시대에는 예수께서 문밖에서 두드리시는 분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문에 서 계시다는 것은 예수님의 재림의 임박성을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주님을 마음 문밖에 세워 두는 교회로서 개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관계를 말합니다. 거듭나고 예수님과의 매일의 산 관계 속에서 거룩해지는 성화의 경험을 하지 않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재림을 위하여 준비되지 못할 것입니다.

준비는 개인적으로
 교회는 잠들어 있어도 교인들은 영적으로 깨어 있을 수 있습니다. 어린 교인들은 항상 교회가 무엇을 해 주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구원의 문제는 교회가 해결해 줄 수 없고, 교회가 구원을 줄 수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교회 전체가 영적으로 깨어나 재림을 위하여 함께 준비하리라는 기대를 해서는 안 됩니다. 재림 전에 부어 주실 성령의 큰 능력도 개인적으로 받는 것입니다. 영적인 경험은 극히 개인적입니다. 예수님을 자기 자신 스스로 찾고 개인적으로 관계를 맺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예수께서는 내가 곧 생명의 떡(요 6:35)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다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그리고 덧붙여 말씀하시기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요 3:53~56).

 그리스도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것은, 음식을 먹듯이 개인적으로 생명의 말씀을 먹고 그분과 개인적인 교통을 나누는 것을 의미하며, 그분께서 우리의 죄를 사하신다는 것과 우리가 그분 안에서 완전해질 수 있다는 것을 믿고 그분을 개인의 구주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성품에 참여하게 되는 것은 그분의 사랑을 바라보고 그것을 깊이 생각하고 그것을 받아 들임으로써 됩니다. 음식이 우리 신체의 일부가 되지 않는 한, 음식이 우리에게 아무 유익이 될 수 없는 것처럼, 우리가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알지 않는다면, 그리고 개인적으로 생명의 말씀을 먹고 개인적으로 주님과 교제를 나누지 않는다면, 그분은 우리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분입니다.

 이론적 지식은 우리에게 아무 유익도 주지 못합니다. 주님의 사랑과 주님의 은혜가 우리의 생애에 동화되어야 합니다. 이렇듯 그리스도의 은혜와 능력을 개인적으로 체험하고, 그 은혜 속에서 변화되고, 하나님의 성품을 이루어 모든 죄를 이기고 극복하는 사람만이 예수님의 재림을 위해 준비하는 사람이며, 그런 사람이 어린양의 신부로서 주님을 기다리며 사는 사람입니다.

재림이 지연되는 이유 세 가지
 예수님의 재림이 점점 지연됐습니다. 교회는 지금 재림을 맞을 하나님의 신부들을 준비시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도자나 교인들이나 모두 깊은 잠에 취해 있습니다. 재림이 늦춰지는 이유는 첫 번째, 교회가 온전한 복음을 가르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은혜만을 강조하는 복음은 교인들에게 온전한 순종과 성화를 간과하게 하므로, 마지막 남은 무리 곧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사람들을 양산해낼 수 없습니다.
 두 번째, 지도자들이 온전한 복음에 반대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것입니다. 교인들은 목사의 영적인 표준보다 더 높이 올라가기 어려워서 지도자들의 영적인 경험과 복음에 대한 이해와 태도는 매우 중요합니다. 세 번째, 교인들이 스스로 영적으로 깨어나려고 노력하고 있지 않는 것입니다. 많은 교인은 자신의 구원을 목사에게 의지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며 스스로 깨어 영적으로 서는 경험을 해야 할 것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내는 기별은 높은 수준의 한 백성을 창출해내는 데 있습니다. 높은 수준의 한 백성이란 내가 이긴 것 같이(계 3:21)라고 말씀하신 그리스도의 승리와 정복을 경험하는 백성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지막에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의 믿음을 지키는 사람들을 필요로 하시는데, 그 이유는 주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죄를 이기고 예수님의 성품을 이룬 사람들을 온 우주에 나타내 보이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요, 교회로서 우리는 지금 깊은 회개의 경험을 해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죄들을 다 회개하고, 주님의 능력으로 모든 연약성과 죄를 이기고 승리하는 생활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이마에 하나님의 인을 받을 것이며, 그런 사람만이 환난을 통과하고, 주님의 이름과 명예를 높이며, 하나님을 사랑하여 죽도록 충성하는 사람들이 됩니다. 그런 사람이 예수님의 신부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한눈을 팔지 않고, 무슨 일이 있어도 졸지 않고, 오로지 신랑이 오시는 것만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이 진정한 예수님의 신부입니다.

 지금은 자다가 깰 때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교회들이여! 지금은 자다가 깨어 옷매무시를 가다듬어야 할 때입니다. 주님께서 오실 시간이 다 되어 갑니다. 그 엄숙한 날에 우리 모두 깨어 있는 채로 발견되기를 기도합니다.

질문과 답변 : 한 번 얻는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나요?

 사도 바울은 육체적 죄의 성향을 재갈먹이지 않는다면, 결국 하나님의 면전으로부터 버림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잘 깨닫고 있었습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전 9:27).

 바울이 여기서 사용한 버림이라는 말은 꽤 흥미로운 말입니다. 그것은 헬라어로 아도키모스로서 다른 곳에서도 버리운다는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고린도후서 13장 5절은 예수그리스도께서 버리운(아도키모스)자의 마음에 거할 수 없음을 말합니다. 디도서1장16절은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아도키모스) 자들의 가증함과 순종치 아니함에 대하여 말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생애가 다시 죄에 사로잡히도록 허용한다면 멸망 당할 수 밖에 없음을 생각한 것입니다.

 바울은 또한 중생(거듭남)을 경험한 신자들이 파멸을 당할 가능성에 대하여도 말하고 있는데, 이는 그들이 주의 만찬을 합당하게 먹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고전 11:29). 이 사람들은 기성 그리스도인들이며, 구원을 함께 나누어 가졌던 교인들임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심판을 받아 멸망 당할 수 있습니까? 바울은 그렇다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들이 심판을 받습니까? 디모데전서 5장12절에 그 대답이 나옵니다. 처음 믿음을 저버렸으므로 심판을 받느니라 신자가 처음 믿음을 저버리고 마지막 때에 심판을 당하게 될 수 있음이 얼마나 분명합니까?

 나는 영생에 대한 영원한 보장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비유로 들면서 자신들의 주장을 설명하는 것을 많이 들어왔습니다. 내 자녀는 나의 가족으로 태어났으므로, 그들은 항상 나의 자녀이다. 그들은 이미 태어난 존재이다. 나의 자녀와 나의 관계 즉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는 분리될 수 없다. 자녀가 순종하든지 불순종하든지를 불문하고, 그는 항상 나의 자녀인 것이다. 이 논리는 중대한 것 하나를 빠뜨리고 있습니다. 문제는 자녀가 다시 태 속으로 들어갈 수는 없지만, 자녀가 병들어서 죽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의사들은 어머니들에게 여러 가지 주의 사항을 이야기 해줍니다. 아이가 죽지 않고 건강하게 잘 살아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해주어야 할 권고와 경고들이 많이 있습니다. 만약 아기가 잘 먹지 않는다면 그 아기는 죽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도,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요 6:53)고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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