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편지: 마음에 바르는 피

 우리의 생명은 대가를 치르고 얻어진 것입니다. 우리의 죄 값을 치르신 예수님의 보혈 때문에 우리의 생명은 연장되었습니다. 우리가 숨 쉬고 있는 공기, 마시는 물 그리고 먹는 빵마다 십자가의 인이 쳐 있고, 오늘도 주님 피의 대가로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구약 시대의 제사 제도에서 예수님을 상징하는 희생 제물의 피는 바르고, 뿌리고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의미는, 십자가에서 예수님 보혈의 피가 흘러졌지만, 그 피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개인적으로 적용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죽임을 당한 산새의 피
 구약에 나오는 예식 중에서, 아주 의미심장한 피를 바르는 의식이 한 가지 있는데, 그것은 문둥병자를 정결케 하는 의식이었습니다. 그 당시 문둥병에 걸린 사람은 사랑하는 가족과 사회와 모든 것과 눈물로 이별하고 작은 괴나리봇짐을 싸들고 떠나야 했습니다. 그리고 아무 치료 방법이 없이 죽을 날만 기다리는 비참한 신세가 되어 혼자 격리되어 살면서 부정하다고 외쳐야 했습니다. 그런데 문둥병이 죽을 병이지만 어떤 때 치료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아마 문둥병에 걸린 이후로 그 사람의 삶은 회개와 통회와 기도로 점철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끔찍한 병에서 해방되기 위해 몸을 씻으며 처절하게 하나님께 매달렸을 것입니다.

 문둥병이 기적적으로 나은 사람을 정결하게 하는 흥미로운 의식이 레위기 14장에 나옵니다. 어느 날 문둥병이 나은 것을 발견한 그 사람은 놀라운 흥분 속에서 제사장에게 달려갑니다. 제사장님! 제 문둥병이 나았어요. 확인해 주세요! 제사장이 놀라서 그를 진찰해 보고는, 오! 축하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자, 이제 빨리 정결 의식을 치릅시다. 가서 산새 두 마리를 가져오시오. 문둥병이 나은 사람은 서둘러서 산새 두 마리를 가지고 옵니다. 제사장은 새 두 마리 중 한 마리는 잡아서 문둥병 걸렸던 사람에게 그 피를 7번 뿌리고, 다른 새는 놓아줍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새를 택했을까요? 새에게는 자유를 상징하는 날개가 있지요. 그것은 다시는 죄를 짓지 말고 죄에서 해방되어 자유롭게 날아다니라고 주신 상징입니다. 그런데 왜 새 두 마리 중에서 한 마리는 잡고 한 마리는 살려 보냅니까?

 이 살아난 새는 바로 다른 새가 죽었기 때문에 살아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문둥병 걸린 사람도, 누군가의 죽음 때문에 다시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예수께서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가 살 수 있다는 상징이지요.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새를 잡는데 흐르는 물 위 질그릇에서 잡으라고 하셨습니다. 왜 흐르는 물 위 질그릇 안에서 새를 잡을까요? 이 흐르는 물은 예수님의 흐르는 보혈을 상징하지요. 넘쳐 흐르는 보혈, 이 세상의 어떤 더러운 것이라도 씻을 수 있는 강 같은 보혈말입니다. 또 질그릇은 인간의 몸을 상징하지요. 질그릇 속에 보배를 가졌다는 말씀처럼, 질그릇 같은 인간의 몸, 인성을 쓰시고 예수께서 오셔서 보혈을 강물처럼 흘리셔서 우리가 살게 되었다는 표상입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의미입니까? 그런데 그것이 다가 아니고, 백향목과 홍색실과 우슬초로 죽임을 당한 산새의 피를 찍어 7번 환자의 몸에 뿌립니다. 우슬초는 그 당시 흔한 잡풀이었지만 정화 작용에 쓰이는 풀이었습니다. 그것은 보잘것없던 예수님의 인성을 상징하며, 또 벌레가 먹지 않는 향기를 지닌 훌륭한 나무인 백향목은 예수님의 흠 없는 성품을 상징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붉은 피를 상징하는 홍색실과 함께 완전 숫자인 7번이 뿌려졌는데, 그것은 예수님의 속죄는 완전하다는 의미입니다.

피를 바르는 의식
 문둥병자를 정결하게 하는 의식을 치른 뒤 8일째 되는 날에는 더욱 흥미로운 의식을 치르는데, 그것은 양을 잡아 정식으로 제사를 드리는 일입니다(레 14:10,17 참조). 이 8일째 되는 날에 드리는 제사에서, 제사장은 제물로 드린 어린양의 피를 문둥병자였던 사람의 오른쪽 귓부리과 오른쪽 엄지손가락과 오른쪽 엄지발가락에 바릅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뜻일까요? 이 속에는 매우 심오한 뜻이 숨겨져 있습니다. 피를 오른쪽 귓부리과 오른쪽 엄지손가락과 그의 오른쪽 엄지발가락에 바르는 일은 제사장을 임명하는 의식에서 하는 일이었습니다(레 8:23 참조).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신뢰를 엿볼 수 있습니다. 죄를 상징하던 문둥병에 걸렸던 사람이 회개하자,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을 받으시고 신뢰하셔서 그 사람의 위치를 격상시켜 주십니다.

 제사장의 직분을 주시는 것이지요. 그를 용서하고 깨끗하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증거하라고&.  회개한 죄인을 회복시키시고, 그 사람을 믿어주시며 신뢰하셔서 당신의 종으로까지 삼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참 놀랍지요? 피를 바르는 예식에서, 피를 귀에 바른다는 뜻은, 우리의 귀에 예수님 보혈의 피를 바르고 모든 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아무리 기분 나쁜 말, 험한 말을 들어도 피를 바른 귀를 통해 들으면 다 이해할 수 있는 소리로 들릴 것입니다. 또 엄지는 손의 대표입니다. 손으로 실천하는 삶을 살라고 이 표상은 우리에게 말해 줍니다. 남을 도와주고, 위로하고, 쓰러진 사람을 일으켜 안아 격려하며 살라고&.또, 엄지발가락에 피를 바른다는 의미는 순종의 삶을 걸어간다는 의미입니다. 가지 말아야 할 곳을 가지 않고, 갈 곳을 가는 것을 뜻합니다. 보혈을 바른 축복의 발이 출입하는 곳은 어디든지 거룩해집니다.

기름을 덧바르라
 그런데 그것이 다가 아닙니다. 피가 발라진 그 사람의 오른쪽 귓부리와 엄지손가락과 엄지발가락에 기름을 덧바릅니다. 그 사람이 희생 제물인 양과 함께 가져온 기름을 여호와 앞에 7번 뿌린 후, 남은 기름은 피를 바른 귀와 손과 발 그 위에 다시 덧바르는 것입니다. 피만 바르면 됐지, 왜 또 그 위에 기름을 덧바를까요? 그것은 모든 일을 행할 때 - 제사장의 봉사 직분이나, 영혼을 섬기는 일이나, 주님을 따라가며 사는 일이나, 그 모든 일을 할 때 - 기름을 상징하는 성령님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의식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얘야! 모든 일은 너의 힘으로 되지 않는단다! 죄를 용서받고 나를 따라 거룩한 성화의 길을 걸을 때, 성령의 기름 부음을 매일 받아야 쉽게 걸을 수 있단다. 넘어지지 않고&. 이것은 피로 정결함을 받은 후, 성령의 도움으로 덧바르는 것, 곧 성화의 삶을 살고자 성령의 도움을 받는 것을 의미하지요. 기름이 없으면 등잔에 불을 밝힐 수가 없듯이, 성령이 없으면 우리가 아는 진리가 아무 효력이 없고, 신앙생활에 힘이 없고, 또 눈이 어두워 넘어지게 됩니다.

피를 마시라는 초청
 그런데 이렇게 피를 바르는 의식이 신약에 와서는 예수님을 통하여 더 직접적인 교훈으로 주어집니다. 이제는 바르는 것이 아니라, 피를 마시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요 6:53) 예수님 당시에 많은 사람이 피를 흘리는 의식에 그렇게 많이 참석하면서도 진정으로 피를 마음에 바르는 경험을 하지 못했습니다. 표면적으로만 예수님을 알 뿐, 생명의 떡인 예수님을 먹지 않고, 그분의 피를 마시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보혈의 피를 마음에 바르는 경험을 몰랐고, 참된 음료인 생명의 피를 마시는 영적인 경험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피를 발라야 합니다. 생명의 떡을 매일 먹고, 피를 매일 마시며, 매일 예수님과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수많은 피가 흐르고 또 흘러졌어도, 그 피는 나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 피를 마음에 바르기 전까지는. 그 피를 마시기 전까지는&.

생애의 빛에서

 경기에 있어서 마지막 주자는 제일 중요한 위치에 있습니다. 제일 잘 뛰는 선수를 배치하지요. 앞의 선수들이 아무리 잘 뛰었다고 할지라도 마지막 선수가 실수하거나 넘어져 버리면 모든 경기가 실패로 끝나 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지구의 역사를 하나의 경기로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지난 6천 년간 하나님을 알고 믿는 백성들이 경주를 해 온 셈이지요.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의 측면에서 본다면 이 경주는 무척이나 중요한 경주입니다.
하나님께서 의인들을 구원하시고 악인들을 심판하실 때에 왜 그래야 하는지에 대한 증거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와 멸망의 공정성을 증거해 주는 마지막 증인들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의인들을 구원하시고 악인들을 심판하실 때에 왜 그래야 하는지에 대한 증거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와 멸망의 공정성을 증거해 주는 마지막 증인들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그저 간단한 하나님의 결정으로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한 사람의 구원과 한 사람의 멸망을 결정하시는데는 심혈을 기울이는 고뇌와 공개된 변론을 통과해야 합니다. 
 하늘에는 심판하는 곳이 있습니다.천사들이 방청하는 가운데 사단의 고소도 참작되어야 하는 것입니다.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그저 독자적인 결정과 선포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공정하신 분이시며 너무나 공평하고 합리적인 결정을 내리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최종 심판 이후에는 이 우주에서 다시는 하나님께 대한 의심이나 털끗만 한 의혹도 존재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죄와 사단이 없어지는 것은 물론 사단이 남겨 놓은 모든 자취조차 영원히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현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를 하나님의 구속 사업의 마지막 주자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번 호는 여러분들에게 신선한 도전을 드리게 될 것입니다.  

 

가정과 영성: 고린도전서 13장의 기도

손계문 전도사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오, 주님! 당신은 칭찬, 위로, 격려, 감사의 말들을 끊이지 않고 잘 하시는 분임을 압니다. 나는 사람의 방언도 천사의 말도 하지 못하는 입이 굳은 자입니다. 만일 가식으로 잘 한다 할지라도 내 자신의 말에는 생명이 없기에 결국은 사망의 감화밖에 남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가슴속에 살면서 삶으로 나타낸 사랑 없이 하는 모든 말은 소리 나는 구리요, 울리는 꽹과리가 되지요. 오늘 나의 입으로부터 발하여지는 모든 언어가 예수님께서 직접 하시는 생명의 말이 되게 해 주소서.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오, 주님! 산을 옮기는 어떤 이적보다도 조그마한 사랑의 행동 하나를 더욱 가치 있게 볼 줄 아는 믿음의 눈을 주소서.

 악의 힘에서부터 오는 이적과 속임이 판을 치는 세상입니다. 경건한 모양으로 크게 자선을 베풀기도 하며, 자신의 열성 때문에 순교자의 죽음을 당할 수도 있지요. 그러나 사랑의 황금 없이 행한 모든 일은 그를 기만당한 열심가 혹은 야망적인 위선자로 남게 만듭니다. 믿는다고 아무리 크게 소리칠지라도 자아 희생적인 사랑으로 마음이 적셔 있지 않은 이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아님을 늘 기억하게 해 주소서.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오, 주님! 내 소유가 무엇입니까? 땅과 바다 그리고 하늘도 주의 것이며, 그 안에 있는 모든 보화도 다 주님의 것이지요. 세상의 모든 금은이 주의 것인데도 가난한 자들을 억압하기 위해 쓰고 자신의 이름을 스스로 높이기 위해 남용한 적이 얼마던가요! 내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릅니다. 어디엔가 숨고 싶습니다. 지금껏 사랑하는 마음 없이 구제의 손길을 내민 적이 얼마던가요! 사랑 없이 행한 봉사는 하나님께 죄악임을 깨닫습니다. 믿는다는 멋진 말을 하면서 사랑 없이 행한 나의 모든 위선을 용서하여 주시고 순결한 사랑 없이 드린 가장 값비싼 제사도 하나님은 받으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소서.

사랑은 오래 참고
 오, 주님! 진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서 받는 멸시나 핍박을 참는 것보다도 먼저 내 마음속에서 솟구쳐 오르는 못된 자아에 대하여 오래 참을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분노나 복수심을 품지 않고 그렇게 참음으로 나중에는 내가 사랑의 사람이 될 것을 오래 기다리게 하소서. 내가 얼마나 비참한 자리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건짐 받았는지를 까마득히 잊고서 남들을 정죄하고 공격하고 비난하는 사람이 되지 않게 하시고, 날 구원하신 그 엄청난 은혜에 날마다 눈물 흘리는 자 되게 하소서. 주께서 나를 오랫동안 기다려 오신 것처럼 나도 그들에 대하여 오래 참게 하소서.

사랑은 온유하며
 오, 주님! 내 의견을 앞세우기 위한 고집, 나를 드러내려는 욕망, 더 좋은 위치에 서려는 이기심과 지배욕 이런 것들은 결국 자신에 대한 사랑에서부터 비롯됨을 압니다. 주께서 이 땅의 가장 낮은 자리에 오셨던 모습을 배우기 원합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노라는 바울의 고백이 나의 고백이 되어 내가 있는 가정, 직장, 학교 모든 곳에서 하늘의 분위기를 전하며 살게 하소서. 그리스도의 발아래 앉는 것을 제일 높은 자리로 여기고,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곳은 하나님께서 있기를 원하시는 바로 그 자리이게 하소서.

사랑은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오, 주님! 내가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자체에 감사하게 하소서. 호흡할 때마다 당신의 은혜에 감사하는 자가 어찌 남의 잘됨을 질투하며 남의 실수를 떠벌리겠나이까? 나 스스로 의인이라 생각하고 휘두르는 정죄의 칼이 가만 보면 나보다 잘됨을 질투하는 본성이 아닌지요. 불로 연단한 금, 곧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으로 나와 이웃이 화목하게 하소서.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오, 주님! 예수께서 이 땅에 육신으로 사실 때 하늘의 왕이셨으나 한 번도 자랑의 말씀을, 교만의 흔적을 남겨 두지 않으셨습니다. 우주의 왕으로서 어떻게 군림하지 아니하고 높고자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까?
겸손의 성품이 입고 있는 옷처럼 나와 늘 동행하는 은총이 되게 하소서. 나의 의로운 행동들을 숨기며 나에게 주의가 집중되는 듯이 보이는 것은 무엇이든지 피하게 하소서.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오, 주님! 아무리 아름다운 그림이라도 그것이 완성되기 전에는 색체의 혼합에 불과하듯이 남들에 대한 판단을 쉽게 내리지 않는 자 되게 하소서. 바리새주의의 특성인, 냉랭하고 비판적이고 용서를 모르는 정신을 버리게 하소서.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오, 주님! 내게는 소유가 범죄처럼 생각된다.고 했던 간디의 말을 기억합니다. 이 말을 듣고 나는 지금 내가 소유한 것이 무엇 무엇인가 생각나는 대로 적어서 목록을 만들어 보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목록의 반도 쓰지 못한 채 지쳐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미 주신 은혜가 너무도 감사합니다.

사랑은 성내지 아니하며
 오, 주님!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 6:33)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의가 무엇입니까?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약 1:2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이 지배하는 마음이 되어 분노가 발을 들여 놓지 못하게 하소서.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오, 주님! 모든 악을 멀리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내 심중에 기록되어 악한 생각이 발 디딜 틈 없게 하소서. 타인의 결함을 찾아내려는 유혹에 빠질 때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는 말씀을 기억하게 하소서.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오, 주님! 사단이 모든 거짓 권능과 징조와 이적과 불의한 모든 속임으로 활동한 결과,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공언하는 자들의 죄는 차고 넘쳐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바벨론 가운데 한 백성을 가지고 계심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이 내리기 전에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그 죄는 하늘에 사무쳤으며 하나님은 그의 불의한 일을 기억하(계 18:4,5)신다는 경고의 외침을 두려움 없이 전하는 자 되게 하소서.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하며
 오, 주님! 예수님은 진리이십니다. 주께서 나를 죄에서 벗어나 자유케 하셨으니, 세상이 나를 버려도 진리이신 당신과 함께 하는 것을 가장 기뻐하게 하소서. 진리가 사람들에게 전파 될 때 성숙한 믿음과 신앙이 확고하게 될 때 당신과 함께 더욱 기뻐하게 하소서.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오, 주님! 사랑은 아름다운 무지개 같아서 나에게 좋은 것만을 보답해 준다고 어리석게 생각지 말게 하시고 사랑은 희생을 하는 것, 고난의 길을 걷는 것, 십자가를 지는 것임을 깨닫게 하소서. 내게 이르러 오는 장애물들을 만날 때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유일한 힘의 근원이신 당신께 도움을 구하도록 하소서.

사랑은 모든 것을 믿으며
 오, 주님! 주께서 영원토록 나와 함께 거하시기 위해 오늘도 날 다듬고 훈련시키심을 압니다. 훈련의 과정이 불편과 결핍과 쓰라린 고통이 수반되고 마치 하나님께서 떠나신 것같이 느껴질지라도, 캄캄한 밤 일수록 한둘 더욱 찬란히 빛나는 별들이 있는 것처럼 여전히 날 지키시는 당신이 계심을 믿게 하소서. 주님 뜻대로 살기로 결심하는 한,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섭리임을 믿게 하소서.

사랑은 모든 것을 바라며
 오, 주님! 내 모든 필요를 채우시는 분은 당신뿐이십니다. 나의 힘으로 되지 않는 것을 기어코 내가 해보려 애쓰지 말고 전적으로 당신께 모든 것을 바라는 것이야말로 참다운 겸손임을 깨닫게 하소서.

사랑은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오, 주님! 주님의 허락이 없으면 어떤 일도 나에게 생길 수 없음을 믿습니다. 나의 모든 고생과 슬픔, 시험과 시련, 핍박과 궁핍 그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됨을 믿습니다.  온갖 경험과 환경은 우리에게 유익한 것을 전달해 주는 하나님의 사자들임을 믿습니다. 진실로 사랑만이 내 삶의 정신이며  중심이 되게 하소서. 당신이 오시기까지 이 사랑의 마음으로  세상을 이기게 도와주소서.  당신을 사랑함에 눈멀게 하소서.

건강: 생명력을 얻는 비결

 인간은 왜 병이 드는가? 이 질문은 유전자는 왜 망가지는가?라는 질문과 같은 질문이다. 그러므로 유전자가 좋아하는 환경과 싫어하는 환경을 잘 이해하고 나면 건강을 유지하는 비결을 알 수 있게 된다.

 인간이 아름다운 환경과 사랑 속에서 행복을 느끼는 것처럼, 유전자도 그러한 조건 속에서 강해진다. 그러나 오염된 공기와 물, 나쁜 음식, 스트레스 등에는 유전자가 고통을 느끼고 약해지게 된다. 오랜 세월 동안 고통을 당한 유전자는 생명력을 잃어가게 된다. 이럴 때, 세포는 망가지거나 변형되어서 질병이 생긴다.  사고로 다친 경우를 제외하고, 유전자 변질과 관련되지 않은 질병이란 없다. 즉, 유전자를 치료해야 질병을 근본적으로 치유할 수 있다. 그러면 한 번 망가진 유전자는 다시 회복될 수 없는가? 회복될 수 있다. 유전자에는 재생 능력이 있는데 이 재생 능력이 강해지면 모든 질병은 치료될 수 있다. 이와 반대로, 아무리 획기적인 치료법이 개발되었다고 할지라도 유전자의 재생 능력이 회복되지 않는다면 병은 절대로 완치될 수 없다.

세포 변형과 그 회복 가능성
 그렇다면 유전자는 언제 회복되고 생성되는가? 생명적인 환경하에서만 회복되고 생성될 수 있다. 깨끗한 음식, 맑은 공기, 행복하고 감사한 마음, 적당한 운동과 같은 생명적인 에너지가 외부로부터 공급될 때 유전자는 매우 빠른 속도로 재생을 시작한다. 정상 세포의 유전자가 변질하여 암세포로 변하기까지 15년 이상이 걸렸더라도 암세포가 다시 정상 세포로 회복하는 데는 몇 개월이면 충분하다. 유전자가 회복되는 속도와 시간은 환자가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생활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진다. 생명적 환경하에서는 유전자가 재생될 뿐 아니라 우리 몸의 필요에 따라서 없던 유전자도 생성되게 된다.

 위암, 간암, 폐암, 유방암, 췌장암, 전립선암, 피부암 등과 같은 암의 종류는 무려 250여 가지에 달한다. 우리 몸의 어느 부위에서도 암은 발생할 수 있다. 암은 외부로부터 병균이 침입해서 생기는 병이 아니라 내 몸속의 세포가 암세포로 변해서 생기는 병이다. 정상 세포가 암세포로 변하는 과정은 정상적인 성격을 가진 사람이 주위의 나쁜 환경과 맞서다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서서히 나쁜 환경에 물들어가게 되어 그 성격이 비틀어지고 악하게 변하는 과정과 매우 유사하다. 이와 마찬가지로 세포도 환경이 좋아야 정상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

 세포는 싱거운 음식물을 좋아하고 깨끗한 공기를 원하는데, 세포의 주인인 인간이 맵고 짠 음식을 좋아하고 공기가 오염된 지역에 살면서 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면 세포는 정상적인 상태를 유지하기 매우 어렵게 된다. 그 결과 세포는 비정상적으로 변질하게 되는데 이것이 암세포이다. 정상 세포가 암세포로 되기까지 간암과 폐암, 위암, 췌장암 등은 대개 15~20년이 걸리고, 유방암은 8~10년, 대장암은 5~10년이 걸린다. 암세포는 자신이 좋아하는 환경이 제거되지 않는 한 끊임없이 번식해 몸 구석구석으로 암세포를 퍼뜨리게 된다.

 암을 극복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밖에 없다. 하나는 정상 세포와 암세포를 정확하게 구별하여 암세포만을 죽일 수 있는 유일한 항암 물질인 T임파구를 강하게 만드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몸속의 세포들에게 생명적인 환경을 제공해 주는 방법이다. 그런데 세포에게 생명적 환경을 조성시켜 주면 T임파구도 강해지고 암세포들도 정상을 찾아간다는 사실이 현대 과학에 의해 밝혀졌으므로 우리가 생명적 환경하에서 산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만드시고 인간에게 가장 적합한 건강의 원칙들을 성경에 기록해 두셨다. 현대 과학은 인간이 성서적 건강 원칙들에 순종하여 살아갈 때 최고의 건강을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세포에게 생명적 환경을 조성시켜 준다는 말은 결국 세포를 구성하는 유전자에게 생명적 환경을 갖추어 준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유전자에게 생명력을 가져다주는 조건만 조성해 주면 유전자가 다시 생명을 얻고 재생되는 것일까? 다시 말해서, 맑은 물과 식물성으로 준비된 깨끗한 음식물, 운동, 맑은 공기 등과 같은 요소들만 제공해 주면 망가졌던 유전자가 다시 생명을 얻고 활동하기 시작할까? 우리는 다음과 같은 실험을 통하여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엿볼 수 있다.

어미 쥐와 새끼 쥐의 관계
 과학자들이 쥐에 대해 실험을 하다가 우연히 발견하게 된 연구 결과가 있다. 쥐는 새끼를 낳으면 어미 쥐가 새끼 쥐들을 열심히 핥아 준다. 새끼 쥐를 여러 마리 낳더라도 번갈아 가면서 부지런히 새끼 쥐들을 핥아 준다. 왜 어미 쥐는 새끼 쥐들을 핥아 줄까? 과학자들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원했다. 그래서 열 마리의 새끼 쥐들 가운데 다섯 마리를 어미 쥐에게서 떼어 놓았다. 그런 후에 두 그룹의 새끼 쥐들에게 똑같은 음식을 주면서 성장 과정을 지켜보았다. 결과는 놀라운 것이었다. 어미 쥐와 함께 있던 다섯 마리의 쥐들은 성장했는데 어미 쥐와 분리시켜 놓았던 새끼 쥐들은 더 성장하지 않았다. 음식만 준다고 해서 성장하는 것은 아니다. 성장 호르몬이 체내에서 분비되어야 비로소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

 과학자들이 어미와 분리된 새끼들의 피를 뽑아 호르몬 수준을 검사해 보았더니 성장 호르몬이 매우 많이 저하되어 있었다. 반대로 어미 쥐와 함께 있으면서 어미 쥐가 열심히 핥아 준 새끼 쥐들은 성장 호르몬이 아주 많이 분비되어 있었다. 이 실험은 사랑이 성장 호르몬의 생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이 사실을 과학적으로 풀이하면 어미 쥐가 핥아 주면 성장 호르몬을 생산하는 유전자가 활성화되어 성장 호르몬이 많이 분비된다는 말이다. 반면에 사랑을 많이 받지 못한 쥐들은 성장 호르몬 유전자가 활동하지 않게 되어 성장을 멈추어 버리고 만 것이다. 결국, 새끼 쥐의 유전자 활동은 어미 쥐의 사랑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그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과학은 사랑을 에너지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과학은 숫자를 의지하지, 사랑과 감사와 은혜와 같은 것은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과학은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과학자들은 사랑의 작용을 이렇게 해석하였다. 뭔가 피부를 계속해서 자극해 주면 모세 혈관이 자극을 받아 확장되고 그 결과 혈액 순환이 잘되어 성장 호르몬이 많이 나오는 현상이 발생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입증하기 위하여 어미 쥐의 혀와 비슷하게 생긴 붓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따뜻한 물에 적신 후에 새끼 쥐들의 몸을 부드럽게 붓질해 주었다. 그렇게 했더니 새끼 쥐들에게서 호르몬이 나왔다.그러나 3~4일 후에 과학자들은 실망하고 말았다. 왜냐하면, 성장 호르몬의 분비가 중단되었기 때문이었다. 처음 붓질을 해 주었을 때는 조건반사 작용에 의해서 성장 호르몬이 잠시 분비되었지만, 그것은 단순한 접촉이었다. 어미 쥐의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사랑의 에너지가 새끼 쥐에게 전달되어야 성장 호르몬이 지속적으로 분비되는 것이다.

 과학자들은 이러한 결과를 보고도 믿지 못했다. 왜냐하면, 사랑은 과학으로 증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랑 때문에 성장 호르몬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어떤 이유가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래서 이번에는 어미 쥐와 떨어진 새끼 쥐들에게 성장 호르몬을 주사했는데 결과는 더욱 놀라웠다. 성장 호르몬을 피 속에 넣어 주었는데도 불구하고 새끼 쥐들은 성장하지 않았다. 분명히 혈중 호르몬 수치는 높아졌는데 세포들이 성장 호르몬을 받아 주지 않으니 자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우리는 이 실험을 통하여 매우 귀중한 진리를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일반적인 접촉과 성장 호르몬 주사로는 성장 호르몬 유전자가 활성화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또한, 동일한 조건하에서 동일한 음식을 섭취하고 동일한 양으로 운동하더라도 그 마음속에 감사와 기쁨이 없으면 물리적 환경들이 유전자의 활성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유전자를 자극하여 활성화하는 것을 우리는 생명력이라고 부를 수 있다. 사랑의 힘은 과학이나 수학으로 측정할 수 없지만, 사랑의 에너지는 분명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세포가 재생된다는 것은 새로운 세포가 생긴다는 것이 아니라 기존에 있던 손상된 세포가 다시 살아난다는 뜻이다. 그렇게 되려면 굉장한 에너지가 필요한데, 그 에너지는 세포의 외부로부터 들어와야 한다.  이때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에너지를 생명력이라고 부른다. 환자들은 이 생명력을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사랑, 은혜, 감사와 같은 에너지는 우리 스스로 억지로 만들어 내지 못한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이 변화되어야만 생기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이 사랑스러워져야 하고, 은혜로워야 하며, 감사하는 정신이 있어야 한다. 환자들이여,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하라. 세포를 만드시고, 유전자를 활성케 하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인간의 마음속에 넣어 주시는 사랑과 은혜와 감사의 정신이다.

 

창조 교실: 혼자서는 볼 수 없는 눈(eye)

 눈은 인체 중에 아주 신비로운 기관입니다. 그러나 눈은 혼자만으로는 볼 수 없습니다. 그것은 홀로 작동되지 않으며, 다른 기관들과 협력이 되어야만 한답니다. 즉, 시세포들이 시신경을 통해서 데이터들을 빠르게 전송해야 하고, 뇌(brain)는 입력되는 데이터들을 적절하게 조합해서 정상적인 영상이 보이도록 빠르게 처리해야만 보는 것이 가능하답니다.
 
 뇌의 데이터 처리 특징은 놀라운 것으로서, 이것은 눈이 빠르게 움직일 때(1초에 두세 번씩), 줄들이 흐려지지 않고 일정한 상이 보이도록 합니다. 이것을 지각 안정성(perceptual stability)이라고 부릅니다.

 럿거스(Rutgers) 대학의 연구팀은 어떻게 뇌가 이것을 달성하는지를 연구하였습니다. 100년이 넘게 과학자들은 지각 안정성은 흐려진 이미지를 차단하는 뇌에 의해서 일어난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짧고 빠른 눈 운동(깜빡임) 동안에 효과적으로 눈이 잠시 멀게 된다고 생각했었지요.
 
 럿거스 대학의 연구는 그 주장이 틀렸다는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뇌는 그 이미지를 차단하는 대신에 그 데이터들을 처리하고 있었던 것이 연구에 의해 밝혀진 사실입니다. 만약 사람들이 일 초에 두세 번 효과적으로 장님이 된다면, 이전 이미지에다가 다시 새로운 이미지를 재설정하는 것이 몹시 어려울 것입니다.
 
 연구에 의하면, 보기 위해 입력된 정보를 처리하는 뇌의 처리 과정은, 뇌가 연속적인 이미지들을 더 쉽게 소화하는 것을 허락하면서 지각 안정성을 돕는다고 합니다. 시각이 생겨나려면 고도로 정교한 렌즈, 시세포, 안구, 망막, 뇌뿐만이 아니라, 영상 처리에 요구되는 정보 프로그램이 같이 협력하여야만 합니다.

 이것은 시각이 돌연변이들과 자연선택에 의해서 우연히 생겨났다는 진화론자들의 주장을 잠잠하게 만들고 있지요.생물이 볼 수 있으려면 각 특별한 기관들과 시스템들이 모두 함께 작동되어야 한답니다. 이러한 것들이 모두 우연히 생겨났다는 진화론적 설명은 너무나 허무맹랑한 이야기이지요.
 
 사람은 정확한 망막 구조와 정확한 무의식 영상 처리 시스템을 통한 최고의 시각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미세하게 조절된 정교한 시스템은, 놀라운 지혜의 창조주가 설계하셨을 때에만 가능한 것이라는 사실을 바보가 아니라면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당신은 무엇을 볼 때마다 그것을 보게 하신 창조주 하나님께 감사드리나요?
 
 

신앙: 1부 - 왜 그들이 믿음의 조상들인가?

 믿음의 장으로 잘 알려진 히브리서 11장에는 많은 믿음의 조상들 이름이 거론되어 있다.  말세를 사는 우리에게 경계로 기록된 성경 히브리서 11장 믿음의 용사들의 믿음과 성품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용기를 준다.  그들의 믿음과 시험을 이긴 승리의 경험들은 마지막 선악의 대쟁투에서 승리를 거두어야 할 우리에게 큰 귀감이 되고 있다.  이번 호 신앙 기사에서는 믿음의 조상들 경험과 마지막 성도들의 영적 경험과의 관계를 조명해 보았다. 큰 은혜가 되길 바란다.    - 편집실 -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 11:1~3)바이올린을 만드는 한 장인이 있었다. 그는 최상의 바이올린을 만들기 위해 질 좋은 나무를 구하려고 총력을 기울였다. 그는 질 좋은 외국산 나무를 수입하기도 하며 애를 썼지만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원하는 바이올린을 만들 수 없었다.

 어느 날, 그는 수목 한계선(고산 및 극지에서 수목이 존재할 수 있는 극한의 경계선)에서 어렵게 자란 나무 한 그루를 발견했다. 그 나무는 옹이가 많고, 이리저리 뒤틀린 모양의 나무였다. 겨울의 매서운 바람과 산꼭대기에서 부는 황량한 비바람을 맞으며 자라다 보니 그 모양이 곧지 않았지만 단단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 장인은 그 나무로 바이올린을 만들었다. 그 바이올린은 그때까지 그가 만들었던 어떤 바이올린보다도 더 훌륭한 소리를 내었다.

 어느 시대를 살았던 그리스도인들보다 마지막 시대에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더욱 강한 믿음이 필요하다. 우리에게 진정한 믿음을 가르쳐 주기 위해 기록된 믿음의 장인 성경 히브리서 11장에는 참된 믿음을 가졌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그런데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리는 그 사람들의 생애와 인생의 이야기들을 살펴보면, 그들이 살았던 삶이 우리와는 전혀 다른, 어떤 실수나 범죄의 기록이 전혀 없는 완벽한 삶이었거나, 보통 사람은 살 수 없는 어떤 이질적인 삶의 기록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곧, 믿음의 조상이었던 그들도 우리와 똑같이 인간의 한계성과 연약성을 지녔던 사람들이었고, 실수와 좌절과 죄를 지어 쓰러진 경험이 있었던 사람들이었던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우리와 달리 훌륭한 믿음의 조상으로 성경에 기록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이 당한 시험과 시련과 고난의 도가니 속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믿음의 훈련을 받았으며, 시련과 고난이 올 때 겸손한 믿음과 신뢰로써 하나님께 굴복하였다는 것이다. 또한, 그들의 공통점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처럼 하여 인내하고 참았다는 것이며,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에 더 비중을 두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분을 보는 것처럼 살았으며, 믿음의 눈으로 그분을 바라보고 사랑하고 신뢰하였다. 그리하여 끝내 그 단련된 정금 같은 믿음으로 하나님을 위해 죽기까지 충성하는 증인들이 되었다. 결국, 그들을 연단하시고 인도하신 하나님의 손길을 의지했던 그들의 단순한 믿음이, 생애의 고비마다 나타났던 고난의 연속들을 견디어 낸 인내가 그들을 훌륭한 믿음의 조상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히브리서 11장 39절과 40절에는 매우 의미심장한 구절이 나오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아무리 그렇게 훌륭한 믿음의 조상과 선조들이 있다 해도 마지막 세대인 우리가 없으면, 즉 마지막 세대인 우리가 온전한 믿음을 소유하고 있지 않으면, 세상의 죄 역사가 마칠 수 없다고 언급되어 있는 것이다.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마지막 세대인 우리에게는 막대한 사명이 주어져 있는데, 그 사명은 다름이 아닌, 성경에 기록된 믿음의 조상들의 믿음을 능가할 만한, 더 강하고 담대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며, 그 믿음으로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증인으로 서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평안한 때에 더 큰 믿음을 배우고자 노력해야 하며,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증인이 되는 데 필요한 대장부다운 강한 믿음을 가지도록 지금 준비하며 열렬히 기도해야 한다. 수목 한계선에서 비바람과 추위를 견뎌 낸 꿋꿋한 나무가 훌륭한 악기로 탄생한다. 땅속에 묻혀 있는 보통 석탄이 섭씨 550도 이상이라는 높은 온도와 1평방 인치당 750톤의 압력을 받게 되면 아름다운 다이아몬드로 만들어진다.

 고통스러운 세상에서 모진 시련과 어려움을 겪지만, 우리를 믿음의 용사로 꼴 지우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끝까지 그분을 신뢰하고 따라갈 때, 우리 역시 하나님의 영광을 세상에 증거하고 드러내며, 하나님을 위해 죽기까지 충성하는 믿음의 용사들이 될 수 있다. 지금부터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조상들이 겪었던 시험과 시련의 생생한 현장들을 마음의 눈으로 함께 방문하며, 그들의 믿음의 경험들과 마지막 세대를 사는 남은 무리가 가져야 할 믿음의 관계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신앙: 2부 - 최초의 순교자 아벨의 순종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히 11:4)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 2:10) 히브리서 11장에서 아벨은 제일 먼저 믿음의 사람으로 이름을 알리고 있다. 아벨은 죽기까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 사람의 대표로 기록되어 있다. 마지막 환난을 통과할 성도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는 자들이며, 하나님의 뜻과 계명에 순종하기 위해 생명을 바치는 사람들이다. 아벨의 믿음과 순종을 살펴보면서 우리의 결심을 굳게 하자.

1) 서로 다른 두 형제 가인과 아벨

 범죄 후, 엄청난 두려움과 뼈아픈 후회 그리고 고통 속에서 떨고 있던 아담과 하와에게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구속의 계획을 발표하셨다.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구속주로서 인간으로 탄생하실 것이라는 복된 소식은, 죄를 지어 영원한 멸망으로 치달아 갈 수밖에 없는 그들에게 놀라운 소망을 주었다. 그리하여 아담과 하와는 그들에게서 태어나는 아들이 구세주가 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아담의 두 아들 가인과 아벨은 품성이 현저하게 달랐다. 아벨은 믿음과 순종으로 하나님께 충성하는 정신을 가졌으며, 타락한 인류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를 보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구속의 소망을 받아들이는 반면, 가인은 반역의 감정을 품었으며, 아담의 죄로 인하여 땅과 인류에게 선고된 저주 때문에 하나님께 불평하는 정신이 있었다. 그는 자기 마음과 정신이 사단이 가졌던 같은 방향으로 흐르도록 허용하였다.

 아담이 시험을 받았던 것같이, 이 형제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지를 입증하기 위한 시험을 받았다. 그 시험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제사를 드리는가 하는 순종의 시험이었다. 가인과 아벨은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준비와 그분께서 제정하신 제사 제도에 대하여서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들은 희생 제물을 드림으로 이 제물이 예표하는 구주에 대한 믿음을 표현하고, 동시에 죄의 용서를 받도록 그분께 전적으로 의지해야 함을 인정한다는 것과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방법을 따라 제사를 드리는 것은 하나님의 구속의 계획에 순응하고 그분의 뜻에 순종한다는 증거가 됨을 알고 있었다. 피 흘림이 없이는 속죄가 있을 수 없었다. 그들은 가축의 처음 난 것을 희생 제물로 바침으로써, 약속된 속죄, 곧 그리스도의 피에 대한 그들의 믿음을 나타내어야 했다.

2) 서로 다른 제사

 두 형제는 그들의 제단을 같은 모양으로 쌓고 각기 제물을 가져왔다. 아벨은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양으로 희생 제물을 드렸다.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창 4:4)다.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 제물을 살랐다. 그러나 가인은 주의 직접적이고 분명한 명령을 무시하고 과일만을 제물로 드렸고, 그것이 가납되었음을 보여 주는 아무런 표적도 하늘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가인은 약속된 희생과 희생 제물의 필요성에 대하여 마음속으로 불평과 불신을 품고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렸다. 그의 봉헌물에는 죄에 대한 참회가 표시되어 있지 않았다. 그는 자기의 공로를 가지고 나오려고 하였다. 그는 양을 가져와서 그 피와 함께 제물을 드리려 하지 않고 자기의 소산, 자기 노력의 생산물을 드리고자 하였다.가인은 제단을 쌓고 희생을 가져오는 점에서는 하나님께 순종하였다. 그러나 그는 부분적인 순종만을 드렸다. 가장 요긴한 부분, 즉 구세주의 필요에 대한 인정을 제외했다.

 아벨은 구속의 원칙을 파악하였다. 그는 자신이 죄인인 것과 죄와 그 죄의 형벌인 죽음이 그와 하나님과의 교통을 가로막는 것을 이해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희생된 제물의 생명을 드림으로, 범해진 율법의 요구를 승인하였으며, 흘려진 피를 통하여 미래의 희생, 즉 그리스도의 갈바리 십자가의 희생으로 속죄가 이루어질 것과 그 속죄를 의지함으로 그가 의로워질 것을 믿었다. 가인도 아벨과 같이 이 진리들을 배우고 받아들일 동일한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아벨은 믿음과 순종을 선택하였고 가인은 불신과 반역을 선택하였다. 모든 문제는 선택에 달려 있었다.

3) 핍박하는 자와 핍박받는 자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딤후 3:12)  가인은 그의 제물이 가납을 받지 못하자 하나님과 아벨에게 분노하였다. 이성과 양심은 그에게 아벨이 옳다고 말했지만, 지금까지 자기 말을 들어 오던 동생이 건방지게 형을 권고하고 또 자기의 반역에 동조하지 않자 격노하여 가인은 그의 동생을 살해하였다. 아벨이 무슨 잘못을 범했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의 아우의 행위는 의로(요일 3:12)웠기 때문이었다. 아벨의 순종과 확고부동한 신앙생활은 가인에게 끊임없는 견책이었다.

 아벨의 살해는 뱀과 여인의 후손, 곧 사단과 그의 부하들과 그리스도와 그분의 백성 사이에 있는 증오심의 실례였다. 아벨의 거룩한 생애는 사람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사단의 주장을 반박하였다.  악한 사단의 충동을 받은 가인은 그가 아벨을 지배할 수 없다는 것을 보았을 때에 크게 노하여 아우를 살해했던 것이다.
 
 의와 죄, 사랑과 증오, 참과 거짓 사이에는 억제할 수 없는 갈등이 있다. 박해의 성격은 시대에 따라 변하지만, 그 원칙이나 그 아래 깔린 박해의 정신은 아벨 시대 이후로 지금껏 주님의 택한 자들을 살해해 온 사단의 정신이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순종한 아벨은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다.

4) 현대에도 계속되는 두 제사
 가인과 아벨이 드린 두 제사의 현저한 차이점은, 현시대에 존재하는 두 종류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나타나고 있다. 영적인 면에서의 두 제사에 대하여 함께 살펴보자.

1. 가인의 제사
 현대의 많은 그리스도인이 드리는 제사는 가인의 제사이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구원의 방법, 곧 하나님께서 성경에 제시하신 참 복음이 아닌 인간이 만든 복음의 길을 따라가므로 가인의 제사를 드리고 있다. 현대 기독교에서 범람하는 반쪽 복음인 값싼 은혜의 복음은,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구원의 복음이 아닌, 인간의 유전과 뜻을 따라 인간의 마음에 맞도록 고안된 복음이다.
 
 현대의 많은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대신 자신에게 쉬운 길을 따르며,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구원의 방법보다 자신에게 맞는 구원의 방법을 스스로 고안해 내어 따르고 있다. 마치 가인이 자신의 맘에 맞는 희생 제물을 가져와 하나님께 드렸듯이, 현대의 기독교인들은 자신의 맘에 맞는 대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있다.

 성경이 제시하는 참 복음은 반쪽만이 아닌, 전체적인 복음이다.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을 뿐만 아니라, 구원하시는 능력이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뜻과 계명을 순종하게 하며, 또한 지속적인 성령의 역사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음속에 임재해 계시므로 죄를 미워하고 승리하는 생활을 살게 하는 것이 참된 복음이다.
 
 은혜로만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치며, 생애의 개혁에 대한 강조가 없는 것, 또 거듭남과 세상의 것들을 버리는 일에 대한 강조가 없는 것,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일과 자신의 뜻을 포기하고 하나님께 굴복하며 사는 것과 성품의 열매를 맺는 생애를 살아야 함을 강조하지 않는 가르침은 가짜 복음이다.

 순종이 없는 생애는 가인이 드린 불순종의 제사와 같다. 진정한 복음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신앙의 공허함을 달래려고 오히려 행위에 의존하는 경향들이 생기는데, 곧 새벽 기도회에 참석하는 일, 선교 연금을 많이 내거나 교회들을 세우는 일, 거짓 성령의 흥분 속에 들뜨는 일 등등의 행위들에 의해서 신앙의 척도를 재고 인간적인 만족감을 얻는 일들이 그것이다.
 
 교회에 나가지 않으면 하나님께 형벌을 받지 않을까, 잘못하면 지옥에 가게 되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동기에서 하는 신앙생활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 세상의 모든 거짓 종교들은 그렇지 않은 것 같지만, 심층적으로 분석해 보면, 사람은 자기의 노력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원칙에 기초를 두고 있는 것이며, 마치 가인의 제사처럼 하나님께 가납 받지 못할 만한 제사들을 드리고 있는 것이다.

2. 아벨의 제사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구원의 방법을 따르는 사람들은 아벨의 제사를 드리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참된 복음의 능력을 체험하는 사람들로서, 자신의 죄를 구속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와 사랑이 매우 고맙고 감사해서 모든 것을 바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뜻을 순종하고 따라가는 사람들이다. 아벨이 감사함으로 하나님의 제정하신 방법대로 제사를 드린 것같이, 이 사람들은 그 길이 아무리 어렵더라도 참된 복음이 제시하는 구원의 방법을 온전히 순종하며 따라가는 사람들이다.
 
 또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하시는 피가 모든 죄를 회개하게 하고 씻을 뿐만 아니라, 죄를 미워하게 하고, 다시는 의도적으로나 고의적으로 하나님께 반역하거나 죄를 짓지 않게 하는 힘을 준다는 것을 생애에서 철저하게 경험하는 사람들이다. 그리하여 생애에는 죄를 승리하는 일과 거듭남이 지속되는 경험이 나타나며, 성령의 열매가 생애와 성품에서 주렁주렁 열리게 된다.

 믿음의 조상으로 기록된 아벨이 예표하듯이,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뜻과 법과 계명에 순종하는 자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고 죽기까지 충성하는 하나님의 참 백성이 나타날 것이다. 그들은 계시록에 나오는 마지막 남은 무리로서, 아벨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다가 생명을 바쳐서 순교했듯이, 자신의 생명을 바치면서까지 하나님의 뜻과 계명에 순종하는 자들이다.
 
 이들은 짐승을 경배하지 않고, 짐승의 표를 받지 않으며,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구원의 방법과 복음을 그대로 따르는 자들인데, 이런 사람들을 성경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계 14:12)라고 부르고 있다. 마지막 남은 무리에 들어가도록 더욱 믿음으로 정진하자.

신앙: 3부 - 살아서 승천할 사람들의 대표 에녹의 사랑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히 11:5)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 하는 믿음뿐이니라.(갈 5:6) 마지막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짐승의 표 환난과 많은 핍박과 어려움을 견디고 하나님의 증인이 되어야 하는 사명이 주어져 있다. 그런데 어떤 어려움과 고난 속에서라도 끝까지 하나님을 위해 충성할 수 있게 하는 비결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이다.
 
 하나님과 사랑에 빠진 사람, 하나님의 사랑이 베푼 구원의 계획에 한없이 감사하는 사람, 주님과 동행하기 좋아하는 사람, 그분 한 분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끝까지 하나님께 충성하며 마지막 시련과 환난과 고난을 잘 견딜 수 있을 것이다.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 중에 하나님을 너무나 사랑하여 끈질긴 믿음으로 그분과의 동행을 끊이지 않고 계속했던 사람이 나온다. 하나님께 대한 에녹의 사랑을 배워 보자.

1) 두 무리의 사람들  
 아벨이 죽자,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또 다른 신실한 아들 셋을 주셔서 그들을 위로해 주셨다. 셋은 하나님께 충성하며 믿음의 계보를 이어받는 신실한 조상이 되었다.  그 당시 사람들은 두 무리로 갈라져 살고 있었다. 가인의 자손들은 먼 곳으로 가서 계속하여 하나님께 반역하고 불순종하며 살던 반면, 셋의 자손들은 하나님께 충성하며 순종하는 삶을 살았다.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은 얼마 동안 서로 떨어져서 살았는데, 가인의 씨족들과 셋의 자손들은 점차로 섞이기 시작하였고, 후에 이 교제는 최악의 결과인 홍수를 초래하였다. 홍수 이전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최초의 사람 아담과 함께 살 기회가 있었으므로 그에게서 하나님과 창조에 대하여 가르침을 받았을 것이다.

 아담은 자신이 타락한 이야기와 눈물겨운 회개와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계획을 이야기하며 간절히 그들을 권고했겠지만, 많은 사람은 아담의 권고를 무시하고 가인의 길을 따라가기를 좋아했을 것이며, 타락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그들에게 있던 뛰어난 체력과 지력으로 악을 도모하여 이 세상은 죄악이 창궐하게 되었다. 성경을 읽어 보면 그 당시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창 6:2)고 그들과 통혼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므로 이를 보아 셋의 자손 중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여인들과 결혼하므로 죄에 빠지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을 신실히 믿던 셋의 자손들은 타락한 자들과 섞임으로 정신과 행동에서 가인의 자손들과 같이 되었고, 일곱째 계명을 무시하고 그들은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았다. 그리하여 신실하던 하나님의 백성이 타락하고 세속적 번영과 향락에 몰두하여 하나님의 계명을 등한히 하게 되었고, 죄는 치명적인 문둥병처럼 세상에 널리 퍼지게 되었던 것이다. 

2) 에녹의 동행
 홍수를 불러올 만큼 죄악이 가득 차고 관영하던 세상에 하나님을 대표하는 순결하고 아름다운 품성을 소유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 사람은 바로 에녹이었다. 에녹은 셋의 6대손이었다. 성경은 에녹에 관하여, 그가 65세 때 아들을 낳았고, 그 후 3백 년이란 긴 세월을 하나님과 동행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에녹은 아들 므두셀라가 태어난 후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더 깊이 느끼고, 영적으로 더 높은 경험에 이르렀으며, 하나님과 더 친밀한 교제 가운데 들어갔다. 그 자신이 아버지가 되어 아들에 대한 깊은 애정과 부드러움을 마음에 느꼈을 때, 그는 그분의 아들을 사람들에게 선물로 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놀라운 사랑과 그분을 어떻게 믿고 신뢰해야 하는 이치를 그의 체험 속에서 깨달았던 것이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한 것은 황홀경 속에서나 이상 중에서 가만히 명상만 하며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그의 일상생활의 모든 일을 행하는 가운데서였다. 가정에서와 사회생활에서,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 시민으로서 그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주님과 동행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무한하고 측량할 수 없는 사랑을 밤낮으로 명상하였으며, 하나님과 사랑의 동행을 지속하였다.
  
 에녹의 마음은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였고, 이 거룩한 동행은 3백 년간 계속되었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거나 예수님의 재림이 임박함을 알게 될 때, 많은 그리스도인의 믿음이 훨씬 더 열렬하고 헌신적이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에녹은 재림이 먼 시대, 장래를 알지 못하던 시대에 살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믿음은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강해지고, 하나님께 대한 그의 사랑은 더 열렬하였다. 

3) 에녹 생애의 우선권
 그 세대 사람들은 자원이 풍부한 땅에서 살았기 때문에, 풍성한 물질과 재료로 크고 멋있는 집들을 지을 수 있었을 것이며, 서로 더 높은 집을 건축하여 꾸미고 서로 경쟁하는 일에 열심이었다. 그들은 금은보석을 모으거나, 이 땅에서 소유물을 축적하는 데 관심을 두지 않는 에녹의 어리석음을 조롱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에녹의 마음은 영원한 보화에 있었다. 그는 늘 하늘 도성을 바라보았고, 그의 생각과 마음은 하늘에 있었다.
 
 그는 이 세상의 것에는 관심이 없었고, 세상의 죄악이 너무나 싫었으며, 세상의 사악함이 많으면 많을수록 하나님이 계시는 곳을 사모하는 마음이 열렬해졌다. 지상에 살면서도 에녹은 믿음으로 빛의 영역에서 살았다. 에녹 생애의 우선권은 하늘의 사물에 대한 것이었다. 에녹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설교하면서 눈물로 그들의 악행을 버리라고 간청하였다. 또 곳곳에 행해지는 죄악을 책망하고 범죄자들에게 분명히 심판이 내릴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활동적인 생활 가운데서도 에녹은 하나님과의 교통을 꿋꿋이 유지하였다. 경건하지 않은 자들을 피하여 에녹은 그들과의 지속적 교제를 피하고 한동안 한적한 곳에 머물면서 많은 시간을 묵상과 기도에 전념하였으며, 영혼의 호흡인 기도가 끊이지 않았다. 
 
4) 에녹의 승천
 세월이 흐름에 따라 인간의 죄악의 조수는 점점 깊어졌고 하나님의 심판의 구름이 세상에 점점 짙게 드리워졌다. 그러나 신앙의 증인 에녹은 그의 길에 굳게 서서 경고하고 간청하고 탄원하고 죄악의 조수를 밀어내어 복수의 심판을 멈추게 하려고 노력하였다. 3백 년 동안 에녹은 하늘과 조화되기 위하여 영혼의 순결을 추구해 왔었다.
 
 그는 3세기라는 긴 세월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였다. 날마다 그는 더 밀접한 연합을 바랐고, 그 교통은 점점 가까워졌으며 마침내 하나님께서 그를 그분 곁으로 데리고 가셨다. 그는 인간으로서 하늘에 들어간 첫째 사람이 되었다.

 에녹은 죽음을 맛보지 않고 살아서 승천할 성도들을 대표한다. 에녹의 경건한 품성은 그리스도께서 재강림하실 때에 땅에서 구속함을 얻을(계 14:3) 자들이 달성해야 할 거룩한 상태의 표준을 제시한다.  마지막 재림 전에 살아서 하늘로 승천할 사람들은 에녹이 하나님에 대하여 가졌던 사랑과 동행을 체험해야 한다.
 
 에녹의 생애는, 세상에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고 사는 경험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살아 있는 증거로 다가온다. 우리도 이 죄악 세상에 살면서 예수님과 끊임없이 동행하고, 그분의 임재 속에 사는 경험을 해야 할 것이다. 만일, 우리가 에녹처럼 주님과 동행한다면, 그리고 우리 마음의 보좌에 주님께서 늘 좌정해 계시는 경험을 한다면, 우리가 어떻게 악한 죄를 좋아하겠으며, 어떻게 이 세상 사물에 마음을 빼앗길 수 있겠는가?

 에녹처럼 하나님의 사랑이 밤낮 우리 명상의 주제가 된다면, 그리고 다함 없는 천부의 사랑에 젖어 감사하는 생활을 산다면, 어떻게 우리 마음속에 세상 욕심이 자리 잡을 수 있고, 교만과 이기심과 악한 욕망이 머리를 들 수가 있겠는가! 하나님께서 에녹을 살아서 승천하도록 하신 것은 마지막 때를 사는 성도들에게 용기 주시고 모본을 보여 주시려고 그렇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마음 깊이 체험하고 주님과 동행하는 사람들은, 앞에 어떤 고난과 시련과 환난이 와도 그 시험을 감사함으로 굳게 견딜 것이며, 하나님께 대한 그 충성과 사랑이 환난을 넉넉히 견디고도 남게 할 것이다. 하나님께 대한 그런 사랑을 가진 사람들만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자 생명을 바칠 것이며, 모든 환난을 이기고 살아서 하늘로 승천할 것이다.

신앙: 4부 - 잉태하는 기적을 이룬 사라의 믿음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앎이라.(히 11:11)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 2:17)

 사람들은 흔히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아름다운 얼굴을 가졌던 여자로만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과는 달리 사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남편과 함께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는 신실한 믿음을 가진 여인이었으며, 그리하여 믿음의 조상으로서 그녀의 이름이 성경 히브리서 11장에 올려지는 영광을 얻었다. 로마서에는 사라와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하여 이렇게 기술되어 있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 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롬 4:18~22)

1) 잉태하는 기적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너의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많으리라고 약속하셨건만, 만국의 아비라는 그의 이름의 뜻이 무색하게도 100살이 넘도록 그에게는 자식이 없었다. 이제 아브라함은 늙었고, 사라도 생산할 능력이 없어진 늙은 여인으로 변했다. 그들의 몸은 생산과는 거리가 먼,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늙은 몸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위기는 하나님의 기회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방법으로 얻은 아들 이스마엘이 아닌, 사라의 몸에서 친히 난 아들이 아브라함의 후사가 될 것이라고 거듭 강조하셨다.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그 이름을 사라라 하라.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네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열국의 어미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열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아브라함이 엎드리어 웃으며 심중에 이르되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생산하리요 하고.(창 17:15~17) 

그가 가라사대 &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아브라함과 사라가 나이 많아 늙었고 사라의 경수는 끊어졌는지라.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요?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창 18:10~14)

 위의 성경 절을 보면, 처음에 아들을 낳으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들은 아브라함과 사라, 두 사람이 모두 웃은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불가능한 것에서 가능한 것을 행하시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을 수 없었다. 사람들은 흔히 사라를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고 웃은, 믿음이 없는 여인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사라를 믿음의 사람으로 기록했으며, 사라의 믿음에 대하여 아브라함과 같이 로마서에 언급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록 성경에 그들의 심정, 특히 사라의 심정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이루어진 일을 보아 결과를 유추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아마 처음에 사라는 늙은 자신의 몸에서 아들이 태어날 것이라는 여호와의 말씀이 하도 기가 막히고 믿어지지 않아서 웃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호와와 사자들이 떠난 다음에 그녀는 주님의 말씀을 곰곰이 되새겨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이 들었을 것이다. 만일, 자신의 불신으로 인해서 하나님 약속의 성취가 무산된다면 어찌할 것인가! 만일, 그녀의 불신 때문에 여호와께서 축복하시지 않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아마 사라는 엎드려 하나님 앞에 간절히 간구하였을 것이다.

 여호와여!   계집 종의 믿음 없음을 보지 마시고, 저의 불신을 용서하시고 잉태의 기적을 이루어 주시옵소서! 당신의 능력을 제가 믿나이다! 얼마나 그녀의 간구가 처절하고 간절했을 것인가! 드디어 그녀의 기도는 가납함을 받았고, 죽은 것 같은 태에서 잉태되는 기적이 일어났다. 만일, 그녀가 끝까지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않았더라면, 아이를 낳을 수 없었을 것이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드디어 믿음의 공과를 잘 배우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의 믿음 없음.에 대한 기록이 믿음 있음.이라는 기록으로 대체되어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는 영광을 얻었던 것이다.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롬 4:19~21)

2) 기적을 믿는 믿음

 믿음의 장에 특별히 사라의 믿음과 잉태함에 대하여 언급된 것에는 깊은 의미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사라의 잉태를 통하여 믿음의 심오한 뜻을 배우기를 원하신다. 믿음은 불가능한 것을 믿는 것이다. 인간의 힘으로 가능한 것을 믿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고 과학을 믿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불가능한 기적을 이루시기 위해 사라가 잉태할 수 없는 늙은 나이에 이르도록 기적을 연기하셨다. 그리하여 인간의 힘으로는 전혀 어찌할 수 없는 처지에 이르게 하시고, 그 상황에서 하나님의 역사와 능력만을 바라보도록 하셨다.

 기적으로 아들이 출생한 경우가 성경에 몇 번 기록되어 있다. 그중 아브라함과 사라, 마리아 그리고 사가랴의 아들 출생은 우리에게 큰 영적 진리를 가르쳐 준다. 우리 스스로는 아무런 선을 행할 수 없으며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할 수 없는 일도 믿고 하나님께 순복하면, 영혼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기적이 이루어진다.
 
 믿음을 통하여 기적으로 약속의 아들을 얻은 것처럼, 영적 생명을 낳게 하는 일, 곧 우리가 의로운 행실을 행하는 일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질 때 우리의 생애에도 기적이 생기는 것이다. 그것은 세상을 창조하셨던 말씀의 능력을 믿는 것이요, 주님은 미쁘사 약속하신 것을 이루실 것을 믿는 것이다.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할 것이 없다.

3) 행함을 생산하는 믿음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약 2:14,22) 사라가 믿음을 가졌을 때 기적이 일어났는데, 그것은 곧 아들을 생산한 것이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진정한 믿음은 기적을 생산하는데, 그 생산은 다름이 아닌 행함이며, 이 행함은 기적의 결과로써 일어나는 것이다. 진정한 믿음은 무엇인가를 반드시 생산하는데, 그것은 의로움이며, 의로운 행실이다. 믿음은 의로움을 만든다. 로마서 2장 13절은 누가 의로운 사람들인지 말하고 있다.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그러므로 의로운 사람은 율법을 행하는 자이다. 의롭다는 것은 옳게(의롭게, righteously) 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의로운(옳은) 사람은 율법을 행하는 자이므로, 한 사람을 의롭다고 하는 것, 그를 의롭게 만든다는 것은 결국 그로 하여금 율법을 행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은, 믿음으로 율법을 행하는 자가 되게 하는 것이다.

 성경에는, 하나님은 그 경건치 않은 자를 의롭다고 하신다고 기록되어 있다(롬 4:5). 그것이 옳은 말인가? 그렇다. 그런데 하나님은 거짓말하실 수 없으신 분이시다. 그래서 그 말의 진정한 의미는, 그 사람이 사실은 악하고 불경건하지만, 그냥 그 사람의 죄와 실수를 보기 좋게 겉치레로 의롭다고 간주하신다는 의미가 아니고, 그보다는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율법을 행하는 경건한 자로 만드신다는 뜻이다. 물론 그 일에는 사람의 편에서 협력하는 일, 곧 믿음이 선제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수 있음을 믿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믿기만 하고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어야 하는가? 아니다. 진정한 믿음을 행사해야 한다. 즉, 의를 유지하기 위하여 - 율법을 행하는 자로 머무르기 위하여 -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는 일이 계속 행사되어야 한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롬 3 : 31)라고 말하는 것이다.

 진정한 믿음은, 우리의 생애로 계명을 범하게 하며 계명을 아무 효과가 없게 하는 대신에, 그것을 우리 마음 가운데 세운다. 그리하여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는 말씀, 곧 순종하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이 믿는 각 사람의 마음 가운데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4) 진정한 믿음을 가진 남은 무리

 진정한 믿음은 말뿐만의 믿음이 아니다. 진정한 믿음은 순종과 행함을 동반한다. 물론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는 일은 행위와는 아무 상관이 없지만, 진정한 믿음 그 자체 속에는 행위가 들어 있다. 믿음은 하나님의 사랑을 보고 감동한 인간의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감사의 반응이다. 믿음은 단지 올바른 교리에 대하여 지적으로 동의하거나, 감정적으로 편안한 안전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그리스도 희생의 피로 우리의 죄가 속해지도록 하신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과 약속을 믿고,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행위에 대한 직접적인 감사의 반응을 나타내는 것으로, 나와 화목하자.는 하나님의 호소를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그에 걸맞은 행위를 가지는 것이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행하는 것이다.

 진정한 믿음은 그리스도와 더불어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을 포함한다. 자신의 의지와 뜻대로 행하는 대신 예수님의 뜻과 의지대로 사는 것을 의미한다. 마지막에 나타날 여자의 남은 자손은 진정한 믿음, 곧 죄를 버리고 승리하며 하나님의 계명을 사랑하여 마음으로 그 계명을 순종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하나님께 대한 진정한 믿음을 가졌으므로,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할 수 있는 기적이 그들의 마음속에 이루어진 사람들이다. 우리 마음속에도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서 남은 무리에 들어가도록 기도하자!

 

신앙: 5부 - 시험을 이긴 아브라함의 인내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히 11:8,7)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계 14:4)

 마지막 성도 여자의 남은 무리 십사만 사천의 특징 중의 하나는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것이다. 어린양 되신 예수께서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간다는 의미는, 자신의 뜻대로 하고 싶은 욕망과 계획과 의지를 하나님의 것으로 대체하고, 하나님의 계획과 길과 인도에 온전히 굴복하고 따라간다는 의미이다.

 주님을 따라가는 그 길에는 모퉁이마다 자아를 부인하고 자신의 뜻과 욕망을 포기하는 일 그리고 모든 해로운 것(영생을 위해 유익하지 않은 것)들을 버리는 일들이 포함된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갈 바를 알지 못하고 정처 없이 떠나 순례의 생애를 살았던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마지막 십사만 사천의 좋은 표본이 된다고 할 수 있겠다. 우리도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갈 준비가 되어 있는가 자신을 점검하며 기사를 읽어 보자.

 1) 갈 바를 알지 못한 채

세상에 우상 숭배가 성행하고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진리가 점점 사라지자, 하나님께서는 진리를 전수하고 보존하기 위하여 아브라함을 부르셨다.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 12:1)는 하나님의 명령은 아브라함에게 쉬운 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안주하던 정착지와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난다는 것은 가벼운 시험이 아니었고, 그에게 요구된 희생도 작은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부르심에 순종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앞으로 들어갈 약속의 땅이 비옥한 땅인지, 기후가 좋은지, 그리고 재물을 쌓을 기회가 있는 곳인지 묻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으므로 그는 순종하였다. 아브라함의 의심 없는 순종은 온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는 가장 현저한 믿음의 증거들 가운데 하나이다. 그에게 있어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히 11:1)였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이 실현되는 외부적 증거가 조금도 없는데도 그 약속을 믿고서, 집과 친척과 고향을 버리고 갈 바를 알지 못하면서,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곳으로 따르려고 나아갔다.

 많은 사람이 아브라함이 당했던 것처럼 시험을 당한다. 그들은 하늘로부터 직접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는 않지만, 하나님 말씀의 교훈과 섭리의 사건들을 통해 깨닫는다. 어린양 되신 예수님을 따라가는 사람들은, 세상의 명예와 부귀를 보장하는 것들과 마음에 맞는 공동생활을 버리고 친구와 친척들과 작별하며, 극기와 고난과 희생의 길로 보이는 데로 가야 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 길이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예수께서 인도하시는 곳으로 불평하지 않고 순종하며 따라가는 것이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것이고, 그것을 배운 사람이 십사만 사천의 자격을 갖추는 것이다.

2) 가장 어려운 시험
 믿음으로 순종하여, 아브라함은 그의 고국을 버렸으며 친족이 사는 고향을 떠나 왔다. 그리고 유업의 땅을 찾아 나그네처럼 방황하는 삶을 살았다. 그러나 믿음의 조상이 되려면 그의 생애가 후대 사람들에게 모본이 되어야 하였는데, 아직 그의 믿음은 완전하지 못하였다. 그는 사라가 자신의 아내라는 사실을 감춤으로, 또 하갈과 결혼함으로 하나님께 대한 불신을 나타내었다. 그리하여 이제 그가 가장 높은 표준에 도달할 수 있게 하려고,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사람이 받은 시험 가운데 가장 견디기 힘든 시험을 당하게 하셨다.

 아브라함은 밤의 이상 중에, 모리아 땅으로 가서 산에서 그의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지시를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다. 이 명령을 받을 때에 아브라함은 고령의 노인이었다. 그는 젊은 시절에는 어려운 일도 견디고 위험한 일도 용감하게 밀고 나갈 만큼 굳센 사람이었으나, 이제는 청춘의 열정도 사라져 버린 나이였다. 노령에 접어들어 걱정과 수고에서 벗어나기를 바랄 나이가 될 때까지,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가장 혹독한 시험인 마지막 시험을 보류하셨다. 이제 그는 매우 부요하고 안정되었으며 그 땅의 통치자들로부터 유력한 군주로 존경을 받았고, 약속의 아들은 장성하여 성년이 되어 그의 곁에 있었다.

 하늘은 지연된 소망을 참을성 있게 기다린 그의 생애를 축복으로 관 씌운 것 같았다. 그렇게 약속된 후사의 출생을 오래 기다렸던 그에게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마음을 고통으로 찢어지게 했다. 이삭은 그의 가정의 빛이요, 그의 노령의 위로요, 다른 모든 것보다도 약속된 축복의 후사였다. 그런 아들을 사고나 질병으로 잃는다 해도 사랑하는 아버지에게는 가슴이 찢어지는 일이었을 것이요, 백발이 된 그를 슬픔에 잠기게 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친히 자신의 손으로 그 아들의 피를 흘리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것은 그에게 도저히 불가능한 일처럼 보였다.

 거룩한 율법에 살인하지 말지니라.라고 했으며, 또 하나님께서는 계명에 금하신 바를 요구하실 리가 없으므로,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잘못 이해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브라함은 장막 밖으로 나가 맑게 갠 고요한 하늘을 우러러보며 그의 자손이 하늘의 별처럼 셀 수 없이 많으리라던 약속을 회상하였다. 만일 이 약속이 이삭을 통해 성취되어야 한다면 어떻게 그가 죽임을 당할 수 있을까?

 의심과 고민 중에 그는 땅에 엎드려 이 무서운 의무를 수행해야 할 것인지, 이 주어진 명령의 확실성을 알려고 전에 결코 해본 적이 없는 간절한 기도를 드렸다. 그러나 하늘에서는 다른 대답 대신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귀에 쟁쟁히 울리고 있었다.


 장막으로 돌아온 그는 이삭이 아무것도 모르고 젊음의 단잠을 자는 곳으로 갔다. 아버지는 잠시 아들의 사랑스런 얼굴을 바라보고 나서 떨면서 돌아섰다. 그는 사라 곁으로 갔는데, 그녀도 자고 있었다 사라를 깨워서 한 번 더 그의 아들을 안아 보도록 해야 할까? 하나님의 요구를 그에게 말해야 할까? 그는 마음을 그에게 털어놓고 이 무서운 의무를 그녀와 분담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사라가 자신의 일을 방해할까 봐 두려워서 자제하였다.

 이삭은 그녀의 기쁨과 자랑이었고 그녀의 생명은 그와 결탁되어 있었으므로 모성애가 그 희생을 거절할지도 몰랐다. 마침내 아브라함은 그의 아들을 불러 먼 산에서 희생을 드리라는 명령에 대하여 그에게 말하였다. 이삭은 종종 아버지와 함께 어떤 제단들에 예배하러 갔었음으로 이 부름이 아무런 놀라움을 주지 않았다. 여행 준비는 빨리 끝났다. 나무는 준비되어 나귀에 실었고 그들은 두 하인과 함께 출발하였다.


3) 시험을 이긴 인내
 드디어 아버지와 아들은 나란히 서서 모리아 산으로 말없이 여행하였다. 아브라함은 엄청난 비밀에 대한 생각으로 말할 마음이 없었다. 그는 이삭을 제물로 드리고 나서 아들을 사랑하는 아내에게로 혼자서 돌아가야 할 날에 대하여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칼이 아들의 생명을 끊을 때에 그것이 아내의 가슴을 찌르리라는 것을 잘 알았다. 아브라함이 여태껏 경험했던 것 가운데 가장 길었던 그 하루는 천천히 저물어 갔다.

 그의 아들과 하인들이 자는 동안에 그는 기도로 밤을 지새우며 아직도 어떤 하늘의 사자가 찾아와서 시험은 이것으로 넉넉하며, 그의 아들은 아무런 해를 받지 않고 그의 어머니에게 돌아가게 될 것이라고 말해 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의 고통당하는 영혼에게는 구원이 이르러 오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에 대하여 불평하지 않고 주의 선하시고 진실하신 증거를 생각하였다.

 이 아들은 예기치 않게 주어졌으니 귀중한 선물을 주신 분께서 당신 자신의 것을 다시 취하실 권리가 없으시겠는가? 이삭은 기적의 아들이니 그에게 생명을 준 하나님의 능력이 그 생명을 다시 회복할 수 없겠는가?
보이지 않는 저편을 바라보며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히 11:19)하였다.

 하나님밖에 아무도 그의 아들을 죽음에 내어 주는 아버지의 희생이 얼마나 큰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내 아버지여,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양은 어디 있나이까?라고 말하는 이삭의 말을 듣자 가슴이 더 떨렸다. 오! 이 얼마나 무서운 시험이었는가! 내 아버지여.란 사랑스러운 말이 얼마나 아브라함의 마음을 찔렀던가! 그는 아들아, 번제할 어린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라고 말하였다.

 지정된 장소에 이르러 그들은 제단을 쌓고 그 위에 나무를 올려놓았다. 그 후에 아브라함은 떨리는 음성으로 하나님의 기별을 아들에게 알렸다. 이삭은 그의 운명을 알고 두려워하고 놀랐으나, 아무 저항을 하지 않았다. 이삭은 만일 그렇게 하기로 선택했더라면 자신의 운명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며, 그 비탄에 빠진 노인은 혈기 왕성한 청년의 뜻을 꺾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삭은 유년 시절부터 즉시 신뢰하고 순종하도록 훈련되어 있어서 하나님의 목적이 자신에게 알려졌을 때 그는 자원해서 순종하였다. 그리고 이제는 마지막 사랑의 이야기를 나누며, 마지막 눈물을 흘리고 마지막 포옹을 한다

 아버지는 그의 아들을 죽이려고 칼을 든다. 이때 갑자기 그의 팔이 정지된다. 하나님의 천사가 하늘에서 그를 부른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 22:11~18)


 긴 세월 동안 주님께서 어디로 인도하시든지 불평하지 않고 따라온 아브라함은 믿음과 인내로써 가장 어려운 지점, 곧 자신의 가장 사랑하는 것까지 하나님 앞에 바치는 곳까지 다다랐고, 그 혹독한 시험을 인내로써 승리하였다. 아브라함도 인간이었고 그의 애정과 애착도 우리와 같았다. 그러나 그는 이삭이 죽임을 당하면 약속이 어떻게 성취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의문을 가지고 머뭇거리지 않았으며, 자신의 아픈 마음을 구실로 핑계를 대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의 모든 요구는 공정하고 의로우심을 알고 그분의 명령을 문자 그대로 순종하였던 것이다. 마침내 아브라함은 그 시험을 통하여, 독생자 아들 예수를 죄지은 인류를 위해 대속물로 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놀라운 사랑을 희미하게 깨달았으며, 아들을 포기해야 했던 아버지의 사랑의 고통과 아픔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되었다.

 아브라함의 위대한 믿음의 행위는 불기둥처럼 서서 모든 후대 사람들의 진로를 비추고 있다. 이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게 되었다(약 2:23).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라. 그러면 그대는 안전하다. 그대는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진정한 믿음은 순종을 통해 나타날 것이며,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시든지, 무엇을 요구하시든지 주님 앞에 다 바치는 헌신으로 나타날 것이다.

신앙: 6부 - 모세의 온유 하나님께 영광이 된 품성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히 11:24~26)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 5:5)
 계시록 14장에 나오는 세 천사가 전하는 기별을 보면, 첫째 천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기별을 외치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의 품성이 하나님의 품성을 닮는 것이며, 우리 주위에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것이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특별히 마지막을 장식할 성도들의 품성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아름다운 것이 되어야 하는데, 이 아름다운 품성의 모본을 보인 사람 중의 하나가 모세이다. 성경은 모세에 대하여 기록하기를,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민 12:3)라고 했다. 모세의 온유함을 배워 보자.

1) 지도자 모세
 하나님께서는 기적을 베푸시고 애굽 땅에 재앙을 내리셔서 이스라엘 백성을 노예 생활로부터 탈출시키셨고, 그들은 놀라운 홍해의 기적을 겪었다. 그들은 그들이 섬기는 하나님이 전능하신 신이라는 것을 눈으로 현저하게 목격하였고 그 행하심에 두려워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애굽을 떠난 지 한 달이 되어 광야에서 처음으로 진을 쳤을 때 준비해 온 양식이 떨어지기 시작하자, 그들은 홍해 앞에서 하던 불평을 다시 하기 시작했다. 백성의 관원들과 장로들까지도 하나님께서 임명하신 지도자 모세에 대한 불평에 가담했다.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았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하여 내어 이 온 회중으로 주려 죽게 하는도다.(출 16:3)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친 백성으로 삼으시고 그들을 광활하고 좋은 땅으로 인도하시려고 해방하셨다. 그러나 그 땅으로 가는 도중에 장애들을 만날 때마다 그들은 용기를 잃고 낙담하며 불평하였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모든 일을 생각하고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가졌더라면 그들은 불편과 결핍과 고통까지도 기쁨으로 참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 능력의 증거들이 계속 눈에 보지 않으면 더는 여호와를 신뢰하려고 하지 않고 불평을 시작했다. 그들은 애굽에서의 지긋지긋했던 종살이를 잊어버렸다.
 그들을 속박에서 구원하려고 나타내신 하나님의 선하심과 능력을 잊어버렸다. 그들은 여행길의 어려움만을 말하고, 그들의 지루한 여행이 끝날 때가 있을지를 염려하였다.  이렇게 훈련되지 못하고 성미 급하고 혈기 있는 백성을 인도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의 섭리로 광야에서 40년간 양 치는 목자의 일을 하면서 급한 성격과 교만과 세상의 교육과 세속적인 사고방식들을 다 버리게 되었으며,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법을 배우고 주님의 방법으로 훈련을 받았다. 고집스러운 양들을 돌보는 목자의 일은 모세가 온유한 성품을 배양하기에 안성맞춤이었고, 또한 조용한 시골에서 모세는 하나님과 긴밀하게 교제하였다.
 하나님께서 부르셨을 때, 그는 말을 할 줄 모르는 아이와 같다고 자신을 낮추었다. 자신을 믿는 인간적인 자부심이 다 빠져나갔을 때에야 비로소 그는 하나님의 종으로 쓰임을 받기에 적합해졌던 것이다. 이제 애굽의 최고 학문을 받고 왕이 되도록 교육을 받았던 모세는 하나님의 양 떼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는 온유하고 겸손한 지도자가 된 것이다.

2) 예수 그리스도를 대표하는 모세의 품성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 광야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청종하겠다고 엄숙한 언약을 세운 지 며칠도 채 지나지 않아, 모세가 하나님께 십계명을 받으러 시내 산으로 올라간 사이, 아직도 하나님의 영광이 시내 산 꼭대기에 머물러 있는데도 그들은 눈에 모세가 보이지 않자 하나님께로부터 돌아서서 다른 신들을 구했다. 저희가 호렙에서 송아지를 만들고 부어 만든 우상을 숭배하여.(시 106:19)
 
 산에 있던 모세는 진영에서 배도가 일어났으니 지체 없이 하산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하나님께서는 너는 내려가라.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네 백성이 부패하였도다. 그들이 내가 그들에게 명한 길을 속히 떠나 자기를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그것을 숭배하였다고 말씀하셨다. 여호와께서는 백성과 더불어 세우신 그분의 언약이 무효가 되었으므로 모세에게 나대로 하게 하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로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이스라엘 백성 중에 특별히 섞인 무리가 걸핏하면 하나님께 대해 반역하였고, 그들은 또한 지도자에 대하여 불평하고 그들의 불신과 고집으로 모세를 슬프게 하기 일쑤였다.  그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는 것은 몹시 힘이 들고 고통스러운 일이 될 것이었다.그들의 죄는 하나님의 은총을 거두어 가게 했으며,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을 멸망시키고 그 대신 모세로 하여금 큰 나라가 되게 하시겠다고 제의하셨던 것이다. 나대로 하게 하라. 내가 그들을 진멸하리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만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멸하시기로 뜻을 정하셨다면 누가 그들을 위하여 간구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께서 친히 모세 하나만을 구원해 주시겠다고 제안하실 때, 그 특별한 제의를 수고와 부담과 희생이 요구되는 그의 운명과 맞바꾸고 싶은 유혹이 모세에게 들지 않았을까? 그러나 위대한 믿음을 가진 모세는 좌절과 진노밖에는 나타나지 않은 곳에서 희망의 근거를 찾아냈다. 그는 나대로 하게 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금지하는 뜻이 아니고 중재하도록 격려하는 말이며, 만일 그가 간절히 간구하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용서하시리라는 뜻으로 이해하였다.

 그는 하나님 여호와께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어찌하여 그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에게 진노하시나이까?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 대하여 표현하실 때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네 백성이라고 하셨다. 그러나 모세는 겸손히 이스라엘에 대한 자기의 지도권을 부인하며, 그들은 그의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스라엘이 애굽을 떠난 지 몇 달이 못 되어 그들의 놀라운 해방에 대한 소식이 인근의 모든 민족에게 퍼졌고,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을 위하여 행하실 일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들이 지금 멸망 받는다면 그들의 원수들은 승리의 개가를 부를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수치를 당하실 것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을 위하여 중재할 때에 모세는 이제까지 하나님의 인도하에서 온갖 정력을 쏟아 온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깊은 관심과 사랑 때문에 그의 소심함은 없어졌다. 그는 간절하게 부르짖기를,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출 32:31,32)라고 하였다. 여호와께서는 모세의 간청을 들으시고 그의 이기심 없는 기도를 응답해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종을 시험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성실성과 범죄하고 감사할 줄 모르는 백성에 대한 그의 사랑이 어떤지 시험하셨던 것이다.
 
 모세는 이 시련을 잘 견디어 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성실함과 단순한 마음과 진실함을 기뻐하시고 그에게 신실한 목자로서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할 중대한 책임을 맡기셨다. 모세는 만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거절하신다면 자기의 이름도 그들의 것과 같이 지워지기를 바랐다. 그는 그처럼 은혜롭게 해방된 백성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이르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었다. 이스라엘을 위한 모세의 중보는 죄인들을 위한 그리스도의 중보를 설명해 준다. 배은망덕하여 여러 번 모세를 돌로 치려 하고 반역하고 불순종하는 백성을 향한 모세의 중재와 애정은, 귀한 생명을 바쳐서 죄악과 배반을 일삼는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하신 예수님의 사랑을 대표한다.

 모세는 자기의 보호 아래 있는 사람들의 완고함과 무지몽매 함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자기가 싸워야 할 어려움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모세는 백성을 설복시키고 잘 인도하려면 하나님께로부터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광야 생활 동안 이스라엘 백성이 반역하고 모세를 힘들게 한 일은 셀 수 없이 많았던 것을 성경의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나 힘들고 지치고 낙망이 되어도 그는 끝까지 그의 온유함을 잃지 않았으며, 백성에 대한 애정과 사랑을 버리지 않았다. 단 한 번 지치고 피곤한 나머지 반석을 두 번 쳐서 지도자로서 실수했지만, 그의 온유한 성품은 그를 하늘 본향의 한 자리를 넉넉하게 차지하게 하였다.

 주님께서는 온유한 그를 하늘로 데리고 가셨다(유다서 9절 참조). 예수께서 인간으로 오셔서 변화 산에서 변화하시고 그분이 걸어야 할 고난의 길에 대하여 묵상하실 때, 완고하고 고집 센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과 온유함으로 인도한 경험이 있었던 모세가 하늘에서 내려와 주님을 격려했던 것을 성경을 통해 알 수 있다. 모세의 온유한 성품은 마지막 성도, 십사만 사천에게 나타나야 할 성품이다. 온유는 하나님께서 가장 귀하게 여기시는 성품의 열매이다.

신앙: 7부 - 예수님의 조상이 된 라합의 믿음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하였도다.(히 11:31)
 
 히브리서 11장에 언급된 두 여인 중에 한 여인인 라합은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와는 달리 이름 없고 보잘것없는 우상을 숭배하는 이방인이었으며, 돈을 위해 몸을 파는 창녀였다. 어떻게 그런 형편없는 이방 여인이 믿음의 장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으며, 그에 더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이 될 수 있었을까?
 마태복음 1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족보를 보면 라합은 후에 예수님의 고조 할머니가 되었으니 말이다. 아마 그 이유는, 아무리 보잘것없고 비천한 신분이라 할지라도 진정한 믿음을 소유하면 영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한가족이 될 수 있고 함께 구원에 참여할 수 있는 귀한 신분이 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하여 기록되었을 것이다. 인간적인 눈으로 보면 두 여인의 공통점은 전혀 없는 것같이 보인다. 그러나 이 두 여인은 똑같이 히브리서 11장에 이름이 올려져 있는데, 그 이유는 두 사람 모두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 큰 성 여리고에 살았던 라합

 라합은 여리고 성의 정문이 있는 성벽 꼭대기에 살았다. 라합의 집은 여행객들이 드나드는 여관이었고, 그녀는 그런 여행객들을 상대로 창녀 일을 하며 사는 사람이었다. 바로 그 집에 이스라엘 두 정탐꾼이 들어가게 된 것이다. 그 당시 여리고 성은 두꺼운 성벽을 가진 튼튼한 성으로서 가나안 땅에서 가장 크고 견고한 성 중의 하나였으므로 난공불락의 성이라고 불리었다.

 민수기 9장 1절에 보면 성의 벽들이 크고 하늘에 닿았다.라고 표현되어 있을 정도로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정복할 수 없을 것 같은 성이었지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 성을 함락시키라고 명령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성을 정탐하러 간 두 정탐꾼을 라합의 집으로 인도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그 이방 여인의 믿음을 알고 계셨으며, 그 집이 안전할 것을 아셨던 것이다. 오늘날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인도하실 때에 모든 사정을 아시고 우리를 안전한 곳으로 인도하시며,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더라도 항상 피할 길을 주시며 우리를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하신다는 것을 알고 감사하자.
 두 정탐꾼은 여리고 성을 점령할 수 있을지 없을지를 정탐하는 중요한 사명을 띠고 비밀리에 그 성에 잠입했지만, 금세 발각되고 말았다. 이스라엘 백성이 진을 친 곳은 여리고에서 불과 5마일 떨어진 곳이어서 밤에 이스라엘 백성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불기둥을 여리고 성 사람들이 볼 수 있었을 것이며, 그들은 곧 이스라엘 백성이 공격해 올 것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정탐꾼에 대한 경계가 삼엄했고, 이스라엘 진영에서 온 정탐꾼이라면 누구라도 죽임을 당할 상황이었다. 곧 여리고 성의 왕이 라합에게 기별자를 보내 왔다.

여리고 왕이 라합에게 기별하여 가로되, 네게로 와서 네 집에 들어간 사람들을 끌어내라. 그들은 이 온 땅을 탐지하러 왔느니라. 그 여인이 그 두 사람을 이미 숨긴지라. 가로되 과연 그 사람들이 내게 왔었으나 그들이 어디로서인지 나는 알지 못하였고, 그 사람들이 어두워 성문을 닫을 때쯤 되어 나갔으니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하되 급히 따라가라. 그리하면 그들에게 미치리라 하였으나, 실상은 그가 이미 그들을 이끌고 지붕에 올라가서 그 지붕에 벌여 놓은 삼대에 숨겼더라.(수 2:2~6) 

2) 라합의 믿음

 라합은 이스라엘의 정탐꾼들을 내어 주길 원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라합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람들을 내어 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방인이요, 창녀였던 라합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사람이 되었을까? 아마 라합은 그녀의 집에 드나드는 여행객들로부터 주변에 일어났던 사건들을 들었을 것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홍해를 가르시고 그들을 구원하신 기이한 이적, 이집트로부터의 구원함을 받은 놀라운 사건, 만나를 내려서 먹이신 사건 등등. 라합은 그 사건들을 듣고 처음에는 기이히 여겼지만, 천천히 그 사건들을 생각해 보면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생겼을 것이다. 그녀의 마음속에는 구원에 대한 갈망이 늘 자리 잡고 있었던 것 같다. 마치 사마리아 여인이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면서 오실 메시아를 기다리며 희망을 품고 있다가 예수님을 만났듯이, 영적인 새로운 삶을 살고 싶은 애타는 갈망과 염원을 품고 있는 이 여인을 하나님께서는 잊지 않으셨다.

 라합은 큰 믿음을 가졌다. 40년 전에 여호수아와 갈렙과 같이 가나안 땅을 정탐하러 갔던 10명의 정탐꾼보다도 라합은 더 큰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두 정탐꾼 앞에서 다음과 같은 간증을 한다.
 말하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백성이 다 너희 앞에 간담이 녹나니,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편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라.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의 연고로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 하지에 하나님이시니라. 그러므로 청하노니 내가 너희를 선대하였은즉 너희도 내 아버지의 집을 선대하여 나의 부모와 남녀 형제와 무릇 그들에게 있는 모든 자를 살려 주어 우리 생명을 죽는 데서 건져내기로 이제 여호와로 맹세하고 내게 진실한 표를 내라.( 수 2:9~12)

3) 보지 못하고 믿는 믿음
 라합은 보지 못했지만 믿었다.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칭찬이 성경에 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도마)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요 20:29)

 라합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놀라우신 역사를 베푸신 하나님을 그저 믿는 것뿐만 아니라 자신의 믿음을 행동으로 보였다. 만일 라합의 집에 숨겨 주었던 두 정탐꾼이 여리고 군사들에 의해서 발각되었다면 라합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녀는 스파이를 도와준 배신자가 되어 사형을 당하였을 것이다. 라합은 자신의 목숨을 내놓으면서까지 그녀가 믿는 바를 행동으로 옮기었다. 
 이와 같이 우리의 목숨을 내놓으면서까지 우리의 믿는 바를 실천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우리는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어디에서든지 예수님을 첫째로 삼고 예수님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 믿음 때문에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한다 해도, 직장에서 쫓겨난다 해도, 혹시 가족이 나를 멸시하고 버린다 해도, 믿음대로 실천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앞길을 책임져 주실 것이다.

 그 당시 라합이 가졌던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40년 전에 열 명의 정탐꾼이 가졌던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비교해 보면 누가 더 하나님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었을까? 10명의 정탐꾼은 실제로 홍해를 건너고 출애굽의 놀라운 구원을 경험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경험도 그들을 구원할 수 있는 믿음을 갖게 하지 못했다.그러나 라합은 보지 못했고, 비록 하나님에 대한 작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녀가 아는 대로 믿고 순종하여 따르는 큰 믿음의 사람이었던 것이다. 라합의 큰 믿음은 그녀를 구원했다. 그녀는 하나님을 믿었고, 은총을 입어 여리고 성이 무너질 때 구원을 받았는데, 그 구원을 얻은 방법은 하나님께서 고안하신 대로 그분의 뜻에 순종함으로써였다.

라합이 가로되 너희의 말대로 할것이라 하고 그들을 보내어 가게 하고 붉은 줄을 창문에 매니라.(수 2:21) 라합이 창밖에 맨 붉은 줄은 죄인을 구원하시고 보호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를 상징했다. 유월절에 재앙이 지나가도록 양의 피를 문지방에 발라 그 집이 재앙을 피할 수 있었던 것처럼, 이 붉은 줄은 라합의 집을 멸망으로부터 보호해 주는 예수님의 보혈을 상징하는 표였던 것이다. 보지 않고 믿는 자는 복이 있다. 머리로만 믿지 않고 행동으로 순종하는 믿음, 라합처럼 생명을 걸고 믿는 바대로 행하는 믿음을 갖도록 하자.

마치면서

 마지막 성도들, 여자의 남은 무리인 하나님의 참 백성은 히브리서 11장에 기록된 사람들보다 더 큰 믿음을 가져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앞으로 당할 시험과 환난은 성경의 어느 시대보다도 더 극심하고 어려울 것이며, 그 환난을 통과하려면 무엇보다도 더 큰 믿음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또한, 더욱 중요한 것은, 마지막 선악의 대쟁투에서 초점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계명이므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순종하는 사람들, 마음과 삶 속에서 하나님의 계명을 이룬 거듭난 사람들이 나타나야, 그리고 그 사람들의 열매 맺는 삶이 증거가 되어야 온 우주가 하나님의 계명은 의로운 것이며, 하나님의 심판은 공의롭다고 선언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믿음의 사람들이 준비되어야 예수께서 빨리 재림하실 수 있다.
 우리는 편안한 때에 더 큰 믿음을 키우도록 노력하고 하나님께 마음을 바치며 간절히 기도하자! 우리가 아니면 이룰 수 없는 중대한 사명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 재림이 임박한 이 시기에 이토록 중대한 사명을 감당해 내는, 큰 믿음을 가진 독자들이 되기를 기도드린다.

 

 

질문과 답변: 갑자기 조종사가 사라진다면?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완전하신 구속의 계획은, 예수께서 재림하셔서 우리를 하늘로 데리고 올라가실 때까지는 완전하게 성취되지 않는다.

 그런데 어떻게 그리스도의 재림이 이 지구의 역사 속으로 임하게 되는 것일까?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먼저 우리는 어떠한 방식으로 임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왜냐하면 오늘날, 재림에 관한 잘못된 가르침들이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불길처럼 번져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제자들이 감람 산 위에서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겠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예수께서는 대답하시기를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라고 말씀하셨던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주님의 대답에 나타나 있는 분명한 암시는 주의 재림에 관한 잘못된 가르침들이 말세에 많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런데 말세가 된 지금, 주의 재림에 대한 심각한 오해가 기독교계에 들어왔다.
 오늘날, 수백만 그리스도인들에게 아무런 검토 없이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기독교계에 엄청난 교리적 혼동의 요인이 되고 있는 신학적 질문이 하나 있는데, 그 질문은 세상 끝에 그리스도께서 어떤 방법으로 이 땅에 임하실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께서 비밀리에 공중 재림하실 것이라는 가르침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데, 소위 비밀 휴거(The secret rapture)라는 가르침이 그것이다. 휴거설을 가르치는 사람들은 예수께서 환난 이전에 의인들만 비밀리에 살짝 들어 올려가셔서 그들이 환난을 통과하지 않게 해 주신다고 말한다. 그래서 휴거설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앞으로 지구에 일어날 엄청난 충돌 사고들을 예상하고 있다.
 
 
 비행기 조종사와 버스와 자동차 운전기사들이 갑자기 들리어 올라가게(비밀 휴거) 되면 굉장한 사고들이 연발하여 일어나게 될 것이라는 공상 소설 같은 이야기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렇게 믿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꽤 많이 있다는 사실에 우리는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또한 휴거론은 세대주의(dispensationalism) 또는 미래주의를 지지하는 목사들에 의해서 전파되고 있는 예언 해석과 접목되어서 여러 가지 모양의 오해와 혼란을 빗어 내고 있다.

 이제, 먼저 비밀 휴거론자들이 만들어 놓은 종말론의 시나리오를 대략 살펴본 다음, 그들이 주장하는 바를 8가지 면으로 나누어서 하나씩 차례로 분석함으로써 예수 재강림에 대한 성서적 진리를 연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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