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성경으로 돌아가는 길잡이 series 5하나님의 은혜가 계명을 폐하는가?

어떤 사람들은 율법이 죄인을 그리스도께 인도하여 깨끗함을 받게 하는 목적을 달성한 후에는, 그리스도인에게 더 이상 법이 필요 없다는 반론을 제기할지 모릅니다. 그것이 사실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진리의 길에서 벗어난 사실을 나타내 보여주고, 정결케 하는 예수의 십자가로 다시 인도해 주는 율법의 감시가 항상 필요한 것입니다. 점진적으로 성장해 가는 그리스도인 경험 가운데서 올바른 위치로 잡아주는 거울의 역할이 항상 필요로 느껴질 것입니다.

율법과 은혜는 서로 경쟁 속에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협력 안에서 역사 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죄를 지적하고, 은혜는 죄로부터 구원해 줍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뜻이고, 은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능력입니다. 우리는 구원을 얻기 위하여 율법을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 둘의 참다운 관계를 잘 배합시킨 아름다운 성경 구절이 요한계시록 14장 12절입니다.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들이니라." 믿음과 행함에 대한 얼마나 완전한 묘사입니까? 믿음과 행함의 아름다운 조화가 성도들 가운데서 발견되어야 합니다.

순종의 행위가 사랑의 참다운 시험(시금석)입니다. 행함은 참된 그리스도인임을 증명하는 증거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약 2:20). 어떤 남자도 입으로 하는 말로만 가지고 순수한 여인의 마음을 얻을 수 없습니다. 꽃을 주는 일도 없고, 헌신적인 행동도 없으며, 사랑의 선물도 없다면, 순결하고 지혜로운 처녀들은 그러한 남자의 마음을 믿을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 7:21).

말과 공언하는 일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참 증거는 순종입니다. 요즈음 자동차의 범퍼에 붙어 있는 스티커들은 얄팍한 사랑에 대한 관념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당신이 예수를 사랑한다면 미소를 지으세요, 만일 당신이 예수를 사랑한다면 경적을 누르세요 등등으로.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까?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계명을 지키라" (요 14:15). 그러나 이 말씀은 대부분 사람에게 있어서 환영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랑이 미소나 손을 흔드는 것 이상의 것을 요구하지 않을 때는 사람들이 사랑을 환영하지만, 그것이 생활 전체를 뒤흔들고 변화를 요구할 때에는 대다수가 거절하는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오늘날 거의 모든 사람은 진리를 찾지 않습니다. 그들은 쉽고 편안하고 안락한 종교 즉, 자신들이 좋아하고 원하는 길대로 살면서도 여전히 구원의 확신을 줄 수 있는 종교를 찾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종교는 참된 그리스도 교회의 신앙이 아닙니다. 이 문제에 관한 가장 강력한 성경 말씀 가운데 하나가 요한일서 2장 4절입니다.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고.." 요한이 그러한 확신을 하고 기록할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성경에서 가장 확고하고 깊게 수립된 진리 중의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y

PDF (PDF) 옛 언약과 새 언약의 차이를 아십니까? 

바이블 맨에게 물어보세요: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눅 24:39)에서 ‘영’은 혼백이 아닌가요?

성경으로 돌아가는 길잡이'에서 말하는 영혼에 대한 글과 대치되는 구절이 아닌가 합니다. 위 구절은 어떤 살과 뼈가 없는 무형의 혼백 같은 것을 가리키는 것 같은 뉘앙스인데 어떻게 보시는지요? 히브리서 4:12도 설명 부탁합니다.

1. 영에 대하여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헬라 원어로는 프뉴마)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눅 24:38~40) 먼저 창세기 2장 7절에 인간을 만드신 창조 공식을 살펴보겠습니다. 킹제임스 영어 성경 : "주 여호와께서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의 콧구멍에다 생명의 호흡(life of breath)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살아 있는 혼(living soul)이 되었더라." 개역 한글판 성경 :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그러므로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의 창조 공식은, 흙(몸) + 생명의 호흡 또는 생기(생명력) = 살아 있는 혼 또는 생령(사람)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2장 7절에 기록된 "생기"의 히브리 원어는 루아흐인데, 그 의미는 신약 성경에서는 동일한 단어가 "프뉴마"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프뉴마" 자체에는 누가복음 24:39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살과 뼈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의 호흡 자체에는 살도 없고 뼈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흙으로 만드신 몸에 프뉴마(생기, 생명력)를 코로 불어넣으셔서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호흡, 바람, 생기, 성령"을 뜻하는 히브리어 "루아흐"가, 신약 성경에서는 헬라어 "프뉴마"(pneuma)로 385회에 걸쳐서 사용되었는데, 신약 성경에서 "프뉴마"는 성령이나 악한 영으로 번역되었을 뿐만 아니라, 번역하는 사람의 사상과 주관에 따라서 "영, 마음, 심령, 정신, 바람"등으로 표현되었으며, 심지어는 "영혼"이라고까지 번역되어 있어서, 읽는 사람들에게 큰 혼란을 주고 있는데, 그 몇 가지 실례를 살펴보겠습니다.

마태복음 27:50 : "예수께서 크게 소리지르시되 영혼(프뉴마)이 떠나시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생명의 호흡이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갔다는 사실, 즉 그분의 죽음을 뜻하는 말씀임에도 불구하고, "프뉴마"가 "영혼"으로 잘못 번역되어 있기 때문에, 마치 예수님이 죽는 순간에 그분의 혼백이 몸을 떠났던 것으로 오해하기 쉽습니다.

사도행전 7:59 :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프뉴마)을 받으시옵소서." 여기서도, 생명이 끊어질 때에 호흡이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표현이, 마치 영혼이 스데반의 몸에서 빠져나가 하늘로 올라간 것처럼 잘못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렇듯, 구약에서 389회 쓰인 "루아흐"나 신약에서 385회 쓰인 "프뉴마"가 비록 신, 영, 또는 영혼이라고 번역되어 있을지라도, 히브리어나 헬라어의 원어적 의미로 볼 때, 그것이 성령을 가리키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인간과 연관되어 사용되는 모든 경우에, 단 한 번도 불멸하거나 시체에서 보이지 않는 연기가 되어 몸을 빠져나가는 어떤 존재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면, 아마도 많은 사람이 깜짝 놀라게 될 것입니다. 성경의 원어와 태초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어떻게 창조하셨는가를 올바로 살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죽음에 관한 신비를 벗길 수 있으며, 죽는 순간에 사람의 영이 소리 없이 빠져나가 허공을 떠돌아다니게 된다는 미신에 빠질 수 없습니다. 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 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히 4:12) 히브리서 4:12에 나오는 "혼(프쉬케)과 영(프뉴마)"도 마찬가지입니다. 헬라어로 프쉬케 카이 프뉴마로서 이 말씀에서는 "생명과 호흡"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프쉬케는 마태복음 10:28에 사용되었는데 헬라어로 프쉬케(복수 프쉬카이(psuchai))- "숨" "생명" 또는 "혼"입니다. 이 단어는 신약에서 40번은 분명히 일반적으로 "목숨"이라는 단어와 결부된 "생명" 또는 "생명들"로 번역되었습니다(마 2:20; 6:25; 16:25). 58번은 "혼" 또는 "혼들"이라는 의미로 번역되었습니다(마 10:28; 11:29; 12:18). 그 중 몇 번은 단지 "사람"을 의미합니다(행 7:14 27:37; 벧전 3:20). 또 다른 경우에는 인칭대명사로 번역되거나 그것과 동등한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시 16:10; 마 12:18; 고후 12:15). 때로는 이 단어가 감정(emotions, 막 14:34; 눅 2:35), 자연적인 식욕(natural appetites, 계 18:14), 정신(mind, 행 14:2, 빌 1:27), 또는 마음(heart, 엡 6:6)의 뜻으로 사용됩니다.

프쉬케라는 단어 자체에도 희미하게라도 육체의 죽음 후에 살아남는, 그래서 육체를 떠나서 불멸하는 의식적인 실체를 암시하는 것은 전혀 없습니다. 소위 육체가 죽은 후에 살아남는다고 하는 살아 있는 의식적 혼에 대한 언급은 성경에 없습니다. y

시골 이야기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이 글은 지난 143호에서 이어지는 이야기입니다.) 봄이 되면 농부는 올해에 어느 밭에 무엇을 심을지를 결정합니다. 예를 들어 이 밭에는 감자를 심고 저 밭에는 콩을 심고 저쪽에는 들깨를 심었다가 수확하고 나면 메밀을 심어야겠다고 결정을 하지요. 해마다 저희가 거의 빠짐없이 심는 것은 옥수수와 감자, 고구마, 검은 콩, 그리고 각종 채소입니다. 때로는 밀과 수수도 심었지요. 어느 봄은 우리 가족이 찰옥수수를 좋아해서 작은 밭에 전부 옥수수만을 심었습니다. 어느 날 찰옥수수 밭을 가보았더니 한 일주일만 기다리면 따먹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저는 "야! 조금만 기다리면 맛있는 찰옥수수를 실컷 먹을 수 있겠구나"하고 중얼거리며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며칠이 지난 후 저는 찰옥수수를 검사하기 위해서 밭을 가보았습니다. 아!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그만 산돼지들이 이제 곧 따먹게 될 옥수수를 그냥 다 씹어먹고 밟고 부러뜨리고 그야말로 잔치를 벌였던 것입니다. 그 옆에 심었던 고구마밭도 다 파헤쳐 놓고&. 봄부터 김을 매고 거름을 주면서 큰 기대를 했던 것들이었는데, 정말 속이 상했습니다. 당장 그놈의 산돼지들을 찾아가서 혼내주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저는 돼지가 부러 트려 놓은 옥수숫대를 베면서 산돼지들도 예수님께서 기르시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마음을 달래었습니다. 산돼지들은 그 후로 몇 차례 더 내려왔었고, (또 언제 내려올지 모르지만) 정말 찰옥수수가 조금밖에는 남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감사합니다. 왜냐하면, 저희에게는 매끼를 먹을 양식이 있고 무엇보다 산돼지들도 돌보시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돌보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애써 수고하고 노력하여도 하나님께서 먹이시고 입혀주시며 지켜 주시지 않으신다면 우리의 모든 일은 헛일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여러 가지 일들을 통하여 주님을 더 의지하게 하시고 주님을 바라보게 하십니다.

한번은 수수를 꽤 큰 밭에 점파식으로 약 15~20센티미터 간격으로 심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밭에는 그냥 흩뿌렸습니다. 수수를 심고 나면 수확하기 전까지 최소 두 번 정도는 김을 매주어야 합니다. 수수와 조, 기장 등이 자라기 시작할 때에 사이 사이의 김을 매주는 것은 참 어렵습니다. 어렵게 두어 차례 김을 매주고 거름을 주어서 수수가 꽤 잘되었습니다. 그래서 큰 수확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막 알알이 여물어갈 무렵 큰 태풍이 지나가면서 대부분의 수수가 꺾어지고 쓰러졌습니다. 알차게 잘 여물어가던 수수들의 양분공급이 중단되면서 많은 수수가 반 쭉정이로 남게 되었습니다. 꺾어지거나 쓰러져서 양분이 공급되지 않은 수수들은 곰팡이가 피고 썩거나 싹이 났습니다. 그런데 모든 수수가 쓰러진 것 같은 그 밭에 드문드문 홀로 굳게 서 있는 수수들이 서 있었습니다. 굵은 줄기를 가지고 푸른 잎과 통통한 알곡을 가진 채 말입니다. 그래서 다행히 씨앗을 보존할 수 있었습니다. 거의 모든 수수가 쓰러지고 꺾어질 때에 홀로 굳세게 서 있었던 수수들은 제 마음에 큰 교훈을 주었습니다. 저도 홀로 굳게 서 있는 수수들처럼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범하고 타협하며 세상을 향하여 갈 때에 엘리야와 다니엘과 침례 요한, 그리고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굳게 서서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주위의 분위기나 대중에 의해 움직여지는 사람이 아니라 홀로 설 수 있는 신앙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세신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마 10:29~31).y

신앙 5부: 그리스도인의 복장

그리스도인(Christian)은 "Christ like"이라는 뜻을 가진, 그리스도와 같은 사람이라는 말이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면에서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대표해야 한다. 말과 행동에서 심지어 복장에서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야 한다. 옷은 그 사람의 됨됨이와 마음을 드러내는 도구가 된다. 그 사람의 복장을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어떤 일에 종사하는 사람인지, 어떤 성격을 가진 사람인지 알 수 있게 된다. 그리스도인의 복장은 그리스도를 나타내야 하며, 그리스도의 성품을 대표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이 문제에 대하여 함께 생각해 보자.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벧전 3:3~4).

1. 의복으로 부를 과시하려는 마음을 버리라

종종 의복은 부와 지위를 과시하고 나타내 보이는 수단으로 많이 사용된다. 사람들은 외모나 옷을 보고 그 사람의 부와 지위와 됨됨이 등을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 비싼 옷과 더 화려한 옷을 입어서 자신의 영향력과 부를 인정받기 원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모본을 따르는 사람들이 아니라 예수님의 모본을 따르는 사람들이다. 하늘의 왕이시며 통치자이셨던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하늘의 영광과 화려함과 숭배를 버리시고 이 땅에 초라한 모습으로 오셔서, 한 벌 옷으로 봉사와 희생의 생애를 사셨던 것과 우리를 비교한다면, 우리의 생활과 의복은 사치한 것이다.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르기를 원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의복을 통한 마음의 방종을 하나님의 은혜로 극복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겸손하게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야 한다.

2. 단정하고 우아하게 입으라

의복의 사치와는 반대로 그리스도인들이 조심해야 할 또 다른 면이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단정해야 한다. 사람들은 마치 지저분하거나 손질하지 않은 모습을 경건한 모습이라고 오해한다. 그리스도인은 깨끗하고 정갈하고 아름다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 잘 손질한 머리와 단정하고 색깔과 모양이 잘 어울리는 우아한 의복, 예수님을 가장 잘 나타낼 수 있는 얼굴과 표정으로 사람들과 만나야 한다. 예수님의 덕을 선전하는 대사로서 그리스도인은 가장 멋진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특별히 그리스도인 여성들은 노출이 심한 옷이나, 과시를 위한 옷이나, 남자들을 자극할 만한 옷을 입으면 안 될 것이다. 성범죄율의 증가와 미니스커트 증가의 비율은 놀라우리만치 일치한다는 사실이 통계에 의해 밝혀져 있다. 의복을 통해 아름다움을 과시하기보다는 내면의 미와 심령을 아름답게 가꾼 사람이 훨씬 더 아름답고 매력적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도록 하자.

3. 유행의 제단에 자신을 희생하지 마라

사단은 세상의 유행을 통해서 인간의 마음을 지배하려고 한다. 유행이란 마치 무서운 마력을 가지고 지배하는 여왕과 같다. 남녀노소를 불구하고 많은 사람이 이 유행이라는 여왕의 요구에 응하기 위해 돈과 시간과 정력과 노력을 바치고 있다. 유행을 따르려는 욕망을 극복하지 못한 사람들은 늘 새롭게 만들어내는 세상 디자이너의 유행을 따르기 위해, 그 유행의 제단 위에 자신의 재력과 시간과 건강을 희생하고 있다. 많은 사람이 그 의복이 아무리 잘 맞고 아름다울지라도 한 번 유행이 지난 것이면 다시 입지 않거나 버리는 경향이 많다. 유행을 따르므로 인해 자녀를 교육할 시간과 기도하고 성경을 연구할 시간을 빼앗기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허식에 대한 욕망은 사치를 낳고, 고상하고 영적인 생애에 대한 포부를 없앤다. 또한, 세상에 변하는 유행을 따르기 위해 들이는 노력은 돈과 시간과 건강을 낭비하게 한다. 그리스도인은 지나친 유행을 따르지 말아야 한다. 너무 유행에 앞서지도 뒤떨어지지도 말 것이지만, 만일 유행이 그리스도인의 복장에 적합한 것이면 유행을 따라 입는 것은 무방할 것이다.

복장에 의하여 그 사람의 인격이 판단된다. 신앙과 좋은 인품과 세련된 취미와 교양이 넘치는 지성은 단정하고 적합한 복장을 선택하는 데서 나타난다. 단아하고 고상한 의복이 겸손한 태도와 합해지면, 사람을 품위 있는 분위기로 두를 것이며, 그 분위기는 많은 위험에서 그 사람을 지키는 데 도움이 될 것이며,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대표하는 데 결코 손색이 없게 될 것이다. 우리의 의복을 통해서 예수님을 잘 나타내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자!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매우 가까운 시점에 우리는 살고 있다. 이제 우리의 신앙에는 과감한 개혁과 부흥이 정말로 필요한 때이다. 독자들의 신앙생활에 큰 부흥과 개혁이 시행되기를 기도드린다. y

신앙 4부: 바벨론의 교육을 아십니까?

하나님의 교육방법과 목적에 상당히 어긋난 길을 밟고 있는 현시대의 교육은 바벨론에 기초를 두고 있다. 교육의 역사와 교육제도의 변화를 함께 공부해 보면서 교육에 대한 개혁의 정신을 가져보자.

1) 교육의 변천사

1. 최초의 교육 개혁

주입식과 강요가 아닌 하나님의 바른 교육 방법을 교육계에서 거의 찾아보기 어려운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때는 중세 암흑시대였다. 16세기의 위대한 종교 개혁자 루터와 멜란히톤은 교육의 개혁 없이 영구적인 종교 개혁을 이루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해하였다. 용기 있고 과감하고 적극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던 루터와 조용하고 부드럽고 소극적인 멜란히톤은 종교 개혁을 위해 하나님께서 세우신 적합한 동역자였다. 멜란히톤은 특히 교육 사업에 관심을 많이 기울였다. 그는 그 당시에 편만하던, 실생활에 거의 쓸모가 없는 지식을 강요하며, 일률적인 교육과정으로 개성 있는 청년들의 정신을 한 틀 안에 묶어두며, 주입식과 암기 위주로 강요하는 교황권의 교육제도를 개혁해야 종교 개혁이 성공하리라는 점을 정확히 파악하고 그리스도인 교육제도를 계발하였다. 멜란히톤은 학교를 많이 세웠는데, 그는 말하기를, "참된 교육 사업은 하나님의 사업이다"라고 했다. 그는 루터의 도움을 받아, 1525년부터 시작하여 1528년 독일 전역에 많은 학교를 세웠다. 이 개혁자들은 법왕교회의 힘이 그 교육제도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 교육제도의 급소를 쳐서 상하게 하여 법왕권이 그 무릎을 꿇게 하였다. 그들은 그리스도인 학교 제도를 설립하여 그 자녀들로 개신교도들이 되도록 하였다.

2. 후기 교육제도가 원점으로 돌아감

루터와 멜란히톤의 사망 후, 그들이 하던 개혁을 이어받은 개신교의 신학자들은 그리스도인 학교들을 증가시키는 대신 단지 신학적인 기교에만 몰두하여, 당대에 이루어졌던 위대한 교육사업의 개혁을 전진시키는 대신 원점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들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몇몇 신학적인 문제들에 대해 의견을 달리하는 견해에 대하여 비난하느라고 많은 시간을 허비하였고, 정통적인 교리를 고수하고 분쟁하느라 대부분 정력을 소비하였다. 그들이 그들의 신조를 구체화는 시켰으나 개신교회의 바탕이 되는 그리스도인 교육이념을 상실하였고 교육사업은 중단되었다. 개혁자의 정신에서 멀리 떨어진 후기의 개신교의 신학자들은 참교육의 개념에 눈이 멀어 교육 사업의 개혁을 게을리하였던 것이다. 이제 개신교주의는 참교육의 이념을 상실하고 죽은 정통 교리 때문에 쇠퇴하게 되었다. 그런 식으로 약화한 개신교회는 다시 원기를 회복한 법왕교의 교육제도의 큰 힘을 저항할 수 없었다.

3. 교육제도를 통한 구교의 승리

교황권의 세력은 자신들이 존재할 수 있는 유일한 비결이 개신교회의 학교들을 짓밟고 승리를 거두는 데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단은 청년들의 정신과 교육사업을 점령할 때 악이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안다. 천주교회는 루터와 멜란히톤이 세운 학교들에서 훈련받고 배출된 수 천명의 선교사들로 말미암아 점점 강해지는 거대한 개신교주의를 약화시키기 위해서는 교육제도를 통해서 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런 와중에 잔 스텀(John Sturm)은 한 큰 개신교 학교에 법왕교의 교육제도를 실제로 재도입한 사람이었다. 그는 겉으로는 훌륭한 개신교도인 것처럼 보였다. 그는 그 당시 소위 개혁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에 의해 위대한 교육가라는 평판을 얻었으며, 그의 학교는 독일에 있는 개신교 학교의 모델로서 아주 유명해졌고, 그의 영향력이 커져서 그가 도입한 교육제도가 영국에서 미국까지 미치게 되었다. 그가 은밀하게 시작한 교육사업은 개신교 교육제도의 개혁을 완전히 허물어뜨리는 엄청난 결과를 가져왔다. 결과적으로 개신교의 교사들은 잘못된 교육을 통해 개신교의 단체를 약하게 하였으며, 법왕권은 제수이트(예수회)의 교육제도를 통해 개신교회에 공격을 가했고 그리하여 개신교의 진정한 정신과 교육은 무너지게 되었던 것이다.

2) 현 교육 제도의 원조는 교황권

한 역사가는, 유명한 교육제도와 학교의 모본으로 불리는 하버드나 스탠퍼드, 예일 같은 학교의 교육제도의 근원이 된, 이튼이나 윈체스터, 웨스트민스터와 같은 전통적인 학교의 교육 과정들이 잔 스텀이 세운 학교의 제도들을 모방하였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말하며, "현대 그리스도인 문화에 그리스와 로마의 문화를 재현시키는 것이 스텀이 가진 야망이었다"라고 말했다(Painter, p163). 스텀이 설립한 학교는 반은 루터와 멜란히톤이 세운 그리스도인 학교였고, 반은 법왕교의 학교였다. 그 학교는 중세기적 고전문학에다 약간의 성경을 첨가하고, 효과를 내기 위해 교회의 교리를 샌드위치처럼 끼워서 가르쳤다. 그들의 교과 과정은 비실제적이며 교육방법은 기계적이었으며, 암기하는 것이 중시되었고 행정형태는 독단적이었다. 학문적인 죽은 지식이 산 지식을 대신하였다. 학생들은 배우도록 강요받았으나, 보고 듣고 생각하고 증명하도록 가르침을 받지 못하였다. 교사들은 가르치는 데 있어서 학생들의 인격이 조화 있게 계발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책정된 틀에 박힌 교과서만을 가르쳤다. 이러한 교육제도에 대해서 교육 역사학자 매콜리(Macaulay)는 이렇게 덧붙였다. "그들은 실행할 수 없는 것들을 숭상했고, 실행할 수 있는 것을 무시했다. 그들은 세상을 길고 긴 미사여구와 지루한 긴 턱수염(학구적인 것)으로 채웠으나 무지하고 죄악으로 편만한 세상을 바로잡지는 못했다."

3) 바벨론에서 온 교육제도와 학위제도

현시대의 교육제도 대부분은 천주교회의 제수이트 학교의 교육제도를 모방한 것이다. 제수이트 학교들의 교수 방법을 보면 현 교육제도와의 유사점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하게 될 것이다. 당시의 제수이트 학교들은 영국의 청년들을 그들의 학교에서 교육해 본토로 돌아가게 하여 그들의 종교를 장악하였으며, 이 교육제도는 미국에까지 널리 퍼지게 되었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현재까지 이어져 왔다. 현시대의 교육제도는 거의 제수이트의 교육의 본을 그대로 모방하고 따라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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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3부: 참 교육을 알고 계십니까?

교육에 대한 우리의 개념은 너무 좁다. 그리스도인들은 교육에 대한 더욱 넓은 식견과 더 높은 목적을 가질 필요가 있다. 요즈음 현 교육은 참교육의 목적으로부터 너무나 동떨어져 있고 왜곡되어 있다. 현시대에 교육의 목적은 좋은 지식과 체험을 습득하여 더 나은 사람이 되고 그 지식으로 인류를 위하여 봉사하고 인류와 세계를 향상하려는 의도보다는, 습득한 더 다양한 지식으로 더 높은 지위와 부와 재물을 확보하고 다른 사람의 위에 군림하여 피지배자를 지배하려는 권력의 수단으로 전락하여 버렸다.

진정한 교육의 목적은 영혼 안에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이다. 참교육은 어떤 전문적인 지식을 얻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참교육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며, 사람을 하나님의 성품으로 회복시켜 에덴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다. 참된 교육이란 전인 교육으로서 온전한 사람, 하나님과 똑같이 닮은 사람을 만드는 것이며, 사람의 지성과 덕성과 영성의 능력이 균형 있고 원만하게 발달하도록 하는 것이다. 참된 교육은 머리에 지식만을 주입해 넣는 지식 위주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올바른 인성과 인격과 품성을 지닌 완전한 사람으로 변화시키고 훈련하는 것이다. 참교육은 구속의 과학과 깊은 연관이 있다. 왜냐하면, 참교육을 이해하고 그 교육과정에 있는 사람만이 영원한 구원에 참여하며 더 높은 학교, 내세에 다가올 새로운 세계의 학교에 입학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교육의 개혁을 이루어야 한다. 참교육에 의한 정신 개조가 없이는 참된 신앙이 들어갈 수 없고, 이 세상에 전해져야 할 진리의 기별이 이해될 수 없다. 참교육에 의해 올바른 신앙과 정신과 영성을 가진 사람들이 생겨나야 이 세상에 복음 사업이 마쳐지고 예수께서 재림하실 수 있다. 참교육과 교육의 개혁에 대하여 함께 공부해 보자.

1) 최초의 학교 : 에덴

이 세상의 시작과 함께 세워진 교육 제도는 모든 시대의 인류 교육을 위한 모본이었다. 교육의 참된 원칙을 실제로 보여 주는 시범학교가 아담과 하와의 보금자리였던 에덴에 최초로 설립되었다. 에덴동산은 교실이었고 모든 자연계는 교과서였다. 창조주께서 친히 교사가 되셨으며 인류의 시조는 학생이 되어서 학교가 시작되었다. 천연계의 법칙과 생태계와 영적인 진리의 원칙들까지 그들은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으로부터 교육을 받았다. 에덴동산이 창조주의 손에서 지음을 받을 당시에는 온 땅이 한없이 아름다웠다. 완전한 창조를 훼손시킬 죄의 흔적이나 죽음의 그늘이 하나도 없었다. 땅과 세계는 지혜로우신 하나님에 대하여 연구하기에 적합한 표본과 대상이었다. 에덴 동산은 하나님께서 지구 전체가 어떻게 되기를 원하시는지 보여 주는 모본이었다. 하나님의 목적은 사람들이 그 수가 늘어남에 따라 세우게 될 다른 가정과 학교도 그렇게 되기를 바라셨던 것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지구는 하나님의 말씀과 그분께서 하신 일을 배우는 가정과 학교로 가득 차게 되고, 이곳 학생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세세토록 반사하기에 더욱 합당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었다.

2) 하나님의 교육 방법은?

1. 주입식이 아닌 실물 위주의 실제적인 교육

하나님의 교육 방법은 강요나 주입식이 아니다. 그분의 교육 방법은 이해와 자발적인 것에 바탕을 두는 교육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스스로 흥미를 느끼고 연구하며, 강요가 아닌 이해와 체험을 바탕으로 모든 것을 습득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로봇처럼 자신의 선택이나 의지의 유무나 생각의 여지 없이 무조건 하나님을 따르도록 강요하시거나 그분의 생각을 주입하시는 분이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인간이 스스로 머리와 지성으로 깨달아 선택하고 이해하도록 격려하시는 방법을 사용하신다. 하나님의 구원과 구속의 방법 역시 강요가 아닌 사랑과 이해이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인간을 강제로 이끄시거나 강요하지 않으신다. 사랑으로 이끄시고 우리 인간들이 그 사랑을 보고 이해하여 그분을 선택하도록 하신다. 참된 교육은 받아들일 만한 준비나 힘이 없는 마음에 주입식으로 교훈하는 것이 아니다. 지능이 일깨워져야 하며, 흥미에 의한 동기 유발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교육 방법이다. 사람의 두뇌를 만드시고 그 법칙을 정하신 하나님께서는 그 법칙에 따라서 두뇌가 발달하도록 계획하셨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으로 택하셨던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의 교육을 보라. 가정에서, 성소에서, 그리고 자연계에서, 우주와 천체계에서, 또 노동을 통하여, 거룩한 건물, 기념비, 또한 많은 규율, 예전(禮典)과 상징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실물 교훈을 주시고, 그분의 원칙들을 보이시고, 하나님께서 하신 기이한 일들을 기억하게 하시는 실제적인 교육방법을 사용하셨다.

2. 개별적이고 창의력에 바탕을 둔 교육

하나님의 교육 방법은 개별적이다. 그분께서는 개개인의 특성이나 개성을 무시하지 않으시며, 틀에 박힌 과정에 모두를 넣어 일률적으로 교육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교육 방법은 독창적이고 창의력이 있고 개성 있는 교육 방법이다.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개성을 흡수하여 무력하게 만드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 개개인을 특성별로 교육하시고 그 서로 다른 특성과 자질을 소중하게 여기는 방법을 사용하신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고 구원하시는 방법도 개인적이며 개별적이다. 각 사람의 다른 특성들을 고려하셔서 그 사람을 교육하시고 인도하시는 과정이 각각 다르다. 교육은 하나님의 방법대로 해야 한다. 현시대의 교육은 일률적이며 틀에 짜여 있고 매여 있다. 개성과 재능이 서로 다른 학생들을 일률적인 과정에 집어넣어 암기와 주입식으로 교육하는 것은 바람직한 교육이 아니고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다.

3. 가정을 통한 교육

학생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교육은 가정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아이의 첫 번째 교사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되어야 한다. 자녀는 부모로부터 제일 먼저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귀중한 교육을 받아야 하는데,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존경심과 신앙심이며, 어른을 공경하며 이웃을 사랑하고 예절과 예모 있게 사회에서 행동하는 법이다. 가정에서 올바른 인성교육을 받은 후에 지식을 쌓아야 올바른 인간이 되고 사회에 덕을 끼치는 사람이 되지, 인성교육이 제대로 되지 않은 사람에게 지식이 들어가면 그것은 재앙 수준이 된다. 아담과 하와는 최초의 학교에서 그들 앞에 생생한 실물 교훈들을 펼쳐 놓고 있는 천연계를 교과서로 하여 즐겁게 공부하였다. 수목과 산림과 나뭇잎과 꽃들, 산의 돌덩이, 하늘의 반짝이는 별, 땅과 하늘과 바다, 이 모든 것에 하나님의 성호(聖號)가 기록되어 있었다. 그들은 창조물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성품을 배웠던 것이다. 에덴에서의 교육은 가정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아담은 "하나님의 아들"(눅 3:38 영문 성경 참조)이었고, 하나님의 아들들은 그 아버지이신 하나님께로부터 교육을 받았다. 그것은 참된 의미에서 가정 학교였다. 타락한 인간의 조건에 적합하도록 세우신 하나님의 교육 계획도 가정을 중심으로 하는 교육이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리스도로 하여금 하나님과 사람을 연결하는 고리로서 하늘 아버지를 대표하는 인류의 교사가 되게 하셨다. 성육신 하여 오신 그리스도는 인류의 위대한 교사이셨다. 그분께서는 또 각 부모를 대표자로 임명하셨다. 가정은 학교이고 부모는 교사이다. 성경에서 믿음의 선조 시대에는 가정을 중심으로 한 교육이 일반적이었다. 신실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태초에 정하신 교육제도를 따랐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이 자신들을 위하여 도시를 건설하고 그곳에 모여 화려함과 사치와 교만과 죄악 속에서 살 때에, 하나님의 교육 방법을 따르고 하나님께서 주신 생활의 원칙을 굳게 지키는 신실한 사람들은 들과 산에 살면서, 밭을 갈고 가축을 치는 가운데 하나님을 묵상하고 연구하며, 자유롭고 독립적인 생활 속에서 하나님을 배우고 그분의 뜻과 방법들을 자녀들에게 가르쳤다. 가정은 학교이면서 또한 교회였으며, 부모는 세상 일과 종교적인 면에서 교사였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 가운데 확립하려고 하신 교육 방법이었다. y

신앙 2부: 당신의 사회 생활은 어떻습니까?

사람이 예수를 받아들이고 새로운 사람이 되었을 때 나타나는 것이 생활반경에서의 변화와 개혁이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변화는 교제와 사회생활(social life)의 성격이다. 이제는 새로운 성향과 성격을 가지게 된, 이제는 취미와 기호가 달라진 거듭난 사람에게 있어서 옛 생활을 청산하는 일과 이전의 생활 방식을 바꾸는 일은 당연한 일이다. 새로운 피조물이 된 거듭난 그리스도인에게 이전의 좋던 것이 싫어지고, 예전에 싫던 것이 좋아지는 경험은 반드시 일어나기 때문이다.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이 살아야 할 사회생활과 생활방식에 대한 지침, 곧 하나님께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그분의 자녀가 살기를 원하시는 사회생활의 지침을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함께 읽어보자.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셨느니라"(고후 6:14~18).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우리의 사회생활

1) 교제의 개혁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하나님께서 그분의 자녀들이 살기 원하시는 생활방식의 첫 번째 지침은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는 것이다. 도대체 이 구절의 의미가 무엇인가?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매지 말라는 뜻은, 믿지 않는 사람과 함께 일하지 말라는 말이다. 무슨 일 말인가? 그것은 믿지 않는 사람과 함께 악한 일을 도모하지 말라는 말로서, 어둠의 일, 죄악적인 일에 함께 참여하지 말고 다시 옛날처럼 죄 된 생애를 살지 말라는 뜻이다.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너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예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엡 5:8~11). 성경은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은 육신의 일과 어두움의 일을 벗어나 빛의 일을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참된 신앙을 하는 사람은 세속적인 일에 더 이상 관심이 없어진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거듭난 경험을 한 사람에게 과거의 삶과 생활은 더 이상 재미가 없는 것이다. 예전의 친구들을 만나 나누던 관심사와 이야기들에 이제는 전혀 공감하거나 흥미를 느끼지 않고 오히려 영적인 갑갑함을 느끼게 된다. 이제는 믿지 않는 사람들과 어울리고 관계된 "어두움의 일"들, 세속적인 일들이 더 이상 흥미가 없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교제 생활의 성격과 질은 반드시 개선되어야 한다. 세속적인 교제와 세속적인 습관들은 교정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께 대한 사랑과 헌신을 감소시키는 불신자들과의 교제를 경계해야 하며, 그들과 나누던 세속적인 일들에서 벗어나야 한다. 허황된 쾌락을 추구하는 일이나 험담을 하는 일, 또한 당을 짓고 술수를 도모하여 다른 사람들을 해하고 비판하는 일들에서 자신을 지켜야 한다. 신앙인이라고 공언하는 수많은 사람이 어두움의 일에 참여하는 이유는 거듭남과 경건의 부재이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에 합당하지 않은 교인들이 많다. 그들은 그리스도인 품성을 소유하고 있지 않다. 진정한 경건은 매일의 품행 속에서 나타난다. 그리스도인의 생애는 다른 이들에게 선을 행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열렬하게 이기심 없이 일하는 것으로 특징지어진다. 새롭게 거듭난 사람들은 이제 다른 친구들이나 사람들을 만나는 이유가 예수님을 증거하고 전도하기 위한 것이 목적이 될 것이며, 더 이상 불신자들과 어울려 세상의 일을 도모하는 것이 교제의 목적이 되지 않을 것이다.

2) 직장과 일의 개혁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구약에 나오는 대속죄일에 이스라엘 백성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을 돌아보고 괴롭게 하는 일만을 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예수께서 재림하시기 전 마지막 시대인 영적 대속죄일의 기간에 살고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이스라엘 백성과 같이 행해야 한다. 즉, 예수님의 재림을 위해 자신이 준비되었는지 철저하게 살피는 생활을 살아야 한다. 그리고 아무 일도 하지 말아야 한다. 여기서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무슨 뜻인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살 수는 없다. 일해야 하고 생계를 위해 직장을 가져야 우리는 살 수 있다. 그 뜻은 우리의 직장과 일은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일을 방해하는 일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의 종사하는 사업이나 직장이나 일이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을 섬기고 따르는 길에 저촉되거나 맞지 않으면 우리는 과감하게 그 직장이나 일을 버려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의미에서 파수꾼과 빛을 전하는 자들로 세상에 세움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인 생애의 목적은 진리의 복음을 전하여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직장은 하나님의 영광을 잘 나타내고 그리스도인 생활에 저촉이 없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꾼과 증인이 되는 것은 단지 진리를 전하거나 문서를 전하는 것만이 아니다. 그리스도를 전하는데 가장 강력한 논증은 그리스도를 닮은 생애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고백하는 사람들이 그들의 생각과 말과 행동에서 주님을 나타내기를 원하신다. 그리스도의 종교는 행하고 말하는 모든 것에 일치하여야 한다. 모든 사업 거래는 정직하고 진실하여야 하며, 직장과 일에서 성실과 근면과 정직의 모본이 되어야 한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이 종사하는 사업은 하나님을 나타내는 일이나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일과 저촉되는 경우가 있다. 성경은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일과 직장은 하나님의 뜻대로 개혁되어야 한다. 만일 그 일이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일을 방해하고 신앙에 반대된다면 기꺼이 그 일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신앙대로 살 길을 열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자비가 많으신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뜻대로 살기 위해 결심하는 영혼들을 버리지 않으시고 길을 열어주실 것이다. 신앙은 겉표지만의 장식품이 아니다. 신앙은 우리의 직장에, 일에, 우리의 사업 거래 관계에서 진실하게 나타나야 한다.

3) 취미 생활의 개혁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뜻과 맞지 않는 모든 취미 생활은 기꺼이포기할 것이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는다고 하는 교인들이 세상 사람들이 하는 것과 똑같이 살고, 취미나 기호가 세상 사람들과 똑같다면 문제가 있다. 진짜 그리스도인이라면, 신앙의 부흥과 영성을 소유하기 원한다면, 자신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영적 생활을 해치고 소홀하게 하는 세상의 헛된 취미들은 버릴 것이다. 독서, 특히 세속적이고 허황한 이야기들로 채워진 책들을 읽는 것은 영성과 정신을 갉아먹는 지름길이다. 영혼을 아름답게 가꿀 수 있고 주님께로 더 가까이 이끄는 좋은 양서들을 읽는 습관을 배양하자. 특히 매일 아침 성경을 읽고 마음을 주님께 바치는 습관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또한, 좋지 않은 감정을 유발하는 세속적인 음악을 듣는 것, 세상의 영화나 드라마를 보는 것, 건전한 휴양이 아닌 세상의 쾌락을 추구하는 놀이, 경쟁심을 격발시켜서 예수님의 성품을 이루지 못하게 방해하는 격렬한 스포츠들을 보거나 거기에 참여하는 일들은 그리스도인이 영적 부흥을 이루기 위해 반드시 피해야 할 것들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좋은 취미들을 기르도록 하자.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는 일, 성경의 주제들을 찾아 공부하여 진리를 깊이 아는 일, 아침마다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는 헌신의 시간을 갖는 일, 야외에 나가 하나님의 창조물을 깊이 연구하고 거기서 영적인 교훈을 얻는 일, 우주나 천체의 사물들을 공부하는 일, 하나님을 명상하고 대화하는 일, 건강에 유익한 옥외의 운동과 전원생활과 텃밭을 가꾸는 일과 농사짓는 일,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찾아 하는 사회봉사 등, 정신과 건강과 영적 생활에 유익한 좋은 일들을 취미로 만들자. y

신앙 1부: 바른 복음이 개혁을 가져온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지만, 세상 사람들과 별 차이가 없다. 그 이유는 그들이 믿는 진리와 신앙이 그들의 생애를 변화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믿고 있는 바와 일치되지 않는 신앙생활은 산 능력이 없는 이름 뿐의 종교이다. 복음이 세상에 능력 있게 증거되지 못하는 이유는 변화와 개혁이 없는 그리스도인의 생애 때문이다. 세상은 변화된 그리스도인들을 보기 원한다. 그들은 종교가 사람의 삶에 참된 변화와 개혁을 가져오는 것을 보기 원한다. 진짜 신앙은 부흥을 가져온다. 그리고 그 부흥에는 반드시 철저한 개혁이 뒤따른다. 곧 알고 있는 진리에 마음을 다하여 순종하는 일이 뒤 따른다는 말이다.

우스운 예화가 하나 있다. 어떤 목사님이 교회에서 열심히 설교하고 있었다. 그 열렬한 설교가 마치자 감화를 받은 교인들이 힘차게 "아멘"을 외쳤다. 그러자 갑자기 그 목사님의 사모님이 이불을 들고 설교단 위로 올라오는 것이었다. 어리둥절하고 있는 교인들과 남편 앞에서 그 사모는 이불을 펴며 큰 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여보, 우리 집에 가지 말고 여기서 삽시다!" 교회에서의 모습과 집에서의 모습이 너무나 다른, 설교와는 정 반대로 사는 목사 남편이 너무나 힘들었던 그 사모는 그렇게 외친 것이었다. 교회에서는 남편이 자신이 하는 설교처럼 행동하고 말을 하니 교회 안에서만 살자는 이 사모의 말은 우리에게 쓴웃음을 던져준다. 비단 이 예화 속의 목사만이 아니라 대부분 그리스도인의 생애가 그렇지 않은가? 무엇이 문제인가? 무엇이 신앙과 삶을 갈라놓는가?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에서 가장 주된 이유는 기독교 안에서 가르쳐지고 있는 복음과 가르침에 스며든 비진리 때문이다.

1) 바른 진리는 신앙의 개혁을 가져온다

오늘날 기독교회 안에 전해지는 복음과 가르침을 들어보라. 거기에는 도덕적인 설교,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위로 설교, 교인들 스스로 자신의 영적 상태에 대해 만족하게 하고 거짓 구원의 확신을 심어주는 기만적인 평안의 설교 등은 있어도, 참된 회개와 전격적인 변화와 개혁과 순종을 촉구하는 설교와 가르침은 거의 없다. 진정한 변화와 개혁이 생기려면 먼저 바른 복음과 가르침이 기독교 안에 있어야 한다. 현재 기독교 안에 난무하고 있는 복음의 가르침들은 참된 부흥과 개혁을 가져오는 일을 저해하고 있는 주된 요인이 되고 있다. 그러므로 교회에, 그리고 그리스도인 개인의 생활에 영적인 변화와 부흥과 개혁을 원한다면, 먼저 올바른 진리의 가르침과 복음을 알아야 한다. 바른 진리가 개혁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2) 값싼 은혜는 개혁을 저해한다

값싼 은혜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의 생애에 전격적인 변화와 개혁이 오기란 쉽지 않다. 믿기만 하라, 은혜로 다 구원해 주신다는, 믿음으로만, 은혜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값싼 은혜의 가르침은 사람을 편안하게 하고 거짓 소망을 주어 위로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죄 된 상태를 진정으로 깨닫게 하거나, 철저하게 회개하게 하거나, 죄를 완전히 포기하여 하나님께 드리게 하거나, 하나님의 뜻과 계명에 온전히 순종하게 하는 참된 개혁을 가져오지 못한다. 아니, 가져올 수 없다. 왜냐하면, 이 가르침은 은혜의 온전한 의미를 왜곡하여 가르치는 반쪽 복음이기 때문이다. 이 값싼 은혜의 가르침은, 하나님의 덮어주시고 죄를 용서하시는 은혜만 강조할 뿐, 정말 중요한 인간의 편에서 하나님께 마땅히 드려야 할 100%의 굴복과 인간이 반드시 해야 할 순종을 강조하지 않는다. 그뿐만 아니라 진정한 은혜의 의미(은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자비와 사랑으로 우리의 죄를 다 용서해주실 뿐 아니라, 새 마음을 주셔서 다시는 그 똑같은 죄를 범하지 않도록 해주시는 능력이라는)를 가르치지 않는다.

값싼 은혜의 가르침을 계속 믿으면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남용하고 과신하게 되어, 회개하고 자신의 죄를 버리고 승리하게 하는 대신, 하나님께서는 조건 없이 용서를 주시고, 또 은혜로 모든 죄를 덮어주시니 주님의 자비만 바라고 그냥 이대로 살면 된다는 식의 안일한 신앙에 빠지게 된다. 그럴 때 신앙의 부흥과 개혁은 거리가 멀어지는 것이다. 자신의 상태가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나은 상태이며, 비록 그렇지 못하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은혜로 다 덮어서 구원해 주시니 새롭게 변화될 필요성을 어떻게 느끼겠는가? 값싼 은혜의 복음은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3) 한 번 구원 받으면 영원히 구원은 내 것?

이 가르침이야말로 위험천만한 가르침이다. 어떻게 이런 잘못된 가르침이 기독교에 침투할 수 있었는지 매우 의아스럽다. 예수를 영접하고 받아들일 때 구원은 이루어진 것이고, 한 번 구원받으면 결코 그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는다는 가르침을 믿는 사람이 왜, 무엇 때문에 변화와 개혁이 필요하겠는가? 변할 필요도, 어떤 것을 주님을 위해 포기하고 버려야 할 필요도, 새롭게 개혁하고 개선할 필요도 느끼지 않도록 기만시키는 것이 이 가르침이며, 이것이야말로 바벨론의 포도주이다.

사도 바울은 분명히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라고 권고하였다. 구원은 한 번 따 놓으면 영원히 내 것이 되는 게 아니다. 어떻게 보면 구원은 조건적이다. 구원은 우리의 굴복, 매일 예수님과 산 관계를 맺는 일, 또 그분의 임재 속에서 그분의 뜻대로 순종하고 복종하며 사는 일이 함께 수반되어야 하며, 주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만이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용서함을 받고 구원을 얻었다면, 그 보혈의 공로로 매일 죄를 이기며 순결하고 정결한 생애를 살아야 구원이 유지될 것이 아닌가? 이 가르침을 믿는 사람은 참된 개혁을 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하며, 거짓 구원의 안일한 기만 속에서 구원을 잃어버리게 된다.

4) 예정설은 개혁을 방해한다

어떻게 살든, 무슨 일을 하든 간에 자신은 구원받기로 예정되었기 때문에 구원을 놓칠 수 없다고 믿는 그리스도인만큼 위험한 사상을 가진 사람은 없다. 물론 어떤 사람은 좋지 않은 환경과 유전적인 기질 속에서도 하나님을 찾고 회개하여 경건하고 신실한 생활을 사는 경우가 있다. 또 어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영적이고 신앙적인 좋은 사람이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예정함과 택하심을 받고 태어난 것이라는 증거는 되지 못한다. 그 모든 일은 성령의 역사 하심의 결과이며, 그 사람이 그 성령의 역사에 마음을 열어 굴복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예정설이야말로 진정한 신앙의 부흥과 개혁을 방해하는 가르침이다. 진정한 신앙을 가진 사람은 무모한 예정설을 신봉하지 않는다. 내가 어떻게 살든 상관없이 구원받기로 택하심을 받았으므로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로 구원을 받는다는 가르침을 믿고 과신하는 대신, 혹시라도 나의 삶으로, 나의 행동과 말로 사랑하는 주님께 욕 돌리게 되지는 않을까 하여 존절하게 자신을 지키고 세상에 물들지 않게 마음을 살피며 경건하게 살아간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자신을 복종하고 순종하는 생애를 산다. 예정설은 참된 개혁을 저해하는 잘못된 가르침 중의 하나이다.

5) 원죄설은 개혁하지 못하게 한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아담의 죄를 타고났으므로 그 원죄로 말미암아 태어난 그 자체가 죄인이라고 믿는 사람들의 신앙생활에는 참된 변화와 개혁이 올 수 없다. 무슨 힘으로도 어떤 노력으로도 자신의 태어난 죄 된 상태를 바꿀 수 없다고 믿는 사람은, 어차피 죄인으로 태어나 죄인으로 살다가 죽으므로 인간이 어떤 노력을 하거나 수고를 한다 해도 별 차이가 없다고 생각하게 되므로, 큰 변화 없이 그냥 예수님만 믿으면 된다는 맹목적인 신앙 안에서 산다. 원죄설을 믿는 사람은 죄는 인간의 의지로 선택하는 것이라는 "죄의 정의"를 알지 못한다. 죄를 이기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과 성령의 역사 하심에 순복하여 하나님의 편을 매 순간 선택하므로 죄를 승리할 수 있다는 진리, 또한 인간의 의지의 힘과 의지를 하나님의 편에 둘 때 일어날 수 있는 놀라운 구속의 신비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원죄설을 믿는 사람은 변화할 필요성을 깨닫지 못한다. 태어난 자체가 정죄 받은 죄인이므로, 또 그 원죄 때문에 지옥으로 간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죄를 짓는 것이고 선하게 살아도 죄인이므로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을 얻는 것이라고 믿는다. 원죄설이야말로 신앙의 참된 변화와 개혁을 저해하는 큰 요소가 되고 있다. 5) 진리와 일치하는 삶은 개혁의 선봉이다 현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머리로만 믿고 또 입으로만 시인하면, 곧 믿는다고 말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리고 그렇게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에 영적인 안일함 속에서 별 변화나 개혁을 추구하지 않고 안주하려는 타성적인 신앙에 빠져 있다. 그러나 참된 신앙은 머리로 믿는 것만이 아니며, 입으로 시인만 하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신앙에는 철저한 돌이킴과 회개와 개혁이 뒤따라야 한다. 곧 생활과 삶 전반에 걸쳐 전격적인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예전의 생활방식이나 사고방식, 그리고 사상과 생각이나 언어와 복장에 변화가 일어나야 하며, 예전의 관심사와 사업상의 태도와 식생활과 사회생활 전반에 걸친 일들에 총체적인 변화와 개혁이 뒤따라야 한다.

우리는 입술로만 진리를 믿는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진리가 우리를 거룩하게 변화시키지 못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믿는다고 공언하는 진리와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진리를 믿는 우리의 믿음은 우리의 생활과 성품을 통해서 증거될 만큼 능력 있고 산 신앙이 되어야만 한다. 참된 신앙과 믿음은 온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행함과 순종으로 나타나며, 믿고 있는 진리와 일치한 삶으로 증명된다. 믿는 바대로 행하고 사는 것이 개혁이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몸소 실천하는 생활, 죄와는 상관이 없는 순결한 생애를 사는 일, 거래와 사업상의 관계에서 정직하고 진실하게 행하는 것, 세상의 쾌락을 따라 방종한 생애를 끊는 것, 예수님보다 더 사랑하는 모든 우상을 버리는 것, 담화와 대화에서 경건과 신실함을 나타내는 것, 세상의 재물이나 명예를 탐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인정과 임재를 더 갈망하는 것, 이렇게 사는 생활이 진리와 일치하는 삶을 사는 것이고, 이렇게 사는 것이 개혁을 이루며 사는 참된 신앙의 삶이다. y

삶의 작은 간증: 별아 이런 여인이 되렴

엄마, 오늘 학교에서요&"

딸 아이가 학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집에 돌아와 나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주로, 누가 자기에게 어떻게 했고, 누구는 또 다른 친구에게 어떻게 했다는 이야기였다. 그 꽃봉오리 같은 입술로 꽃이 필만한 이야기를 할 법도 한데, 온통 딸아이는 보고 들은 것을 엄마에게 전해주느라 윙윙 소리를 내는 벌처럼 바쁘기만 하다. 어떤 이야기들은 열심히 공감하며 들어주고 또 함께 생각해 보기도 하지만 고자질 같은 이야기는 못 하도록 타일렀다. 딸 아이가 학교에 다닌 지 이제 일 년이 다 되어간다. 요즘은 딸 아이의 입에서 다른 아이들에 대해 안 좋은 이야기하는 것을 듣지 못한다. 감사한 일이다. 내가 딸 아이에게 안 좋은 이야기는 하지 말도록 하고 좋은 이야기들을 하도록 교육하게 된 동기는 내가 좋아하는 다음의 이야기 때문이다.

온유하고 겸손한 한 여인이 있었다. 그러나 그녀와 남편 사이에는 아이가 없었다. 그래서 그 당시 많은 사람이 그렇게 했듯이 남편도 후처를 들여 아들과 딸들을 낳았다. 하지만, 남편은 품성이 아름답고 경건했던 본처를 더욱 사랑해 주었다. 질투심이 강하고 마음이 좁으며 오만하고 불손하기까지 한 후처는 자기가 아이들을 낳았으니 본처보다 더 나은 대우를 당연히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고 아이가 없는 본처는 마치 버림받은 여인이나 마찬가지라며 괴롭혔다. 이런 시련을 조용히 견디던 본처는 어느 날 후처에게 심한 말을 듣고 울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이런 사정을 아는 남편은 본처를 여러 말로 위로했다. 그리고 본처의 입에서는 아무런 불평이나 비난의 말을 들을 수 없었다. 이 여인은 세상의 친구와 나눌 수 없는 고통과 괴로움을 하나님께만 가져갔다. 그리고 얼마 후, 아들을 낳게 되었고 그 아들의 이름을 사무엘이라고 하였다. 바로 성경 사무엘서에 나오는 한나의 이야기이다. 이 말씀은 나에게 내가 어떤 여인이 되어야 하며 또 나의 딸을 어떤 여인으로 키워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었다.

솔직히 생각해 보면, 억울하고 마음 상한 일을 당했을 때는 누구라도 내 입장을 알아주었으면 좋겠고 억울함을 어떻게든 풀어보고 싶기도 하다. 그리고 그런 일들을 제일 먼저 말할 수 있는 대상이 배우자일 것이다. 배우자에게 말을 하고 나면 그다음 사람에게 말하는 것은 더 쉬워질 것이다. 이미 한 번 소소히 남편에게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연습을 했기 때문이다. 첫걸음을 어디다 내딛느냐는 그래서 아주 중요하다. 한나는 사람에게 억울함을 호소하는 길에 발을 놓지 않았다. 한나는 남편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하나님께 달려갔다. 그리고 그저 눈물로 하나님 앞에 꽃을 피웠다. 그 꽃이 피고 씨가 날려 아들 사무엘도 12살의 어린 나이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들을 수 있는 열매가 된 것이 아닐까!

내가 하지 못하는 것을 아이에게 하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래서 나도 어떤 말들을 하고 싶은 유혹을 받을 때는 성령님께서 내 마음에 말씀해 주시는 음성을 먼저 듣는 연습을 하고 있다. 나도 많은 연습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연습이 내 성품이 되는 날이 올 것이다. 한나처럼 말이다. 향기나는 꽃이 될 수 있는 말만 해야겠다. 그래야 내 딸 아이도 씨를 받아 향기나는 꽃이 되고 후에 좋은 열매가 될 것이다. 별이 집에 돌아오면 품에 안고 한나 이야기를 다시 들려주어야겠다. y

가정, 건강 그리고 행복: 육류, 살펴 보셨습니까?

1996년 3월 20일 수요일, "광우병"이 전 세계 신문의 머리기사를 장식했다. 영국의 과학자들이 소의 치명적인 질병이 인간에게 전달된다는 것을 밝힘으로써 충격의 파장이 시작되었다. 이 뉴스는 영국 육류 산업에 실질적인 정지 상태를 가져왔다. 영국 사람들은 육류 시장을 피했다. 유럽 연합 전체에서 영국의 쇠고기를 거절했다. 광우병, 조류인플루엔자, 구제역처럼 동물계에 질병들이 난무하지만, 현대인들은 여전히 엄청난 양의 육류를 섭취하고 있다. 미국인의 경우, 한 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21마리의 소, 14마리의 양, 12마리의 돼지, 900마리의 닭, 그리고 1,000파운드의 물고기와 새 종류를 먹는 것으로 집계되었다. 해마다 참으로 엄청난 양의 육류가 인간의 식탁 위로 올라오고 있는데, 경제적으로 부유한 나라들은 대개 미국과 유사한 육식 현황을 나타내고 있다. 동물계의 질병이 그 한도를 넘어서고 있는 이때 육류에 대해서 살펴보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유익을 준다.

육류 비지니스

24시간마다 약 십만 마리의 소가 도살되어 사람들의 식품으로 만들어진다. 통계에 의하면, 7살 난 어린아이는 일주일에 약 1.7개의 햄버거를 먹으며, 13살의 소년은 일주일에 약 6.2개의 햄버거를 먹는 것으로 나타났다. 해마다 6억 7천만 개의 햄버거가 팔리고 있는데, 이것은 매초 200명의 사람이 햄버거를 사 먹는 것이 된다.

고기 속에 숨어 있는 항생제

1974년, 미국인들이 먹고 있는 식품 중에 포함된 화학물질인 식품첨가제의 양이 약 십억 파운드에 육박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러한 양은 한 사람에게 약 5파운드 이상의 식품첨가제가 분배된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데, 지난 20년 동안 식품첨가제의 양과 종류는 급속도로 증가해왔다. 식용 동물을 짧은 시간에 더 많은 무게를 나가게 해서,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각종 호르몬을 이용하여 정해진 시간 내에 더욱 빠른 성장과 더 많은 고기를 얻어내는 기술이 급진 되어 왔다. 1970년 한 해 동안, 미국 내에서만 약 1,300톤의 항생제가 가축들에게 투여되었다. 오늘날 사용되는 동물 사료의 99%에는 각종 화학적 첨가물이 함유되어 있다. 세계보건기구에서 발간한 책자에 의하면, 이제는 항생제가 물고기와 닭고기를 장기간 보존하기 위한 방부제로도 사용되고 있다. 도살 공장에서 도살된 닭들은 즉시로 약품 속에 담가지며, 물고기들은 바다에서 잡히는 즉시 항생제 용액이 담긴 통에 보관된다. 때때로 육우들은 도살되기 직전에 항생제가 투여됨으로써, 고기와 피에 항생제가 스며들어 가게 만들기도 한다. 만일 사용된 약품과 항생제들이 완전하게 제거되지 않는다면, 식품으로 포장된 고기 속에 이러한 약품과 항생제들이 남아 있게 된다. FDA에 의해서 허가된 약 1000여 종 이상의 약품들과 화학물질들이 동물의 고기를 식품화하는 과정에 사용되고 있다. 동물의 고기가 상업화되고, 엄청난 이윤이 육류 산업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정부와 식품회사들은 여러 가지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이러한 약품과 항생제들의 사용을 밀고 나가고 있다. 그러나 1974년~1976년 사이에 미 농림부에서 임의로 선택한 육류의 14%에서 한도 표준을 넘어선 양의 약품과 살충제들이 확인되었다는 보고서가 발표되었다. 그 보고서에서도 동물의 고기를 식품화하는 과정에 사용되는 약품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였다.

암과 육식

지난 100년 동안, 육류의 사용량이 4배나 증가하여 왔다. 우리의 인체는 우리의 입으로 섭취하는 것들로 유지되고 구성되는데, 대부분 질병은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먹는가에 따라서 발생한다. 현대인의 무서운 질병인 암 역시 우리가 먹는 식품과 깊은 관련이 있다. 오늘날 현대인들이 선호하는 동물성 식품에는 몇몇 종류의 발암물질들이 포함되어 있다. 육류에 포함되어 있는 화학물질들은 신체 내에서 여러 가지 부정적인 결과들을 가져오는데, 특히 고기의 변색을 방지하기 위해서 사용되는 아질산염(sodium nitrite)은 신체의 건강에 치명적인 해를 가할 수 있는 것으로 분류될 수 있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식품 속에 함유된 아질산염과 암의 발병 사이에는 분명한 연관이 있다는 사실이 동물 실험을 통해서 확인되고 있다는 것이다. 아질산염은 핫도그, 햄, 베이컨, 그리고 포장된 육류에 사용된다.

질병에 시달리는 가축들

사람들의 질병의 종류가 급속하게 늘어나는 것처럼, 동물계도 여러 가지 질병에 시달리고 있다. 도살장에서 도살되는 소 중 약 10~30%에 해당하는 소의 간에서 종양이 발견되고 있다. USDA에서 발표한 보고서에 의하면, 눈 암에 걸려 있거나 각종 종양에 걸려 있는 소들의 고기가 수백만 파운드씩 슈퍼마켓으로 나오고 있다. 도살된 소는 눈으로 판별하여 병든 부위만을 제거한 다음, 나머지는 그대로 슈퍼마켓의 매장으로 나가게 된다. 정부와 도살업자들은 병든 부위를 제거하면, 나머지 부분은 인체의 건강에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는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과학적으로나 의학적으로 전혀 설득력이 없는 설명이다. 정부 보고서에 의하면, 한 해 동안, 암에 걸려 있거나 결핵에 걸려 있는 2백 4십만 마리의 소들이 병든 부위만을 제거한 채 그대로 식품으로 팔려나가고 있다고 한다.

지금은 결정해야 할 때

치명적인 질병에 걸리기 전에 생활 습관을 바꾸어야 한다. 질병에 걸려서 의사로부터 육식을 중단해야 한다는 말을 들을 때까지 기다려서는 안 된다. 선진국의 지식인들 중 육식을 끊고 채식을 선택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급증하고 있는 것은 그들이 육류가 더는 안전한 식품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채식으로 맛있고 영양이 풍부한 식단을 꾸밀 방법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생각해 보아야 한다. 다양한 종류의 과일, 통곡류, 견과류, 야채에 초점을 맞추고 식단을 준비하는 분들에게 건강의 복이 흘러들어오게 될 것이다. 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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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두언

개혁이라는 단어는 많은 면에서 다양하게 쓰이고 있는 단어입니다. 정치 개혁, 시장 개혁, 교육 개혁 등등 말입니다. 개혁이란 현재의 틀에서 더 나은 방향으로 바꾸자는 뜻이겠지요. 옳지 않은 것들, 맞지 않는 것들, 해로운 것들을 고치고 원칙과 올바름을 향해서 나아가자는 의미입니다.

사람들은 개혁을 싫어합니다. 현재의 편안하고 안일한 형편에 안주하고 싶어하는 것이지요. 무엇을 바꾸고 새로 판을 짠다는 것은 참 귀찮은 일이요 불편한 일입니다.

종교도 그러합니다. 오랫동안 익숙해 있던 가르침, 오랫동안 익숙해 있던 신앙 습관들에서 돌아서서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항상 잘못된 길에서, 잘못된 사상과 생활에서 회개하여 돌이키라고 촉구하고 있습니다. 이 일은 자존심을 꺾어야 하는 일이요, 편안함을 떨쳐 버리고 분연히 일어나야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맞지 않다면 직장도 버리고, 친구와 가족들도 버리고, 오래 지켜왔던 전통들도 뒤로 한 채 진리를 쫓아 개혁의 길을 따라야 합니다. 바꾸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이 찾는 큰 길이 아니라,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은 좁은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하나님보다 더 소중히 여기는 것들이나 사람들이 있으면 안 된다고 하십니다. 모든 것을 미워하지 않으면 내게 합당치 않다고 명령하십니다. 하나님을 믿고 따라가는 길은 개혁의 길입니다. 죄의 길에서 돌아서야 합니다. 아무리 오랫동안 그렇게 생각해 왔더라도 성경에 맞지 않으면 단호하게 버리고 빛을 택해야 합니다. 이러한 간절하고 진실한 선택이 없다면 그것은 진리를 사랑하는 영적 스태미나를 잃어버린 상태라는 뜻입니다.

종교개혁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칼빈, 루터, 웨슬리, 낙스 등등 종교 개혁자들은 그저 시작한 것에 불과합니다. 그 후손들이 계속 말씀의 빛을 따라 개혁해 나아가야 합니다. 세상이 분요합니다. 이제는 끝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종교개혁을 완성하는 교회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여자의 남은 자손들, 참된 교회라고 성경은 그들을 지칭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사람들입니까? y

사랑의 편지: 노래 부르는 우주

우주에는 셀 수 없는 수백억 개의 많은 별과 행성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행성들은 자신만의 고유의 음을 가지고 있어서, 회전할 때 아름다운 음을 냅니다. 그리고 이 음들은 서로 조화되어 아름다운 화음을 이루어 냅니다.

우주의 음악을 들었던 사람

아무나 들을 수 없는 이 아름다운 우주의 음악을 들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그리스의 철학자와 수학자였던 "피타고라스"였습니다. 만물의 근원을 "수"(숫자)로 보았던 피타고라스는 천체의 운동에도, 거문고 줄의 길이에도 모든 수의 법칙이 적용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음악이 수의 비례와 관계가 있으며, 음의 높이도 수학적인 비율에 의하여 나누어진다고 주장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현의 길이를 2:3의 비율로 분할하여 완전 5도의 음정을 고안해내었습니다. 이것을 "피타고라스 음계"라고 하지요.

천문학자이기도 했던 피타고라스는 하늘의 별들이 움직일 때 음악 소리가 난다고 믿었습니다. 피타고라스는 그 당시 신비의 장막으로 불렸던 하늘, 우주를 음악으로 풀이한 재미있고 흥미로운 학자였습니다. 그가 쓴 "천구의 음악"이라는 이론에서 그는 우주는 어떤 법칙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우주의 행성들을 하늘의 둥근 공 같다고 하여 "천구"라고 불렀는데, 각 천구의 내부에는 하나, 혹은 두서너 개의 천체가 붙어 있어 태양과 우주의 중심을 향해 천구와 함께 돈다고 생각했습니다.

피타고라스는 행성들의 회전하는 속도는 우주의 중심으로부터의 거리에 따라 달라진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천구들이 돌 때에 나는 소리는, 중심에서 가까운 구는 저음의 음악이 나오고, 빠른 것에서는 고음이 나온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각 행성은 자기 고유의 음이 있어서 운행할 때 우주에 아름다운 화음이 울린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천구들이 돌 때에 서로 마찰이 생겨서 그것 때문에 절묘한 화음이 발생하는데, 그 음악은 아주 아름다운 화음과 조화를 이룬 음이며, 이로 인해 온 우주는 음악으로 가득 차 있다고 했습니다. 그는 벌써 그 옛날에 각 행성의 거리 비례와 그에 따른 음정까지 그림으로 고안하여 도표를 그릴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이 우주의 음악을 서로 화음이 되는 조화의 음악이라고 불렀습니다.

우주의 노래를 들은 또 다른 사람

그런데 이 우주의 음악에 대하여 알았 던 사람은 피타고라스 한 사람만이 아니었습니다. 독일의 수학자이며, 천문학자이고, 굴절 망원경을 처음으로 발명한 요하네스 케플러도 피타고라스와 똑같은 주장을 하였습니다. 케플러는 행성운동법칙으로 유명한 천문학자로서, , 등, 천문학에 대한 많은 저서를 남겼고, 그의 저서들은 아이작 뉴턴이 만유인력의 법칙을 확립하는 데 기초를 제공하였습니다.

케플러는 피타고라스의 천구의 음악 이론을 이어받은 학자였습니다. 그도 피타고라스의 말대로 행성들에는 고유의 음악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케플러는 "이 하늘의 음악은 귀로 들을 수 있는 음악이 아니며 지성으로만 이해할 수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아마 케플러는 우주의 음악은 귀가 아니라 마음으로만 들을 수 있는 음악이라는 것을 알았나 봅니다. 그는 "행성의 운동에 관한 법칙"을 세 가지나 창설한 학자였는데, 세 번째 법칙을 기술한 책에, 각 행성의 속도는 음계의 어떤 음정에 해당한다고 했습니다. 그는 심지어 각각의 행성이 태양 주위를 움직이면서 내는 음정을 악보로 그려내기도 하였습니다. 각 행성이 자기 궤도를 돌 때, 하프 현을 튕기는 듯한 음악 소리가 난다고 주장했던 그는 마음의 귀와 영감으로 우주의 음악을 들었던 사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의 말대로 행성의 궤도가 하프 현이라면, 태양에서 가장 가까운 수성은 현이 짧고, 태양에서 먼 토성은 현이 깁니다. 그래서 현이 짧은 수성은 높은 소리를 내고, 토성은 현이 길어 낮은음을 냅니다. 그래서 케플러는, "토성"은 베이스 음을 내고, "수성"은 높은 소프라노 음을 낸다고 믿었습니다.

우주의 음악 속에서, 각 행성이 도는 속도가 음표의 어느 것과 부합한다고 믿었던 케플러는 "화성"의 음은 "도"와 "솔", "목성"은 "미", 지구의 음은 "파"와 "미"에 해당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참 흥미롭지요? 마음으로 우주의 음악을 들었던 그는 "이 소리의 교향곡으로 우리는 한 시간도 못 되는 짧은 시간에 영원한 시간을 연주하시는 위대한 예술가인 하나님의 기쁨을 조금이나마 맛볼 수 있다"라고 외쳤습니다. 케플러는 행성들의 회전주기를 기조로 한 "천구의 음악(Music of heavenly sphere)"을 작곡하기도 했습니다.

우주의 노래를 들을 수 있는 사람

우주의 노래를 듣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주의 노래는 하늘의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진 사람에게만 들립니다. 우주의 연주는 하늘의 음악을 이해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만 들립니다.

우주의 노래는 위대한 연주가이신 하나님과 똑같은 주파수를 가진 사람만 들을 수 있습니다. 우주의 노래는 하나님과 똑같은 파동을 가진 사람만이 즐길 수 있습니다. 우주에 가득 찬 하나님의 아름다운 음악을 감상할 줄 아는 사람은 마음속에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똑같은 음률과 화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같은 에너지 속에서, 그분과 같은 진동 속에서, 그분과 같은 사랑의 음률 속에서 함께 울리고 어우러지는 영적인 교감을 나눈 사람만이 하나님의 음악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우주의 노래는 세상에서 사람들과 조화 있게 사는 사람만이 들을 수 있답니다. 세상에서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며 사는 사람만이 우주의 화음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하늘은 우주와 함께 노래 부르는 사람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늘 어느 곳에 데려다 놓아도 하늘의 조화로운 화음을 망치지 않고, 하늘 찬양대 어느 파트에 들어가도 거친 음을 내지 않고, 하늘의 어떤 리듬에도 벗어나거나 튀지 않고 아름다운 하모니를 이루어 낼 사람들을 하늘은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시편 19:1,3,4).

오늘 당신의 귀에도 우주의 노래가 들리고 있나요? 하늘이 당신을 위해 불러주고 있는 노래를 듣고 계신가요? 쉬지 않고 연주되는 아름다운 우주의 노래가 오늘 당신의 마음속에 가득 흘러 넘치기를 기도합니다. 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