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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d You Know? 장례식 날짜를 연기하는 방법

참된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에 있어서 절제합니다. 참된 절제란 "몸에 해로운 모든 것을 제거하고, 유익한 것을 적절하게 사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새 차를 샀다고 합시다. 당신은 그 자동차의 기계 속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에 대해서 굉장히 세심한 주의를 기울일 것입니다. 그 자동차를 만든 공장에서 나온 정비 지침서를 자세하게 읽을 것이며, 거기에 기록되어 있는 모든 권고 사항을 그대로 따름으로써 자동차의 최고 성능을 유지하고자 노력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만드신 우리 몸은 어떻게 다루어야 하겠습니까? 너무나 훌륭하게 만들어진 인체 기계를 어떻게 하면 최고의 성능으로 유지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몸을 만드셨을 뿐만 아니라, "성경"속에 건강 법칙이라는 정비 지침서를 기록해 놓으셨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몸 안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에 대해서 매우 세심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우리의 몸을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새 차보다 더욱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함은 너무나도 당연한 이치입니다.
다음에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생각해보십시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고전 9:25). 세상 올림픽에서 경주하는 자들도 먹을 것과 마실 것에 대해서 절제하는데, 하물며 하늘 올림픽에서 승리하고자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모든 일에" 절제치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시골 생활 이야기: 이런 농사꾼

언제나 그 자리에 변함없이 있는 산처럼
그렇게 주님 향한 사랑이
변치 않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들려오는 소리 메아리쳐 보내는 산골짜기처럼
묵묵히 십자가를 지고
주님이 가신 길을 가고 싶습니다.

낮은 곳으로 흐르는 맑은 물처럼
나의 가장 좋은 것을 나누면서
영혼의 깊은 곳까지 하늘빛 비치는
맑은 영혼으로 살고 싶습니다.

폭풍이나 순풍도 감싸 안으며
검은 구름이나 흰 구름으로 가득 찰 때도
언제나 넓고 평화로운 하늘처럼
그런 마음 닮고 싶습니다.

지친 길손들에게 시원한 그늘을 주고
갈한 땅에 단비 내려 주면서
바람이 미는 곳으로 떠가는 구름처럼
섭리의 바람 이끄는 곳으로
미련 없이 떠나고 싶습니다.
아무도 보아주지 않고,
그 이름 불러 주지 않아도
은은한 향기 발하며
말없이 피어 있는 작은 꽃처럼
나의 자리를 지날 때
주님의 향기가 느껴지길 기도합니다.

저 산 마루의 우뚝 솟은 나무처럼
비바람이 불고 눈보라가 쳐도
불평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으며
그리고 하늘을 향해 끊임없이 자라나는
그런 사람이고 싶습니다.

이른 아침 햇살 가득한 창공을 날며
오늘을 주심을 찬송하고
하루가 지날 때 쉼을 주심을 감사하는
산새들처럼
어떤 상황에서도
항상 기뻐하며, 감사하고 기도하는
그런 농사꾼이고 싶습니다.y

글|김현범

이현맘의 채식 요리 레시피: 채식 햄버거

Sur-147-USA

독자이야기: 간섭하시는 하나님

생애의 빛을 알게 된 지도 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진리에 대한 갈급함이 생겼고 그렇게 진리를 찾다가 생애의 빛을 알게 되었다.
이스라엘 백성의 편견과 고집을 깨뜨리기 위해 흠 없는 어린양이신 예수님이 희생되셨던 것처럼 나의 고집과 편견이 깨어지기 위해서는 나의 부친의 희생이 필요했던 것이었을까? 나는 부친의 죽음을 통하여 이 세상을 죽도록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느낀다... 불순종의 고집으로 점철된 우리의 죄 된 생애를 깨뜨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당신이 희생되셔야만 했던 그 처절한 사랑을...
지금은 그 처절한 사랑의 부르심에 이끌려 어언 2년이라는 세월이 흘러 진리 탐구의 여정을 하는 중이다. 진리를 찾는 자에게 하나님의 섭리가 함께하는 것일까? 얼마 전 뜻하지 않게 몇 가지 사건을 겪으며 하나님께서 나의 생애에 간섭하고 계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된 예배의 중요성을 깨닫고 난 후 몸담은 회사에서 주말을 쉴 수 있는 부서로 지원하게 되었다.
민원행정업무를 담당하느라 교육을 위한 출장이 잦았는데, 하루는 본부에서 민원을 담당하는 직원들을 위한 교육이 있어서 참석하게 되었다. 대략 200여 명 정도 되는 인원이 강사의 강의를 듣기 위하여 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쉬는 시간이나 대기 시간에 짬을 내어 월간지 살아남는 이들을 읽기 위하여 최신 호를 가지고 갔었다. 자리에 앉아서 열심히 밑줄을 그어가며 읽고 있다가 주님 오심이 얼마 남지 않음을 글을 통하여 깨닫고 눈을 들어 강의를 듣기 위하여 무료히 기다리고 있는 군중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속으로 생각했다.
'이들이 진리의 말씀을 듣기 위하여 모인 군중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이들 중에 진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별로 없겠지.'라고 생각하는 순간에 바로 왼쪽 옆에 있던 직원 한 명이 나에게 말을 건넸다. "잠깐 그 책 좀 볼 수 있을까요?" 놀랐다. 이 수많은 사람 중에 바로 내 옆에 있는 사람이 내가 읽는 책에 관심을 보인 것이다. 대개 주위 사람들의 태도는 "김 반장 너무 깊이 들어가지 마, 적당히 해." 이런 것들이었는데 오늘 바로 옆에 있는 이 사람은 내가 읽고 있는 책에 관심을 보이는 것이었다. 몇 번을 훑어보고 나서는 꽤 관심 있어 하면서 생애의 빛 주소와 전화번호를 적어갔다. 속으로 이 사람에게 진리의 기별이 영혼 깊숙이 스며들기를 기도했다.
그리고 저 멀찍이 앞자리에는 나의 옛날 부서의 직장 선배가 있었다. 그는 나의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을 때 성경 진리의 여정을 떠날 수 있도록 출발선을 끊어준 신앙의 선배였다. 상을 치르고 돌아와 슬픔과 충격에 휩싸인 나에게 건넨 그의 한마디가 아직도 생생하다.
"OO아 너도 이제 때가 되었구나." 그리고 자신이 다니는 교회에 초대했고 그 교회에 우리 직장 사람들이 많이 있다고 알려주었다. 아마 같은 직장에서 같은 진리를 추구하는 그들의 모임에 나를 초대하고 싶은 마음이었으리라...
그 이후 인사이동으로 그 선배와는 만남이 끊기고 전화로만 연락하고 지내던 차였는데 이 자리에서 마주하게 된 것이다. 생애의 빛을 알게 된 이후로 그 선배에게 메일로 몇 번이나 내가 공부하고 있는 것들을 알려주곤 했는데, 오늘은 생애의 빛 월간지를 손에 쥐고 있으니 이것을 꼭 그에게 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강의가 마치고 그에게 찾아가 생애의 빛 월간지를 건네주었다. 월간지를 받아 든 선배가 네가 이야기하려던 것이 이것이었구나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경황이 없어서 우리는 흩어지는 군중 틈에서 작별인사를 해야만 했다.

그리고 본부 교육을 가기 전에 킹스 메신저카페에서 같은 지역이라는 이유로 접촉을 시도하려는 형제가 있었는데 본부 교육 며칠 후에 그를 만나게 되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강의 시간에 내 옆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도 강의를 마치고 생애의 빛 월간지를 건네주었던 그 선배도 그리고 킹스 메신저카페를 통하여 알게 되어 만난 이형제도 3명 모두가 같은 교회 사람이었다는 것을... 나에게 진리의 여정을 떠나게 해준 그 선배가 소개해 주려 했던 우리 회사 내의 형제들이 바로 이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아! 하나님께서 내가 사는 지역, 내가 몸담은 직장에 무언가 뜻을 두고 있음이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간섭하시는 하나님, 진리를 찾는 형제를 하나로 묶으시는 하나님...마지막 때 당신의 참 백성을 모으시기 위해 깊이 간섭하시는 하나님을 느끼며 앞으로 이루어 가실 일들을 기대해 본다.y

라이프 토크: 이온화 산소를 마셔라!

소나무와 전나무 주변에 있는 산소를, 아침 햇살이 지나가면서 충전을 시키면, 이때 산소는 미분자 음이온 산소가 된다. 이렇게 충전된 음이온 산소를 호흡할 때, 우리는 상쾌함을 느낀다. 폐는 활짝 열리고, 어느새 심호흡을 하고 있다. 생명의 활력을 담뿍 받아들인 것이다.

캘리포니아 버클리(Berkeley)대학 Krueger교수는 공기 이온 연구에 기초를 놓은 분이신데, 이 교수의 발표에 의하면 "지면에 있는 깨끗한 공기는 음이온과 양이온의 비율이 10 : 12이며 이온의 수는 1500~4000개/cm3, 그리고 음이온은 많이 움직이는데 그 이유는 지면도 전기적으로 음성이기 때문이다."

음이온 산소는 푸른 잎 식물에 의해 만들어지며 특히 소나무와 전나무의 뾰족한 잎에서 많이 만들어진다. 또한, 천둥, 번개, 비바람에 의해서 이온화 음이온 산소가 많이 생긴다. 그리고 특히 폭포수에서 물이 세차게 서로 부딪치는 마찰에 의해서도 음이온 산소가 생산된다. 그 외에도 바다나 호수의 물이 증발할 때 생기고, 산에 있는 온천, 심지어는 물이 끓을 때 생기는 증기에서도 음이온 산소는 유리된다.
공기는 환경에 따라 죽은 공기도 될 수 있고 생명력이 있는 공기도 될 수 있다. 생명력이 있는 공기란 이온화된 공기를 뜻하는데, 다시 말해서 활성화된 음이온 산소를 많이 포함하고 있는 공기를 뜻한다. 이런 공기를 호흡하면 상쾌함을 느끼게 된다. 이때 폐는 즉시로 산소의 질을 인식하게 되고 따라서 자연스럽게 깊은 호흡을 하게 된다. 심호흡은 억지로 하면 힘이 들지만, 소나무와 전나무가 무성한 약간 경사진 언덕을 걸어서 올라가면, 폐가 자연스럽게 활짝 열리면서 심호흡을 하게 될 뿐만 아니라 경쾌함을 느끼면서 산소를 많이 받아들인다. 폐결핵 환자가 이런 환경에서 산책할 수 있다면 놀라운 회복을 얻게 된다.

이온화된 음이온 산소의 또 다른 특징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호흡을 통해서 폐가 산소를 받아들이면 헤모글로빈과 산소가 결합하게 되는데, 이때 이온화 산소는 매우 빠른 속도로 인체 내를 순환하게 된다. 보통 공기의 경우, 폐에서 가까운 세포들에게 적당히 산소를 공급하지만, 활성화된 음이온 산소가 헤모글로빈과 결합했을 경우, 매우 빠른 속도로 체내 구석구석을 순환하면서 산소를 공급하게 된다. 활성화된 음이온 산소는 뇌에서 가장 미세한 망상동맥까지 공급될 수 있으며, 바로 그 외진 곳에 있는 세포에까지 산소가 공급된다. 신장의 사구체 안에 존재하는 망상동맥에까지 이온화 산소는 공급될 수 있다. 산소가 풍성하게 공급되면 장기들은 활력을 얻는다. 따라서 뇌에서는 지력과 기억력이 증진되고 영성도 높아지고 분별력도 예민해진다. 이 외에도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유익이 있다.

Krueger교수의 발표를 조금 더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정상 지면의 공기는 음이온이 1,500개 양이온이 1,800개 총 3,300개 /cm3로써 호흡하기 편안한 데 비해 밀폐된 채 달리는 자동차 안의 공기에는 음이온 입자는 50개, 양이온 입자는 150개 총 200개/cm3 불과하다. 이런 이유 때문에 차 안에서는 피곤하고 졸음이 오고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더욱이 음속으로 달리는 비행기 안에서도 역시 공기 중에 산소결핍 현상이 생기기 때문에 모든 비행기는 인공적으로 산소를 공급해 주어야 한다.

공기는 환경에 따라 죽은 공기도 될 수 있고
생명력이 있는 공기도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사무실이나 아파트처럼 합성 건축재료를 사용해서 지은 밀폐된 공간의 공기는 어떤가? 음이온 입자가 150개 양이온 입자는 200개 총 350개/cm3에 불과하다. 이와 대조적으로 산속이나 폭포수 근처의 신선한 공기에는 음이온 입자가 2,000개, 양이온 입지가 2,500개 총 4,500개나 된다. 그러므로 도시의 밀폐된 공간의 공기는 삼림 속의 공기에 비해서 이온화된 입자 수가 1/10도 되지 않는다. 산소결핍은 이것을 원인으로 하는 질병이 발병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제공하는데, 암과 만성 퇴행성 질병들 그리고 현대문화 질병들이 대표적인 예이다.

환경에 따라서 공기의 질이 달라지지만, 기후에 따라서도 공기의 질은 달라진다. 날씨가 건조하고 먼지가 많은 날의 공기 중에는 음이온 입자가 단지 750개 양이온 입자는 크게 상승하여 2,500개가 된다. 건조한 기후의 공기는 일반적인 음이온 대 양이온 비율인 10:12의 비율을 크게 벗어나게 된다. 다시 말해서 공기의 질이 악화한다. 그러나 소나기가 내리고 천둥과 번개가 지나간 후 공기의 질은 크게 향상된다. 우리의 느낌으로도 쉽게 그 차이를 알 수 있을 정도이다. 밤새 비가 내리고 천둥과 번개가 친 다음 날 아침, 햇살이 맑게 비치는 아침은 음이온 입자가 극대화되기 때문에 공기의 질은 최고의 상태가 된다. 붕어가 물속에서 사는 것처럼, 인간은 공기 속에서 살아가게 된다. 음이온이 풍부하고 양이온이 적은 좋은 환경에서 사는 것은 우리 인체로 하여금 더 좋은 건강을 누리게 하고 질병의 회복을 촉진하며 건강한 노년을 약속한다.

그렇다면 음이온 산소가 인체에 주는 유익에는 또 어떤 것들이 있을까? 우리가 호흡하는 산소 대부분은 뇌에서 사용된다. 뇌는 인체가 받아들인 산소의 80%를 사용해서 뇌세포가 잘 작동될 수 있도록 한다. 산소가 잘 공급되어야 뇌의 내분비 기능이 정상화되고 뇌뿐만 아니라 온 전신의 호르몬 신진대사가 균형을 유지하게 된다. 음이온 산소를 충분히 호흡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뇌파를 비교해 보면, 음이온 산소를 많이 호흡한 사람의 뇌파에는 조용한 안정 상태를 가리키는 알파 파장이 많이 나타나고, 오른쪽 뇌와 왼쪽 뇌가 서로 정보를 활발하게 교환하기 때문에 인격이 준수하고, 신경이 안정된 차분함과 인내력이 향상되며, 영성이 증진되고, 더 나아가서는 통증도 경감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유익이 생긴다.

또한, 음이온 산소의 호흡은 인체의 각 기관에 매우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 예를 들면, 심장의 모세 혈관을 확장시킴으로써 혈류를 증가시켜주고, 혈액을 정화해주며, 폐활량이 증가한다. 신장의 노폐물 배설이 촉진되고, 산성 체질이 알칼리성 체질이 되며, 산모는 모유의 분비량이 증가한다. 췌장은 인슐린과 효소를 분비하는 기능을 잘 수행할 수 있게 되고, 더 나아가서는 면역기능을 활발하게 증진해준다.

어떻게 하면 체내 산소량을 증가시킬 수 있을까? 유산소(Aerobic)운동이 필요하다. 음이온 산소가 풍부한 환경에서 언덕을 올라가거나, 속보로 걷거나, 자전거 타기, 옥외 수영, 활보, 채소 밭 가꾸기, 혹은 꽃밭 가꾸기 등등 옥외 활동이 꼭 필요하다. 땀을 흘리도록 운동을 하고 가볍게 샤워를 한 후 상쾌함을 느끼는데 이것은 유산소 신진대사가 활발하여 혈액이 깨끗하여졌기 때문이다.
불행하게도 현대 사무실이나 아파트는 천연의 자제가 아닌 합성카펫, 플라스틱 브라인더, 나이론 커튼, 텔레비전, 비디오디스크플레이어, 꼭 닫힌 들창, 쇠로 만든 벽, 형광등, 방음 장치의 천장, 밀폐된 에어 컨디션 시스템 등 모든 재료가 인공적으로 만든 것이기 때문에 음이온을 흡수해 가게 되고, 그 결과 음이온 산소의 결핍을 조성하는 환경이 된다. 이 환경 자체가 건강을 해치는 것이다. 또한, 아파트처럼 모든 가정의 같은 공기가 에어컨이나 히터를 순환할 경우, 여러 사람이 사용하는 공기가 한꺼번에 섞여서 순환되고 나누어지게 되며, 새로운 공기의 유입이 활발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공기는 죽어가게 되고 이런 공기는 양이온이 증가하여 인체에 해롭게 된다. 공기 온도가 차갑다고 해서 공기가 살아 있는 공기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통풍이 잘되고, 햇빛이 드는 실내 환경을 유지해야만 좋은 공기를 호흡할 수 있게 된다.

양이온 공기를 많이 호흡하게 되면, 세로토닌 증후군(Serotonin Syndrome)으로 인해서 불면증, 초조, 불안, 긴장, 편두통, 얼굴이나 등이 화끈거리는 증세, 어지럼증, 우울증과 같은 증세들이 나타나게 된다. 실내 공기를 깨끗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부엌 쓰레기를 자주 비워야 하며, 여러 가지 화학물질로 만들어진 제품들을 집안에 놓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 다시 한 번 더 강조한다면, 반드시 실내 공기는 바깥 공기와 통풍이 되어야 하며 채광이 좋아야만 한다.

현대 환경학자들은 도시의 공기가 인간이 필요한 산소의 50%도 공급되지 못하기 때문에 암에 걸릴 수 있는 확률이 매우 높아진다는 말을 하고 있다. 공기가 오염되고, 땅도 오염이 심하고, 더욱이 물도 표현하기가 슬플 정도로 오염이 되어가고 있는 오늘 이 시점에서 과연 우리는 우리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하여 어디에서 우리의 보금자리를 펴고 삶을 영위해야 할까? 깊은 생각을 하도록 도전을 받는다. 여기저기서 작고 큰 움직임이 있는데, 복잡한 도시를 피해서 한적한 시골로 이주하며 소박한 옛 삶을 펼치기 위해서 귀농하는 분들이 점점 더 늘어나고 있다. y

삶의 작은 간증: 고백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 (잠 28:13)

엄마, 할 말이 있어요." 딸 아이가 힘겨운 미소를 띠고 빠끔히 말문을 열었다. 딸 아이는 종종 자기가 잘못한 일을 이렇게 찾아와 나에게 얘기하곤 한다. 이럴 때 나는 최대한 편안한 마음을 가지고 어떤 말을 듣더라도 다 받아들일 준비를 한다. 

"하나님께 먼저 말씀드렸어?" "응." "그럼 하나님께서 용서하셨으니까 엄마한테 말 안 해도 되는 거면 말 안 해도 돼." 엄마인 나도 무슨 일인지 알고 싶지만, 아이에게 하나님을 첫째로 생각하고 그분은 용서하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려 주고 싶어 그렇게 대답했다. "하나님께 많이 기도드렸어. 어제도 하고 그제도 하고 오늘도 하고 그런데 엄마한테 말해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아."
아이의 말에서 진실이 묻어난다. 잘못을 고백하려고 애쓰는 자체가 안쓰럽기도 하고 사랑스럽기도 했다. "그래, 무슨 일인데?" 아이의 마음 문이 닫히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나 사탕 여덟 개 먹었어요." 말을 들어보니 여기저기서 얻은 사탕을 몇 번에 나눠 엄마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먹었다는 것이다. "다시는 안 그럴게요. 엄마." 사탕을 먹은 것은 큰 잘못이 아니나 엄마가 먹지 않길 바라는 것을 엄마 몰래 먹은 것이 마음에 걸려 며칠을 회개 기도드렸다니 아이의 마음이 맑게만 느껴져 내 마음도 맑아지는 듯했다.
아이의 고백 앞에서 나는 하나님께서도 핑계 없는 고백, 변명 없는 회개를 듣기 원하실 거란 생각을 했다. 바울의 고백이 그러했다. 자기의 죄를 작게 보이게 하려는 자기변호 없이 그저 있었던 그대로를 명백하게 고백했다.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며 또 죽일 때에 내가 가편 투표를 하였고 또 모든 회당에서 여러 번 형벌하여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 하고 저희를 대하여 심히 격분하여 외국 성까지도 가서 핍박하였" (행 26:10, 11)다고 했으며 또 그는 자기를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딤전 1:15)라고 표현했다. 이렇게 고백한 바울은 전혀 괴수처럼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진실함이 느껴지고 훌륭하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내가 진정으로 회개하였나?'라고 내 마음을 살필 때 내가 회개한 일들에 대해 아직도 내 변명이나 내 자아에 대한 연민이 있는지 생각해 본다. 아직도 나 자신 쪽으로 기울어지는 연민들이 있다면 내가 진실로 그 일들을 회개하고 내려놓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죄에 대한 진정한 회개에는 내 입장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내가 생각할 부분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헤아리실 부분일 거다.
내 지문들이 잔뜩 찍힌 거울 앞에서 내 모습을 보는 것이 아니라 깨끗이 닦인 거울 앞에 서고 싶다. 내가 씻은 물에 또 들어가 씻는 것이 아니라 흐르는 맑은 물에서 씻고 싶다. 그렇게 회개라는 이름을 만나고 싶고 새 옷을 입고 싶다.
오늘도 딸은 나에게 와 "엄마, 오빠가 사탕 준대요."라고 말한다. 그날 이후 사탕에 관한 일들을 나에게 꼭 말해 주고 싶은가 보다. 여덟 살 여자아이의 아름다운 마음이다. 내 마음에 미소가 지어진다.
곱다. 그리고 그저 아름답다. 자신들의 마음에 성령의 불을 켜고 동기를 살피는 모습이 그리고 솔직히 고백하며 내려놓는 그 모습들이 빛난다.
나도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사람이 되고 싶다.y

시사와 성경: 유전자 조작 씨앗, 거짓 시나리오의 불편한 진실

전국 곳곳에서 여성농민들이 최근 '토종씨앗 지키기 운동'을 시작했다는 소식입니다. 토종씨앗은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는 먹거리 안전을 지키는 기반이자, 종묘회사들에 의해 거의 지배당한 우리 농업이 그 족쇄를 끊고 다시 살아날 수 있는 미래의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몬산토, 파이오니아, 듀폰 등 세계 굴지의 생명공학기업들이 첨단 유전자 변형기술로 기존 곡물 종자를 농토에서 내몰고 있습니다. 이 기업들은 시험관에서 특정 유전자의 구조를 끊거나 연결해, 변형하는 방법으로 얻는 새로운 곡물 품종이 "다수확, 고품질을 약속하는 미래의 식량 대안"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간 상업화된 유전자변형 작물은 대두, 옥수수, 면화, 유채, 감자, 치커리, 파파야, 토마토 등 10여 종인데, 생명공학기업들은 최근 경쟁적으로 유전자변형 작물에 주력, 앞으로 1∼2년 내에 50여 종의 새로운 종자를 선보일 예정입니다.

왜?
말세에 유전자 조작 씨가
쏟아져 나오고 있는가?

생애의 빛 NEWS 해설

"왜 말세에 유전자 조작된 씨와 식품들이 지구 전체를 덮게 될까?"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요한계시록 13장에서 찾을 수 있다. "저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빈궁한 자나 자유한 자나 종들로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 (계 13:16~17). 이 말씀의 의미는 분명하다.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표를 받는 자들만 먹을 것을 사고팔 수 있을 것이다.
짐승의 표 환란은 먹을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을 압박할 것이기 때문에 유전자 조작 씨앗 문제를 살펴보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큰 유익을 가져다줄 것이다. 유전자 조작된 씨앗 문제나 벌들이 급격하게 사라지고 있는 문제들은 모두 그 초점이 우리가 먹는 식품 환경과 먹거리에 맞추어져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전 세계적으로 씨앗 시장은 거의 독점 지배되고 있다. 여러 다른 이름의 종자 및 씨앗 회사들이 많이 있는 것 같지만, 그들의 위에서 씨와 종자를 공급하는 회사는 전 세계적으로 손가락에 뽑을 정도이다. 다국적 씨앗회사들은 유전자 조작을 한 terminator seed이라고 불리는 씨앗들을 파는데, 이 씨앗은 추수 때가 되면, 씨앗이 자동으로 자신을 파괴하기 때문에, 농부들은 씨앗을 받아도 다음 해에 사용할 수 없다. 결과적으로 농부들은 다음 해에 사용할 씨앗을 얻기 위하여 반드시 씨앗 회사를 찾아가야 한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전 세계의 먹거리들이 소수의 거대 기업에 의해서 지배되고 있다.

짐승의 표 환란이 정확하게 어떤 방식으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압박을 가할지 단언하기 어렵지만, 만약 짐승의 환란 때에 적 그리스도 세력이 세계적 씨앗 회사들과 연결되어 압박을 가한다면, 하나님의 백성은 먹을 것을 사거나 팔 수도 없을뿐더러 씨앗 자체를 구하기도 어렵게 될 상황이 올 수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말세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시골에 살면서 조그만 땅을 직접 경작하여 먹을 것을 얻고, 경제적으로 누구에게도 종속되지 않게 독립하는 것을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어떤 분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만 잘 믿으면 되지 왜 씨앗과 식품을 걱정하느냐고 생각하실 분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이 지상에 닥칠 때에 항상 영적 준비와 함께 실제적인 준비를 했던 사람들이 구원받았음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물로 세상을 멸망시킬 때에 방주를 지어 그곳에 들어가지 않는 사람들은 멸망했다. 또 하나님께서 불로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킬 때에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셨음에도 그곳을 빠져나오지 않은 사람은 멸망했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의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그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마 24:15~16)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준비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준비도 영적인 준비와 함께 실제적인 준비가 함께 병행될 필요가 있다. 우리가 하는 실제적 준비 자체가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아니지만, 짐승의 표와 말세의 재난들에 대한 성경 예언을 아는 그리스도인들이 실제적인 준비를 하는 것은 지혜에 속한 문제라고 생각된다.

성경에서 심판이란, 많은 경우에 자신이 뿌린 씨를 거두는 것이다. 심판은 자신이 행한 일의 결과를 거두는 자연스러운 법칙이다. 유전자 조작으로 말미암은 여러 가지 심각한 문제들 때문에 인간은 스스로 그 결과와 심판을 받게 될 상황에 이르고 있다. 성경에는 심판이 인간 스스로 결정한 결과지만, 마치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처럼 기록된 말씀이 몇 군데 있다." 내가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고 나의 표징과 나의 이적을 애굽 땅에 많이 행하리라"(출 7:3). 마치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신 것처럼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마음을 마음대로 강요하거나 주관하지 않는 분이다. 이 말씀의 의미는 바로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함으로써 그 양심이 화인 맞은 상태가 된 것을 표현한 것이다. 마음이 강퍅하게 된 것은 바로왕 자신의 책임이지, 하나님의 책임이 아니다.

재앙과 심판은 인간
스스로가 거두는
결과일 때가 많다

유전자 조작된 씨가 처음 나왔을 때, 그것이 기아 문제와 식량 위기를 해결할 수 있다고 기대했고 병충해와 오래 저장할 수 있는 식품을 얻게 되었다고 모두 크게 환영했다. 그러나 유전자 조작된 식품들을 동물 실험했더니 성장, 신진대사, 면역력이 크게 저하된다는 사실이 밝혀져서 충격을 주고 있다. Mother for Natural Law이라는 비영리 단체에서는 "앞으로 5~10년 안에 우리가 먹는 모든 곡식과 과일과 야채 중에서 95%가 유전공학적으로 조작될 전망이다. 이미 이 일이 실제로 진행 중이다."라고 발표하였다.
유전자가 조작된 어떤 씨앗과 식물들은 본래의 목적과는 상관없이 땅을 황폐화하고, 생태계에 심각한 해를 끼치고 있다. 유전자가 조작된 꽃가루는 예상보다 훨씬 먼 거리를 날아가서, 정상적인 꽃가루들과 섞여 또 하나의 새로운 종자를 만들어 내고 있는데, 이런 현상은 예기치 못한 환경 재앙으로 번져 나갈 수 있다.
모든 생태계는 서로 고리처럼 연결되어 있는데, 유전공학에 의하여 탄생한 수많은 종류의 새로운 생물들 때문에 생태계의 고리에 심각한 변화가 생기는 것이다. 변질한 유전자에 의하여 생태계에 변화가 일어날 때, 환경학적으로 언제, 어떤 문제가 나타나게 될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 영역에 들어가 유전자를 바꿈으로써 하나님께서 창조하지 않은 새로운 종들을 만들어 낼 때, 그 결과는 감당하기 어려운 재난이 되어서 부메랑처럼 정확하게 다시 돌아올 것이다.y

사랑의 편지: 가슴에 청진기를 대고

혹시 나무 소리를 들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나무에 청진기를 대면,
나무가 물을 빨아올리는 소리,
수액이 이리저리 전달되는 소리,
수액이 깊은 곳에서 줄기를 타고 올라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어떤 나무에서는 "꼬로로록 돌돌돌" 작은 시냇물 소리가 들리고,
큰 아름드리나무에서는 "쏴아아" 웅장한 파도소리가 들립니다.

나무의 신비한 소리, 나무의 경이로운 노래!
활기차게, 그리고 끊이지 않고 들리는 이 소리는
부지런한 나무가 삼투압을 통해 물을 마시는 소리랍니다.

그렇습니다.
깊은 곳으로부터 뿌리를 통해 샘물을 길어 올리는 나무는
늘 그렇게 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살아 있는 나무는 노래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가슴에도 노래가 흐르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가슴으로부터 길어 올리는 노래,
영혼을 축이는 생명의 소리가 메아리치고 있나요?

멈추지 않는 심장의 고동처럼,
가슴 속에 그치지 않는 생명의 소리, 사랑의 노래를 가진 사람만이
살아 있는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피안(彼岸)에서
먹고 마시는 경험,
생명의 샘에서 적시고
축이는 경험,

하나님의 가슴과 연결되어
신선한 그분의 영으로 채워지는 산 연결이 없이는,
우리는 수액을 빨아올리지 않는, 노래를 잃은 죽은 나무와 같습니다.

가끔 노래를 잃어버리는 경험을 할 때가 있습니다.
갑자기 가슴에서 소리가 들리지 않는 때가 있습니다.
깜짝 놀라 사라진 노래를 찾을 때는 항상 한밤중입니다.
가슴 속에서 사라진 그 소리,
가슴에서 늘 고동치던 그 노래를 찾아
울며 밤을 지새웁니다.

그러면 이내 알아차려 집니다.
아직 그 노래가 아주 없어지지는 않고
가슴 저쪽 한구석에 희미하게 남아 있다는 것을...
가슴 모퉁이 저쪽 구석에 조그만 조각으로 남아
울리지도 못하고 조용히 나둥그러져 있는 것을...

그리고 곧 알아차리게 됩니다.
어느새 하나님을 향한 영혼의 강렬한 허기가
바쁜 일상에 묻혀 버리고,

오매불망 주만 사모하던 열망이
몰아치는 차가운 세파에 식어 버리고,
하늘로만 솟아오르던 간절한 염원이
이 땅의 무게로 버겁게 눌려버렸다는 것을...

그러면 그 소리를 다시 찾기 위해
다시 생명의 샘물을 길어 올리기 위해
또 다른 몇 밤을 새웁니다.
가슴 속에 그 소리가 다시 가득 울려 넘칠 때까지...

나무는 끊임없이 물을 마시고 있습니다.
흔히들 나무에 대해 '정중동'(靜中動)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겉으론 움직임 하나 없이 고요하지만,
안으로는 끊임없이 물을 길어 올리기 위해 바쁜 나무를 잘 표현하는 말, '정중동'...

맞습니다.
겉으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서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나무는 세상 그 누구보다 바쁘게 쉼 없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청진기를 대보면 아무 소리가 나지 않는 죽은 나무도
파란 잎을 달고 있는 때가 있습니다.
땅과 연결되어 있지 않아도, 자체 영양분을 가지고
수일 또는 수개월을 버티는 나무의 특성 때문입니다.
그래서 단지 나무의 겉모습만을 보고
그 나무가 소리를 가진 산 나무인지 아닌지 판단할 수 없답니다.
그런데 나무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나무 의사들이 알아내는 방법이 있다고 하네요.
고무망치로 나무껍질을 톡톡 두드려보면,
살아 있는 나무에서는 울리는 듯한 공명의 소리가 나지만,
죽은 나무는 탁한 소리를 내면서 껍질이 벗겨진다고 합니다.

꺾으려 해도 꺾어지지 않고 휘어지면서 파란 물이 묻어나는 가지,
그것은 산 나무의 특징입니다.
손에 묻어나는 그 파란 물, 그 살아 있는 수액,
우리의 가슴에도 흘러야 할 그 생명의 물...

오늘 우리 모두 청진기를 들고 나무 소리를 들으러 가면 어떨까요?
그리고 우리 가슴에도 청진기를 대고
하나님의 생명 강에서 영혼의 샘물을 길어 올리는 소리가
들리고 있는지 들어 보면 어떨까요?
하나님의 산 생명수가 우리 가슴을 관통하여 흐르고 있는지 아닌지,
정말 우리가 살아 있는 가슴을 가진 사람인지 아닌지를...y

신앙 6부 - PART 6. 변화되지 않는 이유: 어떻게 거듭날 수 있을까?

어떻게 거듭날 수 있을까?

대부분 기독교인이 변화될 수 없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 생각은 성경적인 것이 아니다. 우리는 변화할 수 있다. 성경은 우리가 변화할 수 있으며, 변화되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인간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가능케 하신다. 참된 믿음은 불가능한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것이다. 믿음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변하는 것은 가능하다!

1) 거듭남, 그 변화

변화한다는 말이 무슨 말인가? 그것은 이전 것이 지나가고 새것이 된다는 말이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새 피조물이 되는 경험, 전혀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경험, 예전에 좋아하던 것이 싫어지고, 예전에 싫어하던 것이 좋아지는 경험, 그것이 변화한다는 뜻이다. 변화한다는 말을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거듭남"이다. 한 번 하고 끝나는 거듭남 말고, 매일 죽고 매일 주 안에서 다시 사는 진정한 거듭남, 그치지 않는 거듭남, 중단되지 않는 거듭남을 말한다. 매일 더 성숙하고 깊어지는 거듭남을 가지는 것을 "변화"라고 한다. 변화는 항상 변하는 것이다. 한 번 변하고 그대로 정체된 것은 변하는 것이 아니다. 매일 죽고 매일 다시 사는 경험, 매일의 거듭남을 유지하는 것이 진짜 변화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라고 하셨다. 그때로부터 지금까지 모든 신실한 그리스도인의 과제는, 예수께서 분부하셨던 위대한 하늘의 경륜, 곧 거듭남이라는 하늘의 비밀을 이루는 것이다. 거듭남,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이루고 추구해야 할 최종 목표이며,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며, 영생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성경은 우리가 거듭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아니, 예수께서는 사람이 거듭나고 변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도 없고 들어갈 수도 없다고 말씀하셨다. 이전의 본성, 곧 혈육으로 나고 육신에 속해서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도 없고 들어갈 수도 없다. 영적인 죽음과 다시 새롭게 태어나는 영적인 탄생을 거치지 않고서는 하늘에 들어갈 수 없다.

거듭나는 것은 마음속에 하나님의 율법이 기록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에 반응하여 주님께 마음을 바치고, 이전의 모든 생애를 청산하고, 죄를 회개하고 통회하여 버리며, 온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 새사람이 될 때, 그때 그 사람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사랑의 율법이 기록된다. 마음이 완전히 바뀌어 다시는 악을 행하고 싶지도 않고, 다시는 죄를 짓고 싶지도 않고, 다만 하나님의 뜻대로만 살고 매 순간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고 싶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율법이 마음과 생각에 기록되는 역사이다. 이것이 마음이 완전히 바뀌고 변화되는 것이다. 진정한 거듭남과 개심은 악으로 기울어지게 하는 유전적이거나 습관화된 성향들을 모두 변화시킨다. 거듭나면, 새로운 동기와 새로운 성향과 새로운 취미를 갖게 된다. 그리하여 성령으로 말미암아 생애가 거듭난 사람들은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2) 어떻게 변할 수 있을까?

죄로 기울어지는 연약성을 지닌 우리 부족한 죄인이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될 수 있다는 것이 복음이다. 성경은 여러 군데에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매일 습관적으로 짓는 죄를 그치고, 새로운 사람으로 변할 수 있다고 피력하고 있다. 많은 기독교인이 죄를 이기고 승리하기를 원하지만, 그 비결과 방법을 모른다. 죄를 승리하는 비결은 다른 것이 없다. 그것은 우리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 은혜가 무엇인가? "은혜"는 두 가지의 의미가 있다.

① 자격없는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죄를 용서하시며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자비
② 우리가 죄로 죽었을 때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를 개심시키시고, 죄의 힘에서 우리를 해방하시는 능력과 힘

1.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하다

은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가리키지만, 가장 성경적인 의미의 "은혜"는 능력이다. 특히 사도 바울은 은혜가 "힘과 파워(power)", 그리고 "능력"이라고 여러 군데에 피력하고 있다. 성경 절을 하나 살펴보자.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 (롬 5: 20,21).
이 성경 절을 보면, 죄도 다스리는 권세(능력, 힘)를 가졌고, 은혜도 다스리는 권세(능력, 힘)를 가진 것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위의 성경 절은, 은혜도 다스리는 힘을 가졌고 죄도 다스리는 힘을 가졌는데, 은혜가 우리를 다스리는 때에는 옳은 것을 행하기가 그른 것을 행하기보다 더욱 쉽다고 말하고 있다. 죄인이 회개하여 죄를 버리고 하나님께 마음을 바치면, 마음에서 죄의 권세가 깨어지고 은혜가 주권을 잡게 되어, 은혜가 죄를 다스리며 죄의 권세(능력)를 격퇴하게 된다. 죄가 다스리는 때에, 올바로 행하기보다 그릇 행하기가 쉬운 것과 같이, 은혜가 다스리는 때에는 그릇 행하기보다 바로 행하기 쉬운 것이 사실이다.
이것을 우리의 영적인 생애에 적용해 보자. 회개하고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용서와 구원을 받아 새 마음으로 거듭난 사람의 생애에는 하나님 은혜의 역사가 늘 나타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은혜가 다스리는 역사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죄를 용서하실 뿐만 아니라, 죄를 미워하고 악한 것과 세속적인 것을 싫어하도록 우리의 마음을 바꾸어 준다. 하나님께서 하늘로부터 내려주신 은혜의 선물인 예수 그리스도께 우리의 마음을 바치면, 예수께서 우리 마음에 좌정하실 것이고 그러면 은혜가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게 된다. 그리고 매일 예수께서 마음속에 늘 임재하시는 가운데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예수님의 마음을 덧입는다는 것이고, 예수님의 마음을 품는다는 말이고, 예수님의 마음으로 변화되었다는 말이다.

이 얼마나 자연스러운 일인가? 우리가 진짜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고 진짜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참된 믿음을 가졌다면, 변화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마 6:24). 당신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신 마음의 보좌를 사단과 예수님이 함께 나누도록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만이 우리 마음의 보좌에 앉으셔서 다스리도록 할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마음속에 좌정하고 임재해 계신 그리스도인이, 사단과 죄를 섬기고 변화되지 않은 예전과 똑같은 삶을 사는 것이 과연 가능하단 말인가? 그럴 수 없지 않은가? 그러므로 변화되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2. 복음의 능력으로 가능하다

성경에는 "은혜"와 같은 뜻의 의미가 담겨 있는 단어가 또 하나 있는데, 그것은 "복음"이라는 단어이다. 다음의 성경 절을 보자.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로마서 1:16).

"복음"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두나미스"인데, 그 뜻은 영어로 "다이너마이트"라는 뜻이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복음"을 능력으로 소개하고 있다. 복음은 구원을 가져다주는 능력이다. 복음은 능력을 가졌으므로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복음의 능력도 받아들이게 되어, 그 능력으로 죄를 다스리고 이기는 생애를 살게 된다는 말이다. 복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받아들인다는 뜻이고, 예수 그리스도가 가지신 능력은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의 능력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받아들이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그가 이기신 것처럼 이기게 되는데, 그것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4).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능력의 비결은 이것이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 그 놀라운 능력을 행하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만일 우리가 회개하고 복음을 받아들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사시게 한다면, 그리고 예수께서 우리의 마음에 계시면서 그분의 일을 하신다면, 우리는 모든 죄를 승리할 수 있고 변화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마음을 변화시킨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가 마음속에 거하시고 함께 사시는 경험, 이것이 변화되는 길이다! 의롭게 하고 거룩하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야말로 얼마나 풍요하고, 얼마나 완전하고, 얼마나 만족스러운 것인가!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다. 그는 모든 일에 충만한 능력을 주신다. 그는 비단 우리를 죄의 저주로부터 구하시는 능력뿐만 아니라, 우리를 죄와 그 죄의 가책으로부터 격리시켜 보존하시고, 다시는 그 죄를 짓지 않을 힘과 능력까지 공급해 주신다. 우리가 온전히 우리의 마음을 바치면, 예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그분의 마음처럼 온전히 바꿔 주시어, 다시는 죄를 좋아하거나 죄를 짓고 싶은 마음이 없어진다. 이것이 진정한 변화이다.

우리는 변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로! 이 사실을 믿자! 우리는 변화되어야 한다. 끝이 매우 가까웠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형상으로 온전히 변화된 사람에게만 하나님의 인을 쳐 주실 것이고, 변화된 사람만이 하늘에 들어갈 자격을 얻을 것이다. 이제 곧 예수께서는 그분을 닮은 사람들, 그분의 참된 자녀들을 찾으려고 재강림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죄를 이기는 승리의 생활, 온전히 변화된 생활을 살게 되는 독자들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드린다! 

신앙 5부 - PART 5. 변화되지 않는 이유:환란이 다가오고 있기 때문에

환란이 다가오고 있기 때문에

요한계시록 7장 1절에 보면, 네 천사가 사방 바람을 붙잡고 있는 장면이 나온다. "이 일 후에 내가 네 천사가 땅 네 모퉁이에 선 것을 보니, 땅의 사방의 바람을 붙잡아 바람으로 하여금 땅에나 바다에나 각종 나무에 불지 못하게 하더라." 그런데 이 사방에서 불려고 하는 바람은, 바로 땅을 해하는 재난과 재해와 재앙의 바람인 것을 2절의 문맥을 살펴보면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점점 심해져 가는 자연재해들과 재난들, 사고와 무서운 일들을 보면서, 우리는 사방 바람을 붙잡고 있는 네 천사의 손이 느슨해지고 바람을 막 놓으려는 순간에 있다는 사실을 감지하게 된다. 마지막 환란이 다가오고 있다. 그것이 우리가 변화되어야 할 이유이다. 성경은 "개국 이래로 그때까지 없던 환란"(단 12:1)이 마지막에 있을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다. 그 환란에서 살아남아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은 바로 변화된 사람, 예수님의 성품으로 온전히 변화되어 이마에 하나님의 인을 받는 사람, 마지막 오순절에 내리는 늦은 비 큰 성령을 받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변화된 사람만이 환란을 통과할 수 있기 때문에, 지금은 온전히 변화되어야 할 때이다.

1. 변화된 사람만이 하나님이 인을 받는다

"또 보매 다른 천사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해 돋는 데로부터 올라와서, 땅과 바다를 해롭게 할 권세를 얻은 네 천사를 향하여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나 해하지 말라 하더라"(계 7:2~3).

마지막이 가까워질수록 두 무리가 확연하게 갈라지고 있다. 구원받을 무리와 멸망을 받기로 선택한 무리 사이에 현저한 차이가 생기고 있다. 선과 악의 전쟁은 마지막에 다다를수록 점점 치열해져 가고 있다. 사단의 백성은 점점 사단의 형상으로 꼴 지어져 가고, 하나님의 백성은 점점 주님의 형상으로 꼴 지어져 가고 있다. 아마겟돈 전쟁, 마지막 선과 악의 전쟁에서 하나님을 증거하고 하나님과 그분의 진리를 위해 싸워야 할 하나님의 백성이 반드시 갖추어야 할 조건이 있는데, 그것은 이마에 하나님의 인을 받는 것이다. 하나님의 인을 받아야 마지막에 사랑하는 하나님을 위한 증인이 될 수 있으며, 환란을 안전하게 통과하고 구원받는 무리에 들어갈 수 있다. 하나님의 인이 무엇이며, 누가 하나님의 인을 받는가?

하나님의 인이란, 하나님의 소유라고 하늘에서 표시하는 표를 말한다. 계시록 7장 1절을 보면, 하늘에서 다른 천사가 내려오면서, 땅을 멸망시키려고 하는 천사에게 큰 소리로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 살아계신 하나님의 인을 가진 천사는, 구원받을 하나님의 백성이 그들의 이마에 살아계신 하나님의 인을 받아 안전하게 될 때까지 세상을 해하지 말라고 외친다. 이것은 계시록 14장 1절에 나오는 144,000(십사만 사천인), 곧 시온 산에 어린 양과 함께 설 사람들의 이마에 쓰인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2. 하나님의 인이란?

하나님의 인은 구원받을 하나님 백성의 이마에 쳐지는 하나님의 표로써,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그들의 성품이 십계명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반사하므로 하나님의 소유라고 인침 받는 것을 뜻한다. 구원받은 사람들의 이마에는 어린 양의 이름과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이 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의 인은 이마에 받는 것일까? 그것은 마치 옛날 이스라엘의 대제사장이 머리에 쓴 관에 "여호와께 성결"이라고 쓰여 있었던 것처럼, 앞이마가 성결하고 정결한 사람이 하나님의 인을 받는다는 뜻이다. 앞이마가 정결하다는 뜻이 무엇일까? 우리의 앞이마에는 전두엽이 자리 잡고 있다. 전두엽에서는 이성, 판단, 결정, 의지를 통제 담당한다. 그리고 전두엽에서 이루어지는 중요한 기능은 영성, 도덕성, 의지이다.

성령께서는 우리 뇌의 전두엽을 통해서 역사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유 의지를 주셨다. 죄의 유혹이 올 때, 그리고 사단이 우리가 죄를 짓도록 유혹할 때, 사단의 말을 듣고 사단의 편을 택하여 죄를 짓든지, 아니면 성령의 음성을 듣고 성령께 굴복하여 죄의 유혹을 물리치든지 선택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의지에 달려 있다. 요한계시록은 하나님을 아는 데에 앞이마(전두엽)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음을 언급하고 있다. 요한계시록 22장 4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다.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 성경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그분의 성품을 의미한다. (출 33:18~23 참조) 계시록 22장 4절은 하나님의 이름, 곧 성품이 우리의 성품 안에 재현되는데, 그것은 우리의 앞이마(전두엽)에 재생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성령께 지속적으로 굴복된 의지를 갖고, 거듭난 마음을 계속 유지하고, 매 순간 성령과 교통하므로 죄를 이기며, 사단의 유혹이 올 때 매번 올바른 편(성령의 음성을 듣는 편)을 지속적으로 선택하는 사람은 영성과 도덕성과 의지력이 온전하게 꼴 지어져 하나님의 성품을 이루게 되는데, 이것이 앞이마가 정결하다는 뜻이고, 그런 사람의 앞이마에는 하나님의 인이 쳐지는 것이다.

짐승의 표 환란이 올 때, 그리고 하나님께서 구원받을 당신의 증인들을 고르실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의 명예를 위해 충성할 사람들은 하나님의 인을 받은 사람들이 될 것이다. 이 하나님의 인을 받은 하나님의 참 자녀는 이 세상과 우주에 하나님의 공의로우심과 은혜와 사랑의 성품을 증거하는 사람들이 될 것이다. 하나님의 인을 받지 못하면 마지막 환란 때에 구원을 얻지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을 받는 문제는 우리 영생과 직결된 매우 중요한 관건이다.

3. 늦은 비 성령을 받아야 한다

초대 교회 당시 오순절 때 한 번 큰 성령의 역사가 있었던 것을 우리는 익히 잘 알고 있다. 이른 비 성령의 대표적인 역사라고 할 수 있는 초대 교회 때의 오순절 성령의 역사는 지금도 각 개인의 신앙생활과 영적 상태에 조금씩, 그리고 조용하게 역사 하고 있다. 사람을 거듭나게 하는 역사, 죄를 깨닫고 회개하게 하는 역사, 새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역사, 죄를 승리하게 하는 역사와 장성한 믿음의 분량으로 자라나 늦은 비를 받게 하는 역사 등은 이른 비 성령의 역사이며, 이 성령의 역사는 지금도 매일의 생활에서 역사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른 비 성령은, 마지막에 다시 크게 임할 두 번째 오순절 성령의 역사인 늦은 비 성령을 받게 하는 매우 중요한 것이다.

이른 비 성령의 역사를 매일 경험하여, 온전한 하나님의 성품으로 매일 변화되는 사람만이, 마지막에 다시는 쓰러지지 않도록 고정하고 마지막 짐승의 표 환란을 통과하게 하는 늦은 비 성령을 받게 될 것이다. 우리는 늦은 비 성령이 내리기 바로 직전에 살고 있다. 이른 비 성령의 역사로 매일 변화되는 경험, 매일 더 깊어지는 회개의 경험을 하는 사람에게만 늦은 비 성령의 역사가 임할 것이다. 늦은 비를 받기 원하는 기독교인들은 현재 이른 비 때에 완전히 회개하고, 죄에 대하여 승리하며, 성품의 변화를 입어야 한다. 자신의 부족함과 결함들을 보충하려고 늦은 비 성령의 큰 능력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큰 실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 때에 내리는 늦은 비 성령은 죄악을 바로잡아 주지도, 죄악적인 결함을 보충해 주지도 않을 것이며, 보충해 줄 수도 없다. 늦은 비 성령이 내리는 시기는, 하늘에서 우리의 죄를 속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와 속죄 사업이 다 마치고, 은혜의 시간이 마친 후에 세상에 환란과 재난이 시작되는 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금은 늦은 비를 받기 위하여 변화되어야 할 때이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잔잔한 성령의 역사로 각 개인 속에 역사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백성을 준비시키고 계시다. 말씀을 통해서, 고난을 통해서, 시련을 통과하며 정결함을 입는 과정을 겪게 하셔서, 또 겸손하게 낮추는 법을 배우게 하셔서, 오류에 빠져서 복음의 진수를 보지 못하던 영적 눈을 뜨게 하셔서, 때로는 재물과 명예를 거두어 가심으로, 그리하여 영적으로 깨어나 이 세상의 헛됨과 영생의 중요성을 깨닫게 하심으로 그분의 백성을 준비시키신다. 지금,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놀라운 성령을 부어 주시기 위하여 준비된 사람들을 찾고 계신다. 성령을 받기에 넉넉하도록 마음을 비운 깨끗한 사람들을 찾고 계신다. 마지막 성령을 받고 담대하게 나아가 바벨론의 죄악을 경고할 용기 있는 사람들을 찾고 계신다. 우리는 변화되어야 한다. 늦은 비를 받기 위해, 온 힘을 다하여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구하고 그분의 도우심으로 변화되는 경험을 해야 한다. 

신앙 4부 - PART 4. 변화되지 않는 이유: 예수님의 재림이 가깝기 때문에

예수님의 재림이 가깝기 때문에

우리는 변화되어야 한다. 우리는 변화될 수 있다. 여기 모든 기독교인이 변화되어야 할 이유가 있다.

성경의 모든 예언 성취와 세상의 징조들을 보면, 예수께서 이 세상에 재림하실 때가 매우 가까이 이른 것을 알 수 있다.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24장과 누가복음 21장에 세상 끝에 있을 여러 가지 징조들과 재림의 징조들에 대하여 강조하시면서, "이런 일이 되기를 시작하거든 일어나 머리를 들라, 너희 구속이 가까웠느니라"(눅 21:28)라고 하셨다. 세상에 일어나는 재난들과 자연재해들, 지진, 홍수, 무서운 질병들을 보면서, 그리고 이 모든 일이 말세의 징조 성취인 것을 눈여겨 보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깨어나 구속함을 받기 위해 준비해야 한다.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해 준비해야 한다. 어떻게 준비해야 할 것인가? 우리는 변화해야 한다.

성경은 누구나 다 구원을 얻는다고 말하지 않는다. 구원의 초청은 누구에게나 주어졌지만, 택함을 입은 사람은 매우 적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예수께서 재림 시에 구원을 받고 심판을 면할 사람들에 대해 하신 여러 가지 비유의 말씀 중에 몇 가지만 살펴보아도 우리는 우리가 변화되어야 할 이유를 찾아낼 수 있다.

1. 예복을 입지 않은 손님의 비유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저가 유구무언이어늘"(마 22:12). 여기에 보면,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고 들어온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거기에는 예복을 입었는가 입지 않았는가 조사하는 일이 있었다. 구원을 받을 사람은 예복을 입고 있어야 했다. 무슨 예복인가? 그것은 예수님이 입혀주시는 의의 두루마기이며, 성도들의 옳은 행실인 흰 세마포의 예복이다. 이 비유를 보면, 임금이 혼인 잔치를 베풀고 손님들을 보려고 들어왔을 때에, 먼저 그들이 예복을 입었는가 입지 않았는가 조사하는 일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임금이 손님을 심사하는 일은, 예수께서 하시는 심판을 표상한다. 복음 잔치에 참석하는 손님들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하는 자들이며, 자신이 구원받았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칭하는 사람들이 다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다. 최후의 상급과 구원이 결정되기 전에, 먼저 누가 의인의 유업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를 결정하는 일이 선재 해야 한다. 아무나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예복을 입은 사람만 구원을 얻는다. 예복은 그리스도의 참된 자녀가 갖추어야 할 순결하고 흠이 없는 품성, 곧 변화된 품성을 말한다. 이것은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인 "성도들의 옳은 행실" (계 19:8), 그리고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엡 5:27)는 아름다운 품성을 가리킨다. 우리는 "더러운 옷"(사 64:6)과 같은 우리 자신의 의를 벗고, 예수께서 주시는 의의 두루마기를 입은 사람, 주님의 의와 성품으로 변한 사람, 겉으로만 의의 옷이 살짝 덮여 있는 사람이 아니라, 속은 변하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 있는 사람이 아니라, 마음속 전체가 변한, 생애와 품성과 생각까지 모든 것이 변한 성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2. 그물의 비유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어버리느니라.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내어 풀무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마 13:47). 이 비유에 보면, 마지막에 좋은 물고기와 나쁜 물고기가 갈리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물을 던지는 것은 복음을 전파하는 것을 의미한다. 복음은 "좋은 것"과 "못된 것"을 교회 안으로 다 모아 들인다. 그러나 복음의 사업이 마쳐지면, 심판은 의인과 악인을 갈라내는 일을 하게 된다. 언행이 일치하지 않는, 변화되지 않은 기독교인들은 마지막 때에 나쁜 물고기처럼 버림을 당할 것이다.

자기가 교회를 다니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자기가 교회 안에 있기 때문에, 또한 구원을 얻기로 예정되고 택하심을 받았기 때문에, 자신이 변하지 않았어도 하나님께서 다 죄를 덮으시고 구원해 주실 것이라는 생각은 위험한 생각이다. 좋은 물고기만 선택된다.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나 그물의 비유는 심판이 있은 후에는 다시 악인에게 구원 얻을 기회가 없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복음사업이 마치게 되면 즉시 악인과 의인을 분류하는 일이 있게 된다. 그 복음에 의하여 변화된 사람은 구원을 얻고, 복음에 의하여 변화되지 못한 사람은 멸망을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죄가 우주의 파멸을 일으키는 근원이 되므로, 죄를 회개하고 버리고 온전하게 변화되지 않은 사람은 하늘에 다시 들이지 않으실 것이다. 죄를 버리지 않은 자들은 결국 그 죄가 멸절될 때에 이 땅과 함께 멸망하게 될 것이다. 예수님의 재림과 심판의 때가 가까웠다. 지금은 온전히 주의 형상으로 변화되어야 할 때이다.

신앙 3부 - PART 3. 변화되지 않는 이유: 깨닫지 못했거나 굴복하지 않아서

깨닫지 못했거나 굴복하지 않아서

기독교인이 변화되지 못하는 또 다른 두 가지 이유는, 영적으로 눈이 멀어 진리를 깨닫지 못하거나, 진리를 다 알지만, 그 깨닫고 알게 된 진리에 굴복하기를 원하지 않거나, 굴복하지 않아서이다.

1. 깨닫지 못해서 변하지 않는다

신앙이 돈독하고 경건하다고 자부하지만, 영적으로 눈이 멀어 진리를 깨닫지 못했던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요 9:41)라고 하셨다. 오늘날의 많은 기독교인도 바리새인과 같다. 그들은 자신이 영적으로 눈이 멀어 있는지 인식하지 못하고, 교회만 열심히 다니고, 목사가 지시하는 일과 교회의 명령만 잘 좇으면 자신이 구원을 따 놓은 하나님의 신실한 자녀인 줄 착각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 오랫동안 교회를 다니고 교회 사업을 열심히 하였어도, 전혀 변화되지 않은 채, 옛 모습 그대로, 옛 성질 그대로, 옛 생활 그대로 사는 기독교인들은 영적으로 눈이 먼 사람들이다.

기독교인이 변화되지 않는 이유는 영적으로 깨닫지 못해서이다. 깨어나고 변화되어야 한다는 성령의 음성을 듣지 못해서이다. 지금 자신의 상태, 곧 성경이 말하는 "뜨뜻미지근"한 상태가 아주 좋고 편안하고, 또 영적인 깊은 잠에 빠져 있기 때문에 변화가 없는 것이다. 성경은 그런 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이렇게 묘사하며 변화되어야 할 필요성에 대해 권고하고 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계 3:15~19).
영적 눈을 떠야 한다. 자신의 곤고한 상태를 보고 놀라 깨어나,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와 바른 복음에 온전히 굴복하고 변화되기 위하여 성령의 능력을 간절히 구해야 한다. 만일 당신이 오래 신앙생활을 했어도 변화가 없고, 옛날 까마득한 시절에 한 번 거듭난 경험만으로 만족하고 살고 있다면 당신은 영적으로 매우 심각한 상태에 있는 것이다. 지금이라도 정신을 차리고 성령의 안약을 사서 눈에 바르고, 영적 눈을 뜨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영적인 것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한다. 영의 눈이 뜨이지 않은 사람은 영적인 일을 분별할 수도 없고, 진리를 깨달을 수도 없다. 아무리 교회를 오래 다녔어도, 아무리 태어날 때부터 모태 교인이었어도, 영적인 안목이 열리는 경험, 진리를 깨닫는 경험, 진리가 삶 속에 파고들어 진리대로 변화되어 살게 되는 경험을 하지 못하고 있다면, 곧 변화된 삶을 살지 못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진정한 기독교인이 아니다. 하나님과 산 연결이 있는 구원받는 자녀가 아니라는 말이다. 변화되지 않는 이유는, 진리를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해서이다.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결코 변화될 수 없다.

2. 진리에 굴복하지 않아서 변하지 않는다.

변화하지 않는 또 다른 중요한 이유는, 진리를 알고 있지만 그 알고 있는 진리와 말씀에 굴복하지 않아서이다. 진리를 알고, 바른 복음도 알고, 하나님의 말씀과 성경 지식에 해박한 사람들 중에 이상하게 변화되지 않고 옛 성질과 기질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영적인 사물에 대해 아주 밝고, 영적인 것에 대해 알 것은 다 알고, 들을 것은 다 들어서 많은 성경 지식과 영적 경험에 대해 알고 있는 듯한데, 왜 변화되지 않는 것일까? 이런 사람들이 변화되지 않는 이유는 단 한 가지밖에 없다. 그것은 알고 있는 진리에 굴복하지 않아서이다. 아니, 굴복하고 싶지 않아서이다. 진리를 잘 알고 있어도, 깨우쳐 주시고 권고하시는 성령의 음성을 듣고 굴복하고 싶지 않으며, 마음속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또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더 좋아하는 어떤 우상이 있어서이다. 가지고 있는 영적 지식에만 만족할 뿐, 그리고 머리로만 알고 있는 진리에 대한 지식이 마치 신앙의 경지를 다 이룬 듯한 착각과 영적 교만에 빠져 있을 뿐, 사실은 자신이 반석 되신 예수님 위에 떨어져 철저하게 깨어지는 경험을 하지 못해서이다.

알고 있는 것과 변화된다는 것은 별개의 것이다. 물론, 성경과 진리에 대해서, 그리고 하나님의 뜻과 영적 지식에 대해서 밝히 알고 있으면 올바른 영적인 경험을 갖기가 훨씬 더 수월하지만, 많은 경우에 머리로만 아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그 진리가 마음과 삶 속에 녹아들어 그 사람을 변화시키지 않으면 그 지식은 아무 소용이 없다. 우리는 그 사실을 예수님의 "열 처녀의 비유" 가운데서 배울 수 있다. 비유에 나오는 열 처녀는 모두 등잔을 가지고 있었다. 등잔과 등불은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를 표상한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 119:105). 그러나 등잔만 있고 그 속에 기름이 없으면, 빛을 낼 수 없다. 기름은 성령을 표상한다. 성경 스가랴서를 보면 성령이 기름으로 설명되어 있다(슥 4:1~14 참조).

하나님의 성령이 없이 하나님의 말씀만을 아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성령의 감화가 없는 진리의 이론만으로는 사람의 마음과 생애가 변할 수 없다. 비록 성경에 정통하고 해박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영이 진리를 깊이 깨닫게 하지 않을 것 같으면, 그리고 성령께서 그 말씀을 통하여 변화시키시는 능력으로 우리 마음에 역사 하지 않으시면, 우리의 품성과 생애는 변화되지 않을 것이다. 미련한 처녀로 대표된 사람들은 진리를 존중히 여기고, 진리를 옹호해 왔으며, 또 진리를 믿는 사람들에게 매혹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성령의 역사에 순종하지 않았다. 반석 되시는 예수님 위에 떨어져 자신의 옛 성질을 깨뜨리려 하지 않았다.

성령이 사람의 마음속에 역사 하게 되고, 사람이 이 성령의 역사를 사모하고 갈망하며 동의하게 될 때, 그 사람 안에는 새로운 품성이 심어지게 된다. 미련한 처녀로 대표된 사람들은 단지 피상적이고 표면적인 행위만으로 만족하는, 변화되지 않는 자들이다. 사실 그들은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깊이 알지 못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품성을 연구하지도 않고, 하나님과 교제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을 의지할 줄도 모르고 하나님을 쳐다보고 살 줄도 모른다. 그리하여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봉사는 점점 형식화되고 만다. "네게 나아오며 내 백성처럼 네 앞에 앉아서 네 말을 들으나, 그대로 행치 아니하니 이는 그 입으로는 사랑을 나타내어도 마음은 이욕을 좇음이라" (겔 33:31). 이 글을 읽으면서 혹시 우리 자신이 그런 사람이 아닌가, 진리를 잘 알고 있지만 변화하지 않고 주님의 성품을 닮지 못하고 있지는 않은가 자신을 깊이 살피고 돌아보도록 하자.

신앙 2부 - PART 2. 변화되지 않는 이유: "한 번 구원 받으면 영원히 구원 받는다"고 믿기 때문에

"한 번 구원 받으면 영원히 구원 받는다"고 믿기 때문에

1. 영원 구원

오늘날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한 번 구원을 받으면 영원히 구원받는다." (Once Saved, Always Saved)라는 교리를 굳게 믿고 있다. 예수를 믿음으로서 일단 한 번 구원받으면, 변화나 품성과 믿음의 영적 성장에 상관없이,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과 불순종에 상관없이 무조건 구원받게 된다는 이 구원론은, 많은 그리스도인을 미혹하여 변화되지 못하게 막고 있다. 보통 영원 구원이라고 불리는 이 가르침은 사람이 한 번 진실한 신자가 되면 그가 믿음을 잃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그러므로 그가 구원을 잃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이렇게 믿는 사람들은 진리의 말씀, 곧 우리의 성품이 예수님의 성품과 같이 변화되어야 하며,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해야 한다는 말씀, 그리고 죄를 승리하는 생활을 살아야 한다는 말씀을 들을 때, 진리를 거절하며 자신 있게 "우리는 이미 구원받았으므로 멸망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그 진리를 지키려고 애씀으로써 어려움을 자초하며 변화되기 위해 그 어려운 희생과 포기의 길을 걸어야 합니까? 우리가 그 진리를 순종한다고 해서 지금보다 더 나은 구원을 받지는 못할 것이며, 그 진리를 거절한다고 해서 멸망 당하지도 않을 것입니다."라고 한다.

2. 정말 한 번의 선택이면 다 되는 것일까?

이 잘못된 구원론을 믿으면, 구원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나 영적인 성장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고, 전적으로 과거에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기로 했던 단 한 번의 선택에 달려 있다고 주장하게 된다. 또한, 이 그릇된 구원관을 가지고 있으면, 성령의 인도 하심에 의해 새롭게 주어지는 진리의 빛에 순종하느냐 또는 불순종하느냐 하는 것은 구원이나 영생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는 것이라고 믿게 되고, 한두 가지 계명, 아니 계명 전부를 범할지라도, 그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온전히 순종하지 않고 자신의 뜻대로 마음대로 살고 있으면서도, 교회만 다니면 구원받는다는 그릇된 확신을 하게 된다. 불순종은 주님과의 관계에서 얻어지는 마음의 기쁨이나 평화에 어떤 악영향을 미칠 수는 있어도, 최종적인 구원에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고 믿게 된다. 이것은 위험한 오류이다.

정말 구원은 한순간의 결정으로만 완성되는 것일까? 한 번 예수님을 선택한 그 한 번의 선택만으로 충분할까? 성경 어느 곳에서도, 과거에 가졌던 한순간의 믿음의 경험이나, 한 번의 선택이 우리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한다는 기록이 없다. 구원은 영원한 생명의 공급자이신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에 의해서, 그 안에서 계속 자라나는 영적 성장으로 얻어지는 것이다. 구원을 받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매일 하나님의 편을 선택하고, 하나님과의 끊임없는 접촉과 관계를 지속하여야 한다. 구원은 그리스도와의 살아 있는 연합을 떠나서는 절대 불가능하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일 5:12).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4,5).

3. 사도 바울과 반대되는 가르침

한 번 구원 받으면 영원히 구원받는다는 가르침은 얼마나 성경에 어긋나는 가르침인가? 그것은 사도 바울이 말한 고백에 얼마나 어긋나는 주장인가? 그렇게 훌륭하고 위대한 사도 바울도 매일 변화되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나는 날마다 죽노라."라고 외치면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4)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육체와 함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는다는 의미가 무엇인가?

그것은, 육신의 본성, 곧 육체가 좋아하고 이끄는 대로 마음대로 살지 않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 가득 찬 육신적인 삶을 십자가에 못 박고, 포기하고, 부인하고, 다시는 육신을 따라 살지 않고 성령의 소욕을 따라 예수님의 뜻대로 사는 변화된 삶을 사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바울은 또 로마서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롬 6:6, 16, 19). 그는 누구든지 자신이 순종하는 것에 종이 된다고 말하면서, 의에 순종하고 지체를, 몸을, 의에 드려 거룩한 삶, 변화된 삶을 살라고 권면하고 있다. 성경의 기록 어디에도 한 번 구원을 받으면 영원히 구원을 받는다는 기록을 찾을 수 없다.

이런 인간의 오류가 섞인 가르침과 이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어리석은 믿음이야말로, 기독교인들이 변화되는 삶을 살지 못하도록 막는 큰 요인이 되고 있다. 당신은 변화되어야 한다. 처음 믿을 때부터 하나도 변하지 않은 채, 세상 사람과 똑같이 돈을 사랑하고, 명예를 숭상하고, 사람에게 인정받기를 좋아하고, 교만하고, 화를 잘 내고, 인내하지 못하고, 질투하고, 미워하고, 복수하기를 좋아하고, 성품이 온유하고 겸손한 예수님의 성품을 전혀 닮아있지 않다면, 당신의 영적 상태는 심각한 것이다. 당신은 변화되어야 한다. 모든 변화되지 못하게 가로막는 인간적인 가르침들을 다 버리고, 과감하게 진리로 돌아서서 주님께서 명령하신 성경의 참 진리가 무엇인지 연구하고, 그 진리가 말하는 대로 모든 것을 버리고 새롭게 변화되고 거듭나야 한다. 그리고 그 거듭남은 한 번만 이루어지면 안 된다. 그 거듭남은 매일 지속하여야 하며, 매일 매 순간 더 깊은 거듭남의 경험으로 들어가야 하며, 늘 그 거듭난 상태를 유지하며 살아야 한다.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 안에서 그 일은 가능한 것이다.

 

신앙 1부 - PART 1. 변화되지 않는 이유: 변화되어야 한다는 가르침을 받지 못해서

변화되어야 한다는 가르침을 받지 못해서

기독교인이 변화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철저하게 그리고 온전하게 변화되어야 한다는 가르침이 기독교 안에 없기 때문이며, 변화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지 않기 때문이다. 교회에서 듣는 설교 중에 간혹 들을 수 있는, 교인들은 신자답게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메시지가 있기는 하지만, 우리의 성품이 예수님의 성품처럼 변해야 하며, 모든 죄를 회개하고 죄를 승리하는 생애를 살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듣기는 어렵다. 그 이유는 현재 기독교 안에서 가르쳐지고 있는 복음과 가르침들은 대부분 변질한 복음, 오류가 섞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현 기독교의 조류와 복음은 사람이 변화되어야 할 필요성을 전혀 강조하지 않는다. 기독교 교리와 복음을 가르치고 전파하는 목회자들과 교역자들이 그렇게 많지만, 현재의 상태에서 벗어나 전혀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되어야 한다는 필요성을 가르치거나 깨우쳐주는 사람이 없으므로 교인들은 자신이 변화되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이것이 기독교인들이 변화되지 않는 큰 이유이다. 그렇다면 어떤 가르침이 변화를 막는가?

1. 거짓 평안의 기별이 변화를 막는다

대부분 기독교인은 교회에 가서 매우 편안한 복음만을 듣는다. 그들이 듣는 복음은 언제나 "지금 이대로도 괜찮습니다! 당신은 값없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저 계속 교회만 다니십시오. 영생은 값없이 주어지고, 구원은 저절로 보장됩니다."라는 식의 거짓 평안을 주는 거짓 복음이다. 구원을 이미 받았으므로 아무것도 염려할 것이 없고, 지금 이 상태가 괜찮다는 평안과 위로의 기별은 신자들을 깨어나게 하지 못한다. 환자가 병이 나으려면 자신의 상태에 대한 정확한 진단을 받고 자신의 병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한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정확히 알려면, 자신의 상태에 대한 정확한 진단이 필요하다. 그러나 요즈음 기독교에서 가르치고 있는 복음과 설교들을 들어보라! 그 설교들은 신자들의 심각한 영적인 상태와 질병을 진단하고 알려주거나, 신자들이 자신의 영혼의 곤고함을 느끼고 깨어나 회개하게 하며, 온전하게 변화되도록 촉구하거나 호소하는 내용의 것들이 아니다. 오히려 신자들의 영적인 상태가 아주 좋고 양호하며, 그대로도 영생과 구원을 얻기에 아무 부족함이 없다고 위로하며 평안을 주는 거짓 평안의 기별들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 성경의 가르침은 그와 반대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상태를 적나라하게 밝히시며 이렇게 말씀하신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계 3:17, 19).

거짓 평안의 기별은 신자들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수술되어야 할 부분을 정확히 알려주어 도려내고 치료하는 것이 훌륭한 의사가 하는 일인 것처럼, 신자들의 곤고한 영적인 상태를 알려주고, 죄를 정확하게 지적하여 회개하게 하고, 진정한 통회와 굴복을 통해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되도록 호소하고 가르치고 촉구하는 기별이 기독교 안에 필요 되고 있다. 우리는 회개해야 한다. 우리는 변화되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과 예수님의 성품으로 변화되어 영광에서 영광에 이를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기독교 안에 가르쳐지고 있는 거짓 평안의 기별이 기독교인들의 변화를 막고 있다.

2. 값싼 은혜의 가르침이 변화를 막는다

당신은 다음과 같은 설교와 가르침에 익숙해 있는가? 그렇다면 당신이 변화되기는 불가능하다. "우리는 죄인입니다. 우리는 어차피 죄 가운데 태어나, 죄를 매일 물먹듯이 짓고 삽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은혜로 다 용서하시고, 덮어주시고 구원해 주십니다. 그냥 입으로 주님을 믿는다고 시인만 하면 됩니다.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은혜로 다 구원해 주십니다!"

요즘 교회 안에 은혜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가르침이 편만하다. 아무리 죄가 많고 또 매일 죄를 지어도, 하나님의 은혜로 다 용서해 주시고 덮어주셔서 구원해 주신다는 값싼 은혜의 가르침은, 진리에 대한 확신이 없이도, 또한 죄의 고백과 죄에 대한 진정한 회개나 거듭남 없이도, 그리고 생애의 진정한 개혁이나 변화가 없이도 구원의 확신을 얻도록 신자들을 세뇌시켜 놓았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도록 요구하지 않는 은혜, 자아의 죽음이 없는 감정적이기만 한 은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가치를 떨어뜨리는 값싼 은혜로 만들어 놓았다. 그런 은혜로만 구원을 받는다고 믿는 신자들은 변화해야 할 필요성이나,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는 일, 그리고 행위의 열매에는 무관심하게 된다. 이러한 가르침은 죄를 값싼 은혜로 덮어씌우기 때문에 깊은 회개의 경험을 할 수 없게 하고, 점점 더 안이하고 편안한 신앙생활과 타성에 젖는 기독교인이 되게 만든다. 이것이 교회 안에 변화되지 않은 신자들이 그렇게 많은 이유이다.
값싼 은혜를 가르치면 사람들은 은혜를 단순히 어떤 교리나 이론으로서 받아들이게 된다. 그리하여 그 은혜 속에 들어 있는 은혜의 진정한 파워, 곧 사람을 완전히 변화시키는 재창조의 능력과 죄를 승리하게 하는 힘, 그리고 성화와 순종의 생애를 가능하게 만드는 은혜의 능력을 간과하게 하므로, 값싼 은혜를 믿는 사람들은 참된 회개나 죄에 대한 포기가 없이도 죄를 용서받을 수 있고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변화와 순종을 강조하지 않는 반쪽 복음, 값싼 은혜를 가르치는 교회 때문에 사람들은 변화하지 못하고 있다.

3.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라서

기독교인들에게 깊게 자리 잡고 있는 사상이 하나 있다. 그리고 이 사상은 기독교인들이 변화되지 못하게 가로막고 있는 큰 장벽이 되고 있다. "우리는 원죄를 타고나 어차피 태어난 자체가 죄인이다. 그러니 죄 중에서 살다가 죄 중에서 구원을 얻는 것이다. 그러니 그냥 이렇게 죄를 지으며 사는 것이 당연하다." 이렇게 믿는 사상은 원죄설이다. 이 말은 교회 안에서 매우 자주, 그리고 흔하게 들을 수 있는 말이다. 원죄를 믿으면 변화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원죄설을 믿는 사람들은 "죄란 우리가 이 죄 된 세상에 태어난 자체이다."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죄란, 우리가 하는 어떤 행동이나, 말이나, 생각과는 상관이 없다고 믿는다. 그리고 "우리는 아담의 자손이기 때문에 조상으로부터 죄를 물려받았고, 바로 그것이 타락한 악한 본성이며,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기 때문에 변화될 수 없다."라고 한다.

성경은 이에 대해 무엇이라고 하는가? 성경은 타고난 조상의 죄 때문에 내가 멸망 받는다고 절대 말하지 않는다. 그 대신 각 사람의 범죄는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고 말한다.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 아들은 아비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할 것이요, 아비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하리니, 의인의 의도 자기에게로 돌아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겔 18:20). 하나님께서는 에스겔 선지자를 통하여 모든 사람은 자신의 죄로 멸망하는 것이지, 조상의 죄로, 아버지의 죄가 전가되어 죽는 것이 아니라고 선포하셨다. 또 다른 구절을 보자. "그러나 악인이 만일 그 행한 모든 죄에서 돌이켜 떠나, 내 모든 율례를 지키고 법과 의를 행하면, 정녕 살고 죽지 아니할 것이라. 그 범죄한 것이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 그 행한 의로 인하여 살리라"(겔 18:21~22).

만일, 신학자들이 말하는 대로, 오래전부터 교회가 가르쳐 온 교리대로, 우리의 조상 아담의 죄가 전가되어서 우리가 죽는다면, 하나님은 얼마나 불공평하신 분이 될 것인가? 그리고 성경의 말씀들은 얼마나 모순된 말씀이 되겠는가? "그때에 그들이 다시는 이르기를 아비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들의 이가 시다 하지 아니하겠고"(렘 31:29). 이 구절도 조상의 죄가 자손에게 전가된다는 것을 부인하고 있지 않은가! 죄를 조상 탓으로 돌리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아버지의 죄가 아들에게 전가되지 않는다는 것을 교훈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에스겔 선지자, 또 예레미야 같은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는 조상의 죄 때문에 연약해진 죄로 기울어지기 쉬운 성향을 유전자로 받고 태어나지만, 조상의 죄 때문에 정죄를 받고 멸망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시는 능력과 은혜로 모든 죄를 승리하며, 죄를 짓기로 선택하지 않고 하나님 편, 올바른 편을 택하므로 변화된 삶을 살 수 있다.

 

권두언

표범이 그 피부를 변할 수 있으며 유색 인종이 그 얼굴을 하얗게 만들 수 있을까요? 물론 과학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피부 이식 수술을 받는다면 혹 모를까…. 만일 표범이 그 피부를 변할 수가 있다면 죄인도 변화될 수 있으리라는 것이 우리의 고민에 대한 성경 말씀의 해답입니다.

그렇다면 포기하라는 뜻인가요? 물론 아닌 것을 잘 압니다. 부자 법관이 슬퍼하며 돌아간 후에, 주께서는 부자가 하늘에 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 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힘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에 놀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지요. 사람은 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고 말입니다.

로마서 10장에서 아주 중요한 한마디 말씀을 발견하게 됩니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쓰다가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않았다는 말씀 말입니다.
구약 성경 예레미야 서는 이스라엘이 가지게 된 의를 "여호와 우리의 의"라고 불렀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 속에 있는 의를,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신 의를 나누어 받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인간 스스로 이룰 수 없는 그러한 의를 얻었기 때문에 "여호와 우리의 의"라고 외친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고민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왜 나는 변하지 않는 걸까? 교회 다닌 지가 그렇게 오래되었는데도... 교회 장로, 집사, 아니면 교역자로 그렇게 오래 봉사했는데도... 새벽 기도는 물론이요, 선교의 일도 많이 했음에도 왜 나는 항상 제자리에서만 서성이는 것일까? 구원받았다고 외치면서도 왜 마음이 이렇게 허전하고 채워지지 않는 것일까?

이번 호에서 이 고민에 대한 좋은 해답을 발견하게 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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