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Did you know?: 사탄이 만들어 놓은 구원의 위조 지폐

 

사탄이 구상하는 기본 전략은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범하게 하는 것이다. 그는 더러운 것은 결코 하늘 왕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죄를 품고 있는 자를 결코 하늘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다음과 같은 사도 바울의 말씀처럼 우리가 누구에게 순종하는가가 우리의 주인을 결정한다.
바로 그자가 우리의 주인이 된다.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 6:16).
우리는 우리가 순종하는 자의 종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만일 그대가 하나님께 순종한다면, 그대는 하나님의 종이다. 그러나 그대가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중단하면, 하나님의 종이 되기를 그치는 것이다. 사탄의 계획은 그대로 하여금 사탄 자신을 순종하도록 함으로써 그대를 사탄 자신의 종으로 삼는 것이다.

그대가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한, 그대가 무엇을 할지라도 사탄은 상관하지 않는다. 그대가 그리스도 교회의 이름으로 무엇을 할지라도, 그대 개인의 마음과 생활에서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이 있다면, 사탄은 상관하지 않을 것이다. 지나간 역사를 통해서 볼 때,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종교적 의식과 활동에 생애를 바쳤지만,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에 불순종함으로써 사탄의 종이 된 예가 너무나 많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 말씀은, 주말마다 빠지지 않고 교회에 다니면서 교회 활동에도 열심히 참여하지만, 하나님의 법을 범하는 불법한 생애를 살아감으로써 영생을 잃어버리게 되는 비극에 대한 경고의 말씀이다. 주의 이름으로 모든 것을 행하였지만, 하늘에 들어가기 직전인 세상 끝에 예수께로부터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 한다는 선언을 듣게 되는 장면을 생각해 보았는가? 왜 이런 비극이 생기게 되었는가?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그와 같은 비극의 주인공이 되게 하였는가?

예수께서는 이 성경 절의 바로 앞에서 그 이유를 정확하게 설명해 두셨다. 그들이 주의 이름을 매우 많이 불렀지만, 그들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의 이름을 크게 부르면서 열심을 내어 일했지만, 그들의 열심과 행위가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예수께서 그들의 경배를 받으실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하기를,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옆으로 제쳐놓고, 인간이 만든 계명과 교리 즉,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하였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순종을 가장 높은 경배 형태로 말씀하셨다는 사실을 주지해야 한다.

 

사랑의 편지: 씨앗

 

씨앗

 

                                                   강영은

 

터널처럼 두른 깜깜한 어둠을 의아해하지 마십시오.

이름 없이 땅속에 묻혀 있음을 한탄하지 마십시오.

빨리 싹을 내고 싶다고 초조해하지도 마십시오.

부풀어 올라 터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불평하지도 마십시오

 

 

왜 그렇게 말없이 웅크리고 있느냐고 묻지 마십시오.

왜 그리 손발 묶인 듯 답답하게 있느냐고 묻지 마십시오.

왜 그렇게 침묵하기만 하냐고도 묻지 마십시오.

왜 빨리 싹 하나 피워 밀어내지 못하냐고도 묻지 마십시오.

 

 

어둠이 왜 두렵지 않겠습니까?

적막 속에 갇혀있는 것이 왜 답답하지 않겠습니까?

햇빛과 하늘을 이고 춤추는 것이 왜 기다려지지 않겠습니까?

다 썩어 존재도 없이 사라져버리는 것이 왜 두렵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어둠 속에서 홀로 싸운 그 몸짓으로 영혼이 살찐다는 것을    

오랜 침묵 끝에 터지는 생명이 더 충만하다는 것을

견뎌낸 고뇌와 시련이 더 힘찬 싹을 밀어낼 것을

깊이 익고 오래 썩은 후에라야 더 아름다운 꽃이 필 것을 나는 압니다.

 

 

잘 압니다. 땅 위로 올라오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압니다. 이제부터가 시작인 것도

딱딱한 흙덩이 몸으로 헤쳐내야 함도,

비바람과 폭풍우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도 잘 압니다.

 

 

잎들 떨쳐내고 가지 전정되는 아픔을 겪을 것을 압니다.

가지들 꺾이는 비바람 속에서 몸 흔들릴 것을 압니다.

무정한 발길질과 비웃음 기다릴 것도 압니다.

짓궂은 바람의 장난으로 흙바람 뒤집어쓸 것도 압니다.

 

 

그러나

싹 틔울 기쁨에

꽃 피울 기쁨에

열매 맺을 기쁨에

그리고 밝은 햇빛 몸으로 받고

더 높은 하늘로 자랄 기쁨에 모든 것을 잊을 수 있기에

 

밝는 날 어깨와 가슴에 더 많은 꽃과 열매를 달게 되리라는 걸 알기에

오래 삭힌 몸에서 절로 터져 나올 잎과 꽃으로 숲을 달굴 것을 알기에

훗날 황량한 들판에 떼 지어 들어설 열매 그득한 숲을 꿈꾸기에

 

오늘도 지난한 몸짓 쉬지 않고 위로 오릅니다.

더 단단히 뿌리와 몸통을 키우며

 

그리고 기다려 봅니다.

이 작은 몸으로 작은 한 귀퉁이의 땅을

풍요롭게 할 그날을...

그리고 하늘 농부의 곳간을 채울 귀한 알곡이 될 그날을...

 

월간 세계 동향 TOP 5

 

1. 미 대통령 오바마 당선 확정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밋 롬니 공화당 후보와의 접전 끝에 재선에 성공했다. 4년 전 미 역사상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됐던 오바마 대통령은 재선 고지에 올라 새로운 역사를 쓰게 됐다.
오바마 대통령은 재선 이후 재정적자 누적으로 '재정절벽' 가능성까지 거론되고 있는 미국 경제의 재건이 가장 큰 과제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2. 허리케인 샌디, 미 북동부 강타

시속 150km가 넘는 돌풍과 폭우를 동반한 허리케인 샌디가 10월 30일(현지시각) 뉴저지주 남부 해안에 상륙해 700만 가구 이상을 정전시켰으며 원자력발전소의 일부 가동을 중단시키는 등 막대한 피해를 줬다. 초대형 허리케인 샌디의 경제적 피해 규모가 사상 최대에 이를 수 있다고 11월 1일(현지시각) 무디스 애널리틱스 보고서는 평가했다.

 

3. IMF, 세계 경제의 새로운 불황에 대해 강력 경고

전 세계 주요 중앙은행들이 경기회복을 위해 대규모 부양책을 실시하고 있지만, 경기지표는 여전히 기대에 못 미치고 있다. IMF는 세계 경제의 성장 전망을 축소하고 유럽이나 미국의 정책가들이 심각한 위협을 잘못 다루면 전면적인 세계 경제 불황이 될 것을 경고하였다. 

 

4. 끝이 없는 유로존 경제 위기

그리스와 스페인에서는 강도 높은 긴축정책을 반대하는 시위가 계속되고 있으며 상황은 계속 악화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독일의 9월 공장 주문은 8월보다 3.3% 하락하여 0.4% 하락을 예상했던 경제 전문가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독일 공장 주문은 일 년간 최대 하락을 기록하였으며 진행되는 경제 위기를 강조하였다.

 

5. 계속되는 시리아 내전

시리아에서는 정부군과 반군의 교전과 테러 등으로 하루에만 100여 명씩 사망자가 발생하고 있다. 또한, 지난 10월에는 터키와 박격포탄 공격을 주고받으며 충돌하는 등 시리아의 이스라엘, 요르단, 레바논 국경 등에서도 무력충돌이 이어지고 있다.
작년 3월 시리아 내전이 시작된 이후 올해 11월까지 모두 3 2천여 명의 사망자가 나온 것으로 집계됐다.

 

바이블맨: 초대 교회 시대의 일곱째 날과 우리 시대의 일곱째 날과는 차이가 있는 것일까요?

 

질문 : 사도행전을 보면 사도들은 안식 후 첫날 곧 일요일에도 예배를 드린 것 같습니다. "안식 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저희에게 강론할 쌔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니"(20:7). 이 본문에서 "떡을 떼려 모였다"는 뜻은 초대 교회 예배의식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그러므로 사도 시대에 사도들은 일요일에도 예배를 드리기 위해 모였다는 겁니다. 이것으로 안식일 논쟁은 일요일이냐 토요일이냐의 율법적 혹은 형식적인 것이 돼서는 안 되며,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가 안식일 논쟁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있는데 사실인가요?

 

식 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저희에게 강론할 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 20:7).

정확한 역사가로 정평을 받고 있는 누가는 부활 후 30여 년이 지난 A.D. 63년경까지의 사도 교회 역사를 기록한 사도행전에서 적어도 84회 이상 안식일이 준수되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반면, 첫째 날인 일요일에 관한 언급은 이곳 한군데밖에 없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처럼, “자기의 규례대로드로아에서 안식일을 보내고안식 후 첫날(토요일 저녁)”에 모였습니다.
그 모임은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특별히 모인 성만찬을 겸한 송별집회였습니다. 20:6-13절의 전체 문맥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여기서 피곤한 유두고가 창에서 떨어지는 일화가 나옵니다. 일요일 아침부터 그날 밤까지 말씀을 나눈 것이 아니라 토요일 저녁부터 밤중까지 계속한 것입니다.

안식 후 첫날은 토요일 밤
새 번역 성경:토요일 밤에, On Saturday night”(NEV).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이방인이면서도 유대력사용( 23:54-56 참조)
경이 말하는 하루의 개념은저녁부터 그 다음 날 저녁까지입니다.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 1:5).
그 저녁부터 이튿날 저녁까지 안식을 지킬지니라” ( 23:32).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날은 금요일입니다. 그 사건에 대한 누가의 기록을 보면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금요일 :이날은 예비일이요 안식일이 거의 되었더라” ( 23:54)
          “그날은 안식일을 준비하는 금요일이었는데 안식일이 곧 시작되려는 참이었다.” (현대인의 성경, 23:54)
안식일 :계명을 좇아 안식일에 쉬더라” ( 23:56)
일요일 :안식 후 첫날 새벽에무덤에 가서” ( 24:1)

예수님은 금요일 오후 3시경( 15:34, 유대시간 9)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리고 그날 저녁을 금요일 밤이라 하지 않고 안식일이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금요일 오후 해가 지고 저녁이 되면서부터 일곱째 날(안식일)이 되는 것입니다.
금요일은 성일(聖日)을 예비하는 날이요, 토요일은 성일이고, 일요일은 성일 다음 날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사건은 십자가와 부활이고, 중요한 날은 안식일입니다. 우리는 기독교 신앙의 중심 사건인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중요한 날인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켜야 합니다.

그날은 안식일 전날, 곧 안식일을 준비하는 금요일이었다.” (현대인, 15:42)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 20:8)
안식 후 첫날 새벽에.” ( 24:1)

 

⑶ “안식 후 첫날(μια των σαββατων)”이라는 말은 유대력의 용어
마력을 썼다면 dies solis(일요일)이라는 용어를 썼을 것입니다제자들은 안식 후 첫날, 둘째 날, 셋째 날, 넷째 날, 다섯째 날, 예비일(금요일), 안식일. 이렇게 날짜계산을 했습니다. 안식일은 그들 삶의 중심이었습니다.

이날은 예비일이요 안식일이 거의 되었더라 갈릴리에서 예수와 함께 온 여자들이 뒤를 좇아 그 무덤과 그의 시체를 어떻게 둔 것을 보고” ( 23:54-56).

안식일이 거의 되는 시간은 언제입니까? 금요일 저녁입니다. 마찬가지로 안식 후 첫날은 토요일 저녁부터 시작합니다.

 

(4) 송별집회
도 바울은 오순절 전에 예루살렘에 도착하려는 계획에 따라 급히 여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안식 후곧 토요일 밤에 다시 모여 성만찬을 겸한 애찬을 나누며, 말씀을 자정이 넘도록 들었는데, 이렇게 밤늦게까지 모인 까닭은 이튿날 날이 새면 바울이 떠나기 때문에 특별집회로 모인 것이었습니다( 20:7.8).
그 다음 날 바울은 육로로 32km 길을 걸어 앗소로 가서, 뱃길로 먼저 가 기다리던 누가 일행을 만나 여행을 계속하여, 미둘레네사모밀레도에 수요일에나 목요일쯤에 이르렀습니다. 거기서 에베소 장로들을 초청하여 특별집회를 해 심금을 울리는 설교를 했습니다( 20:14-38).

 

(5) 안식일 준수
와 같은 문맥을 이해할 때, 사도는 안식일에는 결코 길을 떠나지 않고, 자기 규례대로 신자들과 함께 예배드리며 보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곧안식 후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20:7) 밤중까지 특별집회를 했고, 밀레도에서는 주중인 수요일이나 목요일인데도 다시 에베소의 장로들을 위해 특별 집회를 한 것입니다.
이 두 집회가 모두 그렇게 촉박하고 간절했던 이유는, 그것이 바울의 마지막 여행으로 다시는 얼굴을 볼 수 없을 것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20:37,38). 그러므로 문맥에서 분명하게 사도 바울이 여행 중에도 철저히 지킨 날은 안식일이며, “안식 후 첫날인 일요일은 여행을 떠나는 평범한 날이었음이 분명합니다(교회역사가, Augustus Neander).
일요일을 준수하는 탁월한 교회사가인 네안더도 사도행전 20장의 사건이 일요일을 성수했음을 입증하는 근거가 될 수 없음을 아래와 같이 솔직히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 성경 구절은 전적인 확증을 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도의 촉박한 출발이 이 작은 교회로 하여금 형제애가 넘치는 송별 식사를 위해 모이게 했을 것이고이 경우 특별한 축제가 아니었을지라도 사도는 이때에 그의 마지막 말씀을 전달하였을 것이다.”

 

신앙 10부: 성령의 열매인 절제는…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고전 9:25).

절제는 영어로는 “self control”이라고 하는데, 극기, 자제, 의지력 등으로 표현될 수 있다. 바울이 절제의 열매를 제일 마지막에 언급한 것은, 절제의 훈련 없이는 바울이 지금까지 말한 성령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노하기를 더디 하는 사람은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사람은 성을 점령한 사람보다 나으니라"(16: 32)라고 말하고 있다. 자기를 복종시키고 자기를 통제하는 일은 성을 점령하기보다 어렵다는 뜻이다. 그래서 성령의 도우심 없이는 절제가 어렵다. 마음을 다스린다는 것은 욕망을 억제함을 뜻하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성령을 거스르는 육체의 소욕을 억제하고 다스리며 지배하는 자제력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알맞게 조절하여 방종하지 않도록 통제함을 말하는 것이다.

 

* 절제의 열매를 맺으려면...

1) 하나님의 은혜로 극복하라
마지막 여자의 남은 무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절제이다. 왜냐하면, 자신을 이기는 자, 세상을 이기는 자, 죄를 승리하는 자들만이 마지막 선과 악의 대 쟁투에서 살아남고, 사단과 죄악을 정복하고 이기는 자만이 하나님의 증인이 될 수 있으며, 또한 연단과 훈련을 받고 자제하는 법을 배운 사람들만이 하나님의 온전하신 성품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십사만 사천의 특성을 보라.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 14:5)라고 성경이 말하고 있지 않은가? 입에 거짓이 없고 흠이 없다는 뜻은, 그들은 자신을 제어하고 다스릴 뿐만 아니라 말에 흠이 없는 자라는 말인데, 곧 그들은 철저하게 극기하고 자제한 결과로 그런 아름다운 특성을 이룬 사람들이다. 자아를 부인하고 정욕과 식욕과 욕망을 극복하려면 절제가 필요하다. 더 나아가 감정과 생각을 절제하고 주어진 시간을 절제하여 하나님께 바치며, 악한 말이나 열매 없는 육체의 일에 참여하지 않고 낮에와 같이 방정하게 행하는 데는 철저한 극기가 필요하다. 그리고 이 악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순결하신 성품을 이루기 위해서는 상당한 절제와 엄격한 자제와 극기가 요구된다.
그런데 이런 절제의 열매 또한 우리의 힘으로 맺기가 어렵다. 비록 우리가 의지를 가진다 해도 우리에게는 힘이 없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극복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 우리에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능력과 은혜를 받을 때에 진정한 절제는 가능하다. 우리는예수님을 믿음으로써만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저열한 본성을 정복하라고 가르치신다. 그리스도의 전 생애는 극기의 모본이셨다. 우리가 예수께서 승리하신 것처럼 승리하고자 한다면, 그리스도를 쳐다보아야 하고, 그가 사탄을 대적하신 것처럼 악을 대적해야 하며, 그가 기도하신 것처럼 기도해야 하며, 그가 고민하신 것처럼 고민해야 한다. 복음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승리는 자신에 대한 통제이다. 우리의 선천적인 성향들은 제어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예수께서 이기신 것처럼 이길 수 없을 것이다. 절제하기 위해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구하라. 우리 속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우리로 모든 일에 능하게 하실 것을 믿고 그분의 능력 속에서 절제의 열매를 맺으라.

2) 생활에서 절제를 실천하라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고전 6:19).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기 위하여서 우리는 우리의 몸을 제어해야 한다. 몸을 건강한 상태로 보존하는 것, 그리하여 살아 있는 기계의 각 부분이 조화되도록 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다. 하나님의 자녀는 병든 몸이나 균형지지 않은 정신을 가지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없다. 식욕과 정욕이 완전한 통제하에 있지 않으면서 영적인 성장을 증가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특히 먹는 일에 절제가 실행되어야 인내심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는데, 먹는 일에나 마시는 일에서 부절제로 방종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성품을 이루는 일이 어렵다. 우리가 승리하는 사람이 되려면 일상생활, 특히 식생활에서 절제해야 한다. 우리가 생명의 법칙을 범하며 살 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없다. 육욕에 방종하고 또 계속적인 정욕의 해로운 방종 때문에 병든 몸과 혼란한 지성은 몸과 영의 성화를 불가능하게 한다. 사도 바울은 성공적인 그리스도인 성품의 완성을 위하여 몸의 건강 상태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라.(고전 9:27)라고 말했다.
부절제하는 사람은 인내력 있는 사람이 될 수 없다. 술을 마시는 것만이 부절제가 아니다. 부절제하게 먹는 것, 곧 너무 자주, 너무 많이, 또한 너무 양분이 많으면서도 건강에 좋지 못한 음식을 먹는 것이나 건강을 쓸데없이 소모하는 것도 부절제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분께서 받으실 만한 상태가 되게 하려고, 즉 그분의 소유가 되는 저들의 몸과 정신으로 그분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처지에 이르기 위하여, 관심과 열심을 가지고 식욕을 만족하게 하는 일을 거부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진리의 아름답고 명료함을 그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며, 그 진리를 생활에 옮길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신체적인 건강은 우리가 먹는 것으로 유지된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의 식욕이 성화된 마음의 통제 아래 있지 않고, 또한 우리가 먹고 마시는 모든 면에 절제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을 이루는 일에 실패하게 될 것이다.

 

**마치면서

하나님의 성품을 생애에서 이룬다는 것은, 삶 속에서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가 풍성하게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성도들이 균형 있고 아름다운 성품을 소유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매우 기뻐하시며, 그들을 자랑스럽게 우주에 들어 올리실 것이다. 잘 연마되고 흠 없는 성품을 나타내는 것이 곧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 되며, 이런 성품이 준비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이마에 그분의 인을 치실 것이다. 지금은 마지막 여자의 남은 무리의 성품을 준비할 때이다. 만약 우리의 생애에 성령의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다면, 우리는 겸손하게 통회하고 애통한 마음으로 주님께 굴복하며 아름다운 주님의 성품을 이루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
독자 여러분의 생애에 성령의 열매가 풍성하게 맺히기를, 십사만 사천의 흠 없는 성품이 온전하게 형성되기를 기도드린다.

 

신앙 9부: 성령의 열매인 온유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 5:5).

우리는 온유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온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온유”(gentleness, meekness)는 부드러움, 순함, 친절, 정다움, 과격하지 않음 등의 뜻을 가진 단어로, “온화하고 부드럽다는 의미이다.

 

* 온유의 열매를 맺으려면...

1) 예수님의 생애를 명상하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 11:29).
온유는 예수님 성품의 대표적인 특성이다. 하늘 영광을 버리시고 비천한 인간의 본성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생애는 온유와 겸손 그 자체였다. 아버지 영광의 광채이신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 2:6,7)기로 작정하셨다. 지상 생활 동안 그분께서는 왕으로서 사람들에게 군림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것을 사명으로 여기며 사셨다. 자신을 비우신 예수께서 행하시는 일에는 어디에도 자아가 나타나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우리도 예수님의 이런 온유한 특성을 가질 수 있을까? 우리는 매일 예수님의 생애에 나타났던 온유와 겸손함을 명상하고 쳐다보아야 한다. 바라보는 대로 변화된다. 예수님을 닮고 싶으면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서 생각하고, 그분의 말씀을 읽고, 그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그분과 가까이 동행하여야 한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온유와 겸손을 쳐다보는 사람은, 다니엘이 인자와 같은 이를 바라보았을 때 그랬던 것처럼 “아름다운 빛이 변하여 썩은 듯하”( 10:8)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예수님의 순결하시고 고결하고 아름다운 성품과 생애를 바라보는 사람은, 세상의 모든 것이 그분 앞에서 빛을 잃어버리며 자신의 무가치함을 깊이 느끼게 될 것이다. 그분의 성품과 자신의 성품을 비교해 볼 때 우리는 우리의 추한 성품에 대해 부끄러워질 것이다.
우리가 온유하거나 겸손하지 못한 것은, 그렇게 해야 할 만큼 예수님에 대해 생각하거나 그분에 대해 명상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의 본성을 보면 언제나 자기 과시를 위해 애쓰고 투쟁을 위해 준비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에 대해 배운 사람은 이기심과 교만과 지배욕을 멀리한다. 자아가 성령의 지배 아래 굴복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제일 높은 자리를 얻기 위해 전전긍긍하지 않게 된다. 자신을 드러내기 위하여 다른 사람을 밀어낼 생각도 품지 않게 된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발아래 앉는 것을 제일 높은 자리로 생각하게 될 것이다.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서도 참고 온유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이방인들이나 유대인들이 귀하게 여기는 특성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연민이나 조소를 자아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온유를 천국에 들어가는 첫째 조건으로 삼으신다.

2)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
진정한 의미에서 온유한 사람이란 자아에 대해 죽는 법을 배운 사람이다. 온유는 자아가 비워진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특성이다. 예수께서는 그분의 온유함과 겸손함을 배우기 원하는 자들에게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다. 온유한 사람은 자아 중심적이지 않고 자신에게 사로잡혀 있지 않은데 이러한 태도가 바로 마음에 쉼을 찾게 하는 열쇠이다. 결국, 우리가 겪는 온갖 소란과 소동은 자아를 먼저 생각하고 자신이 원하는 바를 추구하는 데서 기인하지 않는가? 사도 바울은 이런 경험에 대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2:20)라고 고백하였다. 우리의 평화를 깨뜨리는 것은 자신에 대한 사랑이다. 자아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언제나 그것이 굴욕과 모욕을 당하지 않게 하려고 방어 태세를 취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죽고 우리의 생애가 그리스도로 더불어 하나님 안에 감추어질 때는, 무시나 경멸을 조금도 개의치 않게 될 것이다. 비난에 대하여 귀머거리가 되고, 조소와 모욕에 대하여는 소경이 될 것이다.
우리는 자아를 비우기 위해 우리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 자신의 뜻과 의지를 성령의 지배 아래 굴복하고 겸손하게 성령의 음성에 따라야 한다. 비록 그 일이 힘들고 고되더라도 자아를 못 박기 위해 주님의 은혜와 확고한 결심 아래서 밀알처럼 땅에 묻혀야 한다. 온유는 자신의 악함에 대해 진심으로 통회하고 애통해 하는 사람에게 열리는 열매이다. 자신을 주님께 바치고 우리 속에 예수님께서 거하실 때, 온유와 겸손의 열매는 열릴 것이다. 온유의 열매는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이며, 참된 능력의 근원 되시는 주님께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분의 성결의 아름다움에 매료될 때, 그리하여 우리의 성품이 그분의 것처럼 될 때, 지적인 능력으로 고안할 수 없고 돈으로도 살 수 없는 참으로 귀중한 보물인 온유와 겸손의 열매가 열릴 것이다.

 

신앙 8부: 성령의 열매 충성은…

 

오직 선한 충성을 다하게 하라” ( 2:10).

성경에서 충성이라는 단어는 “신실함”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충성은 변함없이 믿음을 고수하는 것인데, 흐트러짐이 없이 신의를 지키는 ‘충절’, 믿는 바를 확신하고 정로에 머무르는 ‘지조’, 변경할 수 없는 원칙이나 목적에 대해 충실한 ‘정절’, 결정한 것에 대해 흔들리지 않고 밀고 나아가는 ‘결의’ 등의 뜻이 포함되어 있다. 충성은 특히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목적한 바에 대해 흔들림 없이 굳게 서는 것을 말한다.

 

* 충성의 열매를 맺으려면...

1) 신실하신 하나님의 속성을 본 받으라
주는 일향 미쁘시니”(딤후 2:13).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시다. 성경에 쓰인 “미쁘시다”는 뜻은 신실하시다는 의미로서, 하나님은 미쁘시다는 표현이 여러 곳에 등장한다. 또한, 성경은 하나님의 성실하심을 찬양하고 있다. “여호와여 주의 성실하심이 주를 둘렀나이다.” (시 89:8), “주의 성실하심이 공중에 사무쳤으며” (시 36:5), “나의 성실함도 폐하지 아니하며” (시 89:33),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 (애 3:23).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한결같다. 하나님은 인간과 지구를 창조하시기 전이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신실하시다. 그분은 과거에 그러하셨듯이 장래에도 변함없이 신실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하나님께서 한 번 약속하신 것은 끝까지 이루시는 속성에 잘 나타나 있다.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을 지키신 하나님, 이스라엘과 맺으신 언약을 지키신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계획하신 그분의 약속을 지키신다.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의 사랑에는 우리를 구원하시겠다는 약속을 지키신 신실하심이 드러나 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한 치의 오차도 없다. 별들이 정해진 길을 따라 광활한 궤도를 운행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경륜은 조급하거나 지체되는 법이 없다. 하나님의 신실하신 계획과 약속은 정확한 시간에 성취된다. 하나님께서는 빽빽한 흑암과 연기 나는 풀무의 표상을 통하여 아브라함에게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종노릇할 것을 보여 주셨으며, 그들이 사백 년간 거기서 머무르게 될 것이라고 밝히셨다.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창 15:14)고 하신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바로 ‘그날에 여호와의 군대가 다 애굽 땅에서 나왔’다(출 12:41). 또한, 하늘의 회의에서 그리스도의 강림의 시간이 작정되었던 그때, 때를 알리는 우주의 시계가 그 시각을 가리켰을 때 예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베들레헴에 탄생하셨다. 이 세상을 정확하게 운행하시는 얼마나 신실하신 하나님이신가!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같이 신실해야 한다. 엉키고 뒤틀린 삶 속에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의지하며 사는 방법을 배우고 그분의 신실하심을 신뢰해야 한다. 모든 세세한 일에까지 충실하신 주님께서는 작은 일에 충성하는 일꾼을 좋아하신다. 예수님은 작은 일에 충성하는 일꾼에게 많은 것을 맡기신다(마 25:21). 하나님은 작은 일을 대하는 일꾼의 태도에 관심이 많으시다. 우리의 충성은 하나님을 향한 충성과 이웃을 향한 충성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머지않아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인데, 그날에 부끄럼 없이 주님 앞에 서기 위해서는 각자에게 주어진 달란트, 곧 재능, 건강, 시간, 물질 등을 잘 활용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충성스러운 삶을 살아야 한다. 어떤 것, 얼마를 맡았는가보다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를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충성을 기억하시고 훗날에 큰 상급으로 갚아주실 것이다.

2) 진리를 깨달으라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계 2:10).
마지막 짐승의 표 환란과 핍박을 견디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증거하는 증인이 되는 일에는 충성이 요구된다. 그런데 생명을 바치면서까지 충성하기 위해서는 먼저 진리를 알고 깨달아야 한다. 성경이 제시하는 명확한 진리를 깨달아 알고, 복음이 무엇을 요구하는지에 대한 확신이 들어가면 하나님과 그분의 진리에 대한 충성은 저절로 생기게 된다. 이 시대에 알아야 할 진리, 곧 우리를 변화시키고 마지막 영광스러운 예수님의 재림을 위해 우리를 준비시킬 진리를 알게 될 때,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 성경이 가르치는 그대로의 정확하고 순수한 진리라는 것을 알게 될 때, 그것은 놀라운 확신과 기쁨을 주게 되어 하나님께 충성하고 싶은 욕망을 끌어 오르게 할 것이다.
하나님의 명확한 진리는 지금 우리가 사는 현시대의 심각성을 깨우쳐 주고 있다. 곧 다가올 환란과 또 재림을 위해 어떤 성품을 준비해야 하며, 어떻게 자아를 이기고 죄를 승리하며, 어떻게 예수께서 가지셨던 믿음을 가지고 살 수 있는지 가르쳐주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자녀들이 그분의 사업이 위기에 처해 있을 때에 무관심하고 불충실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신다. 온 우주는 말할 수 없이 큰 관심을 두고 선악 간에 대쟁투의 마지막 장면을 주목하고 있다. 하나님의 백성은 지금 영원한 세계의 경계선에 접근하고 있다. 이러한 때에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이겠는가? 각 시대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요셉과 엘리야와 다니엘과 같이 자기들이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임을 고백하기를 부끄러워 않는 충성스러운 증인들을 가지고 계셨다. 그리고 지금 충성스러운 사람들을 찾고 계신다. 그들은 진리에 충실하게 서서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누가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인가?”라고 물을 수 있는 사람들이다. 이와 같은 사람들은 자기의 뜻과 계획을 하나님의 뜻과 계명에 굴복시킨다. 그들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위해서는 자신의 생명을 소중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충성할 것이다.

3) 참된 믿음을 가지고 재림을 기다리라
충성심은 재림을 기다리는 태도와 연관되어 성경에 나타난다. 예수께서는 재림과 말세에 대하여 언급하시며,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충성 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뇨?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의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마 24:44~46)고 하셨다. 그런데 악한 종들, 불신실한 종들은 "주인이 더디 오리라"고 생각한다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만일 그 악한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마 24:48). 악한 종들, 충성 되지 않은 자들은 항상 주님의 재림이 먼 미래의 일이라고 생각하며 세상에 빠져 살아갈 것이다. 주님은 악한 종들이 이러한 생각을 하고 "노비를 때리고, 먹고 마시며 취할 것"이라고 하셨다. 불충실한 자들은 바벨론의 오류와 가짜 복음에 취해 주님의 재림을 믿지 않거나 주님이 오실 때가 아직 멀었다고 생각하면서 맡겨진 일에 불성실할 것이다. 주님은 이러한 불신실한 종들에게 "그들이 생각하지 못한 날"과 "그들이 알지 못하는 시간"에 오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모든 죄를 승리하게 하시는 예수님의 능력과 은혜를 믿는 참된 믿음으로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일, 주님의 재림을 촉진하기 위해 충성스럽게 복음을 전하며 사는 일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반드시 행해야 할 의무이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 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눅 16:10). 믿음은 하나님의 사랑과 신실하심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다. 믿음과 충성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우리의 삶에 역사할 때 저절로 생겨난다.

 

신앙 7부: 성령의 열매 양선은…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 5: 8~9).

양선이란 “어질고 착하다”는 의미가 있는 말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선한 자세를 가리킨다. 양선은 예수님의 대표적인 온유한 사랑의 성격이다. 성경에서 ‘양선’은 선한 행동을 나타낼 뿐 아니라 거룩함을 실천에 옮기는 것이다. 양선은 하나님의 특성이다. 선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성경에 친절, 관대, 인자, 자비, 긍휼, 오래 참으심 등으로 나타나 있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모든 피조물을 대하시는 그분의 친절하심과 관대하심에 나타나 있으며( 145:9, 15~16), 죄인들을 인도하여 회개케 하시는 하나님의 인자하심( 100:5, 2:4), 그리고 곤경으로부터 죄인들을 구원해 내시고 절망 중에 있는 자들에게 친절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로 나타난다( 107: 136, 106:1, 44~46). 그리고 죄를 고집하는 자들에게도 계속 친절을 나타내 보이시는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과 노하기를 더디 하심( 34:6, 78:38, 3:10~4:11, 9:22, 벧후 3:9)으로 표현된다.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최상의 표현은 멸망할 수밖에 없는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를 주신 사실에 나타나 있다. 갈보리산 십자가에서 나타내신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분명히 확증해주신 최상최고의 증표이다.

 

* 양선의 열매를 맺으려면...

하나님의 선하심을 본받으려면 인간의 마음의 본바탕이 변해야 한다.
인간의 마음은 죄로 부패하였으며 죄 가운데에 머물러 있다. 그러므로 인간 본연의 마음에서는 선한 의도를 내기 어렵다. 거듭난 마음이 아니면 선을 행하기가 어렵다는 말이다. 하나님 은혜의 역사로 마음이 새로워지고, 예수님의 사랑으로 마음이 부드러워져야 선을 행할 수 있게 된다. 새롭게 거듭날 때 죄의 부패성이 사라지고 어린아이와 같은 부드러움과 깨끗함을 가질 수 있게 될 것이다. 인간이 만들어 낸 선은 가치가 없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마음에 임재해 계셔서 우리의 의가 되실 때 우리의 행위는 의롭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은혜 속에 거하지 않으면 쉽게 완악해질 수 있는 우리의 실체를 알고 그분의 은혜 속에 항상 거하며, 우리 마음속에 언제나 은혜의 단비가 내리도록 성령의 역사 하심을 간구해야 한다. 이 일이 아무리 힘들고 고되더라도 포기하지 말고 매일 그분의 은혜로 우리 자신을 씻고 정결하게 해야 하며 그분 안에 살아야 선한 일을 행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 아래 사는 삶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지속적이어야 한다. 이런 은혜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거룩해져 가는 일이 가능해질 것이며, 선한 일 양선을 남에게 베풀게 될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행동이 ‘선하다’고 말하기 전에 우리의 동기가 옳아야 한다. 선량한 사람이란 하나님을 향한 그의 내면의 헌신과 사랑으로부터 바른 행동이 우러나오는 그런 사람을 가리킨다. 참된 양선이란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는 부자격자에게까지 선행을 베푸는 것이다. 양선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체험한 사람에게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데, 자아에 관한 관심보다 ‘남에 관한 관심’과 배려로 나타난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의 귀중함을 알고,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것을 깨닫고 이웃을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는 사람은 양선의 열매를 맺을 것이다.

 

 

 

신앙 6부: 성령의 열매 자비는…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엡 4: 32).

자비란 친절로 나타나는 사랑이다. 인내는 참는 사랑이며, 자비는 활동적인 사랑이다. 종종 인내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나지만, 자비는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말하고 행동하는가 하는 친절한 언행으로 나타난다. 자비는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것과 같은 박애적이고 인자한 행위와 관대함과 너그러움과 인자한 성격을 의미하며, 작은 일들에서 나타내는 사랑, 곧 다른 사람의 감정과 개성을 존중해 주는 사려 깊은 태도,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거나 인격을 의심하는 말을 하지 않는 인격, 다른 사람의 좋은 자질에 주의를 기울여주는 마음이다. 자비는 격할 수 있는 상황에서 사랑과 연합을 일으키며, 슬픔과 죄악이 만연한 곳에 축복과 기쁨을 가져다주고, 곤경에 처한 사람에게 도움과 치유의 손길을 내민다. 삶 속에 나타나는 자비라는 성령의 열매는 우리 주위를 유쾌하게 해주며,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이끌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성령의 도구가 된다. 자비는 다른 사람들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지을 수 있는데, 그것은 사람들을 하나님의 가족이 되도록 이끌기 때문이다.

 

* 자비의 열매를 맺으려면…

1) 예수님의 생애를 표준으로 삼으라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골 3: 12).
자비의 표준은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는 예수님의 명령 속에 들어 있다(마 5:43~48 참조). 하늘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하라는 것은, 오 리를 가자고 하는 사람과 십 리를 가주고, 속옷을 벗어달라는 사람에게 겉옷까지 내주며,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자를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지 않는, 일상생활에서 사람이 나타내는 사랑의 행위와 자비의 성품을 가리킨다. 그런 하늘 아버지의 품성과 사랑을 우리에게 보이려고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님은 자신을 위해 살지 않으셨다. 그분의 전 생애는 무아의 봉사의 생애였다.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한”(마 20:28) 것이 그분의 모든 행동의 교훈이었다. 거룩한 자비의 간청을 경시하는 모든 영혼을 품으시고, 병든 자를 고쳐주시고 사귀들린 자들을 불쌍히 여겨 해방해주시며, 그분의 사랑을 조소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셨다.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시는 사랑과 자비는 예수님의 모든 생애를 통해 나타났다. 예수님의 전 생애는 모든 사람을 섬기고 모든 사람을 위하여 봉사하시는 자비의 법칙으로 이루어졌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자비의 율법대로 사셨으며 그분의 모본을 통하여 우리가 어떻게 자비로운 사람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 주셨다.

2) 자비의 마음을 달라고 기도하라
사람의 마음은 날 때부터 냉랭하고 어둡고 사랑이 없다. 사람이 자비와 용서의 정신을 나타낼 때는, 언제나 자기 스스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그의 마음에 역사하는 성령의 감화를 통해서 하게 된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요일 4: 19). 그러므로 우리는 자비를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은 모든 자비의 근원이시다. 그분의 이름은 “자비롭고 은혜롭”(출애굽기 34장 6절)다. 그분은 우리를 우리의 가치에 의해 취급하지 않으신다. 우리가 당신의 사랑을 받을 가치가 있는지 묻지 않으시고, 우리를 가치 있게 해주기 위하여 당신의 풍성한 사랑을 부어 주신다. 그분께서는 원한을 품는 분이 아니시다. 그분은 벌을 주려 하지 않으시고 구속하려 하신다. 당신의 섭리를 따라 나타내시는 엄격함도 실은 완악한 자들의 구원을 위한 것이다. 그분께서는 사람들의 고통을 씻어 주고 그들의 상처에 향유를 발라 주고자 심히 갈망하신다. 자비한 사람은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들이다. 무한한 사랑이신 하나님과 일치되는 마음을 가진 모든 사람은 남을 교화시키기 위해서는 힘을 쓰되 남을 정죄하지는 않는다. 영혼 속에 그리스도께서 거하시면 언제나 자비가 흘러넘치게 될 것이다. 불쌍한 자들, 고난 중에 있는 자들, 압박당하는 자들에게 동정을 보이며 자비를 베풀 수 있는 자비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께 간구해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의 삶에 힘들거나 불쾌한 일이 닥칠 때 자비롭게 반응하기로 선택함으로써, 그리스도인의 자비의 은혜를 나타내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신앙 5부: 성령의 열매 오래 참음은...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 (히 10:36).

오래 참음과 인내는 마지막 남은 무리와 매우 관련이 깊은 단어이다. 요한계시록에는 여자의 남은 자손, 곧 마지막 시대에 나타날 하나님의 참 백성의 특징을 인내를 가진 자들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14:12, 12:17).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 믿음을 가지려면 인내가 필요하다. 자아를 쳐서 복종하고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려면 인내가 필요하다. 또한, 마지막에 하나님의 참 백성에게 다가올 어려운 핍박과 짐승의 표의 환란을 견디려면, 또한 하나님의 성품을 우주에 증거하는 하나님의 산 증인의 성품을 이루기 위해서는 오래 참음과 인내가 필요하다. 인내는 견고하게 서 있는 불굴의 자세를 의미하며, 정금같이 연단되어 나오는 산실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 오래 참음의 열매를 맺으려면...

1) 시련을 견디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약 1:3). 오래 참음이란 고난을 참고 견디는 것인데, 이 말은 사물이나 사건과 관련된 인내를 나타내는 말이기도 하지만, 인간에 대한 인내의 의미가 더 많이 포함되어 있다. 인내란 괴로움이나 어려움을 참고 견디는 것인데, 특히 인간 사이에서 야기되는 문제와 어려움을 불평 없이 참아내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골 3:12). 오래 참음은 감정을 거스르는 일을 견뎌내는 속성이며(고후 6:6; 골 1:11; 3:12), 그것은 부당한 취급을 당했을 때에도 보복할 생각을 품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성경은 인내와 오래 참음의 열매를 맺는 데 필요한 것은 시련이라고 말하고 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약 1:2~4). 욥은 이 사실을 알았으므로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나의 가는 길은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 하신 후에는 정금같이 나오리라” (욥 23:10).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인내의 성품을 기르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재목으로 자라게 하시기 위하여 때때로 고난과 시련을 허락하신다. 인생의 고난은 우리 성품에서 불순물과 거친 것을 제거해 내는 하나님의 일꾼들이다. 이들에 의해 채석되어 깎이고, 끌로 새기어지고, 갈리고 다듬어지는 것은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또 돌을 가는 연마기 속으로 들어가 갈리는 것도 힘든 일이다. 그러나 그 속에 들어간 돌은 하늘 성전의 제자리를 채우는데 부족함이 없이 준비되어 나온다. 쓸모없는 물건을 위해서는 주님께서 그처럼 신중하고 철저한 작업을 하지 않으신다. 오직 그분의 보석만이 궁전의 식양대로 다듬어진다. 그분께서 시련과 환난을 허락하시는 것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하시”(히 12:10)기 위함이다. 감당하기 심히 어렵고 가혹하게 보이는 시련이라도 일단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그것이 인내의 열매를 맺게 하는 축복임이 판명될 것이다. 때때로 우리는 시련을 당하기 전보다 시련을 통과한 후에 더 밝고 깨끗한 영적인 시력을 가질 때가 있으며, 믿음으로 시련을 잘 견딘 후에 더욱 겸손하고 오래 참는 사람이 된다. 세상의 미움과 핍박을 받는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섭리의 교육을 받고 훈련을 받게 되어, 세상의 좁은 길을 걸으며 고난의 도가니에서 정결하게 된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동안 쓰라린 투쟁을 경험한다. 그들은 극기를 감내해야 하며 처절한 실망을 맛보기도 한다. 그러나 결국 그들은 인내를 기르고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자가 됨으로 후에 그분의 영광에 참예하는 자가 된다. 우리가 대항한 모든 시험과 우리가 용감하게 견딘 모든 시련은 우리에게 새로운 경험을 주며 품성 형성이라는 과업을 달성하게 한다.

2) 하나님과 예수님의 인내를 배우라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반포하시되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출 34:6). 오래 참음은 하나님의 성품이다. 하나님께서는 가장 완악한 죄인까지도 오래 참고 기다리신다. 우리는 오래 참음의 열매를 맺기 위하여 하나님의 인내를 많이 명상해야 한다. 우리의 부족함과 죄 됨을 오래 참고 기다려주시는 그분의 인내와 자비를 생각하고, 우리도 다른 사람에 대해서 오래 참아야 한다. 우리에게 해를 입히는 사람들이나 원수 같은 사람들에 대하여 부드러운 정신과 끈기 있게 참는 태도를 보이는 것은 내적인 믿음과 성령의 충만이 외적으로 드러나는 표시이다. 종종 성숙한 사람들은 아직 미성숙한 사람들을 참아 주기 어려워하는 경향이 있다. 사실 자신도 지금의 단계에 이르기까지 수년의 세월이 걸렸음에도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 단계에 도달하는 동일한 시간을 주기를 원치 않는다.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벧전 2:23).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본받아 부당한 대우와 억울한 처사를 오래 참아야 한다. 우리는 억울하고 부당한 대우를 받을 때, 복수하고 싶어 하고 항거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오래 참으셨다. 공의로 심판하실 하나님께 자신과 모든 억울하게 당한 일들을 맡기셨기 때문이다. 십자가에서 오래 참으신 예수님의 인내로 오늘 우리가 구원의 축복을 누릴 수 있지 않은가? 박해나 고통을 당할 때 즉시 분노하거나 복수하지 않고, 모욕, 조롱, 부당한 비난을 당하고 억울하게 당할 때 성도들은 오래 참음으로 반응해야 한다. 신앙의 일로 믿지 않는 배우자나 가족에게 모욕을 당하고 억울한 대우를 받을 때에도 역시 믿음으로 오래 참아야 한다. 개인의 삶에서 이러한 특성에 도달하려면 연습과 하나님의 은혜, 자아를 부인하고 성령님의 속삭임에 복종하고자 하는 자원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만일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닮는다면 오래 참을 것이다. 

 

신앙 4부: 성령의 열매 화평은...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요 14:27).

마지막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화평의 열매를 맺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사람들과 화평하게 살 수 있는 기술을 가진 사람만이 하늘의 평화를 깨뜨리지 않고 평화로운 하늘에서 살 수 있기 때문이다. 화평과 평안은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이다. 화평이란 “마음이 평안한 것, 혹은 나라 사이가 화목하고 평화스러운 것”을 말한다. 사랑이 있는 집에는 참된 안식과 평안이 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머무는 곳에는 어느 곳이든지 천국이 된다. 화평은 하나님의 사랑과 영적인 기쁨을 체험한 데서 우러나는 내, 외적 평안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성령님의 인도 하심을 받는 사람이라면 바로 이러한 화평, 진정한 휴식과 안식을 얻게 된다. 화평은 예수 그리스도의 선물로서, 역경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내적 안식과 평정이며 인간의 이해를 뛰어넘는 것이다.

 

* 화평의 열매를 맺으려면...

1) 거듭나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롬 5:1).
우리가 화평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첫 번째 조건은 하나님과 화평하게 되는 것이다. 곧 그것은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골 1:21) 우리가 그분과 더불어 화목한 관계를 회복하는 것을 뜻한다. 하나님께서는 죄인과 더불어 화목하기를 원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화목제물로 보내주셨다. 그리하여 전에는 하나님과 더불어 불화하였고 그분과 원수 되었던 사이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친구 사이가 되었다. 여기에 화평의 비밀이 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을 때, 죄의 종으로 죄책감에 시달려 참된 평화를 가질 수 없었던 과거는 사라지고 참된 평안이 오게 된다. 우리가 거듭난 이후, 하나님의 자녀로 성숙해질 때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는 축복과 은혜를 더 많이 경험하게 되며, 이와 같은 성장은 계속되어 마침내 우리는,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니 저희에게 장애물이 없으리이다.”(시 119:165)라고 말할 수 있게 되며, 하나님과 하나가 되고 화목하게 되어 마음속에 강수 같은 평화가 임하게 되는 것이다.

2) 자아를 버리고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으라
화평의 열매를 맺는 데 필요한 것은 예수님의 은혜이다. 마음속에 받아들여진 그리스도의 은혜는 적의를 제거하여 준다. 왜냐하면,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켜 분쟁을 완화해 주고 심령을 사랑으로 채워 주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동료 인간들로 더불어 화목하게 지내는 사람은 불행해질 수 없다. 질투가 마음속에 있을 수 없고, 좋지 못한 추측이 용납될 수 없으며, 증오가 존재할 수 없다. 하나님과 조화를 이룬 사람은 하늘의 평화에 참예한 자이며 그 복된 감화를 사방으로 널리 퍼뜨리게 될 것이다. 어떤 인간적인 소동이나 사탄의 분노도 하나님과의 완전한 교통으로 얻어지는 안정과 평화를 깨뜨릴 수가 없다. 불안이 일어나는 것은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평화를 깨뜨리는 것은 자신에 대한 사랑이다. 자아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언제나 그것이 굴욕과 모욕을 당하지 않도록 하려고 방어 태세를 취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의 자아가 죽고 우리의 생애가 그리스도로 더불어 하나님 안에 감추어질 때는, 무시나 경멸을 조금도 상관하지 않게 될 것이다. 비난에 대하여 귀머거리가 되고, 조소와 모욕에 대하여는 소경이 될 것이다.

사람은 화평을 만들어 낼 수 없다. 인간이 개인이나 사회를 깨끗하게 하고 고상하게 하려고 계획하지만, 화평을 이루어 내지 못하는 것은 이런 계획이 심령을 울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참된 화평을 창조하고 영속시킬 수 있는 유일한 능력은 그리스도의 은혜이다. 이 은혜가 마음에 심어지면 그것은 분쟁과 불화를 일으키는 악한 정욕을 내쫓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믿고, 전적으로 예수님의 보호 하심에 영혼을 맡기고, 또 그분의 명령에 생애를 맡기는 자들은 평강과 평온함을 얻을 것이다. 예수께서 당신의 임재로서 그들을 기쁘게 하실 때에는 세상의 아무것도 그들을 슬프게 하지 못한다. 완전한 순종에는 완전한 쉼이 있다.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사 26:3). 예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평안은 세상이 주는 평안과 비교할 수 없다. 우리는 그분을 전적으로 의지함으로써 이 평안을 소유해야겠다. 그리고 이 평안을 남에게 끼치고 베푸는 사람들이 되어야겠다.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히 12:14).

 

신앙 3부: 성령의 열매 희락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빌4: 4).

마지막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희락의 열매를 맺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 앞에 기다리고 있는 환란과 시련들은 하나님의 기쁨과 행복을 맛본 사람들이 잘 견뎌낼 것이기 때문이다. 희락이란 “기쁨과 즐거움, 희열”을 말한다. 성경은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명령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생애에 나타나는 기쁨과 즐거움과 감사함은 성령께서 함께하신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이다. 그런데 희락은 억지로 꾸며내거나 만들어 낼 수 없다. 마음이 행복하고 기쁘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겉으로만 기뻐할 수 있겠는가? 아무리 표정을 행복하게 꾸미려 해도 심령이 행복하고 즐겁지 않으면 곧 드러나고 만다. 희락의 열매를 어떻게 맺을 것인가?

 

* 희락의 열매를 맺으려면

1) 하나님을 알고 신뢰해야 한다
기뻐하는 사람, 희락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사람의 특징은 진실한 믿음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어떤 분이시며, 그동안 어떻게 인도해 오셨고 하나님께서 앞으로도 어떻게 해주실 것인가를 확실하게 믿는 사람에게 희락의 열매가 나타난다. 곧 하나님을 잘 알 뿐 아니라 하나님을 깊게 신뢰하는 사람에게 희락의 열매가 맺힌다는 것이다. 비록 주위의 일들이 어렵고 고난과 고통이 심할지라도, 계획한 대로 일이 풀려나가지 않는다 할지라도, 현재 절망적인 일과 시험이 앞을 가로막고 있을지라도, 희락의 열매를 맺는 사람은 슬퍼하거나 절망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자신이 믿고 있는 하나님이 얼마나 신실하고 좋으신 분인지 너무 잘 알기 때문에, 무슨 일이든 하나님의 허락 하심 없이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일어나는 어떤 일에든지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리고 어떤 경우에든지 나를 버리지 않고 끝까지 돌보실 것이며, 끝내는 나를 구원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고 신뢰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안에 있고, 그분의 섭리와 계획 안에 있는데 두려워하거나 슬퍼할 이유가 무엇이 있겠는가? 하나님을 알고 그 안에서 얻는 기쁨이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압도하기 때문에 그는 기뻐할 수 있다. 그러므로 희락은 높은 신앙의 경지에서 맺을 수 있는 성령의 열매이다.

 

2) 소유에 상관이 없어야 한다
참된 기쁨과 행복은 세상의 소유에 달렸지 않다. 참된 희락은 신앙에 기초를 둔 것이고, 하나님께 기반을 둔 기쁨이다. 희락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예수그리스도의 용서의 은혜를 체험하고, 성령님 속에서 영적인 체험을 하는 데서 나오는 영적인 기쁨이다. 참된 기쁨은 세상의 재물이나 명예나 권력을 소유함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세속적인 근원에서 나온 행복은 그 행복을 이루어 주는 다양한 환경과 마찬가지로 변하기 쉽다. 그러나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과 행복은 변하지 않는 영속적인 것으로, 그것은 생애의 어떤 환경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며, 세상 재물의 양이나 세상 친구의 수에 의해 결정이 되는 것도 아니다. 생명수의 근원이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는 영혼의 갈증을 충만하게 충족시켜 주므로 그분께로부터 얻은 행복은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한 가지 덧붙일 것은 기쁨(희락)과 행복은 꼭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행복은 상황이 좋을 때 그 결과로 오지만, 기쁨은 상황과 관계없이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과 연결된 상태에서 이르러 오기 때문이다. 시편 4장 7절에는 기쁨과 행복이 대조를 이루어 나타나 있는데,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저희의 곡식과 새 포도주의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라고 되어 있다. 행복은 풍성한 추수와 같은 유쾌한 상황의 결과로 이르러 오지만 더 큰 기쁨은 하나님을 알고 그분을 신뢰할 때 이르러 온다. 내적인 기쁨은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는 한 계속되지만, 행복은 곡식의 수확량과 같이 예측할 수 없다. 내적인 기쁨은 실망을 이겨내지만, 행복은 실망감에 압도되어 버릴 수 있다. 내적인 기쁨은 영속적이지만 행복은 일시적이다. 기쁨은 고통이나 쾌락보다 더 깊이까지 파고드는 삶의 즐거움이다. 이러한 기쁨은 하나님께서 나의 삶에 임하신다는 자각에서 오며, 상황을 초월하여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에 초점을 맞출 때 맛볼 수 있다.

 

3) 주 안에서 기뻐하라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살전 5:16~18). 기뻐하라는 명령은 기도하라는 명령보다 우선한다. 성경은 “주 안에서” 기뻐하라(빌 4:4)고 명령하고 있다. 희락의 열매를 맺기 위해 우리는 우리가 기뻐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생각해야 하며 우리 자신을 기뻐하도록 훈련해야 한다. 우리가 기뻐해야 할 중요한 이유가 어디 있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 죄를 대속하시고, 항상 용서하시며, 우리를 구원하셔서 양자로 삼으시고 또 예수 안에서 기업을 약속하셨기 때문이다(엡 1:1~11). 또 예수께서는 우리를 위해 처소를 예비하시며,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하늘 처소를 보는 기쁨을 누릴 것이기 때문이다(요 14:2). 그리고 그때까지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우실 것이기 때문이다(빌 4:19). 생각해 보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기뻐하고 감사해야 할 이유는 수없이 많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그 이유를 잊어버리고 살고 있다. 우리의 기쁨이 계속 유지되게 하기 위해서, 기쁨을 유지하는 최고의 방법은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이다(요15: 10~11). 양분을 공급해 주는 포도나무에 항상 붙어 있는 가지가 되는 것이다. 지속적인 기쁨을 얻으려면 내가 예수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아는 것이 필요하다(요15:5). 하나님 안에 거하고 주님을 깊이 의지할수록 깊이 있는 기쁨을 얻을 수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언제나 기쁨을 누릴 수 있다.

 

신앙 2부: 성령의 열매 사랑은…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고전 13:13).

하나님의 성품을 이루고 하나님의 증인이 되기 원하는 사람들이 이루어야 할 성품 중에 사랑은 매우 중요한 특성이다. 사랑의 열매를 맺은 사람은 하나님 성품의 가장 큰 특성인 사랑의 성품을 이룬 사람이기 때문이다. 성령의 열매 중에서 가장 첫째로 꼽히는 것은 사랑이다. 바울도 성령의 열매인 품성의 특성들을 나열할 때 사랑을 최고로 하여 시작하고 있다. 사랑은 그리스도인이 맺어야 할 성령의 열매 중에서 가장 으뜸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 사랑의 열매를 맺으려면...

1)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야 한다
사랑의 열매를 맺는 데 필요한 첫 번째 계단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아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요일 4:8)이시다. 사랑은 하나님 품성의 핵심이며, 하나님은 사랑 그 자체이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시고 우리를 구속하기 위해 독생자를 보내신 근본 동기는 사랑이었다. 범죄로 인간이 잃어버린 바 되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이 비애와 질병과 죽을 운명에 처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의 마음은 고통과 슬픔으로 가득 찼다. 범죄한 인간의 피할 길을 위해 사랑하는 독생자를 주시기로 구원의 경륜을 준비해 놓으셨지만, 아들을 죽게 내어 주는 것과 죄지은 인류를 멸망하도록 버려두는 것 둘 다 하나님께는 고통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 인류를 사랑하시므로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 아들을 죽도록 내어 주신 사실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증오심은 죽음처럼 강하나 죄인에게 대한 사랑은 죽음보다도 더 강하다고 선언하고 있다.

모든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 사랑을 창작할 수도 없고 만들어 낼 수도 없다. 모든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의 근원에서 나오는 것이다. 사랑 중에 가장 고귀한 것이라고 불리는 어머니의 사랑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에 비하면 큰 대양의 물 한 방울과 같다. 하나님의 사랑을 영원의 시간을 두고 연구해도 아주 희미하게밖에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목적, 즉 무가치한 피조물인 인간을 구속하시는 사랑의 신비는 “천사들도 또한 살피기를 원하는” 주제로서 영원무궁한 시대를 통하여 연구 주제가 될 것이다. 

 

2) 십자가의 사랑을 알아야 한다
우리의 생애에 사랑의 열매를 맺기 위한 필수적인 조건은 십자가의 사랑을 이해하는 것이다.

1. 겟세마네에 나타난 사랑
태초부터 일체가 되었던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의 연합은 겟세마네에서 깨어졌다. 예수님의 어깨 위에는 아담으로부터 세상 마지막 시대에 이르기까지 지은 온 인류의 죄악이 놓였고, 죄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를 의식함으로 예수님은 신음하셨다.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지급할 값을 깊이 생각하시며 땀방울이 피가 되도록 기도하시던 예수님의 창백한 입술에서는 “내 아버지여 만일 하실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는 부르짖음이 새어 나왔다. 그대로 버려둔다면 틀림없이 멸망 당할, 계명을 범한 무력한 죄인들과 죄의 세력을 보시고, 또 세계의 절박한 운명을 바라보신 예수께서는 자신에게 어떤 희생이 요구될지라도 인간을 구원하려고 결심하셨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인류를 끝까지 구원하시려는 예수님의 놀라운 사랑은 겟세마네의 피땀에 섞여 있었다.

2. 십자가에 나타난 사랑
예수께서는 타락한 인류의 모든 죄 짐을 지시고 죄를 알지도 못하는 분이 죄 자체가 되셨다. 예수께서 십자가 상에서 세상의 죄와 범하여진 율법의 형벌을 당하는 동안 하늘 아버지의 진노에 대한 깨달음이 그분을 눌렀을 때, 그분의 고뇌는 육체적인 고통을 거의 잊게 할 만큼 고통스러웠다. 예수께 절망을 가져온 것은, 죄 때문에 하나님과 사이에 생긴 분리였으며, 인류의 죄 값을 치르는 동안 사랑하시는 아버지께서 그분을 버렸음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예수께서는 죄 자체가 되셨기 때문에 죄를 짓고 영영한 형벌인 둘째 사망에 들어갈 때 죄인이 느끼는 두려움과 죄책감을 그대로 느끼셨다. 죄를 불쾌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심판을 깨달았기 때문에 느끼는 그분의 심적 고통이 너무나 진했으므로 그분의 심장은 파열될 수밖에 없었다.

십자가에 달려 계신 동안 예수께서는 장래를 볼 수 없었다. 사탄은 하늘 아버지께서 당신의 아들을 버리셨기 때문에 이제 죄 값을 치르고 영영히 죽을 것이며, 예수가 사탄 자신의 처지보다 나을 것이 없다고 시험하고 있었다. 그분은 흑암의 세력과의 두려운 투쟁을 하고 계셨으나, 자신이 인간의 죄 값을 대신하여 치르고 영원히 죽고 다시 하나님이 되어 살아나는 일이 없다 하더라도, 인류의 죄 값을 치르리라고 결심하셨다. 그리하여 언제나 믿고 신뢰하던 아버지에게 믿음으로 당신의 영혼을 부탁하시며 “다 이루었다!”고 부르짖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잃어버린 세상을 구하시기 위하여 자신을 속죄 제물로 주셨다. 그분이 받아야 할 대접을 우리가 받도록 하시기 위해, 우리가 그분의 생명을 받도록 하시기 위해,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는 그분의 의를 통하여 우리가 의로워지도록 하시기 위해, 아무 상관이 없는 우리의 죄를 인하여 정죄를 당하시고, 우리가 당해야 할 몫을 받으시고 우리의 죽음을 당하셨다. 이 얼마나 큰 사랑인가!

 

3) 사랑이 사랑을 낳게 해야 한다
인간은 천성적으로 이기적이며 냉담하다. 그러므로 인간 스스로는 사랑의 열매를 맺을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사랑을 알고 깨달은 사람의 생애에는 사랑의 열매가 맺어진다. 우리가 우리 죄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보게 될 때, 그리고 십자가에 나타난 그분의 사랑을 보게 될 때, 주님을 찌르고 죽게 만든 우리 자신의 죄의 흉악성을 깨닫고 애통하고 회개하게 되며, 그때에 그분의 사랑은 우리 심령에 새 생명을 지어 준다. 사랑은 사랑을 일깨우며, 사랑은 사랑을 낳는다. 성경은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말해주고 있다. 자기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는 것은 세리와 이방인들도 하는 사랑이다. 우리가 해야 하는 사랑은 그것을 훨씬 뛰어넘는 사랑, 곧 자기를 괴롭히고 망하게 하는 원수를 사랑하며, 오른뺨을 치면 왼뺨을 돌려대며, 자기를 핍박하고 저주하는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는 차원 높은 사랑이다. 정말 원수를 사랑하는 일이 가능한 것인가? 원수를 사랑하거나 용서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나 자신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더 용서를 받은 죄인인가를 깨닫는 것이다. 예수님의 주기도문과 비유(마 18:23~35)에 나타나 있듯이, 예수께서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해 줄 때만 하나님께 용서를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신다.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우리는 어쩌면 우리가 용서해야 할 사람보다 더 큰 죄인일지 모른다. 하나님의 용서는 단순히 우리를 정죄에서 면하게 해 주는 사법적 행위가 아니고, 죄를 용서할 뿐 아니라 죄로부터 완전히 돌아서게 하는 놀라운 능력의 용서이다. 곧 마음을 변화시키는 사랑의 용서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잘못을 범한 사람들이 그 실수를 고백하든지 하지 않든지 간에 그들에 대하여 긍휼의 정신을 가져야 한다. 그들이 우리에게 아무리 심한 상처를 줄지라도, 불만을 품거나 상처를 받은 자신을 동정하지 말며, 우리가 하나님께 범죄한 것을 용서받으려 하는 것처럼 우리에게 잘못한 모든 사람을 용서해 주어야 한다. 우리는 남을 용서했기 때문에 용서함을 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용서받았기 때문에 용서하는 것이다. 모든 용서는 공로 없이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 대한 우리의 태도로써 우리가 과연 그 사랑을 내 것으로 삼았는가를 증거하게 된다. 하나님의 용서의 사랑을 받아들인 사람은 원수를 사랑하고 용서한다.

 

4) 예수님과의 연합이 사랑의 열매를 맺게 한다
사랑은 감정이 아니고 원칙이다. 곧 사랑은 느껴지는 대로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의지를 하나님께 바쳐 하나님의 영의 제어하시는 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이 사랑이다. 그리스도와 연합이 있는 곳에는 어디든지 사랑이 있다. 갈바리 십자가를 명상하고 마음에 간직한 사람의 생애에는 교만과 자기를 사랑하는 정신이 깃들 수 없고, 인류를 향한 무아적인 사랑의 열매가 풍성하게 열릴 것이다. 사상과 욕망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감복하게 되어 그분의 뜻에 순종하게 되며, 그때에 우리는 그분의 형상으로 새로 지음을 받고, 우리 생애에 사랑의 열매를 맺게 된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되면(롬 5:5), 그리하여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이”이신 하나님께서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우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면(빌 2:13), 우리는 저절로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될 것이며,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이 사랑의 행위가 될 것인데, 그것은 우리 속에 임재해 계시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뜻을 우리를 통해 나타내신 까닭이다.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사랑할 수 없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될 때에만 그리스도의 정신과 사랑을 갖게 되고 남을 사랑하게 된다. 그리하여 생애에 사랑의 열매를 맺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것이다.

 

신앙 1부: 오직 성령의 열매는…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희락화평오래 참음자비양선충성온유절제”( 5:22~23).

햇빛 속에 빨.주.노.초.파.남.보 일곱 가지 무지개 색깔이 들어 있듯이, 성령의 열매에는 “사랑, 희락,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의 아홉 가지 열매가 들어 있다. 사람의 생애에서 맺어지는 성령의 열매는 그 사람의 믿음의 증거가 된다. 진정한 믿음은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며 삶과 성품 속에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맺게 하기 때문이다. 성령의 열매는 성숙도와 질에서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그 열매를 맺는 시기에는 차이가 없다. 곧 성령의 열매는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속에 받아들일 때 동시에 맺어질 수 있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받아들이고 자신을 주님께 온전히 헌신하고 바친 사람은 성령의 소욕을 따라 행하기 때문에 생애에 성령의 열매가 맺히는 것이 당연하다. 물론 처음 예수님을 받아들였을 때에 맺어지는 성령의 열매의 질과 성숙도와 신앙과 영적 성장이 더 이루어졌을 때의 열매의 질과 성숙도는 차이가 날 수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똑같은 특성과 성격을 가진다. 또한, 성령의 열매는 여러 개가 동시에 열릴 수 있다. 사랑의 열매를 맺은 사람이 기뻐하지 않을 수 없고, 화평하지 않은 사람이 자비와 양선을 베풀지 않을 수 없으며, 자비한 사람이 온유하지 않거나 충성하지 않거나 절제하지 않을 수 없다.

성령의 열매를 생애에서 맺는다는 것은 생애에서 완전한 하나님의 성품을 이룬다는 말과 같다. 곧 ‘하나님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하다’는 것과 ‘삶 속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것’은 같은 것이다. 그런데 성령의 열매는 인간의 힘으로 맺을 수 없다.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은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이다.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 매일 매시간 주님의 임재 속에서 그분과 동행하며 함께 살면 열매를 맺는 일이 가능하다. 우리의 자아가 예수님 안에 숨겨지고, 우리의 의지가 예수님 뜻에 복종되며, 우리의 생각과 사상이 주님의 것과 연합되어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예수님의 정신과 행동이 나타날 때에 성령의 열매는 풍성하게 맺히게 된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요 15:5).

자, 이제부터 성령의 열매를 하나하나 따서 맛을 보기로 하자.

 

권두언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나무

하나님께서는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죄악과 멀리 떠나 계시며 의로우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도 그 호칭과 마찬가지로 거룩하신 영이십니다. 하나님의 의로우신 성품을 받기를 원하는 자들에게 그것을 내려 주시고, 또한 변화시키시는 역사를 불어넣어 주시는 분이시지요.

성경 말씀은 성령의 열매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거룩하신 성령의 역사 하심으로 맺게 되는 열매 말입니다. 그 열매들은 나무의 가지들이 맺게 됩니다. 나무에서 생겨난 가지들이 그 나무가 주는 열매들을 달고 있는 셈이지요. 나무는 하나이지만 그 나무에 달린 가지들은 많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무에 달린 그리스도인들이 많은 것처럼 말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에는 성령의 열매들을 다음과 같이 열거합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그 열매들은, 자기를 복종시키어 하나님 영의 역사에 굴복한 자들에게 생기는 하나님의 형상, 즉 하나님의 성품의 특성들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열매를 얻기 전에 먼저 선재해야 할 일이 있는데, 그것은 그 열매들을 맺을 수 있는 나무가 생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과나무가 없이 어떻게 사과를 맺을 수가 있겠습니까? 복숭아나무가 있지 않고서 어떻게 복숭아 열매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이 맺은 열매로 그들을 판단하실 것입니다. 열매를 맺지 않은 사람들은 도끼로 찍어 내어버림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속에 성령의 나무가 생겨야 합니다. 죄의 속성으로 꼴지어진 나무, 죄악의 열매만 맺게 하는 그러한 종류의 나무가 아니라, 거룩한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나무, 성령의 사람이 준비되어야 합니다. 때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발행인 강병국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