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권두언 - 특별한 새해를 맞이하며…

 

하나님을 아는 자들이 맞이하는 새해는 색달라야 합니다. 시간이 특별해서가 아니라 새로운 시간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가 특별하심을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태초에 천지를 창조해 주신 하나님께서 사시와 일자와 연한을 나누어 주시고 계절들을 따라 열매들을 맺는 과목들과 풀들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사는데 꽃과 새들이 기본 필수 조건은 아니지만, 그들을 만들어 주신 조물주의 계획을 읽어 보면서 역시 주님은 우리를 기쁘고 즐겁게 살도록 하시기 위하여 만물을 창조해 주셨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창조물들이 모두 다시 시작하는 또 하나의 새로운 계절 새해가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영접하시기 위해 다시 오실 재림이 한 해 더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다시 새롭게 준비하여 하나님 맞기 위해 살아야 할 시간이 은혜로 주어졌다는 뜻입니다. 같은 시간이 왔다가 가는 것처럼 세상이 돌고 도는 것 같아도 하나님을 아는 자들에게는 새로운 시간이 다가온 사실이 이해되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 보이는 것들은 잠정적이나 앞으로 다가올 세상은 영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준비해 놓으신 처소에 꼭 가야 합니다. 올해 새해에도 저희 월간지는 여러분들의 영적인 성장과 깨달음을 위하여 열심히 애쓸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은총이 독자 여러분들과 가정들에 충만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Love Letter - 새해 새 기도


                                                  강 영은

 

찬란한 태양을 왕관처럼 쓰고

눈 부신 빛으로 다가온 새해 아침

떨리는 가슴으로 새 기도 드려봅니다.

 

지난밤 흰 눈 내려

미운 이 땅을 은혜처럼 깨끗이 덮어주듯

삐뚤거리며 찍혀진 지난해의 발자국들일랑

자비의 흰 눈으로 덮어 주시고

새로이 떼는 발자국은

당신의 발자국 속에 묻혀 보이지 않게 해주십시오.

 

맑은 햇살 흰 눈밭에 내려      

울퉁거리는 들판조차 매끈하게 흰빛으로 빛나듯

서툰 날개에 보기 싫게 새겨진 무늬

당신의 사랑으로 덧칠해 눈부신 흰 빛으로 빛나게 하시고  

낡은 수첩의 얼룩 새 수첩 새 페이지로 갈리듯

다시 펼쳐진 백지 위에 당신의 고운 무늬를 새겨주십시오.

 

용서하십시오.

눈이 너무 어두워 잘 보지 못했던 지난해  

패인 발자욱마다 가득 담긴 은혜 못 보고,

앞서 가신 발자욱에 흥건히 고인 사랑 못 보고

길이 왜 이리 험하냐고 불평만 했던 지난해를...

 

용서하십시오.

귀가 너무 어두워 잘 듣지 못했던 지난해,

서툰 날갯짓이 부끄러운지도 모르고

욕심의 굴레 무거워 잘 날지 못하는지도 모르고  

위엣 것을 생각하라는 당신의 말씀 귀 씻듯 씻어내곤

날아오르는 것이 왜 이리 힘드냐고 투정만 했던 지난해를…  

 

용서하십시오. 지난해의 모든 것을

자주 비틀거리던 발걸음과

용수철처럼 튕겨 나가던 입술의 말과

미처 삼키지 못해 씁쓸하던 좁은 가슴과

그리고 영혼의 옷자락이 풍기던 좋지 않은 냄새를

 

이제

선물을 기다리는 아이의 손짓처럼

축복으로 임하는 새해 새 아침 첫 기도로 손을 모읍니다.   

 

새해에 우리의 가슴은

고아한 하늘 향기 간직한 호수가 되게 하십시오.

사랑의 물결 늘 일렁이어

미움이며, 원망이며, 교만의 뾰족한 돌 던져져도

사랑의 호수 속에 빠져들어 흔적도 없게 하시고

우리 눈에 고이는 눈물 조차에도

아침 햇살 이슬에 어리듯 하늘 사랑 빛 어리게 해주십시오

 

새해에는 향기로운 세마포로 입혀주십시오.

더러운 우리의 의로 스러진 낡은 옷 벗겨주시고   

올마다 당신의 의의 향기 풍기는 흰 세마포 입혀 주시어

옷자락 날릴 때마다 흩날리는 생명의 향기

사망의 냄새로 죽어가는 영혼들 살리게 하소서.

 

새해에는 이렇게 하게 하소서.

갈래길에 설 때마다 당신의 자취따라 바른길 택하게 하시고

고달프나 당신과 함께라서 가뿟한 천성길

소망의 노래 터져 나와 기쁘게 부르며 가게 하소서.

 

새해에는 이렇게 되게 하소서.

당신처럼 주기만 하고 받을 것은 잊게 하시고

더 주지 못한 안타까움에 눈물 짖게 하소서.

소유하기보다 버리며 움켜쥐기보다 놓으며  

마음의 욕심 털고 빈 마음 가난한 마음으로 가게 하소서.

 

그리고

당신의 사랑 하나만 가지고 행복하게 가게 하소서.

당신의 사랑 하나만 남아 행복하게 살게 하소서

 

신앙 1부: 스가랴 선지자가 본 이상

 

-      불에 그슬린 나무와 아름다운 옷 -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야기하시기를 좋아하십니다. 그중에서도 특별히 하나님의 마음속에 있는 이야기, 곧 그분께서 가지고 계신 우리를 향한 넘치는 사랑과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마련하신 놀라우신 계획에 대해서 말씀하시기를 좋아하십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소통하시기 위해 사용하시는 그분의 말씀이 담긴 편지입니다.

 

하나님의 편지 성경에 나오는 소망의 말씀 중에 가장 희망적인 이야기가 하나 있다면 그것은 바로 스가랴서 3장에 나오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죄지은 인간을 어떻게 용서하시고 회복시키셔서 하늘로 데려가시고, 또 어떻게 거룩한 사람이 되어 하늘에서 주님과 살 수 있게 만들어 주시는지에 대해 말해주고 있습니다. 또한, 마지막 시대의 성도가 받아야 할 하나님의 인에 대해서도 정확하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번 호 신앙 기사에서는 이 중요한 이야기를 공부합니다. 이 기사가 새해를 새롭게 시작하는 독자 여러분들의 신앙에 큰 도움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 편집부

 

1: 스가랴 선지자가 본 이상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사자 앞에 섰고 사단은 그의 우편에 서서 그를 대적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시니라” (3:1).

 

만일 우리가 볼 수 있는 세계와 볼 수 없는 세계를 분리하는 휘장이 거두어져서 하나님의 영적인 세계를 볼 수 있다면, 그래서 그리스도와 사탄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선과 악의 대쟁투를 볼 수 있다면, 지금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영적으로 깨어나 존절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 그리고 사탄의 악한 계략을 저항하기 위하여 주님을 얼마나 더 굳게 의지해야 할지를 알게 될 것이다. 또한, 죄지은 인간을 위해 세워진 구속의 계획의 놀라운 오묘와 중요성을 깨닫게 될 것이며, 그리하여 온 하늘이 인간의 구원에 얼마나 큰 관심이 있다는 것을 알고 용기를 갖게 되어 엄숙한 마음으로 주님을 따르면서 주의 재림을 맞을 준비를 열심히 하게 될 것이다.

 

스가랴 선지자는 계시 가운데 이상을 보았다. 그 계시는 그 당시 이스라엘의 형편에 적용되는 중요한 이상이었지만, 그러나 그 이상은 오히려 마지막 시대를 사는 현시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더 중대한 의미와 교훈을 주는 계시가 되고 있다. , 이제부터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놀라운 사건, 곧 인간을 구속하시기 위해 펼치시는 그리스도의 사업과 인간을 대적하기 위해 벌이는 사탄의 일, 또한 하나님의 백성을 비난하는 사탄의 고소를 무효화시키시는 중보자 예수님의 능력과 사업에 대한 가장 감동적인 예증인 스가랴 3장을 함께 공부해 보자. 그러면 왜 이 이야기가 하나님께서 전해주시는 가장 희망적이고 소망에 넘치는 말씀인지, 그리고 왜 우리가 용기를 잃지 말고 앞으로 나해야 하는지 알게 될 것이다.

 

1) 계시의 장면과 세 인물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사자 앞에 섰고 사단은 그의 우편에 서서 그를 대적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시니라”(3:1).

 

1. 계시의 장면

 

스가랴의 이상 가운데서 흥미로운 광경을 보았다. 그 계시 가운데는 대제사장 여호수아, 여호와의 사자 그리고 사탄이 등장하고 있다. 그런데 그 계시의 장면은 법정의 모습을 띠고 있는데, 마치 재판장 앞에서 피고를 기소하기 위해 검사가 피고를 고소하고 심문하는 듯한 법정 공방의 장면을 방불케 하고 있었다. 곧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여호와의 사자 앞에 서 있고, 사탄은 그 우편에서 여호수아를 대적하고 있다.

 

2. 여호와의 사자

 

먼저 여기서 생각해 보아야 할 점은 여호와의 사자가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원래 여호와의 사자는 하나님의 뜻을 사람에게 전달하기 위해 보냄 받은 자를 통칭하는데, 구약에서는 대부분 중요한 계시를 전하는 하늘의 메신저로 나타난다. 그러나 때때로 하나님 자신이 천사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셨는데, 그 모습을 여호와의 사자라고 성경은 묘사했다(22:11, 22:32, 2:1, 왕하 1:3 참조). 특히 구약에 나오는 여호와의 사자는 성육신하기 이전의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구약적인 표현으로 이 스가랴 3장에 묘사된 여호와의 사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3:2 참조).

 

3. 대 제사장 여호수아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사자 앞에 섰고”(1).

 

이 장면 속에는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여호와의 사자 앞에 서 있는 모습이 나온다. 여호수아는 과연 서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그는 큰 어려움과 환란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백성의 죄와 자신의 죄를 위하여 간구하고 있는 중이었다.

 

여호수아는 B.C. 538년 바벨론을 정복한 바사 왕 고레스의 조서에 따라 이스라엘 백성이 성전을 건축하기 위하여 바벨론에서 돌아올 때 대제사장으로 봉사하고 있었다. 그는 고레스 왕이 이스라엘 백성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하나님의 전을 건축하라는 조서를 내리자, 포로되었던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귀환하여 총독 스룹바벨과 함께 백성을 지도했던 사람이었다. 여호수아가 성전 건축의 사명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으나 그 일은 쉽지 않았다. 사마리아인들과 주변 민족들의 방해와 공격으로 성전공사가 중단되고 지연되는 사태가 일어나 당시의 상황은 매우 위험하고 절망적이었다. 스가랴는 유대인들의 제1차 귀환 때 귀국한 제사장 가문의 사람으로 성전 재건을 호소한 선지자였다. 스가랴 선지자의 계시 가운데,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의 죄와 자신의 죄, 그리고 그들의 부족과 허물과 무가치함을 절실하게 느끼며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는 중이었던 것이다.

 

2) 사탄의 참소와 고소

 

사단은 그의 우편에 서서 그를 대적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시니라”(3:1).

 

스가랴 선지자는 거룩한 이상 중에서 여호수아가 여호와의 사자 앞에 서서 그의 백성을 위해 하나님께 간구할 때 사탄이 그 오른편에 서서 그를 대적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렇다면 사탄이 여호수아에 대해 무엇을, 어떻게, , 대적하고 있는가?

 

사탄은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의 죄악을 가리키며 이 사람이 이렇게 더러운 옷을 입고 있는데, 이렇게 죄가 많고 허물이 많은 사람이 어떻게 성전을 지을 수 있겠으며 대제사장 일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스라엘의 죄가 심히 크고 많은데, 배도와 반역한 그 백성을 어떻게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며 은총을 입게 하십니까?”라고 송사하고 있다. 여호수아는 지금 하나님 앞에 더러운 옷을 입고 그가 지은 죄악에 대해 사탄으로부터 고소 당하며 죄인으로 서 있다. 여기서 여호수아는 죄지은 인간을 상징적으로 대표한다. 하나님의 백성을 대표하는 누추한 옷을 입은 여호수아는 정죄 받은 죄인으로 하늘 법정에서 공판 받는 죄인으로 서 있는 것이다. 그는 자기를 대적하는 사탄이 서 있는 곳에 간구자로서 하나님 앞에 서 있다.

 

1. 사탄의 참소

 

사탄은 참소하는 일을 하늘에서부터 시작했다. 그는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 12:10)이다. 그는 하나님의 백성을 참소하고 속이고 멸망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일하고 있다. 사탄의 참소와 고소 때문에 하늘에 선악 간의 쟁투가 벌어지게 되었고, 그 선과 악의 대쟁투는 지구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계시 중에서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위해서 기도하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진리를 보존하기 위하여 택함을 받은 백성이었기 때문에 사탄의 특별한 적의의 대상이 되어 왔다. 그러나 사탄이 하나님의 백성을 파멸시키려고 작정했지만, 그들이 하나님께 순종하고 있는 동안은 그들을 해칠 수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이스라엘 백성을 죄 가운데로 유혹하여 넘어뜨리고 멸망시키기 위하여 그의 모든 힘과 교활한 술책을 다 사용했다. 불행하게도 이스라엘 백성은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고, 그들의 능력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께로부터 분리되었으며, 그러자 그들은 이방 원수들에게 포로가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섭리로 그들을 구원하시고 해방하시기 위해 역사하셨다.

 

사탄은 이스라엘의 죄과를 낱낱이 열거하고 고소하며 하나님 앞에서 여호수아를 참소하고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뿐만 아니라 인간 각 개인의 생애와 삶 속에서 활동하는 사탄의 술책도 마찬가지이다. 사탄은 사람들에게 회의심을 품게 하고 하나님을 믿는 확신을 잃어버리고 그분의 사랑에서 떠나가게 한다. 사탄은 인간을 유혹하여 그분의 계명을 범하게 하고, 그들을 그의 포로로 주장한다. 사탄은 하나님의 자녀를 참소하고 그들의 죄상을 할 수 있는 대로 과장해서 그들이 구원받을 가망이 전혀 없다고 주장한다. 그는 여호와 앞에 그들의 악행과 결점을 낱낱이 고발한다. 그는 그들의 허물과 실패를 일일이 열거해서 그들에게 도움이 필요할 때에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도와줄 수 없을 만큼 그들의 죄상이 흉악스럽게 보이도록 노력한다.

 

2. 사탄의 고소

 

사탄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대적할 기회를 끊임없이 찾고 있다. 그는 하나님께 용서와 은혜를 열렬하게 구하는 사람은 용서받고 가납받는다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그는 사람들을 좌절시키기 위하여 그들의 죄를 그들 앞에 제시하며 매우 간교한 셀 수 없이 많은 계책을 통하여 인간을 정죄하고자 노력한다. 사탄은 유혹을 주어 인간을 악에 빠뜨리며 그 일에 성공하게 되면 그에 대한 온갖 비난을 시험받은 자들에게 퍼붓는다. 그는 인간의 더러운 옷과 결점 많은 품성을 지적한다. 사탄은 구주를 욕되게 한 그들의 약점과 어리석음과 배은망덕의 죄와 그리스도와 같지 않은 성품 등을 제시하면서 자기에게 그들을 멸망시킬 권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그들의 경우는 전혀 소망이 없으며, 그들로 그들의 더러운 얼룩을 도무지 씻어버릴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해서 사람들의 심령을 위협하려고 애쓴다. 그는 사람들의 믿음을 파괴해서 그들로 자기의 시험에 완전히 굴복하도록 하고 또 하나님께 대한 충절을 버리도록 유혹한다. 사탄은 모든 사람을 유혹하기 위해 매 사람에게 적절한 간계를 준비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을 참소하고 정죄하는 동시에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과 긍휼과 용서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업을 성취하기 위하여 애쓰는 사람들을 참소하고 공박하려고 한다.

 

이 일은 사람이 타락한 이래로 사탄이 땅에서 해 온 일이었다. 사탄은 이 참소하고 고소하는 일을 이 세상 역사의 종말이 가까울수록 더욱 열심히 행하고 있다. 그의 때가 얼마 남지 않은 것을 보고 그는 속이고 멸망시키는 일에 더욱 열성을 내고 있다. 특히 그는 지상에 있는 한 백성, 곧 그들이 비록 연약하고 죄가 많을지라도 여호와의 계명을 존중히 여기고 순종하는 무리를 볼 때에 몹시 분노한다. 그리하여 용의 분노를 가지고 마지막 남은 무리를 지상에서 쓸어 없애버리려고 온 힘을 다하고 있다.

 

하나님의 남은 자손들은 영적으로 깨어나 사탄의 무서운 간계와 활동을 잘 파악하여야 한다. 눈에 보이는 사물과 이 세상으로부터 눈을 돌려,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일어나는 영적인 전쟁 선악 간에 벌어지고 있는 쟁투를 생각하며 매일 매 순간 죄를 승리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능력을 간절히 붙들어야 할 것이다. 지금은 사탄이 던지는 어두운 그림자와 세상의 헛된 일들과 인간관계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일들을 벗어나 영적으로 온전히 준비되기 위해 하늘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일들에 우리의 시선을 고정해야 할 때가 되었지 않는가

 

신앙 2부: 더러운 옷과 불에 그슬린 나무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하실 때에,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섰는지라”(3:2, 3).

 

스가랴 32, 3절에서는 1절에 등장하는 이상하고 흥미로운 장면의 원인과 이유가 확실하게 밝혀지고 있다. 왜 사탄이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여호수아를 그렇게 대적하고 있는지의 이유가 밝혀지는 것이다. 왜 사탄이 여호수아를 대적하며 고소하고 있었는가? 그 이유는 바로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탄은 하나님 앞에서 의기양양하여 이렇게 말한다.

여호와여, 보십시오! 이 더러운 옷을 입은 사람이 당신의 백성, 그것도 모든 백성의 대표자 대제사장이란 사람이요! 이렇게 형편없는 성품을 가진 시커먼 죄의 옷을 입은 사람이어떻게 이런 죄인이 제사장이 될 수 있고, 또 성전을 짓는 사업을 할 수 있겠소? 제사장이란 사람이 이러니 다른 백성은 말할 것도 없지 않겠습니까? 이 사람은 멸망을 받아 마땅합니다!”

이때 놀라운 여호와 하나님의 대답이 발해진다.

사단아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과연 이 말씀의 뜻은 무엇인가? 그리고 이 법정 공방에서 벌어지는 사탄의 고소를 과연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침묵시키시고 해결하실까? , 이제부터 벌어지는 흥미진진한 상황을 함께 연구해 보자.

 

1) 성경에 나타난 옷

 

먼저 여호수아가 입고 있던 더러운 옷, 그래서 사탄에게 고소 거리를 제공하게 된 옷에 대하여 고찰해 본 후 연구를 계속해 나가기로 한다. 성경에서 옷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성경에 은 성품이나 행실, 그리고 의와 관련되어 나타나 있다. 옷과 관련된 성경절들은 다음과 같다.   

 

1. 의로 상징된 기록

 

* 64:6 -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쇠패함이 잎사귀 같으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

* 3:5 –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 3:18 –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 16:15 – “보라 내가 도적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성경에서 옷이나 예복은 종종 를 상징하기 위해 기록되었다. 창세기 37절과 21절에는 두 가지 옷, 무화과 잎으로 엮은 옷과 가죽옷에 대한 기록이 나오는데, 이 옷은 둘 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와 타락과 관련이 있다. 죄를 지어 벗었음을 알게 되자 그들은 무화과 잎사귀로 옷을 만들어 벌거벗은 몸을 가리려고 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죄에서 구원하시겠다는 구속의 계획(3:15)을 발표하신 후 가죽옷을 지어 아담과 그의 아내에게 입히신다. 여기에는 매우 의미심장한 뜻이 숨어 있다. 그들은 범죄하므로 빛의 옷을 잃어버리게 되었는데, 그 잃어버린 옷은 하나님의 영광의 빛, 곧 그분의 의를 상징하였다. 그러므로 무화과 잎으로 엮은 옷, 인간의 의는 그들을 가려줄 수 없었다.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의의 옷만이 그들을 구원해줄 수 있었다. 위의 성경절들을 보면, 이사야는 인간의 의는 더러운 옷과 같다고 피력하고 있으며, 그 외의 성경절들에서도 흰옷은 인간이 유일하게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방편인 하나님의 의를 상징하고 있다.  

 

 

2. 행위나 성품의 상징으로 기록된 예

 

* 19:8 -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 59:6 – “그 짠 것으로는 을 이룰 수 없을 것이요, 행위로는 자기를 가리울 수 없을 것이며…”

* 3:4 –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 22:11, 12 – “임금이 손을 보러 들어올 쌔,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저가 유구무언이어늘

 

앞의 성경 절들을 보면, 옷은 행위나 행실 또는 성품을 상징하는 의미로 사용된 것을 알 수 있다. 깨끗한 옷과 흰 옷, 혹은 예복은 성도의 옳은 행실과 구원받기에 합당한 성품의 상징으로 쓰였다.

 

2) 여호수아와 더러운 옷

 

앞서 우리는 성경에서 시사하는 옷에 대하여 함께 생각해 보았다. 그렇다면 여기서 여호수아가 입고 있는 더러운 옷에 대해 쉽게 유추해낼 수 있지 않은가? 그렇다. 사탄에게 고소거리를 제공해 준 여호수아의 더러운 옷은 바로 그의 죄와 허물, 그리고 죄 되고 부족한 성품을 상징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인간의 더러운 의를 나타내고 있었다.

 

1. 여호수아

 

여호수아는 더러운 옷을 입고 서 있었고, 사탄은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여호수아의 죄 된 성품과 허물과 죄를 낱낱이 들춰내며 그를 고소하고 있었다. 사탄은 그를 대적하기 위하여 담대하게 일어나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은총을 회복 받아서는 안 될 이유로서 그들의 범죄를 지적한다. 그는 그들을 그의 포로로 주장하고 그들이 죽임을 당하도록 그의 손에 맡겨지기를 요구한다. 고개를 푹 숙이고 두려움으로 법정에 서 있는 여호수아, 자신의 절망적인 처지를 생각하며 풀이 죽어있는 그의 모습을 상상해 보라! 얼마나 안타깝고 슬픈 광경인가! 여호수아는 사탄의 비난에 대해 답변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을 바라볼 때, 그리고 그의 백성의 허물과 죄를 바라볼 때 낙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하나님 앞에 묵묵히 서서 그의 허물과 죄를 고백할 뿐이었다.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사탄의 비난에서 그 자신이나 그의 백성을 방어할 방법이 없었다. 그는 이스라엘이 허물이 없다고 주장하지도 않는다. 그는 자기가 대표하는 백성의 죄를 상징하는 더러운 옷을 입고 하나님 앞에 서서 자신의 죄와 그들의 죄를 고백하며 용서받기 위하여 탄원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그들의 회개와 겸비를 가리키며 죄를 용서하는 구세주의 자비를 의지하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주장하면서 탄원하고 있었다.

 

사탄이 일어나 더러운 옷을 지적할 때 여호수아는 자신을 바라보며 낙망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러나 그는 하늘의 중보자께 탄원하고 구주의 공로를 의지하여 열렬히 간구한다. 주님께서 사탄의 참소를 침묵시키고 그의 공격과 계책이 수포로 돌아가게 하시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부르짖는 것이다.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자들은 여호수아처럼 오늘날 그들의 심령을 괴롭게 하고, 그들의 죄를 고백하고, 그들의 중보자이신 예수님을 통한 용서를 열렬히 간구해야 한다. 그들의 통회와 겸손은, 슬피 탄식할 이유를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의 거룩한 계명을 범하고 있으면서도 완전하다고 주장하는 자들의 영적 교만보다 하나님 보시기에는 훨씬 더 가납될 만한 아름다운 일이다.

 

 

2. 인간의 대표 여호수아

 

하늘 법정에서 사탄의 고소를 당하고 있는 여호수아는 표상적으로 죄지은 인간을 대표하고 있다. 여호수아처럼 우리는 우리를 대적하는 사탄의 비난에 대답할 수 없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불렸던 이스라엘 백성은 매우 결함이 많은 허물투성이의 민족이었다. 현시대를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허물과 부족이 많은 사람이다. 사탄은 자신이 인간을 유혹하여 범죄하게 한 죄들을 정확하게 알고 있다. 그는 그 죄들을 가장 크게 과장하여 제시하면서 이렇게 주장한다. “하나님께서 나와 나의 사자들은 추방하시면서 동일한 죄를 범해 온 이 사람들은 구원을 하실 것입니까? 안 됩니다! 만일 그렇게 되면 당신의 보좌는 의와 공의로 설 수 없을 것입니다. 공의는 그들을 정죄하는 선고가 내리기를 요구합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사탄이나 그 부하들과 같지 않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 가운에서 그분의 면전에서 스스로 반역하여 죄를 지었지만, 인간은 사탄의 속임에 빠져서 죄를 짓게 된 것이다.

 

법정에 서 있는 여호수아의 처지는 우리의 처지와 얼마나 같은가! 우리가 죄를 지을 때마다 사탄은 기뻐 뛰며 이렇게 소리친다. “저들을 보라! 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다! 저들이 예수를 믿는다고 공언하는 사람들이다!”라고. 우리를 향한 사탄의 고소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으며, 하늘 법정에서는 지금도 이런 장면이 연출되고 있다. 우리가 죄를 범하고 실수할 때마다 주님께서는 수치를 당하시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생각한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께 욕을 돌리지 않기 위해 얼마나 존절하게 살아야 하겠는가!

하나님의 인정받은 백성이 더러운 옷을 입고 여호와 앞에 서 있는 이 계시의 장면은 하나님의 이름을 믿는다고 공언하는 모든 사람을 회개하게 하고 마음을 깊이 살피게 해 줄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품성의 모든 결함과 하나님의 표준에 이르지 못하는 모든 연약한 점 때문에 사탄이 인간을 정복하고 파멸시키기 위하여 들어올 수 있는 문이 열린다는 것과 또 우리의 모든 실패와 결함이 사탄에게 그리스도를 비난할 기회를 준다는 것을 기억하고 죄를 정복하고 승리하는 일에 더 큰 열성과 열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3) “불에 그슬린 나무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며 겸손하게 탄원하고 있을 때 참소자 사탄에게 놀라운 선고가 발해진다. 사탄을 향한 여호와 하나님의 책망과 선고가 내려지는 것이다. “사단아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도대체 이 말이 무슨 말일까? 누가, 왜 불에 그슬린 나무인가?

 

그슬린 나무의 영적인 의미를 살펴보면, “불에 그슬린 나무는 하나님을 믿고 있는 현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다. 이 악한 세대 속에서 죄에 오염되고 죄의 영향을 받으면서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여호수아처럼 매 순간 사탄의 고소를 당하며 하나님 앞에서 냄새나는 더러운 옷을 입고 초라하게 서 있는 존재들이다. 시시때때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사탄의 시험과 유혹은 얼마나 강한가! 사탄은 하나님의 자녀를 멸망시키기 위해 온갖 계략을 다 사용하며 시험한다. 또한,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도록 주님을 따라가는 길에 온갖 어려움과 장애물을 펼쳐 놓는다. 그리하여 고난의 불과 시험과 고통 가운데서 신앙을 포기하도록 유혹하며 멸망의 불 속에 집어넣어 태워버리려고 애를 쓴다. 사탄이 온갖 술수와 흑암으로 하나님의 자녀를 덮어서 멸망시키려고 하는 그때에 그리스도께서 개입하신다. 비록 그들이 죄를 범했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그들의 죄를 담당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불에서 나무 조각을 끄집어내는 것처럼 인류를 끄집어내셨다. 너무 뜨거운 풀무불 속에 계속 두면 그분의 연약한 자녀가 너무 상해서 살아남지 못할까 봐 그들을 불 속에서 얼른 꺼내시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불에 그슬린 나무인 것이다.

 

사탄은 하나님의 자녀가 다 타서 없어지도록 강하게 공격하며 달려든다. 그러나 주님의 눈은 그분의 백성을 주시하신다. 그들의 고통은 크며, 시련의 풀무의 불꽃은 마치 그들을 다 태워 버릴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을 불 속에서 연단한 금처럼 나오게 하실 것이다. 그리스도의 형상을 완전하게 반사하기 위하여 그들의 세속적 마음은 연단의 불 속에서 제거되고, 불신은 극복되고, 믿음과 소망과 인내가 계발되도록 주께서는 고통의 불을 이용하신다. 비록 하나님의 백성에게 결점이 있다 할지라도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버리지 않으신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이 죄를 지었을지라도, 그들은 사탄처럼 그들 자신을 악의 지배에 완전히 맡기지는 않았다. 주님의 백성은 죄를 버리고, 겸손하고 통회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찾았다. 거룩한 중보자 예수께서는 그들을 불쌍히 보시고 구원하신다.

 

그리하여 그들의 죄와 실수와 배은망덕 때문에 가장 크게 모욕을 받아 오신 분, 그러나 그들의 눈물 어린 회개와 통회를 아시는 분께서 일어나셔서 사단아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내가 이 영혼들을 위하여 나의 생명을 버렸다! 그리고 그들을 나의 손바닥에 새겼다!”고 말씀하시며 사탄을 책망하시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인성을 입으셔서 사람과 연결되셨고, 또한 당신의 신성으로써 하나님과 일체가 되셨다. 그분의 무한하신 능력과 은혜의 도우심은 시련의 불 속에서 신음하는 영혼들, 연약하여 죽어가는 영혼들, 그러나 그들의 죄로 마음 아파하며 통회하는 자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손을 뻗는다. 이제 그들을 멸망시키려고 달려들던 대적 사탄은 책망을 받는다. 비록 불에 타다 남은 나무토막처럼 되었지만, 결코 하나님 앞에서 어떤 것도 자랑할 수 없고 그저 냄새나는 영혼으로서 고개 숙이고 있는 연약한 존재일 뿐이지만, 그리고 아직 상처투성이요 불로 인해 검게 탄 보잘것없는 존재이지만, 통회하며 주님께 나오는 겸손한 사람들은 중보자 예수님의 눈에 그분의 보혈로 구원을 받는 사랑스러운 존재들이다

 

신앙 3부: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선 자들에게 명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네 죄과를 제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3:4).

 

사탄의 맹렬한 고소와 대적이 있지만, 결국 우리의 중보자이시며 변호인 되시는 그리스도께서는 여호수아의 더러운 옷을 벗기시고 아름다운 옷을 입히신다!

스가랴 3장에 나오는 이상 가운데 4절은 이 계시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다. 이 장면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창세로부터 마련하신 구속의 비밀이 압축된, 그리고 사탄의 고소를 통쾌하게 침묵시켜버리시는 하나님의 지혜와 아름다운 사랑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명장면이다. 구약 성경 중에서 이 스가랴 3장만큼 믿음으로 얻는 구원의 복음,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한 진리가 잘 나타나 있는 곳은 없다. 죄지은 인간들에게 소망의 빛을 비춰주고 우리의 입술에서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한 놀라운 진리가 담긴 4절을 함께 연구해 보자.   

 

1) 중보자 예수그리스도의 탄원

 

여호수아(또는 예수아)’라는 이름의 뜻은여호와께서 구원하신다.’라는 뜻이다. 성경에서 오른쪽은 변호와 보호의 위치를 의미한다. 시편 기자는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16:8, 44:3 참고)라고 하였다. 이런 경우 고소자는 반대편에 선다( 109:6). 여호수아가 백성을 대신하여 하나님 앞에서 고소를 당하는 동안, 우리의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변호하신다.

 

히브리서 여러 곳에 강조되고 설명되었듯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늘 성소에서 대제사장으로서 우리를 위해 중보하고 계신다. 중보자되신 예수님은 당신의 피를 가지고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셔서 회개와 믿음으로 주님께 나아오는 영혼들 위해 탄원하신다. 그분께서는 대언자가 되시고 변호인이 되셔서 우리를 위해 변호하시며 갈보리 십자가의 강한 사랑의 논증으로 사탄의 비난과 고소를 물리치신다.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하나님의 계명과 뜻을 완전히 순종하심으로써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권세가 그분께 주어졌으므로, 그분은 범죄한 인류를 위하여 자비와 화해를 그분의 아버지께 주장하신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한 최고의 변호사와 중보자가 되실 수 있는 이유는, 친히 성육신 하셔서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되셨고,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2:17, 18)실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얼마나 인간의 처지를 잘 이해하는 훌륭한 자격을 갖춘 변호사인가! 예수께서는 그분의 무죄하신 생애와 상하고 찔림을 받은 몸을 가지고 아버지 앞에 서서셔 중보하신다. 또한, 상하신 손과 찔림을 받으신 옆구리와 상처 난 발을 가지고 죄에 빠진 인류를 위하여 탄원하신다. “아버지여, 나의 피를 기억하옵소서. 이들을 위하여 내가 목숨을 버렸나이다! 이들이 통회하며 회개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들을 구원하여 주십시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무한한 값을 치르시고 우리를 위해 탄원하시는 주님의 중보는 우리 인간의 최대의 희망이다.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 2:1).

 

2) 더러운 옷을 벗는다는 의미 회개

 

아버지가 돌아온 탕자에게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는 장면과 같이, 4절에는 마침내 여호와의 사자의 명령에 따라 백성의 죄를 상징하는 여호수아의 더러운 옷이 제거되고 아름다운 옷을 입히는 장면이 연출된다. 앞에서 공부했듯이 더러운 옷, 곧 죄와 결점과 허물과 부족한 성품을 상징하던 더러운 옷이 드디어 벗겨지는 것이다. 더러운 옷을 벗는다는 것에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담겨있다. 더러운 옷을 벗는다는 것은 회개를 의미한다. 참된 회개란 더러운 옷을 아주 벗어버리듯이 옛 생애를 완전히 청산하고 죄를 버리고 생애를 개혁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의는 자복하지 않고 버리지 않은 죄를 덮는 가면이 아니다. 말로만 믿는다고 고백하고 생애에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은 진정한 회개가 아니다. 철저한 개혁이 따르지 않는 회개는 참된 회개가 아니다.

 

우리는 흔히 우리의 악한 행실이 자신에게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에 슬퍼한다. 그러나 이것은 참된 회개가 아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진정한 회개가 이루어질 수 있는가? 회개의 지름길은 십자가 밑으로 가는 것이다. 십자가 밑에 나아가 무릎을 꿇고 나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계속 바라보며 죄의 악함을 깨닫는 것이다. 그때에 우리는 주님을 징벌하고 십자가에 못 박게 한 것이 죄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말로 다할 수 없는 주님의 사랑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배은망덕과 반역으로 일관된 생애를 살아왔음을 알게 된다. 죄를 진정으로 슬퍼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의 결과이다. 성령님께서는 구주를 모욕하고 슬프시게 한 우리의 악한 마음을 드러내어 우리로 십자가 밑에서 통회하게 하신다. 우리가 지은 모든 죄로 말미암아 다시 상처를 입으시는 예수님, 우리 죄 때문에 찔림을 받으신 예수님을 바라볼 때에 우리는 그리스도께 고뇌를 안겨 준 죄를 슬퍼하게 된다. 또한, 우리의 죄가 직접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며, 상처를 받아 피가 흐르는 그분의 심장을 찔러 온 것을 깨닫고 가슴이 찢어지는 슬픔을 느낀다. 이러한 애통이 죄를 버리게 하며 참된 회개를 일으키는 것이다. 그럴 때에 우리는 진정으로 죄를 슬퍼하며 다윗과 같은 간절한 기도를 드리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51:10). 그러므로 회개는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돌이키고 거듭나는 것이다, 그리고 완전한 회개가 일어날 때에 비로소 완전한 용서가 성립되는 것이다.

 

3) 아름다운 옷을 입히심의 의미 칭의

 

네 죄과를 제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3:4).

 

이제 사탄의 고소를 침묵시키시고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일을 행하신다. 계시의 장면에 나타난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더러운 옷을 벗기신다. 그러나 그 더러운 옷을 벗기시는 것만이 아니다. 그에 더하여 아름다운 옷을 입히시기까지 하신다!

여기서 아름다운 옷은 그리스도의 순결한 의를 상징한다. 곧 믿음으로 예수를 개인의 구주로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흠이 없는 품성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표상한다. 그런데 아름다운 옷을 입히신다는 것이 영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신학적인 용어를 사용하자면, 아름다운 옷을 입히시는 것의 의미는 칭의이다. 칭의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의인이라고 칭해주시는 것을 말한다. 죄인이 죄를 슬퍼하고 그 죄를 미워하여 버리고 돌아서 완전히 회개할 때에, 하나님께서 그 사람이 전혀 죄를 짓지 않은 의인처럼, 한 번도 죄를 지은 적이 없는 의인처럼 간주하시고 의롭다고 칭해주시는데, 이것을 칭의라고 한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옷을 입히시는 것, 곧 칭의에는 놀라운 하나님의 구속의 비밀과 사랑의 계획이 담겨있다. 이 비밀이 곧 복음의 비밀이며, 인간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길을 만들어놓으신 하나님의 구원의 방편이다. 이 심오하고 흥미로운 복음의 비밀을 함께 공부해 보자.

 

1. 칭의는 선물

 

스가랴 3장의 계시에서 죄지은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정점을 보여주는 아름다운 옷을 입히시는 사건은 여호수아를 놀라게 하고 사탄의 참소를 침묵시킨다. 마치 하나님의 보좌를 둘러싸고 이십사 장로와 모든 생물과 천천만만의 천사들이 하나님의 심판의 공의로우심과 그분의 통치와 승리를 찬양하고 경배하며 영광 돌리는 요한 계시록 4장과 5장의 장면처럼, 인간의 더러운 옷을 벗기시고 모든 죄과를 제하여 버리시며 아름다운 옷을 입혀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구원의 행위와 선고는, 이 사건을 보고 있거나 하늘의 법정에 참석하고 있는 천사들이나 우주 거민들의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할 뿐 아니라 찬양과 경배를 절로 우러나오게 한다. 그 지혜롭고 오묘하신 구속의 경륜에 모든 입이 다물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 구원 얻을 자격이 없는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마련하신 얼마나 놀라운 선물인가! 그렇다! 구원은 놀라운 선물이다. 그리고 구원받기 위해 꼭 필요한 칭의, 의롭다고 칭함을 받는 일 역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선물이다!

 

하나님께로부터 칭의를 받게 한 것은 인간 여호수아의 행위가 아니었다. 그의 회개와 통회가 열렬했기 때문도 아니었고, 혹은 그의 간구와 기도가 간절했기 때문도 아니었다. 그가 하나님께 가납되고 의롭다는 선고를 받은 것은, 곧 아름다운 옷 칭의를 받은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선물이었다. 물론 우리의 회개는 하나님의 의를 받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기는 하다. 그러나 우리의 회개의 행위가 하나님께 의롭다는 칭의를 받게 하는 수단은 아니다. 칭의는 하나님께서 값없이 내려주시는 선물, 곧 갈보리의 십자가의 대속의 죽음을 통해 우리에게 값없이 주시는 은혜의 선물이다.

 

2. 칭의에 숨어있는 구원의 공식

 

더러운 옷을 벗기시고 아름다운 옷을 입히시는 장면에는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신 구원의 공식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더러운 옷이 인간의 죄의 오점과 불의를 상징했다면, 아름다운 옷은 예수 그리스도의 순결하신 의를 상징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가 주님의 의를 입을 수 있는가? 그것은 오로지 믿음을 통해서인데, 이 과정에서 하나님께서 인간의 구원을 위해 세우신 놀라운 공식이 적용된다. 그 공식이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회개하며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질 때에, 우리의 죄가 예수그리스도께 전가되고, 대신 그분의 의가 우리의 의로 전가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의와 순종이 우리 계정에 오르게 되고, 그분의 죄 없는 품성이 우리에게 입혀지게 되고 그분의 순결이 우리의 것으로 하나님 앞에 제시되는 것이다. 곧 우리의 불의와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교환되는 공식이다. 그리하여 회개한 죄인이 하나님 아버지 앞에 의인으로 서게 되는 것이다. 놀라운 공식이 아닌가!

 

회개한 죄인을 하나님께 가납되게 해주고 칭의를 이루어 주는 것은 그리스도의 의 밖에는 없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셔서 우리의 형벌을 중지하시고 우리에게 당신 자신의 의를 옷 입혀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칭의를 받는 것이다. 우리의 생애가 아무리 죄악적이었을지라도 예수님을 개인의 구주로 믿으면 그리스도의 입혀주는 의의 흠 없는 예복을 입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된다. 칭의는 유죄선고와 반대이다. 예수님의 희생은 공의의 요구를 완전히 충족시킨다. 하나님의 무한한 자비가 전혀 받을 자격이 없는 자들에게 주어지고 우리의 죄를 위해 속제물이 되신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의 범죄와 죄악이 용서되며,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죄인이 하나님의 은총 안으로, 그리고 영생의 영원한 소망 안으로 들어가게 되기 때문이다. 하늘의 베틀로 짜인 흠 없는 그리스도의 의의 두루마기가 예수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회개한 영혼들에게 입혀지는 것, 그리하여 하나님 앞에 의인이라는 선고를 받게 되는 것,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마련하신 놀라운 구원의 공식으로 죄인은 그 자비의 공식을 통해서 구원을 받는 것이다.  

 

4) 겉과 속이 같아야 칭의가 이루어진다

 

잠깐 여기서 칭의에 대한 부가적 의미를 조금 더 짚어 보기로 한다. 앞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는다는 의미를 칭의라고 배웠다. 그런데 혹자는 이렇게 질문할지 모른다. 그리스도의 공로와 의를 믿는 자를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여겨주시는데, 죄를 회개할 이유가 무엇인가?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면 왜 회개가 칭의의 한 조건이 될 수 있느냐는 의문이 생길지도 모른다. 그런데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사실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분이시라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의롭지 않은 사람을 의롭다고 간주하고 의로 살짝 덮어주신다면 하나님은 불의한 분이 되는 것이 아닌가? 4절의 언급을 통해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께서는 의의 옷으로 입혀주실 때에 죄를 그냥 놔두시지 않고 없애버린 후에 의의 옷을 입혀 주신다는 사실이다. 죄의 용서는 한낱 하나의 형식에 지나는 것이 아니다. 죄의 용서는 엄연한 현실로서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다. 실제로 깨끗하게 죄 씻음을 받는 것이다. 만일 죄 씻음을 받고 의롭다 하심을 받고 의로워지면 하나의 철저한 변화가 분명히 일어나게 된다. 그것은 겉과 속이 같은 사람이 되는 변화이다. 다시 말해 겉에 의의 옷이 입혀진 것처럼, 속도 의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어야 하나님께서 공의로운 하나님이 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의로우시고 그리스도의 공로를 통해 죄인을 의롭게 여기실 수 있지만, 어떤 사람도 알고 있는 죄를 그대로 행하거나 알고 있는 의무를 소홀히 하면서 그의 영혼을 그리스도의 의의 두루마기로 덮을 수는 없다. 하나님께서는 칭의가 이루어지기 전에 완전한 마음의 복종을 요구하신다. 그리스도의 의는 품고 있는 단 하나의 죄도 가려 주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분으로 하여금 죄를 묵인하게 하지 않는다. 그분은 우리 죄를 못 본 체하시거나 우리의 품성 가운데 있는 어떤 결점도 묵과하지 않으실 것이다. 대신 그분은 우리가 당신의 이름으로 그것들을 극복하기를 바라신다. 어떻게 거짓말하실 수 없고 불의가 없으신 하나님께서, 죄를 그대로 사랑하고 있고 버리지 않는 사람을 그냥 의롭다고 칭해 주실 수 있단 말인가? 그러므로 의의 옷을 입는다는 것에는 더러운 옷을 먼저 벗어버리는 것이 선제한다. 더러운 옷 위에 그냥 의의 옷을 덮어씌워 가리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하셔서 의롭다고 칭해 주시며 의의 옷을 입혀주시면, 그는 의의 옷을 입은 사람으로서 마음속의 의도와 모든 동기가 의로워질 수 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죄를 회개하고 용서받은 사람은 전혀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죄 없이함을 받고 흠 없고 순결한 의를 얻었기 때문이다. 성경은 그것을 이렇게 묘사한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고후 5:17).

 

신앙 4부: “정한 관”

 

곧 정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며 옷을 입히고 여호와의 사자는 곁에 섰더라”(3:5).

 

여호수아에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는 것에서 끝날 것 같은 스가랴서 3장의 계시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 다음 의미심장한 이야기가 더 전개된다. 머리에 정한 관을 씌우시며, 그 후에 보장되는 천국 생활의 묘사가 이어지는 것이다. 왜 아름다운 옷을 입히시는 것에서 계시가 끝나지 않는 것일까? 거기에는 우리가 깨달아야 할 매우 깊은 진리의 도가 숨어있는데, 그것은 회개하고 주님께서 입혀주신 의의 옷을 입는 것만으로는, 즉 칭의를 얻는 것만으로는 구원이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는 진리를 알려주기 위함이다. 오히려 구원은 이때부터 시작된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십자가에서 구원이 끝난다고 믿는다. 십자가의 보혈을 믿기만 하면 된다고, 십자가를 믿고 회개하기만 하면 다 된 것이고 구원을 받는다고 기독교에서는 가르친다. 물론 회개한 사람이 구원을 받는다. 그러나 성경은 그보다 더 깊은 진리를 전해주는데,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을 믿고 회개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구원 과정에 있어서 시작일 뿐이라는 것이다.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는가? 우리가 지금 공부하고 있는 스가랴 3장의 계시를 보아서도 확실히 알 수 있다. 만일 그렇다면 그 외에 무엇이 더 있는가? 스가랴 3장의 계시는 이렇게 우리에게 말해준다. “아름다운 옷만으로는 넉넉하지 않다! 머리에 정한 관을 써야 한다!”…. 이것이 무슨 말인가? 5절부터 시작되는 심오한 내용의 이야기를 공부해 보면 알게 될 것이다. , 이제 5절부터 10절까지 계속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꼭 알아야 할 매우 중요한 성경의 진리를 공부해 보기로 하자.

 

1) “정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며

 

스가랴의 계시에 나타난 대로, 하나님께서는 회개한 죄인에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실 뿐 아니라, 그에 더하여 머리에 정한 관을 씌우신다. “정한 관"이란 무엇이고, 그 의미는 무엇일까?

 

1. “정한 관이란 무엇인가?

 

정한 관은 성소 제도에서 제사장들이 머리에 쓰는 관을 가리킨다. 이와 관련된 성경절을 하나 보자.

모세가 또 아론의 아들들을 데려다가 그들에게 속옷을 입히고 띠를 띠우며 관을 씌웠으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심과 같았더라”(8:13).

그 머리에 관을 씌우고 그 관 위 전면에 금패를 붙이니 곧 거룩한 관이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심과 같았더라”(8:9).

레위기 8장에는 모세가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아론의 아들들을 제사장으로 임명하고 제사장 예복을 입히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는데, 제사장이 머리에 쓰던 관이 정한 관이었다.

출애굽기 39장에는 관에 대한 더 자세한 묘사가 나온다.

세마포로 두건을 짓고 세마포로 빛난 관을 만들고 가는 베실로 짜서 세마포 고의들을 만들고그들이 또 정금으로 거룩한 패를 만들고 인을 새김 같이 그 위에 「여호와께 성결」이라 새기고, 그 패를 청색끈으로 관 전면에 달았으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대로 하였더라”(39:28, 30, 31).

 

여기서 주의를 집중해서 보아야 할 사실은, 제사장이 쓰는 관은 삼중으로 되어 있었고 관의 전면에 청색 끈으로 묶인 금판이 있는데, 그 금판에 여호와께 성결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그 관을 거룩한 관”(39:30, 31 킹제임스역)이라고 불렀다. 이 금판은 청색 끈과 함께 아론의 이마에 얹혔는데, 이것은 대제사장으로서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순종하는 그리스도의 참된 대표자임을 상징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삼중 면류관을 상징하며, 또 구속 받은 자들이 제사장으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서 천 년 동안 왕노릇할 때에(20:4, 6) 머리에 쓸 거룩한 면류관을 표상하기도 한다.

 

2. “정한 관을 머리에 쓴다는 의미 성화

 

정한 관을 머리에 쓴다는 영적인 의미는 성화이다. 앞서 성경의 기록을 살펴본 대로 제사장들은 그들이 머리에 쓰는 관 앞에 금판을 붙이고 여호와께 성결이라는 글씨를 새겨 넣었다. 그리고 그 글귀는 관을 쓰고 있는 제사장의 앞이마에 와 닿게 되어 있었다. 여기에는 매우 귀중한 영적 의미가 들어 있다. 그것은 마지막 시대의 성도들, 곧 하나님의 자녀와 거룩한 제사장으로 택하심을 입은 성도의 앞 이마가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정결해야 함을 시사하고 있다. 앞이마가 정결하다는 뜻이 무엇이며 그것이 성화와 무슨 관계가 있을까? 과학적으로 고찰해 보면, 우리의 앞이마 뒷부분에는 뇌의 전두엽이 자리잡고 있다. 전두엽에서는 이성, 판단, 선택과 결정, 의지를 통제 관할한다. 그리고 전두엽에서 이루어지는 중요한 기능은 영성, 도덕성, 의지이다. 그렇다면 앞이마가 정결해진다는 것이 무슨 말인가? 성령께서는 우리의 전두엽을 통해서 역사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유 의지를 주셨다. 죄의 유혹이 올 때, 그리고 사단이 우리가 죄를 짓도록 유혹할 때, 사단의 말을 듣고 사단의 편을 택하여 죄를 짓든지, 아니면 성령의 음성을 듣고 성령께 굴복하여 죄의 유혹을 물리치든지, 선택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의지에 달려있다. 인간의 의지가 하나님의 음성을 선택하면 그는 의로운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게 되지만, 육체의 소리에 복종하여 살면 악인의 길을 걷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매 순간 육신의 생각을 따르지 않고 성령의 음성에 굴복하며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결정을 할 때, 우리의 앞이마와 두뇌의 생각이 정결해지는 것이며, 이러한 삶이 지속되는 것이 성화이다. 곧 성령 안에서 주님을 따라 걷는 거룩한 생활이 성화이다. 요즈음 기독교에서는 성화를 거의 강조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는 거룩한 생활, 곧 성령의 음성을 듣고 그 길로 따라 걷는 생활이나 영적인 성장, 또한 하나님의 성품으로 변화되어야 할 필요성은 거의 가르쳐지지 않고 있다. 십자가에서 구원이 끝났으므로 믿기만 하면 은혜로 다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가르침은 많은 사람을 멸망으로 이끄는 가르침이다. 예수님의 재림이 매우 가까운 마지막 시대를 사는 성도로서, 그리고 성경의 진리를 깊이 연구하는 학도로서 우리가 주지해야 할 것은, 구원은 칭의만 가지고는 완성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칭의가 하늘에 들어갈 수 있는 표라면, 성화는 하늘에 가서 살 수 있는 적합성이다. 곧 하늘의 거룩한 사회에 적응하여 함께 어울려 살 수 있는 자격이 갖추어져야 하늘에서 살 수 있다.

 

다시 강조하지만, 회개하고 의롭다는 칭함(칭의)를 받고 거듭나는 것은 구원에서 오직 시작점일 뿐이다. 만일 거듭나기만 하고 자라남이 없이 그 지점에서 멈춘다면 그것은 산 신앙도 아니고 살아있는 신앙의 경험을 하는 것도 아니다. 거듭난 후에는 반드시 자라남과 성장이 수반되어야 하는데, 그 성장이 바로 인간의 뇌의 전두엽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음성에 매 순간 굴복하며 살아가는 거룩한 삶이며, 그것이 성령께 굴복된 의지를 가지고 살아가는 성화이다. 성화란 거창한 것이 아니다. 매 순간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삶을 사는 것, 곧 성령의 음성과 하나님의 뜻을 따라 복종하며 살아가는 것이 성화이다.

 

2) 정한 관과 하나님의 인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더 상고해 보아야 할 것은, 정한 관과 마지막 남은 무리가 받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인과 매우 깊은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요한계시록 22 4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다.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 하나님과 어린 양의 이름이 이마에 있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성경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그분의 성품을 의미한다( 33:18~23 참조). 그러므로 이마에 하나님의 이름이 새겨졌다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이 우리의 성품 안에 재현되는 것을 말하는데, 그것이 바로 스가랴 3장의 계시에 나오는 정한 관을 머리에 쓴다는 것과 관계가 있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우리의 의지를 하나님의 뜻에 굴복하므로 주님의 성품이 우리의 앞이마(전두엽)에 재생된다는 의미이다. 곧 성령께 지속해서 굴복된 의지를 가지므로 죄를 승리하고 점점 더 하나님의 성품으로 꼴 지어져 가는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해서 거듭난 마음을 계속 유지하고 매 순간 성령과 교통하므로 죄를 이기며, 사단의 유혹이 올 때 매번 올바른 편(성령의 음성을 듣는 편)을 지속해서 선택하므로 영성과 도덕성과 의지력이 온전하게 꼴 지어져 하나님의 성품을 이루게 된다는 뜻이다. 그것이 앞이마가 정결하다는 뜻이고, 그런 사람의 앞이마에 하나님의 인이 쳐지는 것이다.

 

3) 주어진 아름다운 약속

 

여호수아의 머리에 정한 관을 씌우신 하나님께서 이제 그에게 아름다운 한 약속을 주신다. 하나님께서는 사탄의 대적을 받고 있는 죄 많은 인간을 대표하는 여호수아를 사탄의 고소에서 건져주시고 용서하셨다. 더러운 옷을 벗기시고 아름다운 옷을 입혀 주셨다. 이제 그 자신의 죄와 그의 백성의 죄는 용서되었고, 이스라엘은아름다운 옷으로 입혀졌다. 곧 그리스도의 의가 입혀진 것이다. 그리고 그를 다시 그분의 제사장으로 인정하셔서 머리에 정한 관을 씌우신다. 여호수아의 머리에 씌여진 관은 제사장이 쓰는 것이었고, 비록 이전의 범죄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제 다시 하나님의 성소에서 그분 앞에 봉사할 자격이 있다는 것을 인정받았다. 정한 관을 씌우실 뿐만 아니라, 창조의 능력과 은혜로 앞이마에 하나님의 성품이 재현되도록 도와주시기까지 하시는 것이다. 그 후에 하나님의 아름다운 약속이 여호수아에게 보장된다. 그런데 그 약속은 성화의 생애를 사는 전제와 조건 아래서 주어진 것을 알 수 있다. 그 약속은 바로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네가 만일 내 도를 준행하며 내 율례를 지키면, 네가 내 집을 다스릴 것이요, 내 뜰을 지킬 것이며, 내가 또 너로 여기 섰는 자들 중에 왕래케 하리라그 날에 너희가 각각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로 서로 초대하리라 하셨느니라”( 3:7, 10)는 것이었다.

 

이것이 무슨 말이며 무슨 약속인가? 이 약속은 바로 빛나고 영광스러운 천국 생활을 보장하시는 구원의 약속이다. 하나님의 집을 다스리며 뜰을 지킨다는 말은 하늘에서 주님과 함께 왕노릇하며 영원히 구원과 영생의 복을 누린다는 뜻이다. 그리고 포도나무와 무화과 나무 아래로 서로 초대한다는 말은, 대속죄일을 지나 모든 죄를 용서받은 이스라엘 백성이 큰 기쁨 속에서 천국 생활을 표상하던 장막절을 지키며 잔치를 베풀고 서로 초대했던 것처럼, 하늘에서 영원한 잔치에 참여하여 주님과 함께 행복하게 살 것이라는 의미이다. 하나님의 보좌 주변에 있는 천사들과 영광스러운 무리에 들어가 영원토록 주님을 찬양하며 살 것이라는 약속이다. 단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조건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내 도를 준행하며 내 율례를 지키면그렇게 해주시겠다는 것이다. 곧 지속해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순종하며 산다면, 성화의 길을 따라 산다면 그렇게 해주신다는 것이다. 얼마나 정확한 진리인가!

 

그런데 그것이 가능하게 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또 다른 놀라운 약속을 발표해 주셨다. 그 또 다른 약속은 내가 내 종 순을 나게 하리라”( 3:8)는 약속이었다. 이것이 무슨 말인가? 그것은 장차 너의 죄를 대속할 구세주를 이 땅에 태어나게 하겠다는 약속인데, 그 구세주는 죄에서 인간을 구속해줄 뿐만 아니라 친히 성육신 하셔서 인간으로서 살아보심으로 인간을 어떻게 도와주실 줄 알 뿐만 아니라, 그들의 사정을 잘 이해하기 때문에 인간을 잘 변호하실 수 있는 분이시라는 것이다. 그뿐 아니다. 그 구세주는 연약한 인간이 죄를 승리하고 살 수 있도록 은혜와 능력을 주시는 분이시며, 연약한 인간을 다시 거룩한 제사장으로 만드실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구세주이신데, 그런 분이 메시야로서 이 땅에 태어날 것이라는 보증과 약속이었다. 여호수아와 그의 백성이 용서를 받은 것은 장차 올 구주를 믿는 믿음에 의한 것이었다. 만일 그들이 그분의 도를 준행하고 그분의 율례를 지키면 그분의 공로에 의하여 그들은예표의 사람이 되고, 세상의 나라들 가운데서 하늘의 택한 자로 높임을 받을 것이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소망, 우리의 의와 구속이 되신다. 주님의 보혈의 공로와 구속을 통하여 우리가 죄에서 해방되고 제사장으로 회복되어 하늘에서 영원한 복을 누리며 살게 되는 것이 아닌가!  

 

지금까지 공부했듯이, 스가랴 3장에 기록된 짧은 계시 속에는 하나님의 구속의 비밀의 계획과 그 계획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성취시키시는 방법과 과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는 그리스도의 자비로우신 사역, 우리를 고소하며 멸망시키기 위해 애쓰는 사단의 공격, 그리고 믿음으로 주님을 붙잡고 회개하는 인간들을 용서하시고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와 죄인을 다시 거룩한 제사장으로 회복시키시는 놀라운 방법이 이보다 더 고무적이고 희망적으로 쓰여진 기록을 어디서 찾을 수 있겠는가? 이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구속의 계획이며 사랑의 역사인가!    

 

** 마치면서

 

스가랴 3장에 기록된 계시는 마지막 시대의 성도를 위하여 기록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지금도 하늘 법정에서는 죄인인 우리 인간들을 위해 사탄의 고소를 막으시며 중보하고 변호하시는 주님의 놀라운 역사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죄 된 행동이 얼마나 사탄의 고소거리를 많이 만들어 주고 있으며, 우리의 부족한 성품과 말로 주님께 욕을 돌리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를 생각한다면, 우리의 삶은 얼마나 더 엄숙하고 신실하게 돼야 할는지요! 영적인 대속죄일에 사는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우리들의 심령을 괴롭게 하고 회개하며 마음의 순결을 위하여 탄원해야 할지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더러운 옷을 벗기라는 명령이 내리고, “내가 네 죄과를 제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는 선고를 받을 수 있도록, 그리고 머리에 정한 관을 쓰고 다시 주님의 제사장의 직분을 맡아 일할 수 있도록 지금 우리는 정말 우리 자신을 겸비하게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스가랴 3장의 계시를 통하여 오늘도 우리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보내고 계십니다. 아무리 더러운 옷을 입었을지라도 내 앞으로 나오라고그러면 내가 그 더러운 옷을 벗기고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고그리고 정한 관을 씌우며 너를 구원하리라고

오늘 스가랴 3장의 계시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속의 계획을 감사하면서 회개하며 주님께 마음을 헌신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은혜받을만한 때요 구원의 날인 지금 우리의 마음을 정결하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으시렵니까? 그래서 정한 관이 우리 머리에 씌워지도록, 하나님의 인이 우리 앞이마에 쳐지도록

스가랴서 3장에 나타난 계시의 이야기가 독자 여러분의 이야기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칼럼 - 인내의 기술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 (10:36).

 

맨발의 마라토너 비킬라 아베베는 1960년 로마 올림픽에서 세계 신기록으로 아프리카 최초 우승을 기록합니다. 그리고 1964년 도쿄 올림픽에 참가하여 올림픽 사상 첫 마라톤 2연패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웁니다

 

이후 아베베는 1968년 멕시코 올림픽에 출전하여 경기 초반 17킬로미터까지 무서운 속도로 치고 나가더니 갑자기 경기를 포기합니다. 대회직전 골절상을 당해 도저히 경기할 수 없었지만, 동료들의 페이스메이커로 참가하여 조국 에티오피아에 우승을 안긴 것입니다.

 

그리고 1년 후 아베베는 교통사고를 당해 하반신 마비가 되어 더는 달릴 수 없게 됩니다. 하지만 두 팔이 있기에 감사하다며 장애인 올림픽에 참가하여 양궁에서 금메달을 획득합니다.

 

그는나는 남과 경쟁하여 이기는 것보다 자기의 고통을 이겨내는 것을 언제나 생각한다. 고통과 괴로움에 지지 않고 마지막까지 달렸을 때 그것은 승리로 연결되었다고 말합니다. 아베베는 참고 견딘다는 것이 무엇이고 어떻게 하는 것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인내의 기술이 있었기 때문에 끊임없이 소망의 에너지를 만들어 낼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삶도 고난과 시련의 연속입니다. 예수님을 좇아 의로운 삶을 살기로 결단하는 순간부터 환란과 고통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 당연한지 모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인내의 중요성을 여러 번 강조합니다. 히브리서 10 36절은 우리에게 인내가 필요한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 약속을 받기 위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5 3~4절에 따르면 우리가 환란 중에서 즐거워하는 것은 환란을 통하여 인내를 낳고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을 알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고통과 어려움을 이기는 가장 효과적인 힘은 바로 인내입니다. 인내를 통해 우리는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되고, ( 1:4) 가장 복되고 주님의 자비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입니다. ( 5:11) 우리에게 비록 고난이 많다 하나 하나님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져 내실 것이므로 ( 34:19)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으로 인내하면 하나님의 자랑이 되는 기쁨의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살후 1:4)

 

시대의 징조 - 스페인 쓰레기 대란과 다가오는 세계 경제 위기

 

세계 경제는 계속 침체하고 있습니다.

 

스페인 실업률과 쓰레기 대란

 

유로존에서 독일과 프랑스 다음으로 경제 규모가 큰 스페인의 실업률은 계속 상승하고 있습니다. 2008 1월 실업률은 겨우 8.6%였습니다. 그러던 것이 2012 1월엔 실업률이 22.8%로 폭등했고, 2013 9월에는 26.6%를 기록하며 점점 악화되고 있습니다. 25세 이하 청년 실업률은 더 심각합니다. 스페인 25세 이하 청년 실업률은 56.5%입니다. 이런 숫자들이 의미하는 것은 유로존의 3대 경제 대국인 스페인의 경제가 침체를 넘어 대공황 수준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스페인은 작년 11월에 2주간 쓰레기 대란을 겪었습니다. 스페인 마드리드 시 당국은 계속되는 재정위기로 청소업무를 외주 용역에 맡겼습니다. 이후 3대 용역업체들이 비용절감을 위해 인력의 18% 1,130명을 해고하고, 남은 인력의 임금도 40%까지 삭감하려고 하자 환경미화원들이 총파업을 실시했습니다. 11 5일부터 11일 동안 지속한 파업으로 스페인은 쓰레기로 뒤덮였습니다. 아래 사진에서 보듯이 도시가 대형 쓰레기장으로 변해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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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파업으로 스페인 국민들뿐 아니라 스페인을 방문한 관광객들까지 큰 불편을 겪었습니다. 결국, 3대 용역업체들이 노조원 해고와 임금 삭감을 철회하기로 하면서 쓰레기 대란은 일단락됩니다. 그러나 스페인과 유로존의 경제는 점점 더 심각한 상황으로 가고 있습니다.

 

 

디트로이트와 파산위기의 미국 도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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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위기 문제는 스페인과 유로존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미국도 파산위기에 처한 도시들 때문에 큰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미국 자동차산업의 본산 미시간 주 디트로이트 시는 지난 7월 미국 지방자치단체 사상 최대 규모인 185억 달러(195000억 원)의 빚더미에 오르며 파산 보호를 신청했습니다.

자동차 산업으로 유명했던 디트로이트는 한때 미국에서 4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였으며, 1960년에는 미국 최고의 1인당 소득을 올렸던 도시입니다. 그런 디트로이트가 1960년대부터 자동차 제조 공장들이 해외로 이전되며 활력을 잃기 시작했습니다. 1950 180만 인구가 현재는 70만으로 줄어들었습니다. 지난 60년간 약 60% 이상의 인구가 디트로이트를 떠난 셈이죠. 뉴욕타임즈에 의하면 디트로이트에는 약 7만 개 이상의 건물들이 방치되고 있습니다

디트로이트의 약 3분의 1은 비었거나 방치되고 있으며, 317곳의 공원 중 210곳은 폐쇄되었고, 거리 가로등의 약 40%는 켜지지 않습니다. 예산 삭감으로 대부분의 디트로이트 경찰서는 하루 8시간만 문을 열고 있으며, 경찰력을 계속 줄이고 있습니다. 그런 이유로 경찰은 디트로이트에서 일어난 범죄의 10%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으며, 디트로이트의 범죄율은 뉴욕 범죄율보다 11배나 높습니다.

 

그러나 이런 절망적인 상황은 디트로이트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가 처음 중 한 곳일 수는 있지만, 결코 마지막이 아니다."

라는 디트로이트 시장의 말처럼 앞으로 파산을 신청할 미국의 지방 정부들은 많습니다. 필라델피아, 휴스턴, LA, 볼티모어, 마이애미, 시카고, 해리스버그, 스크랜턴, 뉴욕 등의 대도시들은 이미 거의 파산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이런 도시들은 공무원들의 임금을 극단적으로 삭감하고, 은퇴자들에게 약속한 연금을 대폭 삭감하지 않으면 더는 버틸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다가오는 짐승의 표 환난과 노아 홍수의 교훈

 

스페인과 미국 디트로이트의 경제 문제는 세계 경제위기를 심화시키고, 결국은 세계 경제 붕괴 사태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일들을 앞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일들에 대한 경고로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요?

 

성경 요한계시록 13장은 앞으로 짐승의 표 환난이 있을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 짐승의 표 환난은 현 경제시스템의 붕괴 후에 있게 될 것이며, 전 세계의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게 될 것입니다. 경제 제재를 통한 짐승의 표가 모든 사람에게 강요될 것입니다. 그때에 준비되지 않은 사람들은 굶어 죽지 않기 위해 짐승의 표를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3장에 예언된 짐승의 표 환난에 대해 잘 모르십니까?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현 경제 상황과 성경 말씀을 통해 확인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진리를 찾는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십시오.

성령님은 진실한 마음으로 진리를 찾는 모든 사람을 인도하십니다. 혹시 이 글을 읽는 분 중에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성경 예언을 공부하는 일을 미루고자 하는 분들이 있습니까?

 

노아의 시대에도 홍수가 온다는 경고를 듣고 반신반의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들은 비가 내릴 때에야 비로소 노아가 옳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노아의 방주로 가서 문을 두드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 늦었습니다. 노아 방주의 문은 비가 내리기 칠 일 전에 닫혔고, 뒤늦게 후회한 사람들을 위해 열리지 않았습니다

짐승의 표 환난도 그러할 것입니다. 수 차례 경고된 짐승의 표가 사람들에게 실제로 강요될 때는 준비하기에 너무 늦은 때가 될 것입니다. 마지막 성경 예언들이 성취되려는 이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알고 준비된 자로 설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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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

 

진리를 알기 위해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기 원하는 독자님을 성령님께서 함께하셔서 인도해주시길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짐승의 표가 무엇인지 또 우리가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에 대해 더 알기 원하시는 분은 유튜브에서 아래 두 설교 말씀을 찾아서 확인해보시길 바랍니다.

 

[성경 말씀] 401. 짐승의 표에서 자유한 자들

[성경의 예언들] 21회 짐승의 표 666, 베리칩?

 

 

강병국 목사 - 하늘 나그네

 

“나그네 나그네 하늘 나그네, 좁은 길 마다 않고 걸어가시는 나그네 나그네 하늘 나그네.

한 고개 넘고서 허리를 펴고 두 고개 넘고서 심호흡하는 나그네 나그네 하늘 나그네.

위에서 나리는 만나를 먹고 조용히 맺혀진 이슬 축이며 본향 찾아가시는 하늘 나그네.

세상을 등지고 위를 향하여 꾸준히 걸어 간다. 하늘 나그네.

나그네 나그네 하늘 나그네 좁은 길 마다 않고 걸어가시는 나그네 나그네 하늘 나그네.

 

본향 찾아가는 마음으로 몇 자 적어 보았습니다.

 

나그네에게는 서러움이 있습니다. 자기 집과 자기 땅, 자기 동네가 없다는 것입니다. 떠돌이 신세이지요. 참 힘들고 고된 생애입니다. 한 곳에 머물러 말뚝을 박을 수 없기에, 늘 외로움과 불편함을 감내해야 합니다. 그러나 나그네에게도 소망이 있습니다. 목적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본향을 향하는 일편단심은 모든 괴로움과 고생을 무릅쓰고 한곳을 향하여만 걸어가게 만듭니다.

 

본향에 이르기만 하면 됩니다. 지금까지의 모든 풍파와 고난을 이길 수 있도록 삶의 목적을 주어 온 그곳 말입니다. 그곳에 가면 더는 나그네가 아닙니다. 더 이상 떠돌아 다닐 필요도 없습니다. 나를 기다려 주는 이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를 반기며 영접하여 줄 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러한 자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이 그곳을 나의 돌아갈 본향으로 만들어 주고 있습니다. 거기가 아름답고 좋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내가 함께 살 수 있는 영원한 벗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곳이 너무나도 그립습니다. 나와 대화가 통하고 마음이 맞는 이들과 영원히 함께 살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모르지요. 그래서 나는 오늘도 본향 찾아 길가는 나그네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약속해 주신 가나안 땅에 거하면서도 여전히 자기를 본향 찾는 나그네라고 불렀던 모양입니다. 가나안 땅도 여전히 이 세상에 있는 땅이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는 이러한 나그네들에 대한 눈물겨운 말씀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서 118~26

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9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10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

11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앎이라

12 이러므로 죽은 자와 방불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이 생육하였느니라

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14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15 저희가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16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17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18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19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20 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오는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으며

21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22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의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해골을 위하여 명하였으며

23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하였으며

24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25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2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 우리가 돌아가 안겨야 할 품속, 우리가 가장 사모하는 분으로 여기며 살기에 하나님께서 당신이 우리의 하나님이라고 일컬음 받으시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능욕 받는 것을 이 세상의 보화나 죄악의 낙보다 더 좋아했던 모세, 그야말로 진정한 나그네의 표상입니다.

 

오늘도 나는 혼자 다음의 찬송가를 흥얼거려 봅니다.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나아갑니다. 내 뜻과 정성 모아서 날마다 기도합니다.

내 주여 내 맘 붙드사 그곳에 있게 하소서. 그곳은 빛과 사랑이 언제나 넘치옵니다.

 

 

시 - 가장 힘든 때

 

가장 힘든 때는 가난한 때가 아니다

사람들에게 버림을 당한 때가 아니다

세상이 외롭게 느껴질 때가 아니다

돈 없고 무식하다고 남에게 조롱받는 때가 아니다

가장 힘든 때는 내 마음이 하나님을 볼 수 없게 되는 때이다

내 영혼이 갈급하는 분의 얼굴이

의심의 구름으로 가려져 있는 때이다

 

그때에는 쌀 창고가 넘쳐 있어도 내게 기쁨이 없다

내가 사람의 존경을 받더라도 만족함이 없다

태양이 머리 위를 환하게 비추어도

나는 홀로 캄캄한 밤을 걸어가는 심정이다

 

내가 사랑하는 분, 내가 그리워하는 분,

그분을 보지 못하고, 만지지 못하고, 느끼지 못할 때야말로

내 인생에서 가장 힘겨운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