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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4부_ 최후의 결정을 내렸던 사람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세상의 어떤 것보다 그리고 인간이 가진 어떤 소중한 것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과 진리를 순종하는 길에 걸림돌이 되는 것을 과감하게 포기하고 그분을 따르며 충성하기를 원하신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주신 선물은 우주의 모든 것보다 귀한 최고의 것을 포기하고 희생하신 것이었기 때문이다. 바로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주신 것이다. 그것은 하늘이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었으며 그것은 하늘이 내릴 수 있는 최고의 포기와 최후의 결정이었다. 성경을 읽다 보면 우리의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대목이 나온다. 그 이야기는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하나님의 계명과 뜻에 순종하고 생애를 개혁하기 위하여, 또한 하나님의 사업의 전진을 위하여 그들의 생애에서 최고의 것을 포기하는 최후의 결정을 내린 이들의 이야기이다. 그들이 내린 결정은 얼마나 어려운 것이었으며 얼마나 그들의 뼈를 깎는 아픔을 감수한 최후의 결정이었을까? 그 이야기는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 에스라의 귀환과 사역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오랫동안 고생을 하던 유대 백성들이 고국으로 돌아갈 기회와 훼파되었던 성전 재건축과 회복의 시간이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에 따라 다가오고 있었다. 그 귀중한 사명을 위하여 택하심을 입고 헌신한 사람 중에 에스라 선지자가 있었다. 에스라는 하나님의 율법과 영적인 지식에 있어서 뛰어난 신실한 선지자였을 뿐 아니라 당시 메대 페르시아의 학문에도 뛰어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에스라는 당시 바사의 왕이었던 아닥사스다에게 신임을 받고 있었는데, 평소 에스라를 신임하고 있던 아닥사스다 왕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기 원하는 자라면 누구든지 데리고 갈 수 있도록 에스라에게 허락하였고, 또한 성전의 회복에 필요한 재정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제사장들과 레위인들과 성전 봉사자들에 대한 각종 세금을 면제시켜 줌과 동시에 팔레스틴 지방의 행정관과 사법관들을 임명할 수 있는 권한까지 에스라에게 부여하였다(스 7:13,15-26 참조).

에스라의 귀환은 오랫동안 어려운 형편 아래 수고한 많은 사람의 마음에 용기와 희망을 가져다주었다. 70년 전 스룹바벨과 여호수아의 지도하에 최초의 유랑인의 무리가 돌아온 이래 많은 일이 이루어졌다. 성전은 완공되었고 성벽도 일부분은 보수되었지만 아직도 성전 건축을 위해 할 일들이 많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시급한 것은 백성들의 쇠퇴한 영적 상태였다. 돌아온 에스라에게 들려진, 유대 백성들의 영적인 쇠퇴, 특히 지도자들인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의 죄악과 배도에 대한 소식은 에스라의 마음을 찢어지게 하였다. 에스라는 백성들에게 회개와 개혁을 호소하며 하나님의 율법을 열심히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에스라가 가는 곳마다 회개와 부흥이 일어났다.

 

2)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의 범죄

첫번째 무리로 예루살렘에 돌아왔던 사람들 중에는 여생을 하나님께 바쳐 충성을 다한 사람들이 많았으나 그다음 세대 중 상당한 수는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지식과 신성성을 잃어버렸다. 책임을 맡은 사람들, 곧 하나님의 율법을 가르치고 백성들을 영적으로 인도해야 할 제사장들과 레위인들까지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며 공공연하게 배도하고 있었다. 그 당시 고국에 희망을 걸고 돌아온 유대인들의 생활은 멍들어 있었다. 처음에 그들은 성전 건축을 위해 희생하고 힘을 다하여 헌신했지만 계속되는 적들의 방해와 시련과 가난으로 낙심하게 되었다. 특히 지도자층인 제사장들이나 부자들의 횡포가 시작되어 그들의 삶과 경제 상태는 그들의 영적인 상태만큼이나 최악의 상황에 처해 있었다. 돈이 있고 권력이 있는 자들은 가난한 자들을 압박하고 학대하였으며 가난한 자들에게 돈이나 곡식을 빌려주고는 매우 비싼 이자를 요구하거나 빚을 갚지 못하면 그들의 밭과 땅을 빼앗고 나중에는 가난한 동족의 자녀들까지 빼앗아 가 노예로 삼았다. 또한 안식일을 지키지 않음은 물론 깊은 우상숭배에까지 빠져 있었다. 또한 자녀들은 히브리 방언을 몰라서 에스라가 율법을 가르치고 설교할 때에 성경을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더 심각한 죄악은 이방인과의 잡혼이었다. 하나님의 가장 직접적인 명령을 거역하고 이방인 여자를 아내로 삼은 것이었다. 그것은 그들을 우상 숭배로 몰아갔다.

“방백들이 내게 (에스라에게) 나아와 가로되, 이스라엘 백성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이 땅 백성과 떠나지 아니하고, 가나안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여부스 사람과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과 애굽 사람과 아모리 사람의 가증한 일을 행하여, 그들의 딸을 취하여 아내와 며느리를 삼아 거룩한 자손으로 이방 족속과 서로 섞이게 하는데 방백들과 두목들이 이 죄에 더욱 으뜸이 되었다 하는지라”(스 9:1,2).

그런데 정말 기막히게도 이 일에 앞장을 선 것은 대제사장이었다. 곧 대제사장 엘리아십의 손자가 산발랏의 딸과 결혼하여 산발랏의 사위가 된 것이었다(느 13:28절 참조). 또한 악한 도비야는 제사장 스가냐의 사위가 되었다. 산발랏과 도비야가 누구인가? 산발랏과 도비야는 성전 건축을 방해하고 귀환한 유대인들을 괴롭히고 느헤미야를 죽이려고 음모한 이방인 족장과 사마리아 족속의 대표인물이 아닌가? 그에 더하여 대제사장은 성전의 방 중 십일조와 헌물을 두는 곳에 도비야를 거하게 하였고, 하나님의 성물은 중간에서 이방인 족속들에게 횡령되고 있었다. 그러자 백성들은 제사장들의 부패상을 보고 헌물을 내지 않았다. 그야말로 성전과 성소제도는 이방인들과의 동맹과 잡혼으로 황폐되었고, 지도자들의 나태함과 타락은 백성들의 영적인 배도를 부추기고 있었다.

 

3) 에스라의 통곡과 백성들의 회개

“내(에스라)가 이 일을 듣고 속옷과 겉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으며 기가 막혀 앉으니, 이에 이스라엘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떠는 자가…다 내게로 모여 오더라” (스 9:3,4).

“우리가 어찌 다시 주의 계명을 거역하고 이 가증한 일을 행하는 족속들과 연혼하오리이까?”(스 9:14).

에스라는 이스라엘의 배도가 그들이 이방 족속과 섞임으로 더 심해지고 대규모로 나타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방 나라에 끌려가 어렵게 배운 과거의 교훈에도 불구하고 지도자들이 다시 율법들을 공공연하게 범한 사실을 알았을 때, 그리고 다시 그들을 고국으로 돌아오게 하신 하나님의 선하심에도 불구하고 배은망덕한 그들의 모습을 보았을 때, 에스라의 마음은 의분과 슬픔으로 가득 찼다. 에스라는 엎드려 일어날 줄을 모르며 계속 하나님께 회개의 기도를 드렸다. 이처럼 슬픔과 통회로 하나님 앞에서 간절한 중보 기도를 드리는 에스라의 모습은 유다 백성들의 양심을 일깨워서 그들로 하여금 회개에 동참하도록 만들었다. 에스라 10장 1절을 보면 “에스라가 하나님의 성전 앞에 엎드려 울며 기도하여 죄를 자복할 때에 많은 백성이 크게 통곡하매, 이스라엘 중에서 백성의 남녀와 어린 아이의 큰 무리가 그 앞에 모인지라”고 기록되어 있다. 범죄하였던 자 중 많은 사람은 깊은 감동을 받았다. “백성이 심히 통곡하”(스 10:1)였다. 그들은 죄의 흉악함과 죄가 얼마나 하나님과 그들 사이에 큰 장벽이 되는가를 깨닫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자신과 자신의 죄들을 밉게 보기 시작하였으며 하나님을 아프게 한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였다. 백성들의 참회는 일시적인 감정으로 끝나지 않았으며 참회에 따른 열매를 맺었다.

 

4) 최후로 내린 결정과 개혁

에스라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일어난 회개와 부흥의 역사는, 진정한 성령의 역사가 무엇인지, 또 사람이 성령의 역사에 진정으로 굴복했을 때에 어떤 놀라운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예이다. 우리는 그 결과를 자신들의 죄를 참으로 회개하고 통회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내렸던 최후의 결정에서 보게 되는데, 그것은 육신의 성정을 가진 인간으로서 내리기 매우 힘든 결정이었다. 그러나 자신이 걸어온 죄악과 반역의 과거에 대해 애통하며 완전한 회개의 열매를 맺기 원하는 헌신과 충성의 표로서 그들은 이 힘든 일을 수행했다. 그 일이 무엇이었는가?

모든 백성이 모여 하나님의 율법을 어긴 자신들의 죄와 행실을 슬퍼하고 있을 때에, 스가냐라는 사람이 일어나 그들의 죄를 자복하며 심각한 고백과 함께 그들의 결정과 헌신을 표했다. 그는 자복하기를 “우리가 우리 하나님께 범죄하여 이 땅 이방 여자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았으나 이스라엘에게 아직도 소망이 있나니, 곧 내 주의 교훈을 따르며 우리 하나님의 명령을 떨며 준행하는 자의 가르침을 따라, 이 모든 아내와 그들의 소생을 다 내보내기로 우리 하나님과 언약을 세우고 율법대로 행할 것이라”(스 10:2-4)고 하였다.

“제사장 에스라가 일어서서 저희에게 이르되 너희가 범죄하여 이방 여자로 아내를 삼아 이스라엘의 죄를 더하게 하였으니, 이제 너희 열조의 하나님 앞에서 죄를 자복하고 그 뜻대로 행하여 이 땅족속들과 이방 여인을 끊어 버리라. 회 무리가 큰 소리로 대답하여 가로되 당신의 말씀대로 우리가 마땅히 행할 것이니이다”(스 10:10-12).

그들이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최후로 내린 결정이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그들의 이방인 아내와 자식들을 내어보내는 일이었다. 그들과 결별하고 이별하는 것이었다. 과연 그 일이 쉬운 일이었으며 가능한 일이었을까?

 

5) 마지막 포기와 쓰라린 이별(?)

진정한 회개에는 철저한 개혁이 따른다. 개혁이 따르지 않는 회개는 참된 회개가 아니다. 그들은 철저하게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충성된 사람이 되기로 결심하였다. 그들이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에 굴복하고 진심으로 회개했을 때,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과 율법을 직접적으로 어긴 죄, 곧 이방인과의 잡혼을 회개하고 끊어버리기로 결심하였다. 이제 그들은 마지막 포기와 최후의 결정으로써 그들의 이방인 아내들과 자식들을 내어 보내고 결별할 것을 결정하였다. 비록 이방인이었지만 오랫동안 정들어 살던 아내를 내보내는 일이 쉬운 일이었을까? 더구나 자신의 생명 같은 자식을 내어보내는 일이 쉬운 결정이었을까?

혹시 이 일이 잔인하고 냉정하다고 생각되는가? 꼭 그렇게까지 해야 했었느냐고 반문하고 싶은가? 여기서 이방인 아내와 자식들을 내어 버린다는 것이 무슨 의미였는가? 그들이 이방인 여인과 결혼했다는 의미는 그들이 이방의 풍습을 받아들이고 이방인과 똑같이 살고 있었다는 의미이다. 즉, 이방인들이 섬기고 행하는 우상숭배의 의식을 그대로 행하고 그들과 함께 우상숭배를 하며 살고 있었다는 의미이다. 혹은 직접적인 우상숭배를 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그 우상숭배를 집 안과 가정 안에 두었다는 말이다. 이제 그들은 그들의 생애의 중심에 깊이 자리 잡고 있던 우상을 제거하는 일을 시작했다. 곧 현시대의 영적인 의미로 재해석하자면, 모든 죄를 회개하고 생애 가운데 자리잡고 있는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중요하게 여기는 모든 우상을 제거하며, 새로운 삶으로 거듭나는 개혁과 성화의 길을 걸어가기로 하나님 앞에 온전히 헌신한 것이었다.

쓰라린 이별로 인해 피나는 마음의 고통이 수반되는 일이었을지라도 그들은 이제 하나님의 뜻과 계명을 어기던 그들의 생애를 회개하고 과감하게 개혁하기 위하여 그들의 사랑하는 이방인 아내와 자식들을 떠나 보냈다. 얼마나 위대한 최후의 결정이었는가! 얼마나 남김 없는 최후의 포기였는가! 그리고그것은 얼마나 예수님의 말씀을 상기하게 하는가!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마 7:37). 그들은 그들의 회개와 개혁을 그렇게 증명하여야 했다. 그들은 하나님을 위한 그들의 충성을 그렇게 확실하게 증명하여야 했다.

오늘날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충성은 어떤가? 혹시 우리의 남편이나 아내나 자식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그리고 하나님의 진리에 충성하는 일에 방해가 되거나 거침 돌이 될 때에, 하나님을 위해 모든 것을 과감하게 포기하고 버릴 만큼 우리의 믿음이 신실한가? 우리의 혈연이나 가족이 혹시 우상이 되고 있지 않은가? 하나님 앞에서 죄를 자복하고 그 뜻대로 행하기로 결심한 그들은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과 다 헤어짐으로 순종했다. 하나님께 마지막 남은 모든 것, 최후의 한 가지까지 드리며 충성하라는 이 말씀은 얼마나 엄숙한 초청인가? 얼마나 진지한 명령인가? 하나님께서는 이 마지막 시대에 충성된 사람들을 찾고 계신다. 곧 이세상의 모든 것보다, 재물보다, 음식보다, 평판과 명예보다, 가족이나 혈연보다 더 하나님을 사랑하고 진리를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바칠 만한 믿음과 충성의 사람을 찾고 계신다. 왜냐하면 마지막 때에 통과해야 할 환난은 그런 충성과 믿음이 없으면 통과할 수 없는 개국 이래로 없던 환난, 우리의 믿음을 송두리째 흔들 큰 환난이기 때문이다.

여자의 남은 무리인 십사만 사천의 특징 중 하나가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것이다. 그 의미는 하나님께서 어떤 상황에 처하게 하시든지, 어떤 것을 포기하라고 하시든지 하나님께 충성하고 순종하며 따라가는 것이다. 하나님께 대한 당신의 사랑은 어디까지인가? 하나님께 대한 당신의 충성은 어디까지인가? 모든 것을 다 버리고 포기하면서 따라갈 만큼 하나님께 대한 당신의 사랑은 강한가?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충성의 요구를 깊이 생각해 보면서,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치면서 충실하셨던 주님께 우리의 모든 것을 바치면서 충성하자!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로 이 일을 넉넉히 이루게 하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