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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하늘로_ 종교개혁의 샛별 존 위클리프

 

14세기 교회는 신앙의 문제보다는 정치나 경제적인 관심사들이 우선시 되었고 물질만능주의로 사치와 방탕이 절정을 이루어 부패가 만연했고 거짓교리와 관행들이 날로 증가했으며 성경의 가르침들은 무시되었다. 이러한 때에 16세기 종교개혁자들에 앞서서 교회의 진정한 개혁을 위하여 온 생애를 다 바친 사람이 바로 종교개혁의 샛별로 불리워지고 있는 존 위클리프이다.

그는 1329년 영국의 북부지방 요크셔에서 출생하였다. 16세 쯤 당대 최고의 명문인 옥스퍼드대학에서 공부하였는데 대학시절 이미 놀라운 재능과 학식 뿐 아니라 열성있는 신앙인으로도 명성이 높았다. 그러나 철학이나 교회의 가르침에서 얻지 못했던 구원의 계획을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서 깨닫고 그리스도만이 인류의 유일한 중보자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자신을 그리스도 사업에 바쳐 하나님의 말씀에서 소외된 불쌍한 영혼들을 위해 자기가 발견한 진리를 전파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모든 합법적인 통치권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만 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지상의 통치정신도 섬김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섬기기 위해서 오신 그리스도의 모본을 따라야 한다고 했다. 1366년 영국 왕실의 전속 신부가 되었는데 이것이 교황제도의 실정을 직접 파악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당시 교황들은 교회의 순결성과 천부적인 역할 감당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고, 자신들의 세속적인 소욕이나 야심이 중대 관심사였다. 그들의 훌륭한 저택과 사치스러운 식탁은 백성들의 빈곤을 더욱 극심하게 했다. 로마교회는 온갖 폭정을 일삼으며 그리스도의 겸손과 가난을 버리고 잔인하고 가증한 생활을 추구했다. 수많은 의식행위와 속박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구속을 받아 자유함을 얻은 사람들의 양심이 위협과 유혹을 받았다. 이런 상황에 위클리프는 로마교회의 권력남용을 공격하고 교황의 권위를 제한하려 했다. 특히 큰 악폐였던 수도원 제도와 수도승들의 나태와 시주행위 그리고 종교적 진리를 왜곡하는 사실 등을 들어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그는 우상(형상)과 성자의 유품들을 숭배하는 것을 어리석은 짓으로 비판하였으며 면죄부 판매, 죽은 자를 위한 미사, 행진과 성지순례 등을 부정하였다. 그의 저서 「시민 통치에 대해」에서 ‘교회의 유일한 머리는 그리스도이며 사랑의 정신으로 다스리도록 예정된 사람이 아니라면 교황은 적그리스도의 대리자’라고 선언하여 교황을 적그리스도로 제시하며 교황의 폐지를 부르짖었다. 그것은 중세 로마교회에 대한 치명적인 도전이었다. 사실 그는 고의적으로 로마교회에 반대하고자 하지 않았다. 그러나 진리에 투신하게 되자 필연적으로 거짓과 싸우지 않을 수 없었다. 로마교황권의 오류가 분명해질수록 더욱 열렬하게 성경의 교훈을 설명하였다. 그는 로마교가 사람의 유전을 받아들이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는 것을 보고 성경을 저버린 신부들을 담대하게 질책하고 성경을 백성들에게 돌려줄 것과 성경의 권위를 교회 안에서 다시 한 번 확립시킬 것을 요구하였다. 그는 일반백성들의 무지와 영적인 맹목성을 불쌍히 여겨 롤라드라는 가난한 사제 전도단을 조직하여 각처로 파송하여 일반백성들에게 자신의 가르침을 전하게 했다. 그들은 국내 뿐 아니라 외국에까지도 가서 그의 가르침을 전파했다. 그들 사역의 결과로 많은 사람들이 신자가 되었다. 그러나 영국의 국왕들과 로마 교황은 그들을 이단으로 정죄하였으며, 영국 역사상 최초로 복음의 사도들에 대하여 화형 선고를 내렸다. 순교자가 계속하여 뒤를 이었다.

당시 로마교회는 벌게이트역이라고 불리는 라틴어 성경만을 사용하였기에 일반인들은 성경을 읽을 수 없었다. 그것을 안타깝게 여긴 위클리프는 그들에게 직접 그리스도를 만나게 해 주고자 영어로 성경번역 할 것을 결심하게 된다. 그는 오류와 미신의 쇠사슬을 끊어버리고 오랫동안 속박되어 있는 사람들이 자유를 얻기를 원했다. 당시는 인쇄술이 발달되지 않아 성경을 일일이 손으로 필사하였다. 보통 한 권의 성경을 필사하는 데는 열 달 정도 걸렸다. 드디어 최초의 영어성경이 나오게 되어 결코 꺼질 수 없는 빛을 영국 국민의 손에 쥐어 주었다. 그는 교회의 참된 권위는 교황을 통하여 말하고 있는 교회가 아니라, 성경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며 성경이 하나님의 뜻의 완전한 계시인 동시에, 성령께서 성경의 유일한 해석자이므로 모든 사람들은 성경의 가르침을 연구하여 스스로 자기의 본분을 깨달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렇게 하여 그는 사람들의 마음을 교황과 로마교회로부터 성경 말씀으로 돌이켰다. 성경은 그 가격도 만만치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양의 성경이 필사되자 로마교회 지도자들은 당황하였고 영국 국회는 법령을 정하여 번역했다는 이유로 그를 이단으로 정죄하였다. 그들은 음모를 꾸며 세 번이나 위클리프를 법정에 소환하였다. 위클리프는 국회에서 두려움 없이 교직 정치를 비난하고 무서운 악폐들을 혁신할 것을 요구하며 담대하게 자신의 교리를 확신있게 주장하고 자기를 박해하는 자들의 비난을 반박하였다. “당신들은 이익을 얻기 위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상품화하고자 하는가? 그대들은 누구와 싸우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지금 진리와 더불어 싸우고 있는 것을 아는가?” 법정에서 그를 막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찌하여 너희들은 순교자의 면류관을 멀리서 찾고 있는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저 교만한 주교들에게 전하라. 그리하면 순교는 틀림없이 오고 말 것이다. 살아서 침묵을 지키고 있다는 것은 결단코 안 될 말이다. 탄압하려거든 해보라.” 이런 존 위클리프를 교황청에서 얼마나 미워했는지 그가 세상을 떠난지 40년 후에 그의 유골을 다시 파내어 공중 앞에서 불사르는 악행을 저질렀다. 그리고 그 재를 근처 스위프트 강에 던져 버렸다. 이에 대해 한 저술가는 말했다. “그 재는 스위프트 강물을 따라 에이번으로, 에이번에서 세베른 강으로, 세베른 강에서 영국해협으로 영국해협은 대양으로 옮겨주었다. 그리하여 위클리프의 재는 오늘날 온 세상에 퍼져있는 그의 교리를 상징하고 있다.” 이처럼 종교개혁이 시작되기 약 150년 전에, 그의 사상은 위대한 종교 개혁의 밑거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