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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회사 Episode_ 금욕주의 선동자와 그 히스테리의 영향

 

금욕주의적이고 엄격한 것으로 특징 지워진 4세기 교회 제도가 바로 제롬(A.D. 340~420)에게서 체험되었다. 그는 자신의 삶과 대화를 통해서 그 제도의 가장 나쁘고 불쾌한 특성들을 드러내 보여 주었다. 음침함, 신랄함, 질투, 불관용, 신성한 의무를 행하는 데 있어서 자신의 표준에 도달하지 못하는 모든 것에 대한 불만 등, 이 모든 것이 그에게는 습관화되어 있었다. 이런 사실은 거의 모든 그의 글과 말과 행동에서 무심코 드러났다. 그의 가장 큰 결점 중에는 비판적이고 흠잡기 좋아하는 정신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의 이 같은 정신 때문에 그 시대에 가장 훌륭한 사람들까지도 그의 책망을 피해가지 못했다. 라틴 벌게이트판 성경(5세기)을 편집한 이 사람의 까다로운 기질과 그의 입에서 나오는 모진 독설은 제롬이 4세기 모든 논객 중 가장 신랄하고 가혹한 인물로 알려지게 한 이유에 포함되었다.

제롬은 그의 친구 폴리누스가 금욕주의를 따르기 위해 견뎌낸 모든 굴종과 고난을 만족스럽게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즉시로 그의 재산을 모두 바치라는 힐책의 요구를 했다. 또한, 그 당시 국가와 연합하지 않은 교회들의 새 지도자요 자신의 인생을 올바른 초기 사본들을 수집하는 일과 성경을 배포하는 일, 복음 전단들과 책들을 쓰기 위해 필기자들을 고용하는 일에 혼신을 바친 왈덴스인 비질란티우스에 대하여 제롬은 국가의 손에 넘겨서 유배나 사형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신실한 왈덴스인들의 지도자 비질란티우스에 대해 제롬은 “비열한 놈은 혀가 잘리든지, 아니면 미치광이처럼 대접을 받아야 한다”고 기록하였다.

 

우리는 금욕주의 히스테리의 영향이 얼마나 비도덕적이었는지를 어거스틴(A.D. 354~430)에게서 일어난 변화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 저명한 저술가(아마도 그는 카톨릭 교부들 중 교황권에 의해 가장 칭송받는 인물일 것이다)는 제롬의 견해들을 받아들이라는 대중의 압력을 받았으며, 그 또한 제롬과 서신을 왕래하는 중에 있었다. 박해 정책에 대한 그의 완벽한 공헌에 대해 림보르는 상당히 길게 설명하였다. 어거스틴은 북아프리카에서 주교의 자리에 있으면서 교황권에 치명적인 무기 하나를 선사하였다. 그것은 ‘강제 구금’이라는 괴물 같은 교리를 고안해 낸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그는 종교재판소의 기초를 놓았다. 헬라 철학에 도취하여 있던 그는 그 철학의 정신이 자신의 영혼에 엄청난 불길을 지폈다고 외쳐댔다. 어거스틴은 9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마니교에 빠져 있었다. 이 종교는 정교 연합을 가르치며, 주일 중 첫째 날 준수를 존귀하게 여기는 종교였다. 어거스틴은 왜 교회의 교리들과 관습들이 무력으로 강제되어야만 하는지에 대한 많은 이유를 발견하였다. ‘강제 구금’ 교리는 국가에 의해서 강요된 예배 형태를 거부했다는 이유만으로 수백만에 이르는 사람들을 죽음에 이르게 하였다. 이 외에도 어거스틴은 당시 순수한 복음주의 브리튼(대영제국)의 섬들을 이교적인 교리로 전복시키고자 협박하고 세상 왕권을 이용해 무너뜨리고자 하였으며, 운명론 교리를 통해 오늘날 기독교에 엄청난 해를 입혔다. 어거스틴은 광야 교회의 으뜸가는 대적인데도 오늘날 그는 성자라 칭함을 받고 있을 만큼 기독교는 무지 속에 그의 이교적인 교리를 받아들이고 있다.

이 이교의 관습에 반대한 사람들을 독자들은 아는가? 그들의 투쟁을 다음 호에서 살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