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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회사 Episode_ 교황의 방한과 임진왜란의 배후 예수회

 

1547년 7월, 일본 큐슈에 상륙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Francisco Xavier, 예수회 창설 6인 중 1명)의 전도를 받고 로마 카톨릭교를 허용한 일본 최고 지배자였던 오다 노부나가, 그의 후계자로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예수회 신부들을 만나 명나라와 조선을 정복하여 전역에 교회당을 세우고 그들 백성을 천주교인으로 만들겠다고 호언장담하며 1592년 임진왜란을 일으켰다.

교황 로마 카톨릭교가 처음 우리나라 땅을 찾은 것은 치밀한 조직력을 갖춘 사탄의 검은 군대 예수회 수사들로 이루어진 침략자로서였다. 임진왜란 장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아우구스티누스)는 로마 카톨릭 신도들로 조직된 그리스도단이라는 군단을 이끌었으며, 그 침략군단은 십자가가 새겨진 깃발을 앞세우고, 세스페데스가 이끄는 예수회 소속 사제들이 검은 사제복과 로만컬러를 하고 뒤따랐다. 이 사제들은 조선 사람을 잔혹하게 살육한 자들의 고해성사를 받고 성수를 뿌리며 조선 침략 행렬에 가담했다.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이 2차 전쟁에서 함락되면서 6만 명의 민간인들이 이 무자비한 일본 십자군들에 의해 창고에 갇혀서 화형을 당했다. 임진왜란으로 조선인 5만 명이 사로잡혀 노예가 되어 팔려갔고, 그들 중 7000명의 카톨릭 개종자들이 일본에서 나왔다. 아마도 이순신 장군이 아니었더라면 현재 한국의 국교는 온갖 미신이 뒤섞인 바벨론 종교 로마 카톨릭교가 되었을지 모른다.

교황 로마 카톨릭의 아시아 선교의 첫발은 예수회 창설 멤버 중 한 사람으로 스페인 귀족 출신인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내디뎠다. 그는 총포를 선물하며 인도와 일본 포교에 평생을 바쳐 포교사에 뚜렷한 발자국을 남기며 카톨릭의 성인 반열에 올랐다. 하비에르라는 이름을 가진 성당은 스페인은 물론 일본과 동양 포교의 전진기지였던 말레이시아 말라카, 중국의 상하이와 마카오에도 세워졌다. 한국에는 1963년 충북 수안보에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당이 지어졌다. 아시아의 한국에 첫발을 디딘 예수회 사제 프란치스코 교황의 즉위명도 하비에르의 이름을 딴 것이다.

하비에르가 죽은 해 태어난 중국의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의 선교는 이른바 문화 적응(cultural accommodation) 방식이었다. 서양의 진보된 과학 지식을 전달하는 대가로 선교의 편의를 얻어내려 했다. 마테오 리치의 후임 예수회 선교사인 아담 샬은 중국 연경의 남 천주교당에 머물며 병자호란 이후 인질로 끌려간 소현세자는 물론 사행길의 실학자들과 교류했다.

예수회는 한국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모교 서강대학교를 세웠다. 예수회 사제로 교황이 된 프란치스코가 대한민국의 중심이며,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의 동상이 서 있는 광화문 광장에서 1백만 명이 운집하여 모든 언론과 국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카톨릭 종교를 신봉하다 죽임을 당한 자들에 대한 시복 미사를 거행한 것은, 임진왜란 때 카톨릭 군대가 점령을 실패한 보복임과 동시에, 권력자들을 개종시켜 그들의 힘으로 한국인들을 교황의 종교 로마 카톨릭교로 전향하게 하려는 예수회식 선교전략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대한민국 정권의 지원을 받으며 종교행사를 한 광화문 대로는 차량이 오가고 시민들이 다니는 곳으로, 2002년 월드컵 당시 시민들이 응원을 위해 사용했지만, 종교적·정치적 행사에 사용된 적은 없는 집회하는 장소가 아니다. 이 대한민국의 중심 대로의 차량 통행을 막고, 전철 출입구 폐쇄와 공항을 방불하는 출입 검열을 하며, 전 국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시행한 시복 미사는 그동안 교황 프란치스코가 보여주길 좋아하는 청빈과 섬김의 쇼맨십과는 정 반대의 모습이었다.

한국의 중심으로서의 상징성을 가진 장소에서 한국 정치권의 환대와 함께 전 세계의 이목과 찬사를 받으며 왕들 중의 왕으로 자처하는 교황권에 대하며 성경은

“모든 민족이 그녀의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에 취하였고 땅의 왕들이 그녀와 더불어 음행하였으며, 또한 땅의 상인들도 그녀의 사치의 능력으로 인하여 치부하였”(계18:3)다고 예언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