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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회사_ 브리튼 섬 켄트 왕국에서의 교황 그레고리와 어거스틴의 로마교회식 선교

노텀브리아(Northumbria)는 로마 카톨릭을 믿다가 우상숭배에 빠지게 된 후에 다시 켈트교회에 의해 그리스도께 드려진 나라였다. 그러나 그 나라가 켈트교회에 의해 기독교화된 유일한 앵글로색슨 왕국은 아니었다. 사실 광야교회 1260년 기간의 전체 역사를 살펴볼 때, 우리는 로마 카톨릭을 계속 생존하도록 도운 것은 바로 교황권의 영토 안에 존재해 있던 광야교회였음을 알 수 있다. 이 광야교회가 항상 로마교회의 라이벌로 존재하였다. 광야교회가 어떤 지역들에서 제거되거나 파괴될 때에는 신속히 기독교의 표준들이 저속하게 떨어져 내리는 일들이 발생했다. 에섹스와 메르시아와 동 앙글리아와 켄트에서 그런 일들이 벌어졌다. 이 일에 대해서 잘 이해하고, 또한 잉글랜드를 복음화한 아이단과 그의 후계자들의 사역에 대해 바른 이해를 하기 위해서는 카톨릭의 어거스틴과 그와 함께한 40명의 수도사가 행한 일들에 대해 깊은 고찰이 필요하다. 그들이 로마에서 켄터베리로 온 것은 597년이었다. 교황 그레고리가 어거스틴에게 내린 명령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명령은 어거스틴이 카톨릭교도로서 이교도인 에텔베르트 왕의 아내가 된 베르타의 도움을 받아 켄트에 교황과 그의 수도사들을 위한 발판을 마련한 후에 그레고리가 어거스틴에게 내린 것이다.

“그레고리의 처음 의도는 에텔베르트 왕으로 하여금 우상 숭배를 위해 지어진 신전들을 모두 다 파괴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는 실제로 그 왕에게 그런 자신의 생각을 암시해 주었다. 하지만 그 일에 관해 심사숙고한 끝에 그레고리는 마음을 바꾸어 대수도원장 멜리투스 편에 한 서신을 급송했다. 이 서신에서 그는 만일 우상의 신전들이 잘 지어진 것들이면 그것을 파괴하지 말고, 오히려 그것을 살아계신 하느님의 성전으로 전환해야만 한다고 선언하였다. 이 일은 사람들이 익숙해져 있는 장소들로 그들을 모으는 일을 훨씬 더 쉽게 만들었다. 더 나아가 보통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혜택도 돌아가지 않는 우상들을 위한 축제들은 다른 것들인 교회를 봉헌한 기념일들이나 그 지역에 그들의 유물들이 보관된 성인들을 기념하기 위해 구별된 날로 대체되어야만 했다. 이런 날들에는 사람들이 교회의 주변에 정자를 짓고 그곳에서 축제 음식을 먹도록 가르침을 받아야만 했는데, 그렇게 해서 그들로 하여금 현세의 삶을 위해 주신 선물들에 관하여 모든 행복의 시여자께 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게 하기 위함이었다. 이처럼 그들에게 어느 정도의 관능적 즐거움을 허락함으로 그들을 더 쉽게 내적이고 영적인 면으로 이끌어 갈 수 있게 될 것이었다.”

다음은 카톨릭 추기경 역사학자 앨버트 헨리 뉴먼이 어거스틴이 사용한 방법에 관해 쓴 글이다.
“고행의 삶에 대한 과시, 가장된 기적들, 이 땅에서 얻을 유익들에 관한 약속들, 이런 것들을 통해 그들은 색슨족의 왕인 에텔베르트를 개종시키는 일에 성공하였다. 이 왕은 그를 추종하는 약 10,000명의 사람들과 함께 어떤 강에서 그 선교사들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그 왕과 교황 사이에 확고한 동맹을 맺은 후 이 선교사들은 그보다 훨씬 더 힘든 임무인 브리튼의 그리스도인들을 로마 카톨릭에 복종시키는 일을 위해 사역을 시작했다. 다른 어떤 방법도 통하지 않음을 알게 된 그들은 색슨 왕을 설득하여 그리스도인들을 대상으로 원정 전쟁을 벌이게 했다. 3,000명의 브리튼 그리스도인들이 동시에 살육당했다. 옛 브리튼의 신앙 방식을 고수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수 세기에 걸쳐서 독일 각지에서와 마찬가지로 웨일스와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에서도 모든 힘을 다하여 로마 카톨릭의 침입에 저항하였다. 이 같은 방식의 신앙을 하는 기독교가 이 땅에서 완전히 멸절된 적은 단 한 순간도 없을 것이다.”
어거스틴은 이미 복음이 전해진 지 오랜 브리튼의 모든 섬을 카톨릭으로 점령하기 위해 그곳 그리스도인들을 강제 개종하려고 권력들을 이용하였다. 그가 창안한 강제구금 교리를 통해 카톨릭은 강압적 종교 강요를 계속해 왔다. 그의 운명론과 강제구금 교리는 많은 프로테스탄트에 들어와 현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