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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부_ 부모와 자녀 관계 속에 그려진 하나님의 사랑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시 103:13).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계신 성부 하나님을 자비롭고 인자하시고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로 소개하시기를 좋아하셨다.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는 인간에 대해 가지신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기에 가장 적합한 관계이다. 부모가 자녀에 대해 가지는 사랑, 끊임없이 주어도 또 주고 싶고, 아무리 잘못해도 저절로 용서되고, 미운 짓을 해도 이쁘기만한 부모의 사랑은 아마 우리를 용서하시고 받아주시고 돌봐주시는 무조건적인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가장 잘 대표할 만한 것이 될 수 있으리라.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기도의 첫마디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시작한다. 예수님께서는 그분의 아버지를 우리의 아버지로 부르도록 가르치신다. 그분은 우리를 형제라 부르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다. 우리를 하나님의 가족으로 영접하고 싶은 마음이 너무나 간절하셔서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때 사용해야 하는 첫 번째 말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셨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사랑하시는 것처럼 우리도 사랑하신다는 용기와 위로로 가득 찬 놀라운 진리의 선언인 것이다.

1) 어떤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그 둘째가 아비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비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그 후 며칠이 못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눅 15:11-13).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를 확실하게 예증하시고 하늘 아버지의 크신 사랑을 강조하시기 위해, 인간이 최대한 이해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의 한 비유를 예화로 들어 말씀하시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묘사하셨다. 그것이 바로 그 유명한 탕자의 비유이다.
비유 속의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제재에 몹시 싫증이 났다. 그는 아버지가 자기의 자유를 구속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애로운 아버지의 사랑과 돌보심을 오해하고 집을 나가 마음대로 살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아버지에게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자기 몫으로 받게 될 유산을 지금 달라고 요구하였다. 그는 아버지를 돌아가신 분으로 간주하고 자신의 마음대로, 자신이 원하는 방식대로 살고 싶어 했던 것이다. 아버지는 슬퍼서 처음에는 아들을 만류했지만, 고집을 꺾을 수 없음을 알고 그에게 유산을 내주었다. 넉넉한 유산을 손에 걸머쥔 아들은 기쁨에 들떠 “먼 나라”로 갔다. 많은 돈과 자기 마음대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자유를 갖게 된 아들은 드디어 자기의 소원을 이루게 되었다고 몹시 기뻐하였다. 이제 아무도 그에게 주의나 조언을 주는 사람은 더 이상 없었다. 그는 세상에 나가 그의 욕망이 이끄는 대로 마음껏 쾌락과 방탕에 몸을 맡겼다. 악한 친구들을 사귀고 그들이 부추기는 대로 죄와 쾌락에 빠져 “허랑방탕하여 그 재물을 허비”하였다. 그의 귀중한 청춘은 정욕의 불꽃에서 소멸되고 젊음의 소중한 시간과 지력과 포부는 방종과 쾌락 속에서 쓰러져가고 있었다.

2) 회한과 절망 속에서

해가 석양에 뉘엿뉘엿 질 때, 정신없이 놀던 아이들은 문득 자신이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된 것을 느낀다. 정신없이 방탕하던 젊은이에게 갑자기 인생의 석양이 밀려왔다. 영원히 갈 것만 같던 쾌락과 방탕의 시간은 갑작스레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그의 수중에 있던 돈이 바닥나기 시작했다. 이제 장래를 설계할 줄 모르고 흥청거리던 그에게 남은 것은 빈곤과 가난과 궁핍뿐이었다. 설상가상으로 그 나라에 큰 흉년이 들자 그는 끼니를 잇는 일에도 어려움을 겪게 되어 결국 돼지를 치는 일까지 하게 되었다. 유대인에게는 그 일이 몹시 천한 직업이었다. 돼지 외에는 다른 아무 친구도 없는 쓸쓸하고 흉년이 든 그 지방에서 그는 땅 위에 홀로 앉아 짐승이 먹는 팥 껍질로 배를 채우고 있었다. 그가 잘살 때 그의 곁에 몰려와서 그의 돈으로 먹고 마시며 즐거워하던 친구들 중에 곁에 남아 있는 사람은 이제 아무도 없었다. 그가 허랑방탕하며 즐기던 오락과 세상의 기쁨은 어디로 가 버렸는가? 그는 전에 자기의 양심을 달래고 감각을 마비시키면서 스스로 행복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돈도 다 떨어지고, 배도 고프고 자만심은 땅에 떨어져, 한때 자신의 자유를 뽐내던 그는 이제 자신이 처참한 노예가 된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를 매혹하던 찬란하고 번쩍거리던 세상의 영화는 다 사라져 버리고 이제 그는 속박의 쇠사슬의 무게에 눌리게 되었다.

여기에 묘사된 탕자의 형편은 죄인의 상태를 가리킨다. 얼마나 비참한 형편인가! 가인이 자기의 살 곳을 찾기 위하여 여호와 앞을 떠나간 것처럼, 탕자가 “먼 나라”로 떠나간 것처럼, 죄인들은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행복을 찾으려고 집을 떠난다. 그러나 누구든지 하나님을 떠나서 사는 사람들은 귀한 세월과 정신과 마음의 능력을 낭비하고 영원한 삶을 얻는 일에 낙오자가 된다.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돈을 허비하며 배부르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고 있다. 그런데 머지않아 자신을 깊이 자각할 때가 올 것이다. 먼 나라의 외로운 처지에서 자신의 가련함을 느끼고 절망 가운데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롬 7:24)고 부르짖는 날이 오게 될 것이다.

3) 귀향

돼지를 치고 있던 탕자는 문득 아버지와 아버지의 집을 떠올렸다. 가련한 형편에 빠진 그는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결정을 내리기는 쉽지 않았다. 마음속에는 수많은 갈등이 일어났다. 차마 지금 같은 처참한 꼴로는 집에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더구나 쓸데없이 낭비해버린 유산을 생각하면 고개를 들 수가 없었고, 그의 집의 종들과 주위의 이목을 어떻게 견뎌낼까 고민되었다. 그러나 그는 곧 아버지의 인자한 사랑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리고 이내 그런 아버지의 사랑을 확신하고 소망을 갖게 되었다. 그를 집으로 이끌리게 한 것은 아버지의 사랑이었다. 이와 같이 죄인으로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강권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다. 주님께서는 “내가 무궁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는 고로 인자함으로 너를 인도하였다”(렘 31:3)고 말씀하신다.

탕자는 돼지 떼와 팥 껍질을 버리고 분연히 일어섰다. 그리고 자기의 집을 향하여 길을 떠났다. 허약해서 비틀거리며 먹지 못해 기진맥진한 몸으로 그는 한 걸음 한 걸음 집을 향하여 걸었다. 더러운 누더기로 겨우 몸을 가린 채 맨발로 터벅터벅 집으로 향하고 있는 탕자를 상상해 보라! 놀기만 좋아하고 생각이 모자랐던 그 젊은이는 집을 떠날 때 아버지의 마음속에 남겨 놓은 고통과 외로움과 애절한 사랑에 대해서는 조금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가 그의 방탕한 동무들과 춤추고 먹고 마시고 있을 때 그의 고향 집에 드리운 우울함에 대하여 거의 생각지 못했다. 그리고 이제 피곤하고 무거운 발을 끌면서 고향으로 뻗어 있는 길을 걸어가고 있을 때도 한 분이 자기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아들이 집을 떠난 이후로 아버지는 한 시도 아들을 잊은 적이 없었다. 매일 문을 열어 놓고 매일 밤 등불을 밝혀 놓았다. 혹시 밤에라도 왔다가 들어오지 못하고 돌아설까 봐 아버지는 밤에도 불을 켜고 아들을 기다렸던 것이다.

어느 날, 멀리서 낯익은 모습이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아직 “상거가 먼데”도 아버지는 아들의 모습을 분간했다. 사랑은 눈을 밝게 한다. 여러 해 동안의 죄된 생애로 초췌해졌을지라도 아버지의 눈이 그 아들을 몰라볼 리가 없었다. 그는 “측은히 여겨 달려가” 사랑의 팔로 그의 “목을” 오랫동안 꼭 안았다. 아버지는 사람들이 자기 아들의 비참한 모습과 누더기를 경멸의 눈초리로 보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그가 자기 어깨에 걸쳤던 넓고 좋은 외투로 아들의 남루한 꼴을 덮어 주자 그 아들은 회개의 눈물을 흘리면서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라고 말했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라고 덧붙이는 그의 말은, 그가 얼마나 아버지의 사랑에 대해 무지했는가를 나타내었다. 아버지는 아들을 껴안고 집으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종들에게 명하였다.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4) 하늘 아버지의 사랑

성경은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라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비유에는 탕자의 잘못을 견책하거나 꾸중하는 장면이 전혀 없다. 돌아온 탕자는 자기의 과거가 용서함 받고 그의 죄가 영원히 잊어버린 바 되고 도말 되었다는 것을 느낀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도 죄인에게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의 사라짐같이, 네 죄를 안개의 사라짐같이 도말하였으니”(사 44:22),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사 55:7)고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아버지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회개하는 죄인을 기꺼이 받아주신다. 만일 우리가 주님께로부터 멀리 떠나있다면 일어나서 하늘 아버지께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면 하늘 아버지께서는 멀리까지 나와서 우리를 영접하실 것이다. 우리가 회개하고 그분을 향해 한 걸음만 내딛어도 그분은 재빨리 무한하신 사랑의 팔로 우리를 안아 영접하실 것이다. 그분의 귀는 통회하는 자의 부르짖음을 듣기 위해 열려 있고, 우리 마음에 하나님을 사모하는 생각이 싹트는 순간에 그것을 아신다. 기도가 아무리 더듬거리고, 눈물을 아무리 은밀하게 흘릴지라도 그분은 아시며,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아무리 미약할지라도 하나님의 성령이 알아차리지 못하시는 때가 없다. 기도가 입술에서 떨어지기도 전에, 마음의 소원이 알려지기도 전에 하나님의 은혜가 인간의 마음에 역사하신다.
아버지의 사랑으로 표현된 하나님의 사랑은 너무 깊고 크다. 그러나 세상의 그 어떤 부모의 사랑도, 그 어떤 아버지나 어머니의 사랑도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표현하기에는 부족하다. 죄인을 살리기 위해 생명을 바치신,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를 우리를 위해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성령은 이렇게밖에 표현하지 못하고 있다.
“여인이 어찌 그 젖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