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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회사_태양신 숭배를 기독교화 한 로마 카톨릭 교황권이 제정한 부활절

성경에 딱 한 번 유월절과 무교절 기간 끝에 언급된 Easter는 부활절이 아니라 이교 이스터 절기이다.

“... 이는 이스터가 지나면(after Easter) 그를 백성 앞에 끌어낼 의도였더라.”(행12:4)는 내용은 유대인들에게 잘 보이려는 의도인데 유대인들이 증오하는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부활절일 수 없다.

2세기에 들어 태양을 숭배하는 황제들과 알렉산드리아의 신학자들은 이루려는 목표가 동일했다. 모든 종교를 “태양을 경배의 중심 대상으로 삼는” 종교로 통합하는 야심찬 계획이 세워졌다. 샤프는 이교 철학의 영향에 관해 말하면서 “이교 철학이 자신의 속에 믿기 어려울 정도의 강력한 불길을 타오르게 했다고 고백한 성 어거스틴에게까지도 큰 영향을 끼쳤음을 발견할 수 있다.”라고 기록하였다.
마음속으로 화해를 추구하는 이교 황제들의 태도와 대중에게 복음을 전하려는 알렉산드리아의 전도 방법들을 받아들인 로마의 주교들은 대중에게 인기 있던 이교 축제들의 인기를 떨어뜨리고 싶었다. 그들은 황제가 있는 수도에 있으면서 막강한 영향력을 통해 연중 축제인 부활절과 태양 숭배를 위해 신성시되던 일요일을 교회로 들여와서 연중 가장 큰 축제로 만들기로 하였다. 수 세기에 걸쳐 맹렬히 이어진 부활절 논쟁이 시작된 것이다. 하나님은 구약의 유월절을 성력으로 정월 십사 일(연중 봄)에 기념하도록 정하셨다.
이교에서는 주전 여러 세기 동안 봄에 오는 태양의 분점을 기념하는 거짓 연중 축일을 지켜왔다. 이날은 봄의 여신을 의미하는 스칸디나비아어 “에오스트레(Eostre)”로 불리었다. 이 단어에서 “부활절(Easter)”이라는 단어가 유래되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구약의 유월절에 해당하는 시기에 일어난 사건이기 때문에, 그리스도나 신약 성경의 말씀에서 그 어떤 근거도 제공하지 않는데도 그 사건을 매년 기념하는 관습이 생겨났다. 이 부활절이 이교의 봄 축제와 맞먹는 행사가 되었다. 하지만 유월절인 정월 십사 일은 오늘날 주중 아무 날이나 해당될 수 있다. 동방의 교회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해마다 유월절 이틀 후에 기념했다. 그날이 어떤 요일이든 관계없이 매년 그 달의 십육 일에 해당하는 날에 부활을 기념했다. 이 같은 관습은 구약의 유월절에 관한 성경의 규정과 조화를 이루었다.
태양 숭배자들은 부활절 시기에 행하는 봄 축제에 더하여 매주 하루를 축일로 기념했다. 태양에게 바쳐진 신성한 날로 널리 인정받고 있던 주일 중 첫날의 이교의 화려함을 경쟁에서 이기고 싶던 로마 주교는 부활절을 이 날 저 날로 옮겨가면서 기념하는 교회들을 강력히 비난했다. 로마의 주교 빅토르 1세는 부활절 날짜에 대한 동의를 이끌어내기 위해 지중해 연안을 오르내리며 지역 종교회의들을 소집했다. 알렉산드리아 학교의 수장인 클레멘트는 자신이 모은 일요일 준수에 호의적인 전승들을 요약 출판하여 로마의 태도에 찬성했다. 클레멘트는 처음으로 일요일을 주의 날로 부른 사람이다. 동시에 빅토르는 이것을 지중해 연안의 모든 나라에 선포했다. 그는 이교도들과 점차 세속화되고 있는 기독교인들이 봄 축일의 날짜를 고정하는 일에 동의할 것을 알고 모든 지역의 성직자들에게 춘분 바로 다음의 만월이 지난 후 처음 오는 일요일에 부활절을 지키도록 칙령을 내렸다. 기독교 성직자들은 그때까지 지역 협의체 자체 모임들에서 다수결에 의해 결의된 법령들을 따랐다. 빅토르 1세 이전에는 그 어떤 주교도 감히 지역 협의체의 수장을 무시하고 특정한 주교가 다른 주교들에게 자신의 법령을 따르도록 명령한 적이 없었다. 그 충격과 저항이 너무도 단호했기 때문에, 역사가 아키발드 보워는 “권력 찬탈을 위한 교황권의 첫 번째 시도”라고 묘사하였다.
동방 교회는 이 오만한 요구에 대하여 그 어떤 경우에도 자신들이 지켜온 관습을 버리지 않을 것임을 확고히 선언했다. 그러자 빅토르는 격앙되어서 그들과의 모든 관계를 단절하고, 동방의 성직자들은 형제라 부르기에 합당치 않다고 공표하고, 그들로 로마에 있는 교회와 그 어떤 형태의 교제도 못하게 했다. 동방의 교회들과 서방의 교회들 사이에 생기기 시작한 이 틈은 로마 주교가 가진 힘이 세질수록 더욱 크게 벌어졌다. 파파스가 앗시리아 교회의 수장으로 선출되었을 때는 그와 그의 교회가 이미 저주를 받고 파문을 당한 후였다. 오직 교황권 세력의 성장에 관한 역사를 주의 깊게 읽는 사람들만이 부활절에 대한 논쟁이 로마 주교들의 손에서 얼마나 강력히 조작되었는지를 깨달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