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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부_마음의 법칙과 작용

마음은 어디에 있는가? 흔히 마음 하면 가슴을 가리키지만, 사실 우리의 마음은 우리 머릿속에 있다. 성품 변화의 필요성과 죄의 승리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마음의 작용을 잘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마음의 법칙을 잘 알고 있어야 성화의 길을 가기가 쉽기 때문이다. 성경은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잠 16:32)고 말하고 있다. 또한 자신을 복종시키고 마음을 다스려야 함에 대해 “마음에 할례”를 받고 “마음 가죽”을 베라는 말로 우리에게 교훈을 주고 있다.
물론 마음의 할례를 받는다는 뜻은 거듭남을 의미하지만, 이 의미를 앞서 공부한 과학적인 뇌의 기전으로 해석해 보면, 육적이고 죄악적인 자극을 두뇌로 계속해서 들여보내어 육신의 생각대로 마구 흐르는 부정적 회로를 만들지 말고, 뜻을 정하고 생각을 순결한 영적 사물과 하나님께 붙들어 매므로 영적인 자극과 감화 속에서 긍정적인 회로를 만들라는 의미로 풀 수 있다. 인간의 마음의 법칙과 그 작용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자.

1) 마음은 가장 친밀한 것과 동화된다

인간의 마음은 가장 친숙하고 가까운 것에 따라서 동화되며 같은 특징을 나타낸다. 가장 자주 접하는 어떤 것, 가장 자주 보고 집중하는 어떤 사물, 가장 친밀하게 접하는 사상, 가장 친숙하게 지내는 어떤 것을 닮을 뿐 아니라 같은 특징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것이 마음의 법칙이며 작용이다. 오래 산 부부나 친한 친구들이 서로 닮았다는 말을 듣는 것도 이런 작용의 결과이며, 어른들의 훈계 속에 늘 등장하는 좋은 친구를 사귀고 좋은 책을 읽어야 사람이 좋아진다는 말도 이러한 마음의 작용 때문이다. 시편의 기자는 이런 마음의 법칙을 잘 알았기 때문에 이런 간증을 기술해 놓았다.
“나는 비루한 것을 내 눈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이요, 배도자들의 행위를 미워하니 이것이 내게 붙접지 아니하리이다”(시 101:3). 이것이 무슨 뜻인가? 이 말을 현대적 의미로 재해석한다면, 현시대를 사는 사람들은 자주 미디어, 영화나 드라마, 쇼와 책들을 통해 세속적이고 죄악적이고 선정적인 이야기나 사건에 노출된다. 이런 것들을 쉽게 접하게 되고 눈으로 보고 귀로 듣게 된다. 만일 마음이나 생각을 붙잡지 않은 채, 세속적이고 정욕적인 사상이나 분위기나 환경에 계속 자신을 노출시키고 집중하게 되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은 우리가 친밀하게 접하는 것들과 똑같이 동화된다. 하도 자주 그런 것들에 접하다보니 이제는 판단이 흐려져 어떤 악한 것을 보거나 들어도 그것이 악하다고 느껴지지 않으며 그냥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두뇌에 들여보내는 자극이 된다. 이 자극들에 의해 뇌신경 세포인 뉴런과 시냅스의 연결이 이루어지며, 이것은 성품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이것을 안 시편 기자는 그런 비루한 일들, 곧 저속하고 정욕적이고 세상적인 것들을 눈으로 보지 않겠다고 서원한 것이다. 그리고 그 자극들이 자기의 성품을 형성하여 배도자들의 악한 행위가 자신에게 나타나지 않게 하겠노라고 결심한 것이다.

“비루한 것을 내 눈 앞에 두지”않겠다는 구절에서, 왜 제일 먼저 눈을 언급했을까? 우리의 오감은 우리의 두뇌로 자극을 들여보내는 마음의 통로이다. 그 중 시각은 자극을 제일 먼저, 그리고 가장 많이 받는 통로가 되는데, 눈으로 보는 것이 가장 큰 자극을 주며 마음에 강한 영향을 끼친다. 그런데 눈뿐 아니라 귀로 들여보내는 자극도 매우 중요하다. 성경에는 귀에 할례를 받지 못했다는 표현도 나온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행 7:51).
우리는 듣는 것도 가려서 들어야 한다. 악한 소리에 귀를 막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마음으로 들어가는 통로 오감에 파수꾼을 세워주시기를 주님께 간구하며 악한 감화에서 우리 자신과 마음과 생각을 지켜야 할 것이다. 좋은 것들을 보고 듣고, 아름답고 순결한 것들에 친숙하게 되어 그렇게 동화되도록 하자.

2) 마음은 명상하는 것을 닮는다

그 마음의 생각은 곧 그 위인이다. 인격은 자신이 생각하는 그대로 꼴지어진다. 우리의 마음은 우리가 제일 많이 명상하는 것에 의해 형성된다. 만일 마음이 평범한 것들과 사소한 것들로만 차 있다면 마음과 사상은 위축되고 평범해지고 연약해질 것이다. 일상생활에서 다만 육신적인 평범한 일에만 집중을 하고, 더 높고 더 원대한 사상 속에서 영적으로 고양되는 경험을 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마음과 사상은 축소되며, 하나님께서 주신 거룩하고 높은 부르심의 사명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시인은 거룩한 하나님과 그분의 놀라우심에 대하여 명상하면서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시 19:14)라고 읊었다. 우리의 묵상과 명상이 하나님께 가납할 만한 것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매일 영혼을 약화시키고 부정하게 하는 것들로 마음이 혼란해지지 않도록 우리의 생각을 묶어서 제한시켜야 한다. 만일 우리 입술의 말이 하늘에 열납될 만한 것이 되고, 이웃에게 도움이 될만한 것이 되게 하려면, 생각이 깨끗해야 하고 마음의 명상이 정결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하나님의 계명의 광범위한 원칙을 제시하시면서, 악한 욕망을 실제 행동으로 옮기기 전에 생각으로도 율법을 범할 수 있다고 가르치셨다. 율법은 생각으로 지키는 것이다. 마음으로 먼저 순종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다스려 언제나 유익한 것들을 명상하여 마음을 살찌워야 한다. 우리가 골똘히 생각하고 명상하는 그 주제대로 우리의 생각과 마음이 꼴지어지고 곧 우리는 그런 위인이 된다. 주님께서는 의지의 힘과 마음의 고상한 능력을 우리에게 주셨다. 그 이유는 그 능력을 하늘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영적 사물을 묵상하는 데에 쓰라고 하심이었다. 천박하고 세속적이며, 육신적인 것들을 생각하는 데에 우리의 마음을 쓰는 때가 얼마나 많은가! 시간과 생각을 사소하고 일상적인 일에다 쏟고 영생에 속한 중대한 일은 등한히 할 때가 얼마나 많은가! 만일 우리가 사도 베드로의 말처럼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마음의 악한 상상과 생각을 대항하려는 열렬하고도 지속적인 영혼의 투쟁을 시작해야만 한다. 항상 주님을 의지하는 가운데 생각과 행동으로 죄를 지으려는 유혹을 굳세게 저항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를 지키사 넘어지지 않게 하실 분”을 믿으며 부정적인 것에 우리의 영혼이 더럽혀지지 않도록 잘 보존해야 한다.

영원한 하늘에 속한 사물들을 진지하게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성품과 생애를 명상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좋은 명상이다. 예수님의 무한하신 자비와 사랑, 우리를 위해서 치르신 크신 희생, 순결하고 죄 없으셨던 생애, 이런 주제는 우리가 매일 시간을 내어 명상할 필요가 있는 주제들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구주의 품성을 매일 깊이 명상하며 그분께 가까이 가면 갈수록 주님의 순결하신 생애가 드러나고, 반면에 우리의 죄와 허물이 더 두드러지게 보이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의 허물을 깨닫게 되고 순결하신 주님을 닮고 싶어질 것이다. 하늘에 속한 주제들을 계속 명상하면, 우리의 믿음과 사랑은 더욱 강해지고 우리의 기도는 점점 더 하나님께 가납될 만한 기도가 될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성령으로 우리 마음속에 더 충만하게 역사하시고 우리의 생각은 점점 주님의 능력 안에서 순결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변화해 갈 것이다. 그렇게 될 때 우리가 하는 명상대로 우리의 마음은 꼴지어질 것이다.

3) 바라봄으로 변화된다

무엇을 계속 바라보면 그것처럼 변화된다. 바라봄으로 변화되는 것은 지성적 본성의 법칙일 뿐 아니라 영적 본성의 법칙이기도 하다. 사람의 마음은 바라보도록 허락된 사물에 점차 적응된다. 좋아서 바라보고 흠모하는 것에 동화되는 것이다. 사람은 자기가 가진 이상보다 더 높아질 수가 없다. 인간은 자신이 가진 순결과 지고의 선과 진실의 표준 이상으로 향상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가 자아나 같은 인간을 최고의 이상으로 삼는다면 그 이상의 표준을 결코 뛰어넘을 수 없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거룩하신 모본이신 예수님의 완전하심을 바라본다면, 그분의 순결한 형상으로 온전히 변화함을 입고 새롭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며 우리의 사모하는 주님처럼 되고자 하는 영혼의 목마름이 솟아날 것이다. 우리의 생각이 예수님께 더 오래 머무르면 머물수록 우리는 그만큼 더 예수님에 관해 많이 말하게 될 것이고, 세상에 그분과 닮은 모습을 나타내게 될 것이다.

사도 요한의 생애 가운데 나타난 품성의 변화는 바라봄으로 변화한다는 사실을 증명해 주는 산 실례가 된다. 요한은 예수님을 끊임없이 바라보았다. 우레의 아들이라고 불릴 만큼 화를 잘 내고 다른 사람에게 분노와 증오를 잘 표출하던 불같은 성격의 제자가, 온유하고 친절하고 사려 깊고 사랑이 충만한 성격의 사람으로 변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주님을 닮기 원해서 항상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그분과 교제한 결과이다. 그는 품성에 결점들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가 주님을 늘 바라보았을 때에 거룩한 은혜의 능력이 그를 변화시키고 성화시켰다. 그의 말처럼, “거울을 보는 것처럼” 주의 영광을 바라봄으로 그는 영광에서 영광으로 변화하여 마침내 그가 사모하던 그분과 같아진 것이다. 성화의 모본이 된 요한은 그의 편지 속에 이 마음의 법칙을 이렇게 제시했다.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 3:3).

성화의 길은 쉬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주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그분을 늘 바라보게 하며 그것은 자연스러운 성화의 길을 걷게 한다. 성화란 한순간, 한 시간, 하루의 일이 아니라 필생의 사업이다. 이것은 매일 매 순간 끊임없이 죄에 대하여 죽고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사는 일의 결과이다. 때때로 중단되는 나약한 노력으로는 성화의 길을 걸을 수 없고 마음과 품성에 변화가 올 수 없다. 오로지 오랜 끈기 있는 노력, 쓰라린 투쟁에 의해서만 그것이 가능할 수 있으며 그래야 우리는 죄를 승리할 수 있다. 죄된 세상에 사는 우리에게는 늘 복종시켜야 할 자아가 있고 극복해야 하고 얽매이게 하는 죄악이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생명이 계속하는 한 멈추지 말고 주님을 바라보며 성화의 길을 가야 한다. 바라봄으로써 우리는 변화된다. 아무리 창조주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 해도 정신과 마음을 어떻게 수양하는가에 따라서 변화가 오든지 퇴보가 온다. 예전에 미워했던 죄를 좋아하게도 되고 옛 생애로 돌아갈 수 있는 일은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다. 우리가 깨어 기도하기를 그칠 때에, 마음의 성채를 지키는 일에 실패할 때에 우리는 죄와 유혹에 빠지게 되고 타락하게 된다. 육적인 것에 대항하여 끊임없이 싸우며, 하나님의 은혜의 순화시키는 감화에 순복하며, 매일 주님을 바라보자! 바라봄으로써 주님의 형상으로 변화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