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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부_산채로 장사되는 사람들

 

요즘 기독교에서 침례는 입교식을 치르는 하나의 형식이나 교인의 명부를 늘리기 위한 교회 성장 수단으로 전락해 버린 듯한 인상을 준다. 외적인 형식만으로의 침례 예식은 아무 의미가 없다. 침례는 죄를 진정으로 회개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아무런 가치가 없으며, 그 예식 자체는 사람을 구원하는 힘이 전혀 없다. 침례가 시사하는 진정한 자아 포기와 죽음의 장사지냄과 새 피조물로 나오는 거듭남과 부활의 경험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다.

1) 물에서 죽지 않고 나온 사람들

가끔 미디어에 실리는 당황스럽고 놀라운 세계 면의 뉴스를 접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어떤 사람을 죽은 줄 알고 관에 넣었는데 관을 부수고 살아났다거나 장례식을 치르는데 죽은 사람이 살아서 벌떡 일어났다는 황당한 뉴스이다. 죽은 사람이 살아서 나오다니 그 얼마나 깜짝 놀랄만한 현상인가? 그런데 이 일은 어떤 의미에서 영적으로 자주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다. 이것이 무슨 말인가? 영적 죽음을 상징하는 침례를 받으면서 죽지 않고 그대로 살아서 물에서 올라오는 사람이 있다는 말이다. 산채로 장사된 사람들이 많다. 많은 사람들이 침례를 받았지만 산 채로 장례를 치른다. 말 뿐만의 죽음이지 진정으로 자아가 죽는 경험을 하지 않고 옛 사람이 그대로 살아서 나온다. 옛 성질이 전혀 죽지 않았고 성향이나 경향이 바뀐 적이 없다. 진정한 죽음이 없었기 때문에 삶 속에 진정한 부활 새 삶이 시작되지 못한다.

침례를 받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주장하는데도 그 말과 정신과 품성에 전혀 변화를 볼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진정한 거듭남을 경험하지 못해서이다.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이나 자기의 목적이나 계획에 대한 반대를 참지 못하는 것, 온유하지 못한 품성을 나타내고 쉽게 화를 내는 것, 그리고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자기를 사랑하며 이기심과 급한 성미와 성급한 말을 나타내는 것, 또한 진리를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처럼 자만하고 모난 성격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것 등등은 진정한 거듭남을 경험하지 못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아니, 만일 우리 자신들이 이런 성향들을 나타내고 있다면, 그것은 진정으로 자아에 대해 죽지 않았음을 알려주는 증거가 된다. 과거에 침례를 받았든 앞으로 받을 것이든지를 막론하고, 매일의 삶 속에서 일어나야 하고, 또 매일 지속되어야 할 거듭남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산 생명으로 일어나지 못했거나 현재 그 산 생명으로 살아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 아직도 진정한 자아의 죽음을 경험하지 못했는지 자신들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거듭남의 경험이 이르도록 주님께 간절히 간구해야 할 것이다.


2) 자아가 섞인 봉사

일상생활에서 자아가 죽지 않고 나타나는 사람, 자아를 위하여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한다. 그런 사람들은 혹시 외양적으로 주님을 매우 열심히 섬기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자신이 하는 모든 일에 ‘자아’라는 실을 섞어 짠다. 자아 사랑과 숭배는 그 모습이 다양하다. 그 모습 중 어떤 것은 별 해롭지 않은 것처럼 보이고 표면적으로 선하고 훌륭한 것 같아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자아가 어디에나 나타나 있으면 오히려 그 봉사로 인해 하나님의 사업이 방해를 받는다. 만일 주님을 위한 봉사, 그리스도를 위한 헌신이라고 말하는 어떤 행위에도 자아 숭배의 정신이 들어 있다면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지 않을 것이며 그 봉사는 주 앞에 헛된 봉사가 될 것이다. 우리의 육신의 자아는 오늘 하나님 안에서 죽어야 한다. 매일 매 순간 자아는 하나님 앞에 굴복되고 대신 우리의 마음과 정신 속에 그리스도께서 사셔야 한다. 우리의 자아를 면밀하게 살피자! 그리고 우리 속에 자아 숭배의 정신이 자리 잡지 못하도록 주님께 자신을 철저하게 바치자! 만일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께 연결되어 있다면 그분 앞에 우리의 마음을 낮추고 예수님의 품성을 닮기 위해 열렬하게 노력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거룩한 것과 같이 주님께서는 그분의 백성들이 거룩하고, 순결하고, 깨끗하기를 요구하신다. 왜냐하면 거룩함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자아를 드러내려는 의도로 어떤 것을 행하는 것은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에게 매우 흔한 일이었다. 그들의 외식은 이기주의에서 나온 것이었다. 자신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그들의 생애의 목적이었다. 자아에 대한 사랑은 성경의 말씀을 왜곡하게 하고 메시아를 거절하게 하였으며 예수님의 사명의 목적에 눈을 감게 하였다. 예수님의 제자들까지도 당시의 이런 정신에 어느 정도 물들어 있었는데, 겉으로 보기에는 예수님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린 것처럼 보였지만 마음속에는 자신을 부각하기 위해 어떤 것들을 추구하는 정신이 자리 잡고 있었고, 이 정신이 누가 더 크냐는 분쟁을 늘 일으켰다. 그러나 제자들이 주님의 십자가 이후에 자아가 완전히 죽는 경험을 하였을 때에 분쟁의 정신은 사라지고 드디어 마음이 사랑으로 하나가 되어 성령의 능력으로 나아가 복음으로 세상을 정복하게 되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즐겨 자아를 부인한다. 만일 우리가 십자가에 달리신 구주를 매일 바라본다면, 주님께서 치르신 희생이 얼마나 크고 의미심장한 것인지 충분히 깨닫게 될 것이며, 그 놀라운 구속의 경륜이 우리 마음속에 너무 감사하게 느껴지고 갈보리의 사랑이 우리 마음속에 활력을 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 마음과 입술에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이 흘러넘칠 것인데, 갈보리의 장면들을 기억 속에 생생하게 간직하는 영혼들에게는 자아 사랑이나 자아 숭배 그리고 교만과 같은 정신이 자리 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3) 가장 큰 싸움

세상의 전쟁 중에 가장 큰 싸움은 자아와의 싸움이다. 마음속에서 매일 일어나는 전쟁은 우리가 혼신을 다해 싸워야 할 가장 중요한 싸움인 것이다. 우리의 영생은 이 노력에 달려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는 주님의 능력을 굳게 붙잡는 가운데 이 싸움에서 승리해야 한다. 자아와의 싸움을 상징해 주는 성경의 알맞은 실례는 얍복강가에서 야곱이 하나님과 겨룬 씨름에 대한 경우이다. 야곱은 천사와 힘을 겨루어 이겼다(창 32:23~30 참조).
장자권을 속여 취한 일 때문에 집을 떠나게 되어 오랜 세월을 방황하던 야곱은 하나님의 허락으로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러나 그는 자아를 온전히 굴복한 경험이 없었으며 온전히 하나님과 화친한 경험의 부족으로 장래에 대한 불안감을 떨칠 수가 없었다. 가족과 권솔들을 이끌고 돌아가면서 아버지를 속였던 자신의 과오에 대한 죄책감으로, 형 에서의 분노와 공격 앞에서 두려움에 떨게 되었다. 그는 얍복강가에 엎드려 자신의 모든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며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기를 원했다. 그가 열렬히 기도하고 있을 때 갑자기 원수처럼 보이는 정체불명의 사람이 나타났다. 야곱은 그가 자신의 원수인 줄 알고 새벽이 맞도록 죽을 힘을 다해 싸웠다. 그러나 밤새 자신과 씨름하다가 동이 트자 떠나려는 그분이 언약의 사자임을 깨닫고 야곱은 그분을 붙잡았다. 그는 죄에 대한 용서를 빌면서 축복을 빌어주시기를 간청하였다. 밤이 맞도록 사력을 다해 싸운 야곱! 환도뼈를 침을 당하기까지 주님을 놓지 않았던 야곱은 무엇을 얻었는가? 그는 승리를 얻었다. 그는 새 사람이 되었고 새 이름까지 받았던 것이다.

겸비와 회개와 자아 굴복을 통하여 죄와 허물이 많던 야곱은 하늘의 지존자를 이기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하나님의 약속에 매달렸다. 야곱이 자신의 힘으로 승리를 얻으려고 애쓸 때에는 두렵고 고통스러웠다. 그는 그 거룩하신 손님을 적으로 잘못 생각하고 그의 힘이 다 없어질 때까지 싸웠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의 자비에 자신을 내어 던졌을 때에 그는 원수의 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무한하신 사랑의 팔에 안겨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하나님을 얼굴과 얼굴로 대면하여 보았고 그의 죄는 용서를 받았다. 우리도 자아를 굴복하고 자아와 싸우기 위해 온 마음을 다해 주님을 붙들어야 한다. 굳세게 하나님을 의지하고 새 생명을 얻을 때까지 씨름해야 한다. 열렬하고 진지한 기도, 그리고 결정적인 노력과 순종과 예수님의 공로를 믿는 믿음에 의해서만 우리는 승리할 수가 있고 자아를 정복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