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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회사_교황 교회가 점령한 이후의 스코틀랜드

 

과거 기록들을 소실시키거나 거짓 꾸며내는 승자들의 파렴치함 때문에 켈틱(Celtic) 교회의 이야기가 참 모습이 아닌 거짓으로 꾸며진 얼굴을 가지고 존재하고 있다. 1120년까지만 해도 이 켈틱 교회와 교황권 사이에는 그 간격이 현격히 벌어져 있었다. 교황권의 시녀 마거릿 왕비의 다른 아들인 알렉산더 왕과 새로이 세인트앤드류스 관구의 수장으로 임명된 캔터베리의 이드머(Eadmer) 사이에는 견해 차이가 매우 컸다. 그가 캔터베리의 두 수사에게 조언을 구했을 때 그들은 의미심장한 말을 하였다.

“사람들은 만일 이드머가 스코틀랜드 교회(켈틱교회)의 관습을 따른다면 그는 자신의 성품에 굴욕을 안기며 자신의 구원을 위태롭게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Maclauchlan, Early Scottish Church, pp.395.

로마 교회는 1120년에 이르러 켈틱 쿨디 교회의 관습이 로마 교회의 관습과는 상당히 거리가 멀어서 쿨디 교회를 따르는 주교의 영생을 위태롭게 할 수도 있다고 주장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패트릭에게 했던 것처럼 스코틀랜드의 광야교회 영웅인 콜룸바를 로마 교회의 성인 명단에 등록하였다. 6세기와 7세기에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에서 선교 사업이 가장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던 바로 그 지역들에서 후일에 복음적 종파들이 가장 크게 번성한 사실은 매우 주목할 만한 일이다. Newman, A Manual of Church History, vol. 1, p. 414.

켈틱 쿨디 교회의 지도자 콜룸바와 그의 후계자들에 의해 이루어진 품성과 행위의 변화는 여자들의 지위를 향상시키고, 아이들에게 애정 어린 관심을 갖게 하고, 신자들로 성경을 사랑하게 하였고, 교회와 국가가 바른 관계를 형성하게 하였으며, 원기 왕성한 서양 사람들에게 지속적인 선교사의 삶을 살 수 있도록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다. 스코틀랜드에는 수없이 많은 씨앗이 매우 깊이 심어졌다. 그곳은 복음의 씨를 심기에 매우 비옥한 땅이었다. 이런 비옥함은 후에 교황권의 관습과 전통에 점령당해 그 성장이 묻혀버렸음에도 상당히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종교개혁의 바람이 이 지역으로 불어왔을 때, 왕권에 의해서 스코틀랜드에 형성되어 있던 카톨릭의 관습들이 크게 바뀌어 옛 모습으로 돌아갔다. 로마 교황권은 옛 쿨디 교회의 믿음과 그 단순한 체계를 근절할 수가 없었다. 특히 초대 기독교의 초기 거주지들과 후기의 피난처들에서는 더욱 그러했다. 이미 종교개혁 이전에 유럽의 거의 모든 나라에 개혁자들이 존재했었다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로마 교회의 찬탈 행위에 대해 공개적으로 항의했던 마지막 나라인 스코틀랜드에도 그러한 개혁자들이 계속 존재하였을 것으로 보는 것이 그리 잘못된 결론은 아닐 것이다.

“사람들이 어떤 종교가 아직 멸절되지 않았다고 믿고 있는 이상, 그 어떤 박해도 그 종교를 멸절시킬 수는 없다.”

옛적 콜룸바의 신앙은 영속하는 사랑과 애정으로 옷 입혀진 채 아버지로부터 아들로 전수되었다. 스코틀랜드 사람들이 그들의 지위를 찬탈한 로마 종교로부터 당한 고난들은 마치 표현이 감정을 더 깊게 만들듯이 그들의 신앙을 더 깊게 만들어 줄 뿐이었다. 그들은 로마 카톨릭(천주교회)의 침입을 강력히 저지하였다. 교황권이 스코틀랜드에서 지상권을 행사하고 있던 시기에도 왈덴시안 공동체의 일원이었던 사람들과 위클리프를 따르는 사람들이 그곳에 살고 있었다. 종교적 폭정에 대한 최종적이고도 항구적인 반대(Protest)는 종교개혁의 물결이 이 땅을 가장 중요한 동맹 중의 하나로 확보하였을 때 일어났다. 스코틀랜드가 종교개혁을 위하여 세상을 두 번 구원했다고 하는 말이 역사에 관하여 그리 불공평한 말은 아닐 것이다. 콜룸바의 놀라운 조직력과 경건한 삶을 통해 주어진 활력에 크게 힘입어서 마침내 광야교회가 승리를 거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