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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부_용서 받은 삶

 

온 우주의 원칙인 하나님의 율법은 죄의 대가로 사망을 요구한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 6:23). 인간이 죄를 지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셔야 하셨다.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죄인을 죽이시든지 아니면 율법을 폐지하셔야 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죄인에게 살 기회를 주시기 위해서, 죄인 대신 예수님께서 죄의 대가를 담당하게 하시어 희생당하게 하시므로 십자가를 통해 율법의 권위를 높이 세우심과 동시에 인간에 대한 그분의 사랑을 보여주셨다. 그래서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가 입 맞춘 곳이다. 우리가 십자가에 대해 진정으로 알게 될 때에, 주님의 사랑이 죄를 증오하게 할 것이며, 주님께서 주시는 용서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깨닫게 될 것이다.

 

1) 죄지으라고 용서해 주심?

많은 교인들을 보면 마치 하나님께서 또다시 죄를 지으라고 용서해주신 것으로 착각하고 사는 것 같다. 그러나 정말 그러한가? 빚진 자에 대한 비유(마 18:23~35)에서 예수님은 용서의 조건에 대해 말씀하고 계신다. 그 주인은 1만 달란트 빚진 종의 빚을 모두 탕감해주었다. 영적인 해석을 적용해 볼 때에 그는 용서받고 의인이 된 것이다. 그러나 그 종은 자기가 받은 대로 행하지 않았는데, 곧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을 용서하지 않고 잡아 옥에 가둔 것이다. 그 일을 들은 주인은 슬퍼하면서 자기 종에게 1만 달란트 탕감해준 것을 무효화시켰다. 성경은 분명하게 용서받은 자는 반드시 용서받은 자의 삶을 살아야 함을 가르치고 있다.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해주시는 것은,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요 8:11)고 용서해주시는 것이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은혜가, 예수님의 십자가가 모든 죄를 용서해 주고 덮어주므로 그냥 죄를 짓고 살다가 영생에 들어간다고 믿고 있다. 십자가에서 치러진 죄의 값을 생각하지 않은 채 말이다. 죄의 대가가 얼마나 엄청난 것인가! 죄가 하나님의 아들을 죽였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우리는 용서받고 생명을 얻은 것이다.

 

2) 용서의 값

만일 우리가 수백억의 빚을 지고 빚쟁이들에게 시달리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이 금액은 보통 사람이 평생을 일해도 갚기 힘든 금액이다. 아무리 노력하고 모든 방법을 동원해도 갚을 길이 없다. 절망 가운데 모든 것을 포기하고 감옥에 갈 날을 기다리고 있는데, 한 부자 친구의 도움으로 극적으로 빚을 탕감받게 된다. 그 때에 우리의 감사와 기쁨이 어떠할까? 모든 근심 걱정이 없어지고 하늘이 열리듯 희망의 빛이 마음에 비치면서 새로운 용기와 꿈이 생길 것이다. 어제는 염려와 불안으로 잠이 오지 않았으나 이제는 꿈만 같은 이 사실에 잠을 설치게 될 것이다. 우리를 염려하던 사람들에게 전화하여 이 기쁜 사실을 전할 것이다. 그리고 도와준 친구의 은혜를 평생토록 잊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 고마운 친구의 은혜를 갚기 위해 못할 일이 없을 것이다. 이 일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하신 일이다. 우리의 죗값을 모두 치르시고 용서해 주셔서 사망에서 건져주신 것이다. 이러한 진정한 용서의 경험은 우리의 삶의 목적을 완전히 바꿔놓을 것이다. 우리는 용서의 대가와 그 가치를 정말 알고 있는가? 용서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삶에 아무런 변화가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 세상에서 가장 값비싼 것은 용서이다. 죄의 용서를 위해 온 우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이 지불되었다. 이보다 더 값비싼 것이 우주에 또 있을까? 우리는 용서에 대해 얼마나 그 가치를 느끼고 감사하고 있는가?

 

3) 용서받은 자의 삶

세계 2차대전이 발발했을 때에 한 그리스도인 청년이 미 해군 함대에 징집되었다. 그는 그 함대에서 기회가 있는 대로 전도지를 나눠주며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를 하곤 했다. 그러나 그의 상관은 예수 이야기만 나오면 비웃고 조롱하면서 그리스도인 청년을 골탕먹이고 괴롭혔다. 때로는 그의 소지품들을 바다에 던지기도 하고 기도하는 그의 뒤통수를 신발로 때리기도 하였다. 그럴지라도 이 청년은 늘 한결같이 친절하고 예의 밝았다. 그러던 어느 날 긴급 사이렌 소리가 울리면서 “각자 제 위치로!” 라는 말이 확성기를 통해 나왔고 순식간에 나타난 적의 비행기는 포탄을 함대에 퍼부었다. 배에는 불이 났으며 부서진 곳이 많아 가라앉기 시작하였다. 잠시 후 함장은 확성기를 통해 “각자 알아서 자기 생명을 구하라! 행운을 빈다”는 마지막 명령을 전달했다.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모든 대원들은 미리 준비해 둔 구명조끼를 입고 바다로 뛰어들었다. 이 그리스도인 청년이 바다로 뛰어들었을 때 그는 구명조끼를 못 찾아 어찌할 바를 모르고 공포에 질려있는 그의 상관을 보게 되었다. 그 청년은 얼른 그가 입고 있던 구명조끼를 벗어 자기를 그렇게 괴롭히던 상관에게 던져주고 “이 전쟁에서 살아남게 되면 예수님을 기억해 주십시오!”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파도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1년 이상의 세월이 지난 후 한 사람이 교회 문을 두드렸다. 그는 위의 이야기를 그 교회의 목사님에게 해주면서 자기가 바로 그 못된 상관이라고 말했다. 그는 자기를 위해 생명을 버린 그 어린 졸병을 떠올리며 그 청년이 믿었던 예수님을 알고 싶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청년이 살았다면 분명히 그렇게 살았을 전도자의 삶을 살고 싶다고 고백하였다.

우리의 생명은 예수님의 용서로 다시 얻게 된 생명이다. 그렇다면 용서받은 우리의 삶이 어떠해야 할 것인가?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5:15, 20, 21). 우리는 진정으로 용서받았는가? 그렇다면 용서받은 자로서 그리스도를 위해 살므로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야 하지 않겠는가!

 

4) 사랑이 주는 고통

많은 사람들은 용서에 대해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에 예수님이 하늘에서 사무적으로 죄의 기록 책에 “용서받았음” 이라는 도장만 찍어 주면 끝나는 것처럼 생각한다. 도대체 우리가 짓는 죄가 예수님과 무슨 상관인가? 2000년 전에 그분이 십자가에 돌아가셨으므로 우리의 용서와 그분의 고통은 십자가에서 끝난 것인가? 정말 그러할까? 좀 더 실제적인 이야기를 통해 그 주제로 접근해 보자. 한 목사님이 여러 해 전 어느 도시에서 전도집회를 개최하였는데, 마지막 즈음에 한 여자분이 눈물을 흘리며 강당의 입구 쪽으로 걸어 나와서 상담을 하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흐느끼며 말했다. “나의 아들을 위해 기도해 주세요!” 그 여인의 아들에게 어떤 일이 있는 것인가? 너무 아파 위독한 상태인가? 아니었다. 사고가 났는가? 아니었다. 그는 교도소에 갇혀있었다. 그 여인이 그렇게 말하였을 때, 그 강사 목사님이 이렇게 말했을까? “어머니, 이제 그만 슬퍼하시고 기뻐하세요. 적어도 어머님은 감옥에 갇히지 않으셨잖아요?” 결코 아니다. 지금 누가 더 고통스러워 하고 있는가? 감옥에 있는 그 아들인가, 아니면 감옥 밖에 있는 어머니인가? 자녀들의 죄 때문에 고통당하고 마음 아파하는 부모님들을 볼 때에 우리의 죄 짐을 지시고 중보 하시며 고통스러워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희미하게나마 엿볼 수 있지 않은가? 그분은 인간 부모가 사랑하는 것보다 몇백 배 더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 아니신가? 인간 부모의 마음이 자녀 때문에 이렇게 고통당한다면 우리를 만드신 창조주시며 우리를 위해 생명을 주신 구세주의 마음은 어떠하시겠는가!

여러 해 후에 그 목사님은 이 여자분을 또 만나게 되었다. 그 때도 변함없이 그 여자분은 눈물을 글썽이면서 같은 말을 하였다. “내 아들을 위해 기도해 주세요!” 여러 해 후에도 여전히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는 그 아들을 위해 기도해 달라는 것이다. 그 때에 여러분 같으면 이렇게 말하겠는가? “어휴, 어머님, 이제 아드님 생각은 잊어버리세요! 그러다 궤양이라도 생기시겠어요. 어느 흥겨운 파티에라도 참석하시든지 해서 좀 잊어버리세요. 아드님 때문에 그렇게 짓눌리실 필요 없습니다. 그 아이는 당연히 받아야 할 벌을 받고 있을 뿐이잖아요?” 그 어머니의 문제는 대체 무엇인가? 그 어머니가 고통스러워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오직 아들에 대한 사랑 때문에 어머니의 가슴은 미어지는 것이다. 당신은 왜 죄는 우리가 짓는데 예수님께서 고통당하시느냐고 묻는가? 만일 예수님의 마음속에 우리들에 대한 동정과 사랑이 없다면 그분의 용서는 문자 그대로 사무처리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그분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며 그렇게 고통스러워하시고 안타까워하시는 것은, 우리를 그분 자신의 생명을 주실 만큼 아끼고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죄는 예수님의 생명을 앗아갔으며 인간의 본성에 엄청난 영향을 주었고 세상에 파멸과 불행을 초래했다. 죄는 온 우주에 그리고 예수님의 마음에 엄청난 슬픔과 고통을 가져왔으며, 우리가 죄를 지을 때마다 그분의 마음은 찢어진다. 왜냐하면, 그분은 죄가 우리의 영혼에 끼치는 해악을 너무도 잘 아시기 때문이다.

사랑이 예수님의 마음에 고통을 가져오고 있다.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죄 때문에 예수님께 가해지는 고통에 대해 이해하기는커녕 무관심과 방종 속에서 세상의 것들만을 추구하며 질주하고 있다. 그분의 자녀들이 짓는 죄로 인해 받으시는 예수님의 고통과 눈물을 그치게 할 방법은 없을까? 언제까지 그분의 고통이 계속되어야 하는가? 여러분은 예수님을 기쁘게 하고 싶은가? 그분의 마음의 고통을 줄여주고 짐을 가볍게 해주고 싶지 않은가? 그분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은 많은 헌금도, 멋진 신앙고백도, 유창한 방언과 떠들썩한 봉사활동도 아니다. 그런 것들이 예수님의 마음에 있는 고통을 없애주지 못한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시 51:17). 상한 심령이란 우리의 죄로 인해 그분께 고통을 드린 것을 진정으로 슬퍼하는 마음이다. 그분을 사랑하고 갈급한 마음이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 제물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 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를 인하여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 6:6~8). 우리의 죄로 인해 고통당하시는 예수님을 생각할 때 우리 마음속에 죄에 대한 슬픔과 비애가 느껴지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