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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회사_프란치스코와 종교재판

 

종교재판이 공식적으로 시작된 것은 교황 이노센트 3세 재위기간(1198-1216)이었다. 성경을 믿는 이들이 그 이전에 이미 수 세기 동안 로마 카톨릭에 의해 박해를 받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이노센트 3세는 선임들보다 훨씬 철저하게 종교재판을 조직화시켰으며, 이교도들은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고 선언했다. 또한 사람들이 자국어로 된 성경을 읽는 것을 금지시켰다. 1215년에 이노센트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신성한 성경을 번역하는 자 또는 비밀 집회를 여는 자 또는 그들의 최상급자들의 인가를 받지 않은 채 설교하는 자는 체포되어 심문과 형벌에 처해질 것이다. 그들에 대한 소송 절차는 어떠한 항의에도 구애받지 않고 시작될 수 있다”(J.P. Callender, Illustrations of Popery, 1838, p.387). 이 교황은 “이전의 율법에 따라, 거룩한 산을 만지는 그 짐승은 죽을 때까지 돌로 침을 당하듯이, 미천하고 교육(로마 카톨릭 신학)받지 못한 자들은 성경을 만져서도 안 되고, 그 교리들을 감히 가르쳐서도 안 된다고 선언했다.”(Schaff,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VI,p. 723).

깊은 흑암의 이 시대에는 카타리파, 파테린파, 리용의 가난한자들, 파사긴파
(Passagines), 조세핀파(Josephines), 베렌게리안파, 피터 브루이즈파, 로잔의 헨리파, 아놀드파(Arnoldists), 발도파 등 무수한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영원한 파문에 처해졌다.


“이단”을 믿는다는 명목으로 화형당하고 있는 왈덴시스교도들
“이노센트 교황 시대는 사상과 예배의 모든 자유에 테러를 가하는 시대였다.”
(Blackburn, Church History, p.307). “이노센트 3세는 사방에서 [왈덴시안]을 추적하게 하였다. 메츠(Metz)의 왈덴시안들에게 쓴 교황의 편지에, 거기서 그는 가장 야만스럽게 그들을 쫓고 박해할 것이라고 규정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이 피터 발도에 의해 서민어로 번역된 성경을 읽는 자유를 누렸기 때문이다.”(Allix, Remarks upon the Ancient Churches of Piedmond, p.287).

“성경은 아주 드물게 번역되었으나, 그 일부라도 서민 언어로 번역된 곳에서는 어디라도 사람들이 그 빛 가운데서 기쁨을 누렸음을 알 수 있다. 모셀[프랑스]의 메츠에서 한 감동적인 사건이 발견된다. 몇몇 리용의 빈자들, 또는 왈덴시안들이 불어로 된 몇 권의 쪽 성경을 그곳에 가져다주었다. 남녀들은 열심히 그것을 읽었다. 그들은 성경을 읽는 모임을 만들었다 ... 로마 신부들이 그 모임들을 중지시키려 했다. 하지만 그 회원들은 ‘하나님께서는 모든 계층의 사람들을 위해서 그분의 말씀들을 주셨다. 이 책들은 당신들이 가르치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우리는 이것을 포기할 수 없다.’고 말하며 완강히 모임을 유지하였다. 마치 고정된 이름인 양 그들은 발도파라 불려졌다. ... 그 결과, 이 성경을 읽는 자들을 진압하기 위해, 시토수도회 신부들이 메츠로 보내졌다.(특히 당대 뛰어난 연설가 버나드는 가장 악랄한 박해자의 선봉이었다. 그의 찬송시는 개신교 찬송가에도 몇 편이 있을 정도이다) ... 왈덴시안들에게 무력이 행사되고, 추적당했다. 가능한 한 그들의 성경역본들은 불에 태워졌다. 그들의 의견은 근절되었다. 피터 발도에 의해 발송된 로망스어로 된 성경들에 특별한 비난이 쏟아졌으며, 반드시 불태워져야 했다.”(Blackburn, Church History, pp.314,15).

성경이 서민들의 공통언어로 번역되어 등장하는 곳마다, 또한 카톨릭의 전통의 방해를 받지 않고 성경이 선포되었던 곳마다, 로마 카톨릭은 성경이 어둠에 있는 사람들에게 가져다준 그 빛을 끄려고 노력했다. 평민들이 잘 모르는 언어인 라틴어로 된 성경밖에 구할 수 없었을 때는 로마 당국이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공통어로 성경을 번역했을 때 그들의 분노는 폭발했다.

발도의 피터와 또 다른 왈덴시안 무리들에 속해있던 순회 선교사들의 막강한 영향력에 대항해서, 교황 이노센트 3세는 두 개의 수도사 조직을 설립했다. 이 수도사들은 전도를 위한 포교사의 외형을 하고 각지를 돌아다녔지만, 로마의 비성경적인 교리들만 전달하였다. 이 수도회 중 하나는 아씨시의 성 프란시스 수도회(Francis of Assisi)였다(Faber, History of the Ancient Vallenses, p.477 f1). 이 프란시스(프란치스코)의 이름과 정신을 현 교황이 차용하고 있다. 사실 프란시스를 제외한 그 수사들은 대부분 부랑무식했으며 성경을 전혀 읽을 수도 없는 문맹이었다.

“이교도”들에 대한 악명 높은 십자군이 교황 이노센트 3세의 통치하에서 소집되었다. (비단 모슬렘으로부터 “기독교” 영토를 되찾기 위한 의도만이 아니라, 이교도라 불리던 분리주의 성경 신봉자들에 맞서서 십자군이 소집되기도 했다). 1209년에, 십자가를 든 한 무서운 군대가 40일 동안의 복무 기간으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모든 이교도들을 파괴할 예정이었다. ...이 십자군들의 잔악성에 가히 필적할 만한 대상이 없어 보인다. 몇 개월 동안 약 2십만 명이 희생되었고, 이노센트 3세의 허가를 받았던 모든 명목의 전대미문의 만행들이 자행되었다. 두 개의 큰 도시, 베지에르스(Beziers)와 카르카소네(Carcassone)는 재로 변했고, 다른 수천 명은 불타는 집에서 쫓겨나 숲이나 산에서 유랑하며 날마다 빈곤에 시달렸다(Orchard, Concise History of the Baptist, p.211). 이 십자군은 오늘날 미국을 중심으로 되살아나 프란치스코 교황과 함께 준비되고 있으며, 성경만을 완강하게 믿는 신자들은 극단주의 혹은 근본주의 테러리스트로 규정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