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der2

제2부_완전과 완전의 결과

 

완전이라는 말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거부감을 주는 단어로 매도되어 버렸다. 기독교 안에 들어온 오류의 가르침들의 결과로, 그리고 “완전”이라는 단어와 어휘의 오용으로 인해 그 의미와 그것이 주는 놀라운 교훈이 간과되고 있다. 그러나 그렇게 된 가장 큰 원인은,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완전”에 대한 올바른 개념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스로 자신의 부족함과 미비한 영적 상태로 구원에 대한 불안감과 압박을 느끼게 되고 낙심과 초조감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또한 “완전”을 하나님의 관점과 평가에서 생각해야 함에도, 인간의 눈으로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영적 상태를 판단하거나 분석하여, 나는 완전하다거나, 또는 완전하지 못하다거나, 혹은 저 사람은 완전하고, 이 사람은 완전하지 못하다고 인간의 생각과 평가대로 판단하는 것이다. 이렇게 완전에 대한 왜곡된 개념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완전이라는 의미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게 하였다. “완전”이라는 단어에 그리스도인들이 거부감을 가지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작용하고 있는데, 비단 완전에 대한 왜곡된 개념 때문뿐만 아니라, 율법주의에 대한 두려움이나 완전에 대해 가르침을 받은 적이 없으므로, 그리고 교회 안에 자리 잡은 오류의 영향과 사단의 공격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완전의 개념이 거부감을 일으키고, 곡해된 데에는 자유주의 신학과 기독교에 들어온 거짓 복음이 기여한 바가 크다. 순종을 강조하지 않고 성화를 경시하도록 가르치는 현 기독교의 복음은, 하나님의 뜻과 계명대로 순종하고 살아야 하는 성도의 당연한 행실을 율법주의로 몰아가게 만든다. 그래서 성경의 순수한 가르침과 진리대로 순종하며 거룩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들은, ‘율법주의자’ 또는 ‘완전주의자’라는 도장이 찍힐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움츠리게 되었다. 변질된 복음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완전에 대한 가르침을 전혀 듣지 못해 왔고, 죄를 승리하는 믿음에 대해 배운 적이 없으므로 어쩌면 완전이라는 개념에 대한 무지는 당연한지도 모른다.
완전의 올바른 개념과 영적 의미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자.

1) 완전이란 무엇일까?

완전이란 말을 영어로는 “Perfection”, 그리스어로는 “텔레이오오” 라고 한다. “텔레이오오” 란 말은 “완성하다, 달성하다, 이루다, 마치다” 라는 뜻이 있다. 그렇다면 무엇을 이루고 무엇을 완성한다는 것일까? 바로 율법의 요구인 의를 이룬다는 것이다. 의에 다다른다는 것이다. “텔레이오오”는 “텔레오라”는 단어에서 파생되었는데, 그 단어에는 “결과, 끝, 결국, 종결” 등의 뜻이 있다. 그러면 완전은 무엇의 결과일까? 무엇의 끝, 무엇의 결말로서 오는 것일까?

대부분 그리스도인은 “완전”을, “모든 것을 다 성취하고 올라간 다 이룬 지점”으로 생각한다. 즉, 죄를 지을 수 없는 경지나, 죄를 짓지 않는 지점에 이른 것을 완전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완전은 이르러야 할 어떤 지점이 아니다. “완전”이란 마음의 상태나 경험을 말하는 것이다. 완전은 죄를 지을 마음이 전혀 없어진, 하나님과 완전히 하나된 마음의 상태이다.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 있는 상태,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굴복되어 있는 마음의 상태를 “완전”이라고 하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런 완전의 상태에 이를 것을, 이런 마음을 가지라고 언급하고 있다. 온전함과 거룩함은 같은 의미로 쓰일 수가 있는 단어이다. 거룩함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근엄하고 경건하며 잘 웃지 않거나 감정을 나타내지 않는 것이 아니다. 거룩함이란, 자신의 전체가 하나님께 바쳐진 상태, 온전히 마음이 하나님께 굴복된 상태를 가리킨다.

완전이란 죄의 유혹을 전혀 느끼지 않는 상태가 아니다! 거룩하고 경건하게 되어 더 이상 이룰 경지가 없는 지점이 아니다. 죄의 유혹을 받고, 고의적이 아니라 연약하여 쓰러질 때가 전혀 없지는 않지만, 매 순간 하나님과 동행하며 마음을 하나님께 바치며, 주님의 임재 속에 사는 것이다. 그리하여 죄짓기가 너무 싫어지고, 자신의 의지대로 살고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만 살고 싶게 된 상태가 완전한 것이다. 그런 상태야말로 마음의 동기와 방향이 완전히 변화된, 새언약이 생각과 마음에 쓰인 상태이다. 그것이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의 성취인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십계명을 폐하셨으므로 계명을 지킬 필요가 없고 그냥 예수님을 믿고 사랑하기만 하면 된다는 어떤 사람들의 주장과는 다른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율법의 완성을 이루라는 더 높은 부르심과 명령이다. 성경은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사랑은 완전하게 하는 띠니라”(골 3:14)고 말하고 있다. 이것이 무슨 뜻인가? 그것은 사랑이야말로, 사랑의 성품이야말로 완전의 상태를 확연하게 나타내주는 증거가 된다는 의미이다.

2) 완전이란 그릇 안에 들어 있는 것

완전에 대한 더 깊은 영적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자.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롬 13:10).
여기에 “완성”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이것은 앞서 살펴보았던 “텔레이오오”, 곧 무엇의 결과나 끝을 의미하는 그 단어와 일맥상통하는 의미의 단어이다. 이 구절에서 “완성”이란 말의 의미는, 율법의 절정, 율법의 온전한 현시라고 할 수 있다. 물을 병에 흘러넘치도록 가득 채운 다음에 뚜껑으로 봉하는데, 그 맨 마지막을 봉하는 것이 사랑이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완전”은 율법을 온전히 이루는 것인데, 그 율법을 이루는 결과는 하나님과 똑같은 사랑의 성품을 갖는다는 것이다. 완전이란 그릇 안에 가득 차 있는 것은 사랑이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마 5:46) “라고 말씀하시면서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셨다. 그리고 이 사랑에 대한 결론으로서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고 말씀하신 것이다.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는 말씀의 또 다른 표현이다.

그렇다면 그런 사랑, 율법의 완성인 무아적인 사랑이 우리에게 있는가? 아니다! 그러한 사랑은 우리가 스스로 아무리 만들어 내려고 해도 불가능하다. 그 사랑은 오직 성령을 통해서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며 받을 수 있다.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롬 5:5).

이런 사랑을 갖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과 성품을 갖는 것이다.이 사랑은 예수님의 모든 행동의 동기였다. 이 사랑이 바로 빛이요, 의요, 생명이었다. 이런 사랑을 가지고 있는 상태, 이런 사랑이 우러러 나오는 마음의 상태를 완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사랑은 우리에게 결코 없다. 우리는 날마다 우리를 완전하게 하는 그 사랑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아야 한다. 왜냐하면 선하신 분, 온전하신 분, 참사랑을 가지신 분은 하나님 외에는 없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완전케 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사랑을 받아 그분의 사랑을 희미하게 반사하는 것뿐이다. 그러니 우리가 완전하다고 자랑할 수 있겠는가?

3) 무엇이 완전하게 되는가?

완전하다는 것은 무엇이 완전하게 된다는 말인가? 완전에 대해 연구하면서 우리들은 완전에 대한 개념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1. 우리의 본성이 완전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성경에서 완전해야 한다고 말씀하실 때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본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완전이라고 하면 절대 완전을 생각한다. 절대적인 완전은 하나님의 속성이다. 사람들은 절대 완전을 떠올리며, 인간은 결코 절대 완전에 이를 수 없다고 말한다. 사실 그 말은 맞다. 왜냐하면, 절대 완전, 즉 한계도 없고 미래에 실패할 가능성도 없는 절대적인 완전은 하나님에게만 가능한 속성이기 때문이다. 절대 완전이란 피조물들에게는 결코 불가능한 것이며, 인간이나 천사들을 위한 것도 아니다. 천사들의 완전은 하늘에서 실패하였고, 사람들의 완전함은 에덴에서 실패하지 않았는가? 그러므로 절대 완전이란 하나님께만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다.

사람들은 또한 본성적인 완전을 많이 생각한다. 우리의 죄 된 본성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야 제거될 것이며, 그 후에야 속으로부터 나오는 죄의 충동들이 없게 될 것이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완전이라고 하면, 죄의 충동이나 유혹조차 느끼지 않는 본성의 완전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죄에 대한 연약성이나 충동이나 유혹조차 느끼지 않도록 다른 본성으로 변하는 본성적 완전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 일어나는 것이다. 성경적 완전이란, 죄의 충동을 받거나 유혹을 받아도 마음이 하나님께 굴복되고 하나가 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에 동하거나 죄를 선택하지 않는 것을 말하지, 죄의 충동이나 유혹까지 본성적으로 제거되는 “본성적인 완전”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에서는 본성의 완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성품의 완전을 말하고 있다.

2. 인간의 영역에서의 완전

피조물인 우리는 신성을 가지신 하나님과 똑같은 성품의 완전함을 가질 수는 없다. 우리가 수만 번 죽었다 다시 태어난다 해도 우리는 하나님과 같은 완전한 속성과 성품과 무한한 사랑을 가질 수 없다. 우리는 우리가 이해하는 한도 내에서 다만 희미하게 하나님의 사랑과 성품을 흉내 내고 그 사랑을 반사할 뿐이다. 그러므로 완전하게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역에서의 완전이 아니라 인간의 영역에서의 완전을 뜻한다.

3. 온전한 마음과 성품의 상태

완전해야 한다면, 도대체 우리의 무엇이 완전해야 한다는 것인가? 그것은 우리의 몸이 완전해지는 것도 아니고, 우리의 모습이 완전해지는 것도 아니고, 우리의 지식이 완전해지는 것도 아니다. 또한 사람 앞에 드러나는 우리의 행위가 완전해지는 것도 아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완전은 우리의 마음, 우리의 동기가 거듭난 상태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예수님의 마음을 갖는 것을 말한다. 우리와 같은 인간의 본성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셔서 “고난을 통해 순종함을 배워서 완전하게 되신”(히 5:8, 9) 예수님의 마음(빌 2:5)을 갖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무엇이 아닌 우리 심령의 완전을 요구하신다. 이러한 마음에서만이 온전한 성품이 계발될 수 있기 때문이다. 웨슬리는 그의 책 “그리스도인의 완전”에서 “완전은 의도의 순수성이며, 마음의 할례이요, 또 다른 각도에서 볼 때에 완전한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이 적당하다”고 말했다.

4. 완전한 성품

완전과 죄 없는 상태에 대하여 말할 때, 우리는 그 정의를 성품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완전에 대한 정의를 논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올바른 완전의 개념이다. 성경은 우리의 성품을 말하면서 완전하라고 하는 것이다.
요약해 보면, 완전한 상태란
첫째는 죄로부터 영혼이 정결케 된 순결한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며,
둘째는 그 정결케 된 마음이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으로 채워지는 것이고,
셋째로 성령의 감화에 온전히 굴복된 마음을 통해, 성령께서 주관하시므로 성령의 열매가 성품과 삶을 통해 나타나는 것이다. 그런 상태를 완전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 상태는 완전한 사랑(고전 13장)을 가진 상태이다. 사랑은 소극적인 의미에서는 죄악적인 모든 것을 추방하며, 적극적인 의미에서는 사람의 마음을 채워 사람의 모든 말과 행동을 지배한다. 우리의 모든 생각과 동기는 순결하고 거룩해야 한다. 거듭난 마음에서만이 순결한 사랑의 성품이 계발될 수 있다.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실 때에 그분은 우리 안에 그분의 순결한 사랑의 성품을 창조하실 것이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