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회사_16세기 침례 논쟁과 왈덴시안

 

16세기 종교개혁 당시 소위 성직자들의 논쟁 때문에 재침례 성도들이 더욱 증가했고, 다음의 사항들의 보고서가 있다. 그러는 가운데 옛 왈덴시안들(old Waldenses)과 거룩한 침례 조항을 중요시하는 후스파(Hussites) 사이에 차이점이 드러났다. 1507년 그 당시에 헝가리에 있던 왈덴시안이 매우 심하게 박해당했다. 그들에 관한 설명에 의하면, 그들은 죄 없는 삶을 살았다. 그리고 1508년의 답변서에 뿐만 아니라 이후에 발표한 신앙 고백을 보면 그들은 유아세례에 대해서 어떤 말도 언급하지 않았음이 분명히 선언된다. 1521년 루도비쿠스 비베스(Ludovicus Vives)가 소개된다. 그는 어거스틴(Augustine)에 대해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전에는 성인이 혼자 침례를 받았고 심지어 어거스틴 시대에도 성인(장성한 사람) 침례의 관행이 이탈리아의 몇몇 도시에서 여전히 행해졌다.’ 옛 왈덴시안과 관련된 2개의 조항 중 하나는 교황에 반대한 것이고, 또 하나는 침례에 관한 것이다. 1540년에 데살로니가에 있는 교회들에 대해 언급되어 있다. 그 교회들은 사도 시대부터 믿음을 변함없이 지키고 있고 재침례 성도들에게 동의한다고 되어 있다. 두 명의 다른 저자가 데살로니가의 교회들에 관해 확증하는 내용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다른 작가들의 증언이나 믿을만한 전기에서 발췌한 것들이다.

기록에 보면, 터키에는 단지 교회가 3개 있지만, 데살로니가에만 기독교인들이 30개 이상의 교회나 예배당을 가지고 있다고 되어 있다. D. Vicecomes는 데살로니가의 기독교인들이 침례를 거행했던 때에 대해서 언급한다. 우리 선조들의 시대에 살다가 죽은 몇 명의 독실한 신자들에 대해서 말하자면, Thomas Van Imbrceck(A.D. 1558), Jacob de Roore(A.D. 1569), John Wouters van Kuyck(A.D. 1572), Christian Gastayger(A.D. 1586), Bartholomew Panten(A.D. 1592)에 의해서 남겨진 것들이 있다. 마지막으로 1600년쯤에 메니스트(Mennists)라 불리는 사람들이 수년 동안 믿고 행한 완전한 신앙 고백을 한다. …

믿는 자들을 구별하게 하는 표, 즉 그리스도의 법령에 따르면, 침례는 이 당시에 또한 정통 신자들(orthodox believers)이라고 불릴 수 있는 사람들이 올바르게 가르치고, 행하고 유지했던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서 말한 조항은 많은 반대와 폭력과 박해를 받아야 했다. 카톨릭교도들(그들은 거의 항상 이들을 반대했다)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다른 점에서 카톨릭교도들의 교리를 신봉하는 종파들이 박해했다. 그리고 그들은 공포와 두려움에 떨며 혼동된(Confused) 바벨(Babel)에서 생겨난 로마 카톨릭교로부터 도망쳐야 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은 진리를 모호하게 하기는커녕, 더욱 밝게 비추고 영광을 나타내곤 했다. 마치 구리와 대조되는 황금처럼, 깊은 계곡과 대조되는 높은 산처럼, 밤의 어두움과 대조되는 한낮의 빛처럼 진리는 더욱 분명하게 두드러졌다. 이것이 공격당한 진실뿐만 아니라, 진리를 옹호하는 사람들에 관한 그 당시의 실정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설명되고 증명되었다.

야곱 메르닝(Jacob Mehrning)의 「History of Baptism, 772p」은, 1500년부터 1600년까지인 16세기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다음의 말로 시작된다. “이 당시에 독일에서는 주로 소위 말하는 성직자들 사이의 격렬한 대립과 일단의 지식인들이 성직자들과 벌인 논쟁에 의해서 옛 왈덴시안과 그 성도들에 대한 가장 혹독한 박해가 일어났다.” 그러나 이 박해의 결과로 [왈덴시안]은 어떤 나라에서 볼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재침례 성도(Anabaptists)를 얻었다.

그러나 이 시대는 또한 독일에서는 루터, 스위스에서는 쯔빙글리, 나중에 프랑스에서는 칼빈(칼뱅)이 있었던 세기였다. 이 세기에 로마 카톨릭교에 대한 개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으로 로마 교황의 잘 알려진 권력과 수많은 카톨릭의 미신을 부인하고 반대하고 싸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개신교는 겉으로 너무 큰 불만을 피하기 위해서, 비록 카톨릭교도들이 유아세례에서 행했던 소금이나 침, 귀신 쫓기와 같은 많은 것들을 포기했지만, 유아세례에 관해서는 여전히 로마 카톨릭교를 따르고 있었다. 그들은 또한 카톨릭교도와 함께 맹세의 선서, 세속적인 권세의 지위, 적과의 전쟁, 때때로 서로 간의 전쟁 등과 같은 것을 존속시키고 있었다. 이러한 것들 중에서 옛 왈덴시안은 스스로 정결화 했고 그런 것들을 행하려고 하는 어떤 누구와도 교제하려고 하지 않았다.

16세기가 시작되기 전에 이미 몇몇 왈덴시안 그리스도인들은 분명히 비밀리에 후스파와 연합했다는 것은 사실이고, 그런 정책으로 이들이 또한 그들의 전 선생이었던 존 후스(John Huss)의 온화함을 따르려 했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후스파가 유아세례를 계속 유지하고 그들의 선생의 죽음에 대해 복수하려고 하며, 그를 죽인 사람들과 참혹한 전쟁을 벌이려고 시작했을 때, 후스파와 연합했던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크게 속았음을 알고 그들을 떠났다. 그리고 감히 그런 사람들과 함께 자신들이 구원받는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비록 적은 수지만, 몇몇 사람들이 그들과 함께했다. 따라서 왈덴시안은 대부분 옛 교우들에게 돌아갔지만, 후스파는 루터파, 쯔빙글리파, 칼빈주의자들에 의해서 받아들여졌다. 이들 파는 후스파와 함께 유아 세례뿐 아니라 전쟁을 찬성했다.

그러나 몇몇 왈덴시안은 나중에 배교하기 전에 후스파와 연합했고, 거의 몇 안 되는 사람들은 여전히 그들과 함께 남아 있었기 때문에, 후스파는 비록 잘못됐지만, 왈덴시안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따라서 그들이 혼합된 신앙고백을 가진 것은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그 신앙 고백은 부분적으로 왈덴시안의 옛 신앙 고백과 일치했고, 부분적으로는 혁신이나 인간의 법 때문에 질적으로 하락하였다. 예를 들면, 후스파의 침례 조항은 다음과 같이 되어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믿음은 첫 번째 성사인 침례를 존중하는 것들을 믿고 고백할 것을 강요한다. 이제 성인이 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믿게 된 사람은 누구든지, 그 말씀으로 영혼의 거듭남과 교화가 되었기 때문에 그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을 때 받는 힘과 똑같은 힘을 받아서 믿음을 통해 획득된 내적인 정결함의 표시인 외적인 물로 씻으므로 거룩한 교회와 연합되었다.”

역사적으로 성경 말씀을 순종하는 참 그리스도인들은 침례를 통한 구원관이나 유아세례를 인정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