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부_계명이 해주는 일

 

항해하는 사람들이 늘 쳐다보는 별이 있다. 그 별은 북두칠성이다. 북쪽 하늘에 국자 모양을 이루고 있는 별 7개. 북두칠성은 옛부터 항해의 길잡이로 쓰이는 별이었고 길을 잃은 항해사들이 가장 먼저 찾는 별이었다. 북두칠성은 하늘을 나는 비행기의 항법 기준도 되고 있다. 만일 그리스도인의 신앙 생애에 있어서 뚜렷한 길잡이나 표준이나 기준이 없다면 신앙은 표류하고 말 것이다. 밤하늘의 북두칠성이 항해하는 사람들에게 항상 올바른 방향을 가리켜주듯이, 계명은 그리스도인들을 하늘의 항구로 인도하는 길잡이가 된다. 계명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바른 지침서이며 구원을 가르쳐주는 고마운 참고서이다. 만일 계명이 없었다면 우리는 구원의 표준도 심판의 기준도 알 수 없었을 것이며, 하나님의 성품을 가늠하거나 하나님의 왕국의 원칙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계명 속에 나타난 모든 사랑의 원칙들은 하나님의 성품이 어떠하시다는 사실을 계시해 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의 시민이 될 사람들이 갖추어야 할 성품과 지켜야 할 법칙과 표준에 대해 알려준다. 

시편 기자는 계명 속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사랑과 구속의 경륜의 신비함을 깨닫고 그의 영감의 시에서 율법, 곧 하나님의 계명에 대해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나로 주의 계명의 첩경으로 행케 하소서. 내가 이를 즐거워함이니이다”( 시 119:35 ).
“주의 법은 나의 즐거움이니이다”( 시 119:77).
“내가 보니 모든 완전한 것이 다 끝이 있어도 주의 계명은 심히 넓으니이다.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묵상하나이다”( 시 119:96~97).

계명의 참 의미와 뜻을 아는 자만이 하나님의 법을 사랑하며 사모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시편 기자야말로 하나님의 계명의 오묘한 뜻을 알고 그것을 즐긴 자가 아닌가!

1) 인도자 계명

사도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계명을 가장 적절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는 율법, 계명을 몽학선생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갈3:24 ).
몽학선생은 학생을 도와주는 가정 교사이다. 헬라 시대에는 주인의 자녀가 6~7세가 된 시기로부터 성인, 보통 12살 혹은 15~16세가 될 때까지 일상적인 시중을 들던 전문 노예가 있었는데, 그 사람을 몽학선생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생활의 전반적인 면, 곧 의복, 식사, 교양, 훈련까지 여러 면에서 시중을 들고 학교까지 안전하게 인도하며, 성인이 될 때까지 후견인으로서 책임을 졌다. 몽학선생의 원어는 “파이다고고스”로, ‘아이’를 뜻하는 ‘파이스’와 ‘인도하다’는 뜻의 ‘아고’가 합성되어 만들어진 단어이다. 아이를 지도하고 가르치는 교사, 주로 어린이의 보호자나 안내자의 성격이 강했던 이 몽학선생은 초보적인 교사 역할을 감당했으므로 ‘초등교사’라고도 불렀다. 사도 바울은 계명을 묘사할 때에 이 용어를 적용시켰다. 이 개념을 통해 하나님께로 안전히 인도하는 계명의 역할을 적절히 묘사해 주고 있다. 그렇다. 우리를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것이 율법이 가지고 있는 가장 중요한 기능이요 목적이다.

2) 가르치고 깨닫게 하는 계명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롬 7:7).
계명이 없었다면 우리는 결코 우리의 상태를 알지 못했을 것이다. 계명이 없이는 우리가 잃어버림을 당할 위기에 처해 있는지, 하나님의 뜻을 잘 행하고 있는지 알 길이 없다. 또한 하나님의 자녀로서 어떻게 행하고 살아야 하는지의 규범을 알 길이 없다.
계명은 우리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 깨닫게 한다. 율법은 죄를 심히 죄되게 하기 위하여 주신 것이다.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되게 하려 함이니라”(롬7:13).
율법은 죄를 나타내 보이고 개인을 그리스도께로 향하게 한다. 율법을 바라볼 때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의 영의 깨우침을 받아 예민해져서 우리 자신의 더러움을 볼 수 있게 된다. 그때에 우리는 더러움에서 깨끗하게 될 길을 찾게 되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정결케 된다는 복음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계명은 우리를 비춰보는 거울과 같다. 거울이 우리의 얼굴에 묻어 있는 때를 지울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한 사실이다. 하루 종일 거울을 들여다본다거나 거울로 얼굴을 문지른다고 해서 깨끗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거울이 하는 일은 얼굴에 묻어 있는 더러운 것들을 보여 주어서 더러운 사람에게 세수하고 씻도록 지시해 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율법도 죄인에게 그의 형편을 알려줌으로써 죄인을 정죄하고 참 정결함을 받기 위하여 십자가로 가도록 지시해주는 것이다.

1. 표준이 되는 계명

하나님의 계명은 의에 대한 그분의 표준이다. 계명은 우리에게 바라시는 하나님의 모든 뜻을 표현하고 인간의 모든 의무를 가르쳐준다. 성령의 활동을 통하여 그것들은 죄를 지적하며 구주의 필요성을 깨닫게 한다. 인간의 법은 명백한 범행에 대해서만 논하지만, 십계명은 "심히 넓"(시 119:96)어서 우리의 가장 은밀한 생각과 욕망과 질투, 시기, 욕정 및 야심과 같은 정서까지 취급한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에서 하신 설교에서 율법의 이런 신령한 차원을 강조하시고 범죄는 마음에서 시작되는 것임을 나타내셨다(마 5:21, 22, 27, 28; 막 7:21~23). 그러므로 하나님의 계명을 보고서야 우리의 표준을 깨닫게 된다. 십계명이 비록 짤막한 일련의 금지 조항을 나타내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 이상이다. 그것은 원대한 원칙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우리가 해서는 안 되는 일뿐만 아니라 해야 할 일까지 망라하고 있다. 우리는 악한 행동과 생각들을 삼가야 하며 하나님께서 주신 우리의 재능과 은사들을 선을 위하여 사용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2. 행복의 울타리 계명

십계명의 모든 조항이 “하지 말라”라는 금지 사항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 같이 보이지만, 계명을 숙고하여 보면 모든 부정적인 금지 조항도 긍정적인 측면을 지니고 있는 것을 알게 된다. 예를 들어, "살인하지 말지니라"는 여섯째 계명은 "생명을 증진시키라"는 긍정적인 면을 지니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백성들이 이웃의 모든 사람들의 복리와 행복을 증진시키기 위해 노력하기를 원하신다. 더욱 심원한 의미에서, 십계명의 모든 조항은 구원과 영생에 대한 복음을 제시해주고 있으며 조항마다 긍정적인 원칙에 기초되어 있다. 십계명의 금지 사항들은 순종할 경우 행복에 대한 확실한 보증이 된다. 그래서 계명은 행복의 울타리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순종할 때에 보호벽이 되는데, 하나님께서는 계명 속에 의의 불변하는 원칙들을 계시하심으로 범법의 결과인 악과 불행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신다.

계명은 참된 자유를 제공한다. 십계명에 대한 순종은 우리에게 참된 자유를 보장해 준다. 하나님의 율법의 테두리 안에, 우리의 행복을 위해 둘러주신 울타리 안에 산다는 것은 죄로부터 벗어난다는 뜻이다. 그것은 죄와 죄의 결과에 수반되는 모든 것, 계속적인 근심과 걱정, 불행, 양심의 가책, 생애의 활력을 시들게 하는 점증되는 죄의식과 후회로부터 자유롭게 됨을 의미한다. 시편 기자는 "내가 주의 법도를 구하였사오니 자유롭게 행보할 것이오며"(시 119:45)라고 말하였다. 야고보는 십계명을 "최고의 법", "자유케 하는 완전한 법"(약 2:8, 1:25)이라고 언급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요 8:34)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범할 때, 우리에게는 자유가 없다. 그러나 자유를 얻도록 예수님께서는 죄의 짐을 진 채 당신께 오도록 우리를 초청하신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메기 쉬운 당신의 멍에(마 11:29, 30)를 주신다. 그 멍에 자체는 율법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멍에를 멜 때, 그분께서는 무거운 짐을 져주시며 순종을 즐거운 것이 되게 만들어 주신다. 전에는 불가능하였던 일을 가능하게 해주시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심령에 새롭게 기록된 율법은 기쁨과 즐거움이 되는 것이다.

3) 은혜 아래 혹은 율법 아래?

많은 기독교인들이 “우리는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기 때문에, 더 이상 계명을 지킬 필요가 없다”라는 말을 한다. 계명을 지키고, 계명에 대해 말을 하는 것 자체가 율법 아래 있다는 증거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은혜 아래 있다”는 것과 “율법 아래 있다”는 의미가 무엇일까? 이것에 대한 정확한 답을 로마서 6장 14,15절에서 발견할 수 있다.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그런즉 어찌 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여기에 “율법 아래 있는 사람”과 “은혜 아래 있는” 사람들의 차이가 확연하게 나온다. 이 성경 구절의 말씀대로 은혜 아래 있는 자들은 죄가 주관하지 못하는 사람이고,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은 죄가 그들을 주관하고, 죄가 시키는 대로, 그대로 끌려가는 사람들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율법 아래 있는 사람들은 죄의 노예로서 율법의 정죄와 심판 아래 있는 것이다. 율법 아래 있다는 것은,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받으려는 것이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에게는 계명이 무거운 짐이 된다. 왜냐하면 마음이 새롭게 바뀌지 않았으므로 하나님의 법을 사랑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법을 지키고 싶은 마음도 없고, 그 법을 지킬 수도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요일 5:3 ).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계명은 무거운 것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의 법을 주야로 묵상하고 그것을 사랑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않고 거듭나지도 않은 사람에게는 계명은 무거운 것이 되고 억누르는 것이 된다. 그런 사람은 자신의 행위로 끊임없이 계명을 지키기 위하여 애를 쓰게 되므로 무거운 짐에 눌려있게 된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롬 3:19).

흔히 기독교인들이 이분법적인 방법으로 성경의 시대를 두 시대로 나누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과 정면으로 위배된다. 그 사상은 구약 시대는 율법 시대이고 신약시대는 새 언약의 은혜의 시대라는 사상이다. 성경은 아브라함과 모세가 구원을 얻는 방법은 현재의 구원 얻는 방법이 다르다고 말하지 않는다. 구약 시대에도 그들이 율법을 지키는 행위의 여부에 따라서 구원을 얻지 않았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분의 보혈의 피의 공로로 받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참 믿음은 사람을 변화시켜 계명을 지킬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준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고 받아들이는 순간,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에 임하셔서 율법의 요구를 이루는 순종의 열매를 우리의 삶 속에서 생산해 내신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그것이 율법 아래 있지 않게 되는 비결이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은 계명을 사랑하게 되고 계명을 순종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 은혜의 능력 아래 있다. 은혜 아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과 계명과 반역하거나 그것을 범하지 않으며, 그래서 법에 따라 정죄 당하지 않는 상태에 있는 것이다. 은혜란 죄를 용서해주는 것 이상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죄의 권세를 누르고 하나님의 법을 순종하게 하는 능력을 주는 힘이며 파워이다. 성경은 죄와 은혜가 왕 노릇 한다고 말하고 있다. 죄도 다스리는 능력이 있고 은혜도 다스리는 능력이 있는 것이다. 은혜가 왕 노릇 한다는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전적으로 우리의 마음을 주장하고 다스린다는 의미로, 우리가 주님을 믿고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완전히 바칠 때,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이 우리를 다스리게 되고, 은혜가 우리의 의지에 역사 하여 매 순간 주님의 뜻을 따르며 계명을 지키는 삶을 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