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부_비판이 맺는 열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마 7:1)

그리스도인이 첫사랑을 잃어버렸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 자신의 행위로 구원을 얻으려는 성향이다. 신앙생활에서 주님의 능력과 은혜를 의지하는 일을 그치게 될 때 행위로 의를 얻으려는 율법주의가 나타난다. 머릿속에서 이론이나 지식적으로는 잘 알지만, 그 지식이 성령의 터치와 하나님의 사랑으로 덧입혀져 진리로 영혼이 성화되는 진정한 신앙으로 승화하지 못했을 때 율법주의에 빠지게 된다. 

율법주의는 마음을 하나님에게서 떠나 자기 자신에게만 초점을 맞추게 한다. 그러나 결국 자신이 의를 이룰 수 없음을 알게 되고 인간적인 부당한 요구 조건들과 많은 규칙과 규정들을 만들어 자신에게나 다른 사람들에게 적용시킨다. 하나님의 사랑이 마음에서 사라짐과 아울러 동료 인간에 대한 사랑도 소멸된다. 그리하여 많은 부당한 요구 조건을 내걸고 인간이 고안한 그 제도나 표준에 미달하는 모든 사람을 비판하게 된다.

1) 비판과 판단이 부르는 결과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도 그랬다. 그들은 겸손과 감사함으로 하나님 앞에 예배해야 했지만, 영적 교만으로 가득 차서 그저 생각하는 것이 “내 자신, 내 기분, 내 지식, 내 방법” 뿐이었다. 그들은 자기들이 성취한 것들을 기준 삼아 다른 사람들을 비판했다. 내가 이룬 것, 내가 행한 것, 내가 만든 결과 등 자신의 행위와 성취를 다른 사람과의 것과 비교하며 비판했다. 율법주의에는 반드시 비판과 비교가 따른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도 그랬다. 그들은 화려한 관복을 입고, 비판하고 정죄하기 위하여 재판석에 앉았다. 그런데 지도자들뿐만 아니라 모든 유대 백성들도 거의 동일한 정신을 가지고 양심의 영역에까지 끼어들며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있는 문제를 놓고 서로 심판하였다. 그런 현상을 보시고 예수께서는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이어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마 7:2 )고 하셨다. 이 말씀은 황금률이 거두는 당연한 결과를 언급하신 것이다. 다른 사람을 비판할 때에 그 비판은 반드시 비판을 되부른다는 진리를 우리에게 각인시켜 주신 것이다. 누가는 그의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이렇게 기록해 놓았다. “비판치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눅 6:37). 설명이 필요하지 않는 얼마나 정확한 말씀인가!

비판과 판단은 똑같은 결과를 부른다. 다른 사람에게 향한 비판의 눈은 곧 다시 자신에게 돌아온다. 이 말은 아무도 자신을 기준으로 삼지 말라는 의미이다. 나의 의견, 어떤 의무에 대한 나의 견해를 표준으로 삼지 말라는 뜻이다.
사람들이 우리의 이상에 도달하지 않을지라도 우리는 마음속으로 정죄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 맘에 들지 않는 사람이나 우리가 바라는 이상이나 표준에 다다르지 못하는 사람을 보면 못마땅하게 느낄 때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비판하지 말며, 그들의 동기에 관해 추측하지 말고, 판단하지도 말아야 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없고, 또 스스로 결점이 많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심판할 자리에 앉을 자격이 없다. 모든 행동의 숨은 동기를 아시는 하나님께서만이 각 사람의 사정을 결정하실 수 있으시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롬 2:1).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거나 비판하는 사람은 자기 스스로 죄가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심리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어떤 행동을 보고 화를 내는 것은, 그것을 보고 화를 내는 그 사람 자신이 똑같은 면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황금률은 여기에도 적용된다. 만일 우리가 남을 판단하고 비판한다면 그 똑같은 헤아림과 판단을 받는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2) 내 눈의 들보와 형제 눈의 티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 7:3).
예수님의 이 말씀은 타인의 결점을 잘 찾는 사람에 대한 교훈이다. 어떤 사람의 품성이나 생활에서 결점을 발견할 때 그것을 지적하기 위해 안달하는 사람들이 있다. 또한 결점을 고쳐주기 위해 재빠르게 날카로운 지적을 가하는 사람이 있다. 예수께서는 이런 행동은 비판의 대상이 되는 그 사람의 결점과 비교할 때 마치 티에 대한 들보와 같은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곧 비판적인 정신에 빠진 사람은 그가 비난하는 사람보다 더욱 큰 죄를 범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동일한 죄를 범할 뿐 아니라 거기에 자만과 비평이 더해지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유일한 표준이시다. 만일 우리가 자신을 다른 사람들의 표준으로 삼는다면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의 위치에 놓는 것이 된다. 그러면 하늘 아버지께서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요 5:22)셨으므로, 사람들의 동기를 비판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의 특권을 찬탈하는 것이다. 비판하거나 과장하는 것은 사랑과 용서의 정신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 완전히 굴복하는 회개를 경험하지 않은 사람들은 구주의 사랑에서 나오는, 마음을 여는 감화를 잘 끼치지 못한다. 복음의 따뜻하고 친절한 정신을 잘못 나타내며 그리스도께서 위해 돌아가신 귀한 영혼들에게 상처를 주기 쉽다.

냉랭하고 비판적이고 용서를 모르는 정신은 율법주의의 특성이다. 신앙 경험에 사랑이 없으면 예수님도 거기에 계시지 않는다. 그분의 임재가 없는 신앙은 빈 껍데기 신앙이며, 아무리 부지런히 활동하고 열성을 내어도 주님과는 무관한 것이 된다. 타인의 결함을 찾아내는 데 남다른 지각과 예민함을 가진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신에 빠져 있는 각 사람에게 예수께서는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하라”고 말씀하신다. 죄를 지어 켕기는 사람이 누구보다 먼저 죄를 알아챈다. 이런 사람은 남을 비난함으로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악을 감추거나 변명하려고 애쓴다. 최초의 부부는 죄를 범하자마자 서로 비난하기 시작했다. 인간은 그 본성이 그리스도의 은혜 아래 있지 않을 때 필연적으로 이렇게밖에 될 수 없다.

3) 남에게 조언할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은?

사람들이 한번 비난하는 정신을 가지게 되면 형제의 결점을 지적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게 된다. 자기 마음대로 그것이 교정하기 위해 강압적인 방법을 사용하려고 할 것이다. 힘이 미치는 한 사람들을 강요하여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하게 할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 당시에 유대인들이 한 일이고, 교회가 그리스도의 은혜를 상실했을 때 언제나 해 온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을 강요하지 않으시고 당신께로 이끄신다. 그분께서 사용하시는 유일한 강제 수단은 사랑의 강권이다.
예수께서는 비난하는 자들에게, 타인의 잘못을 지적하려고 하기 전에 먼저 자신의 눈에서 들보를 빼내고, 비난하는 정신을 버리고, 죄를 자백하고 버리라고 명령하신다.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은 심령의 변화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조언해주는 위치에 서기 전에 먼저 이 경험을 해야 한다.

만일 어떤 사람의 생애에 위기가 닥치거나 문제가 생겨서 조언이나 권면을 주어야 할 때, 우리의 말은 평소에 어떤 모본과 감화를 끼쳤는가에 따라서만 영향을 줄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을 행하기 전에 먼저 선하게 되어야 한다. 우리의 마음이 은혜로 겸허하고 순수하고 부드러워지기 전에는 다른 사람들을 변화시킬 감화력을 발휘할 수 없다. 잘못을 범한 형제에게 조언할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이 무엇인지 아는가? 그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이라도 버릴 수 있는 사랑이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우리 눈에서 들보를 빼고 형제를 도와줄 준비를 하게 된다. 그제야 형제에게 가까이 나아가 그를 감동시킬 수 있고 도울 수 있다.

만일 예수님이 우리 마음속에 내재하신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살피며 그들의 잘못을 폭로하는 길을 걷지 않을 것이다. 비난하고 정죄하는 대신에, 도와주고 축복하고 구원하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 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 역시 여러 번 실수하고 잘못을 범했다는 사실을 상기하며 서로 불쌍히 여겨야 한다. 갈보리의 십자가를 자주 쳐다보는 사람은 자기의 죄 때문에 구주께서 달리셨음을 생각하고 그의 죄악의 정도를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헤아려 보지 않을 것이다. 결코 다른 사람을 정죄하기 위하여 재판석에 앉지 않을 것인데, 갈보리의 십자가의 그늘 아래서 행하는 사람들에게는 비판이나 자만의 정신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람들과 교제할 때 늘 자신을 상대방의 처지에 두도록 하자! 상대방의 아픔과 곤란과 실망과 기쁨과 슬픔에 함께 들어가자! 우리가 자신을 다른 형제와 동일시하고, 우리가 그들과 처지가 바뀌었을 때 대접을 받고자 하는 그대로 행하자! 황금률은 진정한 친절의 원칙이며 진정한 예의의 원칙이다. 황금률의 표준이야말로 바로 그리스도교의 참 표준이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 싶은 대로 대접하라는 황금률을 지키기 원하는가? 비판은 비판을 부르고 동정은 동정을 부를 것이다. 우리가 베푸는 자비와 사랑은 메아리처럼 우리에게 돌아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