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부_황금률이 말하는 이웃

 

 

계명과 황금률은 이웃을 사랑하고 남에게 잘 대접하라고 말하고 있는데, 황금률에 나타난 ‘남’과 계명이 가리키는 ‘이웃’은 누구일까?

1) 이웃에 관한 그들의 논쟁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모이기만 하면 자주 “내 이웃이 누구인가?”라는 주제로 논쟁을 펼쳤다. 이방 사람들과 사마리아인들은 이미 그들에게 외인이요 원수로 여겨지고 있었기 때문에 논쟁 대상에서 제외되었지만, 같은 유대인끼리도 같지 않은 여러 계층의 사람들을 어떻게 구별할 것인가에 대해 늘 논쟁을 벌였다. 그러나 그렇게 논쟁을 벌이는 이면에는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을 순종하고 싶은 마음이 없이 핑계거리를 찾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이웃이 누구이냐고 따지는 이유는 사랑이 없고 사랑을 베풀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마음과 불신, 그리고 이기심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들은 너무나 이기적이어서 스스로 장벽을 쌓아 이웃으로부터 자신들을 차단하고 격리하고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택하셔서 이방과 주변 국가와 민족들에게 빛을 비추려고 하셨지만, 그들은 진리의 빛과 하늘의 축복과 지식들을 이웃에게 나눠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은 세상의 빛이 되는 대신, 높은 장벽을 세우고 이기심과 편견에 빠져 구원의 혜택이 이방과 이웃 나라들에 베풀어지는 것을 기뻐하지 않았고 값없이 주어진 하늘의 선물을 나누고 싶어 하지 않았다.
제사장들과 랍비들과 장로들은 자신을 깨끗하게 하기 위한 여러 가지 의식으로 한 평생을 보냈다. 그들은 무식하고 부주의한 사람들과 접촉하게 되면 더러워지게 되며 그것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많은 수고를 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들은 이 “깨끗지 아니한 자”들을 이웃으로 여겨야 하는가가 늘 고민이었다. 얼마나 모순된 바리새주의인가!

2) 고통받는 자의 이웃

1. 이웃이 누구오니까?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그들의 논쟁거리이기도 했던 ‘이웃’에 관한 해결도 얻고 싶었던 한 율법사가 예수님께 나아와 질문을 던졌다. 되받아 물으신 예수님의 질문에 율법사는 “네 마음을 다하며…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니이다”라고 대답했다. 계명의 두 큰 원칙에 대한 그의 바른 대답은 예수님의 칭찬을 들었다. 예수께서는 그의 마음을 꿰뚫어보시며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고 하셨다. 자신의 영적 상태에 대해 만족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던 율법사는 순결하신 주님 앞에서 자신이 전혀 계명을 지키지 못하고 있었음을 느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깨우침을 받았지만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대신에 그것을 핑계하려고 했다. 그는 진리를 인정하는 대신에 오히려 계명을 지키기가 얼마나 어렵다는 것을 드러내고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면서, “내 이웃이 누구오니까”라는 또 하나의 질문을 던지므로 양심의 소리를 피하려고 했다.

2. 자비를 베푼 자

그때 예수님은 모든 사람의 입을 다물게 하는 그 유명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얘기하셔서 ‘이웃’에 대한 개념을 확실히 하시는 반면, 진정으로 계명을 지키는 정신과 마음이 무엇인가를 가르치셨다.
당시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기 위해서는 유대 광야를 지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광야를 통과할 때 사람들은 종종 강도의 습격을 받았다. 예수님의 이야기 가운데 강도를 만나 귀중품을 빼앗기고 거의 죽게 된 채로 길가에 쓰러진 사람의 이야기는 당시에 실화로 널리 알려졌던 것이었다. 그러나 피를 흘리고 쓰러져있는 사람을 도와준 사람은 제사장도 레위인도 아닌, 유대인들이 개처럼 취급하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지혜가 많으신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설득력 있는 방법으로 계명의 원칙을 제시해 주신 동시에 그 이야기를 듣는 모든 사람들이 이 원칙을 지키지 않고 있음을 지적하셨다. 율법사는 그리스도의 말씀 가운데서 한마디도 책잡을 수 없었다. 그리스도에 대해 가졌던 그의 편견이 사라지고 마음속에 깨닫는 바가 컸지만, 그러나 그는 아직도 민족적 편견에서 탈피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마리아인에게 명예를 돌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예수님이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고 물으셨을 때, 다만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라고 대답하였다. 예수께서는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말씀하셨다.

3) 예수님을 대표하는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에 등장하는 사마리아 사람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을 몸소 실천함으로써 자기를 업신여기는 사람들보다 더 의롭다는 것을 드러내 보였다. 예수님께서는 이야기를 통해 진정한 이웃이 누구인가를 가르쳐 주셨는데, 우리가 자비와 사랑을 베풀어야 할 이웃은 바로 고통받는 사람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다. 이웃이란 우리가 속한 교회의 교인이나 우리와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인종이나 피부색이나 계급적 차별과는 관계가 없이, 우리의 도움이 요구되는 모든 사람들이 이웃이다. 시험과 역경 속에서 고통을 당하는 사람, 가난하고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 마음이 상처를 받고 용서를 바라는 가련한 사람, 진리를 모르고 오류 속에서 방황하는 잃어버린 양들, 하나님의 소유인 모든 사람들이 다 우리의 이웃이다.

거룩한 진리가 우리의 삶 속에서 실천을 통해 많은 감화를 끼쳐야 함에도 실제로는 그렇지 못한 이유는 우리 속에 진정으로 이웃을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며 사심 없이 도와주려는 자비와 동정심이 결여되었기 때문이다. 우리 마음속으로부터 예수님의 사랑이 동기가 되어 행하는 실천이 아니라면 아무리 선행을 많이 해도 아무런 가치가 없다.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고 말씀 속에 나타나 있는 모든 진리를 믿는다고 말할 수 있으나, 우리의 믿음과 사랑을 일상 생애에 실천하지 않으면 이웃에게 아무런 유익도 주지 못한다. 올바른 모본이 신앙 고백보다 훨씬 많은 유익을 세상에 끼친다.

사마리아 사람은 자기의 생명이 위험에 처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처 입은 사람을 자기 형제처럼 대했다. 이 사마리아 사람은 그리스도를 대표한다. 우리가 상처를 입고 죽게 되었을 때에 그분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셨다. 그분은 우리를 피해 지나가지 않으셨으며 우리로 속절없이, 아무 소망도 없이 죽도록 버려두지 않으셨다. 그분은 온 하늘 천군의 존경을 받으시던 거룩하고 행복한 하늘 집에 머물러 계시지 않으시고 우리의 상처를 보시고 고쳐주시려고, 또한 당신을 배반하는 원수들을 구원하시려고 죽으셨다. 당신을 죽인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셨다.
그분은 당신의 모본을 가르키시며 제자들에게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로라”(요 15:17),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고 말씀하셨다.

사랑은 신앙과 경건의 기초이다. 사람이 말로는 아무리 공언한다 할지라도 자기의 형제들에 대해 이기심 없는 사랑을 갖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가진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려고 애쓰는 것만으로는 결코 이런 정신을 가질 수 없다.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 가운데 있어야 한다. 자아가 그리스도께 몰입될 때에 사랑은 저절로 생겨난다. 성령의 역사는 마음속에 변화를 일으켜 그리스도의 본성을 사람 속에 심어준다. 진정한 신앙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생활 속에 거하시는 것이며 삶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원칙이다. 어떻게 이 일이 우리에게 일어날 수 있을까?
하나님의 사랑을 닮고 싶어 하는 열망으로 매일 주님 안에 거하고, 그분의 생애를 본받기 위해 매일 주님 안에 거하고, 그리고 그 사랑을 달라고 매일 간구하는 것이다. 우리 속에 거룩한 사랑이 계속 거하시게 하자! 그럴 때에 우리는 자연스럽게 황금률을 지킬 수 있는 사람들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