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회사_교황 바오로 4세의 종교재판

 

바오로 4세 통치 기간에, 왈덴시안 교회를 박해하려고 종교재판가들이 로마에서 파송되었다. 교황의 종교재판 소장, 알렉산드리니 추기경은 병사들을 거느리고 산 섹스토(San Sexto)의 거주민들을 추격했다. 주민들은 고문자들을 피해 이미 도피하였다.

“그들을 추격하여 산 속의 덤불숲과 동굴에 있는 은신처까지 몰아가면서 그 군대는 그들 중 다수를 살육했다. 도망친 사람들은 마치 들짐승처럼 피에 주린 하운드견들에게 쫓겼다. 한 그룹의 도망자들이 아펜니노 산맥으로 올라갔다. 그곳은 거의 접근 불가한 산 속의 피난처였고 그 군대는 그들을 제거하는데 실패했다. 그 후 그 총독이 칙령을 내렸는데, 그는 이 분리주의 그리스도인들을 박멸시키는데 정신없는 자로서 ‘산을 기어올라 왈덴시안의 근거지들을 공격하는 작업을 기꺼이 수행하겠다는 모든 산적들과 폭도들과 범죄자들에게 사면을 약속했다.’ 이 칙령에 충성하여 아펜니노의 비밀통로에 아주 익숙했던 폭도 패거리들이 모여들었다. 숲길을 헤치고 큰 암벽들을 기어오른 후 산 정상의 바리케이트로 사면에서 돌격하여 그 불행한 왈덴시안들을 학살했다. 이렇게 산 섹스토의 주민들은 박멸당했다. 어떤 이는 칼에, 어떤 이는 불에, 또 다른 이들은 피에 주린 하운드견들에게 찢겨 죽거나, 기아로 굶어 죽었다”(Wylie).

극도의 공포 분위기가 이태리 전역과 카톨릭 지배하에 있는 다른 국가들에서 형성되었다. 종교재판소들이 고용한 스파이들이 일체의 의심 가는 “이교적” 행동들을 고발했다.
“한 무더기의 고용된 스파이들이 이태리 전역에 흩어져서, 그들에게 주어진 추천장을 이용해 각 가정들을 출입하면서 교묘하게 사람들의 신뢰를 샀다. 그들이 이런 방법으로 얻은 비밀 정보를 종교재판가들에게 넘겼다. 그들은 가지각색의 인물들을 가장하여, 박식한 자들과 문맹자들을 쫓아다녔고, 궁정이나 수도원에서 동일하게 발견되곤 했다.”(M'Crie).

바오로 4세 치하에서 금서 목록은 더 확대되고 엄격하게 강제되었다.
“그 목록의 확정으로서 교황청 칙령을 선포하고, 아울러 그것이 효과적으로 실행되는지 살펴보기 위해서, 지체 없이 대리자들이 이태리의 여러 지방들로 급파되었다. 정죄된 책들의 운명은 이교도들에 대항하여 선언된 것과 동일했다. ... 불속에 던져진 책들의 수는 어마어마해서, 그것을 한 곳에 모두 모은다면 트로이의 화재에 비길 수 있을 정도였다. ... 이 기간 동안 수색은 너무나 엄격히 실행되어, 금지되 있는 책들을 발견할 목적으로 가택방문들이 지정되어 있었다. 만일 그것들을 불 속에 던지지 않으려는 사람들과, 지정된 기한에 제출하는 것을 잊은 사람들은 책을 땅에 파묻거나, 집 안에 철저히 숨기는 예방조치를 취했다.”(M'Crie).

바오로 4세의 기간에 수백 명의 성경신자들이 살인적인 박해로 죽어갔다. 만탈토, 산 시스토, 라 구아르디아의 왈덴시안 마을들은 파괴되었고, 그 주민들은 잔인하게 고문당했다. “산 시스토는 불태워졌다. 온갖 폭행당한 여자들과 아이들은 그 산맥을 따라 흩어졌는데, 거기서 그들 대부분은 사로잡혀 코센자로 압송되었다. ... 약 백 명의 나이 든 여인들에게 사형이 선고되었다. 전체 포로는 1,600명을 헤아렸고, 그들 모두에게 유죄판결이 내려졌다.”(Lea). “어떤 이들은 탑 꼭대기에서 던져지거나 절벽 위로 거꾸로 내동댕이쳐졌다. 다른 이들은 철 채찍으로 찢겨졌고, 마침내 활활 타는 막대기에 맞아 죽었다. 그리고 또 다른 이들은, 송진을 온 몸에 바르고 산채로 화형 당했다. ... 많은 사람들이 스페인 노예 갤리선으로 끌려갔다.”(Wylie). 1561년 몬탈토에서는 “마치 양우리처럼 그들도 모두 한 집에 갇혔다. 형 집행자가 와서 그들 중 하나를 끌어내, 자신의 얼굴을 냅킨(벤다)으로 가린 후, 그 집 근처의 벌판으로 끌고 가 무릎을 꿇리고 칼로 그의 목구멍을 잘랐다. ... 이런 식으로 88명의 모든 남자들이 도살당했다.”(Wylie). “좀 다루기 힘든 이들은 갤리선으로 보내졌고, 사역자들과 지도자들은 화형에 처해졌다. 이들 중 다섯 명은, 그들의 고통을 오래 지속시키고 무시무시한 표본으로 삼기 위해, 전신에 송진을 바른 후 산채로 화형시키기 위해 이미 코센자로 압송되었다. 도망자들을 포획하기 위해 머리 당 10크라운의 보상금이 제공되었고, 그들은 날마다 끌려왔다. ... 15세 미만의 모든 아이들은 왈덴시안 정착촌으로부터 최소한 8마일 이상 떨어진 카톨릭 가정들로 뿔뿔이 흩어졌고, 다른 계급과 혼인이 금지되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박해가 지속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았지만, 1561년 12월 12일자 그 총독이 보낸 편지에도 처리하라고 명령을 내리면서 죄인들의 재판에 관해 암시하고 있다.”(Lea). 라 구아르디아와 산 시스토와 그 주변 지역은 불에 태워져서 완전히 폐허가 되어버렸다. 발견할 수 있었던 모든 속어로 된 성경 역본과 서적들은 종교재판소들에서 파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