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편집실

21세기 현대의 교회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 크게 번성해 있습니다. 캄캄한 밤에 도시를 내려다보면 온 골목마다 붉은 십자가가 눈에 들어옵니다. 교회를 다니는 수많은 사람은 자신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처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주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이처럼 많았던 때는 지구 역사상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또한 기독교가 이렇게 힘이 없고 타락하여 세상 사람들에게까지 웃음거리가 되는 때도 역사상 없었던 것 같습니다. 몇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의 하나는 십자가의 참된 의미를 바로 아는 기독교인이 매우 적기 때문일 것입니다.

십자가의 참된 의미가 무엇일까요? 왜 하나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해서 인간을 구원하시는 것일까요? 왜 하나님께서는 대속의 죽음을 죽으셔야만 했을까요? 그 길만이 인류를 구원하는 유일한 방법이었을까요? 우리 생애의 중심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되어야 합니다. 그 곳에 우리의 모든 것이 있습니다. 십자가, 그 곳에서 모든 것이 출발합니다.

사도 바울은 여러 전도의 경험 끝에 정교한 논쟁이나 토론을 피하고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고전 2:2). 십자가의 사랑을 깨닫고 경험하는 사람들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을 사도 바울은 경험적으로 알게 된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십자가의 참된 의미를 진실로 이해한다면, 우리의 마음과 생애에 놀라운 변화가 생기게 될 것입니다. 또한 오늘날 교회들이 이렇게 타락한 상태에 있지도 않을 것입니다. 이번 신앙기사에서 십자가의 참된 의미를 이해하여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은혜가 여러분의 마음속에 충만하시기를 간절하게 소원합니다!

- SOSTV 선교센터 편집실 -

제1부_꼭 십자가여야만 했을까요?

왜 십자가가 필요하게 되었을까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서 또 다른 방법이 없었을까요? 무한한 지혜를 가지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희생시키지 않고도 인간을 구속하실 수 있는 다른 계획을 생각해내실 수 없으셨을까요? 우주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도로 얻기 위하여서 다른 댓가를 마련하실 수는 없으셨는가 말입니다. 천사가 인류를 대신하여 죽을 수는 없었을까요?

예수님께서 갈보리로 가신 것은 전혀 다른 길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이유는 이 세상의 인류를 죄에서 구속하시기 위한 목적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거기에는 하나님께서 사탄 마귀와 싸우는 대우주적인 영적 전쟁의 의미도 내포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과 사탄 사이의 영적 전쟁은 십자가에서 최고도에 달하였었을 뿐 그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아니했습니다. 십자가라는 하나님의 무기는 창조 이전부터 하나님의 마음속에 감추어져 있었습니다. 혹시 인간이 자유 의지의 선택을 통하여 하나님을 반역하고 범죄하게 될 경우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과 은혜를 통하여 다시 구속할 것에 대한 계획이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마음속에는 있었습니다.


십자가가 생긴 이유

십자가가 세워진 이유는 사탄이 하늘에서 반역을 일으키고 전쟁을 시작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원래 아름다운 그룹 천사 중 하나였습니다. 에스겔은 마귀의 타락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계시의 말씀을 기록하였습니다.

에스겔 28:13-15 “네가 옛적에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있어서 각종 보석 곧 홍보석과 황보석과 금강석과 황옥과 홍마노와 청옥과 청보석과 남보석과 홍옥과 황금으로 단장하였었음이여 네가 지음을 받던 날에 너를 위하여 소고와 비파가 예비 되었었도다. 너는 기름 부음을 받은 덮는 그룹임이여 내가 너를 세우매 네가 하나님의 성산에 있어서 화광석 사이에 왕래하였었도다. 네가 지음을 받던 날로부터 네 모든 길에 완전하더니 마침내 불의가 드러났도다”

또한 이사야는 다음과 같이 사탄의 타락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Lucifer, 루시퍼)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 그러나 이제 네가 음부 곧 구덩이의 맨 밑에 빠치우리라”
사 14:12-15.

위의 말씀들을 미루어 보아 그의 타락은 자아몰입에서 나오는 교만에서부터 비롯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피조물 가운데서 가장 아름다운 존재였던 것 같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자신을 비기면서 하나님처럼 높아지겠다는 마음이 생겨서 다른 천사들을 유혹하면서 하늘에서 반역을 시작하였습니다. 그가 천사들 중 삼 분의 일 정도를 미혹하는 데 성공한 사실을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데, 요한계시록 12장의 말씀이 그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꼬리가 (용의 꼬리 - 필자 주) 하늘 별 삼 분의 일을 끌어다가 땅으로 던지더라...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으로 더불어 싸울새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 이기지 못하여 다시 하늘에서 저희의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 큰 용이 내어 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 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 쫓기니라” 계 12:4,7-9.

여기에서 용은 말씀 그대로 사탄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탄의 도전장

이 전쟁에서 사탄이 인류를 유혹한 수법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거짓말로 사람들을 기만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하와에게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하신 실과를 따 먹어도 괜찮다고 미혹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지 않고 소홀히 해도 별문제가 없는 것이며 영원히 살 수 있다고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다른 모든 실과들은 먹을 수 있지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만은 먹지 말라고 하신 이유는 선악과 자체에 독이 들어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권위를 상징하고 우주의 조화와 질서를 성립하는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존중성을 위하여 주신 명령이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존경의 마음이 이 세상의 평화와 생명을 영원히 아름답고 질서 있게 보존할 수 있습니다. 법이 없는 사회가 있을 수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사탄은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말하면서 그들을 미혹하고 기만하였습니다. 더 나아가서 마귀는 하나님을 이기적인 분이라고 인류에게 이간하였습니다. 그 사실은 창세기 3장에서 발견할 수 있게 되는데, 사탄은 아담과 하와가 그 금단의 과실을 먹으면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처럼 될 것이라고 말하고, 이것을 아는 하나님이 그것을 먹지 못하도록 금지시키신 것이라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이기적인 분이시기 때문에 선악과를 먹지 못하게 하셨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한 중상과 이간에 인류의 조상은 그만 넘어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들의 불신이 이 세상을 이러한 파멸로 몰고 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다시 회복되어 에덴동산으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길은 다시 하나님을 사랑하고 존경하며 그분의 율법을 존중하여 순종하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은 그렇게 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그 마음이 악하여지고 불순종에 익숙하여졌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 8:7.

그러므로 하나님께는 사탄의 이러한 참소들을 합리적이고도 공정한 방법으로 침묵시키셔야 할 필요가 생기게 된 것이었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이기적인 분이 아니고 인류의 평화와 영원한 행복을 원하시는 크신 사랑의 존재인 것을 증명해 주셔야만 했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계명은 우주의 질서와 평화를 위한 것으로서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요, 그것을 무시하고 깨뜨리는 날에는 세상의 파멸과 슬픔이 온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이셔야만 했습니다.

제2부_어린 예수와 십자가

죄가 시작되기 이전, 멀고 먼 태고 때에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께서는 만약 인간이 불신과 교만의 죄에 빠진다면 이 지구를 자아추구의 이기주의의 멸망 속에서 구원하시고자 하는 구속의 협정을 맺으셨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사람들이 자아추구를 버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추구하여 하늘 보좌에 앉을 수 있도록 계획하셨습니다. 그 깊이와 높이를 측량할 수 없는 십자가의 극적인 사랑의 표현을 죄짓지 않은 우주의 존재들에게 나타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이 일에 그의 십자가를 지고 계셨습니다.
우리가 어떠한 사람이든지, 만약 그리스도를 따르기 원한다면, 우리는 우리만의 십자가를 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자가 되기 위하여 사제나, 수도승, 성직자, 선교사, 교회 직원, 종교 지도자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죄된 세상에서 배양된 깊은 자아본위적 사상을 버리고 빈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따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자아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죽기를 싫어하는 씨는 결국 잃어버림을 당할 것이고, 땅속에 들어가 죽는 씨는 많은 열매를 얻을 것입니다. 자연의 법칙 안에 바로 하늘 나라가 세워진 창조적 원칙이 숨어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정부의 깃발은 바로 십자가이며 마귀가 하나님의 정부를 뒤엎기 위하여 십자가를 없애려 한다는 사실은 그리 놀랄만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마귀 사이에서 벌어지는 선악간의 싸움에서 하나님의 전략은 십자가의 깃대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으십니다. 사랑은 본능적으로 십자가를 선택합니다. 그 이유는 십자가만이 완전한 사랑을 표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너무나도 사랑하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의 길 이외에 다른 어떤 것도 생각하지 않으시고 그의 독생자를 주시고자 작정하셨습니다. 예수께서도 그 길을, 인류를 위한 신성한 사랑으로, 따르기로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는 “태초로부터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이 되신 것입니다(계 13:8, 참고). 누구의 마음속에 들어가든지 신성한 사랑은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십자가의 역사를 시작합니다. 죄에 대항하는 우리의 싸움은 창조주께서 하시는 똑같은 원칙에 근거하여서만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린 예수와 십자가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그의 인생을 통하여 보여주신 진리의 십자가는 깊은 아름다움을 담고 있습니다. 비록 완전한 인간으로서 모든 종류의 시험을 당하셨지만 그의 마음은 죄 없으셨으며, 정결하셨습니다. 이 사실은 놀라운 경이요 사랑의 보고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와 이 세상의 모든 인간과의 다른 점입니다.
아기로서 태어나셨을 때에 예수께서는 그가 하늘에 계셨을 때를 기억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이 세상의 모든 아기들처럼 태어나셔서 인간의 아기가 생각할 수 있는 그 이상의 것을 알지 못하셨습니다. 그는 목자들의 숭배를 깨닫지 못하였으며 박사들의 방문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큰 도시에 가보았던 운 좋은 아이처럼 시골 산 동네에 사는 친구들에게 하늘에서 천사들의 사령관이었던 때를 설명할 수도 없었습니다. 예수께서도 다른 모든 아이들처럼 우리가 배웠던 방식으로 지식을 습득하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아이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라고 적고 있는 것입니다(눅 2: 40, 52).
예수님에 관한 신비는 바로 그의 태어나심에 있습니다. 신이 인간이 되시고 이 땅에 태어나서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자라나셔야 하시고, 죄 없이 사신 것은 큰 신비입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그가 태어나실 때에 그의 지식에는 어떠한 초자연적인 과거의 기억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그 모든 것을 하늘에 두고 이 땅에 인간으로 태어나셨습니다.
예수가 12살이 되어 깊이 생각할 수 있는 때가 이르렀습니다. 그의 마음속에는 장래의 일을 형성할 수 있는 어떠한 모형이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유대 나라 명절이었던 유월절에 참석하였던 때는 12살 때였습니다. 처음으로 그는 유명한 사원들과 하얀 두루마기를 입은 제사장들이 피 흘리는 희생 제물을 제단에 올려놓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조심스럽고 경건하게 어린 예수의 마음은 희생양이 가진 상징적인 의미를 생각하였습니다. 제사장도, 어느 누구도 그 의미를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재갈 물린 말처럼 묵묵히 그들이 이해할 수 없는 의식을 행할 뿐이었습니다. 4000년 동안 하나님의 백성은 죄를 용서받기 위하여 짐승의 피를 바쳐왔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이 “왜 이러한 일을 행합니까?”라고 물으면 제대로 답변하는 자가 드물었습니다. 특히 예수님이 사셨던 당시에는 아무도 신비로운 그 희생의식을 설명할 수 없었습니다. 어린 예수는 아마 “소나 염소의 피가 정말로 죄를 없앨 수 있을까?”하고 의아해하였을 것입니다.
어린 예수는 다른 아이들처럼 친구들과 잡담과 놀이를 하지 아니하고, 심지어는 부모도 어떻게 할 수 없는, 깊은 생각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피를 뿌리는 그 장면이 그의 마음속 깊이 어른거렸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께서 처음으로 짐승들의 피가 우리의 죄를 속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에 그 마음에 어떠한 변화가 일어났는지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땅에 오시기 전 하늘에서뿐만 아니라, 이제 인간으로서도 무릎을 꿇고 깊은 심오한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 가라사대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히 10:5-7.

“아버지여 당신에게는 이러한 짐승의 피가 필요 없나이다! 당신은 그 안에서 아무런 기쁨을 찾을 수 없으니, 그 이유는 이것들이 어떠한 인간의 죄도 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가 바로 그이오니 나는 줄 수 있는 몸이 있고, 나눌 수 있는 피가 있나이다. 제가 여기 있나이다, 아버지여. 저로 하여금 하나님의 어린양이 되게 하소서. 제가 세상 죄를 위하여 죽겠나이다. 제 피가 속죄제물이 되겠나이다. 제가 이사야가 말한 그 ‘고통받는 일꾼’이 되겠나이다. 저로 인간의 죄를 위하여 상처받게 하시고, 멍들게 하시고, 채찍질 받게 하소서. 당신의 뜻을 따르리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계속해서 말하기를 예수께서 구약의 표상적인 봉사를 제하여 버리시고 자기 자신을 그 자리에 세우셨다고 하였습니다.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히 10:9,10.

영원 전에 미리 존재하였던 과거의 기억이 유월절 의식의 신비를 대신 설명할 수 없었습니다. 하늘에서 이 지구가 만들어지기 전에 있었던 “평화의 협정”은 “그 두 사람 사이에” 있었으며 (스가랴 6:13),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삼아 세상의 죄를 씻기로 하였지만, 예수께서는 이 세상이 있기 전에 하나님 아버지와 하신 그 계약을 기억해 내실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죄로 더럽히지 않은 정결한 예수님의 마음은 유월절 의식을 통하여 본 상징들을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히브리서 9:9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의지하여 드리는 예물과 제사가 섬기는 자로 그 양심상으로 온전케 할 수 없나니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만 되어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

히브리서 10:1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이것은 모두 비유이지...’ 예수께서는 생각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무죄하고, 순결하고, 거룩하고, 깨끗한 누군가가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죽임을 당하여 잃어버린 인류를 대속해야 한다... 이렇게 의미 없이 계속되고 있는 무의미한 의식은 이제 극적인 마지막을 맞게 함으로 의식의 실제적인 의미가 거룩한 희생으로 나타나야 한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박사들과 제사장들이 깨닫지 못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12살짜리 어린 예수는 그 의미의 중심을 이해하였습니다. 그의 어린 마음은 강한 의지의 힘으로 감싸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구원을 이루어 보려는 불쌍한 영혼들의 노력은 하나님의 은총의 자비 없이 그대로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이사야 59:15,16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하시고 그 공평이 없는 것을 기뻐 아니하시고 사람이 없음을 보시며 중재자 없음을 이상히 여기셨으므로 자기 팔로 스스로 구원을 베푸시며 자기의 의를 스스로 의지하사 의로 호심경을 삼으시며 구원을 그 머리에 써서 투구를 삼으시며...”

히브리서 9: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이 놀라운 사랑의 사업을 보세요! 그는 인간의 몸에 거하셨고, 영원 전의 모든 기억을 알지 못한 채 10년 동안 어린이로서, 단지 성경 말씀만 믿음으로써 사신 그리스도… 그는 영원 전 하늘의 사령관으로서 내리신 그 결정을 인간으로서도 선택하셨습니다. 그는 십자가를 지시기를 선택하셨습니다.

구원받을 수 있는 오직 한 길

하나님의 사랑이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우리 마음에 비치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께서 영원 전에 선택하신 그 길, 또한 어린아이로서 옛날 예루살렘 성전에서 결심하신 그 길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의 마음(십자가)을 품든지, 이 세상 신(마귀)의 마음(자아숭배)을 품을지는 우리가 선택해야 할 것이고 결과는 오직 십자가의 길만이 부활로 우리를 이끌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요 12:25.
두 십자가! 예수님의 십자가와 우리의 십자가. 그리스도를 선택한 강도가 졌던 그 십자가는 곧 우리의 십자가입니다. 또한 갈보리에는 또 다른 세 번째의 십자가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에는 구원이 주어질 수 없었습니다. 십자가상의 또 다른 강도는 고통과 죽음 속에서도 그의 마음을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반역적인 그의 정신은 마지막 죽는 순간까지 이 세상 신의 마음 (자아숭배)을 선택하고 예수를 거절하고 저주하였습니다. 우리도 그 강도처럼 십자가의 사랑을 거절하고 그를 따라서 영원한 어둠으로 떨어질 것인가요?
우리의 거룩한 모본께서 보여주신 그 십자가는 우리가 우리의 십자가를 지기에 쉽게 하십니다. 그의 십자가를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우리 자신의 십자가를 발견할 수 있고 또한 기쁨으로 이것을 지게 하는 힘을 찾을 수 있습니다.

제3부_십자가 대속의 참된 의미

우리는 베드로전서 2장 24절에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읽게 됩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어떻게 몸으로 타인의 죄를 질 수 있을까요? 이 사실을 이해하기 위하여 다음의 경험을 이해하도록 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죄를 짓고 나면, 예를 들어서 거짓말을 하거나 물건을 훔치고 나면 어떠한 반응이 우리의 몸에 나타나게 되는가요? 맥박이 빨라지고 가슴이 두근거리게 되며, 두려운 죄책감이 마음을 사로잡아 괴로움을 느끼게 되고, 얼굴이 빨개지며 식은땀이 몸을 적시게 됩니다. 그리고는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생기고 마음의 평화와 행복이 사라지게 됩니다. 이러한 것이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 나타나는 신체적인 반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러한 것이 우리가 우리 죄를 우리의 몸으로 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예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 죄를 당신의 몸에 대신 지셨다는 말씀의 의미를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십자가의 대속이란, 우리의 죄를 마치 예수님 자신의 죄처럼 인정하여 대신 전가시키는 것 이상의 큰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지셨다는 의미는 우리의 부채를 은행의 계좌 모양으로 다른 사람의 책임으로 넘겨 버리는 것 이상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셨다는 의미는, 우리의 죄로 인한 결과와 심판을 대신 경험하심으로써, 우리가 그러한 대가를 다시 치러야 할 필요가 없도록 하셨다는 실제적인 맞바꿈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에 대하여 미리 예언한 말씀들 가운데 특히 시편 40편은 우리의 눈을 뜨게 합니다. 시편 40편 12절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부르짖음을 듣게 되는데, 그 부르짖음은 다름 아닌 십자가상의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고통에 대한 예언인 것을 보게 됩니다. “무수한 재앙이 나를 둘러싸고 나의 죄악이 내게 미치므로 우러러 볼 수도 없으며 죄가 나의 머리털보다 많음으로 내 마음이 사라졌음이니이다”
죄가 전혀 없으시고 한 번도 죄를 범해 본 적이 없으신 구세주께서 나의 죄가 나의 머리털보다 많다고 말씀하고 계신 사실을 보세요! 다시 말해서 인류의 모든 죄악이 십자가 위에 달려있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 한꺼번에 전가되어 내리 누르는 형편을 표현한 말씀입니다. 조금 전에 생각해 보았듯이 우리가 죄를 범할 때 느끼는 죄책감과 같은 신체적인 반응들이 갑자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과 몸에 실제적으로 느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예수께서 인류의 모든 죄를 지금 자신의 몸으로 짊어지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죄인이 느끼는 절망감, 자비가 섞이지 않은 심판의 두려움과 그 죄책감의 뼈아픔을 순결하신 하나님의 어린양께서 갑자기 마음에 그리고 당신의 몸에 느끼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영원한 멸망의 죽음을 당하심

그래서 그분은 십자가에서 이렇게 부르짖으셨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그것은 순교자의 부르짖음이 아니었습니다. 어느 순교자가 하나님의 진리를 위하여 죽어 가면서 그러한 외침을 한 적이 있었습니까? 순교자들은 모두 다 기쁨과 소망 속에서 영원한 구원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목숨까지 바친다는 사실에 기뻐 찬송하면서 화형대나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져 가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예수님의 죽음은 순교자들의 죽음과는 달랐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그들이 받아야 할 죄의 결과를 대신 받아 주시는 대속의 죽음이었습니다. 한번도 하나님 아버지와 분리된 경험이 없이 늘 아버지와 하나이셨던 그분께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는 십자가에서 갑자기 하늘 아버지와 분리되는 느낌을 느끼신 것입니다. 죄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사이를 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용납하실 수가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죄를 지신 예수께서 통렬하게 부르짖으신 이유는 죄가 예수님을 지옥 같은 어두운 심연의 절망으로 몰고 갔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을 예언한 말씀으로 잘 알려진 이사야서 53장에서 우리는 더욱 명백한 말씀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사야 53: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이 말씀에도 우리가 받을 죄의 값을 예수께서 대신, 실재적으로 경험하여 주셨다는 사실을 말씀하여 주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죄를 지신 것은 그 죄의 고통을 대신 경험하여 주신 사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죄를 대신 책임지기 위하여 전가시키는 것 이상을 의미합니다. 또한 이사야서 53장12절 중반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보게 됩니다.

이사야 53:12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들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범죄하여 죽어가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렀습니다. 그분은 우리 대신 완전히 죽어 없어져 버리더라도 죄인들을 위하여 대신 죽기를 택하겠다는 우리는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강렬한 사랑을 나타내어 준 것입니다. 이 엄청난 사랑이 인류를 살게 하였습니다. 이 사실은 영원토록 연구와 경외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바울은 예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서 죄 그 자체가 되셨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지은 죄 그 자체가 되셔서 우리 대신 형벌을 받아주신 사실을 그렇게 강조한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부터 그러한 사실을 느끼셨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죄를 대신 몸에 지시는 경험을 시작하셨기 때문에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탄원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아니, 하늘 그 자체와 영원히 분리되어 죽어버릴 가능성을 내다보셨던 것입니다. 그 고뇌의 아픔을 과연 누가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육체의 고통이 아니라, 죄의 고통

예수께서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실 때를 기억해 봅시다. 예수께서는 신음하시다가 서서히 돌아가신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양편 강도들은 금요일 저녁까지 아직 죽지 아니했기 때문에 속히 죽게 하려고 다리를 꺾었지만 예수께서는 벌써 운명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를 향하여 큰 소리로 부르짖으시고는 갑자기 고개를 떨구시고 숨을 거두셨다고 성경은 마지막 장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이 갑자기 파열되어 돌아가신 증거입니다. 로마 군인이 죽었는지를 확인해 보기 위하여 주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찌르자 피와 물이 흘렀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심장이 작동하기를 멈추고 파열되었기 때문에 혈구와 혈청이 나뉘어서 물과 피가 따로 흘러내린 것입니다. 인류의 죄를 지시면서 그 괴로움과 죄의식을 더 이상 견디실 수가 없으셔서 예수님의 심장은 그만 터져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의 못박힘 때문에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죄가 찌르는 아픔들 때문에 돌아가신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 죄악들이 바로 예수님을 죽인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40편 12절은 예수님의 고통의 장면을 그린 예언에서 “내 마음이 사라졌음이니이다”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영어로는 “Therefore my heart failed me”(그러므로 내 심장이 멈추었나이다-필자 번역)라고 번역하고 있어 예수께서 죄의 무게 때문에 심장이 멈추어 버린 표현의 감각을 느끼게 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어린 양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일은 우리가 피상적으로 이해하는 것보다 훨씬 깊고 넓은 엄청난 의미가 그 속에 내포되어 있습니다. 이 사실을 각자 개인의 마음속으로 믿고, 정말로 감사하며 눈물겹게 받아들이는 자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나의 죄를 주께서 실제로 대신 져 주셨고 그래서 내가 죄에서 자유를 얻고 그 정죄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 글을 읽고 있는 바로 여러분과 저의 죄 때문에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께 완전히 버림받아 심판당하시는 것으로 느끼셨습니다. 그것은 쇼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영혼은 떨리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을 위하여 죄를 대신 져 주시고 영원한 죽음을 받아야 할지, 아니면 인류를 포기하고 아름답고 고통이 없는 하늘로 다시 올라가 버려야 할지를 선택하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예수의 곁에서 주님을 몹시 괴롭혔습니다. 감사치도 않고 깨닫지도 못하는 인류를 보여 주면서 예수님의 희생이 헛된 일이 될 것이요, 이제 이 대속의 죽음은 그를 영원히 멸망 당하게 만들 것이라는 절망적인 말들을 해 주었을 것입니다. 그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선택하셔야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죄인들을 위한 구속의 죽음을 자신의 것으로 감당하기로 결정하셨습니다. 다시는 무덤 속에서 나와 부활하지 못할 것처럼 영원한 멸망의 운명을 느끼신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약속도 더 이상 보이지 아니하는 깜깜한 영혼의 그늘 아래서 하나님의 아들은 고민하고 계셨습니다.
그분은 자기 자신의 생명과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 자신의 영생과의 선택에서 촛불처럼 떨고 계셨습니다. 드디어 예수께서 믿음으로 승리하셨습니다. 그는 “다 이루었다!” “아버지여 내 영혼을 당신의 손에 의탁하나이다!”라고 소리치시며 고개를 떨구셨습니다. 선택은 이루어졌습니다. 주님의 너무나도 큰 사랑이 바로 여러분을 포기하실 수가 없으셨던 것입니다. 차라리 당신이 죽어 영원히 사라져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여러분을 구하여 내시겠다고 결정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이미 인류가 범죄하였을 때부터 결정해 놓으신 사실입니다. 그러한 주님을 하늘 아버지께서는 삼 일 만에 부활해 내시었습니다. 그러한 사랑을 가지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또한 우리의 유일한 구세주이십니다.
과연 누가 이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다 이해할 수가 있을까요? 바다를 먹물로 삼고 하늘을 두루마리 삼아 모든 풀들을 붓으로 만들어 기록하려 해도 그 사랑 다 기록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고 믿고 가슴 깊이 받아들여 감격해 하는 자들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십자가의 고통은 육신적인 고통 그 훨씬 이상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이해할 때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끌려 가게 됩니다.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요 12:32.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를 중심으로 신앙합니다. 2000여 년을 거듭해 오면서 기독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구원의 표상으로 삼고 믿으며 가르치며 전하여 왔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고전 2:2). 십자가가 없었더라면 우리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인류가 이렇게 은혜의 시간을 가지고, 하나님과 또한 주님의 구원을 발견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고 살고 있는 것은 갈보리의 십자가의 구속의 은혜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영원토록 찬양과 존귀와 영광을 돌리기에 합당한 구속의 상징입니다. 십자가는 인류의 죄를 대신 지시고 그 죄 값을 갚으신 주님의 고통을 상징합니다. 인류가 당하여야 할 처참하고도 자비가 섞이지 아니한 영원한 멸망의 죽음을, 우리를 대신하여 지불하신 하나님의 어린양의 놀라운 희생을 나타냅니다. 십자가는 멸망 당하는 인간들을 그대로 내버려 두실 수가 없어서 절규하시며 돌아오라고 탄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상징이었습니다.

제4부_기독교회 속에 들어온 사탄의 기만

그러나 우리가 한가지 기억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십자가에서 절정에 이르긴 했으나 그것으로 아직 구속이 끝나지는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마귀는 자기가 십자가를 없앨 수는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십자가의 능력과 의미를 없애 버리기 위하여 또 다른 작전을 세웠습니다. 십자가를 그리스도인들이 믿더라도 십자가의 참된 의미를 오해시켜 버리면 십자가를 믿지 않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는 사실을 사탄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주 교묘한 전략을 세웠는데, 그것은 오히려 아예 믿지 않는 것보다 더 무서운 기만이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십자가를 없앨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십자가의 의미를 자기의 주장에 맞게 색칠하여 자기가 원하는 바대로 사람들이 믿고 따르도록 만들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는 태초부터 하나님의 율법은 꼭 순종할 필요가 없는 것이며, 하나님의 법을 폐해도 큰 문제가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사람들을 유혹해 왔습니다. 그것이 바로 마귀가 인류의 조상들을 기만한 방법이 아니었던가요!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를 찬양하고 설교하며, 갈보리에 대하여 많이 말하는 것에 대하여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사탄은 그리스도인들이 감정적으로 십자가에 대하여 많이 말하고 찬송하며 설교하기를 원합니다. 십자가의 그 참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한 그리스도인들이 드리는 예배나 찬송은 사탄에게 조금도 두려움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사탄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십자가에서 율법이 폐하여졌다고 가르치며 믿게 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보혈과 은혜가 마치 인간의 불순종에 대한 좋은 핑계가 되도록 믿게 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를 믿는 한 하나님의 계명은 더 이상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믿도록 권합니다. 십자가를 믿는 한 죄를 계속 지어도 충분한 용서 속에 있으니 염려할 필요가 없다는 듯이 믿고 살도록 격려합니다. 사탄은 갈보리의 십자가가 우리를 하나님의 율법에서 해방하였다고 믿게 만듭니다. 십자가가 마치 우리를 죄로부터 구해낸 것이 아니라, 그 죄 가운데서 구원을 준 것으로 믿게 만들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그리스도의 보혈이 우리를 죄에서부터 해방하여 낸 것이 아니라 죄를 짓는 일에 자유를 주신 것처럼 생각하게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십자가의 보혈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죄를 용서하는 능력뿐만 아니라, 죄인들을 그 죄에서부터 해방하여 다시는 그 죄를 반복하지 않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나아가서 십자가는 죄인의 마음을 변화시켜 하나님의 계명과 말씀대로 순종하며 사는 자로 만들어 주는 초자연적인 능력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9: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만일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계명을 폐하신 것이라면, 무엇 때문에 예수께서 그 위에서 돌아가실 필요가 있었겠습니까? 율법을 그렇게 쉽게 폐해 버릴 수 있으셨다면, 예수께서 무엇 때문에 율법을 범한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그 값을 치르실 필요가 있었겠습니까?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이 있기 때문에 죄가 성립되는 것이고, 죄에 대하여서 하나님의 율법은 사망을 선고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인간들의 죄값을 대신 지불하셨다는 사실 자체가 하나님께서 당신의 율법을 폐하시는 것이 아니라 존중하시고 높이신다는 사실을 드러낸 것입니다. 그냥 쉽게 율법을 폐하여 버리실 수 있는 일이었다면 무엇 때문에 그렇게 고통스러운 죽음을 통하여서 인간들의 죄를 용서하셔야만 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에서 하나님께서 율법을 폐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완전케 세우신 사실을 알 수 있게 됩니다.

마태복음 5: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로마서 3:31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사도 바울이 설명한 예수께서 십자가로 폐하셨다는 것은(골 2:14-16 참조) 하나님의 계명이 아니라, 의문의 율법 곧 유대인들이 지키던 모세의 율법 즉, 절기들이나 종교 의식적인 절차들을 가리켜 말한 것이었습니다.

십자가의 의미를 감추어 버리는 것

사람이 죽을 때 진정으로 죽는 것이 아니라 어떤 다른 상태로 살게 된다는, 영혼은 절대로 완전히 죽지 않는다는 가르침은 큰 오류입니다. 단순히 비타민이 부족하여 어떤 병이 걸리는 것처럼 고대로부터 전해 내려온 영혼 불멸적인 사상은 기독교회에 복잡한 혼란을 만들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뱀은 아담과 하와에게 그들이 죄를 지을지라도 절대로 죽지 않을 것이라고 유혹하였습니다(창 2:17 참고). 지금도 사탄은 우리에게 “너는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창 3:4)고 유혹하고 있습니다. “죽음이라는 것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아. 어떤 인간도 결코 완전히 멸망 받을 수 없어. 영혼은 자연적으로 불멸한다고.”
이러한 사상이 이방인들의 종교의 기본사상이 되었으며 점차적으로 기독교에 들어와 이제는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이 사상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겉으로 볼 때 이러한 생각이 별 나쁜 결과를 끼친다고 보이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생각하여 보세요. 이 사상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라고 하신 로마서 5장 8절의 말씀과 대치됩니다. 왜냐하면 영혼불멸설 안에는 실제적인 “죽음”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해서, 사탄이 우리에게 이 사상을 통하여 속이려 하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진정으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겪으셔야만 했던 경험은, 실제로 죽음이 존재하지도 않고, 그렇기 때문에 잃어버릴 것도 없고, 포기해야 할 것도 없으며, 그래서 참을 만하였다고 사탄이 말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죽음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희생은 어디에 있는가요? 희생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는 아무런 의미 없는 쇼에 불과합니다. 이것이 바로 사탄이 노리는 것이며 십자가의 의미를 없애려는 것입니다. 나라와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전쟁 용사들의 죽음보다도 더 중요하지 않게 십자가를 만들어 버리는 사상이 바로 죽음이 없다는, 영혼 불멸의 사상입니다.

제5부_십자가가 주는 진정한 의미

그리스도께서 경험한 십자가의 고통은 그 어떤 육체적 고통이나 순교자들의 경험과 비교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십자가에는 어떠한 수치나, 억지로 믿어야만 하는 짐이 없습니다. 이사야는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죄악”이란 무엇인가요? 우리의 죄악은 우리로 하나님과 분리되게 만들었습니다.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하였습니다.(사 59:2) 죄는 우리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을 분리시키고 우리의 영혼을 빼앗기게 하였으며 담대함을 잃어버리게 하였습니다. 구주께서는 진정으로 우리의 죄악을 자신에게 옮겨놓으셨습니다. 이 의미는 죄가 갖는 모든 죄책감과 외로움, 완전히 버림받은, 더 이상 희망이 없이 멸망 받기만을 기다려야만 하는, 사형선고 받은 죄인의 처절함을 모두 느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하나님 아버지와 분리시킨 요소들이었습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벧전 2:24.
그리스도께서는 단순히 그의 어깨에 우리의 짐을 지시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그의 마음과 영혼 깊숙이 우리의 죄를 지셨습니다. 그의 모든 신경조직에, 그의 마음과 영혼에 우리의 죄를 지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고후 5:21.

그리스도께서 죄를 위하여 받으신 그 죽음이란 무엇인가요? 성경은 두 가지 죽음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보통 말하는 죽음으로 “잔다”는 의미에서의 죽음(요 11:11,13 참고)을 말하고, 둘째 사망은 완전한 죽음을 말합니다. 요한계시록 2:11, 20:6, 21:8절에 나오는 이 둘째 사망은 하나님과 영원히 분리되는 것이며, 모든 빛과 즐거움과 생명으로부터 영원히 분리되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상태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하신 그 죽음은 바로 이 둘째 사망이었습니다. 영원히 이 땅과 온 우주에서 사라져 가는, 더 이상 다시 태어나거나 창조함 받을 수 없는, 더 이상 존재하지 못할 상태로 가버리는 죽음이었습니다.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깐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을 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히 2:9.

예수께서는 인류 모두가 각기 당하여야 할 그 둘째 사망을 맛보셨으므로,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죽음은 우리가 늙어서 죽는 그러한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만약 그들이 죄를 짓는다면 받을 것이라고 말한 그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이 지구에 그 동안 살았던 수 천억의 인류 개개인의 모든 죄의 결과를 마음에 지시고 한 사람의 죄책감이 아니라 수 천억 명의 죄책감과 그들의 불안함과, 희망 없음을 모두 느끼시며 영원한 죽음을 당하시는 십자가상의 그리스도를 생각하여 보세요.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 히 2:17,18.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의 마음은 하나님 아버지의 얼굴로부터 완전히 가려졌습니다. 희망도, 빛도 둘째 사망 속에서 완전히 사라졌으며, 다시 창조되는 부활도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죄인의 죽음을 당하셨으므로 더 이상 부활을 기대하거나 용서를 바랄 수 없었습니다. 만약 예수께서 부활의 소망을 조금이라도 느낄 수 있었다면, 그는 모든 사람의 죽음을 맛보기에 부적합하였을 것이고, 진정으로 자신을 우리의 죄를 위하여 희생하실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나님께 기도하실 때에 그의 인성은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마 26:38,39.

그리스도께서 마셨던 그 잔은 어떤 인간도 아직까지 맛보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우주 역사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오직 그리스도만이 영원한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소름 끼치도록 두렵고 절망적인 둘째 사망을 온전한 정신으로서 경험하신 그리스도. 그의 손을 찌른 못도, 그의 뚫어진 발도, 매서운 채찍도 그를 죽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육체적 고통을 거의 느끼실 수 없을 정도로 그 마음의 고통이 극심하셨습니다. 그를 죽인 것은 겟세마네부터 흘리시기 시작한, 피땀 흘리는 마음의 고통이었습니다.

“훼방이 내 마음을 상하여 근심이 충만하니 긍휼히 여길 자를 바라나 없고 안위할 자를 바라나 찾지 못하였나이다” 시 69:20.

이 땅에서 사신 모든 생애를 통하여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부활에 관한 확신이 있으셨습니다. 그는 언제나 하나님 아버지의 기뻐하시는 얼굴을 보실 수 있으셨으며, 이러한 영광의 햇빛 아래서 마음이 움츠러들 수 있는 어떠한 큰 장벽도 없었습니다. 심지어는 십자가상에서 회개한 강도가 자기를 기억해 달라고 하였을 때에도 예수께서는 즐거운 확신 속에서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그러나 곧 이러한 감흥은 사라지고 예수께서 마셔야 할 그 잔이 그의 몸과 마음을 침투해 들어왔습니다. 급속한 변화가 그에게 이르렀습니다.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저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가로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마 27:42,40.
그리스도께서 마신 그 쓴 잔은 이렇게 욕하고 저주하는 사람들, 예수께서 구원하시려고 왔던 바로 그 사람들로 인하여 더욱 쓰게 변하였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이러한 말씀을 들으시는 그리스도의 마음은 어떠하였을까요?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한 번 내려와 봐!” “하나님이 왜 너를 구원해주지 않지?” 그리스도의 손은 넓게 벌려져 나무에 박혀 있었기에 귀를 막으실 수조차 없으셨습니다. 그저 기도할 수만 있었을 뿐. 승리의 기도가 아니라, 희망의 기도가 아니라, 버림받는 울부짖음의 기도뿐. 하늘은 닫혔고 어느 누구도 그를 돕는 손길을 뻗치지 않았습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치 아니하오나 응답지 아니하시나이다” 시편 22:2.

여러 시간 동안 예수께서는 죄와 죽음의 짐과 싸우셨습니다. 구경꾼들의 잔인하게 모욕하는 말이 들리기 시작한 조금 후 “제 육 시로부터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 구 시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제 구 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하나님과 자신과의 완전한 분리가 이루어졌음의 절망을 선고하셨습니다. 사람들의 모욕은 독에 담겨 가시 돋친 화살처럼 그리스도의 마음에 심한 고통을 일으켰으며, 하나님과 완전히 분리되어 가는 예수의 영혼은 더 이상 견딜 수 없었습니다. 이제 완전한 죽음이 그리스도의 영혼을 빼앗아 갔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못 박힌 손으로 자신의 눈물을 감출 수 없음을 아시고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어두움을 보내어 놀리는 군중들로부터 그의 얼굴을 숨기셨습니다. 오직 짙은 암흑 속에서 들리는 것은 갈보리로부터 메아리치고 있었던 거의 사라져 가는 작은 신음뿐... 얼마나 잔인한 인간들인가요? 또한 얼마나 자비로운 하나님이신가요? 아들의 마지막 고통을 숨기시는 그 자상한 사랑. 천사들조차도 보기를 허락하지 않았던 그리스도의 고통의 마지막 장면들, 영원한 죽음을 갖게 하시기 위하여 끝까지 그리스도에게 나타내 보이지 않으셨던 하나님의 동정, 그러나 마지막 격정의 모습을 사람들로부터 숨기우신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은 하늘의 법과 구속과 사랑의 원칙을 온 세상에 전하고 있었습니다. 희망은 영원히 사라졌지만, 사랑은 견뎠습니다. 시편 22편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겪으셨던 그 고통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믿음은 보이지는 않지만 실제로 존재하는 것에 대한 의지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보이지도 않고 존재하지도 않는 것을 위하여 희생할 수 있게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수난을 통과하실 때에 그 마음과 영혼은 오직 죽어 가는 인류를 위한 사랑으로서 채워져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부활과 영생의 희망이 전혀 없었지만, 사랑은 그 영원한 죽음을 끝까지 받아들일 수 있게 하였습니다.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게 합니다. 순교자의 죽음이 아닌 죄인의 죽음을 택하시고, 희망 없는 영원한 죽음의 세계로 그의 얼굴을 돌리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을 수만 있다면 우리는 참된 그리스도인들로 변화될 것입니다.

 

마치면서

십자가를 찬송합시다! 그것은 우리의 구원의 상징입니다.
십자가를 감사합시다! 그것은 우리 하나님의 크신 사랑의 표상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참 목적을 잊지 말도록 합시다. 오늘날, 십자가에 대한 커다란 오해가 범람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마귀가 뿌린 씨들입니다. 십자가는 인간의 죄를 용서해 줄 뿐만 아니라 인간의 마음을 변화시켜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순종하는 진실된 그리스도인들로 바꾸어 주는 것입니다. 십자가에는 죄인들을 변화시켜 하늘에 있는 거룩한 천사들과 같이 살 수 있기에 안전한 자들로 만들어 주는 힘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고 구속하시는 것은 우리를 거룩하고 깨끗한 자들로 만드시기 위하여서 구원하신 것입니다.

십자가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죄를 짓는 면허증을 주는 것이 아니라, 죄를 이기고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율법을 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케 해 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리스도인을 순종하며 사는 사람들로 만들어 줍니다. 이것을 경험하는 자들이 바로 참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십자가의 참된 의미와 사랑을 바로 알고 그 사랑으로 변화되는 독자분들이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신앙인_18세기 영국 부흥운동을 주도한 감리교 창시자 요한 웨슬리

요한 웨슬리는 영국 작은 마을인 엡워드에서 4대에 걸친 목사가정에서 19명의 자녀 중 15번째(아들로 두 번째)로, 동생 찰스 웨슬리는 18번째(아들로는 세 번째)로 태어났다. 어머니 수산나는 가정을 작은 단위의 교회로 여겨 자녀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성장하려면 어려서부터 자신의 의지를 제어하는 여러 규율을 만들어 자녀의 영혼 구원을 숭고한 목적으로 삼아 자녀의 영적 생활을 체계화시키고 경건 생활의 모범으로 "엄격한 시간표, 하나님 앞에서의 묵상과 자기 성찰을 위한 규칙적인 시간, 영적 일기의 기록, 안식일의 엄수"등의 청교도적 경건을 자녀 교육에 엄격히 적용하였다. 웨슬리 형제는 어려서부터 굴복과 신앙 훈련을 터득하였으며 규율적인 생활습관, 고결한 심성, 용기, 순종, 독립심, 자제심, 경건한 믿음 등 그의 신앙과 인격형성에서 어머니의 영향은 절대적이었다.

당시의 영국은 산업혁명과 상공업의 발달로 많은 인구가 도시로 집중하였다. 수공업자들의 파산, 빈부 격차 심화, 밀수 성행, 부정부패, 사치, 방탕으로 혁명 직전의 무법천지 상태였고 음란한 퇴폐풍조가 만연하였고 처처에 투견, 투우, 투계가 성행하였고 강도, 폭행, 도적질 등 범죄가 만연하고 감옥은 온갖 죄수들로 가득 차서 넘쳐 있었다. 또 성직자가 1만 2천 명 이상이었지만 영적인 힘을 잃어버린 형식적 위선자들로 자연 종교를 즐겨 연구하며 대부분의 신학도 그런 방향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동생 찰스 웨슬리가 1726년 옥스퍼드 대학에 입학하자 뜻을 같이하는 친구와 Holy Club을 만들어 경건하게 살며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구원을 힘입으려고 매일 밤 모여 기도하고 성경을 연구했다. 또 가난한 자를 방문하고 병자를 위문하는 등 여러 봉사사업을 펼치게 되었다. 웨슬리와 휫필드 등 Holy Club 친구들은 가장 근면하고 경건한 노력으로 그들의 육신적 마음의 사악함을 극복하고자 애를 썼다. 또 극기와 박애와 겸비의 생애를 살고, 그들이 하나님의 은총을 입을 수 있게 해주는 성결을 얻는 데 있어서 필요한 모든 방법을 매우 엄밀하고 정확하게 준행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경건치 않은 동료 학생들로부터 메소디스트(Methodists - 규칙 준수자)라는 모멸적인 칭호를 받았다. 하지만 대학 시절과 전도 사업을 착수한 당시에 받은 멸시와 조롱과 박해의 격렬한 시련은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군병으로서 어려움을 견딜 수 있게 하였다. 또 오늘날에는 그 칭호가 영국과 미국에서 가장 세력 있는 감리교파의 하나로 명예로운 이름이 되었다. 웨슬리는 찬송에도 힘을 썼다. 국교회의 성가가 옥외 대중용으로는 적당치 않으므로 동생 찰스 웨슬리와 특별히 찬송을 지었다. 찰스 웨슬리가 지은 찬송이 6천 편 이상이다. 웨슬리 형제는 해마다 찬송가를 발행하였으며 그 찬송은 대개 개인의 종교적 경험을 표시하는 것으로 '만 입이 내게 있으면', '천부여 의지 없어서', '구주여 크신 인애를 ' 등이 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웨슬리와 휫필드 등 그의 Holy Club 동료들은 기대와는 달리 지치고 피곤하여 오히려 깊은 절망과 낙심에 빠졌으며 결국은 값없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믿음으로만이 구원과 경건함에 이른다는 놀라운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 그들은 참된 종교는 마음에 뿌리를 박고 있다는 것과 하나님의 율법은 말과 행동에는 물론이요, 생각에까지 미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들은 외부에 나타나는 행위의 바름뿐 아니라 마음의 성결이 또한 필요한 것을 확신하였으므로 새 생애에 들어가기를 힘썼다. 그러나 그 당시는 그들은 구하는 바를 얻지 못하였다. 정죄의 상태에서 놓여나고 죄의 세력을 깨뜨리고자 하는 그들의 노력은 허지로 돌아갔다. 그것은 바로 루터가 경험한 것과 똑같은 투쟁이었다. 그것은 그의 심령을 괴롭게 했던 문제, 곧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욥 9:2)고 한 바로 그 문제였다.

그 후 웨슬리 형제는 목사 안수를 받고 선교 사업을 위하여 미국으로 파견되었다. 항해 중에 심한 폭풍우를 만나 죽을 지경이 되었을 때 그 가운데서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신뢰와 평안을 나타내는 모라비아 교도들을 통하여 아직도 자기는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의 보증을 가지고 있지 못함을 깨달았다. 그는 얼마 동안 그 모라비아 교도들과 함께 지내며, 그들의 그리스도인적 행동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그 후 런던에서 있은 모라비아 교도들의 한 집회에서 루터의 로마서 서문을 듣고 “나는 구원을 얻기 위하여 그리스도, 오직 그리스도만을 신뢰해야 한다고 느꼈다. 그 때에 한 가지 확증 곧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 심지어 나 자신까지도 제거해 버리시고, 나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구원하여 주신 데 대한 확증을 얻었다.” 그동안 그는 엄격한 극기와 자책과 겸비의 괴롭고 쓸쓸한 고투의 긴 세월을 통하여 하나님을 찾으려는 목적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러나 이제 기도와 금식과 자선 사업과 자기희생으로 얻으려고 애쓴 은혜가 실상은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선물임을 깨달았다. 그 후에도 엄격한 극기의 생애를 계속했는데, 이제는 그것이 신앙의 근거가 아니고 결과였으며 성결의 기초가 아니고 열매였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는 그리스도인의 소망의 기초이며, 그 은혜는 순종으로 나타날 것이다. 그의 생애는 그가 받은 위대한 진리, 곧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마음속에서 역사하는 성령의 새롭게 하는 능력, 그리스도의 모본을 따라 생애에 이루어지는 열매 등 일단 그리스도의 믿음 안에 굳게 서자 그의 온 마음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에 관한 지식을 어느 곳에든지 전하고자 하는 욕망으로 불타서 "나는 이 세계를 나의 교구로 생각한다. 그러므로 내가 세상 어느 곳에 있더라도 기쁜 구원의 소식을 듣기 원하는 모든 사람에게 그것을 선포하는 것이 나의 의무라고 생각한다."라며 진리를 전하는 일에 온전한 삶을 바쳤다.

찰스 스투얼이 영국 왕위에 오르자 웨슬리가 갖는 [속회]와 [야간집회]를 교황권 운동이나 왕권 회복운동으로 오인하여 교구 목사들과 지주들이 폭도를 매수해 집회를 방해했다. 많은 성직자는 그를 “영국 최대의 위선자, 민중의 사기꾼, 허식자, 위증자, 선동자, 악마의 젖으로 길러낸 자, 희극의 위선자”라고 조소, 야유하였고 연극 무대에도 언제나 조롱과 경멸의 대상으로 표현되었다. 그가 설교하면 그 집회 장소에 돌, 쓰레기, 오물 등을 집어 던지고 욕설을 퍼붓고 모래를 뿌리는 등 온갖 방해를 일삼았다. 그러나 격노한 폭도의 무리가 습격할 때도 담대히 복음을 전파하였으며 그의 위엄있는 풍채와 인격 그리고 그의 영적 감화력 앞에서 여지없이 압도당하고 말았으며 1750년 중반부터는 모든 핍박과 비난이 사라지며 자유롭게 복음을 전하게 되었다.

사실 웨슬리는 새 교회를 세우려는 생각은 없었다. 옥외 전도, 즉석 기도, 평신도 전도, 찬송, 연회, 속회, 전도인의 안수 등 모든 것은 국교회가 웨슬리의 구령 사역을 찬성하지 않았기 때문에 필요에 의하여 생긴 것이다. 웨슬리는 자기가 살아있는 동안 국교회와 분리하지 않겠다고 말하였고 새로운 교파를 만들 생각이 전혀 없었으나 자기 전도를 듣고 들어온 사람들을 위하여 어떤 단체로든지 조직해야 할 필요는 느끼게 되었다. 이후 감리교(Methodist Connection)라는 명칭으로 한 조직을 가지게 되었다.

다음 호에서 “18세기 영국 부흥운동을 주도한 감리교 창시자 요한 웨슬리”는 2부로 이어집니다.

진리탐구_144,000인의 신앙관

이제부터 알아볼 내용은 하나님의 목적과 사명을 가진 144,000인의 신앙관입니다. 성경에는 마지막 세대에 하나님의 증인이 되어 죽음의 위험에 두려움 없이 진리를 위하여 충성할 십사만 사천에 관한 신앙과 믿음이 말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희가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십 사만 사천인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 (계 14:3~5)

십사만 사천인의 특징을 크게 4가지로 살펴보면
첫 번째로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함”입니다.
먼저 십사만 사천인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않은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구약 성경에서 “행음”이나 “음행”이라는 단어는 우상 숭배와 관련이 있는 표현들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않았다”라는 것은 다른 복음이나 거짓된 가르침에 물들지 않은 순수한 진리를 그대로 지키고 믿는 것을 말합니다.
요한계시록에는 두 종류의 여자가 등장하는데 하나는 주님의 몸된 교회를 상징하는 정결한 “여자”이고, 다른 하나는 바벨론 교회들을 상징하는 “음녀”입니다.
요한계시록 17장에는 바벨론을 “음녀”라고 표현하였습니다.

“그 이마에 이름이 기록되었으니 비밀이라, 큰 바벨론이라,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 하였더라.”(계 17:5)

“음녀”의 성서적인 정확한 개념을 이해하려면 그 반대의 의미가 있는 “정결한 처녀”(여자)에 대하여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여자” 또는 “정결한 처녀”는 하나님의 진리를 가진 주님의 “참된 교회”를 상징합니다.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라”(고후 11:2)

그러므로 “정결한 처녀”(참 교회)와 반대 의미가 있는 “음녀”는 거짓 가르침과 거짓 교리를 가지고 있는 바벨론 교회를 상징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144,000인의 특징인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했다”는 구절을 통해 십사만 사천인은 정결한 교회를 상징함을 알 수 있습니다.

음녀는 간음하는 여자를 이야기하며, 영적으로 오류와 세상과 벗 됨이 간음을 범하는 교회인 음녀라고 성경은 교훈하고 있습니다.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약 4:4)

그러므로 144,000인은 음행을 범하는 음녀, 바벨론 교회와 완전히 대조되는 마지막 시대의 증인과 백성인 교회로서, 그들은 음녀(바벨론 교회)가 가르치는 교리들에 의하여 더럽혀지지 않았으며 순결한 진리를 끝까지 믿고 순종하는 사람들입니다.
즉, 음녀의 취하게 하는 포도주에 취하지 않은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또 다른 천사, 곧 둘째가 그 뒤를 따라 말하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모든 나라를 그 음행으로 인하여 진노의 포도주로 먹이던 자로다 하더라”(계 14:8)

오늘날 기독교에는 성경의 순수한 복음과 진리에서 변질된 오류의 가르침들이 너무나 많이 전파되어 있으며, 하나님의 책망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 옛날 유대교회처럼 목이 곧고 앞을 보지 못하고 귀는 닫아버리고 말았습니다.

마지막 짐승의 표를 거절하고 하나님의 편에서 진리를 위하여 충성할 사람들은 변질되지 않은 복음, 바벨론의 포도주에 취하지 않은 순수한 복음과 가르침을 순종하는 사람들인데 이것이 144,000인 첫 번째 믿음의 특징입니다.
다음 호에는 두 번째 특징인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들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기독교회사_프로테스탄트의 유래

오늘날 수많은 기독교 분파가 존재하지만 프로테스탄트의 정신과 열정은 잃어버린 시대입니다.
당시 개혁 사업의 가장 고귀한 증언은 스파이얼스 회의(1529년)에서 독일 그리스도인 귀족들이 제출한 항의서였습니다. 이 하나님의 사람들의 신앙과 용기와 변함없는 정신은 그 후 여러 시대를 위한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주었습니다.
개혁사업은 암담하고 두려운 시대였습니다. 보름스의 칙령으로 루터는 법적 보호를 받지 못하게 되었고, 그의 교리를 가르치거나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금지되었음에도, 독일 안에서는 종교 자유가 확산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로 진리를 반대하는 세력이 억제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카알 5세는 종교 개혁을 박멸하려고 손을 뻗쳤으나, 그 때마다 여러 일로 불가불 그 손을 접을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여러 번 거듭해서 로마종교에 항거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즉시 멸절될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위기일발의 순간마다 투르크군이 동부 국경에 나타나거나 프랑스 왕과의 분쟁, 교황과 황제와의 세력 다툼 등의 일이 생겼습니다. 이와 같이 나라가 어지럽고 어수선한 중에 개혁 사업은 힘을 얻고 발전되어 나갔습니다.
페르디난트 왕이 이들의 양심에 따른 확신을 무시했으므로, 제후들은 회의에서 왕의 퇴장을 개의치 않고 항의서를 국회에 즉시 제출하기로 하고 다음과 같은 엄숙한 선언서를 작성해 의회에 제출하였습니다.
“우리는 유일한 창조주시요 보존자시며 속죄주시요 구주시며 머지않아 우리의 심판주가 되실 하나님 앞과 온 인류와 온 피조물 앞에서 항의서를 제출합니다. 우리는 개인과 국민의 대표자로서 장차 반포될 칙령이 하나님을 대항하고 그분의 거룩한 말씀과 우리의 정당한 양심과 우리 영혼의 구원에 어긋나는 점은 절대로 승인할 수 없습니다. … 어찌 우리가 이러한 칙령을 용인할 수 있겠습니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지식을 사람에게 계시해 주셨음에도 그러한 지식을 받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얼마나 합당치 못한 일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일치되는 교리보다 더 확실한 교리는 있을 수 없습니다. … 주님께서는 다른 교리를 가르치는 것을 금하십니다. …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해 밝혀야 합니다. … 이 거룩한 책은 그리스도인에게는 모든 점에 필요하고 이해하기 쉽고 어두움을 물리치기에 적합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아래서 완전히 순수한 성경인 신구약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만을 전하고 여기에 위배되는 것은 어떤 것도 더하지 않을 결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참으로 유일한 진리이며, 진실로 모든 교리와 행위의 확실한 표준으로서 결코 실패하거나 우리를 속이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기초 위에 서는 사람은 어떠한 지옥의 권세와 장차 없어질 사람의 영화에도 저항할 수 있습니다. … 이런 이유로 우리는 이제 우리에게 지워진 멍에를 거부하는 바입니다. … 동시에 황제 폐하께서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는 그리스도인 왕처럼 우리를 대우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는 황제 폐하와 왕공 제위에게 모든 존경과 순종으로써 우리의 당연한 의무를 이행할 것을 선언합니다.”
이 항의서에 의회는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항의자 측의 담대함에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의 미래는 곤란과 불안정이 있으며 분열과 피 흘림과 투쟁이 불가피해 보였습니다. 하지만 개혁자들은 자신들의 길이 정당함을 확신했으며 전능하신 분의 거룩한 팔을 의지하면서 “늠름한 기상으로 확고부동하게” 전진했습니다.
이 유명한 항의서가 담고 있는 모든 원칙은 프로테스탄트의 본질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 항의서는 신앙 문제에서 사람의 두 가지 악폐에 대하여 항의했습니다. 그 하나는 위정자의 강요요, 또 하나는 교권의 남용이었습니다. 이런 악폐 대신에 프로테스탄트들은 정권 위에 양심의 힘을 보이는 지상의 교회 위에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놓았습니다. 첫째로 프로테스탄트들은 영적인 것들에 있어서 세속적 권세를 거부하고 선지자와 사도들처럼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행 5:29)함을 말합니다. 이것은 카알 5세의 왕관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왕관을 높인 것입니다. 또한 이것은 사람의 온갖 교훈이 하나님의 말씀에 예속되어야 한다는 원칙을 확립해 주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진리라고 확신하는 바를 자유롭게 이야기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밝혀진 대로 믿고 순종할 뿐 아니라 가르쳐야 하며, 수도사나 정권이 이를 간섭할 권한이 없다고 했던 것입니다.
스파이얼스의 항의는 종교적 자유를 억압하는 데 대한 엄숙한 반증인 동시에 온 인류는 각자 양심의 지시에 따라 하나님을 경배할 권리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선언이 반포되어,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새겨졌으며, 사람의 힘으로 결코 지워 버릴 수 없는 하늘의 책에도 기록되었습니다. 독일의 모든 복음 신자들은 그 항의서를 신앙 고백으로 채택했습니다. 각 곳에서 사람들은 이 선언에서 더욱 훌륭한 새 시대의 약속을 바라보았습니다. 인간의 유전과 전통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을 표준으로 삼게 된 이러한 신앙만이 삶의 질을 고상하게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들의 항의 때문에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라는 명칭이 개혁 교회에 주어졌습니다.

Healing Story_유자

쌀쌀한 바람이 불어오는 계절이 되었습니다. 짧은 옷들은 넣어두고 따뜻하고 두툼한 옷들을 꺼내어 옷장에 넣어 둡니다. 옷을 정리할 때마다 버릴 옷들이 한 무더기 나오는 것이 참 신기합니다. 분명 입을 거라고 넣어두었는데 말입니다.
우리에게 나는 다 되었다 하는 때가 과연 있을까요? 시간이 지날수록 더 초라하고 죄뿐인 내 자신을 발견하며 우린 수시로 주님의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심령을 가지고 당신 앞으로 나아오는 우리를 어여삐 보시고 기뻐하시는 우리 아버지이심을 알기에 우린 소망을 갖습니다.
내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잘 절인 유자청 한 스푼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물을 따라 놓고 가족들을 불러 모아 보세요. 따스한 유자차를 사이에 두고 즐거웠던 하루를 이야기하며 몸도 마음도 따뜻해지는 시간을 가져 보시면 어떨까요?

유자는 전 세계에서 오직 동북아시아의 일본과 한국에서만 생산된다고 합니다. 특히 기후적 특성이 잘 맞는 한국에서만 상등품이 나온다고 하니 유자는 알고 보면 아주 귀한 과실인 셈입니다.
유자의 대표적인 성분과 효능
 
* 비타민C
유자의 비타민 C는 레몬의 3배가 넘는 양입니다. 유자의 비타민C는 육체적 피로의 주범인 젖산이 축적되는 것을 막고 스트레스 물질의 농도를 감소시켜 피로회복을 도와줍니다. 껍질을 함께 먹기 때문에 다른 과일에 비해 섬유소의 섭취 비율도 높은 편이라 변비 예방에도 좋습니다. 또한 감기 예방과 피부 미용에도 매우 좋습니다.
* 칼슘
유자의 성분 중 다른 과일에 비해 특히 많은 것이 칼슘인데 이는 사과, 바나나보다 10배 이상 많이 함유되어 있다고 합니다. 따라서 유자는 성장기 어린이의 골격 형성과 성인의 골다공증 예방에 유익한 식품입니다.

* 헤스페리딘
쓴맛을 내는 헤스페리딘(hesperidin)성분은 플라보노이드계의 일종으로 유자의 속살과 껍질에 많이 들어 있습니다. 유자의 헤스페리딘은 모세혈관의 저항력을 강화시켜 혈관이 파괴되어 생기는 뇌출혈, 피하출혈 등을 방지하는 작용을 합니다. 그 외에도 항암, 항균, 항염증, 항알레르기, 간의 해독작용 등의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 리모넨
리모넨은 감귤류 껍질에 주로 많으며  과피 기름의 80~90%를 차지하는 주요 성분입니다. 오렌지 냄새의 장본인인 리모넨은 다양한 용도의 향료로도 널리 사용되고 있습니다. 유자 속의 리모넨 성분은 목의 염증을 가라앉혀 주고 기침을 완화시켜 주는 작용이 있습니다. 또한 펙틴 성분과 함께 모세혈관을 튼튼하게 하고 혈액 순환을 촉진시켜 뇌혈관에 이상이 생겨 발생하는 고혈압을 예방하며 신경통에도 좋은 약효를 나타내 줍니다.

* 항암효과
체내의 발암물질을 해독하는 효소의 생성을 증대시켜 초기 단계의 발암 과정을 예방해 줍니다. 또한 림프종 세포와 유방암 세포의 증식을 억제하고 대장암세포의 혈관신생과 전이를 억제하며 세포자살을 유도하는 작용을 합니다.

이렇게 몸에 좋은 유자를 어떻게 먹을까요?
 
* 유자즙
가장 손쉽게 이용하는 것으로는 즙을 내 마시는 방법이 있는데 유자를 반으로 잘라 즙을 내어 물에 타서 마시는 것입니다. 컵에 유자즙 20%, 뜨거운 물 80%를 섞은 다음 꿀을 타서 마시면 됩니다.
 
* 유자차
유자를 얇게 썰어서 뜨거운 물에 2∼3조각씩 넣어 우려 마시거나 유자청을 만들어 먹으면 좋습니다. 유자청은 깨끗이 씻은 유자를 껍질째 얇게 저며 유리병에 유자 한층, 설탕 한층 쌓는 식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설탕이나 꿀을 넣어 만드는 유자차는 열을 가하는 다른 조리법보다 비타민C가 많이 파괴되지는 않지만, 물의 온도 자체가 높기 때문에 생으로 섭취하는 것보다는 감소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유자 그대로 섭취하거나 열을 가하지 않는 조리방법을 이용하는 것이 비타민C 섭취에 가장 좋습니다. 또한 비타민C가 산화될 때 철이나 구리가 함께 있으면 산화가 촉진되기 때문에 유자를 보관 시에는 금속 용기보다는 유리 용기에 보관하는 것이 좋습니다.
 
* 기타
유자 과육은 잼, 젤리, 양갱 등을 만들고  껍질은 얼려 진공 건조한 뒤 즉석식품으로 이용하거나 가루를 내어 향신료로 쓰고, 종자는 기름을 짜서 식용유나 화장품용 향료로 쓰거나 신경통, 관절염 약으로 쓴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인 가정_깨끗한 분위기의 가정

모든 그리스도인 가정마다 규율이 있어야 합니다. 또한 부모들은 말과 처신에서 가족 각자에 대하여 그 자녀가 장차 되기를 희망하는 그런 (품성과 습관을 위한) 귀하고 생생한 본보기가 되어야 합니다. 깨끗한 언어와 참된 그리스도인의 예모를 항상 실천해야 합니다. 어린 자녀들과 청년들을 가르쳐 자중하고, 하나님께 신실하며, 원칙에 성실하도록 해야 하며, 그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존중하고 순종하도록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
이런 원칙들은 그들의 생애를 제어할 것이며 또한 그들이 남들과 교제할 때 실천될 것입니다. 그들은 깨끗한 분위기를 만들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분위기는 연약한 사람들을 거룩함과 하늘로 인도하는 길로 나아가도록 격려해 주는 감화를 끼칠 것입니다.
모든 교훈은 품성을 고양하고 고상하게 하는 것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늘 책에 기록된 기록은 장차 심판을 받기에 부끄러울 것이 없는 그런 것이 될 것입니다.

이런 종류의 교훈을 받는 자녀들은 책임 있는 일을 감당할 수 있도록 준비될 것이며 경계와 모본으로 항상 남들로 하여금 옳은 일을 하도록 도울 것입니다. 도덕적 감수성이 둔해지지 않은 사람들은 바른 원칙들을 옳게 식별할 것입니다. 그들의 타고난 기품에 대하여 정당하게 평가하며 체력과 정신력과 도덕적 능력을 가장 유용하게 활용할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유혹에 대하여 굳센 방비가 된 사람들이며 쉽게 함락시킬 수 없는 성벽에 둘러싸여 있는 이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가족들을 하늘 가족의 상징으로 삼기 원하십니다. 부모와 자녀들은 날마다 이것을 기억하고 각각 피차에 하나님의 가족의 일원을 대하듯이 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들의 생애는 세상을 향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가족으로서 하나의 실물교훈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그리스도께서는 영광을 받으시고, 그분의 화평과 은혜와 사랑은 값진 향료처럼 그 가정에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모든 것은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들은 자녀들을 훈육하는 일에 있어서 확고하고 친절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늘 천사들이 그 가정에 끌려 평화와 향기로운 감화를 나눠줄 수 있도록 질서 정연하고 올바른 가정이 되도록 진지한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채식요리_현미콩와플

209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