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인_18세기 영국 부흥운동을 주도한 감리교 창시자 요한 웨슬리

요한 웨슬리는 영국 작은 마을인 엡워드에서 4대에 걸친 목사가정에서 19명의 자녀 중 15번째(아들로 두 번째)로, 동생 찰스 웨슬리는 18번째(아들로는 세 번째)로 태어났다. 어머니 수산나는 가정을 작은 단위의 교회로 여겨 자녀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성장하려면 어려서부터 자신의 의지를 제어하는 여러 규율을 만들어 자녀의 영혼 구원을 숭고한 목적으로 삼아 자녀의 영적 생활을 체계화시키고 경건 생활의 모범으로 "엄격한 시간표, 하나님 앞에서의 묵상과 자기 성찰을 위한 규칙적인 시간, 영적 일기의 기록, 안식일의 엄수"등의 청교도적 경건을 자녀 교육에 엄격히 적용하였다. 웨슬리 형제는 어려서부터 굴복과 신앙 훈련을 터득하였으며 규율적인 생활습관, 고결한 심성, 용기, 순종, 독립심, 자제심, 경건한 믿음 등 그의 신앙과 인격형성에서 어머니의 영향은 절대적이었다.

당시의 영국은 산업혁명과 상공업의 발달로 많은 인구가 도시로 집중하였다. 수공업자들의 파산, 빈부 격차 심화, 밀수 성행, 부정부패, 사치, 방탕으로 혁명 직전의 무법천지 상태였고 음란한 퇴폐풍조가 만연하였고 처처에 투견, 투우, 투계가 성행하였고 강도, 폭행, 도적질 등 범죄가 만연하고 감옥은 온갖 죄수들로 가득 차서 넘쳐 있었다. 또 성직자가 1만 2천 명 이상이었지만 영적인 힘을 잃어버린 형식적 위선자들로 자연 종교를 즐겨 연구하며 대부분의 신학도 그런 방향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동생 찰스 웨슬리가 1726년 옥스퍼드 대학에 입학하자 뜻을 같이하는 친구와 Holy Club을 만들어 경건하게 살며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구원을 힘입으려고 매일 밤 모여 기도하고 성경을 연구했다. 또 가난한 자를 방문하고 병자를 위문하는 등 여러 봉사사업을 펼치게 되었다. 웨슬리와 휫필드 등 Holy Club 친구들은 가장 근면하고 경건한 노력으로 그들의 육신적 마음의 사악함을 극복하고자 애를 썼다. 또 극기와 박애와 겸비의 생애를 살고, 그들이 하나님의 은총을 입을 수 있게 해주는 성결을 얻는 데 있어서 필요한 모든 방법을 매우 엄밀하고 정확하게 준행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경건치 않은 동료 학생들로부터 메소디스트(Methodists - 규칙 준수자)라는 모멸적인 칭호를 받았다. 하지만 대학 시절과 전도 사업을 착수한 당시에 받은 멸시와 조롱과 박해의 격렬한 시련은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군병으로서 어려움을 견딜 수 있게 하였다. 또 오늘날에는 그 칭호가 영국과 미국에서 가장 세력 있는 감리교파의 하나로 명예로운 이름이 되었다. 웨슬리는 찬송에도 힘을 썼다. 국교회의 성가가 옥외 대중용으로는 적당치 않으므로 동생 찰스 웨슬리와 특별히 찬송을 지었다. 찰스 웨슬리가 지은 찬송이 6천 편 이상이다. 웨슬리 형제는 해마다 찬송가를 발행하였으며 그 찬송은 대개 개인의 종교적 경험을 표시하는 것으로 '만 입이 내게 있으면', '천부여 의지 없어서', '구주여 크신 인애를 ' 등이 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웨슬리와 휫필드 등 그의 Holy Club 동료들은 기대와는 달리 지치고 피곤하여 오히려 깊은 절망과 낙심에 빠졌으며 결국은 값없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믿음으로만이 구원과 경건함에 이른다는 놀라운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 그들은 참된 종교는 마음에 뿌리를 박고 있다는 것과 하나님의 율법은 말과 행동에는 물론이요, 생각에까지 미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들은 외부에 나타나는 행위의 바름뿐 아니라 마음의 성결이 또한 필요한 것을 확신하였으므로 새 생애에 들어가기를 힘썼다. 그러나 그 당시는 그들은 구하는 바를 얻지 못하였다. 정죄의 상태에서 놓여나고 죄의 세력을 깨뜨리고자 하는 그들의 노력은 허지로 돌아갔다. 그것은 바로 루터가 경험한 것과 똑같은 투쟁이었다. 그것은 그의 심령을 괴롭게 했던 문제, 곧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욥 9:2)고 한 바로 그 문제였다.

그 후 웨슬리 형제는 목사 안수를 받고 선교 사업을 위하여 미국으로 파견되었다. 항해 중에 심한 폭풍우를 만나 죽을 지경이 되었을 때 그 가운데서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신뢰와 평안을 나타내는 모라비아 교도들을 통하여 아직도 자기는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의 보증을 가지고 있지 못함을 깨달았다. 그는 얼마 동안 그 모라비아 교도들과 함께 지내며, 그들의 그리스도인적 행동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그 후 런던에서 있은 모라비아 교도들의 한 집회에서 루터의 로마서 서문을 듣고 “나는 구원을 얻기 위하여 그리스도, 오직 그리스도만을 신뢰해야 한다고 느꼈다. 그 때에 한 가지 확증 곧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 심지어 나 자신까지도 제거해 버리시고, 나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구원하여 주신 데 대한 확증을 얻었다.” 그동안 그는 엄격한 극기와 자책과 겸비의 괴롭고 쓸쓸한 고투의 긴 세월을 통하여 하나님을 찾으려는 목적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러나 이제 기도와 금식과 자선 사업과 자기희생으로 얻으려고 애쓴 은혜가 실상은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선물임을 깨달았다. 그 후에도 엄격한 극기의 생애를 계속했는데, 이제는 그것이 신앙의 근거가 아니고 결과였으며 성결의 기초가 아니고 열매였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는 그리스도인의 소망의 기초이며, 그 은혜는 순종으로 나타날 것이다. 그의 생애는 그가 받은 위대한 진리, 곧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마음속에서 역사하는 성령의 새롭게 하는 능력, 그리스도의 모본을 따라 생애에 이루어지는 열매 등 일단 그리스도의 믿음 안에 굳게 서자 그의 온 마음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에 관한 지식을 어느 곳에든지 전하고자 하는 욕망으로 불타서 "나는 이 세계를 나의 교구로 생각한다. 그러므로 내가 세상 어느 곳에 있더라도 기쁜 구원의 소식을 듣기 원하는 모든 사람에게 그것을 선포하는 것이 나의 의무라고 생각한다."라며 진리를 전하는 일에 온전한 삶을 바쳤다.

찰스 스투얼이 영국 왕위에 오르자 웨슬리가 갖는 [속회]와 [야간집회]를 교황권 운동이나 왕권 회복운동으로 오인하여 교구 목사들과 지주들이 폭도를 매수해 집회를 방해했다. 많은 성직자는 그를 “영국 최대의 위선자, 민중의 사기꾼, 허식자, 위증자, 선동자, 악마의 젖으로 길러낸 자, 희극의 위선자”라고 조소, 야유하였고 연극 무대에도 언제나 조롱과 경멸의 대상으로 표현되었다. 그가 설교하면 그 집회 장소에 돌, 쓰레기, 오물 등을 집어 던지고 욕설을 퍼붓고 모래를 뿌리는 등 온갖 방해를 일삼았다. 그러나 격노한 폭도의 무리가 습격할 때도 담대히 복음을 전파하였으며 그의 위엄있는 풍채와 인격 그리고 그의 영적 감화력 앞에서 여지없이 압도당하고 말았으며 1750년 중반부터는 모든 핍박과 비난이 사라지며 자유롭게 복음을 전하게 되었다.

사실 웨슬리는 새 교회를 세우려는 생각은 없었다. 옥외 전도, 즉석 기도, 평신도 전도, 찬송, 연회, 속회, 전도인의 안수 등 모든 것은 국교회가 웨슬리의 구령 사역을 찬성하지 않았기 때문에 필요에 의하여 생긴 것이다. 웨슬리는 자기가 살아있는 동안 국교회와 분리하지 않겠다고 말하였고 새로운 교파를 만들 생각이 전혀 없었으나 자기 전도를 듣고 들어온 사람들을 위하여 어떤 단체로든지 조직해야 할 필요는 느끼게 되었다. 이후 감리교(Methodist Connection)라는 명칭으로 한 조직을 가지게 되었다.

다음 호에서 “18세기 영국 부흥운동을 주도한 감리교 창시자 요한 웨슬리”는 2부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