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부_“오라!”


“오라!” “만일 주님이시거든 내게 물 위를 걸어 오라고 말씀하소서.” 베드로의 호소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허락이 아니라, 명령이었습니다. “오라!”

예수님께서는 그 이상의 어떤 다른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께서는 베드로로 하여금 물 위를 걸을 수 있을 만한 증거를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의 제자,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명령에 의존하여서 확신을 이끌어내야만 하였습니다. 거룩한 확신이 가득 찬 주님의 명령은 베드로에게 영감적인 확신을 불러일으켜 주었으며, 그리하여 베드로는 신속하게 순종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주 사용하시는 방법 중의 하나입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에, 그것은 자주 구체적 내용과 설명이 아닌 부르심으로 우리에게 들려옵니다.

1) 명령으로 들리는 하나님의 음성
“네 아들, 곧 네가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이제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산중에서 내가 네게 알려줄 한 산에서 그를 번제로 드려라” (창 22:2). 이 성경절에는,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알아차릴 수 있을 만한 내용이 담겨 있을 뿐입니다. 그 이상의 어떤 것도 없습니다.

“예수께서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을 던지는 것을 보시니 저희는 어부라,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마 4:18,19). 이것이 그 사람을 부르신 말씀의 전부입니다.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지나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 (마 9:9). 여기서는 오직 두 단어만을 말씀하셨습니다.

38년 동안, 한 앉은뱅이가 베데스다 연못으로 매일 들려져 왔는데, 그는 연못이 요동칠 때에 치유를 얻고자 하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요 5:6-9). 잠시 후에 그가 자신을 고쳐준 사람을 찾아보니, 예수님께서는 이미 자리를 피하신 후였습니다. 이 모든 경우들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그분에 대한 믿음을 활용해서 그분의 명령을 수행하도록 각 사람들을 남겨둔 채 그 자리를 떠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 믿음을 요구하심
우리가 성경에 나타난 이러한 예화를 생각해 볼 때,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큰 믿음을 요구하신다는 사실이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그 대표적인 예로서, 주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제외하고는 어떤 사람도 경험한 적이 없는 불가능한 행동을 당신의 제자인 베드로에게 요구하셨던 것입니다.

표면적으로는, 주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의 길을 쉽고 평탄하게 만들기 위해서 어떤 특별한 노력도 기울이지 않으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가 앞서 보았던 것처럼, 그분께서는 베드로가 물 위를 걸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내포하는 어떠한 확신을 주는 언급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이삭의 생명을 취하지 않으시겠다고 미리 보장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께서는 베드로와 안드레와 마태에게 먹고 살만한 적당한 수준의 월급을 지급하겠다는 보증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의도적으로 거의 불가능한 믿음을 당신을 따르고자 하는 자들에게 요구하셨는데, 예수님께서 요구하시는 믿음을 충족하기 위해서 그들은 자신들이 전적인 헌신과 굴복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분의 명령은 그때와 마찬가지로 오늘날도 길고 구체적인 설명을 포함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음성을 직접 귀로 들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것은 우리의 양심을 통해서 영혼을 울리는데, 그 소리는 흔들리지 않는 권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매우 조용하고 은은하게 우리의 귀를 울립니다. 우리가 이러한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게 될 때, 우리는 아브라함, 안드레, 마태, 중풍병자, 그리고 베드로처럼 주님의 말씀에 즉시 순종하여, 배에서 내린 다음 물 위를 걸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조용히 저를, 또는 그대를 찾아와서 “나를 따르라!”고 지금 말씀하신다면, 우리는 그분의 말씀을 믿고, 굴복하여, 순종할 수 있겠습니까? 바로 이러한 것들이 주님께서 그대와 저에게 요구하시는 믿음입니다. 믿음과 헌신, 또는 굴복은 결과적으로 동일한 것입니다. 믿음은 그대가 모든 것을 의탁할 수 있는 그리스도께 대한 전적인 신뢰인데, 그것은 굴복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그대가 믿음이 있다면, 굴복하게 될 것이고, 그리고 그대가 굴복한다면, 더 큰 믿음을 소유하게 될 것입니다. 계속적인 굴복 없이 계속적인 순종을 주장할 수 없습니다. 굴복은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3) 믿음은 순종을 통해 나타남
베드로의 믿음은 그의 순종에 의해서 인정받았습니다. 믿음은 언제나 순종을 통해서 인침을 받습니다. 사실, 참된 순종만이 참된 믿음을 시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다음과 같은 올바른 지침을 말할 수 있었습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런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뇨?” (약 2:14). 야고보의 질문에 대한 답은 “결코 못한다” 입니다. 야고보는 또 다시 다음과 같은 도전을 던지고 있습니다.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약 2::8). 야고보는 구원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행함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믿음과 굴복의 결과로서 나타나게 되는 행함과 순종을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의혹이나 타협하는 일 없이 당신께 순종할 수 있는 충분한 확신을 소유하기를 요구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에 대한 증거들을 보여주시고, 들려 주십니다. 당신을 찾고자 하는 자들이 그분께 대해서 확신을 가질 수 있을 정도로 풍성한 증거들을 주십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에게 물 위를 걸으라고 말씀하실 때, 우리는 우리의 눈 앞, 또는 우리의 손 안, 또는 우리의 발 아래와 같이 가까운 곳에서 항상 확실한 증거들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우리가 순종할 때만 그러한 증거들을 받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베드로가 실제로 물 위를 걸을 때까지 그가 물 위를 걸을 수 있다는 보증을 받았던가요? 예수 그리스도의 신뢰할 만한 명령인 “오라!”라는 말씀의 증거 외에 어떤 다른 증거도 없었습니다. 가끔 주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에 대한 완전한 신뢰심을 가지고 물 위를 걸을 것을 요구하시는 데에는 오직 한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물 위를 걷지 않는다면, 우리의 발 밑에서 느껴지는 물을 결코 발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순종을 통한 경험에서 우리로 하여금 귀중한 체험을 소유하게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순종을 통해서 얻게 되는 경험은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신뢰와 믿음을 더욱 더 깊고 높은 수준으로 이끌어 갑니다.

4) 순종을 통해 시험을 받음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단순한 마음의 동의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는 행동인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또한 그러한 행동을 하는 데에는 믿음이 요구된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러한 행동을 하는가 또는 하지 않는가에 따라서 그리스도에 대한 한 개인의 믿음의 상태가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가끔 어떤 그리스도인들을 만나게 되는데, 그들은 죄에 대해서 승리하기를 소원하며, 믿음과 평화와 사랑 같은 거룩하고 영적인 요소들을 소유하기를 원하지만, 어쩐 일인지 그러한 것들을 소유하게 되는 기쁨을 맛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주여, 나로 하여금 물 위를 걸어 당신께 가게 하소서” 라고 입으로 외치고 있지만, 주님께서 “오라!”고 명령하시는 호소에는 결코 응답하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있지만, 배 위를 서성거리면서 불분명하고, 두려워하면서, 의심을 품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들 자신 안에서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의 원천을 찾으려고 하지만, 자신 안에 그러한 원천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대한 순종은 우리 자신의 능력 안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힘으로 결코 물 위를 걸을 수 없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은 우리 자신이 가지고 있는 어떤 것을 근거로 해서 순종하는 것이 아니고, 그분의 부르심과 명령에 순종할 수 있는 원천을 제공해 주시는 그분을 온전히 신뢰함으로써 순종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의 믿음은 순종에 의해서 시험 받게 됩니다.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그가 무슨 말로 변명할지라도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디트리취라는 사람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오직 믿는 자만이 순종할 수 있고, 오직 순종하는 자만이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순종으로 나타나는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분께서는 오직 믿음이 있는 자만이 행할 수 있는 순종을 요구하시기 때문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행하는 순종만이 베드로로 하여금 물 위를 걸을 수 있게 하였습니다. 그와 같은 믿음이 없이는, 그는 파도 위에 서있는 그분을 신뢰할 수 없었는데, 왜냐하면 물 위를 걷는다는 것은 너무도 바보스럽게 보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때 그가 순종하지 않았다면, 그는 자신이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다는 사실을 드러내었을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직 믿음으로 행하는 순종만이 우리로 하여금 죄에 대해서 완전한 승리를 얻을 수 있게 해줍니다.

로마서 8장 2~4절을 통해서, 믿음으로 행하는 순종을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더 높은 법에 의거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적인 능력은, 우리로 하여금 물 위를 걸을 수 없도록 하였던 물의 수압에 대한 물리적인 법칙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켰습니다. 세상에서 인정받고 있는 보편적인 수압의 법칙에서 해방된 자들만이 물 위를 걸을 수 있는 것입니다. 율법이 육신이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육신으로 보내어 물 위를 걷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도 그분처럼 물리적인 수압의 법칙이 아닌 하늘의 믿음의 법칙에 의거하여 물 위를 걸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 또한 우리로 하여금 불가능한 것을 할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해서 모본이 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경험에 있어서 우리는 물 위를 걷지 못할 뿐만 아니라 확신을 잃어버리고 아예 배를 포기하고 떠나려고까지 합니다. 즉시로 죄의 물결과 싸워야 하지만 우리에게는 이미 그러한 죄의 물결을 감당할 만한 믿음이 없음을 보고 좌절하게 됩니다. 우리가 이러한 상황과 상태에 처하게 될 때, 우리는 종종 이렇게 생각합니다. “죄를 완전히 정복한다는 것은 정말 불가능한 일이야. 물 위를 어떻게 걸을 수 있겠어?” 그리하여 그러한 믿음을 가지고 그리스도인의 생애를 살고자 할 때, 우리는 계속해서 물속으로 빠져들어갈 수 밖에 없습니다. “너희의 믿음대로 될지니라”라는 주님의 말씀은 그런 사람들에게도 적용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순종해야만 합니다.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할 수 없음을 잘 알지만 그렇기에 우리는 믿음을 활용해야 합니다. 믿음을 말할 때 다음과 같은 생각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순종에 관한 모든 의무는 우리에게 있지만, 순종을 위한 모든 능력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걸었을 때, 그리스도께서는 베드로가 할 수 없는 모든 일을 해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베드로가 할 수 있는 것은 어느 것이라도 그를 대신해서 해주시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스스로 배에서 뛰어 내릴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한 발걸음을 내디딜 수 있었고, 계속해서 걸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는 물의 부력을 전혀 이용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믿음을 가졌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그 믿음을 근거로 해서 베드로를 위해서 일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5) 믿음은 언제나 물 위를 걷는 것
베드로는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것을 현실화하였습니다. 그는 그 이전이나 후에 어떤 사람도 하지 못했던 것을 성취했습니다. 그는 세상에서 인정하는 과학적인 견지에서 보면 절대 불변의 물리적 법칙에 대항하여 걸었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도 물 위를 걸을 수는 없습니다. 수력학 법칙은 인간이 물 위를 걷는 것을 절대적으로 금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베드로로 하여금 물 위를 걸을 수 있게 하였을까요? 조그만 개구리의 무게조차도 가라앉아 버리는 물의 표면 위에서, 성장한 인간의 무게를 버티게 하였던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요?

그것에 대한 대답은 믿음입니다. 믿음이란 자신의 확신이 이루어내는 자기달성이 아닙니다.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서 소유하는 완전한 확신인데, 이것을 근거로 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적을 창조해 내시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그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주님, 저에게 불가능한 것을 행하도록 말씀해 주십시오. 물 위로 걸어서 당신에게 가도록 명하여 주십시오.” 만일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인의 생애를 이런 식으로 이해하고 있지 않다면, 그는 아직 그리스도인의 참된 생애를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경험 속에서 불가능한 것들이 일어나지 않고 있는 사람은 아직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그리스도인 생활이 단순히 종교적인 형식을 유지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일종의 자아훈련을 통해서 그것을 성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생활은 진정한 그리스도인 생애가 전혀 아닙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란 마음속에 내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모든 죄와 악한 것을 이기고 정복하는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진실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예수님께 다음과 같이 호소하는 것입니다. “주님, 나를 명하사 물 위로 걸어오라 하소서.” 그리고 우리는 이렇게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 저는 저의 생애에서 죄를 극복하기를 원합니다. 저는 질투심, 원망, 분노, 조절되지 않는 식욕, 그리고 원한을 버리기를 원합니다. 저는 이 지긋지긋한 죄의식으로부터 해방되기를 원합니다. 주님, 저는 물 위를 걷기를 원하지만, 제 스스로 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제 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입니다. 주님, 저를 주님께 가도록 명령하여 주시옵소서.”

6) “오라!”

이런 소원에 대한 주님의 대답은 항상 “오라!” 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한다면 주님의 이러한 분명한 음성을 듣게 될 것입니다. 그 때는 나 자신의 느낌이나 감정 경험에 근거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그 하신 말씀만을 의지하여 그대로 순종하는 것이 우리를 살려내는 믿음이 될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하신 명령과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물 위를 걸어가게 하실 수 있다는 그 믿음 말입니다.


마치면서
많은 사람은 성경에 대한 풍부한 이해와 영감적 통찰 없이 믿음을 단순한 사전적 개념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죽기 전에 믿어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참된 믿음을 소유하는 것은 한 순간 갑자기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각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빛을 거절할 때마다 양심이 무뎌지고 점점 더 회개하고 구원받기 어려운 상태가 됩니다. 성경에 기록된 많은 사람이 주님 곁에서 온전히 회개하고 믿기를 미루다가 멸망 당했습니다. 아간, 게하시, 가룟 유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등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진리를 믿을 기회를 주셨지만 마음에 품은 죄를 회개하지 않다가 결국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믿음은 머리로 어떠한 사실이나 가르침을 인정하거나 동의하는 수준 이상을 의미합니다. 믿음이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을 인정하고 받아들인 후 온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그 말씀대로 따라 사는 것을 말합니다. 성령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진리의 빛을 비춰주시고 우리가 참된 믿음으로 주님을 따르길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주시는 기회가 영원히 계속되지는 않습니다.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은혜의 시간은 반드시 그 끝이 있습니다. 또한 이 시대 자체가 그 은혜의 때가 마쳐질 시간임을 성경이 가리키고 있습니다. 죽기 전에, 아니 더 이상 여러분의 마음이 주님의 명령 듣기를 거절하므로 화인 맞아 굳어지기 전에 주 예수님의 믿음을 가지십시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기를 더 이상 미루지 말고 오늘 주님을 믿음으로 영접하고 따라가는 독자 여러분이 되시길 기도합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은혜의 시간이 주어진 것을 감사하며 참된 믿음을 소유하여 이 타락한 세상에서 주님을 증거하는 증인들로 서는 우리가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