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부_나는 진짜 그리스도인인가요?

 

A.W.토저(Aiden Wilson Tozer, 1897~1963) 같은 목사님이 계셨던 것은 기독교계에 큰 축복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이 시대의 선지자라는 평판을 들었습니다. 그는 교회의 부패한 현실을 깊숙이 들여다보고 인기에 영합하지 않고 타협없는 하나님의 말씀을 강력하게 선포했습니다. 토저 목사는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그가 깊이 있는 말씀의 이해와 박식한 신학적 이해를 눈물의 기도로 반죽하여 개혁의 메세지로 전할 때에 많은 그리스도인의 가슴을 치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오직 성령과 말씀으로써만 심령을 부흥시키는 설교자였습니다. 그는 평생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삶의 개혁과 부흥에 관한 40여권의 명저들을 저술했습니다. 그는 Christian and Missionary Alliance라는 복음주의 교단의 목사였습니다.
그는 물질만을 추구하는 현대 자본주의가 생산해 낸 교회의 자본화와 그리스도인의 가야할 길인 성화 대신 평안과 행복만을 추구하는 오염된 신앙, 명예는 추구하지만 십자가는 부인하는 가짜 신앙, 그리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부흥을 기획하지만 성령이 메마른 교회, 신자 수의 증가를 위한 비즈니스적인 영업법을 도입한 회개 없는 그리스도 영접, 체험은 있지만 신학이 없는 신앙과 죽은 정통만을 간직한 채 하나님을 만난 뜨거운 감격이 없는 신앙으로 전락한 현 시대의 신앙의 허상을 날카롭게 고발하고 있습니다. 진짜 신앙과 가짜 신앙을 정직하게 파헤친 그의 글들을 통해 우리의 신앙을 진단해 봅시다!

1) 진짜는 험한 십자가를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모순처럼 보이는 진리
오늘날 대부분의 기독교 지도자들은 기독교 신앙을 과학, 철학 및 그 밖의 자연적이고 합리적인 것들과 조화시키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역설적이며, 기독교의 신앙 체계의 뿌리에 놓여있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도 하나님의 역설입니다. 증명될 수 있는 것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신앙이 필요 없습니다. 신앙은 실험이나 논리적 증명에 근거하지 않고 하나님의 성품에 근거합니다.
십자가는 자연인, 곧 거듭나지 못한 사람과 완전히 대립됩니다. 다시 말해서 십자가의 철학은 자연인의 사고와 정면 충돌하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라고 단언했습니다(고전 1:18 참조).

그리스도인의 역설, 하나
그리스도인의 역설은 여러가지 면에서 나타납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다고 믿지만 전보다 더 충만한 삶을 누리며, 또한 영원히 살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는 이 땅에서 활동하지만 동시에 하늘에 앉아 있습니다. 비록 이 땅에서 태어났지만 거듭난 후에는 더 이상 이 땅이 고향이 아님을 믿습니다. 공중에서는 아름답고 우아하지만 땅에 내려오면 서툴고 보기 흉한 쏙독새처럼 그리스도인은 천상의 자리에서는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지만, 그가 몸담고 있는 사회의 살아가는 방법들과는 잘 조화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늘의 아들로서 이 땅의 사람들 중에서 승리를 거두려면 세상의 방법을 따르지 말고 오히려 그와 반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그는 안전하기 위해서 오히려 자신을 위험에 빠뜨리며, 자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 목숨을 잃어버립니다. 만일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려고 시도한다면 오히려 생명을 잃을 위험에 처합니다. 높아지려면 낮아져야 하고 낮아지기를 거부한다면 이미 낮아진 것입니다. 그러나 스스로 낮아진다면 이미 높아지고 있는 것이며 가장 약할 때 가장 강하고, 가장 강할 때가 가장 약합니다. 가난하지만 다른 사람들을 부유하게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며, 부유해지면 그 능력이 사라집니다.

그리스도인의 역설, 둘
남에게 가장 많이 주면 자신이 가장 많이 소유하게 되고, 가장 많이 소유하려고 하면 가장 적은 것이 남습니다. 가장 낮아졌다고 느낄 때 가장 높이 있으며, 자신의 죄를 가장 많이 깨달을 때 가장 죄가 적습니다. 자신의 무지를 깨달을 때 가장 지혜로우며, 자신이 가장 많은 지식을 쌓았다고 믿을 때 가장 무지합니다. 때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가장 많은 일을 하는 것이고, 가만히 서 있는 것이 가장 멀리 가는 것입니다. 고난 중에 기뻐할 수 있으며, 슬픔 중에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구원을 얻었다고 믿지만, 장차 구원 얻을 것을 기대하면서 소망 중에 기뻐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만, 하나님에 대해 공포심을 갖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임재에 완전히 압도되어 자신이 망했다고 느끼지만, 그 어떤 것보다도 하나님의 임재를 갈망합니다. 그는 자신의 죄에서 깨끗케 되었음을 알지만, 자신의 육신 안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않음을 알고는 괴로워합니다.
그는 한번도 본 적이 없는 분을 가장 사랑하며, 자신이 비록 보잘 것 없고 초라한 존재이지만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이신 분과 친구처럼 대화합니다. 그는 자신이 본래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고 느끼면서도 그는 자신을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 치욕의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음을 확신하며, 하나님에게는 가장 보배로운 존재인 것을 감사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놀라운 존재
십자가를 지는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 어디에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철저한 비관주의자이며, 동시에 낙관주의자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볼 때 그는 비관주의자가 됩니다. 왜냐하면 그는 십자가에서 영광의 주님에게 쏟아진 심판이 모든 사람들에게 유죄 판결을 내리는 심판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리스도 밖에서 인간적인 소망을 찾으려는 시도를 거부하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려는 인간의 노력이 아무리 고결한 것이라 할지라도 결국 사상누각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비관주의자이면서 동시에 평온한 낙관주의자입니다. 십자가가 온 세상에 유죄선고를 내린다면, 그리스도의 부활은 온 우주에서의 선의 궁극적인 승리를 보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결국 모든 사람들의 문제들이 전부 해결될 것이며, 그리스도인은 이 궁극적인 승리를 기다립니다. 그렇습니다! 이토록 그리스도인들은 믿기 힘들 정도로 참으로 놀라운 존재입니다!

험한 십자가의 길
그러나 예수님을 받아들이는(영접하는) 행위로써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시작한다는 주장이 맞는 말이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기독교는 받아들임과 거부, 긍정과 부정을 모두 포함합니다. 이것은 회심하여 처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뿐만 아니라, 그 후에 신앙생활을 계속할 때에도 해당되는 말입니다. 즉, 그리스도인이 평생의 싸움을 다 마치고 본향으로 돌아갈 때까지 날마다 이 진리는 적용됩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그리스도가 미워하시는 것들을 모두 거부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 생활에는 부정적인 면도 있고 단점도 있습니다.
주님은 사람들에게 자기를 따르라고 부르실 때, 결코 쉬운 길을 제시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지금 전도할 때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꺼리는 것들을 주님의 제자들에게 서슴없이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의 전도자들 중 주님처럼 아무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눅9:13)라고 말할 용기를 가진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요? 그리고 안타깝게도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하는 수많은 사람들은 이토록 험하고 힘든 신앙의 길을 갈 수 있는 도덕적 능력 자체가 없습니다. 오늘날의 도덕적 풍토는 우리 주님과 사도들이 가르친 엄하고 질긴 신앙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현재 종교적 온실에서 만들어지는 허약하고 깨지기 쉬운 신자들은, 과거에 목숨을 아끼지 않고 복음을 증거하다가 죽어간 성도들에 비교하면 참으로 한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한 책임은 오늘날 교회 지도자들에게 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희생 없이도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고 말할 뿐입니다.
오늘날 교회들은 유약한 그리스도인들로 가득합니다. 그들은 무엇인가 재미있는 것들로 즐겁게 해주어야만 교회에 나옵니다. 의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죄를 미워해야 하며,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자신을 거부해야 하며, 선한 길을 따르기 위해서는 악한 길을 떠나야 한다는 것을 그리스도인들이 언제 깨달을 것인가요? 이 세상과 친구가 되는 것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면서 앞으로 전진할수록, 그리고 높이 올라갈수록 우리 앞에는 더 많은 어려움이 놓여 있고, 우리 영혼의 공격이 더 거세어진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사람들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은 이 사실을 알고, 어려움과 고난의 길을 즐거움으로 가며, 또한 그 고난을 해결하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라서
비유를 들어 말하자면, 성령 충만한 삶은 강도들이 창궐하는 숲을 통과하는 순례의 길이요, 마귀와 처절하게 싸우는 전쟁입니다. 성령 충만하면 언제나 갈등이 있게 마련이며 때로는 자신의 본성과 사력을 다해서 싸워야 할 때도 있습니다. 우리가 완전히 승리하는 방법은 승리하신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는 것뿐입니다.

2) 진짜는 솜사탕을 거부하고 가시면류관 복음을 믿습니다.

생사의 문제
세상에는 극소수이지만 생사의 문제처럼 필수적인 일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그리스도와 어떤 관계를 맺느냐 하는 것은 바로 생사가 달린 가장 큰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죄인들을 구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으며, 우리의 공로와 상관없이 오직 그분에 의해서 구원을 받는다고 성경이 가르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자동적으로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는 것은 아닙니다. 거기에는 세 가지 아주 중요한 질문이 적용되어야 하고, 그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는가에 따라 우리의 영생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 질문은, 객관적으로 제공된 구속이 어떻게 하면 주관적으로 받아들여진 구원이 되는가? 또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이루신 일이 어떻게 내 안에서 효력을 발휘할 수 있는가? 그리고 구원을 얻기 위해서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세 가지입니다. 이 중대한 질문에 대해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라, 그리스도를 당신의 개인적인 구주로 받아들여라, 그리스도를 영접하라의 세 가지 답을 내 놓습니다. 그러나 이 세 가지 대답들은 사실 다 동일한 것입니다.
그리스도 영접은 만병통치약?
우리는 영적으로 게으릅니다. 그래서 신앙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할 때 가장 쉬운 길을 택하려는 쪽으로 기울어지며, 그리하여 그리스도 영접을 만병통치 약처럼 사용하여 보편적으로 적용합니다. 심지어 그들은 순간적인 마음의 충동에 의해서, 고통이나 손해 없이, 평상시의 삶의 방식을 바꾸는 수고 없이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 태도는 생사를 가르는 중대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아무런 효과가 없습니다. 만일 과거에 이스라엘 민족이 유월절의 피를 받아들인(영접한)후에 계속해서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겠다고 고집했다면, 탕자가 아버지의 용서를 받아들인(영접한) 후에 계속 먼 나라의 돼지들 틈에서 생활했다면 어떻게 되었겠는가요? 그리스도를 영접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려면 거기에 따르는 행동의 변화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리스도를 영접한다는 뜻
그리스도를 영접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경험은 아주 독특한 경험으로서, 이 연합은 지적인 측면, 의지적인 측면, 그리고 감정적인 측면을 포괄합니다. 지적인 면에서 신자는 예수님이 자신의 주시요, 그리스도라고 확신합니다. 의지적인 면에서 그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리스도를 따르겠다고 결심합니다. 그 결과 감정적인 면에서 그는 그리스도와의 교제에서 오는 큰 기쁨을 누립니다. 그리스도를 구주로 인정할 뿐만 아니라, 주로 인정하는 데는 많은 혁명이 따릅니다. 진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일부분만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분의 모든 것을 받아들입니다.
그리스도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그분 이외의 다른 것들을 철저히 부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은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요일 4:17)라는 말씀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신앙은 그리스도의 친구들을 우리의 친구들로, 그리스도의 원수들을 우리의 원수들로, 그리스도의 방법들을 우리의 방법들로, 그리스도의 거부하시는 것을 우리가 거부하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우리의 십자가로, 그리스도의 생명을 우리의 생명으로, 그리스도의 미래를 우리의 미래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바람을 안고 사는 사람들
그리스도인들은 바람을 받으며 세상을 거슬러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바람이 불지 않는 산허리 양지 바른 곳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교회를 성장시키고 비신자를 구원하겠다는 우리의 결의가 최근에 현대의 세일즈맨들이 사용하는 기법을 교회에 들여와 사용하는 죄를 범하게 한 것 같습니다. 세일즈맨들은 상품의 좋은 점들만 이야기하고 다른 것들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것처럼 지도자들과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영접하기만 하면, 그분이 마음의 평안을 주시고, 문제들을 해결해 주시고, 사업이 번창하게 해 주시고, 가정을 지켜 주시고, 언제나 행복하게 해 주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 말을 믿고 교회에 나온 사람에게 첫 찬바람(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해 생기는 시련이나 어려움)이 몰아치면 그들은 떨면서 카운슬러에게 찾아가서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를 알려고 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더 이상 무엇을 어떻게 말해 줄 지를 모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정말 진리에 충실한 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복음서에 보면 그분은 진리의 전모를 제시하시고 사람들로 하여금 결단을 내리도록 하셨습니다. 그분은 사람들이 엄격한 진리에 너무나 부담을 느껴 돌아설 때, 따라가서 장미빛 약속을 제시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자신이 아담의 후손들에게 인기가 없을 것을 아셨습니다. 또한 그분은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이 인기를 얻기를 기대해서는 안된다는 것도 아셨습니다. 그분과 동행하는 사람들도 그분의 얼굴에 몰아치는 바람을 역시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진짜 신앙이야? 가짜 신앙이냐?
솜사탕처럼 달콤한 복음을 제시하면서 산허리 양지 바른 곳을 약속하는 것은 사람들을 잔인하게 속이는 것입니다. 소위 ‘쌀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이 있는데, 그 뜻은 물질적 이익을 위해서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복음을 제시할 때,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 치러야 할 대가를 제대로 알려주지 않기 때문에 교회들에서 많은 ‘쌀 그리스도인’이 양산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제자가 되겠다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약속하시는가요? 그분은 죄사함, 내적 청결, 하나님과의 화평, 영생, 성령을 선물로 받는 것, 유혹의 극복, 부활, 영화롭게 됨, 하나님과 영원히 거할 수 있는 처소들을 약속하십니다. 이런 것들은 영적인 축복이지 물질적인 것들이 아닙니다.
진짜 신앙을 가진 사람은 그리스도의 승리를 믿기 때문에, 그 승리에 참여하기 위해서 어떤 고난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반면, 가짜 신앙을 가진 사람에게는 바람이 싫고, 산허리의 양지 바른 곳이 좋다라는 확신만 있을 뿐입니다.

3) 진짜는 행복보다 거룩을 열망합니다.

참된 영성의 척도
영성의 개념은 그리스도인들의 모임마다 서로 다릅니다. 어떤 모임에서는 신앙에 대해서 끊임없이 큰 소리로 말하는 사람이 신령한 사람으로, 또 어떤 모임에서는 열심있고 활기에 찬 사람, 또는 가장 먼저, 가장 길게, 가장 큰 소리로 기도하는 사람이 영성 있고 영적인 사람이라는 명성을 얻습니다. 열렬한 간증, 빈번한 기도, 큰 찬양이 영성과 관계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그런 것들 자체는 영성도 아니고, 영성의 증거도 아닙니다.
참된 영성의 척도는 우리에게 주로 나타나는 욕구들이 무엇이냐?라는 것입니다. 진짜 그리스도인에게 나타나는 다음과 같은 욕구들은 언제나 우리 속에 깊이 자리잡고 있는 욕구들로, 우리의 삶에 동기를 부여하고 우리의 삶을 통제할 만큼 강력합니다.

* 첫째: 거룩해지기를 바라는 욕구
자신들이 남보다 더 거룩하다고 말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행복에 대한 갈망은 실상 그들이 거룩하지 않다는 충분한 증거입니다. 정말로 신령한 사람은, 기쁜 일이 생겨나도 교만해지지 않을 정도로 성숙했을 때에 비로소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쁨을 부어 주신다는 것을 잘 압니다. 존 웨슬리는 초기 감리교 단체들 중 한 단체의 구성원들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보기에 그들은 사랑 안에서 온전해진 것 같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어떻게 하면 거룩해질 수 있는지를 배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종교를 즐기기 위해 교회에 오기 때문입니다.”
* 둘째: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갈망
이 세상에서 스스로 고난과 수치를 당하면서까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은 신령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을 기쁨으로 삼으며, 늘 그분의 영광을 갈망합니다.
* 셋째: 스스로 십자가를 지려는 마음
역경과 환난은 의인과 악인에게 모두 찾아오는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을 십자가라고 부르지만, 사실 십자가라는 것은 우리가 굳이 당하지 않아도 되는 환난을 그리스도를 순종하기 때문에 당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사람은 그리스도에게 순종하기를 선택함으로써 십자가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그리스도에게 연합되고, 그리스도의 주권적 지배를 받아들이고,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 넷째: 하나님의 관점에서 판단하려는 욕구
모든 것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는 사람이 영성이 깊은 그리스도인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저울로 달아보고, 하나님께서 단지 표면만 아니라 본질을 꿰뚫어 보고 평가하시듯이 그것들의 가치를 평가하는 것이 성령 충만한 삶의 표시입니다. 육적인 그리스도인은 본질을 보지 못하고 겉모습만 보기 때문에 그에 따라 우쭐하기도 하고 낙심하기도 합니다. 영적인 그리스도인은 곤란을 당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관점에서 모든 것을 판단하기를 고집합니다.
* 다섯째: 의로운 삶에 대한 욕구
신령한 사람의 특징은 옳게 사는 것을 택하는 것입니다. 성숙한 하나님의 사람의 특징은 세상에 대해 초연한 자세를 취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사랑하며 집착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만, 성령으로 사는 사람은 이 땅에 집착하지 않고 오히려 남은 인생을 가치있게 살며, 의로운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여생의 길이를 결정하시도록 맡기고 평안을 누리며 삽니다.
* 여섯째: 기꺼이 희생하려는 마음
성령이 충만한 그리스도인의 또 다른 특징은 다른 사람들이 발전할 수 있도록 자신을 기꺼이 희생하는 것입니다. 그는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자신보다 낫게 여기고, 자신은 주목받지 못해도 그들이 향상되는 것을 보고 기뻐합니다. 그의 마음에는 시기심이 없습니다. 그의 형제들이 영예를 얻을 때 그는 기뻐하는 데,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며, 그 뜻이 그의 지상 천국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실 때 그도 역시 기뻐하는데,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이 기뻐하시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보다 높아지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면 그는 자신의 낮아짐을 얼마든지 기쁨으로 받아들입니다.
* 일곱째: 시간을 초월하는 마음
영적인 사람은 시간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영원의 관점에서 판단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신앙에 의해서 세상의 풍조와 시간의 유한성을 초월한 그는 마치 이미 이 세상을 떠나서 하늘나라에 도달한 사람처럼 생각하고 느끼는 법을 배웁니다. 이런 사람은 유명한 사람보다는 유용한 사람이 되고, 섬김을 받기보다는 섬기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것들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의 활동에 의해서 이루어져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