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 믿음으로만 구원 얻는 이유


구원은 믿음으로만 얻게 되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그런데 구원이 믿음으로만 이루어진다면 율법은 필요없는 것인가? 아니다. 율법이 없이는 구원을 논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율법의 정죄 때문에 구원의 필요가 생겼기 때문이다.

그러면 왜 성경 어떤 곳에서는 마치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율법을 폐하시고 우리가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 것처럼 표현하고 있는 것일까? 이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 이제부터 깊이있게 살펴보도록 하자.

 

율법의 목적

바울의 신학의 정수인 갈라디아서는 믿음으로 얻는 구원에 대해 아주 간단명료하게 설명하고 있다. 다음은 바울의 일문일답이다.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갈3:19 상단.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이유가 무엇이냐고 질문한다. 이에 대한 바울의 대답은 우리가 율법을 범하고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죄를 짓지 않았다면 율법을 주실 필요가 없었다.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갈3:19 하단. 즉, 약속의 자손이신 예수께서 오실 때까지만 율법이 필요하고 그 후에는 더 이상 율법이 존재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참 이상한 말씀 아닌가?

“중보는 한편만 위한 자가 아니나 오직 하나님은 하나이시니라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을 거스리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갈3:20, 21. 여기서 바울이 참으로 흥미로운 말씀을 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율법을 주신 이유는 율법을 지킴으로서 구원받으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죽이려고 율법을 주셨다는 것이다. 이게 대체 무슨 뜻일까?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안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갈3:22-24.

몽학 선생은 학생을 도와주는 가정 교사이다. 몽학 선생의 할 일은 학생들이 학교 선생님에게 가기까지 도와주는 것이다. 우리를 예수께로 인도하는 것이 율법이 가지고 있는 가장 중요한 기능이요 목적이다. 그러므로 율법은 우리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 깨우침을 줄 뿐이지 우리를 구원해 줄 수는 없다. 만일 우리가 율법으로 구원받을 수 있었다면 예수께서 돌아가실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돌에 써서 죽게 하는 의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을 인하여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고후 3:7. 율법의 직분은 죽게 하는 것이다. 율법은 죄를 심히 죄되게 하기 위하여 주신 것이다.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니라” 롬7:13. 그러므로 바울은 율법을 지켜서 구원얻을 자가 아무도 없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이 율법주의에 빠져서 방황하다가 그 반대의 극단에 빠져들어가고 있다. 그들은 마음에 이기심과 욕심을 가득 가진 채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하다가 결국에는 모든 것을 포기하는 참담한 경험 속에서 정반대의 극단적 가르침을 붙잡게 되는데, 그것이 “무조건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가르침이다. 그들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무조건 예수님만 믿자는 식으로 신앙 생활을 하는데, 이것이야말로 율법주의자들이 종말이다. 율법을 지켜서 구원받으려고 노력하다가 안 되니까 포기하고 그와 반대의 극단으로 뛰어들게 되는 것이다.

죄는 무엇인가? 죄는 불법이다 (요일3:4). 우리가 법을 어겼으므로 죄가 우리를 죽인다. 그래서 율법과 선악과는 비슷한 것이다. 선악과를 따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과 ‘하지 말라’는 십계명은 그 취지와 목적에 있어서 동일한데,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을 확인하고, 판단하고자 하는 것이다. 선악과를 먹지 않음으로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생명과를 먹음으로서 생명을 얻는 것과 마찬가지로, 율법을 지킴으로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생명나무이신 예수님 때문에 구원받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성경은 율법의 순종과 그 행위를 통하여 구원받을 육체가 하나도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구원받게 되는 것인가? 다음에 소개하는 예화를 통하여 참된 구원의 경험에 대해서 살펴 보도록 하자.

한번은 중국에 갔을 때 어느 호텔에 일주일을 머물렀다. 칠층에 묵었는데 그다지 좋은 호텔이 아니라 엘리베이터가 없었다. 책이 잔뜩 든 무거운 가방을 들고 하루에도 서너번씩 오르락 내리락 했는데, 한번만 올라갔다 내려와도 땀이 쭉 빠졌다. 이런 식으로 일주일을 살고 나니 딱 죽을 지경이었다. 그 다음 일주일이 지나서 이번에는 엘리베이터가 있는 호텔로 갔다. 일층에서 버튼만 누르면 자동으로 칠층까지 단번에 올라간다. 아, 얼마나 좋고 감사한지. 절로 감사가 나왔다. 칠층까지 걸어서 올라가는 고역을 치루어 보았기 때문에 감사한 것이다.

내 힘으로 아무리 율법을 지키려고 애써도 율법은 지켜지지 않는다. 오히려 항상 신경이 거기에만 쏠려 있기 때문에 남들이 율법을 지키나 안 지키나 하고 주위를 살필 뿐이다. 그래서 주위에 나보다 좀 못나고 부족한 사람이 있으면 험담하고 비판하고 정죄한다. 성일을 지키려고 교회에 와도 내 맘에 안 드는 사람을 보면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율법을 지키기는 커녕 율법의 정신에서 멀어도 한참 멀다. 이런 자신을 보니 한심해서 눈물만 날 뿐이다. 이런 경험을 해 본 자만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것에 대해 예수님께 진심으로 감사할 수 있다.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없는 죄의 본성을 가진 나를 내 마음의 중심에 있는 단순하고도 순수한 믿음을 보시고 나를 의롭다고 여겨주시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갈2:16.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19절. 율법을 지키려고 아무리 애를 써 봐도 자꾸 실패하고 넘어짐으로서 율법에 대해서 죽었던 사람이 이제는 그 방향을 바꿔서 예수께로 나아가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고 한다는 이 말씀은 무슨 뜻인가?

사도 바울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2:20. 죄된 본성을 가진 죄인은 율법을 지킬 수 없다. 그러므로 율법의 근본이시며, 그 율법을 완전하게 지키는 생애를 사셨던, 의로우신 예수님을 우리 마음 속에 모셔야 한다. 바로 이것이 믿음이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다. 믿음으로 예수님을 내 안에 모시고 사는 실제 생활이다.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시고 사는 생애 자체이기 때문에 믿음은 율법을 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롬3:31. 우리가 무슨 수를 쓰더라도 율법을 폐할 수는 없다. 믿음으로도 폐할 수 없으며 사랑으로도 폐할 수 없다. 율법은 하나님의 품성의 사본이므로 하나님 그분과 마찬가지로 불변하다. 그러므로 성서적 믿음을 가진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율법을 폐지시키고 마음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마음 속에 받아들임으로서 예수께서 그러하셨던 것처럼 율법에 순종하는 생애를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내 방식으로 율법을 지켜서 구원받으려고 애쓰던 것을 이제는 그만 두고 하나님의 방식, 즉 믿음만을 의지하여 살아가는 것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생애이다.

 

믿음 = 성령받은 증거

율법으로 구원을 얻는게 아니라면, 어떻게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가? 또한 무엇을 어떻게 믿으라는 말인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께서 나의 구원을 위해 이미 이루어 놓으신 역사를 믿는다는 뜻이다.
아브라함이 나이가 많아 자식을 갖는다는 것이 도무지 불가능해 보였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밤하늘의 별을 보이시면서 앞으로 네 자손이 이렇게 많아지리라고 약속하셨다. 이 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을 보면서 자신에게 자손을 주시겠다는 약속도 이루실 것을 믿었다. 왜냐하면 저 많은 별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자신과 같은 늙은이에게 자식을 생산할 수 있게 해 주시겠다는 약속을 넉넉히 지키실 수 있음을 믿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이었다.

요한복음 17장 3절에 영생은 예수를 아는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나는 예수를 알고 또한 그분을 믿는다. 그러므로 나는 구원받았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수박을 겉만 핥고 그 속은 먹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아브라함이 믿었을 때 하나님께로부터 약속을 받았던 것처럼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도 우리에게 약속을 주신다. 성경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하나님께서 무엇을 주겠다고 약속하고 있는가?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갈3:1-2. 초대 교회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은 믿을 때 성령을 받았다. 어떤 사람들은 성령 받은 증거로 기적의 은사들을 주장하지만, 기적은 성령을 받은 확실한 증거가 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기적은 마귀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성령을 받은 가장 확실한 증거는 무엇인가? 성령을 받은 가장 확실한 증거는 우리가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고 주님의 뜻대로 살아 승리하는 능력의 삶을 사는 것이다. 이 성령은 율법의 행위가 아닌, 오직 믿음으로 받는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갈3:14.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고 받아들이는 순간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에 임하셔서 율법의 요구를 이루는 순종의 열매를 우리의 삶 속에서 생산해 내신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았다는 사람이 믿음이 없고, 믿음을 가진 사람이 성령이 없다면 그것은 거짓말이다. 그래서 믿을 때 우리 속에 성령(그리스도의 영)이 계신지 확인해 봐야 한다. 그래서 바울이 로마서에도 고린도후서에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가 확인해 봐라. 너희 속에 성령이 없으면 너희는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고 말하고 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롬8:9.

 

성령의 능력

우리가 아무리 믿는다고 공언해도 우리 속에 성령께서 오셔서 하나님의 진리와 율법을 사랑하는 마음을 생산해 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다. 시편 119편을 읽어 보라. 거기서 우리는 율법에 대한 다윗의 존중심과 사랑을 깊이 느낄 수 있다. 율법을 사랑하는 마음이야말로 성령의 역사의 결과이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롬8:1. 그러므로 예수를 믿고 마음에 받아들인 그리스도인은 이제 더 이상은 죄의 노예가 아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2-4절. 바울은 율법의 요구를 이루되 그것을 자신의 노력과 우리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율법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지금까지 말한 바로 이것이 갈라디아서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요약이다. 여기에 그 공식이 나온다.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뿐이니라” 갈5:4-6. 예수님 안에서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은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율법의 요구를 온전히 이루는 삶을 살게 한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도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남의 것을 훔치지 않는 것도 그 이웃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롬13:10. 우리에게는 이기적인 사랑은 있으나 순수한 하나님의 사랑은 없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롬5:5. 하나님의 사랑이야말로 율법을 지키는 근본 정신인데, 성령께서 이 사랑을 우리 마음 속에 부어주셔야만 우리가 드디어 율법을 지킬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목적은 성령을 받는 것이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인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갈5:13. 이것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다. 우리의 이기적인 사랑이 아닌 성령을 통하여 받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의로운 생애를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6절. 이것이 구원이다. 우리가 성령 충만하면 육체의 소욕이 우리를 지배하지 않는다. 그러나 육체의 소욕이 나를 지배하면 성령이 우리를 떠나갈 수 밖에 없다. 그것은 전적으로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

 

성령으로 말미암은 사랑

“너는 나를 인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같이 잔혹하며 불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이 사랑은 많은 물이 꺼치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엄몰하지 못하나니 사람이 그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지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 아8:6,7.

아가서를 기록한 솔로몬은 하나님의 인침 받는 것을 죽음보다 강한 사랑을 받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 사랑은 원한다고 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두 남녀의 마음이 맞아야 생긴다. 보고 반해서 마음이 맞아야 이런 사랑이 생기지, 그냥 돈 주고 산다고 해서 사랑이 생기지 않는다. 진짜 사랑이 없으면 어려울 경우 도망가 버리고 만다. 솔로몬은 이러한 사랑과 하나님의 인을 연결지어서 말씀하셨다. 홍수나 많은 물로 끄지 못하는,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죽음보다 더 강한 사랑으로 인치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교회가 진정한 그리스도의 신부요, 하나님께서 인을 치신 자라는 것이다.

로마서 8장의 후반부에는 믿음으로 말미음는 의에 대한 결론이 기록되어 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한 요약과 결론이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가? 그것은 모두 사랑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롬8:36-39. 그래서 성경의 사상은 우리가 믿을 때 하나님께서 성령을 주시고 성령이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안에 부어 주면 그 사랑이 드디어 우리로 하여금 율법의 요구를 이루게 하여 변화된 그리스도인의 생애를 살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한가지 문제

그런데 여기 한 가지 문제가 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성령이 충만하여 성령의 힘에 의해서 내 속에 있는 죄의 법이 힘을 잃어버리고 주관됨으로서 새 생활을 시작한 후 구원받고 그 순간 우리의 생애가 끝나든지 예수께서 재강림하시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예수께서 오실 때까지 성령 충만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때 마귀가 우리의 약점을 잘 알기 때문에 온갖 수단, 즉, 몸의 고통, 직장, 자녀문제, 경제문제 등으로 우리를 공격한다. 이런 상황에서 죄를 이기는 것이 가능한가? 성경의 대답은 물론 “YES”이다. 요한일서 2장과 3장에는 하나님에게서 난 자마다 범죄할 수가 없다는 놀라운 말씀이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사람들이 마귀와의 실전에 약하기 때문에 쓰러지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예화를 통하여 이 문제에 대해서 좀 더 깊이 생각해 보도록 하자. 비가 올 경우 가끔 정전이 발생된다. 천둥번개가 쳐서 3초만 전기가 나가도 아주 귀찮은 일들이 생기곤 한다. FAX에 있는 시간, 디지탈 전화에 있는 시간, 주방의 오븐에 있는 시간들을 모두 올바로 교정해 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인생 역시 마찬가지다. 인생이라는 순례길을 걸어가다 가끔 원치않는 천둥번개에 맞는다. 그러면 잠시 정전이 되어 믿음이 나가고 성령을 잃어 버리게 된다. 그래서 쓰러지면 우리 힘으로 발버둥을 치다가 다시 주님께 나가게 된다. 이러한 경험들이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걸어가는 인생길에서 일어나는 것은 사실이지만,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죄는 반드시 이길 수 있으며, 정복할 수 있는 것으로 우리 모두에게 약속하고 있다. 성경이 약속했으므로 우리는 그것을 믿어야 한다. 우리 자신의 부족으로 인하여 가끔 넘어진다고 해서 죄와 유혹을 극복할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성령은 한번 받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매일 받아야 한다. 오늘의 구원은 내일의 구원을 보장하지 않는다. 날마다 주님께 굴복하고 날마다 믿음을 새롭게 하고 날마다 성령을 받아야 한다. 주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역사를 믿음으로서 성령을 받고, 또 그 성령을 통해서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이 진짜 믿음이고, 또한 이것이 율법의 완성이다.

성경은 우리가 실수하여 범죄하였을 경우에도 하늘에 중보자가 있으니 낙심하지 말라는 보증의 말씀을 주고 있다(고후5:5). 보증이란 무엇인가? 보증이란 앞으로 더 크고 좋은 것이 온다는 것을 확증해 주는 것이다. 그 더 좋은 것을 위해서 매일 보증을 받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소망은 무엇인가? 오직 믿음으로 성령의 약속을 받는 것이다. 영적으로 오르락 내리락하지 않고 믿음으로 의롭게 사는 자들, 그리고 성령을 받고 예수를 마음에 모신 자들은 때때로 넘어질지라도 그들의 정신이 다른 것에 분산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일에 집중된다.

예수께서 재강림하시기 직전,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환난과 핍박이 엄습하게 될 것이다. 그 때 예수께서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을 환난과 핍박이라는 용광로 속에 집어 넣으셔서 정결케 하신 후에 그들을 완전한 자로 인치실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요한계시록은 마지막 시대의 성도들이 마지막 핍박과 환난 후에 “살아계신 하나님의 인”을 받는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계14:1-5를 보면 계13의 짐승의 표의 환난을 통과한 이후에, 드디어 인침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흠없이 서 있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된다. 이러한 인침받은 자들, 즉 믿음으로 구원받은 자들을 환난에서 보호하시기 위하여 예수께서 일어나실 것이다. “그때 네 민족을 호위하는 대군 미가엘이 일어날 것이요 또 환난이 있으리니 이는 개국 이래로 그때까지 없던 환난일 것이며그때에 네 백성 중 무릇 책에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을 얻을 것이라” 단12:1. 성경은 최후의 승리자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계14:12. 그러므로 우리가 소망을 가지고 주님 안에서 성령의 약속을 매일 받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