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계문 목사 칼럼_종교개혁 500주년

 

2017년 10월 31일은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킨지 500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1517년 10월 31일, 카톨릭의 면죄부 판매에 항의하며 ‘95개조 반박문’을 비텐베르크 성의 교회 문에 붙였고, 이 반박문은 민중들을 계몽시키며 종교개혁운동의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계시록 17장의 음녀는 그 이마에 “큰 바벨론이라, 땅의 음녀들의 어미”라 기록돼 있습니다(17:5). 우리는 고대제국인 바벨론에 대해 잘 알고 있는데, “바벨탑”이라 할 때의 그 바벨입니다. 바벨이란 단어의 본래의 뜻은 “하나님의 문”입니다. 그러나 바벨탑은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리고 인간이 고안한 종교예배를 드리는 특별한 장소가 되었습니다. 최초의 바벨탑을 쌓던 어느 날, 일꾼들은 전혀 예기치 못한 언어의 혼잡으로 공사가 중단되었고, 이리하여 “바벨”이라는 단어는 “혼잡”이란 뜻으로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음녀 바벨론은 자신을 하나님의 문, 아니 하나님께로 가는 유일한 문으로 주장하고 있습니다. 라틴어로, “엑스트라 에클레시암 논 살루스 에스트”(Extra ecclesiam non salus est), 즉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구원은 오직 교회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라는 주장이 수세기에 걸쳐 로마 천주교회의 공식 교리로 신봉되어 왔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어거스틴)의 이 사상은 박해를 정당화 하는 교리가 되었습니다.
지난 인류역사에서 수많은 사람의 피를 흘린 끔찍한 참상은 약 600만을 학살한 나치도 아니고, 약 30만명 이상을 학살한 아프리카의 이디아민도 아니고, 교황의 천주교에 의해 자행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최소 5천만에서 1억에 가까운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순교 당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한다는 교회가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었을까요?
첫 번째는, 카톨릭의 교리가 그 일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교회를 통해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이 사상이 종교재판의 근거가 된 것이지요. 13세기 카톨릭의 수도사 토마스 아퀴나스도 이단자들은 처형해야 한다고 지지했습니다. [가톨릭 백과사전]에서도 “배교자들을 신체적으로 억압할 수 있는 권리가 교회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단자들을 고문하고 화형시킬 교회의 “권리”는 사실상 연옥과 지옥이라는 비성경적 교리의 끔찍스러운 결과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고문을 자행하였는데, 참람하게도 하나님이 그 고문자라고 주장한 것과 다름없는 것이지요.

두 번째, 종교 재판이 가능했던 또 다른 이유는 교회가 정치에 깊이 관여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국가와 교회의 불륜 관계 속에서 종교 재판소가 탄생한 것입니다. 서로 뒤를 봐주고 나눠먹기식 야합관계가 살인과 만행을 정당화 한 것이지요.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이 바벨은 하나님의 문이 아니라 혼돈의 장소가 되었습니다. 바벨론은 진리와 거짓을 혼합시켜 사람들에게 대혼란을 야기시켰습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가르치면서도 교회의 결정이 성경과 다를 때는 교회의 결정을 성경보다 큰 권위로 존중합니다. 성경이 모두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가르치면서도 십계명의 둘째 계명을 삭제하고, 넷째 계명을 변경했습니다.
이 종교세력에 대해 계시록 17장은 “큰 바벨론, 음녀들의 어미”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음녀가 있고, 음녀들의 어미가 있습니다. 카톨릭교회는 오래 전부터 스스로를 모든 교회의 어미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음녀의 딸이 처음부터 음녀로 태어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처음에는 “바벨론이요, 음녀요, 적그리스도”였던 교회로부터 나왔습니다. 나와서 개신교회로서 갓난아기의 발걸음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매우 슬픈 얘기지만 이 딸들도 결국 음녀의 전통을 이어받아 어느 날 바벨론이 되고 말았습니다. 예언대로 카톨릭은 음녀들의 어미가 되고 말았습니다.

 

카톨릭교회가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훌륭한 일들을 얼마나 많이 합니까? 가난한 나라에 가서 학교와 병원도 세워주고, 과부와 고아와 노숙자들을 지원하는 많은 단체도 가지고 있고, 난민과 소외된 이들을 얼마나 잘 보살펴줍니까? 또한 어떤 면들에서는 성경의 지식을 여러 이단과 이교로부터 보호하고 보존해오는 일에 있어서도 일익을 담당했습니다. 그런 점에 있어서 카톨릭 교회에도 고마움을 느낍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계명을 반대하고, 그리스도의 심판 사역을 거부하고, 자신들의 교리수호를 위해 신실한 성도들을 학살했습니다.
과거의 일일까요? 지나간 일일까요? 그래서 참회하고 용서를 구했나요? 그랬다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서로 용납하지 못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문제는 과거에 그랬고, 현재도 그러하며, 미래에는 “짐승의 표”로 온 세상의 성도들의 피에 취하게 될 것입니다.

음녀의 딸들은 처음에는 음녀의 지배에서 벗어나고자 뛰쳐나왔습니다. 루터는 하나님의 진리인 3대 강령을 재발견했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고, “오직 성경만이 궁극적인 권위”이며, 믿는 자는 모두 제사장이라는 “만인제사장”이 그 세 강령입니다.
칼빈은 사제나 성자들이 우리의 구원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사실 지금 우리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지만 당시 교회가 하나님의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이 단순한 진리를 깨달을 수가 없었습니다.
웨슬리는 구원이란 아우구스티누스의 주장대로 이미 하나님에 의해 선택된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예정설이 아니라 믿는 모든 사람에게 제한없이 부여되는 것이라는 은혜의 진리를 재발견했습니다.
개신교의 발걸음을 땠던 이들은, 새롭게 회복된 하나님의 진리의 빛 속에서 환하게 빛났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 개혁자들에게 큰 신세를 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비극적인 일이지만, 요한계시록 13장은 음녀와 그 딸들에 의해 성취될 것을 다음과 같이 예언하고 있습니다.
“[16] 저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빈궁한 자나 자유한 자나 종들로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17]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할 것이다(계 13:16,17).
카톨릭과 개신교가 연합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을 잔인하게 핍박하게 될 것인데, 그 일은 먼 미래에 갑자기 이뤄지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역사를 보면 개신교도 카톨릭 만큼이나 편협하기 그지없었습니다. 그들도 세속 정부의 힘을 빌어 같은 개신교인들을 화형시키는 등, 어미가 했던 가공할 정도의 잔혹한 행위들을 반복했습니다.
개신교가 그렇게 잔인한 행위들을 할 수 있었던 이유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개신교의 신학 내에도 하나님께서 이리 태우고, 저리 태우고, 뒤집어 태우면서 영원히 지글지글 고문을 가한다는 이교의 교리를 포함하고 있고, 아울러 여러 세기에 걸쳐 세속 권력과의 불결한 관계를 유지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구교와 신교는 하나가 되었고, 온 세상의 정치적 지도자들까지 교황의 권세에 굴복하고 있습니다. 계시록에 “온 땅이 이상히 여겨 짐승을 따”른다는 예언이 성취되는 시기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종교개혁 5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우리는 종교개혁의 정신을 오늘도 가지고 있습니까?
교회는 끊임없이 개혁되어야 합니다. 종교개혁은 끝나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