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계실 때 감람산 위에서 제자들에게 당신의 재림의 때가 가까웠음을 보여 줄 징조를 말씀하신 후,깨어 있으라경고하시며, 그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보여 주셨다. 그것은 무료하게 기다리는 일로 시간을 보낼 것이 아니라 부지런히 일하면서 시간을 보내라는 것이었는데, 주님께서는 이 교훈을 달란트의 비유로써 가르쳐 주셨다.

 그분께서는 천국은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제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각각 그 재능대로 하나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두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마 25:15)라고 말씀하셨다. 이 비유 가운데서 다른 지방으로 가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대표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종으로 나타난 자들은 저희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봉사하라는 초청을 받아들였다고 말하는 사람들이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은 봉사를 위하여 구속함을 받았다. 그리스도 자신이 일꾼이셨으며 그분을 따른 모든 사람들에게 봉사의 법칙, 곧 하나님과 저들의 동포에게 대한 봉사의 법칙을 주셨다. 이 점에 있어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고상한 생애의 개념을 세상에 보여 주셨다. 사람은 다른 사람을 위해 봉사하는 생애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연결된다. 봉사의 법칙은 우리를 하나님과 연결시키는 고리가 되는 동시에 우리 동포들과 연결시키는 고리가 된다.

성령의 선물들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교회에게 위탁하신 달란트는 특별히 성령이 나누어 주시는 선물과 축복을 나타낸다. 어떤 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 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 고전 12:8-11.

 모든 사람이 다 같은 선물을 받는 것은 아니지만 주님의 종들 각자에게 어떤 종류의 성령의 선물을 주시기로 약속되어 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며 성령을 보내시겠다고 말씀하셨지만, 그러나 제자들이 성령의 역사를 위하여 믿음과 기도로써 저희 자신을 완전히 굴복시켰을 때에야 비로소 성령의 부어 주심을 받았다. 그와 같이 이 하늘의 선물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미 우리의 것이 되었지만, 실제로 우리가 그것을 소유하는 것은 자신을 포기하고 마음을 주님께 굴복하여 열고 하나님의 성령을 받아들이는 데에 달려 있다.

다른 달란트들
 
그러나 특별한 성령의 선물만이 비유에 나오는 달란트라고 할 수 없다. 이 달란트는 선천적이고, 후천적인 것, 또 육적인 것과 영적인 것에 관계없이 모든 선물과 재능을 다 포함한다.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에 사용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때, 우리는 우리의 모든 소유와 우리 자신을 아울러 그분에게 바치는 것이다. 그분은 우리가 바친 것을 순결하게 하시고 고상하게 하셔서 그것으로 동료 인간들을 축복하고 그분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데 쓰도록 우리에게 다시 돌려주신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각각 그 재능대로 나누어 주셨다. 달란트는 아무렇게나 나누어 주시는 것이 아니다. 아무도 저희가 더 큰 선물을 받지 못했다고 해서 슬퍼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각 사람에게 달란트를 나누어 주신 분은 그것이 크거나 작거나 간에 각자가 그 맡은 달란트를 잘 활용할 때 모든 사람들로부터 똑같은 영광을 받으시기 때문이다. 다섯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다섯 달란트를 사용해야 하고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한 달란트를 사용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을 받지 아니하(고후 8:12)신다.

달란트의 사용
 
달란트의 비유에서 우리에게 가장 크게 관계되는 문제는 내가 얼마나 많이 받았느냐가 아니고, 내가 받은 것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우리의 온갖 능력을 개발하는 것이 하나님과 우리의 동포를 위해 해야 할 첫 번째 의무이다. 재능과 유용성이 날마다 자라나지 않는 사람은 인생의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공언할 때 주님의 일꾼으로써 우리가 가능한 한 최고의 표준에 도달하겠다고 다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최대의 선을 이루기 위하여 우리의 각 기능을 최대한 완전하게 개발해야 한다.

 주님께서는 이루어야 할 큰 사업을 가지고 계신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대리자들을 택하시고 그들로 날마다 같지 않은 환경에 처하게 하심으로 당신의 경륜을 이루고자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경륜을 이루고자 하는 일념으로 당신의 대리자들을 택하시되 그들이 완전하기 때문에 택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그분과 연합함으로 완전함을 얻게 하기 위하여 택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대리자들에게 무슨 일에나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의무를 지워주신다.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도덕적으로 완전하기를 요구하신다. 우리는 결코 선천적으로나 후천적으로 악으로 기울려는 우리의 성벽에 맞추기 위하여 의의 표준을 낮추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품성의 불완전함이 죄가 된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품성의 모든 의로운 특성들이 하나님 안에서 전체적으로 완전하고 조화를 이루게 되며,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누구나 다 이 특성을 가질 특권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원하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주시고 도와주시지만, 우리 편에서 할 수 있는 일, 곧 우리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최대의 선을 이루기 위하여, 우리는 우리의 각 기능을 최대한 완전하게 개발해야 한다.  아무것도 이 일을 방해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운명이라는 것이 아무리 사람을 단단히 붙잡아 매어도 그것을 타개할 길이 없는 것은 아니다. 역경은 그것을 극복하고자 하는 굳은 결심을 일으킨다. 하나의 장벽을 깨뜨릴 때 앞으로 전진할 수 있는 더욱 큰 힘과 용기를 얻게 된다. 단호한 결심을 가지고 옳은 방향으로 매진하라. 그리하면 역경이 그대의 방해자가 되는 대신에 오히려 돕는 자가 될 것이다.

 주의 영광을 위하여, 또한 품성의 아름다움을 닦기 위하여 대망을 품으라. 그대가 품성을 닦는 모든 면에 있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라. 에녹이 비록 부패된 시대에 살고 있었으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던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시험도 그를 타락시키지 못했던 저 신실한 정치가 다니엘과 같이 굳게 서라. 그대의 죄를 없이하기 위하여 자기의 목숨을 버리시기까지 그대를 사랑하신 그분을 실망시키지 말라.

 그는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을 기억하라. 비록 지금까지 실수했다 할지라도 그대가 그 실수를 하나의 경고로 삼을 것 같으면 그대는 틀림없이 승리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 그대는 패배를 승리로 바꾸게 되어 그대의 원수로 실망하게 하고 그대의 구주를 높이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꼴 지워진 품성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내세로 가지고 갈수 있는 유일한 재물이다. 그러므로 현세에서 우리의 품성을 개발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성령님과 하늘의 천사들은 단호한 믿음을 가지고 그들의 행실에까지 완전함을 나타낼 그러한 품성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도우며 협력할 것이다. 이 일에 힘쓰고 있는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께서는 내가 네 오른편에 서서 너를 돕고 있다고 말씀하신다. 사람의 의지와 하나님의 뜻이 협력할 때에 그것은 전능한 것이 된다. 하나님께서 하라고 명령하신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의 힘을 의지하여 이룰 수 있다. 그리하여 그분께서 명하는 모든 것은 다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하늘의 도우심을 구하며 자신을 온전히 하늘과 연결시켜 사는 사람들은 아름다운 품성을 이룰 수 있으며, 이것은 또 달란트를 활용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권두언

강병국 목사

 성경은 참으로 놀라운 책입니다. 어쩌면 그렇게 공부하면 공부 할수록 이전보다 더 새로운 이해와 감동이 계속적으로 솟구쳐 나오는 것일까요?

 시대 마다에 맞는 말씀들이나 특히 각 시대마다 적용되는 예언들을 연구하다 보면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에 감탄하게 되지요. 그렇게 짧고도 간단하기만 한 예언들 속에 어쩌면 그렇게 넓고 심오한 역사의 흐름들과 의미들을 담아두시다니 역시 하나님의 지혜가 아니면 그렇게 할 수 없는 부분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에 예언들을 담아 두신 이유가 있습니다. 예언이란 물론 미래를 미리 내다보게 하는 지혜와 안목을 주지마는 그것보다는 그 예언들이 성취된 과거의 역사를 살펴 보거나, 그 예언이 이루어 져 가고 있는 지점을 지나면서 그 정확하고도 놀라운 성경 예언의 신비함 속에 우리의 자신들을 잊어버리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성경에 대한 신뢰가 높아지고 또한 성경을 기록해 주신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향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번 호는 성경의 예언들 속에서도 특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 시대에 성취되어 나가고 있는 놀라운 한가지 예언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예언을 어떻게 이해하고 믿는가에 따라 우리의 운명이 달라 질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예언은 누가 바벨론 세력이며 과연 하나님께서 그를 어떠한 방식으로 심판 하실 것인가를 설명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느 편에 서야 할지에 대한 좌표를 알게 해 주는 예언입니다. 우리는 짐승의 표에 대하여 이해하려고 하기 전에 짐승의 표를 강요할 짐승의 세력이 과연 무엇이며 누구인지를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짐승의 표가 무엇인지를 알게 될 것이고 어떻게 하는 것이 그것을 피하는 길인지를 알게 될 것이 아닙니까?

 이번 호는 독자 여러분들께, 우리들의 이 시대에, 지금 현재 성취되어 가고 있는 한가지 중요한 예언에 대하여 확실한 이해를 드리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정독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1부 - 진리를 찾아가는 경로

 바울의 생애를 들여다 보면 그가 진리를 발견하기까지의 경로가 보인다. 바울의 생애를 들여다 보면 한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까지의 영혼의 고통이 보인다. 바울의 생애를 들여다 보면 어렵게 느껴지던 바울의 글이 쉽게 풀린다. 바울의 생애를 들여다 보면 내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까지의 신앙 여정을 미리 볼 수 있게 된다.

 바울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우리는 빌립보서 3장 4~6절에서 그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만하니 만일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내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고 &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다 그렇다. 바울은 율법으로는 흠이 없던 자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불행하였으며 그의 영혼에 평안이 없었다. 그가 율법에 순종하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죄 아래 팔려 있는 자기 자신을 발견할 뿐이었다. 그는 유대 교회 안에서 자부심을 갖고 살 수 있을 정도의 교인이었지만, 그의 마음 속 깊은 곳에는 처절한 절망감과 패배감이 가득 차 있었다.
 겉보기에는 신실한 유대교인이었고, 성공적인 사회인이었지만, 그러나 동시에 철저하게 불행한 사람이었다.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까지 그의 영혼의 고통은 그칠 날이 없었다. 바울은 왜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까지 고통과 고뇌의 삶을 살아야만 했을까? 바울의 생애를 들여다 보면 그 이유를 알게 된다. 성경의 이곳 저곳에 기록된 바울의 생애에 관한 기록들을 통해서 그의 생애와 신앙경험을 추적해 보면 다음과 같은 모습들을 그려볼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까지의 바울
 
내가 팔일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다 빌 3:4. 바울은 대부분의 유대인들처럼 어렸을 때부터 엄격하고 경건한 부모 밑에서 구약 성경의 율법을 외우며 자랐을 것이다. 나이가 들어 철이 들면서 바울은 자신의 생애가 율법에 비추어 볼 때 너무나 더럽고 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그의 말과 행동 그리고 동기와 목적들을 거룩한 성경에 비추어 볼 때마다 그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이 은근한 교만과 거짓과 위선으로 얼룩져 있다는 사실을 보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그런 것들을 개혁하고 고쳐서 율법의 의를 이루기 위하여 굉장한 노력을 하였을 것이다. 아마도 청년기에 그는 이런 결심을 했을지 모른다.
 나는 이제부터 내 말과 행실을 완전히 뜯어 고치겠다. 다시는 거짓말을 하지 않겠다. 남을 비평하거나 중상하지 않겠다. 정욕을 억제하겠다. 게으름을 피우지 않겠다. 곡마단의 서커스 같은 것은 쳐다보지도 않을 것이며, 어떤 종류의 유희도 즐기지 않겠다. 원수를 사랑하겠다. 스스로 높아지고자 하는 정신을 버리고 겸손하겠다.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겠다. 나는 친구들과 주변 사람들에게 나의 전격적인 개혁을 선언함으로써 굳게 결심한 이 마음을 바꾸지 않겠다

 한 동안 그의 결심과 개혁은 잘 진행되었을 것이다. 그의 헌신은 정말 대단한 것이었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로부터의 칭송이 한동안 그치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개혁이 너무나 전격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그의 그러한 변화를 싫어하는 어떤 친구들은 바울 곁을 떠났을 것이다. 그의 새벽 기도는 정말로 뜨거웠고, 길었을 것이다. 그는 말의 실수를 줄이기 위하여 하루의 대부분을 침묵으로 지내는 때도 여러 날이었을 것이며, 그와의 대화 속에는 항상 성경절들이 인용되었을 것이다. 가끔씩 자신이 마치 에녹처럼 하나님과 동행하는 듯한 느낌을 느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개혁이 유익한 것이긴 했지만, 인위적으로 조작된 성결은 오래가지 못했을 것이다.

 바울은 율법의 의를 이루는 성화된 삶을 진정으로 사모하고 추구했지만, 그의 마음은 거듭나지 못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경험을 이해하지 못한 채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겉모습만을 흉내 내는 생활은 오래 지속될 수 없었다. 그의 언행과 생각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옛 상태로 돌아가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의 부자연스러운 개혁은 주변의 가족들과 친지들을 매우 불편하고 어색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바울의 개혁은 주변 사람들뿐 아니라 자신까지도 부자유스럽고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그의 굳은 결심은 이런 생각으로 흔들리기 시작했을지 모른다. 왜 내 신앙은 다른 사람들에게 불편을 줄까? 나만 올바르고 다른 사람들은 다 틀렸다는 말인가? 조금씩 적당하게 타협하면서 살면 안될까? 원칙에 대한 약간의 타협이 내 구원에 무슨 지장을 가져올까? 나의 지나친 침묵과 죄를 범하지 않으려는 노력은 오히려 내게 우울증을 가져올지도 몰라 라는 생각들이 머리를 들기 시작했을 것이다.

 얼마 후, 바울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서서히 개혁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고 있었을 것이다. 그가 유대 교회의 교인이라는 표시는 매 안식일 마다 냉랭한 마음으로 회당에 가는 것과, 아침 저녁으로 머리를 숙여서 드리는 무의미한 기도와, 율법을 생명력 없는 음성으로 읽는 낭독으로 명맥을 유지하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율법과 원칙을 타협하지 않기 위하여 피나는 노력을 기울였을 것이다. 그가 과거에 가지고 있던 죗된 습관이 살아나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날마다 조심스럽고 긴장된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유대 교회의 지도자들과 제사장들의 신임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하여 겉으로 드러나는 모든 것을 잘 관리하려고 노력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영혼 깊숙한 곳에서는 도대체 나의 신앙은 왜 나의 옛 습관 하나를 확실하게 끊어내지 못한단 말인가? 왜 내 마음에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모세와 다윗에게 주셨던 평화와 위로가 없을까? 도대체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내 자신도 율법을 준행하지 못하는 위선자인데, 어떻게 내가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의 율법을 강론할 수 있는가?라는 울부짖음이 있었을 것이다. 이런 좌절감이 청년 바울의 온 생애를 뒤엎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이 붙잡고 있던 율법의 원칙들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무척이나 애를 썼을 것이다.

 바울의 그러한 노력과 투쟁의 모습을 보는 주변 사람들은 바울의 그러한 내적 고통을 알 수 없었기에 그를 가리켜 율법에 있어서는 흠이 없는 자라고 평가했다. 사람의 눈으로 볼 때, 그는 흠이 없는 자였지만, 하나님의 법 앞에서는 여전히 위선자고, 살인자며, 도둑질 한 자였다. 바울은 그러한 사실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 죄를 범할 때마다 말할 수 없는 고통과 고뇌가 그를 압도하였다. 자신의 영혼을 짓누르는 율법의 정죄를 잊어버리고, 유대 교회와 하나님 앞에 공로를 세우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단자들을 잡는 일에 몰두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기독교회 첫 번째 순교자가 되는 스데반 집사의 순교 현장을 목도하게 되었다.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스데반)에게 달려들어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그리스도를 만나기 이전의 바울의 이름)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행 7:57~60. 무리들이 던진 돌에 맞아 무참하게 죽어가는 스데반의 얼굴에 나타난 거룩한 영혼의 평안을 보면서 바울은 깊은 혼란 가운데 빠졌을 것이다. 나는 유대 교회의 정통이고 스데반은 이단 예수 당원인데, 어찌 죽어가는 그의 얼굴에 나에게는 없는 하늘의 평화가 나타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이 그의 머리를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까지 그의 생애는 선을 행하기 원하지만 결국에는 악을 행하게 되는 괴로움과 고통의 연속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울을 택하신 이유
 
얼마 후, 그 날도 그는 예수 당원을 잡기 위하여 다메섹으로 가고 있었다. 바울은 그 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써, 그의 생애에 있어서 놀라운 전환점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다음과 같은 의문을 갖게 된다. 왜 예수께서는 하필이면 바울에게 나타나셨을까? 유대 땅에 수만명의 제사장과 바리새인들 그리고 율법사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 왜 바울에게만 예수께서 나타나셔서 진리를 보여주셨을까? 예수께서는 오랫동안 바울의 정직한 고통을 눈여겨 보셨을 것이다. 다른 바리새인과 율법사들 역시 죄 중에 살았지만, 아니 바울보다도 훨씬 악하고 대담하게 율법을 범하는 삶을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영혼 속에는 죄로 인한 고통과 고뇌가 없었다. 그들은 양심 속에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과 죄책감을 무시한 채 살았다. 그러나 바울은 비록 그것이 너무나 힘들었지만 늘 율법의 정죄를 정직한 마음으로 인정하며 살았다.

 우리는 그런 바울의 모습을 보면서 깊은 연민의 정을 느끼게 된다. 어렸을때 부터 율법에 둘러싸여 자란 바울. 부모와 선생과 제사장들로부터 늘 성경 말씀에 순종하라는 엄격한 지침을 받았던 바울. 최선을 다하였지만, 언제나 모자람을 느껴야만 했던 바울. 정죄 받는 느낌과 양심의 가책을 무시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던 바울. 우리는 이런 바울을 보면서 정직한 그리스도인의 고뇌를 엿보게 된다. 그의 양심은 항상 심한 자책으로 고통 받았지만, 그의 양심을 위로해줄 위로자를 만나지 못했다. 죄를 범할 때마다 양을 잡아 성소에 갔지만, 그곳에서도 바울의 영혼에 평안을 줄 수 있는 분을 만날 수 없었다. 바울은 죄책감을 해결하지 못한 채 고통 속에서 긴 세월을 보내야만 하였다. 예수께서는 그런 바울의 모습을 놓치지 않으셨고 그를 불쌍히 여기셨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다메섹으로 가는 바울을 찾아가셨고, 그를 당신의 사도로 택하기로 결정하셨다.

 오늘날에도 이런 상황은 정확하게 반복되고 있다. 죄로 인한 영혼의 고통을 어찌할 줄 몰라서 괴로워하는 정직한 그리스도인이 있는가 하면,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죄에 대한 고민과 고뇌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살아가고 있다. 죄 가운데 살고 있지만, 양심의 가책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있다. 이런 사람들이 과연 복음을 이해할 수 있을까? 자신의 죄에 대하여 깊은 절망을 느껴보지 못한 사람들이 어떻게 복음이 주는 평안을 맛볼 수 있을까? 어떻게 그런 사람들이 십자가의 희생이 주는 구원의 기쁨을 충분히 느낄 수 있을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의 바울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바울은 드디어 그의 죄 짐을 받아 주실 수 있는 분을 만나게 되었다. 바울은 드디어 정죄로부터 벗어나는 자유를 얻었다. 그의 영혼을 수십년 동안 붙잡고 있던 죄책감으로부터 해방되었다. 바울은 십자가의 용서와 은혜를 뼈 속 깊이 체험할 수 있었다. 용서받은 감동이 그의 온 몸을 전율케 하였다. 그는 마침내 하나님과 개인적인 교제를 할 수 있게 되었는데, 그러한 경험은 그의 생애에 놀라운 변화를 가져왔다. 인간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과 교제하고, 유한한 자가 무한하신 분과 교제할 때에 몸과 마음과 영혼에 임하는 결과는 측량할 수가 없다. 이와 같은 하나님과의 교제야말로 인간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교육이다. 이러한 산 교육을 통하여 그의 믿음과 신앙은 놀랍게 발전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와 만난 이후, 바울은 더 이상 율법의 한 조목 한 조목을 지키려고 애쓸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의 마음 전체가 율법과 완전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랑스런 말을 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의 마음에 있는 충만한 사랑과 은혜는 아름다운 언어가 되어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미워하지 않으려고 애쓸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의 마음 속에는 원수와 미움이 없었기 때문이다. 교만하지 않으려고 애쓸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의 마음 어디에도 교만이 없었기 때문이다. 거짓말하지 않으려고 조심할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의 순결한 영혼 어디에도 거짓이 발붙일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만나기 이전에는 그토록 노력해도 안되던 것들이 예수를 만남으로써 모든 것이 한꺼번에 가능하게 되었다. 날마다 그의 생애는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헌신과 사람들에 대한 사랑과 동정으로 점철되었다. 더 이상 율법 아래서 고통 받을 필요가 없었다. 더 이상 정죄함을 받을 필요가 없었다. 더 이상 죄책감으로 인한 영혼의 고통도 없었다. 육이 아니라 영을 좇아 사는 바울의 생애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율법의 요구를 완전하게 만족시키는 것이 되었다. 그의 생애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 그가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은 율법을 무시하거나 폐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율법을 더욱 더 굳게 세우는 강력한 원동력이 되었다.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롬 3:31.

2부 - 바울을 알면 로마서가 보인다!

 바울을 모르면 로마서를 오해하게 된다

 생애의 빛 선교기관에서 편집일을 하면서 가끔씩 받게 되는 질문 가운데는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율법의 행함이 아니라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는 말을 여러 번 강조하였는데, 왜 생애의 빛에서는 계명과 순종을 강조하는 구원론을 강조하는가라는 항의였다.

 그런 항의 어린 질문들을 받으면서 내 마음 속에는 한가지 의문점이 떠올랐는데, 그것은 왜 바울은 로마서를 그렇게 기록함으로써, 믿음과 행함에 대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이상한 혼돈을 갖도록 했을까? 그가 좀 더 이 문제를 분명하게 설명하였다면 오늘날 기독교에 존재하는 구원에 대한 이상한 오해들은 없었을텐데& 라는 의구심이었다. 사람들은 로마서에 기록되어 있는 다음과 같은 성경절들을 읽으면서 믿음과 행함에 대한 이상한 견해를 갖게 된다.

 로마서 3:28,30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는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이시니라

로마서 4:2,5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서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바 되었느니라 & 일을 하지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로마서를 읽다 보면 사람들에게 혼돈을 주기 쉬운 이와 비슷한 말씀들이 나온다. 뿐만 아니라 인간은 본성적으로 죄를 승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말씀들도 여러 군데서 강조되고 있다. 그 중 대표적인 말씀은 로마서 7장의 말씀이다.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롬 7:14,15.

 얼핏 이런 성경 절들만을 뽑아서 읽으면 믿음과 행함에 대한 오해를 갖기 쉽다. 그런데 바울은 왜 이런 말씀들을 로마서에 기록하였을까? 우리가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은,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이전의 율법의 종으로 살아가던 경험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에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키는 영적 경험을 모두 기록했다는 사실이다. 로마서는 율법에 매여 살던 참혹한 상태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영혼의 평안과 자유를 찾게 된 과정과 환희를 기록한 체험의 글이다. 로마서는 죄의 종으로서, 율법에 매인 종으로서 하루하루를 힘겹고 참담하게 살면서 양심의 고통을 누구보다도 깊이 느끼며 살던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깨달은 후에 얻게 된 환희와 기쁨을 체험적으로 설명한 편지서이다. 그래서 로마서에는 율법으로부터의 해방과 정죄로부터의 자유가 그토록 강조되어 있는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실패와 성공을 직접 체험한 그리스도인이었다. 행함을 통해서 구원에 도달하려다가 철저하게 실패한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한 믿음을 통하여 드디어 거룩한 순종의 삶을 살게 되었다는 간증이 로마서의 배경에 흐르고 있는 주제이다. 그러므로 그는 행함을 통한 구원을 철저하게 부정하는 말씀을 로마서에 기록하였고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의 승리를 강조하였던 것이다.

 율법을 지키기 위하여 그것에 매달렸을 때에는 오히려 실패와 좌절만이 있었는데, 그가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분 안에서 발견한 복음을 통해서 드디어 율법이 요구하는 의를 이루는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바울의 삶을 이해하고 나면, 바울이 기록한 로마서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로마서를 통하여 바울은 율법을 무용지물로 만들거나 폐지시키려고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키는 유일한 방법을 찾아낸 그의 체험을 설명하려고 애썼다. 거듭남의 경험 없이 인간의 힘으로 율법을 지키려고 애쓰는 행위로서는 결코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없지만, 그리스도를 개인적으로 만나고 그분 안에서 거듭난 경험을 한 그리스도인은 그 마음의 중심이 변화되었기 때문에 힘들게 애쓰거나 인위적인 노력 없이도, 자연스럽게 자신의 생애와 품성 가운데 열매가 맺히게 된다는 것이 로마서가 말하는 핵심 내용이다.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롬 6:14, 22.

 로마서를 읽기 전에 우리는 먼저 바울이 짊어졌던 영혼의 고통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로마서 7장에서 그는 거듭나지 못한 자신의 과거 모습 즉, 육체와 죗된 본성으로 인하여 죄의 종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처참한 모습을 묘사하였다. 그러나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의 경험인 로마서 8장을 기록하면서 그러므로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라고 극적인 선언을 하였다. 바울은 율법의 종으로 살아 온 영혼의 고통이 지긋지긋하였을 것이다. 그는 영혼 깊은 곳으로부터 양심의 자유와 평안을 갈구하였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맛보게 된 자유와 쉼이 너무나 소중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오랜 세월 동안 정죄를 받아 온 바울이 로마서 8장의 첫머리에서 밑바닥부터 끓어오르는 심정으로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라고 외치는 간증을 이해하는 사람은 결코 바울의 글을 오해할 수 없다. 우리도 바울과 같은 그러한 간증을 할 수 있을까?

 로마서 8장은 그가 만난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생애에 가져다 준 복음의 능력에 대한 찬양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가짜 복음도 로마서 8장에 비추어 보면 그 허상이 분명하게 드러나게 된다. 계명과 행함에 대한 어떤 교리도 로마서 8장으로 검증해 보면 그 진위가 쉽게 드러난다. 왜냐하면 로마서 8장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좇아 행하는 자들은 율법의 요구를 이루며,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반드시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라고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기 때문이다(롬 8:12~14). 로마서 1장부터 7장은 8장을 말하기 위한 서곡이다. 로마서 8장에서 자유와 평안과 승리를 강조하기 위해서, 먼저 바울은 행함으로 구원을 얻고자 하는 허망함을 설명했고, 인간의 타락한 본성과 의지의 무력함을 묘사했던 것인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을 마치 바울이 율법을 폐하고 죄를 승리할 수 없다고 믿었던 것으로 오해하고 있다.

계명을 폐지시키기 원하는 이유
 
사실, 바울 당시에 유대 땅의 수많은 바리새인들 앞에 예수께서 나타나셨다. 그들 앞에서 설교를 하셨고, 기적을 행하셨다. 그러나 바리새인들 중에 바울만이 예수 안에서 진리를 발견하였다. 왜 다른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은 예수 안에서 아무것도 찾지 못했는데, 바울은 진리와 평안을 찾았을까?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양심과 영혼의 고통이 없었지만, 바울에게는 너무나 힘든 고뇌와 고민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울이 오랜 세월 동안 겪어온 양심의 가책으로 인한 고통스런 생애가 바울로 하여금 진리와 평안에 대하여 간절한 목마름을 갖도록 하였다.

 죄를 범했을 때에 우리의 양심은 마땅히 그에 상응하는 고통과 가책을 받아야만 한다. 그러나 꾀가 많은 우리 인간들은 죄를 짓지만 양심은 가책을 받지 않고 문제를 해결하는 평화스런(?) 삶을 원한다. 이러한 사람들의 요구 때문에 오늘날 온 기독교회는 신신학과 자유주의 복음으로 뒤덮이게 되었다. 양심의 소리와 가책을 잠재우기 원하는 목사들과 신학자들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교리를 세워 놓았다. 이 두 가지 교리 중 어느 하나를 받아들이면, 알고 있는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게 되고, 또한 알고 있는 죄에 대하여 양심의 가책을 갖지 않게 되는 두려운 일이 생긴다.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교리를 믿고 따라가는 사람들의 양심은 서서히 마비되어 가고, 죄책감은 점점 사라지게 된다.

1. 십자가에서 십계명이 폐지되었다
 
십자가에서 율법이 폐하여졌다는 가르침을 받아들인 사람은 더 이상 계명을 지킬 필요가 없게 된다. 빨간 불이 켜졌을 때 지나가는 차는 불법이다 라는 교통법규가 폐지되면, 빨간 불이 켜졌을 때에도 운전자들은 아무런 양심의 가책이나 조심 없이 주행을 계속하게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계명이 폐지되면 사람들은 아무런 양심의 가책 없이 하나님의 법을 폐하는 부도덕한 삶을 살게 되며, 그러한 삶 속에서도 여전히 구원은 보장되는 것으로 착각하게 된다. 이러한 교리를 받아들인 사람에게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는 삶을 살도록 호소하는 음성을 들려주시기 어렵게 된다. 양심은 죄에 대하여 점점 더 무감각하게 된다.

2. 비록 십계명은 폐지되지 않았을지라도, 타락한 본성을 지닌 인간은 십계명을 온전하게 지킬 수 없다
 
사도 요한은 죄의 정의를 계명을 범하는 것이라고 규정하였다.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요일 3:4. 그런데, 인간은 타락한 본성을 타고 태어났기 때문에 도무지 죄를 이길 수 없다고 주장하는 교리를 믿는 사람들은 비록 계명을 폐하지는 않을지라도, 계명의 존재를 유명무실하게 만들고 만다. 이런 교리는 죄를 도무지 승리할 수 없는 골리앗과 같은 것으로 설명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계명을 범하는 죄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인간은 타락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에 각종 교통법규들을 준수할 수 없다고 믿는 운전자는 교통법규들을 범하는 운전을 하면서도 자신이 저지르는 불법에 대하여 언제나 타당한 이유를 갖게 된다. 원하는 마음은 있지만 육신이 약해서 하나님의 법을 지킬 수 없다는 핑계가 항상 준비되어 있기 때문에 심각한 양심의 가책 없이 불법한 삶을 살게 된다. 자유주의적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계명을 범하는 죗된 삶을 살면서도 자신의 죄에 대한 신학적 핑계를 갖게 되기 때문에 양심의 가책이나 성령의 세미한 음성을 듣지 못하게 되며, 또한 죄를 범하면서도 여전히 구원에 대한 헛된 안전감을 가지고 살아가게 된다.

 물론 타락한 인간의 본성으로는 계명을 지킬 수 없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오직 거듭난 그리스도인만이 계명을 지키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바울 역시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는 계명을 지키는 거룩한 삶을 살지 못했다. 거듭나지 않은 그리스도인은 계명을 매우 지키기 어렵고 무거운 것으로 생각하게 되는데, 왜냐하면 그의 육이 항상 영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의 사도 요한은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우리 모두에게 이 문제를 분명하게 조명해 준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요일 5:3,4.

 죄를 회개하고 버리는 대신에 양심의 가책과 성령의 음성을 잠재우려고 할 때, 그리스도인은 위에 언급한 두 가지 교리 중 어느 하나를 받아들이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바울의 경험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바울이 율법을 지키기 위하여 처절하게 싸워보지 않았다면, 과연 그가 인간의 행함과 노력으로 의를 이룰 수 없다는 성경의 가르침을 얼마나 깊게 이해할 수 있었을까? 그가 율법의 정죄를 받고 깊은 고통과 고뇌 속에서 진지하게 살아보지 않았다면, 과연 십자가의 복음을 통해서 율법의 정죄로부터의 해방과 자유를 얼마나 깊이 이해할 수 있었을까? 그가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라는 자유주의적 복음을 믿고 살았다면, 과연 그가 로마서에 기록된 것처럼 그리스도인의 실패와 승리의 경험을 그토록 완전하게 묘사할 수 있었을까? 바울처럼 고뇌하지 않았던 사람은 바울의 글을 오해하게 된다. 신신학과 자유주의 신학에 빠져 있는 사람은 결코 죄의 깊이와 사람을 변화시키는 복음의 능력을 바울이 말하는 깊이대로 이해할 수 없다. 그들은 오히려 바울의 글을 핑계삼아 죄를 더욱 더 담대하게 범하도록 유도하는 교리를 받아들이게 된다.

호소
 
진실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작게나 크게 바울의 경험과 같은 경로를 거치게 된다. 행함을 통하여 율법의 의에 도전했다가 실패하고 좌절하는 패배감. 자신의 의지와 노력으로 원칙과 규칙을 지키려고 애쓰다가 얻게 되는 좌절감. 이런 실패 때문에 많은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계명과 원칙을 포기하는 쪽으로 신앙의 방향을 바꾸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정죄를 피하는 길을 발견하지 못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타협과 포기의 길에 들어서고 있다. 진리 안에 존재하는 자유와 참된 평안과 행복의 길을 찾지 못한 사람들은 결국에는 다른 복음을 찾아 먼 길을 떠나게 되는데, 바로 이것이 우리가 복음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찾아야만 하는 이유이다.

 나는 계명에 대한 순종을 강조하는 보수적인 복음을 받아들인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예수 그리스도 밖에서 찾는 모습을 보아 왔다. 또한 신신학과 자유주의 복음을 받아들인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와 사랑을 말하면서 불법과 부도덕 속에서 원칙과 양심을 타협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아 왔다. 이 두 부류의 사람들 모두에게 문제가 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 돌아와야 하고, 또한 계명을 지키는 삶으로 돌아와야 한다. 그래서 성경은 마지막 시대 성도들의 특징을 다음과 같은 말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계 12:14. 독자 여러분의 신앙에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이 하나로 묶여져 있는가?

 성경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 구원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또한 너희가 믿는 대로 될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정말로 하나님을 알면 우리의 생애는 달라지게 될 것이다. 하나님을 무섭고 엄격하며 냉정한 분으로 아는 사람은 그런 믿음을 갖게 될 것이고, 하나님을 값싼 사랑의 소유자로 믿는 사람들은 그런 믿음을 갖게 될 것이다. 우리는 어떤 하나님을 믿고 있으며,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떤 분이신가? 우리가 믿는 대로 우리의 성품과 생애가 꼴 지워질 것이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알면, 죄를 범할 때마다 깊은 가책을 느끼게 될 것이다. 철이든 자식이 늙은 부모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가슴 아파하는 것처럼 말이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가족과 이웃과 교우에게 저지른 모든 악들을 기억할 때마다 마음에 깊은 고통을 느끼면서 그들에게 다가갈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모든 높아지고자 하는 정신과 교만을 버리게 될 것이다. 그는 돌아온 탕자처럼 감사와 찬송으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우리의 육신적 성향이 하나님의 성령으로 교정되지 않으면 그 속에 도덕적 죽음의 씨앗을 간직하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과 생명적인 관계를 맺지 못하면 우리는 방종과 자아 본위의 마음과 죄의 유혹과 같은 세력들을 저항할 수 없다. 계명을 지키기 위한 최선의 노력을 하되, 하나님과의 생명적 관계 속에서 그것이 이루어져야만 열매가 맺히게 된다. 그렇다면, 생명적인 관계란 어떤 것인가?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했던 것이 바로 생명적인 관계였다. 바울은 이 생명적인 관계에 대하여 로마서 8장에 이렇게 기록하였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느니라 롬 8:14,15. 그것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이다. 아들이 아버지를 무서워하고, 불신하면 사랑이라는 생명적 관계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아버지에 대한 불신이나 의심이 있으면 아들은 아버지를 완전하게 신뢰할 수 없다. 이런 아들은 아버지를 가까이 하지 않은 채 아버지한테 혼나지 않기 위하여 아버지의 말을 듣는 척하며 살아가게 될 것인데 이런 관계는 생명적 관계가 아니다.

 또 하나의 중요한 질문은 어떻게 하면 생명적 관계를 가질 수 있는가? 이다. 성경은 오직 한 길을 제시하는데, 그것은 그리스도를 바라 보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분을 바라보면 생명적 관계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바울의 경우 이 경험은 그의 생애에 놀라운 부흥과 개혁을 가져다 주었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을 때, 그는 자신이 집 나간 탕자이고, 부모의 사랑을 저버린 불효 자식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거기서 아버지와 아들의 생명의 관계는 맺어질 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모른 채 구원을 위하여 맹목적으로 하나님을 믿으려고 노력하면서 보다 많은 공로와 선을 쌓으려고 애쓰고 있다. 그러나 신앙의 성패는 하나님의 심정을 아는 데에 달려 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도 전도를 잘하고, 설교를 잘 할 수 있지만, 내 가족과 이웃과 교우들, 그리고 하나님의 심금을 울릴 수는 없다. 바울이 걸었던 길을 걸으면, 바울이 만났던 예수님을 만나게 된다.

1부 - 바벨론이란 무엇인가?

 성경 요한 계시록에는 이 지구의 마지막 시대가 가까움을 알려주는 큰 징조의 하나인 바벨론행보에 대한 예언이 나와 있다. 바벨론의 정체는 무엇인가? 그리고 지구의 마지막 역사에서 바벨론이 취할 행보는 어떤 것인가? 그리고 그리스도인들과 바벨론과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또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어느 시대인가? 과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지구 역사를 마치시는 하나님의 사업에서 어떤 역할을 담당해야 하는가? 그리고 마지막까지 살아남는 남은 백성이 되는 길은 무엇인가? 이번 호 신앙기사를 함께 연구하여 유익을 얻게 되기를 바란다. - 편집실 -

 성경에는 이 세상 역사 마지막 시점에 나타날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과 그 백성들이 행할 사업에 대하여 예언되어 있다. 그 예언은 요한 계시록 18장 1절~5절에 있는데, 그 예언을 보면, 마지막에 하나님의 남은 백성들이 할 사명은 바벨론의 정체와 그 음모를 밝혀 내고,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나오라고 불러 모으는 일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 과연 바벨론이란 무엇이며, 그 음모는 무엇인가? 함께 연구하여 보자.

* 요한계시록 18:1-5
1) 1절;
  이 일 후에 다른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권세를 가졌는데 그의 영광으로 땅이 환하여지더라

1. 다른 천사는 누구인가?
 
이 성경 구절에는다른 천사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다른 천사라는 표현을 보면 그 전 장들(chapters)에서 기별을 전하고 경고하는 천사들이 계속 나왔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희랍어로 천사(angel)는 angelon으로서 기별자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천사는 진짜 하늘의 천사들이 날아다니는 것이 아니고, 세상에 있는 사람들한테 복음을 전하고, 진리를 전하고, 경고하며 외치는, 기별을 가진 사람들의 상징이다. 요한 계시록은 상징의 책이다. 그러므로 이 천사들은 기별자들, 곧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고 진리와 성경말씀을 세상에 펼쳐 보이는, 성령께서 쓰시는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을 상징한다.

2. 큰 권세를 가졌는데
 
그리고 이 천사는 큰 권세를 가졌다고 언급되어 있다. 이 말의 뜻, 큰 권세를 가졌다는 뜻은, 이 천사가 아주 놀라운 일을 성취한다는 의미인데, 천사가 내려와서 하는 일의 엄청난 힘(power)을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그들(천사)이 하는 일은 아주 흥미있는 일이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남은 백성들을 바벨론에서 나오라고 불러 모으는 일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그분의 말씀(진리)과 진리를 따라 살고자 원하는 사람은 그 권세에 다 굴복하고 순종해서 따르게 된다는 뜻으로 큰 권세를 가졌다고 표현되었다.

2) 2절; 힘센 음성으로 외쳐 가로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1.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무너졌다는 말은 바벨론에 대한 하늘의 심판이 임하여 멸망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여기서 큰 성 바벨론이란 말은 영적인 것으로 상징된 이야기이다. 이것은 영적인 바벨론이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실제적인 국가 큰 성 바벨론은 이미 옛날에 무너졌기 때문이다. 바벨론은 구약에 등장하는 고대의 국가의 이름이다. 특별히 다니엘서에는 이스라엘 청년이었던 다니엘이 바벨론 나라에 포로로 잡혀가 활약하는 이야기와 바벨론 나라에 대하여 자세히 언급되어 있다.

2. 영적인 바벨론
A. 성경에는 바벨이란 말이 처음 쓰여진 곳:
  성경 창세기 10장과 11장에는 처음으로 바벨과 바벨탑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바벨탑을 쌓은 사람은 니므롯이란 장수였다. 노아 홍수 후 사람들은 다시는 홍수로 이 세상을 멸하시지 않으리라는 무지개를 통한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과 주권에 도전하는 뜻으로 니므롯의 명령을 따라 바벨탑을 쌓았다. 인간은 하나님께만 속해 있는 지도권을 취하였다. 그러므로 바벨론이란 단어는 하나님의 주권에 반역한다는 뜻을 가진 말과 근원적으로 동의어이다.

B. 또한 히브리 어에서바벨이란 단어는혼잡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기 600년 전에 존재하던 바벨론이라는 도시는 배교와 혼잡 같은 많은 특성들을 가지고 있었다. 이 세계적인 힘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억압하였고, 여러국가를 통일하고 다스리던 바벨론에는 여러가지 종교가 혼합된 형태의 거짓 종교들이 성행했다. 그 옛날부터 바벨론은 모든 거짓종교의 어미가 되었으며, 그들의 종교는 그들이 행하는 어떤행위에 따라 구원을 얻는 것이라고 만들어 놓았고(그리하여 이방신의 분노를 달래려고 제사를 드림), 거룩하지 못한 것과 혼잡과 권력의 집중이 다스리는 세력이 되었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바벨론은 혼돈과 혼잡으로 연상할 수 있다.

C. 또한 여기서 나오는 바벨론이 영적인 의미로 쓰여진 것이 확실한 증거는: 예수님께서 오시기 바로 직전에 일어날 사건을 묘사한 계시록 18장에큰 성 바벨론이 무너졌다라고 쓰인 것을 보면, (계시록 19장에는 재림의 광경이 나옴) 그것은 옛날 고대 바벨론 국가가 아니고 영적인 바벨론이라는 것이 확실하다.

D. 그러면 이 바벨론은 누구, 무엇을 가리키는 말인가?: 옛날에 바벨론이 유다와 이스라엘을 침공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간 것을 성경을 통해 우리는 알고 있다. 그 때,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왕이 예루살렘을 침공해 들어갔을 때, 그는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성소에 있는 거룩한 기명들, 곧 은 금 기명들과 촛대 등을 다 가지고 바벨론으로 돌아와, 그 거룩한 기명들을 그들의 태양의 신전인 마르둑 신전에 가져다가 놓았다. 그리고 유대인 가운데서 귀중한 사람들과 다니엘과 그 세 친구 같은 사람들을 바벨론의 포로로 잡아 갔다. 그러므로 이 마지막 시대 때에 이 바벨론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하면, 하나님의 교회라고 불리어는지는데, 영적으로 타락한 교회, 곧 하나님의 교회(백성)가 바벨론에 잡혀가 이방 신을 섬기는 잘못된 오류에 매여있는 상태를 말한다. 다시 말해서 교회가 진리가 아닌, 오류를 가지고 있는 가짜 신의 신전, 국가에 교회가 잡혀 가있다는 뜻이며, 그런 곳에 끌려가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 그래서 하나님의 성전에 쓰는 기구들이 다 거기에 가 있고, 하나님의 백성들도 또한 거기에 있다. 즉, 오류와 진리가 뒤섞여서 있는 타락한 마지막 시대 교회의 참상을 가리켜서 바벨론이라고 하는 것이다.

3).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앞서 바벨론이 무너졌다고 외친 이유는 바벨론이 귀신과 악령의 처소가 되었기 때문이다. 영적으로 이 뜻은 무엇인가? 요즈음 교회의 현실을 보면, 교인들이 성령의 역사라고 믿는 기적과 이적과 치유와 방언의 은사 등이 넘쳐 난다. 하지만, 진정한 성령의 역사 - 죄를 깨닫게 하고, 회개하게 하고, 거듭나게 하고, 사람을 하나님의 성품과 마음으로 변화시키고,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곧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맞기 위하여 준비하도록 하는) - 는 교회 안에서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그대신 생애의 아무런 변화 없이 그냥 구원받았다고 말하며, 방언이나 기적의 은사를 받았다고 하나 성품이나 생애는 마귀를 닮은 교인들이 교회에 많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의 이름을 부르지만, 만일 잘못된 진리와 복음, 그리고 잘못된 믿음으로 믿으면 그속에 마귀가 틈타기 때문에 사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찬송을 부르고 기도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영의 역사가 교회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성경에서는 이를 귀신의 처소가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각종 더러운 영이 모이는 것은 깨끗하고 순결하게 하는 영이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성경은 성령은 우리를 성결케 한다고 말한다. 곧, 영어로는 The spirit of holiness and purity, 순결함과 거룩게 하시는 영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교회안에 예수를 믿고다고 공언하는 사람들이 매일 싸우고, 속이고, 질투하고, 미워하고, 과시하고, 권력다툼이나 한다면 그런 곳이 어떻게 하나님의 교회이겠는가?

 성령은 우리를 거룩하고 순결하고 깨끗하게 만든다. 또한 성품을 변화시키고, 세상과 분리되게 만든다. 이것이 성령이며, 이런 것이 성령의 거룩한 역사이다. 이런 거룩한 역사가 없는 교회에는 무슨 영이 있을까? 성경은 그것을 가리켜 더러운 영이 모였다고 표현하였으며, 그런것이 바로 오늘날의 타락한 교회이다(타락한 교회에 대하여는 제 2부에 더 자세히 언급할 것임). 또한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라는 표현은 무엇일까? 가증한 새가 무엇인가? 성경에 보면 가증한 새가 있는데, 그것은 매, 독수리와 까마귀 같은 것들로서, 죽은 시체를 뜯어 먹는 새들이다.

 만일 교인들이 교회에 와서 싸움을 하고 파가 갈라지고 개인의 이득을 위해 남을 모함하고 난리를 피우면, 그것이 바로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된다. 진리 때문에 싸우는 것은 당연하다. 진리는 오류와 싸워야한다. 옛날에 예수님도 진리를 위해 싸우셨다. 그러나 그것 말고 사람들끼리 험담하고, 욕하고, 자랑하고, 인간적인 소욕 때문에 싸우는 것은 가증한 새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마지막 시대의 영적으로 타락한 교회를 상징하고 있는 이야기이다.

4). 그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를 인하여 만국이 무너졌으며 또 땅의 왕들이 그로 더불어 음행하였으며 땅의 상고들도 그 사치의 세력을 인하여 치부하였도다 하더라;
 
이것은 잘 못된 타락한 교회가 주는 음행의 포도주 때문에 세상이 취하고, 만국이 취한 것을 말한다. (제 3부에서 취하게 하는 포도주에서 음행의 포도주에 대하여 자세히 다룰 것임)

2부 - 계시록이 말하는 바벨론의 정체와 음녀는 무엇인가?

 바벨론에 대한 자세한 언급은 계시록 17장에 나온다. 여기서 바벨론은 이마에큰 바벨론이라는 이름이 기록된음녀로 표상되어 나오는데, 과연 음녀로 표상된 바벨론의 정체는 무엇인지 함께 연구해 보기로 한다.

1). 바벨론과 음녀는 누구인가?
1. 음녀의 모습
계시록 17:1~4
 또 일곱 대접을 가진 일곱 천사 중 하나가 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많은 물 위에 앉은 큰 음녀의 받을 심판을 네게 보이리라. 땅의 임금들도 그로 더불어 음행하였고 땅에 거하는 자들도 그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였다 하고 곧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광야로 가니라. 내가 보니 여자가 붉은 빛 짐승을 탔는데 그 짐승의 몸에 참람된 이름들이 가득하고 일곱 머리와 열 뿔이 있으며 그 여자는 자주 빛과 붉은 빛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 손에 금잔을 가졌는데 가증한 물건과 그의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하더라

 먼저, 1절에서 일곱 대접은 일곱 재앙을 말하는 것이다. 앞으로 이 세상에는 재앙이 내릴 것이다. 누구 한데 일곱 재앙이 올 것인가? 그것은 바로 바벨론에 속한 사람들에게 일곱 재앙들이 올 것이다. 그러므로 천사가 바벨론에서 나와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고 외치는 것이다. 계시록 17장 1절 하단에 큰 음녀가 나온다. 그리고 이 음녀가 하는 일에 대하여도 나온다. 과연 이것이 영적으로 무슨 뜻인가?

 성경의 표현을 보면, 이 음녀의 모습은 참 화려하다. 이 음녀는 자주 빛과 붉은 빛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 손에 금잔을 가졌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 금잔 속에는 가증한 물건과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 들어 있다. 그리고 음녀는 이것으로 사람들을 마시게 해서 취하게 만든다. 음행의 포도주다. 예수께서 가나의 혼인 잔치에 가셨을 때 처음으로 기적을 행하셨다. 그분은 물동이에 가득 들은 물을 포도즙으로 만드셨다. 여기서 물이 포도즙이 된 것을 알 수 있는데, 포도즙이 상하면 포도주가 된다. 포도즙은 우리가 마시면 시원하고 생명력을 주지만, 포도주는 우리를 취하게 하고, 앞을 분별하지 못하고, 넘어지게 한다. 교회에서 생명의 포도즙이신 예수님을 주어야 할 텐데, 상한 포도즙을 주어 사람을 비틀거리게 하고, 취하게 만드는 포도주(거짓 오류가 섞인)를 주고 있다. 잘못된 가르침을 주는 타락한 교회를 일컬어서 성경은 바벨론 이라 한다.

2. 음녀는 누구인가?
 음녀의 정체를 더 알아보기 위하여 5절과 6절을 읽어보자.
5절 그 이마에 이름이 기록되었으니 비밀이라, 큰 바벨론이라,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 하였더라
6절 또 내가 보매 이 여자가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한지라 내가 그 여자를 보고 기이히 여기고 크게 기이히 여기니

 위의 성경절을 보면, 음녀의 이마에는 이름이 쓰여져 있는데, 이 음녀의 이름은 바로큰 바벨론, 땅의 음녀들의 어미라고 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으로 보아 이 음녀와 바벨론은 같은 것임이 분명하다. 음녀란 여자를 가리키는데, 음녀란 음부, 곧 품행이 방정하지 않은, 정조가 없이 타락한 여자를 가리킬 때 사용하는 말이다. 계시록에는 교회를 여자로 표현한고 있다. 순결한 처녀는 하나님의 정결한 교회를 말하는 것이고 타락한 교회는 음녀를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음녀는 누구란 말인가?

 위의 성경구절들을 자세히 읽어보면, 그 음녀를 설명하는 많은 특징들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쉽게 그녀를 알아낼 수 있다. 이 음녀는 큰 바벨론, 즉 모든 혼잡 - 많은 거짓 오류 - 의 집합체인 타락한 교회일 뿐 아니라, 음녀의 어미이므로, 타락한 교회들의 우두머리인 것을 알 수 있으며, 또 그녀에게 딸들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위의 성경절(5절)을 통해 우리는 바벨론의 시초가 된 어미가 있고 바벨론을 따라가는 딸들이 있는 것을 알아낼 수 있다. 주체세력이 있고 따라가는 세력이 있는 것이다.

 또 6절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여기 한 여자, 음녀가 있는데,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해있다는 뜻은 무엇인가? 그 의미 그대로 성도들의 피를 흘리고 예수의 증인들의 피를 흘리고 핍박한, 타락한 교회라는 것이다. 이 사실로 보아 음녀의 정체를 알아내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다. 기독교 역사를 살펴보면, 주의 말씀을 똑바로 믿고, 성경진리대로 믿는 사람들을 많이 잡아다가 죽이고, 순교자를 수천만 명을 낸 교회가 있었다. 이 여자 때문에 교회가 타락하게 되었고, 이를 따르는 교회들은 타락한 교회, 곧 바벨론 교회가 되었다.

 예수님의 증인들과 성도들의 피를 흘리고, 그 피에 취한 교회세력은 6000년 인류역사상 가운데 하나밖에 없는데, 그 세력은 바로 로마 가톨릭 교회와 법왕권, 곧 교황권이다. 이렇게 밖에는 이 성경구절을 도무지 해석할 길이 없다. 만일 당신이 이 말을 처음 듣는다면 좀 이상하겠지만, 성경이 말하는 음녀의 특징들은 항상 천주교회에 들어맞는다. 물론 천주교에는 많은 신실하고 좋은 교인들이 있고 그들 모두를 음녀로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음녀나 바벨론이란 지칭은 그 조직과 그 조직이 세운 여러가지의 교리를 말하는 것이지 그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경고를 받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 경고의 배경은 인간의 소리가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이 명령하는 바이며, 이 조직에서 가르치는 가르침은 성경의 명료한 가르침들과 맞지않음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경이 말하는 음녀의 징조와 신분이 이 권력과 꼭 들어맞는 것 또한 그 이유가 된다.

 음녀가 교황권이라는 것에 대한 더 자세한 증명을 해보자면, 5절 하단을 보면 된다. ...큰 바벨론이라,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 하였더라(계 17:5). 천주교는 자신 스스로를 어머니 교회라고 부른다. 추기경(지금은 교황이 된) 렛싱거는 전 세계 감독들에게 보내는 교서에 쓰기를; 한가지 분명하게 해야할 사실은 단 하나의 거룩한 교회인 천주교는 다른 사도 교회들과 자매가 아니다. 천주교는 모든 교회의 어머니이다. (데일리 텔레그래프, 9. 4. 2000). 이런 천주교회의 선포는 성경 계시록 17:5에 나오는 예언을 확인시키도록 공헌한다.

2). 취하게 하는 포도주란 무엇인가?
 계시록 17:2 땅의 임금들도 그로 더불어 음행하였고 땅에 거하는 자들도 그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였다 하고

A 성경은음녀와 큰 성 바벨론이 자신의 성경적이지 않은 교리로 온 세상을 취하게 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이교의 교리와 혼합되고, 거짓 오류가 뒤섞인,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인 성경과 맞지 않는 잘못된 교리를 성경은취하게 하는 포도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기원 후 300년경에 로마는 정치적인 통합 수단으로 기독교를 국교로 만들어 이교도와 그리스도인들의 화합을 꾀하고 정치 세력을 확장하였다. 그 이유로 인해 많은 이교의 교리들이 그리스도교에 도입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인간을 구원하는 단순하고 아름다운 복음의 진리가 인간의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 힘든 교리로 대체되었고, 자비로우신 사랑의 하나님의 모습이, 마치 제물이나 제사를 통하여나 달랠 수 있는 두렵고 무서운 이교의 신의 이미지로 대체되었다. 인간 중보자인 마리아를 통하지 않고서는 가까이 나아갈 수 없는 두렵기만 한 신으로... 천주교는 성경에 없는 많은 교리들을 그리스도 교회 안에 소개했는데, 그 교리들은 아직도 개신교 안에, 그리고 기독교인들 속에 고스란히 남아 그리스도인들의 구원 문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B 땅의 임금들도 그로 더불어 음행하였고 땅에 거하는 자들도 그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였다 하고 계시록 17:2. 성경에서 음행을 한다는 뜻은 무엇인가?
 에스겔 23장27~30절을 보면 그 의미를 알 수 있는데, 네가 이같이 당할 것은 네가 음란히 이방을 좇고 그 우상들로 더럽혔음이로다(겔 23:30)는 구절을 보아 영적으로 음행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진리를 놓고서 거짓 진리를 받아 들이는 것이고, 하나님을 믿지 않고 우상을 숭배하는 것이다. 이것이 곧 다른 사람들에게 포도주를 마시게 해 취하게 만든다라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옛날 하나님의 백성이었던 이스라엘이 타락하고 하나님을 떠나 우상숭배에 빠진 것을 왕들과 백성들이 음행을 했다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또한 그것은 진리를 주지 않고 진리를 가르치지 않는 것을 가리킨다. 다른 성경절들을 연구해 보자.

* 렘 13:27 내가 너의 간음과 사특한 소리와 들의 작은 산 위에서 행한 네 음행의 비루하고 가증한 것을 보았노라 화 있을진저 예루살렘이여 네가 얼마나 오랜 후에야 정결하게 되겠느뇨 하나님의 교회가 작은 산 위에서 음행을 했다. 옛날의 유대 지방에 가면 작은 산이 있는데, 거기에서 산당을 세워 놓고 우상 숭배를 했었다.

* 미가 1:7 그 새긴 우상을 다 파쇄하고 그 음행의 값을 다 불사르며 그 목상을 다 훼파하리니 그가 기생의 값으로 모았은즉 그것이 기생의 값으로 돌아가리라

 잠깐 여기서 요즈음 현대 기독교인들의 우상은 무엇인가 살펴보자. 요즈음 기독교인들은 마음으로 우상을 섬긴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 - 자녀, 재물, 명예, 쾌락, 자존심 등등 - 은 무엇이든지, 또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애정을 빼앗아 가는 모든 것은 무엇이든지 영적인 현대의 우상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무엇이 참 진리인지 깨닫지 못하고 제 갈 길을 모른 채 비틀거리며 방황하고 있다. 진리와 복음이 분명하지 않다. 왜냐하면 음행의 포도주를 마셨기 때문이다.

C 옛날 바벨론 왕이 귀인과 찬치를 베풀었었다.
 그 때, 벨사살 왕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취하여 온, 하나님 앞에 쓰이던 거룩한 금은 기명을 가지고 와서 술을 부어서 마시게 했다. 금의 기명은 성전에서 쓰는 것인데 그 안에 포도주, 사람을 취하게 하는 것이 들어 있었다. 이 말은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이고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데, 그러나 가르침은 사람을 취하게 만드는 포도주(거짓 복음, 오류가 섞인 교리)가 들어있다는 것이다. 이런 교회의 형편을 가리켜서 바벨론이라 하는 것이다. 옛날에는 마귀가 믿는 사람을 다 순교시켰는데, 그것이 잘 되질 않아 요즘에는 사람들을 잘못된 교리를 믿게 하여 멸망 받게 만들고 있다.

* 렘 51:7
바벨론은 여호와의 수중의 온 세계로 취케 하는 금잔이라 열방이 그 포도주를 마시고 인하여 미쳤도다 옛날에 바벨론에서 가르치는 태양숭배와 잘못된 가르침으로 이스라엘뿐 아니라, 온 세계가 다 그것을 받아들여 전부다 태양신을 섬기는 이방신전을 짓게 되었다. 다 취하게 되었다. 이것처럼 마지막 시대에도 잘못된 오류를 믿는 것은 음행을 한다고 성경은 예언하고 있는 것이다.

* 이사야 28:7,8,13
이 유다 사람들도 포도주로 인하여 옆걸음 치며 독주로 인하여 비틀거리며 제사장과 선지자도 독주로 인하여 옆걸음 치며 포도주에 빠지며 독주로 인하여 비틀거리며 이상을 그릇 풀며 재판할 때에 실수하나니(7절) 모든 상에는 토한 것, 더러운 것이 가득하고 깨끗한 곳이 없도다(8절)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고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하사 그들로 가다가 뒤로 넘어져 부러지며 걸리며 잡히게 하시리라(13절) 그러므로 포도주에 취하지 않으려면, 위의 13절 말씀처럼, 성경 한 곳만 살피지 말고 전체 성경을 살펴보고, 여기서 얻고 저기서 얻고, 성경 전체에서 문맥을 보고 거기서 진리를 발견하라 라는 말이다.

3부 - 바벨론의 취하게 하는 포도주, 거짓 복음과 교리들

 제3부에서는 바벨론의 취하게 하는 포도주, 곧 거짓 복음과 교리들 - 천주교가 기독교에 들여온 성경과 맞지 않는 교리들 - 에 대하여 생각해 보기로 한다.

 이것을 함께 연구해 보는 것은 아주 중요한데, 그 이유는 기독교 안에 진리가 아닌 오류들이 살며시 들어와 복음을 변조시켜 놓아 우리의 영생이 달린 구원 문제의 교리들을 뒤바꿔 놓았기 때문이다. 바른 진리를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한데, 그 이유는 올바른 가르침을 알아야 올바른 영적인 경험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요즈음 많은 개신교에서 그들의 신앙교리를 바꾸면서까지 천주교회와의 연합을 도모하고 있는 것을 본다. 화해와 연합은 좋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올바른 진리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특별히 이 기사를 읽는 독자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말은, 이 기사는 어떤 특정한 교회를 비난하거나 그 교인들을 공격하는 의미에서 쓴 것이 아니다. 만일, 우리 기독교인들이 성경이 제시하는 복음과 진리를 정확히 모르고 바뀌어지고 뒤섞인 복음을 믿는다면, 우리의 영적인 경험에 혼란이 올 것이며, 올바른 예언에 대한 지식과 진리에 대한 깨달음이 없이 믿으면, 마지막 시대에 하나님을 위한 증인이 되는 일과 재림을 위해 준비하는 일에 차질이 생길 수 밖에 없으므로, 정확한 지식을 알고 있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이 기사를 편성했다는 바를 이해하기 바란다.

1). 교황권이 들여온 취하게 하는 포도주
* 원죄설-original sin
* 성체설
* 성자 숭배, 성지 순례, 우상
(사도상들, 베드로상, 성모 마리아상, 여신들))
* 영혼 불멸설(새세대 운동이나 강신술에서도 발견되는 교리)
* 연옥설, 지옥설 (살아남는 이들 62호 참조)
* 거짓 이야기들, 경외서
* 일요일 성수제도
* 십계명 변조
* 거짓 복음
(교회 안의 변조된 복음; 살아남는 이들 79호 참조)

1. 원죄설
 변질된 복음의 가장 원조는 원죄설이라고 할 수 있다. 원죄설이란,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신의 죄로 인해 죄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아담의 죄 때문에 태어날 때부터 정죄를 받은 죄인이라는 주장이다. 이 원죄설의 창시자는 어거스틴이다(예정설도 주창함). 어거스틴의 모친은 기독교인이었지만 그의 부친은 마니교(Manichaean)였다. 이러한 이단 종교의 배경에서 양육된 그는 기독교인이 된 후에도 어릴 때 받아들인 이단적 개념을 지워 버릴 수 없었고, 어린 마음에 고착된 이교 사상이 그의 신학적 사상에도 크게 영향을 미쳤다. 어거스틴은 죄의 기원에 관한 개념(원죄설)을 일반화 했는데, 그는 죄라는 것은 십계명을 범하는 데 달려 있는 것이 아니고, 존재 상태 바로 그것이 죄라고 주장하면서, 그것은 생애 가운데서 죗된 행위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것이라고 말했다.

 천주교에서는 이 사상을 받아들여 원죄설을 주장하고 있으며, 천주교회의 많은 신학적 오류들은 모두 다 어거스틴에 의해서 조장되었거나, 혹은 그 뒤를 따라 학자들이 일치된 신학적 사상을 조성하려는 시도의 결과로 개발된 것들이다. 그런데 이 원죄설은 성경이 말하는 죄의 개념과 판이한 차이가 있다. 성경이 말하는 올바른 죄의 개념은, 우리가 태어날 때 타락한 본성과 유전 때문에 죄로 기울어지는 성향은 타고 나지만, 정죄받은 죄인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죄를 짓기로 선택하기 전에는 정죄받은 죄인이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2. 성찬식
천주교에서는 성찬식 때 신부가 떡과 포도주를 높이 쳐들면 그것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진짜 몸(육신)으로 변한다고 가르치며, 신자들이 떡을 먹으며 포도주를 마실 때마다 매번 다시 예수 그리스도를 희생시키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이것을 거룩한 희생 미사라고 부르며, 이것을 매번 행해야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께서 희생되실 때 한 번에 그 몸을 드리셨다고 말하고 있으며, 그러므로 성찬식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예수께서 단번에 희생을 드리신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행해야 한다 (히 9:24~28, 고전 11:13~26).

3. 구원을 주는 성례 (sacrament)
천주교에서는 하나님께서 성례(聖禮-sacrament)를 통해서 그들을 용서하신다고 말하고 있다. 세례와 성찬의식은 성례-sacrament라고 불리우는 것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용서와 의를 우리의 행위 (성례-sacrament)를 통해 받을 수 없다. 이것은 16세기의 천주교 공회로부터 기원된 것이다. 우리는 구원과 의를 얻는 일에 있어서 우리와 그리스도 사이에 아무것도 끼어들게 해서는 안된다. 우리를 의롭게 만드는 길은 오직 하나 우리의 죄를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직접 나가는 것 밖에는 없다.

4. 유아 세례
아기의 머리에 물을 뿌리는 세례는 천주교와 루터교에 들어가는 표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나 어린 아기는 아직 아기이라 스스로 자신의 믿음을 가질 수 없다. 아무도 다른 사람의 신앙을 대신해서 결정해 줄 수 없다. 성경은 믿음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에서, 그리고 그 말씀을 믿음에서 나는 것이지 세례를 받음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롬 1:17, 막 16:16). 침례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맺는 좋은 언약의 의식이다(벧전 3:21). 그러나 어린 아기는 그런 언약의 의미를 알지 못한다. 모든 사람은 먼저 복음에 대해서 들어야 하고 그 다음에 자신의 지각으로 하나님을 받아들일 것인지 아닌지를 결정해야 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성경에서 말하는 침례의 참된 의미는, 물에 장사지내다라는 뜻인데, 그것은 상징적으로 우리의 모든 죄된 생애를 물에 장사지내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새로운 생명으로 일어나는 것을 뜻한다(롬 6:3~6).

5. 십계명의 변조
아마도 세기에 걸쳐 천주교가 만든 종교의 가장 큰 변조는 성경 출애굽기 20장 3~17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십계명을 바꾼 것일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하신 하나님의 중요한 법인 십계명을 천주교에서 변경시켰다. 성경에 쓰여 있는 십계명과 천주교가 새롭게 변경한 십계명을 비교해 보자.

1.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2.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3.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는 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4.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5.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6. 살인하지 말지니라.
7. 간음하지 말지니라.
8. 도적질하지 말지니라.
9.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
10.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찌니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

1. 하나이신 천주를 흠숭하라.
2. 천주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지 말라.
3. 주일을 거룩히 지내라.
4. 부모에게 효도하라.
5. 사람을 죽이지 말라.
6. 간음하지 말라.
7. 도둑질하지 말라.
8. 거짓증언을 하지말라.
9. 남의 아내를 탐내지 말라.
10. 남의 재물을 탐내지 말라.

2). 포도주에 함께 취한 교회들
* Joint Declaration(연합 선포):
 계시록 17장에 나오는음녀가 딸들의 어미라는 표현을 주목해 보아야 한다. 이것은 영적인 의미로, 오류, 즉 취하게 하는 포도주가 바벨론(어미)으로부터 조금씩 다른 교회들(딸들)로 스며들어감에 대한 표현이다. 이 예언의 성취를 지금 우리는 눈 앞에 보고있는가? 그렇다. 대표적인 예로, 루터교회 세계본부와 천주교회가 1999, 10. 31에 그들의 교리 중 칭의(Justification)에 대한 가르침에 대하여 함께 찬성하여 싸인하는 Joint Declaration(교리 연합 선포식)을 가진 사건이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루터는 천주교회의 오류를 정면으로 공격하고 종교개혁을 일으킨 장본인이다. 그런데 그 후예들은 다시 천주교와 교리의 찬성 연합식을 거행한 것이다. 루터교회의 교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천주교회와 찬성한 이 교리의찬성에 대하여 알지도 못하고 있는데, 이 일은 교회의 회직들과 지도자들 위에서 이 모든 것들을 결정하는 우두머리들의 힘에 의하여 된 일이기 때문이다. 이 칭의에 대한Joint Declaration(연합선포)는 다른 많은 것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중, 우리 인간은죄성(sinful)을 가지고 있는 동안에 동시에 의롭다(righteousness)고 언급하고 있다. 즉 죄 가운데 있는 죄인이면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말이다. 그러나 성경은 말하기를, 우리가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받아들이고 있는 한 우리는 더 이상 죄인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서 우리가 항상 죄인이면 아무도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성경은 깨끗하지 않은 것은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며, 예수께서는 죄 가운데서가 아니고, 죄로부터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셨다고 말한다(계 21:27, 마 1:21).

* Charta Oecumenica (C.O)
 최근에 유럽에 있는 루터교와 천주교의 조직, 그리고 유럽의 교회 협의회(CEC; Conference of European Churches)와 천주교 감독 협의회(CCEE; Catholic Bishops Conference of Europe)는 Charta Oecumenica라고 불리우는 새로운 교리 연합선포를 준비하려고 함께 모였다. 그런데, 여러가지 많은 논제들을 다루고 있는 이 기록은 거의 천주교회와 1995년 제수잇회의 계획서의 복사판과 같다(1995년판 제수잇 총회로부터 나온 계획서). 이 총회의 계획서를 잠깐 살펴보면, 그들은 모든 교회들의 완전한 연합을 위해 일할 것이라고 언급되어 있다. 천주교의 산하 아래 그렇게 하기 원한다는 언급은 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런데 이 Charta Oecumenical에는 위에 언급된 천주교와 제수잇의 계획서에 나오는 말이 똑같이 반복되고 있는데, 그것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의 최대의 목표인 모든 교회의 완전한 연합을 이룰 때까지, 우리를 분리시키는 서로의 어떤 차이점도 없애고 모든 분야에서 함께 일하려고 우리는 노력할 것이다. 이 일을 이루기 위해서 그들은 다른 교회들과 대화를 시도할 것인데, 먼저 다른 교회들의 믿는 신조를 알아낸 후에, 함께 가진 공통점들은 모우고, 서로 찬성할 수 없는 신조들은 다루기를 회피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들은 진리를 높이 들고 모든 분야에서 하나님의 뜻과 조화를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며 기도할 것이다. 교리 연합 선포는 주께서 가라사대에 의한, 즉 성경말씀에 의한 기록이라기 보다는 그냥 혼란스러운 문서이다.

* Charta Oecumenica는 또한 크리스챤 교육 안에 종교 연합을 도모하는 교육과 신학을 펴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라고 선포했다. C.O에는 유럽의 공통복음주의 사관을 도모하고, 다른 교회 교인들에게 전도하여 그 교회들로부터 교인들을 도적질하는 일을 하지 않을 것을 약조하는 조항이 들어 있다. 만일 이 조항을 따른다면 바벨론으로부터 내 백성을 불러 나오게 하라는 가르침의 자유가 명시되어 있는 성경 계시록의 기별은 사라지게 된다. 우리는 이것에 대하여 경고해야 한다. 사실 Charta Oecumenica 는 종교의 자유를 위협하고 있는 것이다!

3). 음녀의 딸들
 
많은 기독교회들이 그들이 믿는 교리가 어디서 어떻게 비롯되었는지를 검토하거나 알지 못한 채, 또 그것이 성경과 맞지 않는 교리인지 아닌지를 알지 못한 채, 맹목적으로 믿고 따라 가는 것은 바로 음녀의 딸들이 어미를 따라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루터교와 다른 교회들이 천주교회와 함께 교리 연합선언에 연합하여 중요한 문제에 관한 거짓교리들을 유지하도록 찬성하고 싸인한 것은 바로 성경이 기술한대로(계 17:5) 그 교회들이 음녀의 딸들이 된 것을 뜻한다.

 마틴 루터가 종교 개혁을 했지만, 사실 성경이 말하는 완전한 밝은 빛인 온전한 진리에 이르는 완전한 종교 개혁을 이루지는 못했다. 그는 천주교에서 가르치던 행함이나 교회의 권위에 의하여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하고 위대한 개혁을 했지만, 그 외에 천주교회에 들어와 있는 신학적 문제와 교리들에 대해서는 더 개혁을 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리하여 아직도 기독교회에는 가르침에 있어서 천주교의 교리들과 가르침이 섞여 있다. (원죄설, 예정설, 지옥설, 영혼 불멸설 등등)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계 18:2)이라는 표현에서 무너졌다는 뜻은 타락한 것을 뜻하는 의미로, 한 때 진리를 알았으나 진리에서 떨어진 교회들을 말한다. 이것은 교회 안에 들어온 영적인 타락에 대한 실례이다.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교회들에게 경고와 견책을 하고 계시는 것이다. 루터 교회는 이것의 좋은 실례이다. 마틴 루터는 그의 시대에 교황권에 대항하여 위대한 종교개혁을 외쳤건만, 지금의 루터교회는 천주교회와 함께 아주 중요한 교리에 있어서 동맹을 맺고 있다. 이것은 딸들이 어미를 모방하여 따라간다는 예언의 성취를 보여주는 좋은 예다.

 그러므로 바벨론이란 이 지구상의 사람들을 미혹하는 거짓 종교집단으로서, 성경상의 바벨론의 종교는 천주교인데, 많은 다른 교회들이 거짓 교리와 오류의 영향을 받아 그 뒤를 따르고 있다. 지금 루터교회는 조금씩 더 바벨론처럼 되어가고 있다. 성경은 그것이 크게 무너질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천주교회와 루터교...그리고 그와 똑같은 길을 걸어가는 모든 교회와 사람들이 다 무너질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가까운 장래에 이 모든 것들이 드러날 것이다. 그러나 바벨론의 특성들을 나타내는 교회, 곧 모든 영적인 흑암과 하나님의 진리로부터 멀리 떨어진 상태에 머물러 있는 그런 교회들일지라도, 그 안에 참되게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 영혼들은 아직 이 시대에 깨달아 할 특별한 진리에 눈을 뜨지 못하였지만, 하나님을 사랑하고 신실하게 믿는 사람들이다. 그 중에 있는 많은 신실한 사람들은 더 밝은 빛을 사모하고 있다. 그들은 교회에서 그리스도의 참된 형상을 찾을 수 없고, 그들의 교회가 세상과 더 가까워 지는 것을 보며 갈등을 겪는다. 참된 진리를 경험하며 진정으로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과, 그냥 교회에 다니니까 교회에서 시키는대로 따라가는 사람들, 이 두 그룹의 차이는 점점 더 현저해질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 때가 이르면, 모든 것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사람들, 그리고 참된 복음을 생애에 경험한 사람들은 그들을 붙잡고 있는 끈을 과감히 끊어버리고, 마지막 하나님께서 그분의 참 백성들을 모으실 때 그 참된 하나님의 자녀들의 무리에 함께 가담할 것이다.

4부 - 지금 우리는 어느 시대에 살고 있는가?

 요한계시록 17장을 연구하다 보면 우리가 사는 시대가 성경 예언상 어느 시점인지를 알게 된다. 우리는 과연 어느 시대에 살고 있는가? 계시록 17장과 계시록 13장을 연결하여 함께 연구해 보자.

1). 붉은 빛 짐승을 탄 여자
 
또 일곱 대접을 가진 일곱 천사 중 하나가 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많은 물위에 앉은 큰 음녀의 받을 심판을 네게 보이리라. 땅의 임금들도 그로 더불어 음행하였고 땅에 거하는 자들도 그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였다 하고, 곧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광야로 가니라. 내가 보니 여자가 붉은 빛 짐승을 탔는데 그 짐승의 몸에 참람된 이름들이 가득하고 일곱 머리와 열 뿔이 있으며(계 17:1~3). 계시록 17장 3절을 보면, 여자, 곧 음녀가 무엇을 타고 있는 사실을 알게 되는데, 이 음녀가 과연 무엇을 타고 있는가? 이 여자는 붉은 빛 짐승을 타고 있다. 그런데 그 여자가 타고 있는 짐승의 몸에는 참람된 이름이 가득하고, 일곱 머리와 열뿔이 있다.

1. 여자(음녀)가 짐승을 타고 있는 상징의 의미
 
왜 여자가 짐승을 타고 있는가? 만일 독자가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 성경예언을 공부한 독자라면, 이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이 있으므로 짐승을 타고 있다라는 구절의 의미를 이해할 것이다. 짐승은 국가, 왕, 또는 세력을 상징한다. 또한 음녀는 타락한 교회를 상징한다.

짐승 = 국가, 왕, 세력 음녀 = 타락한 교회

그래서 음녀가 짐승을 타고 있다라는 의미는, 타락한 종교(교회)가 왕이나 국가의 세력과 연합했다라는 뜻이다. 즉, 타락한 교회가 국가의 권력을 사용하고 있는 상태를 상징하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겠다. 여기에서는 타락한 교회가 국가의 힘들을 이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왜냐하면 음녀가 짐승을 타고 있는 것으로 묘사 되어 있기 때문이다.

2. 여자(음녀)가 많은 물 위에 앉아 있는 상징의 의미
 
계시록 17장 1절에 천사가 사도 요한에게 많은 물 위에 앉은 음녀의 심판을 네게 보이리라는 구절이 나온다. 성경은 영적 바벨론을 상징할 때 많은 물위에 앉아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것이 무슨 뜻인가? 계시록 17:15절에 그 해석이 잘 나와 있다.  또 천사가 내게 말하되 네가 본 바 음녀의 앉은 물은 백성과 무리와 열국과 방언들이니라

물 = 백성, 무리, 열국, 방언들

 그러므로 많은 물 위에 앉아 있다는 상징은, 이 음녀, 곧, 타락한 교회인 큰 바벨론이 많은 백성들과 사람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교회라는 뜻이다. 숫자가 많고 인기가 있는 교회이다. 그것이 바벨론, 곧 음녀이다.

3. 짐승의 몸에 있는 참람된 이름들은 무엇인가?
계시록 17:3 곧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광야로 가니라 내가 보니 여자가 붉은 빛 짐승을 탔는데 그 짐승의 몸에 참람된 이름들이 가득하고 일곱 머리와 열 뿔이 있으며

 참람된이란 뜻은 무슨 뜻인가? 예수께서 지상에 계실 때,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되다고 하자, 바리새인들이 주님을 참람되다라고 하며 죽이려고 했던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누구든지 하나님이나 예수님과 자신을 동등하게 여기거나 그렇게 말한다면 그것은 참람된 일이다. 또한 자신이 예수님처럼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하는 권세가 있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참람된 일이 된다. 만일, 이 지상의 어떤 교회나 인간이 죄인들의 죄를 용서 할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참란된 것이다. 즉 자기가 하나님과 같은 권세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참란된 것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흥미있는 사실은 로마 천주교회의 교황의 공식 명칭이 Vicarius Filii Dei 인데, 그 명칭의 뜻인즉 하나님의 아들의 대리자라는 뜻으로서 이 지구상 교회에 군림하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자라는 뜻이다. 교황은 인간의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세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2). 일곱 머리와 열 뿔 가진 짐승의 정체는?
 
계시록 17장 7절에 나오는 짐승에 대하여 알아보자. 이것은 우리가 과연 어느 시점에 살고 있는지 가리켜주는 중요한 예언이다.

 계시록 17장 7,8절  천사가 가로되 왜 기이히 여기느냐 내가 여자와 그의 탄 바 일곱 머리와 열 뿔 가진 짐승의 비밀을 네게 이르리라 네가 본 짐승은 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으나 장차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와 멸망으로 들어갈 자니 땅에 거하는 자들로서 창세 이후로 생명책에 녹명되지 못한 자들이 이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으나 장차 나올 짐승을 보고 기이히 여기리라.

 계시록 17:9~13지혜 있는 뜻이 여기 있으니 그 일곱 머리는 여자가 앉은 일곱 산이요, 또 일곱 왕이라. 다섯은 망하였고 하나는 있고 다른이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으나, 이르면 반드시 잠간 동안 계속하리라. 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어진 짐승은 여덟째 왕이니 일곱 중에 속한 자라. 저가 멸망으로 들어가리라. 네가 보던 열 뿔은 열 왕이니 아직 나라를 얻지 못하였으나, 다만 짐승으로 더불어 임금처럼 권세를 일시 동안 받으리라. 저희가 한 뜻을 가지고 자기의 능력과 권세를 짐승에게 주더라.

 이 짐승은 일곱 머리를 가졌는데, 전에 있었다가 지금은 보이지 않지만, 나중에 무저갱으로부터 또 다시 올라와 멸망으로 들어갈 자라고 되어 있으며, 이 일곱 머리 가운데 하나인데, 죽었다가 또 다시 부활해서 올라왔다가 또 죽을 것이라고 예언되어 있다. 이는 곧 교황권이다. 생명책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은 다 교황권에 절할 것이다. 이것은 마지막 때에 있을 짐승의 표의 환란에 대한 표현이다.
계시록 17:10,11 일곱 왕이라 다섯은 망하였고 하나는 있고 다른 이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으나 이르면 반드시 잠깐 동안 계속하리라 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어진 짐승은 여덟째 왕이니 일곱 중에 속한 자라 저가 멸망으로 들어가리라.

 여기서 다섯 왕이란, 바벨론, 페르시아, 헬라, 로마, 그리고 교황 로마를 말하는 것인데, 성령이 계시 가운데 요한을 데리고 광야로 가서, 음녀의 정체을 밝혀 주던 시점이 바로 이 다섯왕들이 망하고 없어진 그 시점부터인 것이다. 바로 그러한 시점의 상태로 데려가서 마지막 시대에 전개될 바벨론의 세력의 흥망 성쇄에 대하여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다음의 성경절을 보면 더 자세한 힌트를 얻게 되는데, 요한이 광야로 데려감을 받았을 때에(중세기 핍박의 시기를 의미함) 이 음녀가 성도들의 피에 취해 있다고 하였음으로 중세기의 교황권의 핍박의 시기가 끝나는 시점으로 데려 감을 당했다는 뜻이 된다.

 계 17:5-7 그 이마에 이름이 기록되었으니 비밀이라, 큰 바벨론이라,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 하였더라 또 내가 보매 이 여자가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한지라 내가 그 여자를 보고 기이히 여기고 크게 기이히 여기니 천사가 가로되 왜 기이히 여기느냐 내가 여자와 그의 탄 바 일곱 머리와 열 뿔 가진 짐승의 비밀을 네게 이르리라. 그러므로 교황권의 중세기 핍박의 기간이 끝나가는 무렵에 서서 요한은 장래에 일어날 사건들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섯은 망하였고, 다시 말해서, 바벨론과 페르샤, 헬라, 로마, 교황로마 등의 다섯 세력은 이미 망하였고 하나는(여섯째 왕) 지금있고 또 하나는(일곱째 왕) 아직 나라를 얻지 못했는데, 얻게 되면 그 세력을 잠간동안 계속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은, 다섯 왕이 지나간 이후에 현재 여섯째 왕의 시기를 바라 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여섯번째 왕은 누구일까? 로마 교황권이 1260년 동안 핍박을 하다가 그가 죽었을 당시에 이 지구상에 1798년도를 전후로 해서 그쯤에 올라왔던 나라가 있어야 되는데 그게 누구냐 하는 것이다, 그 세력이 누구냐 하는 것이다.

 요한 계시록 13 장에는 바다에서 올라오는 복합적인 짐승으로 교황권이 등장하는데 이 교황권이 죽게되는 상처를 받게 될 때에(1798년도에 불란서의 세력에 의하여 교황권이 몰락하는 시점) 다른 한 세력이 바다가 아닌 땅으로부터 올라 온다고 예언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교황권이 바로 다섯번째의 왕이기 때문에 그 이후에 올라오는 이 새끼 양 같은 세력이야 말로 그 다음을 잇는 여섯번째 왕의 세력임에 틀림이 없는 것이다. 계 13:11 내가 보매 또 다른 짐승이 땅에서 올라오니 새끼 양같이 두 뿔이 있고 용처럼 말하더라

 성경에서 새끼 양은 누구를 상징하는가? 예수님을 상징한다. 예수님을 상징하는 기독교의 가르침을 가지고 올라온 세력이다. 즉 유럽의 교황권의 핍박을 피하여 도망온 청교도들에 의하여 세워진 나라이다. 그러므로 이 세력은 바로 미국일 수 밖에 없다. 땅에서 올라 왔다는 표현은, 사람들이 많은 곳으로 상징된 바다가 아닌 인적이 드문 황야 같은 땅을 발견하여 세워진 나라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힌트인 것이다.

 왜 두 뿔이 있다고 표현했을까? 그것은 왕권을 상징하는 것으로, 하나의 뿔인 독재주의가 아니고 종교와 국가가 분리 되어 있는 민주주의 국가, 즉 종교와 국가가 각각 분리되어 있는 국가를 상징하는 용어이다. 그러나 미국이 기독교의 정신을 가지고 성장하게 되지마는, 결국에는 천주교 국가처럼 되어 버리는 것을 알 수가 있는데, 양처럼 올라왔지만 용처럼 말하게 된다고 예언되어 있기 때문이다. 곧 마지막 때에 성도들을 죽이려고 따라온 사단의 도구가 될 것이라는 예언이다. 먼저 나온 짐승인 교황권과 협력하여 마지막 성도들을 핍박하는 법을 만들게 되는 세력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미국에 대한 성경의 예언이다.

계시록 13:12 저가 먼저 나온 짐승의 모든 권세를 그 앞에서 행하고 땅과 땅에 거하는 자들로 처음 짐승에게 경배하게 하니 곧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은 자니라. 교황권은 1798년도에 죽게되는 상처를 받았지만 예언을 따라 곧 낫게 되었다. 바로 이 교황권의 세력에게 온 세상이 경배하도록 촉구하며 짐승의 우상을 세워주는 국가가 미국이다. 그러므로 6째 왕은 미국이다. 그렇다면 일곱째 왕은 누구인가? 7째 왕은 세계연합을 말한다. 이 일곱째 왕과 열뿔 세력에 대한 표현이 똑같은 것을 알 수가 있다.

 계 17:10,12 또 일곱 왕이라 다섯은 망하였고 하나는 있고 다른 이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으나 이르면 반드시 잠깐 동안 계속하리라& 네가 보던 열 뿔은 열 왕이니 아직 나라를 얻지 못하였으나 다만 짐승으로 더불어 임금처럼 권세를 일시 동안 받으리라.

 일곱째 왕이 이르면 잠깐동안 그 세력을 유지 할 것이요, 열뿔도 일시 동안만 세력을 받는다고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이 일곱째 왕의 세력과 열뿔의 세력은 같은 세력임을 알려 주는 언어들이다. 미국의 세력이 결국은 세계 연합인 유엔의 힘을 북돋아서 온 세계가, 로마 나라가 열뿔로 갈라졌었던 것처럼 (그러나 로마 나라 당시의 분열은 아닌 것이 아직 나라를 얻지 못하였다고 말하기 때문에 미래에 이르러 오는 세력을 말하는 것이다) 각 나라로 갈라져 있던 국가들이 유엔이라는 이름 하에 다시 연합하여 한 세력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일곱번째 왕이요, 이 연합 세력은 교황, 즉 다시 부활하여 올라오는 여덟번째 왕인 교황권에게 과거 중세기 때와 같은 세력과 권세를 주게 되는 것이다.

 이 여덟번째 왕은 지나간 일곱 왕들 가운데 하나였었으며 죽었다가 다시 살아 올라오는 세력이라고 예언하여 주고 있기 때문에 이 세력은 마지막 시대에 그 힘이 다시 부활된 교황권을 말하는 것이다. 일곱째 왕인 세계연합은 교황권을 지지하고 있다.

 계 17:13 저희가 한 뜻을 가지고 자기의 능력과 권세를 짐승에게 주더라 그러나 교황권은 나중에 또 망하게 될 것이다.

 계 17:16,17 네가 본 바 이 열 뿔과 짐승이 음녀를 미워하여 망하게 하고 벌거벗게 하고 그 살을 먹고 불로 아주 사르리라 하나님이 자기 뜻대로 할 마음을 저희에게 주사 한 뜻을 이루게 하시고 저희 나라를 그 짐승에게 주게 하시되 하나님 말씀이 응하기까지 하심이니라. 일곱째 왕들 즉 세계연합이 결국에가서는 지금까지 교황권에게 속임을 당해 왔다는 사실과 오류들에 농락당하여 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분노하여 교황권의 기만을 벗기고 태워 죽여 버리게 될 것이라고 성경 예언을 설명하고 있다.

 계시록 17장 끝절인 18절은또 내가 본바 여자는 땅에 임금들을 다스리는 성(도시)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참으로 바티칸은 한 작은 성(도시)으로서 세계의 왕들과 나라들을 다스려 온 세력인 것을 알 수 가 있다. 그러므로 로마 교황이야 말로 계시록 17장이 예언하여 주고 있는 하나님께서 심판 하실 바벨론 - 음녀의 어미인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어디쯤에 와 있는가?

 계 17:12 네가 보던 열 뿔은 열 왕이니 아직 나라를 얻지 못하였으나 다만 짐승으로 더불어 임금처럼 권세를 일시 동안 받으리라

 지금 우리는, 미국이 용처럼 말하기 시작하였고 세계 연합이 교황과 연합하여 잠깐 동안 그들의 권세를 누리기 시작하려고 하는 즈음에 와 있다. 지금 우리는 여섯째 왕인 미국의 세력을 지나 7째 왕인 세계 연합의 세력이 도래 하려고 하는 시기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조금만 더 있으면 하나님의 남은 교회인,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진실된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여 죽이려 하는 사단의 최후의 분노의 시대가 이르러 오게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짐승의 표의 환란인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의 성도들과 싸우는 것 보다는 그들의 주님이신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과 싸우는 것이 될 것이다.

 계 17:14 저희가 어린 양으로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 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저희를 이기실 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입고 빼내심을 얻고 진실한 자들은 이기리로다

 다니엘 12:1 그 때에 네 민족을 호위하는 대군 미가엘이 일어날 것이요 또 환난이 있으리니 이는 개국 이래로 그때까지 없던 환난일 것이며 그 때에 네 백성 중 무릇 책에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을 얻을 것이라

 지금은 세상의 인기있는 종교를 따라 갈 때가 아니다.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인 성경대로 살아야 할 시기이다. 지금은 정말 죄와 세속에서 벗어나 정결케 함을 입어야 할 때이다. 하나님께서는 부르심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택함을 받고 진실하게 끝까지 주님을 따라 사는 자들을 보호하실 것이다. 지금 이 시기는, 많은 사람들이 가고 있는 넓은 길을 따라 쉽게 살아 가려고 방종할 때가 아니요, 참된 진리대로, 주께서 말씀하신 좁은 길대로 따라 살아야 할 때이다.

5부 - 남은 백성이 되는 길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서 다른 음성이 나서 가로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예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계 18:4).  자비롭고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께서는, 계시록 17장에 바벨론에 다가올 심판에 대해서 경고하신 후, 그분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그 심판과 재앙을 받지 않고 살아남는 길을 제시하시며 호소하고 계시는 것을 위의 성경구절에서 읽을 수 있다. 그런데 그 초청은 다름이 아니고, 거기(바벨론)서 나오라는 초청이다. 그(바벨론)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 재앙들을 받지 말라는 사랑의 호소이다.

1). 구약시대의 바벨론
예레미야 51:5~9
 5절대저 이스라엘과 유다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를 거역하므로 죄과가 땅에 가득하나 그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에게 버림을 입지 아니하였나니
 
 6절 바벨론 가운데서 도망하여 나와서 각기 생명을 구원하고 그의 죄악으로 인하여 끊침을 보지 말지어다. 이는 여호와의 보수의 때니 그에게 보복하시리라. 예레미야 51장에 나와있는 이 말씀을 사도 요한은 그대로 빌려서 계시록 17장과 18장에 거기서 나와 그 죄에 참여하지 말고...라고 하고 있다. 계시록에 나와있는 예언은 구약에 나와 있는 말을 전부 인용한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적인 배경을 이해해야 계시록에 있는 영적인 상징을 이해하게 된다. 옛날에 실제적으로 있었던 일이 영적으로 반복되는 것이다.
 
 7절 바벨론은 여호와의 수중의 온 세계로 취케 하는 금잔이라 열방이 그 포도주를 마시고 인하여 미쳤도다.

 위의 성경절을 읽어보면, 구약에도 바벨론은 포도주로 열방을 취하게 한다고 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영적으로도 이 바벨론 때문에 세상이 취한다. 바벨론 때로부터 시작해서 모든 이교의 잘못된 가르침과 오류가 세상에 퍼졌다.

렘 51:10-13
 여호와께서 우리 의를 드러내셨으니 오라 시온에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일을 선포하자. 화살을 갈며 방패를 굳게 잡으라. 여호와께서 메대 왕들의 마음을 격발하사 바벨론을 멸하기로 뜻하시나니 이는 여호와의 보수하시는 것 곧 그 성전의 보수하시는 것이라. 바벨론 성벽을 향하여 기를 세우고 튼튼히 지키며 파수군을 세우며 복병을 베풀어 방비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바벨론 거민에 대하여 말씀하신 대로 경영하시고 행하심이로다. 많은 물가에 거하여 재물이 많은 자여 네 탐람의 한정, 네 결국이 이르렀도다.

 위의 성경절에서 이 바벨론에 대해 설명하기를, 많은 물가에 거하여 재물이 많은 자여 라고 했는데, 계시록 17장도 많은 물위에 앉아 있는 여자라고 표현하고 있다. 물위에 앉아 있는 여인이 무엇을 뜻하고 있는가?

 옛날에 바벨론 성이 아름다웠다. 그 밑에 유브라데스 강이 흐르고 있는데, 예언으로 볼 때 마지막 시대의 여섯째 재앙을 보면 유브라데스 강이 마르매 동방으로 부터는 왕들이 오는 길을 예비하더라 라는 말이 나온다. 이 말은 그대로 옛날 역사를 가져다 상징적으로, 영적으로 전세계적으로 풀어서 설명을 하고 있는 것이다.

 바벨론의 벨사살 왕이 1000명의 귀족들과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져온 일곱 금 촛대와 하나님의 성전에서 쓰는 귀한 그릇들을 가져다가 포도주를 부어 마시며 연회를 베풀고 취했을 때, 한 손이 나타나서 벽에 글을 썼다. 그 글에 의미는 달아보니 부족하다, 내가 네 나라를 페르시아에게 주리라는 뜻이었다. 그날 밤에 고레스 왕이 유브라데스 강을 마르게 하여 그 바벨론 성을 함락하였다. 이것이 성경에 유브라데스 강이 마른다라는 표현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고레스 왕, 곧 동방에서 온 이 왕이 바벨론을 멸망시키고, 그 안에 포로 잡혀 있는 유대인들을 해방시켜서 성전을 지으라라고 예루살렘으로 돌려 보냈다. 이것은 오늘 날의 바벨론 같은 교회들의 무리 가운데 사로 잡혀있는 주의 백성들을 주님께서 오셔서 해방 시킬 것을 상징한다.

2). 바벨론에서 나오라고 외치는 천사
 
계시록 18장 1절에는 그의 영광으로 온 땅을 환하게 만드는 천사가 등장한다. 이 일 후에 다른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권세를 가졌는데 그의 영광으로 땅이 환하여지더라. 이 천사는 힘센 음성으로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라고 외치고 있다. 이것은 무슨 뜻일까?

 1부에서 공부했듯이 천사는 하늘에 날아다니는 진짜 천사가 아니고, 하나님의 참된 진리와 기별을 전하는 사람들, 곧 기별자들이다. 이 천사는 바벨론의 비밀을 알고 있으며, 또 바벨론의 음모 - 모든 사람들을 음행의 포도주, 곧 바벨론의 취하는 포도주인 거짓복음으로 취하게 만들어 구원을 얻지 못하도록 하려는 음모 - 를 알아 내어, 그 비밀을 알리고 세상 사람들을 멸망에서 구원해내려고 외치는 사람들이다.

 이 천사들은 마지막 때, 곧 이 세상과 바벨론에 하나님의 심판이 내리기 바로 전, 아직도 참된 복음을 모르고 바벨론에 묶여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바벨론에서 나오라고 죽음을 무릅쓰고 용감하게 외치는 사람들을 말하며,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하나님을 위해 외칠 증인들을 지금 찾고 계신 것이다. 마지막 늦은 비 성령을 충만히 받고, 이 세상을 향하여 바벨론이 무너졌다고, 그 가운데서 나오라고 외칠, 하나님의 증인인 천사들은 과연 누가 될 것인가?

È 남은 백성이 되는 조건
1.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요즈음 기독교 안에는 거짓 복음이 침투하여 십자가에서 구원이 다 이루어졌다고 하는, 칭의만으로 구원을 얻으려는 값싼 복음이 활개를 치고 있다. 매일 우리 마음 속에 임재하시고 감화하시어 우리를 죄 짓지 않도록 지켜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능력, 또한 자아의 완전한 굴복과 거듭남, 그리고 새 생명으로 매일 부활하여 사는 성화의 생활을 강조하지 않는 반쪽의 복음은 위험한 것이며, 많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올바른 영적 경험을 하지 못하도록 이끈다. 이 거짓 복음의 원조는 바벨론인 것을 우리는 앞에서 배워 알고 있다.

 성경이 요구하는 하나님의 남은 백성이 되는 조건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들(계 14:12)이다. 그런데, 계명을 지키려면 예수의 믿음을 가져야 한다. 계명은 우리의 힘으로는 지킬 수 없다. 그것은 예수께서 이 세상에 사실 때 가지셨던 믿음, 곧 자신을 완전히 비우시고 온전히 아버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하나가 되어 사신 믿음을 가져야 지킬 수 있다.

 계명을 지킨다는 뜻은, 자아가 완전히 죽고 온전히 거듭난 상태를 매일 유지하는 성화의 생애를 사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매일 성령으로 예수님의 사랑이 부어지는 경험을 하는 것이며, 또 마음 속에 하나님의 법이 쓰여지는 새언약의 경험, 곧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을 가지므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자연스럽게 생애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완전한 종교 개혁을 통해 회복된 완전한 복음을 알 필요가 있고, 그 완전한 복음을 알므로 그 온전한 진리로 성화되는 경험을 반드시 해야 한다. 마지막 시대에 하나님의 증인이 될 사람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통해, 그리고 매 순간 우리 속에 임재하시는 예수님의 은혜와 성령의 감화를 통해, 자신의 타락된 본성에 따르지 않고 죄를 이기는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시려고 이 땅에 오신, 그리고 자기를 구원하시려고 생명을 바치신 예수님을 너무도 사랑하므로 죄를 이기는 것이 생애에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사람들, 마음이 완전히 거듭난 사람들, 곧 계명을 지키는 사람들이다.

2. 바벨론의 관습과 사상에서 나온 사람들이어야 한다;
 
바벨론에서 나오라고 외칠 사람들은 자신이 바벨론에서 구속된 경험을 가진 사람이어야 한다. 구속이란 흑암의 학교, 이 세상에서 배운 세속적인 정신과 관습과 생활방식에서 벗어나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참 백성들은 세상에 살지만 세상의 생활 방식에서 벗어난 하늘의 방식으로 살아가야 한다. 하늘을 위하여 준비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먼저 마음과 정신이 하나님의 마음과 정신으로 거듭나야 하는데, 그것은 곧 사도 바울의 경험이 우리의 매일의 경험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자신을 예수그리스도께 완전히 바친 사람들은 하루의 매 순간들을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게 될 것인데, 곧 그분의 마음으로 느끼고, 그분의 생각으로 생각하고, 그분의 눈으로 보고, 그분의 성품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임재 속에서 사는 사람이라면 사랑스럽고 거룩한 성품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물론 성품의 성숙과 장성에는 단계가 있지만 말이다. 예수님과 함께 24시간 연결되어 살아가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그분의 뜻과 계명을 지키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먹는 것, 입는것, 사는 환경, 생활 방식이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야 한다. 모든 가족이 예수님을 중심으로 하는 영적인 유대관계를 가지며, 특히 자녀들을 하나님 안에서 거듭나는 아이들로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지금 우리는 영적으로 심각한 시대에 살고 있다. 성경이 말하는 마지막 시대,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운 시대에 살고 있다. 요즈음 하나님의 참 백성들은 점점 하나님의 성품으로 꼴지워져 가고, 흑암의 권세를 따르는 사람들은 마음과 정신이 점점 더 악하게 꼴지워져 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당신은 어느 편에 속하고 있는가? 시대의 징조를 바라보며 영적으로 깨어나, 세상을 버리고 마지막 하나님의 증인으로 쓰임을 받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가? 바벨론에 남아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구원하기 위해, 세상에 내릴 심판을 피하도록, 그리하여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라고 외칠 수 있는 하나님의 용감한 군사가 되기 위하여 준비되어 가고 있는가?

 머지 않아 온 세상을 환하게 할 큰 성령의 운동(계 18:1)이 있을 것인데, 모든 죄를 회개하고 마음의 성전을 깨끗하게 한 사람들은 성령의 충만하심을 받고 나아가 바벨론의 정체와 음모를 밝히며, 바벨론에 있는 하나님의 참 백성들에게 그 죄에 참예하지 말고 거기서 나오라고 외칠 것이다. 그것을 큰 소리 외침, 늦은비 성령 운동이라고 부르는데, 그 일은 짐승의 표의 환란과 핍박을 불러올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령으로 충만하게 무장된 하나님의 증인들은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을 온 세상과 우주에 증거할 것이다.

 지금은 성령을 받기 위하여 회개하고 모든 바벨론의 습관들을 버리고 개혁할 때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로 죄를 이기고 승리하는 남은 백성이 되도록 하기에 넉넉하지 않은가! 그 사랑이 우리로 바벨론을 향하여 크게 외칠 하나님의 용감한 군사로 만들기에 충분하지 않은가! 우리 모두 그 외침에 참여하는 하나님의 증인들이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