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하나님의 마음을 덧입기를 소원하면서

 세상에는 많은 하나님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한 분 밖에 안 계시지만, 사람들이 각각 자기의 관념 속에서 생각하고 믿는 하나님이 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기만의 틀 속에서 자기가 창조해낸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자기의 됨됨이가 그러면 자신의 생각 속의 하나님의 모습 또한 그렇습니다. 인색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인색하고 좁은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의 마음을 가진 사람은 사랑이 많고 풍부하신 하나님을 섬깁니다. 인색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인색하게 대하고, 자비로운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합니다.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자기 마음 속에 늘 인간의 흠을 찾아내어 벌주기를 좋아하시는 무서운 하나님을 모시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생각 속의 하나님처럼 다른 사람을 비판하고 판단합니다. 그러나 사랑의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용서하며 가슴을 열어 누구든지 받아들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마음 속에 자신이 생각하고 깨달은 만큼의 하나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당신은 어떤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고 있습니까? 마음에 깨닫고, 마음 속에 모시고 있는 하나님의 모습대로 우리는 행동합니다.

하나님의 거울에 비추어 보며
 
하나이신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우리들의 하나님이 서로 다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요? 같은 하나님을 그렇게 오래 믿었어도 우리가 아직 다 같이 참 하나님의 모습으로 변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의 마음이 스스로의 고집스러운 생각으로 가득 차서 온전하신 하나님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거듭나는 첫 계단은 보는 것입니다. 요한 계시록 3장 15~19절에는 마지막 라오디게아 교회의 백성인 우리들에게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메시지가 나오는데, 그것은네 자신을 보라!는 것입니다.

 성경의 옛날 성소에는 물두멍이 있었습니다. 그곳은 제사장들이 손을 씻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손을 씻기 전에 먼저 그 물에 자기의 모습을 비추어 보았습니다. 우리도 거울처럼 맑은 성소의 물두멍에, 하나님의 마음의 거울에 우리의 마음을 비춰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의 참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과 생각 속에 빼어내고 버려야 할 것들, 하나님의 마음과 같지 않은 것들이 얼마나 많이 들어 있는가를... 그리고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거짓되고 쓸 데 없는 생각과 관념 - 교만과 편견, 판단과 비판, 배타심과 이기심, 이중성과 술수, 독선과 자존심 - 들로 가득 차있는가를...

 마음이 쓸 데 없는 것들로 가득 차 있는 사람의 눈에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무엇이든지 통과시킬 수 있는 투명한 마음이 아닌, 어둡고 탁하게 흐려있는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볼 수 없고, 천국을 이룰 수도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마음이 청결한 자만이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은, 우리의 마음과 눈과 생각과 관념을 버리고, 하나님의 마음과 눈과 생각과 관념을 가지는 것을 말합니다. 모든 것을 버려야 마음이 청결해지고, 모든 것이 버려지고 죽어 없어져야 하나님이 우리 속에 새롭게 태어납니다.

생각과 감정을 바치는 일
 
우리의 생각과 감정은 우리의 품성이라고 어떤 유명한 종교 저술가는 말했습니다. 그 말은 곧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생각과 감정이 우리 자신이라는 말이며, 그것이 우리가 어떠한 사람이라는 것을 결정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거기에다가 조상으로부터 유전된 타락된 성향까지 합쳐져서 우리 자신을 이루고 있습니다.

 당신은 어떤 사람입니까? 어떤 감정과 생각으로 이루어진 사람입니까? 어떤 품성을 가진 사람입니까? 자기 자신을 보지 못하면, 자신의 유전적으로 타고난 성향과 그리고 자신이 그동안 마음에 집어넣고 살아온(후천적으로 배양해 온) 생각과 관념이 무엇인지 뚜렷이 알지 못하면, 우리는 그것들을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아가 깨끗이 함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우리 마음에서 완전히 빼내어 버리시는 하나님의 영혼 정결사업에 참여할 수도 없습니다.

 미국 아이들이 쓰는 말에 인디언 기버(Indian giver)라는 말이 있습니다. 무엇을 주었다가 도로 달라는 아이를 놀리는 말이지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자주 인디언 기버들이 되곤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하나님께 모두 바친다고 드리다가는, 하나님께서 성령의 칼로 그것을 완전히 수술해 내시도록 시간을 드리지 않은 채,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으로 덧입을 시간을 가지지 않은 채, 금방 그것을 도로 가져와 자기 마음과 생각과 감정대로 해버리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모본 되신 예수께서 이 세상에 사실 때, 그분의 생각과 마음에 사단이 발 부칠 곳이 한치도 없었던 이유는, 예수께서 자신의 마음을 완전히 비우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감정과 생각과 마음을 수술하여 완전히 없애주시도록 그것들을 드리고, 버리고, 비우고, 그 대신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과 감정을 받아야 예수님처럼 승리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자신을 살펴야 하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거울에 당신의 마음을 비춰보십시오! 당신의 생각과 감정들을 주님께 가지고 나아가 깨끗하게 씻음을 받으십시오! 자기의 생각과 마음을 비우고 버리는 사람만이 완전한 하나님을 볼 수 있고, 완전한 하나님을 깨달을 수 있고, 그리고 마음속에 완전한 천국을 이룰 수 있습니다.

 매일 매 순간 생각과 마음을 비우십시오! 우리가 우리의 고집스러운 생각과 관념과 마음을 다 버리고 겸손히 하나님 앞에 앉을 때, 그 때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과 관념으로 덧입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비우는 만큼 하나님의 마음과 하늘의 사랑이 우리를 채울 것입니다.

 하나님의 수술하시는 칼에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맡길 때, 그리고 그 분의 칼이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깨끗하게 도려내실 때, 그래서 우리 자아가 완전히 죽을 때, 그 때 우리 마음에는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이 들어와 가득 차게 될 것이며, 그 때 우리는 비로서 하나님과 완전히 하나가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마음을 덧입기를 소원하면서...

권두언

강병국 목사

 남북 이산 가족들이 며칠 동안 상봉한 후에 너무나 가슴이 시려 울면서 헤어지는 모습들을 보고 있노라면 어느새 우리들도 따라서 안타까운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언제 다시 만날는지 기약 없이 헤어지는 그들은 차라리 만나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슬프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뇌까리며 눈물들을 훔칩니다. 자기 나라 백성들을 위하여 존재한다는 정치인들이 자기 백성들을 울리고 있는 모습들이지요.

 그런데 여러분들은 알고 계십니까? 그보다 더 안타깝고 기가 막힌 사연을 가지고 있는 이산 가족들이 우주에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 지구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정말로 슬픈 사연을 가지고 있는 이산 가족들입니다. 죄로 인하여 영생을 잃어버리고 하늘의 가족들과 생 이별한 상태에서 살고 있는, 북한주민들보다 더 가슴 아픈 이산 가족들입니다. 성경은 하늘의 대표이신 예수님과 인류의 대표인 사도 요한과의 다음과 같은 간절한 애원으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0)

 예수께서 하루 속히 오셔야 합니다. 헤어져 있는 하늘의 가족들과 재회해야 합니다. 우리 인류가 다시, 죽음과 슬픔이 없고 영원한 생명과 행복이 넘치는 하늘 나라로 가서, 헤어졌던 하늘의 가족들과 상봉하려면 죄의 문제를 해결하여야 합니다. 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분리 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죄란 무엇인지에 대하여, 그리고 예수님의 구속의 계획이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에 대하여 성경적이고 올바른 견해를 회복하여야 합니다. 무엇이 죄인가에 대한 서로 다른 이해는 기독교회 안에서 복음에 대한 커다란 분리의 벽을 가져왔습니다.

 죄란 무엇이며 어떻게 성립되는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해야 죄의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 것인가, 어떻게 하는 것이 죄를 정복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한 이해가 올바로 세워져야 합니다. 그래야 거짓 복음에 휩쓸려서, 예수를 믿으면서도 멸망을 당하게 되는 슬픈 일을 막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번 호는 이 중요한 죄의 문제와 확실한 복음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서 마련되었습니다. 기도하시면서 읽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서론 - 교회 안에 존재하는 두 가지 복음

 예수께서는 이 세상의 끝을 가져 오는 복음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마 24:14.

 그렇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그 복음을 전파해야만 예수께서 재림하시고 이 세상이 끝이 이르게 된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마 24:14. 여기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질문을 던질 수 있는데, 그것은 도대체 예수께서 말씀하신 천국 복음이란 어떤 복음입니까?라는 질문이다. 기독교 전체의 약 300여 개의 크고 작은 분파 및 교파들이 저마다 천국 복음을 전파한다고 말하고 있지만 분명한 사실은, 성경은 오직 한가지 복음만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담과 하와 시대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와 열두 제자들의 초기 기독교 시대까지 죄로 인하여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는 복음은 오직 한가지이다. 요한계시록은 마지막 시대에 전파되는 그 한가지 복음을 영원한 복음이라고 부르고 있다. 또 보니 다른 천사가 공중에 날아가는데 땅에 거하는 자들 곧 여러 나라와 족속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졌더라 계 14:6. 그러므로 우리는 아담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았고, 예수께서 이 땅에 계실 때에 가르치셨고, 그 분의 제자들이 이 세상에 전파하였던 복음, 그리고 요한계시록이 영원한 복음이라고 부르는 그 복음이 어떤 복음인지를 정확하게 이해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예수께서 오실 수 있고, 이 세상의 끝이 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수많은 교파에서 각기 다른 가르침과 복음을 주장하고 있는데, 어떻게 하면 그 모든 복음들 중에서 성서적 참 복음을 찾아 낼 수 있을까? 자신이 어떤 교회에 소속되어 있는가를 불문하고, 진실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성경이 말하는 참된 복음을 이해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자신과 가족의 구원을 결정하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말하기를 가르침과 교리는 중요치 않다. 그저 예수를 전파하라고 한다. 정말 그런가? 복음의 내용은 상관없고 그저 예수 이름으로 침례를 주면 되는 것일까? 사도 바울은 이 문제에 대해서 분명한 입장을 나타내었다.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갈 1:8. 예수께서 사도들에게 가르치신 복음 이외의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게는 저주가 임할 것이라는 것이 바울의 입장이다.

 이 세상에 수많은 종류의 복음들이 존재하지만, 그들 모두는 결국 두 종류의 복음으로 나누어 지는데, 첫 번째는 죄를 이길 수 없다는 복음이고 두 번째는 죄를 이길 수 있다고 가르치는 복음이다. 우리는 이번 특별 기사에서 기독교회 안에 존재하는 두 복음을 살펴봄으로써 독자 여러분들 스스로 참된 성서적 복음이 어떤 것인가를 확인할 수 있도록 도와드릴 것이다. 생애의 빛 편집실에서는 이번 호에서 현존하는 모든 종류의 복음을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하였는데 그 두 가지를 편의상 첫 번째 복음과 두 번째 복음으로 구분하였다. 제1부에서는 첫 번째 복음에 대해서 그리고 제2부에서는 두 번째 복음에 대해서 살펴 보고자 한다.

1부 - 세상에서 가장 인기 있는 복음

첫 번째 복음

 첫 번째로 소개하는 복음은 현대 기독교회에서 가장 인기 있는 복음이다. 이 복음은 거의 모든 교회들에서 가르쳐지고 있으며, 거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받아들이고 있는 복음이다.

 복음을 신학적으로 분석할 때, 대부분의 신학자들과 성경학자들은 그 복음이 주장하는 죄에 대한 정의 또는 죄란 무엇인가? 라는 문제를 제일 먼저 살펴 보는데, 그 이유는 이것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서 복음의 내용이 완전히 달라지게 되기 때문이다. 이 기사에서도 우리는 죄의 문제부터 먼저 살펴 보기로 하겠다. 지금부터 연구하게 될 죄의 정의를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서 그것에 고리를 물고 따라오는 복음에 관한 여러 가르침들이 전혀 달라지게 된다. 다음에 계속되는 글을 읽으면서 논리적으로 연결되는 복음의 연결 고리들을 주의 깊게 살펴 보기 바란다.

1. 죄란 태어난 상태 그 자체 라는 교리의 문제점
 
죄란 무엇인가? 첫 번째 복음은, 죄란 우리가 이 죗된 세상에 태어난 자체이다라고 말한다. 또한 이 복음은 죄라고 하는 것은 어떤 행동이나 말이나 생각과는 상관이 없다고 주장한다. 첫 번째 복음은 죄를 다음과 같은 논리로 설명한다. 아담은 우리의 조상이다. 아담은 그의 범죄로 인하여 이 세상 전체에 문제를 가지고 왔다. 우리는 아담의 자손이기 때문에 그로부터 죄로 기울어지는 성향을 유전적으로 받았는데, 바로 그것이 타락한 본성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본성은 이기적이고 교만하며 복수하기를 좋아한다. 우리의 본성은 선한 것이 아니고 악한 것이다.

 그래서 첫 번째 복음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가지고 태어난 본성은 너무나 악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이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들은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잃어버린바 되었고, 지옥불의 정죄를 받았다고 가르친다. 첫 번째 복음은 말하기를 죄란 우리가 어떻게 행동하고 말하는 것 때문에 발생되는 것이 아니라 타락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나는 그 자체 때문에 죄인이 된다고 죄에 대한 정의를 내린다. 죄에 대한 이러한 정의는 첫 시작부터 죄를 도무지 이길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는 것으로 결정지어 버리게 되는데, 이것은 논리적으로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믿음을 갖도록 인도한다.

2. 그리스도는 우리와 다른 인성을 취하셨다는 교리의 문제점
 
한 고리는 또 다른 고리로 연결된다. 만약 위에서 살펴본 바대로, 죄가 우리가 가지고 태어난 본성 그 자체라고 가정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와는 전혀 다른 인성을 취하셔야만 한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죄인들의 구세주가 되시기 위해서는 그분께는 죄가 전혀 없어야만 하는데 첫 번째 복음이 죄에 대하여 내린 정의에 따라서 죄가 우리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악한 본성 자체라면,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정죄 받은 죄인이 되어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 복음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우리와는 전혀 다른 완전한 것으로 만들 수 밖에 없었다. 겉모습은 그분의 조상들의 죄의 결과를 받았지만, 그분의 내면의 인성은 보통 인간의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을 취하였다는 교리를 세우게 되었다.

 지금까지 언급한 죄와 그리스도의 인성 문제는 복음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 중의 하나이다. 왜냐하면 이 두 가지 문제에 대한 가르침은 복음의 가장 밑바닥에 위치하여 그 기초를 놓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기초가 잘못 놓여지면, 그 위에 쌓여지는 모든 가르침과 복음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게 된다. 만약 우리가 첫 번째 복음이 말하는 대로 본성적으로 죄인이라면, 우리는 항상 죄를 범하지 않을 수가 없다. 비록 우리가 침례를 받고 거듭났다고 할지라도, 타락한 본성은 없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언제까지나 우리 안에 그대로 있다. 우리가 아무리 성령의 감화 감동하심에 따라서 선한 행위를 하고 선한 말을 하며 살지라도,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악한 본성은 여전히 우리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정죄 받은 죄인으로 살아가게 된다. 참 하나님의 백성이 이마에 하나님의 인을 받은 다음에도, 그리고 지구의 은혜의 시간이 끝난 후에도 악하고 이기적인 본성은 결코 변하지 않기 때문에 악인과 의인 모두는 예수께서 재 강림하시는 그 날까지 죄를 범하며 살게 된다는 것이 이 복음이 말하는 바이다. 요한계시록 22장은 은혜의 시간이 끝난 이후에는 거룩한 자와 불의한 자가 최종적으로 결정된다고 선언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복음은 모든 사람은 예수께서 다시 오시는 순간까지 계속해서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모태로부터 가지고 태어난 본성 그 자체가 죄이기 때문에 단 한 순간이라도 죄를 범하지 않을 수 없다. 침례 받고 거듭난 이후에도 본성적으로 계속해서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계속적으로 범하는 죄를 계속적으로 용서 받아야만 한다. 요한계시록이 우리에게 예언하는 것처럼 이 세상에 짐승의 표가 내려지고 전 세계에 일곱 재앙이 내려서 인류에 대한 은혜의 시간이 끝난 다음에도 나는 계속해서 죄를 범할 수 밖에 없고 계속해서 용서를 받아야만 한다. 어느 누구도 죄를 가지고는 천국에 갈 수 없기 때문에 계속적인 죄에는 계속적인 용서가 필요하게 된다.

 자, 그러면 다시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로 하자. 만약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이 죄로 인하여 타락한 본성을 갖고 태어나는 우리와는 다른 것이라면, 그 분께서는 어떻게 유혹을 받으셨을까? 이 복음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기 이전의 모습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혹 받으신 상태를 엿볼 수 있다. 왜냐하면 이 복음은 예수께서는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기 이전과 같은 완전한 인성을 취하셨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범죄하기 이전의 아담과 하와는 사단으로부터 어떻게 유혹을 받았는가? 지금 사단은 우리를 공격하기 위하여 어디든지 우리를 따라다니는데, 에덴 동산에서도 사단은 아담과 하와를 공격하고 유혹하기 위해서 어디든지 그들의 뒤를 밟으면서 따라다녔는가? 사단이 원할 때마다 아담과 하와를 계속해서 유혹하고 시험에 빠뜨렸는가? 아니다! 사단은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 주변으로 올 때에만 그들을 유혹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이 복음은 예수께서는 모든 면에서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하여 아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처럼 유혹을 받지 않으셨다. 예수께서는 교만과 실망, 화를 내고자 하는 유혹 같은 것들은 결코 받은 적이 없다. 하나님의 뜻 대신에 자신의 뜻을 행하고자 하는 시험을 받지 않으셨다고 대답한다. 그러나 우리는 다음과 같은 성경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예수 그리스도)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히 4:15.

 자, 그러면 우리는 다시 첫 번째 복음을 믿는 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해야 한다. 만약 예수께서는 우리가 유혹 받는 식으로 시험을 받지 않으셨다면, 그분께서는 어떻게 시험을 받으셨는가? 그들은 이렇게 대답한다. 예수께서는 오직 3번만 유혹을 받으셨다. 첫 번째 시험은 광야에서 받으셨고 두 번째는 겟세마네에서 받으셨으며 마지막으로는 갈보리 십자가 위에서였다. 우리는 가만히 앉아 있어도 마귀가 시험하기 위하여 우리의 본성을 건드리지만, 예수께서는 시험과 유혹을 받기 위해서는 의도적으로 시험이 있는 장소로 나가셔야만 했다는 것이 이 복음이 말하는 바이다. 하와가 시험을 받기 위하여 에덴 동산 중앙에 있던 선악과 나무로 나갔던 것처럼, 예수께서도 광야나 겟세마네 동산이나 갈보리로 나가야만 했다는 것이 첫 번째 복음의 설명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외부와 우리의 본성 내면으로부터 시험을 받지만, 예수께서는 외부로부터만 시험을 받았다는 것이 이 문제의 골자이다. 지금까지 설명한 내용을 요약하자면, 타락한 본성을 지닌 우리는 호흡하는 것처럼 죄를 계속적으로 범하게 되지만, 예수께서는 우리와는 달리 죄의 흔적이 전혀 없는 완전한 인성을 취하였기 때문에 그분은 우리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유혹을 받으셨고 그러므로 그분은 죄를 범하지 않을 수 있었다는 것이 이 복음의 바닥에 깔려 있는 논리이다. 이러한 가르침은 우리를 논리적으로 또 다른 신학적 고리로 인도해 가는데, 그것은 칭의에 관한 문제이다.

3. 칭의(용서)만으로 구원받는다는 교리의 문제점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천국에 가려면 죄가 없어야 되는데 이 첫 번째 복음의 가르침에 있어서는 인간은 죄 속에서 태어나고 죄를 몸 속에 가지고 있기 때문에 결코 죄를 이기거나 버릴 수는 없다. 그러므로 죄를 해결하고 구원받기 위해서는 용서만이 유일한 수단이다. 타락한 본성(죄)을 가지고 태어난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구원받기 위하여 용서(칭의)를 필요로 하게 된다. 그래서 천주교회에서는 갓 태어나서 아무 것도 모르고 울고 있는 신생아에게 영아 세례라는 의식을 통하여 용서를 베푸는 황당한 아이디어까지 만들어 내게 되었던 것이다. 이 복음의 도표에는 성화가 포함되지 않는다. 왜 이 복음을 믿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복음에 성화를 포함시키지 않을까? 왜냐하면 그들은 칭의만이 전적으로 예수께서 하시는 일이며 성화와 같은 인간의 불완전한 행함은 구원의 조건에서 배제되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여기서 특이할 만한 사실은, 그들은 성화를 인간 스스로의 불완전한 노력과 애씀으로 여긴다는 사실이다. 성화에 대해서 이러한 이해를 가질 때, 성화는 더 이상 의미가 없어지게 되고 구원과는 무관하게 된다.

93 이러한 가르침은 사람들에게 어떤 경험을 가져다 줄까? 이 복음을 믿고 따라가는 사람들의 삶에는 어떤 경험들이 실제로 일어나게 될까? 만일 독자 여러분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 분을 믿어서 구원을 얻게 되었고 또한 주의 날을 거룩하게 지키면서 교회에 잘 다니고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직장에서 여러분에게 주일에도 일터에 나와서 근무해 달라는 요구를 받았다면, 여러분은 어떤 결정을 하겠는가? 직장을 잃어버릴 경우 가족들을 먹여 살릴 길이 막연한데 이러한 상황에서 여러분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위기는 매우 어려운 상황이지만, 이 첫 번째 복음은 주의 날에 직장에 나가서 일하는 것은 구원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가르친다. 왜냐하면 주의 날을 지키는 행함 자체가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 복음은 말하기를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 넷째 계명인 안식일을 지키는 행함이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 그러므로 주의 날을 범하여도 멸망하지 않는다 고 한다.

 이 복음은 매우 단순한 복음이다. 구원에 이르는 길도 한 가지이고 구원을 잃어버리는 길도 한 가지라고 가르친다.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이미 구원이 이루어졌고, 이와 반대로 예수께로부터 등을 돌리고 거절하면 구원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이 이 복음을 믿는 사람들의 신조이다. 이 복음에 의하면, 구원을 잃어버리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주의 날을 지키지 않아도, 마약을 복용해도, 술에 취해 중독이 돼도, 십일조를 드리지 않아도, 오직 예수를 인정하고 믿기만 하면 구원은 보장된다는 것이 이 복음이 의미하는 바인데, 왜냐하면 이 모든 행위들은 성화에 속한 문제들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복음을 믿는 목사는 그들의 설교 중에 이렇게 말한다. 잘못 행하고 잘못 말하고 잘못 생각하는 것은 예수를 거절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양심에 꺼리는 일을 계속해서 하고 있으면서도 예수를 믿기만 하면 우리의 구원은 계속적으로 유지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내용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이기적으로 태어난 상태 그 자체가 죄이기 때문에 인간은 도무지 죄로부터 해방될 수 없기 때문에 오직 용서(칭의)를 통해서만 구원이 주어지고 유지될 수 있으며, 성화는 인간의 불완전한 행위에 불과하기 때문에 구원의 조건이 결코 될 수 없다. 구원은 용서(칭의)를 통해서 넉넉히 이루어지며 성화(그리스도인의 영적 성장)는 있으면 좋고 없어도 구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이 이 복음의 가르침이다. 구원과 칭의에 대한 이러한 생각은 논리적 고리를 또 하나 연결하게 되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완전 문제이다.

4. 완전한 순종은 불가능하다는 교리의 문제점
 
죄를 이기적으로 태어난 상태로 규정한 결과 어떤 그리스도인도 결코 죄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가르침이 생기게 되었고, 이것은 결국 그리스도인의 거룩한 생애(성화)를 구원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으로 몰아갔다. 이러한 논리는 그리스도인의 완전한 순종과 굴복은 불가능하다는 또 하나의 결론으로 발전된다. 이 복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50%나 80%의 순종은 가능할지 모르지만 계명에 대한 100%의 온전한 순종은 불가능하다고 가르친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타락한 본성 자체부터 죄일 뿐 아니라 그러한 불완전한 본성으로는 결코 죄를 승리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는 다르다. 예수께서는 우리와는 다른 인성을 가지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완전한 순종의 생애를 사실 수 있었지만, 우리는 타락한 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결코 완전한 순종의 생애를 살 수 없다. 그리스도인의 완전한 순종은 예수께서 재 강림하셔서 우리의 육체(본성)를 완전한 것으로 바꾸어주실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5. 복음의 열매들에 나타나는 문제점
 
복음에는 그에 합당한 열매들이 맺히게 된다. 지금까지 살펴 본 이 첫 번째 복음에도 그에 합당한 열매들이 맺힌다. 이 복음은 설교 단상에 다음과 같은 열매를 맺히게 만든다. 우리는 죄인으로 태어났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용서뿐이며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은 보장됩니다. 교회마다 이런 복음으로 가득 차 있는데, 심지어는 보수적이고 성서적이라고 불리는 교회들까지도 이런 복음의 도전을 거세게 받고 있다. 복음은 반드시 열매를 가져온다. 그것이 참 복음이든지 거짓 복음이든지를 불문하고 복음은 그것을 받아들인 교회와 개인에게 분명한 결과를 가져다 준다. 먼저 심판 문제를 생각해 보자. 복음을 앞에서 언급한 식으로 믿는다면 심판도 필요가 없게 된다. 주일을 올바로 준수하지 않아도 구원이 보장되는데 심판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십일조를 바치지 않고 술에 취한 삶을 살아도 구원이 보장되는데 심판이 무슨 필요가 있는가? 이런 복음에서 구원을 위한 조건은 단지 천사 한 명이 기록책에 1994년 1월 12일 홍길동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받아들였음이라고 쓴 기록만 있으면 된다. 물론, 기록하는 천사는 홍길동의 삶을 주시하여 바라보지만 비록 그가 주의 날을 범하고 노름을 하고 술을 먹어도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궁극적으로 거절하지 않기 때문에 천사는 홍길동이 계속해서 구원 안에 머물러 있다고 기록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복음에서는 심판이 필요 없게 된다. 그래서 이러한 복음에서는 심판의 의미와 용도에 대한 여러 가지 의문들이 생기게 된다.

 이러한 복음에서는 십계명 또한 그 효용성과 의미를 잃어버리게 된다. 죄를 인간이 가지고 태어난 죗된 상태(본성)로 간주하는 이 복음에서는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지라도 항상 죄를 범하고 있는 상태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명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교리가 무력화되고 만다. 또한 죄는 인간의 본성 자체이며 동시에 계명을 범하는 것이라고 믿는다고 할지라도, 결과는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본성적으로 계속해서 죄를 짓고 있는 상태에서 율법을 지키고자 하는 노력과 행위 자체가 무의미해지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와 다른 인성을 취하셨기 때문에 완전한 순종의 삶을 사실 수 있었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완전하게 순종할 수 없다고 믿기 때문에 이런 복음 하에서 완전한 순종이란 불가능할 뿐 아니라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만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대개 이 복음을 믿는 사람들은 예수께서 재 강림하시면 그 때야 완전한 본성을 받게 되므로 그 때에야 비로서 내가 하나님의 계명을 완전히 지킬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지금은 불가능하다. 아무도 율법을 지킬 수 없다고 말한다. 어차피 인간은 본성적으로 죄를 계속해서 범할 수 밖에 없는데, 십계명을 조목 조목 지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라는 말이 이 복음을 따라가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하는 말이다. 이러한 논리 하에서 하나님의 도덕률(십계명)이 용도 폐지되면 교회는 도덕적으로 철저하게 파괴되고 만다. 간음이나 부적절한 결혼 관계가 교회 안에서 묵인되기 시작하며, 공공연하게 하나님의 십계명을 범하는 사람도 집사와 장로로 안수 받는 길이 활짝 열리게 된다. 간단히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부인하는 것 이외의 모든 것이 교회 안에서 일어나게 되며, 온갖 세속적 행습들이 교회 안에 들어와서 활개를 칠 수 있는 문이 활짝 열리게 된다.

 이 복음을 믿는 어떤 목사가 얼마 전에 이런 말을 했다. 하나님의 구원은 너무나 넓고 크기 때문에 우리가 무엇을 먹고, 무엇을 마시며, 무엇을 입고, 무엇을 듣고, 무엇을 보며, 무엇을 읽는다고 할지라도 그런 모든 것들은 성화와 행함에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에 우리의 구원과는 상관이 없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 성경에 나오는 어떤 표준을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것들은 우리가 완전한 본성을 받은 다음에야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그런 것들에 대해서 더 이상 이야기하지 말자. 그런 문제들은 오히려 교회의 분열을 조장하기만 한다. 이런 가르침 하에서는 성경에 나오는 모든 교훈과 건강 문제와 절제 문제와 위생 문제들도 구원과 상관없는 것들이라는 이름 아래 그 의미와 목적이 사라져 버리고 만다.

 도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 복음의 제일 밑바닥에는 예정설이 있다. 첫 번째 복음의 뿌리를 찾아서 내려가다 보면 그 맨 밑바닥에서 예정설이란 교리를 만나게 된다. 예정설이란 간단히 말해서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은 구원받고 어떤 사람은 멸망 당하게 될 것을 미리 결정해 놓으셨다는 교리이다. 구원과 멸망이 결정되는데 있어서 인간의 선택과 결정은 전혀 개입되지 않는다는 것이 예정설이다. 최초로 이 복음이 시작될 시기인 3~4세기경에는 많은 기독교인들이 예정설을 믿었었는데, 그들이 믿었던 복음 또한 다음과 같은 논리로 구성되었다. 우리는 타락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에 죄인들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완전한 본성을 취하셨기 때문에 죄가 없었고 또한 죄를 범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런데 우리의 죄는 용서를 받을 수 있으며, 장차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에 예수님처럼 완전한 본성을 받으면 그 때 나도 예수님처럼 완전한 순종의 생애를 살 수 있다. 이 얼마나 그럴듯하게 들리는 말인가?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이러한 인간의 논리를 한마디도 동의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을 받을 자와 멸망을 당할 자를 미리 결정해 놓지 않으셨다. 다음에 이어지는 제2부에서는 기독교회 안에 존재하는 두 번째 복음에 대해서 다루고자 한다. 독자 여러분께서는 제2부를 공부하심으로써 기독교 전체를 나누는 두 가지 복음을 한 눈에 보고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2부 - 성서적 참 복음

 제1부에서 다룬 복음의 뿌리를 찾아서 내려가면,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을 자와 멸망 당할 자를 미리 결정해 두셨기 때문에 구원에 관한 한 인간 개인의 선택과 의사는 전혀 무시된다는 예정설을 만나게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제2부에서 다룰 두 번째 복음의 뿌리를 찾아서 내려가면 자유 의지의 선택이라는 원칙이 나온다. 생애의 빛은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자유 의지를 주셨다고 믿는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스스로가 무엇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 우리가 구원받기로 선택할 수 있고, 또한 멸망 받기로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 성경 전체가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다루게 될 두 번째 복음 즉 성서적 참 복음은 바로 이 점에 기초하여 시작된다.

1. 죄란 자유 의지의 선택이다
 
성경은 죄를 본성으로 규정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어린 아기는 지옥불에 태워 없어질 정죄를 받은 죄인이 아니다. 이 복음은 죄를 마음의 선택으로 정의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에 Yes (예)라고 대답할 수 있고 No (아니오)라고 거절할 수도 있다. 성령의 음성을 거절하고 성경에 기록된 분명한 하나님의 계명에 불순종하기로 선택할 때에 비로서 우리는 죄인이 되는 것이다. 어린 아기는 태어나는 순간 본인의 의지로 어떤 선택도 하지 않았고, 선택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아직 없기 때문에 그를 죄인으로 정죄할 수 없는 것이다. 첫 번째 고리가 잘못되면 두 번째 고리 또한 잘못된 방향으로 나가는 것처럼, 첫 번째 교리가 올바른 기초 위에 세워지면 그것과 논리적으로 연결되는 다음 교리들도 자연스럽게 성서적으로 세워진다.

2. 우리와 같은 예수 그리스도
 
죄를 자유 의지의 선택 여부라고 정의하고 나면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해서도 성서적인 교리를 세울 수 있게 된다. 죄에 대하여 성서적 정의를 내리면, 예수 그리스도를 죄인으로 만들지 않기 위하여 그 분의 인성을 억지로 우리와는 전혀 다른 인성으로 조작할 필요가 없게 된다. 예수께서는 우리와 같은 육체(인성)를 취하셨다. 죄에 대한 이러한 정의 하에서는 예수께서 우리와 같은 인성을 취하셨다고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죄인으로 만들지 않게 된다. 예수께서 모든 면에서 우리와 한결같다라고 말하실 때, 가장 중요한 점은 그분께서 우리와 동일한 수준에서 유혹을 받으셨다는 점이다. 첫 번째 복음이 말하는 것처럼 그 분의 생애 가운데 3번만 우리와 같이 유혹을 받으신 것이 아니라 항상 우리와 같이 유혹을 받으셨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히 4:15). 그리스도는 우리와 같은 인성을 취하셨다. 그래서 우리처럼 시험을 받으셨다. 이러한 진리는 우리로 하여금 복음의 중심을 이해할 수 있도록 이끌어 준다.

3. 칭의와 성화로 구원받는다
 
첫 번째 복음은 칭의만을 복음으로 규정하지만, 두 번째 복음에서는 칭의와 성화 두 가지 모두가 복음이다.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용서하심과 동시에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키셔서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신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우리는 자신의 죄를 진정으로 회개하여 용서받은(칭의) 그리스도인으로부터 이 전에 즐기던 술과 담배를 끊고 복잡했던 여자 관계를 정리하며 훔친 물건을 돌려주는 놀라운 변화(성화)를 보게 되는 것이다. 칭의와 성화 중에 어느 하나가 무시되면 복음 전체가 망가지게 된다. 칭의는 받았는데 성화는 되지 않는 경우는 결코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죄인을 의롭다고 선언(칭의)하실 때에는 그 죄인의 마음도 동시에 변화시켜 주시기 때문이다. 욕심 많던 세리 삭개오가 주님으로부터 용서(칭의)를 받은 다음 그 생애가 완전히 변화(성화)되었던 것처럼, 칭의를 받은 사람은 그 사람의 생애 가운데 반드시 거룩한 열매(성화)가 자연스럽게 나타나게 된다.

칭의: 첫 번째 복음에서는 칭의는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이며 성화는 50%는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이고 나머지 반은 인간의 노력이다 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이 점에서도 이 두 가지 복음은 분명한 차이를 드러낸다. 왜냐하면 두 번째 복음 즉 참된 성서적 복음은 칭의를 받는 것은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하심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지만 내 자신이 그 분을 믿어야 하고 내 생애를 그 분께 드리는 내 자신의 선택과 결정이 있어야만 칭의가 이루어지는 것으로 설명하기 때문이다. 전적으로 예수께서 칭의를 해주시지만 그 분의 사랑과 희생에 반응하고 응해야 할 나의 몫이 있다는 말이다.

성화: 성화의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첫 번째 복음에서는 성화를 인간의 불완전한 행위로 간주하여 복음에 포함시키지 않지만, 여기서 다루는 성서적 복음에서는 성화 역시 하나님의 전적인 역사라고 가르친다. 우리가 해야 할 몫은 그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역사를 내 마음 속에서 이루시도록 허용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께서 이 길이 정로니 이 길로 가라고 말씀해 주실 때, 나는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이 성화이다. 그러므로 성화에 있어서도 나의 인간적인 노력은 없다. 100% 하나님의 역사이다. 나는 그저 하나님께서 인도하시고 보여주시는 대로 믿고 순종하며 따라갈 뿐이다.

4. 완전한 순종은 가능하다
 
우리를 100% 의롭다고 칭해주시는 분께서 우리를 온전히 성화시켜주신다는 사실을 믿는가? 예수께서 그만한 능력이 없으신가? 많은 경우에 사람들은 죄가 하나님보다 강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의 하나님께서는 죄보다 훨씬 강한 분이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칭해주시는 것처럼 우리를 거룩하게 변화시켜 주실 수 있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 그리고 진리의 빛과 인생의 경험들을 통하여 우리로 하여금 계명에 대한 완전한 순종의 길로 인도하신다.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결코 완전한 순종의 삶을 살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실 수 있다는 것이 성경의 약속이다. 이것을 바라고 믿는 것이 마지막 시대의 그리스도인 신앙이다.

 성화와 완전으로 나아가는 길에서 우리가 반드시 배워야 할 두 단어가 있다. 매우 단순한 말이지만 우리는 이 두 단어를 잘 사용하지 않는데, 그것은 Yes, Lord!(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다. 이렇게 말할 때 우리는 칭의를 받고 성화를 하게 되는데, 바로 그것이 완전한 순종의 삶이다. 바로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그대로의 복음이다. 제1부에서 배운 첫 번째 복음을 믿는 어떤 목사가 최근에 다음과 같이 설교했다. 우리는 복음을 한 단어로 줄일 수 있는데, 그 말은 용서입니다. 우리가 용서를 받는 한 구원은 보장됩니다. 우리의 양심이 우리에게 말하는대로 살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용서만 받으면 구원은 보장됩니다. 진리의 빛과 양심대로 살지 않는데 어떻게 용서가 베풀어지는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그 목사는 그렇게 복음을 설명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 공부하고 있는 이 두 번째 복음은 어떤 말로 요약할 수 있을까? 우리는 이 복음을 회복(restoration)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다. 복음이란 타락한 죄인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변화되고 회복되는 것을 말한다. 복음은 그저 우리를 용서만 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복음 속에는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대로 회복시켜 주는 능력이 포함되어 있다. 바로 이것이 예수께서 온 세상에 전파하라고 명하신 천국 복음이다(마 24:14). 바로 이것이 마지막 시대에 전파되어야 하는 영원한 복음이다(계 14:6).

5. 복음의 열매들
 
이 두 번째 복음에는 어떤 열매가 맺히게 될까? 이 복음에서 심판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된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생애는 기록하는 천사에 의해서 기록된다. 그래서 왜 이 사람은 구원받을 수 있고, 왜 저 사람은 구원받을 수 없는지가 공정하게 구별되어야 한다. 왜 이 사람은 하늘에서 영원토록 예수님과 살 수 있고, 왜 저 사람은 지옥의 심판을 받아야 하는지가 사람들과 천사들 앞에서 분명하게 드러나야만 한다. 입으로는 믿는다고 말하였지만, 그들의 삶 속에서는 죄가 계속되었던 사람들에 대한 심판에 대해서 성경은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이 복음에서는 순종의 열매가 거두어진다. 죄를 자유 의지의 선택으로 볼 때, 계명은 지킬 수 있는 것이 된다. 인간의 본성이 너무나 타락되어 있는데, 어떻게 우리가 계명을 온전히 지킬 수 있는가 라는 도전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도전에 대한 가장 분명한 대답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와 같은 인성을 취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명을 완전히 지킨 생애를 사셨다 이다. 제1부에서 다룬 첫 번째 복음의 믿음처럼 만일 예수께서 우리와는 다른 종류의 인간이셨다면, 계명에 순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만일 성경이 말하는 대로 예수께서 우리와 같은 인성을 취하신 분이라면 계명에 대한 완전한 순종은 가능해 진다.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 예수께서 사용하셨던 동일한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하나님의 참 백성들도 계명을 온전히 지킬 수 있다!

 이 복음에서는 지혜의 열매가 거두어 진다. 성경에 나오는 여러 가지 지혜들이 우리의 구원을 결정짓는 기준은 아니지만 우리가 미처 상상하지 못한 유익을 가져다 줄 수 있다. 한가지 예를 들어보도록 하자. 어떤 그리스도인이 마약과 술에 취해 사는 거리의 노숙자를 집으로 데려와서 깨끗하게 씻어주고, 담배와 술과 마약을 끊게 하고 성경이 지시하는 여러 가지 건강의 원칙들을 가르쳐 주었다. 그는 그러한 가르침들을 잘 따랐다. 성경에 나오는 건강원칙들을 잘 따를 경우,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평균 7~9년 더 오래 산다는 사실이 과학적으로 입증된 것처럼 그 사람은 장수를 즐기다가 죽었다. 그러나 그가 후에 악인들의 부활에 일어나서 유황불의 심판을 받았다면 성경에 나오는 건강 원칙들이 그 사람의 구원에 무슨 유익을 주었는가? 건강 원칙들은 단지 그 사람을 7~9년 동안 더 오래 살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을 뿐이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건강의 원칙들은 그러한 목적으로 주어진 하나님의 지혜가 아니다. 건강에 대한 여러 가지 교훈과 원칙들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이유는 우리의 마음과 몸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어서 서로가 밀접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건강한 몸에 건전한 정신과 마음이 깃든다는 말은 성경의 진리와 일치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역사는 우리의 마음과 생각 속에서 이루어진다. 바로 그 곳에서 선과 악의 대 쟁투가 이루어진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성경 속에 건강에 대한 여러 가지 지혜를 담아 두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건강한 라이프 스타일을 통하여 조성된 우리의 맑고 깨끗한 정신과 마음을 통해서 우리의 영적 전쟁을 돕기 원하신다.

 이 복음에서는 마귀의 온갖 잡음들이 차단되는 결과가 얻어진다. 성경은 우리의 감각 기관을 잘 지킬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마귀, 두 존재가 모두 우리의 오관 즉, 시각, 청각, 후각, 미각, 그리고 촉각을 통하여 접근해 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다섯 가지 감각을 잘 지키면 마귀의 접근을 꽤 성공적으로 제어할 수 있다. 진지한 그리스도인이라면 각종 쓰레기를 쏟아내는 텔레비전과 각종 미디어를 조심스럽게 절제해야만 한다. 첫 번째 복음은 예수를 믿는 한 다른 것들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말한다. 첫 번째 복음을 설교하는 목사들은 흔히 그러한 것들은 구원과 상관없는 일들이라는 말로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의 지혜와 경고들을 무시한다.

 지금까지 제1부와 2부를 읽어온 독자 여러분께 질문하고자 한다. 여러분은 어떤 복음을 지금까지 믿어 왔는가? 또한 여러분들은 지금부터 어떤 복음을 따라가고자 하는가? 어떤 것을 선택하든지 그것은 여러분의 몫이고, 그 결과 또한 여러분 스스로가 받게 될 것이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기사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께서 독자 여러분의 마음 속에 진리에 대한 확신을 깊이 새겨주시길 기도 드리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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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 죄란 무엇인가? 1

 "죄란 무엇일까? 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죄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정확히 알아야 하는가?

 
 
 사람들은 아프면 의사를 찾아간다. 의사에게 간다는 것은 무언가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가는 것이다. 어딘가에 무슨 문제가 있을지 모르기 때문에 가는 것이다. 그 때 의사가 해 줄 수 있는 제일 중요한 일은, 그 사람에게 무슨 병이 있는지 알아내는 것이다. 그 다음에야 치료가 가능하다. 복음도 마찬가지이다. 죄를 무엇이라고 진단하고 정의하는 데에 따라서 우리의 복음과 신앙과 믿는 바가 달라진다. 제 1부에서 언급했던 두 가지 다른 종류의 복음은 죄에 대한 다른 정의와 이해 때문에 생기게 된 것이다. 죄에 대한 두 가지 정의에 대하여 연구해 보자.

1)  죄의 정의
A. 원죄설 - 죄는 본성이다 라는 정의
 첫 번째 죄에 대한 정의는 원죄설이다. 이것은 우리의 본성이 바로 죄라는 가르침이다. 다시 말해서, 이 정의는 우리가 태어날 때에 이미 우리는 잃어버린바 되고 정죄 받은 상태에서 태어난다고 믿는 것이다. 곧, 우리는 지옥으로 갈 본성으로 태어났다고 믿는 것이다.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느냐에 따라서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 잘못된 본성이 있는 그 자체가 죄라고 믿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원죄설의 정의이다. 그리고 이것이 거의 모든 개신교인들이 믿고 있고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B. 죄는 선택 - 죄는 우리의 선택이다 라는 정의
 첫 번째 원죄설의 정의는 우리는 잘못된 본성으로 태어났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연히 잘못된 행동을 한다 라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죄의 정의는 다르다. 우리가 잘못된 본성을 유전적으로 받았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멸망 당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는 인간들이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 말하기를, 하나님, 나는 내 뜻대로 하겠습니다. 나는 주님 뜻대로 하기를 원하지 않아요! 라고 말하고, 하나님의 뜻(계명)을 어기고 자기 뜻대로 한다면, 그것이 자기가 한 선택이고, 그것이 죄인 것이다. 이것이 두 번째 죄의 정의인 죄는 선택이라는 것이다.

2) 선택으로서의 죄
 
앞에서도 말했지만, 기독교내에 존재하는 두 가지 서로 다른 종류의 복음은 죄에 대한 두 가지 정의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선택으로서의 죄를 더 알기 쉽게 설명하기 위하여, 한 예증을 들어보자. 고양이는 사람에게 와서 털을 비비며 아주 좋아한다. 그런데 주인을 따라 문을 나설 때 갑자기 이상한 성격을 나타낸다. 수염과 꼬리를 바짝 세우고 날카로운 동물로 변한다. 왜 그러는가? 고양이는 본성적으로 자기보다 큰 것이 오면 무조건 도망가고 자기보다 작은 것은 무조건 잡기 때문에, 밖을 나가면 본성대로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밖에서 작은 생쥐를 잡으면 어떻게 하는지 아는가? 그는 생쥐를 금방 죽이지 않고 놓아 주었다 다시 잡았다 하는 반복을 계속한다. 왜냐하면 그는 쥐를 잡는 것에 재미를 느끼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물 가운데 하나이다. 그런데 이 창조물은 다른 창조물(생쥐)에게 죽기까지 형벌을 가하는 것이다. 이것이 죄악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하나가 아니다. 우리가 새 땅에 가면 그런 것은 없을 것이다.

 고양이가 다시 주인에게 올 때 어떻게 하는가? 콧수염을 바싹 세우고 자기가 생쥐를 잡은 것에 대해 주인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온다. 그때 주인은 어떻게 하는가? 만일 당신이 주인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고양이를 정죄할 것인가? 아니면 죄가 없는 것인가 라고 갈등할 것인가? 아마 여러분은 고양이를 쓰다듬으면서 잘했다고 말하며 다시 그 살인자를 집으로 들여 보낼 것이다.

 자, 여기서 악한 것과 죄에 대한 책임의 차이를 알아보자. 이 고양이가 한 일은 악한 짓이다. 그러나 그것을 가지고 우리는 너는 죄의 책임이 있다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왜 그런가? 이 고양이의 작은 두뇌 속에는 양심이라는 것이 없고, 옳고 그름의 차이 또한 없다. 그는 그저 타락한 본성만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타락한 본성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본성이 말하는 것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태어났을 때, 우리에게 타락된 본성은 악하게 있지만, 아직 죄의 책임은 없다. 죄를 짓기로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죄는 스스로가 짓기로 선택해야 죄가 된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고 있는 올바른 죄의 정의인 것이다.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 (약 4:17).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 아들은 아비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할 것이요 아비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하리니 의인의 의도 자기에게로 돌아 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겔 18:20).

3)  결과와 죄의 형벌로서의 죽음
 
창세기 2:17은 하나님께서 창조 받은 인간들에게 처음 주시는 말씀이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그들이 선악과를 먹었는가? 그런데, 그들이 그 날 바로 죽었는가?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열매를 먹으면 죽을 것이라고 말씀 하셨는데, 왜 아담의 사형 집행이 즉각 시행되지 않았을까? 그 이유는 대속의 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의 독생자께서 사람의 죄를 몸소 지시고 타락한 인류를 위하여 죄값을 지불하기를 자원하셨기 때문이었다.

 계 13:8을 읽어 보도록 하자. 이 절의 전단에 중점을 두겠다.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영어 성경의 번역을 보면, 창세 전부터 죽음을 당해 오신 어린양이라고 말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창세 이후로 4000년이 지난 이후에 돌아가시지 않았는가? 이것은 무슨 뜻인가? 이것은 예수님께서 인간이 타락할 경우를 대비해 창세 전부터 구속의 계획을 마련해 놓으신 것을 말한다.

 아담과 하와가 사단의 유혹을 받아 들이고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고 하신 바로 그 일을 했을 때,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앞에 서서 말씀하시기를, 나로 그 형벌을 받게 해 주소서. 제가 사람의 자리에 서겠습니다. 사람에게 기회를 한번 더 주소서 라고 하셨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살 수 있는 이유는,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즉시로 예수님께서 중재자로 서셨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인간의 죄를 대속하시려면 고통을 당해야 할 것을 아셨지만 인간을 대신하기로 하셨다. 아담이 죄를 범하자마자 하나님의 아들은 그가 갈보리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실 때 가지셨던 동일한 능력으로 범죄자에게 선고된 운명을 막기 위하여, 당신의 생명을 인간의 구원을 위한 담보물로 제시하셨다. 그러므로 죄의 정의로서의 원죄설은 성경의 구속의 계획과 맞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와 에덴 동산에서 어떻게 하셨는지 에도 불구하고, 많은 기독교인들은 여전히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아담의 죄의 대가를 지불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아담이 죄를 범했기 때문에 우리는 멸망 당하고 정죄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무언가를 갚으셨을 때는, 그것은 완전히 갚으신 것이다. 인간은 더 이상 갚을 것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거절했을 때에 그들은 멸망 당할 수 있었다. 그들은 십자가를 지나쳐야 지옥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아이들은 그들의 길에 주님의 십자가를 가지고 태어난다고 할 수 있다. 어린 아기들은 지옥으로 미끄러지는 길 위에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지옥으로 가기 위해서는 십자가를 짓밟고 지나가야 되는 것이다.

4)  죄에 대한 예수님의 정의
 
죄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말씀 하시는 지에 대해 한번 보자. 요한복음 9장 1~3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길을 걸어가시는데, 눈이 먼 맹인을 발견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때에 제자들이 질문을 했다. 2절,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그들은 이 사람이 죄인입니까? 라고 묻지 않았다. 그들은 그의 눈을 좀 봐, 그는 자기의 죄 때문에 심판 받은 것이 아니냐? 라고 했다. 그들이 그렇게 말한 뜻은, 그는 그렇게 태어났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제자들이 알기 원하는 것은, 그의 부모들이 뭔가 잘못을 한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부모들의 죄 때문에 그는 정죄를 받는 것입니까? 아니면, 그가 엄마 뱃속에서 죄를 지은 것입니까? 라고 묻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그들의 질문이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예수님께서는, 눈이 먼 사실과 죄와 혼동하지 말아라. 눈이 먼 것은 악한 것에 속하지만은, 그러나 그것은 죄와 동일한 것은 아니다 라고 하시며, 계속 말씀하시기를 지금은 마귀의 역사만 볼 수 있지만, 너희는 조금 있으면 하나님의 역사를 보게 될 것이다 라고 하셨다. 만약 마귀가 역사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면 아무나 다 태어나면서 장님이 될 수 있다. 예수님께서 그가 소경 됨을 어떻게 취급하셨는가? 내가 너의 눈을 용서한다 라고 하셨는가? 절대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그분은 그의 눈을 치료해 주셨다. 그의 눈을 다시 재 창조해주셨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우리의 죄악들을 취급하시는 것이다.

 

4부 - 죄란 무엇인가? 2

 죄란 무엇인가?2편에서는 죄와 죄책감, 그리고 유혹과 죄의 차이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한다. 자칫 무거워 보이는 신학적인 논제 같지만, 진실된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반드시 알아야 할 주제이고, 또 이것에 대해 확실한 이해가 생길 때 승리하는 신앙생활이 가능하게 되기 때문에 열심히 함께 연구하여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1). 죄악과 죄책감
 
아담과 하와가 이 세상에 가지고 온 죄에는 두 가지 문제가 따른다. 한 가지는 죄악이고 또 다른 한 가지는 죄책감이다. 악은 모든 인간의 본성과 동물들에게 있고, 또 이로 인해 세상의 모든 문제가 야기된다. 또한 다른 문제는 죄책감이다. 우리는 죄의 책임을 지고 있는 정죄 받은 죄인이다. 그러면 주님께서 이 두 가지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하시는가? 그분은 우리의 죄책감을 용서 하신다. 내가 너희의 죄책감을 대신 질 터이니 너희는 자유롭게 가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우리의 죄책감이 없어질 때, 우리에게 지옥이 없는 것이다. 우리에게 두 번째 죽음이라는 것이 없어질 것이다.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이 있을 것이다.

 우리의 죄악과 죗됨은 언제 없어지는 것일까? 우리의 본성 가운데 있는 죗된 본성과 죄악들은 없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예수님의 재림 때에야 없어질 것이다. 주님께서 어떻게 그것을 없애시는가? 주님께서 그것을 용서하시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다시 이 세상과 우리의 본성을 재창조 하심으로 없애시는 것이다. 요한 복음 9:41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바리새인들은 우리와 같은 본성을 가지고 태어났다. 그러나 예수께서 하신 말씀과 같이 여러분이 정말 모른다면, 정말 죄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죄를 알기 때문에 우리의 죄가 남아 있다. 빛은 우리의 죄악들을 깨닫게 하고, 이것이 우리의 죄책감으로 변하게 하는 것이다. 곧, 하나님의 빛의 지식이 우리에게 오면,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순종하기로 선택하지 않으면, 우리의 본성 가운데 있는 죄악이 죄책감이 되는 것이다.

È 이 문제에 있어서 성경에서 분명한 말씀을 찾아보자.
4 야고보서 4장 17절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 우리가 여기에 있는 차이를 이해해야 된다. 우리가 옳은 것과 그른 것을 알아야 죄가 성립이 되는 것이다. 알면서도 올바른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죄이다. 이럴 때에 그것이 죄가 되는 것이다. 고양이나 어린 아기한테는 죄가 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죄가 될 수 없는 것이다.

4 야고보서 1장 14절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여기에 자기 욕심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 맞지 않는 것이다라는 뜻이다. 또한 우리의 죗된 본성과 그 힘에 의하여 우리가 유혹을 받았다고 말하는 것이다.

2). 유혹과 죄의 차이
1. 유혹
 유혹에는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밖에서 무엇인가 우리를 자극하는 요소가 필요하다. 보는 것, 혹은 듣는 것 등. 그래서 우리의 내적인 것이 그것에 유혹을 받아서 끌려야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내적으로 끌리는 것이 없으면 거기에는 유혹이 있을 수가 없다. 바로 이것이 야고보서 1:14절에서 읽은 것이다. 우리가 그것에 유혹을 받고 끌려야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끌리는 자체가 죄라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지 않겠다고 결정을 할지라도 우리가 그런 자극에 끌리는 자체가 죄라고 생각한다. 거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믿기를 이 죗된 자체가 죄라고 생각을 하고 있다. 물론 우리의 본성이 죄 되다. 그러나 성경은 그 본성 자체가 죄라고 말하지 않는다. 우리가 그렇게 끌리는 것은 유혹이라 말한다.

2. 죄
 그렇다면 죄란 무엇인가? 죄는 유혹 뒤에 온다. 죄가 되기 위해서는 필요한 단계가 있다. 곧, 유혹을 계속 품어야 죄가 되는 것이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 이 성경절을 보면 죄가 성립되는 데는 단계가 있는 것을 알게 된다.

93 예를 하나 들어보자. 험담하는 죄는 악한 생각을 품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또한 성경에서 말하는 궤휼은 온갖 형태의 불순을 포함한다. 불순한 생각이 용납되면 부정한 욕망을 품게 되고, 그 욕망으로 마음이 더럽혀지면 그 정직성도 손상된다. 불순한 생각은 죗된 것이다. 그것은 더럽혀지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스도 교회에서는 이것을 죄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 불순한 생각이 죄가 되기 위해서는 한 가지 일을 더 해야 한다. 그것을 품어야 된다. 그것을 우리의 생각으로 품어야 죄가 된다는 것이다.

 야고보서 1장 14, 15절은 죄가 되는 단계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14절,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라는 말씀처럼, 사람은 처음에 유혹을 받고, 그 욕심을 계속 품어 죄를 짓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유혹을 죄가 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죗됨과 죄의 책임에는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보통 그리스도인들은 첫 번째 단계(끌리는 단계)가 죄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은 3번째 단계를 죄라고 말한다. 이렇듯 죄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어떻게 대답 하느냐에 따라서, 두 가지 다른 복음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1편에서 살펴보았듯이, 첫 번째 죄의 대한 정의(원죄설)는, 우리가 숨을 쉬는 것처럼 우리의 본성 자체가 죄라고 말한다. 그렇다고 하면, 우리는 우리의 본성과 늘 함께 있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것은 할 수 없고 그냥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사람이 된다. 그래서 그런 정의를 가진 사람에게 복음은 항상 용서만해야 한다.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항상 용서만 받고 살아야 된다는 말이다. 이것이 바로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믿고 있는, 성경과 맞지 않는 교리이다.  그러나 죄가 우리의 마음에 선택이라면 우리는 예수님을 거절할 수도 있고, 또 그분을 거절함으로 인해 치료 받을 수도 없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을 우리마음 가운데 모시기로 선택한다면 우리는 용서도 받고 치료함도 받을 수 있다.

5부 -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 1

 지금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태어나심과 그분의 삶에 대한 오해와 무지로 뒤덮여 있다. 서점이나 극장가에는 예수님의 삶에 대하여 논하는 책과 영화가 나와서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우리는 돈을 위하여 만들어진 책과 영화 속에서 그리스도의 태어나심과 삶에 대한 위대한 진리를 결코 발견할 수 없다. 그러한 것들은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온갖 오해와 편견을 갖도록 이끌어 갈 뿐이다.

 지금 기독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대한 오해와 편견으로 둘로 나뉘어져 있다. 한 쪽에는 우리와 같은 육체를 취하셔서 모든 그리스도인의 모본으로서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있고, 다른 한 쪽에는 우리와 전혀 다른 육체를 취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라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있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독자 여러분은 어떤 그리스도를 믿고 있으며, 또한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취하고 태어나신 본성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가? 이 문제는 구원을 논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복음의 연결 고리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본성(인성)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우리가 믿고 따라가는 복음과 삶이 완전히 달라지게 된다. 이제부터 1,2편에 걸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취하신 육체(본성)에 대한 비밀을 살펴보도록 하자.

1)  대속과 모본
 
먼저 예수님의 대속과 모본에 대하여 생각해 보기로 하자.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는 구세주로서의 예수님에 대해서만 많이 배워왔다. 그러나 성경을 잘 연구해 보면, 예수님의 모본은 대속 못지않게 중요함을 알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서도 오셨지만, 또한 우리의 모본이 되시기 위하여도 오셨다. 곧,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어떻게 생활해야 하는지 모본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이다.

 만일, 예수께서 대속만을 위해서 이 땅에 구세주로서만 오셨다면, 십자가에서 직접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돌아가시지, 왜 이 땅에 아기로 태어나셔서 33년 동안 세상에 사시면서 우리의 모본 되는 생애를 사셨을까? 그리고 왜 내가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었으니 너희도 이기라고 하셨을까? 그리고 육체로 계실 때에 심한 통곡과 기도로 하나님께 간구하는 모습을 보이시며 우리로 그분의 모본을 따라 가게 하셨을까?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오셨지만, 그분이 이 땅에 오신 그에 못지 않은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지킬 수 없는 법을 만드셨다는 사단의 거짓을 깨뜨리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것이다. 그분께서는 인성을 취하시고 이 땅에 오셔서 순종의 생애를 사심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지킬 수 없는 법을 만들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증명 하셨다. 또한 인간도 하나님의 법을 완전하게 지키는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 주셨다. 그러기에 스스로 우리의 본성을 쓰시고 인생을 체험하셨다.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 (히 2:17~18).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그들의 구세주로 받아들이고, 그분의 은혜와 능력으로 거룩한 품성에 참여하는 자들은, 계명이 가리키는 모든 교훈에 순종하는 생애를 사셨던 그리스도의 모본대로 살 수 있게 된다.

2)  예수님의 본성
1. 우리와 같은 본성을 가지심
 예수님께서 성육신 하실 때 어떤 본성을 취하셨을까? 예수께서는 우리와 같이 시험 받으실 수 있는 타락한 인간의 본성을 취하셨다. 성경절들을 찾으면서 함께 연구해 보자.

È 로마서 8: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È 빌립보서 2: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위의 성경절들에서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오셨다 라는 뜻과 사람의 모양으로라는 뜻이 도대체 무슨 뜻인가? 그것은 실제적으로 예수님께서 우리의 죗된 육신의 모양을 가지고 오셨다는 말이다. 죄인의 육신의 모양, 우리 인간들과 똑같이 시험을 받으시는 본성을 가지고 오셨다라는 말이다.

È 히브리서 2:11;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È 히브리서 2:16;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위의 성경절들은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본성을 쓰신 것을 말해주고 있는데, 16절을 킹 제임스 성경의 표현으로 보면 아주 그 의미가 확실하다.

 For verily he took not on him the nature of angels; but he took on him the seed of Abraham.:
이 뜻은 예수께서는 천사의 본성을 취하신 것이 아니요, 아브라함의 본성을 취하셨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우리 인간과 똑 같은 본성, 곧 아브라함과 같은 인간의 본성을 가지시고 이 땅에 오신 것이다.
 
2. 같은 본성을 가지고 우리의 모본이 되심
 아담이 에덴에서 죄를 짓지 않았을 때에라도 하나님의 아들이 인성을 취하는 것은 거의 무한한 굴욕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인류가 4천 년간 죄로 말미암아 연약하여진 때에 인성을 취하셨다. 그분께서는 아담의 모든 자녀들과 같이 유전 법칙이 끼쳐온 결과를 받으셨다. 이러한 유전을 지니시고, 또 우리와 같은 슬픔과 시험을 당하시면서 우리에게 죄 없는 생애의 모본을 주시기 위하여 오셨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믿기를 예수님은 우리 인간의 유전법칙에서 제외되었다고 믿고 있다. 또한 그분은 아담이 죄를 짓기 전의 인성을 취하셨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에는 그런 말씀이 전혀 없다.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에게서 탄생하셨다. 마리아는 자기 조상의 유전을 받았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마리아의 유전법칙을 받고 이 땅에 오셨다. 주님께서는 우리와 똑같은 유전을 받으시고 태어나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모든 인간과 같이 유혹을 받으셨지만, 어떤 하나의 순결하지 않고 고상하지 않은 행동을 하게 하는 유혹에 굴복하신 적이 전혀 없으셨다.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타락된 우리의 본성의 욕구를 물리칠 수 없다. 사단은 이 통로를 통하여 우리에게 시험을 가져올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단이 각 사람에게 와서 인간의 선천적인 약점을 이용하고,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모든 사람을 시험과 유혹에 빠뜨리려고 할 것을 아셨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사람이 걸어가야 할 땅을 먼저 통과하셔서 우리도 이길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셨다. 그분은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똑 같은 본성을 지니시고 그 길을 먼저 걸어 가셨다. 그리고 우리도 예수님처럼 승리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하여 주셨다. 예수께서는내 뜻을 행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시며, 온전히 하나님 아버지의 뜻만을 순종하는 생애를 사셨다. 그리하여 우리도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승리의 생애를 살 수 있다는 모본을 보여 주신 것이다.

6부 -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 2

1)  자신을 비우신 그리스도
 
성경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비우셨다고 되어 있다.

È 빌립보서 2: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여기서 우리는 첫 번째 문단을 이해해야 한다. 이 원어는 아주 단순하게 기록이 되어 있다. 예수님께서 자기의 형상을 비우사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 주님께서 자기의 어떤 형상을 비우셨는가?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어떠한 부분을 비우셨는가? 함께 연구하여 보자.

c 예수께서 비우신 속성들
1. 전능
È 요한복음 5:30 - 내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예수님께서는 구약 성경에 여호와 하나님과 동등 되게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이상하게 들려질 수 밖에 없다. 예수님께서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라고 하시기 때문이다. 또한 자기의 뜻에 따라 행하지 않고 자기 아버지의 뜻에 따라 행하신다고 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이 세상에 사시며, 이적을 베푸실 때 조차도 당신이 가지신 전능하신 능력에 의뢰하지 않으셨다. 예수께서는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노라고 하시며, 그분의 능력을 버리시고 하나님 아버지의 능력만을 의지하셨다. 주님께서는 자신이 우리와 똑같은 입장에 처한 삶을 보여주시기 위해 자기의 능력을 사용하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을 의뢰하셨다. 그러므로 우리의 능력은 하나님 밖에 없다.

2. 기억
È 누가복음 2:52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어떻게 그 놀라운 하나님께서 지혜가 자라갈 수 있는가? 예수께서는 어린 아이로 이 세상에 태어나셨다. 엄마 품에 안기어 양육 받을 수 밖에 없는 무력한 아기로 태어나셔서 점점 자라나시며 지혜를 터득해 가셨다. 그분은 친히 이스라엘을 위하여 모세에게 말씀하셨던 바로 그 말씀을 이제는 그의 어머니의 무릎에 앉아서 배우셨다. 그분은 우리와 같은 방식으로 지식을 얻으셨다. 그의 부모들이 예수를 12세 때 처음으로 예루살렘 성전으로 데려갔을 때, 그는 처음으로 성전 제사에서 어린양이 희생되는 것을 보았고, 그때 그는 자신이 이 세상의 구세주로서 메시아로 이 땅에 오신 것을 깨달으셨다. 성령께서 그분의 사명의 신비를 깨닫게 해주셨다. 예수께서 당신 자신이 어떤 분인지 어떻게 이해했는가? 당신의 사업의 대해서 어떻게 이해했는가? 그것은 당신의 기억을 통해서 이해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고 그것을 믿는 믿음으로 이해하신 것이다.

3. 선견 (미리 아심)
È 마가복음 13:32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어떻게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짜를 모르실 수가 있으신가? 이런 일들이 올 것을 예언으로 말씀하셨는데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것만 알았고 그 이상은 모르셨다. 예수께서는 늘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계획 속에서만 행하셨다. 예수께서 지상에 오시기 전에 그 모든 내용의 완전한 계획이 그 앞에 제시되어 있었겠지만, 그러나 예수께서는 사람들 가운데서 행하실 때에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 한걸음 한걸음씩 인도함을 받았다.  십자가 상에서 인간의 모든 죄가 예수님을 눌러 그 고통으로 죽어가실 때, 믿음과 느낌 사이에서 갈등하시며, 예수님께서는 아마 그의 아버지께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이다. 아버지께서 저를 여기에 보내셨기 때문에 제가 여기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지금 아버지의 얼굴을 볼 수가 없습니다. 세상의 죄가 내 위에 있습니다. 내가 아버지의 얼굴을 다시 볼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뜻이 무엇이든지 간에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 지리이다. 주님께서는 우리 인간들을 사랑하셨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할 마음을 가지고 계셨다. 이렇듯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선견성을 비우시고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만 순종하셨으며,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서 존재 하셨다.

4. 무소부재 (동시에 어느 곳에나 존재하심)
 
그리스도께서는 인성 때문에 방해가 되어 모든 장소마다 친히 계실 수 없었다. 그래서 예수께서 승천하시어 아버지께로 가셔서 지상에 성령을 보내시는 것이 인간들에게 유익한 일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성령님을 통하여 각 사람의 마음 속에 거하신다.

5. 영광
È 이사야 53:2 -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그는 그의 영광과 위엄을 다 버리셨다. 그분은 하나님이셨지만 잠시 동안 하나님의 영광의 형상을 포기하셨다. 성경 다른 곳에는 잠깐 천사보다 못하게 되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히 2:7~9 참조)

2)  죄지은 사람이 가지게 되는 죄에 대한 강한 경향을 갖지 않으심
 
그런데 예수님의 본성을 연구하다가 극단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부분이 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본성을 가지셨다는 것을 강조하다가 그분을 사람들 앞에 죄의 경향을 가진 한 사람으로 제시하게 되는 것이다. 그분은 제 2의 아담이시다. 그분은 죄의 유혹에 굴복하실 수 있는 가능성이 있으셨지만, 유혹에 한번도 넘어가거나 시험에 굴복하시지 않았고, 죄를 짓지 않으셨다. 그리고 그분은 죄를 한번도 지으신 적이 없었기 때문에, 죄지은 사람이 가지는 죄로 기울어지는 경향이 없으셨다. 죄 없는 경향이란 무엇인가?

 습관은 우리가 계속 반복함으로 생기는 것이다. 죄의 경향이란, 죄로 기울어지는 경향, 타락한 경향에 따라 우리가 선택을 하고, 그런 선택을 함으로 만들어진 습관을 말한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인성을 쓰셨을지라도, 어떤 죄의 습관을 가지시지 않으셨다. 그러나 죄의 유혹들을 인식하셨고, 그러므로 우리의 감정과 연약함을 이해하시고 우리를 도우시는 중보자가 되실 수 있는 것이다. 히브리서 4:15 -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3)  예수님과 우리의 차이
 
예수님과 우리와의 차이는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예수님의 탄생이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탄생하셨다. 그러나 우리는 태어날 때에 죄로 기울어지는 경향, 곧 타락한 경향을 타고 났다. 그래서 죄의 습관이 생겼다. 여기에 우리와 예수님과의 차이가 있다. 그러나 우리도 예수님처럼 성령으로 거듭날 수 있다. 거듭나게 되면, 성령께서 우리의 생애 가운데 있는 타락한 습관들을 변화시키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인간 어머니와 성령으로 태어나셨다. 성령께서 그의 아버지로서 잉태되신 것이다. 그래서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타락한 본성을 주관하고 계셨다. 그래서 그분은 죄악적인 습관을 배양하지 않으셨다. 그리스도와 우리와 단 한가지 유일한 차이는 바로 우리가 성령으로 태어나고, 성령을 받는 시간의 차이가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태어나셨을 때부터 성령을 받으셨지만, 그러나 우리는 그 성령을 거듭날 때 받는 것이다. 바로 우리가 그 거듭남을 경험할 때, 예수님께서 승리하신 것같이 우리도 똑같이 승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예수께서 우리보다 더한 특권을 가지고 사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받으셨던 능력을 우리도 또한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기도와 말씀을 통해서 매일 성령을 받으셨다. 예수님께서는 신성을 사용하신 것이 아니라 거룩한 본성이신 성령을 매일 받으신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죄를 이기신 것이고 하나님과 같은 성품을 나타내 보이신 것이다.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우리도 똑같은 성령을 우리의 생애 가운데도 받을 수 있다. 그리하여 우리도 주와 같은 성품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와 끊임없는 교통을 하셨다. 이와 같이 우리도 하늘 아버지와 계속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 우리 속에는 의가 없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어야 의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구원의 경험의 중심이다. 예수께서는 우리와 같은 본성을 쓰시고, 매 순간 하나님과 연결되는 성령 충만한 삶을 사시므로 죄를 승리하시고 우리의 모본이 되셨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님께서 사셨던 것처럼 살면, 죄를 승리하는 생애를 살 수 있는 것이다!

7부 - 그리스도인의 완전과 죄를 이기는 길 1

 7부에서는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대하여 함께 연구해 보기로 하자. 사람들은 완전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두려워한다. 왜냐하면 완전하면, 율법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극단적인 교리나 완전주의자들이 부르짖는 어떤 이론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그러나 우리가 죄가 무엇인가하는 죄의 정의를 이해하고 나면, 죄 없는 상태가 무엇이며, 성경과 복음이 말하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완전이 무엇이며, 그런 일이 언제 생길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1)  죗된 본성인가? 죗된 품성인가?
 
죄란 무엇인가? 앞에서 공부한 기사들을 상기하면서 다시 생각해 보자. 만일 우리가 유전적으로 받은 본성이 죄라면, 곧 죗된 본성이 죄라면, 죄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은 죄 없는 본성이 되어야 하므로, 죄를 승리하는 생활이 전혀 불가능하다. 그러면 성경이 말하고 있는 복음도 틀린 것이 되고 만다. 죗된 본성, 곧 우리의 타락한 본성은 언제 없어지는가? 그것은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우리가 새로운 불멸의 몸으로 변하고 우리의 본성이 바뀔 때에 없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죄가 죗된 품성이라고 하면, 그리고 죄는 우리의 선택이라고 하면, 그것은 우리가 매일 선택하는 선택이 되므로, 죄 없는 상태, 죄를 승리하는 품성이 이루어지는 것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재림하기 이전에 우리 생애 가운데서 죄를 이기는 경험을 가지는 것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올바른 죄의 정의는, 죄는 죗된 품성이라는 것을 우리는 이해해야 된다. 죄는 우리가 선택해야 할 관건이다. 유전으로 받은, 타고난, 그리고 존재하는 죗된 본성 자체가 죄가 아닌 것이다.

2) 완전의 4가지 정의
 
흔히 기독교에서 말하는 완전이라는 단어에는 4가지 다른 정의들이 있다. 그래서 완전에 대해서 많이 혼돈이 되는 것이다.

1. 절대 완전: 절대로 실수도 없고, 잘못 판단도 하지 않는 것;
 우리 가운데 누가 이러한 완전에 합당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이런 완전을 가질 수 없다. 또한 하늘의 천사들도 이러한 완전을 가질 수 없다. 절대 완전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안에만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첫 번째 정의는 우리에게 적용될 수 가 없다.

2. 본성의 완전: (죄 없는 본성);
 우리는 태어날 때 죗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난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우리가 받는 것, 그것이 죄 없는 본성, 완전한 본성이다. 여기에는 인간의 선택이 포함되지 않는다. 우리가 어떻게 태어나는지에 대한 선택이 없다. 또한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그분께서 우리에게 어떤 본성을 주실지 우리가 선택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2번째 정의, 완전한 본성은 우리에게 적용되지 않는다.

3. 품성의 굴복;
 우리가 우리 자신을 예수님께 바칠 때, 얼마큼이나 바치는가? 100% 완전히 주님께 굴복해야 된다. 이것이 완전한 굴복이다. 우리가 깨달은 만큼, 그리고 우리가 아는 만큼 완전히 드리고 바쳐야 한다. 하늘에 갈 수 있는 조건은 품성의 온전한 굴복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한 가지 질문을 하신다. 너희는 온 마음을 다하여 나를 사랑하느냐? 만일, 당신이 정직하게 네라고 답변할 수 있으면, 당신은 지금 영생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당신이 계속 네라고 답변할 수 있는 한, 당신의 영생을 계속 보유할 수 있다.

4. 품성의 장성함;
 만일 우리가 품성의 완전한 굴복을 계속하면, 그것은 우리를 품성의 장성함으로 인도하게 될 것이다. 완전함이란, 죄를 선택하지 않는 것, 죄 없는 선택을 말한다. 예수님을 우리의 구세주로 받아들이는 것은 죄 없는 선택이다. 이것은 우리의 성품의 굴복이고, 그것은 우리를 품성의 장성함으로 이끈다. 그래서 이 과정에 있어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의 선택이 포함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완전의 정의에 대해서 우리에게 적용되는 정의들은, 3번째와 4번째 정의이다.

3)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품성의 완전함
1. 유다서 24 - 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너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즐거움으로 서게 하실 자;  하나님께서 우리를 넘어지지 않게 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 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이것은 실제적인 하나님의 약속이기도 하다.

2. 베드로 후서 2:9 -
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시고; 우리가 유혹에서 건짐을 받으면 유혹에 넘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유혹에서 구원해 주실 수 있는 분이시다.

3. 고린도 전서 10:13 -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하나님께서 얼마나 많은 시험에서 우리에게 피할 길을 주시는가? 모든 시험에서이다. 그리고 모든 시험을 당할 즈음이다. 우리가 매번 시험을 당할 때마다 피할 길을 찾는 것이 불가능한 것인가? 어떤 죄들은 죄를 짓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는 것들인가? 그러면 죄가 하나님보다 더 강하다는 것인가?

4) 시험을 이기는 방법과 우리의 선택
 
성경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시험을 당할 때에는 거기에 반드시 피할 길이 있다고 하셨다. 우리가 기도와 말씀으로 주님께 나아가는 한, 죄 짓는 것은 힘들다. 시험을 이기는 방법을 살펴보자.

1. 기도; 시험과 유혹을 이기는 방법에는 기도가 제일이다. 기도는 응급시에만 하는 것이 아니고, 방어하기 위해서도 해야 한다. 방어적인 기도는 유혹이 오기 전에 먼저 기도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유혹이 올 때까지 기도하는 것이다. 하루에도 여러 차례 그 죄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을 주장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에 그 유혹이 올 때, 하나님께서 우리가 이길 수 있도록 천사를 보내 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방어적인 기도를 미리 하는 것이 바로 유혹을 피할 수 있는 길이다.

2. 성경을 외움; 마귀가 우리의 마음을 잘못된 길로 끌어 당기는 유혹을 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대신 선택해 주시지 않는다. 어떤 것들을 생각하고 어떤 길로 가야 할지는 우리가 선택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마귀를 이기신 방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기록하였으되 였다. 성경절을 외우는 것은 큰 유혹들을 이기는 좋은 방법이다. 성경절을 읽고 외우면, 하늘의 있는 것들에 우리의 마음이 거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우리의 마음을 영원한 곳에 두는 것이다.

3. 찬송; 또 다른 하나의 방법은 찬송이다. 예수님도 아마 찬송을 부르셨을 것이다. 기도와 성경을 외우는 것과 찬송하는 것이 시험과 유혹과 죄를 이기게 하고,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영원한 곳에 두게 하는 좋은 방법들이다. 하나님께서는 진정으로 죄를 미워하며 이런 모든 방법으로 죄를 승리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에게 올바른 선택을 하도록 힘과 능력을 주실 것이다.

8부 - 그리스도인의 완전과 죄를 이기는 길 2

2편에서는 죄의 승리와 완전한 품성에 대하여 더 공부해 보기로 한다.

 
 
1) 죄를 승리하는 길

 
우리가 올바르게 행할 힘은 없지만, 올바른 편을 선택할 수는 있다. 우리가 주님의 편을 선택할 때, 즉시로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를 도우셔서 우리로 범죄하지 않도록 도와 주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비록 우리의 의지로 올바른 편을 선택한다 해도, 유혹과 죄를 이기는 데는 하나님의 능력이 늘 필요한 것이다.

 우리의 두뇌는 어떤 패턴으로 움직인다. 우리의 눈과 귀로 어떤 자극이 들어오면, 우리의 두뇌 세포들은 서로 빨리빨리 연결을 한다. 그리고 우리 몸의 어떤 기관들에게 신호를 보낸다. 그래서 거기에는 연결하는 길(선)이 생기고, 그것이 습관이 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우리를 화나게 만들면, 그 때 자연적으로 우리 입에서 좋지 않은 어떤 말이 튀어나온다. 그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뇌에 다른 선, 새로운 길을 주셔야 된다. 그래야 우리의 눈과 귀에 어떤 충동이 들어 올 때, 옛날 길, 곧 옛날 패턴으로 가지 않고 새로운 길로 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 어떤 사람이 똑같은 것을 말해도, 악한 말을 해도, 그 새로운 패턴이 우리의 얼굴에 미소를 짓게 만드는 것이다. 이런 일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의 마음이 재창조를 받아 우리의 두뇌에 새로운 길, 새로운 패턴이 생겨야만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내 의지와 결심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오직 주님의 능력으로만 되는 것이다. 그것만이 유일하게 죄를 승리할 수 있는 길이다.

 죄를 이기려면, 먼저 우리의 생각을 깨끗하게 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의 죄가 우리 마음에 생기기 때문이다. 우리가 죄를 다룰 때는 먼저 우리에 생각과 마음을 다루어야 한다. 부패한 상상이나 생각들이 밀려올 때 우리는 주님의 은혜의 보좌 앞으로 가서 구해야 할 것이다. 좋지 않은 생각이나 상상이 우리를 끌어 내리려고 할 때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으로 빨리 뛰어가야 한다. 왜냐하면 원수 마귀가 우리를 멸망시키려고 하기 때문이다. 우리 생각이 거룩하고 순결하며 하늘에 대해 머물러 있도록 우리는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훈련해야 한다.

2)  죄의 승리에 대한 성경의 약속

1. 고린도전서 10:13 -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우리가 정말 피할 길을 찾는다면, 우리에게는 모든 피할 길이 있다고 성경은 말한다.

2. 고린도후서 10:5 -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성경은 모든 생각들까지 하나님께 복종할 수 있다고 말한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사실 때 그분의 생각이 어느 정도까지 하나님 아버지께 복종하였는가? 모든 생각이다. 그렇게 계속된 예수님의 전체의 생애의 결과가 무엇이었는가? 죄 없는 생애이다. 그분에게는 단 하나의 죄도 없었다. 모든 생각까지도 아버지께 굴복되었기 때문이다.

3. 갈라디아서 5:17 -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육체와 성령은 우리를 서로 다른 곳으로 끌어간다. 우리의 타락한 본성과 성령은 서로 동의하지 않는다. 16절에는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 육체의 욕심을 다른 말로 바꿀 수가 있다. 그것은 다른 말로 유혹이다. 이 유혹은 죄가 아니며, 다만 육체의 유혹이다. 여기서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는다라는 말을 다른 말로 바꿀 수 있는데, 그것은 죄이다. 다시 한번 이 말씀을 읽어보자. 너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죄를 짓지 않으리라 바로 이렇게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나는 성령 안에서 10년, 20년 동안 살아왔다. 그런데 나는 매일 성질을 부린다!라고 한다면, 이 성경 말씀은 옳지 않다.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매일 행하셨는가? 그분께서는 날마다 성령의 지도 가운데 사셨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죄를 지으셨는가? 성령은 죄를 짓지 않는다. 우리가 유일하게 죄를 짓는 길은 우리가 성령을 우리 마음 가운데 잠깐 비켜 계시게 하는 때이다. 우리가 죄를 범하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성령 안에서 걷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육체 속에서 행하고 있는 것이다.

4. 요한일서 3:2-9 -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이것은 성경 말씀 가운데서 가장 강력한 말씀이다. 하나님의 씨가 우리 마음 가운데 거하면, 우리는 죄를 범할 수가 없다라고 성경은 말한다. 이 말은 헬라 말로 현재분사형이다. 그러므로 6절을 보면,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현재 죄를 짓지 않고 있나니라는 뜻이 되며, 8절은, 현재 죄를 짓고 있는 자는 현재 마귀에게 속해 있는 자다라는 뜻이 된다. 그러므로 죄를 짓든지 순종하든지 둘 중에 하나이다. 우리가 성령 안에 있거나, 아니면 마귀의 지배 아래 있지, 그 중간은 없다.

우리가 지금 읽은 말씀은 너무나 불가능하게 들리고 우리의 실제 생활과 너무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이 약속들은 이루어 질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어떤 약속을 주실 때는 의미가 있기 때문에 주시는 것이다. 빛이 있으라 말씀하실 때 거기에 빛이 있었다. 네 죄가 용서 받았다라고 말씀하실 때 우리의 죄는 용서 받았다. 우리가 마음에 어떻게 느끼든지 간에 죄는 용서 받았다. 내 씨가 네 안에 있기 때문에 너는 죄를 범할 수 없다라고 말씀 하실 때, 그 말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당신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가?

3)  완전과 완전한 성품

완전이란 하나님의 뜻과 계명, 그리고 진리에 굴복된 그리스도인의 성품을 의미한다. 완전은 본성의 완전을 의미하지 않는다. 1편에서 언급한 완전의 정의를 다시 생각해 본다면, 품성의 장성함이란 완전한 성품을 말한다. 성품의 완전이란, 외부적으로 그 누구도 판단을 하거나 가릴 수 없다. 그러나 각 개인이 매 순간 올바른 편, 하나님의 길을 선택하고 순종하여 행할 때, 하나님의 능력으로 완전한 성품을 가질 수 있으며, 그 단계는 각 개인마다 다르다.

 그리스도인의 완전은 자신의 생애를 하나님께 완전히 굴복할 때인, 거듭나는 순간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처음 거듭나는 순간은 그저 그리스도와 함께 걷기를 시작하는 때이므로 성품의 성장이 장성한 수준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자신과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이해하는 수준까지만 굴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굴복할 당시에 알고 있는 모든 죄를 버리고, 알고 있는 하나님의 뜻과 진리에 대하여 완전히 순종하는 것을 의로 여겨 주신다. 이렇게 하나님께 굴복된 그리스도인의 성품은 완전한 것인데,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완전한 의로 여겨주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완전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장성한 성품으로서, 우리의 성품과 생애에 풍성한 열매를 맺어서 추수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해 나가는 과정이 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빛이 밝아지고,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지식이 증가됨에 따라서 우리의 굴복과 순종은 더욱 더 깊고 의미 있는 것으로 발전해 나가게 된다.

 앞에서 배운 대로, 만일 우리가 죄를 우리의 선택 여하에 달린 것으로 본다면, 우리는 죄를 짓지 않기로 선택할 수 있다는 사실 또한 믿어야 한다. 사단은 억지로 우리에게 악을 행하게 할 수는 없다. 우리의 마음이 그의 지배에 굴복하지 않는 한 그는 우리를 주관할 수가 없다. 우리의 의지가 먼저 승낙하고 우리의 믿음의 손이 그리스도를 놓기 전에 사단은 자기의 세력을 우리에게 행사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 속에 살아계시다면, 예수께서 범죄하지 않으신 것처럼, 우리도 죄짓기를 거절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마음 속에 들어오시면 죄가 나가고, 죄가 들어오면 그리스도께서 나가는 것이 단순한 원리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죄를 동시에 우리의 마음 보좌에 모실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나누인 마음을 용납하지 않으신다. 장성한 완전의 상태는 그리스도께서 전적으로 우리의 마음과 생애를 주장하심으로, 우리가 반역적인 선택을 하지 않는 것이다.

4)  예수님의 완전한 성품은 우리의 모본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사실 때에 우리와 같은 육체를 입으시고도 죄짓지 않는 생애를 사셨다. 그분께서는 생각까지라도 시험에 굴복하시지 않으셨다. 그리스도의 인성은 신성과 연합되었다. 그분은 늘 성령의 내재하심으로 사단과 투쟁할 준비가 되어 있었고 그러므로 죄를 승리 하셨다. 예수께서는 우리로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시기 위하여, 또 품성의 모본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다. 곧, 인간이 위로부터 능력을 받음으로써 완전한 생애를 살 수 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것이다. 그리스도의 생애는 타락한 인간이 신성과 연합하고 교제할 때에 어떻게 될 것인가를 보여 준다. 그리고 그분의 완전한 성품은 그분을 따르는 모든 자들도 그가 한 것처럼 하나님께 굴복할 때 소유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우리가 믿음으로 그분과 더불어 연합하고 있는 동안에는 죄는 우리를 주관하지 못할 것이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유혹은 아무런 힘도 갖고 있지 못하다. 사단은 모든 면에 우리들과 같이 시험을 받으셨지만 죄가 없으신 주님의 고결하신 성품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죄를 짓게 할 수 없다. 사람이 그리스도를 마음에 받아들일 때에는 그리스도의 생애를 살 수 있는 능력도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본이시다. 또한 우리와 똑같은 인성을 입으시고 경험을 하셨기 때문에 우리를 어떻게 도와주실지를 잘 알고 계신다. 예수님은 능력이 무한하신 분이시다. 그분이 죄짓는 것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실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참 믿음을 가진 사람이 아니다.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참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 당신은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능력을 힘입어 죄를 승리하는 생활을 살 수 있다는 것을 믿는가?

마치면서

이번 호에서 연구한 주제들이 혹시 너무 신학적이거나 어려운 것이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만일 당신이 진실된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고 베뢰아 사람처럼 성경을 열심히 탐구하는 사람이라면, 아마 이 연구가 영적인 면에서 큰 도움이 되었으리라고 믿는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며 나아가는 사람들의 삶에는 예수님과 똑같은 생애가 이루어질 수 있다. 곧, 죄를 승리하는 생활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과 기적으로 가능한 것이다. 이것은 나사로를 죽음가운데 살리신 것보다 더 큰 기적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죄를 승리하기 원하는 사람에게, 그리고 예수님의 모본을 따라 살기 원하는 사람에게 새로운 마음과 생각을 재창조해 주실 것이다! 곧 마음을 바꾸시는 기적을 행하실 것이다! 그리하여 죄를 승리하는 생활이 가능하도록 만들어 주실 것이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다. 이것이 바로 은혜의 복음의 기적인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것이 독자의 생애에 가능한 것이 되기를 기도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