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기도 응답 받기


기도는 친구에게처럼 하나님께 마음을 털어놓는 것이다. 하나님께 우리를 알리기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분을 알고 받아들일 수 있게 되고자 기도한다. 기도는 하나님을 우리에게로 내려오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그분에게로 올라가게 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겸손한 마음으로 드리는 사람의 기도를 마치 예수님 자신의 소원처럼 받아들이신다. 진실한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는 어떤 것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심령을 울린다. 비록 기도가 유창하게 표현되지 않았을지라도 그것이 마음의 중심으로부터 우러나왔다면, 그 기도는 하늘에 올라갈 것이며, 예수께서는 그것에 자신의 완전하고 선하신 향기를 담아서 하늘 아버지께 바치신다. 기도에 응답 받기 위한 조건들로 성경은 어떤 것들을 언급하고 있는가?

겸손
첫 번째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자세를 취해야 한다. 우리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대로 구해야 할 것이다.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요일5:14.
이렇게 간구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을 겸손히 하고 하나님께서 무엇으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든지 받아들이겠다는 자세가 필요하다. 우리는 하나님을 강요하여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어낼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을 속일 수 없다. ‘그분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 같지 않고 우리의 방법은 그분의 것과 같지 않으니 그분의 길은 언제나 완전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의 소원 위에 하나님의 소원을 두어야 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기도는 우리의 뜻과 계획을 이루어 달라고 하나님께 강요하기 위해서 드리는 것이 아니다. 기도는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완전하신 때와 섭리가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 드리는 것이다. 기도는 하늘의 지혜를 여는 믿음의 손 안에 쥐어진 열쇠이다. 우리는 언제나 기도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정결한 마음
진지한 마음으로 영혼의 정결함을 위하여 기도하라. 어떤 은사라도 기도를 대신하지 못하며, 영혼의 건강을 유지시키지 못한다.
효과적인 기도 응답을 위해서는 우리의 생애에서 알고 있는 죄는 하나도 없이 하여야 한다. 만일 우리가 죄에 붙어 있으면 우리의 간구는 들려진 바 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 시66:18.

순수한 동기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을 우리의 소욕의 제단에 올려놓아서는 안 될 것이다.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 약4:3. 우리의 이기적인 요구 사항들이 다 응답받는다면 우리 자신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과 하나님의 사업까지도 다 망할 것이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고 사랑으로 가득 찬 분으로서 우리와 다른 이들에게 최상의 것을 그리고 그분의 이름에 영광을 돌릴 만한 것을 주시기 원하신다.

신뢰
그 다음에는 신뢰할 필요성이 있다. 예수께서는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고 말씀하셨다. 막11:24. 만일 우리가 반신반의한다면 우리의 기도가 응답받을 것이라고 추호도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야고보는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라고 말하였다. 약1:6-8. 만약 우리가 두 얼굴을 갖고 의심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도록 우리에게 자원을 맡기실 수 없다. 당신이 만약 새로 산 차 한대를 갖고 있다면 차를 함부로 운전할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그 차를 빌려주겠는가?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는 것은 우리의 간구를 응답받는데 필수이다.

용서
이 신뢰와 연관지어 진 것이 바로 기꺼이 용서하고자 하는 정신이다. 다음의 두 성경절을 주목하라. “너희가 서서 기도할 때에 만일 어떤 사람과 적대 관계에 있다면 그를 용서하라 그러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죄들을 용서하시리라 그러나 만일 너희가 용서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죄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고 하시더라” 막11:25, 26(KJV).
만일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할 수 없다면 어떻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해 주시도록 기대할 수 있는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제일 먼저 하나님께 구하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우리 자신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완전하고 자유롭게 용서받은 우리가 우리에게 해를 끼친 사람들을 용서해 주지 않는다는 것이 가당한 일인가? 다른 이들을 마음에서부터 용서한다는 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진정으로 믿고 귀중히 여긴다는 증거이다. 용서받은 죄인은 사죄함 받는 것의 가치를 알고 감사하며, 그리하여 하나님의 축복을 잘 다룰 준비를 갖추게 되는 것이다.

감사
마지막으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마련해 놓으신 것들을 감사해야 한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빌4:6. 감사를 드리는 것은 우리 기도를 듣고 응답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며 단지 우연의 일치나 우리 자신들의 고안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감사함은 우리의 마음을 모든 것을 마련해 놓으신 하나님께 돌리게 하며 그리하여 우리가 아닌 그분이 영광을 받으시게 된다. 그들의 마음을 항상 하나님께 두고 있는 자들은 완전한 보호에 대한 확신으로부터 오는 평화를 갖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기도는 영혼에 평안을 가져다 준다. 빌4:7; 사26:3, 4.

응답이 지연되는 이유
이러한 조건들이 충족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리라는 확신을 갖을 수 있다. 하나님의 응답은 예스 아니면 노, 둘 중에 하나다. 예스일 경우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실지라도 응답이 지연되는 수가 있다. 이러한 기다림은 종종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확신을 의심의 심연으로 몰아넣는다. 그러나 기도의 응답이 지연되는 것이 항상 나쁜 것은 아니다. 지연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기뻐하지 않으신다거나 혹은 그분께서 휴가 중이라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응답이 지연되는 데는 세 가지 가능성이 있다.

엘리야는 비가 오기를 일곱 번 기도하였다. 기도 후 매번 그는 구름이 몰려오는지 확인하였다. 이렇게 하기를 일곱 번 하였다. 일곱 번의 기도를 드리는 동안 엘리야는 자신의 마음을 다시금 살필 기회를 가졌다. 혹 그의 마음에 죄가 남아있는 것이 아닌가 살피고 또 살피며 자신의 죄를 온전히 회개했을 때 비가 오게 되었다. 응답의 지연은 그 축복으로써 심령의 정결을 가져다 준다.
또한 기다림은 우리의 소원을 간절하게 한다. 너무나 자주 우리는 기도할 때에 모든 것을 당연시 한다. 우리는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께서 풍족하게 주신 것들을 값싸게 취급할 위험을 언제나 갖고 있다. 주님께서는 그분의 선하심을 향한 우리의 감사가 더욱 자라나기를 원하시며, 오직 그럴 때에만 우리는 그분의 축복을 더 큰 존경과 조심성으로 간직할 수 있다.

기도의 응답이 지연되는 세번째 요인은 환경들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연결되어 있는데, 이것은 우리의 기도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기 위함이다. 다니엘은 그가 받은 환상에 응답을 받기 위해서 삼주 동안 하나님께 간구하였다. 다니엘의 요청의 응답으로 내려온 천사는, 환경과 사정에 의해서 응답이 연기되었음을 설명하였다(다니엘10장). 그러므로 응답받지 못한 기도 때문에 하나님을 향한 당신의 확신이 흔들리는 일이 없게 하라. 기다림은 긍정적인 목적으로 쓰이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NO”라고 대답하실 때가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와 소원에 전혀 무심하시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뻐하지 않으심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부정적인 응답을 받을 때는 어떤 것이 우리에게 최선인지를 아시는 하나님의 실수없는 지혜와 완전한 예지를 받아들여야 한다. NO는 단순히 하나님 아버지께서 제일 잘 아신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우리의 기도는 때때로 응답되지 않아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기도는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기도대로 하나님께서 응답하시면, 우리는 교만과 자기 만족의 길을 걷게 된다. 하늘에 가면, 이 땅에서 우리를 괴롭게 하고 실망시켰던 신비들이 풀리게 된다. 하늘에 가면, 응답받지 못했던 우리의 기도와 좌절당했던 희망이 우리에게 가장 큰 축복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내가 대학에 있었을 때, 진심으로 사랑하던 한 여인과 교제하였다. 우리는 정말 잘 어울렸다. 우리의 관계는 완전해 보였다. 학교 직원들과 학생들은 우리의 우정이 긍정적인 결말을 가져오리라고 확신하였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께 우리의 교제에 관해 기도하였을 때, 그분께서는 분명한 거절로 응답하셨다. 다른 응답을 주시기를 바라며 계속하여 기도했지만 응답은 똑같았다. NO는 여전히 NO였다.
우리는 결혼하지 않았다. 비록 그 당시에는 많이 괴로웠지만 나의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인 것에 대해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시간이 지난 후에 그 여인과의 교제를 객관적인 입장에서 바라보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의 성격과 구체적으로 하고자 하는 일들이 조화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게 되었고 우리의 가야할 길이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의 기도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대답하시든지 - YES든지 NO든지 - 간에 우리의 삶을 향한 그분의 부드러운 돌보심을 알아야만 한다.

실수하시지 않는 하나님은 너무나도 좋은 분이시다!

권두언


강병국 목사

저는 남미 선교 여행을 마치고 며칠 전에 돌아왔습니다. 세상 어디에 가든지 아이들의 순진함과 밝은 미소는 어쩌면 그렇게 한결 같은지 모르겠습니다. 남미 어린이들의 수줍고도 천진한 표정들은 제 마음을 사로 잡기에 충분하였습니다.

아이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큰 축복들 중에 하나입니다. 그들의 애정과 평화로움에 어른들의 마음들이 쉼을 얻게 됩니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이러한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 갈 수 없다고 말씀하시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일은, 이러한 선물로 얻은 아이들을 어떻게 키우고 교육시키느냐 하는 큰 관건이 부모들에게 달려 있다는 사실입니다. 교육의 영향은 영원히 계속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을 하늘의 빈 자리들을 채우며 영원히 살게 될 인물들로 만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죄악의 오염이 전혀 없는 곳에서 영원토록 배우며 성장하고, 또 나아가서는 자기들의 원하는 모든 소원들과 꿈들을 성취시키고 이룰 수 있는 우주의 주인공들로 교육시키는 것입니다. 우리의 교육 목표는 영원한 하늘이지 잠간 있다가 떠나갈 이 세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의 자녀 교육의 이념과 사상이 세상의 것들과 큰 차이를 갖게 됩니다.

과연 요즈음처럼 혼잡하고 타락한 세상의 물결 속에서 어떻게 우리 자녀들을 올바르게 교육시킬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우리 자녀들을 영원히 살 수 있는 자로 꼴지울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여야 반항적인 아이들을 그리스도인적인 예모를 가지고 다룰 수가 있을까요? 자녀 교육처럼 힘든 일이 없습니다. 자녀들의 교육만큼은 아무도 장담할 자가 없습니다. 특히 요즈음과 같은 악한 세상에서 말입니다. 그러나 용기를 내십시오! 우리들에게 자녀들을 선물로 주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여전히 사랑하시며 도와 주시려고 팔을 벌리고 계십니다. 이번 호는 여러분들에게 새로운 통찰력과 힘을 드리게 될 것입니다.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


만일 여러분이 매우 낡고 더럽고 여기저기 기운 옷을 입고 있는데, 어느날 어떤 사람이 와서 여러분이 입고 있는 더럽고 추한 옷을 벗기고 최고급의 정장을 입혀 준다면, 여러분의 마음에 어떤 생각이 들 것인가?

아마도, 감사한 생각에 앞서 왜 이 분이 내게 이런 최고급의 옷을 선물로 줄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그러한 의문을 갖는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오늘날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하다. 오늘날 현대 기독교회가 따라가고 있는 구원에 대한 가르침 중에서 가장 인기 있는 가르침은 아마도 스가랴 3장 4절의 말씀일 것이다.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내가 네 죄과를 제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 “ 스가랴 3:4. 여호와께서 자신의 추하고 더럽고 누더기 같은 옷을 벗기시고 하얀 세마포를 입히시는 이 장면이야말로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구원의 선물을 가장 잘 묘사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구원의 약속을 즐기면서 살아가고 있다. 자신에게 왜 그런 옷이 입혀지고 어떤 과정을 걸쳐서 그런 옷이 자신에게 입혀지게 되는가에 대해서는 전혀 무관심한채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구원의 즐거움만을 생각하는듯 하다. 그러나 우리는 스가랴 3장 4절 바로 앞에 있는 말씀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스가랴 3장1절부터 읽어 보기로 하자.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사자 앞에 섰고 사단은 그의 우편에 서서 그를 대적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시니라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하실 때에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섰는지라” 스가랴 3:1~3. 여호와께서 천사에게 명하여 더러운 옷을 벗기고 희고 아름다운 옷을 입혀주시는 이유는 여호수아가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직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같은 그리스도인만이 희고 아름다운 의의 세마포를 입게 되는 것이다.

더러운 옷을 입고 있는 이 사람은 잘못을 저질렀지만 매우 진지한 마음으로 회개하는 사람들을 대표한다. 그의 더러운 옷은 없어졌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내가 네 죄과를 제하여 버렸’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의 죄는 무죄하고 순결하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게게로 전가되었다. 그리고 그 사람은 비록 아무런 자격이 없을지라도, 모든 불의에서 깨끗함을 받고, 그리스도의 입혀주신 의를 입고 주 앞에 서 있다. 오 이 얼마나 놀라운 변화인가? 이것이 그리스도의 의를 입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영광이다. 이같은 큰 은혜를 입은 사람이 어찌 죄를 더 계속 지을 수 있단 말인가? 어찌 그들이 그리스도의 마음을 슬프게 할 수 있단 말인가?

 

그슬린 나무

그슬린 나무란, 비록 죄를 저질렀지만, 회개의 심령으로 그 마음이 새까맣게 탄 영혼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자신이 지은 죄를 생각하면서 또한 그 죄로 인하여 상처를 받았을 다른 사람을 생각하면서, 그리고 죄로 인하여 일어나는 결과들을 생각하면서 그 마음이 새까맣게 타버린 것이다. 바로 이런 사람이 흰 옷을 입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이 하얀 사람이 의의 옷을 입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불에 그슬려 까맣게 타버린 사람이 하얀 의의 옷을 입는다고 말할 수 있다. 하얀 세마포 안에는 불에 타서 그슬린 새까만 마음이 숨겨져 있다.

그런데 우리 말에 속이 시커멓다는 말이 있다. 불에 그슬려서 마음이 새까맣게 탄 것과 그 속내가 시커먼 것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다른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도 마음이 타지 않는 사람,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하고도 그 마음이 타지 않는 사람은 그 속내가 시커먼 사람이다. 그런 사람의 마음은 전혀 불에 그슬릴 이유가 없다. 왜냐하면 자기가 원하는대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하고 싶은 말을 다하고, 하고 싶은 것 다하고, 먹고 싶은 것 다 먹는 그런 사람의 생애에 있어서 자아 부정은 찾아 볼 수 없다. 진리의 요구가 그 사람에게는 아무런 느낌도 줄 수 없다. 자신은 항상 공평하고 정당하다고 생각하지만, 매사에 있어서 자기 중심적이고 이기적이다. 이런 사람들은 주변 사람들이나 친구들로부터 깊은 사랑과 애정을 받지 못하게 된다. 양심이 둔감하거나 마비된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그 마음이 불에 타서 그슬리지 않는다.

 

마음이 불에 그슬리는 이유

마음이 불에 타서 그슬리는 이유는 자아를 부정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화재 사건이다. 피부가 불에 그슬리면 얼마나 쓰리고 아픈가? 마음도 불에 그슬리면 매우 심한 고통을 받게 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자아 부정의 아픔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셨던 것이다.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내 버리라 네 백체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마5:29,30. 이 말씀은 자신의 의지를 꺾어서 주 앞에 바치는 자아부정의 어려움을 표현한 말씀이다. 어떤 사람이 자원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눈을 빼어 버릴 수 있을까? 어떤 사람이 자원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손목을 도끼로 내리칠 수 있을까? 자아부정의 생애란 어떤 나쁜 습관이나 죄를 버리고 싶은 마음이 자연스럽게 생길 때까지 기다렸다가 버리는 것이 아니다. 눈을 빼거나 손목을 잘라 버리는 고통이 따르는 자아부정의 생애는 우리의 마음을 불에 태워 그슬려 버리는 것이다. 원수를 미워하는 대신 그를 동정과 사랑으로 대하기 위해서는 마음이 까맣게 타들어가야 하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에게 눈보다 하얀 의의 옷을 입혀 주시는 것이다.

 

그슬린 나무와 자아부정

여기서 잠깐 암과 마음의 관계를 생각해 보자. 우리가 잘 아는대로 암은 식생활 뿐만 아니라, 스트레스와도 매우 깊은 관계가 있다. 우리는 때때로 신실한 그리스도인도 암에 걸려서 죽는 경우를 보면서 이상하게 생각한다. 때때로 모든 일에 절제하고 건강한 식생활을 하는 신실한 목사님이나 사모님들도 암에 걸려서 고통스럽게 죽는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행복과 즐거움과 감사의 생애인데, 어떻게 암에 걸릴 수 있을까? 그것은 진실한 그리스도인은 자아부정의 삶을 살기 때문이다. 나보다는 다른 사람의 형편을 먼저 헤아리고, 진리와 양심의 음성에 순종하는 생애를 살아가는 사람은 대개 어려움과 고난 속에서 생애를 마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과 자아를 최우선에 두는 생애를 살아가게 된다.

자아부정의 과정 속에서 마음이 새까맣게 타들어가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경험을 통하여 잘 안다. 물론 자아부정의 터널 뒤에는 평화와 감사와 행복이 약속되어 있지만, 그 약속을 붙잡는 과정 속에서 마음은 고난이라는 불에 그슬려서 심한 고통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한가지 안타까운 일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마음만 태우고 자아 부정의 경험을 온전하게 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경우에는 마음이 스트레스를 잔뜩 받아서 새까맣게 탄다고 할지라도, 주께서 주시는 평화와 감사와 행복의 느낌을 선물로 받지 못하게 된다. 이런 경우에는 마음이 비록 고통으로 인하여 새까맣게 탔다고 할지라도 의의 옷을 입지 못할 것이다. 예를 들어서 생각해 보자. 이웃과 문제가 생겼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내가 잘못한 것은 없고 저 사람이 잘못을 하였다. 더구나 내게 해를 가한 사람이 나에게 와서 자신이 잘못했다는 말이나 표정조차도 보이지 않는다. 이런 경우 미워하고 복수하고자 하는 육체의 소욕이 나를 충동질한다. 그런 감정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서 애쓰는 과정 속에서 마음은 까맣게 타들어 간다. 그러나 결국 육체의 감정에 굴복하여 마음 속 깊숙한 곳에 미움과 증오의 감정을 키워나간다면 비록 마음이 쓰라린 감정으로 까맣게 탔을지라도 하얀 의의 옷은 입지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마음이 까맣게 탔다고 해서 의의 옷을 입는 것은 아니다. 고난의 불로 마음이 까맣게 타들어가는 과정 속에서 자아를 굴복하고 승리를 쟁취하는 사람만 의의 옷을 입을 수 있는 것이다.

자아부정에 대해서 이야기 하면 어떤 사람들은 이런 질문을 한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멍에는 가볍다고 하셨으며,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고 하셨는데, 우리가 자아 부정을 해야한다면 그것은 율법주의적인 신앙이 아닌가요? 주께서 주시는 쉼을 받기만 하면 되지, 자아부정은 또 무엇입니까?” 내가 짊어지고 있는 무거운 멍에를 벗기로 결정하는 선택은 내가 할 몫인데, 바로 이것이 자아부정이다. 물론, 성령께서 그러한 선택을 하도록 양심 속에서 호소하고 강권하시지만, 궁극적으로 이런 선택을 하는 것은 내가 할 몫이며, 또한 거기에는 눈을 빼내고 손목을 잘라내는 것과 같은 심적 고통이 따른다. 그러나 일단 선택을 하고 마음을 하나님께 바치고 나면 예수께서 메어 주시는 가벼운 멍에를 매고 살 수 있다. 예수께서는 이 면에 있어서 아무도 오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눅 9:23.

 


불에 그슬린 나무와 의지의 굴복

지금까지 말씀드린 불에 그슬린 나무 이야기는 의지의 굴복 문제에서 그 결론을 맺을 수 있다. 사람은 일생동안 자기가 하고 싶은 것과 자기가 하지 말아야 할 것들 사이에서 투쟁하며 살아간다. 어떤 것을 하고, 어떤 것을 하지 말아야 된다는 의지의 투쟁은 하루에도 수십번씩 마음 속에서 벌어진다. 아주 작은 일부터 시작하여 매우 중요한 일까지 우리의 의지는 무엇인가를 결정하고 선택하는 일을 한다. 자신의 감정을 부인하고 마땅히 해야할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굉장한 싸움을 해야만 하다.

의지의 문제는 아담과 하와로부터 시작되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했을 때, 그들의 의지에 어떤 문제가 발생했다. 그들이 타락했을 때, 그들은 자신들의 의지를 사단의 권한하에 주어 버렸다. 물론 아담과 하와가 그렇게 되기를 원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되고 말았다. 그들은 더 이상 자신의 의지를 주관하는 주관 자가 될 수 없었다. 의지는 병이 들어서 매우 연약하게 되었고 마귀는 연약해진 의지를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었다. 로마서 7장 14`15절에서 바울은 연약해진 의지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일지 못하나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왜 바울은 그런 말씀을 기록했을까? 왜냐하면 의지가 쇠약해진 인간은 자기 자신이 하기를 원하는 그 일을 할 만큼 의지가 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담과 하와의 죄로 인하여 우리의 의지는 약해져서 마귀에게 복종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의 뜻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과 진리에 순종하는 삶을 살 수 있을까? 비록 우리의 의지가 타락하고 약화되었다고 할지라도 완전하게 무기력해진 것은 아니기 때문에, 완전히 사단의 지배하에 있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우리의 의지는 아직도 우리가 어떤 존재를 섬길 것인가를 선택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그러므로 오늘날 너희가 섬길 자를 택하라.”고 말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수24:15.

인간은 누군가를 섬기면서 살도록 창조받았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지 않으면, 마귀를 섬기면서 살도록 창조받았다. “나는 둘 중에 아무도 섬기지 않겠다” 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마귀를 섬기고 있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자기를 다스릴 존재를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어떤 의미에 있어서 우리는 완전한 자유인이 아니다. 누군가를 섬겨야 하며, 누군가의 지배를 받으면서 살아가도록 창조된 피조물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를 섬기기로 선택한다면, 우리는 그분 안에서 진정한 행복과 자유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의문을 가지고 있다. “내가 어떻게 하여야 주님을 섬기고 그분의 말씀에 복종할 수 있는가?”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기를 간절히 소원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도덕적인 의지력이 약화되어 있기 때문에 원치 않는 문제가 발생한다. 때때로 의심의 노예가 되며, 종종 죗된 생애의 습관에 지배를 받는다. 우리의 결심과 결정들은 모래처럼 힘없는 끈과 같아 우리의 애정과 충동과 감정을 스스로 조절할 수 없다. 우리 자신이 약속을 깨뜨리고 결심을 파기했던 과거의 경험들이 우리의 의지와 진실함에 대한 확신을 점점 약화시켜 왔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 우리를 더 이상 용납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절망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이해할 필요가 있는 것은 의지의 참된 힘이다. 그것은 인간의 본성 가운데 있는 지배하는 힘으로서, 결정하는 힘과 선택하는 힘이다. 모든 일은 의지의 올바른 활용에 달려 있다. 하나님께서는 태초에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인간에게 주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을 활용해야 한다. 우리는 스스로의 힘으로 우리 자신의 마음을 변화시킬 수 없다. 우리는 애정을 하나님께 스스로 드릴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기로 선택할 수는 있다. 만약 우리가 우리 자신의 뜻과 의지를 하나님께 드리기만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당신께서 기뻐하시는 뜻대로 우리 마음 속에서 역사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비록 우리가 연약한 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그리스도인인가 아닌가를 결정하는 것은 선택에 달려 있는 것이다.

인간의 의지가 하나님의 의지와 협력할 때에 그것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힘이 된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능력 속에서 다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분의 명령은 그것을 성취시킬 수 있는 능력과 함께 온다는 사실을 우리는 믿어야 하다.

구속의 역사에 있어서는 강요란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령의 지배하에서 자유스럽게 선택할 권한을 갖는다. 한 영혼이 그리스도께 굴복하기로 결정할 때, 그 영혼 속에는 가장 고상한 자유가 깃든다. 사람들은 굴복은 자유를 빼앗아간다고 생각하지만, 굴복은 진정한 자유와 행복을 가져다 준다. 죄를 범하는 것은 바로 영혼 자신의 선택이다.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사단의 노예 상태로부터 해방될 수 없는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가 우리 자신으로부터 해방되기를 간절히 소원할 때에 영혼은 하늘로부터 오는 능력과 연합되고 거기서 나오는 놀라운 힘에 의해서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는 결과를 얻게 된다. 연약한 인간의 의지가 전능하신 하나님께 굴복될 때 놀라운 기적이 생기는 것이다. 하나님과 그분의 진리에 자신의 의지를 굴복하는가 또는 하지 않는가가 구원받는 사람들과 구원을 거절하는 자들 사이에 존재하는 정확한 경계선이 된다.

굴복이란 무슨 뜻일까? 굴복은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시고 호소하시는 사랑에 대한 우리의 응답을 뜻한다. 참된 굴복은 십자가 아래에서 이루어진다. 이러한 굴복을 통하여 우리의 잘못된 의지가 깨뜨려 지며 마음이 바뀌어 지고, 태도와 소원이 성령의 능력에 의해서 전격적으로 변화되어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게 되는 것이다. 모든 생활에서 하나님의 권위만 인정되고 모든 일을 하나님의 뜻에 일치되도록 맡기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오직 하나님께만 굴복해야 한다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 다시 산 자와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롬 6:12,13.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계속적으로 이리저리 흔들리며, 그 결과 그들의 생애가 다른 사람들을 넘어뜨리게 만드는 거침돌이 된다. 진리의 원칙이 안착되지 못했기 때문에 가지고 있던 원칙마저 유혹의 파도에 의하여 씻겨나가며, 모든 잘못된 것들을 전적으로 승리하려고 애쓰지도 않게 된다. 자신의 의지를 하나님께 굴복하지 않은 사람의 본성은 유혹의 바람이 부는대로 흔들린다. 아담과 하와의 죄로 인하여 연약해진 의지는 거듭남에 의하여 그것의 올바른 기능을 회복함으로써, 죄를 버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 수 있게 된다.

영혼이 주어진 빛에 따라서 행하기로 선택하는 즉시로 더 많은 빛과 힘이 주어질 것이다. 성령의 은혜는 영혼의 결심과 협력 함으로써 각 개인들의 필요를 충족시킨다. 풍성한 빛 자체가 해방시키는 것이 아니라, 의지가 진리의 빛을 선택하기 위하여 꿈틀거리고 인간의 영혼 깊숙한 곳으로부터 “주님이시여 나를 도와주시옵소서”라는 간절한 음성이 울려나올 때, 그는 승리자가 될 것이다. 의지가 강한 자가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굴복하는 자가 승리한다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진리이다.

 

죄로 어두워진 이 세상에서
하늘의 깨끗한 것들을 사모하면서 살아가는 것,
그것이 자아를 죽이는 삶입니다.

그대가 어떤 직업, 어떤 외로움, 어떤 옷, 어떤 화장, 어떤 지휘 하에서도
겸손한 만족과 평안을 누릴 수 있다면,
그것이 자아를 죽이는 삶입니다.

그대가 어떤 어려움, 어떤 귀찮음, 어떤 성가심을 받고 있을 때,
사랑스럽고 유쾌한 분위기를 상대방에게 계속 나누어 주는 것,
그것이 자아를 죽이는 삶입니다.

자아가 죽기 전까지는, 진정한 평화와 행복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우리 모두의 영혼 속에 깊이 새겨지게 되기를 바랍니다.

2부 - 두뇌의 면류관


지난 호에 이어서

앞이마의 뒷부분에 위치한 전두엽은 뇌의 가장 큰 돌기로서 판단과 논리, 지능과 의지를 통제하는 곳이다. 전두엽에서 이루어지는 3가지 중요한 기능들은 영성, 도덕성, 그리고 의지로서 이들은 사람의 독특한 개성을 이룬다.

요한계시록 22장 4절에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구원받은 사람들의 이마(전두엽)에 하나님의 이름, 즉 그분의 성품이 새겨질 것이라는 뜻이다(출33:18-23; 하나님의 이름 = 하나님의 성품). 구속함을 받은 무리들은 하나님의 아들 딸로서 그분을 닮을 것인데, 바로 앞이마(전두엽)에 쓰여진 하나님의 이름이 그것을 증명한다. 그렇다면 이 전두엽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얼마나 중요한지는 자명하다. 두뇌의 면류관이라 불리워지는 전두엽. 어떻게 이 면류관을 최상의 상태로 보존시킬 수 있는지에 대해서 계속하여 알아보자.

 

뇌의 크기와 기능

55인간과 동물들의 전두엽의 크기가 다르다는 것은 흥미로운 사실이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전두엽이 바로 인간과 동물을 구별하는 가장 중요한 기관이다. (보기 4)
작은 전두엽을 가지고 있는 동물일수록 더욱 더 본능에 의해서만 움직인다. 큰 전두엽을 가지고 있는 동물들일수록 더 복잡한 일들을 수행할 수 있다. 오직 두뇌의 3.5% 크기의 전두엽을 가지고 있는 고양이는 제한적인 판단과 논리적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 개들은 고양이 보다 더 길들이기 쉬운데 그 이유는 7%의 뇌가 전두엽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동물들 중에는 침팬지가 뇌의 17%인 가장 큰 전두엽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이에 비하여 뇌의 33-38%가 전두엽에 위치하고 있다.

어떤 동물들은 인간에 비하여 다른 부분이 더 발달되어 있다. 예를 들어서 인간에 비하여 침팬지는 더 큰 소뇌(근육 운동을 관할하는)를 가지고 있다. 그 이유는 침팬지들에게는 나무 사이를 건너 다닐 수 있는 균형성과 민첩성이 필요되기 때문이다. 새들도 날고, 내리고, 사냥을 하기 위하여 잘 발달된 소뇌를 가지고 있다. 이 모든 행동들은 모든 근육들의 잘 조화된 협조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다른 동물들은 더 발전된 후두부(시력을 주관하는)를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시력은 인간의 시력보다도 더 좋다. 또한 어떤 동물들은 정수리 돌기가 더 발전되어 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다른 점은, 바로 더욱 큰 전두엽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영적인 식별력이 있고 뛰어난 학습능력이 있는 것이다.

 

정신적 질병과 전두엽

어떤 심리학적 질병들은 전두엽 문제에 직접 관련되어 있다는 것은 놀랄만한 사실이 아니다. 다음은 그러한 장애들이다.

전두엽과 관련된 질병

광란증(mania)
망상적이고 충동적인 상태
식욕 증가
관심부족, 과민증
우울증

광란증(mania)은 감정적 혼란에 의한 것이며 지나친 활동, 흥분, 혼란한 생각들, 불면증, 불안한 관심의 고조로서 나타난다. 이러한 문제의 근원은 손상된 전두엽의 기능에 있다. 망상적이고 충동적인 상태는 계속적이고 반복적으로 원치 않는 생각들, 충동들, 행동들로서 나타나는데, 그 이유는 전두엽이 손상되었기 때문이다. 관심부족, 과민증 역시 많은 경우 전두엽 문제로부터 일어나게 된다. 미국에서, 관심부족 과민증은 1990년에 900,000명에서 1995년에는 20,000,000명으로 늘어났다. 우울증도 전두엽에 관련되어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 뇌 정밀 검사기의 촬영에 의하면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의 전두엽은 혈액 순환이 60% 줄어있음을 볼 수 있다. 또한 우울증 환자의 전두엽의 활동을 증가시키면 그 부분에 혈액 순환이 활발해지면서 우울증도 급격히 향상될 수 있음이 나타났다.

 

식욕과 전두엽

내가 의사로서 접해왔던 여러 공통적인 육체적 건강 문제들이 전두엽과 관련되어 있었다. 식욕 자제에 관한 문제는 현대 사회에 가장 큰 문제점들 중의 하나로 나타나고 있다. 살이 찐 사람들 모두가 식욕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많은 경우 그러하다. 미국 내에 비만에 걸리는 사람들이 많아짐에 따라서 현재 음식물에 대한 관심도가 고조되고 있다. 이상 식욕 항진(Bulimia)과 같은 식욕 장애도 전두엽에 관련되어 있는데, 그 이유는 식욕을 통제하는 곳이 전두엽에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배가 고플지라도, 또한 해로운 음식에 대한 애착도가 아무리 강할지라도 전두엽이 올바로 기능하고 있으면 그러한 욕구를 통제할 수 있게 된다. 전두엽의 기능이 저하된 사람들은 이러한 욕구를 제지할 수 없다. 비만증에 걸린 많은 사람들이 계속해서 과식을 하는 이유는 바로 그 사람들의 전두엽이 ‘그만 먹게’ 하는 기능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알코올과 카페인이 전두엽에 미치는 영향

알코올은 약품의 후유증을 더 심각하게 할 뿐만이 아니라 전두엽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 알코올은 미국에서 뇌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대중음료이다. 몇 년 전, 술을 마시는 사람들과 안 마시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MRI, PET의 두 가지 실험이 행하여졌다. MRI는 현재 가장 많이 사용되는 진단법으로 뇌의 구조를 실제로 보여준다. 이 방법을 사용하여 술을 마시는 사람의 뇌를 촬영하면 전두엽에 있는 회색물질이 현저하게 줄어들었음을 볼 수 있다. 이 회색물질은 뇌신경세포들이 밀집되어있는 곳이다. “피층위측(cortical atrophy)”이라고 부르는 회색물질저하 증상은 중간 전두엽의 기능을 담당하는 뇌세포들이 없어지는 증상이다. PET는 뇌의 기능을 조사하는 촬영 방법이다. 이 조사를 통해서 술을 마시는 사람들은 낮은 포도당 대사작용을 나타냈는데, 이것은 곧 전두엽의 낮은 활동성을 가리킨다.

카페인은 천천히 뇌에 영향을 미친다. 미국사람들은 매일 아침 습관적으로 카페인을 복용하기 때문에 이러한 결과를 예상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러한 자극을 위해서 막대한 돈이 쓰여진다. 카페인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뇌의 교통을 방해한다. 뇌 세포들은 화학작용을 통하여 서로 이야기를 한다. 신경세포는 신경통화제(neutrotransmitters)라는 물질을 방출하고 그 옆 세포가 그것을 받는다. 어떤 신경통화제는 그것을 받는 세포를 자극시키던지 아니면 저하시키던지 한다. 카페인은 이러한 자연적인 뇌의 화학작용을 방해하고 다른 자극을 전달한다. 카페인은 의지력을 저하시키고, 약품사용 중지 때 나타나는 후유증을 느끼게 하며, 정신질환을 악화시킨다.

 

모유, 고도 불포화 지방, 비타민을 통항 전두엽 활력증진

어린 아이들은 자기들이 어떤 것을 먹을지 선택할 수 없다. 모유를 먹이기로 선택한 어머니를 만난 행운아들은 귀중한 전두엽을 유산으로 물려받게 된다. 연구에 따르면 모유를 먹은 아이들은 건강한 전두엽을 오랫동안 또는 평생 가질 수 있다고 한다. 어떻게 모유가 이러한 좋은 결과를 만드는가 하는 이유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한 가지 알 수 있는 것은 모유가 가지고 있는 지방의 특성이다. 일본의 요코타 박사는 설명하기를, 갓난 아기들은 오메가3 지방을 충분히 섭취해야 한다고 하며, 이것이 없으면 학습 기능이 낙후된다고 한다. 다른 국제 연구팀들의 보고서도 이와 비슷한 결과를 제시하고 있다. 대부분의 연구서들이 자라나는 뇌에 오메가3 지방이 필수적인 요소라고 지적하며, 전통적인 이유식은 모유에 비해서 현저하게 낮은 오메가3 지방을 포함하고 있다고 동의한다. 이유식을 다른 일반 음식으로 보충하여도 오메가3 지방을 보충하기는 어렵다. 한 연구 그룹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결론적으로, 이유식을 먹이는 아기들에게 모유를 먹는 아이들이 섭취하는 긴 사슬의 PUFA의 양을 보충시키는 것은 사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아기에게 모유가 이토록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모든 부모들은 깨달아야 할 것이다. 또한 좋은 지방을 섭취하는 것은 아기들뿐만이 아니라 어른들의 지력개발에 필수적이다. 콜시나 박사와 동료 과학자들은 10여 년 전 이미 이 점에 대하여 논한 바 있다. 그들은 두 그룹의 쥐들에게 적당량의 지방을 섭취하도록 하였는데, 그 지방들은 서로 다른 음식으로부터 추출되었다. 야채 지방(20% 고도불포화유지-콩 기름)을 섭취한 쥐들은, 20% 포화유지를 섭취한 쥐들에 비해서, 더 높은 습득 능력을 보였다. 이스라엘 과학자들도 유사한 연구 결과를 얻었다.

버넬 벌드위 의사는 왜 지방의 종류에 따라서 다른 결과를 만드는지를 설명한다. 주로 동물성 식품에서 발견되는 포화지방은 뇌의 효과적인 정보전들을 방해한다고 한다. 그의 가설은 시냅스라고 부르는 신경 세포의 연접부에서 정보 전달 작용이 일어나는데, 동물성 포화지방은 이 작용을 뻑뻑하게 만들며, 야채, 씨, 견과류에서 나오는 식물성 불포화지방은 도리어 뇌 정보 전달 작용을 더 윤활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고도불포화지방 외에도 비타민과 광물질들은 뇌의 작용에 에너지를 전달한다.

 

음악과 전두엽

음악이 전두엽 발전에 큰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적다. 음악은 뇌의 감정을 주관하는 곳을 통하여 들어오게 된다. 음악의 종류에 따라서 음악은 뇌에 해가 될 수도, 이득이 될 수도 있다. 음악치료사들은 당김음을 사용하는 록음악과 이와 비슷한 음악들은 전두엽을 통과하지 않고 우리 뇌에 들어오게 되어, 그 음악에 대한 판단을 할 수 없게 된다고 설명한다. 음악도 텔레비전처럼 최면적인 상태를 만들 수 있다. 여러 해 동안 로큰롤 음악이 젊은이들의 마음을 저하시키고 있다는 논란이 있어왔다. 그래서 최근 몇 신경생물학자들과 물리학자들이 팀을 이루어 한 연구를 발표하였다. 이 연구는 여러 다른 종류의 음악적 리듬이 쥐에게 미치는 영향을 조사한 것이다. 8주 동안 세 그룹의 쥐들에게 서로 다른 음악을 듣게 하였다. 한 그룹의 쥐들에게는 록음악에 나오는 불협화음적인 드럼이 만드는 리듬을, 다른 그룹의 쥐에게는 클래식 음악을 듣게 하였고, 마지막 그룹의 쥐들에게는 아무 음악도 들려주지 않았다. 첫째 날 모든 쥐들에게 미로를 통한 음식 찾기를 시켰을 때에 모든 쥐들이 다 비슷한 능력을 나타내었다. 그러나 8주가 다 지나자 그룹별로 차이가 나기 시작하였다. 클래식 음악을 들었던 쥐들과 아무 음악도 듣지 않았던 쥐들은 정상적으로 미로를 벗어나 음식을 찾았는데, 로큰롤 음악을 들었던 쥐들은 처음보다 더 긴 시간이 걸렸다.

과학자들은 록음악을 들었던 첫 번째 쥐들이 다른 쥐들에 비해서 왜 현저하게 낮은 두뇌 활동을 나타내었는지를 조사하기 위해서 그들의 뇌를 검사하였다. 이 검사를 통해서 록음악을 들었던 쥐들의 뇌에는 비 정상적인 신경조직이 자라났다는 것을 보게 되었으며, 그로 인해서 기억장치를 담당하는 요소가 방해를 받고 있다는 것을 보게 되었다. 연구자들은 음악의 멜로디나 하모니가 아니라 리듬이 뇌의 기능에 영향을 주고 있다고 결론지었다. 비자연적인 리듬은 학습능력저하를 포함한 여러 영구적인 악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결론

2부에 걸쳐 우리는 전두엽의 기능과 전두엽에 해로운 것들, 그리고 어떻게 전두엽을 손상시키지 않고 최상의 상태로 잘 보존할 수 있는지 배웠다. 위험한 3D 직업에 뛰어들어야만 전두엽 상해를 입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생활 습관가 취미로 굳어버린 많은 버릇들이 조금씩 조금씩 두뇌의 면류관을 갉아먹고 있다.

각 사람에게 있어서 유혹이 오는 방법은 다르다. 어떤 이에게는 음식의 유혹이 가장 강할 것이고, 또 약을 수시로 복용하던 사람, 음악을 즐겨듣는 십대들 등 각자 승리해야 할 분야가 다르다. 시험받는 분야는 다 다를지 모르나 그 시험을 이기는 방법은 오직 하나이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롬8:37. 오직 예수님을 붙잡음으로 우리는 유혹을 이기고 승리할 것이다.

우리가 매순간 승리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우리의 의지가 올바로 그 역할을 해야만 한다. 앞에서 읽었듯이 우리의 의지를 조정하는 기관은 전두엽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을 먹든지, 무엇을 듣든지, 무엇을 보든지, 모든 일을 행할 때에 그 일이 나의 생각(전두엽)과 마음을 깨끗하고 건강하게 지킬 수 있는 것인지를 생각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이 나의 마음에 예수님의 성품을 갖게 하는데 방해물이 되지 않는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여러분의 마음에 예수님의 성품이 뚜렷이 새겨져 하나님의 인침을 받게 되길 간절히 바란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고전10:31.

서론 - 하나님의 소유인 우리 자녀들


이번 호는 독자들에게 많이 생각하게 만드는 글들로 채워지게 될 것 같다. 나아가서는 어떤 부모들에게는 좀 충격적인 메시지가 될지도 모르겠다. 자녀 교육문제를 다룰 것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자기 자녀의 문제를 거론하면 심각해지기 일수이다. 그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프라이버시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때에는 솔직 담백한 말들이나 글들이 오히려 우리를 도와 줄 때가 있다. 이번이 바로 그러한 경우라 하겠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운 이때에 우리 자녀들이 영생에 들어 갈 수 있을지에 대하여 점검하는 일은 얼마나 필요한 일인가! 우리의 우선 순위를 재점검하고 지나가야 할 때가 왔다. 그러한 의미에서 서론에서부터 좀 날카로운 생각을 되새겨 보도록 하자. 함께 안전 벨트를 착용하고서..?BR> 에스겔서는 우리에게 무척 심각한 말씀을 던지고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또 네가 나를 위하여 낳은 네 자녀를 가져 그들에게 드려 제물을 삼아 불살랐느니라 네가 너의 음행을 작은 일로 여겨서 나의 자녀들을 죽여 우상에게 붙여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였느니라” 겔 16:20,21).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향하여 고소장을 던지시는데 그 내용이 바로 그들의 자녀들을 우상의 제물로 죽인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고소장에서 그들의 자녀들이 그들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 당신의 소유라고 말씀하신다. 그들이 당신을 위하여 낳아 잠깐 맡아서 돌보고 있는 아이들을 자기들 마음대로 사용하였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자녀들을 어떻게 여기시는지에 대한 생각을 이해하게 된다. 우리의 자녀들이 우리들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이며 하나님의 소유라는 것이다. 아이를 잉태하는 과정에서부터 생명을 창조하고 합성시키는 모든 절차가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에 아이들은 하나님의 합법적인 소유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우리 자녀들을 기르고 교육시키는 일이 하나님의 소유를 잠시 맡아 양육해 드리는 것이 된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양부모들인 것이다.

실상인즉 우리 자녀들이 자라면 그들은 엄연히 자기 개인적인 인격과 선택력을 가진 독립적인 인간이 아닌가. 뿐만 아니라 그들은 영원히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며 배울 엄청난 잠재력을 지닌 존재가 아닌가. 그렇게 보면 우리가 그들을 끼고 있는 시간은 영원이라는 세월에 비해 잠깐 지나가는 경점에 불과한 것이다. 이러한 성서적인 이해를 갖게 되고나면 우리가 우리 자녀들을 보는 시야가 달라지게 되고 우리의 책임감도 색다른 각도에서 다가오게 된다.

흔히 부모들은 자기 자녀들을 자기 자신들을 위하여 키운다. 자기들의 적성에 맞는 아이들로 자라게 하려고 애를 쓴다. 장래에 원래 부모이신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계속 성장해야 할 존재로 키우지 아니한다. 오히려 그들을 세상에 더 어울리는 아이들로 성장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자녀들이 크면 교회를 떠나가게 되고 세상의 성공과 재미를 훨씬 더 선호하는 사람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교육관에 큰 문제가 생겼다. 하나님을 위하여 교육시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위하여 교육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교육관념의 결과는 너무나 처절하다. 오늘날의 청소년들을 보라. 교회 안에 있는 청소년들을 관찰하여 보라. 그들이 어떻게 살고 있으며 어떠한 결과를 초래하고 있는지를.

오늘날 우리의 청소년들이 걸려들고 있는 마약 문제, 난잡한 성문제, 폭력과 반항 등등은 우리들을 심각하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혹 어떤이들은 자기들의 자녀들은 그러한 문제가 없다고 말할는지 모른다. 우리 아이들은 참 착하고 교회도 열심히 다니는 모범생이라고. 그렇다면 그들의 부모에 대한 예의는 어떠한가? 하나님께 대한 열정은 어떠한가? 영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들 사이에 무엇을 더 선호하고 있는가? 그들은 과연 거듭난 경험을 하고 있는가? 그들이 몰래 듣고 있는 음악이 어떠한 종류인가? 그들이 입고 다니고 싶어하는 옷들은 어떠한 것들인가? 이러한 질문들은 우리를 곤혹스럽게 만들고 있다. 다시 말해서 많은 경우에 우리 자녀들은 세상의 우상에 바쳐지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 산 제사로 드려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우상들의 제물로 바쳐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외치시는 말씀이다.

우리는 우리 자녀들의 신앙 보다는 그들의 좋은 학교 성적을 더 우선하고 있다. 그들의 거듭남의 경험보다는 세상에서 얻는 좋은 직장들을 더 우선하고 있다. 우리는 그들이 하나님께 드려야 할 헌신보다는 세상의 칭찬을 더 우선하고 있다. 우리는 그들이 하나님께 어떠한 인정을 받을지 보다는 세상 사람들의 인기에 더 치중하고 있다. 우리는 그들이 영생에 들어가는 것 보다도 세상에서 누리는 성공에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이렇게 우리의 자녀들을 우상의 제물들로 바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을 불에 우상의 제단의 불로 태우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하나님의 말씀은 한번도 틀린 적이 없다. 부모들이시여! 이번 호의 글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께서 우리의 좌표를 확인하고 교정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기도드리자! 우리는 하나님의 위로와 능력이 필요한 사람들이다. 특히 자녀들을 교육시키는 일에 있어서.

1부 - 젊은이 + TV = 폭력?


“젊은이 + TV = 폭력” 이제는 이런 공식을 내려도 무방할 것 같다. 다음의 글을 읽고 당신의 집 울타리는 안전한지 한번 점검해 보도록 하자.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 늦은 시각 밤거리를 걸어다니면서 안전하다고 느끼는가? 당신은 그렇다 해도 그렇지 못한 수백만의 사람들이 있다. 안전하다고 느끼지 않는 곳에 살고 있는 것처럼 불안한 것은 없다. 모두들 언제 자기 집 안방을 침입해올지 모르는 폭력에 둘러 싸여, 전전긍긍해 하고 있다.

우리가 처해 있는 환경에서 치안이 허술해지는 것은 이해할 만하다. 현대의 젊은이들과 청년들을 휩쓸고 있는 폭력에 대한 걱정이 커지고 있다. 자살과 살인은 15세에서 24세까지의 젊은이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사망 원인이다.
미국의 노스 이스턴 대학교의 사법대 학장인 제임스 폭스 박사는 “지금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이 모든 아이들이 성장하는 십년 안에 우리는 피바다를 보게 될 것이다”라고 경고하였다. 십대와 젊은이들이 점차 걷잡을 수 없이 변해가고 있는 이 상황에서, 과연 우리는 피바다를 향해 가고 있는가? 우리가 어떻게 손을 쓰지 않는 이상, 그렇게 될 것이라고 많은 전문가들이 예견한다. 문제에 제동을 걸기 위해서는 왜 문제가 존재하게 되었는지에서부터 시작해 보아야 한다. 그것을 깨닫고 나면 문제 해결을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TV와 폭력의 관계
통계적으로 TV시청은 현대인들의 주요한 여가 활동 중 하나이다. 텔레비전이 가지고 있는 문제들 중 가장 우려되는 것은, 그것이 우리의 가치관들을 결정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TV 프로그램은 쉴새없이 폭력 장면을 쏟아 내어 놓음으로써, 현대인들의 성격을 부정적이고 폭력적으로 형성시켜가고 있다. TV에서 묘사되는 폭력의 양은 점점 치솟고 있는 것 같다.

여덟살 짜리 소년들이 어떤 종류의 TV폭력을 얼마나 많이 시청하는지에 대한 폭넓은 연구 자료가 있다. 이십 이년 후에 이 소년들의 기록을 법률 집행 기록들과 연관지어 평가하였다. 여덟살 때 본 TV 폭력들은 그들이 30살 될 때까지 범한 범죄들의 심각성과 연관되어 있었다는 결론이 나왔다.

이러한 보고들이 없다면, 어릴 때 보았던 폭력물이 성인이 되어서의 범죄에 영향력을 미친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흡연의 결과와 폭력 사이에도 매우 흥미로운 연관성이 있다. 젊은이가 담배를 피우기 시작할 때에, 즉시로 그 손상들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수년의 세월 후에는 궁극적으로 심각한(생명을 위협할 수도 있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는 잘 안다. 몇십년 후의 문제를 막기 위해서, 대개의 부모들은 부모들은 어린 자녀들이 흡연을 하지 못하도록 강하게 만류한다. 그렇다면 TV 시청에 관해서는 왜 그와 똑같은 접근을 시도하지 않는가? 저속한 소재들을 다루는 프로그램을 가정에서 보지 못하도록 함으로써, 사회는 또 다른 모양의 아동 학대인 TV 폭력으로부터 어린이들을 보호해야 할 책임을 갖고 있다.

 

어린이와 TV 폭력

부모들은 갓난아기들이 흉내내고 따라하는 것을 보며 흐뭇해한다. 태어난지 얼마 안되는 영아들도 엄마 아빠에게 방긋 웃어보인다. 영아들은 나쁜 것과 좋은 것을 구분할 능력이 없다. 그들은 무엇을 보든지 간에 그대로 흉내낸다.
십 사개월 정도 된 영아들은 또래들이나 어른들을 따라할 뿐 아니라 텔레비전에 나오는 것들을 보고 흉내낸다. “가정의 울타리 밖에서 일어나는 폭력은 매일 같이 일어나는 흔한 것으로서 놀랄 만하고, 자극적이고, 깊은 인상을 남길 정도로 효과적이다. 그런 세상을 다루는 텔레비전을 사실적인 정보원으로 바라볼 때 어린이들은 아주 어린 나이에도 가장 깊은 인상을 받게 된다.” 우리의 어린 자녀들은 무서운 TV 장면을 볼 때에 긴장하고 감정적이 된다. 물론 어른들도 똑같이 반응할 수 있지만, 그들은 지금 보고 있는 것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것이 아님을 알기 때문에 자제하게 된다.

반면에 아이들은 부모가 무엇이라고 설명해 주든지 간에 그들이 눈으로 보는 것을 그대로 믿는다. 매일 두 시간에서 세 시간 정도 텔레비전을 보는 아이들은 8학년을 마칠 때 쯤이면 8,000건의 살인과 100,000건의 폭력을 보게 된다. 예를 들어 겨우 3.5분동안 텔레비전 프로의 폭력을 시청한 5세에서 9세까지의 어린이들은 비폭력적인 프로를 시청한 아이들에 비해 그들이 본 것을 흉내낼 준비가 더 잘 되어 있다.

설상가상으로 어린이들의 텔레비전 프로는 어른들의 것보다 더 폭력적이다. 최근 TV Guide는 “TV 폭력이 우리의 어린이들을 저격하는가” 라는 제목의 놀랄 만한 기사를 실었다. 이 기사는 만화를 가장 폭력적인 프로그램으로 선정하였다. 오늘날 어린이들은 부모들보다 6배나 더 강도 높은 폭력에 노출되고 있다. 게다가 텔레비전이 현대 사회에서 가장 인기 좋은 보모가 되어버린 시점에서, 부모들이 원하든 원치 않든 아이들은 자기들이 보는 것으로부터 배운다. 텔레비전이 내놓는 이 야단법석에 우리의 어린 아이들을 내놓고 이렇게 마음을 푹 놓아도 되는 것일까?

 

TV에 제물이 되는 청소년들

텔레비전이 가장 비싼 희생 댓가를 요구하는 위기의 시기는 바로 사춘기 전이다. 한창 감수성이 예민할 시기에 노골적인 섹스와 다른 범죄들의 사실적인 묘사를 보는 것은 그들의 마음에 지울 수 없는 인상을 남긴다. 성인이 되면 그들은 이러한 정신적인 청사진에 의한 영향력을 저항하기가 훨씬 힘들어 질 것이다. 그러한 “마음의 오염”은 그 주인의 마음에 영원히 영향을 끼칠지도 모른다.

또한 많은 청소년들은 제재받지 않는 무한정의 자유 시간을 갖고 있다. 이것이 특별히 걱정거리가 되는 이유는 이 또래 청소년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프로가 바로 MTV(Music TV)이기 때문이다. MTV의 노골적이고도 폭력적인 주제들은 그들 뿐 아니라 어른들까지도 폭력적으로 만든다. TV의 성적인 묘사는 또한 성적인 욕망들을 자극한다. TV를 많이 본 아이들일수록 첫 성경험을 하는 나이가 어리며, 그 대부분은 결혼 생활 밖이다. TV 대신, 십대들을 위해 건전한 활동들을 마련하면 그들은 나이가 들어서도 이런 종류의 행동에 쉽게 발을 들여놓지 않을 것이다.

많은 이들이 TV가 우리 자녀들에게 미치는 손상에 대해 슬퍼하지만, 동시에 자신들의 흥미를 위해 TV를 계속 보고자 한다. 어른들의 쾌락 추구에 우리 아이들이 희생되고 있는가? 만일 부모들이 수많은 우리 자녀들이 범죄자로 성장하기를 원치 않는다면, 우선 부모가 먼저 텔레비젼을 멀리해야 할 것이다.

 

부모의 의무

첫번째 단계는 TV를 끄고 폭력과 성적 묘사가 난무한 비디오를 빌리지 않는 단순하고도 간단한 것이다. 선택된 채널들을 끄게 하는 채널 제한 프로그램도 있다. 선택된 시간에 모든 채널을 꺼버리는 타임 리미터도 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좋은 해결책은 TV를 내다버리는 것이다. 여러해 전에 우리 집에서는 이렇게 했고 그 결단을 내린 것을 한 번도 후회해 본 적이 없다.

몇 년전 TV에 저항한(?) 인디아, 봄베이 주민들의 이야기가 뉴스에 나왔다. TV의 폭력과 섹스에 신물이 난 몇백명의 사람들이 1994년 12월 TV를 창 밖으로 내던졌다. 오늘날 이 유명한 봄베이의 주택가에 사는 1200명의 주민들 중 단 한 사람도 TV를 갖고 있지 않다. 그 결과로 가정생활의 질이 한결 더 나아졌다고 이들은 얘기하였다.

“그러면 TV없이 어떻게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알 수 있소?”라고 할 분들도 있을 것이다. TV 뉴스보다 훨씬 더 유익한 뉴스 소스들이 많이 있다. 신문, 저널, 주간 잡지, 웹 싸이트, 그리고 온라인 서비스 등이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 시대에 TV가 제공하는 정보가 언제나 최상의 것은 아니다. 한 저녁의 뉴스거리 전부 다를 합쳐도 신문의 한 쪽의 반 밖에 안 된다. The Detroit News는 1996년 12월과 1997년 1월에 걸쳐, 4개 방송사의 뉴스프로 40개를 조사한 결과, “각 방송국마다 범죄가 가장 흔한 소재”였다고 보고하였다. 또한 둘째로는 재해, 사건 사고, 홍수, 돌풍 등이었다. 더 이상 뉴스만을 본다고 해서 폭력물 시청으로부터 안전할 수 없게 되었다. 나아가 시청 시간을 더 늘리는 각종 광고들이 끼어 있다.

사실 TV는 하나의 오락상자이다. 만약 프로그램이 흥미롭지 않으면, 대부분의 시청자들은 다른 채널로 돌린다. 많은 이들은 TV를 포기하면 그러한 급진적인 변화에 대처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당신이 전격적으로 그 괴물을 버렸다고 하자. 그 많은 자유시간들을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 가족 활동, 취미 생활, 집수리, 그 밖에 다른 할 것들이 많이 있다. 만일 우리가 성품 계발과 폭력 예방에 관심이 있다면 우리의 시간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우리의 마음을 도덕적으로 이끌 만한 여가 활동을 계획하는 것이다.

19세기의 어떤 유명한 종교 저술가는 성품 계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바라봄으로 우리는 변화된다. 만약 그대의 마음이 다른 이들의 도덕적 결함과 불완전에 머무른다면 그대 역시 그와 똑같은 모습으로 바뀔 것이다. 그대는 성품에 결함이 생기고 정신적으로 한 쪽으로 치우쳐져 불균형해질 것이다. 그대의 마음이 완전하신 그리스도의 생애에 머무르게 하라. 생각들이 그분께 집중되어 있고 대화의 주제가 하늘의 것들이 되면 그대는 ‘그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게 될 것이다. 그대는 ‘정욕으로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될 것이다.”

참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높은 부르심이 있다.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 이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고자 할 때 우리는 예수님을 더 많이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세상의 것들에게서 눈을 돌려 참된 평안과 행복을 주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들을 바라보자. 사랑하는 가족들과의 대화 시간, 자연 가운데서 보고 명상하는 시간, 가정을 참 안식처로 가꾸고 꾸미는 일들, 도움이 필요한 이웃을 돕는 일, 성경 말씀을 읽고 기도함으로 자아를 버리고 내 안에 예수님을 모시는 일들 등은 TV를 보며 폭력적으로 변해가는 우리 가족에게 참된 그리스도인의 마음을 품게 할 것이다.

2부 - 등 돌린 자녀 마음 사기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삼상15:23. 이것은 매우 두려운 말씀이다. 자녀가 부모에게 반역적일 때에는 마귀가 그의 의지와 마음을 지배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반역적인 자녀의 마음을 붙잡고 있는 어둠의 힘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만 풀릴 수 있는 마법과 같다. 많은 경우 부모들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자녀들의 마음에 반역의 씨앗을 뿌린다. 성경은 이러한 위험들을 지적해 주고 있다.

 

부모의 모본

부모로서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말하는 대로 실행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 알고, 진리에 대해 이야기하며, 심지어 겉모습으로는 그리스도인인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우리의 심령으로는 우리가 공언하는 대로 생활하지 않을 수 있다. 예수께서는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라고 말씀하셨다. 마15:8.

주말 세미나 후에 한 부부가 나에게 다가와서 이렇게 말했다. “정말 좋은 강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 아이는 어떻게 하지요? 우리 아이는 매우 반항적이에요. 우리집 딸아이는 여덟 살 밖에 안되었는데, 하는 말마다 모두 거짓말입니다. 우리가 하라고 시키는 것은 아무 것도 안 합니다. 심지어 저녁상 차리는 것을 도와달라고 부를 때도 오지 않을 정도 입니다.” 나는 우리의 자녀들이 반항의 정신을 나타날 때에는 자신의 생애를 먼저 점검해 봐야 한다고 조언해 주었다. 그 부모의 어린 딸이 거짓말하는 문제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나는 부모들이 무의식 중에 거짓말하도록 가르치는 쉬운 예를 들어 주었다. “전화벨이 울리면 부모는 ‘이렇게 전화해 주셔서 정말로 반갑습니다’라고 얘기합니다. 그러나 전화를 끊고 나서는 ‘그 사람들이 나 좀 그만 귀찮게 했으면 좋겠어.’라는 뜻을 말을 내뱉곤 말합니다. 이런 식으로 부모들은 자신도 인식하지도 못하는 사이에 자녀들에게 거짓말하도록 가르치는 것이지요.” 나는 다음과 같은 말로 해결책을 제시하였다. “부모인 우리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살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두 분께서도 그렇게 기도해 보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만일 두 분께서 자원하는 심령을 갖고 주님께 매달린다면, 주님께서 두 분의 기도에 응답하실 것입니다. “

그 다음 주 그 부부의 남편에게서 전화가 왔다. “선생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을 때, 저는 솔직히 마음 속으로 화가 났었습니다. 그러나 그날 밤, 하나님께서는 내가 온 생애를 통해서 속여왔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내가 딸아이더러 거짓말하라고 가르친 것이지요. 하나님께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다음날 아침 내 딸을 꼭 껴안으며 용서를 구했습니다. ‘딸아, 아빠는 하나님께서 너와 나의 마음을 변화시켜 주시기를 원한다. 우리 집은 이제 옛날과는 달라질 것이야.” 얼마 안되서 딸아이가 변하기 시작했어요. 지금은 정직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엄마 아빠를 도와 준답니다!” 우리 부모들이 마음 속에서 반항하기를 그치고 죄를 자백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우리의 자녀들을 변화시키실 것이다.

 

바라봄으로

반항의 씨앗이 우리 자녀들의 마음에 심어지게 되는 두번째 방법은 그들로 하여금 반항을 바라보게 놔두는 것이다. 우리의 자녀들이 무엇을 읽거나 보거나 듣도록 허락하든지 간에 그들은 그대로 될 것이다. 성경은 “종말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고 하였다(빌 4:8).

한 어머니가 점점 더 버릇 없어지고 불순종하는 세살 짜리 아들 문제로 내게 조언을 구했다. 나는 그 어머니에게 “아이를 올바르게 가르치기 위해서 무엇을 하십니까?”라고 물었다. 그 어머니는 “매일 성경공부를 하고 조석으로 가족 예배를 드립니다. 그리고 자질구레한 일들을 돕도록 하지요. 그리고는 아동용 비디오를 보게 합니다.” 라고 대답했다. 기독교 서점에서 산 비디오라고 해서 다 그리스도인들이 보기에 합당한 것은 아니다. 어떤 비디오들은 어린이들로 하여금 실제 생활에 싫증을 내게 함으로, 반항의 씨앗을 심기 시작한다. 비디오를 많이 보는 아이들의 성격은 재미있고, 자극적이며, 흥미 위주의 성격으로 서서히 형성되어 간다. 그런 아이들은 단순하고 영적인 것들에 대한 관심과 흥미를 잃어 버리게 된다. 나는 성경에 기록된 ‘바라보는 대로 변화 된다’는 법칙을 가르쳐 주면서, 자녀가 어떤 비디오나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볼지 선택하는 데 있어서 빌립보서 4장 8절의 조언을 따르도록 가르쳐 주었다.

 

지도와 훈계

어린 자녀의 생활에 지도와 훈계가 빠져 있다면 그것은 반항의 씨를 심는 또 하나의 방법이다. 세상의 철학은 말하기를 행복한 아이로 키우기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그리고 언제든지 그들이 원하는 것을 하도록 내버려 두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도처에 반항적인 어린이들과 십대들에게서 그 열매를 볼 수 있다. 자녀들이 원하는 것을 무엇이나 다 주는 것은 그들을 이기적으로 만들고 성품을 쾌락적으로 유도한다. 자녀들이 그들의 마음을 어떻게 굴복하고, 그것으로 인하여 올바른 것을 행할 수 있는 힘을 어떻게 받을 수 있는지를 보여 주어야 한다. 자녀들이 아주 어렸을 때부터 자아 부정과 순종의 축복을 경험하도록 도와 주어야 한다.

 

일관성

반항의 씨앗을 심는 네번째 방법은 일관성 없이 법칙과 규율을 적용하는 것이다. 때때로 우리 부모들은 자녀들이 순종하는 것이 부모의 기분이나 환경에 따라 다를 수 있다고 생각도록 만든다. 예를 들어 부모가 바쁠 때는, 자녀들이 불렀을 때 즉시 오지 않아도 대충 넘어 간다. 때로 자녀들이 불순종하는 경우에도 그냥 넘어가거나, 한 아이는 훈계하고 똑같은 일로 다른 아이는 그냥 놔두기도 한다. 또는 집에서라면 꾸지람을 받을 일도 다른 집을 방문할 때는 그냥 무시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칙은 언제나 동일하다. “나 여호와는 변역지 아니하나니...” 말 3:6. 가정을 다스릴 때 항상 일관성 있게 규칙을 적용하는 것은 자녀들로부터 존경, 신뢰를 불러일으키게 할 뿐 아니라, 불평등으로 인한 불만과 혼돈을 최소화 해준다.

 

나태함

반항의 다섯번째 근원은 게으름이다. “네 아우의 죄악은 이러하니 그와 그 딸들에게 교만함과 식물의 풍족함과 태평함(Idleness = 게으름, 나태함)이 있음이며...” 겔 16:49. 과거에 나는 항상 아이들이 원하는 만큼 자유 시간을 주곤 하였다. 어떤 책에서 좋은 어머니는 그렇게 해야 한다는 내용의 글을 읽은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항상 아이들 사이에 일어나는 말다툼과 신경질 뿐이었다. 더 많은 자유 시간을 주면 줄수록, 아이들은 더 불만이 쌓이고 버릇이 없어지고 반항적으로 되어 갔다. 그러나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의 지도하심대로 아이들에게 적당한 할 일을 찾아 줌으로써, “바쁜 손이 행복한 손이다”라는 격언을 실생활에서 경험하게 되었다. 우리의 자녀들이 부지런하고 유용한 사람이 되도록 가르친다면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할 때에만 느낄 수 있는 진정한 기쁨을 그들도 경험하게 될 것이다.

 

메마른 땅

마지막으로 반항은 기쁨과 행복, 진정한 교제가 없는 곳에서 자라나는 잡초와 같은 것이다. “오직 거역(반역)하는 자의 거처는 메마른 땅이로다” 시 68:6. 우리의 가정이 “메마른 땅”처럼 되고 안 되고는 전적으로 부모에게 달려 있다. 예를 들어, 아빠가 밖에서는 미소를 머금고 사람들에게 호인이라는 소리를 듣지만, 가정에서는 시무룩하고 소극적이며 가족들이 하는 일에 잘 관심을 두지 않는다면 그런 아버지는 가정을 메마른 땅으로 만든다. 그리고 아버지가 컴퓨터나 신문 앞에만 앉아 있을 뿐, 자녀들을 위해서는 시간을 내어주지 않는다면, 그런 아버지 역시 가정을 메마른 땅으로 만든다.

현대 사회는 어머니들을 가정 밖으로 이끌어 내는데 성공하였다. 그래서 어린 자녀를 가진 엄마 역시 사회 생활과 직장, 경력을 쌓아가느라고 바쁘다. 그런 어머니들은 모든 사람들을 위해 시간을 내줄 수 있지만, 자녀들을 위해서는 도무지 시간이 없다. 그 결과, 가정은 메마른 땅이 되고 사랑의 꽃은 시들며 오직 반항의 씨앗만이 뿌리를 내리고 자라게 된다. 우리의 자녀들에게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 시간, 정열, 열성, 헌신을 주자. 그리하여 우리의 가정이 천국을 맛볼 만한 낙원이 되도록 하자.

 

선택

우리는 다니엘처럼 다음과 같은 기도를 드릴 필요가 있다. “우리는 이미 범죄하여 패역하며 행악하며 반역하여 주의 법도와 규례를 떠났사오며 ... 주여 공의는 주께로 돌아가고 수욕은 우리 얼굴로 돌아옴이 오늘날과 같아서 유다 사람들과 예루살렘 거민들과 이스라엘이 가까운데 있는 자나 먼데 있는 자가 다 주께서 쫓아 보내신 각국에서 수욕을 입었사오니 ... 이는 그들이 주께 죄를 범하였음이니이다 주 우리 하나님께는 긍휼과 사유하심이 있사오니 이는 우리가 주께 패역하였음이오며.” 단 9:5, 7, 9.

반역이 우리에게서 시작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해결책을 선택하는 것도 우리에게서부터 시작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용서하시며 새로운 원칙들로 새롭게 시작하도록 힘을 주실 것이다. “나의 힘을 의지하고 나와 화친하며 나로 더불어 화친할 것이니라.” 사 27:5.

하나님의 능력과 지도하심으로 우리의 마음과 가정에 있는 모든 반항의 씨앗들을 뿌리뽑을 수 있게 되기를 기원한다. 예레미야 32장 27절에 있는 이 약속을 기억하도록 하자. “나는 여호와요 모든 육체의 하나님이라 내게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감사

기력이 하루 하루 쇠하여 가고
소망도 점점 사라져 가며,
두 발은 힘을 잃어 떨립니다.
무거운 짐으로 어깨는 굽어 가고
용기도 이젠 그 모습을 감춥니다.
의지는 약하고 밤은 불편함 때문에 너무 길고,
낮은 너무 짧고 바쁘오니
이런 근심과 피곤함 속에서 어떻게 감사해야 하나요?

하지만 여전히 기력은 남아 있고
소망은 용기와 함께 생활 속에 함께 하며,
아직도 두 다리는 가파른 언덕을 오를 수 있습니다.
어깨는 여전히 무거운 짐을 나르고
내 육체와 의지가 감당할 수 없을 때는
보이지 않는 힘이, 나를 도와 줍니다.
낮이나 밤이나 주님 빛을 주시고
고통을 이겨 가는 은혜를 주시니
난 감사를 드릴 수 밖에 없습니다.

육체와 정신이 필요한 모든 것
매일매일 채워 주심을 감사드리며
그 세심한 생명의 말씀에 감사합니다.
“주님 안에 살아가는 자가 진정 사는 것이라”
이 땅의 삶이 화려하던 소박하던
낮이나 밤이나 빛 되시는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그것이 주님 가신 길 따라가는 길이오니.

“감사할 수 없는 일들이 인간의 눈에는 산더미 같음에도 범사에 감사하라 하심은 주님이 그 중에 함께 하시기 때문이요 말없이 도우시며, 고통을 통해 은혜를 더하시는 분이 바로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 부족하지만 주님의 은혜로 감사하며 웃을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아멘!”



 

3부 - 어둠에 갇힌 청소년들을 위하여


겉으로 보았을 때 데일은 그가 원하는 모든 것을 갖고 있었다. 키가 큰 호남형에, 잘 생긴 얼굴과 바른 예절, 우수한 성적, 그리고 하나님을 찾는 열정까지도. 그러나 데일은 마음 속 깊은 곳에서 고통당하는 영혼이었다.

그는 자기 자신의 비하와 우울증으로 고생하였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신앙에 결코 만족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생각하고 극단적으로 엄격한 생활을 했다. 또한 그는 늘 자신은 아버지를 만족시킬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사로 잡힌채 살아 왔으며, 아버지로부터 소외당하는 삶을 살아 왔다. 창문을 통하여 바라볼 수는 있지만 마음대로 다가갈 수는 없는 거리를 내려다 보면서, 그는 홀로 무거운 정신적 짐을 짊어진 채 살았다.

데일은 여러번 자살 시도를 했고 마침내 성공하였는데, 그 사이에 그는 많은 약물치료를 받았고, 정신병원, 상담, 각종 치료법등을 전전긍긍하며 돌아다녔으나 그 효과도 잠시 뿐이었다. 그의 비참한 죽음은 지금도 친구들, 가족들, 그리고 상담자에게 큰 충격으로 남아 있다.

 

우리를 놀라게 하는 통계들

U. S. Surgeon General에 따르면 10~15%의 어린이들과 사춘기 청소년들이 우울증의 증상을 나타내고 있다고 한다. 우울증은 모든 연령층에 있어서 가장 높은 자살의 이유이다. 자살은 15~25세 사이의 젊은이들 사망률에 있어서 세번째 요인이다. 미국에서만 매해마다 8%에 해당하는 어린이와 사춘기 아이들, 그리고 성인 13명 중 1명이 자살을 시도한다. 점점 더 많은 숫자의 똑똑하고 능력있는 젊은이들이 우울증에 빠져들고 있다. 데일처럼 거의 절반이 자살을 시도하고 있으며 슬프게도 그 중 10% 정도는 성공한다. 만일 우리가 젊은이들의 자살 증가를 막기 원한다면, 그 뿌리인 우울증을 캐내야 된다는 것이 명백하다.

 

십대 우울증의 이유들

십대의 우울증은 다른 연령층의 우울증보다 훨씬 더 높은 수치를 보이고 있다. 예를 들어 지난 90년대 동안 미국 내에서 1백만이 넘는 처방전들이 우울증에 걸린 십대들과 어린이들을 위해 쓰여졌다. 왜 십대들과 어린아이들의 우울증이 이토록 크게 증가하는 것일까? 부모와 형제 자매간의 불화를 포함한 가족 문제를 그 원인으로 들 수 있다. 또한 암, 사고, 죽음, 이혼, 근친상간 등과 같이 가정에 닥친 충격 또한 십대 우울증에 한 요인이 되고 있다. 깨어진 인간관계와 학우들과의 어려움도 우울증의 원인이다. 사랑과 성관계를 통해 감성적 해결책을 찾으려고 하는 학생들은 우울증으로 이끄는 정신적 충격을 받을 확룔이 훨씬 더 크다. 한 연구 자료는 “왕따” 문제를 우울증의 주요인으로 꼽았다. 일본에 사는 16살 짜리 학생인 시노의 이야기는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

시노의 아버지는 정치가였다. 일본에서 정치가의 자녀들은 그 정치가의 명예에 먹물을 칠하기 위한 방편으로 학생들과 교사들의 목표물이 되고는 한다. 목표가 된 정치가의 자녀는 정신적인 고통을 견디다 못해 마침내 자살을 하게 된다. 그러면 그 정치가는 치욕을 당하고 대중의 신뢰를 잃게 된다. 학교에서 그런 취급을 받는 데에는 어느 정도 자신의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는 시노는 항우울증 치료를 받아야만 하는 심각한 우울증에 시달리게 되었다. 병원의 치료에도 불구하고 우울증은 계속 되었고, 그녀는 여러 차례 자살을 시도하였다. 다행히 시노의 이야기는 긍정적인 결말을 맺게 되는데, 그 이야기는 뒤에서 다시 하도록 하겠다.

우울증 예방과 치료에 있어서 기성 세대의 사회적 제도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혼한 부부와 맞벌이 가정이 늘어가면서, 어린이들은 그전 세대에 비해 훨씬 적은 부모의 관심과 사랑을 받게 되었다. 콜만 박사는 “많은 젊은이들이 집에서 어른들이 할 의무와 책임을 떠맡고 있다. 이것은 그들에게 중압감을 준다.”고 말하였다. 핵가족 제도로 인하여 어린이들은 보통 조부모, 숙모, 숙부들과 의미있는 관계를 맺기에는 너무 멀리 떨어져 살고 있다. 한 때는 방과 후 어린이들에게 안전한 피난처였던 이웃도 많은 경우 더 이상은 바람직한 환경을 제공하지 못한다.

마리화나나 알콜 같은 약물 남용과 Bulimia(병적 과식욕), Anorexia Nervosa(식욕 부진증)를 포함한 불규칙한 식습관은 십대 우울증의 부가적인 이유이다. 십대들을 위한 영화, 음악, 비디오 게임과 같은 오락들은 대부분 자녀들의 정신과 감정을 우울하게 만드는 가사와 주제들로 채워져 있다. 그들은 분노와 폭력이 불만에 대처하기 위한 바람직한 방법이라고 본다. 실제로 어떤 인기있는 노래들은 분노로부터 탈출하기 위한 매혹적인 방법으로 자살을 그려놓았다.
우울증으로 이끄는 다른 요인들 중에는 학교 성적에 대한 걱정, 낮은 자아 평가, 강간의 후유증, 성 정체성에 대한 혼란, 인종 문제 등이 있다. 소수 민족의 젊은이들일수록 더 높은 우울증과 자살 시도율을 갖고 있다.

 

어른들이 젊은이들을 위해서 해야 할 일

어린이와 사춘기 아이들에게 우울증이 증가하고 있다면, 또한 우울증에 걸린 자녀들 중 거의 절반에 상당하는 청소년들이 자살을 시도하고 있다면, 우리는 이것을 심각하게 생각해야 되지 않겠는가? 어른들과 의미 있는 관계를 갖고 있는 자녀일수록 현대 사회의 사춘기 아이들이 겪고 있는 압박으로부터 살아남을 확률이 높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주변을 둘러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이웃 사람이든지, 교인이든지, 교사이든지, 부모든지, 삼촌이나 이모, 혹은 형제 자매든지, 조부모이든지 간에 한 청소년의 삶에 변화를 줄 수 있다.

이전 세대에서는 대가족 제도가 부모와 자식간의 문제를 푸는데 도움을 주었고, 긍정적인 역할을 했었다. 여가 시간은 대부분 가족들과 함께 보냈다. 부모가 일하는 아이들은 방과 후에 간식거리를 들고 텔레비전 앞에 앉거나,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은 상태에서 또래들과 쇼핑을 가는 대신 할머니 댁으로 갔다. 청소년들이 어렸을 때부터 어른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 왔다면, 십대가 되어서도 그들은 여전히 어른들을 신뢰할 것이다. 십대들은 문제 많은 같은 또래의 아이들과 어울리는 대신, 삶에 유용한 기술들을 배울 기회가 필요하다. 조부모는 부모보다 여가 시간이 더 많으므로 십대 손자 손녀들을 데리고 나갈 기회가 더 많다. 또한 건축이나, 바느질, 요리 등의 중요하고도 실제적인 기술들을 가르쳐 줄 수 있다. 또한 손자 손녀들의 학예회나 놀이 등에 참여할 수 있다. 이것은 빨리 시작할수록 좋은 것이다.

삼촌과 이모, 고모, 그리고 나이든 형제자매들은 조부모만큼이나 큰 버팀목이 되어 줄 수 있다. 부모와 자녀 간에 약간의 문제가 생겼을 때, 다른 어른들은 중립에 서서 도울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친척들이 주위에 살고 있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도울 수 있는 가정이 주변에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편모 밑에서 자라는 소년들은 그들의 삶에서 긍정적인 남성의 영향력을 필요로 한다. 사도 야고보는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고 하였다(약 1:27).

아마도 우리가 나가는 교회에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청년들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들에게 수학이나 사회 과목을 가르칠 수도 있다. 학교 공부와 씨름을 하고 있는 대부분의 어린이들이 정서적인 문제를 갖고 있다. 한 젊은이를 도와 주기 위해 손을 내밀 때, 우리는 그들이 인생을 긍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도록 도와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귀한지 깨닫게 도와주며 삶의 특별한 목적을 찾아가도록 도와줄 수 있다. 궁극적으로 이것이 우울증과 싸우기 위해 우리 모두가 써야 할 방법이다.

 

우울증에 빠진 십대를 돕는 방법

우리가 알고 있는 어떤 십대가 우울증을 갖고 있거나 혹은 자살할 기미를 보이고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첫번째로, 당신은 우울증과 자살의 위협을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 또한 만일 치명적인 무기가 주위에 있으면, 그것을 치워야 한다. “만약 집에 총을 갖고 있다면, 당신이 자살할 확률은 5배나 된다.”고 오코노 박사는 말했다.

시노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이 긍정적인 결말로부터 우리는 중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다. 시노가 또래들과 교사들로부터 거절받은 느낌은 너무나도 심해서 그녀는 차라리 죽기를 원했다. 그러던 중 그녀는 겨울 방학 동안 일단의 젊은 그리스도인 청년들을 만나게 됐다. 시노는 그리스도인이 아니었지만, 그 젊은이들의 기쁨과 사랑에 이끌렸다. 청년들은 시노와 친구가 되어 그녀를 위해 기도해 주었다. 시노 역시 그 청년들처럼 행복하게 되기를 원했다. 시노는 젊은이들 중에서 미쉘과 특별히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 “시노가 친구를 절박하게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그녀는 외로웠고 정에 굶주려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시노가 더 영원한 친구를 찾도록 도와 줘야만 했어요. 저는 합창단과 여행을 하고 있던 터라 거기에 오래 머무를 수 없었고, 제가 떠나고 난 뒤에 그녀는 더욱 더 우울해질 것이란 사실을 알았죠. 우리 중 누구나를 위해서 언제라도 항상 그 자리에 계실 분은 예수님 한 분 밖에 없죠.
“나는 예수님에 대해서 그리고 그녀를 향한 그분의 놀라운 사랑에 대해서 얘기해 줬어요. 성경을 읽으므로 그분에 대해 더 자세히 알 수 있다는 것을 설명했죠. 그분의 인도하심과 평화를 위해서 어떻게 기도하는지 보여줬어요. 비록 다른 사람은 그녀를 거절할지라도 예수님은 절대로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려줬습니다. 그녀에게 제 이메일 주소를 가르쳐 주고 우리는 서로 연락하기로 약속했어요.”

개학이 되어 시노는 학우들과 교사들의 잔인함으로 다시 돌아갔다. 그러나 이제는 그녀가 따돌림당할 때 도와주시는 새로운 친구가 생겼다.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기도를 통하여 시노는 그들의 행동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하였다. “나는 절대로 나쁜 사람이 아니고 그들 역시 100% 나쁘지는 않아요. 모든 사람에게는 좋은 점이 다 있어요. 내가 어떻게 이런 느낌을 갖게 되었을까요? 하나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는 것을 느껴요.” 시노는 미쉘에게 편지를 썼다.

시노가 같은 또래 아이들의 집단행동에 대해서 객관적인 태도를 취하자 그들은 그녀에게 미치는 영향력을 잃어버렸다. 교사들은 그녀의 새로운 태도에 놀라고 말았다. 그녀는 행복했고 성적은 안정적이었다. 밤에 잠도 잘 자기 시작했다. 곧 그녀는 약물을 끊었고 비슷한 치료를 받고 있는 여동생을 도와주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처럼 우울증으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생각을 새로운 방향으로 바꿀 필요가 있다. 궁극적으로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의 빛으로 자신들의 가치를 보고 삶에 대한 그분의 목적을 깨달아야 한다. 하지만 단순히 그들에게 성경구절을 인용해 주는 것은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증명할 만한 눈에 보이는 무엇이가를 필요로 한다. 그들에게는 영원한 친구를 소개시켜 줄 친구가 필요하다.

 

우울증 치료 방법

모든 연령층의 우울증 환자들을 치료해 온 한 의사는 “생활 습관을 바꾸는 것과 같은 장기간의 해결책에 중점을 두는 것이 중요하다” 고 말하면서 아래와 같은 것들을 “처방”하였다.

1. 부정적인 생각을 피하라. 마음이 인생의 축복들을 음미하도록 훈련하라. 자신의 힘으로 문제 자체를 없앨 수 없는 경우에는, 비관적인 생각이 들 때마다 얼른 긍정적인 생각으로 바꾸라. 성경, 특별히 잠언을 읽는 것은 정신 건강과 우울증을 호전시킨다. 용기를 주는 성경 말씀들을 외우고 암송하라. 예수의 생애를 연구하고 명상해 보라. 교회에 나가고 교회 활동들에 참여하라.
2. 규칙적으로 충분한 수면을 취하라. 숙면은 신체의 면역 기관들을 강화시켜 우울증을 막아내고 양호한 정신 건강을 촉진시키도록 돕는다. 낮 시간 동안 흥미있고 유익한 활동을 하는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밤에 잠을 잘 잔다. 조용하고 어둡고 환풍이 잘 되는 방에서 자도록 하라. 잠자리에 들기 전에 영감적인 글을 읽거나 조용한 음악을 들으라.
3. 규칙적으로 운동하라. 가능한 한 옥외에서 하는 운동이 좋지만 실내 운동도 크게 도움이 된다.
4. 심호흡을 하라. 신체 내 낮은 산소량은 기분과 정신적 기능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앉을 때나 설 때나 곧게 허리를 편 자세를 유지하라. 산소량을 늘리기 위해서 일분당 여섯 번씩 심호흡을 하라.
5. 좋은 클래식 음악과 찬송가를 들으라. 음악은 부정적으로나 긍정적으로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 결과가 나와있다. 좋은 음악은 우울증 초기에 치료 목적으로 사용되지만 요즘 팝 뮤직의 가사와 스타일은 우울증을 악화시킨다.
6. 광선 치료법을 사용하라. 햇볕이 잘 들지 않는 곳에 사는 어떤 사람들은 SAD(Seasonal Affective Disorder)를 경험하는데 이것은 낮 시간에 생성되는 호르몬이 부족할 때 생기는 우울한 증상이다. 그러나 하루에 30분씩 햇볕, 혹은 밝은 인공 불빛을 쬐었을 때 증상이 사라졌다. 방 안을 항상 환하게 해야 한다.
7. 매일 영적인 시간을 가지라. 신앙이 깊은 환자들은 그렇지 않은 환자들보다 더 빨리 호전되었다. 매일 성경을 읽고 그 가르침들을 행하라. 삶의 문제들을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로써 그분과 교통하라.

젊은이들 사이에 증가하고 있는 우울증은 우리의 가장 귀중한 자산에 대한 마귀의 공격이다. 우리 주위의 젊은이들의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 무엇인가를 해야 할 결심을 해야만 한다. 아무리 작거나 단순한 것일지라도 지금부터 시작해야 한다. 우리에게는 낭비할 시간이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우리 주위의 청년들에 대해서 책임을 물으실 때, 당신은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25:34~36, 40)는 말을 들을 수 있는가? 오늘 우리에게 영혼들이 맡겨졌음을 잊지 말자.

4부 - 치명적인 소리


세계는 치명적인 사운드로 술렁이고 있다. 반항, 증오, 죽음, 관능과 외설이 노래의 가사로부터, 귀청이 찢어질 것 같은 앰프로부터 소리지르고 있다. 이러한 뒤틀리고 비꼬인 예술이 하늘의 분위기를 호흡하며 평화와 사랑, 기쁨이 주관해야 할 교회 음악에 슬며시 들어오고 있는 것은 그 배후에 악의 세력이 활동하고 있기 때문임을 직관적으로 알 수 있다.

잠시만! 거룩한 교회의 아치를 메아리치고 들려오는 저 소리는 무엇인가?

영적인 갈증을 채울 만한 무언가를 찾고 있는 젊은이들은 현대 크리스챤 뮤직(CCM)의 귀에 거슬리는 소음을 즐긴다. 성경 가사는 재즈와 블루스의 매혹적인 세련미와 불협화음 사이에 끼어 있다.
세상의 최첨단을 달리는 유행보다는 언제나 한 발 늦게, 그러나 서서히 이 소음들이 교회의 예배 형식에 도입되고 있다.

요즘의 많은 크리스챤 음악들은 곡에 붙인 가사의 뜻은 좋을지 모르나 그 스타일에 있어 세상의 댄스 뮤직들과 별반 차이가 없어 영적으로 분간하기 힘들다. 음악은 우리에게 영적으로 영향을 끼치는가?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음악을 사용하는데 있어 어떤 특별한 표준을 갖고 계시는가?

 

과학의 증거

음악은 개인의 취향의 문제일 뿐, 도의를 따질 성격의 것이 아니라고들 생각한다. 그러나 과학자들이 음악을 연구한 결과는 음악이 단순히 개성의 표현이며 개인의 취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답하기에는 어려운 질문을 던진다.
노래의 가사는 우선 제쳐두고서라도 음악은 그 자체만으로도 우리가 인정하고 싶지 않은 능력을 행사하고 있다.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믿고 싶지는 않겠지만 실제로 음악은 우리에게 정신적으로 뿐만 아니라 신체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음악에 적응하는 존재들로서 우리의 몸과 감정의 깊숙한 곳으로부터 음악에 반응한다. 음악은 우리 자신들의 일부이기 때문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도 모르는 채 무의식적으로 음악에 반응하는 것이다.

과학은 무의식과 음악 사이의 관계에 대해 몇몇 흥미로운 사실을 밝혀냈다. 음악은 지성이나 의지(전두엽과 소뇌)를 통해서가 아니라 감정(탈라무스)을 통해서 두뇌로 들어온다. 실제로 음악은 이성을 비켜 지나간다. 음악이 지성적인 면으로는 감상되어질 수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제일 먼저 감정에 의해서 인식되어진다는 뜻이다. 일단 자극이 탈라무스에 전해지면 뇌는 자동적으로 침범당한다.

다른 연구 결과는 리듬과 하모니를 통해 음악은 모든 신체 기능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사실 음악을 듣는 사람은 깨닫지도 못하는 사이에 음악은 심장 박동수, 호흡, 그리고 다른 반사 운동들에 작용한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 신체의 작용들은 무의식 중에 일어난다.

다양한 종류의 음악들은 여러 가지로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다. 과학자들은 이것을 증명하기 위해 템포, 리듬, 하모니를 사용하였다. 리듬이 강하게 가미된 음악들, 가령 댄스나 행진곡들은 감각 운동 반응을 일으켜 운동 능력을 자극한다. 흥미롭게도 행진곡과 댄스는 각각 다른 종류의 신체의 움직임을 자극한다. 그리하여 음악은 신체적으로도, 감정적으로도 우리에게 영향을 준다.

한 연구자는 당김음으로 이루어진 댄스 음악이 청취자나 연주자 둘 다에게 (외관상)가벼운 최면을 거는 효과가 있음을 발견하였다. 이것은 쇼핑하러 가서 매장에서 틀어주는 “띄우는 음악”(기분을 전환하고 약간의 최면 효과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불리움)을 듣고 나면 경험할 수 있다. 소비자가 쇼핑을 하는 동안에는 기분이 좋지만 몇 시간 뒤에 매장 밖을 나서면 어지럼증과 함께 정신적으로 완전히 소모된 기분을 느낀다. 상점의 매니저들이 잘 아는대로 “띄우는 음악”은 쇼핑객들이 구매를 하지 않고자 하는 억제력을 떨어뜨리고 충동 구매욕을 증가시킨다. 이러한 음악은 알코올이나 마리화나를 아주 가볍게 사용하고 난 것과 비슷한 효과를 가지고 있다.

 

음악의 기준

당신은 성경에서 어떤 음악을 들어야 하는지 알려주는 목록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삶의 사소한 부분들까지 일일이 두 돌비에 써 놓지는 않으셨다. 그렇다고 해서 성경이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는 몇몇 것들에 대해 하나님께서 무관심하시다는 뜻은 아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10:31)고 분명히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음악을 선택함에 있어 성경이 어떤 기준을 제시하고 있는지 알아보자.

우리가 영적으로 분별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이 순결하고 거룩한 것에 머물러야 한다고 성경은 말한다. “종말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 만하며... 이것들을 생각하라”빌4:8. 더 나아가 우리의 신체는 궁극적으로 악이나 선 둘 중 하나의 세력의 지배를 받게 될 것인데 그러므로 성경은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12:1)고 훈계하고 있다. 몸과 마음 둘 다 순결함과 거룩함을 위해 보존되어야 한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하고 영적 식별력을 방해할 만한 것은 무엇이든지 신체 영역 안으로 들어와서는 안된다.

만일 우리가 음악이 갖고 있는 윤리적인 능력을 이해한다면 로마서 12장 1절의 말씀을 언제나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회심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음악과 사단이 고안해 낸 것들을 잘 분별할 수 없다. 사람이 그의 마음에 “새롭게 함”(롬12:2)으로 변화를 받지 않는다면 음악에 관련된 문제 뿐만 아니라 다른 것들도 별반 중요하지 않거나 사소한 일로 보일 것이다.

우리의 마음은 언제나 영적으로 밝은 지성의 통제 아래 있어야 한다. 댄스 음악의 리듬 패턴은 듣는 사람의 마음의 긴장을 줄이고 쉽게 영향을 받을 수 있는 상태를 조성하여 통제 불능이 되게 한다. 우리의 마음이 약해지면 우리는 사단의 능력에 쉽게 굴복하는 상태에 이르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롬6:16. 오직 두 가지 선택 밖에 없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마6:24.

댄스 음악은 마음의 통제력을 빼앗고 선택의 자유를 없앤다. 가사가 종교적이라면 주님을 위해서 “최면”에 걸리는 것도 괜찮지 않느냐고 반문할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인 경험의 어느 각도에서 보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인간의 선택력을 제거하지 않으신다. 의지를 강요하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에 전적으로 배치되는 일이다. 무아지경에 빠져 의지력이 약화되거나 완전히 없어지는 것은 사단 숭배의 한 부분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복음성가들은 나이트 클럽이나 디스코텍에서 흘러나오는 댄스 음악의 리듬 패턴을 바탕으로 작곡되어졌다. 이러한 형태의 음악은 육체적인 정욕에 호소하기 위하여 사단에 의해 고안된 것이다. 그는 정욕과 관능을 그려내기 위하여 댄스 음악을 만들어냈다. 댄스 음악에 맞춰 춤추고 있는 사람의 몸의 움직임을 관찰해 보라. 눈길은 자연히 몸통, 특별히 엉덩이에 가게 된다. 댄스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드는 것은 그 리듬(당김음, 강 약 중간 약 대신에 약 강 중간 강으로 된 것)과 연관된 것으로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이러한 몸의 움직임은 대단히 관능적이다. 그에 반해 군악대의 움직임을 보라. 여기서는 몸통 대신 사지로 눈길이 쏠린다. 팔과 다리의 움직임은 행진곡의 리듬에 반응하는 것으로서 자연스러운 것이다. 음악의 리듬의 패턴은 움직임의 종류를 지시한다.

관능적인 세속 음악들을 만드는 작사가들과 프로듀서들은 이 리듬 패턴의 원칙을 잘 알고 있으며 자신들의 음악에 이러한 이론을 적용시키고 있음을 스스럼 없이 인정한다. 롤링 스톤의 리더 믹 재거는 “당신은 아드레날린이 온 몸을 훑고 지나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것은 성욕을 일으킨다.”고 말하였다. 더 도어즈의 모리스는 “우리를 관능적인 정치가로 생각해 달라”고 말하였다. 제퍼슨 에어플레인의 발린은 “우리는 엔터테인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나누고 있는 것이다”라고 이야기하였다. 만일 이러한 음악가들이 자신들의 음악의 목적은 관능과 정욕을 조장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단지 여기에다 크리스챤 가사를 집어넣는다고 해서 그것이 거룩하고 성스러운, 그리고 교회의 예배에 맞는 음악이 되겠는가? 복음의 개념들을 그려내기 위해 댄스 리듬을 가미하는 것은 속된 것과 거룩한 것을 한데 섞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 두 가지를 구별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서 단연코 금하신 일이다. (겔22:26; 레10:8~11을 보라).

복음 댄스 음악은 크리스찬 가사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매우 기만적이다. 음악의 윤리는 가사에만 제한된 것이 아니다. 가사 자체는 음악을 그리스도인 경험에 알맞게 순결한 것으로 만들어 주지 않는다. 댄스 음악 자체는 연주하는 이나 듣는 이에게 있어 영성에 반대되고 영적 성장을 방해하는 속성을 갖고 있다. 음악의 가사와 음악의 스타일은 바늘과 실 같은 관계이다. 그리하여 성, 마약, 반항, 그 외의 메시지들이 록이나 댄스 음악의 형태로 듣는 이의 마음을 비집고 들어온다. 거룩하고 순결한 크리스천 가사를 그 반대의 것 -관능, 불순함 등- 을 그려내기 위해 만들어진 음악과 섞는 것은 전혀 맞지 않는 일이다. 이것은 영적인 형태의 간음이다.

우리가 선택한 음악들을 통해 교회에서, 가정에서 치명적인 소음이 무의식적으로 우리를 침식시키고 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최고의 표준까지 도달하라는 그리스도 예수의 부르심을 받고 있다. 그분에 대한 믿음과 성령의 능력으로, 그리고 열렬한 기도와 부지런한 성경연구로서 그분께서는 우리를 영적으로 고무시키고 그분과 우리의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음악으로 우리를 이끄실 것이다.

우리의 음악이 지옥의 것이 아닌, 하늘의 것이 되게 하자. 우리의 음악이 관능과 정욕 대신 하늘이 귀하게 보시는 순결, 거룩, 의를 반영하는 영적인 노래(골3:16; 엡5:19)가 되게 하자.

 

아이에게 배우세요!

그 어린아이는 당신보다 훨씬 위대합니다.
당신이 가르치는 그 아이가 당신을 가르칩니다.

당신은 그더러 예수와 같이 되라고 가르치지만 당신은 그가 이미 당신보다 훨씬 낫다는 것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당신은 그의 잘못을 올바로 가르친다고 하지만 가르치는 쪽은 당신이 아니라 마음이 훨씬 더 깨끗하고 자유로운 그 아이입니다.

당신은 그더러 하나님을 믿으라고 가르치지만, 그보다 믿음이 부족한 사람은 당신입니다.
그는 단순한 믿음으로 즉시 믿으나 당신은 당신 나름대로의 의심과 이유를 찾아냅니다.

당신은 그더러 용서하라고 가르치지만, 그는 당신이 가르칠 때 이미 용서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리고 그가 용서했을 때에는 언제나 용서한 상대방의 잘못을 잊어버립니다.
그러나 당신은 어떻습니까? 원한을 오래 품고 빚진 자를 잊지 못합니다.

당신은 그에게 사랑을 가르치려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당신은 외칩니다.
“얘야, 내가 선생이 아니라 네가 선생이다!”

그러므로 당신이 가르치는 그에게서 배우십시오.
그를 닮으십시오.
천국에 가려면 “어린아이와 같”아야 한다고 예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5부 - 부모가 자녀 교육에 실패하는 이유


부모는 자녀들의 잘못된 습관과 방종을 제어하고 올바로 교정해 주어야 한다. 그러나 여기서 부모의 의무가 끝나서는 안된다. 자녀들의 성격과 기질을 잘 살펴봄으로써 자녀들이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주의 깊이 살펴보아야 한다.

자녀들이 아플 때에 병원에 데려가고, 그들의 경제적인 필요를 채워주고, 그들을 학교에 보내는 것으로써 자신의 의무를 다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부모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부모가 자녀에 대해서 가져야 할 의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의 정신적인 결핍을 보살펴 주는 일이다. 자녀들의 연약하고 상처난 마음을 치료하는 일에는 부단한 노력과 지혜가 요구된다.

혹시 그대는 이런 부모가 아닌가?

자녀들을 돌보는 일에 있어서, 대부분의 부모가 범하는 잘못은 자녀들을 일관성 있는 감정과 원칙을 가지고 대하지 않는 것이다. 자녀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교육시키는 일에 있어서, 부모는 순간마다 변하는 자신의 느낌과 감정에 따라서 자녀들을 대해서는 안된다. 부모는 자녀들의 감정과 그들의 기질과 필요가 무엇인지를 잘 살핀 다음에 일관성 있는 원칙과 태도를 가지고 그들에게 접근해야 한다. 만일 부모의 감정과 원칙이 시시때때로 변한다면 자녀들은 혼동을 일으키게 되며 심한 경우에는 부모를 무시하거나 부모의 말에 반항적인 청년으로 성장하게 된다. 이러한 자녀들의 불행은 대부분 부모에게 그 책임이 있다. 부모가 자녀를 일관성 없게 다룬다는 말의 의미는, 대수롭지 않은 일에도 자녀들에게 신경질을 부리며, 자녀들이 분노와 미움을 품게 말하고, 자녀들을 가혹하고 까다롭게 다루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식으로 다루어진 가련한 자녀들은 결국 그들의 부모와 동일한 정신을 가진 성인으로 성장하게 된다. 자녀를 교육시키기 위한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한 부모야말로 자녀 교육에 있어서 문제의 주요 원인이다. 사업이 잘 되지 않거나 밖에서 좋지 않은 일이 있을 경우 어떤 부모들은 가정을 불평과 신경질로 가득 채우는데, 이로써 모든 가족들은 매우 비참하고 불쾌한 시간을 가정에서 보내게 된다. 예수께서는 “바라보는 대로 변화된다”는 불변의 법칙을 말씀하셨다.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사람이 그리스도의 품성을 닮는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처럼 감정과 원칙이 일관성 없는 부모를 바라보면서 성장한 자녀들은 그 부모를 닮아서 신경질적이고 분노를 쉽게 폭발하는 성인으로 성장하기 쉽다.

어떤 부모들은 자신을 제어하지 못하기 때문에 가정의 분위기를 어둡게 만든다. 그들은 자녀들에게 친절한 정신으로 어떤 일을 하라고 요청하는 대신에 신경질적이고 꾸짖는 어조로 명령하며 별다른 이유 없이 자녀들의 조그만 실수를 책망하고 비난한다. 부모들이시여, 그대들이 취하는 이러한 태도는 자녀들의 쾌활함과 사기를 꺽어버린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부모에게 이러한 식으로 명령을 하달받은 아이들은 자원하는 마음과 부모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자 하는 소원으로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무서운 부모의 말을 감히 거역할 수 없기 때문에 할 수 없어 부모의 명령을 이행하게 된다. 대체적으로 이러한 아이들은 부모의 말에 온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경향이 있다. 자녀들은 부모의 말에 순종하는 것을 기쁨으로 여기는 대신에 고역으로 여기게 되기 때문에 부모의 지시를 이행하는 일에 있어 자주 실패하게 되는데 그러한 자녀의 실수와 잘못을 보면서 부모는 신경질적으로 꾸짖음으로써 자녀를 더욱 더 어려운 상황으로 몰고 간다. 이미 자녀는 자신의 실수 때문에 낙망과 낙담으로 압도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모는 자녀의 잘못과 실수를 계속 그들 앞에 열거하면서 꾸짖는다. 이러한 부모의 태도는 자녀들로 하여금 부모를 기쁘게 하거나 만족하게 해 주고 싶다는 욕망을 말살시킨다. 그리하여 “될 대로 되라”는 정신이 자녀들을 사로잡게 되며 부모가 있는 가정 안에서 발견할 수 없는 기쁨과 즐거움과 유쾌함을 가정 밖에서 찾으려고 한다. 이렇게 성장한 자녀들은 자신이 부모의 권위에 저항할 수 있을 만한 나이가 되면 부모의 말에 정면으로 도전하게 되며, 종국에는 부모를 떠나서 거리의 친구들과 어울리게 되고 자신이 전혀 상상하지도 못했던 악한 사람으로 타락하게 된다.

가르치기 전에 먼저 거듭나야 할 부모

누가 이것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가? 그 청년을 타락하게 만든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 만일 가정이 자녀들에게 가장 매력적이고 행복한 곳이었다면, 즉 부모가 자녀들에게 충분한 사랑을 표현하였고 그들이 유익을 얻을 수 있는 일거리를 적당하게 공급하여 주었으며, 자녀들이 부모를 가장 친한 친구로 생각했고, 자녀들이 부모의 말에 자원하는 마음으로 순종하는 법을 가르쳤다면 부모는 자녀들이 바치는 최고의 순종과 사랑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어떤 상황 하에서도 자녀에게 친절하게 말하고 자녀들이 옳은 일을 행하려고 애쓸 때 격려해 줌으로써 부모는 자녀들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 이러한 부모들은 가정 안으로 들어오려고 하는 모든 어둠의 그림자들을 내쫓고 유쾌한 사랑의 햇빛을 가정에 들여올 수 있다. 아무리 가난하고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가정의 분위기가 하늘의 분위기를 담고 있다면 자녀들은 의를 사랑하고 친절하며 정직하게 성장할 수 있다.

어떤 부모는 때때로 자신의 기분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잘못된 말과 태도를 자녀들에게 나타낼 수 밖에 없었다고 말하면서, 자신이 타고난 천성이 예민하고 신경질적이기 때문에 자녀들에게 결코 올바르게 대할 수 없다고 핑계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가 선천적으로 타고난 나쁜 기질을 변화시킬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단을 가장 기쁘게 만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리하여 부모의 고상하지 못한 성품으로 인하여 자녀들의 성격이 매우 불안전하게 꼴지워진다.

부모들이시여, 초조하고 화가 나며 안달이 날 때 가족들에게 신경질을 부림으로써 가족들의 영혼에 상처를 입히지 말라. 자녀를 가지고 있는 부모는 자신을 지키는 일에 있어서, 매우 큰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자신의 혀와 입술로 가족들을 불쾌하게 만들지 말며, 어떤 상황 속에서도 상냥하고 침착하며 안정된 정신을 가지고 말하기로 결심하라. “나는 신경질적인 말로 내 자녀의 행복과 즐거움을 깨뜨리지 않을 것이다”라고 스스로에게 다짐하라. 날마다 주님 앞에 이러한 헌신과 결심을 바치는 부모들만이 자녀들을 깊은 사랑과 동정으로 양육시킬 수 있다. 만일 그대가 이러한 방법으로 자녀들을 훈계하고 교육시켜 나간다면, 자신이 올바른 원칙 하에서 자녀 교육에 대한 의무를 성실하게 이행해 나가고 있다는 자각심이 그대에게 용기와 확신을 더해 줄 것이다.

어떤 부모들은 자녀가 자신들이 원하는 바대로 따라오지 못할 때, 쉽게 조급하여져서 모든 문제의 원인이 자녀에게 있다고 결정지은 다음에 가차없이 자녀들을 비난하고 책임을 추궁한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자녀들이 정말로 책망받을 만한 잘못을 행하였는데도 불구하고 용납되고 아무런 추궁없이 지나간다. 자녀들은 부모의 이러한 일관성 없는 태도에 실망하여 나중에는 부모의 말을 거의 무시하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된다. 부모로부터 일관성 없는 교육을 받은 자녀들은 장차 부모에게 반항하는 성격을 형성하게 된다. 부모는 자녀들이 부모의 기분에 맞추어서 행동해 줄 것을 기대하지만 부모 자신이 자녀들의 기분에 맞추어서 지혜롭게 그들을 다룰 것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자녀의 잘못에 대해서는 가혹한 부모가 부모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는 너무나 관대하다.

모든 부모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자녀를 위탁하셨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그분께서는 부모에게 자녀에 대한 책임을 물으실 것이다. 그러나 어떤 부모들은 자녀를 마치 자신의 소유물로 생각한다. 모든 자녀는 그리스도의 소유물이다. 모든 부모는 그리스도께서 주신 선물을 위탁받아서 그들을 이 땅에서 거룩한 그리스도인으로 양육시키는 책임을 갖고 있다.

많은 그리스도인 부모들이 인생의 무거운 짐으로 인하여 마음의 근심과 육신의 피로에 지쳐있다. 그러므로 종종 지상에서 가장 소중한 자녀들을 하나님께서 불쾌하게 여기시는 태도로 대하기 쉽다. 이러한 부모의 태도는 자녀들의 마음에 어두운 구름을 드리우게 만들어서 자녀들에게 침울하고 저항적인 기질을 형성시킨다. 어려움에 처한 자녀들게 필요한 것은 책망과 꾸지람보다는 따뜻한 위로와 격려이다. 부모와 자녀 사이에 존재하는 상호간의 인내와 친절은 가정을 작은 천국으로 만들어서, 천사들이 즐겨 찾아와 머물게 만들어 준다.

가정에서 어머니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특히 자녀가 어릴 때에 어머니가 미치는 영향은 아버지의 영향보다 훨씬 크고 강력하다. 어머니는 자신의 감정이 비록 우울할지라도 그것을 자녀들에게 나타내 보이지 말아야 한다. 어머니는 마음을 항상 성령의 아름다운 감화 아래 둠으로써 상냥하고 유쾌한 정신으로 자녀들을 대하여야 한다. 자녀들이 어머니의 마음에 있는 그늘을 볼 때 자녀들의 여린 마음에도 우울한 그늘이 깃들게 된다. 자녀들이 가정을 어둡고 지겨운 장소로 생각하게 만들지 말라. 어머니들이시여, 하늘은 자녀들을 교육시키는 일에 있어서 그리스도인 어머니들의 인내와 노력에 많은 기대를 걸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자녀들의 마음을 붙잡아라!

자녀들로 하여금 부모의 찌푸린 얼굴을 보지 못하게 하라. 자녀들이 사단의 유혹에 굴복하였다가 후에 잘못을 깨닫고 회개할 경우에는 그대 자신이 하늘 아버지께 용서받기를 바라는 것처럼 기꺼이 자녀들의 잘못을 용서하라. 친절하고 동정적인 정신은 자녀의 마음을 부모에게 붙들어 매는 끈이다. 사단은 자녀들의 마음을 부모로부터 떠나게 만들기 위해서 온갖 계략을 사용한다. 모든 부모는 그것과 싸워야 한다. 자녀들이 부모를 막역한 친구로 생각하도록 만들라. 언제라도 부모의 귀에 자신들의 시련과 슬픔과 어려움을 이야기할 수 있는 여유를 주라. 부모와 자녀가 이러한 사랑의 연합을 이룰 때 사단이 자녀들의 경험없는 발을 얽어매려고 준비했던 덫은 무용지물이 될 것이다.

자녀를 다루는데 있어서, 부모는 자녀가 어린 아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자녀들에게 원칙을 가르치되, 부모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면서 자녀를 엄격하게만 다루지 말라. 그들이 한순간에 완전하게 되기를 기대하거나 장성한 남녀처럼 행동하도록 만들려고 애쓰지 말라. 부모의 이러한 태도는 자녀의 마음문을 닫게 만든다. 사단과 그의 악한 천사들이 자녀들의 마음을 빼앗기 위해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자녀를 공정하고 온유하며 사랑스런 태도로 다루어야 한다. 이러한 부모의 태도는 자녀의 마음에 강력한 영향을 미칠 것이며, 자녀들로 하여금 부모를 깊이 신뢰하게 만든다. 자녀가 부모를 가장 믿을 만하고 절친한 친구로 생각하게 될 때, 사단의 모든 공격은 허지로 돌아갈 것이다. 사단이 우리의 자녀들을 공격하는 수단으로 가장 잘 사용하는 통로는 자녀의 친구들이다. 청년들은 서로 매우 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러므로 부모는 자녀들의 마음을 부모에게 붙들어 매는 일에 배가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부모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자신의 진정한 행복이라는 사실을 잘 설명해 주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다루시듯이

우리는 어린 시절에 얼마나 부모의 사랑과 관심과 칭친과 동정을 원했었는가! 부모로부터 억울한 책망을 받았을 때, 얼마나 기분이 좌절되고 낙담했었는지를 기억하라. 부모는 자신의 어린 시절로 돌아가서 자녀의 마음과 심정을 이해하기 위해서 마음을 낮추어야 한다. 그러나 자녀 교육에 있어서 흔들리지 않아야 하는 원칙은 자녀들에게 부모의 말에 순종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부모의 말은 절대적으로 순종되어야 한다. 그러나 자녀들의 자원하는 순종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부모가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를 영혼 속에 받아들이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서로를 대하고 자녀를 대하는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하신다면, 우리는 완전히 낙망하고 좌절하여 넘어져서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자녀들이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천천히 그들을 이끌어야 한다. 그분께서는 자녀들을 뒤에 남겨두고 부모 혼자 앞으로 전진하라고 명령하지 않으신다. 부모는 자녀들을 조심스럽게 좁은 길로 인도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의 힘과 능력에 맞는 길을 부모에게 보여주실 것이다. 자녀를 교육시키는 일에 있어서 지나치게 초조해하지 말라. 부모인 우리가 자녀를 염려하고 사랑하는 것보다 그리스도께서 훨씬 더 많이 자녀의 앞날과 영생에 대해서 고뇌하신다는 사실에 대한 이해는 우리의 마음 속에 깊은 평안함을 가져다 주기에 넉넉하다.

자녀들과 함께 놀아주고, 그들의 슬픔을 진지하게 동정하라. 거친 말이 그대의 입에서 새어나가지 않도록 기도하라. 부모의 거친 말은 자녀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기는데 어떤 경우에는 치료하기 힘들 정도의 상처를 만든다. 자녀의 마음 속에 난 상처는 자녀의 품성을 삐뚤어지고 반역적으로 만들어 간다. 자신을 완전히 지배하지 못하는 부모는 자녀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다룰 수 없다. 너무나 잦은 책망은 자녀들로 하여금 부모의 훈계와 책망을 지겨운 것으로 생각하게 만든다. 아이들을 다룰 때에는 단호하면서도 친절하게 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그대의 조력자가 되어야 한다. 사랑은 자녀의 마음을 그대에게로 이끄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다. 자녀를 사랑으로 다루는 그대의 태도는 자녀들을 선하고 의로운 길로 인도할 것이다.

때때로 그리스도께서도 매우 엄한 책망을 하셨으므로, 부모인 우리도 그렇게 자녀를 책먕해야 할 경우가 있을 수 있지만,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책망하는 자의 정확한 상태와 그들이 감당할 만한 정도의 책망의 크기와 그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아셨다. 그분께서는 잘못을 범한 자의 시련과 정확한 동기를 아셨으므로 영혼을 낙망에서 구하는 방법과 희망을 영혼 속에 불어넣는 방법을 아셨다.

그러므로 부모들이여! 그리스도께서 그대들을 대하듯이 자녀들을 동정과 사랑으로 대하라. 끊임없는 기도와 간구로 그분께 배우라. 그리하여 결코 자녀들의 교육에 실패하지 않는 부모가 되도록 힘쓰라.

6부 - 참 교육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잠언 9장 10절.

일반적으로 교육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너무도 그 범위가 좁고 수준이 낮다. 교육에 대한 좀 더 넓은 식견과 좀 더 높은 목적을 가질 필요가 있다. 참된 교육은 어떤 학과 과목을 이수하는 것 이상의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교육은 이 세상의 생활을 위하여 준비하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그것은 사람의 생활 전체에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무덤에 들어가기까지 깊은 관련을 가지고 따라다니는 것이다. 교육은 지, 덕, 체의 능력을 균형있게 계발하고 발달시키는 것이어야 한다. 교육은 사람들을 이 세상과 이웃들에게 봉사함으로써 기쁨과 보람을 얻을 수 있도록 준비시켜야 한다.


참된 교육의 원천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가르치는 성경 말씀 속에서 찾아야 한다. 성경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었느니라” 골2:3. “모략과 명철도 그에게 속하였”다고 하였다. 욥12:13.


세상에는 일찌기 위대한 교사들, 곧 높은 지능과 광범위한 연구를 함으로써, 지식의 매우 넓은 분야를 개척한 사람들이 있다. 그러한 사람들은 자기 민족의 인도자로 또는 지도자로 칭송을 받았다. 그러나 그러한 인간들보다 훨씬 뛰어난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역사 이래로 모든 위인들이 걸어간 발자취를 살펴볼 수도 있지만 진리의 빛 되신 하나님께서는 그들보다 이전에 존재하셨던 분이시다. 태양계의 달과 별들이 태양의 빛을 받아서 반사하는 것처럼, 세상의 위대한 사상가들은 의로운 빛 되신 하나님의 진리를 하나씩 둘씩 비추었다. 해 아래에 새로운 것이 하나도 없다는 진리를 잊지 말아야 한다. 그들은 진리를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찾아내었을 뿐이다.


모든 참된 지식과 발전의 근원은 하나님을 아는데 있다. 물질계나 정신계나 또는 영계를 막론하고 어느 곳에서나 하나님에 관한 증거와 지식이 나타나 있다. 우리가 어떤 방면의 연구에 종사하던지 간에 진리에 도달하려는 순수하고 진지한 목적을 가지고 나아간다면,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고 만질 수도 없지만 만물 가운데서 일하시며, 만물을 통하여 일하시는 크신 하나님의 존재를 느끼고 만나게 될 것이다.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과 더불어 교제하며 유한한 인간이 무한하신 하나님과 함께 사귈수 있게 된다. 이러한 교제가 사람의 지, 덕, 체에 미치는 강력한 영향력은 우리의 상상을 넘어서는 것이 된다.


창조와 구속의 기초인 사랑은 참된 교육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인생의 지침으로써 주신 율법에도 이것이 명백하게 나타나 있다. 첫째로 큰 계명은,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둘째는 사람에 대한 계명으로써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이다. 사랑의 율법은 사람의 몸과 마음과 정신을 하나님과 이웃들을 위한 봉사를 위하여 바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러한 봉사는 다른 사람들에게 축복을 가져다 줄 뿐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도 가장 큰 축복을 가져오게 된다. 이러한 봉사와 희생으로 점철된 생애를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품성을 완전하게 반사하게 되며 마음에 천국을 받아들임으로써 하늘에 적합한 자들로 꼴지워지게 된다.


참된 교육의 목적은 사람 안에 하나님의 품성을 재현하는 것이다. 세상은 위대한 지식을 가진 사람보다는 고상하고 단순한 품성을 가진 사람을 더욱 필요로 하고 있다. 세상은 견고하고 확고한 원칙에 의해서 자신의 재능과 욕망이 지배되고 있는 인물을 요구하고 있다. 세상이 필요로 하며 요구하고 있는 사람과 세상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교육의 방향이 정반대로 엇갈리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오늘날은 모든 그리스도인 가정과 청소년들에게 있어서 위기의 시대이다. 교육의 동기와 목적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가? 교육이 이기적인 야심과 권세를 얻고자 하는 야망을 만족시키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 어리 아이의 시절부터 이기적인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비법을 가르쳐 주는 것이 교육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이러한 교육을 거쳐간 수많은 사람들이 패권을 위하여 싸우는 무가치한 인생을 살다가 아무런 소망없이 무덤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교육이 다루는 학문의 주제에도 심각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많은 학문을 배운 사람일수록, 성경이 원하고 세상이 필요로 하는 “마음이 가난하고 온유하며 의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기는 커녕 오히려 교만과 허영을 자랑하는 경향이 있다. 높은 과학과 학문을 배울 사람일수록, 하나님을 경외하고 순종하는 생애를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의심과 회의 속에서 하나님을 떠나가는 모습을 얼마나 많이 볼 수 있는가! 교육을 통하여 하나님과 더욱 가까워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가까워지고 있다. 세상에 살지만 세상을 이기는 그리스도인들이 필요한 시대가 되었다. 강력하고 순결한 의지를 훈련하고 가장 높고 고귀한 목표를 성취하기 위하여, 자신의 생애를 준비하여야 할 청소년과 그리스도인 가정이 절실하게 요구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과연 누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 평범한 그리스도인으로 살기보다는 강력한 개혁자고 살기로 선택하는 것이 훨씬 안저한 시대가 되었다. 살아남을 수 있는 교육은 어떤 것일까? 하나님의 교육은 사람으로 하여금 생각할 수 있도록 만든다. 하나님의 교육은 하나님과 비슷한 생각을 하도록 인도한다. 사람의 사상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사상을 받아들이는 것이 참된 교육의 목적이다. 단순힌 학문을 배우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천연계와 성경의 계시 가운데 열려 있는 보다 넓은 세계를 이해해야 한다. 자신들의 본분과 생애의 목적과 운명에 대해서 깊이 생각할 줄 아는 사람으로 키워야 한다. 나약하지 않으며 생각하고 행하는 일에 있어서 강력한 의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 환경의 노예가 되지 않고 그것을 극복하는 사람, 넓은 마음과 확고한 생각과 신년을 가지고 목적을 위하여 돌진하는 용기를 갖춘 사람을 만들어 내는 것이 참된 교육의 목적이다.


참된 교육은 인간의 품성을 아름답게 변화시켜 이기적인 욕망이나 세속적인 야심에 의해서 생애의 목적이 희생되지 않도록 이끌어 나간다. 교육은 죄와 악에 대항하는 강력한 소원을 마음에 심어주며, 모든 동기와 욕망을 순결하게 보호해 줄 수가 있어야 한다. 참된 교육은 하나님의 펌성을 인간의 마음에 재현시켜 주어서, 마음과 영혼이 새롭게 다시 창조함을 받도록 만들어 준다.


어떤 교육이 이보다 높을 수 있을까? 무엇이 이보다 높은 가치를 지닐 수 있을까?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에게 가지고 계신 목적은 우리가 우리 자녀에 대해서 가지고 있응 것보다 훨씬 높은 것이다. 하나님의 품성을 소유하는데까지 도달하는 것이 그분의 목적이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이루어야 할 목적이 있으며 도달해야 할 표준이 있다. 우리의 목절과 표준은 하늘이 땅보다 높은 것처럼 그렇게 높고 순결한 것이 되어야 한다. 우리의 교육은 현세를 위해서 뿐만이 아니라 내세를 위해서 계획되고 수행되어야 한다.

 

당신에게 달린 일


한 곡의 노래가 순간에 활기를 불어넣을 수 있다.

한 송이의 꽃이 꿈을 일깨울 수 있다.
한 그루의 나무가 숲의 시작일 수 있고
한 마리의 새가 봄을 알릴 수 있다.

한 번의 악수가 영혼에 기운을 줄 수 있다.
한 개의 별이 바다에서 배를 인도할 수 있다.
한 줄기의 햇살이 방을 비출 수 있다.
한 자루의 촛불이 어둠을 몰아 낼 수 있고
한 번의 웃음이 우울함을 날려보낼 수 있다.

한 걸음이 모든 여행의 시작이다.
한 단어가 모든 기도의 시작이다.
한 가지의 희망이 당신의 정신을 새롭게 하고
한 번의 손길이 당신의 마음을 보여 줄 수 있다.

한 사람의 가슴이 무엇이 진실인가를 알 수 있고
한 사람의 인생이 세상에 차이를 가져다 줄 수 있다.

이 모든 것이 당신에게 달려있다.

“가정이나 직장이나 교회에서 발생하는 모든 문제점이 그가 아닌 나에게 달려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래도 주님! 이 모든 문제점의 해결 또한 나의 한 생각, 나의 한 행동에 달린 일임을 깨닫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모든 일에 불평, 비방하지 않고 항상 감사할 줄 알며, 말로만이 아니라 모든 일에 항상 예수님처럼 행동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아멘!”

 

논쟁과 순종의 차이

“쉬지 말고 기도하라” (살절 5:17)
어느 날 성경의 권위자들이 모여 기도에 대해 연구하고 있었습니다.
함께 모였던 신학자들은 모두 말하기를
“쉬지 않고 기도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야.”
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때마침 그 모임의 차 시중을 들고 있던 여인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는 항상 기도하는 것이 조금도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때 둘러앉아 있던 신학박사들이 그녀의 말을 듣고 흥미 이게 생각되어
왜 그러냐고 물었습니다.
그녀의 대답은 이러했습니다.

“나는 아침에 눈을 뜨면
하나님께 나의 마음의 눈까지 뜨게 해 주십사하고 기도하며 일어납니다.
도 옷을 입을 때는
나의 영혼에 믿음의 옷을 입혀달라고 기도하며 옷을 입습니다.
또 세수할 때에는
나의 마음도 언제나 깨끗하게 주님의 보혈로 씻어 주십사 하고 기도합니다.
또 청소를 할 때에도
내 마음 구석구석이 깨끗이 청소되어 죄가 잠깐이라도 내 속에 있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못할 일을 시키지 않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늘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가끔 순종보다는 논쟁을 택합니다.

주님! 신학박사들의 교만한 마음보다는 낮아지고 겸손한 마음을 갖게 하시고
항상 믿음으로 순종케 하시고 위급할 때만 기도하게 마시고
범사에 기도하게 하시며,기쁠 때만 기도하게 마시고
슬플 때나 혹 병중에 있을 때도 주님을 찬양하며 기도하게 하시옵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