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서론 - 죽음 너머 저편 세계를 아시나요?


생애의 빛 편집인에게,

안녕하십니까? 저는 이민와서 처음 예수님을 영접하고 4년째 침례교회에 출석하는 침례교인입니다. 얼마 전에 우리 목사님께서 설교하면서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죽으면 즉시로 영혼이 육신을 떠나는데, 생전에 예수를 잘 믿었던 사람은 그 영혼이 천국으로 가고, 그렇지 않은 사람의 영혼은 지옥으로 가서 수십억년 아니 영원토록 불속에서 고통을 받으며 죽지도 못하고 쉬지도 못하는 상태로 지내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 설교 말씀을 들은 이후로 지금까지, 억장을 막히게 하는 슬픔과 고통이 내 마음을 괴롭히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저희 부모님들은 나름대로 선하고 성실하게 사셨던 분들이었는데,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한 채 작년에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부모님들은 그리스도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매년 봄, 가을이 되면 떡을 만들어서 장독대에 차려놓고 절하셨고, 무당집에 다니시면서 점도치고 푸닥거리도 하시던 전형적인 시골 농부이셨습니다.
저는 저희 교회 목사님의 그 설교 말씀을 들은 이후부터는 자다가도 문득 부모님 생각만 하면 식은 땀을 흘리면서 몸서리를 치곤 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지옥의 불구덩이 속에서 고통을 당하시고 계실 부모님의 영혼을 생각하면, 하나님의 처사가 너무나 잔인하고 불공평하다고 원망하는 마음이 솟구칩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성경을 읽던 중에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말씀을 보게 되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인데, 왜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차라리 죽이시지 않고, 죄인의 영혼을 영원토록 고통스럽게 하시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너무나 답답한 마음에 이런 편지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저는 성경을 잘 모르지만, 살아남는 이들이 매우 성경적인 신앙지라는 인상을 읽을 때마다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부디 성경적이고도, 내 마음의 궁금증을 속시원하게 해결할 수 있는 답변을 부탁드립니다.

텍사스에서 정은모 드림

 

생애의 빛이 드리는 답변

오늘날, 그리스도 교회 안에 정은모 씨와 같은 고민과 갈등에 빠져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너무나 많이 있다. 사람이 죽은지 1분 후에는 어떤 상태로 어디에 있게 될까? 영혼이 몸에서 소리없이 빠져 나와서, 천국이나 지옥, 또는 공중에서 끝없이 떠돌아다닌다고 하는데, 그것은 사실일까? 신의 존재를 믿는 종교인들 뿐만 아니라, 신의 존재를 부인하는 무신론 자들까지도 죽음 이후의 상태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죽음 이후의 상태에 대해서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것은 우리의 경험을 통해서는 알 수 없는 영역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일단 죽으면 다시 현실 세상으로 돌아 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에는 3일 동안 죽어 있다가 살아나온 사람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분의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가 3일만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경험했던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서 성경은 어떻게 말하고 있을까? 만일 죽는 순간에 즉시로 혼이 몸에서 빠져나와 하늘이나 지옥에 간다면, 예수님의 혼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로 가셨어야만 한다. 그러나 요한복음 20장에는, 우리의 예측과 상반되는 말씀이 나온다. 예수께서는 그분께서 부활하신 일요일 이른 아침에 무덤을 찾아왔던 막달라 마리아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심으로써, 십자가 이후의 3일 동안 하늘에 가서 하나님을 만나지 않았음을 분명히 밝히셨다.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 간다 하라.” 요한복음 20:17. 예수께서는 그분께서 부활하신 일요일 이른 아침에 무덤을 찾아왔던 막달라 마리아에게, 지난 3일 동안 하늘에 가서 하나님을 만나지 않았음을 분명히 밝히셨다. 어떻게 된 일인가?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후부터 부활할 때까지의 3일 동안,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가지 않으셨다면, 어디서 무엇을 하셨다는 말인가?

이제부터, 이 흥미 있는 문제를 심층 분석해 보도록 하자. 죽음 이후의 상태에 대한 여러가지 가르침들 중에서 과연 어떤 것이 성경적인 진리일까?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 즉, 그리스도인, 불교인, 무속인, 심지어 신의 존재를 부인하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죽음 이후의 상태에 대해서 다음에 소개하는 4가지의 믿음 중의 하나를 받아 들이고 있다;

1. 일부 개신교인들과 거의 모든 종교인들(무속인, 불교인 등등 : 사람은 죽는 순간에, 영혼이 몸을 떠나는데, 생전에 자신이 행했던 선과 악에 따라서, 영혼이 천국(극락) 또는 지옥으로 가게 된다고 믿는다.
2. 천주교인 : 사람은 죽는 순간에, 영혼이 몸으로부터 분리되어 나와서, 생전에 자신의 삶에 따라서 천국이나 지옥 또는 그 중간 단계인 연옥으로 간다고 믿는다.
3. 칼빈주의 개혁교회 교인들 : 사람은 죽는 순간에, 영혼이 육체를 떠나서 천국도 지옥도 아닌 임시 수용소와 같은“중간 상태”에 머무는데, 그곳에서 예수 재림 직전까지 생전에 자신이 행했던 선과 악에 따라서 고통을 받거나 편안하게 지낸다. 그들은 일종의 개신교회식 연옥에 머물러 있다가, 예수 재림시에 영혼이 천국이나 지옥으로 영원히 들어가게 된다고 믿는다.
4. 일부 그리스도인들 : 영혼은 몸과 분리될 수 없다. 그러므로 사람은 죽는 순간에, 잠을 자는 것과 같은 무의식의 상태로 들어가게 되며, 예수께서 재림하시는 순간에 죽었던 의인들은 무덤으로부터 부활함과 동시에 다시는 병들거나 죽지 않을 영광스러운 육체를 받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로 승천하며, 악인들은 천년기 이후에 심판의 부활로 일어나 유황불에 의하여 소멸된다고 믿는다.

위에 소개한 4가지 믿음 중에 어느 것이 성경이 말하고 있는 죽음 이후의 상태일까? 위에 언급한 4가지 믿음을 분석해 보면, 1, 2, 3항은 사람의 육체는 죽을지라도, 영혼은 결단코 죽을 수 없기 때문에, 몸이 죽는 순간에 영혼이 몸으로부터 분리되어서 빠져 나온다고 믿는 것이며, 4 항은 영혼은 결코 몸과 분리될 수 없기 때문에 사람이 죽었다고 할지라도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는 현상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음 이후의 상태에 대한 위의 4가지 가르침들을 다음과 같이 두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

영혼 불멸설 : 영혼은 육체와 분리될 수 있 기 때문에 육체는 죽을지라도, 영혼은 의식 을 가지고 있는 상태로 영원히 존재한다. 그러므로 죽는 순간에 즉시로 영혼이 몸으 로부터 분리되어서 천국, 지옥, 또는 연옥으로 가서 영원히 존재하게 된다는 가르침.

영혼 멸절설(조건적 불멸설) : 영혼과 육체는 결코 분리될 수 없으며, 육체가 죽을 때에 영혼도 함께 소멸된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죽는다고 할지라도 영혼이 육체와 분리되어 빠져 나오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으며, 오직 세상 끝에, 의인들은 생명의 부활로 일어나 새로운 생명과 육체를 받고 하늘로 승천하여 영원히 살지 만, 악인들은 심판의 부활로 일어나서 유황불의 형벌을 받아 완전히 소멸된다는 가르침.

어느 것이 진실인가? 죽음의 진상은 무엇인가? 죽은 사람은 어디에 있는가? 인간은 앞으로 다가올 영원한 시간을 어디서 어떻게 보내게 될 것인가? 참으로 엄숙한 문제들이다. 죽음의 정체를 모르고 사는 것은 종착지를 모르고 여행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만이 죽음에 대하여 가장 확실한 대답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으로 돌아가서 죽음 이후의 상태에 대한 답변을 찾아야 한다. 이번 호에서는, 죽음 이후의 상태에 대해서 제기되는 모든 의문들을 13가지 질문으로 나누어서, 그 대답을 성경 속에서 찾아 보았다.

1. 하나님이 불멸하시는 것처럼, 인간도 불멸하는가?
2. 육체는 죽음으로 인하여 없어지지만, 영혼은 영원토록 불멸할까요?
3. 죽는 순간에 무엇이 하나님께로 돌아가나요?
4. 영혼은 언제, 어떻게 없어집니까?
5. 영혼은 보이지 않는 연기 같은 존재입니까?
6. 의인들과 악인들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요?
7. 죽은 사람들은 무덤 속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8. 나사로는 4일 동안 어디서 무엇을 하다가 돌아왔나요?
9. 예수님은 3일 동안 하늘에 올라가 계셨나요?
10. 가장 많이 오해되고 있는 3가지 성경절의 의미를 아십니까?
11.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12. 영혼불멸 사상의 뿌리를 아시나요?
13. 종교개혁자들이 무엇이라고 기록했는지 살펴보셨나요?

이제, 다음에 나오는 13가지 질문에 대한 답변들을 읽으시면서, 죽음 이후의 상태에 대하여 성경이 말하고 있는 분명한 진리를 이해하게 되시길 바랍니다.

권두언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과연 그 영혼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요? 아니 그 보다도 먼저, 사람의 영혼이란 도대체 무엇이며 또 어떻게 이루어진 것일까요?

이러한 질문들은 인류의 기원만큼이나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수수께끼가 아닐 수 없습니다.


20세기에 들어와서 인간의 영혼에 대하여 연구하는 심령술이 날로 번창해 가고 있으며 죽음 저편을 갔다가 왔다는 사람들이 종종 신문이나 잡지를 통하여서 등장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할리웃에서 만들어내는 영화들 가운데서 죽은 영혼들의 소재를 다루고 있는 작품들이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병에 걸리거나 사고를 당하여 코마(무의식)에 빠진 상태에서 자기의 영혼이 몸을 빠져 나가 죽음 건너편을 다녀 왔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어떤 사람들은 수술을 받고 있는 도중에 영혼이 몸과 분리되어 나와 천장에서 수술받고 있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는 사람들도 생겨 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경험들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까요?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계시 가운데 지옥에 가서, 악한 영혼들이 불고기 처럼 지글지글 타면서 영원토록 고통을 당하고 있는 장면을 보고 왔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입니다. 그것이 사실일까요? 어린 아이나, 무신론자나, 악랄한 살인자나 아니, 히틀러 같은 사람들도 같은 곳에 함께 모여 영원토록 죽지 않고 고통을 당하게 하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진정한 모습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죽은 후에 그들을 어떻게 취급하시는 것일까요? 여러분의 돌아가신 가족들이 지금 어떠한 상태에 있는지 아십니까? 여러분은 그들의 영혼과 만나서 대화 할 수 있는 것일까요? 성경은 이 문제에 대하여 어떻게 설명하고 있을까요?

여러분들은 이번 특집을 통하여서 일생 일대의 놀라운 진리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모든 편견이나 개인 의견을 접어 두시고 하나님의 말씀 성경이 죽은 영혼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지 잘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이 연구는 앞으로 다가올 수많은 오류와 기만으로부터 여러분을 보호하여 드릴 것이며, 여러분은 두고 두고 이 진리에 대해서 감사하게 되실 것입니다.

1부 - 인간은 불멸의 존재입니까?


인간의 죽음 이후의 상태에 대한 문제를 파헤치기 앞서, 우리는 이 문제의 핵심을 찌르는 문제를 먼저 다루어야만 한다. 만일 우리가 이 문제를 정확하게 풀 수 있다면, 죽음과 영혼에 대한 모든 다른 질문들은 자연스럽게 해결될 것이다.

그렇다면, 그 중요한 문제란 무엇인가? 그것은 사람이 선천적으로 타고난 속성에 관한 문제이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어떻게 창조하셨는가에 관한 문제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죽을 수 있는 속성을 지닌 존재로 창조하셨는가? 아니면, 끝없이 영원히 존재하는 속성을 가진 존재로 창조하셨는가? 이 질문에 대한 정확한 답을 성경에서 찾아 내는 것이야말로 죽음 이후의 상태에 대한 신비를 풀 수 있는 열쇠이다. 그럼 이제부터,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속성과 인간의 속성을 비교 검토해 보자.

하나님의 속성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께서는 영원불멸의 속성을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에 동의하는데, 성경 역시 하나님의 불멸의 속성을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다. “오직 그(하나님)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딤전 6:16.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딤전 1:17; 롬 1:23

인간의 속성
에덴 동산에서 변경된 인간의 속성 :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영원토록 존재하는 존재로 창조하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아담과 하와에게 교훈하셨지만(창 2:17), 사단은 뱀으로 가장하고 그들에게 접근하여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고 그들을 안심시키고 선악과를 따먹는 죄를 짓도록 유도하였다. 하와는 결국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라는 사단의 거짓말을 받아들였다. 그 결과, 사람의 운명은 하나님의 경고대로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로 바뀌었다.

백과사전에서 “인간”이라는 단어를 찾아 보면, “죽음을 면치 못할 운명을 가진 존재”라는 말로서 “인간”이라는 단어의 정의를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성경은 인간의 속성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가? 인간도 하나님처럼 불멸의 속성을 가지고 있는가? 성경은 이 질문에 대해서, “죽을 수 밖에 없는 사람이 하나님보다 더 의롭겠느냐? 사람이 자기의 창조주보다 더 순결하겠느냐?” 라고 대답하고 있다(욥 4:17, 킹제임스 영어성경역).

그러나 성경은 인간이 죽지 않을 영원불멸의 본성을 가질 수 있는 소망의 날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데, 그 날은 세상 끝에 있을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이다. 예수 재림시에 의인들은 썩지 아니할 몸을 입고 부활하는데, 바로 그 때 드디어 “죽지 아니함을 입을”것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고전 16:51~53.

그러므로 썩지 아니하고 죽지 아니하는 불멸의 속성은,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나오는 속성이 아니라, 예수 재림시에 부활한 의인들이 “홀연히 다 변화”함을 받을 때에야 비로소 인간에게 부여되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이러한 인간의 속성을 신학적인 용어로는 조건적 불멸(Conditional Immortality)이라고 부르는데, 그 이유는 영원 불멸의 속성은 오직 구원을 받는 성도들에게만 조건적으로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 재림시에 의인은 부활과 함께 영원 불멸의 속성을 선물로 받지만, 악인은 그러한 속성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지 못한 채 지옥에서 멸망당할 것이라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자, 그러면 지금까지 살펴본 성경상의 증거들을 볼 때, “하나님이 불멸하시는 것처럼, 인간도 불멸할까요?”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독자들 스스로 얻을 수 있을 것이다.

2부 - 육체는 죽지만 영혼은 영원토록 불멸합니까?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어떤 선입관 때문에,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간은 죽을 수 밖에 없는 육체를 가졌지만, 육체 안에는 불멸의 영혼이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요?” 또는“육체는 죽을지라도, 육체 안에 있는 영혼은 죽지 않고 영원토록 불멸하는 것이 아닌가요?”

이러한 질문들은 매우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처럼 들리지만, 성경은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 매우 분명한 답변을 준다.

에스겔 선지자는 다음과 같이 영혼의 속성에 대해서 선언하였다. “모든 영혼이 다 내게 속한지라 아비의 영혼이 내게 속함 같이 아들의 영혼도 내게 속하였나니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으리라” 겔18:4. 사단은“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이다(요 8:44). 사단은 에덴동산에서 하와를 범죄하도록 유혹했던 이후부터 오늘날까지“영혼은 결코 죽지 않는다”는 사상을 인류에게 뿌려 왔다. 에덴동산에서 하와를 유혹할 때, 그는 놀랍게도 인간의 본성과 운명에 대한 거짓 사상을 하와의 마음에 심어줌으로써, 그의 기만적인 사업을 시작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경고하셨음에도 불구하고(창 2:16), 사단은“너희가 정녕 죽지 않으리라”고 속삭임으로써 하와가 선악과를 따서 먹게 만드는데 성공하였다(창 3:4). 그러나 그 이후에도 하나님께서는 “죄의 값은 사망”임을 거듭 선언하시고(롬 6:23)),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고 재차 경고하셨지만(겔 18:4), 사단은 죄의 결과가 영원한 죽음이라는 엄연한 사실과 인간의 참된 속성에 대하여 거짓된 오류를 온 세상에 뿌려 놓는데 성공함으로써, 수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대담하게 범죄하도록 만들었다. 다음에 소개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죄인은 반드시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

창세기 2:16 :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에스겔 18:4 :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
로마서 6:23 :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안에 있는 영생이라.”
고전 15:56 :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요한계시록 20:14 : “사망과 음부(무덤)도 불못에 던지 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성경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죄의 값은 사망임을 선언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영혼이 영원히 살아서 존재한다는 사상이 온 기독교계를 장악하고 있다. 만약 죄인이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당한다면, 그것은 영원한 고생이지 사망이 아니다. 그것은 “죄의 값은 사망” 이라는 성경의 진리를, “죄의 값은 영원한 고생”이라는 오류로 바꾸어 놓는 격이 된다. 적어도 열개 이상의 성경절이 영혼의 불멸성을 부인하고 있는데, 예수께서는 영혼이 죽을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하여 명백한 진리를 선포하심으로써, 이 문제에 대한 오해의 여지를 막으셨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 하지 말고,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 하라” 마 10:28. 영혼은 죽을 수 있는 것이며, 지옥불에서 멸하여 없어질 수 있는 것이다.

영혼이 불멸한다는 사상은 성경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이방 종교나 신화로부터 나온 것이다. 힌두교, 불교, 각종 토속신, 조상숭배, 무속 신앙, 그리고 거의 모든 고대의 종교는 영혼은 불멸한다는 사상 위에 그들의 기초가 놓여 있다. 이것이 중세기에 그리스도 교회 안으로 잠입하여 들어 왔는데, 그 결과 오늘날에는 거짓이 진리를 압도하고 보편화 되었으며, 오직 성경을 올바로 이해하는 그리스도인들만이 “영혼은 죽을 수 있다”는 진리를 붙잡고 있다. “영혼은 불멸한다”는 사단의 첫번째 설교는 수많은 종교인들에 의해서 오랜 세월을 통하여 반복되어 왔다. 몇년 전에는 리더스 다이제스트 지에 어떤 개신교회의 유명한 목사가 “죽음은 없다”는 제목으로 기사를 기고하였는데, 그는 거기에서 사단의 최초의 설교를 다음과 같이 되풀이 하였다. “여러분은 정말로 죽는 것이 아닙니다. 아마 죽는 것처럼 보일지는 모르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여전히 살아 있는 것이며, 이전에 알던 것보다도 훨씬 더 많은 것을 죽음 이후에 알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설교를 듣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명과 진리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죗된 생활을 살면서도 자신의 영혼은 영원토록 불멸할 수 있다는 거짓 희망을 갖게 된 것이다.

영혼의 속성에 대한 문제를 종결하면서, 또 하나의 성경 말씀을 독자들 앞에 제시하고자 한다.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plan)가 소멸하리로다.” 시편 146:4. “무릇 산 자는 죽을 줄을 알되 죽은 자는 아무 것도 모르며.” 전도서 9:5. 이제, 영혼의 속성에 대해서 독자들 자신이 대답할 차례가 되었다. “육체는 죽음으로 인하여 없어지지만, 영혼은 영원토록 불멸합니까?”

3부 - 죽는 순간에 무엇이 하나님께로 돌아가나요?


우리는 앞에서 영혼은 불멸하는 것이 아니라, 죽을 수 있다는 진리를 성경 속에서 발견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또 하나의 의문을 갖게 되는데, 그것은 “만일 영혼이 불멸하는 것이 아니라면, 죽음 이후에 우리의 영혼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라는 문제이다.

우리는 이 문제 역시 성경 속에서 그 해답을 찾아야만 한다. 성경이 죽음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가를 찾아야 한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죽음에 대한 정의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말씀이 솔로몬의 기록 가운데에 있다. “흙은 예전에 있던 대로 땅으로 돌아가고 영(spirit)은 그것을 주셨던 하나님께로 돌아가리라” 전 12:7(킹제임스 성경역). 여기에, 한가지 이상한 말씀이 나오는데, 그것은 모든 사람은 그가 악인이든지 의인이든지 간에 죽었을 때에 “흙은 예전에 있던 대로 땅으로 돌아가고, 영은 그것을 주셨던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말씀이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께로 돌아간다고 표현된 “영”이 무엇인가를 알아보기 이전에, 먼저 사람이 태초에 어떻게 창조되었는지를 먼저 이해해야만 한다. 성경은, 죽음의 과정은 창조의 과정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이루어 진다는 놀라운 진리를 선포하고 있는데,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어떻게 창조하셨는가를 정확하게 알 수 있다면, 인간이 죽었을 때에 어떤 상태로 되돌아가게 될 것인지를 알 수 있다는 논리적 확신을 갖게 만든다.

A)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신 두 가지 재료

“주 여호와께서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의 콧구멍에다 생명의 호흡(life of breath)을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살아 있는 혼(living soul)이 되었더라” 창세기 2:7(킹제임스 영어성경).

육체 :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조상인 아담의 몸을 흙으로 빚어 만드셨다. 그러므로 사람의 죽은 시체가 부패되는 과정을 과학적으로 분석하면, 몸의 화학적 구성 성분이 흙과 동일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이 일단 죽어서, 그 시체가 땅에 묻히면, 육체는 태초에 창조주께서 땅에서 취하셨던 그 화학적 요소들을 다시 땅으로 되돌려 주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흙과 동일한 원소들을 취하셔서, 창조주의 위대한 지혜로 인간의 육체를 만드셨던 것이다.
생명의 호흡 : 흙에 의해서 몸이 만들어 졌지만, 그것이 생명을 갖고 활동하기 위해서는 생명력이 주입되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세포에 생명력을 제공하고, 심장을 박동케하고, 호흡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생명력인“생명의 호흡”을 코에 불어 넣으셨던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생명의 호흡”이라는 단어의 히브리어 원어의 의미에서도 그 진실성을 확인할 수 있다. “생명의 호흡”은 히브리 원어로 “Neshamah”인데, 그것은 “호흡”과 “살아 있음(living)”의 복합어이므로, 원어적 의미 역시 “생명의 호흡”(life of breath) 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실 때에 사용하셨던 두 가지 재료는 흙과 생명의 호흡 임을 알 수 있다. 성경은 흙으로 만들어진 아담의 몸에 하나님의 생명의 호흡을 불어 넣어서 만든 인간을 “살아 있는 혼”이라고 표현하였다. 흙+생명의 호흡=살아있는 혼(living soul)=인간. 여기서, 우리는 성경이 생명을 가진 인간을 “살아있는 혼”이라고 부르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전도서 3:19에 기록된 말씀 즉, “인생에게 임하는 일이 짐승에게도 임하나니 이 둘에게 임하는 일이 일반이라 다 동일한 호흡이 있어서 이의 죽음같이 저도 죽으니” 라는 말씀을 보아서도,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실 때에 코에 불어 넣으신 “생명의 호흡”은 어떤 귀신같은 영혼이라고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성경은 인간과 동물은 “다 동일한 호흡”을 가지고 있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죽을 경우, “생명의 호흡”은 육체와 분리되어서 혼백과 같은 형태로 영원히 존재하게 된다는 가르침을 믿으면, 인간과 “동일한 호흡”을 가진 동물 역시 죽음 이후에 혼백을 가지고 영원히 존재한다는 엉뚱한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B) 두 가지로 만들었으니, 두 가지가 원래의 장소로 돌아가야 한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셨을 때에 두 가지 재료(흙과 생명의 호흡)를 사용하셨으므로, 인간이 죽어서 땅 속으로 들어갈 때에 하나님께서 태초에 사용하셨던 두 가지 재료인 흙과 생명의 호흡이 어떤 상태로 변화되는가를 성경 속에서 확인하면, 죽음에 관한 깊은 신비를 벗길 수 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사용하셨던 두 가지 재료 이외의 어떤 것도 인간의 구성 요소가 될 수 없다. 그런데 앞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흙으로 빚어서 만드셨던 육체는 생명이 끊어지는 순간부터 그것의 원래 모습인 흙으로 변하여 땅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는데, 바로 이것이 전도서 12장 7절의 전반부에 나오는“흙은 예전에 있던 대로 땅으로 돌아가고”의 의미이다.

그렇다면, 똑같은 성경절의 후반부에 나오는“영은 그것을 주셨던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는 창세기 2:7과 전도서 12:7를 비교함으로써, 놀라운 진리의 평행 구조를 발견하게 된다. 즉, 생명이 끊어지는 순간, 인간의 두 가지 구성 요소 중에서 육체는 부패되서 흙이 되어 땅으로 돌아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또 다른 구성요소인 “생명의 호흡” 역시 처음 그것의 공급처인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의미이다. 창세기 2:7에서는 “생명의 호흡”이라고 표현되었던 것이, 전도서 12:7에서는 “영”으로 표현되었을 뿐이다. “영은 그것을 주셨던 하나님께로 돌아간다”전 12:7.

지금까지 우리는, “생명의 호흡”(life of breath) 과 “영”(spirit)이 성경에서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는 단어라는 사실을 배웠다. 이제부터는 그 두 말의 히브리어(구약성경) 또는 헬라어(신약성경)가 동일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를 확인하기만 하면 죽음 이후의 상태에 관한 최종적인 결론을 내릴 수 있다.

C) 구약 성경에서의 “영”과 “호흡”

구약 성경의 히브리어 원문에는 “루아흐”(rauch)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루아흐:의 뜻은 “성령, 호흡, 바람, 기운”으로 구약 성경에 총 389회나 등장한다. 구약 성경에서 “루아흐”는 “성령”이라는 의미로는 94회 사용되었으며, 그 이외에는 번역하는 사람이 영혼에 대해서 어떠한 견해를 가지고 있는가에 따라서 “신, 영혼, 영, 호흡, 생기, 기운, 정신, 마음” 등으로 서로 다르게 번역되어 있기 때문에 히브리어에 대한 지식이 없는 사람의 경우, 자칫 잘못하면 엉뚱한 오해를 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구약 성경에 나오는 성경절들에서 히브리 원어인 “루아흐”가 어떻게 번역되었으며 또한 그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살펴 보기로 하자.

전도서 12:7 : “영(루아흐)은 그것을 주셨던 하나님께로 돌아간다”에서 “루아흐”는 “영”으로 번역되었지만, 이것은 이미 앞에서 살펴 보았던 것처럼, 어떤 정신이나 귀신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태초에 인간의 코에 불어 넣어주셨던 “생명의 호흡”을 뜻한다는 사실을 배웠다.

시편 146:4 : “그 호흡(루아흐)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라.” 인간의 죽음을 설명하는 이 성경절에서는 “루아흐”가 “호흡”이라는 단어로 올바르게 번역됨으로써, 창세기 2:7과도 일관성 있는 조화를 이루고 있다.

에스겔 37:5 :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루아흐)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영적인 죽음으로부터 부활시키는 모습을 상징하는 이 성경절에서는 “루아흐”가“생기”라고 올바로 번역되어 있으며, 영어 킹제임스 성경에도 이것이“breath”(호흡)이라고 번역되어 있다.

욥기 27:3 : “나의 생명이 아직 내 속에 완전히 있고, 하나님의 기운(루아흐)이 내 코에 있느니라.” 여기서 “루아흐”는 “기운”으로 번역되었는데, “하나님의 기운이 내 코에 있느니라”라는 표현을 볼 때, 우리는 여기에 나오는 “하나님의 기운”(루아흐)이 하나님께서 태초에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에 코에 불어넣으셨던 그 “생명의 호흡”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시편 104:29,30 : “주께서 저희 호흡을 취하신즉 저희가 죽어 본 흙으로 돌아가나이다. 주의 영(루아흐)을 보내어 저희를 창조하사.” 여기에도 사람이 죽을 때에는 몸이 흙으로 돌아간다는 말씀이 나오지만, 모순처럼 보이는 말씀이 한 가지 나오는데, 그것은 “주의 영(루아흐)을 보내어 저희를 창조하사”이다. 창세기 2:7에서는 하나님께서 생명의 호흡으로 인간을 창조하였다고 했는데, 여기서는 “주의 영”으로 인간을 창조하셨다고 말하고 있다. 이 두 성경절 사이에 존재하는 모순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오직 “루아흐”가 한 성경절에서는“호흡”으로 번역되었고, 다른 성경절에서는“영”으로 번역되었다는 사실을 이해할 때에만, 논리적 모순을 해결할 수 있다. 그러므로 “주의 영”으로 창조하였다는 말씀의 의미는 주의 호흡으로 창조하셨다는 뜻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제, 우리는 전도서 12:7로 돌아가서 그 말씀의 완전한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준비를 갖추었다. “영(spirit)은 그것을 주셨던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솔로몬의 말을 사람이 죽으면 그 혼백이 몸을 떠나서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면 커다란 오해를 갖게 된다. 다시 말해서, 사람이 죽으면, 그것을 주셨던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루아흐”를 어떤 의식을 가진 “혼백이나 귀신”같은 존재로 생각하는 것은 히브리 원어에 대한 지식의 부족과 영에 대한 잘못된 편견에서 빚어진 오해이다. “루아흐”가 “성령”으로 번역될 경우를 제외하고는, 죽음과 생명을 묘사하는 성경절에 나오는 “루아흐”는 반드시 창조시에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에 불어 넣어 주셨던 “생명의 호흡”또는 “생기”로 해석되어야 한다. 성경적으로 볼 때, 사람을 구성하고 있는 두 가지 요소인 “흙과 생명의 호흡” 이외에 어떤 것도 추가되거나 감해져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므로 솔로몬이 전도서 12:7에서 “영은 그것을 주셨던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라고 죽음을 묘사했을 때, 그는 생명의 호흡이 그것을 주신 분께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오직 호흡만이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는 유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D) 신약 성경에서의 “영”과 “호흡”

신약 성경도 이 문제에 대해서 중요한 빛을 우리에게 비추어 주고 있다. “영혼(spirit)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약 2:26. 여기에 나오는 “영혼”(spirit) 이라는 말을 성경의 난외주에서 찾아보면, “호흡(breath)을 뜻함”이라고 기록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앞에서 살펴 보았던 바와 같이, 전도서 12:7에서도 “영”이라는 표현이 “생명의 호흡”이라는 의미를 대신하였던 것처럼, 야고보서 2:26에서도 “영혼”이라는 표현이 “호흡”이라는 의미를 대신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구약성경이 히브리어로 기록된 것에 반하여, 신약성경은 헬라어로 기록되었다. 그러므로 구약성경에서 “호흡, 바람, 생기, 성령”을 뜻하는 히브리어“루아흐”가, 신약 성경에서는 헬라어“프뉴마”(pneuma) 라는 단어로 385회에 걸쳐서 사용되었는데, 신약 성경에서 “프뉴마”는 성령이나 악한 영으로 번역되었을 뿐만 아니라, 번역하는 사람의 사상과 주관에 따라서 “영, 마음, 심령, 정신, 바람”등으로 표현되었으며, 심지어는 “영혼”이라고까지 번역되어 있어서, 읽는 사람들에게 큰 혼란을 주고 있는데, 그 몇가지 실례를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

마태복음 27:50 :“예수께서 크게 소리지르시되 영혼(프뉴마)이 떠나시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생명의 호흡이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갔다는 사실 즉, 그분의 죽음을 뜻하는 말씀 임에도 불구하고, “프뉴마”가 “영혼”으로 잘못 번역되어 있기 때문에, 마치 예수님이 죽는 순간에 그분의 혼백이 몸을 떠났던 것으로 오해하기 쉽다.

사도행전 7:59 :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프뉴마)을 받으시옵소서.” 여기서도, 생명이 끊어질 때에 호흡이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표현이, 마치 영혼이 스데반의 몸에서 빠져나가 하늘로 올라간 것처럼 잘못 번역되어 있다.

이렇듯, 구약에서 389회 쓰여진 “루아흐”나 신약에서 385회 쓰여진 “프뉴마”가 비록 신, 영, 또는 영혼이라고 번역되어 있을지라도, 히브리어나 헬라어의 원어적 의미로 볼 때, 그것이 성령을 가리키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인간과 연관되어 사용되는 모든 경우에 있어서, 단 한번도 불멸하거나 죽은 시체에서 보이지 않는 연기가 되어 몸을 빠져나가는 어떤 존재를 의미하지 않는다. “영, 신, 영혼”이라고 번역된 말의 원어적 의미와, 태초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어떻게 창조하셨는가를 올바로 살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죽음에 관한 신비를 벗길 수 있으며, 죽는 순간에 사람의 영이 소리없이 빠져나가 허공을 떠돌아 다니게 된다는 미신에 빠질 수 없다.

이제, 다시 독자들이 대답할 때가 되었다. “죽는 순간에 무엇이 하나님께로 돌아 가나요?” 몸에서 소리없이 빠져나간 혼백입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생명의 호흡”입니까?

4부 - 영혼은 언제, 어떻게 없어질까요?


앞에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신 두 가지 재료를 설명하면서, 하나님의 창조 공식을 잠시 설명하였지만, 영혼에 대한 오해와 편견이 너무나 깊이 사람들의 마음에 박혀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위대한 과학을 좀더 자세하게 공부해 보자.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의 창조 과학을 분명하게 이해하게 되면, “영혼은 언제, 어떻게 없어집니까?”라는 질문에도 쉽게 대답할 수 있다. 인간을 만드실 때에 사용하셨던 하나님의 창조 공식이 성경의 어디에 나와 있는가? 그것은 창세기 2장 7절에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킹제임스 영어 성경 : “주 여호와께서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의 콧구멍에다 생명의 호흡(life of breath)을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살아 있는 혼(living soul)이 되었더라.” 창 2:7
개역 한글판 성경 :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창 2:7

그러므로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의 창조 공식은, 흙(몸)+생명의 호흡 또는 생기(생명력)=살아있는 혼 또는 생령(사람) 이다. 물론, 여기서 생명의 호흡(생기)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호흡하는 공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체가 활동할 수 있게 만드는 특별한 생명력을 의미한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성경은, 생명이 끊어지는 죽음의 순간을 호흡이 끊어지는 것으로 묘사하는 것이다.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라” 시편 146:4.

A) 창조 공식에 대한 오해

다시 한번 창세기 2:7을 생각하면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신 모습을 상상해 보자. 먼저, 하나님께서는 흙으로 사람의 몸을 빚으셨는데, 그것은 완전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필요한 기관들과 모양을 갖추고 있는 죽은 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몸에는 아직 생명력이 없기 때문이다. 심장은 있지만 뛰지 않으며, 피는 있으나 흐르지 않고, 두뇌는 있으나 생각하지 않는 죽은 몸이다.

그런데 그 때 하나님께서는 당신께서 만드신 그 몸에 중요한 한 가지를 더 추가하셨다. 그분께서 사람의“콧구멍에다 생명의 호흡을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살아 있는 혼(living soul)이 되었”다(창 2:7). 이 말씀이 가진 중요성을 결코 쉽게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 말씀은 너무나 많은 경우에 잘못 해석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몸 안에 영혼을 집어 넣으시지 않으셨다. 그분께서는 오직 한가지 즉, 생명의 호흡(생기)을 불어 넣으셨다. 몸과 호흡이 합침으로써 사람은 살아 있는 영혼(생령)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의 창조 공식은, 몸+영혼=사람이 아니라, 흙(몸)+생명의 호흡(생명력)=살아있는 영혼(사람)이다.

그러나 오늘날 거의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시기 위해서 몸 안에 연기같은 영혼을 집어 넣으셨다는 미신적인 견해를 받아들이고 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어렸을 때부터 교회나 학교에서 그러한 말을 들어왔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성경 말씀을 제외한 이 세상의 모든 종교들은 인간의 몸 안에“영혼”이 들어있다고 믿고 있는데, 그러한 미신적 가르침이 그리스도 교회에도 깊이 들어와 있다. 성경에 나오는 몇가지 시적 혹은 비유적인 표현들을 제외하고는, 영혼이 육체의 안과 밖으로 드나든다고 말한 곳은 단 한군데도 없으며, 영혼이 육체를 떠나서 독자적으로 존재한다고 말한 곳도 없다는 사실을 알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깜짝 놀랄 것이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신 창조 공식을, 몸+영혼=사람으로 착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B) 예증으로 알아보는 하나님의 창조 공식

56전구+전류=빛 : 위에서 공부한 것처럼, 영혼은 사망 직후에 연기처럼 빠져 나가는 어떤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흙으로 빚으신 몸에 생명의 호흡을 첨가하신 결과로 존재하게 된 의식이 있는 생명체를 말한다. 이 진리를 좀 더 명확히 이해하기 위해서 간단한 예를 들어 보자. 사람의 몸을 전구라고 가정하고, 그 속에 흐르는 전류는 하나님께서 몸 속에 불어넣으신 생명의 호흡으로 생각하면, 전구에서 비쳐나오는 빛은 몸과 호흡이 합쳐졌을 때에 사람이 된 영혼으로 볼 수 있다. 즉, 전구(몸)+전류(생명의 호흡)=빛(영혼 또는 사람)의 공식을 생각해 보도록 하자. 우리가 반짝거리는 빛을 볼 때에, 우리는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의 창조를 연상케 하는 매우 좋은 표상을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누군가가 스위치를 내려서 빛이 꺼졌다고 하자. 스위치를 내리는 순간에 빛은 어디로 갔는가? 갑자기 빛이 없어져 버린 것이다. 왜냐하면 더이상 전류가 전구에 흐르지 않기 때문에, 스위치를 내림과 동시에 빛이 즉시로 사라지게 되었던 것이다. 자, 이제 이러한 전구의 모습을 연상하면서 다음 질문에 답해 보자. 몸에서 호흡이 끊어지면, 영혼(빛)은 어디에 있는가? 예수께서 재림하시면서, 죽었던 자들이 부활하게 될 때, 하나님께서 스위치를 올림으로써 인간의 몸에 다시 생명의 호흡(전류)을 회복시켜 주실 때까지 영혼(빛)은 존재하지 않게 된다.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고전 16:51~53.

위에서 언급한 전구의 예증이 바로, 사람이 죽는 순간에 육체와 생명의 호흡이 어떻게 전에 있던 대로 “돌아가”는지를 보여 주는 것이다. 육체(전구)는 부패되어 땅으로 돌아가고, 생명의 호흡(전류)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감으로써 중단되면, 영혼(빛)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흙으로 만들어 놓았을 때에, 아담은 흙덩어리인 육체에 불과하였다. 하나님께서 아담의 몸에 생명의 호흡(생명력)을 불어넣으시기 전에는 아무런 개성이나 감정도 없었다. 그런데 몸에 하나님께서 생명의 호흡을 주시자, 즉시로 사람은“살아 있는 영혼(생령)”이 되었던 것이다. 이와같이, 영혼(생령)이 육체와 생명의 호흡(생명력)과의 연합의 결과로서 존재하게 된 것이라면, 그 영혼이 사라지는 때는 언제이겠는가? 물론, 그것은 전구에 흐르던 전류가 중단되는 것과 같이 그 연합 상태가 파괴될 때이다.

판자+못=상자 : 우리들의 손에 판자와 못을 가지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지금 우리들의 손에는 두 가지 즉, 판자와 못이 있지만, 망치를 사용해서 판자에 못을 박음으로써 상자를 만들면, 이제 우리는 두 가지가 아닌 세 가지를 가지게 된다(판자와 못과 상자). 얼마 있다가, 조심스럽게 상자에서 못을 빼어 옆에 놓으면, 우리는 다시 판자와 못, 두 가지 만을 갖게 된다. 판자로부터 못을 빼었을 경우, 상자는 어디로 갔는가? 없어졌다!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상자는 못과 판자가 서로 연합되어 있는 상태에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와 똑같은 방법으로, 하나님께서는 두 가지 즉, 몸과 생명의 호흡을 가지고 창조의 사업을 시작하였다. 하나님께서 그 둘을 연합시키셨을 때, 인간은 영혼이라고 불리워 지는 상태로 존재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솔로몬은 말하기를, 죽을 때에 영(호흡, 루아흐)은 하나님께로 되돌아 가고, 몸은 흙으로 돌아간다고 했던 것이다. (참조 : 이미 앞에서 배웠던 것처럼, “루아흐”나 “프뉴마”는 그것을 번역하는 사람이 영혼에 대해서 어떠한 견해와 사상을 가지고 있는가에 따라서, 호흡이 끊어지는 죽음의 장면을 “영, 신, 영혼” 등이 몸을 떠나는 것으로 번역하였지만, 원래의 의미는 생명의 호흡이 원래 그것을 주셨던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의미함) 성경의 어떤 곳에서도 영혼이 몸 없이 떠돌아 다닌다거나, 몸 없이 계속 존재한다는 기록을 찾아 볼 수 없다. 몸과 생명의 호흡의 결합관계가 깨어질 때, 영혼(생명체)은 존재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영혼(생명)은 몸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생명의 호흡(생명력)이 없이는 단 한순간도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죽는다는 것은, 생명의 호흡(생명력)이 인간의 몸에서 제거되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하며, 따라서 죽은 사람의 몸도 호흡이 몸과 결합되기 전의 상태인 흙으로 되돌아 가게 된다.

자 이제, 독자들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할 시간이 되었다. “영혼은 언제, 어떻게 없어집니까?”

5부 - 영혼은 연기 같은 존재인가요?


A) 성경의 원문이 말하는“영혼” 의 의미

“주 여호와께서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의 콧구멍에다 생명의 호흡을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살아 있는 혼(living soul)이 되었더라.” 창 2:7(킹제임스 영어 성경역).

성경은 완성된 인간 창조물을 가리켜 “살아 있는 혼, 또는 생령”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것을 구약성경의 원어인 히브리어로는 “네페쉬”(nephesh)라 하고, 신약성경의 원어인 헬라어로는 “프쉬케”(psuche)라 한다. 이 두 개의 원어는 모두 “숨쉬며 살아 있는 존재” 즉,“생명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뉴 킹제임스 영어 성경에는 “살아있는 혼”(living soul)이라는 표현 대신에 “살아있는 존재”(living being)라고 번역상의 표현을 바꾸었다. “호흡”이라는 뜻을 가진 “루아흐”나 “프뉴마”를 잘못 오역함으로서 생긴 오해들이, “생명”이라는 뜻을 가진 히브리어나 헬라어를 잘못 번역함으로서 똑 같이 반복되고 있다. “영혼”(soul)에 대한 잘못된 편견과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의 견해에 맞추어서 성경을 번역함으로써 빚어진 잘못이다.

B) “영혼”이라는 단어에 대한 오해

많은 사람들은 “생명”을 의미하는 히브리어나 헬라어가 한글 성경에 종종“영혼”으로 번역되어 있기 때문에, 그 원어의 의미를 완전히 곡해하게 되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영혼을 본래부터 불멸의 성질을 가지고 있는 혼백이나 귀신으로 교육받아 왔기 때문에,“영혼”이라는 말을 읽거나 들을 때마다 그들은 성경이 말하는 바와는 전혀 다른 어떤 것을 추측하게 된다. 그러나 성경은 단 한 번도 영혼을 불멸이나 죽지 않는 연기같은 존재로서 언급한 적이 없다.

“생명”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구약 성경의 원어인 히브리어 “네페쉬”는, 구약에 기록된 총 754회 중에서 22번은 “새, 물고기. 짐승”등을 가리켰으며, 7번은 사람과 짐승을 동시에 가리켰고, 절반 이상은 “영혼”(soul)으로 번역하였으며, “네페쉬”의 참 뜻인 “생명”(life) 으로는 119번 번역되어 있다. 또한 “네페쉬”와 동의어로서 사용된 신약 성경의 “프쉬케”는 총 105번 사용되었는데, 번역하는 사람의 판단에 따라서 “생명”으로 40번, “마음”으로 3번, 그리고 “영혼”으로는 58번이나 오역되었다. 이러한 번역상의 문제 때문에, 사람이 죽는 순간에 영혼이 몸에서 빠져 나가서 불멸한다는 선입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성경절들을 가리키면서, 영혼불멸설을 주장하게 되는 것이다;

마태복음 10:28 : “몸은 죽여도 영혼(프쉬케)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 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프쉬케)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 하라.” 영혼에 대한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이 성경절을 지적하면서, “자 보라, 몸은 죽어도 영혼은 몸으로부터 빠져 나가기 때문에 결코 죽을 수 없다” 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러한 오해는 28절의 다음에 이어지는 39절의 말씀을 읽을 때에 쉽게 풀린다. “자기 목숨(프쉬케)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프쉬케)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앞에 나오는 28절에서는 “영혼”으로 번역되었던 “프쉬케”가 39절에서는 “목숨”, 즉 “생명”(life)으로 바르게 번역됨으로써, 28절의 의미를 올바로 파악할 수 있다. 그렇다면 28절의 참 뜻이 무엇인가? 그 당시에 바리새인들이나 로마의 관원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의 생명까지 위협하였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생명에 대한 위협으로 인하여 위축되어 있던 사람들에게 용기를 잃지 말라는 격려의 말씀을 하셨던 것이다. 즉, 그리스도를 위하여 육신의 생명을 빼앗길 지라도,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받은 영원한 생명은 핍박자들이 결코 빼앗지 못할 것이므로, 잠시 뿐인 육신의 생명을 버리는 순교의 길을 두려워 하지 말라는 의미이다.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요 5:24.

요한계시록 6:9,10 :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프쉬케)들이 제단 아래 있어 큰 소리로 가로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제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하니.” 죽는 순간에 영혼이 몸을 빠져나가서 불멸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서 많이 사용하는 성경절 중의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그들은 “여기에 나온 영혼들은 순교당하여 죽은 사람들의 영혼들이며, 그들은 죽은 후에도 의식을 가진 채 자신들의 원통함을 부르짖고 있다”고 말한다. 요한계시록 6장에 나오는 이 말씀이 정말, 그리스도를 위하여 목숨을 잃은 각시대의 순교자들의 형체없는 영혼들이 성전에서 제물을 드리는 좁은 제단 아래 밀집해 모여서, 그들의 원통함을 참지 못하여 소리지르고 있다는 뜻인가? 그러한 일이 하늘 어디선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는가?

우리가 아는 바대로, 요한계시록은 심오한 영적 진리를 상징을 통하여 드러내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계시의 말씀도 상징적으로 받아 들여야 한다. 이 성경절에 나오는 “제단, 피”와 같은 단어에서, 우리는 이 말씀이 성소에 나오는 용어들을 사용하여 상징적으로 표현하였다는 사실을 간파할 수 있다. 구약 성경에 나오는 제단은 성소의 뜰에 있는 것으로서, 그 당시 제사장은 희생제물인 죄없는 어린양의 피를 제단 사면에 뿌렸다.(레 1:5). 요한계시록을 기록한 사도 요한은 바로 그러한 이스라엘의 제사제도를 기억하면서,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순교자들의 희생의 피도 어린양의 피처럼 흘려져서 제단 아래에 있다는 상징적 표현을 사용한 것이다.

제단 아래에 흘려진 순교자들의 희생의 피가 복수를 갚아달라고 호소하는 장면이 나오는데(“우리 피를 신원하여”), 이것 역시 실제가 아니고 상징이라는 증거가 계속해서 이어지는 11절에서 증명된다. “각각 저희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이것은 예수께서 그들의 호소에 대한 응답으로 흰 두루마기를 순교자들에게 주시는 모습인데, 영혼불멸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위에 나온 9,10절이 이미 하늘에 올라가 있는 순교자들의 아무런 실체가 없이 연기처럼 존재하는 영혼이라면, 어떻게 연기처럼 존재하는 영혼들이 흰두루마기를 입을 수 있겠는가? 상징과 실체를 구별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처럼 커다란 혼란을 겪게 된 것이다. 상징적인 표현을 사용하여 기록한 계시를 문자 그대로 해석하였기 때문에, 순교자들이 죽는 순간에 그들의 영혼이 육체를 빠져 나가서 하늘로 올라갔다고 착각하게 된 것이다.

C) 동물들도“프쉬케”라고 불리운다!

“영혼의 원어적 의미가 생명이라면, 동물들도 영혼(프쉬케)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아니요”라는 대답을 하면서, 다음과 같이 자신들의 답변에 대한 설명을 덧붙인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만물의 영장으로 만드셨기 때문에, 오직 사람만이 영혼(프쉬케)이라고 불리워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어나 헬라어 성경 원문에는, “프쉬케”라는 말이 동물들을 표현하는데에 사용되었는데, 그래서 영어 성경에는 동물들이“영혼”(soul, 한국어 성경에는“생물들”이라고 번역되어 있음)이라고 번역되어 있다. “둘째가 그 대접을 바다에 쏟으매 바다가 곧 죽은 자의 피같이 되니 바다 가운데 모든 생물(soul, 영혼)이 죽더라.” 동물들도 “프쉬케”라고 불리우는 이유는 그들도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으로부터 사람이 받는 것과 동일한 생명력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솔로몬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던 것이다. “인생에게 임하는 일이 짐승에게도 임하나니 이 둘에게 임하는 일이 일반이라 다 동일한 호흡이 있어서 이의 죽음같이 저도 죽으니 ....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 곳으로 가거니와” 전 3:19,20. 물론, 이 말은 사람과 동물이 동일한 최후의 운명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은 인간들에게만 부활과 심판의 기회가 주어져 있다. 그러나 모든 생명력(생명의 호흡)은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간에 오직 하나님께로부터만 오며, 사망시에는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간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성경은 생명을 영혼이라고 표현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기 바란다.

이와 같이, 성경에는“네페쉬”나 “프쉬케”가 인간(살아있는 영혼, 생령)으로 번역되었을 뿐만 아니라, 물고기, 파충류, 육축과 같은 짐승들로도 번역되었기 때문에, 만일 “네페쉬”나 “프쉬케”가 영혼 불멸설을 믿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불멸의 혼백이라면, 도살장에서 죽은 소나 구운 상태로 밥상에 오른 물고기, 그리고 기름에 튀겨진 닭들도 불멸의 영혼을 가지고 있다는 기상천외한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영혼(soul)이라는 말로 번역되었기 때문에, 불멸의 혼백이라는 인상을 주고 있는 “네페쉬”나 “프쉬케”는 사람이나 동물, 그리고 살아있는 생명체를 가리키는 것이지, 인간이나 어떤 생물 속에 존재하는 귀신이나 혼백이 아니라는 분명한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이제 다시, 독자들에게 질문하고자 한다. “성경에 나오는‘영혼’은 보이지 않는 연기같은 존재 입니까?”

6부 - 의인과 악인은 지금 어디에 있나요?


만일 사람이 죽는 순간에 영혼이 육체를 빠져 나와서 의인들은 하늘에 가고, 악인들은 지옥에 간다면, 성경에 나오는 선지자나 의인들의 영혼은 지금 하늘에 있어야 하며, 악인들의 영혼은 지옥에 가있어야 한다.

이제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성경에서 찾아보자. 성경은 죽은 의인들과 악인들이 현재 어디에 있는지를 아무도 오해할 수 없는 언어로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A) 죽은 의인들의 현주소

사도행전 2:29~34 에서, 베드로는 그 당시 이미 죽은지 700년 이상이나 되는 다윗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말하였다.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비록 다윗이 생전에 하나님께 대한 죄악을 범하였을지라도, 그는 용서와 구원의 확신을 가진 채 죽었다. 성경을 아는 어떤 그리스도인도 다윗이 구원받지 못하였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죽는 순간에 의인의 영혼은 즉시로 몸에서 빠져 나와서 천국에 올라 간다면, 어째서 베드로는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라고 말하였을까? 다윗이 죽고난 후 700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왜 다윗은 천국에 올라가서 사는 축복을 누리지 못하였을까? 29절에 나오는 베드로의 대답을 들어 보자. “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

베드로는 말하기를, 다윗은 지금 무덤 속에 있으며, 아직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다고 선언하였다. 참으로 놀라운 사실이다. 하나님께서 그토록 사랑하시던 다윗이 죽은지 700년이 지났어도 천국에 들어가는 약속의 보상을 받지 못하였다면, 다윗과 같이 선한 생애를 살다가 죽은 다른 의인들은 어떠하겠는가? 그들 역시 무덤 속에서 쉬면서, 예수께서 재림하시는 부활의 날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일어날 것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에녹과 엘리야는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하늘로 승천하였는데, 이것은 예수 재림 시에 그 때까지 이 땅에 살았던 모든 의인들이 하늘로 승천할 것이라는 사실을 예표한다. 히브리서 11:13 에도 죽은 의인들의 현주소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되.” 히브리 11장에는, 우리가 잘 아는 믿음의 조상들과 그들이 어떠한 믿음을 가지고 살았는가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여기서, 바울은 믿음의 조상들인 아벨, 에녹, 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을 열거하면서, 그러한 위대한 믿음의 조상들도 이 땅에서 나그네처럼 살다가 하늘에 가지 못하고 위에서 언급한 다윗과 같이 무덤 속에 누워 있기 때문에, 그들 역시 아직 약속을 받지 못하였음을 지적하였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서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이 문제에 대해서 예수께서는 누가복음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 눅 14:14. 마태복음에도 다음과 같은 그리스도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대로 갚으리라.” 마 16:27. 여기에 나온 두 개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시에 있을 부활 때까지는 아무도 보상을 받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매우 단순하고도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는 아무도 하늘이나 지옥에 먼저 갈 수 없다는 뜻이다. “그 때(재림)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 예수께서 말씀하신대로 모든 사람들은 무덤 속에서 최후의 심판을 기다리고 있는데, 사도 요한이 기록한 요한계시록에서 다시 한번 더 이 진리를 확인할 수 있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대로 갚아 주리라.” 계 22:12.

사도 바울은 의인들이 예수 재강림의 날에 받게 될 보상에 대해서 좀더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고전 15:53. 마지막 날에 어떤 일이 일어난다는 말인가? 바울이 설명하는 죽음과 부활의 비밀에 대해서 자세히 들어보자.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고전 15:51~52. 예수께서는 이러한 의인들의 부활을 가리켜 “생명의 부활”이라고 부르셨다.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 나오리라.” 요 5:28~29. 죽은 의인들은 예수 재강림 때까지 그들의 현주소인 무덤 속에서 “생명의 부활”을 기다리게 된다는 성경의 가르침을 부정할 수 있는가?

B) 죽은 악인들의 현주소

악인들이 죽었을 경우, 그 영혼이 즉시로 몸을 빠져나가서 지옥의 유황불에 들어가는 형벌을 받는가? 이 질문에 대하여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이 답변하고 있다. “만일 네 손이 범죄케 하거든 찍어버리라.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의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리라.” 막 9:43. 여기서 예수께서는 악인의 혼이 지옥불에 들어 간다고 말씀하셨는가? 아니다. 그분께서는 “두 손”을 가진 육체를 가지고 지옥에 들어간다고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5:30에서도, 예수께서는 “온 몸”이 지옥불에 던지운다고 말씀하심으로써, 악인의 혼이 아니라 육체가 유황불 속에서 형벌을 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셨다.

죽음 직후에 혼이 소리없이 육체를 빠져 나가지 않는다는 진리는, 우리들에게 “악인들에게도 부활이 있는가?”라는 의문을 갖게 만든다. 그렇다. 위에서 배운 것처럼,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에는 오직 의인들만 부활하여 하늘로 승천하지만, 성경은 악인들의 부활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 사도행전에는 악인의 부활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저희의 기다리는 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라.” 행 24:15. 의인들에게 부활이 있는 것처럼, 악인에게도 부활이 있는데, 예수께서는 악인들의 부활을 “심판의 부활”이라고 부르셨다.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요 5:28~29. 그렇다면 악인들은 언제 부활해서 그들의 악한 생애에 대한 형벌을 받게 될까? 이 질문에 대한 힌트가 베드로 후서 2:9에서 발견할 수 있다. “주께서는 경건한 자들을 시험에서 구해내시고 불의한 자들을 형벌에 처할 심판의 날까지 가두실 것을 아시느니라.” (킹제임스 영어성경역). 이 말씀은 예수께서 악인들을 심판의 날까지 무덤 속에 가두어 두실 것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의인들은 예수 재림 때까지 무덤 속에서 “생명의 부활”을 기다리며, 악인들 역시 무덤 속에서 천년기의 끝에 받게 될 “심판의 부활”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죽은 자들의 현 주소이다(천년기에 대해서는 살아남는 이들 21호에서 자세하게 설명하였음). 사람이 죽는 순간에, 영혼이 몸을 살짝 빠져나가서 의인은 하늘에 가고, 악인은 지옥에 간다면, 부활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이미 하늘이나 지옥에 가있는 사람들을 다시 지구로 불러내려서 무덤으로부터 부활시킨 다음에 다시 천국과 지옥으로 되돌려 보낸다는 것이 얼마나 우스운 이야기인가? 죽는 순간에 영혼이 몸을 빠져나간다는 이야기야말로 그리스도 교회의 부활 신앙을 우화로 만들어 버리며, 하나님을 비논리적이고 우스운 분으로 만들어 버리는 위험한 독소이다. 자 이제 독자들이 스스로 판단해서 대답할 때가 되었다. “의인들과 악인들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요?”

7부 - 죽은 사람들은 무덤 속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죽은 자들은 부활의 순간까지 무덤 속에서 어떤 상태로 있을까? 성경은 죽음 후의 상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A) 죽음 이후의 상태

1. 자식이 잘되고 못되는 것도 전혀 느끼지 못할 정도로 현실과 완전히 단절된 상태이다 : “그 아들이 존귀하나 그가 알지 못하며 비천하나 그가 깨닫지 못하나이다.” 욥기 14:21
2. 일체의 감정과 의식이 없다 : “죽은 자는 아무 것도 모르며.” 전도서9:5,6.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plan, 계획)가 소멸하리로다.” 시편 146:4
3. 아무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는 무활동의 상태이다 : 전도서 9:10
4. 고통도 느끼지 못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찬양할 수도 없는 무감각의 상태이다 : “사망 중에서 주를 기억함이 없사오니 음부(무덤, grave)에서 주께 감사할 자가 누구리이까” 시편 6:5. “내가 무덤에 내려갈 때에 나의 피가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어찌 진토가 주를 찬송하며 주의 진리를 선포하리이까.” 시편 30:9. “죽은 자가 여호와를 찬양하지 못하나니 적막한데 내려가는 아무도 못하리로다.” 시편 115:17. “음부가 주께 사례하지 못하며 사망이 주를 찬양하지 못하며 구덩이에 들어간 자가 주의 신실을 바라지 못하되 오직 산 자 곧 산 자는 오늘날 내가 하는 것과 같이 주께 감사하며 주의 신실을 아비가 그 자녀에게 알게 하리이다.” 이사야 38:18,19.

B) 잠이라고 불리우는 죽음 이후의 상태

성경은 위와 같은 죽음 이후의 상태를 “잠”(sleep) 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러한 성경의 단순한 표현은 죽음에 대하여 일어날 수 있는 여러가지 다른 이론들을 잠재우고 있다.

다니엘은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하여 예언하면서, 흙으로 돌아간 죽은 자들이 잠에서 깨어 날 것이라고 말했다. “그 때에 네 백성 중 무릇 책에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을 얻을 것이라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다니엘 12:1,2.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저자들이 죽음을 잠이라고 말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잠”은 죽은 자의 상태를 가장 완전하게 묘사할 수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몹시 피곤에 지쳐서 밤에 잠자리에 누으면, 눕자 마자 깊이 잠들게 되는데, 이러한 경우에 다음 날 아침에 깨어날 때까지의 시간은 마치 한 순간이 지난 것처럼 느껴지게 된다. 그는 자기가 잠든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를 전혀 모르는 상태로 깊은 무의식 세계 속에서 잠을 잔 것이다. 죽음이라고 불리우는 잠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성경이 죽음을 잠이라고 부르는 또 하나의 이유는, 죽음은 마치 잠과 같아서 시간과 공간과 주변 사물을 전혀 의식할 수 없으며, 아침이 되어 잠에서 깨어나는 것처럼, 언젠가는 죽음이라는 잠에서 깨어나 부활할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죽음을 “잠” 의 동의어로 사용한 경우가 66번이나 기록되어 있는데, 다음에 열거하는 성경의 위인들은 모두 죽음을 “잠”으로 표현하였다;

욥 : 욥기 3:13 ; 7:21 ; 14:12 ; 17:16
모세 : 신명기 31:16
다윗 : 시편 13:3 ; 사무엘하 7:12 ; 열왕기상 1:21, 2:10
솔로몬 : 열왕기상 11:43
예레미야 : 예레미야 51:39,57
다니엘 : 다니엘서 12:2,13
예수 그리스도 : 마태복음 9:24 ; 마가복음 5:39 ; 누가복음 8:52 ; 요한복음 11:11
마태 : 마태복음 27:52
베드로 : 베드로후서 3:4
누가 : 사도행전 7:60, 13:36
바울 : 고린도전서 11:30, 15:6,18,20 ; 데살로니가 전서 4:13~15, 5:10

영감을 받은 성경의 기자들이 가장 자주 언급한 죽음의 성격은, 죽으면 아무 것도 모르는 무의식 상태가 된다는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계 뿐만 아니라 여타의 모든 종교계에 공존하는 대표적인 사상은“죽음 이후에도 생명이 있다”는 가르침인데, 이러한 가르침은 성경의 어느 곳에서도 발견할 수 없는 사상이다. 중세기 때에 이방 종교인들이 믿고 있는 가르침이 그리스도 교회에도 스며 들어왔던 것이다.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plan, 계획)가 소멸하리로다”고 말했던 시편의 말씀은 죽음을 매우 단순하고도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다(시편 146:4). 솔로몬도 죽음에 대한 시편의 기록에 다음과 같이 동의하고 있다. “무릇 산 자는 죽을 줄을 알되 죽은 자는 아무 것도 모르며 다시는 상도 받지 못하는 것은 그 이름이 잊어버린 바 됨이라 그 사랑함과 미워함과 시기함이 없어진지 오래니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에 저희가 다시는 영영히 분복이 없느니라 ... 무릇 네 손이 일을 당하는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어다 네가 장차 들어갈 음부(무덤)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전도서 9:5,6,10.

죽음 이후의 상태에 대한 사람들의 편견과 선입관은 너무나 깊이 뿌리 박혀 있기 때문에, 매우 분명한 성경 말씀을 눈 앞에 보여주면서 읽어주어도 그 말씀을 받아 들이지 않는 경향이 있다. 만일 다음과 같은 말씀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고 가정한다면, 죽음에 대한 모든 논쟁은 이미 오래 전에 확실하게 끝났을 것이다; “그 사랑함과 미워함과 시기함이 계속될 것이니 네가 장차 들어갈 음부에는 일도 있고 계획도 있고 지식도 있고 지혜도 있음이니라.” 누가 감히 이러한 성경절에 맞서서 자신의 주장을 펼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정말 믿기 어려운 일들이 기독교회 안에서 펼쳐지고 있는데, 성경에는 그러한 기록이 전혀 없을 뿐아니라, 오히려 그와 정반대되는 사실에 대해서 거듭 거듭 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믿기 원하는 것만을 고집하고 있다. 죽음에 대한 진리를 증언하고 있는 수 많은 성경절들을 보면서도, 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유교와 불교에서 가르치는 가르침을 맹목적으로 따르고 있다.

죽음에 대한 진리를 다시 한번 읽어 보자! “음부(무덤)가 주께 사례하지 못하며 사망이 주를 찬양하지 못하며 구덩이에 들어간 자가 주를 찬양하지 못하며 구덩이에 들어간 자가 주의 신실을 바라지 못하되 오직 산 자 곧 산 자는 오늘날 내가 하는 것과 같이 주께 감사하며 주의 신실을 아비가 그 자녀에게 알게 하리이다” 이사야 38:18,19. 만일 죽은 의인들이 자신들이 죽는 순간에 하늘나라로 인도된다면, 그들은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겠는가? 다윗은 죽음에 대한 진리를 이렇게 기록하였다. “죽은 자가 여호와를 찬양하지 못하나니 적막한데 내려가는 아무도 못하리로다” 시편 115:17.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함이 없사오니 음부에서 주께 감사할 자가 누구리이까?”시편 6:5.

C) 사도 바울의 장례식 설교

신문에 가끔 실리는 장례식의 부고 광고문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글을 보게 된다. “홍길동 님께서는 향년 52세의 나이로 1998년 1월 16일 0시 55분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천국으로 가셨기에 이에 부고합니다.” 또한 장례식장에서도 이와 비슷한 설교들이 흘러 나오고 있는데, 형체도 없는 죽은 사람의 영혼이 훨훨 날아서 하늘로 올라갔으니, 후에 하늘에 가서 다시 만날 수 있다고 위로하는 목사님들의 설교를 듣게 된다. 그런데 과연 신문에 나오는 부고문이나 장례식장에서 쉽게 들을 수 있는 전형적인 장례사들은 성경이 말하는 진리와 일치하는가? 정말로 죽은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아들 딸들은 하늘로 올라갔는가? 이 질문에 대한 확실한 대답을, 우리는 데살로니가전서 4장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장례식 설교에서 찾을 수 있다.

데살로니가전서 4:16~18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장례식 설교에서, 바울은 유가족들을 위로하는 말씀으로 그의 설교를 끝맺는다. “그러므로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 우리는 데살로니가 전서 4장에 나오는 바울의 설교만이 유가족들에게 완전하고도 참된 위로를 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그러면 이제, 바울의 장례식 설교문을 함께 읽어보도록 하자.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그러므로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살전 4:16~18절.

여기서 바울은 하늘에서 예수님과 함께 있을 수 있는 방법을 말하고 있다. 그의 설교 가운데 나오는“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란 말을 쉽게 간과하지 말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그 말은“이런 방법을 통해서만 주와 함께 있을 수 있다”라는 뜻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주님과 함께 있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성도들의 부활을 제시한 다음에, 유가족들에게 말하기를“그러므로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고 말했던 것이다. 사람이 죽었을 때에 어떤 보이지 않고 만질 수 없는 연기같은 형체가 몸을 떠나서 천국에 가거나 지옥으로 떨어진다는 식의 설교는 유가족들에게 아무런 위로가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도 어긋나는 설교이다. 사랑하던 사람을 사별했을 때, 그가 하늘나라에 먼저 가서, 지상에 남겨두고 온 가족들이 세상에서 겪는 온갖 마음 아픈 상황들을 내려다 보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유가족들에게 참된 위안을 가져다 줄 수 있는가? 바울은 사람이 죽은 후에 주님과 함께 있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을 설명하면서, 예수님의 다시 오심과 부활을 지적하였던 사실을 기억하도록 하자.

바울의 말은 죽음과 무덤이 끝이 아니라는 영광스러운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바울은 유가족들에게 죽음의 잠으로부터 깨어나는 부활을 말하면서 위로하였던 것이다. 의인들은 불멸의 몸을 선물로 받을 것인데, 그 일은 순식간에 일어날 것이다.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고전 15:51~53. 모든 죽은 자들은 완전한 무의식 세계 속에서 잠을 자다가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는 최종 선고를 듣기 위해서 일어날 것이다. 그들이 1000년 전에 잠들었든지 또는 예수께서 오시기 5분 전에 잠들었든지 간에, 그들에게 있어서 부활하는 순간까지의 시간은 0.01초도 안되는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어떤 분들은 예수께서 오래 전에 죽었던 모든 사람들의 갈갈이 헤지고 썩은 시체들을 어떻게 회복시키실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서 염려한다. 물론, 어떤 시체들은 폭탄에 맞고, 또 어떤 시체들은 불에 타고, 또 많은 사람들은 깊은 바다에 빠졌다. 그러나 모든 생명의 근원이신 창조주께서 각 사람의 개성을 완전하게 회복시키는데에 어떤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하나님께서는 각 개인을 완전하게 부활시키는데에 아무런 문제도 없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

몸을 빠져 나간 죽은 사람들의 혼은 살아 있는 가족들과 친지들을 도와주기 위하여 공중을 이리저리 날아다니고 있을까? 죽은 영혼들은 제사 때마다 자신의 집에 찾아와서 제사상 위에 차려진 음식들로 배를 채우면서 만족한 미소를 띄우고 있을까? 성경은 죽은 자들은 완전한 무의식 속에서 부활의 시간까지 “잠”을 자고 있다고 선언하고 있다. 이제 다시 독자들이 대답할 차례가 되었다. “죽은 사람들은 무덤 속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8부 - 나사로는 4일 동안 어디서, 무엇을 하다가 돌아왔나요?


요즈음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가끔씩 듣게 되는데, 그들은 지옥을 가보았다고도 주장하며, 천국에 갔다가 돌아왔다고도 말하면서, 지옥과 천국의 모습을 이야기 한다. 그런데 그들 중 누구의 이야기를 믿어야 하며, 어디까지를 진리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참으로 그 한계를 분명하게 정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그러나 성경에는 죽었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에 의해서 다시 살아난 사람의 이야기가 나온다.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그 이야기를 근거로 해서, 자신이 죽었다가 살아났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대한 권위있는 대답을 찾아 보도록 하자.

신약성경에는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의 이름은 나사로이다. 예수님과 절친했던 친구인 나사로가 죽었을 때,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나사로의 죽음을 설명하셨다. “가라사대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제자들이 가로되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 하더라. 예수께서는 그의 죽음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나 저희는 잠들어 쉬는 것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생각하는지라 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요 11:11~14. 계속해서 죽음에 대한 성경의 참된 가르침이 이어진다. 잠시 후에 예수께서 나사로의 돌무덤 앞에 서서 다음과 같이 크게 외치시는 모습이 나온다. “나사로야 나오라.” 그분께서는“나사로야 내려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는데, 왜냐하면 나사로는 하늘이나 다른 어떤 곳에 가있었던 것이 아니라 무덤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나사로는 죽음의 잠에서 깨어 밝은 태양빛 아래로 걸어 나왔다.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사람들에 대한 여러가지 과장된 이야기들이 있지만, 나사로에 대한 이야기야말로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가장 권위있는 이야기이다. 나사로가 4일동안 죽어 있었던 사실에는 어떠한 의심의 여지도 없다. 그의 누이들이 예수께서 무덤의 문을 막고 있는 돌을 옮겨 놓으라고 명령하셨을 때에 반대하였던 장면에서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나사로의 누이인 마르다는,“주여 죽은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라고 말함으로써, 나사로의 시체가 이미 부패되기 시작하였음을 예수께 고하였다(요 11:39).

간혹, 순간적으로 심장이 마비되었다가 소생한 사람들이 천국의 영광스러운 광경을 보았다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는가?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죽음의 다리를 건너갔다가 예수님 덕분에 4일만에 다시 돌아 온 나사로는 자신의 죽음의 경험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했는가? 그가 하늘나라의 영화로운 광경과 영광의 장면들에 대해서 말하였는가? 그렇지 않다. 그는 하늘에 대해서는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나사로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 잠자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순식간에 지나간 망각의 순간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나사로가 하늘에 올라가 있다가 다시 이 어두운 세상으로 불려 내려 왔다면, 그것은 나사로에게 있어서 얼마나 끔찍한 형벌이었겠는가? 만일 그가 하늘에서 의인들이 받는 보상을 즐기고 있었다면, 그는 제발 천국으로 다시 돌아가게 해달라고 예수님께 간청하였을 것이다. 만일 나사로가 천국에서 4일 동안 지냈었다면, 나사로에게 있어서 이 세상의 삶은 무서운 지옥에 가는 것보다 더 지긋지긋했을 것이다. 만일 나사로가 천국에 가있었다면, 그를 매우 사랑하셨던 예수께서는 그를 다시 지구로 불러오지 않으셨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잠”이라고 부르셨다. 예수께서 죽음에 대해 묘사할 때에 사용하신 간단한 용어를 믿는 것이 왜 그렇게도 어려울까? 잠든 동안에는 아무 것도 모른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이, 어떻게 죽은 후에는 더 많은 것을 아는 초자연적인 존재가 된다고 말하는지 알 수 없다. 만일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가 원하는대로 받아들이기 위해서 죽음의 의미를 왜곡시켜 버린다면, 예수님의 말씀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오늘날, 자신이 죽었었다가 살아났다고 말하면서, 자신이 직접 하늘과 지옥에 가보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는데, 만일 그들이 정말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면, 나사로처럼 하늘이나 지옥에 대해서 한 마디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사람이 죽는 순간에 영혼이 몸을 살짝 빠져나간다고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무당이나 점쟁이를 통하여 사단의 악령들에게 자신의 운명을 물을 수 있는 신학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성경은 죽음은 무엇을 보거나 말하거나 들을 수도 없는 완전한 무의식의 세계라고 선언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사람은 누우면 일어나지 못하고, 하늘들이 없어질 때까지 그들은 그들의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일어나지 못하는 도다 ... 자기 아들들이 존귀하게 되나 그는 그것도 알지 못하며 그들이 비천하게 되어도 그가 그것을 알지 못하나이다.” 욥기 14:12,21. “해 아래서 행해지는 어떤 것에서 더 이상의 몫을 영원히 얻지 못하느니라.” 전도서 9:6. 

이제 다시 독자들이 대답할 시간이 되었다. “나사로는 4일 동안 어디에서 무엇을 하다가 돌아왔나요?”

9부 - 예수님은 3일 동안 하늘에 올라가 계셨나요?


많은 사람들이 누가복음 23장에 나오는, 예수님과 강도 사이에 오갔던 마지막 대화를 지적하면서, 사람이 죽으면 즉시로 영혼이 몸을 빠져 나가 하늘로 올라간다고 주장한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누가복음 23:42,43.

이 말씀이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 보았던 성경절들과 상반되는 것처럼 보이는가? 여기에 나오는 한 말씀이 성경에 나오는 모든 다른 말씀들을 뒤집어 놓을 수 있다고 속단할 수 있는가? 이 말씀은 마치 예수님과 강도가 십자가에서 죽는 그 날에 함께 하늘 나라에 갈 것이라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성경은 두 가지 상반되는 이야기를 동시에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성경은 항상 오직 한 가지 진리만을 증거한다.

이제부터, 누가복음 23장에 나오는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는 말씀이, 정말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후부터 부활하실 때까지의 기간인 3일 동안 하늘에 가계셨다는 사실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살펴 보도록 하자. 우리는 요한복음 20장에서 이 말씀의 진정한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 열쇠를 발견하게 된다.

부활하신 후에 밝히신 3일 동안의 소재지 : 예수께서는 금요일에 십자가에서 돌아가셨고, 그로부터 3일 후인 일요일 이른 아침에 부활하셨는데, 그분의 무덤을 찾아가고 있는 막달라 마리아 앞에 나타나셔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요한복음 20:17

예수께서 하셨던 이 말씀은 영혼불멸을 믿는 사람들이 도저히 대답할 수 없는 매우 이상한 수수께끼를 남겨 놓았다. 만일 부활하신 일요일 아침까지 하늘에 올라가지 않으셨다면, 어떻게 3일 전에 그 강도에게 바로 “그 날” 함께 낙원에 가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실 수 있는가? 누가복음 23장에 나오는 “낙원”과 요한복음 20장에 나오는 하나님이 계신 장소가 동일한 장소라는 사실을 요한계시록 2장에서 확인할 수 있다. 사도 요한은 생명나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다는 사실을 설명하고 있는데(계 2:7), 그 말씀은 하나님이 계시는 곳과 낙원이 동일한 장소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해준다. 분명한 사실은, 예수께서 돌아가신지 3일 후까지 하늘에 올라가지 않으셨다면, 물론 3일 전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을 때 역시 하늘에 가지 않으셨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

 

오역된 헬라어 성경 원문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후 부활하실 때까지 3일 동안 하늘에 가지 않으셨다면, 누가복음 23장 43절에 나오는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의 의미는 무엇인가? 성경의 헬라어 두루마리 사본에는 성경 말씀이 한줄로 길게 쓰여져 있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거기에는 마침표나 쉼표 같은 부호가 없으며, 성경절과 장을 나누어 놓은 것이 없다. 1911년 흠정역 성경이 번역되었을 때, 성경 학자들은 필요에 따라서, 번역하는 말의 의미를 맞추기 위하여 쉼표를 붙이고 성경절과 성경장을 나누어 놓았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구두점이 없는 헬라어 원문을 번역하면서, “오늘”이라는 부사 앞에 쉼표(,)를 잘못 찍어 넣은 결과, 예수께서 마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라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번역하게 된 것이다.

자 이제, 헬라어 원문의 의미를 살펴보자. “아멘(진실로) 소이(네게) 레고(내가 말하노니) 세메론(오늘) 메트에무(나와 함께) 에세(네가 있을 것이다) 엔 토 파라이데이소(그 낙원 안에)” 헬라어의 단어별 의미를 살펴보더라도,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이 경우에 있어서, 영혼에 대하여 편견을 가진 번역자들이 번역할 때에 쉼표를 “오늘”이라는 낱말 뒤에 붙이는 대신에 앞에 붙임으로써, 번역상의 혼란이 야기되었다. 쉼표를 “오늘”이라는 말의 뒤에 붙여야만, 다음과 같이 올바르게 번역될 수 있다. “내가 진실로 오늘 네게 이르노니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헬라어 원문을 이렇게 해석해야만, 예수께서 강도에게 하셨던 말씀이 다른 모든 성경절과 완전한 조화를 이룰 수 있으며, 막달라 마리아에게 했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라는 말씀과도 정확하게 일치하게 된다(요 20:17). 다시 말해서,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는 그 날(“오늘”)에 하늘에 강도와 함께 올라갈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그 말씀의 의미를 쉽게 풀어서 쓰면 다음과 같다; “내가 오늘 네게 확신을 주노라 비록 지금 내가 아무도 구원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고, 내 제자들은 모두 나를 버리고 도망갔으며 나는 정죄받은 중죄인의 취급을 받아 죽어가고 있는 지금, 나는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게 될 것이라는 확신을 네게 주노라.”

이것이 주의 거룩한 말씀을 부당하게 변경시키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번역하는 사람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로부터 특별한 영감을 받은 사람들이 아니다. 오직 성경을 기록한 원래의 저자들만이 영감을 받은 사람들이다. “오늘”이라는 낱말의 뒤에 쉼표를 붙이는 것이 성경의 원문에도 일치할 뿐만 아니라, 이 문제에 대하여 성경 전체에 나타나 있는 사상과도 일치한다.

히브리 원어와 그 단어의 의미 : “아멘(진실로) 소이(네게) 레고(내가 말하노니) 세메론(오늘) 메트에무(나와 함께) 에세(네가 있을 것이다)엔 토 파라이데이소(그 낙원 안에)”

올바른 번역 : “내가 진실로 오늘 네게 이르노니, 네가 나 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Verily I say unto you today, you shall be with me in paradise.)

잘못된 번역 :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 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Verily I say unto you, today you shall be with me in paradise.)

 

강도가 부탁했던 말의 의미

이제, 강도가 예수께 부탁했던 말의 의미를 살펴 보도록 하자. 이 문제를 풀 수 있는 또 하나의 열쇠는, 그 강도가 했던 부탁은 세상의 종말에 하나님의 나라에 임할 때,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부탁했다는 사실이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눅 23:42. 그는 자신이 죽기 바로 직전인 그 “오늘” 당장에 어떤 보상을 달라고 부탁하지 않았다. 그는 사도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마지막 날에 의의 면류관을 쓸 수 있기를 기대했던 것이다. 죽음을 목전에 둔 바울이 자신의 믿음과 봉사에 대한 보상을 언제, 어떻게 받을 것이라고 기대했는지를 살펴 본다면, 십자가에서 강도가 예수께 드렸던 부탁의 진정한 의미를 알 수 있다.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왔도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 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딤후 4:6~8.

그리스도의 위대한 종인 사도 바울이 영원한 보상에 대한 소망을 그리스도의 왕국이 이 땅에 임하는 마지막 날에 두었던 것처럼, 그리고 회개한 강도 역시 자신의 소망을 마지막 날에 두었던 것처럼, 우리 역시 우리가 고대하는 보상을 마지막 날에 두어야 한다.

 

 자, 이제 다시 독자들이 답변해야 할 시간이 되었다. “예수님은 3일 동안 하늘에 올라가 계셨나요?”

10부 - 오해받고 있는 세 성경 절의 의미를 아시나요?


1.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 되는 때

빌립보서 1:21~23 :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가릴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었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어떤 사람들은 이 말씀을 근거로 해서 바울은 자신이 죽는 순간에 그의 영혼이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 될 것을 기대했다고 해석함으로써, 영혼 불멸을 뒷받침하려고 애쓰지만, 성경은 다음과 같이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의 의미를 설명해 준다;

A)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 (being with the Lord) 라는 표현은 바울의 편지서 뿐만 아니라, 복음서에도 자주 등장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표현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살펴봄으로써, 일관성 있는 의미를 찾아야 한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4장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시기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주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남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살전 4:15,16. “항상 주와 함께 있”을 때가 언제인가? 사도 바울은 재림의 때에야 비로소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먼저 죽는다고 해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아니라, 재림의 때가 되어야만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우리가 죽거나 끝까지 살아 있는 것이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수 있는 조건이 결코 아니라고 말했다. “주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남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 15절.

B) 골로새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도, 바울은 우리가 언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 밝히 말하였다.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골로새서 3:4. 여기에서도 재림의 때에야 “그와 함께” 있을 수 있다고 선언하였다.

C)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 제자들과의 이별을 앞두고 그들과 다시 만나게 될 날(때)에 대해서 분명히 말씀해 주셨다. ; “ ...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요 14:2,3. 예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이 그분과 함께 있을 수 있는 3단계를 설명하시면서, 첫번째 단계로, 예수께서 “처소를 예비”해야 하고, 두번째 단계로 예수님이 “다시 와” 야 하며(재림), 세번째 단계로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하는 것(그리스도와 함께 거함)이라고 말씀하셨다.

D) 사도 바울은 자신의 마지막 소원을 진술하면서,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한다고 밝혔다(빌 3:10). 그리고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시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린다고 거듭 밝힘으로써, 재림시에 있을 부활만이 유일한 소망임을 확인하였다.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에서도, 그리스도의 재강림을 알리는 “나팔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살” 것을 강조했으며(고전 15:52), 만약 이러한 부활의 소망이 없으면, “너희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에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리라”고 말함으로써(고전 15:17), 죽는 순간에 즉시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의 여지를 조금도 남기지 않았다.

신약 성경에 나오는 “육신을 떠나서” 라는 표현은 죽음을 의미하며,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은 재림에 대한 확고한 신앙을 가지고 부활의 날까지 무덤 속에서 무의식의 상태로 쉬고 싶다는 말을 시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2.“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의 의미

고린도후서 5:6~8 :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여기서 다시 “주와 함께 거”한다는 표현이 나온다. “영혼은 불멸한다”는 사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이 성경절을 이용하여 영혼은 육신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거할 수 있다는 사실을 주장하려고 애쓴다. 그러나 문맥을 자세히 살펴보면, 사도 바울이 그렇게 표현한 의도를 알 수 있다. 편견이나 선입관을 버리고, 그 앞에 나오는 1~4절까지를 읽어보면,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한다”라는 말의 참 뜻을 이해할 수 있다;

고린도후서 5:1~4 :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있는 줄을 아나니,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사도 바울은 자신의 죽어서 썩어져 없어질 몸을 “장막 집”이라는 시적인 표현을 사용하여 기록하였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의 의미는 죽음을 뜻한다. 그래서 베드로 역시 자신의 죽음을 예고하면서 “나도 이 장막을 벗어날 것이 임박한 줄” 안다고 표현하였던 것이다(벧후 1:14). 그렇다면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 곧 “하늘로 부터 오는 우리 처소”는 무엇인가? 4절에 그 대답이 나온다.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 바 되”는 때인 재림시에 부활한 몸이 입게 될 썩지 않을 신령한 몸을 말하는 것이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성경절에서, 바울은 부활의 시간에 영원한 생명을 지닌 새로운 몸을 받기를 사모한다는 말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이 말에 이어서 바울은 자신의 의도를 더욱 더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영혼불멸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바울은 육체를 벗어나기를 원했던 것이 아니라, 오직 마지막 부활의 날에 새로운 몸을 하나님께로부터 받기를 원했던 것이다. 바울의 은유적이고 시적인 표현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때, 성경 전체에 나오는 영혼과 죽음과 부활의 사상이 크게 왜곡된다. 또한 5절에 나오는,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 바”되는 때란 썩어져 없어질 수 밖에 없는 육체 대신에 영원한 생명이 담겨진 몸을 받는 때인 재림의 때를 의미한다.

자, 그렇다면 8절에 나오는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란 무슨 뜻인가? 영혼불멸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말처럼, 사람이 죽은 즉시 몸을 떠난 영혼이 그리스도 곁으로 간다는 말인가? 계속해서 이어지는 성경절에 그 대답이 나와 있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고후 5:10. 심판대 앞에서 각각 그 행한 것에 따라 보상을 받게 되는 때가 언제인가? 재림의 때이다.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 계 22:12.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다시 이 사실을 확인하고 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삼킨 바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고전 15:51~54.

 

3.“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의 의미

벧전 3:18~20.: “ ...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한글 성경에 기록된 이 말씀을 언뜻 잘못 읽으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직후에 영으로 연옥이나 지옥 어디에 내려가셔서 노아 당시에 구원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고통당하는 사람들의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셨다는 것으로 오해하기 쉽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연옥 같은 곳이 정말 있어서 죽은 후에도 구원을 받을 수 있는 두번째 기회가 있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두번째 구원의 기회가 있다는 가르침은 없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히 9:27) 라는 말씀을 비롯하여 죽는 순간에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도 끝난다는 말씀이 여러 곳에 나와 있다(마 16:27 ; 롬 2:6 ; 겔 18:24 ; 계 22:12). 두번째 구원의 기회가 있다는 사상은 죽음 이후에는 일체의 의식이 없다는 성경의 일관된 가르침과도 크게 상반된다. 만약 두번째 기회가 주어진다면, 왜 하필이면 노아 홍수 당시에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게만 그런 특권이 주어져야 하는가?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베드로전서 3장에 나오는 “육으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는 말씀의 참된 의미는 무엇인가? 이 말씀을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누어서 분석해 보자;

전반부 ; “육으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이 말씀의 뜻을 자칫 오해하여, 예수께서 죽으셨을 때에 육체는 죽었지만, 영혼은 육체에서 분리되어 살아난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이 말씀의 의미는, 예수께서 이 땅에서 지니셨던 연약한 인간의 속성은 십자가에서 죽었지만, 성령을 통하여 부활하심으로써 원래에 하나님으로서 지니셨던 영적인 속성이 회복되었다는 사실을 뜻한다. 그러므로 한국어 성경에는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라고 잘못 번역된 말이, 영어 성경에는 “made alive by the Spirit”(성령으로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라고 올바로 번역되어 있는 것이다. 즉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성령을 통하여 부활하여 영원한 생명을 받으셨다는 뜻이다. 이러한 사실이 다음에 이어지는 성경절에서도 확인된다;

“이 아들로 말하자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롬 1:3~4.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부활하셨던 그리스도께 일어난 이러한 변화는 그리스도 뿐만 아니라 그분과 같이 고난에 동참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그대로 일어나는데, 성경은 그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벧전 2:24.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롬 8:10,11.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시면, 비록 육체는 죽을지라도 성도들에게는 부활이 보장되며 영원한 생명이 약속된다. 바로 이것이 육으로는 죽임을 당하나 영으로는 살림을 받는다는 말의 의미이다.

후반부 :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옥에 있는 영들”은 누구이며, “옥”은 어디를 말하는가? 여기에 나오는 “옥”은 감시를 통하여 행동을 속박받는 뜻의 감옥(phulake)을 뜻한다. 또한 “영들”의 헬라어 원어는 앞에서 배운 바와 같이, “프뉴마”로서 “생명” 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옥에 있는 영들”이란 옥에 갇힌 사람들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옥”은 어디를 말하는가? 그것은 지옥을 의미하는 말씀이 아니라, 영적으로 어두운 이 세상을 뜻한다. 이사야 선지자도 “옥”을 어두운 세상이라는 의미로 사용하였다. “네가 소경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처한 자를 간에서 나오게 하리라” 사 42:7. 또한 시편에서는 “옥”을 영적인 어두움을 묘사하는 표현 방법으로 사용하였다. “내 영혼을 옥에서 끌어내사 주의 이름을 감사케 하소서.” 시 142:7. 예수께서 침례를 받으신 후에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으시고, “옥”에 갇힌 사람들, 즉 “흑암에 앉은 백성”과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셨듯이(마 4:15,16), 노아 홍수 당시에도 예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죄에 속박되어 영적인 암흑에 갇힌 “옥에 있는 영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셨다.

“옥에 있는 영들”이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계속해서 이어지는 성경절에서도 분명하게 밝혀 진다. “그들(옥에 있는 영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 이다(벧전 3:20). 여기에 “옥에 있는 영들”의 모습이 나오는데, 성경은 그들의 정체를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예수께서 노아 홍수 당시에 멸망을 당해서 지옥에 간 혼백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셨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께서 성령을 통하여 노아 홍수 당시에도 영적인 어두움 속에서 불순종하던 사람들에게도 복음을 전파하셨다는 사실을 뜻한다. 베드로전서 4장 6절에 나오는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말씀도 과거에 죽은 자들 역시 그들이 살아 있을 당시에 성령을 통하여 복음을 들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과거에 죽은 사람들이 복음을 듣지 못했더라면 변명의 여지가 있겠지만, 성령을 통하여 구원의 복음을 듣거나 깨닫고도 “순종치 아니하”였기 때문에 준엄한 심판이 임하게 된다. 모든 사람의 구원은 그들이 살아 있는 동안에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에 어떠한 태도를 나타내며 살았는가에 따라서 결정되며, 일단 죽은 다음에는 구원을 위한 기회가 더 이상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다시 독자들이 답변해야 할 시간이 되었다. “가장 많이 오해되고 있는 3가지 성경절의 의미를 아십니까?”

11부 -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사람들의 이야기


그레이스가 응급실로 실려왔을 때, 그녀는 고열과 극심한 고통으로 거의 사경을 헤메고 있었다. 그녀는 정신을 잃어가고 있는 중이었지만, 자신의 주변에서 간호원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모습을 느낄 수 있었으며, “이 사람의 혈압이 급속하게 떨어지고 있습니다!” 라고 외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는 얼마 있다가 그레이스는 자기 안에 있는 또 하나의 자신이 몸밖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는 순간부터 더 이상 몸의 고통을 느끼지 않게 되었다. 그녀는 새털처럼 가쁜하게 공중에 뜨는 것을 느낄 수 있었으며, 자신을 살리기 위해서 애쓰고 있는 의사들과 간호원들의 모습을 천장으로부터 내려다 볼 수 있었다.

그런 후에 그레이스는 안개와 같은 구름에 쌓여 있는 반투명의 터널을 통과했다. 그레이스는 후에 이 경험을 회상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정말 멋지고 따뜻하며 행복한 곳에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나는 빛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빛 가운데는 천사와 같은 어떤 존재가 있었는데, 그는 나에 관한 모든 것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습니다. 내가 과거에 했던 일과 느꼈던 모든 것들을 내게 보여주었습니다. 나는 그 빛 가운데서 영원토록 살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 천사와 같은 존재는 내게 나의 가족들과 아이들을 보여 주면서 ‘그레이스 너는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서 너의 자녀들을 양육하고 나중에 하늘이 너를 다시 부를 때까지 기다려야 한단다’ 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행복한 그 곳을 떠나서 슬픔과 고통이 있는 세상으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는 순간, 나는 자신이 몸속으로 다시 돌아온 것을 느끼게 되었고, 다시 신체에 심한 고통을 느끼기 시작하였습니다.”

얼마 전, 미국의 유명한 화보 월간지인 라이프 지는 이상과 같은 내용의 기사를 “죽음 저편 세계”라는 제목하에 특집으로 다루었다. 죽었다가 살아난 경험(Near death experiences)은 최근에 가장 많은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문제가 되고 있다. 라이프지와 거의 유사한 주제를 다룬 책인 “죽음 이후의 삶”(Life after Death) 이라는 제목의 책은 700만부나 팔리는 공전의 판매고를 올리면서 거의 모든 미국인들의 관심을 끄는데 성공하였다. 현재, 수많은 의사, 심리학자, 생물학자, 그리고 인류학자들이 “죽었다가 살아난 경험”의 진상을 파헤치기 위해서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는 뉴스가 보도되었다. 죽음 이후에 대한 문제를 연구하는 사람들의 단체들이 실제로 존재하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은 Journal of Near-Death Studyies 와 International Association for Near-Death Studies 인데, 그들이 발표한 내용에 의하면, 현재 약 8백만명 이상의 미국인들이 자신들이 죽었다가 살아난 경험을 하였다고 주장한다고 한다.

이러한 일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이러한 일들은 단순한 환각상태에서 느껴진 일들인가? 아니면, 몸에서 빠져나간 혼백이 실제적으로 하늘로 가는 여행을 한 것인가? 나는 이러한 모든 질문들에 대해서 완벽하게 대답할 수 있는 전문가는 아니다. 그러나 나는 건전한 상식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판단을 내릴 수 있다고 믿는다.

첫째, 우리 모두가 한 가지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자신이 죽었다가 살아났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의학자들이 말하는 죽음을 경험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단순히 심장이 멈추었거나 숨을 쉬지 않는다고 해서, 그 사람을 죽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현재 법으로 정의하는 죽음이나 의학자들이 말하는 죽음이란, 무엇보다도 뇌세포들 대부분이 죽었기 때문에 뇌기능이 정지되어서, 느끼거나 생각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다시는 회생할 가능성이 없는 상태를 뜻한다.

둘째, 우리의 뇌는 커다란 정신적 충격을 받았을 경우, 다양한 환각 상태를 일으킬 수 있다. 이러한 경우, 우리의 뇌는 우리를 존재하지도 않는 환상적인 장소로 여행시킬 수 있으며, 존재하지 않는 인물이나 대상을 만나게 할 수도 있다. 실제로, 많은 정신 심리학자들은 죽음 저편에 다녀 왔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말을 정신적 혼돈 상태 하에서 가질 수 있는 착각으로 결론 짓는 것이 일반적이다.

셋째, 죽음 저편의 세계를 보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대개 자신이 믿는 종교에서 가르치는 지옥과 천국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간증사이에서 어떤 일관성을 찾을 수 없다. 저마다 하늘과 지옥을 갖다 왔다고 하지만, 서로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우리 모두는 죽음에 대한 문제를 정직한 마음으로 다루어야 한다. 죽었다가 살아났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경험을 들어보면, 마치 그것은 이 땅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았든지를 불문하고, 또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에 어떠한 반응과 태도를 나타내면서 살았든지를 불문하고, 심지어는 하나님의 진리를 거절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였던 불신자들까지도 자신이 죽었다가 살아난 경험을 이야기 하면서, 천국에 다녀왔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모순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그리스도를 신실하게 믿지 않았던 사람일지라도, 죽음 이후에 그 영혼이 하늘에 올라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하는 그러한 이야기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온 마음을 다하여 받아들이고, 그분의 진리에 따라서 순종하는 생애를 살지 않는 사람에게는 결코 구원이 허락되지 않는다는 진리를 선포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지금까지 언급한 것들이 아무리 논리적이라고 할지라도, 성경이 말하는 증거에 비교할 수는 없다. 성경은 사람이 죽는 순간에 몸을 떠나서 다른 세계를 경험하고 감각하는 불멸의 영혼을 가지고 있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성경은 죽음을 의식이 없는 잠으로써, 설명하고 있는데, 그 죽음의 잠은 오직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강림하시는 사건을 통해서만 깨워질 수 있는 것으로 선언하고 있다.

죽음의 저편 세계에 갔다가 돌아왔다고 주장하는 또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 보자. “어느 추운 겨울 밤, 나는 외딴 곳에 살고 있는 친구의 집으로 가기 위하여 자동차를 운전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자동차가 눈 위를 미끌어 지면서 나무를 들이받았다. 그 순간 죽음이 나를 엄습하여 왔다. 나는 촉촉하고 안개같은 회색빛깔의 물질에 쌓여져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나는 긴 터널을 통과하였는데, 그 터널은 밝은 빛을 투과시키는 방울들로 휩싸여 있었다. 그 터널의 끝에서 나는 죽음의 저편 세계를 보았다.”

오늘날 죽음을 경험하고 돌아왔다는 사람들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안개같은 긴 터널을 통과하여 죽음 저편 세계인 천국을 보았다고 말하고 있다. 하늘에 갔다 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커다란 모순이 있는 이유는, 그들이 보았던 하늘의 모습이 성경에 기록된 하늘의 모습과 다르다는 사실이다. 성경에는 계시를 통하여 하늘의 모습을 기록한 사람의 기록이 있는데, 그의 이름은 사도 요한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어떤 터널을 통과하여 하늘에 갔다왔다고 말하지만, 요한은 터널같은 모양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다. 요한계시록을 기록한 사도 요한의 계시를 들어 보도록 하자.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같더라.” 계 21:2. 요한이 보았던 천국은 터널같은 곳이 아니었다. 그는, 하늘에 있는 새 예루살렘성을 결혼식에서 신부가 환하게 빛나는 것으로 묘사하였으며, 그 거대한 성채가 성도들을 위하여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모습을 보았다. 요한은 그 성채 안에 있는 도시의 거리는 순금으로 되었으며, 문은 진주로 만들어 졌고, 하나님의 영광이 환하게 빛나고 있기 때문에 어두움은 전혀 존재할 수 없다고 구체적으로 기록하였다.

예수께서도 하늘 예루살렘성에 대해서 설명하셨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요 14:2,3. 지금, 예수께서는 우리들이 실제적으로 거할 수 있는 처소를 준비하고 계신다. 예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실 때, 그분께서는 죽었다가 부활한 의인들과 살아있는 성도들을 공중으로 승천시키신 다음에 하늘로 데려가실 것이다. 성도들은 하늘 예루살렘성의 진주문을 들어가면서, 죽음 이후에 자신이 느꼈던 경험이 아니라, 죽음 이전에 자신의 생애를 인도하신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에 대해서 감사하는 간증을 하게 될 것이다. 하늘은 영원불멸의 몸을 선물받은 성도들이 실제적인 생활을 하면서 사는 곳이다. 하늘에서 우리는, 예수께서 우리들 각자를 위하여 예비하신 처소를 볼 수 있으며, 그 안에 들어가 영원토록 행복하게 살게 될 것이다. 그러한 하늘의 생활은 꿈도 아니고 상상도 아니며, 몸에서 빠져나간 혼백이 허공을 날아다니는 몽롱한 환각 상태도 아니다. 하늘은 실제적인 장소이다. 그러므로 장차 우리는 온 몸을 가지고 하늘에 가서 그 곳을 실제적으로 보고 느끼고 만지게 될 것이다.
하늘은 형체도 없는 혼백이 올라가는 곳이 아니라, 우리와 예수 그리스도가 실제적으로 얼굴과 얼굴을 서로 대면하여 정확하게 볼 수 있는 곳이다. 다음과 같은 사도 바울의 기록을 읽어 보라.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고전 13:12.

성경은 “죽은 자는 아무것도 모른다” 라고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죽은 다음에 자신이 천국이나 지옥에 가서 어떤 것을 보고 느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진리와 사람들이 경험했다고 주장하는 이야기 사이에서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12부 - 영혼 불멸 사상의 뿌리를 파헤쳐 보셨나요?


종교의 차원을 넘어 동서고금의 절대다수의 신앙이 되어 온 영혼불멸 사상의 근원은 어디이며, 그것이 오늘날까지 전수되어온 역사적 배경은 어떠한가?

이방 종교는 물론 로마 카톨릭 교회, 희랍정교, 그리고 대부분의 개신교회와 심령과학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우는 강신술, 그리고 무당까지도 공유하고 있는 이 뿌리깊고 가지많은 영혼불멸 신앙의 근본은 어디인가?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음을 전제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영혼불멸 신앙의 뿌리를 캐어내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라 하겠다(히 9:27). 영혼 불멸 사상의 뿌리를 역사적으로 파헤친 월간지, 살아남는 이들 54호참조하세요.

 

영혼불멸 사상의 뿌리

인간의 귀에 들려진 첫번째 거짓말은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라는 사단의 속삭임이었다(창 3:4). 그러나 이에 앞서 하나님께서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경고하셨다(창 2:16).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할 경우에는 반드시 그 죄의 결과로 “정녕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말씀과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는 사단의 거짓말은 인간이 스스로 판단해야만 했던 첫번째 운명적 퀴즈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하와는 거짓말을 믿기로 선택하였다. 왜냐하면 죽음을 경험하지 못한 그의 이성은 죽음을 부인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몸이 죽어도 우리 몸 안에 있는 어떤 존재는 영원히 살아있을 것같은 느낌에 속아서 영원불멸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있다. 이러한 영원불멸의 착각은 인류의 보편적인 신앙이 되어 왔다. 힌두교, 불교, 자연신교, 무속신앙 등 거의 모든 종교인들이 불멸과 환생이라는 가르침을 진리로 받아들이고 있다. 사단이 에덴동산에서 속삭였던 거짓이 진리를 이기고 보편화 되었다.

 

기원전 : 영혼불멸 사상의 기초를 놓은 헬라 문화

사단이 시작한 영혼불멸 사상은 헬라 문화와 접목되면서부터 새로운 체계를 확립하게 되었다. 몸을 떠나 존재하는 영혼과 윤회와 환생의 사상이 만연되기 시작하였다. 기원전 6세기 유명한 수학자이며 철학자인 피타고라스는 영혼불멸 사상에 기초하여 윤회사상을 철학적으로 체계화하였다. 이렇게 철학이라는 옷을 입은 영혼불멸사상은 기원전 5세기에 이르러서는 소크라테스에 의해서 받아들여졌는데, 그는 죽음을 통하여 영혼이 해방되어 감옥과 같은 육신에서 벗어나서 불멸의 존재가 되어, 영원한 “이데아”(idea)의 세계로 돌아간다고 가르쳤으며, 자신의 그러한 믿음을 실증하기 위해서 여러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태연하게 독배를 마시고 죽었다.

소크라테스의 인상적인 죽음에 충격을 받은 그의 수제자 플라톤은 마침내 영혼불멸 사상의 열렬한 주창자가 되었으며, 그의 논집인 파에돈(Paedon)은 영혼불멸 사상의 교과서로 자리 잡게 되어서 중세기까지 서방 정신문화의 기초를 이루게 되었다. 영혼불멸 사상은 고대 헬라의 신비주의에 기초를 둔 이교 사상이라는 사실을 “유대 대백과사전”은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영혼불멸의 신앙은 헬라 사상, 특별히 바빌로니아와 이집트 사상을 이상하게 혼합한 신비 종교를 받아들인 플라톤의 철학과 접촉함으로써 유대인들에게 유입되었다.”

 

3세기 : 영혼불멸 사상의 중심지인 알렉산드리아

로마제국의 헬라 문화 중심지였던 알렉산드리아에는 당대에 있어서 최대 규모의 신학교가 있었는데, 3세기 초에 그 신학교에서 교장을 지낸 오리겐은 헬라 철학의 영향을 받아서 영혼불멸 사상을 그리스도 교회로 끌어 들였다. 그는, “하나님 자신이 영원하고 불멸인 것처럼, 인간의 영혼도 불멸이다”라고 선언하고 자신은 “영혼불멸을 믿는 진정한 플라톤주의자”라고 자처하였다. 오리겐과 같은 시대에 살았던 북아프리카 칼다고 출신의 라틴 교부 터툴리안도 플라톤의 영혼불멸을 주장하고, 더 나아가서는 의인의 영혼이 영원한 복락을 누림과 같이 악인의 영혼도 지옥불에서 영원히 탄다는 영원지옥설을 최초로 그리스도 교회 안으로 끌어들이는데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그리하여 죄의 결과인 “사망”을 “영원한 불행과 고통”으로 바꾸어 놓았다.

 

5세기 : 연옥 신앙의 문을 연 어거스틴

터툴리안과 같은 라틴 교부이며, 북아프리카의 히포 출신인 당대 최고의 신학 교부인 어거스틴은 중세 카톨릭 교회의 신학적 기초를 세웠다. 그는 33세 때에 그리스도 교회로 개종하였는데, 그 전까지 마니교의 신자였으며, 플라톤주의를 열렬히 신봉하였었기 때문에 그리스도 교회로 개종한 이후에도 그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는 플라톤의 영혼불멸 사상을 성경의 가르침으로 만들기 위해서 무리하게 성경을 해석하는 잘못을 범하였다. 그는 “개개인의 영혼의 운명은 죽는 즉시 결정됨과 동시에 내세에는 정결케 하는 고통이 있”다고 가르침으로써, 연옥의 개념을 그리스도 교회 안으로 가지고 들어 왔다. 어거스틴의 이러한 연옥의 개념은 “플라톤의 그치지 않는 고통의 처소의 개념”을 따른 것이다.

그로 인하여 카톨릭 교회의 연옥에 관한 교리의 기초가 놓였으며, 교황 그레고리에 의해서 서기 582년에 교리로 인정되어, 기상천외한 연옥에 관한 신앙이 생기게 되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나온 영혼불멸의 주창자들, 즉 터툴리안, 오리겐, 어거스틴 등이 모두 헬라의 영혼불멸 사상의 본거지인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한 북아프리카 지방의 교부들임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13세기~16세기 : 이단이 된 정통, 정통이 된 이단

영혼불멸 사상과 그것에 기초해서 생긴 연옥 신앙은 13세기의 신학자인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서 확고한 신학으로 집대성되었으며, 그로부터 50년 후에는 단테에 의해서 그 유명한 신곡이라는 소설이 쓰여져서 영혼불멸 사상에 입각한 지옥, 연옥, 천국이 민속신앙으로 소개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는 동안 성경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사상인 영혼불멸 사상이 그리스도 교회 안에 넓게 퍼지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종교개혁의 불길이 일어나기 직전에 열린 제5차 라테란 종교회의에서 교황 레오 10세는 다음과 같은 역사적인 교서를 반포하기에 이르렀다.

“어떤 사람들이 영혼의 속성은 죽을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과는 달리, 우리는 거룩한 회의에서 결정된 대로, 영혼은 ... 불멸이라고 한 교황 클레멘트 5세의 교시에 따라 영혼은 죽게 된다고 주장하는 자들을 정죄하고 배척하며 그와같은 그릇된 주장에 집착하는 모든 사람들을 멀리할 것과 이단으로 징벌하여야 할 것임을 명하는 바이다.” 이 때부터 이교적이요 비성서적인 영혼불멸을 반대하는 그리스도인들은 공식적으로 이단이 된 것이며, 가혹한 처벌의 대상이 된 것이다.

 

종교개혁운동 이후 : 칼빈을 통해서 로마 천주교회로부터 개신교회로 되돌아 온 영혼불멸 신앙

프랑스에서 젊은 카톨릭 신자였던 칼빈은 개신교회로 개종한지 2년째가 되던 해인 1534년(25세)에 영혼불멸을 반대하고 죽음을 잠과 같은 무의식으로 가르친 그리스도인들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최초의 신학논문인 “혼수론”을 씀으로써, 오늘날 일반 개신교회들이 영혼불멸 신앙을 따르도록 만드는 불행한 계기가 되었다. “혼수론”이 개신교회로 개종한지 불과 2년만에 나온 논문이고, 그것을 저술한 때의 칼빈의 나이가 25세라는 어린 나이였음을 생각할 때, 그가 저지른 신학적 과오를 이해할 수 있지만, 그가 남긴 결과와 영향은 참으로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상처가 크고 깊다.

칼빈에 앞서 종교개혁운동을 주도하였던 영국 옥스포드대학의 교수인 위클립과 틴데일, 그리고 독일의 마틴 루터 등이 중세 카톨릭 교회의 영혼불멸설 교리가 이교적인 사상임을 공공연하게 지적하고 나선 이 후에 “혼수론”이 나왔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종교개혁의 주역인 칼빈이 취한 이교적이요 비성서적인 입장은 참으로 유감스러운 것이었다.

칼빈이 받아들인 영혼불멸 신앙은 도데체 어디에 기초를 둔 것인가? 칼빈은 그의 유명한 저서인 “그리스도교 강요”에서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이교도 철학자들로부터 영혼의 정의를 구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그러나 예외가 있는데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인 플라톤은 영혼은 불멸의 본질이라고 바르게 정의하였다.” 칼빈이 저술한 “그리스도교 강요” 제1권 15장 6항의 “영혼과 그 기능” 장에는 자신의 가르침이 플라톤의 사상에 근거했음을 밝히고 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칼빈과 플라톤은 영혼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매우 유사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영혼에 관한 칼빈의 정의 : “사람의 신(sprit) 혹은 영혼(soul)은 몸과 구분되는 본질이다 ... 몸이 죽은 후 영혼은 감각과 지성을 갖춘 채 살아있다. 여기에서 나는 영혼의 불멸 이외에 어떤 다른 사상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단언하는 바이다.” 기독교 대백과사전 8, 1246. Mead, 86,87. “죽음의 온 밤을 통하여 영혼은 행복을 누리기에 필요한 모든 의식과 감각을 가지고 깨어 있다.” Thomsen, 40,41.

영혼에 관한 플라톤의 사상 : “죽음이란 몸이 영혼으로부터 분리되어 존재하고, 영혼이 몸에서 분리되어 존재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가? 우리가 몸에 의해서 방해를 받고 있는 한, 그리고 우리의 영혼이 그토록 큰 악에 의해서 더럽혀져 있는 한, 우리는 결코 우리가 원하는 것을 충분히 얻을 수 없다 ... 만약 우리가 어떤 것에 대한 분명한 지식에 도달해 보고자 한다면, 우리는 몸에서 분리되어야 한다.” Paedo, Mead 197,202.

그리하여 어떤 학자들은 칼빈의 “혼수론”에 대해서 “기록은 칼빈의 손으로 했지만, 목소리는 플라톤의 목소리이다”라고 개탄하였는데, 그 이유는 그 뿌리가 같기 때문이다. 영혼불멸과 연옥 신앙을 강력하게 부인하면서, 중세기 카톨릭 교회의 오류를 지적하고 나섰던 개혁자들의 성서적 주장을 무시하고, 플라톤의 사상을 이어받은 천주교회의 신학자들의 가르침을 전수한 칼빈으로 인하여 영혼불멸 사상은 오늘날 개신교회의 전반에 걸쳐서 뿌리를 깊이 내리게 되었다. 만약 칼빈만 종교개혁자들과 협력하였더라면, 영혼불멸 사상, 연옥 사상, 영혼이 죽은 순간에 천국에 가거나 지옥에 간다는 사상은 종교개혁운동에 밀려서 사라져 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자, 이제 독자들에게 질문하고자 한다. “영혼불멸 사상의 뿌리를 파헤쳐 보셨나요?

13부 - 종교 개혁자의 기록을 살펴보았나요?


틴데일 : 영국을 대표하는 종교개혁자인 틴데일은 헬라어 성경을 최초로 영어로 번역한 까닭으로 화형을 당한 순교자이다. 성경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근거로 그는 중세기의 카톨릭 교회가 가르쳐온 영혼불멸과 죽은 다음에 영혼이 몸에서 빠져나가서 천국이나 지옥 또는 연옥에 간다는 가르침을 부인하고 재림 시에 있을 부활을 그리스도인의 유일한 소망으로 제시하였다.

당시에 그를 박해하던 교황권을 향하여 던졌던 논리적 진술을 들어 보라. “그대들은 몸을 떠난 영혼이 천국이나 지옥에 간다고 가르침으로써, 그리스도와 바울이 입증한 부활의 논증을 파괴하고 있다 ... 참된 믿음은 부활에 근거하고 있으며, 그것을 매순간마다 바라보도록 강조하고 있다. 이교의 철학자들은 이것을 부인하고 영혼은 언제나 살아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교황은 그리스도의 영적인 가르침과 철학자들의 인간적인 가르침을 함께 섞어 놓았으나 이것들은 서로 상반되기 때문에 조화될 수가 없다 ... 내게 말해 보시요. 만약 영혼들이 하늘에 있다면, 그들이 왜 천사들과는 달리 새삼스럽게 부활을 받아야 하는 까닭이 무엇인가?” D. Neal, History of the Puritans, Vol. 1, 269

틴데일은 영혼불멸 사상과 부활 신앙은 논리적으로 서로 공존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사람이 죽는 순간에 영혼들이 천국이나 지옥 또는 연옥에 가버린다면, 행한 대로 갚아주는 때인 그리스도의 재림은 무슨 소용이 있으며, 부활은 무엇 때문에 있어야 하는가?.

 

마틴 루터 : 루터는 1520년 11월 29일에 발표한 41개조 신조에서 “영혼이 불멸이라는 신조는 터무니없는 다른 견해들과 함께 로마교회의 교리집 쓰레기더미에서 발견되어 지는 것”이라고 논박하였다(The Problem of Immortality, p. 256 by Petavel). 종교개혁운동의 선봉장인 마틴 루터는 영혼불멸 사상을 신학적 근거로 해서 이루어진 면죄부 제도를 반대하였으며, 연옥과 죽은 성자 숭배를 부인하였고, 죽음을 무의식의 잠이라고 가르쳤다.

루터는 죽는 순간까지 결코 그가 믿었던 진리에서 떠나지 않았지만, 그의 사후에 그를 따르던 제자들은 영혼불멸을 믿는 사람들에 의해서 이단이라고 지목을 받게 되자, 그들의 스승인 루터가 마치 영혼불멸 신앙을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위장함으로써, 마틴 루터가 생명을 걸고서 사수한 진리의 빛을 감추어 버렸다.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18세기 성공회 학자이며 사제인 블랙번은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자신들이 이단이 될 것에 대한 어리석은 염려 때문에 자신들의 스승의 가르침을 옹호하는 대신, 자기 스승은 결코 그런 교리를 고수하지 않았던 것으로 증명하려는 입장에 자신들을 두었다.” A Treatise in Millennium, Vol. 2, 328.

루터의 다음과 같은 글은 그가 생전에 무엇을 믿고 있었는지를 분명하게 밝혀 준다. “하나님의 아들의 고귀한 피를 통하여 구원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는 대신에 그것을 깊고, 달콤한 잠으로 생각하도록 훈련받아야 한다. 그리하여 관 속에 들어가는 것을 천국이나 지옥에 가는 것으로 착각하기 보다는 무덤 속에서 무의식 상태로 잠자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러한 나의 믿음은 하나님 앞에서 명백한 진리로 판명될 수 있다; ‘우리 친구 나사로는 잠들었도다 ...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는 죽었느니라 ...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마르다가 가로되 마지막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요한복음 11:11~24. ‘가라사대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요한복음 9:24. 또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죽을 수 밖에 없는 우리의 육체에 대한 잘못된 견해들을 완전히 거부하였다. 땅 속에서 부패되었던 육체가 다시는 부패되지 않을 몸으로 영광스럽게 일어나게 될 것이며, 연약한 육체가 강력한 힘을 지닌 몸으로 일어나게 될 것이다.” Christian Song Latin and German, for Use at Funeral, 287. “주님께서 재림하셔서 ‘마틴 루터여, 일어나라!’고 말씀하시면서 무덤의 문을 두드리실 때까지 잠자고 있을 것이다. 그 때에 우리는 즉시로 일어나서 그분과 함께 영원토록 행복하게 살 것이다.” The Christin Hope, p. 37

 

쟌 밀톤 : “실락원”의 저자인 밀톤은, 영혼에 대한 문제의 핵심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만일 우리가 이방종교에서 가르치는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사람 자체가 바로 살아있는 영혼이라고 말하는 성경의 가르침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사람은 본질적으로 합성시키거나 분리될 수 없는 존재이며,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두개의 다른 존재, 즉 영혼과 몸이 합쳐져서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다. 사람 자체가 살아있는 영혼이기 때문에, 영혼은 몸, 이성, 감각, 활동력, 개성을 가진 존재를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몸에 생명력을 불어넣어 주기 위해서 ‘생명의 호흡’을 불어넣으셨는데, 인간의 몸에 생명의 호흡이 불어넣어지는 순간, 인간은 ‘살아있는 영혼’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하게 되었다.” The Prose Works of John Milton, Vol. 4, p188

“죽음이란 생명력이 사라지는 것을 의미한다. 영혼이 몸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을 죽음이라고 정의하는 견해는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가르침이다. 사람이 죽을 때, 어떤 부분이 분리된다는 말인가? 영혼이 분리되는가? 만일 그렇다면, 몸은 어떻게 되는가? 영혼은 살아있고, 몸은 죽어 있는 상태를 어떻게 죽음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죽어 있지만 여전히 생명력을 가지고 살아있는 상태를 어떻게 죽음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그러므로 영혼과 몸이 분리되는 현상을 죽음이라고 정의할 수 없다.” 상동, p 279

양심과 지성으로 지켜져온 부활 신앙 : 틴데일의 제자인 프리드는 영혼불멸을 반대한 죄목으로 화형에 처해졌으며, 1575년7월 종교 개혁자인 테르우르트와 피터스가 동일한 죄목으로 화형에 처해졌다. 1611년 4월 레가트와 위트만 역시 동일한 죄목으로 화형을 당했는데, 그들은 죽기 직전에 엘리자벳 여왕에게 다음과 같은 자신들의 신앙 고백을 재가해 주기를 요청하였다. “우리는 이사야 26장 19절, 요한복음 11장 25절, 다니엘 12장 2절, 요한복음 5장 25절, 고린도전서 15장 22절, 데살로니가전서 4장 16절에 기록된 대로 죽은 자의 부활을 믿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그의 천사들과 함께 구름을 타고 오실 때, 죽은 자들로부터 우리 각자의 몸이 일어날 것이며, 그 때에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17세기 초에는 재침례파의 교리와 회중교회의 교리를 겸한 침례 교회가 영국과 화란에서 형성되었는데, 일반 침례교(General Baptist)로 알려진 이들은 영혼불멸설을 부인하고 부활 때까지 무덤 속에서 무의식의 상태로 존재한다는 진리를 받아들였다. 1660년 약 2만명 이상의 침례교인들이 서명한 25개조의 신조에는 이러한 그들의 신앙이 뚜렸하게 반영되어 있다. 이러한 신앙이 실락원의 저자이며, 학자이며 시인이며 정치가인 밀톤에 의해서 번져나갔다. 독일의 신학자로서 헬라어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한 스테그만에 의해서 영혼에 관한 진리가 다시 한번 확인 되었다.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이후 성직자들이 교권과 교파에 얽매어서 교단 간에 높은 담을 쌓는 동안, 각 분야의 학자들과 전문 지식인들은 교파를 초월하여 진리를 회복하는데에 크게 공헌하였다. 산소를 발견한 과학자인 프리스틀리,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뉴톤 경, 케임브리지 대학의 수학자인 휘스톤 등은 과학자요 신학자로서 영혼불멸설을 공개적으로 부인하였으며, 영국 찬송가의 아버지요 신학자인 아이삭 왓츠는 초기에 받아들였던 영혼불멸 사상을 버리고 성경의 진리로 돌아섰다. 오늘날까지 굴지의 성경주석학자로 손꼽히는 루터교회의 히브리 학자인 프렌츠 델리취는 그의 구약성경 주석에서 “성경 전체는 영혼이 불멸한다는 것에 대해서 전혀 말하고 있지 않다. 성경적인 관점에서 볼 때, 영혼은 죽음에 이를 수 있다.” 라고 단언하였다.

 

오스카 쿨만 : 20세기를 대표하는 신학자인 스위스의 오스카 쿨만은 죽음과 부활의 문제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의 죽음을 통하여 죽음을 정복하심으로써 다시는 죽지 않을 불멸의 영혼을 쟁취하신 유일한 분이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죽음을 정복하기 원한다면, 먼저 죽어야 하는데 즉, 몸과 영혼이 함께 죽음으로써,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부여하신 생명력 자체를 잃어버려야만 한다. “ 영혼의 불멸과 죽은 자의 부활, 8. “영혼의 불멸과 죽은 자의 부활”이라는 오스카 쿨만의 저서는 한국에서도 장로교회의 원로 신약성서 학자요 목사인 전경연씨에 의해서 번역되어 1965년 복음주의 신학총서 5권에 소개된 바 있다. 이 논문에서 쿨만은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그리스도 교회의 소망과 영혼불멸에 대한 헬라사상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 영혼불멸을 믿는 헬라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그리스도교의 부활 설교를 받아들이기가 가장 어려웠다 ... 신약에는 ‘영혼불멸이냐? 죽은 자의 부활이냐?’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명백하게 기록되어 있다. 위대한 철학자인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가르침은 결코 신약의 가르침과 조화될 수 없다.” 전경연편, 8.

오스카 쿨만은 영혼불멸과 부활은 동시에 믿을 수 없는 서로 상반되는 사상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은 신앙 양심선언을 하였다; “그리스도교회가 영혼불멸과 부활신앙을 연결지어 놓음으로써 빚어진 신학적 착오와 일반 평신도들의 혼동은 나로 하여금 침묵을 지키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영혼불멸의 신앙을 받아들인다는 말은 그리스도 교회의 핵심인 부활신앙을 부인하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에, 나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습니다. 오늘날 기독교회는 고린도전서 15장을 플라톤의 철학으로 희생시켰는데, 본인은 이 사실을 도저히 덮어둘 수 없습니다.” 상동, 9.

 

자 이제 다시, 독자들이 베뢰아 사람의 입장 하에서 대답을 하여야 할 때가 되었다. “종교개혁자들의 기록을 살펴 보셨나요?”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런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사도행전 17:11.

결론 - 영혼 불멸설의 위험과 참된 부활 신앙


사람이 죽은 후에 어떻게 되는 것인가?” 라는 질문은 죽은 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필요한 질문이다. 비록 성경이 죽은 자들은 꿈도 꾸지 않는 깊은 잠을 자고 있으며 아무것도 모른다라는 사실을 수십번씩 반복 선언하고 있을지라도, 오늘날 여전히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헬라의 이교 사상을 좇아 “영혼은 결코 죽지 않는다”고 굳게 믿고 살고 있는 것이다.

이 얼마나 고집스럽고 이상한 일인가? 오늘날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믿고 있는 신조들을 성경 말씀에 비추어 보면 여러가지가 하나님의 말씀과는 상반되게 믿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면서 우리는 놀라게 된다. 이러한 모든 거짓말은 거짓의 아비 사단에게서부터 유래된 것이다.

모든 거짓말에는 목적이 있다. 사단은 왜 에덴 동산에서 하와에게 선악과를 먹어도 결코 죽지 않을 것이라고 속였을까? 그 이유는, 사람의 몸은 죽어도 영혼은 죽지않는다는 거짓말을 퍼뜨린 후에, 죽은 사람들의 영혼들로 가장하여 나타나서 사람들을 속이고 오류와 미신으로 사로잡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귀신과 접신한다는 이 강신술이야말로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것이며, 마귀는 이러한 속임수를 통하여 무당굿을 하는 무속신앙으로부터 시작해서 현대인들이 신봉하는 심령과학(죽은 영혼들과 교통한다는 강신술)에 이르기까지 그럴듯한 가면을 쓰고 인간들에게 접근하여 기만하는데 성공하게 된 것이다.

구약성경에서 우리는 사단이 바로 이러한 강신술을 이용하여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 휩싸여 있던 사울 왕을 속이는데 성공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사울 왕이 하나님께 버림을 당한 후, 신접한 여인을 찾아간 사실이 사무엘상 28:6~14에 나오는데, 그 때 사울왕이 만났던 영혼은 죽은 사무엘 선지자가 아니라 사무엘의 혼백으로 위장한 악령이었다. 그러므로 구약성경에는 이러한 강신술사나 무당들을 근절시키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출 22:18; 레19:31; 신18:10). 그러므로 영혼 불멸의 사상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죽은 사람들의 영혼들을 앞세우고 “미혹하게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쫓”(딤전 4:1)도록 유도하는 사단의 온갖 속임수에 아무런 방비없이 노출되게 되는 것이다.

1960년대에 버지니아 주에 두 자녀를 가진 해링턴 부인에게 희안한 일이 생겼었다. 해링턴 부인의 남편인 브라이언이 육군으로 월남전에 참가하게 되었는데, 어느날 갑자기 미 육군성으로부터 남편이 전사했다는 비보가 날아오게 된 것이다. 큰 슬픔에 빠져서 괴로워하고 있는 해링턴 부인에게 하루는 이웃에 살던 친구가 찾아왔다. 찾아와서는 대뜸 “해링턴 부인! 남편을 만나보고 싶은 생각이 없소?”라고 묻는 것이 아닌가! 당황한 해링턴 부인은 그것이 무슨 뜻인지 다시 물어 보았다. 그러자 그 친구는 다시 똑같은 질문을 하는 것이 아닌가! “글쎄, 남편을 만나 보고 싶은 마음이 없느냐구요?” “아니, 이상도 하시네. 죽은 내 남편을 어떻게 만나 볼 수 있다는 말입니까? 원 세상에 별일도 다 있구만.” 그러자 그 친구는 자기가 강신술을 하는 교회에 다닌다는 사실을 말하면서 자기가 다니는 교회의 강신술사에게 부탁하면 죽은 영혼들을 불러내어 대면하여 이야기 할 수 있게 해 준다는 것이었다. 그때 해링턴 부인은 이렇게 말했다. “무슨 말을 하고 있는거요? 성경에 말씀하시기를 죽은 자는 아무것도 모르며 부활의 아침까지 잠자고 있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는데, 무슨 그런 엉뚱한 장난같은 말을 하고 있는 겁니까?” 완강하게 부인하는 해링턴 부인의 반응을 보면서, 그 친구는 포기한 듯 돌아가고 말았다.

그런데 시일이 지나면서 남편이 너무나 보고 싶어진 해링턴 부인은 남편의 혼을 만나서 이야기 할 수 있다는 말에 조금씩 호기심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어떤 날 오후, 해링턴 부인이 남편을 보고 싶은 마음에 견딜 수 없어서 강신술을 하는 교회에 가 보겠다는 약속을 하게 되었다. 죽은 자의 영혼을 초청해 오는 능력이 있다는 강신술사와 만나서 부인은 남편에 대한 인상착의와 형편을 설명해 주었다. 그러자 그 강신술사는 기도 비슷한 주문을 외우기 시작하면서 월남전에서 전사한 남편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벽에서부터 하얀 연기같은 것이 스며 나오는 것같더니, 해링턴 부인 앞에 그렇게도 그리워 하던 남편이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너무나 놀란 해링턴 부인은 처음에는 어안이 벙벙 하였으나 남편을 만났다는 기쁨에서 모든 것을 잊어 버리고 남편과 대화를 나누었다.

그 후로 이 부인은 남편을 보고 싶을 때마다 강신술사를 찾아가서 죽은 남편을 만나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그렇게 하기를 두 서너달이 지난 후에 하루는 해링턴 부인 집에 초인종이 울렸다.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아빠가 돌아 왔다고 외치는 아이들의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란 부인은 기절할뻔 하였다. 남편이 바로 문 앞에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아니, 여보! 당신 이제 이렇게 돌아다닐 수가 있게 됐어요? 내일 내가 강신술 교회에서 당신을 만나러 갈 참이었는데...” 그때 그 남편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여보,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요? 내가 돌아왔소! 당신의 남편, 브라이언이 살아서 돌아 왔단 말이요! 사실은, 내가 죽은 것이 아니고, 실종 되었는데, 국방성에서는 내가 죽은 줄로 알고 사망 처리를 한 것이요. 여보, 나는 지금 막 월남에서 돌아오는 참이오!” 두 자녀를 끌어 안으며 이렇게 말하는 남편을 보고 해링턴 부인은 아연실색하였다. 그리고 부인으로부터 지난 얼마동안에 있었던 일들에 대해서 들은 남편도 아연실색하게 되었다. 자 그렇다면, 그 부인이 강신술 교회에 가서 계속 만나 보았던 남편의 영혼은 과연 누구였겠는가? 물론 그것은 인류를 속여서 멸망에 빠뜨리기 위한 마귀가 그 남편의 모습으로 가장하여 나타났던 것임에 틀림이 없다.

이제, 여러분들은 이렇게 생각해 보시기 바란다. 여러분 앞에 돌아가신 여러분의 부모님이나 가족중 누가 갑자기 나타났다고 하자. 그리고 그분들이 하늘에서부터 여러분에게 전해줄 기별을 가지고 왔다고 말한다고 가정해 보자. 그때에 여러분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더 나아가서, 하늘에서 왔다는 그 영혼들이 성경의 말씀과 배치되는 거짓된 것을 말하면서, 하늘에 가 보았더니 이러 저러한 것들이 세상에서 믿을 때와는 판이하게 다르더라고 말하면서 이것들을 알려 주려 왔다고 말한다면 여러분들은 과연 누구를 믿을 것인가? 하나님의 권위있는 성경 말씀을 믿을 것인가? 아니면 눈에 보이는 영혼같은 존재가 말하는 말을 믿을 것인가? 우리가 영혼은 죽지 않고 어디엔가에 존재 한다고 믿고 있으면 사실상 커다란 기만을 향하여 문을 크게 열어놓고 살고 있는 셈이 된다.

어떤 분들은 이렇게 말을 한다. “돌아가신 부모님들의 영혼이 우리를 지금 내려다 보고 있고 또한 우리를 도와 주고 있다고”. 자, 생각해 보자.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여러분들이 다치고 사고나고 병나고 슬픈 일을 당하고 있는 모습을 항상 보면서 살고 있는 그들에게 과연 하늘은 천국이 될 수 있겠는가? 앞에서 공부한 것처럼, 성경은 죽은 자들은 아무것도 모르며 깊은 잠을 자고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죽은 자들은 자기의 할 일을 다 마치고 지금 편히 쉬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인들로서 성경에도 없는 이교의 가르침을 가지고, 이미 고인이 된 우리의 부모들과 가족들을 이상한 귀신으로 만들지 말아야 한다.

성경은 부활을 가르치고 있다. 만일 사람이 죽어서 그 영혼이 지옥 또는 천국에 이미 가있다면, 도대체 그들을 또 다시 부활시킬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모든 사람은 일단 죽으면, 각기 자신에게 운명지어진 생명 또는 심판의 부활을 기다리면서 땅 속에서 잠자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들과 모든 천연계가 다 주님의 오심을 고대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전서 15장에서 우리에게 부활이 없다면 다 망하였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은 부활을 가르치고 있다. 우리의 몸과 혼이 함께 일어나는 부활의 그 아침을 말이다. 우리는 과연 성경을 믿을 것인가? 아니면 사람의 철학과 가르침을 믿을 것인가? 선택은 우리에게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