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기도와 재물에 대한 교훈 3가지


1.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마태복음 6:7.

이방인들은 그들의 기도 속에 죄를 속하는 공로가 있는 것으로 여겼다. 그래서 기도를 오래 하면 할수록 자신들의 공덕이 더 커지는 줄 생각했다. 만일, 그들이 자신의 노력으로 거룩해질 수 있다면, 스스로 즐거워 할 수 있는 무엇, 곧 자랑할 어떤 근거를 가지게 될 것이다.

이러한 기도의 사상은 거짓 종교의 모든 제도의 기초를 이루는, 스스로의 힘에 의한 속죄의 원리에서 생긴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기도에 있어서 이 이교의 사상을 받아들였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재하며,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하는 사람들 사이에까지 퍼져 있다. 마음에 하나님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으면서도, 틀에 박히고 습관적인 말을 되풀이하는 것은 이방인의 “중언 부언”과 똑같은 성격을 가진다.

기도가 죄를 속하는 것은 아니다. 그 자체에는 아무런 효능과 공효가 없다. 우리가 멋대로 내뱉는 화려한 말은 모두 합해도 거룩한 소원 한 가지만 못하다. 가장 유창한 기도라 할지라도 마음의 진정한 뜻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면 무익한 말에 불과하다. 그러나 격의 없는 친구에게 아무런 부담 없이 호의를 구할 때와 같이 진정한 마음으로 영혼의 단순한 소원을 아뢰며 드리는 기도, 이것이 믿음의 기도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격식을 차린 찬양을 원치 않으신다. 그러나 상하고 억눌린 마음으로 자신의 죄됨과 더없이 약함을 깨닫고 부르짖는 무언의 절규는 무한히 자비하신 하나님께로 나가는 길을 발견한다.

 

2.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내지 말라” 마태복음 6:16.

하나님의 말씀이 뜻하는 금식은 형식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음식을 거절하고 베옷을 입고 머리에 재를 뿌리는 것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죄를 진정으로 슬퍼하며 금식하는 사람은 결코 겉으로 과시하고자 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금식의 목적은 심령의 죄 때문에 육체를 괴롭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죄의 무서운 특성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마음을 겸손하게 하고, 그분의 용서하시는 은혜를 받을 수 있도록 우리를 도와주기 위한 것이다. 이스라엘에게 한 그분의 명령은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욜2:13)라는 것이었다.

우리가 스스로의 노력으로 성도의 유업을 사거나 덕을 세울 줄 알고 고행을 하거나 우쭐해 하는 것은 아무 유익이 없을 것이다.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요6:28)라는 질문을 받으시고,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요6:29)고 대답하셨다. 회개는 자신에게서 그리스도께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그리스도를 받아들여 믿음으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게 할 때, 선한 업적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마6:17, 18)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즐거움으로 해야지 슬픔과 우울한 기분으로 해서는 안된다. 예수님을 믿는 신앙에는 우울한 것이 없다.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슬픈 표정을 지으며 주님 안에서 실망당한 것과 같은 인상을 주게 되면, 이것은 곧 주님의 품성을 잘못 나타내고 그분의 원수의 입에 구실을 붙여 주는 것이 된다. 말로는 하나님을 그들의 아버지로 주장할 수 있을지 모르나, 우울하고 슬픈 표정을 지음으로써 그들은 고아의 모습을 세상에 나타낸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봉사를 사실 그대로 매력 있게 나타내기를 바라신다. 극기와, 마음의 은밀한 고통을 자비하신 구주께 내어 놓도록 하자. 짐을 십자가 아래 내려놓고, 그대를 먼저 사랑하신 그분의 사랑 안에서 즐겁게 갈 길을 가도록 하라. 사람들은 영혼과 하나님 사이에 은밀히 진행되는 일을 끝까지 모를 수도 있다. 그러나 마음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활동의 결과는 모든 사람에게 나타날 것이다. 왜냐하면 “은밀한 중에 보시는” 분이 “갚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3.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마태복음 6:19.

땅에 쌓아 둔 보물은 오래 가지 못한다. 도둑이 구멍을 뚫어 훔쳐 가고, 좀이 먹고 동록이 쏠기도 한다. 화재와 폭풍우가 소유를 쓸어가 버리기도 한다.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그러므로 땅에 쌓아 둔 보물이 마음을 빼앗아 하늘의 것이 들어오지 못하게 할 것이다.

유대인 시대에는 사람들의 정열이 주로 돈을 사랑하는 쪽으로 쏠렸다. 속된 마음이 하나님과 믿음이 차지할 자리를 빼앗았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재물을 향한 탐욕은 너무도 매혹적이며 황홀케 하는 영향을 생애에 미치기 때문에, 고결함을 왜곡시키고 인간성을 부패케 하는 결과를 초래하여 마침내 사람들을 멸망에 빠뜨리고 만다. 사단을 섬기면 근심과 번민과 피곤한 수고로 가득 찬다. 또, 사람이 세상에 쌓아 두려고 애쓰는 재물은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다.

예수께서는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 하느니라 네 보물이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이 교훈은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는 것이다. 하늘의 보물을 획득하는 것은 자신의 유익을 위한 것이다.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 중에서 이들만이 진정으로 우리의 것이다. 하늘에 쌓아 둔 보물은 없어지지 않는다. 그 어떤 화재나 홍수도 그것을 없애 버릴 수 없고, 그 어떤 도둑도 그것을 빼앗아 갈 수 없고, 좀이나 동록이 그것을 해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재산보다 더욱 귀중하게 여기시는 이 보물은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엡1:18)함이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분의 보배, 곧 그분의 귀중하고 특별한 보물로 불려진다. 그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들이 면류관의 보석 같”(슥9:16)다. “사람을 정금보다 희소케 하며 오빌의 순금보다 희귀케 하리로다”사13:12. 모든 영광의 발원지인 위대한 중심이 되시는 그리스도께서는 순결하고 완전한 상태에 있는 당신의 백성을 당신의 고난과 겸비와 사랑의 대가로, 또 당신의 영광의 보충으로 바라보신다.

우리는 위대한 구속 사업에 그분과 연합하고 그분의 죽음과 고난으로 얻은 부를 그분과 함께 나누도록 허락 받고 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살전2:19, 20)고 편지하였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노력하여 얻으라고 하신 보물이다. 품성은 생애의 위대한 수확이다.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하여 사람의 마음속에 하늘을 향해 가고자 하는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모든 언행, 곧 그리스도와 같은 품성의 형성에 이바지하는 모든 노력은 하늘에 보물을 쌓고 있는 것이다.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도 있게 될 것이다. 다른 사람들을 이롭게 하기 위한 모든 노력을 통해 우리는 스스로 유익을 얻는다. 복음을 전하는 데 금전과 시간을 바치는 사람은 그 사업과 또 그 사업을 통하여 접촉하게 될 영혼들을 위하여 관심을 기울이고 기도하게 된다. 애정이 다른 사람들에게로 향하면서, 그는 그들에게 최대의 선을 행하기 위하여 더욱 하나님께 헌신하게 된다.

그리하여 세상의 재물이 소멸될 마지막 날, 하늘에 보물을 쌓아 둔 사람은 그의 생애에서 얻은 것을 바라보게 될 것이다. 만일, 지금껏 그리스도의 말씀에 유의해 왔다면, 우리는 크고 흰 보좌 주위에 모일 때 우리의 활동으로 구원받은 영혼들을 보는 것은 물론, 저들의 면류관을 그리스도의 발 아래 놓고 세세 무궁토록 그분을 찬양하는 큰 무리가 우리의 노력의 결과로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구원하고 구원받은 사람이 또 다른 사람을 구원하는 식으로 하여 안식의 항구에 들어오게 된 사람들임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일한 자는 구속주의 영광에 참예하는 구속 받은 이 사람들을 얼마나 큰 기쁨으로 바라보겠는가! 영혼을 구원하는 사업에 신실했던 자들에게 하늘은 얼마나 귀중한 것이 될 것인가!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골3:1.

 

이런 기도를 드리세요!

하나님의 눈 외에는 어떤 사람의 눈에도 보이지 않고, 하나님의 귀 외에는 어떤 사람의 귀에도 들리지 않는 은밀한 장소에서, 우리는 가장 깊이 감추어진 우리의 욕망과 소원을 무한히 자비하신 아버지께 쏟아 놓을 수 있다. 그리하면 인간의 부르짖음에 반드시 응답하시는 한 음성이 고요함과 침묵을 통하여 우리의 마음 속에 들릴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지칠 줄 모르는 사랑으로 완악한 마음을 가진 죄인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들의 참회를 받아주고자 기다리신다. 그분께서는 마치 엄마를 알아보고 웃는 아기의 미소를 기다리듯이 우리에게서 당신의 은혜와 희생에 대한 진실된 감사함의 표현이 은밀한 기도를 통하여 흘러나오길 기다리신다. 기도를 통하여, 우리를 향한 그분의 마음이 얼마나 부드럽고 동정적인지를 깨닫게 되길 소원하신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슬픔을 당신의 사랑으로, 우리의 상처를 당신의 치유로, 우리의 연약함을 당신의 능력으로, 우리의 공허를 당신의 충만으로 대치할 수 있도록 지금도 우리를 초청하고 계신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매일의 친구로 삼을 때, 우리는 보이지 않는 능력이 우리를 둘러 싸고 있는 것을 느끼게 되며, 그분과 자주 교제함으로써 그분을 닮아가게 될 것이다. 매일 드리는 은밀한 기도는 우리에게 고상한 포부와 진리와 의무에 대한 분명한 이해, 생애의 고상한 목적, 그리고 의에 굶주리고 목마른 심령을 가지게 만들어 준다.

권두언


강병국 목사

우리는 우리들의 현주소와 좌표를 알아보기 위하여 과거를 돌아 보아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과거의 역사는 우리들의 거울이 되기 때문입니다.

폴란드에 있는 옛날 나치 수용소였던 아우슈비치를 방문하였을 때 제가 느꼈던 충격은 잊혀지지 않을 교훈 가운데 하나로 지금도 제 마음 속에 남아 있습니다. 그 수용소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역사가 죠지 산타야나 씨가 말한 문구가 돌 벽에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Those who cannot remember the past are condemned to repeat them - George Santayana” “과거를 기억할 줄 모르는 사람은 그러한 일들을 다시 반복하게 될 운명에 처하게 될 것이다-죠지 산타야나” 우리가 실수들과 과오에서 우리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과거 우리들의 선조들이 행한 과오들과 실수들을 공부해야만 합니다. 성경은 인간이 기록한 역사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기록하여 주신 역사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과장이나 화려하게 꾸민 문구들이 없습니다. 어떠한 인간의 업적을 높여주기 위하여 우리가 흔히 하듯이 그들의 잘못과 실수들은 감추어 주고 좋은 것들만 골라 기록하여 주는 그러한 꾸민 역사가 아닙니다. 성경 말씀은 과거의 역사와 인간의 생애를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기록하고 있는 영감의 책입니다. 다음 세대들을 위한 영적인 교훈을 위하여서, 특히 말세를 사는 우리들을 위한 거울로서 기록하여 주신 것입니다. 거울은 우리 자신들의 모습을 반사하여 보여주지 않습니까?

이번 호는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과 광야생활에 관한 기사들을 실었습니다. 그냥 기사들이 아니라, 현대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을 조명해 주는 측면에서의 기사들을 수록하였습니다. 큰 축복을 얻게 되실 것을 확신합니다.

회개한 사람을 위한 옷


때와 장소에 맞춰서 옷을 입는 것은 기본적인 예의이다. 만일 내가 수상스키를 타러 간다면, 나는 수영복에 구명조끼를 입을 것이다. 하지만 수영복 차림으로 스키를 타러 간다면 굉장히 우스꽝스러울 것이다.

어떤 사람이 편안한 반바지에 화려한 티셔츠를 입고 하얀 양말과 운동화를 신고 있다면, 나는 그 사람이 산보나 조깅을 하러 간다고 생각할 것이다. 주일 아침 길을 나서는데 저만치서 옷을 잘 차려입고 성경을 들고 오는 한 가족을 본다면, 그 사람들은 아마도 교회에 가는 그리스도인들일 것이다. 우리가 입는 옷들과 우리의 태도는 우리가 누구이며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말해준다.

그렇다면, 예수님과 천사들과 함께 살기 위해 하늘을 향하여 가고 있는 사람들은 어떤 옷을 입고 있을까? 만일 어떤 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하늘에서 살기 위해서 진지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면, 그는 그리스도의 의의 두루마기 - 결혼 예복 - 을 입고 있을 것이다. 비록 그 하얀 예복의 천이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을지라도, 그의 삶과 말과 행동과 태도, 그리고 말씨와 표정은 그가 의의 세마포(예복)를 입고 있는지 아닌지 알 수 있게 해준다.

 

의의 두루마기

성경에는 구원받은 사람들과 영원한 왕국에 들어갈 사람들이 반드시 입어야 할 옷(예복)에 대한 언급이 여러 번 나온다. 이 의의 두루마기는 결혼 예복과 동일한 것이다. 이 기사에서 우리는 의의 예복이 무엇을 뜻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입을 수 있는지 배울 것이다. 우리 스스로가 만든 의복들은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것이 아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서 창조시에 주셨던 빛의 옷 대신 무화과 나뭇잎으로 옷을 만들어 입었지만, 그것은 “더러운 옷”에 불과하였다. 성경은 인간 스스로가 만드는 의의 옷을 “더러운 옷”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사 64:6. 그러나 하나님께서 만들어서 주시는 옷은 하늘의 베틀에서 짜여진 비싸고, 흠없는 옷이다. 그 옷은 진심으로 회개하고 믿는 죄인들에게만 주어진다.

이사야 선지자는 그러한 옷을 받는 기쁨을 이렇게 표현했다. “나는 여호와로 인하여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으로 내게 입히시며 의의 겉옷으로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 사61:10. 탕자가 제정신이 들어 집으로 돌아올 때 아버지는 종들에게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 입히”(눅15:22)라고 명하였다.

나는 어떤 서적에서 다음과 같은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가치가 없다. 그러나 우리의 보증인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에게로 나오는 모든 사람을 넉넉히 구원할 수 있으시다. 과거의 경험이 어떠하든지, 그리고 현재의 환경이 아무리 절망적이라 할지라도 연약하고 속절없고 낙담한 지금의 상태 그대로 예수께 나가면, 우리의 자비하신 구주께서는 멀리서부터 우리를 맞아 당신의 사랑의 팔과 의의 두루마기로 감싸 주신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품성을 그대로 나타내는 흰 두루마기를 입혀 아버지께 소개시키신다.” 경제 및 금융 문제 전문가인 나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나의 “보증인”이 되신다는 성경의 사상은 매우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나의 보증인이 되셔서 나와 함께 서명하는 것이다. 가끔씩 내가 금융 문제를 강의할 때마다 나는 다른 사람이나 회사를 위해서 절대 “보증”을 서지 말라는 권고를 한다. 왜냐하면 문제가 생겼을 경우, 보증을 선 사람이 빚을 대신 물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그 보증을 죄인을 위해서 하신다! 비록 나의 신용이 매우 좋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분께서는 나의 약속과 헌신을 믿어 주시고 보증을 서주신다. 내가 지은 죄들을 보아 나는 죽어야 마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께서는 나를 위해 돌아가셨다. 보증을 서주셨을 뿐만 아니라, 내가 진 빚까지 다 갚아주신 것이다!

 

회심은 큰 거래이다

회심은 단지 우리의 죄됨을 인정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회심은 죄를 슬퍼하고 그것으로부터 돌아서는 것을 수반한다. 하나님의 뜻과 성령의 호소를 받아들인 상태에서 그리스도의 마음을 받는 것이 회심(회개)이다. 다윗왕이 밧세바와의 죗된 행위 후에 하나님께 회개한 것은 세기를 내려오며 모든 죄인들이 배워야 할 본이 되었다. 다윗이 하나님께 매달리며 드렸던 기도 속에는 그의 회심이 매우 잘 나타나 있다. “나를 용서하시고, 나를 변화시키시고, 승리하도록 능력을 주소서.”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도말하소서 [나를 용서하소서]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변화시키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나를 용서하소서]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성령의 정케 하시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능력을 주소서]” 시 51:9~12.

사람들은 여간해서는 잘 변화되지 않는다. 우리 모두가 그 사실을 잘 안다. 우리는 우리에게 유전되고 또한 출생 이후로 배양되어 온 악으로 기우는 성향의 희생자들이다. 인간의 영혼이 회개하는 문제는 가볍게 다룰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회개는 거룩한 능력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가장 큰 이적이다.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받아들이는 믿음을 통해서 실제적인 결과가 이루어지게 된다. 믿음을 통하여 순종의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마다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빌 2:13)신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한 인간이 회심을 경험할 때 일어나는 변화들을 가장 정확히 묘사한 글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 글을 읽는 독자 자신의 경험과 비교해 보기를 바란다.

“죄를 사랑하는 땅에 속한 마음을 변화시켜 말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의 아름다움과 하나님의 위대함을 이해하여, 영혼이 하나님의 사랑에 잠기고 하늘의 신비로 사로잡히는 것은 사소한 일이 아니다. 죄인이 이러한 일들을 이해하게 될 때, 그가 이전에 살던 생활은 더럽고 혐오스럽게 보인다. 그는 죄를 미워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그의 심령을 깨어놓고 그리스도를 영혼의 생명과 기쁨으로 받아들인다. 그는 전에 즐겼던 쾌락을 끊는다. 그는 새로운 마음과 새로운 사랑, 새로운 관심과 새로운 의지를 갖는다. 그의 슬픔, 소원, 애정, 이 모든 것들이 새로워진다. 한때 아무런 매력이 없었던 하늘이 그에게는 풍요함과 영광의 곳으로 보인다. 그는 미래의 집이 될 하늘을 사모한다. 왜냐하면 거기에서 그는 보혈로 자신을 구원해 주신 분을 바라보고 사랑하며 찬양할 것이기 때문이다. 전에는 힘들게만 보였던 거룩한 순종의 삶이 이제는 그의 즐거움이 되었다. 관심조차 없었던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연구하며 성경을 그의 최고의 조언자로 삼고 살게 되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보내주신 편지가 된다. 그의 생각, 말, 행동들은 모두 이 말씀에 의해 판단되어진다. 그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명령 앞에 떨지만 말씀의 약속들을 굳게 붙잡고 그것을 자신에게 적용시킴으로써 영혼을 강건하게 한다.” The Faith I Live By, p. 139.

그러므로 우리는 회심의 정의를 다음과 같이 내릴 수 있다. “회심은 마음의 변화이며 불의에서 의로 돌아서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공로를 의지하고 그분을 진심으로 믿는 믿음을 활용함으로, 회개하는 죄인은 죄사함을 받게 된다. 그는 악을 행하기를 그치고 선을 행하기를 배우며 은혜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 안에서 자라난다. 그는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죄로부터 분리되어야 함을 알고 그에 따르는 모든 희생을 감수하게 된다. 그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얻을 수만 있다면 그 어떤 것도 아깝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는 그리스도의 군대에 들어가 용감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타고난 경향과 이기적인 욕망과 싸우며 자신의 의지를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뜻과 양심 속에서 들려 주시는 성령의 호소에 굴복시킨다. 날마다 그는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며 필요한 힘을 얻고 도움을 얻는다. 이제 자아는 그 세력을 잃어 버렸고, 하나님께서 죄인의 마음을 다스리신다. 그의 생활은 의의 열매를 맺는다. 한때 그 속에서 뒹굴었던 죄를 이제는 미워한다. 굳센 결심으로 그는 거룩한 길을 따른다. 이것이 참된 회심이다.” 회심은 내가 가진 옛 것을 주고 새 것을 받는 가장 이익이 많이 남는 큰 거래이다.

바울이 기록한 마지막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경고의 말씀을 읽어 보도록 하자.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3:1~5)!

능력 없는 경건의 모양. 다른 이름을 붙이자면 이름 뿐인 기독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 순종이 없는 믿음을 가진 그리스도인이야 말로 경건의 능력이 없는 모양 뿐인 신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경건의 능력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죄사함 받을 뿐 아니라 그 마음까지 함께 변화함을 받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죄인의 마음 속에서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뜻한다. 바울이 언급한 경건의 능력은 없고 모양 뿐인 그리스도인들은 진정으로 회심을 경험하지 않은 신자들을 뜻한다. 그들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의 뜻과 진리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에 진리의 사랑을 받지 못하게 되어 결국에는 사단이 역사하는 각종 기적과 감정적 신앙에 이끌려 구원을 잃어 버리게 된다.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희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 살후 2:9~11.

 

날마다 죽노라

바울은 감정적이고 기적을 선호하는 모양 뿐인 능력 없는 신앙에 대한 치유책이 어디에 있다고 말하였는가? 그는 날마다 죽는 경험이야말로 유일한 해결책이며 사단의 역사에 대한 승리의 비결이라고 외치고 있다. 그가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만난 구주를 위해 평생 충실하게 봉사하면서, 바울은 자신의 변화되지 않은 옛 본성이 고개를 들고 일어나려고 애쓰는 것을 느끼면서 이 죗된 욕망을 끊임없이 제어하지 않는 한 자신에게 소망이 없음을 깨달았다. 그는 그리스도인의 생애는 매 발걸음마다 자아 부정의 생애가 되어야 함을 잘 알았다. 여러 성경 저자들은 매일마다 그들의 생애를 하나님께 재헌신하였다. 다윗은 “주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가 종일(매일) 주께 부르짖나이다 “(시86:3) 라고 말하였다. 다니엘 역시 매일 세번씩 기도드림으로써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는 일을 그치지 않았다(단6:10). 그의 신실한 기도 생활이 그의 거룩한 삶의 주요한 요인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예수께서는 이 문제에 대하여 보다 확실하게 말씀하셨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16:24)고 말씀하셨다. 성경은 베뢰아인들이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했다고 기록한다(행17:11). 또한 예수께서는 주기도문에서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매일) 양식을 주”시도록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다(마6:11).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매일의 경험이 필요한 이유는 명백하다. 참된 회심은 일생에 한 번만 있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 매일 필요하다. 이 회심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에 들어가게 해준다. 참된 회개를 통하여 옛 것들, 즉 본성과 유전적으로 물려받거나 배양되어진 잘못으로 향하는 경향이 힘을 잃고 사라지게 된다. 회개를 통하여 죄인은 새롭게 되고 성화된다. 하지만 이 일은 중단없이 계속 진행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사단이 존재하는 한, 사단은 자신의 일을 행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애쓰는 자들은 강한 악의 조류를 만나게 될 것이다. 그들의 마음은 끊임없는 기도와 경계로 둘러싸여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둑이 터지고 죄의 물결이 홍수처럼 밀려와 안전을 휩쓸어 갈 것이다. 새로 거듭난 마음은 말씀의 소금을 매일 뿌리지 않는 한 그 거룩하고 아름다운 상태에 머물러 있을 수 없다. 날마다 신령한 은혜를 받지 않으면 어떤 사람도 회심한 상태를 지속할 수 없다.

아침마다 그대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라. 그리고 이 일을 그대의 첫 번째로 할 일로 삼으라. 또한“오 주여! 나를 받으사 온전히 당신의 것으로 삼으소서. 나는 나의 모든 계획을 당신의 발 앞에 놓나이다. 오늘 나를 당신의 일에 써 주시옵소서. 나와 같이 하여 주시고 나의 모든 일이 당신 안에서 성취되게 하옵소서” 라는 기도를 간절한 마음으로 매일 하나님께 드리라. 아침마다 그 날을 위하여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라. 모든 계획을 하나님께 맡겨 그분의 섭리에 따라 행하기도 하고 그만 두기도 할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대는 날마다 그 생애를 하나님의 손에 맡기게 되고 따라서 그대의 생애는 그리스도의 생애를 따르게 될 것이다.

 

시험

다음의 시험은 개인들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이 시험은 개인적이며 마음의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이것은 그대가 어떤 옷을 입고 있는지를 알아내는 데에 있어서 실수하지 않을 것이다.
아무도 스스로의 힘으로 하늘 문을 비집고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어떠한 눈가림으로도 하늘에 들어갈 수는 없다. 만일 조금만 시간을 내어 생각해 본다면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곧고 좁은 길에 있는지, 아니면 죽음과 지옥으로 인도하는 넓은 길에 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사람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자문해 보아야 한다.

1. 내 마음은 그리스도의 은혜로 새롭게 되었는가?
2. 내 마음은 성령의 음성을 듣고 그것을 받아들이는가?
3. 나의 죄들을 회개하고 자백하였는가?
4. 나의 죄는 용서함 받았는가?
5. 나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살아가고 있는가?
6. 나는 성경에 기록된 진리를 위하여 모든 희생을 감수할 수 있는가?
7. 나는 구세주를 섬기기 위하여 기꺼이 모든 시간을 완전히 바치고자 하는가?
8. 나는 진리에 순종함으로 나의 영혼을 정결케 하고 그분 안에서 완전해지길 소원하는가?

만일 위의 여덟 가지 질문에 모두 ‘네’라고 대답할 수 있다면 그대는 생명으로 이끄는 곧고 좁은 길을 가는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

지금은 희생이 두려워서 뒤로 물러설 때가 아니다. 만일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의의 예복을 입고 세상과 연합하는 대신 그리스도와 연합한다면, 그 앞에는 빛나고 영광스러운 빛이 비추어질 것이다. 그리스도로부터 구원의 생명수가 넘쳐흐른다. 믿음으로 그분의 능력을 부여잡을 때 그분께서는 겉으로 보아 가장 희망 없는 이들도 놀랍게 변화시키실 것이다. 그분은 자신의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이 기적을 행하실 것이다.

 

놀라운 약속

우리는 예수 재강림을 위하여 올바로 준비될 수 있다. 예수께서는 구원에 필요한 것들을 마련해 놓으시고 그것을 이룰 능력을 주신다.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는 모든 사람들은 그분 앞에 선택된 충실하고 참된 백성으로써 서게 될 것이다. 사단은 그들을 구세주의 손에서부터 빼앗아 낼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보호하심을 주장하며, 회개하고 믿는 단 한 명의 영혼도 원수의 손아귀에 들어가도록 허락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는 맹세하시기를 “나의 힘을 의지하고 나와 화친하며 나로 더불어 화친할 것이니라” (사27:5)고 말씀하셨다. 여호수아에게 주신 약속은 우리 모두를 위한 것이다.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네가 만일 내 도를 준행하며 내 율례를 지키면... 내가 또 너로 여기 섰는 자들 중에 왕래케 하리라” 슥3:7.

 

사랑과 행복


서 정희

사랑한다는 말은
모든 것을 안다는 말입니다.

사랑한다는 말은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말입니다.

사랑한다는 말은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는 말입니다.

오늘 그분께서 당신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내가 너를 진정으로 사랑한단다.

행복은
이 사랑을 받아들이는 데서 오는 것입니다.

행복은
이 사랑의 힘으로 내 자아가 죽는 데서 오는 것입니다.

행복은
자아가 죽음으로 내가 변화되는 데서 오는 것입니다.

행복은
내가 변화되어 예수님의 마음을 품을 때 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리스도의 사랑이 내 안에 새겨져
세상에서
잃은 것이 많아도,
바보라 불리워도
사랑이 내 안에 있으므로
사랑 받기에
사랑 하기에
참으로 행복하다 말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서론 -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의 경험이 우리를 가르치고 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0장에서 옛날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 이후 광야 생활의 경험들과 죄악들에 대하여 기록한 후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고전 10:11).

다시 말해서 하늘 가나안 땅을 향하여 여행하고 있는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에 기록하여 두신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의 경험을 통하여 영적 교훈을 배움으로 우리는 다시 그러한 실수와 과오들을 반복하지 말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이다. 특히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과 광야 생활의 경험들은 우리에게 많은 영적 통찰력을 가지게 한다. 죄와 반역의 역사가 항상 반복하고 있는 이유는 우리의 죄의 속성이 예전 사람들과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성경 말씀은 마치 거울과 같은 것이다. 말씀 속에 있는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를 읽고 있노라면 우리는 그 속에서 오히려 우리 자신들의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 자손들의 불신과 불평은 오늘날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들의 형편을 예시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을 돌이켜 보면서 하나님께서 저희를 위하여 그처럼 많은 사랑과 돌보심의 증거를 반복해서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그렇게 불신하고 끊임없이 불평한 것에 대하여 이상하게 생각한다. 도대체 어떻게 그들이 그토록 주님의 은혜를 잊어버리는 자가 될 수 있을까 의아해 한다.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는 동안에도 얼마나 사소한 일로 인하여 불평하며 원망하고 있는가! 우리는 우리 자신들을 잘 알지 못한다.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우리를 시험하시고 작은 일로 우리의 믿음을 연단하신다. 그러나 우리들은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만큼도 시험에 견디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많은 사람들은 현재 매일의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공급 받고 있으면서도 하나님께서 장래의 필요들도 공급해 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신뢰하지 않는다. 우리들은 그저 작은 일들 때문에 불신을 표명하며 낙담에 빠지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혹시 그들이 궁핍해져서 저희의 자녀들이 고생하게 되지나 않을까 미리 염려하면서 항상 고민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어려운 문제가 생기고 곤궁한 처지에 빠졌을 때, 하나님께 대한 저희의 사랑과 믿음이 시험을 당할 때, 그들은 이런 시련이 오는 것에 대하여 겁을 내고 하나님께서 저희를 연단 시키시기 위하여 선택하신 과정에 대해서 원망한다. 그러한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들의 태도와 생활로 그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그들의 사랑과 충성심이 모든 것을 참고 견딜 수 있을 만큼 순결하고 완전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믿음은 강하고 활기가 있으며 참을성이 있어야 한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 되어야 한다. 그러한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에는 그 증거로 항상 감사와 찬송이 존재하게 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절제하는 일을 큰 고통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좋지 않은 음식을 먹고 마시는 일에 방종하며 살아가고 있다. 현시대에도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건강에 좋지 않은 음식을 마구 먹는 잘못된 식욕을 억제한다면 그 결과로 굶어 죽을 줄로 생각하고 뒤로 물러가고 있지 아니한가? 그리하여 그들은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 처럼 차라리 노예가 되어 병든 몸을 가지고 죽게 될지라도 하늘에서 내려 주신 만나를 먹는 것보다 차라리 애굽의 고기 가마 곁에서 살기를 선택하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복되는 원망들과 그들의 범죄 때문에 초래된 하나님의 진노들은 후세에 살게 될 그리스도인들 특히 말세에 생존할 사람들을 경계하기 위하여 거룩한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또한 그들의 헌신과 열성, 그리고 성소를 짓기 위하여 자원하여 바친 풍성한 예물에 관한 일도 후세의 하나님의 백성들의 유익을 위하여 기록되었다. 그토록 기쁜 마음으로 성소를 세우는 데 많은 물건들을 준비한 것은 하나님께 예배 드리기를 진실로 원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한 모본이 되는 것이다. 그러한 헌신의 생애를 통하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위하여 하늘에 살 집을 예비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이번 호는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과 광야 여행에 대한 역사를 통하여 우리들의 삶을 조명하여 보는 기사들로 준비하여 보았다. 이러한 이해는 말세를 살아 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너무나 소중한 교훈들이 될 것이다.

 

1부 - 애굽에서 시내산까지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안위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롬 15:4. 우리는 성경을 읽고 감명을 받는데 그칠 것이 아니라 그 내용을 교훈으로 삼아 우리의 실생활에 적용을 시켜야 한다.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 성경을 기록하신 참 목적이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영적인 이스라엘인 우리는 지금 하늘 가나안 변경에 거의 다다랐다. 우리의 눈 앞에서 성취되어 가는 징조들과 세상의 되어지는 일들은 그것을 분명히 말해 주고 있다. 이러한 때에 고대 이스라엘의 행적을 살펴봄으로써 우리 자신들의 영적인 여행을 점검하고 그들이 저질렀던 실수에서 배우므로 똑같은 잘못을 범하지 않을 수 있다. 이번 호를 읽으심으로 우리의 출애굽이 광야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늘 가나안에 당당히 입성하는 것이 되도록 큰 은혜를 받으셨으면 한다.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고 있는 교훈

이스라엘 백성이 겪은 광야 생활의 역사는 세상 끝날에 사는 영적 이스라엘의 유익을 위하여 기록되었다. 이스라엘 백성이 사막의 이곳저곳으로 행진하던 모든 여정과, 그들이 당한 배고픔과 목마름과 피곤함 중에서, 그리고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당신의 능력을 현저히 나타내신 일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광야를 방황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다루신 기록은 각 시대의 당신의 백성들을 위한 경고와 교훈으로 가득 차 있다. 히브리 사람들이 겪은 여러 가지 경험은 가나안에 있는 그들의 약속된 안식처에 들어가기 위한 예비 학교였다. 하나님께서는 이 시대에 사는 그분의 백성이 겸손한 마음과 온순한 정신으로, 고대 이스라엘이 겪은 시련들을 자세히 살펴서, 하늘 가나안을 위해 준비하는 일에 교훈을 받게 되기를 원하고 계신다.

많은 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의 행적을 되돌아보고 그들의 불신과 원망에 몹시 놀란다. 그리고는 그들이 그때에 있었더라면 그처럼 배은망덕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작은 시련이 그들의 믿음을 시험할 때 그들은 고대 이스라엘 백성보다 더 나은 신앙과 인내를 나타내지 못하고 있다. 난관에 봉착했을 때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정결케 하시기 위하여 선택하신 과정에 대하여 불평한다. 그들의 현재의 필요가 공급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장래를 위하여 하나님을 신뢰하기를 원치 않는다. 그들은 빈곤이 그들에게 이르러오지 않을까, 자식들이 고통 가운데 버려진 바 되지나 않을까, 늘 걱정한다. 어떤 사람들은 항상 불행을 예상하거나 실제로 존재하는 어려움들을 과장함으로 그들의 눈이 어두워져서 그들이 감사해야 할 많은 축복들을 보지 못한다. 그들이 만나는 장애물들이 그들을 힘의 유일한 근원이신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도록 이끄는 대신에 그들을 그분에게서 떨어져 나가게 한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불안과 불평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히 3:12)하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모든 일에 비추어, 우리의 믿음은 굳세고, 활동적이고, 영속적이어야 한다. 우리의 마음에서 나오는 말은 불만과 불평이 아니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 성호를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시 103:1, 2)라는 말이 되어야 한다.

 

등한히 여긴 한 가지 의무

“여호와께서 길의 숙소에서 모세를 만나사 그를 죽이려 하시는지라 십보라가 차돌을 취하여 그 아들의 양피를 베어 모세의 발 앞에 던지며 가로되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 남편이로다 하니 여호와께서 모세를 놓으시니라 그 때에 십보라가 피 남편이라 함은 할례를 인함이었더라” 출 4:24~26.

미디안에서 나오는 길에 모세는 여호와의 불쾌히 여기심에 대한 놀랍고 무서운 경고를 받았다. 그를 당장 죽일 것처럼 한 천사가 그에게 위협하는 몸짓으로 나타났다. 아무 설명은 없었으나 모세는 그가 하나님의 요구 중 하나를 무시한 것을 기억하였다. 아내의 권유에 못이겨 그는 막내 아들에게 할례식을 거행하는 일을 등한히 하였다. 모세는 그의 아들이 이스라엘로 더불어 세우신 하나님의 언약의 축복을 받을 자격을 얻게 해주는 조건을 이행하지 않았다. 그들이 선택한 지도자에게 있는 이런 태만이 백성에게 보내시는 하나님의 교훈의 능력을 감소시킬 수 밖에 없었다. 십보라는 남편이 죽임을 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손수 의식을 거행하였다. 그제야 천사가 모세로 하여금 여행을 계속하도록 허락해 주었다. 모세는 바로에 대한 그의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매우 위험한 처지에 놓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생명은 거룩한 천사들의 보호를 통하여서만 보존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알고 있는 의무를 등한히 하는 생활을 사는 한 천사들의 보호를 받을 수 없기 때문에 결코 안전하지 못할 것이었다.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에 있을 시련의 때에 의인들은 하늘 천사의 봉사를 통하여 보호를 받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율법을 범한 자들에게는 안전이 없을 것이다. 그 때에 천사들은 하나님의 교훈 중 어느 하나라도 무시하는 사람들을 보호할 수 없다.

그 때에 하늘의 천사들의 보호를 받기 위해서는 우리가 알고 있는 의무를 지금 행해야 할 것이다. 모세의 경우처럼 가족들의 반대 때문에, 혹은 세상 사람들의 이목이 무서워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것들을 등한히 하는 경우는 없는지 우리의 생활을 살펴보아야 한다.

 

은혜의 문이 닫혀질 때에

시간이 흐를수록, 자신의 불순종 때문에 온 애굽땅이 고통당하는 것을 보면서도 바로의 마음은 한층 더 굳어졌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바로에게 기별을 보내어 “내가 이번에는 모든 재앙을 네 마음과 네 신하와 네 백성에게 내려 너로 온 천하에 나와 같은 자가 없음을 알게 하리라… 내가 너를 세웠음은 나의 능력을 네게 보이고 내 이름이 온 천하에 전파되게 하려 하였음이니라” (출9:14)고 선포하셨다. 하나님께서 이 목적을 위하여 그를 세상에 나도록 하신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하여 정하신 바로 그 때에 그가 보좌에 오르도록 사건들을 지배하셨던 것이다. 이 교만한 폭군은 그의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긍휼을 잃어버렸지만 그의 생명은 보존되었다. 사건들을 처리하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에 속한다. 하나님께서는 힘있게 나타나는 당신의 능력을 감히 저항하지 않을 더 인자한 왕을 보좌에 앉히실 수도 있으셨으나 그렇게 했을 경우에는 여호와의 목적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바로를 취급하시는 일에서 여호와께서는 우상숭배를 미워하시고 잔인한 행위와 압제를 처벌하신다는 당신의 결의를 나타내셨다.

하나님께서 바로에 대하여 “내가 그의 마음을 강퍅케 한즉 그가 백성을 놓지 아니하리”(출 4:21)라고 말씀하셨다. 왕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는 초자연적 능력이 행사되었던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에게 당신의 능력에 대한 아주 분명하고 놀라운 증거를 주셨다. 그러나 왕은 완고하게 그 빛을 거절하고 그것에 유의하지 않았다. 그가 거절한 무한한 능력이 나타날 때마다 그의 반역은 더욱 굳어지고 결정적이 되었다. 그가 맨 처음 표적을 거절할 때에 심은 반역의 씨들은 결실을 거두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종들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말씀하시며, 주의와 경고를 주시고 죄를 견책하신다. 그분은 각 사람에게 그들의 그릇된 행위가 품성으로 굳어지기 전에 그것들을 시정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다. 그러나 만일 그가 시정받기를 거절한다면, 하나님의 능력은 그의 행동을 고쳐주기 위하여 개입하지 않는다. 그는 같은 길을 되풀이하기가 훨씬 쉽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는 성령의 감화에 대항하여 마음을 굳게 하고 있다. 그가 계속 빛을 거절하면 그는 더욱 강력한 감화력도 영구적으로 감명을 주지 못하는 곳에 자신을 두게된다.

한 번 유혹에 굴복한 일이 있는 사람은 두 번째는 더 쉽사리 굴복하게 될 것이다. 죄를 반복할 때마다 그의 저항력은 감소되고, 그의 눈은 어두워서 죄에 대한 자각을 상실하게 된다. 뿌려진 방종의 씨마다 열매를 맺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수확을 막기 위하여 이적을 행하지 않으신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갈 6:7. 불경건한 강퍅함 즉 거룩한 진리에 대한 태만과 저항을 나타내는 자는 그들이 뿌린 것을 수확하고야 말 것이다.

그들이 원할 때에는, 언제든지 악한 길에서 돌이킬 수 있으며, 지금 은혜의 초청을 경시할지라도 거듭거듭 그 감화를 받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양심의 가책을 진정시키는 사람들은 그들이 멸망할 때까지 똑같은 길을 행할 것이다. 그들은 대반역자의 편에 그들의 모든 영향력을 바친 후에라도, 극도의 궁지에 빠져 있는 순간에 곧 위험이 그들을 에워싸는 때에, 그들의 지도자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죄악적인 방종의 생활을 경험하고 그것에 익숙하도록 길들여지고 단련된 성품이 그들에게 너무나 철저하게 형성되어 있으므로, 그들은 그 때에 예수님의 형상을 받아들일 수 없다. 그들의 길에 아무런 빛이 비치지 않았었더라면, 문제는 달라졌을 것이다. 하나님의 자비가 중재하여 그들에게 자비의 제의를 받아들일 수 있는 기회를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빛이 오랫동안 거절되고 멸시당한 후에는, 마침내 그 같은 기회는 영영 사라지게 된다.

 

유월절

“너희는 무교절을 지키라 이 날에 내가 너희 군대를 애굽땅에서 인도하여 내었음이니라 그러므로 너희가 영원한 규례를 삼아 이 날을 대대로 지킬찌니라” 출 12:17.

유월절은 기념적인 동시에 표상적인 것이다. 그것은 과거에 애굽에서 구원받은 사실을 가리킬 뿐 아니라 장차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백성을 죄의 속박에서 해방하시기로 되어 있는 더 큰 구원을 예표하는 것이다. 희생 제물로 바쳐진 새끼양은 우리들의 구원의 유일한 희망이신 “하나님의 어린양” 곧 그리스도를 나타낸다. 사도는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고전 5:7)고 말한다. 유월절 양을 죽이는 것만으로 충분치 못했다. 그 피를 문설주에 발라야 하였다. 그처럼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가 각 영혼에게 적용되어야 한다. 우리는 그분께서 온 세상을 위하여 죽으셨다는 사실 뿐 아니라 우리 각자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우리는 속죄의 희생의 공로를 우리 자신에게 적용시켜야 한다.

피를 뿌릴 때에 사용된 우슬초는 정결케 함의 상징이었으며 문둥병자와 죽은 사람을 만짐으로 부정하게 된 사람들을 정결케 하는 데 쓰였다. 시편기자의 기도 가운데도 우슬초의 의미가 나타나 있다.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시 51:7).

어린양은 그 뼈가 하나도 꺾이지 않고 온전하게 준비되어야 했던 것처럼 우리를 위하여 죽으실 하나님의 어린양의 뼈도 하나도 꺾이지 않아야 하였다(출 12:46; 요 19:36). 이처럼 그리스도의 희생의 완전함이 표현되었다. 그 고기는 먹어야 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용서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그분의 말씀을 통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분께로부터 영적 능력과 영양을 끊임없이 공급받아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다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말씀의 뜻을 설명하시면서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요 6:53, 54, 63)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아버지의 율법을 받아들이시고 당신의 생애에 그 원칙을 실천하셨으며, 그 율법의 정신을 나타내시고 마음속에 있는 그 자비로운 능력을 보이셨다. 요한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고 말하였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그분의 경험에 동참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소화시켜서 그것이 생활과 행동의 원동력이 되도록 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그분과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하나님의 속성을 반사해야 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의 살을 먹고 피를 마셔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 속에 생명이 없다. 그리스도의 정신과 사업이 그의 제자들의 정신과 사업이 되어야 한다.

어린양의 고기는 쓴나물과 함께 먹어야 했는데 이는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하던 때의 고통을 회상하기 위함이었다. 그와 같이 우리도 그리스도를 먹을 때에 우리의 죄를 통회해야 할 것이다. 무교병을 먹는 것 역시 깊은 뜻이 있었다. 이 절기 동안에는 그들의 집에 누룩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 유월절의 규례 가운데 명백하게 지시되어 있으며 유대인들은 그것을 엄격히 지켜야만 했다. 그와 같이 죄의 누룩도 그리스도로부터 생명과 영양을 받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서 일소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 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없는 떡으로 하자”(고전 5:7, 8)라고 편지하였다.

노예들은 자유를 얻기 전에, 이제 곧 성취될 큰 구원에 대한 그들의 믿음을 보여야 했다. 피의 표적이 그들의 집에 있어야 했으며, 그들은 자신과 가족들을 애굽 사람들과 분리시켜 그들의 집안에 불러모아야만 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들에게 주어진 지시 중에 한 가지라도 무시했거나, 자녀들을 애굽 사람들로부터 떼놓기를 게을리했거나, 어린양은 잡았지만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르지 않았거나, 그들의 집 밖으로 나간 사람이 있었다면 그들은 안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이 필요되는 모든 것을 다했다 하더라도, 정직하게 믿었을지라도, 그들의 성실함이 그들을 구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여호와의 지시를 따르지 않은 사람들은 모두 멸망시키는 천사의 손에 그들의 장자를 잃을 것이었다.
백성들은 이 명령을 순종함으로 그들의 믿음에 대한 증거를 나타내야 했다. 그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구원 얻기를 바라는 사람들은 모두 그들의 구원을 확보하기 위하여 그들 스스로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를 범죄의 형벌에서 속량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그리스도 뿐이시지만 우리가 할 일은 죄에서 순종으로 돌아서는 것이다. 사람은 행함이 아닌,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되어 있다. 그러나 그의 믿음은 행함으로 말미암아 나타나야 한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주셔서 죄를 위한 화목 제물로 죽게 하셨다. 그는 진리의 빛과 생명의 길을 나타내 보이셨고 의식들과 특권을 주셨다. 그러므로 인간은 이러한 구원의 방편들로 더불어 협력하여야 하고 하나님께서 준비해 놓으신 도움들을 감사함으로 사용해야 하며 하나님의 모든 요구들을 믿고 순종해야 한다.

 

바다 속에 난 길을 따라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에 의해서 바다 속에 난 길을 따라 나온 모세의 믿음과 찬양의 노래를 들어 보자. “이 때에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이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니 일렀으되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내 아비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리로다 여호와는 용사시니 여호와는 그의 이름이시로다 그가 바로의 병거와 그 군대를 바다에 던지시니 그 택한 장관이 홍해에 잠겼고 큰 물이 그들을 덮으니 그들이 돌처럼 깊음에 내렸도다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권능으로 영광을 나타내시니이다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원수를 부수시니이다주께서 주의 큰 위엄으로 주를 거스리는 자를 엎으시니이다 주께서 진노를 발하시니 그 진노가 그들을 초개 같이 사르니이다 주의 콧김에 물이 쌓이되 파도가 언덕 같이 일어서고 큰 물이 바다 가운데 엉기니이다 대적의 말이 내가 쫓아 미쳐 탈취물을 나누리라 내가 그들로 인하여 내 마음을 채우리라 내가 내 칼을 빼리니 내 손이 그들을 멸하리라 하였으나 주께서 주의 바람을 일으키시매 바다가 그들을 덮으니 그들이 흉용한 물에 납 같이 잠겼나이다 여호와여 신 중에 주와 같은 자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에 영광스러우며 찬송할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 누구니이까 주께서 오른손을 드신즉 땅이 그들을 삼켰나이다 주께서 그 구속하신 백성을 은혜로 인도하시되 주의 힘으로 그들을 주의 성결한 처소에 들어가게 하시나이다 열방이 듣고 떨며 블레셋 거민이 두려움에 잡히며 에돔 방백이 놀라고 모압영웅이 떨림에 잡히며 가나안 거민이 다 낙담하나이다 놀람과 두려움이 그들에게 미치매 주의 팔이 큼을 인하여 그들이 돌같이 고요하였사오되 여호와여 주의 백성이 통과하기까지 곧 주의 사신 백성이 통과하기까지였나이다 주께서 백성을 인도하사 그들을 주의 기업의 산에 심으시리이다 여호와여 이는 주의 처소를 삼으시려고 예비하신 것이라 주여 이것이 주의 손으로 세우신 성소로소이다 여호와의 다스리심이 영원무궁하시도다 하였더라” 출15:1~18.

“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오직 주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을 인하여 주의 이름에 돌리소서”(시 115:1). 이스라엘의 구원의 노래에 편만한 정신은 이와 같은 것이었다. 이 정신이야말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살아 있어야 할 정신이다. 우리의 영혼을 죄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하심으로써 하나님께서는 히브리 사람들이 홍해에서 얻은 구원보다 더 큰 구원을 우리를 위하여 이룩하셨다. 우리는 히브리 백성들같이 마음과 뜻과 목소리를 다하여 인생에게 행하신 그분의 기이한 일을 인하여 여호와를 찬양해야 한다.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늘 생각하며, 그분의 작은 선물에도 무관심하지 않는 사람들은 기쁨의 띠를 띠고 마음으로 여호와를 찬양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손에서 받는 매일의 축복들과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행복과 천국을 주시기 위하여 예수께서 죽으신 사실이 끊임없이 우리의 감사의 제목이 되어야 한다. 잃어버린 바 된 죄인인 우리를 자기 자신과 연결시키시고 자기의 귀중한 보배로 삼아주신 것은 하나님께서 얼마나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얼마나 큰 비할 데 없는 사랑을 주셨는지를 나타낸다. 우리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기 위하여 우리 구주께서 어떠한 희생을 치르셨는가! 우리는 위대한 구속의 경륜 속에서 우리 앞에 제공된 복된 소망을 인하여 하나님을 찬송해야 한다. 우리는 하늘의 유업과 풍부한 약속들을 인하여 그분을 찬송해야 한다. 예수께서 살아 계셔서 우리를 위하여 중보하시는 일을 인하여 그분을 찬송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섭리로 히브리인들을, 앞에는 바다가 있고 뒤에는 산이 있는 요새로 인도하신 것은 당신의 권능을 나타내시어 그들을 구원하시고 그들의 압박자들의 교만한 콧대를 현저하게 꺾으시기 위함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다른 방법으로 저들을 구원하실 수도 있으셨다. 그러나 그들의 믿음을 시험하시고 당신께 대한 그들의 신뢰심을 강하게 하시기 위하여 이 방법을 선택하셨다. 백성들은 지치고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러나 모세가 그들에게 전진하라고 명령했을 때 그들이 주저했더라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위하여 결코 길을 열지 않으셨을 것이었다. “저희가 홍해를 육지같이 건”넜던 것은 “믿음으로”(히 11:29)였다. 행진하여 바다 속으로 들어간 것은 그들이 모세를 통하여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들은 그들의 힘으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으므로, 그 때에 이스라엘의 전능하신 분께서는 그들이 걸어갈 길을 만드시기 위하여 바다를 가르셨다.

이 이야기가 가르치는 큰 교훈은 모든 시대를 위한 것이다. 가끔 그리스도인의 생애는 위험에 둘러싸이고, 의무를 수행하기 어려운 것처럼 보인다. 앞에는 절박한 파멸이 있고 뒤에는 속박이나 죽음이 있는 것처럼 생각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음성은 “앞으로 나가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우리는 비록 우리의 눈으로 어두움을 꿰뚫어 볼 수 없고, 우리의 발이 찬 물결을 느낄지라도, 이 명령을 순종해야 한다. 우리의 전진을 가로막는 장애물은 망설이고 의심하는 사람의 앞에서는 결단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모든 불확실한 그림자가 사라지고, 실패나 패배의 위험이 없어질 때까지 순종을 미루는 자들은 결코 순종하지 못할 것이다. 불신은, “장애물들이 제거되고 우리의 길을 똑똑히 볼 때까지 기다리자”고 속삭이나 신앙은 용기 있게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믿고, 앞으로 전진하라고 촉구한다.

애굽 사람들에게는 흑암의 장벽이 되었던 구름이 히브리 사람들에게 큰 빛줄기가 되어, 온 진영을 비춰 주고, 그들의 앞길을 밝혀 주었다. 그와 같이 하나님께서 섭리하시는 일들은 불신하는 자에게는 암흑과 절망을 가져다 주는 반면, 신뢰하는 영혼들에게는 한낮의 광명과 평화로 가득 차 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은 사막이나 바다를 통해 나 있는지 모르나 그 길은 안전한 길이다.

 

시내산에서의 율법과 복음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땅에서 나올 때부터 제 삼월 곧 그 때에 그들이 시내 광야에 이르니라 그들이 르비딤을 떠나 시내 광야에 이르러 그 광야에 장막을 치되 산 앞에 장막을 치니라 모세가 하나님 앞에 올라가니 여호와께서 산에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너는 이같이 야곱 족속에게 이르고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라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 모세가 와서 백성의 장로들을 불러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그 모든 말씀을 그 앞에 진술하니 백성이 일제히 응답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명하신 대로 우리가 다 행하리이다 모세가 백성의 말로 여호와께 회보하매” 출 19:1~8.

출애굽 백성의 역사를 살펴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러한 말을 발한 때가 다만 이 때만이 아니었다. 재삼 재사 그들은 자아 확신 가운데서 “여호와의 명하신 대로 우리가 다 행하리이다”고 하였다. 그 언약들에 대하여 의심을 나타낸 자들은 그들이 나타낸 그러한 반응이 적절한 것이었는지를 결정하고자 애썼다. 어떤 이들은 그보다 나은 반응을 나타낼 수 없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만일 주님께서 오늘 가장 가까운 산에 내려오셔서 그대에게 ‘이제부터는 너희들이 어떠한 죄도 더 이상 범치 않기를 내가 원하노라’는 기별을 주신다면 그대는 어떠한 반응을 나타내겠는가. “좋습니다, 주님이여, 내가 약속하노니 이후로는 내가 어떠한 실수도 범치 않겠습니다. 나는 더 이상 죄를 짓지 않기로 맹세합니다” 고 말한다면 그것이 훌륭한 대답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하나님께서는 시내산에서 당신의 백성에게 위대한 많은 것들을 나타내 보이셨다. 그는 저들에게 조직에 관한 원칙들과 건강생활에 관한 것들을 나타내 보이셨다. 곧 그들의 소유의 십분의 일이 하나님께 속한다고 보여 주셨다. 그들은 시간에 있어서도 교훈을 받았다. 곧 시간의 칠분의 일은 특별한 의미에 있어서 하나님의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저들에게 정직에 대하여, 맹세에 대하여, 참과 거짓 증거에 대하여도 가르치셨다. 그뿐 아니라 의복의 표준에 대하여도, 결혼과 이혼에 대하여도 가르침을 주셨다.

만일 주께서 오늘 친히 우리에게 내려오셔서 이러한 상세한 교훈을 주신다면 “좋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받아들이겠습니다.” , “주께서 명하신 대로 우리가 다 행하리이다.” 라고 대답하는 것보다 아마도 이사야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에 그가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6:5) 고 말했던 것처럼 말하는 것이 훨씬 쉬울지도 모르겠다.

“여호와의 명하신 대로 우리가 다 행하리이다.” 실상 그것은 너무나 큰 부담이었다. 자신을 바라볼 때에 우리에겐 그 말씀을 이행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그 말씀을 이행할 수 있는 가능한 방법이란 하나님께서 당신의 율법을 우리의 육비 안에 새기는 길 뿐이다. 우리에게는 힘이 없는 바 오직 위로부터의 도움만이 이를 이행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지 않는 어떤 능력을 가져야만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시내로 인도하시고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시고 그들에게 순종의 조건으로 큰 축복의 약속과 함께 당신의 율법을 주셨다. 백성들은 그들의 마음의 죄악의 실체와, 그리스도 없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실감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선뜻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다. 자신들의 의를 세울 수 있으리라는 느낌으로 그들은 “여호와의 모든 말씀들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고 선언하였다(출 24:7). 그들은 장엄한 위엄 중에 율법이 선포되는 것을 목격하였고 산 앞에서 무서워 떨었다. 그러나 불과 몇 주간이 지나기도 전에 그들은 하나님과 세운 언약을 깨뜨리고 새긴 우상에게 예배하기 위하여 절하였다. 그들은 그들이 깬 언약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총을 바랄 수 없었다. 그제서야 그들은 허락과 용서의 필요를 알고 아브라함과의 언약에서 나타났고 희생제도에 예표된 구주의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이제 그들은 믿음과 사랑으로 그들의 죄의 속박에서 구원하실 하나님께 매어달렸다. 이제 그들은 새 언약의 축복을 바로 평가할 준비가 되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가 “여호와의 모든 말씀들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고 말할 때에 우리는 그 언약에 대한 잘못된 관계에 들어감으로써 어려움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주께서 시내산으로부터 십계명을 말씀하신 후에 모세는 산으로 올라갔다. 그때에 날은 어두웠고 뇌성과 번개와 지진이 일어났다. 모세는 거의 6주 동안 그 산에 있게 되었다. 산 아래에서는 마음은 애굽에 남아 있으나 가나안으로 여행하고자 따라 나섰던 섞인 무리들이 애굽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온 진영에 반역의 정신이 감돌았다. 모세의 나약한 형 아론과 함께 금으로 송아지를 만든 백성들은 금송아지 주변을 돌며 춤을 추고 있었다.

아론은 이 백성들이 진정한 의미에서는 이 금송아지를 경배한 것이 아니라 이것은 다만 저들을 구원해낸 하나님을 표상하기 위하여 그렇게 행하는 것이라고 스스로 위로하면서 백성들과 함께 보조를 취했을 것이다. 우상에게 머리를 숙여 경배하는 자들은 오늘날에도 그럴듯한 구실을 갖다댄다. 그들은 ‘우리는 이 우상들을 경배하는 것이 아니라 참 하나님을 바라보기 위하여 이것들을 다만 매개물로 사용한다’고 말한다.

백성들이 금송아지 주변에서 춤을 출 때에 모세가 돌아왔다. 그는 하나님께서 새기신 돌비를 깨뜨려 버렸다. 그 다음 금송아지를 가루로 빻아 물에 쏟은 다음 저들에게 너희가 숭배하던 신을 들여마시라고 명하였다. 그리고 그는 회중 가운데 서서 주의 편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그의 오른편에 모이라고 지시하였다. 이 때 레위 족속중 모든 사람과 또 다른 족속들로부터 사람들이 나아와 그의 오른편에 서게 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모든 호소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들은 움직이지 않고 계속 그 자리에 남아서 “우리는 반역하겠습니다” 라고 표시하였다. 이때 모세는 자기편에 있는 자들에게 저들의 칼을 빼어 계속 반역하는 3천명의 형제와 이웃과 동료들을 죽이게 하였다. 어디에 자비가 있는가. 어찌하여 그들이 반역한 3천명을 애굽에 돌아가도록 허락할 수 없었단 말인가? 그들은 돌아가기를 원하였는데 그들에게 왜 선택권을 주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해 본다.

내가 이미 하나님에 대하여 의심하고 있다면 십자가의 이야기는 나에게 오히려 내 의심들을 굳게 할 여지만을 남기게 할 뿐이요 반면에 내가 하나님을 이미 사랑하고 신뢰하는 것을 배워 그분이야말로 참으로 지혜로우신 분이심을 내가 안다면 하나님께 대한 어떤 모순된 이야기를 들음에도 불구하고 그분을 계속 신뢰케 되는 것이다. 시내산의 배도도 그러하였다. 범죄를 신속히 형벌하지 않으면 다시 동일한 결과가 일어났을 것이다. 세상은 노아의 날처럼 부패하게 되었을 것이다. 만일 이 범죄자들이 처벌되지 않았더라면 가인의 생명을 그냥 둠으로 일어난 결과보다 더 큰 재난들이 연달아 일어났을 것이다.

 

중보 기도

그러나 모세는 시내산 꼭대기 어디에선가 40주야를 보내면서 하나님께 탄원하였다. 우리는 우리의 사랑하는 이웃이나 가족이나 친구나 신자나 또는 고집센 백성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탄원하면서 얼마의 시간을 보내 보았는가. 또 아직도 애굽에 마음을 두고 있는 백성들을 돌이키기 위하여 얼마나 시간들을 보내 보았는가. 우리는 한낮이나 혹은 하룻밤을 기도해 본 적이 있는가. 우리는 온종일 놀고 여행하며 이야기하곤 한다. 그러나 하루 종일 기도한다는 것은 무엇과 같은 것일까? 모세는 그리하였다. 모세는 자기를 미워하는 사람을 위하여서까지도 그리하였다. 출애굽기 32장은 모세가 하나님께 탄원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곧은 백성이라 그런즉 나대로 하게 하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로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 출 32:9~10.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모세야, 나는 이 백성에 대해서 진력이 나므로 이들을 다 멸해버리고 네게서 새로운 백성으로 새출발하련다.”고 말씀하셨다. 만일 하나님께서 오늘날 우리에게 이러한 제의를 해 온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아마도 어떤 이들은 “하나님, 옳습니다. 저들을 다 멸한 다음 나에게서 새로운 출발을 하십시오.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모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무릎을 꿇고 여호와께 탄원하기를 “하나님이여, 이 백성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그들이 큰 범죄를 하였나이다. 그럴지라도 그들을 용서해 주시옵소서. 주님이여, 만일 주님이 저들의 죄를 용서해 주시지 않는다면 내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워버려 주옵소서.” 라고 탄원하였다.

인간들은 때때로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그들의 생명을 바치는 일이 있으나 모세는 장래가 없는 보잘 것 없는 백성을 위하여 그의 영생을 포기하고자 하였다. 사람들은 그러한 사랑을 다만 한 곳에서만 얻게 되는데 그곳은 모세가 얻었던 장소이다. 반역한 무리들을 벌하도록 지시하신 그분께서는 회개한 백성을 위하여 탄원하시는 분이셨다. 오래전에 갈바리의 한 장소에서 예수께서는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24)고 말씀하셨다.

시내산에서는 율법만 받게 된 것이 아니요, 은혜도 같이 받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 백성들에게 성소를 통하여 복음을 나타내 보이셨다. 하나님께서는 복음과 율법을 분리해 주시지 않으셨다. 그분께서는 언제나 율법의 요구에 응할 수 있는 해결책으로서 성소를 통하여 복음을 제시하신다. 시내에서의 출애굽 백성들이, 그리고 현대의 이스라엘인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형태로 복음을 설명해 주고 있다.

2부 - 죄의 사슬에 묶여 있는 이스라엘


시내 광야에서부터 가나안 변경 가데스 바네아까지는 11일간의 거리였다. 그런데, 3일 여정 후에는 공공연한 불평들이 들렸다. 이러한 불평은 이스라엘과 완전히 연합하지 않은 섞인 무리에게서 시작되었는데 그들은 끊임없이 비난할 구실을 찾고 있었다.

그 불평자들은 행진 방향에 불만을 품고 모세도 역시 그들과 같이 구름의 지도를 따르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모세가 그들을 인도하는 길에 대한 결점을 끊임없이 찾고 있었다. 불만은 전염되었고 얼마 안 가서 온 진영에 퍼졌다.

애굽에서 갖고 온 음식물이 동이 나자, 하나님께서는 “만나”라고 불리우는 하늘의 음식을 공급해 주셨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단순하고 반복된 음식에 불평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애굽 시절에 종노릇하면서 얻어 먹던 고기 맛을 잊지 못해서 불평하였던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 중에 섞여 사는 무리가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가로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할꼬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이제는 우리 정력이 쇠약하되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도다” 민 11:4~6.

아마도 그들은 만나에 진절머리가 났던 모양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좀더 깊은 의미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만나뿐 아니라 고기도 쉽게 그들에게 공급하실 수 있으셨다. 그러나 그들의 건강과 행복을 위하여 그것을 제한하셨다. 그들이 애굽에서 먹었던 자극성 식물보다 그들에게 더 필요하고 적합한 음식을 공급하는 것이 그분의 목적이셨다. 왜곡된 식욕을 보다 건전한 상태로 회복시켜 그들로 하여금 태초에 인류를 위하여 준비된 음식 곧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주셨던 최고의 식품을 공급하고자 하셨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육식을 공급하지 않으신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다.

사단은 그들을 유혹하여 이런 제한을 불공평하고 잔인한 일처럼 생각하게 했다. 사단은 식욕의 방종이 호색을 낳게 하기 쉬운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들로 하여금 금지된 것을 갈망하게 하였다. 이 방법을 통하여 백성들이 더 쉽게 그의 지배하에 들어 갈 수 있었다. 질병과 불행의 창시자 사단은 최대의 성공을 거둘 수 있는 곳에서 사람들을 습격할 것이다. 하와를 유혹하여 금단의 열매를 먹게한 때로부터 사단은 식욕에 호소하는 유혹을 통하여 광범위하게 사람들을 죄로 몰아넣었다. 이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모든 도덕적 의무를 무시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준다. 이런 사람은 유혹이 엄습해 올 때 그것을 저항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지 않다.

육식은 범죄 이후에 특히 노아 홍수 직후에 이 땅에 먹을 식물이 부족하였기 때문에 허락되었다. 왜냐햐면 육식은 생명을 단축시키고 죽음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노아 홍수 이후 인간의 수명은 급격하게 줄어 들었다(노아 홍수 이전의 평균 수명은 900세 이상 이었음).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기를 탐하자 하나님께서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들이 그토록 원하는 것을 주실 수 밖에 없었다. “바람이 여호와에게로서 나와 바다에서부터 메추라기를 몰아 진 곁 이편 저편 곧 진 사방으로 각기 하룻길 되는 지면 위 두 규빗쯤에 내리게 한지라” 민 11:31.

어떤 사람들은 이 성경절을 지적하면서 그리스도인은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 주신 건강 식생활법에 제한받지 않고 어떤 종류의 육류라도 먹을 수 있다고 말하지만, 메추라기는 성경이 정한 깨끗한 육류이다. 그러므로 이 문제는 그리스도인이 부정한 고기를 먹을 수 있는가에 관한 것이 아니다. “고기가 아직 잇사이에 있어 씹히기 전에 여호와께서 백성에게 대하여 진노하사 심히 큰 재앙으로 치셨으므로 그곳 이름을 기브롯 핫다아와라 칭하였으니 탐욕을 낸 백성을 거기 장사함이었더라” 민 11:33, 34.

무엇이 문제가 되었는가? 고기를 먹고 안 먹고가 아니라 그들의 문제는 반역이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교훈과 지시를 주시면서 어떤 길을 가라고 분명히 말씀하실 때, 만일 내가 발길을 돌이키면서 “아니오, 나는 그 길을 가는데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하자. 그런 경우, 나는 모든 죄가 가진 요소를 다 나타낸 것이다. 그들이 메추라기를 먹었느냐 먹지 않았느냐는 것은 전혀 문제가 아니었다. 심판은 그들이 하나님께 반역한 결과로 당하였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서 그들로 순결하고 거룩하고 행복한 백성이 되도록 하시고자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다. 이 목적을 달성하시기 위하여 그분은 그들 자신들의 행복과 그들의 후손들의 행복을 위하여 그들로 훈련을 받게 하셨다. 만일 그들이 그분의 현명하신 제한에 복종하여 기꺼이 그들의 식욕을 억제했더라면 그들은 허약과 질병을 모르고 지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후손들은 육체적·정신적 힘을 아울러 가졌을 것이며 그들은 진리와 의무에 대해 분명하게 인식하고 예민한 분별력과 확실한 판단력을 가졌을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의 제한과 요구에 복종하기를 원치 않았으므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분께서 그들이 도달하기를 원하셨던 높은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고 그분께서 그들에게 내려 주시려던 축복도 받지 못했다. 시편 기자는 “저희가 저희 탐욕대로 식물을 구하여 그 심중에 하나님을 시험하였으며 그뿐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여 말하기를 하나님이 광야에서 능히 식탁을 준비하시랴 저가 반석을 쳐서 물을 내시매 시내가 넘쳤거니와 또 능히 떡을 주시며 그 백성을 위하여 고기를 예비하시랴 하였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듣고 노하”(시78:18~21)셨다고 말했다.

홍해에서 시내 광야까지 여행하는 동안에 불평과 소동이 자주 일어났으나 하나님께서 그들의 무지와 무분별력을 동정하시어 그 때에는 그들의 죄에 대하여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셨다. 그러나 그 후에 그분은 호렙산에서 자신을 그들에게 나타내셨고, 그들은 하나님의 위엄과 능력과 긍휼을 목격하였으므로 이제 그들은 큰 빛을 받았다. 그래서 그들의 불신과 불만은 더 큰 죄를 초래하였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여호와를 그들의 왕으로 받아들이고 그분의 권위에 순종할 것 역이었으므로 이스라엘을 무정부주의와 멸망에서 보존하기 위해서는 이런 행동은 신속하고 분명하게 처벌을 받아야 했다. 이렇듯 모르고 짓는 죄와 알고도 짓는 죄에는 큰 차이가 있다.

 

약속의 땅 변경에서


히브리인들이 호렙산을 떠난 지 11일 만에 약속의 땅 변경에서 멀지 않은 바란 광야에 있는 가데스에 진을 쳤다. 여기서 백성들은 정탐꾼을 보내어 그 땅을 탐지하자고 제의하였다. 모세는 곧 이 문제를 여호와 앞에 제출하여 하나님의 허락을 받았고 이 일을 위하여 각 지파에서 족장 한 사람씩을 선택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모세는 지시받은 대로 사람들을 선택하고, 그들에게 그 땅에 가서 그 위치와 자연의 이점과 거기 거하는 백성들의 강약과 다소를 살피되 그 땅의 토질과 비옥도를 살피고 그 땅의 열매를 가져오라고 명하였다.

그들은 남방 변경으로 들어가 북방 끝에 이르기까지 온 땅을 정탐하고 40일 후에 돌아왔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큰 희망을 품고 열렬한 기대를 가지고 그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정탐꾼이 돌아왔다는 소식이 이 지파에서 저 지파로 퍼져나갔고, 그들은 기쁨으로 만세를 불렀다. 백성들은 모험적인 임무를 수행하고 무사히 돌아온 사자들을 만나려고 급히 달려나갔다. 정탐꾼들은 견본이 될만한 과일을 가져와 그 땅의 비옥함을 보여주었다. 그 때는 포도가 익는 계절이었으므로, 그들은 두 사람이 메야 운반할 수 있을 만큼 큰 포도송이를 가져왔다. 그들은 또 그 지방에 많이 나는 무화과와 석류를 가져 왔다.

백성들은 그처럼 좋은 땅을 소유할 수 있게 될 것이므로 크게 기뻐하며 그들이 모세에게 보고하는 말을 한마디도 놓치지 않으려고 열심히 들었다. 정탐꾼들은 “당신이 우리를 보낸 땅에 간즉 과연 젖과 꿀이 그 땅에 흐르고 이것은 그 땅의 실과니이다”(민 13:17~33, 14장)라는 말로 보고하기 시작했다. 백성들은 열광적으로 환영하면서, 여호와의 음성을 순종하여, 곧 올라가 그 땅을 점령하기를 간절히 원했다. 그러나 그 땅의 아름다움과 비옥함을 묘사한 후 두 정탐꾼을 제외하고는 모두 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을 정복하는 길에 놓인 고난과 위험을 과장하여 말했다. 그들은 그 땅의 각 부분에 산재하고 있는 강력한 민족들을 열거하면서 자기들이 그들을 정복하기는 전혀 불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들은 또 그 곳에서 아낙 자손들인 거인들을 보았다고 보고하고 그들이 그 땅을 소유하려고 생각하는 것은 무모한 짓이라고 말했다.

이제 사태는 변했다. 정탐꾼들이 사단의 충동을 받아 절망에 빠진 자신들의 불신의 마음에서 나오는 감상을 말할 때에, 백성들의 희망과 용기는 겁에 질려 절망으로 변했다. 그들의 불신은 회중에게 어두운 그림자를 던지고 그처럼 자주 나타났던 강한 하나님의 능력을 잊어버리게 했다. 그들은 그들을 여기까지 인도해 내신 그분께서 그 땅을 그들에게 분명히 주시리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바다를 갈라 길을 내시고, 추격하는 바로의 군대를 멸하시면서, 그들을 어떻게 압제자로부터 해방시키셨는지를 돌이켜 생각해 보지 않았다. 백성들은 하나님에 대하여 전혀 생각지 않았다.

그들은 불신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했고, 지금까지 그들을 안전하게 인도하신 손길을 신뢰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그들은 과거에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던 그들의 잘못을 다시 범했다. 그들은 “자, 이것이 우리들의 소망의 끝이며, 이것이 바로 우리가 소유하려고 애굽에서 여행하여 온 땅이로구나”고 말하였다. 그들은 그들의 지도자들이 백성을 기만하고 이스라엘에게 어려움을 준다고 비난하였다.

백성들은 실망과 낙담으로 자포자기하였다. 고민의 통곡 소리가 어지러운 불평의 소리와 뒤섞여 퍼져나왔다. 갈렙은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알고, 하나님의 말씀을 옹호하고자 담대히 일어서서, 불충실한 동료들의 악한 영향력을 물리치기 위해 전력을 다하였다. 잠시 동안 백성들은 아름다운 땅에 대하여 희망과 용기를 주는 그의 말을 듣느라고 잠잠하였다. 갈렙은 이미 보고된 것을 부인하지 않았다. 성벽은 높았고 가나안 사람들은 강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땅을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셨다. 갈렙은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고 격려하였다.

그러나 열 정탐꾼들은 그의 말을 가로막고 장애물에 대하여 처음보다 더 어둡게 묘사하였다. 그들은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또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를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고 말했다.

이 사람들은 그릇된 길로 접어들어 갈렙과 여호수아는 물론, 모세와 하나님께 대하여, 고집스럽게 반대하였다. 사태의 진전은 그들의 마음을 더욱 굳게 할 뿐이었다. 그들은 가나안을 점령하려는 모든 노력을 좌절시키려 했다. 그들은 그들의 유해한 영향력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사실을 왜곡했다. 그 땅은 “거민을 삼키는” 땅이라고 그들은 말했다. 그것은 불길한 보고일 뿐 아니라 허위 보고였다. 그것은 그 자체에 모순이 있었다. 정탐꾼들은 처음에 그 땅은 비옥하고 번영하는 땅이요, 그 곳 백성들은 키가 크다고 보고했는데, 만일 그 땅이 “거민을 삼키는” 땅이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그 곳 기후가 건강을 해친다면 위에 말한 모든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들의 마음을 불신에 굴복시킬 때에는 그들은 그들 자신을 사단의 지배 아래 두게 되며 사단이 그들을 어디까지 끌고 갈지는 아무도 말할 수 없다.

“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밤새도록 백성이 곡하였더라.” 폭동과 공공연한 반항이 신속히 뒤따라 일어났다. 사단이 완전히 지배했기 때문에 백성들은 이성을 잃은 것같이 보였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악한 말을 듣고 계신다는 것과 구름기둥 속에 싸인 그분의 앞에 있는 천사가 그들이 폭발시키는 무서운 분노를 주목하고 계신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모세와 아론을 저주하였다. 그들은 비통 중에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하고 부르짖었다. 그리고 그들의 감정은 하나님을 대항하여 일어났다.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망하게 하려 하는고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이에 서로 말하되 우리가 한 장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 그리하여 그들은 차지할 수 없는 땅을 약속함으로 그들을 기만하였다고 모세 뿐 아니라 하나님도 비난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강하신 팔이 그들을 구원해낸 그 고생과 속박의 땅으로 되돌아가기 위하여 그들을 인도할 장관을 임명하기까지 하였다.

굴욕과 고민 중에, “모세와 아론이 이스라엘 온 회중 앞에서 엎드”렸다. 갈렙과 여호수아는 백성들의 소란을 진정시키고자 시도했다. 그들은 비통과 의분의 표시로 옷을 찢고, 백성들 가운데로 급히 달려나갔다. 그들의 쟁쟁한 음성은 울음소리와 반역적 통탄으로 야단 법석하는 소리를 압도하고 들리었다.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가나안 사람들은 그들의 죄악의 한도를 채웠으므로 여호와께서는 더 이상 그들을 참으실 수 없으셨다. 여호와의 보호가 제거되었으므로, 그들은 쉽게 항복할 것이다. 하나님의 언약에 의하여 그 땅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증되어 있었다. 그러나 불충실한 정탐꾼의 허위 보고가 수용되고, 그것 때문에 온 회중은 기만을 당했다. 반역자들의 노력이 효과를 발휘한 것이다. 그 때의 불신을 볼 때에는 두 사람만 불길한 보고를 하고 열 사람이 모두 여호와의 이름으로 그 땅을 점령하자고 격려했을지라도, 그들은 역시 그들의 사악한 불신 때문에 열 사람의 충고보다 두 사람의 말을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열 명이 반역의 편에 서 있는 반면, 두 사람만이 정의를 옹호하고 있었다.

불충실한 정탐꾼들은 큰 소리로 갈렙과 여호수아를 중상하고, 그들을 돌로 치자고 소리를 쳤다. 미친 듯한 폭도는 저 충성스러운 사람들을 죽이려고 던질 것을 잡았다. 그들이 미친듯이 앞으로 달려나갈 때에 갑자기 그들의 손에서는 돌이 떨어지고, 무서운 침묵에 압도되어서 그들은 공포에 떨었다.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그들의 살인 계획을 막으셨다. 타오르는 빛과 같은 그분의 임재의 영광이 성막을 비췄다. 백성들은 모두 여호와의 징조를 바라보았다. 그들보다 더 강하신 분이 나타나셨고 아무도 감히 그들의 반항을 계속하지 못하였다. 불길한 보고를 가져온 정탐꾼들은 공포에 움츠러들어 숨을 죽이고 그들의 장막을 찾아갔다.

이제 모세는 일어나 성막으로 들어갔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내가 전염병으로 저들을 쳐서 멸하고 너로 그들보다 크고 강한 나라를 이루게 하리라”고 선언하셨다. 그러나 모세는 그의 백성을 위하여 탄원하였다. 모세는 백성들을 멸하고 그를 더 강한 나라로 만드시겠다는 제안에 동의할 수 없었다. 모세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호소하여 말하였다. “구하옵나니 주의 인자의 광대하심을 따라 이 백성의 죄악을 사하시되 애굽에서부터 지금까지 이 백성을 사하신 것같이 사하옵소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그 즉석에서 멸망시키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으나, 그들의 불신과 비겁함 때문에 그분은 그들의 원수를 정복하기 위하여 능력을 나타내실 수 없으셨다. 그런고로 그분은 당신의 긍휼하심으로 그들에게 단 하나의 안전한 길인 홍해쪽으로 되돌아가라고 명령하셨다.

백성들은 모반하여, “우리가… 이 광야에서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하고 부르짖었었다. 이제 그 소원이 허락되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너희 시체가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라 너희 이십세 이상으로 계수함을 받은 자… 전부가… 너희가 사로잡히겠다고 말하던 너희의 유아들은 내가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들은 너희가 싫어하던 땅을 보리”라. 그리고 갈렙에 대하여 “내 종 갈렙은 그 믿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좇았은즉 그의 땅으로 내가 그를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 자손이 그 땅을 차지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정탐꾼들이 40일간을 그 여행에 소비한 것처럼, 이스라엘 무리는 40년 동안 광야에서 방황하게 될 것이었다.

모세가 하나님의 결정을 백성들에게 전달했을 때에, 그들의 분노는 비탄으로 변했다. 그들은 그들이 받을 형벌이 공정함을 알고 있었다. 불충실한 열 정탐꾼은 하나님께서 내리신 전염병에 걸려 온 이스라엘 회중의 목전에서 죽었고 백성들은 그들의 운명에서 자기들의 파멸을 읽을 수 있었다.

 

가짜 회개


그들은 지금에야 그들의 죄된 행위를 성실히 회개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들은 저들의 망은과 불순종을 슬퍼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들의 악한 행동에 따르는 결과를 슬퍼한 것 뿐이었다. 여호와께서 당신의 명령을 철회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았을 때에 그들의 고집은 다시 머리를 쳐들었으며, 그들은 광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선언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원수의 땅에서 물러가도록 명령하심으로, 그들의 표면적 복종을 시험하시고, 그것이 진정한 복종이 아님을 입증하셨다. 그들은 무분별한 감정의 지배를 받아 하나님을 순종하라고 간청한 정탐꾼을 죽이려 함으로 큰 죄에 빠졌던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결과적으로 그들에게 재난을 가져올 무서운 과오를 범했다는 것을 알고 두려워할 뿐이었다. 그들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으며, 그들에게는 동일한 폭동을 일으킬 구실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모세가 하나님의 권위를 받들어 그들에게 다시 광야로 돌아가라고 명했을 때에, 이러한 반역이 다시 일어났다. 이스라엘 백성이 40년 동안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다는 하나님의 명령은 모세와 아론은 물론 갈렙과 여호수아에게도 참으로 쓰라린 실망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한 마디의 불평도 없이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처사를 불평하고 애굽으로 돌아가겠다고 하던 사람들은 그들이 멸시하던 축복들이 저들로부터 거두워졌을 때에 울며 크게 슬퍼하였다. 그들은 까닭없이 불평하였으니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울 이유를 주셨다. 만일 그들이 자기 앞에 그대로 놓여 있는 그들의 죄를 슬퍼했더라면, 이런 선고는 내리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재앙에 대하여 슬퍼하고 그들의 슬픔은 회개가 아니었으므로 그들에게 내린 선고를 역전시킬 수 없었다.

그들은 그 밤을 통곡으로 보냈으나 아침이 되었을 때 한 가지 희망을 갖게 되었다. 그들은 그들의 비겁한 행동을 속죄하기로 결심했다. 하나님께서 올라가 그 땅을 취하라고 명령하셨을 때에 그들은 그 명령을 거절했고, 이제 그분이 퇴각하라고 그들에게 지시하였을 때에 그들은 전과 동일하게 반역적이었다. 그들은 그 땅을 점령하고 소유하기로 결심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사업을 받으시고, 그들에 대한 그분의 목적을 변경하실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이 정하신 때에, 그 땅에 들어가는 것이 그들의 특권이요, 의무가 되게 하셨다. 그러나 그들의 고의적 태만으로 그 허락은 철회되었다. 사단은 그들을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함으로 자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그리고 사단은 이제 하나님의 금령이 내린 지금에 와서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요구하셨을 때에 그들이 거절한 바로 그 일을 하도록 그들에게 독촉하였다. 그리하여 대기만자는 그들로 두 번째 반역을 하도록 인도함으로 승리를 얻었다. 그들은 처음에 가나안을 점령하는 데 그들의 노력과 함께 하실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그 사업을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 자신들의 힘으로 성취하고자 대담하게 나섰다. 그들은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사오니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대로 우리가 올라가서 싸우리이다”(신 1:41)고 외쳤다. 그들은 범죄로 인하여 그처럼 몹시 눈이 어두웠다. “여호와께서는 올라가서 싸우”라고 그들에게 결코 명하지 않으셨다. 그분의 의도는 그들이 전쟁으로 그 땅을 얻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순종함으로 얻는 것이었다.

백성들은 마음의 변화가 없으면서도 정탐꾼의 보고를 듣고 반역한 그들의 죄와 어리석음을 고백하였다. 그들은 그 때에야 그들이 그처럼 경솔하게 내던졌던 축복의 가치를 알았다. 그들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것은 그들의 불신 때문이라고 고백하였다. 그들은 “우리가… 범죄하였”다고 말하고 잘못은 하나님의 편에 있는 것이 아니요, 그들에 대한 그분의 약속들을 성취하지 못한 데 대하여 하나님을 그처럼 나쁘게 비난한 그들 자신에게 있다고 고백하였다. 그들의 고백은 비록 참된 회개에서 우러나지 않았을지라도, 그것은 그들을 취급하시는 하나님의 처사의 공정성을 입증하였다.

주께서는 지금도 사람들로 하여금 당신의 공의를 인정하게 하심으로 그와 동일한 방법으로 당신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시기 위하여 일하신다. 그분을 사랑한다고 공언하는 사람들이 그분의 섭리에 대하여 불평하고, 그분의 약속을 멸시하고, 유혹에 빠져 악한 천사들과 연합하여 하나님의 목적을 깨뜨리고자 할 때에 여호와께서는 때때로 이런 사람들이 비록 진정으로 회개하지 않았을지라도, 그들의 죄를 깨닫고 그들의 행위의 악함과 그들을 다루시는 그분의 공의와 선하심을 부득이 시인하도록 환경들을 지배하신다. 하나님께서는 흑암의 역사가 드러나도록 하기 위하여 당신의 사업의 반작용을 그냥 두신다. 악한 길로 지체없이 나가는 정신은 비록 근본적으로 변화되지 않았을지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옹호하고 반대와 오해를 받아왔던 그분의 충성스러운 책망자들을 의롭다고 하시기 위하여 자복하도록 하신다. 하나님의 진노가 최후로 쏟아질 때에도 그러할 것이다.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 여 뭇 사람을 심판하”실 때에 “모든 경건치 않은 자의 경건치 않게 행한 모든 경건치 않은 일… 을 정죄하”(유 14, 15)실 것이다. 죄인들은 모두 그분의 정죄가 공정함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침을 당한 반석


“회중이 물이 없으므로 모여서 모세와 아론을 공박하니라 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말하여 가로되 우리 형제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을 때에 우리도 죽었더면 좋을뻔 하였도다” 민 20:2, 3. 약속의 땅의 경계에 서 있는 사람으로서 이런 생각을 갖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그것은 40년 전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실패했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믿음이 없다는 것을 나타내는 증거가 된다.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총회를 이 광야로 인도하여 올려서 우리와 우리 짐승으로 다 여기서 죽게 하느냐 우리를 애굽에서 나오게 하여 이 악한 곳으로 인도 하였느냐 이곳에는 파종할 곳이 없고 무화과도 없고 포도도 없고 석류도 없고 마실 물도 없도다” 민 20:4, 5.

그대가 그 이야기를 연구해 보면 물이 흘러나오지 않게 된 것은 백성들의 순례생활이 바야흐로 끝날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가장 큰 표적 중 하나임을 발견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마른 땅과 반석에서 물을 공급해 주셨다. 그 일은 그들이 시내산에 도착하기 전 르비딤에서 시작하여 광야여행 동안 내내 계속되었다. 그것은 르비딤에 있던 반석과 같은 것은 아니었지마는 백성들에게 물이 가장 필요한 곳에서 솟아 나왔다. 그들이 이동해 가서 장막을 치는 곳은 어디에서나, 사막의 모래에서 혹은 반석에서 물이 솟아나서 그들이 그곳을 떠날 때까지 그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그 일이 그친 것은 그들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때가 거의 다 되었다는 것과 그 땅에는 물이 많이 있으므로 그런 이적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 주는 강력한 증거가 되어야 했다. 불행히도, 그것은 사람들이 사용하는 안경에 따라 달라질 수 밖에 없었다. 약속의 땅에 가까워졌음을 알려주는 증거를 믿음의 안경을 사용하여 보느냐, 혹은 불신의 안경으로 보느냐에 따라 상황이 달라졌던 것이다.

어떤 사람은 주변에서 일어나는 놀라운 사건에 관한 소식을 듣고 겁을 집어먹고 두려워 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징조를 알고서는 머리를 들고 즐거워 한다. 그대는 그대의 반응에 의하여 어느 편에 속해 있는지를 스스로 진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대는 겁을 집어 먹을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감사합니다, 주님. 거의 본향에 이르렀습니다”고 말할 것인가?

사람들은 물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불평하고 원망했다. 그들은 징조가 어떠하든지 간에 거기서 적극적인 것을 보고자 하는 태도를 전혀 갖지 않았다. 모세와 아론은 회중들을 떠나서 성막 문 있는데로 갔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지팡이를 가지고 네 형 아론과 함께 회중을 모으고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는 반석에게 명하여 물을 내라 하라 네가 그 반석으로 물을 내게 하여 회중과 그들의 짐승에게 마시울찌니라 모세가 그 명대로 여호와의 앞에서 지팡이를 취하니라 모세와 아론이 총회를 그 반석 앞에 모으고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패역한 너희여 들으라” 민20:7~10. 지상에서 가장 겸손한 사람으로 알려져 온 사람에게서 이상한 말이 나왔다. 모세는 성질이 급한 사람이었다. 그는 애굽 사람의 생명을 빼았고 바로에게서 피해 갔던 것이다. 그는 40년간의 목자생활을 통하여 조급한 성격을 죽이고 겸손을 배웠다. 그러나 그는 순간적으로 하나님을 붙드는 손을 놓쳐 버렸다. 그리하여 그의 본성적인 조급성이 다시 표면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패역한 너희여 들으라.” 그들이 패역하였던가? 물론 그러했다. 그러나 그는 사실에 속한 것을 그릇된 정신으로 말해 버렸다. 사실을 말해 주는 것과 그릇된 정신으로 그것을 말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이다. 우리들 중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우리 가족이나 우리 자녀들에게 꼭 같은 실수를 범해 왔는가? “패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우리가”라고 표현된 말에 유의해 보라. “그 손을 들어 그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매 물이 많이 솟아나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 (민 20:10, 11)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게 응답해 주신 기도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과 반대되는 기도를 응답해 주시는 또 하나의 다른 경험을 목격하게 된다. 먼저, 그분께서는 백성들이 반석에서 다시금 물을 얻지 못하게 하고자 바라셨다. 그러므로 그분께서는 물의 공급을 끊어버리셨다. 두번째, 그분께서는 모세가 사용한 그런 방법으로 물이 나오게 하는 것이 그분의 뜻은 아니었다. 그러나 여전히 물이 흘러나왔다. 물은 모세 때문에 나온 것이 아니라, 모세가 사용한 그릇된 방법에도 불구하고 나왔다. 그릇된 방법으로 하나님께 나가는 자도 때로는 순간적으로 옳은 결과를 얻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후에도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고 옹호하기 위하여 그릇된 방법을 옳은 결과로 보답해 주실 때가 있다.

 

쳐다봄으로 살라


호르산을 떠난 지 얼마 후 이스라엘 사람들은 가나안의 한 왕 아랏으로 더불어 교전하여 패배하였으나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의 도우심을 열렬히 간구했을 때에 하나님의 도우심이 그들에게 임하여 원수들은 대패하였다. 그러나 이 승리는 감사의 마음을 고취시키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할 필요를 느끼게 하는 대신에 그들을 자만스럽고 자부심이 강하게 만들었다. 곧 그들은 불평하던 옛 습관에 빠지고 말았다. 근 40년 전에 정탐꾼의 보고를 듣고 반역한 후에 즉시 이스라엘 군대가 가나안으로 진군하도록 허락을 얻지 못한 일을 그들은 지금 불만스럽게 생각하였다. 그들은 광야에서 오랫동안 체류한 것은 지체라고 말하면서 그들이 그 때에도 지금처럼 원수들을 쉽게 정복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들이 남쪽으로 여행을 계속할 때에 그들의 길은 수목의 그늘이 없는 무더운 사막의 골짜기를 통해 뻗어 있었다. 그 길은 멀고 어려운 것처럼 보였으며 그들은 피곤과 갈증으로 심히 고통을 받았다. 또 다시 그들은 믿음과 인내의 시험을 견디지 못했다. 그들은 계속적으로 저희가 경험한 어두운 면에 집착함으로 점점 하나님과 멀어지고 말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만의 정신에 빠져서 축복에서까지도 결점을 찾으려고 하였다.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올려서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고 이 곳에는 식물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박한 식물을 싫어하노라”민 21:5.

모세는 백성들 앞에서 그들의 죄를 충실히 제시하였다.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간조한 땅”(신 8:15)에서 그들을 보호한 것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이었다. 그들이 여행하는 동안 하루도 하나님의 은혜로운 이적으로 보호함을 받지 않은 날이 없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모든 길에서 그들은 갈증을 풀어 주는 물을 발견하였다. 하늘에서 내린 떡은 배고플 때에 그들의 허기를 채워 주었고 낮에는 구름기둥의 그늘과 밤에는 불기둥 아래서 평화와 안전을 얻었다. 그들이 암석의 험준한 산길을 오를 때나 광야의 울퉁불퉁한 길을 헤치고 나아갈 때에 천사들은 그들을 위해 봉사하였다. 그들이 고난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온 대열 중에 약한 자가 한 명도 없었다. 그들의 오랜 여행에서도 그들의 발이 부르트지 않았고 옷이 해어지지도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앞길에 삼림과 사막에 있는 맹수와 독사류를 제거하셨다. 그분의 이 모든 사랑의 증거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이 계속 불평한다면 여호와께서는 그들이 당신의 은혜스러운 보호를 감사하고 회개하고 겸손히 당신께로 돌아올 때까지 당신의 보호를 거두실 것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함을 받아 왔기 때문에 끊임없이 그들을 둘러싼 무수한 위험을 깨닫지 못하였다. 그들은 망언과 불신에 빠진 나머지 죽게 되었다고 생각했으며 여호와께서는 이제 그들에게 죽음이 오도록 허락하셨다. 광야에 불뱀이라 불리는 독사가 있었는데 이 독사에게 물리면 극렬한 염증을 일으켜 신속하게 죽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 하나님의 보호하시는 손길이 이스라엘을 떠났을 때에 수많은 백성들이 이 독사에게 물렸다.

그리하여 온 진영에 공포와 혼란이 일어났다. 거의 모든 장막에 죽어가는 자와 죽은 자들이 있었다. 때때로 찢어지는 듯한 비명 소리가 밤의 적막을 깨뜨렸는데 이는 새로 뱀에게 물린자가 있음을 알리는 것이었다. 고통을 당하고 있는 자들을 도와주거나, 아직 물리지 않은 자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고통스러운 염려와 노력으로 모두 분주하였다. 이제는 한 마디의 불평도 그들의 입술에서 흘러나오지 않았다. 현재의 고통에 비교하면 전에 당한 어려움과 시련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였다.

백성들은 이제 하나님 앞에 스스로 겸비하였다. 그들은 모세에게 나아와 죄를 고백하고 탄원하였다. 그들은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하므로 범죄하였”(민 21:7)다고 말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들은 모세를 그들의 가장 큰 원수이며 그들의 모든 고통과 재난의 원인이라고 비난하였었다. 그러나 그런 비난을 말할 때에라도 그들은 그 비난이 잘못임을 알았다.

그리고 참으로 어려움이 닥쳐오자마자 그들은 그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중재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 모세에게 달려갔다.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민 21:7)라고 그들은 부르짖었다. 모세는 하나님께로부터 산 뱀과 비슷하게 구리로 뱀을 만들어 백성 중에 높이 세워 두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리고 물린 자들이 그것을 바라보면 구원을 받을 것이었다. 이 기쁜 소식이 온 진영에 전해졌다. 이 때에 많은 사람이 이미 죽었다. 모세가 장대에 구리뱀을 달아 올렸을 때에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바라보기만 하면 낫는다는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같은 불신으로 말미암아 멸망을 당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만드신 구원의 길에 대한 믿음을 가진 자들도 많이 있었다. 부모와 형제와 자매들은 고통 가운데서 죽어가는 친지들의 희미한 눈망울들을 구리뱀에게로 향하도록 도와주려고 몹시 노력하였다. 비록 힘없이 죽어가는 자들일지라도 한 번 쳐다보기만 하면 완전히 회복되었다.

백성들은 구리로 만든 뱀에게는 치료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치료하는 능력은 하나님께로부터만 오는 것이다. 이 단순한 방법으로 백성들은 그같은 고통이 그들의 죄로 인하여 이르러 왔음을 깨닫게 되었다. 또한 그들은 하나님을 순종하는 동안에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보증을 받았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호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구리뱀을 든 것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중대한 교훈을 가르치시기 위함이었다. 그들은 치명적인 독소의 영향으로부터 자신들을 구원할 수 없었다. 하나님만이 그들을 치유하실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구원의 길에 대한 그들의 믿음을 나타내야 한다는 요구를 받았다. 그들은 살기 위하여 바라보아야 했다. 하나님께 가납될 수 있는 것은 그들의 믿음이었고, 그 뱀을 바라봄으로 그들의 믿음을 나타냈다. 뱀 그 자체에는 어떤 효험도 없었지만, 그것은 장차 십자가에 달리실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상징하였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공로를 믿어야 할 필요성이 그들의 마음에 깨우쳐졌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제물을 가져왔고 그렇게 함으로 그들의 죄를 위한 충분한 속죄가 이루어진 줄 알았다. 그들은 이 제물들이 예표하는 장차 오실 구속주를 의지하지 않았다. 여호와께서는 이제 그들이 드리는 희생 제물 자체는 구리뱀처럼 아무 능력도 없고 효력도 없지만 구리뱀과 같이 그것은 그들의 마음을 크신 속죄 제물이신 그리스도께로 인도해야 할 것임을 그들에게 가르치고자 하셨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4, 15. 이 세상에 살았던 자들은 모두 다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계 12:9) 자의 치명적인 독아(毒牙)에 물렸다. 죄의 치명적인 결과는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방책에 의해서만 제거될 수 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높이 쳐들린 뱀을 쳐다봄으로 구원받았다. 쳐다보는 것은 믿는다는 의미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들의 회복을 위하여 준비된 방법을 의지하여 생명을 구원했다. 그처럼 오늘날의 죄인들도 그리스도를 쳐다봄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 즉 죄인들은 속죄의 희생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용서를 받는다. 활력이 없고 생명이 없는 상징물과는 달리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회개하는 죄인을 고칠 수 있는 능력과 효능을 가지고 계신다.

비록 죄인들은 자기 스스로 구원함을 받을 수 없지만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해야 할 일이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요 6:37)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께 나아가야 한다. 우리가 죄를 회개할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주시고 용서해 주실 것을 믿어야 한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나 믿음을 행사하는 주체는 우리 자신이다. 믿음은 영혼이 하나님께서 제공하시는 은혜와 자비를 붙잡는 손이다.
그리스도의 의 외에는 아무것도 우리에게 은혜스러운 언약의 축복 중 단 한 가지도 받을 권리를 주지 못한다. 이 축복을 얻으려고 오랫동안 갈망하고 노력한 자들이 많으나 받지 못함은 그들이 스스로 이 축복을 받기에 합당한 무슨 일을 해보려는 생각을 품은 까닭이었다. 그들은 시선을 자신에게서 돌리고 예수를 모든 것을 충족시키시는 구주로 믿지 않았다. 우리는 우리의 공로가 우리를 구원하리라고 생각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만이 우리의 유일한 구원의 소망이시다.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 4:12.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죄를 용서하시는 구주로써 예수의 공로를 의지할 때에 우리는 우리가 바라는 모든 도움을 받게 될 것이다. 아무도 마치 자기 자신을 구원할 능력을 가진 것처럼, 자기 자신을 바라보지 말라. 예수께서는 우리가 이 일을 하기에 무력하기 때문에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 예수 안에는 우리의 소망과 우리의 칭의와 우리의 의가 있다. 우리에게 죄가 많음을 알게 될 때에 낙심하거나 우리에게 구주가 없는 것처럼 두려워하거나 구주께서 우리에게 은혜 베푸실 생각이 없는 것처럼 여기지 말 것이다. 예수께서는 무력한 우리에게 당신께 나아와 구원함을 얻도록 초청하고 계신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는 하늘이 제정한 구제책에서 도움을 발견하지 못한 자들이 많았다. 죽은 자들과 죽어가는 자들이 그들의 주위에 널려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는 죽음을 피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았으나 계속하여 그들의 상처와 고통과 죽음이 확실함을 슬퍼하다가 마침내 그들이 즉시 나음을 받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기력은 쇠하고 그들의 눈은 흐려지게 되었다. 우리가 우리의 필요를 인식한다면 우리의 모든 힘을 우리의 행위를 슬퍼하는 일에 바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없이는 우리의 상태가 무력함을 깨달아야 하는 동시에 결코 실망하지 말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가 부활하신 구주의 공로를 의지하여야 한다. 바라보고 살라. 예수께서는 당신께 나오는 자는 모두 구원하시겠다는 보증을 주셨다. 비록 기별을 받아야 할 무수한 사람들이 당신께서 제공하신 은혜를 거절할지라도 당신의 공로를 의지하는 자는 한 사람도 멸망하도록 버려둔 바 되지 않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구속의 경륜의 신비가 그들에게 분명해질 때까지는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무수한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그 효과를 체험한 사실을 알면서도 믿음으로 바라보기를 거절한다.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결코 발견할 수 없는 이유와 증거를 찾아내기 위하여 철학의 미로에서 방황하면서도 하나님께서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증거는 거절한다. 그들은 의의 태양이 빛을 발하는 이유를 깨달을 때까지 그 빛 가운데서 행하기를 거절한다. 이런 노선을 고집하는 자들은 아무도 진리의 지식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의심할 여지를 모두 제거하지는 않으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신앙의 기초를 놓을 수 있는 충분한 증거를 주신다. 그러나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에 마음은 흑암 중에 처하게 된다. 만일 뱀에게 물린 자들이 쳐다보기를 동의하기 전에 멈추어서서 의심과 의문을 일으켰더라면 그들은 멸망을 당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먼저 쳐다보는 일이 우리의 의무이며 믿음으로 쳐다봄으로 우리는 생명을 얻을 것이다.

3부 - 가나안에 들어간 사람들


가나안은 참으로 가까우면서도 너무도 먼 땅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세 번째로 요단강가에 있는 약속의 땅의 경계에 도착했다. 그러나 신명기의 기록에 의하면, 그들은 한 단체로서 크게 변한 것이 없었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마음으로나 외관상으로 가나안 땅에서 아직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이방민족들은 그들의 죄악의 잔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는 믿음을 갖지 못한 자들을 흔들어서 요단강을 건너갈 수 있는 자들을 골라 내셨다.

우리가 마침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되는 것은 우리가 한 단체로서 대단한 변화를 이루었기 때문에서가 아니다. 그것은 이 세상 민족들이 죄악에 대한 그들의 잔을 채웠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나라에 들어갈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하늘 나라에 데리고 가실 것이다. 그 나머지 사람들은 흔들림을 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그대가 주변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품성이 재현되기를 바란다면 그 생각을 고쳐야 한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볼 때, 교회가 준비되었거나 되지 않았거나 간에 예수님께서는 매우 신속히 오실 것이다.

“이스라엘 자손이 또 진행하여 모압 평지에 진 쳤으니 요단 건너편 곧 여리고 맞은 편이더라 십볼의 아들 발락이 이스라엘이 아모리인에게 행한 모든 일을 보았으므로.” 발락은 아모리인이 모압인에게 승리했기 때문에 불안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모압왕 발락은 이스라엘이, 그의 나라를 이미 정복한 적이 있었던 아모리인을 패배시켰다면 그들에게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전쟁을 해봐야 승산이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는 하나의 기발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는 그들을 저주하고자 했다.

“미디안 장로들에게 이르되 이제 이 무리가 소가 밭의 풀을 뜯어먹음 같이 우리 사면에 있는 것을 다 뜯어먹으리로다 하니 때에 십볼의 아들 발락이 모압 왕이었더라 그가 사자를 브올의 아들 발람의 본향 강변 브돌에 보내어 발람을 부르게 하여 가로되 보라 한 민족이 애굽에서 나왔는데 그들이 지면에 덮여서 우리 맞은 편에 거하였고 우리보다 강하니 청컨대 와서 나를 위하여 이 백성을 저주하라 내가 혹 쳐서 이기어 이 땅에서 몰아내리라 그대가 복을 비는 자는 복을 받고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줄을 내가 앎이니라” (민 22:4~6). 분명히 발람은 저주에 효력이 있는 것으로 명성이 나 있었다.

“하나님이 발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그들과 함께 가지도 말고 그 백성을 저주하지도 말라 그들은 복을 받은 자니라”(12절). 하나님께서 일단 축복하신 것은 아무도 저주할 수 없다. 그러므로 발람은 그 사자에게 여호와께서 말씀해 주신 바를 말해 주었다. 그러나 발락은 고집이 세었다. “발락이 다시 그들보다 더 높은 귀족들을 더 많이 보내매”(15절). 그리하여 중요한 인물들이 발람에게 찾아와서 이스라엘을 저주하러 와 달라고 요청했다. “밤에 하나님이 발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 사람들이 너를 부르러 왔거든 일어나 함께 가라 그러나 내가 네게 이르는 말만 준행할지니라 발람이 아침에 일어나서 자기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모압 귀족들과 함께 행하니” (20, 21절).

이제 우리는 모든 어린이들의 책에 나와 있는 친숙한 이야기, 곧 발람과 나귀에 대한 이야기를 여기서 찾게 된다. 나귀는 주님의 천사가 서 있는 것을 보았고 주님의 천사에게 존경을 표하는 방법까지 알고 있었다. 그러나 발람은 너무나 눈이 멀어 있었기 때문에 그 사실을 볼 수 없었다. 발람은 나귀가 고집스러워서 바른 길을 가지 않으려고 하는 줄 알고 그 짐승을 때렸다. 나귀가 포도원 사이에 있는 담에 그의 발을 비벼서 상하게 하자, 발람은 그 짐승을 무자비하게 때렸다.

“여호와께서 나귀 입을 여시니 발람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무엇을 하였기에 나를 이같이 세 번을 때리느뇨 발람이 나귀에게 말하되 네가 나를 거역하는 연고니 내 손에 칼이 있었더면 곧 너를 죽였으리라 나귀가 발람에게 이르되 나는 네가 오늘까지 네 일생에 타는 나귀가 아니냐 내가 언제든지 네게 이같이 하는 행습이 있더냐 가로되 없었느니라”(28~30절).

그대는 사람이 나귀와 대화한다는 일을 놀라지 않고 상상해 볼 수 있겠는가? 그는 놀라서 나귀에서 떨어졌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너무 마음이 흥분 상태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마치 매일 그런 일이 반복되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극히 정상적인 상태에서 그 짐승과의 대화를 계속했다. 그것은 사람이 화를 내면 어떤 상태가 되는지, 또한 그가 그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어느 정도로 확고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는지를 보여 준다. 그는 어떤 일이 있어도 상관하지 않고 끈덕지고 미친 듯이 그의 길을 가고 있었다.

그때 주님께서는 발람의 눈을 열어 주셨다. 그는 주님의 천사가 칼을 빼들고 길을 막고 서 있는 것을 보았다. 모든 것이 분명해졌음에도 불구하고 발람은 “당신이 이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면 나는 돌아가겠나이다”고 말했다(34절). “당신이 이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면.” 그는 얼마나 눈이 멀었던가! 천사는 “그 사람들과 함께 가라 내가 네게 이르는 말만 말할지니라”고 하였다.

발람은 발락의 왕궁에 도착했다. 다음 날 모압 왕은 발람을 높은 언덕 위로 데리고 올라가서 이스라엘의 진영을 보게 했다. 발람은 거기서 의식을 행하였다. 그 의식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는 제사와 같은 것이었다. 그때 발락은 발람이 이스라엘을 저주하게 하고자 노력했다. “하나님께서 저주치 않으신 자를 내 어찌 저주하며 여호와께서 꾸짖지 않으신 자를 내 어찌 꾸짖을꼬? 나는 의인의 죽음 같이 죽기를 원하며 나의 종말이 그와 같기를 바라도다”(민 23:8-10). 그 때 “발락이 발람에게 이르되 그대가 어찌 내게 이 같이 행하느냐 나의 원수를 저주하라고 그대를 데려왔거늘 그대가 온전히 축복하도다.” 발락은 “다시 한 번 해보자”고 말하였다. 그는 “그들을 달리 볼 곳으로 가자”고 제안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비스가 산 꼭대기에 이르렀다. 그곳에서 그들은 다만 이스라엘 진영의 한 부분만을 볼 수 있었다. 그는 이스라엘의 수가 마음에 큰 감동을 주지 않을 것이므로 거기서는 한 단체로서의 그들을 저주하게 될 것으로 희망했다. 발람은 다시금 의식을 행하면서 말을 계속했다.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 내가 축복의 명을 받았으니 그가 하신 축복을 내가 돌이킬 수 없도다”(민 23:19, 20).

21절에 이상한 말이 나온다. “여호와는 야곱의 허물을 보지 아니하시며 이스라엘의 패역을 보지 아니하시는도다.” 그러나 그 당시 산 아래에 있는 이스라엘 진영에서는 24,000명의 사람들이 그들의 허물과 패역 때문에 불과 며칠 후에 죽임을 당하게 되어있었다. 하나님은 그 사실을 모르셨던가? 그분께서는 24,000명이나 되는 그 사람들을 보지 않으셨던가? 그 순간까지 긍휼과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공로라는 거울을 통하여 당신의 백성의 단체를 보지 않으셨던가? 마침내 우리는 우리의 지나간 역사에서 그런 일에 대한 어떤 증거를 가지고 있다. 반역과, 믿음의 부족과, 영적 광야에서의 방황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관심을 쏟으시는 지상에서의 유일의 대상이다.

발람은 마침내 모압의 지도자가 더 이상 말하지 말라고 명령하기까지 그 백성을 축복하는 일을 계속했다. “그대는 여기서 말을 그치는 것이 좋겠다. 그리고 우리가 앞으로 더 나아가도록 하자.” 그는 강력하게 말하였다. “우리가 더 나아가서는 전과 같이 결코 말하지 않도록 하라.” 그러나 발락은 사실상 어리석은 선택을 다시 한 번 한 것이었다. 그들은 브올 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마지막으로 의식을 행하였다. “야곱이여 네 장막이, 이스라엘이여 네 거처가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라고 발람은 말했다. “하나님이 그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으니 그 힘이 들소와 같도다 그 적국을 삼키고 그들의 뼈를 꺾으며 화살로 쏘아 꿰뚫으리로다... 너를 축복하는 자마다 복을 받을 것이요 너를 저주하는 자마다 저주를 받을지로다.”

“발락이 발람에게 노하여 손뼉을 치며 발람에게 말하되 내가 그대를 부른 것은 내 원수를 저주하라 함이어늘 그대가 이같이 세 번 그들을 축복하였도다 그러므로 그대는 이제 그대의 곳으로 달려가라”(민 24: 5~11). 그 말은 “이 곳을 떠나 집으로 가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발람이 떠나갈 때 그는 다른 모든 축복중에 또 하나의 축복을 남겨 놓았다. 그것은 많은 사람들이 모든 성경에서 메시야의 오심에 관한 가장 흥미있는 예언 중 하나로 생각하는 것이다. “내가 그를 보아도 이 때의 일이 아니며 내가 그를 바라보아도 가까운 일이 아니로다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홀이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서 모압을 이 편에서 저 편까지 쳐서 파하고 또 소동하는 자식들을 다 멸하리로다”(민 24:17).
발람은 이기심이 손상당하므로 상처받은 그대로 집으로 돌아갔다. 그는 부와 명예를 얻고자 희망했으나, 그가 얻은 모든 것은 발락의 불쾌?감정 뿐이었다. 그 결과로 발락은 그의 수염을 잡아끌고, 그의 머리를 할퀴었다. 그리고 그는 화려한 융단이 깔려있는 왕궁으로 서서히 걸어가서 다음 번에 어떻게 할 것인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스라엘과 싸울만큼 실력을 갖추고 있지 못했다. 이스라엘을 저주하기로 한 그의 생각은 쓴 열매를 거두고 말았다. 이제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한편 발람은 아직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천정을 쳐다보고 누워서, 하나님 백성이 축복받은 이유와, 그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생각했다. 그 때 기발한 아이디어가 발람에게 떠올랐다.

발람은 다시금 발락의 왕궁에 나타났다. 그는 말했다. “그 백성들이 복을 받은 이유는 그들이 하늘의 하나님께 충성했기 때문이며, 순종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제 만일 당신이 그들의 충성심과 순종심을 깨뜨리도록 어떤 일을 하기만 하면 어떤 시람이든지 당신을 위하여 저주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그 저주는 저절로 주어지게 될 것입니다.” 발락은 발람의 제안에 귀가 솔깃해진 나머지 어떤 계략이 있는지 그에게 물어보았다. 발람은 모압 여자들이 가장 매력적이므로 그들 중 가장 아름다운 여자들을 골라서 이스라엘의 진영으로 들여보내도록 하라고 발락에게 제안했다. 그 제안을 진정으로 받아들이기로 하고, 발락은 잔치를 배설하여 발람과 이스라엘 사람들을 초청하기로 계획했다. 그 잔치에 24,000명의 사람들이 참석했는데, 그들 중 대부분이 지도자들이었다. 발락의 견해에서 볼 때, 그 잔치는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

모세의 경험에 있어서 이상한 일은 모세가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에게 어떤 일이 생겼던가? 그는 시내산 꼭대기에서 산 아래 평원에서 진행되고 있는 일을 말할 수 있었고, 백성들이 금송아지 주변에서 춤을 출 때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모세는 아론과 엘르아살을 통하여 우림과 둠밈에 접근하여 갔다. 그러나 그는 반역이 범민족적으로 실제화 되고서야 비로소 사태의 전말을 알게 되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어떤 목적을 위하여 이스라엘의 지도자들 중 몇 사람들의 눈을 가리워서 한 동안 사태를 직시하지 못하게 하셨다.

한번은 어떤 사람이 나에게 작은 공식을 가르쳐 주었다. 나는 그 후 여러 차례 그것을 사용했다. 그것은 수학적인 이론을 알려주는 공식이 아니었지마는 의미있는 공식이었다. 그 공식은 “만일 어떤 일이 잘못되면 하나님의 시간과 그분의 상황을 잊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정하신 시간에, 그리고 그분께서 정하신 상황에 맞도록 올바르게 처리해 줄 것이다.” 사물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시간에, 하나님께서 정하신 상황에 맞추어 이루어진다. 만일 그대가 교회에서, 본부에서, 지도자들 사이에서 잘못을 보았을 것 같으면, 하나님께서는 그것에 관하여 알고 계신다. 비록 어떤 사람이 그것에 대하여 얼마동안 눈 먼 것처럼 보일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마지막에 가서 일을 바르게 처리하신다.
모세는 마침내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스라엘이 바알브올에게 부속된지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시니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백성들의 두령을 잡아 태양을 향하여 여호와 앞에 목매어 달라 그리하면 여호와의 진노가 이스라엘에게서 떠나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사사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기 관할하는 자 중에 바알브올에게 부속한 사람들을 죽이라 하니라”(민 25:3~5). 목매어 다는 일과, 학살과, 일어난 재앙으로 24,000명의 사람들이 그들의 생명을 잃어버렸다.

이스라엘의 방백 중 한 사람인 시므리가 브올의 잔치에서 돌아오면서 모압의 창녀 하나를 데리고 왔다. 반역으로 탄식하고 있는 모세와 백성들 앞을 지나서 그는 그 여자를 자기 장막으로 데리고 들어갔다(민 25:6참조).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그 일을 차마 보지 못하여, 마침내 하나님께 감동되어 창을 들고 시므리와 그 창녀를 따라갔다. 그는 그 두 사람을 창으로 찔러 땅에 꽂았다.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들도 해하지 않으시는 분이라고 표현하고자 애를 쓴다.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에게 있어서 꼭 적당한 시간에 지진이 일어났다. 모든 일은 저절로 생긴 일이었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공의의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그 사실을 결코 잊지 않는 것이 좋다. 사람들은 그의 태도와 그들이 선택한 반역 때문에 마침내 스스로 멸망의 지경에 빠지고 만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런 일이 생기게끔 하신 일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비느하스가 취한 행동은 결과적으로 그의 가정에 있는 제사상 직분을 영원히 존귀하게 해 주었다.

마침내 이스라엘 족속들 사이에서 흔들리고 체질당하고 재조직하는 일이 요단강변에서 끝났다. 비느하스의 아버지 엘르아살은 이스라엘을 계수하라는 말을 듣고 그 일을 했다. 그는 애굽을 떠난 20세 이상의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여러 해 전에 예언했던 그대로 갈렙과 여호수아와 모세 밖에 남지 않은 것을 발견했다. “모세와 제사장 아론이 시내 광야에서 계수한 이스라엘 자손은 한 사람도 들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그들이 반드시 광야에서 죽으리라 하셨음이라 이러므로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한 사람도 남지 아니하였더라”(민 26:64, 65).

내가 소년이었을 때 전도자인 아버지와 아저씨를 따라서 미시간에 간 일을 난 기억한다. 그들은 그랜드 래피드 시내에 있는 큰 홀에서 전도회를 열었다. 첫날 저녁에 꽤 많은 사람들이 앞줄에 앉아 있었다. 우리는 그처럼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 참석하게 된 이유를 그 후에야 알게 되었다. 그 도시에 있는 어떤 큰 교회 목사가 그 집회에 위협을 느끼고, 누구든지 그 집회에 가서 설교를 듣는 자는 교회에서 출교시키겠다고 말하였던 것이다. 그런 위협적인 광고 때문에 첫날 저녁에 많은 사람들이 참석하였던 것이다.

몇 년 전에 노스웨스트의 한 장막집회에서 어떤 사람들이 교회에서 나누어 준 인쇄물에 대하여 반대 의견을 가졌었다. 우리 지도자들은 일어나서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은 이 인쇄물들을 읽지 않는 일이며, 집에 가자마자 그것을 태워버리는 일입니다.” 고 말했다. 그런데 사람들이 집에 돌아가서 그 인쇄물을 쓰레기통에서 꺼내어 읽게 되었다는 것을 나는 알게 되었다. 그 이유는 단순히 그 인쇄물에 관하여 경고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대가 고속도로에서 “이 표지판의 뒷 면을 읽지 마시오”라는 표지를 본다면 모든 사람이 차에서 얼굴을 돌려 그것을 읽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마귀는 역심리를 알고 있다. 그는 한 동안 저주하고, 가치를 저하시키고, 조소한 후, 그의 전술을 바꾸고자 할 것이다. 그는 때때로 하루 밤 사이에 그들의 생각을 바꾸어 놓는다. 그는 제일 먼저 사람들에게 이스라엘을 저주하도록 이끌었다. 그 다음에 그는 “그들과 친해지고 그들을 잔치에 오도록 초청하라”고 제안했다. 그 일은 훌륭하게 이루어졌다.

오늘날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교회 통합 운동은 우리를 친구가 되도록 권유하고, 우리의 특성을 없애라고 말한다. ‘우리는 모두 형제들이므로 누구나 다 같은 장소를 향해 가고 있다. 모든 길은 동일한 천국으로 이끌어준다.’ 원수는 그의 전술을 바꾸고 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오시기 직전에 교회가 부도덕한 일을 직면하게 될 것이라는 많은 증거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일에 휘말려 들어가지 않을 유일의 사람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사람들이다.

성경예언에 의하면 여자는 교회를 표상한다. 요한 계시록에는 순결한 여자는 순결한 교회를, 타락하고 부패한 여자는 타락하고 부패한 교회를 상징한다. 그러므로 만일 출애굽 운동을 예수님의 재림을 고대하는 신자들로 비교한다면, 예언적 의미에서 그대는 모압의 여자들을 이교도 혹은 타락한 교회들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바벨론은 타락한 교회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대는 문자적인 의미에서는 물론이요 예언적 영적 의미에서 모압여자들과의 친교를 목격한 적이 있는가? 두 가지 의미에서의 해석을 다 같이 음미해 보라. 우리는 사업을 마치기 전에 그런 상황을 더욱 많이 목격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약속의 땅 경계지역에서 실제적으로 목격할 일은 큰 흔들림과 체질하는 일이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이 세상에서 분리되기를 원하신다. 사단은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께로부터 분리시키고자 노력한다. 왜냐하면 그 일이 생기면 저주가 절로 찾아오기 때문이다. 그 일은 결코 실패할 수 없다. 나는 그 순간에 비느하스가 대표하는 편에 가담하기를 원한다. 나는 다른 어떤 것보다 하나님의 품성과 영광에 더욱 큰 관심을 가진 사람들에게 속하기를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