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주님께 사랑으로 쓰는 편지


주님!
때때로 하늘을 봅니다.
그리고 하늘을 응시한 채 그대로 한참을 멈춰서 있곤 합니다.

아름아름 찬연한 아지랭이 떠올라 더욱 빛나는 연두빛 봄 들판과 어울어져 맞닿은 저리도 고운 저녁 노을은 못다 이룬 꿈을 마저 피우려는 한 송이 장미꽃처럼 그렇게 활활 붉게 타오르는데 제가 걸음을 멈춰서서 하늘을 보는 것은 그 찬란한 저녁 노을이 아름다워서가 아닙니다. 파란 물방울이 금방이라도 배어날 것 같은 투명한 하늘에 한 점씩 드문드문 피어오르며 지나가는 흰 구름이 그리는 그림이 고와서도, 아련한 밤 하늘에 깜빡이는 등불을 켜며 모여드는 초롱초롱한 별들이 예뻐서도 아닙니다.
멀지만 제겐 아주 가까운 그 하늘엔 오늘도 푸른 옷자락 흩날리시며 분주한 듯 저를 찾으시는 사랑하는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
오늘도 저를 보셨나요?
수많은 사람들 속에 숨어 있어도 내 피로 구속한 내 자녀는 안다고 말씀하시며 커다란 가슴으로 품을 듯이 내게 다가오시는 주님!
아침이면 누구의 이름도 부르기 전, 어느 누구와도 얘기를 나누기 전에 맨 먼저 나를 불러 달라고 부탁하시는 주님.
그래서 매일 아침이면 하늘로 향한 창문을 열고 맨 먼저 주님을 부르며 하루를 시작한답니다. 그러면 기도는 호흡의 일부가 되어 숨쉬는 순간마다 주님의 숨결을 느낍니다. 또 ‘든든히 먹어야지 끼니를 걸르면 안된다’ 시며 조반을 챙기는 어머니처럼 아침마다 당신의 가슴에서 나온 생명의 말씀을 펴놓으시는 주님! 오늘도 주님께서 주신 맛있는 양식을 음미하며 혀 끝에 와닿는 당신의 사랑을 느껴 보았습니다.

주님!
그런데, 아시지요?
매일 다른 하루가 시작되고 에누리 없는 삶의 수레바퀴 속에 휘말리다 보면 저는 곧잘 주님의 임재를 잊어버리는 건망증 환자가 될 때가 있다는 것을요...... 시련과 근심의 회오리 바람이 검은 폭풍우처럼 밀려들어 영혼의 방을 어지럽힐 때 힘들다고 울며 투정을 부리다가 문득 정신을 차려 고개를 들면 눈 앞에 떠오르는 주님의 슬피 우시는 모습!...... 마치 구름 기둥에 몸을 숨기신 채 성급히 거친 광야길을 앞서 가셔서 장막 칠 자리를 몸소 보시던(신1:33) 주님이 함께 계셨건만, 사람이 자기 아들을 안음 같이 너희의 행로 중에 너희를 안고 가리라(신1:31)는 주님이 손을 들어 함께 가고 계셨건만, 조금만 힘들면 엎드러져 원망하며 여호와가 우리 중에 계신가(출17:7) 하며 울던, 그래서 곁에 계셨던 주님으로 슬픈 눈물을 쏟으시게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저는 얼마나 자주 적은 믿음과 불신으로 주님을 슬프게 하는지요!

주님!
터질 듯한 고민으로 가슴이 뻐근해질 때, 아무도 나의 사정과 감정을 이해하지 못 하는 것 같아 외롭게 느껴질 때, 그리고 그건 너무 억울해서 혼자 감당하기 어려운 시련이라고 생각될 때, 그리고 가라앉혀도 휘저어진 앙금처럼 섭섭한 감정의 찌끼가 올라와 온 영혼의 맘을 상하게 할 때, 그때 왜 그렇게 자주 주님의 커다래진 귀를 보지 못할까요? 우리의 사정을 조금만 말씀드려도 크게 가슴 떨리시며 함께 공감해 주시는 주님이 옆에 계신데도, 귀 기울여 들어주시려고 서성거리시는 주님이 옆에 계신데도....... 그리고 “네가 어찌하여 이르기를 내 사정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원통한 것은 내 하나님에게서 수리하심을 받지 못한다 하느냐...”(사40:27)고 하시는 주님의 음성이 들리는데도....... 대신 연약하고 변하기 쉬운 인간의 귀에 우리의 고민과 슬픔을 아무 생각 없이 털어놓고 그래서 서로 동의를 구하다가 더 어두운 흑암의 터널 속으로 함께 빠질 때가 얼마나 많은지요! 그렇게도 우리와 말문을 트기 원하시며 도란거리는 우리의 목소리를 그리워 하시는 주님이 가깝게 계신데도 외면한 채 말입니다.

주님!
그러나 어김없이 찾아왔다 가는 매 계절 속에서 주님의 눈물 어린 사랑의 약속을 듣는 것은 어찜인지요!
하늘하늘 춤을 추며 내려오는 흰 눈이 있어 따뜻한 겨울, 하도 고와 눈 한 송이 손에 받으면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사1:18), 귀에 들리는 주님의 목소리.
봄이면 뽀얀 안개 덮힌 새벽 숲을 바라다 보며, 그리고 여름에는 짙은 먹구름이 소나기를 뿌리고 간 뒤 맑게 개인 하늘을 보며 가슴 속에 다시 새겨보는 주님의 약속. “내가 네 죄를 빽빽한 구름의 사라짐 같이 네 죄를 안개의 사라짐 같이 도말하였으니 너는 내게 돌아오라(사44:22)”는......
끊임없이 파도가 일렁이는 가을 바다에 서서 속절없이 작은 돌 하나 던져보며 음미하는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미7:19)는 주님의 약속은 어쩌면 매일 이리도 새롭고 달콤한지요!

주님!
인생이 늘 장미꽃으로 덮여있는 길은 아니지만 나와 함께 걸으면 가시덩굴로 휩싸인 길도 발끝에 보드라운 감촉이 도는 포근한 풀밭길로, 그리고 이름 모를 꽃들이 만발한 아름다운 꽃밭 길로 변한다고 가르쳐 주신 주님!
그렇게 무거워 보이는 십자가도 나와 함께 지면 오히려 발걸음을 가볍게 만들어주는 시원한 한 통의 생수와 같아진다고 가르쳐 주신 주님. 고통과 고난의 생애도 당신의 황홀한 임재 앞에서는 환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흑암을 비출 수 있는 빛이 내겐 한 줄기도 없지만 의의 태양이신 주님과 접촉하게 될 때 온 심령이 당신의 임재로 작열할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주님 안에 거할 때 그 사람이 겨냥한 화살은 당신의 임재로 두르고 있는 주님께로 떨어지게 되어 그래서 아픔도 모른 채 엄마 품에서 배시시 웃는 천진난만한 아기처럼 주님 안에 그렇게 편히 안겨 쉴 수 있다는 것을 왜 진작 이렇게 절실하게 깨닫지 못했을까요?

주님!
오늘 제가 불러드린 노래를 들으셨나요? 어두운 고난의 터널을 지나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곳, 오직 당신의 목소리만 들리던 곳에서 당신께로부터 배운 그 아름다운 노래를요.

주님!
오늘은 가슴을 더 활짝 열고 싶습니다. 더 열 수 없으리 만큼 크게, 활짝...... 그리고 하늘로부터 빛살처럼 꽂히며 내려오는 축복의 소나기를,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사랑의 빗줄기를 흠뻑 맞고 싶습니다. 그릇이 너무 작아 조금 밖에 받지 못하던 당신의 무한한 축복을, ‘네 믿음대로 되리라.’ 시며 충만히 내려주시지만 적은 믿음 때문에 충만히 받지 못하던 당신의 사랑의 기적을......

주님!
지금 가슴을 크게 열고 나를 온전히 비운 채 빈 마음으로 당신 앞에 섭니다.
내 안에 충만히 임하시옵소서.
저의 온 영혼이 온통 빛으로 환하게 물들어질 때까지......
지상의 온갖 번거로움이 사라지고 영원한 하늘의 안식이 내 영혼에 가득히 채워질 때까지......

주님, 오늘은 더 당신을 사랑합니다.

권두언


강병국 목사

    기도는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습관입니다. 아마도 이 세상에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하나님을 믿지 않는 무신론자라고 할지라도 긴급한 상황을 만나거나 죽게 될 입장에 놓였을 때에는 모름지기 어딘가에 존재하는 신을 향하여 하소연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는 인간이 하나님과 나누는 교통의 수단입니다. 현대인들이 전화나 컴퓨터의 이메일을 의사 소통의 수단으로 삼고 있듯이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기도가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는 방법이 되는 것이라 할 수 있겠지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시간과 공간에 지배를 받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든지 하늘을 향하여 드리는 기도를, 그것이 생각 속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든지 아니면 소리 내어 하는 말들로 이루어지든지 간에 그 세미한 소리들을 다 듣고 계시는 것입니다.

    엄청나게 바쁘고 복잡한 현대 도시들 가운데 자리하고 있는 어떤 밀집된 아파트의 작은 방에서 드려지는 조그마한 기도 소리도 하나님의 귀를 스쳐 지나가는 법이 없습니다. 수많은 군중과 함께 걸어가며 드리는 작은 기도 소리에도 하나님은 당신의 귀를 기울이십니다. 기도는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는 어머어마한 특권입니다.

    그래서인지 이렇게 소중한 기도에 대해 잘못된 이해들이 많이 퍼져 있는가 하면 또한 많은 분들이 이것을 오용하거나 남용하고 있는 모습들을 종종 대하게 됩니다. 이번 호의 주제는 기도입니다. 이번 기사들을 통하여 성서적인 큰 깨달음을 갖게 되시기를 간절하게 기도드립니다.

최고의 전도왕이 되는 방법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출애굽기 19:5, 6.

5절에 나오는 “내 소유가 되겠고” 라는 말씀이 영어 킹 제임스 성경에는 “my peculiar treasure”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영어 성경 말씀은 “나의 독특한 백성”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독특한 백성이란,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속해서 이리저리 끌려다니지 않는 백성들을 말하며, 세상의 흐름에 따라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과 언약에 따라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가리킨다. 또한 6절에 나오는 “내게 대하여 제사장이 되며”라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 제사장은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에 대해서 알려주는 직책을 가진 사람이다. 하나님의 뜻과 그분의 법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교육시켜서 그들을 의의 길로 인도하는 사람들이 제사장들이다.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복음과 구원의 도를 알려주는 통로로 사용되는 독특한 사람들이 바로 제사장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소개하고 복음과 진리를 전파하는 제사장직을 맡기 위해서는, 먼저 그분의 말씀을 순종하고 그분과의 언약을 지키는 생애를 사는 사람이 되어야만 한다.

진리와 복음을 전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 중에 어떤 방법이 가장 효과적이고 능력있는 방법일까? 가장 힘있고 효과적인 방법은 하나님의 진리와 복음과 그분과 맺은 언약에 대하여 충성스럽게 살아가는 우리 자신의 삶, 그 자체이다. 매일의 삶 가운데 나타나는 우리의 말씨, 태도, 한결같은 마음, 진리에 대한 변치 않는 충성심, 어떤 일이 생겨도 주님의 뜻을 선택하는 우리의 결정이야말로 가장 능력있는 최고의 전도 방법이다. 말로만 하는 신앙에는 아무런 힘도 없지만, 생애에서 나타나는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충성심과 태도와 정직한 생활은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소개하고 복음을 증거하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다.

다니엘서에는 가장 효과적인 복음 전파 방법이 무엇인가에 대한 가장 좋은 예증이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잠깐 다니엘서를 살펴보자면, 다니엘서는 다니엘의 생애에 대한 이야기(1장~6장)와, 세상 역사에 대한 예언(7장~12장), 이렇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다니엘의 전반부에서 그는 자기가 경험한 하나님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신과 세 친구들을 인도하고 구원하셨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하나님께 충성할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크신 일을 베푸신 사실을 이야기한다. 후반부에는 다니엘의 시대부터 예수님의 재림까지 큰 환난과 시련을 통과할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예언이 기록되어 있다.

다니엘서의 순서를 보면 먼저 생애에서 나타나는 참된 믿음을 소유해야 끝까지 살아남을 주님의 백성들, 독특한 주님의 소유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이것이 원칙이며 순서인 것이다. 후반부에 있는 다니엘의 예언을 아무리 잘 이해한다고 해도 전반부에 있는 다니엘의 품성을 준비하지 못하면 그토록 완벽한 예언의 지식이라도 우리들로 하여금 마지막 때에 흔들리지 않고 서게 하는 자격을 주지는 못한다. 예언의 사건들에서 승리하고 시련을 통과하려면, 그 전에 다니엘과 세 친구들의 믿음을 소유해야만 한다.

그러면 이제 하나님께서 어떠한 때에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을 통하여 증거하셨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다니엘의 세 친구들이 그 어느 때보다도 뜨겁게 불타오르던 풀무불에 던져진 사건, 그리고 다니엘이 사자굴에 던져진 사건, 이 두 사건이야말로 하나님께서 가장 크게 역사하신 사건이자 복음이 가장 널리 전파된 계기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가? 물론 설교하고 전도하고 봉사하는 것도 좋은 신앙이지만 우리의 생명을 다 바쳐서라도 주의 말씀과 명령을 지키고 주님을 사랑하는 우리의 생활이야말로 가장 좋은 전도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말로 하는 전도보다 훨씬 더 영향력이 큰 전도는 바로 그리스도의 아름다우신 성품을 투명하게 반사하는 우리의 삶, 우리의 생활, 우리의 성품이다. 어떤 일이 닥쳐와도 굴하지 않고 예수님께만 순종하는 우리의 삶이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질 때 그것은 가장 큰 전도의 발판이 될 것이다.

다니엘 3장에 나오는 풀무불 이야기로 가 보자. 이 이야기에는 다니엘이 나오지 않는다. 아마도 다니엘의 절개와 대쪽 같은 충성심을 잘 아는 느부갓네살 왕이 그를 먼 나라로 특사로서 보냈을 것이다. 왕은 다니엘이 어떤 위협이 닥쳐와도 굴하지 않고 하나님만 경배할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를 너무나도 아끼고 보호하려는 마음에서 그렇게 했을 것이다. 만일 다니엘이 두라 평지에 나온다면, 그는 금신상에 절하라는 왕의 명을 어기고 풀무불에 던져질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이 보는 당신은 어떠한 사람인가? “그 사람은 절대로 이런 일에 동참하지 않을 것이니 의사를 물어볼 필요도 없네. 저 사람은 죽어도 타협하지 않을 사람이네.” 라고 말할 것인가? 아니면 “교회를 다니고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하기는 하지만 우리와도 잘 어울리고 일상 생활도 우리와 다른 것이 없으니 문제 없을 것이다” 라고 말할 것인가?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다니엘처럼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할 때 다가오는 어려움이 훨씬 더 적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우리를 볼 때, 저 사람은 어떤 일이 있어도 하나님의 명령을 어길 사람이 아니다, 라는 것을 확실하게 깨달아야 한다.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왕에게 ‘왕께서 우리를 위하여 다시 음악을 연주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풀무불에서 건져내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지 않으신다고 해도 우리는 오직 하나님께만 충성할 것입니다.’ 라고 말했다. 바로 이것이 진짜 믿음이다! “주께서 보호하시면 충성하겠습니다.” 이것은 진짜 믿음이 아니다. “주께서 우리를 보호하지 않으시더라도.” 이것이 진실된 믿음이다. 이런 믿음을 소유한 사람들이 주님의 “특별한 소유”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진짜 믿음을 어떤 방법으로 보상하셨는가? 그들이 풀무불에 던져졌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의 곁에 친히 계심으로였다. 그들이 믿음으로 극렬한 시련의 용광로를 통과할 때, 하나님께서는 사실상 그 어느 때보다도 그들 곁에 가까이 임하셨던 것이다. 그대는 지금 영적인 풀무불에 떨어졌는가? 그렇다면, 다니엘의 세 친구들이 나타냈던 진짜 믿음을 활용하라. 느부갓네살 왕과 신하들의 눈에 하나님께서 보이셨던 것처럼 믿지 않는 자들의 눈에도 그대의 곁을 지키고 계시는 하나님의 임재가 보일 것이다.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출애굽기 19:5, 6. 이것이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에게 일러주신 전도 방법이다. 이것이 가장 효과적인 전도이다.

“느부갓네살이 말하여 가로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을 찬송할찌로다 그가 그 사자를 보내사 자기를 의뢰하고 그 몸을 버려서 왕의 명을 거역하고 그 하나님 밖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그에게 절하지 아니한 종들을 구원하셨도다. “그러므로 내가 이제 조서를 내리노니 각 백성과 각 나라와 각 방언하는 자가 무릇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께 설만히 말하거든 그 몸을 쪼개고 그 집으로 거름터를 삼을찌니 이는 이같이 사람을 구원할 다른 신이 없음이니라 하고” 단3:28, 29.

이 얼마나 아름다운 전도인가? 왕과 주위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감동을 받았다. 이들을 죽이려고 했던 왕 자신이 감동을 받고 이들의 하나님을 오직 한 분 신으로 선포하였다. 왕이 그들을 대신해서 전도해 주는 것이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앞으로도 이와 똑같은 일이 벌어질 것이다.

그러면 이제 다니엘서 6장에 나와 있는 최고의 전도의 두 번째 예증을 보자. 바벨론은 메대 페르시아에 의해 점령당하고 천하가 바뀌었으나 한 가지 바뀌지 않은 것이 있었으니 바로 국무총리 다니엘이었다. 생각해 보라. 어떻게 한 나라의 왕이 자신이 점령한 적국의 국무총리를 그대로 유임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다니엘은 하나님과 왕의 눈에 은총을 입었다. 그러나 그의 동료들이 이를 시기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다니엘이 수석 총리가 되지 못하게 막으려고 온갖 힘을 다 썼다. 그들이 다니엘을 파멸시키기 위해서 얼마나 혈안이 되었을는지 상상할 수 있겠는가? 그들은 다니엘을 끌어내릴 만한 꼬투리를 잡으려고 틈을 노렸으나 그에게서 단 한 가지의 허물도 찾을 수 없었다. 이것이야말로 마지막 시대 주님의 백성들이 가져야 할 성품이다. 아무리 찾아봐도 허물을 찾을 수 없는 성품, 그대는 이러한 성품을 가지고 있는가? 그러나 그들은 그의 종교를 내놓고는 그를 제거할 만한 계책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들이 그를 고소할 만한 유일한 것은 하나님께 충성하는 그의 신앙 뿐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다니엘의 신앙을 이용하여 그를 제거하고자 하였다. 이것은 마지막 시대 주님의 독특한 백성들이 통과해야 할 환난을 예표한다.

다니엘 같은 백성들이 준비되어야 환난이 생긴다. 그와 같은 충성심과 절개심을 가진 “독특한 백성들”이 나와야 예수께서 하늘 본향으로 데리고 갈 사람들이 준비되는 것이다. 이들은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은 백성들이다.
다니엘은 30일 동안 왕 외에는 아무에게도 기도하지 못 한다는 조서를 들은 후에도 변함없이 예루살렘을 향하여 창을 열고 하루에 세 번씩 기도하였다. 창문을 열지 않고 소리 내지 않고 기도하거나 다락방에 숨어서 기도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는 그렇게 하기를 거절하였다. 그렇게 하는 것은 타협이기 때문이었다.

다니엘처럼 융통성 없고 올곧고, 타협이란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 사람의 눈에는 도무지 출세할 수 없는 사람 같아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께 그는 “주님의 특별한 백성, 독특한 소유” 였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잃은 양들을 찾는데 쓰실 수 있는 최상의 기구였던 것이다.

왕이 다니엘을 어찌나 아꼈는지는, 그가 밤새도록 식음을 전폐한 사실에서 알 수 있다. 다니엘이 푹신한 사자의 털을 베고 하나님의 따뜻한 돌보심 아래서 마음껏 쉬고 있을 때 왕은 그를 걱정하느라 단 한숨도 잘 수가 없었다. 다음날 새벽같이 일어난 왕은 사자굴로 달려갔다. 다니엘의 아름다운 그리스도인적 대답을 들어보라. 그는 자신을 사자굴에 던져 넣은 왕을 책망하고 원망하는 대신, “왕이여 원컨대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라고 그의 말을 이었다.

“이에 다리오왕이 온 땅에 있는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들에게 조서를 내려 가로되 원컨대 많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찌어다.
“내가 이제 조서를 내리노라 내 나라 관할 아래 있는 사람들은 다 다니엘의 하나님 앞에서 떨며 두려워할찌니 그는 사시는 하나님이시요 영원히 변치 않으실 자시며 그 나라는 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그 권세는 무궁할 것이며.
“그는 구원도 하시며 건져내기도 하시며 하늘에서든지 땅에서든지 이적과 기사를 행하시는 자로서 다니엘을 구원하여 사자의 입에서 벗어나게 하셨음이니라 하였더라” 단6:25~27. 다리오 왕이 대신 전도를 해주고 있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처럼 그도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신해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온 세상에 전파한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최고의 전도이다. 다니엘의 신실함과 충성 때문에 다리오 왕은 전국에 조서를 내려 다니엘의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였다. 이것보다 효과적인 전도가 어디에 있겠는가?

하나님께서 잃은 양들을 찾기 위해 사용하시는 통로는 진리와 진리에 충성하는 하나님의 종들이다. 하나님께서 그대에게 전도하라는, 받은 바 빛을 나누어 주라는 마음의 부담을 주시는가? 그러나 어떻게 전도해야 할지 몰라서 망설이고 있는가? 지금까지 살펴본 바대로 하나님께서 사용하실 수 있는 최상의 그릇, 사람들을 주님께로 이끄는 데 쓰여질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전도자들은 바로 평상시나 위기의 순간에나 변함 없이 한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그분을 드러내어 그분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는 자들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마지막 때에 다니엘처럼 죽기까지 주님께 충성하는 백성, 극렬한 환난의 풀무불 속에서도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성품을 나타내는 사람들을 통하여 바벨론에 있는 당신의 백성들을 부르시고 마지막 사업을 마치실 것이다. 우리 모두 이 무리에 들어가도록 힘쓰자.


최상의 전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바다 건너 먼 외국으로 나가는 것도,
성경을 들고 나가 큰 소리 외쳐 노방 전도하는 것도,
전도지를 들고 거리로 나가 뿌리는 것도,
좋은 전도라고 할 수 있지만,

그보다 훨씬 더 좋은 최고의 전도 방법은,
이웃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변화된
나의 생활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동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으로 거듭난
내 삶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가족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인침받은 나의 성품을 조용히
나타내는 것입니다.

다니엘처럼,
그의 세 친구들처럼.

광우병 때문에 채식을 해야 한다구요?


근래에 시애틀 시내를 걸어본 적이 있다면 아마 버스에 걸린 희한한 광고를 보았을 것이다. 어미소와 송아지가 거리를 걷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맛있는 야채 버거를 드시는 것이 어때요?” 라고 말하고 있는 광고이다.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은 이 광고를 보면서 잠시 멈춰서서 ‘내가 저 귀여운 소를 털만 빼고 다 먹고 있는가?’ 라고 자문하게 된다. 특히 영국에서 광우병을 갖고 있는 수백만의 소들이 도살되었다는 소식이 들리면서부터 우리들은 자문하기 시작했다. “광우병 때문에라도 채식을 해야 하지 않을까?” 이 질문을 검토해 보기로 하자.

먼저, 동물들이 이러한 뇌의 질환을 갖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소가 이러한 뇌질환을 갖게 되면 우해면양뇌증(Spongiform Encephalopathy)이라고 부르고 양이 이러한 병에 걸리면 면양진정병(Scrapie)이라고 한다. 뉴기니아에서는 이 질병을 쿠루(Kuru)라고 불러왔다. 쿠루는 식인종들이 인간의 뇌를 식용함으로 생긴 병이다. 의학계에서는 이를 변형 크로이츠펠트-야콥병, 즉 인간 광우병이라고 부르며 이 병의 주된 원인은 육류 섭취이다.

이 모든 질병의 공통요소는 바로 변형된 단백질, 프리온(Prion)이다. 프리온은 동물성 식품들 속에 몰래 침투해 들어온 침입자이므로 우리의 각별한 주의를 필요로 한다. 최근에 들어서 광우병과 같은 동물의 질병으로 인하여 채식에 대한 관심이 고조된 것은 사실이지만, 채식은 과학적으로나 영양학적으로도 인간에게 가장 적합한 식생활임이 입증되고 있다.


“그 시절”의 충고

1940년도에 많은 영양학자들은 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들에게 발생할 영양부족의 문제들을 제기하였다. 한 의사는 빈혈이 있는 친구에게 “인간의 혈액과 근육과 비슷한 음식을 먹는 것은 너무나도 상식적인 것이다. 그러한 음식은 당연히 고기이다.”라고 충고했다. 그리고 고기를 많이 먹을수록 건강에 더 좋다고 권장했다. 과연 그의 충고는 옳은 것이었는가?

그 시절, 사람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영양분은 생명을 위한 단백질, 근육을 위한 단백질, 건강한 간과 폐, 그리고 뇌를 위한 단백질, 오로지 단백질이었다. 의사들은 우유, 치즈, 계란 등, 동물성 단백질 섭취에 신경을 쓰라고 권했다. 그 당시 영양학자들이 그렇게 주장했으므로 우리는 아무 의심 없이 그들의 말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근래에 와서는 곡식, 과일, 채소, 콩, 견과류 그리고 씨앗 등을 골고루 섭취하는 것만으로도 인체에 필요한 단백질을 충분히 공급받을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 시절에 우리는 비타민 B12 결핍의 위험에 대해서도 주의를 들었다. 혈액과 뇌의 건강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이 루비색의 분자(비타민 B12)를 공급하기 위해 고기와 우유, 그리고 계란을 섭취할 것이 권장되었다. 이것은 사실이다. 완전 채식을 하는 사람들(유제품을 섭취하지 않는 채식가들)은 비타민 B12를 적당량 공급하고 있는지 특별히 신경을 써야 한다. 그러나 적당한 양의 비타민 B12를 섭취하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다. 비타민 B12를 보강한 식품들이 시중에 많이 나와있다. 음식으로 섭취할 수 없을 경우에는 약국에서 파는 정제나 캡슐로 섭취할 수 있다.

지금까지 왜 고기의 섭취가 권장되어 왔는지 그 이유를 알아보았다. 이제는 저울의 다른 쪽을 재보도록 하자.

 

왜 먹지 말아야 하는가?

세계 인구의 7% 정도 밖에 되지 않는 미국인들이 육류 공급량의 1/3을 섭취하고 있다. 의 저자 존 라빈스는 그의 저서에서 “450g의 소고기를 얻기 위해서는 7kg의 곡물과 콩, 그리고 1만 톤의 물이 필요하다. 1,350kg의 콩과 옥수수는 22명분의 식사량이 되지만 이를 소에게 먹여 고기와 우유를 생산하면 겨우 한사람이 먹을 만한 양에 불과하다”며 육식의 비생산성을 강조했다. 세계의 많은 인구가 기아에 허덕이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다음에 우리가 햄버거를 먹을 때 한번 생각해볼 문제이다. 세 치 혀 끝을 만족시키기 위해 고기의 근육과 내장을 먹을 때, 아무 잘못 없는 동물들이 죽어야 한다. 그러나 동물을 아끼는 마음을 차치하고서라도 고기를 먹는 것 자체가 우리의 건강을 해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콜레스테롤을 생각해 보자. 수년에 걸친 연구로 인해 콜레스테롤이 혈관을 막고 심장마비를 가져온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그러나 채식을 하면 콜레스테롤을 전혀 섭취하지 않게 된다.

지방은 또 어떠한가? 후라이팬에서 지글지글 타고 있는 기름진 음식은 위험하다. 그러나 지방이 들어있는 모든 음식이 다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제한된 양의 식물성 지방은 사용하기에 안전하다. 지방은 보통 실내 온도에서는 액체로 유지된다. 그러므로 실내 온도에서 고체의 형태인 지방에는 버터와 정제된 돼지 기름이 들어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방과 콜레스테롤 이외에도 육류 섭취가 인체에 끼치는 해로움에는 여러 가지를 꼽을 수 있지만 그 중에서 가장 심각한 위험은 바로 “암”이다. 다음의 글은 미국 전염병학 저널(American Journal of Epidemiology)에 실린 글이다. “우리는 고기의 섭취가 장암을 일으킬 확률이 높다는 것을 발견했다.”

미국 임상 영양 저널(American Journal of Clinical Nutrition)은 “육류의 소비는 장암과 난소암으로 인한 사망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라고 적고 있다. 동물을 먹는 것은 심장 질환과도 관계가 있다. 미국 화학 협회(American Chemical Society)는 “고기의 사용이 관상동맥 질환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수많은 연구를 통해 알려진 일반적인 상식이다.” 라고 말했다.

다시 광우병으로 돌아가 보자. 면양진정병과 광우병은 프리온으로 인해 동물에게 생기는 질병이며 변형 크로이츠펠트-야콥병과 뉴기니아의 쿠루는 똑같은 프리온에 의해 인간에게 생기는 질병이다. 프리온으로 인해 동물에게 생기는 질병이 인간에게도 영향을 주는가? 다시 말하면 광우병에 감염된 소를 먹으면 나에게도 광우병이 생기는가? 그렇다!

 

채식가가 될 것인가? 말 것인가?

우리는 건강을 위해서 고기를 먹어야 한다고 배워왔다. 그러나 고기를 먹지 말아야 할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음을 또한 배웠다. 그러면 당신은 이제 채식가가 되어야 하는가? 선택은 당신에게 달려있다.
미국 정부의 한 기관에서는 미국 인구의 5%가 채식가이거나 그에 가깝다고 보고하고 있다. 잘 알려진 채식가 중에는 셰익스피어, 밀톤, 볼테르, 그리고 뉴톤 등이 있다. 수 천년동안 불교의 승려들은 고기를 먹지 않았다.
채소, 과일, 콩, 견과류, 그리고 곡식을 골고루 섭취하면 완벽한 영양소가 몸에 공급될 뿐만 아니라 콜레스테롤이나 불필요한 지방에 대한 걱정을 전혀 할 필요가 없다. 음식은 가공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음식을 먹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그렇다면 채식 위주의 식단이 당신에게 최상인가? 당신은 이미 그 답을 알고 있다. 만일 당신이 “예스”라고 대답한다면 당신은 오늘, 동물들을 먹기보다는 그들과 친구과 되기로 선택한 수천의 사람들의 대열에 가담하는 것이다.

자연이 제공하는 최고의 식단


건강 영양학 전문가인 존 포터(John Potter)에 의하면 음식과 건강 사이에는 분명한 관계가 있다고 한다. 과일과 채소를 많이 먹는 사람들일수록 특별히 위, 식도, 폐, 구강, 췌장, 자궁내막, 대장, 피부 등에 발생하는 암에 걸릴 확률이 낮다고 한다.

왜 그러한가? 그 이유는 바로 식물성 음식들에 함유되어 있는 항암 성분에서 찾을 수 있다. 항암 성분에는 카로테노이드(노란색과 빨간색 과일과 채소에서 발견할 수 있는 성분), 섬유질, 아스콜베이트(비타민 C), 그리고 토코페롤(비타민 E) 등이 있으며 과일과 채소는 이러한 것들의 저장고이다. 이러한 천연 성분들을 피토케미칼(Phytochemicals)이라고 한다. 많은 제약회사들이 피토케미칼을 뽑아서 항암제로 만들려고 시도하였으나 그들은 그렇게 하는 것이 그다지 좋은 방법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사람을 대상으로 실험한 결과, 정제된 보완제들은 암에 걸릴 위험을 줄여주지 못하고 오히려 어떤 경우에는 암을 발생시킬 확률을 높일 수도 있다는 것이 발견되었다. 이렇게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보완제들은 식물성 음식에서 손쉽게 찾을 수 있는 여러 종류의 항암 성분과 피토케미칼을 다양하게 공급하지 못한다. 포터 씨는 가장 안전하고 효과적인 접근법은 다양한 종류의 피토케미칼이 들어있는 식물성 음식의 섭취를 늘리는 것이라고 말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암 예방과 치료에 좋은 효과가 있는 과일과 채소를 충분히 섭취하고 있지 않다. 그래서 과일과 채소의 섭취량을 늘리는 것이야말로 올바른 길로 가는 첫 번째 발걸음이라고 할 수 있다.

1. 정제되지 않은 곡식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건강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정제되지 않은 곡식의 가치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정제되지 않은 곡식은 세 가지의 성분- 겨(Bran), 배종(Germ), 그리고 배젖(Endosperm) ­을 함유하고 있다. 하지만 정제된 곡식에는 배젖만이 있다.

미네소타 대학의 조앤 슬라빈(Joanne Slavin)은 수많은 연구에 의해 정제되지 않은 곡식의 유익이 발표되었으나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단순한 이유로 그것을 섭취하지 않고 있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정제되지 않은 곡식들을 섭취하면 비만증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이유로 요즘에는 저탄수화물을 섭취하는 다이어트가 활기를 띠고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아트킨스(Atkins Diet) 다이어트이다. 특히 이 다이어트는 연예인들 사이에서 유행하고 있다. 그러나 탄수화물을 충분히 섭취하는 다이어트가 오히려 체중 관리에 효과적이라는 것이 입증되었다. 탄수화물은 필요 이상 섭취했을 경우, 지방보다 몸에 저장되는 양이 훨씬 적기 때문에 장기간에 걸쳐 탄수화물을 충분히 섭취하는 다이어트를 하는 것이 비만의 확률을 낮춰준다.”

비만은 심장 질환, 당뇨, 그리고 암을 불러오는 대표적인 원인 중 하나이다. 대체로 채식주의자들에게서는 비만증을 찾아보기 어렵다. 채식 위주의 식단은 우리의 몸에 섬유질과 식물성 단백질을 공급하며, 산화방지제(비타민, 미네랄, 그리고 피토케미칼 등)들, 그리고 심장혈관과 관계된 질환들과 암으로부터 보호하는 다른 성분들을 공급한다. 하루에 5~6그릇(Servings)의 정제되지 않은 곡식을 섭취할 것을 권장한다.

2. 건강을 위한 견과류!

견과류는 평판이 그다지 좋지 않다. 고지방음식이라는 이유로 사람들은 식탁에 견과류를 올리는 것을 회피한다. 그러나 로마린다 대학의 개리 프레절(Gary Fraser)교수에 의하면 규칙적으로 적은 양의 견과류를 섭취하는 것은 건강에 유익하다고 한다. “견과류를 정규적으로 섭취하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심장 질환에 걸릴 확률이 35~50% 정도가 낮다.” 라고 프레절은 말한다. 매일 견과류를 섭취하는 사람들은 견과류를 섭취하지 않는 사람들보다 수명이 2년에서 2년 반 정도 더 연장된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프레절은 견과류에 함유된 지방이 단일 불포화 지방산(Monounsaturated)과 다중 불포화 지방산(Polyunsaturated)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이것은 가장 좋은 천연의 비타민 E이며 농축된 섬유질을 가지고 있다. 연구 결과에 의하면 아몬드나 호도 등과 같은 견과류를 다른 지방 대신 사용했을 때 저농도 지단백(LDL)―나쁜 콜레스테롤―이 8~12%나 감소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전문가들은 견과류의 높은 비타민 E 함유량이 세포를 파괴하는 산화를 방지한다고 말한다. 견과류에서 찾을 수 있는 아미노산 알지닌(Arginine)은 심장 질환의 발병 확률을 감소한다. 하지만 견과류에서 찾을 수 있는 고지방은 문제가 되지 않는가 라고 당신은 물을 것이다. 아니다. 학자들에 의하면 견과류를 자주 사용하고 있는 사람들 중에 비만증인 사람을 찾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3. 수퍼푸드 - 콩!

세 번째로 채식가들에게 중요한 것은 콩이다. 콩은 양질의 단백질을 함유하고 있다. 영양분의 내용물은 콩의 종류에 따라 조금씩 다를지 모르나 일반적으로 아주 좋은 품질의 탄수화물, 섬유질, 미네랄, 그리고 피토케미칼을 함유하고 있다. 콩은 콜레스테롤을 전혀 함유하고 있지 않으며 아주 적은 양의 포화 지방을 가지고 있다. 포화지방이 높고 콜레스테롤을 많이 함유한 고기 대용품으로 콩을 사용한다면 건강에 유익할 것이다.

근래에는 메주콩(Soybean)에 들어있는 호르몬과 비호르몬적 특성을 함께 가진 피토에스트로겐(Phytoestrogen)에 특별히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학자들은 높은 메주콩 섭취량으로 인해 호르몬과 관계된 유방암과 전립선암과 같은 질병들의 확률이 낮은 나라들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메주콩이 심장 혈관 질환, 뼈 건강, 콜레스테롤, 그리고 갱년기 여성을 위한 호르몬 대용 치료에 얼마나 유익한지에 대한 많은 영양학 연구가 있었다. 결과에는 각각 다른 차이가 있었지만 콩의 효과는 확실하게 볼 수 있었다.

채식주의의 유익

채식가가 되는 것이 요즘 유행이다. 그러나 지금은 유행을 떠나서 건강을 생각해야 할 때이다. 오타고 대학의 짐 맨(Jim Mann) 교수는 “채식주의의 식생활을 하는 사람은 심장 질환, 당뇨병, 비만, 담석증, 고혈압, 그리고 콜레스테롤의 확률이 감소되는 경험을 한다. 과일, 채소, 콩, 그리고 정제되지 않은 통곡류를 균형지게 섭취하며 운동을 하는 채식가들은 체용량지수(Body Mass Index)가 보통 사람들보다 1/3이 낮으며 허혈성 심장질환은 고기를 먹는 사람들보다 24%나 낮다.”라고 했다.

비만과 심장질환이 채식가들 중에서 낮은 이유는 포화지방과 콜레스테롤의 섭취가 낮기 때문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채식가들은 충분한 양의 식물성 음식을 섭취함으로써 많은 병으로부터 더 안전하게 보호받는다는 증거가 굳어지고 있다.

그대는 채식 위주의 식생활을 하기 원하는가? 그렇다면 복잡한 체계를 따라 하지 않아도 필요한 영양분들을 섭취할 수 있다. 식탁에 폭넓은 종류의 정제되지 않은 곡식, 과일, 콩, 채소, 그리고 견과류를 올려놓으라. 성장기 어린이들이나 임산부들은 칼슘, 철분, 비타민 B12, 그리고 요오드(Iodine) 가 함유된 음식들을 충분히 섭취하도록 하라.

채식에 대해 궁금한 점 몇 가지

1. 채식 위주의 식습관은 영양의 불균형을 가져오지 않습니까?
- 그렇지 않다. 적절한 음식물을 선택할 수 있는 지식만 갖춘다면 채식자로서 ‘건강생활’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 예를 들어 철분, 비타민 B(특히 B12)·D, 칼슘, 필수 아미노산 등을 충분히 섭취하도록 각별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이는 콩과 다양한 곡물을 섭취하면 가능하다. 따라서 잡곡류와 콩 등을 고루 먹고, 백미 대신 현미, 잡곡, 통밀 등 통곡류의 밥을 지어먹기를 권한다.

2. 채식자와 비채식자는 건강상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 채식자들을 보면 동물성 식품의 섭취를 많이 하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만성적 질환이나 각종 암발생율이 낮다. 어떤 종합 병원 내과팀의 채식자와 비채식자의 동맥경화성 심장질환 위험도 비교연구(대한순환기학회 학술지 제38차)결과에 따르면 채식자는 비채식자에 비해 혈중 콜레스테롤치가 현저히 낮은 결과를 보여 관상동맥 심장질환의 발생 위험율이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채식을 위주로 한 고섬유질 식사의 장점을 하나 들면 바로 체중조절인데, 이는 섬유소의 포만 효과가 과식을 방지하기 때문이다.

얼마나 필요한가?

FDA 에서는 하루에 최소한 5 서빙(Serving)의 과일과 채소, 그리고 곡식은 6서빙(Serving)을 섭취할 것을 권장하고 있다. 서빙(Serving) 크기는 다음과 같다.

과일
중간 크기 하나
작은 크기 2개
1컵의 통조림된 과일이나 자른 과일
마른 과일 4개

채소
요리한 채소 ½ 컵
1컵 샐러드
감자 하나

정제되지 않은 곡식
빵 한 조각
현미 ½ 컵
국수 1컵

내게 주어진 선택의 권리


우리의 양심은 예민해져야 한다. 가장 작은 음성도 가장 크게 알아들을 수 있는 예민함이 우리에게 있어야 한다. 사람들은 종종 하나님을 실험실 안에서 증명해 보려고 애쓰지만, 양심 속에서 속삭이는 하나님의 음성은 좁은 실험실에서 증명하거나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온 우주를 창조하시고 지금도 주관하시는 위대한 분이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도 않지만, 지금도 인간의 양심을 통하여 분명한 음성을 발하신다.

매일의 삶 속에서 우리의 양심은 선과 악의 두 가지 음성을 듣는다. 한 쪽에서는 선과 진리의 음성이 들리고, 다른 한 쪽에서는 악과 거짓의 음성이 들린다. 어떤 음성을 받아들여야 하는가? 세상은 나에게 악의 음성을 받아들이라고 강요한다. 세상은 나에게 거짓과 죄를 강요한다. 이 세상에서는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서 악이 선을 누르고 승리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선을 추구하는 나의 양심은 고뇌와 고통 속에서 날마다 원치 않는 시련을 받는다. 때때로 내가 어떤 것을 선택할 수 있다는 사실이 나를 괴롭힌다. 차리리 선을 택할 수 밖에 없는 입장에 있거나, 악을 택할 수 밖에 없는 일말의 핑계가 나에게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때도 있다.

그러나 나는 안다. 하나님도 내게 선택을 요구하시고, 악마도 내게 선택을 요구한다는 사실과 내가 선을 선택할 때마다 내 영혼 속에 완전한 평안이 깃든다는 사실을. 내가 악을 선택할 때마다 양심은 더 큰 괴로움을 당하였고, 평화와 행복은 자취를 감추어 버렸으며, 잔잔한 미소는 사라져 버렸다. 선은 희생을 요구하고, 악은 돈과 명예를 보장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선은 인생에 커다란 손해를 가져오고, 악은 번영을 약속하는 듯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오히려 선은 참된 행복과 평화를 약속하며, 악은 불안과 초조와 긴장을 가져다 줄 뿐이다. 선은 영원한 평화를 약속하지만, 악의 뒤에는 순간적인 만족과 영원한 고뇌가 따를 뿐이다.

무엇이 옳은가를 결정하는 문제는 군중들의 지지도에 의해서 정해지는 것이 아니다. 어떤 것이 진리인가를 판별하는 것은 사람들의 표결에 의해서 정해지는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역사는 많은 경우에 있어서 진리가 소수의 편이었음을 말하고 있다. 진리는 오히려 당대에는 냉대와 오해와 조롱을 받는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진리는 수백여년이 지난 다음에야 그 가치를 인정받는다. 바로 이러한 이유가 사람들이 진리를 선택하기 꺼려하는 이유가 아닐까?

비록 부족하지만, 나는 오늘도 진리를 선택하고 싶다. 오늘도 선을 선택하고 싶다. 그러나 문제는 나의 의지가 너무나 약하다는 점이다. 나의 의지와 결심은 썩은 새끼줄 같아서 사흘을 넘기지 못한다. 그러므로 나는 나로 하여금 진리와 선을 선택할 수 있는 힘을 줄 수 있는 능력자, 예수님을 찾아가야만 한다. 그분께서는 나의 연약함과 사정을 잘 아시고 도와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기 때문이다.

봉사와 희생의 위험성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선과 봉사를 통하여 죄로 인한 양심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한다. 심지어는 교회에 바치는 헌금을 통하여 죄책감에서 벗어나려는 그리스도인들의 숫자가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나 역시 자선과 봉사를 통하여 그리스도인의 참된 경험을 얻기 위해서 노력을 기울였던 적이 있다. 빈민 구호 병원에 보조 간호원으로 들어가서, 그들의 발과 배설물을 닦아주며, 환자들로부터 온갖 욕설을 들으면서도 즐거운 마음으로 인내의 수련을 받고자 하였다. 그러나 자선과 봉사는 사랑의 결과이지 원인이 아니다. 자선과 봉사 사업에 열심히 종사하면, 결국에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관념은 그럴 듯하게 보이지만, 진리는 아니다. 자선과 봉사의 행위가 자비로운 마음을 배양시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마음 속에 존재하는 사랑의 수준을 결코 넘어설 수 없다. 자신의 마음 속에 존재하지 않는 봉사와 자선을 억지로 이끌어 낼 때, 자선은 위선이 되고, 봉사는 교만으로 발전하게 된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교회와 사회를 위하여 수많은 자선과 봉사를 베푼 사람이 결국에는 교만한 목사와 장로의 모습을 드러내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자선과 봉사가 나를 교만하게 만든다면, 선행은 나의 원수이다. 자선과 봉사의 양이 많으면 많을수록 교만과 위선의 깊이는 깊어질 수 있다.

조심하라! 고아원을 세워서 하나님과 사람에게 봉사하려고 하는 자여! 세상이 그대의 자선심을 인정하고 교회가 그대의 신앙적 헌신을 칭찬할 때, 그대는 바로 지옥의 벼랑길 위에 서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눈에 보이는 사업이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보다 더 높게 평가되는 오늘날, 그대의 이름이 높이 들리면 들릴수록 조심하라! 위대한 자선 사업가 하워드는 임종시에 단 두마디의 유언을 남겼다. 그의 유언은 그의 미친 아들이 회복되기를 바라는 것과 자기를 위해 비석을 세우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대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을수록 안전하다.

자신의 마음과 생애 속에 숨겨져 있는 죄를 해결하지 않은 채 자선 사업가가 되기를 원하는 자가 있는가? 조심하라! 세상에 이름을 날리고 싶어하는 정치가와 연예인들이 자선 사업에 많은 돈을 투자하는 모습을 보라! 그와 마찬가지로, 가짜 그리스도인들도 자선과 봉사를 인기의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다. 설교를 잘 하지 못하는 야심적인 목사도 자선가가 되면, 세상의 주목을 받을 수 있다. 그러므로 자선 사업에 종사하는 사람을 여러 사람들 앞에서 칭찬하지 말라!

“너는 남을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그 구제를 은밀히 하라. 그리하면 은밀히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네게 갚아 주실 것이니라.”
마태복음 6:4.

서론 - 기도의 올바른 이해


하나님께서는 천연계와 성경을 통하여 우리에게 항상 말씀하고 계신다. 또한 성경은 성령께서 항상 우리의 마음 속에 역사하고 계신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와 교제에 있어서 그것만으로는 충분치가 않다. 우리도 하나님께 말하는 일이 필요하다. 관계란 항상 서로 간에 의사 소통과 대화가 있어야 이루어지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우리의 심정을 하나님 앞에 토로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영적 생명과 힘을 얻기 위하여 우리 하늘 아버지와의 실제적인 교제를 가져야 한다. 물론 우리는 우리의 마음으로 하나님을 그리워하며 사모하기도 하고 또한 그의 업적과 그의 자비와 그의 축복에 대하여 명상하기도 하지만 이것은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교통하려면 우리의 실제적인 매일의 생활에 대하여 하나님께 무엇인가 말하는 것이 있어야 한다.

기도는 마치 친구에게 대화하는 것처럼 하나님께 우리의 심정을 펼쳐놓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형편을 하나님께 알리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의 형편과 마음을 우리 자신보다도 더 잘 알고 계시기 때문에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기도의 목적은 우리 자신이 하나님을 우리 생활 속에 더 잘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드리는 것이다. 기도는 하나님을 우리에게로 내려오시게 하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자신들을 하나님께서 계신 곳으로 올라가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더 확실하게 이해하기 위하여 하나님과 대화하는 일이 기도이다. 이러한 생각은 기도에 대한 우리의 관념에 커다란 혁명을 일으켜 줄 수가 있다. 기도란 우리의 뜻을 관철하기 위하여 어린아이가 떼를 쓰듯이 하나님께 매어 달리거나 졸라대는 식의 호소가 아니다. 기도는 우리의 원하는 것을 받아낼 때까지 하나님의 팔을 비틀어대는 식으로 붙들고 늘어지는 어거지도 아니다. 기도는 오히려 우리가 조용히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고 그분의 뜻을 수용할 수 있게 되기 위하여 주님과 나누는 대화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보다도 훨씬 더, 우리를 향한 최선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이 점이 바로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기도에 대하여 오해하고 있는 중요한 문제이다.

예수께서는 세상에 계실 때에 당신의 제자들에게 어떻게 기도할지를 가르쳐 주셨다. 주님께서는 저희의 매일의 필요를 하나님께 아뢰고 저희의 모든 염려를 하나님께 맡겨 버리라고 하셨다. 그러면 그들의 기도를 들어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예수님 자신도 이 땅에 거하실 때에 자주 기도하셨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의무와 시련을 위하여 굳세게 나아갈 수 있도록 당신의 아버지께 새로운 능력을 달라고 늘 기도하셨다. 예수께서 이른 아침에 기도하시고 산에서 내려오셨다는 기사를 우리는 성경에서 자주 읽게 된다. 예수는 모든 일에 우리의 모본이 되신다. 예수께서는 우리와 같이 연약한 인간의 몸을 가지고 오셨기 때문에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셨으나 죄는 없으셨다(히 4:15절 참조). 그분도 죄악 세상에서 마음 속의 많은 투쟁과 고민을 경험하셨다. 그분도 인간으로 오셔서 사셨기에 절실하게 기도가 필요하셨다. 예수께 있어서 기도는 하나의 큰 특권이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아버지와 교통하는 기도의 경험에서 큰 위안과 기쁨을 발견하셨다. 인류의 구주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도 기도의 필요를 느끼셨는데, 하물며 이렇게 연약하고 죄가 많으며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 인생들이야 어떠하겠는가!

우리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풍성한 축복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려고 항상 기다리고 계신다.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의 샘에서 마음껏 퍼마시는 것은 우리의 특권이다. 우리가 기도를 그렇듯 적게 하는 것은 얼마나 이상한 일인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 중에 아무리 비천한 자일지라도 진정으로 하는 기도 듣기를 고대하시지만 우리들은 우리의 소원을 하나님께 기도로 말씀드리기를 싫어하는 것 같다. 하나님께서는 무한하신 사랑의 마음으로 사람들을 그리워 하시고 저희가 구하고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주시기를 원하시지만 우리들이 이렇게 기도를 적게 하고 있으니 이러한 모습을 보고 있는 하늘의 천사들은 얼마나 답답하겠는가? 천사들이 아무리 우리를 도와 주고 싶어도 구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도와줄 수가 없어서 안타까워 하고 있을 것이다. 천사들은 하나님 앞에 경배하기를 좋아하며 그분 앞에 가까이 있기를 좋아한다. 그들은 하나님과 대화하는 일을 저들의 최고의 기쁨으로 여기며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오히려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는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이 기도하는 일 없이 그저 하루 하루를 살아 가고 있는 것이다.

마귀는 기도를 게을리하는 자들을 어두움으로 가두어 놓는다. 이 원수의 속삭이는 시험은 저들을 죄에 빠뜨리려고 유혹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기도의 특권을 사용치 아니하였기 때문이다. 기도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을 쌓아 둔 하늘 창고를 여는 믿는 자의 손에 있는 열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이 어쩌면 이렇게 기도하기를 싫어할 수 있을까? 끊임없이 기도하고 늘 깨어있지 않으면 우리는 부주의하게 되고 정로에서 탈선하게 되는 것이다. 사단은 우리가 열성 있는 기도를 통하여 시험을 이길 만한 은혜와 능력을 얻지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는 길을 막으려고 끊임없이 애쓰고 있다.

기도에 대한 또 다른 중요한 면에 대하여 생각해 보도록 하자.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기를 기대하려면 거기에 몇 가지 조건들이 있다.

첫째는,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도움을 받을 필요를 느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기를 “내가 갈한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리라” (사44:3)고 말씀하셨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같이 하나님을 앙망하는 자들은 확실히 배부르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마7:7)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롬 8:32)라고 하시지 않았는가?

두 번째는, 회개하는 심정으로 주 앞에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마음에 죄를 품든지, 알고 지은 죄를 버리지 아니할 것 같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실 것이다. 그러나 회개하고 통회하는 자의 기도는 언제든지 받으실 것이다. 모든 아는 죄를 바로잡은 후에야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응답하실 것을 우리가 믿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예수의 공로이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는 것은 그분의 보혈이다. 그러나 우리가 주께서 받으시는 조건을 응하기 위하여 우리 편에서도 할 일이 있는 것이다.

세 번째, 응답받는 기도의 또 하나의 요소는 믿음이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히11:6) 한다. 예수께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막11:24)고 하셨다. 하나님의 약속은 광범위하고 무한하며 약속을 허락하신 분은 진실하신 분이시다. 우리가 구하는 그것을 꼭 우리가 구하는 바로 그 시간과 그러한 방법대로 받지는 못 할지라도 우리는 주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실 것을 믿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너무나 흠이 많고 장래 일을 잘 내다보지 못함으로 어떤 때에는 우리 자신들에게 축복이 되지 못하는 것들을 구하기 일쑤이다. 그러므로 우리 하늘 아버지께서는 사랑으로써 우리에게 가장 좋은 방법대로, 다시 말해서 만일 우리가 영적으로 눈이 밝아 그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볼 수만 있다면 우리 자신도 그렇게 원하며 구하게 될 그러한 방식으로 우리의 기도를 응답하여 주시는 것이다.

우리의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 듯한 때라도 우리는 그 허락을 굳게 붙잡아야 할 것이다. 응답의 시간은 확실히 올 것이며 우리에게 절실히 요구되는 축복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기도는 언제나 우리가 꼭 원하는 방식으로 응답되고 또한 우리가 꼭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망상이다.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지혜로우시므로 잘못하실 리가 없는 것이요, 지극히 선하시기 때문에 정직히 행하는 자에게 반드시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비록 기도가 즉시 응답되지 않을지라도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라는 그의 확실한 허락을 믿어야 한다.

네 번째, 우리가 하나님께 긍휼과 축복을 구하려고 할 때에 우리는 우리 마음 가운데 사랑과 용서의 정신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마6:12)라고 기도하면서 어떻게 용서하지 않을 마음을 품을 수 있겠는가? 우리의 기도가 응답되기를 바랄진대 우리는 우리가 용서함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용서해 주어야 할 것이다.

다섯 번째, 기도를 꾸준히 하는 일은 응답을 받는 조건이 된다. 우리의 믿음과 경험이 자라나기를 원할진대 우리는 항상 기도하여야 한다. 우리는 깨어서 항상 기도하며, 감사함으로 기도에 항상 힘써야 한다. 베드로는 신자들에게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벧전4:7)고 권하였다. 바울은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빌4:6)고 가르쳤다. 유다는 “사랑하는 자들아… 성령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키” (유 20,21)라고 말씀하였다. 끊임없는 기도는 우리의 심령이 하나님과 끊임없이 연결됨을 의미하는 것이며 그리하여 생명이 하나님께로부터 흘러나와서 우리의 생명으로 들어오고 다시 순결과 거룩함이 우리의 생명에서 하나님께로 흘러 돌아가게 한다.

기도에 있어서는 부지런함이 필요하다. 무슨 일이든지 간에 우리의 기도하는 일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하여야 한다. 예수와 우리들의 심령 사이에 교통함이 막히지 않도록 온갖 노력을 다해야 한다. 기도할 때에 우리가 늘 습관적으로 하는 곳으로 가서 기도하는 것이 좋다. 하나님과 교통하기를 참으로 원하는 자들은 기도회에 참석하기를 좋아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가정 안에서 기도할 것이요, 무엇보다도 은밀한 기도를 등한히 하여서는 안된다. 기도를 등한히 하면서 영혼이 번영할 수는 없는 것이다. 가족 기도와 공중 기도만으로는 넉넉지 않다. 홀로 조용한 가운데서 하나님의 감찰하시는 눈 앞에 우리의 심령을 내어놓는 일이 중요하다. 비록 우리의 주위가 부패된 분위기로 둘려 있을지라도 우리는 그 더러운 공기를 호흡하지 않고 하늘의 깨끗한 공기 가운데서 살 수 있다. 우리는 진정한 기도로써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올림으로 불순한 망상이나 불경한 생각이 우리의 마음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모든 문을 막을 수가 있다. 하나님의 붙들어 주심과 그분의 축복을 받기 위하여 마음 문을 열어 놓는 자들은 이 땅의 분위기보다 더 거룩한 분위기 가운데서 살 수 있게 될 것이며 하늘과 끝없는 교통을 지속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우리의 마음은 찬송의 날개를 타고서 하늘로 더욱 가까이 오를 수가 있다. 찬송은 곡조에 담은 다른 형식의 기도이기 때문이다. 기도는 우리의 단순한 권리가 아니라 우리의 특권이다. 우리는 더 많이 기도하여야 한다. 세상의 마지막이 가까울수록 우리는 더욱 더 많이 기도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기도는 성경적인 기도가 되어야 한다. 극단적이고 광신적인, 그리고 지극히 이기적이며 무엇을 얻어 내기 위해 보채는 형식의 기도는 이제 그만 두어야 한다. 그러한 기도는 사실상 자기 도취이지 진정한 의미의 하나님과의 대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기도는 우리의 권한이 아니다. 기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특권이다.

1부 - 기도하는 이유


    우리는 기도해야 하는가?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다 아신다. 우리가 일일이 고하지 않아도 그분께서는 우리의 필요를 아신다. 자녀는 먹을 것과 입을 것, 잠자리를 달라고 아버지께 조르지 않는다. 이런 것들은 자연스럽게 그에게 공급되는 것이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 우리의 필요를 아심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는 그분께 우리의 필요를 아뢰어야만 하는가?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공급하시는 것이 너무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인가? 아버지께서 채워주실 것을 다 알면서도 무릎꿇고 비는 것은 우리의 품위를 떨어뜨리는 일이 아닌가?

    그에 대한 답은, 사람들이 기도하든지 안 하든지 간에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주시며 또한 그분은 사람들을 차별 대우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그분은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 모두에게 똑같이 비를 내리신다. 마5:45. 아무도 무언가를 위해 빌어야 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전혀 편애함 없이 모두의 필요를 채우신다. 사실, 많은 경우 악한 사람들이 의로운 사람들보다 더 잘 산다. 의심할 바 없이, 하나님께서는 이런 경우를 허락하심이 틀림없다. 만일 그분께서 의로운 자들에게만 복을 주시고, 악한 자들은 가난으로 저주하신다면, 어떤 이들은 단지 잘 살고자 하는 욕망 때문에 하나님께로 돌이킬 것이다. 그렇다면 복은 단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섬기도록 매수하는 뇌물에 지나지 않을 것이며 이것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맞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이생에서의 형벌에 대한 두려움이나 상에 대한 욕심 없이 선과 악 둘 중에 하나를 택하기 원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공평하게 치우침 없이 대하시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미워하는데도 경제적으로 부요하다. 한편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 중에는 간신히 생계를 이어나가는 이들도 있다. 전자는 근면하게 일하고, 그들에게 있는 것을 잘 간수하며 하는 모든 일에 부지런하다. 후자는 부주의하고 나태하며 기도는 많이 하고 일은 거의 하지 않으며 하나님께서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실 것이라고 느낀다. 하나님께서 자기 편에 계시고 또한 도와주실 것이니 철저하게 준비할 필요가 없다고 믿는 그리스도인 의사보다 열심히 준비한 믿지 않는 외과 의사가 더 좋은 기술을 갖고 성공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기도해야 하는가? 만일 하나님께서 구하는 자에게 특별한 도움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면, 기도하지 않는 사람과 똑같이 열심히 연구하고 일해야 한다면, 도대체 왜 기도해야 하는가? 기도하는 농부가 믿지 않는 그의 이웃만큼이나 열심히 밭에서 일해야 한다면, 기도해서 더 좋을 것이 무엇이 있는가? 무신론자인 친구보다 더 나은 외과 의사가 될 수 없다면 왜 의대생은 하나님께 도우심을 구해야 하는가?

고백에 대한 삐뚤어진 인식

    이 모든 질문들은 전부 기도란 것은 일하지 않고도 하나님께로부터 무엇인가를 얻어낼 수 있는 방편이라는 전제를 기초로 한 것이다. 믿지 않는 자는 성공하기 위하여 일한다. 그리스도인은 기도로서 일을 대신할 수 있는가? 하나님의 뜻에 따르면, 아니다. 기도는 행함이나 일, 혹은 다른 어떤 것도 대신할 수 없다. 기도하고 회개함으로 용서받을 수는 있지만, 악한 행동의 결과를 바꾸거나 그에 따르는 형벌을 없이 할 수는 없다. 다윗은 그의 죄를 자백하고 깊이 회개하였지만, 그가 지은 죄의 결과들은 없어지지 않았다(삼하12:13~14). 이것이 바로 사람은 망각하기 쉽고 그러므로 항상 이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는 원칙이다.

    여러 해 전, 나의 학생들 중 한 명이 중요한 시험에서 부정 행위를 하였다. 그는 평균 정도 되는 학생이었는데 시험 결과가 너무 잘 나와서 B학점을 받았다. 얼마 후 그의 양심은 그를 괴롭혔고 그는 자신의 부정 행위를 깊이 뉘우치며 나에게 그것을 고백하는 편지를 썼다. 나는 그가 고백해서 기쁘다고 말해 주었다. 나는 그의 사과를 받아들이고 그의 점수를 B에서 F로 고쳤다고 알려주었다. 그 학생은 내가 한 이 일에 대해 분노를 표시하면서 말하기를 만약 자백한 것의 결과가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결코 자신의 잘못을 얘기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의 자백은 B학점을 얻을 만하지 았았던가? 그 학생은 그가 스스로의 힘으로 치르지 않은 시험에 왜 내가 B학점을 줄 수 없는지를 이해하지 못하였다. 자백한다는 것으로 그의 부정 행위를 고칠 수는 없으며 B학점이 요구한 공부를 대신할 수도 없다는 것을 그는 깨닫지 못했다. 그 학생의 자백의 결과로 그에게 B학점을 준다면 부정 행위를 한 다른 학생들에게도 똑같이 해야 될 것이며 그렇게 된다면 정직하게 학점을 받은 모든 학생들에게 불공평한 일이 될 것이다. 상을 얻으려고 하는 자백은 진정한 자백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죄를 자백하면 형벌을 면하게 해주겠다고 약속하심으로 사람을 매수하지 않으신다. 순종하는 자에게 상이 허락된 것은 사실이나, 무엇인가를 얻어내기 위해 하는 순종이나 자백은 거의 가치가 없다고 보아야 한다. 사실 그런 순종은 아무런 도덕적 가치가 없다. 그것은 마치 어린 아이가 까불지 않으면 사탕을 주겠다는 약속 때문에 얌전하게 순종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욥의 경우에 바로 이 원칙이 걸려있었다. 사단은 조소하듯이 “욥이 아무 이유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 아십니까?” 라고 물었다. 사단은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복을 주셨기 때문이고 욥이 경건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부하게 해주셨기 때문이라고 넌지시 말하였다. 하나님께서 그를 울로 두르셔서 어떤 악도 그를 건드리지 못하게 하셨고, 그분께서 그 손의 일을 축복하셔서 그의 재물을 늘리셨기 때문에 욥이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이라고 사단은 이야기하였다. 욥1:10.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 욥1:11.

    하나님은 사단의 불평을 받아들이시고 말씀하시기를,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고 하셨다.  이 시험을 허락하심으로 하나님께서는 욥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재물을 바라고 하는 것이라는 사단의 고소를 꺾고자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이기적인 동기 없이 하나님을 섬기는 자, 하나님께서 축복을 거두어 가신다고 해도 하나님을 믿는 자가 이 세상에 있음을 보이고자 하셨다. 비록 욥은 그의 결정이 얼마나 중대한 것인지 알지 못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문제에 있어서 욥에게 의지하고 계셨던 것이다.

    욥의 재물을 뺏을 수 있다는 하나님의 허락을 받고 사단은 욥이 가진 모든 것, 심지어는 그의 자녀들까지도 모두 빼앗았다. 그는 완벽한 일을 해냈다. 종들은 달려와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재앙들을 보고하였다.  갑작스런 재앙에 할 말을 잃은 욥은 나직이 아뢰었다.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욥1:21, 22. 사단은 하나님께서 욥이 가진 것을 제하신다면 욥이 하나님을 저주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대신 욥은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였다. 이것은 하나님의 완승이었다. 왜냐하면 사단이 이 시험의 조건들을 내세웠고 하나님께서 그것에 동의하셨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이 지구상에서 한 사람만큼은 이익을 얻고자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님이 증명되었다.

    사단은 패배하였다. 그러나 잠시 후 그는 다시 돌아와 말하기를 그가 진 것은 하나님께서 욥의 몸에 손대지 못하도록 하셨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만일 하나님께서 사단으로 하여금 “그의 뼈와 살을 치도록” 하신다면 욥이 대면하여 욕할 것이라고 하였다. 욥2:5 참조. 하나님께서는 이 시험의 법칙을 바꾸는데 동의하시고, “내가 그를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생명은 해하지 말지니라”고 말씀하셨다.  “사단이 이에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서 욥을 쳐서 그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악창이 나게 한지라” 욥2:7. 여전히 욥은 왜 하나님께서 이러한 시험을 그에게 허락하셨는지 알지 못했지만 그의 믿음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의 부인은 그에게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했지만 욥은 요동하지 않았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결과는 첫 번째 시험과 똑같았다.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치 아니하니라” 욥2:10.

    시험은 끝났다. 하나님께서는 사단의 주장과 고소가 허위였음을 증명하셨다. 욥은 이익을 얻고자 하나님을 섬긴 것이 아니었다. 욥은 다음과 같은 승리의 말로 그의 믿음을 표현하였다. “그가 나를 죽이실지라도 나는 그를 신뢰하리라” 욥13:15(KJV).

왜 기도하는가?

    왜 기도하는가, 라는 질문이 생기는 이유는, 사람들이 기도할 때에는 거기에 따르는 이점이 있으며 만약 그러한 유익이 없다면 기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데 있다. 이러한 생각은 기도를 상업적으로 사용하는 것과 다를 바 없으며 기도의 본질을 무시하는 것이다.

    기도의 본질은 하나님과 교통하고 친구에게 하듯 그분과 대화하는 것이다. 우리는 왜 친구들과 어울리고 이야기를 나누는가? 우리 자신을 부요하게 하기 위해 그들로부터 무언가를 얻으려고 함인가? 이러한 것을 생각하는 자체가 진정한 우정과 친교에 정반대되는 것이다. 왜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서로 어울리고 함께 앉아서 이야기하기를 좋아하는가? 그들이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정답이 아닌가? 다른 설명이 필요없다. 자신의 손익을 따지는 것은 그들의 목적과 멀다. 참으로 그러한 동기는 진정한 사랑에 치명적일 것이다.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닌, 주는 것에 기초한 것이다.

    왜 기도하는가? 왜 사랑하는가? 마찬가지로, 왜 숨쉬는가? 라고 물을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다 자연스럽고 필요한 것들이다. 사랑이 있는 곳에 교제가 있고, 기도가 있다. 다른 어떤 것이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왜 기도하냐고 묻는 것은 이상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에게 있어서 기도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므로 기도 없는 삶을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어린 아이에게 왜 기쁘거나 슬플 때 엄마에게 달려가서 이야기하는지, 또 자기가 발견한 것을 엄마에게 보여주는지 묻는다면 그 아이는 틀림없이 왜 이런 질문을 하는가 하고 이상하게 여길 것이다. 엄마 외에 누구에게로 아이가 달려가겠는가? 그 이상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엄마는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엄마는 아이의 지혜의 샘이다. 엄마는 상처들을 아물게 하고 눈물을 마르게 할 수 있다. 그녀는 어떤 경우에 어떻게 해야 할지 다 알고 있다. 그녀는 이해한다. 때때로 아이는 단지 엄마를 사랑한다고 말하기 위해 엄마에게 달려간다. 볼을 쓰다듬어 주고, 뽀뽀해 주고, “엄마도 너를 사랑해”라고 말할 때, 이 모든 것이 왜 아이가 엄마에게 달려가는지를 설명해 준다. 아이에게는 왜 엄마에게 달려가는지 묻는 것이 유치하고 이상한 것이다. 그 아이는 아마도 어른들은 뭘 모른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그 아이가 옳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은 그가 왜 기도하는지 묻는 것은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하나님께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구하고 그것을 받지만, 믿지 않는 그의 이웃 역시 기도하지 않고도 양식을 받는 것을 안다. 그는 하나님께서 까마귀와 참새와 악한 자들을 모두 먹이신다는 것을 안다. 그러면 왜 기도하는가? 왜냐하면 믿지 않는 사람이 받는 사람으로서 갖춰야 할 조건에 응낙하기를 원치 않음으로 못 받는 것을 그리스도인은 양식과 더불어 받기 때문이다.

    아이가 자라나면서, 아버지는 그의 자녀가 음식과 옷 이상의 것을 필요로 할 것임을 안다. 그는 교제와 친교를 필요로 할 것이다. 그는 이해심 많은 아버지의 조언을 필요로 할 것이다. 아들은 스스로에게 그러한 도움이 얼마나 필요되는지 모를 수도 있지만 아버지는 그것을 알며 그 필요를 채우기 위해 기꺼이 그의 최선을 다한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육신을 위하여 모든 이들에게 양식을 주신다. 또한 원하는 자들에게 정신과 영혼을 위한 양식을 주신다. 그분은 모든 이들에게 이것을 제공하시지만, 많은 이들이 육신의 양식은 받아들이면서 영혼의 양식은 거절하여 영원히 잃어버림을 당한다. 하나님께서는 모두에게 이것을 제공하신다. 그분은 모두에게 그 손을 펼치시지만 오직 소수만이 하나님의 손을 잡는다. 하나님께서 더 이상 무엇을 하실 수 있는가? 인간이 그분께서 제공하신 것을 거절하는 것은 그분의 마음을 너무나 슬프게 한다.

    왜 기도하는가? 하나님께로부터 무엇인가 얻어내기 위함이 아니다. 개인의 이익을 위한 우정이야말로 만인의 지탄을 받아 마땅하다. 사대주의자는 양의 가죽을 쓴 늑대에 불과하다. 우정은 절대로 이익을 얻어내기 위해 사용되어서는 안된다.

    왜 기도하는가?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친구이기 때문이다. 무아적인 사랑에 기초한 우정보다 더 거룩한 것은 없다. 그것은 이 땅에 존재하는 하늘이며, 하나님께서 인간의 심장에 넣어주신 사랑과 동정으로 충만할 성도들의 영광스러운 친교를 미리 맛보는 것이다.

우정

    그리스도께서는 “너희는 나의 친구라”고 말씀하셨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요15:14, 15.

“너희는 나의 친구라.” 이것보다 더 영광스럽고 놀라운 일이 있는가? 친구를 갖는 것 - 당신이 신뢰할 수 있는 사람,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 마음의 가장 깊은 곳을 열 때 이해할 수 있는 사람, 당신의 확신을 견고한 신뢰로써 누설하지 않는 사람, 당신이 갖고 있는 가장 거룩한 소망과 야심을 이야기할 때 마음속으로 비웃거나 업신여기지 않는 사람, 그 마음이 당신의 사랑과 연결되어 있고 당신의 감정에 반응하는 사람, 비록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당신을 끝까지 믿어주는 사람, 다른 이들이 오해할 때 당신을 변호해 주고, 온 세상이 등을 돌려버릴 때 당신 곁에 서 있는 사람, 그 자리에 없거나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라도 한결같은 사람, 당신의 약점을 알고도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 슬플 때나 도움이 필요할 때 당신 곁에 있기 위해 대륙을 횡단할 사람, 절대로 당신을 버리거나 떠나지 않을 사람 - 이것이야말로 궁극적인 우정인 것이다!

    만일 당신에게 그런 친구가 있다면, 그 친구를 꼭 잡으라. 폭풍이나 태풍, 비바람, 눈보라, 물불이 닥쳐와도 그와 헤어지지 말라. 살든지, 죽든지 그에게 매달리라. 그와 대화하라. 그와 교통하라. 그를 사랑하라. 이러한 친구가 바로 그리스도이다. 결코 그를 저버리지 말라. 그는 절대로 당신을 저버리지 않을 것이다.

친교

    기도는 하나님과 이야기하는 것, 혹은 그분께 말하는 것, 그 이상이다. 그것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친교요, 생명이다. 우정이나 친교에 있어서 가장 큰 기쁨은 말하는 데 있지 않고, 말을 뛰어넘어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데 있다. 진정한 친구는 단 한 마디의 말도 없이 귀중한 시간을 보낼 수 있다. 두 사람은 조용하게 바닷가에 앉아 손을 잡고 침묵 속에 달콤한 교제를 즐길 수 있다. 두 사람은 숲속을 걸으며 단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은 채 자연과, 하나님과, 그리고 서로와 교제를 나눌 수 있다. 두 사람이 무릎을 꿇고 헌신하며 하나님과 서로에게 자신들을 바칠 때에, 완전한 이해가 영혼에 깃들 것이다. 겉으로 드러남 없이 마음과 영혼의 교통이 있을 수 있다. 비록 입으로 하는 말은 없을지라도, 사랑, 우정, 동의, 그리고 조용한 기쁨과 넘치는 행복이 있다. 이런 경험을 가진 사람들은 다음의 이야기의 뜻을 이해할 것이다. 평생을 함께 한 친구 둘이 인생의 황혼이 가까워올 때, 어느 조용한 오후 둘이 함께 말 한 마디 없이 앉아있다가 저녁이 되면 한 사람이 둘 모두의 감정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오늘 오후 우리 함께 정말 즐거운 시간을 보냈구나.” 이러한 우정을 이해하는 사람들은 결코 “왜 기도해야 합니까” 라고 묻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지금 이곳에서 맛볼 수 있다. 천국은 단지 미래를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지금 실제로 이루어질 수 있다. 나는 지금 수마트라 섬 일만 피트 상공 위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방금 고도, 속도, 기온과 날씨 상황 등이 방송되었다. 나의 귀중한 친구들은 멀리 떨어져있다. 그러나 나는 지금처럼 그들의 사랑을 느끼고 즐거워해 본 적이 없다. 나는 그들이 나를 사랑함을 안다. 나는 그들이 나를 위해 기도하고 있음을 안다. 그 사랑을 알기 때문에 나는 편안히 쉰다.

    스바냐 3장 17절보다 더 아름답게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해 놓은 곳은 없을 것이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이 구절을 읽으면 어머니가 그녀의 어린 것을 품에 안고 기쁨에 겨워 노래하며 사랑으로 편히 있을 때 아이가 엄마에게 바짝 다가붙는 평화로운 그림을 떠올리게 된다. 평화, 만족, 사랑에 대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그분의 사랑을 표현하기 위하여 예로 든 것이다. 어머니가 품 안의 아이에게 조용히 노래불러 주듯이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향한 사랑으로 노래 부르신다. 그분은 그 사랑 안에 쉬신다. 이것은 그 속성이 사랑이신 하나님께 평화와 만족을 드린다. 어떻게 우리가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분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는가? 비할 데 없는 사랑으로 두르신 그분을 한번 쳐다보기만 한다면 어찌 우리가 그분과 교제를 나누지 않을 수 있겠는가? 기도는 교제이다. 기도는 생명이다. 기도는 사랑이다. 기도는 영혼의 호흡이다.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기도하지 않고 살 수 있는가?

귀향

    우리가 하늘 아버지의 크신 사랑에 대해 올바르게 이해할 때, 우리는 결코 낙담하거나 실망할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이 집에 돌아올 날을 열망하시며, 그 생각에 기뻐하신다. 지금도 그분께서는 이제 곧 되어질 일을 보며 즐거워하신다.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자녀들이 집으로 돌아오는 세기의 사건을 준비하시며 하나님께서는 행복하시다. 오래지 않아 다가올 이 날은 하나님께도 어마어마한 날이 될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돌아오시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본향에 돌아오기를 기다리신다. 그리고 그분의 사랑과 열망은 우리의 것보다 더욱 더 크다. 그분께서는 이미 오래 동안 기다려 오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그분의 사랑과 친교, 그리고 돌보심과 인도하심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기도한다.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또한 다른 어떤 곳에서도 얻을 수 없는 영혼의 만족감을 그분에게서 얻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께 기도한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어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분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 알기 위해 기도한다. 그분의 마음을 바꾸도록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바꾸시도록 기도한다. 그분이 우리를 위하여 당신의 계획을 바꾸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를 도우사 그분의 계획을 기꺼이 받아들이게 하시도록 기도한다.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고통을 견딜 힘을 달라고 기도한다. 세상에서 데려가 달라는 것이 아니라 세상 안에서 신실하게 살도록 도와달라고 기도한다. 고생이나 시련에서 도망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들을 감내할 인내심을 달라고 기도한다. 일감을 치워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잘 할 수 있도록 지혜를 달라고 기도한다.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신 분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분과 성도들의 교제를 귀중하게 여기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기도한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기도란 진정한 감동 없이 해내야 될 일이고, 특권이라기 보다는 의무가 되어버렸다. 이것은 정말 슬픈 일이다. 이러한 태도는 단지 뜨뜻미지근한 그리스도인에게만 제한된 것이 아니다.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이름있는 사람들에게도 기도는 습관적인 것이 되어버렸다. 많은 경우, 이것은 사람들이 기도의 의미와 그 무한한 가능성을 희미하게 밖에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기도를 말하고, 기도를 외울 뿐, 자신들의 마음을 하나님께 토로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진수성찬을 얻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저 빵 부스러기만 주울 뿐이다. 그들로 하여금 기도와 기도의 가능성을 연구하게 하라. 그들이 기도할 때 묵상하게 하라. 그들로 하여금 친구에게 하듯이 하나님과 이야기하는 법을 배우도록 하라. 그리하면 그들은 전에 결코 꿈꾸지 않았던 영역에 다다를 것이다.

2부 -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열쇠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저희에게 비유로 하여” 눅18:1. 이 비유는 한 과부의 청원을 마침내 들어준 불의한 재판관에 관한 것이었는데, 그는 공의에 기초해서가 아니라 그녀의 끈질김 때문에 그녀의 소원을 들어준 것이었다.

“비유”라는 단어는 라틴어 “파라볼라”에서 오는데 이는 비교나 예화를 의미한다. 이것은 어떤 일을 상징적으로 빗대어 표현하는 것이다. 이 비유의 목적은 그리스도인들이 기도할 때에 낙망치 아니하고 또한 너무 빨리 포기하지 말아야 할 것을 가르치기 위함이었다. 낙망한다는 것은 약하고 힘없는 상태를 말한다. 그것은 희망과 믿음을 잃어버림을 상징한다. 그것은 낙심하고 포기하는 사람을 묘사하는 것이다. 낙망은 희망, 용기, 믿음, 그리고 끈질김의 반대이다.

비유에 나오는 과부는 계속하여 재판관을 찾아가 호소하였다. 그녀가 거절당했을 때 그녀는 물러나 포기하기를 거절했다. 왜냐하면 그녀는 자신의 호소가 정당하였고 재판관에게는 그녀의 요구를 들어줄 의무가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틀림없이 그녀를 무례하게 대하고 그녀가 포기하도록 하려고 모든 것을 다했을 것이다.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 재판관은 공평하신 하나님과 비교해볼 때, “불의한” 재판관이라고 불렸다. 만일 불의한 재판관도 마침내 공의를 실행하고 청원자의 끈덕진 소원을 들어준다면 “공의의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의 마음이 당신의 뜻과 일치할 때 요구하는 것을 당연히 귀담아 듣고 응답해 주시지 않겠는가?

때때로 그분의 응답이 느리고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의 응답이 지체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왜 우리가 드리는 기도의 응답이 지체되는 것인가? 하늘로 올라가는 기도의 대부분은 기도하는 사람들의 유익을 위하여 지체될 필요가 있다. 그분은 우리의 필요를 벌써 아시고 그것을 채워주려고 열망하신다. 그분은 우리가 기도하기도 전에 우리의 필요를 예견하신다.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겠고 그들이 말을 마치기 전에 내가 들을 것이며” 사65:24. 기도는 우리를 변화시킨다. 기도는 우리의 태도와 우리의 품성을 변화시킨다. 기도함으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들을 감사함으로 받을 수 있는 준비를 갖추게 된다.

만일 부모가 아이들이 원하는 모든 것을 즉시 주면 아이들의 버릇을 망치게 된다. 그러한 아이들은 욕심 많고, 이기적이며, 자기 밖에 모르고 감사할 줄 모르게 된다. 그들은 현재 살고 있는 세상과 앞으로 살 하늘 나라를 모두 잃고 만다. 잘 자란 어린이들, 훗날 유용하고 이타적으로 성장한 아이들은 종종 그들이 원하는 것을 갖지 못했거나 혹은 요구 사항들이 지체됨으로 그들의 품성이 계발되었다. 여러 해 동안의 자아 부인과 경험의 학교에서 배운 원칙을 통하여 그들은 이타적이 되고 감사하는 법을 배웠다. 위대한 사람들은 고생의 학교에서 만들어진다. 우리의 하늘 아버지께서 자녀들을 가르치시는데 이 땅의 부모들보다 덜 지혜로우시겠는가?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끈질긴 기도를 듣고 응답하신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끝내셨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눅18:8. 기도의 응답이 더디므로 때때로 믿음은 흔들림을 당한다. 마지막 때에는 믿음이 희귀할 것이다. 예수님의 질문은 요한계시록 14장 12절에 그 답이 나왔는데, 바로 우리 주께서 다시 이 땅에 돌아오실 때 “예수의 믿음”을 가진 자들이 그분을 맞을 것이다.

“예수의 믿음” 혹은 예수께서 가지셨던 것과 동일한 믿음은 그분께서 믿음을 얻으셨던 것과 똑같은 방법-기도와 금식-으로 얻을 수 있다. 마17:19~21. 오직 기도하는 사람들만이 믿음이 자라날 것이며, 예수님처럼 기도의 생활을 하는 사람만이 그분께서 가지셨던 기적을 일으키는 믿음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 그러한 백성들만이 그분께서 이 땅에 돌아오실 때 그분을 맞을 준비가 되어있을 것이다. 끈질기게 기도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이 세상을 영광으로 밝힐 기별을 선포할 것이다.

현대 교회의 가장 큰 필요는 영적 부흥이며 이것은 오로지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써 이르러 올 것이다. 오순절 이래로 있었던 모든 부흥은 모두 그들의 소원을 끈질기게 하나님께 아뢴 소수의 성도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유쾌하게 하는 성령의 이른비는 소수의 사람들이 끊임없이 기도하였을 때 내렸다. 교회 안에 대대적인 개혁이 일어날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다. 의로운 한 사람의 기도가 하나님의 팔을 움직일 수 있다. 이 세상을 뒤흔들었던 종교개혁의 능력은 기도의 밀실에서부터 나왔다. 마찬가지로 종교개혁을 완성시키고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믿음으로 돌아가게 할 수 있는 능력은 기도에서 나와야 한다.

그러므로 기도는 이 죄많고 반역한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이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특권이다. 기도는 영혼에게 영적인 생명의 호흡이 된다. 영적인 생활에 있어서 기도는 육신의 생명과 호흡의 관계와 같다. 기도를 게을리하는 것은 영적인 죽음을 초래한다. 기도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대화요, 교제이다. 기도는 사람을 하나님께, 이 땅을 하늘에 매어놓는 황금줄이다. 기도는 세상을 움직이는 팔을 움직이는 능력이다. 기도는 겉으로 보아 가장 희망없는 사람들을 바꿀 수 있다. 기도할 때 미래는 하나님의 약속들만큼이나 환하게 밝아온다.

어떤 이는 말하였다. “기도는 황금강이다. 어떤 사람들은 강가에서 목마름으로 죽어가고 어떤 사람들은 무릎을 꿇고 황금물을 마신다.”

마침내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

어떤 때는 모든 것을 포기한 채 단지 누워서 기다리는 자들이 하나님의 뜻을 진정으로 따라가는 자들이 될 수도 있다. 수많은 실패와 고난의 경험 속에서 자신의 연약함을 깊이 인식한 어떤 사람들은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하나님의 행동과 간섭이 나타날 때만을 기다리기도 한다. 그들은 다음과 같은 경험적 결론을 이야기한다. “마침내, 마침내,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을 준비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종들 중에서 어떤 이들은 자신의 활동적인 봉사를 완전히 그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기도라는 무기의 사용법을 체득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하였고, 그 뜻이 이루어질 때까지 조롱과 비난을 받으면서 조용히 앉아 있었다. 기도가 가지고 있는 놀라운 능력은 종종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엎드려서 열렬하게 기도하는 사람들의 것이다.

3부 - 하나님께서 어떤 기도들은 응답해 주실 수 없는 이유


나의 삶과 내 주변 사람들의 삶에 일어나는 일들과 상황들은 때때로 나를 혼란스럽게 한다. 산다는 것은 종종 꽤 혼란스러울 수 있는 법이다.

크리스챤 저자이자 강사인 조이스 랜돌프는 목사의 부인이었던 자신의 어머니에 관한 한 놀라운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 여인은 기도할 때 구체적인 필요들을 하나님께 아뢰었다. 그러나 종종 그런 기도들은 응답받지 못했다.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한번은 그녀가 우표를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그녀는 하나님께서 그녀의 기도를 들으시고 바로 그 날, 우표를 보내주실 것이라는 강한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우표를 받지 못했다. 그녀의 남편과 함께 일하던 원로 목사는 그 날 우표를 받았다. 하지만 그녀를 위한 우표는 없었다. 후에 이 여인은 알게 되었는데, 하나님께서 이 원로 목사의 마음에 우표를 그녀에게 나눠주라는 부담을 주셨었다. 하지만 그 목사가 마음을 굳게 하여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축복을 그녀와 함께 나누기를 거절한 것이었다.

나에게 있어서 이 이야기는 이해가 되지 않았던 많은 일들에 새로운 빛을 던져주었다. 나는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믿음을 가지고 열렬히 기도할 수 있겠지만, 만일 그 기도의 응답이 하나님의 손에 들려 사용되기를 원치 않는 사람들에 달려 있는 것이라면, 나의 기도는 응답받을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전에 내가 생각해 왔던 것과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나는 하나님께서 기도를 응답하시는 방법은 언제나 세 가지 - 곧 응답해 주시는 것과, 나의 더 나은 유익을 위해 응답하지 않으시는 것과, 기다림이 필요한 응답 - 중 하나라고 믿었다. 이제 여기에 네번째 가능성 - 기도 응답받는데 쓰여질 수 있는 사람이 하나님의 감동하심을 거절하는 것 - 이 더해진 것이다.

선을 위한 영향력과 악을 위한 영향력이 언제나 우리 주위를 둘러싸고 있다고 성경은 가르친다. 사도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경고하였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벧전5:8. 하지만 시편 기자는 우리에게 이렇게 확증하였다.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네 모든 길에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시91:11. 선과 악을 위한 영향력 중 어느 것이 우리의 삶에서 더 강할지를 선택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자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다 공급하기를 원하시는데, 단지 육신적인 것(먹을 것, 입을 것, 잠자리 등) 뿐만이 아니라 감성적인 것(평안함과 행복감 등)에 있어서도 우리가 풍족하기를 원하신다. 사도 바울은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빌4:19)고 확언하였다. 때때로 우리 자신들의 선택으로 이러한 축복을 잃어버릴 때도 있지만, 종종 우리와 가까운 사람들의 잘못된 선택으로 그럴 때도 있다. 만일 당신 주변의 사람들의 선택이 하나님께서 당신을 축복하시고자 하는 것을 방해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아마도 이 사람들과 개인적으로 만나 이야기를 함으로 이런 상황을 풀어나갈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그 사람들과 거리를 두는 것이 좋을 수도 있다. 특별히 그 사람들의 이기적인 행동이 당신과 가족들의 안전과 삶을 위협한다면 그렇게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어떤 경우에라도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도록 하라. 그들의 삶에 있어서 선을 위한 영향력이 악을 위한 영향력보다 더 크도록 기도하라. 또한 야고보서 5장 16절에 있는 약속을 주장할 수 있다.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물론 당신이 기도한다고 해도 그들은 여전히 선과 악 중 하나를 택할 수 있는 선택권을 갖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대의 삶에서 복잡한 상황들을 도와주실 것이다. 어떤 때는 기도의 응답이 딱 맞는 시간에 이르러 온다. 어떤 때는 그 응답이 오래 걸리고 이해하기 어렵다. 많은 경우에 우리는 오직 힘든 경험들을 통해서만 이것을 배워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이 교훈을 통하여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이 있다. 우리 마음에 누군가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 때 그 일이 비록 우리에게 희생을 요구한다 할지라도 기꺼이 해야 한다는 것이다. 누군가 꼭 도움이 필요한 어려운 상황에서 간절히 눈물로 기도하고 있으며 그의 기도를 응답하시기 위해 오늘 내 마음에 하나님께서 말씀하고 계시는지도 모른다. 선한 음성, 양심은 하나님의 목소리다. 우리가 그것을 거절하므로 다른 이가 기도의 응답을 받지 못하고 어둠 가운데 있도록 해서는 안될 것이다.

또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 마음에 오는 부담감을 거절하면 하나님은 다른 사람을 쓰실 거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 동역하여 일할 기회와 축복을 잃는다는 것이다. 다른 이를 사용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은 나의 행복을 위해 다른 이를 도우라고 부르시는 것이다. 누군가의 기도의 응답을 위해, 그리고 내 영혼을 위해 그분의 부르심에 순종하자.

4부 - 하나님과의 대화


나 :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시여.”
하나님 : 그래!

나 : 방해하지 마세요. 저는 지금 기도하는 중이에요.
하나님 : 하지만, 너는 방금 나를 불렀잖니?

나 : 당신을 불렀다구요? 아뇨, 단지 기도하고 있을 뿐이었어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시여”
하나님 : 그것 봐라. 또 나를 불렀잖니.

나 : 제가 언제요?
하나님 : 방금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시여”라고 했잖니. 그래, 무슨 말을 하고 싶니?

나 :하지만 거기엔 아무 뜻도 없었어요. 그저, 아시다시 피, 오늘을 위한 기도를 주문처럼 외우고 있을 뿐이었어요. 항상 주기도문을 외거든요. 그러면 마 치 임무를 완수한 것처럼 기분이 좋아져요.
하나님 : 그래? 알겠다. 그럼, 계속 기도하렴.

나 : 그러죠.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하나님 : 잠깐만! 방금 무슨 뜻으로 한 말이었니?

나 : 뭘요?
하나님 :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했잖니.

나 : 그건, 그건, 음, 무슨 뜻인지 모르겠네요. 그게 무슨 뜻인지 제가 어떻게 알아요? 그저 주기도문의 일부분일 뿐이지요. 그런데 그게 무슨 뜻이지요?
하나님 : 나의 이름에는 나의 모든 것이 들어있단다. 그래서 나의 이름은 나의 성품이나 마찬가지지. 내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 것은 너의 말과 행동과 생각으로 나의 성품을 거룩하게 드러내는 것을 말하는 것이란다.

나 : 아, 이제 이해가 가네요. 무슨 뜻인지 전에는 몰랐어요. 감사합니다.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하나님 : 너 정말로 그렇게 되길 원하니?

나 : 그럼요.
하나님 : 그럼, 그렇게 되기 위해서 무엇을 하고 있니?

나 : 무엇을 하냐구요? 음, 생각해 보니까 아무것도 한 것이 없네요. 제 생각에는 주님이 그 위에서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것처럼 이 밑에서도 모든 것을 좀 주관하셨으면 해요. 아시다시피, 여기엔 불행한 일들이 참 많아요.
하나님 : 그래, 나도 알고 있단다. 내가 먼저 네 마음을 주관하게 해다오.

나 : 네? 무슨 말씀이신지...
하나님 : 네가 하는 말들, 집에서 가족들을 대하는 태도, 급한 성격, 네가 즐겨 보는 것들, 돈 쓰는 문제들을 포함한 너의 모든 것을 내가 돕게 해다오.

나 : 잠시만요! 저만 갖고 뭐라 그러지 마세요. 저도 교회에 다니는 다른 사람들만큼은 된다구요.
하나님 : 난 네가 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고 기도한 걸 들었는데, 정말 그렇게 되려면 너의 뜻과 의지로 나만 선택하고 따라와야 한단다.

나 :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만 따라가라고요? 제가 즐기고 있는 것들이 있는데 그것을 버리지는 못 할 것 같아요. 전 그것들이 좋거든요.
하나님 : 모든 것을 버리라는 것이 아니란다. 너에게 참으로 평안과 기쁨과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을 선택 하라는 뜻이야. 네가 지금 즐겨 하는 것들이 너에게 참 행복을 가져다주고 있니?

나 : 참 행복이라고요? 아니요, 아니요. 해가 뜨고 나면 허무함을 느끼죠.
하나님 : 그래, 내가 다 안단다. 우리 함께 극복해 나가자꾸나. 네가 정말 자랑스럽단다.

나 : 그런데 하나님!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는 저의 기도에 응답해 주실거죠?
하나님 : 너는 영의 양식을 먼저 구해야 한단다. 지금 네게 필요한 양식은 성경 말씀이란다. 그 성경을 펴서 너의 갈급한 영혼을 채우렴.


나 : 성경 읽는 것이 습관이 안 되서 한 번 펴기가 쉽지 않네요. 절로 한숨이 나와요.
하나님 : 어느 누구도 너에게 성경을 펴줄 수가 없고, 어느 누구도 너에게서 성경을 빼앗을 수 없단다. 하지만 이걸 기억하렴. 성경 말씀은 너를 향한 나의 마음이라는 것과 너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성경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지금 선택하렴. 성경을 펴기로...

(잠잠 .......)
하나님 : 기도하렴.

나 : 두려워요.
하나님 : 두렵다고? 뭐가?

나 : 주님이 무슨 말씀을 하실지 다 알아요.
하나님 : 그러니?

나 :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하나님 : 그 사람은 어떻게 할 거니?

나 : 주님께서 그 사람 얘기를 하실 줄 알았다니까요. 주님, 그 여자는 저에게 거짓말을 하고 저에 대한 온갖 헛소문을 퍼뜨렸어요. 또 빌려간 돈은 절대로 안 갚았다고요. 이번 기회에 꼭 버릇을 고쳐줄 거에요!
하나님 : 하지만, 너는 기도하지 않았니? 네 기도는 어떻게 되는 거니?

나 : 그럴 맘이... 없어요.
하나님 : 그래, 적어도 넌 솔직하구나. 하지만 미움, 증오, 시기는 너를 힘들게 할 뿐이란다.

나 : 그렇겠죠. 하지만 그 여자에게 복수하고 나면 괜찮아질 거에요. 계획을 다 짜놨다구요. 내가 아팠던 만큼 아프게 해줄 거에요!
하나님 : 아니야, 그렇게 한다고 해서 네 기분이 더 나아지지는 않을거야. 복수는 너의 마음을 결코 위로하지 못한단다. 너 스스로 지금 얼마나 불행한지 알고 있잖니? 내가 너를 행복하게 해줄게.

나 : 행복하게요? 어떻게요?
하나님 : 그 여인을 이해할 수 있는 마음을 달라고 나에게 기도하렴. 그녀를 꼭 붙잡고 있는 사단의 모습을 생각해 보렴. 죄에 넘어져 너에게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던 그녀를 불쌍히 여기고 용서하렴. 그리고 나서 너도 내가 주는 용서의 경험을 맛보렴. 내가 너와 함께 한 것처럼 내가 그녀를 도울 수 있도록 기도하렴. 그러면 너를 누르고 있는 복수라는 죄에서 너는 자유로워질 것이고 그제서야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 깨달을 거란다.

나 : 오, 주님, 당신이 맞습니다. 언제나 주님이 옳으시죠. 그리고 복수하는 것보다도, 전 주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싶습니다. (한숨) 맞아요. 그래요, 그녀를 용서하렵니다.
하나님 : 그래, 잘했다! 마음이 평안하다는 걸 느끼니?

나 : 네. 마음이 평안해요. 오늘 밤에는 잠을 잘 잘 수 있을 거에요. 그녀와의 일을 생각하는 동안 잠을 깊이 잘 수 없었어요.
하나님 : 그래, 나도 안다. 아직 기도를 다 안 마쳤지?

나 : 아, 네.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며.”
하나님 : 그래, 그래. 내가 그렇게 도와줄게. 단지 시험받을 만한 곳에 가지 말아야 한단다.

나 : 무슨 뜻이세요?
하나님 : 무슨 뜻인지 다 알잖니.

나 : 네, 알아요.
하나님 : 그래.

나 :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하나님 : 어떤 것이 나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인지 이제 너는 알거라고 믿는단다.

나 : 네, 주님만 믿고 주님만 선택하여 주님만 따라갈께요. 오늘 하루 그렇게 살 수 있도록 늘 제 옆에 계셔서 저를 붙들어 주세요.
하나님 : 그래, 오늘 너는 참다운 기도를 했구나. 나를 따라오렴.

나 : 주님, 정말 감사합니다!

5부 -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세요!

 
그리스도인이 된지 여러 해 되는 많은 사람들이 기도하는 법을 전혀 배우지 못한 경우가 많다. 그들에게 있어서 기도란 그저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어떤 형식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만일 자신들이 아침에 몇 분간 무릎을 꿇고 기도하지 않으면 어떤 재난이 그들에게 닥칠까봐 두려워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어떤 특별한 요청을 하였는데 아무 일이 없으면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안 들어주시는 것으로 알고 다른 것을 위해 기도하기를 시작한다. 종종 그들은 낙망하여 기도하기를 멈춘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알지 못하는 하나님께 머리를 조아린다. 그들은 기도하는 습관에 젖어있긴 하지만 자신들의 기도가 응답이 될 것인지에 대해서는 진실된 마음으로 믿지를 않는다. 그들은 기독교가 아닌 다른 종교를 믿는 자들이 하는 식으로 그저 몇 마디 말을 중얼거릴 뿐이다.

얼마나 많은 기도들이 모호하고도 내용이 없는 것들인지! 어떤 이들은 긍휼을 구하나 긍휼이 자신들에게 왜 필요한지를 모른다. 어떤 이들은 구원받기 위해 기도하지만 무엇으로부터 구원받는지도 모른다. 또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축복이 자신들과 자신들이 사랑하는 이들 위에 내려달라고 기도하지만 결코 그 응답을 기대하지도 않는다. 이런 모든 자들에게 주님께서는 말씀하신다. “내가 네게 해주기를 원하는 것이 진정 무엇이냐?”고.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기를 기대한다면 우리는 그에 필요한 조건들을 수행해야만 한다. 물론 여러 가지 조건들이 있지만 내 경우에는 나의 기도 생애에 있어서 내가 따르는 5가지 조건들이 있다.

첫 번째 조건은 우리가 모든 것에 있어서 예수님께 의존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엡3:17~19).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벧전5:7). 후자에 있는 이 짧은 말씀은 풍성한 부로 가득차 있다. 우리는 어린 아기가 자기 아버지의 팔에 안겨 쉬는 것처럼 그분의 팔 안에서 쉬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우리는 아직도 예수님에게만 의존하는 대신 인생의 문제들을 풀기 위해 우리의 인간적인 지식과 경험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자아가 제거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생애를 지도하실 수 있다.

응답받는 기도의 두 번째 조건은 우리의 생애에서 모든 죄를 제거하고자 하는 의지이다. 우리가 이 두 번째 조건을 충족시키려 할 때 우리 중 많은 이들은 어떤 죄들을 사랑하고 그 죄들을 버리기를 원치 않기 때문에 망설이기 시작한다. 그 죄들 중 많은 부분은 우리의 아내나 남편이나 목사님이 알지 못하는 은밀한 죄일는지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죄들을 아신다. 성경은 그에 대해 분명히 말하고 있다.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 (시66:18).

그분이 응답해 주실 것을 믿으라

응답받는 기도의 세 번째 조건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갖는 것이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히11:6). 또한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벧전1:7). 또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롬10:17)는 말씀을 기억하자.

응답받는 기도의 네 번째 조건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기도하는 것이다. 종종 우리는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마음으로는 전혀 우리에게 줄 수 없으신 것들을 구한다. 그러한 요청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부정적인 응답을 주신다. 하나님께서 “안돼”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이해하는 데는 그만한 영적인 성숙을 필요로 한다. 그 때문에 우리는 항상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해야만 한다.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을 줄을 또한 아느니라” (요일5:14, 15). 이 성경절은 성경 전체에서 가장 마음을 전율케 하는 성경절 중 하나이다. 나는 이 성경절에 주어진 약속을 하루에도 여러 번 반복하여 주장한다. 우리가 그분의 뜻을 좇아 구할 때 우리는 그분께서 우리에게 응답하실 것을 확신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신실한 기도에 응답하신다.

응답받는 기도의 다섯 번째 조건은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때까지 기꺼이 기다리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어떤 때는 가장 수행하기 어려운 조건이다. 우리는 우리의 기도가 즉시 응답되기를 원한다. 나는 어떤 사람이 자신의 기도가 응답될 때까지 52년 동안 자신의 두 친구들을 위해서 기도했던 것을 기억한다. 그는 하나님과 한 약속을 했었다. 그는 자신의 기도가 하나님의 뜻과 일치한다는 것을 알았고, 하나님께서 응답을 주실 때까지 기도를 멈추지 않았다. 히브리서 10:35, 36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느니라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

이것들이 내가 내 생애에 적용하는 응답받는 기도의 다섯 가지 조건들이다. 그 조건들은 내 기도 생애에 능력을 주었다.

그러나 내가 응답받는 기도의 다섯 가지 단계를 밟은 후에 주님께서는 내가 나 자신의 매일의 생애에서 기도해야만 할 몇 가지 사실들이 있다는 것을 명백하게 가르쳐 주셨다. 우리가 우리 자신들을 위해서 먼저 기도하므로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할 때 능력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내가 하는 첫 번째 요청은 하나님께서 나를 모든 죄로부터 정결케 하셔서 나를 그분을 위해 매일마다 사용되는 순결하고 거룩한 도구로 만들어 달라는 것이다. 나는 나 자신의 연약함과 실수들을 주님 앞에 내놓고 자백한다. 그럴 때 그분은 나를 놀라운 방법으로 용서해 주시며 정결케 해주신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요일1:9).

두 번째, 나는 하나님께서 나를 겸손하게 지켜주실 것과 계속 겸손하게 되도록 해달라고 기도한다(약4:6 참조). 은혜는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의 창고로 들어가는 문이며, 겸손은 바로 그 은혜의 문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자아가 죽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 생애 가운데 능력을 부여하실 수 있으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갈2:20). 그리스도께서는 오직 겸손한 마음을 가진 영혼 안에서만 거하실 수 있으시다. 겸손한 마음을 갖기 위해서 우리는 위대하신 심장 외과 의사에게 우리의 낡은 심장을 도려내고 새 마음, 즉 겸손한 마음을 달라고 구해야만 한다. “내가 그들에게 일치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신을 주며 그 몸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서” (겔11:19). 우리 자신에게서부터 나온 겸손은 바리새주의적인 것이다. 심장 이식 수술을 하여 겸손해진 것이 진정한 겸손인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기적이다.

성경에 대한 사랑

세 번째 요청은 하나님께서 나의 마음을 당신의 말씀에 대한 사랑으로 채워주시도록 간구하는 것이다.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오랜 시간 동안 하나님의 성경 말씀을 읽는다는 것은 어렵다. 성경에 제시된 사상들에 생각을 집중하는 것이 그들에겐 너무도 어려운 일이다. 고린도전서 2장 14절에는 그에 대한 분명한 이유가 나와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우리의 생애 가운데 육적인 생각이 주도권을 잡을 때 영적인 주제들을 공부하는 데서 만족이나 기쁨을 얻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당신의 말씀에 대한 사랑을 주셔서 살아있는 말씀의 잔치를 즐김으로 오는 큰 기쁨과 평화를 소유케 해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니 저희에게 장애물이 없으리이다” (시119:165).

내가 매일 드리는 네 번째 간구는, 나로 하여금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 심지어 원수들까지 사랑하게 해달라고 구하는 것이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마5:44). 나는 이것이야말로 우리 자신의 육적인 사랑이 진정 죽었는지를 확인해 볼 수 있는 가장 좋은 기준임을 확신한다. 우리를 미워하는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기적이 요구되는 일이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마음 속에 암처럼 자신을 갉아먹고 있는 원한을 품고 다닌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요일4:20).
우리는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기를 원해야만 한다. 우리가 낯선 이들의 눈을 들여다 볼 때 우리는 그들이 하늘 나라에 갈 후보자인 것을 인식해야 한다. 우리는 구원의 말씀으로 그들에게 접근하고자 간절히 사모해야만 한다. 바울이 그러했던 것처럼 우리도 이 소망을 소유해야만 한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모든 사람에게 전도하는데 아무 것도 거리낀 것이 없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보이셨던 그 사랑을 우리에게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아니, 탄원해야 한다.

다섯 번째로 우리가 구해야만 할 것은 우리 자신의 경험 가운데 있는 산과 다른 사람의 경험 가운데 있는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다. 예수님께서는 “오 믿음이 적은 자들아”라고 종종 말씀하셨다. 이 세상에 인간으로 내려오셨던 하나님이신 그분은 이 세상에 믿음이 그리도 적은 것을 인해 계속 놀라셨다. 나는 그분이 그분의 가장 사랑하시는 소유인 교회를 보실 때 너무도 믿음이 적은 연고로 아직도 계속 놀라고 계심이 분명하다고 믿는다. 우리는 마귀가 우리의 행렬에 끼어들어왔다는 말을 듣는다. 왜 그런가? 바로 너무도 적은 믿음 때문이다. 우리는 그 믿음을 느껴야만 하며, 만져야만 하고,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할 준비가 되기 전에 소유해야만 한다. 말씀은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고 말한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롬1:17). 하나님과 함께 할 때 우리가 갖는 능력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믿음에 정비례한다. 적은 믿음은 적은 능력을 낳으며, 큰 믿음은 큰 능력을 낳는다. 믿음이 없으면 능력도 없다.

마지막으로 간구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매일 당신의 성령으로 침례받도록 해주시는 것이다. 우리들 대부분은 침례를 받았다. 그러나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목사는 물로 침례를 줄 수 있지만 성령으로 침례를 주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이시라는 사실이다. 침례 요한은 그 사실을 명백하게 말했다.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침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침례를 주실 것이요” (마3:11). 매일마다 우리 주님께서 성령의 침례를 주시도록 탄원하자. 하나님의 사업이 완성되어 가는 것을 볼 수 없는 이유는 우리가 우리 가운데서 성령의 임재의 증거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마지막은 지금 우리 바로 앞에 임박해 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대부분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속히 오실 것이다. 노아와 롯 당시처럼 마지막은 갑자기 이를 것이다. “저희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멸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이르리니 결단코 피하지 못하리라” (살전5:3).

오늘 우리의 구원을 확실히 하도록 하자. 오늘, 그리고 매일, 주 예수님께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소서”라고 기도하도록 하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하라

기도와 의무


우리는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간다. 기도는 영혼의 호흡이며 모든 축복의 통로이다. 회개하는 영혼이 기도를 드릴 때, 하나님께서는 그 투쟁을 보시고 갈등을 지켜보시며, 그 진실성을 주목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그 영혼의 맥박에 손을 얹으시고 모든 고동을 기록하신다. 감동을 주는 어떤 감정도, 동요를 일으키는 어떤 정서도, 그늘을 가져오는 어떤 슬픔도, 영혼을 더럽히는 어떤 죄도, 생애를 움직이는 어떤 사상이나 목적도, 하나님께서는 다 아신다. 우리가 정직한 심령으로 그분께 나아가는 한, 그분께서는 우리를 받아주시고 우리의 마음과 생애를 치료해 주신다. 기도는 우리와 하나님을 연합시킨다. 기도는 지치고 고달픈 영혼에게 새로운 힘과 신선한 감동을 준다.

기도는 우리의 의무와 상식을 대신하지 않는다. 믿음과 행함이 분리될 수 없는 것처럼, 기도와 행함 역시 분리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기도할 수 있는 특권을 주셨으며, 또한 각자가 해야 할 의무도 주셨다.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는 환자가 의사에게 진찰받기를 원하시는가? 아니면 먼저, 환자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다음, 그분께 도움을 요청하길 원하시는가? 아니면, 의사에게 가지 않고 믿음으로 병이 낫기를 기도해야 하는가?

이러한 질문은 한마디로 답변할 수 없는 질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에게 최선을 다하는 태도를 요구하시며, 그러한 우리의 태도에 축복하신다. 그렇다고 해서, 일이 어려움에 봉착하거나, 성공할 가능성이 희박할 경우에만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는 기도를 드려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한 기도는 비 오는 날에만 기도하는 구두닦이 소년의 기도와 같은 것이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기도와 의무는 병행되어야 한다. 우리는 언제, 무엇을, 어떻게 해야 될지를 하나님께 여쭈어 보면서 우리의 의무를 수행해야 한다. 마치 어린아이가 어머니에게 도움을 구하듯이 말이다. 그분의 뜻과 섭리가 무엇인지를 살피면서, 우리의 의무를 수행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대로 밀고 나가다가 스스로 탈진되어 포기 상태에 이르는 것을 원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양심과 지성을 주셨으므로, 우리는 그 둘 다를 사용해서 그분과 교통하고 그분의 뜻을 이해해야 한다.

성소 기도


성소로 나가며 드리는 찬양 : 하늘에 계신 아버지, 오늘 아침 당신 앞에 나온 것은 지난 밤 동안 저를 지켜 주시고, 매일 아침마다 새로운 긍휼로써 돌보시는 자비를 인해 감사하기 위함입니다. [그 날에 맞는 개인적인 감사에 적합한 노래나 성경절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번제단 : 제가 당신 앞에 겸손히 나온 것은 당신께서 당신의 아들 예수님을 우리를 위해 돌아가게 하신 큰 희생을 알기 때문입니다. 저도 제 자신을 완전히 당신께 드릴 때 예수님과 함께 세상과 자아에 대해 죽기를 원합니다(롬12:1, 2; 6:6~14; 고전15:31; 눅9:23, 24). 지금 당신께 제 의지와 제 존재의 전체, 즉 육체적, 정신적, 영적, 정서적(막12:30)인 전체를 드립니다. 주님, 만일 당신과 저 사이에 제가 오늘 필요로 하는 당신의 성령의 부어주심을 막는 어떤 장벽이 있다면 지금 가르쳐 주시옵기를 기도드립니다. * 여기서 잠시 멈춰서 하나님께서 무엇이라 말씀하시는지 들으십시오.

물두멍 :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심 - 엡5:26.
하나님께서 당신의 마음 속에 떠오르게 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성경의 관주를 찾아 정직, 격정, 믿음, 사랑, 화냄, 등과 같은 것을 살펴 보십시오.
당신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과 상치되는 어떤 것(태도, 말, 행동 등등)이 있으면 그것을 자백하십시오. 예수님의 보혈로 사함 받고 정결함 받기를 구하십시오. 만일 필요하면 형제들 간에 화해를 하십시오.

촛대 : 성령
성령의 부어주심을 구하십시오. 당신이 오늘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열매, 은사 등을 구하십시오.

떡상 : 힘과 능력
오늘을 위한 힘(육체적, 정신적, 정서적, 영적)과 당신의 모든 필요(경제적, 사회적 등등)를 위한 능력을 하나님의 전능하신 뜻을 따라 구하십시오.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의 말씀 속에서 당신에게 주시는 약속들을 주장하십시오.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십시오.

분향단 : 다른 사람을 위한 중보의 기도
주님께서 당신의 마음 속에 부담을 주시는 이들을 위해 특별한 기도를 드리십시오. 그들을 위해 성소의 계단들을 밟으실 수 있습니다. 이러한 기도는 사람들을 주님 앞으로 이끄는데 매우 효과적입니다. 혹은 단순히 당신의 소원을 주님 앞에 아뢰거나, 또 그 사람을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의 약속들을 주장하실 수도 있습니다.

둘째칸 (지성소) : 오늘 하나님께 완전히 헌신함
아버지, 저를 예수님의 보혈을 통하여 당신의 특별하신 임재 가운데로 들어가게 해 주시옵소서. 오늘 당신께서 저를 인봉해 주시고, 당신 날개의 그림자로 저를 덮어 주소서. 약속하신 대로 저를 결코 떠나거나 버리지 말아 주시옵소서. 당신의 의로우신 오른손으로 저를 붙잡으시고 힘 주셔서 굳게 서게 해 주시옵소서. 당신의 전신갑주를 제게 입히셔서 저를 악한 자에게서부터 보호해 주시옵소서. 저는 제 자신을 당신의 사랑의 팔에 의탁하나이다. 저를 권고하시고, 고쳐주시며, 가르쳐 주시고, 훈련시켜 주셔서 저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이끌어 주시옵소서. 당신께서 제게 말씀하신 모든 것을 기억나게 하사 제가 당신의 말씀을 순종하도록 해주소서. 오늘 하루 종일 당신의 영광과 다른 사람을 위한 봉사, 혹은 저 자신을 정결케 하시는 일이 필요하다고 보시면 그 일을 부디 실행해 주시옵소서. 그러나 당신의 자비와 보호하심으로 저를 가리시고, 당신의 지혜와 힘을 주셔서 그 모든 것을 통과할 지혜와 힘을 주시옵소서. 제가 당신의 음성을 오늘 매순간 듣게 해 주시고, 당신의 뜻과 영광에 따라 저를 사용해 주시옵소서. 저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기도하는 방법에 대한 질문과 답변


#1 안녕하세요? 교회에 다닌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교회에 가면 목사님은 기도를 열심히 하라고 말씀하시는데 어떻게 기도를 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는 분이시고 또 우리와는 너무 먼 하늘에 계신다고 하는데, 이렇게 멀리 계신 분께 어떻게 기도를 해야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는지요?

답: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의 기도를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사무엘상 1장 13절은 “한나가 속으로 말하매 입술만 동하고 음성은 들리지 아니하므로” 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가 간절할 때 입술에서 기도가 나오기 전에 먼저 아신다는 사실입니다. 간절하게 애타는 심령이 기도의 자세입니다. 또한 기도는 마치 친구에게 자기의 사정을 말하듯이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펼쳐 놓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마음에 느끼며 마음 속에 계신 하나님께 대화하듯이 기도를 시작해 보시기 바랍니다.



#2 항상 말씀으로 저의 영적 생애를 도와주시는 생애의 빛 관계자들께 감사드리며 이 지면을 통하여€한 가지 묻고 싶습니다.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려면 죄 짓지 않는 깨끗한 생애를 살아야만 기도할 수 있는지요? 늘 죄인의 모습으로 살아가기에 기도하려고 무릎 꿇으면 마음이 무겁기 때문입니다. 기도할 용기가 점점 없어지는 요즘입니다. 저에게 희망의 말씀을 주시길 바라며......

답: 로마서 3장 10절에 보면,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라고 했습니다. 또 마태복음 9장 13절에는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고 이야기했습니다. 예수님께 기도할 때에 우리 자신의 죄지은 초라한 모습 때문에 좌절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이 계신 것을 인하여 용기와 희망을 가지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3 안녕하세요? 교회에 다닌 지는 꽤 오래 되었지만 아직도 궁금한 것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 드리는 내용에 따라서 응답이 되는 것인지, 아니면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기도가 우리가 느끼지 못 할 뿐이지 적당한 때에 다 응답이 되고 있는 것인지요?

답: 예수님께서는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은 줄로 믿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얼마나 간절한 심령으로 기도하느냐가 중요한 것이지 내용이 어떠냐에 따라 다른 것은 아닙니다. 많은 예들이 있지만 몇 가지만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8장 1~3절 참고. 누가복음 8장 43~48절에 보면,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드리는 모든 기도는 하나님의 뜻에 부합될 경우 항상 응답이 있습니다.

 

#4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제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이미 다 알고 계시는데, 왜 구태여 기도해야 합니까?

답: 이것은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를 생각해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모든 부모님들은 자식들이 어려움에 빠졌거나, 도움이 필요하거나, 기쁘고 슬픈 일이 있을 때에 혼자서 속으로 끙끙거리지 말고 부모님께 달려와 마음을 털어놓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필요와 사정을 우리가 입으로 직접 고하지 않아도 다 알고 계시지만, 우리가 예수님께 달려가 입술을 열고 우리 마음을 내어놓을 때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기쁘실까요?

그리스도인의 길


어떤 그리스도인의 탄식

죄를 죄로 느끼지 않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나는 매우 외로운 세월을 보내야만 했다. 그들의 설교나 신앙 태도는 나에게 이렇게 들렸다. "죄에서 구원받으려는 자는 교회로 오라!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방패 삼아서 대담무쌈하게 죄를 범하면서 살기 원하는 자들도 교회로 오라!"

나는 교회에서조차 영혼의 평안을 찾을 수 없었다. 죄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복음을 듣기 위하여 나는 또 어디를 찾아가야만 하는가? 

교회 안에서 얻지 못한 대답

나는 내 죄가 부끄러워서 하나님을 피하려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내 손을 놓지 않으셨다. 나는 하나님의 겨누는 표적이 된 듯하였고, 그의 화살에 맞아서 비틀거렸으며 그의 손이 나를 누르셨다. 내가 동으로 가도 그가 계셨고, 서로 가도 그분을 만나게 되었다. 나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요 용서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었다. 죄로 인한 가책으로 인하여 나는 완전히 삶의 즐거움을 잃고 말았다. 식욕을 잃고 밤잠을 이루지 못했으며 일할 기력조차 없었다. 하루는 유명한 목사님을 찾아가 내 영혼의 고통을 말하면서 도움을 구했으나 “나는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없다”는 대답을 줄 뿐이었다. 천로역정의 저자인 존 번연 역시 죄의 문제로 고민하고 있을 때, 하루는 감당할 길이 없어서 목사를 찾아가 마음을 털어 놓았던 적이 있었는데, 그 목사가 말하기를 “아마도 당신은 악마의 종이 되었나 봅니다”라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죄의 문제를 이해하지 못할 뿐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을 성경과 자신의 경험을 통하여 설명하지 못하는 목사야말로 자신이 왜 목사가 되었는지를 모르는 성직자라고 말할 수 있다. 죄의 문제에 대한 명백한 답변을 가지고 있지 못한 어떠한 신앙이나 종교도 모두 거짓이다.

시련과 기도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은 완전하다. 만일 복음이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서 구원에 이르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지 못한다면, 그것은 복음에 어떤 결함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이 진리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매주마다 교회에 나가고,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받아들여다고 말하는 사람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멀리 떨어져서 따라간다. 구세주의 발자국을 매우 가까이 따라가지 않는 사람들은 결국 사단이 주는 시험의 덫에 걸리게 될 것이다.

하늘의 천사들은 어려운 시험을 당하여 드리는 우리의 진지한 기도를 받기 위하여 기다리고 있다. 천사들은 목마른 사슴이 물을 구하듯이 하나님의 위로하심을 간구하는 사람에게 찾아가 그들의 진심어린 기도를 받아서 하늘 아버지께 올라간다.

우리는 우리가 구한 것이 반드시 응답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진실한 그리스도인에게 자신을 나타내시는데, 기도를 응답하는 분으로서 나타내신다. 그러므로 기도를 드리는 우리의 마음이 순결하고, 기도의 목적이 비이기적이면, 하나님께서 최선의 방법으로 응답하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다.

사단이 주는 시험과 시련에 의해서 낙담하지 말아야 한다. 자신을 인간의 손에 맡기지 말고, 하나님의 손에 맡겨야 한다. 하나님께 나아가 시련 속에서도 자신의 영혼을 보존해 달라고 간구하라. 그분께서는 우리의 힘이요 능력이시다. 주님께서는 항상 시련과 고난을 통하여 우리를 연단시키시며, 더 높은 신앙으로 인도하신다. 그리스도인은 사업의 실패, 실망, 두려움 등 모든 문제들을 기도로 주님께 맡김으로써, 그분 안에서 완전한 쉼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완전한 쉼을 얻은 사람은 마음으로부터 감사함이 흘러 나와서 입술로 그분의 보호하심을 찬양하게 될 것이다. 가난과 고통 속에서도 행복과 보람을 찾을 수 있으며, 외로움 속에서도 풍요로움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이러한 경험을 하는 사람은 천박한 이야기나 세속적인 탐욕에 빠지지 않게 될 것이며, 마음 속에 있는 하나님께 대한 감사를 입술로 표현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