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영혼의 화판 위에


    한 해를 뒤돌아본다. 바쁜 듯이 찍혀진 우리 발자국 옆에, 서둘러 따라오신 듯 찍혀진 주님의 발자국...정말 이 한 해 동안 주님과의 동행은 얼마나 깊었으며, 우리 영혼 속에 주님의 모습이 얼마나 깊이 스며 들었을까? 거울 속의 이미지 처럼, 언뜻 스쳐가는 모습속에 주님의 형상이 비쳐날 듯도 한데...

    우리가 얼마나 더 주님과 가까워져야 우리의 모습에서, 우리의 말에서, 아니 우리의 마음속 밑바탕에서까지 주님의 향기가 끊임없이 배어나올까?

    보잘 것 없는 거미줄에 맺힌 이슬이 환한 아침 햇살을 받아 빛날 때, 그것은 마치 영롱한 진주를 꿰어 놓은 듯 찬란한 목걸이처럼 빛나, 한 순간 지나는 행인의 이목을 끌 듯이...밤새 어두움에 잠들었던 숲을 찬연한 아침 햇살이 비출 때, 나뭇 잎새 하나 하나가 반짝거리며 깨어나 마치 그것이 빛나는 새들이 되어 공중에 날아가는 것처럼 보이듯이...비록 아무 것도 아닌 “질그릇”이지만 그 속에 아름다운 “보배”가 늘 숨기워져 간직되어 있으면, 언젠가 주님의 찬란한 빛이 우리의 형상 속에서 스미어져 “우리가 그와 같을 줄 알”(요일 3:2) 게 될 날이 오지 않을까? 주님이 세상의 누구보다 가까운 우리의 친구가 되어 언제나 함께 지낸다면 말이다.

친구 이야기
    사람들은 누구나 친구를 가졌으면 한다. 한번 마음을 주면 영원히 변하지 않고, 어떤 어려운 상황에도 떠나지 않고 곁에 있어주며, 끝까지 자기를 신뢰하고 믿어주는 눈물겨운 친구가...
    친구는 모든 것을 함께 나눈다. 보잘 것 없는 이야기일지라도 마음에 맞는 친구와 함께 나누면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고, 설령 서로 나눌 특별한 이야기가 없더라도 함께 마주만 보고 있어도 좋다. 슬픔과 서러움과 기쁨과 환희를 함께 나눌 수 있는 진정한 친구...어두운 밤, 고향 집의 등불처럼 마음을 훈훈하게 녹여주는, 마치 고향 바다에 돌아온 듯 마음이 포근해 지도록 만들어 주는 친구를 가진다는것, 그것은 인생에 있어서 큰 행복 중에 하나일 것이다.
    친구는 서로 닮는다. 어릴 적에 집에 놀러왔던 내 친구가 가고 난 뒤 걱정하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기억난다. “얘! 네 친구가 마음은 좋아보인다만, 너무 수선스럽고 수다스럽구나! 얌전하고 정숙한 아이와 사귀어야지...친구는 서로 닮는 법이란다!” 그 때 어머니께서는 내가 얌전치 못한 친구의 말씨와 태도를 닮을까봐 걱정을 하셨었다. 정말 친구는 서로 닮는다. 함께 지내고, 함께 나누고, 함께 얘기하며 서로 시간을 많이 보내다 보면 말씨, 마음의 생각, 행동 등이 서로 닮을 수 밖에 없어진다. 그래서 어떤 종류의 친구를 가지고 있는가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게 되는가 보다.
    성경은 우리에게 친구를 소개하고 있다. 깊은 실망의 시간에도 함께하며, 절망과 낙담의 어두운 그늘속에서도 함께 있어주며, 고통의 눈물이 뺨을 적시고 외로움과 적막함이 밤안개처럼 주위에 내려 덮혀 막막할 때, 어떤 땐 아주 엎으러져 일어날 기운도 없이 쓰러져 있을 때, 여전히 곁에 와서 손 내밀어 일으켜 주는 참된 친구에 대해서 말이다.

진정한 친구를 가졌던 사람
    오래 전에 이 땅에 살았던 에녹은 바로 그런 친구를 가졌었다. 그리고 사귀면 사귈수록 따뜻하고, 신뢰가 가고, 믿음직스러운 그 친구와의 교제가 너무 좋아서 삼백년이란 긴 시간을 그와 함께 우정을 나누었다. 에녹은 삼백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였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삼백년, 아니 삼세기나 되는 긴 세월 동안 그는 그의 친구되신 하나님과 어떻게 지냈을까?
    에녹이 살았던 당시도 지금처럼, 아니 어쩌면 지금보다도 더 부도덕한 일들과 악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던 시대였을 것이다. 그 시대는 하나님께서 홍수를 내리실 수 밖에 없도록 ‘죄악이 관영’한 세상이었으니까...그러나 주위에 그러한 죄악이 넘침에도 불구하고, 에녹은 하나님과 매일 교제함으로 친구되신 하나님의 모습처럼 거룩하고 고결하게 되어 아름다운 하늘의 사람으로 변하는 놀라운 경험을 가졌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한 것은 황홀경속에서나 또는 이상 중에서가 아니라 그의 일상 생활의 모든 의무를 행하는 가운데서였다. 가정에서와 사교 생활에서, 남편과 아버지로서, 친구로서, 시민으로서 그는 확고하고 신실한 하나님의 종이었다.
    에녹은 자기의 아들이 태어난 후 하나님과 더 친밀한 교제 가운데로 이끌려 들어갔다. 그가 자기의 아들에 대한 깊은 애정과 뜨거운 사랑과 관심을 마음에 느꼈을 때, 그는 당신의 아들을 사람들에게 선물로 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깨달았으며, 그리하여 하나님의 무한하고 잴 수 없는 사랑이 순간마다 그의 명상의 주제가 되었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에녹은 자신의 연약함과 불완전함을 더욱 깊이 느꼈다. 그에게 있어서 기도는 영혼의 호흡이었으며 그는 바로 하늘의 분위기 가운데서 살았다. 그는 일상생활에서 사람들과 더불어 살 때, 말로써 또 행동으로써 남에게 축복이 되기 위해 일한 후에는, 반드시 잠시 물러나서 하나님께서만 나누어 주실 수 있는 거룩한 의와 지식에 주리고 목말라 하면서 한동안 한적한 곳에서 보내곤 하였다. 이렇게 하나님과 교제한 에녹은 점점 더 하나님의 형상을 반영하였고, 그의 얼굴은 거룩한 빛으로 빛났다. 그가 하나님과 교통하고 나올 때에 경건하지 않은 사람들까지도 그의 얼굴에 찍힌 하늘의 인상을 뚜렷하게 느낄 수 있었다.

잠시도 헤어질 수 없었던 하나님과 에녹
    그 세대 사람들은 금, 은, 보석을 모으거나, 아름다운 집을 짓거나, 이 땅에서 소유물을 축적하는 데 관심이 없는 에녹을 보고 분명 그를 조롱하였으리라! 그러나 에녹의 마음은 영원한 보화에 있었고, 그의 생각과 마음은 하늘에 있었으며 그의 대화는 늘 하늘에 관한 것이었다. 이 땅에 살면서도 에녹은 믿음으로 하늘의 빛의 영역에서 살았다.
    삼백 년 동안 에녹은 하늘과 조화되기 위하여 영혼의 순결을 추구했었다. 날마다 밀접한 연합을 바랐던 그와 주님과의 교통은 너무 가까워졌고, 하나님께서는 그를 당신 곁으로 데리고 가기를 원하시게 되었다. 너무 친해진 에녹과 하나님은 이제 잠시도 헤어져서는 살 수 없는 사이가 되었기 때문에...마침내 그는 영원한 세계의 문어귀에 섰고 그와 축복의 나라는 한 걸음 사이였다. 드디어 그 문이 열리고 지상에서 그처럼 오랫동안 이루어졌던 하나님과의 동행은 하늘에서 계속되게 되었다. 그는 인간으로서 하늘에 들어간 첫 번째 사람이 되었다.


바라봄으로 변화됨
    주님께서는 에녹과 그러했듯이, 우리와도 단짝 친구가 되기를 원하신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그분과 너무 친해져서 그분의 모습을 거울처럼 반사하기를 원하신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같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바라본다는 것은 말씀에 나타난 그분의 생애를 연구하고 명상하는 것이다. 아름답고 매력적인 그의 품성을 바라보는 것!...우리는 바라봄으로써 그분의 형상으로 변화될 것이다.
사람이 예수님과 친해질 때에 그는 자기속에 심각한 결점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자신이 너무나 그리스도를 닮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에게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 때 그는 마치 사진 촬영사가 자기의 목적하는 물체를 찍으려고, 매 순간을 놓치지 않고 포착하기 위해 노력하듯, 크신 모본되시는 예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마음으로 사랑하는 주님의 정신과 모습을 포착하기 위해 노력한다. 이것이 예수를 바라본다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의 생애를 닮는 것은 멀찍이 떨어져서 그를 바라봄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분의 깊은 사랑을 마음속으로 매일 명상하고, 그분에 관해서 매일 이야기하고, 그분의 완전하심을 깊이 생각하고, 취미를 우아하게 하고, 품성을 고상하게 하려고 노력함으로써 되는 것이며, 믿음과 사랑으로, 열렬하고 참을성있는 노력으로 완전하신 모본을 닮으려는 시도를 거듭해 봄으로써 되는 것이다.

영혼의 화판 위에
    또 한 해가 간다. 지난 한 해동안 어쩌면 우리의 영혼의 화판에는 희미하게, 때로 간혹 선이 끊어진 채, 알아 볼 수 없는 형체로 그려진 주님의 모습이 여기 저기 흐트러져 나타나 있지는 않았을까?... 
    우리가 정말 빛과 사랑의 근원이신 주님과 절친한 친구가 되어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사이가 될 때, 주님과 우리가 밀접한 관계를 맺어 서로에게 생명같은 존재가 될 때, 그 때 비로소 ‘전체가 사랑스럽’고 ‘만 사람위에 뛰어나신’ 그분의 아름다운 모습이 우리 영혼속에 깊이 스며들 것이다.
    그 때, 주님께서는 우리의 영혼의 화판 위에 당신의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실 것이다! 그 때 그 분은 우리의 영혼의 화판위에 좀더 뚜렷한 선으로, 좀더 아름다운 색채로 그분 자신의 형상을 그려 넣으실 것이다!
바로 그 때...우리의 영혼 위에 참된 친구의 모습이 완전히 그려질 때...우리는 비로소 이렇게 노래할 수 있으리라!
“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요일 3:2)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과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고...

 

권두언


강병국 목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 한가지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사회 현상이 있는데, 그것은 종교적인 과격파들의 모습, 곧 자기들이 믿는 신조를 사회에 실현하려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폭력이라도 불사하려는 모습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투쟁, 그리고 과격파 이슬람계들의 미국을 향한 자살테러 사건들을 거의 매일 접하면서 마음속에 한가지 생각이 드는 것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왜 사람들이 자기의 소신과 신앙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다른 사람을 증오하고 죽이는 일까지 불사하게 되는 것일까요? 그것도 하나님을 믿는다는 종교의 이름 하에서 말입니다. 물론 그들에게 정치적인 이유의 복선이 상당 부분 깔려 있는 것이 사실이지마는 그러나 그것은 엄연히 종교 전쟁에 가까운 투쟁입니다.

    핍박의 정신은 성경 첫 부분에 기록될 정도로 인류 역사만큼이나 오래 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핍박이라는 것이 믿지 않는 자들이 믿는 자들을 핍박하는 것이 아니라 믿는 자들이 다른 믿는 자들을 핍박한다는 데 있습니다. 핍박의 정신은 하나님의 정신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을 자기와 다르게 믿거나 자기의 가르침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해서 육신적인 해를 가하는 핍박의 정신은 결코 그리스도의 정신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것이 기독교회의 역사를 점철해 온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핍박에 대한 문제를 자세하게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번 호는 이 핍박의 정신이 어디에서 어떻게 오게 되는 것인지를 연구하는 기사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이제 곧 큰 핍박이 이르러 온다고 예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과거의 역사를 통하여서 미래를 사는 지혜를 배우게 됩니다. 지금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세상을 이기는 믿음을 배워야 할 때입니다.

 

1부 - 마지막 시대에 등장하는 핍박의 세력


요즈음 미국의 보수적인 기독교 단체들과 기독교 극우파 단체들의 활동이 과거 어느 때 보다도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여파에 힘입어 국가의 안보 차원이라는 명제 아래 예전에 없었던 법을 시행하며 미국은 더욱 기독교 세력이 우수한 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가고 있다.

기독교 보수 세력이 주축이 되어 활발하게 벌리고 있는 마약 퇴치 운동, 금주, 금연 운동, 낙태 금지법, 총기 사유 금지법, 공립학교 기도 시간 부활 방안, 국가가 인정하는 특정한 종교가 사회 복지 연금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 법원에 십계명 돌비를 세우는 방안 등 과거에 볼 수 없었던 많은 사회 정화법들이 그들에 의해 제창되어 시행되려는 단계에 있다.

이것을 보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만족해 하며, 다시 이 미국을 올바르고 도덕적인 국가로 탈바꿈할 수 있도록 만드는 좋은 방책들이라고 찬성하고 후원하는 것을 우리는 본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그냥 겉으로 보기에 좋고 더욱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려는 바람직한 시도에서 나온 정책들이라고 가볍게 보아 넘겨도 좋은 것일까?

성경에는 마지막 시대가 되면 어떤 세력이 나타나 참 하나님의 백성들을 핍박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다. 그런데 그 예언을 가만히 연구해 보면 그 세력은 정치적인 세력이지만 종교적인 힘을 빌려 이 일을 행할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성경은 그것을 곧 짐승의 우상을 세우는 일이라고 말하고 있다. 과연 이 짐승의 우상은 무엇이며 이것을 세우는 세력과 기독교 극우파의 활동과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이번 호에서는 앞으로 다가오는 핍박에 대하여 준비하기 위해, 그동안 인간 역사에 있어 온 핍박의 역사와 정신을 조명해 보았으며, 표면상으로 보기에는 아주 바람직해 보이지만 자칫 인간의 양심을 억압하고 핍박할 여지가 있는 종교법을 세우는 데 크게 기여할, 그리하여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짐승의 우상을 세우는데 큰 역할을 할 기독교 극우파 세력들의 움직임에 대해서 또 이 세력과 짐승의 우상과의 관계와 이것이 어떻게 세워질 것인가에 대하여 특별히 다루어 보았다.

사실 인간의 양심이나 사회는 억압이나 강제령을 통해서 깨끗해 질 수 없으며 오직 하나님께 대한 사랑으로 거듭난 신앙만이 인간과 사회를 진정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 “핍박”이란 주제가 좀 무겁고 이해하기 어려운 주제일지 모르지만, 이번 기사들을 통하여 전에 생각해 보지 못했던 “핍박”에 대해 올바른 개념을 갖게되며, 앞으로 성취될 예언에 대한 안목이 더욱 새롭게 열리어 마지막에 다가올 핍박을 위하여 효과적으로 준비되는 독자들이 되기를 바란다.  -편집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성경에 쓰여진 마지막 예언을 보고 의아심을 가진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마지막에 성도들을 핍박하는 어떤 세력이 등장하여 성도들을 괴롭힐 것이라고 예언되어 있기 때문이다. 과연 그 세력은 어떤 세력이며, 어디서 또 어떻게 형성되어 그 세력을 펼칠 것인가? 그 세력을 알기 위해, 또 그 세력이 어떻게 활동할 것인가를 알기 위해 먼저 우리는 요한 계시록에 쓰여진 마지막에 대한 예언을 알지 않으면 안된다.
성경 요한계시록 13장 11~18절에는 예수 재림 직전에 하나님의 백성들을 핍박할 한 나라가 나타날 것을 예언하고 있다. 이 나라는 마지막에 하나님을 믿는 진실된 백성들을 핍박하기 위하여 짐승의 우상을 세우고 짐승의 표를 강요할 것이며, 이 세력에 복종하지 않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죽이려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참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나라의 출범과 또한 이 나라를 통하여 나타날 짐승의 우상이 언제 어떻게 세워질 것인가에 대해, 또 하나님을 참으로 믿는 진실된 백성들이 어떻게 이 모든 핍박과 환난을 이기고 승리할 것인가에 대해 확실하게 알고 있어야 할 필요가 있지 않겠는가?

 

예언된 나라의 출현

그러면 먼저 이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그리고 이 나라가 어떻게 하나님의 남은 백성들을 핍박하게 되는지 연구해 보기로 하자.
    요한 계시록 13장 11~15절 ; “내가 보매 또 다른 짐승이 땅에서 올라오니 새끼양 같이 두 뿔이 있고 용처럼 말하더라. 저가 먼저 나온 짐승의 모든 권세를 그 앞에서 행하고 땅과 땅에 거하는 자들로 처음 짐승에게 경배하게 하니 곧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은 자니라. 큰 이적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 오게 하고 짐승 앞에서 받은 바 이적을 행함으로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하며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칼에 상하였다가 살아난 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라 하더라. 저가 권세를 받아 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그 짐승의 우상으로 말하게 하고 또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

* 성경 예언에서 짐승은 “나라”를 상징한다. 다니엘서 7:23에는 “넷째 짐승은 곧 땅의 넷째 나라인데”라고 하였으며, 같은 장 17절에는 “그 네 큰 짐승은 네 왕이라”고 설명하였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 13:11절에 나오는 짐승은 어떤 나라인데, 바다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땅에서 올라오는 나라이다.

* 성경의 예언을 연구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니엘이나 계시록에 예언 되어진 나라들은 한결같이 물이나 바다에 바람이 불 때에 올라온 사실을 알 수 있게 되는데, 물은 요한 계시록 17:15절의 천사의 해석에 근거해서 ‘사람들’ 혹은 ‘백성들’을 상징하고, 바람은 예레미야 25;32,33; 49:36을 근거로 ‘전쟁’을 상징하는 말로서 이해 할 수가 있다. 그러므로 바다에 바람이 불고 짐승이 하나씩 올라온다는 상징은 백성들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서 나라가 하나씩 일어나게 되고 연이어 또 다른 나라가 등장한다는 성경적 상징 언어인 것이다.

    이렇게 비춰보면 이 나라는 땅에서 올라오는 나라임으로 백성들, 즉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난 전쟁을 통하여 탄생되는 국가가 아니고, 사람들이 많이 있지 않은 곳, 사람들이 별로 없는 땅, 즉 물과 정 반대되는 대조적인 형편에서 생겨 나는 나라임에 틀림이 없다. 성경 다니엘서에 나타난 바벨론이나 그리스나 로마처럼 인구가 많은 유럽 지역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사는 사람들이 드문 지역을 상징하는 땅에서부터 올라오는 나라를 말하는 것이다.

 

이 나라의 출현 시점과 정체

    그러면 이제 이 나라가 생겨나는 시기를 알아 보도록 하자. 그래야 이 나라의 정체를 확실하게 알 수 있다. 바로 그 전장인 요한 계시록 12장을 보면, 하늘에서 쫓겨난 사단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이 세상에 태동한 하나님의 교회 사이에 벌어지는 대쟁투가 그려져 있다. 사단의 세력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기 위하여 추적하고, 하나님의 교회는 핍박을 피하여 도주하는 장면이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교회가 중세기에 크게 핍박을 당하여 새로운 대륙으로 피난하여 갈 것에 대하여 예언해 준 사실을 보게 된다.

계 12:6 - “그 여자가 광야로 도망하매 거기서 일천 이백 육십일 동안 저를 양육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예비하신 곳이 있더라”

* 성경에서 여자는 하나님의 교회를 의미한다. (성경 구약, 호세아 2:19,20, 이사야 54:1-8, 에스겔 16:8-14, 예레미야 6:2 에서 그리고 신약, 고린도 후서 11:2, 에베소 5:21-23을 통하여 교회는 하나님의 아내 혹은 여인으로 상징되어 있음) 그러므로 계시록 12장에서 여인이 쫓겨 다니는 예언은 하나님의 교회가 핍박을 받고 있는 장면이 미리 묘사된 것임에 틀림이 없다.


계 12:13,14 - “용이 자기가 땅으로 내어 쫓긴 것을 보고 남자를 낳은 여자를 핍박하는 지라”(옛뱀 곧 사단이 분노하여 인간을 구원할 남자-예수 그리스도를 상징-를 섬기며 전하는 교회를 미워하여 죽이려 한다는 뜻 - 편집자 주). “그 여자가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 광야 자기 곳으로 날아가 거기서 그 뱀의 낯을 피하여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양육 받으매”

* 성경에서 “한 때”란 1년을 상징한다. 영어로 one time(한 때)이란 말도 옛날 영어로 일년을 의미하는 것이다. 다니엘 11장 13절은 그 사실을 증명해 주고 있는데, “북방 왕은 돌아가서...몇 때 곧 몇 해 후에 대군과 많은 물건을 거느리고 오리라”고 말씀한 것으로 보아 분명히 “한 때”란 일년을 가르키는 용어인 것을 알 수가 있게 된다. 그러므로 교회가 “한 때 두 때 반”, 즉 1년+2년+반년, 다시 말해서 3년 반 동안 핍박을 당하며 도망 다니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요한 계시록 12장의 예언 속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계 13:5,7 - “또 짐승이 큰 말과 참람된 말을 하는 입을 받고 또 마흔 두달 일할 권세를 받으니라 ... 또 권세를 받아 성도들과 싸워 이기게 되고 각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받으니”

* 여기에도 하나님의 성도들이 핍박 당하는 기간으로 42개월을 말씀하고 있는데, 이 기간은 바로 조금 전에 본 3년 반의 기간과 같은 기간이며, 또한 12장 6절에 교회가 광야로 도망하여 거하는 1천 2백 60일의 기간과 꼭 같은 것임을 알 수 있게 된다. 유대력으로는 한달이 30일이기 때문에, “한때 두때 반때 -- 3년 반”의 기간과“마흔 두달”의 기간과 “일천 이백 육십일”의 기간은 다 같은 기간을 말하는 것으로써 성도들이 핍박을 당하여 쫓겨 다니는 기간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 성경에서 기간적인 예언을 말씀할 때는 1년을 1일이라고 말하는 상징어를 쓰고 있는데, 민수기 14:34 과 에스겔 4:6, 욥기 10:5 등등에서 그와 같은 예를 찾아 볼 수가 있다.
모든 종교 개혁자들은 저마다 이 기간을 1260년간의 종교 암흑시대라고 믿었으며 그렇게 말했다. (살아남는 이들 월간지 33호와 48호를 참조 할것)

    기독교 역사는 왜 이 때를 중세기 종교 암흑시대 라고 부르는 지에 대해 잘 증거해 주고 있는데, 중세기에는 천주교의 교황권이 정치의 권력과 결탁하여, 자기의 종교를 받아들이지 않고 성경대로 믿는 신실한 하나님의 백성들을 무섭게 핍박하고 죽였다. 그래서 이 종교 핍박시대 동안 왈덴스인들이나 알비젠스인들, 그 외에도 수많은 진실된 그리스도인들이 광야나 산속 (알프스 피에몽 골짜기 등등)으로 피신하여 가서 그들이 신봉하는 신앙의 자유를 누리기 위하여 도피의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1260년 예언의 끝을 알리는 종이 울리자, 종교개혁운동이 일어났으며, 개신교회 시대의 아침을 맞이하게 되었다. 대부분의 종교 개혁자들과 성경 예언 연구가들은 교황 피우스 6세가 비참하게 최후를 마치던 해인 1798년에 1260년 동안의 종교 암흑시대가 끝났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던 세력이 깨어지는 때, 즉 중세기의 종교암흑시대가 끝나는 시점에서, “땅”에 대한 의미심장한 장면이 등장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계 12:15~16 - “여자의 뒤에서 뱀이 그 입으로 물을 강같이 토하여 여자를 물에 떠내려 가게 하려 하되, 땅이 여자를 도와 그 입을 벌려 용의 입에서 토한 강물을 삼키니”

* 앞에서 공부했던 바와 같이, “바다 또는 물”은 “사람들, 백성들”을 가리키는 상징적 표현이다. 이 예언에는, 사단(뱀)은 도피하는 하나님의 교회(여자) 의 뒤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용 곧 사단의 입에서 물을 토하여 내어 여자를 떠내려 가게 하려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이 장면은 사단이 유럽에서 사람들(물)을 통하여 하나님의 참된 교회를 핍박하고 없애려고 했던 시도에 대한 예언이다.

* 그런데 잘 주목하여 보자. 우리는 여기서 두 번째 짐승 (또 다른 짐승)이 출현하는 장소인 “땅”에 대한 정확한 장소를 발견하게 된다. 즉, 종교 암흑시대가 끝나갈 무렵 교황권의 핍박을 피하기 위하여 도망가는 하나님의 백성을 돕기 위하여“땅”이 나타나는 장면이 나온다. “땅”이 “강물”을 삼켯다는 것은, 용(사단)이 물(사람들)로 교회를 떠내려 가게 하려고 할 때, 인적이 드문 “땅”이 나타나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피신처 역할을 했다는 의미이다.
    중세기의 종교 박해를 피하여 메이 플라워 호나 또 다른 많은 배들을 타고 이주하여 오는 청교도들과 수많은 개신교도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하여 주고, 다시는 종교의 핍박 없이 예배와 신앙의 자유를 가지고 살 수 있도록 땅을 제공하여 준 나라가 과연 어느 나라였는가? 사람들이 많은 지역에서 전쟁을 통하여 세워진 나라가 아니라 인구가 별로 없는 황무지 같은, 즉 “땅”같은 대륙을 발견하고, 이주하고, 개발하여 세운 나라가 어느 나라인가? 역사는 이러한 조건들을 만족시키는 유일한 나라를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는데, 그 나라는 미국이다.

자 이제 정리해 보자. “내가 보매 또 다른 짐승이 땅에서 올라오니 새끼 양 같이 두 뿔이 있고 용처럼 말하더라.”계 13:11. ‘또 다른 짐승’ 인 이 두번째 짐승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올라왔는가? (월간지 33호 22쪽 참조)

1) 언제? 1260년이라는 중세기의 암흑시대가 끝날 무렵인 1700년대 후반기에,
2) 어디서? 사람이 많이 살지 않는 인적이 드문 “땅”에서,
3) 어떻게? 기독교 정신을 가지고 일어난 신생국가.

이러한 나라는 어떤 나라인가? 여기에서 우리는 틀림없는 미국의 모습을 볼 수 있다.

1) 미국은 언제 독립된 국가로 건국되었는가? 1776년
2) 미국은 어디에 세워졌는가? 소수의 인디언들만이 살고 있었을 뿐 사람들이 별로 없던 땅인 신대륙에 세워졌다. “땅에서 올라오니”에서 “올라오니”의 원어적 의미는 소리없이 연기처럼 올라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미국의 태동에 대하여 역사학자 R.A. Anderson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말없는 씨앗처럼 우리는 하나의 제국으로 소리없이 자라났다.”
3) 미국은 어떻게 세워졌는가? 미국은 교황권의 종교 박해를 피하여 메이 플라워 호를 타고 미동부 매사추세츠 주에 이주해온 청교도들에 의해서 세워졌기 때문에, 예배와 신앙의 자유를 가지고 살 수 있도록 기독교 정신을 기초로 건국되었다. 그래서 정치와 종교를 완전히 분리시킨 헌법을 제정함으로써, 종교적 핍박이 없는 신앙과 양심의 자유를 보장하였다. 미국은 “그 입을 벌려”서 핍박으로 인하여 신대륙으로 쫓겨오는 하나님의 교회를 받아 주었다.

    종교 암흑시대가 끝나갈 무렵, 하나님의 백성이 교황권의 핍박을 피하여, 인적이 드물었던 신대륙으로 건너가서, 기독교 정신을 기초로, 18세기 후반에 세워진 국가...이러한 특징들은 우리로 하여금 두번째 짐승의 출현 장면이 미국의 건국 상황과 정확하게 일치된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게 만든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이 교황권의 핍박을 피하기 위한 피신처를 오래 전부터 이미 준비해 놓으셨으며, 그곳은 다름이 아닌 바로 미국이었던 것이다.

 

초강대국으로 변하는 두 번째 짐승

    “새끼 양처럼 두 뿔이 있고 용처럼 말하더라” 계 13:11

    종교개혁자이며, 감리교회의 창시자인 요한 웨슬레는 미국이 건국되기 전에 이미 두번째 짐승의 출현을 정확하게 예고하였다. 1760년경, 그는 1260년간의 교황권의 권세가 무너져 가는 모습을 보면서 요한계시록 13장에 나오는 두번째 짐승에 대해서 이렇게 해석하였다. “새끼 양같은 두번째 짐승이 아직 이르지 아니했지만, 그러나 올 날이 결코 멀지 않았다. 그는 첫번째 짐승의 42달 기간이 끝나는 시기에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Explanatory Notes Upon the New Testament, 17th ed., 704.
    이 얼마나 놀라운 예언 해석인가! 이러한 요한 웨슬리의 예언 해석은 발전되어서, 1890년경에는 J.N. 앤드류스 목사가 두번째 짐승의 정체는 바로 미국이라고 말하게 되었다. 그는 말하기를, 미국은 장차 천주교의 교황권 및 정치 세력과 손을 잡고 종교를 강요하며, 온 세상을 향하여 용처럼 말하는 존재, 즉 마지막에 하나님의 백성들을 핍박하는 세력으로 변모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 해석을 하였다. 그러나 그 당시 미국 기독교계에 깊이 자리잡고 있던 반 천주교회 분위기로 인하여 앤드류스 목사의 예언 해석은 일반 기독교회에게 널리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그 당시만 해도 미국은 청교도적인 정신이 투철하던 때였으니, 교황권에게 쫓겨 자유를 찾아 고향 땅인 유럽을 등질 수 밖에 없었던 사람들이 세운 이 나라가 나중에 교황권과 손을 잡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핍박 할 나라가 될 것이라는, 그러므로 두 번째 짐승은 미국이라는 앤드류스 목사의 견해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로부터 100여년이 지난 지금에는 요한 웨슬리와 앤드류스 목사의 예언 해석이 얼마나 정확하게 성취되었는가를 분명하게 볼 수 있다.

 

세계 최강대국이 된 미국

    건국 당시만 해도 미국은 세계에서 미미한 존재였다. 아무도 미국이 장차 용처럼 말할 수 있는 초강대국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세계 1,2차 대전을 거치면서 미국은 온 세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다. 소련과 동구 공산권이 몰락한 후부터는 온 세상을 향하여 “용처럼 말”하기 시작하는 미국에 대하여 어떤 나라도 감히 대항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고, 최근 이라크와의 전쟁을 통해 유엔 마저도 건드릴 수 없는 세계 최강대국이 된 미국의 모습을 우리는 보고있다.
하나님의 예언이 놀라우리만치 정확하게 성취되는 모습을 보노라면, 엄숙한 두려움마저 느끼게 된다.

    이 “용처럼 말한다”는, 미국에 관한 두렵고 놀라운 예언은 믿기 어렵지만 그것은 성경에 예언되어 있기 때문에 확실한 것이다. 성경은 미국이 새끼양처럼 올라왔지만 종국에는 용처럼 말하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예언은 미국이 마지막에 새끼 양같은 정신을 버리고 중세기 때에 교황권이 유럽을 압박하던 그 정신으로 돌아가서 결국에는 마지막 시대에 하나님의 백성을 핍박하는 세력으로 변모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그러면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마지막 시대에 첫번째 짐승과 두번째 짐승이 협력하여 핍박을 가하게 되는 장면을 살펴 보도록 하자;

 

짐승의 우상을 세우는 미국

    “새끼양과 같이 두 뿔이 있”지만 “용처럼 말한다”는 것은, 처음에는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어 건국되었으나, 이 나라는 앞으로 국가와 교회가 합하여진 종교적 정치를 할 것을 말한다.
    계 13:14~15 - “...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라 하더라. 저가 권세를 받아 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그 짐승의 우상으로 말하게 하고 또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
    이 말씀은 곧 이 어린양처럼 생긴 짐승으로부터 나온 종교와 정치적 방침이 전세계의 정치권을 장악할 것이며, 이 나라가 추구하는 종교를 따르지 않을 때에는 누구든지 핍박과 죽임을 당할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중세 암흑시기 때에 나타났던 정치적 현상이었다. 중세 종교 암흑시기에는 교황권이 전 세계를 자기의 종교를 믿도록 탄압하였으며, 또한 교황의 명령을 받은 왕이 자기 나라 백성들에게 무력을 통하여 천주교를 믿도록 강요하였다. 그리하여 많은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들이 성경에 있는 진리를 사수하다가 순교하여 목숨을 잃었다.
    짐승의 우상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계시록 13장에 첫번째 짐승으로 묘사된 교황권이 과거 중세기 동안 했던 일들을 그 모양, 그 “Image?그대로 묘사하여 흉내내는 것을 말한다. 즉, 마지막 때에 두번째 짐승으로 묘사된 미국이 중세기에 교황권이 그랬던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마지막 참 하나님의 백성들을 핍박하는 세력으로 등장하여 짐승의 표를 강요하고 죽이는 일을 할 것이라는 것이다. (살아남는 이들 33호를 참조 할것)

    그렇다면 성경에 예언되어 있고 기독교의 자유를 위하여 탄생된 이 미국이 어떻게 짐승의 우상을 세우고 참 하나님의 백성들을 핍박하는 세력으로 변한다는 말인가? 그리고 그 일이 가능한 일일까? 다음에 계속되는 기사들을 연구하여 보자.

2부 - 짐승의 우상이란 무엇인가?


킹 제임스 성경을 보면, 성경 요한 계시록 13:14,15 에 기록된 “우상”이란 단어가 영어로 “Image”, 곧 “형상”이라는 뜻으로 쓰여졌는데, 이것은 어떤 것을 매우 흡사하게 닮았다는 것을 말한다.

계 13:14,15 에는 첫 번째 짐승을 위하여 만들어진 한 우상(image, 형상)이 등장하는데, 이 우상은 하나님의 백성을 핍박하는 일에 사용될 것으로 예언되어 있다.

우상의 정체에 대한 두가지 힌트
1)
우상은 첫번째 짐승을 위하여 만들어진다
2) 우상은 첫번째 짐승의 모습(image)을 닮았다

그러므로 짐승의 우상은 첫번째 짐승을 위하여 만들어지는데, 그 모습(image)은 첫번째 짐승의 특성과 행적을 닮았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첫번째 짐승과 그가 한 행적

    이 첫번째 짐승은 표범의 몸과 곰의 발과 사자의 입을 가지고 있으며 용으로부터 그 권세와 능력을 받는 괴상한 모습으로 등장하고 있다. 이 짐승은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이며, 그 열 뿔 위에 면류관을 쓰고 있다고 상징되어 있다. (살아남는 이들 48호, 52호를 참조할 것)  
이 이상한 요한 계시록 13장의 짐승은 그의 머리중 어느 하나에게가 아니라, 바로 열뿔 모두 위에 면류관이 씌어져 있는 모습으로 나타나 있는데,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짐승의 출현 시기를 알려 주시는 비밀 암호로서 그것은 로마가 몰락하면서 열뿔로 나누여지는 과정과 시기에 시작한다는 뜻이다.

이 표범과 같은 짐승이 하는 일과 그 성격을 살펴 보면 그 정체를 우리는 곧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역사에 나타난 첫 번째 짐승의 행적
 
1). 그는 능력과 보좌와 권세를 용같은 나라로 상징된 이교 로마 나라로부터 받는다 (계 13:1,2).
2). 그가 경배를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종교적인 세력인 것을 알 수 있고, 온 세상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계 13:3,4).
3). 참람된 능력을 가지고 있다 (요한 계시록 13:5,6). 성경에서 참람됨이란 다음의 두 가지를 주장하는 것이다. a. 자기가 죄를 용서 한다고 주장 하는 것 (눅 5:21). b. 하나님과 동등하다고 주장 하는 것 (요 10:33).
4). 이 세력은 42달, 즉 1260년 동안 지배하는 권세를 가진다 (계 13:5).
5). 이 세력은 하나님의 성도를 핍박한다 (계 13:6,7).

    위의 사실들을 미루어 보아, 그 세력은 다름이 아닌 로마 교회의 교황권임에 틀림이 없다. 말틴 루터를 포함하여 유명한 종교 개혁자들, 멜랑톤, 니콜라스 리들리, 쟌 베일, 라티머, 크래머, 쟌 낙스 등등의 많은 개혁자들이 요한 계시록 13장의 첫 짐승은 다름아닌 교황권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가르쳤었다. (더 자세한 연구를 원하면 월간지 살아남는 이들 48호, 52호를 참조하기 바란다).

요약
1) 첫번째 짐승(교황권)이 갖고 있던 세력은 정치-종교적 세력이었다.
2) 교황권은 정치 세력과 결탁하여, 자기들의 종교를 강요하고, 자기들의 종교를 믿지 않는 참 하나님의 백성을 핍박하였다.
3) 마지막 시대에 형성되는 짐승의 우상도 첫번째 짐승의 모습(image)을 닮아서 정치적 힘을 이용하여 자신들이 믿는 종교적 교리나 가르침을 강요할 것인데, 이를 거절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가혹한 핍박을 받게 될 것이다.

    짐승의 우상을 세운다는 말의 의미 중세기의 종교 암흑시대에 교황권이 로마 제국의 권력과 손을 잡고 자신들이 강요하는 교리를 거절하던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였던 것처럼, 미국의 개신교회가 미 정부의 권력과 손을 잡고 중세기 때에 교황권이 행했던 종교적 핍박의 모습(image)을 재현할 것이라는 뜻이다.

 

사단이 짐승의 우상을 세우기 위해 이용하는 방법

1) 종교 연합 운동: 개신교회와 교황권의 연합운동은 이미 오래 전부터 추진되어 왔다. 벌써 오래 전에 주요 신문에 실렸던 기사를 보자. “교황권의 요구에 따라, 200여 종파의 개신교회 지도자들은 각기 다른 전통을 가지고 분리되어 있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장벽을 무너뜨리기 위하여 진행되고 있는 프로그램에서, 교황과 함께 기도하고자 트리니티 대학의 예배실에 모였다. 국제 교회 협의회의 총무인 클레이너 랜달 씨는 ‘거기서 교황이 개신교도들과 함께 칼빈파의 찬미가와 찰스 웨슬러의 찬미를 부르고 있는 것을 볼 때에 감동받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하였다. 그는 또한 -이 사실은 우리가 얼마나 가까워졌는지를 잘 보여주는 증거이다- 고 덧붙였다” 1979년 10월 8일자 워싱턴 포스트지.
종교 연합 운동은 겉으로 보기에 너무나 바람직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그것은 오래 동안 성공리에 추진되어 왔고, 거의 대부분의 종파가 가입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만일 믿는 신조와 교리의 차이로 인해 이러한 종교 연합에 참여하지 않는 어떤 교파나 그룹이 있으면, 그 종파에게 핍박이 가해질 우려가 있다.
 
2) 교회와 국가의 연합: 종교연합운동의 정신에 깊이 젖어있는 사람들은 강력한 기독교 정치 단체를 구성하여, 도덕적으로 피폐해진 사회와 국가에 다시 기독교적 정신을 불어넣고, 미국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축복하실 수 있는 국가로 만들기 위해서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러한 단체들이 미국의 기독교 극우 보수파 단체들이다. 그들이 그들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종교적 성향을 띤 법안을 입법화하거나 교회와 정치에 대한 분리의 벽을 허물어뜨릴 수 있는 헌법의 재해석이 반드시 이루어져야만 한다. 이러한 목적을 위하여, 그들은 자신들의 사상을 지지하는 특정한 정치인들을 적극적으로 후원하며, 국회의원들에게 강력한 로비 활동을 펼치고 있다.

    미국의 개신교가 미 정부의 권력과 손을 잡고 자신들이 믿는 특정 교리를 일반 사람들에게 강요할 때, 신앙적 양심 때문에 그것을 거절하는 사람들에게는 핍박이 가해지게 될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사단은 이러한 기독교계의 흐름을 주도하면서 미국을 강력한 기독교적 헌법을 가진 용같은 짐승으로 키우기 위하여 최고의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이러한 면에 있어서, 미국에 있는 개신교회 단체들이 어떻게 정치적으로 움직이고 있는가를 주목해 보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지금 미국에서는 .....

2003년, 9월 30일, U.S.A Today에 실렸던 기사
    “알라바마주와 메릴랜드, 그리고 많은 다른 주들에서는 지금, “과연 종교적인 기념비를 공공 건물이나 장소에 세우는 것이 적절한 것인가?”에 대한 논쟁이 치열해 지고 있다. 여론 조사에 의하면, 많은 사람들이 종교의 기념비는 괜찮지만, 문제는 어떤 종교의 것인가가 중요하다고 대답했다. 이제 미국은 종교적인 문제를 정치적인 이슈로 밀어부치는 데 성공하였고, 국민들의 종교적 관심도도 지금처럼 높았던 적이 과거에 없었던 것 같다. 이제는 짐승의 우상이 거의 세워지는 시대에 들어선 듯 하다.”

- CNN, Gallup 여론 조사 -
1. 미국 돈 동전에 쓰여진 “In God we trust”라는 문구를 좋게 생각하는가? 예: 90% 아니오: 8%
2. 초 교파적인 기독교 예배 행사를 공립학교에서 여는 것을 좋게 생각하는가? 예: 78% 아니오: 21%
3. 성경 십계명 비를 공공 건물이나 장소에 세우는 것을 찬성하는가? 예: 70% 아니오: 29%

3부 - 핍박의 역사


    선과 악의 대쟁투가 걸려있는 이 지구의 세상 역사를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인간의 역사와 인간을 다루시는 방법과 사단이 인간 역사를 다루는 방법의 현저한 차이를 보게 된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처음 창조하실 때, 자유 의지를 주시고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주셔서, 인간 스스로 자원해서 하나님을 선택하고 따르도록 만드셨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가 우리의 자유 의지를 사용하여 모든 일을 스스로 선택하도록 하시며 무슨 일이든지 우리를 억지로 강요하시는 일이 없으시다. 비록 하나님을 진실로 믿고 섬기는 것이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길이라 할지라도, 그분은 결코 인간의 양심을 강요하여 억지로 하나님을 믿도록 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사단의 방법은 이것과 판이하게 다르다. 그는 항상 인간의 양심을 억압하고 강요하고 위협하여 어떤 것이든지 강제로 받아들이게 한다.

핍박의 기원
    핍박은 항상 죄의 역사와 더불어 병행해 왔다. 죄가 들어와 선과 악의 대쟁투가 시작된 이래 이 지구에는 항상 끊이지 않는 전쟁이 있어 왔는데, 그것은 다름이 아닌 하나님과 사단 사이에, 의와 불의 사이에, 사랑과 증오 사이에, 그리고 거짓과 진리 사이에 존재하는 마찰이었다.
제일 처음 나타난 핍박의 정신은 가인과 아벨 사이에 있었던 사건을 통해 나타났다. 가인은 자기의 동생 아벨이 의로웠음으로 그를 미워하여 죽였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딤후 3:12). 잃어버린 세상을 구속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예수는 하나님과 인간의 적인 원수들의 연합 세력에 부딪히게 되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모든 사람도 그와 같다. 의와 죄, 참과 거짓 사이에는 억제할 수 없는 갈등이 있다. 박해의 성격은 시대에 따라 변하지만, 그 원칙 곧 그 아래 깔려 있는 정신은 아벨 시대 이후로 지금껏 주님의 택한 자들을 살해해 온 바로 그것이다.

핍박의 시초
    기원 후 64년 경에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복음이 성령의 능력하에 온 천하에 전파되었다고 자신있게 공포할 수 있었을 만큼 신약 시대의 그리스도교는 성공적으로 포교되었다. 그러나 AD 70년 로마의 공격으로 예루살렘이 멸망된 후, 하나님을 믿던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들과 더불어 이방인들의 미움의 표적이 되었다.
로마의 디시우스(Decius) 황제는 한 법령을 발표하여 누구든지 이방 신이었던 로마의 신에게 경배하고 희생을 바칠 것을 강요하였고, 이 법령에 불복하는 자는 누구든지 죽음을 당하였다. 레오날드 벌두인 (Leonard Verduin)은 “개혁자들과 그의 양자들”이라는 저서에서, 그 때 초기 그리스도교는 이방 종교로 개종시키려는 세속적인 세력으로 인한 강렬한 반대에 처음으로 봉착했고, 그때가 그리스도교에 세속주의가 들어와 발전하기 시작한 시점이 되었다고 언급하였다.
기원 후 303년에는 십여년간에 걸쳐로마의 이교도인 디오클레시안 황제로부터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무서운 핍박이 계속되었는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기들의 신앙을 고수하다가 죽임을 당하였다. 그 여파로 그 황제가 퇴위한 몇 년 뒤에까지도 그의 추종자들에 의하여 자행된 핍박에 의하여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죽음을 당하였을 뿐만 아니라 무서운 고문과 형벌로 인하여 불구가 된 그리스도인들이 셀 수 없이 많이 생겼다. 그런 모든 핍박 속에서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고수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불가능하게 보였는지!

또 다른 핍박의 양상
    그런데 콘스탄틴 황제가 로마에 즉위한 뒤에는 새로운 양상이 생기게 되었다. 그는 매우 영리하고 정략적인 정치가였으므로 사방에 흩어져 있는 그리스도인들과 이교도들을 화합시켜 그의 왕국과 정치 세력을 확장하기 위한 일환으로 삼으려고 AD 312 년에 한 법령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는데, 그것은 다름이 아니고 황제 자신이 침례를 받고 그리스도교에 입적한 후, 누구든지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이고 일요일을 예배일로 삼으라는 강제령이었다.
그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상의 안식일인 일곱째 날 토요일을 예배일로 지키고 있었고, 이교인들은 일요일을 태양신을 섬기는 날로 삼아 그들의 신을 경배하고 있었다. 콘스탄틴 황제는 자신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반면 그리스도인들이 지키던 예배일인 토요일을 일요일로 바꿀 것을 강요하였다. 그리고 이방인이든지 누구든지 간에 강압에 의하여 그리스도교에 입적하여 하나님을 예배하여야 하였을 뿐만 아니라, 태양신을 섬기던 일요일을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날이라는 명제를 세워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다.
    그 법령이 얼마나 신속한 배도로 그리스도교를 인도하며, 그 무서운 종교 암흑시대를 여는 시발점이 되었으며, 교회 성직자 지도자들에 의하여 반대자들을 참혹하게 핍박하는 무자비한 학정으로 변하게 하는 원천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처음 그 법령이 선포되었을 때 그것은 충실한 그리스도인들을 그동안 계속되던 핍박에서 구원하기 위한 얼마나 놀라운 사건으로 보였던가!

    “그런데 이제는 양상이 바뀌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예전에 그리스도인들이 당하던 모든 불이익이 이교도인들에게 이르러 왔는데, 그것은 어떤 이교도인들이든지 만일 집안에서라도 우상에게 아주 적은 제물일지라도 바치고 우상을 숭배하면 굉장한 벌을 받았고, 그들의 이교신을 섬기는 일들은 엄격하게 금지되었다. 아직 그리스도교의 침례를 받지 않은 사람들은 침례 공부반에 참석하도록 강요받았으며, 침례 공부 후에는 반드시 침례를 받도록 하였고 이에 불복하거나 아니면 침례를 받은 후에 다시 예전 이교도의 신앙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은 심한 형벌을 받았다” (레오날도 벌두인 저 “개혁자들과 그의 양자들” p32 참조).

    세상 역사에서 이방종교가 쇠태하고 그리스도교의 세력이 강해질 때, 세력이 왕성해지고 있는 크리스챤 종교가 이교의 세속적인 사회의 전례를 모방하여, 그리스도교 안에 세속주의를 발전시키는 형식적인 종교가 되어, 하나님의 참 교회를 핍박할 가능성은 항상 있다.

반대하는 무리가 생겨남
    그런데 교회가 세력을 얻어 커지고, 영적인 상태가 세속화될 뿐 아니라 종교를 강요하는 이교의 정신을 나타내자, 이런 세속적인 양상을 따라가기를 거부하는 한 크리스챤의 무리가 생겨났는데, 그들은 “도나티스트”라고 불리는 일단의 그리스도인 그룹이었다. 그들은 콘스탄틴 황제가 비 신앙인들에게 그리스도교의 신앙을 강제로 받아들이도록 강요하는 일에 반대하였다. 그들과 세속주의 사이에 있던 차이는 그들이 믿는 교리나 신학 이론에 있기도 했지만, 그것보다 더 종교가 국가와 하나가 되어 종교를 강요하도록 지배하는 세력에 대한 반기를 든 것에 있었다.
    “도나티스트”들은 그리스도교가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할지라도, 종교가 국가의 힘과 결탁하여 자기의 종교를 강요하는 사회 제도는 그리스도의 정신과 방법이라기 보다는 사단의 방법이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그리하여 이교의 정신을 가진, “그리스도교의 세속주의”에 의해서 초래되는 강요와 핍박에 반대하여 일어났으며, 그들은 지금의 북 아프리카 지역에 많이 모이게 되었다. 그들은 교회가, 그들의 마음이 참으로 변화되어 그리스도인이되었다기 보다는 “즉흥적인 개종” , 곧 명령을 듣지 않으면 그들 앞에 이르러 올 생명의 위협과 위험과 핍박을 피하려고 막무가내로 그리스도인이된 사람들로 가득 찬 것을 보게 되었다. 그들 “도나티스트”들은 세상의 다수를 차지하는 가짜 그리스도인들과는 전혀 다른, 적은 수의 참된 남녀 그리스도인들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일반적인 정신에 거부하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이전 형제들에 의하여 무서운 핍박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또 다시 언급하면, 이 핍박은 그들의 신앙 신조와 믿음에 대한 핍박이었다기 보다는, 종교가 국가와 통합하여, 각 사람이 개인적으로 자신의 영적 상태를 결정할 수 있는 종교의 특권을 빼앗고, 황제의 강제 칙령을 강요하는 세력이 된 것에 대하여 반대하기 때문에 오는 핍박이었다.

광야 교인들의 생성
    이 핍박은 많은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을 “광야 교회”로 내몰았다. 항상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정치와 종교의 통합”을 반대하던 “도나티스트”들이 걸은 길을 따라갔다. 이들이 4세기 경에 생긴, 종교 암흑시대 동안 성경에 나타나 있는 참 신앙을 고수하기 위하여 “광야”로 쫓겨 다니며 신앙 생활을 한 “왈덴스인”들이 되었다. 그 외에도 “알비젠스”나 “휴구노” 같은 많은 신실한 그리스도인 무리들이 몇년 뒤에 생겨났다.
    중세기 종교 암흑시대에는 로마 천주교의 교황이 각 나라의 정권과 결합하여 세계의 주권을 장악하고, 그들의 종교를 강요하는 일이 광범위하게 일어났다. 그리하여 천주교와 그들이 지어낸 교리를 믿지 않고 성경을 그대로 믿으려는 무리들을 핍박하였고, 13세기 경에는 그 무서운 종교 재판소를 세워 그 곳에서 세속적인 종교와 교인들에 의하여, 4, 5세기 경의 도나티스트들처럼 종교와 정치의 분리를 주장하고 종교의 자유를 고수하려는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을 무섭고 잔인하게 핍박하였으며, 진실된 그리스도인들이 참혹한 고문과 죽음을 당하였다.
    기대되었던 대로 “교회의 세속주의자” 들은 이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을 이기게 되었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교회의 권위를 강요하기 위하여 국가와 정치의 “힘”과 “무력” 을 사용하는 것은 정당한 일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왈덴스인들이나 알비젠 교도들이나 휴구노 같은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종교와 정치의 통합”을 반대하고 믿지 않았으므로, 국가의 군인들의 무자비한 공격으로부터 자신들을 방어할 만한 아무런 무기나 무력 같은 것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개혁자의 출현과 과거의 답습
    앞서 나타났던 ‘도나티스트’들이 가졌던 정신, 즉 죽음도 불사하고 항거했던 신실한 그리스도인들과 순교자들이 가졌던 참된 신앙의 정신은 16세기에 나타난 개혁자들에 의해 검증되었다. 쯔윙글리나 루터 같은 훌륭한 개혁자들이 이들이 닦아놓은 터 위에 굳게 서서 종교 개혁을 부르짖게 되었다.
    그런데 종교 개혁운동이 궤도에 올랐을 때 그들은 부패한 교회가 행했던 과거의 실수를 그대로 모방하는 일을 답습하고 말았는데, 그것은 다름이 아니고 종교 개혁운동을 보호하고 보존하기 위해 정부의 권력, 즉 세속적인 지도자들의 힘에 보호를 신청한 것이었다. 이렇게 종교가 국가의 방어와 보호를 구한 것은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했으며, 결국, 칼빈을 포함한 그 위대한 개혁자들도 교황의 발자취를 따라 자기들이 주장한 이론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을 핍박하고 죽이는 과오를 범하고 말았다.
    그런데 루터나 쯔윙글리나 칼빈 같은 개혁자들이 자기들의 이론 - 어거스틴이 주장했던 유아 세례나 예정설 등 - 에 동조하지 않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죽이는 일은 옳은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일단의 사람들이 생기게 되었는데, 그들은 “아나벱티스트 (Anabaptist)” 라고 불리우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성경에서 말하는 올바른 침례의 의미와 종교는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대로 스스로 원하여 선택할 수 있는 것이 되어야 하며, 교회는 신약 시대의 교회처럼 운영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한 종교가 다른 종교를 핍박함
    놀랍게도 개혁자들은 자기들의 개혁 운동을, 타락한 로마 천주교회의 발자취를 따라 전개함으로, 쯔윙글리 같은 개혁자는 자기가 주장하는 ‘유아세례 이론’에 동조하지 않는 수 많은 아나벱티스트들을 자신의 교회 앞 강물에 던져 넣어 죽였다. 또 루터는 아기가 태어나자 마자 물을 뿌려 세례를 주는 ‘유아세례’를 굳게 신봉했고 자기의 믿는 신조를 관철하기 위하여 세상 지도자들의 세력에 결탁함으로 결국에는 이런 정신과 믿는 이론 때문에 독일이 나뉘어지게 되었다.
    이렇게 종교가 정치 세력이나 세속적인 권력의 힘을 빌자, 아이러니한 일이 벌어지게 되었다. 독일에서는 만약 그 주(State) 를 다스리는 정치가가 로마 캐톨릭을 믿으면, 그 주는 “천주교 주 (Roman Catholic State)” 가 되어 개신교도 (Lutheran Protestant) 들을 핍박하였고, 만일 그 주(State)의 지도자가 개신교를 믿는 사람이면 그 주는 “개신교 주 (Protestant State)” 가 되어 천주교인들을 핍박하는 일이 생겼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종교에 맞는 주 (State) 를 찾아 거주지를 옮겨야 했고, 이 종교도 저 종교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아무 곳에서도 보호를 받지 못하였으며, 아나벱티스트 같이 성경 그대로 믿으려는 사람들은 종교의 자유를 찾아 북 아메리카로 이주하게 되었다.
    또 칼빈은 자기가 제창한 이론에 의의를 제기하고 토론하기 원하여 찾아온 스페인의 과학자 써비터스 (Servitus) 를 자신의 신조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화형시켰는데, 그것도 자신의 신조를 믿지않는 “이단자”에게 회개할(?) 기회를 준다며 푸르고 젖은 장작에 천천히 태워 죽게 하였다. 그러나 이런 캘빈의 전혀 그리스도인 답지 않은 행동을, 루터의 동조자들과 심지어 부드러운 개혁자로 불리우는 멜랑톤까지 잘했다고 후원하였으니, 지나친 종교의 열성이 오히려 또 다른 귀한 생명을 파괴하고 죽이는 잔인한 일을 불러들였던 것이다.

    이렇게 종교사는, 많은 경우에 참된 그리스도의 정신을 잊은 채, 성경의 올바른 가르침과 진리를 버리고, 자기와 사상과 신조가 다른 종교와 성도들을 핍박한 역사들로 채워져 있다.

 

4부 - 핍박의 신학



항상 그러했듯이 역사에서 종교를 핍박한 세력은 어떤 독재자의 세력도, 어떤 다른 이상한 세력도 아니었다. 그것은 자기의 신조가 다른 소그룹의 종교를 핍박하는, 인간의 유전을 더 중요하게 믿으며 경건의 모양만을 가진 형식적인 다수의 종교 세력이었다.

또한 그것은 그 다수의 우세한 종교가 인간의 양심을 억압하여 억지로 자기의 신앙을 강요하려는 데서 비롯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에 의해서 초기 교회 그리스도인들에게 자행된 핍박은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다. 이교도들이 과거에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했던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그들은, 세력이 우세한 그리스도교가 저희와 믿음이 다른 소수의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지 못하게 해야 했으며, 이런 위험한 정신이 그들 안에 깃들게 하지 말아야 하였다. 옛날, 이교도 사회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소수였으므로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없었다. 그러나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로 개정한 후 그 당시 그리스도교가 유행이 되고, 또 기독교 세력이 정치의 권력과 결탁하여 우세하게 되며 이교의 정신으로 물들었을 때, 그렇게 종교를 강요하는 일들이 가능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한가지 더 덧붙여 말하면, 교회가 세력을 얻고 당대의 인기있는 것이 되어 많은 사람이 개종하게 될 때, 사람이 어떤 종교로 개종하려면 마땅히 필요되는 참된 거듭남과 헌신의 경험을 경하게 여기게 되므로 그 교회 교인들의 신앙심과 헌신이 희석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앞의 3부 기사에서 살펴본 것처럼, 아무리 개혁자들이라 할지라도 그들의 정신과 개혁에 있어서 성경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모본을 완전하게 따르는 데는 미치지 못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종교적인 열성으로 자신들의 신조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죽였는데, 그 이유는 그렇게 하는 길이, 자신이 정설이라고 생각하는 ‘교리’를 넣어줄 수 있으며, 그들을 “이단”과 “이설”에서 보호하여 구원을 받게 하는 길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당시 개혁자들로 하여금 그들이 전하는 신조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을, 천주교회처럼 핍박하고 강요하여서라도 믿도록 하려는 정신을 넣어준 한 유명한 “핍박 신학의 이론”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성자라고 불리는 그 유명한 ‘어거스틴’이 성립한 이론이었다.

핍박 신학의 원조 어거스틴

기원 후 3세기 경에 살았던 교회 감독 어거스틴(354-430)은 로마 천주교의 교리를 조직화한 사람으로서 천주교에서뿐만 아니라, 개신교에서까지 대부로서 추앙을 받고 있다. 많은 저자들은 칼빈의 가르침 중 많은 이론들이 어거스틴이 제창한 교리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어거스틴이나 칼빈을 향해 “그리스도교 역사 중에서 가장 훌륭한 신학자”였다고 역사가들이나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우리는 무조건 그들을 찬양할 수만은 없다.

왜냐하면 어거스틴은 아버지가 이교도였기 때문에 그의 유년 시절에 신약 성경의 가르침으로부터 광범위하게 빗나간 이교의 교육을 받았고, 그러므로 그가 제창한 이론들은 이교가 가지고 있는 견해들에서 많은 영향을 받게 되어, 깊이 들어가 보면 이교에 뿌리를 두고 있는 오류의 가르침들을 교회에 많이 뿌려 놓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칼빈은 어거스틴의 견해를 그대로 따라갔다. 특히 성경 창세기 처음부터 9장까지를 우화적으로 해석하라는 어거스틴의 충고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진화론을 믿도록 문을 여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서로 다른 시대에 살았지만, 어거스틴과 칼빈은 다수의 종교가 소수의 종교 그룹을 핍박하는 일을 ‘정당화’시키는 터전을 마련하였다. 현대 신학자들은 이 사람들을 찬양하지만, 종교가 정치의 힘의 도움을 받고, 종교와 정치가 통합할 때, 다시 그것이 소수의 종교 그룹을 무섭게 핍박하는 세력으로 변할 위험성에 대하여 깨닫지 못하고 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과거의 비극적인 교훈을 잊어버린 채, 정치와 종교의 분리의 중요성을 평가절하하고 다수가 가진 신앙과 종교를 국가의 힘을 빌어 강요하려는 조짐을 보이고 있는 것을 본다.

핍박 신학의 이론

그러면 어거스틴이 주장했던 “핍박 신학의 이론”에 대하여 알아보자. 히포에 있는 교회의 감독이었던 어거스틴은 로마의 콘스탄틴 황제가 죽은 지 17년 후에 태어났는데, 그는 콘스탄틴 황제의 ‘종교와 국가의 통합의 개념’과 ‘도나티스트’를 강하게 반대하는 정신을 받아들인 사람들이었다. ‘도나티스트’들은 신약 성경에 나타나 있는 개념대로 ‘교회의 몸은 그리스도께 그들의 삶을 온전히 헌신한 참된 교인들’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교회의 몸은 국가이고, 교회와 국가는 분리 할 수 없는 한 몸이며, 그렇기 때문에 필요하다면 어떤 수단을 사용하여서라도 모든 국민들이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이 아주 적절한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어거스틴과 세속적인 그리스도인들이 가졌던 이 개념은, ‘교회의 몸’인 ‘국가’가 선택한 종교를 믿지 않고 종교의 자유를 주장하는 ‘도나티스트’들의 생명을 위협하였으며, 이것은 로마 제국의 통용되고 있는 천구교의 신조와 종교를 파괴하는 행위라고 규정하여 온갖 핍박을 다 가하였다. 그런데 그가 콘스탄틴 황제와 마찬가지로 그러한 개념을 받아들인 것은 그 둘 모두가 이방 종교였던 “마니교(Manichaeism)”의 가르침들과 개념들-종교와 국가를 하나로 보는 개념 등-속에서 자라났고 물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로마 천주교 역사에 있어서 어거스틴 만큼 그 교회의 사상과 철학에 영향을 미친 교부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신약 성경에 나오는 교회에 대한 올바른 개념을 갖지 못한 어거스틴은 시편 72:11에 나오는 “만왕이 그 앞에 부복하며 열방이 다 그를 섬기리로다”는 성경절을 잘못 인용하여 말하기를-이제 교회는 지배하고 통제하는 힘이 더 막대해졌으므로 모든 왕이 그 앞에 부복해야 하는 것처럼,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국가가 제정한 종교에 굴복하게 하여야 하며, 강요하고 강권하여서라도 이 좋은 종교를 가지게 해야 한다-고 했다. 그것이 그의 유명한 “Compell them to come in” Theory- “강요하여 들어오게 함”의 이론이다.

또한 눅 14:23에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는 성경절을 잘못 인용하여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믿도록 강권하라고 하셨다’고 하며, 종교를 억지로라도 믿게하는 일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자신의 신조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을 핍박하였다. (레오날도 벌두인의 “개혁자들과 그의 양자들” 65, 66에서 참조)

초기 핍박 당시에는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을 화형시키는 일이 많지 않았으나 후기로 갈수록 불에 태워 죽이는 일이 널리 퍼져서, 성경의 진리를 그대로 믿는 셀 수 없이 많은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의 귀중한 목숨이 화형대에서 불살라졌다. 그런데, 모순되게도 박해자들은 성경 요한복음 15장 6절의 말씀, 곧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는 구절 중에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을 “만일 사람이 로마 천주교회를 거절하면”으로 해석하여 천주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을 불에 태우는 일을 합리화하였다.

한번 그리스도 교회에 이교의 정신이 들어오자, 교회는 자기의 이론과 신조를 강요하려고 사용하는 “무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구약과 신약에서 구실이 될 만한 성경절들을 자꾸 찾아 내었다.

그들은 구약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이 사용했던 창과 검, 그리고 베드로가 예수께 얘기한 눅 22:38에 있는 ‘두 검’에 대한 이야기-베드로가 예수님께 두 검이 있다고 하자, 예수께서 ‘족하다’고 하신 장면의 이야기-를 부적당하게 인용하여 말하기를, 한 검은 천주교회의 성직자들이고 또 다른 한 검은 국가의 군인들을 말하는 것이라고 하며 그들이 하는 핍박을 정당화시켰다. 그리고 이 개념은 12세기에 와서 더욱 강하게 강조되었다. (레오날도 벌두인의 저서 “개혁자와 그의 양자들” p42 에서 참조)

그리고 어거스틴의 ‘강권하는 이론’은 이렇게 핍박하는 행위를 정당화 시키는 일에 단단한 버팀목이 되었다. 그렇게도 위대하다고 숭배받는 한 성인의 잘못된 개념과 잘못된 성경 해석이 그렇게도 수많은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의 피를 흘리게 할 줄을 누가 알았으랴!

초창기 그리스도 교회는 오직 하나님의 능력만을 의지함으로 힘을 얻어, 이교가 정치의 힘을 빌어 압박해오는 모든 박해와 반대를 이겨내고 승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교회가 국가와 연합하여 정부의 도움과 힘을 요청하고, 하나님을 부인한 채, 교회의 참 경건의 능력을 잃어버렸을 때, 이 땅에 천 년이 넘는 그 긴 종교 암흑 시대가 도래하도록 이끌어 갔던 것이다.

장래의 핍박을 견딜 사람들

성경은, 이 땅에 멀지 않아 성경의 진리를 있는 그대로 믿는 신실한 교인들에게 중세기 때 있었던 것 같은 핍박이 다시 일어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을 핍박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하는 핍박의 행위를 사회와 종교의 정당성을 들어 합리화시킬 것이며, 또 그것은 성경의 이론에 입각한 행동이라고 그들의 행위를 정당화시킬 것이다.

예수께서는 오래 전에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내가 너희더러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요 15:18~20).
 
“사람들이 너희를 출회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 하리라” (요 16:2)

성도들에게, 하나님께 진정으로 충성하는 자인지 아닌지를 시험하는 과정이 될 마지막 핍박을 견딜 자들은, 그리고 그 어려운 핍박 속에서도 오직 하나님만 사랑하고 진리를 고수할 사람들은, 지금 사람의 인정보다 하나님의 인정하심만을 바라며 혼자 묵묵히 진리를 고수하며 사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들은 주위의 모든 사람의 신앙이 식어갈 때 그 차가움에서 열을 취하고, 모든 사람의 신앙이 형식적이고 냉랭해질 때 진실되고 열렬한 신자가 되어, 주위의 영적인 기근에 아랑곳없이 늘 하나님과 산 연결을 맺어 활력있는 신앙 생애를 사는 사람들일 것이다!

이제 앞으로 시련의 날이 이르면 하나님의 말씀을 그들의 생애의 법칙으로 삼은 사람들이 나타날 것이다. 여름에는 상록수와 다른 나무를 뚜렷하게 구분할 수 없다. 그러나 겨울 바람이 불어오면 상록수는 변함없이 남아 있지만 다른 나무들은 잎이 떨어져 그 가지가 벌거숭이가 된다. 그것처럼 지금은 마음이 거짓된 신앙 고백자들을 진정한 그리스도인과 구별할 수 없다. 그러나 그 구별이 분명히 지어질 때가 절박해 오고 있다.

만일 반대와 핍박이 우리의 신앙을 향해 일어난다면, 완고와 억압이 다시 기세를 떨친다면, 박해의 불길이 다시 일어난다면… 그러면 분명히 반신 반의의 위선적인 신자들은 흔들리고 믿음을 버릴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반석과 같이 굳게 설 것이며, 그들의 믿음과 소망은 번영의 때보다 더욱 강하고 더욱 밝아질 것이다.

당신은 다가오는 핍박을 위해 믿음을 준비하고 있는 사람인가?

5부 - 기독교 극우파의 문제


미국에는 현재 기독교 극우 보수파들의 움직임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이 옛날의 신앙을 회복해야 한다’는 그럴듯한 명제아래, 정치권의 힘을 빌려 그들의 종교적인 주장을 펼치려고 기독교 극우 보수파들이 추진하고 있는 일들은, 과거 중세기 때 교황권이 행하던 행적과 같은 성격의 것으로서, 이것이 나중에 핍박의 세력으로 변하여 종교를 강요하고 짐승의 우상을 세워 하나님의 참 백성들을 핍박할 것을 유추해 낼 수 있다. 그러므로 그들의 행보와 움직임을 주시해 보는 것은 중요하다고 할 수 있겠다. 그들의 주장과 계획에 대한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질문과 문답 형식으로 기사를 꾸며보았다. 독자들의 숙독을 바란다.

1. 근래에 와서 새로운 그리스도인 권리(New Christian Right) 란 단어가 기독교 극우 보수파 단체들 사이에 많이 쓰이는데, 도대체 새로운 그리스도인 권리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 새로운 그리스도인 권리(New Christian Right) 란 기독교 교리를 정치적으로 실현하기 위해 연합하고 있는 미국 기독교 극우 보수파 종교적 정치 단체들을 말한다.

2. 새로운 그리스도인 권리 ( N.C.R ) 를 주장하는 종교계의 지도자들이 공통적으로 표명하고 있는 주제는 “미국이 경건했던 그 옛날의 황금 시대로 돌아가야 한다” 라는 것인데, 그것은 겉으로 보기에는 그럴듯 하지만 상당히 위험스러운 사상이다. 그것을 주장하는 지도자들은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가?

* 많은 종교 지도자들 중 몇 사람들의 의견을 예로 들어 본다.
* 제임스 케네디(James Kennedy) - “의로운 새 정부는 그리스도의 왕국을 전진시키려 하는 의로운 백성들로부터 발생한다는 사실을 다시 배움으로써 이 세대의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법률들을 역전시킬 수 있다.”
* 프랭키 쉐퍼(Franky Schaeffer) - “우리는 한때 누렸던 그리스도교 국가의 아름다움과 풍성한 사랑을 반드시 다시 일으키지 않으면 안된다.”
* 패트 로버트슨 - “나는 여러분이 미국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기 위하여 애국적으로 활동하는 그리스도인의 군대에 함께 참여할 것을 촉구한다”
* 팀 라헤이(Tim LaHaye) - “내가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150 년간 이 나라는 자유와 사회의 품위와 국내적 평온을 보장시켜 주는 성서적 원칙들 위에 건설되었다. 우리는 다시 그 원칙들을 찾아야 한다.”
* 로버트 두간(Robert Dugan) - “우리 나라가 하나님이 주신 생명의 권리에 대한 그 역사적 존중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갔는지를 인식할 때 참으로 가슴에 아픔을 느끼지 아니할 수 없다.”
* 제리 팔웰(Jerry Falwell) - “미국은 이 나라의 초기 역사에서 하나님과 성경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틀림없는 말씀을 존중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축복을 누렸다. 미국의 역사를 부지런히 살피는 역사 학도라면 어느 누구도 우리의 위대한 나라가 그리스도인 국가를 세우기 위해 고상한 신앙심의 깊은 원칙 위에 섰던 경건한 사람들에 의해 건설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할 것이다.”

3. 과연 미국은 과거에 올바른 기독교의 원칙들을 실천해 왔는가?

* 한 종교 신학자는 그 문제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 클리포드 골드스타인 (종교 신학자) - “도대체 새로운 그리스도인 권리 ( N.C.R )를 지지하는 지도자들이 말하는 ‘신앙심 깊은 원칙들’ 이란 무엇을 두고 하는 말인가? 우리는 과연 어디에서 그 올바른 원칙들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일까? 그 원칙들은 ‘하나님의 왕국을 전진시키려 하는 의로운 백성들’ 에 의하여 저질러진 수많은 아메리카 원주민의 살해와 인종 말살의 행위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가? 수백만의 아프리카 흑인들을 노예로 끌어와 그들이 흘린 피땀 위에 이 ‘그리스도인 국가’를 건설한 사실에서 발견되는 것인가? 아니면 미국이 ‘하나님과 성경을 존중하려고 애썼다 ‘고 하는 그 초기 역사에서 종교적인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들을 박해한 행위 속에 나타났는가?
물론 미국의 건국 초기는 종교의 자유를 찾아 이 땅으로 건너온 청교도들에 의해서 세워진 경건한 그리스도교 정신을 가진 국가였다. 그러나 청교도인 우리의 시조들이 사라진 후, 미국이 나타낸 정신은 ‘신앙심 깊은 원칙’에 입각한 것이 아니었다.”

* 미국의 영광스러운 기독교적 과거, 곧 “자유와 사회적 품위와 국내적인 평온과 성서적인 원칙 위에 나라가 세워졌던” 시절에 대한 가장 웅변적인 증언은 그 당시 노예로서 그러한 원칙들을 직접 몸으로 체험했던 프레드릭 더글라스에게서 들을 수 있다. 노예였던 그는 이렇게 말했다.

* 프레드릭 더글라스(Frederick Douglass) - “당신들의 7월 4일은 아메리카 노예에게 무엇인가? 내가 대답하겠다. 그 날은 일년 중 다른 모든 날들 보다도 노예들을 항상 희생시켜 온 그 불의와 잔혹이 더욱 크게 가해지는 날이다. 노예들에게 당신들의 기념일은 가짜였다. 당신들의 기도와 찬송과 설교와 감사는, 당신들의 모든 종교적인 가두 행진과 모든 엄숙한 행사와 함께 우리들에게는 단순히 허위 좋은 가장이며, 기만이며, 속임이며, 불경이며, 위선이다. 당신들은 몹쓸 짓을 한 이 나라의 창피스러운 죄악들을 얄팍한 허울로 덮고 있는 것이다. 이 세계에서 미국인들 이상으로 더 충격적인 죄악을 행하는 나라가 없다.... 당신들은 당신들이 마시는 차(Tea)에 대한 3페니의 세금을 거부하여 영국군의 대포 포탄 앞에 가슴을 내밀었는데, 당신들의 나라의 흑인 노동자들이 어렵게 벌어서 손에 쥔 1페니의 4분의 1밖에 안되는 1파딩 한 닢을 뺏으려고 흑인 노동자들의 손목을 비틀고 있다. 당신들은 “하나님이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셨다”(행 17: 26)고 신앙을 고백하며, 또 모든 세상 사람들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말한다. 그러나 당신들은 피부 색깔이 당신들과 같지 않은 사람들을 짐승처럼 취급하며 악명 높게 미워하였다. 당신들은 그 미움에서 영광을 구하고 있다.... 이 나라에 노예 제도가 존재하는 사실 자체가 당신들의 공화국주의가 가짜이고, 당신들의 인도주의가 비열한 겉치레에 불과하며, 당신들의 기독교가 거짓임을 알리는 딱지가 되고 있다.”

또 다른 한 작가는 노예 제도 기간의 미국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 엘렌 골드 하몬 ( 종교 저술가 ) - “인간의 고뇌가 장소에서 장소로 이동되어 매매되고 있다. 천사들이 이것을 전부 기록하고 있다. 이것이 책에 기록되고 있다. 경건한 노예와 여자 노예와 아버지들과 어머니들과 그리고 어린이들, 형제들과 자매들의 눈물들이 모두 하늘에 있는 병들에 담겨지고 있다. 하나님은 자신의 분노를 참겠지만 오래 더 참지는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가 이 나라를 향하여 특히 이와 같은 참혹한 인간 무역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자신들도 이 무역에 참여하고 있는 종교 단체들을 향하여 불타고 있다.”

* 역사가 로버트 핸디(Robert Handy)는 기독교적인 미국(A Chrisstian America) 이라는 책에 “18세기 초의 미국의 상황은 미국의 교회들에게 좋게 보이지 않았다....1800년도에는 미국의 전체 인구의 10% 미만이 교인이었다. 물론 교인 명부에 이름을 맡기지 아니한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교회와 연관되어 있기는 했지만 전체적 모습은 크게 희망적이 아니었다.”고 썼다.
* 이와는 대조적으로 오늘날에는 미국 인구의 40%가 매주마다 교회에 출석한다. 반면 영국에서는 인구의 14%만이, 프랑스에서는 12%만이 교회에 출석한다. 매주마다 모든 경기장의 참석자의 총수보다 더 많은 미국인들이 교회에 출석한다. 그리고 그 90%가 주일에 몇 번씩은 기도를 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진실로 과거의 미국인들은 기독교적이었다” 며 옛날의 신앙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하는 새로운 권리 지지자들의 주장은 틀린 것이요, 어쩌면 미국 국민들은 과거보다 오늘날에 더 많이 신앙을 고백하고 있는지 모른다.
* 세 사람의 복음주의자들은 기독교적인 미국이라는 신화를 폭로하는 한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역사의 사실을 주의깊게 연구할 때, 우리는 초기의 미국이 독특하게, 분명하게, 또는 압도적으로 성서적 이상을 반영한 기독교적인 나라라고 할 만하지 못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미국의 역사에는 그리스도인들이 돌아가고자 하는 바 잃어버린 황금 시대가 없다.”
그러므로 미국의 ‘기독교적 과거’라는 신화는 새로운 권리계 수정주의적 역사가들이 만들어 낸 수많은 미국사 중 하나일 뿐이다.

4. 과연 새로운 그리스도인 권리자 ( N.C.R ) 들이 지향하고 있는 주장은 합리적인 것인가?

* 미국의 초기 역사는 노예 제도와 압제와 공공연한 살인 행위로 특징지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권리계의 지도자들에게는 미국의 과거가 ‘그리스도교적’ 인 미래의 국가를 설립하기 위한 그들의 청사진이 되고 있다. 그래서 미국이 경건한 신앙심으로 돌아가서 그리스도교적 가치들을 회복하고, 정부 안에 성서적 원칙들을 재건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보복의 심판을 받게 된다고 한다.
* 클리포드 골드스타인은 말하기를 “의로우신 하나님이시라면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기들을 죽이는 나라보다는 태어나서 장성한 사람들을 죽이는 나라를 심판할 가능성이 더 많아 보인다. 그리고 수백 년을 계속한 노예 제도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진노가 내리지 않았다면, 몇 십년 동안 ‘플레이보이’ 지가 판매되고 있다고 해서, 미국이 곧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것이라고 말하는 새로운 권리자들의 의견은 맞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기독교 보수 극우파들은 미국이 저질렀던 많은 실수들의 슬픈 과거를 잊어버린 채, 그 당시에는 미국이 경건한 기독교 국가였으므로 하나님이 이 나라를 축복하셨었다고 믿으며, 오늘날에는 음란물들과 텔레비젼 같은 나쁜 것들과 전화 섹스와 미혼모들로 인해 많은 사생아들이 생겼음으로, 이 나라가 만일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이 나라에 진노를 쏟아 부을 것이라고 믿는다.” 고 했다.
* 물론 두말 할 필요없이 미국의 개인적인 도덕 가치는 쇠퇴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결과는 정치가들의 책임만이 아니라 성직자들의 실패를 나타내 주는 것이다. 그 해결의 길은 새로운 그리스도인 권리( New C. Right )를 지지하는 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정치권과 공직에 그리스도인들을 앉히는 것이 아니다. 그 해결책은 바로 우리의 가정과 교회에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을 보유하는 것이다. 이곳 - 각 가정들 - 이 바로 미국의 특성이 하나의 정신으로 형성되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치에 관여하거나 입법을 통하여 나라를 구원하려고 하는 새로운 그리스도인 권리 (N.C.R.) 세력의 계획은 합리적이라고 할 수 없으며, 이 나라에 기독교적 경건의 부흥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독교적 경건의 부재를 드러내고 있다.


5. 새로운 권리 ( N.C.R )를 지지하는 대표적인 지도자들은 어떤 주장과 어떤 일들을 하고 있는가?

* 보수적인 그리스도인 지도자 존 화잇헤드(John Whitehead) -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오늘날 일어나고 있는 사태에 대하여 무거운 책임감을 나누어 가져야 한다. 일이 이렇게 되게 된 주요한 요인의 하나는 기독교의 영향력이 감소되어 그 결과 인본적인 사상이 일어나서 사회를 주도하게 한 것이기 때문이다.”
* “그리스도인 연합 기구 (Christian cohollition)”의 로버트 리드 - “그리스도인들이 해야만 하는 일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나라를 되찾아 다스리는 것이다. 한 번에 한 구역을, 한 번에 한 이웃을, 한 번에 한 주를 되찾는 것이다. 나는 나의 생애에 이 나라가 다시 한번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다스려지는 것을 보게될 것으로 정직하게 믿고 있다.”

* 갤럽 여론 조사에 의하면 교인 명부에 오른 많은 그리스도인 인구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를 반영하기보다는 지미 스웨거를 반영하고 있다는 결론이 나왔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인들을 실패케 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실패케 하였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무력한 목사와 교사들을 통하여 이룩할 수 없는 것을 세속적인 법률이 그들을 대신하여 이룩해 주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 옛날에 초대 교회가 복음의 단순성을 떠나 이교의 제의와 관습을 수용하자, 교회는 부패하여 하나님의 성령과 권능을 상실하게 되었다. 그리고 사람들의 양심을 지배하기 위하여 교회는 세속적인 권력의 지원을 구했다. 그 결과가 교황권이었다. 즉 국가의 권력을 지배하고 그 권력을 교회의 목적, 특별히 ‘이단’을 처벌하는 데에 사용한 교회가 교황권이었다. 미국이 짐승의 우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종교적 권력이 정부를 지배하여, 교회가 그 자신의 목적을 수행하는 데에 국가의 권위를 사용할 수 있게 되어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정확히 새로운 권리 세력들이 하고자 하는 일이다.

6. 새로운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그들의 목적 달성을 위해 정치권에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하는 구체적인 방안은 무엇인가 ?

* 새로운 권리 세력은 자신의 정치적인 목적을 위하여 미국의 역사를 다시 쓰려는 또 다른 계획을 가지고 있다. 이 계획은 미국 헌법 제 1 수정 조항의 구절을 다시 제정하여 손질하려는 것이다.
이 구절은 “의회는 종교의 제정을 존중하는 어떤 법률도 제정하지 않는다....” 라고 되어 있다.
“의회는 종교의 제정을 존중하는 어떤 법률도 제정하지 않는다” 는 뜻은 - 의회는 종교를 제정하기 위하여 전혀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다는 뜻, 곧 종교 자유법 - 이라는 뜻인데, 그 뜻과 의미가 충분히 명확함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권리 ( N.C.R )지지 세력과 사람들은 주장하기를 ‘그것은 의회가 특정 종교를 다른 종교보다 더 편애할 수 없다는 뜻이므로, 의회는 모든 종교들을 평등하게 지원할 수 있다’는 뜻이라고 해석하여 말한다.

* 케이드 프르니어는 주장하기를 “정부는 미국의 종교를 관용해야 할 뿐만아니라 긍정적으로 지원해야 한다는 것을 명백하게 인정한 대법원 판례가 많다” 고 하였다.
* 미국의 대법원의 대법관인 윌리엄 H. 렌퀴스트(William H. Rehnquist)는 이에 동의하여 말하기를 제정 구절은 단순히 “국교의 제정을 금지하고 여러 종파나 교파들 중의 편애를 금지하고 있다” 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말하기를 이것이 “종교에 대한 비 차별적인 원조를 연방 정부가 제공하지 못하도록 금지하는 것은 아니다” 라고 하였다.

** 법의 해석, 누가 옳은가?

그 법을 과연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제임스 메디슨이 그법의 제정 구절을 작성하였기 때문에 그가 그 정확한 뜻을 알 것이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그는 그 주제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피력한 문서를 남겼다. 그리고 “버지니아 주가 제1 수정 조항을 위한 이론적 근거와 그 예비적 초안을 제공했기 때문”에 그 역사는 오늘날 우리가 그 종교 관계 구절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
    미국 독립 전쟁 후에 버지니아 주에서는 그 주의 지도자들이, 버지니아 주에 도덕적인 상황이 악화되고 ‘음란함과 사악함과 악덕’이 신속히 퍼지고 있음을 크게 우려하였다. 이러한 사태에 대응하기 위하여 당시 버지니아에서 가장 명성이 높았던 정치인이었던 패트릭 헨리(Patrick Henry)가 종교의 ‘일반적인 평가(The General Assessment)’라는 법안을 작성하여 교회를 지원하기 위한 재산세의 제정을 주장하였다. 그는 그가 제출한 법안에 주장하기를 “각 납세자는 자신의 세금이 어느 교회로 가야 하는지를 결정할 수 있으며, 만약 그가 특정 교단을 명시하지 않으면 그 세금은 교회 학교의 설치에 사용하게 해야 한다” 라고 했다.
1784년에 제안된 이 법안은 특별히 “다른 신조를 가진 단체와 교단에서 복음을 전하는 여러 목사와 교사들의 지원과 부양을 위한 것”이었으며 그들의 교회들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간단히 말해서 헨리가 제출한 법안인 “일반 평가법”은, 20세기의 새로운 권리 세력(N.C.R)들이 제1 수정 조항의 허용 사항이라고 이해하는 것의 18세기 판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모든 종교에 대한 정부의 비 우대적, 비 차별적 지원’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법의 작성자 제임스 메디슨은 총탄같이 이 문제에 대응했다. 패트릭 헨리가 제출한 법안의 주장이 이 법을 만들 초기의 의도와 정신에서 벗어나는 것을 주목한 제임스 메디슨은, 자신의 강력한 연설로 ‘일반 평가법안’에 대한 지지를 집결시키고 있던 패트릭 헨리를 주 의회로부터 축출하여 버지니아의 주지사로 들여앉혀 버렸다. 이렇게 되어 패트릭 헨리는 주 의회의 싸움에는 속수 무책이 되었다. 그 다음으로 메디슨은 그 법안에 반대하는 세력을 결집시키고 또 그의 유명한 ‘청원과 항의’를 작성할 시간을 벌기 위하여 ‘일반 평가 법안’의 표결을 지연시켰다.
    그는 첫 단락의 끝 문장에서 “우리는 ‘일반적인 평가 법안’이라고 말하는 이것에 항의한다” 라고 쓴 다음에, 나머지 열 다섯 개의 단락을 ‘왜냐하면’으로 시작하여 이 “일반 평가법”을 반대하는 이유를 열거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이 법안이 “그들의 가장 기본적인 종교 자유들을 위협하는 ‘권력의 위험한 남용’의 요소가 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는 “15세기의 교회 제도는 미신과 편협과 박해를 낳았는데, 이 법안도 똑같은 일을 할 것”이라고 하며 경고하기를 “다른 종교들을 배제시키고 기독교를 제정할 수 있는 동일한 권위가, 다른 교파들을 배제하고 기독교의 어떤 특정한 교파를 똑같이 쉽게 제정할 수 있다는 것을 그 누가 모르겠느냐” 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또 “이 법안이 제안하고 있는 그 제정이 기독교의 지지를 위한 필요 조건이라고 말하는 것은 기독교에 모순되는 주장이다. 왜냐하면 기독교의 모든 가르침은 이 세상 권력에 대한 의존을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메디슨은 이 법의 해석이 바뀌려는 것을 보고 너무나 놀랐기 때문에 “우리의 자유와 관련된 최초의 실험” 에서 그 법안을 옛날 천주교가 했던 스페인의 종교 재판에 비교하기까지 하였다.
    “종교 재판과 이 법안과는 거리가 있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 차이는 단지 정도의 차이일 뿐이다. 이 법안은 첫 계단이며 스페인의 종교 재판은 불관용의 마지막 단계인 것이다.”
이것이 제정 구절을 작성한 사람의 생각이었다.

7. 새로운 그리스도인 권리자들의 주장에 대하여 반대하는 사람들의 의견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 클리포드 골드스타인 - “웬일인지 사람들이 이 구절이 종교에 대한 정부의 지원을 허용하는 것으로 추론하고 있다. ‘신조가 다른 교파와 종교들’에게 세금을 지원하게 하려 하는 헨리의 작은 법안을 종교 재판에 비교하는 것은 약간 심한 것 같으나, 그 언사와 그 열정은 메디슨이 종교 자유의 기본 원칙을 이해하고 있음을 나타내 주고 있다. 즉 정부는 종교를 방해하지도 장려하지도 못하도록 제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법의 제정자 제임스 메디슨은 말하기를 ‘일반적으로 정부가 종교에 참견할 수 있는 권리는 그림자만큼도 없다’고 확언하였다.”
* 헌법 학자 리오나드 레비(Leonard Levy) - “’의회는 종교의 제정을 존중할 어떤 법률도 제정하지 않는다’고 하는 권력의 명백한 금지가, 모든 교파의 종교에게 도움을 제공하는 권력을 창조하는 것으로 믿는다는 것은 비합리적일 뿐만 아니라 얼빠진 일이다.”
* 조엘 헌터(Joel Hunter) - 새로운 권리의 한 행동가에게 그 문제에 대하여 보기 드물게 민감한 반응을 나타내면서 “공공 기관의 의사 표시는 강제성을 띠지 않을 수가 없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정부와 그 산하의 여러 공공 기관의 권력은 강제적이다.... 그리고 정부의 기관들에 의해 추진되는 모든 행위들은 정부의 기관들과 연결된 강제력을 수반한다. 이와 다르게 생각한다는 것은 너무나 지나치게 순진한 것이다.”

**결론
    분명히 대부분의 새로운 권리계 행동가들은 ‘너무나 지나치게 순진’하거나 아니면 헌법에 명시된 교회와 국가의 분리의 벽을 없이하려는 그들의 노력에 의해 나타날 결과들에 대해 무정할 만큼 무관심하거나 중 하나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은 그 벽의 붕괴로 인한 결과를 알고 있으며, 그러한 결과를 원하고 있다고 말할 수 밖에 없게 된다.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짐승의 우상은 개신교회들이 자신들의 교리를 강요하기 위하여, 문민 정부의 권력의 지원을 요구하게 될 때 생기게 될, 배교한 개신교회를 말한다. 곧, 참 그리스도의 정신을 떠난 배교한 개신교회가 정부의 힘을 빌어 그들의 종교를 강요할 때 세워질 것이다. 바로 이것이 새로운 권리 세력들이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공격함으로써 노리고 있는 것이다. 자신들이 지향하는 바가 어떤 일을 초래할지도 알지 못한 채...
    비록 지금은 새로운 권리 세력( New Christian Right )이 그 일에 성공하지 못했지만, 멀지않아 이 단체(또는 그것과 같은 다른 단체)는 이 일을 해낼 것이다. 우리는 그 일이 일어나는 일을 보기 위해서는 예언을 펼쳐 볼 필요조차 없다. 우리는 단지 법정을 주시하고 있기만 하면 된다. 왜 그런가? 요한 계시록에 묘사된 대로, 예언적인 시나리오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법정이 제1 수정 조항에 대한 그들의 입장을 바꾸어야 하기 때문이다.

6부 - 다시 돌아온 기독교 극우파


    새로운 그리스도인 권리를 주장하던 유명한 지도자들 중 꽤 여러 사람이 스캔달과 사건들로 인해 무대에서 사라지자, 그 운동은 잠잠해지는 듯했다.

    그러나 요즈음, 과거와는 다른 전략과 방법을 가진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나 더욱 성공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그리하여 예언 성취에 한 몫을 담당하고 있는 새로운 그리스도인 권리 세력에 대해 알아본다.

    새로운 권리 - 언듯 겉으로 보기에는 너무 훌륭해 보인다. 그러나 자세히 알고 보면 그 속에 많은 모순이 있다.
    제리 팔웰(Jerry Falwell)은 한때 자유주의자들과 여성 우대주의자들과 동성연애주의자들과 볼셰비키 당원들과 민주당원들과 무신론자들의 채찍이었다. 그러나 그는 경제적으로 허우적거리는 자신의 학교에 부과된 세금에서 6억불을 감세하려고 자유 대학교의 복음적인 주장들을 약화시키기 바빴다. 거국적인 그리스도인 행동 협의회(National Christion Action Council), 도덕적 다수(Moral Majority), 자유 협의회(Freedom Council) 같은 새로운 그리스도인의 권리(New Christian Right) 계열의 조직들은 하나같이 “미국을 구하기” 위하여 조직되었으나 자신들은 구원하지 못했다. 모두가 근본주의자의 저널과 보수적인 다이제스트 같은 출판물과 더불어 사라졌다.
    지미 베커는 돈에 약했고, 지미 스웨거는 여자에 약하여, “새로운 권리”를 주장하는 이 조직들의 정치적 위세에 몰려오던 헌금을 가라앉게 하는 데에 일조하였다. 이들을 위한 정치 헌금이 침몰한 속도는 1988년에 대통령 후보 경쟁에 나섰던 패트 로버트슨을 침몰시킨 속도보다도 더 빨랐다. 그리고 레이건과 부시의 12년 집권 이후에는 한때 “보수 운동의 중심”으로 호칭되던 새로운 권리 세력은 이제 정치적 망각 속으로 사라진 것 같이 보인다.

 

다시 태어난 새로운 권리

    그러나 그러한 겉보기는 기만일 수 있다. 진실로 새로운 그리스도인 권리 세력은 소멸되기는 커녕 오히려 과거 어느 때보다도 미국의 정치 구조 안에 더욱 튼튼한 요새를 구축하였다.
    폴리시 리뷰(Policy Review) 지의 편집인인 토마스 에트우드(Thomas Atwood)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른바 복음적인 권리의 세력은 돌아왔다. 그들은 그들의 조직을, 좀 더 주 (State) 와 지방 정치 위주로, 그리고 지명도가 높은 전국적인 지도자들에게 덜 의존적이 되도록 재정비하였다. 이러한 조직은 더욱 효과적이다. 왜냐하면 이제 이 조직은 확실하게 복음주의로 구별되지 않은 좀더 광범위한 기반을 통해 일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학자인 매튜 모엔(Matthew Moen)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1980년대는 새로운 권리 집단이 공공의 대화와 의회의 토론을 변경시켰다. 90년대에는 이 세력이 이전에는 그렇게 할 수 없었던 방식으로 영향력을 획득하기 위하여 권력 구조 안으로 조용히 침투하고 있다. 그리고 몇 개의 부문에 있어서 이 세력은 이와 같은 새로운 전략에 힘입어 이전보다 더 강력해졌다.”

    현재 그들은 이렇게 달라졌다. “성경에 기초된” 법률들을 통과시키지 않은 의원들에게 성경을 두드리면서 지옥불과 유황을 쏟아 부으려는 듯 항의를 제기하던 고지식한 사람들 대신에, 똑같은 사안을 추진하지만 무대 뒤에서 일하는, 좀더 정치적으로 기민한 보수적 인사들로 서서히 대치되었다. 모엔(Moen)은 말하기를 “지금은 그들에게 한때 결핍됐던 분별력과 세련됨을 갖춘 새로운 기간 요원들이 들어오고 있다”고 하였다.
    새로운 권리 그룹 (N.C.R) 은 과장이 많은 그들의 언사도 크게 가라앉혔다. 지미 스웨거가 그의 정적들에게 사용했던 경고들, 예컨대, “당신은 이른바 도덕적인 메카시주의자들에 맞서지 않고 있다” 라든가, 또는 당신은 바보같은 근본주의자들에 맞서지 않고 있다” 라든가 “당신은 하나님과 맞서고 있다”는 식의 경고는 좀더 세련되고 좀더 덜 분파적인 방식의 것으로 바꾸어지고 있다.
    이전에는 낙태 반대 투쟁에 대해서도 “이 죄로 뒤덮인 사악한 나라 위에 전능하신 하나님의 진노가 부어짐으로써 발생된 전국적인 대학살 사태를 중지시키는 싸움”이라고 불러왔다. 그러나 지금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기의 권리”를 위한 토론으로 부른다. 공립 학교에서 기도를 하게 해야 한다는 주장은 종교적 가치들에 대한 “균등한 기회”라는 주장으로 바꾸어졌다. 그리고 수업료 세금 우대(Tuition Tax Credits)는 종교 교육을 위한 “선택의 자유”로 되었다.

    그들은 이전처럼 자주, 혹은 공개적으로 자신들의 입장에 반대하는 주장들을 “마귀의” 주장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동성연애자들에게도 전에처럼 “성도착자들과 남색자들”이라고 공개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이 운동에 참여하는 활동가들도 이제는 “당신들의 태도는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에 위배된다는 사실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당신들에게 경고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나를 부르셨다”는 식으로 자기를 내세우지 않도록 교육받고 있다.

 

새로운 권리 전략의 변화

    하나님의 진노하심의 과장된 표현을 좀더 수용적인 언어로 바꾼 것 말고도 새로운 권리 세력은 그들의 전반적 전략을 수정하였다. 최소한 지금은 의회나 백악관을 쟁취할 수 없다고 판단한 그들은 군과 주 단위의 지방 정치에 조용하게 침투하는 전국적인 운동으로 숨어 들어갔다.
    자유를 위한 미시간 위원회의 위원장인 제임스 머페트(Games Muffett)는 말하기를 “오는 90년대는 풀뿌리 계층 (서민 계층)에서 행동주의가 최대의 기회를 맞이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우리가 백악관으로부터 눈을 떼고 일반 대중에게 초점을 맞추어야 할 때가 이르른 것”이라 하였다.
주로 미국의 공화당을 통하여 새로운 그리스도인 권리 세력은 전국에 걸쳐 학교의 교육위원회로부터 주 의회에 이르는 공공의 직책에 자신들의 사람을 앉히고 있다.
    정치 분석가인 롭 거르위트(Rob Garwitt)는 이렇게 쓰고 있다. “보수적인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은 최소한 6개 주에서 공화당을 이끌고 있거나 지원하고 있다. 그들은 오레곤으로부터 조지아에 이르는 지역에서 평의회나 학교 교육위원회에 후보를 내세우고 승리하고 있다. 그들은 지금 주류의 후보들과 정치적 그룹의 선거 운동과 조직에서 부상하고 있는 유능한 정치 전략가들을 육성해 왔다. 그리스도인 권리 세력은 이제 더 이상 정치적으로 무지한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의 지도자들은 어떻게 하면 권력에 닿을 수 있는지를 배운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제 그들의 힘은 그 권력도 장악할 가능성이 높을 만큼 자라나고 있다.
    패트 로버트슨의 그리스도인 연합의 책임자인 로버트 리드(Robert Reed)는 말하기를 “우리는 주 정치에 초점을 맞추어야 했을 때에 워싱턴만을 비판해 왔다. 그리스도인들이 관심을 나타내야 할 진정한 싸움은 이웃과 학교 교육위원회와 시의 평의회와 주 의회에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새로운 전략을 요약하는 ‘열쇠 같은 말’은 “연합”이다. 이제는 한 지역에서 몇몇 큰 권력을 가진 소수의 권력 구조들이 활동하는 대신에, 미국 전역에 독립적인 여러 작은 그룹들이 퍼져 동일한 목적을 위해 활동하고 있다. 가족 생활 세미나의 회장이며 새로운 권리의 지도자인 팀 라하이(Tim Lahaye)는 말하기를 “90년대는 종교적인 권리 세력은, 많은 독립적인 여러 사람들로 구성되어, 지역적으로 후원하고 연합하면서도, 개별적으로도 활동하도록 자금이 지원되는 조직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게릴라식 전투 방식은 앞서의 재래식 전투보다 뚜렷한 이점들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알칸사스의 포덩크 학교 교육위원회를 공략하는 데는, 워싱턴에 있는 미국 상원을 공략할 때처럼 많은 정치적 재치가 필요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덜 세련된 요원들이라 할지라도 전에는 그들이 영향력을 끼치지 못했던 곳들에서 영향을 끼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지방 정치에 대하여 많이 알고 있지 않으며 대부분은 관련되어 있지도 않고 대부분 관심도 없다. 그들의 무관심이야말로 새로운 권리 그룹에게 이롭게 작용할 요소이다.
    낮은 투표율 또한 새로운 권리 세력이 자신들을 위한 이점으로 사용할 수 있는 또 다른 요소이다. NAE의 두간(Dugan)은 말하기를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투표의 확실한 무게를 이용하여 문화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하였다.

 

더욱 활성화된 새로운 권리 세력

    최근의 캘리포니아의 지역 정치는 이러한 풀뿌리 대중의 위력을 요약했다. 90년대 초기에 새로운 권리 세력은 주 공화당 중앙 위원회와 군 단위 중앙 위원회의 절반을 장악했다. 샌디에고 군에서는 60명의 새로운 권리 행동가들이 1990년 11월에 실시된 학교 교육위원회 물 문제 위원회, 시 평의회 선거에 출마하여 의석을 확보했다. 그 중에 몇 명은 “비밀 후보”로 출마한 자들이었다. 패트 로버트슨의 선거 운동을 도왔던 보수적인 복음주의자들은 주 단위의 공화당 기구에 계속 머물러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조직을 인수하려고 활동중이다.
프레드릭 클라크슨(Fredrik Clarkson)은 이렇게 말했다. “1988년 선거를 치른 후에 로버트슨의 핵심 조직원들은 당의 보수적인 조직 단위인 캘리포니아의 공화당 총회(CRA)    를 지배하였다. CRA는 자유를 위한 젊은 미국인들과 대학 공화당원과 그 밖의 한 우익적인 공무원 그룹과 연맹을 형성하여 군의 공화당 위원회를 지배하였으며 끝내는 주의 공화당 위원회를 지배하였다.”
패트 로버트슨의 그리스도인 연합(C.C)은 이미 소멸된 도덕적 다수(Moral Majority) 단체와는 달리 새로운 권리의 정치적 복음을 지역 단위에 전파하였으며, 이 조직은 로버트슨의 과거 대통령 선거 운동을 통하여 확보된 180만 명의 명단에게 편지를 발송하는 운동을 전개하여, 이제는 40개 주에 25만 명의 회원을 주장하게 되었으며, C.C측의 통계에 의하면 회원이 계속 증가되고 있다.
C.C의 책임자 가이 로저스(Guy Rodgers)는 말하기를 “전국적으로 증거하고 있는 이러한 반응은, 모든 지역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이 들불처럼 번지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정치적 권력에서도 그같은 탁월성을 발휘해야 할 때라는 사실에 동의하고 있다는 사실”이라고 하였다.
    그리스도인 연합은 지역 평의회나 주 의회와 미 의회에 그리스도인의 관심을 대변시킬 계획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 지도자들을 “효과적인 사회적, 정치적 행동”을 위해 훈련시킬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한 광고 문구는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사회를 변화시킬 일반 대중 운동의 배후에서 일치 단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틀간의 그리스도인 연합 지도자 학교 프로그램을 선전하는 한 광고문은 “주님께서는 당신이 공직에 출마하기를 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믿으라”고 말했다.

 

과거와 똑같은 새로운 권리 세력

    새로운 권리의 현재 목표는 과거의 그것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지금은 하나님의 진노의 신학에 의존하지 않고 단순하게 도덕심과 상식에 의존하여 좀더 세속적인 음조와 세속적인 논리를 사용함으로써, 이 운동이 이 단체의 종교적 견해에 동의해서가 아니라 그 정치적 주장에 동참하는 수많은 지지자들을 이끌어내게 되었다. 동성애 프로그램에 세금을 내고 싶지 않다는 주장을 지지하기 위하여 꼭 ‘예정설’이나 ‘한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는다’는 교리를 믿고 방언을 하는 성서 근본주의자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두말 할 필요없이 오늘날 새로운 권리 집단이 소유하고 있는 가장 강력한 자산은 이 단체가 여러 직책에 확고하게 심어 둔 높은 도덕적 입지이다. 세속적이거나 종교적이거나를 떠나서 책임 있는 시민이라면 그 누가 우리 사회의 여러 범죄와 마약과 도덕적 타락을 역겹게 생각하지 않겠는가? 그 누가 미국의 학교와 청소년과 도덕적 문화에 대해 걱정을 않겠는가? 새로운 권리 세력은 이처럼 도덕적 문제에 관심을 쏟아 진지한 노력을 하고 있으며, 최소한 이 노력 하나만으로도 지지자들과 지원과 권력을 이끌어 내어 그들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권리 세력은 결국 정치적인 권력을 획득하면서, 국가 권력과 결탁한 그리스도인들이 자행할 박해를 성취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다.
미국 시민의 자유 연맹(American Civil Liberties Union)의 사무총장인 아이라 글레서(Ira Glasser)는 미국을, “정부가 부과한 종교적 가치에 의해 지배되는 미국”이 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예언적이라고 할 만큼 “정부가 부과한 종교적 가치에 의하여 지배되는 미국”이라고 묘사한 미국의 미래는 요한 계시록에 예언된 그대로의 미국의 미래이다. 모든 것이 일치되지는 않지만, 서로 같이 공통적으로 주장하고 있는 몇몇의 교리들을 중심으로 연합한 미국의 지도적인 교회들은, 국가에 영향력을 행사하여 그들의 법령을 강요케 하고, 그들의 기관들을 유지케 할 것이며, 그 다음에는 개신교 미국이 로마교회의 권력 구조의 우상을 형성하여 그 법을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시민법의 처벌을 부과받을 수 밖에 없도록 할 것이다.

    비록 새로운 권리 세력은 지금 그러한 박해를 야기시키기에 충분한 힘을 획득하지 못했지만 그러한 방향으로 꾸준히 나가고 있다. 그러한 경향은 벌써 1992년, 공화당 전국 대회에서 분명히 나타났다. 당시 한 뉴스 보도에 의하면 이 대회는 수 차례에 걸쳐 “종교적인 부흥회의 모습”을 나타내었다. 가족의 가치에 대한 공화당의 강조는 공화당의 구조 안에 들어가 있는 보수적인 복음주의자들의 영향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워싱턴 포스트 지의 E. J. 다이온느 기자는 말하기를 “그리스도인 권리계의 당원들은 그들의 조직의 근육을 구부려 놓았고 그 세력을 그들의 회원 숫자 이상으로 강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부시의 대통령 선거 본부가 그들이 선호하는 주제의 하나인 ‘전통적인 가족 가치’를 대통령 선거를 위해 뭉치게 할 정책으로 채택하게 하였다” 고 하였다. 월 스트리트 저널은, 휴스톤에서 운집한 대표들의 약 40%가 보수적인 복음주의 신자로 평가된다고 보고하였다. 새로운 권리의 행동가 마틴 모우어(Martin Mauyer)는 말하기를 “만약 내가 어떤 더 나은 정보를 갖고 있지 않는 한 나는 공화당의 정책이 종교적인 권리측 인사들에 의해 작성되었다고 단언하고 싶다” 고 하였다.

    공화당 전당대회가 종료된 지 몇 주일 후에 ‘그리스도인 연합(C.C)’ 측이 버지니아 비치에서 승리 대회로 가는 제2차 연례 행진(Second Annual Road to Victory Conference)대회를 개최하였다. 조지 부시를 연사의 한 사람으로 한, 3일간의 ‘계획과 전략 모임’이었던 이 대회의 마지막 날 밤에, 패트 로버트슨은 환호하는 대표들에게 말하였다. “선거 결과가 어떻게 나타나든지 “우리는 1993년에 다시 모일 것이다. 1994년에도 다시 모일 것이다. 1995년에도, 1996년에도, 1997년에도 다시 모일 것이다. 1998년에도 다시 모일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완전히 이길 때까지 다시 모일 것이다.”
로버트슨이 말했듯이 보수적인 그리스도인들의 정책은 다시 제기될 것이다. “다시 돌아오겠다”는 그의 말을 주목해야 한다.

    어떤 의미에서 “새로운 그리스도인의 권리”라는 이름은 이름 그 자체가 잘못된 명칭이다. 이 명칭은 새로운 것도 아니며(1970년대에 출발하였다), 그리스도인적인 것도 아니며, 권리도 아니다(이 단체는 교회와 국가에 대하여 위험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
    새로운 것이 있다면 그들의 접근 방식이 새롭다. 그들은 과거보다 이제 좀더 영리해졌으며, 좀더 세련되었으며, 좀더 요령있게 되었으며, 또 그만큼 위험스런 존재가 되었다. 자세를 낮추어 대중에게로 다가가는 이 새로운 전략이 드러내고 있는 것은, 새로운 그리스도인 권리의 세력이 죽기는커녕, 또 다른 “낮은” 의미로 “다시 태어났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새로운 권리”.... 물론, 그들은 종교적 열심이 있지만 그들의 잘못된 종교적 열심이 미국의 국가의 이념이 되고 있는 “종교의 자유”를 위협할 뿐만 아니라 결국에는 하나님의 진실된 백성들을 핍박하는 세력이 될 것이다.

결론 - 핍박의 정신

  
    핍박이란 과연 어떻게, 왜 생기게 되는 것일까? 흔히들 생각지 않고 지나치기 쉬운 질문 가운데 하나이다. 왜 믿는 사람들이, 같은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게 되는 것일까?

    인간의 역사 가운데서 믿는 자들이 같은 믿는 자들을 핍박하여 죽인 숫자가 일반적인 모든 전쟁에서 죽은 군인들의 숫자를 다 합친 것 보다 더 많다는 것이 정설이다. 또한 그러한 종교적인 핍박을 통하여 죽은 자들의 대부분이 기독교인들의 핍박으로 죽은 기독교인들이라는 것이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어떻게 사랑과 용서와 인내를 가르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그렇게도 많은 사람들을 핍박하여 괴롭히거나 아니면 죽일 수가 있었을까? 이것은 분명 그들의 가르침이 그러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믿는 믿음의 철학이 잘못되었거나 잘못 인식 되어서 그러했을 것이다.

핍박은 영적인 전쟁

    우리는 인류 역사의 첫번째 핍박의 정신이 아담의 아들인 가인에게서부터 이미 시작된 사실을 볼 수가 있다. 가인은 동생 아벨이 드린 제사가 하나님께 받으신 바 되고 자기의 것은 용납되지 않자 화가 나서 그를 돌로 쳐 죽였다. 그것은 시기와 질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쉽게 설명하자면 거듭나지 않은 자가 거듭난 자를 핍박한 것이다. 육적인 자가 영적인 자를 핍박한 것이다. 하나님의 성령의 지배를 받지 않는 자가 성령의 지배를 받는 자를 죽인 것이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진리와 오류의 투쟁이라 할 수 있겠다. 이것은 그리스도와 사단 사이의 투쟁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와 사단 사이의 전쟁은 사람들 속에서 이루어 지는 것이기 때문이며 양편 다 사람들을 통해서 일하고 투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영적인 전쟁은 이 지구상에서 이루어 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늘에서는 이 전쟁이 이미 끝났고 그 투쟁이 이 지구에 내려와서 최종적인 결투를 벌이고 있기 때문에...
    핍박은 대부분 잘못 믿는 자가 잘 믿는 자를 괴롭히거나 죽이는 것을 의미한다. 국가와 교회가 하나로 연합되어 있었던 중세기 같은 시대에는 자기들의 믿는 바와 상치되거나 반대하는 자들을 이단으로 몰아서 옥에 가두거나 사형대에 올려서 죽게 하였다. 그러나 국가와 종교가 분리됨을 보장하는, 종교 자유의 헌법을 가지고 있는 나라나 지역에서는 육신적인 핍박을 가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말로나 고소나 따돌림을 통하여 상대방을 괴롭히는 일로 핍박의 방법을 대신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런데 우리가 한가지 알아야 할 것은, 이러한 핍박의 정신이 마치 기독교회의 교리인양 잘못 인식되어지고 공적인 교회의 차원에서 많은 사람들을 때리고 옥에 가두며 죽이게 되기까지의 뒷 배경에는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어거스틴의 교리

    옛날 교부 시대의 말기에 살았던 어거스틴은 중세기 교회의 교리들을 확립하는데 있어서 크게 공헌을 한 사람 가운데 하나이다. 흔히들 우리들은 그를 성 어거스틴으로 알고 있지마는 그것은 중세기 교회에서 그렇게 미화시켜 그려 놓은 그림에 불과하고 그는 결코 성자가 아니었다. 특히 그가 가르치고 확립한 두가지 가르침은 지금까지도 기독교회를 혼돈과 오류의 어려움 속에서 허덕이게 하고 있다. 그가 가르친 오류들 가운데 하나는 원죄설이고 또 다른 하나는 교회의 핍박을 가능케 한 가르침이다.
    첫째로 그의 원죄설은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성화의 과정을 오해케 만들었고 그리하여 예정설의 기초를 놓게 만들었다. 두번째로 그가 저술한 “Compell them to come in” 이라는 책을 통하여 그는 그 당시 중세 교회 교인들에게 이단(?)들은 육신적으로 고통을 가해서라도 다시 불러 들여 와야 하며 그것이 하나님께서 이단들의 영혼들을 구원하시는 방법이라고 가르쳤다. 어거스틴은 “신국”이라는 저술을 통하여 이 땅에서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신정정치를 펼쳐야 한다는 논리를 가르친 자였기에 그러한 논리가 가능했던 것이다. 그의 사상의 영향은 온 교회를 물들게 만들었고 드디어 교회는 공식적으로 이단을 박멸하기 위하여 또한 심지어는 그 이단들의 영혼을 청결케 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그들의 육신을 괴롭히는 잔인한 핍박의 방법들을 자행하기에 이른 것이다.

핍박은 사단의 정신

    핍박이란 믿지 않는 자가 믿는 자들에게 가하는 괴롭힘 보다는 믿는 자들이 같은 믿는 자들에게 자기들의 교리나 신앙을 달리 하거나 반대하기 때문에 가하는 괴롭힘을 말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듯 싶다. 하나님께서는 핍박하는 분이 아니시다. 원수일지라도 사랑하라고 하시는 분이시다. 자기와 다른 것을 믿고 있다고 하여서 그를 괴롭히거나 핍박하는 것은 사단의 정신이다. 물론 오류를 가르치기 때문에 하나님의 교회를 혼란케 하는 자들을 분리 시키는 일이나 경고하는 일은 교회가 하여야 하는 임무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오늘날 세상은 많은 경우에 어두움이 빛으로 인정되어 있고 빛이 어두움으로 인정되어 있다. 진리가 오류로 인정되어 있고 오류들이 진리로 둔갑 되어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러한 입장에서 큰 실리를 얻게 되는 자가 바로 사단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잘못된 가르침이나 비 성서적인 교리를 진리로 믿고 살고 있으면 그러한 환경은 마귀가 활동할 수 있는 최상의 무대가 되는 것이다. 그는 그러한 환경 속에서 오히려 진리를 믿고 수호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핍박하고 따돌리며 죽이게 하는 핍박을 초래할 수 있는 최상의 기회를 얻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리를 성경적으로 올바로 믿고 사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이요, 그러므로 우리는 내가 믿고 있는 것이 과연 성경적인 것인지를 항상 질문하며 살아가야 하는 의무가 있는 것이다.

    사회의 정의를 구현하는 일이나, 나라의 도덕을 되살리기 위한 일이나, 교회를 부흥시키고 개혁시키는 일은 국가적인 강제 법령을 통하여서는 이루어질 수가 없다. 적어도 하나님께서는 어느 누구도 강제로 하늘에 데려 가시지는 않으실 것이다. 진정한 개혁은 마음 속의 개혁으로만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왕국은 마음이 거듭나게 될 때에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요, 그래서 거듭난 자들만이 그 왕국의 일원들이 되는 것이다. 국가나 교회의 강압적인 법령을 통하여 사람들을 바꾸어 놓으려 하는 시도는 오히려 핍박을 낳게 되는 것이요, 또한 그것은 사단의 방법이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다. 그래서 성경은 어떤 믿는 자들이 그러한 육신적인 혈기를 사용하여 다른 믿는 자들을 핍박하는 일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오류를 진리로 알고 있는 자들이 오히려 진리를 가지고 있는 자들을 핍박하는 일이 앞으로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정말 큰 일이 아닐 수가 없다.
    예수께서 마태복음 24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시었다.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 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시험에 빠져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 24:9-13). 예수님 자신도 거짓과 불법에 의하여 미움과 핍박을 받아 십자가에서 돌아 가셨다. 예수님을 핍박한 정신은 사단의 정신이었다. 진리대신 인간의 가르침을 높이는 정신이었다. 성령에 의하여 거듭나지 않은 자들이 성령의 은혜를 따라 사는 자들에게 행하는 일들이었다.

마지막에 다시 실현될 핍박

    이러한 핍박의 정신과 원리에 대하여 우리가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어야 하는 이유는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이 이전에 없던 엄청난 핍박의 시대를 곧 맞이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다니엘서 12장 1절은 이것을 개국 이래로 없던 환난일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요한 계시록은 이 마지막 시대에는 핍박의 양상이 짐승의 표를 강요하는 것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해 주고 있다. 이것은 온 세계적인 일이 될 것이다. 인류 역사의 마지막 핍박이 될 이 짐승의 표의 핍박도, 믿지 않는 자들이 믿는 자들을 핍박하는 것이 아니다. 잘못 믿는 자들이 자기들의 믿는 것이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나머지 올바로 믿는 자들을 핍박하게 되는 것이다.
    옛날 중세기처럼, 국가와 교회가 연합하여서 성경대로 올바로 잘 믿는 자들을 괴롭히고 핍박하게 되는 것이 바로 앞으로 올 짐승의 표의 핍박이다. 다니엘서 3장과 6장의 핍박의 이야기에서 그 상징과 의미를 사용하여서 (실례:짐승의 우상, 경배하라는 명령 등등) 예언된 요한 계시록에 나타난 마지막 시대의 핍박은 다니엘 시대의 핍박의 정신과 동일할 것인데, 곧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도록 강요함으로 생기게 되는 투쟁, 그리고 그것을 반대하여 일어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한 사단의 핍박의 정신이 다시 불타게 되는 역사의 반복이 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러한 핍박을 허락하시는 이유가 있다. 중세기의 핍박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무엇이 진리이며 누가 성경대로 믿는 자들인지를 보여 주셨다. 핍박 받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품성과 진리를 옹호하는 그들의 정신을 통하여서 그 당시와 또한 후세대에 변치 않을 진리와 오류의 차이를 보여 주셨다. 그 당시 핍박의 환난들이 있었기에 우리 후세대들이 진리와 오류 사이의 투쟁을 보게 되었고 무엇이 참인지를 알게 되는 계기가 된 것이었다. 평화적인 시대에는 오류들이 조용히 들어와 판을 치게 될 수가 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투쟁을 일으키셔서 믿는 자들에게 진리를 분별하도록 역사하시는 것이다.
    마찬가지이다. 머지 않은 장래에 하나님께서 마지막으로 한번 더 핍박을 허락하시는 이유는 진리를 높이시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무엇이 진리이며 무엇이 오류인지를 밝히 볼 수 있는 기회를 주실 것이다. 그래서 온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며 진리를 따르든지 아니면 자기 자신을 보호하고 세상의 인기를 위하여 인간의 오류를 지지하든지 간에 중대한 결정을 하게 되는 시기가 이르러 오게 되는 것이다. 이제 앞으로는 중간은 없을 것이다. 두 무리만 존재하게 될 것이다. 어린 양에게 속한 무리와 마귀에게 속한 무리 둘만 있게 될 것이다. 그런데 슬픈 사실은 그들 모두가 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공언하는 그리스도인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어떻게 믿고 살고 있느냐 하는 것이 장래에 우리가 어느 편에 속하게 될 것이냐를 결정 짓는 디딤돌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과연 진리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들 가운데 속할 것인가? 아니면 진리를 핍박하는 자들 가운데 속할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과거에 핍박 받는 광야 교회와 함께 하셨고 그들을 보호 하시며 또한 생명의 길로 인도 하셨다.(계시록 12장 참조)

    큰 핍박의 시기가 이제 막 저 모퉁이를 돌아 우리를 향하여 달려 오려고 준비하고 있다. 나는 핍박 받는 자인가? 아니면 핍박 하는 자인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성품이 우리 모두에게 충만하여, 진리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일에, 그리고 진리를 드높이고 고수하는 일에 용감한 백성들이 되고, 모든 환난에서 우리를 능히 건지시고 힘주실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므로 끝내 아름다운 상급을 받는 독자들이 되기를 기도 드린다.

핍박하는 자와 핍박받는 자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다니고 있습니다. 그럴듯한 성경 가방을 손에 들고, 혹은 비싼 반지를 낀 손에 무게있는 까만 가죽 성경과 찬송가를 든 채.... 

    주일이면 가족 누구보다도 일찍 일어나 준비를 합니다. 그리고 교회에 갈 때는 좋은 인상 (부자이며 아름답고 그리고 똑똑하며 믿음좋다는 인상) 을 끼치기 위해 가장 아름다운 옷을 차려 입고, 될 수 있으면 앞 자리에 앉습니다. 때로 주일학교 교사를 맡아 가르치는 봉사도 하고, 혹은 성가대에 들어가 훌륭하고 아름다운 찬양도 합니다. 손을 흔들며 하는 찬양 예배시간, 부드러운 반주와 리듬에 맞추어 노래하다 보면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이 감격에 빠지기도 하고, 통성기도 때에 제일 큰 소리를 내어 하기도 합니다. 목사님을 도와 심방도 열심히 가고, 새벽 기도회에는 빠지는 적이 없고, 가족의 무사와 안일을 위해 연금도 많이 드리며 교회 봉사 활동과 선교 활동에도 남 다른 열심을 보입니다.

    이쯤 되면, 이 사람의 신앙 상태에 대해 나무랄 것이 아무 것도 없겠지요? 정말 그럴까요?...계속 들어 보기로 하지요!

    그런데 예배시간이나 구역반 예배 때 자기 남편이나 아내가 기도를 맡았는데, 잘 하지 못하고 떠듬거리거나 유창하지 못한 기도를 드립니다. 얼마나 창피하고 자존심이 상하는지...신앙있는 가문의 인상을 평가 절하시키는 태도에 신경질이 납니다. 돌아 오는 길에 던지는 퉁명스러운 한 마디...
“당신 믿은지가 얼마인데 그 기도가 그게 뭐야! 나 원 참 부끄러워서...”

    그 날 설교 시간에 특별히 목사님께서 교회에서 라이벌 관계인 아무개 장로 혹은 아무개 집사의 이름을 들어가며 칭찬을 하십니다. 갑자기 속에서 열이 나며 생각이 뒤엉키는 바람에 설교하시는 목사님의 목소리가 점점 멀리 사라지는 듯 합니다. “아니 목사님이 하필이면 그 장로, 그 집사 칭찬을 하시다니...내가 그 사람보다 모자라는 게 뭐 있다고...앞으로 교회에서 내 영향력을 더 펼치려면 다른 방법을 모색해 보아야겠군!...”

    교회 주보에, 특별한 사회 봉사활동을 벌인 아무개 집사의 동향이 실렸습니다. 그 사람이 교회에 드린 많은 연금과 사회에 베푼 선행과 기부금이 모든 교인들의 화제거리가 되었습니다. 칭송을 받는 그 집사를 보며 예배시간 내내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제직 회의 때, 교회를 위하여, 굉장한 지지를 받을 만 하다고 느껴지는 훌륭한 의견을 제시했건만, 제직 위원들이 별로 나의 의견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거나, 어떤 장로가 의의를 제기하며 무시하는 발언을 합니다. 없신여김을 받았다는 생각에 속으로 내심 불쾌합니다. 기회가 다시 주어지면 의의를 제기했던 그 장로에게 멋진 반격을 하리라 마음속으로 벼릅니다.

    구역반을 위하여 준비하는 회의시간이었습니다. 으례히 구역장인 내가 모든 것을 잘 관활하고 통솔하건만, 별 지도력도 없어 보이는 새 교인이 참석해서 구역 예배를 위한 건설적인 의견이 있노라고 하며 열렬히 자기의 의견을 내세웁니다. 버릇없다는 생각이 스치며 앞으로는 잠잠하도록 만들어야 겠다고 다짐을 합니다.

    예배가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차 속에서, 설교 시간에 끄떡거리며 졸은 아내나 남편이나 아이는 늘 혼벼락을 맞습니다. 믿음이 없고 영적이지 못하다는 이유로...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다닙니다. 마음 속에 일어나는 육신적인 욕망들 - 좋은 평판과 인정을 받고싶은 욕망, 교회에서 최상권을 잡고 싶은 욕망, 칭찬과 높임을 받으려는 욕망, 자기의 영향력과 주관을 실현시키고 싶은 욕망, 다른 사람을 자기 마음대로 다스리고 싶은 욕망, 경쟁에서 으뜸이 되고 싶은 욕망 - 들을 아름다운 모습과 경건한 태도로 포장을 한 채...

그것이 진정으로 창조주를 경배하고 섬기려고 드리는 예배라기 보다는 자신의 의견과 평판을 더 사랑하고, 자신을 섬기는 예배가 되는 줄도 모른 채...
그리고 신앙은 책갈피 속에 끼워 놓았다가 일주일에 한번씩만 꺼내는 장식품 쯤으로 생각한 채...
그리고 그런 신앙 태도가 얼마나 많은 교우들을 혼란가운데 빠뜨리는 줄도 모른 채...
그리고 예수님의 참된 온유와 겸손과 사랑의 정신을 배우지 못한 사람은, 결국 다른 사람을 괴롭히고 지배하고 핍박하는 “용”같은 존재가 될 것이라는 것도 모른 채...
그래서 자신이 이사야서에 표현된 “성전 마당만 밟는 사람들”의 존재가 된 줄도 모른 채...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고 있습니다.

 

신앙은 곧 삶

    신앙은 매일의 삶속에 스며들어 있어야 합니다. 화판에 여기 조금, 저기 조금 물감이 칠해져 있듯이, 생활속에 그렇게 가끔씩 나타나는 것은 참된 신앙이 아닙니다. 화판 전체가 온통 아름다운 물감으로 채색되듯이, 신앙은 먹을 때, 입을 때, 말할 때, 숨쉴 때, 그리고 사는 전체의 삶속에 나타나야 합니다.
교회에서는 좋은 그리스도인이었는데, 장사할 때는 비 그리스도인이 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에서는 훌륭한 교인이었는데, 가정에서는 비 교인이 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자기 주장대로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사람은 결국 자기 뜻을 관철하기 위해서 남을 누르고 핍박하는 사람이 됩니다.
자기 뜻대로 성사되지 않으면 못마땅해서 기분이 상하는 사람은 결국 남을 해치고 핍박하는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의 나라의 원칙

    예수께서 하시는 구속 사업에는 강제가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진리를 받아들이게 하기 위하여 어떤 압력도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분이 사용하시는 방법은 오로지 “사랑”뿐입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성령의 감화 아래서 누구를 섬길지를 선택할 자유를 주십니다.

    제자들이 주님의 왕국에서 서로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누가 크냐’는 논쟁을 벌였을 때, 예수님께서는 슬퍼하시며, 분개한 제자들을 불러 “이방인의 소위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나라는 법정이나 회의나 입법 기관의 결정, 또는 세상의 위인들의 후원을 얻어 설립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성품을 성령의 도우심으로 인간의 마음에 심음으로 이루어집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세력과 부와 교육은 지도자들의 유익을 위하여 군중을 억압하는 수단으로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상류 계급은 생각하고 결정하고 지배하게 되어 있었으며, 하류 계급은 복종하고 섬기게 되어 있었습니다. 다른 모든 것과 같이 종교도 또한 권력에 좌우되었습니다. 백성은 상부에서 지도하는 대로 믿고 행하도록 기대되었고, 인간으로서 자신을 위하여 생각하고 행동하는 인간의 권리는 전적으로 부인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바리새인이나 제사장의 의견을 따라 예수님을 믿지 않고 진리를 거절했습니다.

    세상 나라에서 지위는 권력의 확대를 의미합니다. 예수께서는 이와는 다른 원칙하에 국가를 건설하고 계셨습니다. 그는 사람들을 권력이 아닌 사랑과 봉사로 부르셔서 강한 자가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도록 하셨습니다. 권력과 지위와 재능과 교육은 동료들에게 봉사할 큰 의무를 감당하도록 그들에게 주셨으며, 결코 그것을 사용하여 누구를 억누르거나 핍박하거나 학대하도록 고안하시지 않았습니다.

    양심의 문제에 있어서 심령은 속박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지배하여 그를 판단하거나 그의 의무를 규정할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영혼에게 생각할 자유와 그가 깨달은 대로 행할 자유를 주십니다. 그리스도의 나라에는 오만한 압제도, 행동의 강제도 없기 때문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 20:28).

    예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빈곤을 맛보셨고, 우리를 위하여 극기하셨으며, 당신의 생명을 버리심으로 모든 사람을 살게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행하신 원칙은 그의 몸된 교회의 교인들이 행하여야 할 원칙입니다. 구원의 계획과 기초는 사랑입니다. 그리스도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은 예수께서 끼치신 모본을 따르고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하는 사람입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일 3:16).

    여러분은 핍박하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핍박받는 사람입니까? 
    여러분을 미워하고, 모함하고, 해를 끼치는 사람에게 보복하려고 벼르고 계십니까? 아니면 온유하고 겸손한 예수님의 모본을 따라 사랑으로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하고 계십니까? 
    어떤 사람이 여러분과 신앙이 다를 때, 여러분은 그에게 역성을 내며 신앙을 강요하십니까? 아니면 그 사람이 깨달을 때까지 오래 참으며 사랑으로 본을 보이십니까? 
    여러분의 의견이나 주장이 관철되지 않을 때, 여러분은 예민하게 반응하거나 없신여김을 받았다는 생각에 기분이 상하십니까? 아니면 나의 주장에 어떤 고칠점이 있는지를 겸손하게 다시 반성하고 생각해 보십니까? 
    여러분이 교회에서 맡은 직책을 다른 교우들을 위하여 사랑으로 봉사하고 섬기기 위하여 사용하십니까? 아니면 교회를 좌지우지하고, 다른 교인들을 지배하며 다스리기 위하여 사용하십니까? 
    교회활동을 함에 있어, 자신이 중심이 되어 마음대로 모든 것을 하십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의 의견을 존중하며 받아들이고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어 협력하며 하십니까?

    예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마음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없고, 진정한 거듭남을 체험하지 못한 형식적인 그리스도인들은 나중에 결국 형제를 구원하지 못하고 핍박하는 사람이 될 것이라고...그리고 예수님의 바른 정신, 곧 겸손하고 온유한 정신을 온전히 배우지 못한 사람들은, 결국 올바르지 않은 방법으로 종교를 강요하는 일이 있을 때, 그 틀린 정신과 무리속에 다 참여하게 될 것이라고...

    여러분은 어떤 사람입니까?...핍박하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핍박 받는 사람입니까?...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마음이 가난하여 그리스도의 필요를 깨닫고, 자기의 죄 때문에 애통해 하며, 그리스도와 고난의 학교에 함께 앉은 사람들은 거룩한 교사에게서 온유를 배우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 축복의 산위에서 팔복을 말씀하실 그 당시, 부당한 대우를 받을 때 참으며 온유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이방인들이나 유대인들이 귀하게 여기는 특성이 아니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온유를 천국에 들어가는 첫째 조건으로 삼으셨다. 그분의 생애와 품성 속에는 이 귀한 덕성의 거룩한 미(美)가 나타났다.

    아버지의 영광의 광채이신 예수님은“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빌립보서 2장 6, 7절)기로 작정하셨다. 생애의 온갖 미천한 경험을 통하여, 그분께서는 사람들과 함께 다니시되 왕으로서 충성을 요구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것을 사명으로 여기는 자가 되기로 하셨다. 그분의 태도에는 고집이나 냉혹함을 나타내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세상의 구주께서는 천사보다 더욱 위대한 특성을 소유하셨으나, 그분의 신성한 존엄성에는 모든 사람을 당신께로 이끄는 온유와 겸손이 혼합되어 있었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비우셨다. 그래서 그분께서 하시는 일에는 어디에도 자아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런 그분께서 이제 우리에게 명령하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자아를 물리치고 이것이 더 이상 영혼의 중심을 차지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우리가 자랑으로 여기는 자립과 자존은 사단의 속박의 표로서, 예수님 앞에 그것은 참으로 비열한 것으로 나타난다.
    사람의 본성을 보면 언제나 자기 과시를 위해 애쓰고 투쟁을 위해 준비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에 대해 배운 사람은 이기심과 교만과 지배욕을 멀리 한다. 그리하여 심령 속에 안정이 깃든다. 자아가 성령의 지배 아래 굴복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제일 높은 자리를 얻기 위해 전전긍긍하지 않게 된다. 자신을 드러내기 위하여 다른 사람을 밀어낼 생각도 품지 않게 된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발 아래 앉는 것을 제일 높은 자리로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그분의 인도하시는 음성에 귀를 기울인 채 그분의 손이 우리를 이끌어 주기를 기다려야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마음속에 거하는 손님으로 영접할 때,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안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의 마음과 뜻을 지켜 줄 것이다.
    우리의 평화를 깨뜨리는 것은 자신에 대한 사랑이다. 자아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언제나 그것이 굴욕과 모욕을 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방어 태세를 취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죽고 우리의 생애가 그리스도로 더불어 하나님 안에 감추어질 때는, 무시나 경멸을 조금도 괘념치 않게 될 것이다. 비난에 대하여 귀머거리가 되고, 조소와 모욕에 대하여는 소경이 될 것이다. 세속적인 근원에서 나온 행복은 그 행복을 이루어 주는 다양한 환경과 마찬가지로 변하기 쉽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평안은 변하지 않는 영속적인 평안이다. 그것은 생애의 어떤 환경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며, 세상 재물의 양이나 세상 친구의 수에 의해 결정이 되는 것도 아니다. 그리스도는 생명수의 근원이시므로, 그분께로부터 얻은 행복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가정에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온유는 집안 식구들을 행복하게 해주고, 다툼을 방지해 주며, 화를 내며 대답하지 않게 해줄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흥분을 진정시켜 주며, 그 매력을 감지할 수 있는 반경에 거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느낄 수 있는 부드러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온유는 그것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면 어디서나 세상의 가정들을 하늘에 있는 큰 가정의 한 부분이 되게 해준다.
    원수진 자에게 복수하기 위해 고민하는 것보다는 무고(誣告)를 견디는 쪽이 훨씬 낫다. 증오와 복수의 정신은 원래 사단에게서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그 정신을 품는 자에게는 불행이 초래될 뿐이다. 마음의 겸비, 곧 그리스도 안에 거함으로 얻는 온유는 진정한 축복의 비결이다.

    온유한 자는 “땅을 기업으로 얻을 것이라.”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우리의 첫 조상이 아름다운 이 지상 곧 그들의 나라를 다스리는 통치권을 잃어버리게 된 것은 자아를 높이고자 한 욕망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잃어버린 것을 속량하는 것은 자기 희생을 통해서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그러신 것처럼 우리도 승리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요한계시록 3장 21절).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하”(시편 37편 11절)게 될 때, 우리는 겸손과 극기를 통하여 그분의 후사가 될 수 있다.

    온유한 자에게 약속된 그 땅은 사망과 저주의 그림자로 어두워진 이 세상과 같지 않을 것이다. 그 곳에는 실망도 없고, 슬픔도 없고, 죄도 없고, 병들었다고 말할 사람도 없다. 그 곳에는 장례 행렬도 없고, 탄식도 없고, 죽음도 없고, 이별도 없고, 마음 상하는 일도 없다. 단지 예수께서 거기 계시며, 평화가 거기 있다. 그 곳에서는 “주리거나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며 더위와 볕이 그들을 상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을 긍휼히 여기는 자가 그들을 이끌되 샘물 근원으로 인도할 것임이니라”(이사야 49장 10절).

세상과 교회가 타락하는 가장 큰 이유


    세상이 타락해 가는 이유 중 가장 큰 것을 뽑으라면 우리는 그것을 교회의 타락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교회가 타락하는 이유 중 가장 큰 것을 뽑으라면 그것은 교역자의 불성실함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각 영혼들의 구원에 대한 책임이 교역자에게 놓여져 있다. 하나님께서는 엄숙한 심판대 앞에서, 교역자의 불성실로 잃어버린 바 된 영혼들에 대한 책임을 문책하실 것이다.

    영혼들에게 큰 영향을 끼치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설교이다. 설교의 감화력은 설교자의 웅변이나 지식에 있지 아니하고, 설교자가 얼마나 하나님과 밀접히 교제하며 그의 일상 생활에서 그가 전하는 말씀을 얼마나 실천하느냐에 달려 있다. 성령에 의해 움직이는 사람, 매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의 영혼이 소성함을 얻는 사람, 날마다 더욱 더 자신의 부족과 연약함을 느끼고 성령의 임재가 없이는 한 순간도 안전치 않음을 깨닫는 사람이 성령께서 쓰시는 사람이다. 자신이 얼마나 성령의 감화 가운데 있느냐는 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얼마나 성령의 감화를 줄 수 있느냐를 결정한다. 성령의 감화만이 영혼들을 감동시킬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성령이다. 우리가 성령의 필요를 느끼는 정도에 따라서 성령은 부어질 것이다. 성령을 통해 자신이 감화 받은 말씀과, 성령께 굴복함으로 승리한 자신의 경험을 전하는 것이 참 설교이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명예와 평판과 인기를 위하여 설교한다. 그들은 자신의 인기가 떨어질 까 염려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지 않는다. 그들은 인간과의 관계만을 생각하고 마지막 심판대에서의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지 않는다. 그들이 평판을 잃을까 두려워 죄를 죄라고 지적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와 오래 참으심만(하나님 품성의 한 쪽만)을 전하는 동안 영혼들은 기만당하고 있다. 그들은 영혼들을 말씀의 표준에 맞게 끌어올리는 대신에 하나님의 말씀의 표준을 끌어내린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을 높이고 자신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들은 사람들의 주의를 자신에게 집중시키기 위하여 설교를 준비하고 기사를 쓴다. 그들이 하나님께서 받으셔야 할 영광을 대신 취하고 있는 동안 하늘의 천사는 그들의 이름 아래 “불성실”이라고 기록한다. “만일 나팔이 분명치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쟁을 예비하리요”(고전14:8).

    하나님의 충실한 종들은 어떻게 하면 그들에게 맡겨주신 영혼들을 구원에 이르게 할지 진지하게 연구하고 열렬하게 탄원할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평판을 위해서 설교하지 않고 하나님의 명예를 위해 설교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제시하고 결과는 하나님께 맡긴다. 그들은 설교자를 바라보게 하지 않고 말씀 속에 계신 예수님을 바라보게 한다. 하나님의 참된 종은 영혼들 스스로가 말씀을 연구하고, 그들 자신의 영혼을 위하여 기도하도록 이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 2:4-6). “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오직 주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을 인하여 주의 이름에 돌리소서”(시115:1).

    영혼들이 그대를 통하여 무엇을 보는가? 오, 그대는 누구를 위하여 설교하는가? 하나님의 명예를 위하여 인가? 아니면 자신을 위하여 인가? 다음의 말씀이 우리의 결심이 되게 하자. “내 하나님의 말씀하시는 것 곧 그것을 내가 말하리라”(대하18: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