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그리스도를 따르는 대가


강영은

주여!
새 도화지 위에 무엇을 그릴까 설레는 아이처럼,
아무도 밟지 않은 하얀 눈길을 어디서부터 밟아야 할까 가슴 뛰는 아이처럼,
이제 우리 앞에 마악 펼쳐진, 아무것도 쓰여지지 않은 인생의 새 페이지를 앞에 놓고 당신을 부릅니다.

지난 해, 주님 앞에 그렇게도 부족했지만, 당신은 한결같은 자비와 섭리의 손으로 우리를 인도하셨습니다!

때로는 그 섭리를 이해하지 못하여 투정을 부렸었고, 우리의 계획과 시나리오대로 인생의 기록이 쓰여지지 않을 땐, 불평을 했습니다.
그 시련이 우리에게 그렇게 필요하기에 당신께서 허락하셨건만,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은 항상 가시투성이라고 울었습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교훈을 그리도 늦게 배우며 . . .

주님의 손을 잡고 가는 굽이굽이, 항상 그렇게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 드렸어도, 우리의 손을 잡고 가시는 당신의 손은 언제나 따뜻했습니다.

주여!
새해에는 소원이 있습니다.

이 해에는 우리가 토기장이이신 주님의 손에 놓여 빚어질 때, 절대 불평하지 않게 하소서.

혹시, 지난 날들 동안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새로운 장애물들이 나타나고, 더 극한 시련과 난관에 둘러싸이게 되더라도 놀라거나 실망하지 않게 하소서.
주님과 같은 품성을 소유하기 위하여, 또한 주님의 사업에 적합한 사람이 되기 위하여 그렇게 기도하였건만,
우리를 변화시킨다고 생각하는 안일하고 조용한 환경을 만나는 대신, 우리의 본성에 있는 모든 악을 다 자극하는 것처럼 보이는 험한 환경에 처하게 되어, 우리에게 있는 줄도 몰랐던 결점들이 다 휘저어져 나타나 우리를 실망시킨다 하더라도, 우리를 단련시키시는 지혜로운 당신의 손을 놓지 않게 하소서.

토기장이가 진흙을 가지고 자기의 뜻대로 형체를 만들 듯이, 흙을 이겨 빚고 뭉치어 물로 축인 후 말리다가, 다시 적시어 그것이 완전히 말랑말랑해지면 모양을 만들어 깎고 다듬은 후, 햇빛에 말리고 가마에서 구워 드디어 사용하기에 알맞은 그릇을 만들듯이,
위대하신 주님의 손으로 우리를 빚으실 때, 그 과정이 아무리 힘들더라도 마치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조용히 놓여 있는 것처럼,
우리도 이 해에는 조용히 당신의 손에 놓여 있게 하소서.
어떤 그릇을 빚으시든지 만족한 채 . . .

주여!
새해에는 기쁨으로 십자가를 지게 하소서.

“만일 하나님이 인도하고 계신다면, 왜 이런 일들이 우리에게 닥치는가?” 라며 울던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우리는 울며 의심하지 않게 하소서.
대신, 어려운 일들이 우리 앞에 다가올 때, 그 안에서 주님이 우리를 인도하고 계시는 증거들을 볼 수 있는 눈을 허락하소서.
십자가는 우리를 위해 주님께서 마련하신 가장 훌륭한 훈련의 도구이며, 또한 그분께서 사용하시는 사랑의 방법이라는 것을 기억하면서 . . .
주님께서는 가치없는 돌을 당신의 용광로 속에 던져 넣지 않으신다는 것을 믿으며 . . .

아니, 그보다 우리에게 십자가가 있다는 것은 우리가 주님을 따라간다는 증거가 됨으로 기뻐하게 하소서.
그리고 우리가 당신의 눈에 가치있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기뻐하게 하소서.
주님께서 계발시키기를 바라시는 귀중한 무엇이 우리 속에 있기에,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 속에 당신을 영화롭게 할 무엇이 있다고 생각하시기에, 우리에게 십자가를 허락하시는 것을 알고 기뻐하게 하소서.
그리고 기쁨으로 십자가를 짐으로 우리가 참된 당신의 제자임을 증거하게 하소서.

그러나 그 무엇보다 고난의 십자가도 주님과 함께 지면 환희의 십자가가 되는 것을 알므로 온전히, 뛸듯이 기뻐하게 하소서.

주여!
새해에는 이 깨끗한 페이지 위에 아름다운 기록들로만 가득차게 하소서.
부디 원망과 불신의 어두운 그림자는 이 페이지 위에 깃들지 않게 하시고, 희망과 소망과 믿음의 곡조들로만 채워지게 하소서.

우리가 영위하는 하루 하루가 얼마나 엄숙한 것인지를, 그리고 그 하루 하루가 우리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하는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깨닫게 하소서.
매 순간의 기록들이 우리의 인생의 페이지를 채우며, 하늘의 책에 기록의 양(量)을 늘리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하소서.
한번 입에서 나온 말, 한번 나타낸 행위는 결단코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세상의 어떤 강한 자라도 단 하루의 기록을 지우거나 취소할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그 기록들이 나중에 우리를 정죄하지 않도록 . . .
한번의 표정으로라도 한번의 몸짓으로라도 당신을 근심하게 하지 않도록 . . .
그리고 그것을 기록하는 천사들이 우리의 아름다운 기록들 때문에 미소지을 수 있도록 . . .

주여!
새해에는 지속적으로 주님을 신뢰하게 하소서.
어두울 때야말로 당신께서 우리 곁에 가장 가까이 계시는 때이며, 우리의 위기는 당신의 기회라는 것을 믿으므로 초조해 하거나 근심하지 않게 하소서.
그리하여 어두운 터널을 지날 때도 빛 가운데서처럼 안온하고 평안하게 주님을 따라가게 하소서.
“별의 수효를 계수하시며”, 우리의 “머리털도 세시는” 주님은 참새 한마리 떨어짐도 주시하시는 자상하신 창조주이심을 기억하며 . . .
그리하여 주님 안에 늘 편히 쉬면서 . . .

주여!
새해에는 언제나 감사하게 하소서.

어머니가 마치 사랑하는 아기의 미소짓는 것을 지켜 보고 기뻐하듯이, 우리의 마음에 주님께 대한 감사의 생각이 한가닥 스치기만 해도, 그것은 당신의 마음에 기쁨의 음률을 가득 채운다는 것을 알고 늘 감사하게 하소서.
당신을 사모하는 생각이 싹 트는 순간에, 당신을 찬양하고픈 소망이 입술을 열어 노래하도록 하기 전에,
주님의 마음은 벌써 우리에게 달려와 화합의 멜로디를 엮어낸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 . .

주여!
이제 마악 시작하는 또 한 해,
당신 없이는 절대 혼자 가지 않으렵니다!

주여!
우리의 손을 잡고 가소서.
지난 해와 똑같은 사랑의 손으로 . . .
지난 해와 똑같이 따뜻한 손으로 . . .

 

권두언


강병국

    교회가 핍박을 당하던 시대에는 항상 그 순결을 유지해 왔던 사실을 우리는 역사에서 살펴보게 됩니다. 왜 그럴까요? 투옥과 칼과 고문과 사형 명령이 진짜 그리스도인들과 가짜 그리스도인들을 구분하여 주었기 때문입니다.

    거짓이나 가식적인 확신을 위하여서 목숨을 바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종종 교회를 정결하게 하시기 위하여서 핍박과 고난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무수한 사람들이 옥에 갇히거나 죽임을 당하면 다른 사람들이 일어나서 그들의 자리를 채웠습니다. 고난은 오히려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께로 가까이 나아가게 하였습니다. 한 명의 순교자가 생기면 백 명의 믿는 자가 일어났습니다. 이것을 목격한 사단은 그의 전략을 바꾸기 시작하였습니다. 무력으로 이루지 못했던 일을 이루기 위해서, 그는 이제 교회 안에 들어와 교묘한 작전을 펴 나가기로 한 것입니다. 박해를 그치고 사단은 오히려 교인들에게 세속적 번영과 세속적 명예라는 미끼를 던지기 시작하였습니다. 평안하고 안정된 교회 형편을 만들어 주면서 세상의 재미와 부귀 영화를 꿈꾸게 만들었습니다. 그것은 핍박보다 더 무서운 시험이었습니다. 온 세상의 교회들이 거의가 다 안락한 가운데 극기없는 평안한 신앙 생활을 추구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교회에 핍박이 없는 이유는 교회가 순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지금 상태 그대로 교회를 잠재워 놓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박해를 보내어 교회를 뒤흔들어 깨우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번 호는 참된 제자의 길에 대하여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어떠한 사람이 진짜 그리스도인일까요?

    이번 호의 기사들은 여러분들께 신선한 충격을 드릴 것입니다.

 

부모를 따라 꼴 지어지는 자녀


바쁜 현대 생활속에서 살면서 경건하고 모범적인 그리스도인 부모가 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신실한 부모들은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명, 곧 자녀들의 품성을 하나님의 나라에 적합하도록 꼴 짓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을 것이며, 어떤 희생을 치르고라도 올바른 주님의 방법으로 교육시켜서 자녀가 부모와 함께 영생에 들어가도록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새로운 해를 맞아 우리들은, 아버지로서 혹은 어머니로서 각기 자신을 살피고 우리의 가정들을 관찰하여 정말 이 해에는 우리의 가정들이 하나님께 온전히 바쳐지게 되기를 바라면서, 이번 가정 기사에서는 그리스도인 부모의 모본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루어 보았습니다. 이 기사가 새해에 주님께 더욱 헌신하려는 부모님들께 큰 도움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편집실 -

자녀들은 부모의 거울?
    자녀들은 부모들을 모방한다. 부모들은 그들의 첫번째 교사이며 자녀들은 학생이다. 부모의 음성, 행실, 정신은 그들의 어린 자녀들에 의하여 모방된다.
자녀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부모를 모방하게 되어 있다. 왜냐하면 자라면서 보고 배운 것에 의해 그 아이가 꼴지어지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들은 그들에게 올바른 본을 보이기 위하여 각별히 주의하여야 한다.
    가정에서 친절하고 예모가 있으며, 동시에 단호하고 과단성이 있는 부모들은 자기 자녀들에게서도 같은 특성이 나타나는 것을 볼 것이다. 만일 부모들이 올바르고, 정직하고, 존경을 받을 만하면, 자녀들은 이러한 부모의 특성을 뚜렷이 닮을 것이다. 만일 부모들이 하나님을 공경하고 경배한다면 그와 같은 방법으로 훈련을 받은 그들의 자녀들 역시 하나님을 섬기기를 잊지 아니할 것이다.
    가정에서 부모들은 자녀들에 의해 모방되기를 원하는 그런 모본을 자녀들 앞에 언제나 나타내야 한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서로 말과 표정과 행동에 있어서 부드러운 관심을 보여야 하며, 자녀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품성을 나타냄으로써 성령께서 그들을 주관하고 있다는 것을 명백히 드러내야 한다. 모방의 힘은 강하므로, 이 능력이 가장 활발한 유년과 청소년 시절에 완전한 모본을 어린이들 앞에 제시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부모들이 자기의 자녀들 앞에서 좋은 모본이 될 때 자녀들은 그들의 부모를 신뢰할 것이며, 부모들이 깨우쳐 주는 교훈을 받아들일 것이다.

어머니의 모본
    어머니는 자녀들의 교육에 있어서 방학이 없는 학교에 다니는 것과 같다. 그는 자녀들을 가르치는 동안에 자신이 날마다 배운다. 어머니가 자제와 참는 것에 대하여 자녀에게 교훈을 주려면, 먼저 자신이 그것을 실천해야 한다. 자녀들의 서로 다른 마음과 기분을 취급함에 있어서 어머니는 예리한 지각력이 필요한데, 그렇지 못할 때 어머니는 그릇된 판단을 내리든지 그의 자녀들을 불공평하게 다룰 위험에 빠지기 쉽다. 자기의 자녀들이 예모 있고 친절하게 되기를 원한다면 어머니는 가정 생활에서 친절의 법을 먼저 실천하여 모본을 보여야 한다.
    자녀들의 운명은 거의 어머니들의 손에 달려 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머니가 의무 수행에 실패한다면 자녀들을 하나님의 원수의 편에 속하게 하여 영혼을 멸망시키는 사단의 대리자가 되게 할 수 있을 것이지만, 만일 어머니가 경건한 모본과 신실한 훈육으로써 자녀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면, 그들을 많은 영혼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훌륭한 도구로 키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어머니는 그들의 신성한 의무를 바르게 수행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시도록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며, 자기 사명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은밀한 기도를 많이 하고, 자녀들을 예수께 바치며, 자녀들의 성질과 습관을 형성시킬 모든 기회를 잘 활용해야 한다. 어머니는 자녀의 너무 두드러진 강한 특성을 억제하는 한편, 부족한 특성들을 격려하면서 품성의 계발을 신중히 살펴야 할 것이다. 어머니는 자기의 생애가, 자기에게 위탁된 귀한 자녀들에게 깨끗하고 고상한 모본이 되도록 해야 한다.

어머니는 평생 교사
    어머니들이여! 학교의 교사들이 그대의 자녀들을 교육시키기 위하여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지만, 그대의 모본은 다른 어떠한 방법으로 성취할 수 있는 것보다 더욱 중요한 일을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으라!
    그대의 대화, 자신의 사업 문제를 처리하는 방법, 그대가 말로 표현하는 좋은 것들과 싫은 것들 등은 모두 자녀들의 품성을 형성하는 일을 돕는다. 그대의 자녀가 그대에게서 발견하는 친절한 성격, 자제, 침착, 예의 등은 날마다 그들에게 교훈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 교훈은 변함없이 항상 계속되어야 하며, 어머니는 아이들의 평생 교사가 되는 것이다. 연중 무휴인 이 학교의 영향은 그대의 자녀를 훌륭한 아이로 만들 그런 것이 되어야 한다. 이 어렵고도 소중한 직업을 훌륭하게 수행하기 위하여 어머니들은 하늘의 능력을 달라고 하나님께 늘 기도해야 한다.

어머니는 아이의 교과서
    어머니들이여! 그대의 자녀들에게 무례하지 않도록 조심하도록 하자. 순종을 요구하되 그대의 자녀들에게 부주의한 말을 하지 않도록 주의하자. 왜냐하면 그대의 태도와 말은 그들의 교과서이기 때문이다. 자녀의 생애의 전 기간 동안에 온유하고 친절하게 그들을 도와주도록 하자. 그래서 어머니란 존재가 그들의 마음에 햇빛과 같이 되도록... 자라나는 소년 소녀들은 매우 민감하므로 난폭하게 다루면 그들의 온 생활을 파괴할 수가 있고 그들의 부드러운 감수성에 상처를 줄 수 있으므로 조심해야 한다. 결코 격정적이고 신경질적인 말로 꾸짖지 말자. 그것은 그들에게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것보다는 늘 긍정적이고 신뢰하는 말을 하여 자녀들을 격려하자.
사실 가정에서 애쓰는 어머니는 자기의 수고에 대하여 아무런 세속적인 영예도 받지 못하는 반면에 남편은 공개적인 사회 생활이나 선교지에서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어머니가 거룩하신 모본이신 예수님의 본을 따라 자녀들의 품성을 형성시키기 위하여 노력한다면, 천사는 그 어머니의 이름을 세상에서 가장 큰 선교사의 하나로 하늘 책에 기록할 것이다.
    어머니는 가족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드는 하나님의 대리자이다. 그는 날마다의 의무 수행을 즐거움 가운데서 하여 성서적 신앙의 감화가 우리를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지를 보임으로써 신앙을 몸소 실천해야 한다.
    다른 어떤 사업도 그 중요성에 있어서 어머니의 일에 비길 수 없다. 그의 일은 화가와 같이 화폭 위에 아름다운 형상을 그리거나 조각가와 같이 대리석에 형상을 아로새기는 것은 아니다. 또는 저술가와 같이 고상한 사상을 힘있는 문구로 나타내거나 음악가와 같이 아름다운 감정을 음률로 표현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임무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힘입어 인간의 심령에 하나님의 형상을 계발시키는 것이다.

아버지의 모본
    가정을 행복하게 만드는 책임은 어머니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들도 담당해야 할 중요한 역할이 있다. 아버지는 그의 강하고 열렬하고 헌신적인 애정으로 말미암아 그의 식구들 즉, 어머니와 자녀들을 가장 강한 연합의 줄로 함께 매는 가정의 띠이다.
    “가정의 띠” (husband ; 원래의 뜻은 House-band에서 유래함 - 편집자 주) 라는 그의 이름은 남편의 올바른 정의이다.
    자녀들은 어머니의 자녀임과 동시에 아버지의 자녀이다. 그러므로 아버지는 자녀들의 행복에 어머니와 똑같은 관심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아버지는 가정을 행복하게 만드는 데 있어서 자기의 몫을 감당해야 한다. 그러므로 걱정과 사업상 어려움이 아무리 많을지라도, 그것들이 가족들의 마음을 흐리게 하도록 허용하여서는 안 된다. 그는 미소를 띠고 유쾌한 말을 하면서 가정에 들어가야 한다.
    아버지는 단순히 충동에 의하여 움직이는 어린아이와 같아서는 안된다. 아버지는 균형없이 자라고 훈련받지 못한 소년으로서가 아니라 남성다운 성격과 정욕을 제지할 수 있는 사람으로서 그의 가정의 머리에 서야 한다. 그는 올바른 도덕에 대한 교육을 받아야 한다. 그의 가정 생활에 있어서의 그의 처신은 하나님의 말씀의 순결한 원칙에 의하여 지도되고 제어되어야 한다.
    아버지들은 자신의 마음을 순결하게 하여야 한다. 그리고 날마다 그리스도를 배워야 한다. 결단코 가정에서 전제군주적 정신을 보이지 말아야 하며, 그러기 위하여 늘 자기의 의지를 하나님께 복종시켜야 한다.

아버지는 가정의 제사장
    모든 가족들은 아버지를 중심으로 모인다. 그는 자기의 남성적인 태도로 힘, 성실, 정직, 인내, 용기, 근면 그리고 실제적 유용성과 같은 남성적인 덕성들을 가정에서 나타내야 한다. 아버지는 어떤 의미에 있어서 아침과 저녁 희생을 하나님의 제단에 드리는 가족의 제사장이다. 아침과 저녁에 아버지는 가정의 제사장으로서 가족들을 예배로 한데 모이게 해야 한다. 그리고 그날에 자기 자신과 그의 자녀들이 범한 모든 죄를 하나님께 고백하여야 한다.
    또한 아버지는 가정에서 거룩하신 입법자이신 하나님을 대표한다. 그는 그의 자녀들 안에 올바른 원칙들을 확립하며 자녀들이 순수하고 고결한 품격을 형성할 수 있도록 하나님과 협력하는 동역자이다. 아버지는 언제나 산 믿음으로 자기 자녀들을 하나님께 붙들어매야 한다.
    아버지들이여! 자신의 힘을 불신하면서 자기의 무력한 영혼을 예수께 매어 달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을 매일 붙잡자!
    아버지들이여, 아침 저녁으로 가정에서 가족들과 함께 기도하자! 또 혼자 골방에서 열렬하게 기도하자!

자녀들과 사귀는 아버지
    보통 아버지는 자기의 자녀들을 자기에게 이끌어 붙들어 맬 많은 귀중한 기회들을 허송한다. 직무를 마치고 귀가했을 때 그는 얼마의 시간을 그의 자녀들과 더불어 보내는 것이 즐거운 변화라는 것을 배워야 한다.
    아버지들은 자녀들과 더불어 섞여 사귀고, 작고 난처한 일들을 가진 그들을 위로하고, 강한 사랑의 줄로 그들을 그의 마음에 매며, 그들의 자라나는 마음에 현명한 충고를 주며, 좋은 감화를 끼치기 위하여 자신들의 그릇된 위엄을 풀고 얼마간의 자기 만족을 위한 시간과 여가를 희생해야 한다.
    아버지들이여, 가능한 한 많은 시간을 그대들의 자녀들과 함께 보내자! 하나님의 말씀에 일치되도록 그들을 훈육하는 방법을 알 수 있도록 그들의 여러 가지 성향을 알아내려고 힘쓰자! 그리고 결코 한 마디의 낙담시키는 말도 하지 말고 어두움을 집에 가져오지 말자. 자녀들에게 쾌활하고 친절하고 애정을 가지나 그들 멋대로 하도록 허용하는 어리석음을 범치 말자.
    아버지들은 자녀들이 누구나가 다 겪어야 하는 그런 작은 실망들을 참도록 가르쳐야 한다. 아이들이 서로 다툴 때 저들을 가르쳐서 서로 참고, 피차에 신뢰와 동정을 가지도록 힘쓰라고 가르쳐야 한다.
    아버지들이여! 그대의 권위에 애정을, 확고한 제지에 친절과 동정을 연합시켜라. 그들과 친구가 되되 특별히 그대들의 아들들과 친구가 되라. 
    아버지는 자기의 직업이 무엇이든 간에 자기가 보호하고 있는 영혼들을 결코 등한히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는 이 자녀들을 세상에 나게 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그들이 바람직하지 못한 교우 관계와 악한 동무를 사귀지 않도록 보호할 책임을 하나님께 대하여 지고 있다. 그는 그의 활동적인 자녀들을 전적으로 어머니의 보호에 맡겨서는 안 된다. 이것은 그녀가 지기에는 너무나 무거운 짐이다. 그는 어머니와 자녀들의 최선의 유익을 위하여 모든 일을 준비해야 한다. 
    가장인 아버지는 유용성과 의무를 위하여 자기 자녀들을 훈육하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해야 할 그의 특별한 일이다. 자녀들의 생애의 초년에는 자녀들의 성격을 꼴 짓는 일은 주로 어머니에게 맡겨진다. 그러나 어머니는 언제나 그가 아버지의 협력을 받고 있다고 깨달아야 한다. 아버지는 세상의 유혹보다도 더욱 강한 감화를 자녀들에게 끼칠 수 있다. 그는 자기 가정의 어린 자녀들이 가진 각자의 경향과 성격들을 연구하여 그들의 필요와 위험을 알아서 나쁜 것을 억누르고 옳은 것을 장려해 줄 수 있는 준비를 갖추어야 한다.

부모들에게
    부모들이여! 그대들이 자신을 극복한 한 번의 승리는 그대의 자녀들에게 큰 가치와 격려가 될 것이다. 그대는 매일 하나님께 그대 자신을 맡기며 이렇게 말하라.
    “주여! 제가 주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기 위하여 당신의 손에 제 자신을 위탁하는 것은, 제가 자녀들의 마음과 품성을 형성하는 데 있어서 하나님과 동역자가 되기 위한 것입니다.” 라고...
    아버지, 어머니들이여, 그대들이 자신을 극복할 수 있을 때 그대들은 자녀들을 다스리는 일에 큰 승리를 얻을 것이다. 그대가 자제하지 못하고 성이 나서 말하고 행할 때마다 하나님 앞에 범죄하는 것이다. 기록하는 천사는 어린이들 앞에서 경솔하거나 농담으로 말한 모든 성급하고 부주의한 말을 기록한다. 그리고 그 천사는 부모들의 깨끗하지 않고 고상하지 않은 모든 말을 그리스도인 품성의 한 흠으로 표해 놓을 것이다.
    그대의 자녀들에게 친절하게 말하라. 그대가 얼마나 성미가 급한지, 그대가 얼마나 꾸지람 받는 것을 참지 못하는지를 명심하고, 그대가 할 수 없는 일을 그들에게 기대하지 말라. 왜냐하면 자녀들은 그대보다 연약하며 그대가 견디는 것만큼 견딜 수 없는 것이다. 
    오래 참는 인내를 배우라. 그러면 그대가 참아낸 극기, 베푼 동정, 그리고 수고의 열매는 백 배가 될 것이다. 만일 부모들이, 자녀들이 올바르고 또한 올바르게 행하기를 원한다면 먼저 자신들이 말과 실천에 있어서 올바르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임을 우리의 가정에서 실증하자.
    매일 그대의 자녀들의 지성이 꼴지어지고 있으며 애정과 품성이 형성되어 가고 있다. 그런데 그들은 어떠한 모본을 좇아서 형성되고 있는가?
    자녀들은 그대의 거울이다. 부모들이 후세에 늙어 무덤에서 쉴 때에라도 그들이 남긴 일은 영속적이 되어, 그대의 자녀를 통해 그것이 선한 것이었는지 악한 것이었는지 증명될 것이다.

 

 

아직도 간식과 과식을 하십니까?

    
    “뭐 먹을 것 없어?...” , “좀 출출한데?...” 이 말은 우리 주위에서 식사 시간외에도 흔히 들을 수 있는 말이다.

    사무실에서 일하는 사람이든지, 집에서 살림만 하는 주부든지, 아니면 공부만 하는 청소년이든지, 그들 가운데 흔히 볼 수 있는 공통적인 현상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모두들 늘 무엇인가를 입에 집어 넣고 먹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물어보면 그렇게 하는 이유가 다양하다. 그것은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서, 또는 집중을 잘하기 위해서, 아니면 심심해서, 출출해서 등등 서로 같지 않은 많은 이유이다.
    그 다음 흔히 볼 수 있는 또 다른 공통적인 현상은 과식이다. 자신의 양에 꼭 차서 배가 부른데도 계속 먹는 것, 그것을 과식이라고 하는데, 맛있어서... 스트레스 때문에...식욕이 땡겨서... 등등의 같지 않은 많은 이유로 그렇게 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간식과 과식을 하는 습관을 그냥 놔두면, 언젠가 비싼 값을 치러야 하는 좋지 않은 질병을 초래한다는 것이다.
    자, 이제부터 소화의 과정에 대하여, 그리고 과식과 간식이 우리 몸에 끼치는 영향에 대해 알아보자.

 

소화는 어떻게 되나?

    소화는 위장에서만 되는 것이 아니다. 음식물이 소화되려면 입(구강), 식도, 위장, 십이지장, 소장, 간, 담낭, 췌장, 마지막에는 대장까지 총동원되어야 완전히 소화가 끝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런 모든 기관이 각각 기능을 다 해야 소화가 완성되는 것이기 때문에, 음식물을 소화 시키는 일은 몸의 많은 활력과 에너지를 요하는 섬세한 작업이라 할 수 있겠다. 먼저 이 소화 기관들이 각각 어떤 일을 하는지를 간단히 살펴보자.

입: 저작운동을 한다.
    음식물이 입에 들어오면 혀와 치아, 그리고 침등이 서로 협력하여 일을 시작한다. 음식을 먹으면 입에서 침이 나오는데, 그 침에는 전분을 일차 소화시키는 아밀라제(amylase) 와 티알린(ptyalin) 이라는 소화 효소가 들어 있다. 우리의 혀는 열심히 음식물을 입안에서 이리 저리 돌려주고 우리의 이(치아)는 열심히 들어온 음식을 부수고 가는 일을 한다. 이렇게 저작 운동을 통하여 잘게 부숴진 음식물은 목 안쪽으로 이동된다.

식도: 음식물을 위장으로 운반한다.
    식도는 자발적으로 일어나는 연동 운동을 통하여 음식물을 식도 하부로 보내는데, 위의 분문이 열리기 전에 식도 하부 1/3에 해당하는 곳에 음식물이 두 세덩이로 모아져 있다가 위로 들어가게 한다.

위장: 음식물을 소화한다.
    위장은 계속되는 연동 운동과 위액 분비를 통하여 음식물을 소화시키는데, 위에서는 위산과 단백질을 일차 소화시키는 펩신(pepsin) 이라는 소화 효소가 나온다.
위는 연동 운동을 통하여 들어온 음식물을 부수고, 위액과 섞어 완전히 죽처럼 만드는데 이것을 미즙(chyme) 이라고 부르며, 이렇게 말간 미즙을 만들어야 그것을 다음 소화과정을 위해 십이지장으로 보낼 수 있다.
    위에서 음식물이 완전히 비워지려면 1~4시간이 걸리는데, 탄수화물이 제일 빨리 비워지고 그다음 단백질, 지방 순으로 된다. 지방은 시간당 10그람(약 2 찻술)으로 가장 늦게 비워진다.

십이지장: 영양소를 혈액안으로 동화시킨다.
    십이지장은 소장의 첫부분 10% 에 해당하는 기관으로십이지장 액, 담즙, 췌장분비물들이 분비되어 있으며, 단백질과 지방을 소화시켜 장벽에 있는 미세한 모세혈관망을 통하여 영양분을 흡수시킨다.

* 그 외 십이지장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의 소장과 대장, 간, 담낭, 췌장 등 여러 소화기관에서 음식물의 소화, 즉 단백질이나 지방을 소화시키는 일을 위하여 소화 효소, 담즙, 췌장액 등등 여러가지 효소와 물질들을 분비하며, 또는 음식물 소화과정 중간에 생기는 대사물들이나 독성들을 저장, 혹은 해독, 배설하는 일들을 한다.
* 소화가 완전히 되고 위가 비어 다음 식사를 하려면, 간단한 식사를 했다 할지라도 식사한지 약 4시간 정도 이상의 시간이 지나야 한다. 특별히 고 지방식사나 육식을 많이 한 경우 과잉 단백질과 과잉 지방이 완전히 소화되려면 그 이상의 긴 시간이 필요하다.
* 이렇게 소화 과정에 대하여 간략하게 줄여서 살펴 보아도 우리는 음식물이 소화되려면 얼마나 많은 기관들과 기능들이 함께 협력하여 일을 해야 하는지를 알게 된다. 그리고 한번 소화를 시키는데 얼마나 많은 시간을 요하는지도 알게 된다.

 

간식의 해로움

    우리의 위장은 자기의 역할을 다 한 후 (약 4시간 이상의 노동을 한 후), 적어도 1시간 이상의 휴식이 필요하다. 만일 소화가 다 끝나기도 전에 다시 음식이 위에 들어가면 우리의 위는 반쯤 소화를 시키고 있던 음식물을 옆에 밀어 놓고, 새로 들어온 음식을 받아 (먼저 들어온 음식과 같은 상태로 만들기 위해) 소화시키기 시작한다. 그러면 그 동안 옆으로 밀어 놓은, 반쯤 소화된 음식물은 위의 뜨거운 온도에서 발효되어 독성을 일으키게 된다. 그 결과로 두통, 어지러움, 현기증 등, 비정상적인 많은 현상들이 나타나게 되는데, 그것 뿐 만이 아니라 소화 시간이 길어짐으로 위장과 다른 모든 소화기관이 피곤하게 되어 몸이 피곤하고 무력감을 느끼게 된다. 그러면 딱하게도 사람들은 이러한 무력감을 배가 고프거나 영양이 모자란다는 증거로 해석하여 또 먹는다. 이렇게 하여 악순환이 계속되고 위장이 과다한 노동으로 고장이 나면 우리 몸에 질병이 오게 되는 것이다.

 

과식의 해로움

    위장에 일을 과중하게 부과하는 것은 현명한 일이 아니다. 음식을 너무 많이 먹으면 소화기관뿐 아니라 온 몸에 부담을 주게 된다. 그리고 나중에는 모든 성인병의 주범인 반갑지 않은 비만증도 유발하게 된다. 과식을 하면 혈압이 잘 높아지고 과식후에 뇌졸증도 잘 발생한다.
사람들은 많이 먹으면 힘이 나고 생명과 활력이 증가된다고 생각하지만 그 반대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몸은 여분의 음식을 처리하느라고 필요 이상으로 자신의 활력을 다 써버리기 때문이다. 소식을 하면 장수한다는 얘기는 확실한 학설로 증명되고 있지 않은가?
    너무 많은 여분의 음식은 신체에 부담을 주며, 병적 발열 상태를 일으킨다. 그것은 위장에 과도한 분량의 혈액이 모이게 하므로 사지와 수족을 급히 차게 만든다. 또 우리 몸에 쓸 수 있는 양이 한정되어 있는 소화 효소들을 빨리 다 쓰게 만들어 우리의 생명을 단축시킨다.
우리가 과식할 때마다 위장과 소화 기관은 너무 힘들게 일을 하므로 소화 하는 일이 다 마쳤을 때 우리의 몸은 무기력하거나 피로감을 느끼게 된다. 그런데 계속하여 과식하는 사람들은 이 기진맥진한 느낌을 배고픈 상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소화 기관의 과로상태에서 오는 것이다. 그런 상태로 인해 어떤 때에는 두뇌가 마비되어 정신적, 육체적 노작(勞作)에 싫증나는 때도 생긴다.
    이러한 불유쾌한 증세는 우리 몸이 활력을 쓸데없이 소모하여 이제는 완전히 탈진되어 있는 까닭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위장이 “내게 좀 쉴 시간을 주시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이 노곤함은 음식물을 더 요구하는 것으로 해석하여 위를 쉬게하는 대신에 새로운 짐을 더 지워 준다. 그 결과 소화 기관은 훌륭하게 일을 해야 할 때에 벌써 다 써서 낡아버린다.
    우리의 몸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살아있는 기계이다. 과식은 산 기계를 막히게 하며 기계의 작용을 방해한다.
    만일 모든 사람들이 이 살아 있는 기계인 인간의 몸을 잘 이해한다면 이와 같은 실수를 하지 않을 것이다.
    모든 일에 자제하고 절제했다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나 사회 봉사에 유용하고 훌륭한 일을 성취할 수 있었을 많은 사람들이 모든 일에 절제하지 못하므로 체력과 지력을 뺏겨 몹쓸 질병에 걸리게 되고 오히려 가정과 사회에 부담을 주는 사람이 되는 예들이 많다.
    새해에는 좋지 않은 습관인 간식과 과식하는 습관을 고치고 모든 일에 절제하는 사람이 되자!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고전 9:25). 과식을 방지하기 위한 10가지 조언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롬 12:1).

 

과식을 방지하기 위한 10가지 조언

1. 첫술을 뜨기 전에 당신이 먹어야 할 전체량의 음식을 접시에 담으라.
2. 그대의 창조주요 주인이신 보호자 하나님께 이 모든 맛있는 음식을 공급해 주심을 감사하라.
3. 훈련의 한 과정으로 접시를 완전히 비우지 말라. 그리고 제일 좋아하는 음식은 옆으로 조금 비켜 놓아라.
4. 천천히 먹도록 하라. 조금씩 베어 먹고, 완전히 잘 씹 으라.
5. 식사 도중에 몇번 쉬어라. 입속에 아직도 음식이 있을 때 젓가락으로 다른 음식을 집지 않도록 하며 한입 베 어물 때마다 젓가락을 내려 놓는 것도 좋다.
6. 식사가 끝나자 마자 즉시 자리에서 일어서라. 잘 씹어 먹는다면 25~45분 가량이 식사 시간으로 소요될 것이다. 이 때에 식탁을 몇 분간이라도 떠나라. 이 동안
양치를 하면 식탁의 대화에 다시 끼더라도 먹는 것을 삼가기가 쉬울 것이다.
7. 산보같은 경한 운동을 하라. 계속해서 먹게 되는 유혹으로부터 떠나기 위해 식후 산보를 하나의 사교적 행사로 하라.
8. 음식점이나 사교적인 모임에 갈 때, 무엇을 먹을 것인지를 미리 계획하고 그대로 실천하라. 식사 30분 전에 물을 마시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9. 식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에는 음식을 쳐다보거나 생각하지 말고 대신에 계획되어 있는 활동에 대해 마음을 단호히 집착시키라.
10. 비록 1/2찻숟갈의 음식이 남았더라도 아깝다고 더 먹지 말고 냉장고에 넣거나 버리라. 식사가 끝난 다음에는 절대로 아무것도 먹지 말라.

1부 - 예수님을 따르는 대가


    새로운 해가 시작된다. 또 다른 해를 맞으며, 예수님을 따라가는 제자들로서 여러분들은 어떤 결심을 했는가? 이 해에는 정말 더 예수님을 진실되게 따라가겠다고 결심했는가? 아무 불평과 원망없이?...

    올 해에도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은 변함없으실 것이다. 이 해에는 우리도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하며, 변함없이 충실하게 주님을 따라가자!
예수님을 따라가는 제자로서 우리가 치러야 할 대가에 대해 성경은 분명히 말하고 있다. 그러나 많은 교인들이 구원은 값 없이 주어지는 것이요, 그냥 믿기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는데,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 무슨 값을 치러야 하느냐고 반문한다.

    정말 그럴까? 먼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치르신 대가를 생각해 보자. 죄지은 인류를 위해 독생자 예수를 주신 하나님의 사랑!... 우리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치신 독생자 예수님!... 그리고 우리의 구원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우리를 날마다 도우며 섬기는 천사들!... 얼마나 큰 하늘의 보화들을 우리를 위해 주셨는가?
우리가 정말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치르신 대가를 깊이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그분께서 치르신 그 대가에 대해 진정으로 감사하는 사람이라면,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예수의 제자가 되기 위해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 또 얼마나 희생해야 되는지에 대해 묻지 않을 것이다. 다만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특권이 감사해서 좁은 길을 불평없이 따라갈 것이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눅 9:23)

    이번 호 신앙 기사에서는 제자된 대가에 대해 초점을 맞춰 보았다. 새해를 맞아 주님을 더 열심히 따라가려는 결심을 한 독자들을 위해 유익한 기사들이 되기를 바란다. - 편집실 -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믿는 자들이다. 자기 자신의 의견이나, 아니면 어느 인간의 학설을 따르는 자들이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좋은 대로 사는 자들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의 모본을 따라 살기로 작정한 자들이다. 세상을 살기에 편리한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또한 제시하여 주신 길대로 사는 자들이다.

그렇기에 그리스도인의 길과 세상의 길 사이에는 항상 투쟁이 있기 마련이다. 믿는 자들이 예수를 구세주로 받아들일 때에는 동시에 예수를 자기의 주인이요 왕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수반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현대 기독교회 안에는 예수를 자기 편리한 대로,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믿고 사는 가짜 그리스도인들로 가득 차있는 이상한 시대가 되어 버렸다. 어떤 교회들은 기업이 되어 가는가 하면 어떤 교회들은 사회 친목 단체나 클럽처럼 변신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시점에서 우리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좌표를 다시 살펴 보는 일이 필요하겠다. 과연 성경은 이 문제에 대하여 어떻게 말씀하고 있는가? 어떠한 사람이 참된 그리스도인일까?

    예수께서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하여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마태복음 7:13,14.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인들은 살기에 적합하지 않은 세상에 살고 있다는 말씀이다. 그들이 이 세상에서 사는 일이란 참으로 많은 희생이 필요되는 생애라는 말씀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하는 기쁨과 즐거움은 이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다는 말씀이다. 마음이 거듭나서 취미와 좋아하는 것들이 바뀌어지지 않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인 생애를 살 수가 없다는 말씀이다. 쉽게, 그리고 편하게 사는 길은 멸망의 길이라고 말씀하신 셈이다. 사도 바울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골로새서 3:1-3.

    세상에서도 재미를 보고 하늘도 가겠다는 태도로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멸망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구원을 얻는 길에는 중간이 있을 수가 없다. 적당히 믿는다는 사고 방식은 신앙이 아니다. 우리가 물려 받은 성경과 진리는 피 묻은 것들이다. 얼마나 많은 선조들이 자기들의 생명을 바쳐가며 신앙과 진리와 그리고 표준을 고수하여 왔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빚진 자들이다.

    한번은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길을 가시는데 어떤 사람이 질문을 하였다. “혹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얻는 자가 적으니이까?” 누가복음 13:23. 옛날이나 지금이나 인간의 궁금증은 한결같은 것을 보게 된다. 이에 예수께서는 주님을 따르는 제자의 길, 즉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란 어떠한 각오로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 길인지를 아주 명료하게 설명해 주셨다. “저희에게 이르시되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누가복음 13:24) 라고 말씀 하시고는 길을 가시다가 뒤 따르는 수 많은 군중들을 향하여 다시 더 자세하게 이렇게 말씀하시었다. “허다한 무리가 함께 갈쌔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하지 않겠느냐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가로되 이 사람이 역사를 시작하여 다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또 어느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으로서 저 이만을 가지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만일 못할 터이면 저가 아직 멀리 있을 동안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지니라.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누가복음 14:25-33.

    예수님의 제자의 부르심은 아주 명백하다. 따르기 전에 먼저 어떠한 대가를 치르어야 하는지에 대하여 분명하게 제시하여 주셨다. 하나님과 부모 형제 사이에 선택하여야 할 입장에 놓이게 되었을 때에 하나님을 먼저 선택하지 않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고 말씀하시고 있다. 자기 자신의 정욕을 부인하고 예수를 따를 때에 자연히 짊어지고 가야할 십자가가 따르게 된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죽이는 길이다. 그 길은 어떤 의미에서 수치스러운 일이다. 옛날에 십자가를 지는 일이 그러했던 것처럼....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요, 또한 주님의 축복 때문에 그것들을 소유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철저하게 이해하고 사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의 재산이나 시간이나 달란트(재능)들은 모두 주님께서 주신 것이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서 사용되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따르는 자가 그리스도인이다. 이러한 제자됨의 대가에 대한 가르침이 타협되거나, 가르쳐지지 않고 망각되어 버렸을 때에 교회는 곤두박질 하게 되었고 급기야는 세상 사람들과 교인들 사이를 구분하지 못할 만큼 타락하게 된 것이다.

    어떤 한 청년이 사랑하는 애인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를 썼다고 한다. “사랑하는 그대여 나는 당신을 그리워하오! 내가 당신을 찾아 만나기 위하여서는 에베레스트 산보다 더 높은 산이라도 넘어 가겠고 태평양보다 더 넓은 대양이라도 헤엄쳐 가겠소! 오, 나는 당신을 그리워 하오!” 그리고는 그 편지 밑에다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P.S.- 오는 수요일날 당신을 만나러 가겠소! 비가 오지 않는다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일인가! 그러나 실제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살고 있지 않는가? 입으로는 주님을 사랑하며 믿는다고 말은 하지마는 실상에 있어서는 적은 일들로 하나님을 부인하며 살고 있지 않는가? 자신의 편안함과 세상의 재미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 싶은 욕망들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매일 매일 예수를 배반하며 팔고 있다. 그러면서도 교회들은 마치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들인양 여전히 십자가를 자기 교회 지붕 위에 높다랗게 달아놓고 선전하며 살고 있지 아니한가! 과연 우리는 진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인지 다시 한번 살펴 보아야 겠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바로 눈 앞에 두고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하여 예비하는 생활을 살아야 하는 때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래서 선지자 아모스는 다음과 같이 외쳤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을 만나기를 예비하라.” 아모스 4:12. 우리는 하늘에서 거룩한 천사들과 이웃이 되어 살아야 할 사람들이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초림하셨을 때에 그 분의 길을 예비하기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던 선지자 침례 요한도 회개의 기별을 전파하였다. 그는 유대인들이 오시는 메시야를 마음속에 받아들일 수 있게 하기 위하여서 그들의 생애의 개혁과 부흥을 촉구하는 회개의 기별을 전하였던 것이다. 그의 사명에 대하여 이사야 선지자는 이미 이렇게 예언해 두었었다. “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 바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 질 것이요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함과 같으니라.” 누가복음 3:4-6; 이사야 40:3-5.

    그렇다. 산처럼 높아져 있는 우리의 교만한 마음들이 낮아져야 하겠다. 골짜기처럼 깊숙하게 들어가 있는 음흉한 마음들과 이기심들이 돋아져 평평하게 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 타협하며 적당하게 살아가는 굽은 마음들이 곧바로 펴져야 하겠다. 그리고 돌들과 파인 곳들이 많은 길처럼, 거칠고 모나며 세상의 잔재들로 가득찬 성품들이 치워져야 하겠다. 그래서 하나님이 오시는 길이 평탄하여 지도록 말이다. 침례 요한은 광야에서 다음과 같이 외쳤다. “요한이 침례 받으러 나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 누가복음 3:7-9.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텔레비젼 프로그램을 똑같이 좋아하며,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듣고 웃는 농담들과 코메디 쇼들을 보면서 같이 깔깔거리며 웃고 있다면 우리들과 그들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세상 사람들과 꼭같이, 뒤 늦을새라 유행 옷을 걸치고 다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마음을 단장하는 대신에 더욱 더 예쁘게 보이기 위하여 짙은 화장을 하느라 많은 시간들과 돈들을 낭비하면서도 우리는 과연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이라고 스스로 자칭할 수가 있을까? 속 사람을 단장하기 보다는 값진 패물과 장신구들, 반지, 귀고리, 팔찌, 목거리, 비싼 시계들로 몸을 치장하고 다니면서 우리는 과연 어떻게 세상을 향하여서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할 수가 있겠는가? 파티의 좌석에서 같이 술 마시며 담배를 피우며, 성경이 하지 말라고 분부한 일들을 같이 행하면서 어찌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할 수 있겠는가? 세상 사람들을 즐겁게 하고 몸을 흔들게 하는 그러한 유행가를 따라 부르면서 어떻게 우리가 하늘을 가고 있는 성도들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몸을 과다하게 노출 시키는 짧은 치마나 상의를 입고서 어떻게 하나님을 경배한다고 교회 문을 들어설 수가 있을까? 그러한 옷 차림들은 예배드리는 자들을 위하여 디자인한 것이 아니다. 그러한 옷차림들은 우상을 숭배하는 세상 사람들이 남자들의 눈을 현혹하기 위하여 만든 옷들이다. 오늘날 교회는 성경의 표준에서 너무나 멀리 떨어져 나와 있다. 우리는 다시 종교 개혁이 필요한 시대에 살고 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곧 다시 오시기 때문이다. 제2의 침례 요한의 사역이 필요한 시대가 되었다. 참된 회개를 촉구하는....

    마태복음 13장에는 또 다른 예수님의 호소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 마태복음 13:44-46. 보화가 감추인 밭의 값은 얼마였는가? 백만불? 천만불? 아니다. 그 밭의 값은 그 농부가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이었다. 진주의 값도 마찬가지였다. 진리와 영생의 대가는,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됨의 대가는 자기의 옛 생애를 완전히 다 포기하고 예수님의 길에 서는 것이다. 그래서 그 문을 좁은 문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 길은 가장 즐거운 길이다. 그 길은 가장 보람되고 행복한 길이다. 그 길은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과 쉼을 주는 길이다. 그러나 그 길에는 한 가지 조건이 있는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함과 겸손함을 배워야 하는 길이다. 진리를 발견하려고 헤메던 인간이, 창조주요 구속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 만나고 나면 과거에 살던 죗된 길이 얼마나 어리석게 보이는지 모른다. 그리고 신기루와 같은 세상이 제시하는 행복에 속임 당했던 자신을 후회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죄를 미워하게 된다. 그것이 거듭난 자들의 특징이다. 그리고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사는 영생의 길이 그렇게도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골로새서 1:21,22) 라고 바울은 말씀하고 있다. 사도 베드로도 합세하여 우리들에게 이렇게 호소하고 있다.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사모하라...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 나타나기를 힘쓰라.” 베드로 후서 3:10-12, 14.

 

2부 - 하나님이 치르신 대가


하나님의 독백

    무슨 말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내가 사랑하는 너희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치른 대가를 설명하려면 말이다. 내가 치르어 내야만 했던, 그렇게 깊고 오묘한 구원의 값을 너희가 이해할 수 있을런지...

       나는 너희를 자유 의지가 없는 인간으로 만들지 않았단다. 왜냐하면 너희 인간들이 창조주인 나의 사랑을 깨달아, 자발적으로 스스로 우러나오는 사랑과 순종을 나에게 바치기를 바랬기 때문이지. 그래서 우리 서로 진정한 사랑을 깨닫게 되어, 아름다운 사랑의 관계를 나누며 영원히 살게 되기를 정말 바랬기 때문에...

    아! 나는 정말 그 날을 잊을 수가 없단다. 그날, 너희 인간의 시조 아담과 하와가 나를 배반하여 나의 법을 불순종하고, 사단의 말을 믿어 그의 말대로 선악과를 따먹은 그 날을...
한 천사가 전해준 인류의 첫 범죄의 소식은 나의 마음과 나의 아들 예수의 마음과 모든 천사들을 얼마나 슬프게 했는지!... 그날 온 하늘은 슬픔과 안타까움과 충격으로 가득찼고, 모든 천사들은 거문고를 내려 놓고 음악을 그친 채 한없이 눈물만 흘렸단다. 이제 앞으로 인간이 영원히 잃어버린 바 되고, 내가 창조한 세상은 암흑으로 뒤덮여 불행과 질병과 사망이 난무할 운명에 처하게 되며, 아담의 모든 가족들이 죄의 삯인 사망을 받아 영원히 죽을 수 밖에 없게 된 것을 알자, 우리의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단다.

    그 날 하늘에는 비상 회의가 열렸었지! 나는 자애로운 예수가 슬픔과 동정의 빛이 가득 찬 얼굴로 나에게 오는 것을 보았단다.
    지극히 영광스럽고 찬란한 빛에 둘러싸인 채 우리가 이야기를 나누었건만 그때 나의 마음은 얼마나 캄캄하고 녹는 듯 했는지...

    너희는 너희의 사랑하는 아들을 다른 범죄자를 대신하여 죽게한다는 것이 얼마나 뼈아프고 가슴 에이는 것인지 알기나 아니?... 그 구속의 계획은 인류가 범죄하기 오래 전에 세워 놓은 것이긴 했다만, 막상 나의 독생자 예수가 인간의 죄 값을 치르기 위해 세상에 가겠다고 자원하자 나는 정말 어찌 할 바를 몰랐단다. 너희는 내가 아무런 고통도 없이 나의 사랑하는 아들을 너희 죄값을 치르기 위해 내어 주었다고 생각하니? 아니다! 결코 아니다!...
    죄지은 너희 인류를 그냥 죽도록 버려 두는 것이나, 너희를 위하여 나의 사랑하는 아들을 죽게 내어 주는 것이나, 이 두가지는 다 나에게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왜냐하면 예수는 삼위일체 중 하나인 아들 하나님으로, 나와 목적과 뜻이 같을 뿐 아니라 서로 분리될래야 분리될 수 없을 만큼 서로 사랑하는 한 몸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고, 너희 인류도 내 몸처럼 사랑해서 너희를 결코 죽도록 버려둘 수 없는 존재들이기 때문이었단다!

    마침내 회의가 끝나고 모든 고통과 번민에서 벗어나, 이루 형용할 수 없이 자애스럽고 빛나는 얼굴로, 천사들에게 인간들이 피할 수 있는 길이 마련되었음을 알려 주는 아들 예수의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감격에 젖었었다! 그가 인류를 위한 대속물로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고, 그들의 죄를 대신 지고 스스로 죽음의 선고를 받음으로써, 인류가 그의 피 공로를 통하여 죄사함을 얻고 순종함으로 다시 영원히 살 수 있는 길이 생기게 된 기쁨이란 이루 표현할 수 없었지만, 한편으로는 그 고통스러운 죽음과 고난의 길을 가야하는 나의 아들 예수를 생각하니...

    예수는 천사들에게 말했단다. 그가 하늘의 모든 영광을 버리고 한 인간으로서 이 땅에 태어날 것이라고, 또 스스로를 낮추고 시험당하는 자들을 돕기 위하여 사람이 당하는 각가지의 시험들을 몸소 겪어야 한다고... 그리고 그가 죄에 대한 형벌과 죄인들 사이에 서서 그들의 죄와 질고를 지지만은,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 받아들일 자들은 극소수에 불과할 것이며,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미워하고 배반할 것이라고... 그리고 최종적으로 교사로서의 그의 사명을 마친 후에 인간의 손에 넘기워져서 사단과 그의 천사들의 충동으로 악인들이 가하는 모든 고통과 치욕을 견디고, 범죄한 죄인으로서 하늘과 땅 사이에 매달려 가장 잔인한 죽음을 당해야 한다고...

    그는 천사들도 차마 볼 수 없어서 얼굴을 가리울 정도의 무시무시한 고통으로 괴로워해야 할 것을, 그리고 신체적인 고통뿐만 아니라, 신체적인 고통과는 비교도 안 되는 정신적인 고통을 겪을 것을, 그리고 온 세상의 모든 죄의 무게를 견디고 죽었다가 사흘만에 다시 부활하여 죄인들의 중보 사업을 위하여 그의 아버지께로 승천할 것을 그들에게 말해 주었단다.

    처음에 그 소식을 들은 천사들은 기뻐하지 않았단다. 그들의 사랑하는 사령관인 예수가 인간의 몸을 입고 땅에 내려가 고통스러운 삶을 살 뿐만 아니라 인간의 죄값을 위하여 귀한 목숨을 버리고 고난의 죽음을 당하신다는 그 소식에...
천사들은 그의 앞에 엎드려 서로 자기들이 이 일을 위해 생명을 바치겠노라고 했지. 그래! 천사들 중에도 멸망해 가는 인류를 위하여 자기의 영광을 버리고 생명을 바칠 자가 있을 만큼 하늘은 인간의 구원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는걸... 그러나 그것은 부질없는 일이었다. 인간의 범죄는 너무나 큰 것이기 때문에 천사의 생명으로는 그 값을 지불할 수가 없기에... 내 아들 예수의 죽음과 중보 외에는 다른 아무 것으로도 그 값을 지불하고, 절망적인 슬픔과 불행으로부터 잃어버린 인류를 구원해 낼 수 있는 방법이 없었어.

    예수는 그들에게 자기가 죽으면 자기의 죽음으로써 많은 생명을 구할 수 있지만, 천사들의 생명으로는 그 값을 지불할 수 없고,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위한 대속물로서 오로지 그의 생명만을 받으실 수 있다고 말해 주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를 도울 수는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예수가 인간의 타락한 성정을 취함으로 연약하여 어려움에 처하게 될 때, 그를 돕는 일을 할 수 있을 것이었지.
    발표가 마친 후, 예수는 구속의 계획에 대하여 함께 기뻐해 달라고 모든 천사들에게 요청하였다. 그러자 형용할 수 없는 기쁨이 하늘을 가득 채웠고, 하늘 찬양대의 노래가 다시 시작되었단다.
    천사들은 반역한 인류를 위하여 사랑하는 아들을 내어 주는 나의 큰 자비와 사랑을 인하여, 그리고 기꺼이 하늘과 나의 품을 떠나 고통과 번민의 생애와 굴욕적인 죽음을 선택하고, 다른 사람을 위하여 생명을 바치는 예수의 극기와 희생을 인하여 이전보다 더 큰 곡조로 거문고를 타며 찬양하고 노래하였단다!

    얘들아! 너희는 삼차원의 세계를 아니? 아니, 이렇게 설명하면 더 이해하기 쉽겠구나! 만일 너희가 개미나 어떤 곤충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너의 사랑하는 아들을, 동물도 아닌 일개 곤충으로 태어나게 하여, 그 곤충 대신 죽게 해야 한다면 너희의 마음이 어떻겠니?... 이렇게 설명하면 나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더 이해할 수 있겠니?... 창조주가 자기가 창조한 피조물을 위하여 대신 대속의 죽음을 죽는다는 것, 그것은 바로 이와 같은 것이란다. 아니 그것보다 더한 일이지!

    너희는 별 세계들을 좀 생각해 보았니? 밤 하늘 총총한 별을 보며 나, 창조주의 존재에 대하여 생각해 본 적이 있니?...
    이 우주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수억, 수만의 은하계들이 있는데, 그 은하계 안에는 또 수많은 태양계가 있지. 그리고 그 하나의 태양계 마다에는 해, 달, 별, 그리고 수성, 목성, 금성, 화성 등의 별이 있고, 거기에 너희가 살고 있는 지구가 있지. 너희는 잘 모르겠지만, 너희가 살고 있는 지구는 너무 작아서 이 우주에서 마치 작은 먼지처럼 잘 보이지도 않는단다. 그러나 그렇게 보이지도 않는 작은 지구가 내 눈에 왜 그렇게 크게, 귀중하게 보이는 줄 아니? 그것은 바로 사랑 때문에... 맞아, 그것은 나의 너희에게 대한 사랑 때문이야!...

    나의 분신과도 같은 사랑하는 독생자를 주어도 아깝지 않을 만큼 너희를 사랑하기 때문에...

    나의 아들 예수는 인간이 되기 위해 포기하고 버린 것이 너무나 많단다. 너희도 나의 길을 따르려면 포기할 것이 많은 것처럼...
그러나 신이 인간이 되기 위해 버린 것에 비하면 비교도 되지 않겠지!... 혹시 이 성경절 기억하니?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빌 2:5,6,7).

    내 아들 예수는 너희의 구원을 위해 모든 것을 비우되, 신성 중에 하나인 무소부재성도 포기했단다. 어디에나 동시에 거할 수 있는 무소부재성 말이야. 그래서 이제는 성령을 통해서만 많은 곳에 동시에 거할 수 있게 되었지. 그것이 얼마나 위대한 신성 중의 하나를 포기하는 것인지 너희는 결코 모를거야!

    아, 그리고 정말 내 독백을 마치기 전에, 이 이야기는 빼놓을 수가 없다. 내게 있어서, 그리고 나의 아들 예수에게 있어서 가장 고통스러웠던 날, 그 날에 대한 얘기를... 그 캄캄하고 잔혹하던 겟세마네와 십자가의 고통의 이야기를...
    겟세마네 예수의 부르짖음을 따라 그 고통의 잔을 그 손에서 거두고 싶던 이 아버지의 마음을, 그리고 죄에 대한 거룩한 분노를 견디며, 인간의 죄를 대속하여 나의 아들 예수가 십자가에서 참혹한 죽음을 당할 때, 검은 구름으로 내 자신을 감싼 채, 십자가 곁에서 함께 고통당하던 그 순간의 얘기를... 그 뼈를 깎는 것 같던 고통의 순간의 얘기를... 그냥 중도에 포기하고 돌아서라고 말하고 싶을 만큼 참기 어려웠던 내 아들의 고뇌에 찬 신음소리를... 그 때마다 우리 앞에 떠오르는 너희의 방황하는 모습... 아무 소망도 없이, 속절없이 죽어갈 너희의 모습이 크게 부각되어 우리는 차마 포기할 수 없었다. 그것은 사랑, 눈을 감아도 밟히는 너희에 대한 나의 사랑 때문이었다!

    가끔씩 나는 너희의 모습을 보며 의아할 때가 많단다. 그렇게 큰,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의 큰 희생과 사랑을 보여주었건만, 나를 따라 제자의 길을 갈 때에 그렇게 자주 불평하고, 조금이라도 덜 희생하고 싶어하고, 덜 포기하고 싶어하며, 조그만 희생도, 조그만 대가도 치르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너희들을 보며 말이다. 그것이 너희의 영생을 위한 길인데도...

    이제 나의 독백을 마치련다. 이 독백을 통해 내 마음이 얼마나 전달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나의 마음은 상관은 없단다. 너희가 나의 희생과 사랑을 알아주든지, 안 알아주든지...
    그런 것에 상관없이 나는 너희를 사랑한다! 다만 이 독백이, 내가 너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조금 더 잘 이해하게 할 수 있다면, 그리고 나의 변함없는 사랑을 깨달아, 나를 따라가는 제자의 길에 요구되는 희생의 대가가 쉽게 느껴지도록 만들 수만 있다면... 그렇다면 나는 아주 만족이란다!

    끝으로 다시, 나는 너희를 정말 사랑한다! 만일 다시 한번 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죽는 것이 필요하다면, 또 다시 내 사랑하는 아들을 너희를 위해 줄 수 있을 만큼... 그렇게...

    나를 따르는 제자의 길을 불평하지 않고 즐겁게 따라오는 너희가 되기를 바라며...

사랑하는 너희의 하나님으로부터.

3부 - 비유를 통하여 말씀해 주신 이야기


우리가 치러야 할 제자된 대가

예수님을 따라가려면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할까? 여러분들은 만일 예수께서 지금 이 지상에 계신다면, 마치 부자 법관과 같이 그 앞에 달려가서 “내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무엇을 하오리까?” 라고 묻고 싶지 않은가?

그 때 예수께서는 무엇이라고 대답하실까? “나를 따르려면...” 하시며 많은 비유와 흥미있는 이야기들을 사용하시며 제자가 되는 대가에 대해 말씀하지 않으시겠는가?
신앙 기사 3부에서는 우리가 예수님을 따를 때에 어떤 대가들을 치러야 하는지 예수님께 직접 질문하고 그분의 대답과 설교를 듣는 형식으로 기사를 구성해 보았다. 예수님을 따르는 참된 제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많은 깨달음이 있기를 바란다. - 편집실 -

우리들: “예수님! 주님의 제자가 되어 주님을 따르려면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하나요? 그냥 믿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닌가요? 구원과 은혜는 선물로 값없이 주시는 것이라고 하셨는데... 좀 설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 “사랑하는 나의 자녀들아! 나는 너희를 사랑하여 구원을 값없이 베푼다. 그런데 나의 구원을 받아 들이려면 너희가 꼭 해야 하는 일들이 있단다. 그것들을 비유와 이야기를 통해 가르쳐 줄테니 지금부터 내가 들려주는 비유와 교훈들을 잘 들어보아라.”

비유를 통하여 말씀해 주신 이야기 1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에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 (마 13:44).

“먼저 ‘감추인 보화’ 의 비유를 통해 설명해 주마.
옛날에는 사람들이 그들의 보화를 땅속에 감추는 풍속이 있었단다. 왜냐하면 그 때에도 절도와 강도 사건이 빈번하였고, 통치자가 바뀔 때마다 재산을 많이 가진 사람들에게 과중한 세금을 부과하는 일과 또 나라가 적군의 침입을 받아 약탈될 위험이 항상 있었기 때문에 부자들은 저희의 재산을 보존하기 위하여 그것들을 숨겨 두곤 했다.
그 당시에 땅은 재물을 감추어 두는 데 가장 안전한 곳으로 생각되었지. 그러나 때때로 감춰둔 장소를 잊어버리는 일이 생겼는데, 그것은 그 돈을 감춰둔 주인이 사망하거나 옥에 갇히거나 귀양살이를 가게 될 때였지. 그러면 그가 애써 숨겨 둔 재산은 그것을 발견한 운 좋은 다른 사람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었단다. 그래서 묵은 밭에서 옛날의 화폐와 금, 은, 장식품들이 발견되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경작할 땅으로 그런 밭을 빌려서, 소로 그 밭을 갈 때 그 속에 묻혔던 보화가 드러나곤 했단다.
한번은 어떤 사람이 밭을 갈다가 보화를 발견했단다. 그 사람은 깜짝 놀라 큰 재물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을 알고 그 보화를 본래 감추어져 있던 자리에 도로 묻어 두었지. 그리곤 집에 돌아가 그 보화가 묻힌 밭을 사기 위하여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다 팔았단다. 그의 가족과 이웃들은 그를 보고 미쳤다고 생각했지. 그들은 아무리 보아도 그 묵은 밭이 별로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그 사람은 그 밭을 잘 알고 그렇게 했던 것 아니겠느냐? 그 사람은 그 밭의 소유권을 넘겨 받은 다음, 감추인 보화를 찾기 위하여 그 밭을 샅샅이 뒤져서 엄청난 보화를 건진단다.”
“이 비유는 하늘 보화, 곧 너희에게 베풀어진 구원의 가치와 그것을 얻기 위하여 너희가 들여야 할 노력을 설명하는 것이란다. 밭에서 보화를 발견한 사람은 그 감추인 보화를 얻기 위하여 자기에게 있는 모든 것을 다 팔고 내놓았을 뿐 아니라 그것을 얻기 위하여 어떠한 수고도 아끼지 아니하였단다.
이것처럼 하늘 보화를 찾은 사람도 진리의 보화를 얻기 위하여서는 어떤 수고도 너무 크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고, 어떤 큰 희생이 요구될지라도 그것이 너무 값비싼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구원도 이와 같단다. 보화를 발견한 사람이 자기의 모든 것을 팔아 보화가 숨겨있는 밭을 샀듯이,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너의 모든 것을 버리고 내가 주는 구원을 받아들여야 한다. 나는 너희를 구원하기 위해 나의 모든 것을 버리고 온전히 바쳤기 때문에, 너희도 모든 것을 버리고 온전한 마음으로 나를 따라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단다. 그것이 바로 나를 따르는, 나의 제자된 대가이다.
나를 믿는다는 것은 복음의 보화를 찾아 그것을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그 복음이 지워 주는 일체의 의무까지도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한단다.”

비유를 통하여 말씀해 주신 이야기 2

우리들: “의미 깊은 비유이네요! 다른 비유를 하나만 더 얘기해 주세요.”

예수님: “그래. ‘진주’ 의 비유를 하나 더 얘기해 주마.”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
(마13:45~46).

“나는 이 이야기에서 나의 사랑의 선물인 구원을 고귀한 진주로 비유하였단다. 그리고 구원을 찾는 사람들을 값진 진주를 구하는 상인으로 비유하여 설명하였지. 여기에 나오는 값진 진주는 바로 나,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이란다. 내가 주는 의는 순백의 진주처럼 결함도 없고 흠도 없다. 내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골 2:3)어 있고, 나는 너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고전 1:30)었다. 너희의 심령의 필요와 갈망을 만족시킬 수 있는 어떤 것도 이 세상에서는 찾을 수 없을 꺼야. 그것은 오직 내 안에서만 찾을 수 있지... 나를 발견한 사람은 너무도 값진 진주를 찾았음으로 다른 모든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긴단다.”
“그런데 나는 비유 가운데서 진주를 선물이라고 하지 않았다. 장사는 자기에게 있는 모든 것을 주고 그것을 사야 했지. 성경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아들인 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선물로 거저 주셨다고 써 있는데 이 말이 무슨 뜻이냐고 묻는 사람이 많이 있다. 물론 구원은 값없이 주는 선물이다. 그러나 나에게 아낌없이 자기 자신, 곧 영과 혼과 몸을 바치는 자들에게만 그러하다. 너희가 나의 명령한 모든 말을 즐겨 순종하는 생애를 살기 위해서는 너희 자신을 하나님께 바쳐야 한단다. 그리고 너희 자신과 너희가 가진 모든 재능은 다 하나님의 것이므로 그 모든 것을 그분을 섬기는 일에 바쳐야 하지. 이것이 바로 나를 따르는 대가란다.”
“너희가 너희 자신을 전적으로 나에게 바칠 때만, 하늘의 모든 보화와 아울러 구원을 너희에게 줄 수 있단다. 그럴 때에 너희는 값진 진주를 얻게 되는 것이야.
구원은 거저 주는 선물인 동시에 또한 매매되는 것이란다. 그 뜻은 너희는 너희의 노력으로 구원을 얻을 수 없지만 그것을 얻기 위하여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을 만큼 깊은 관심과 백절 불굴의 정신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세상에는 하늘 진주를 항상 찾고 있는 것같이 보이는 사람들이 있단다. 그러나 그들은 저희의 좋지 못한 습관을 완전히 끊어 버리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은 나를 자기들 안에 살게 하기 위하여 자신에 대하여 죽지 않기 때문에 귀한 진주를 얻지 못한단다. 그들은 불순한 야망과 세상에 대한 애착을 극복하지 못했어. 그들은 십자가를 지고 극기와 희생의 길을 걸었던 나를 따라오지 않으려고 하지. 그들은 거의 그리스도인이 되기는 하였으나 아직 완전한 그리스도인은 아니란다. 그들은 거의 하늘나라에 가까이 이른 것같이 보이지만 그 곳에 들어갈 수는 없단다! 구원을 거의 얻었으나 온전히 얻지 못했다는 말은 거의 잃어버렸다는 말이 아니라 완전히 잃어버렸다는 뜻이 될 수 있단다! 심각한 얘기지?”
“얘들아! 그리고 말이다. 값진 진주를 구하는 장사의 비유에는 이중의 뜻이 있단다. 그 뜻이 무엇인지 내가 얘기해 줄께. 이 이야기는 단지 천국과 구원을 찾는 사람들에게 적용될 뿐 아니라, 당신의 잃어버리신 백성을 찾으시는 하나님께도 적용될 수 있단다.
값진 진주를 구하는 하늘의 상인이신 하나님께서는 잃어버린 인류를 값진 진주로 보셨다. 그분께서는 죄로 인하여 더럽혀지고 파멸된 사람에게서 구속의 가능성을 보셨던 것이지. 하나님께서는 인류를 천하고 무가치한 존재로 보지 않으신단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나, 그리스도 안에서 인류를 보셨어. 그리고 구속의 사랑을 통하여 인류가 어떻게 될 것도 보셨단다. 그분께서는 우주의 모든 부요한 것을 모아 진주인 너희를 사는 데 써 버리셨다! 얼마나 큰 사랑이냐!... 하나님께서는 그 진주를 찾아서 다시 당신의 왕관에 붙이실 것이란다!”
“그들이 면류관의 보석같이 여호와의 땅에서 빛나리로다”(슥 9:16).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나의 정한 날에 그들로 나의 특별한 소유를 삼을 것이요”(말 3:17).

교훈을 통하여 말씀해 주시는 이야기

우리들: “진주를 산다 고 하니까 생각나는데요, 성경에 ‘사라’ 는 예수님의 말씀이 어디엔가 나오지요? 그 말씀이 어디 있는지, 또 그 뜻에 대해서 말씀해 주세요.”

예수님: “그래. 성경에는 내가 상인으로 묘사되어 무엇을 ‘사라’고 하는 장면이 여러 곳에 나오는데, 특히 계시록 3장 18절에는 세번이나 나온단다. 나는 성경에, 하늘의 상인으로서 귀중품들을 가득 싣고 이집 저집을 다니면서 호소하며, 돈으로 살 수 없는 상품들을 내어 놓고 사라고 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단다. 그런데, 얘들아! 잘 생각해 보렴! ‘산다’ 는 것은 그냥 얻는 것이 아니고 어떤 대가를 치러야만 한다는 것을. 내가 사라고 하는 것들은 거저 줄 수도 있는 것들이지만, 거기에는 내가 그 대신 받기를 바라는 대가가 꼭 있단다. 그 대가가 무엇이냐구? 그것은 바로 너희의 모든 것이야. 너희의 온 마음, 너희의 온 생각, 너희의 온 몸, 그리고 너희의 가장 귀중한 어떤 것들!... 이제 시작하는 얘기는 좀 심각한 것이지만 너희를 위한 아주 귀중한 교훈이니 잘 들어보도록 하렴.”

교훈 1. “금을 사라”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라” (계 3:18).

“이 세상 역사의 거의 마지막을 사는 라오디게아 교인인 너희들 중에 많은 사람들은 너희 자신 스스로를 알지 못하고 있단다. 너희는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고 하지만 너희는 너희의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고 있지. 너희는 영적으로 뜨뜻미지근한, 정말 하나님의 입에서 토해 내침을 당할 만큼 영적으로 심각한 상태에 있다는 것을 빨리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빨리 그 병을 고침을 받아야 하는데, 고침을 받으려면 내가 사라고 하는 것들을 사서 그것으로 치료를 받아야 한단다.”

“첫번째로 내가 너희에게 사라고 하는 것은 ‘금’이야. 그 금이 무엇인줄 아니? 그것은 바로 참된 믿음과 사랑이다. 어떤 환경에도, 어떤 역경에도, 어떤 순간에도 변하지 않는 나에 대한 참된 사랑과 믿음!... 그리고 단련을 받아 더욱 순수하고 빛나는 믿음!...
때때로 하나님께서 자기의 백성들에게 베푸시는 섭리가 있는 것을 너희는 알고 있지? 내가 자세히 주목해 보았더니, 자기가 좋은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시련, 곧 연단시키고 순결하게 하기 위한 시련이 주어졌을 때, 어떤 사람은 불순물로 판명되는 것을 보았단다! 언제나 정금이 나타나는 것은 아니지. 신앙적인 위기가 있을 때마다 어떤 사람들은 유혹에 넘어지는 것을 나는 보았다. 하나님의 흔드심은 많은 사람들을 마른 잎처럼 떨어져 나가게 할 것이란다. 번영의 때에는 믿는다고 공언하는 사람들이 크게 증가하지만, 역경은 그들을 신앙 밖으로 추방한다. 그들의 신앙은 하나님께 견고하지 못한 것을 드러내지. 말씀으로 인해 환난과 핍박이 일어나게 되면 많은 사람들은 실족하게 되어 나를 떠나간단다!... 그들은 나에게 속하지 않았으므로 나를 떠나간다!”
“너희에게는 굳센 신앙이 필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너희는 금, 곧 불로 연단한 금을 나에게서 사야 하지.
내가 사라고 권하는 불로 연단한 금은,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인데, 그것만이 너희의 심령과 믿음을 부요하게 만들 수 있단다.
너희가 활기차게 많은 일을 할 수 있으나, 사랑 곧 나의 마음에 있는 사랑과 똑같은 사랑이 없으면 너희는 결코 나와 한 가족이 될 수 없다. 믿음과 사랑은 진정한 부와 정금으로서, 이것은 참된 증인인 내가 뜨뜻미지근한 사람들에게 사라고 권고하는 것이다. 세상 보화에 있어서 너희가 아무리 부유하다 할지라도, 너희의 모든 부는 뜨뜻미지근하다고 불리는 질병을 고칠 수 있는 귀한 치료제를 살 수 있게 하지 못한단다. 지성과 세상의 부는 라오디게아 교인들인 너희의 결함을 제거하는 데는 무력하며, 또한 그 비참한 형편을 고칠 힘이 없다. 너희들 중 많은 사람들이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들 스스로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구나.
너희는 내게서 금을 사야 한다! 흔들리지 않는, 시험을 당하면 당할수록 그 광채가 더욱 빛나는, 시련과 역경의 시험을 견디게 해 줄 참된 은혜로 둘러싸인 금이 너희에게는 필요하다! 너의 마음을 차지하고 있는, 나보다 사랑하는 모든 우상을 내게 내어주고 대신 금을 가져라! 그것이 나를 따르는, 나의 제자되는 대가란다!”

교훈 2. “흰 옷을 사라”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라” (계 3:18).

“너희가 나를 따라오려고 할 때 필요한 것이 또 하나 있는데, 그것은 나에게서 흰 옷을 사야 하는 것이란다. 사람이 자신이 벌거벗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옷을 걸쳤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세상에서 우스운 일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너희는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내 눈에는 너희의 헐벗은 모습이 얼마나 가련하게 보이는지...
너희는 반드시 내게서 흰 옷을 구입해야 한단다. 흰옷이 무엇이냐구? 흰 옷은 다름이 아니고 품성의 순결, 곧 죄인에게 나누어 주는 나의 순결한 의이다. 이것은 하늘의 직물로 짠 옷인데, 하나님으로부터 온 지혜라야만 이 직물을 완전하게 만들 수 있단다.”

“비유 가운데도 있지않니? 혼인 잔치에 예복을 입지 않고 온 사람 이야기 말이다. 예복은 나의 참된 제자들이 갖추어야 할 순결하고 흠이 없는 품성을 표상한단다. 바로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계 19:8)와 ‘티나 주름 잡힌 것’(엡 5:27) 이 없는 것으로 묘사된 품성을 말하는 것이지. 성경에는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라고 쓰여 있단다. 그런데 이 세마포는 믿음으로, 나 예수를 개인의 구주로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들에게 내가 입혀 주는 흠이 없는 품성을 표상한다.”
“이 순결한 흰 두루마기는 본래 너희 인간의 시조가 거룩한 에덴에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입혀 주셨던 것이다. 그 때 그들은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일치한 생애를 살았고, 그래서 아름답고 부드러운 하나님의 빛이 그 거룩한 부부를 늘 둘러싸고 있었지. 이 빛의 두루마기는 하늘의 순결한 영적 옷의 상징이었단다. 만일 그들이 하나님께 충실했더라면 그 빛의 두루마기가 언제까지나 계속해서 그들을 두르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죄를 지음으로 인해 하나님과의 연결이 끊어지게 되고 그들을 둘렀던 빛의 옷은 사라지게 되었다.”
“지금 너희는 하늘의 두루마기가 필요하다! 인간들이 범죄한 후 너희는 하나님의 율법의 요구에 응할 만한 자신의 의를 조금도 가지지 못하게 되었어. 그러나 내가 너희를 위하여 피할 길을 열어 주었다. 나는 이 세상에서 너희가 당하는 것과 같은 고난과 시험 가운데서 살았다. 나는 죄 없는 생애를 살다가 너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죽었고, 지금 너희 죄를 벗기고 나의 의를 주려고 하고 있단다.
너희가 자신을 나에게 바치고 나를 너희의 구주로 받아들이면, 너희의 생애가 아무리 악하였을지라도 나의 공로로 인해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단다. 나의 품성이 너희의 품성을 대신하게 되고 그러면 너희는 죄를 도무지 범하지 않은 것처럼 하나님의 앞에 받아들이는 바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옷을 사려면 치러야 하는 대가가 있지! 그것은 다름이 아니고 너희의 헌 누더기 같은 옷을 벗어 내게 주고, 너희 자신을 온전히, 하나도 남김없이 온전히 내게 바치라는 것이야. 그럴 때 내가 눈부신 새 흰 옷을 네게 줄 수 있단다.”

우리들: “너무 좋은 말씀이세요! 그런데 어떻게 하면 그 흰 옷을 받아 계속 입고 살 수 있는지 그 방법을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세요.”

예수님: “그래. 그것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너희가 너희 자신을 나에게 바칠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데, 그것은 바로 너희의 마음이 나의 마음과 연합되고, 너희의 뜻이 나의 뜻에 합쳐지고, 너희의 정신은 나의 정신과 하나가 되고, 너희의 생각은 나에게 고정되어 마침내 너희는 바로 나와 똑같은 생애를 살 수 있게 된단다! 이것이 바로 의의 옷을 입는 방법이다! 곧 그것은 너희와 내가 혼연일체가 되어, 하나가 되어 함께 산다는 의미이기도 하지.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너희를 보실 때, 무화과나무 잎으로 엮은 옷이나 죄로 인해 벌거벗은 너희의 몸은 보지 않으시고, 내가 하나님의 계명을 온전히 순종함으로 이룬 나의 의의 두루마기를 보시게 되지.”
“그 ‘혼인 예복의 비유’에서 예복을 입지 않고 혼인 잔치에 참석한 사람은 오늘날 이 세상을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상태를 나타낸단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면서 복음의 축복과 특권을 요구하지. 그러나 막상 나를 따르는 데 어떤 대가나 희생이 요구되면, 그들은 그것을 싫어한단다. 말하자면 쉽게 구원을 얻으려고 하는 것이지. 내가 치른 무한한 희생의 고통을 무시한 채...
그들에게는 사실 품성의 변화가 필요해. 그들은 죄에 대한 진정한 회개를 전혀 체험하지 못했어. 그들은 나의 필요를 느끼지도 않고, 나에 대한 믿음도 나타내지 않는다. 그들은 악을 행하려고 하는 선천적, 또는 후천적 성벽을 극복하지 못했고... 그러면서도 그들 자신이 꽤 선하다고 생각하고, 나를 의지하는 대신에 자신의 공로를 의지한다. 그들은 말씀을 듣기만 하는 자들로서 잔치에는 왔으나 흰 의의 두루마기는 입지 않은 사람들을 말한단다. 마지막에 내가 두번 째 강림할 때, 흰 옷, 곧 의의 두루마기가 없이 발견되지 않도록 준비하기 바란다.”

교훈 3. “안약을 사라”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계 3:18).

“세번 째로 내가 너희에게 사라고 권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안약이란다. 내가 보니 라오디게아 교회 교인들 중 거의 대부분이 영적으로 눈 멀어 있는데도, 자기들은 잘 본다고 하고 있다. 그런 사람들의 행동을 보면 정말 동정을 금할 수 밖에 없지. 왜냐하면 장님 같은 행동을 하면서 본다고 하니까 말이다.
안약은 영적으로 소경된 것을 고치고, 바로 보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란다. 또한 안약은 선악을 식별할 수 있게 하지. 그리고 아무리 가장된 죄라도 분별할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을 갖게 한단다.
너희는 성령의 안약이 필요하다. 영적인 안약을 눈에 발라 너희 자신의 결점들과 성품의 결함들을 알 뿐 아니라 사단의 간계와 거짓 영의 역사도 밝히 알아야 한다. 눈은 너희의 양심이자, 마음의 빛이란다. 온 영과 전 존재의 영적 건강은 사물을 보는 눈의 정확한 시력에 달려 있지. 눈이 치료를 받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보게 하려면 예민하게 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안약을 양심에다 적용시키면 그것은 너희의 양심을 예민하게 만드는데, 그 이유는 그 말씀이 죄를 깨닫게 하기 때문이란다.
만일 너희들이 계속적으로 나를 바라보고 성령을 받아들인다면 너희들은 밝은 시력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러면 너희들은 백방에서 밀려오는 위기들을 식별할 수 있을 것이야.”
“이 안약을 어떻게 살 수 있느냐고? 그것은 너희의 모든 자부심을 버림으로써, 너희에게 아무리 중요한 것이라 할지라도 모든 것을 다 포기함으로써 너희의 눈을 뜨게 할 안약을 살 수 있단다. 그리고 온전히 성령께 굴복하고 그의 인도를 따라가겠다고 결심해야 한단다. 이것이 바로 나를 따르는 대가이다.”

우리들: “예수님! 좋은 말씀과 설명, 정말 감사합니다. 이 새해에는 정말 모든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주님을 따라가는 사람들이 되고 싶습니다!”

 

4부 - 값싼 은혜와 값비싼 은혜


    은혜를 위해서 무한한 대가가 지불되었으며, 값으로 헤아릴 수 없는 희생이 지불되었다. 은혜를 무한하게 나누어 주기 위해서 치르어진 값은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자마다 은혜를 매우 소중하고 값비싼 것으로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디트리히 본회퍼(저자 설명: 1906년 2월 4일 독일의 브레스라우 시에서 의과대학 교수의 아들로 출생. 1930년도에 23세의 나이로 베를린 대학 조직 신학과의 교수로 취임. 1943년, 나치스의 게스타포에 체포되어 감옥생활 시작. 히틀러 치하에서 너무나 조용하게 침묵을 지키고 있는 기독교회를 책망하기 시작함. 1945년 2월, 뷰켄발드 강제 수용소로 끌려감. 기독교회에 스며드는 자유주의 신학에 대해서 규탄했던 대표적인 신학자. 1945년 4월 9일, 옥중에서 자신의 신앙를 포기하지 않고 고수하다가 순교함. 이 기사는 그의 대표적 저서인 “제자가 되는 대가” 에서 발췌한 글임.)

    오늘날 기독교계에 가장 크게 오해받고 있는 그리스도의 선물이 있는데, 그것은 다름이 아닌 “은혜”이다. 소위 값싼 은혜(cheap grace)라고 불리어지는 가르침이 거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무방비 상태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값으로 헤아릴 수 없는 그리스도의 희생과 죽음으로 인하여 마련된 값비싼 은혜가 시장에서 파는 싸구려 물건처럼 헐값에 거래되고 있다.

    값싼 은혜라는 말은 하나님의 은혜가 시장에서 팔리는 값싼 물건처럼 팔려 나간다는 의미이다. 침례와 죄의 용서가 너무나 가치없는 것으로 전락되었으며, 고의적이고 의도적인 죄를 범한 죄인에게 회개하라는 호소 대신에, 위로와 격려의 말들이 무책임하게 난발되고 있다. 물론 은혜에는 어떠한 대가나 가격이 붙어서는 안된다. 우리가 은혜에 대해서 생각할 때에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은혜에 대한 대가가 이미 지불되었다는 사실이다. 은혜를 위하여 무한한 대가가 치르어졌기 때문에, 그것을 무한하게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모든 인류에게 은혜를 무한하게 나누어 줄 수 있기 위해서 치르어진 값은 결코 헐값이 아니었다. 은혜를 위해서 무한한 대가가 지불되었으며, 값으로 헤아릴 수 없는 희생이 지불되었다. 은혜를 무한하게 나누어 주기 위해서 치르어진 값은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자마다 은혜를 매우 소중하고 값비싼 것으로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은혜를 매우 값싸게 취급하는 사람들은 은혜를 단순히 어떤 교리나 이론으로서 받아들인다. 그들이 받아들이는 은혜 속에는 사람의 마음을 완전히 변화시키는 재창조의 능력과 생명력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은혜를 죄의 용서에만 국한시켜서 생각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과 그분께서 베푸신 용서하시는 은혜를 정신적으로 인정하고 동의하기만 하면, 은혜는 자신의 죄를 용서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은혜에 대한 매우 위험한 오해이다. 은혜에 대해서 이러한 가르침을 믿는 사람들은 죄를 값싼 은혜로 거침없이 덮어씌우기 때문에, 깊은 회개의 경험을 할 수 없게 된다. 또한 이러한 상태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죄와 세속으로부터 구원받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도 솟아 나올 수 없으며, 가난한 마음으로 의를 사모하지도 않게 된다.

    만일 은혜에 대한 이러한 가르침이 올바른 진리라면,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처럼 살아도 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정말 은혜가 값싼 은혜라면, 인생살이에서 세상이 요구하는 바에 맞추어서 살아도 된다고 설교해야 한다. 정말 은혜가 값싼 것이라면, 우리는 깊은 자기 기만 속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게 된다: “값싼 은혜가 그대를 덮어주고 있으므로 죄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구태여 애쓰지 않아도 된다. 그대는 값싼 은혜 아래에서 경건한 삶을 살기를 원하는 척 할 필요도 없다. 진리대로 살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라는 것이나, 한번 그리스도를 버리고 세상으로 나간 교인에게 재침례를 요구하는 것과 같은 것들은 불필요한 이설이다. 그대가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산다고 할지라도, 그대는 여전히 죗되고 이기적인 생애를 살 수 밖에 없으므로, 거룩한 생애에 대한 소망을 버려라. 은혜가 항상 그대에게 베풀어져 있기 때문에 그대가 그리스도를 믿고 받아들이는 한, 그대의 생애가 어떠하든지 간에 구원은 보장되어 있다. 은혜가 그대를 덮어주고 있으므로, 더 이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필요가 없다. 하나님의 은혜가 온 세상을 덮어주고 있으므로, 그대는 세상 사람들처럼 살아도 된다. 어차피, 그대는 은혜로 구원받았는데, 부흥과 개혁이 무슨 필요가 있는가? 구태여 세상 사람들과 조금 다른 것을 하거나, 조금 다른 길을 가는척 하지 말라. 십자가에서 베풀어진 은혜가 그대를 구원하기에 넉넉하지 않은가? 세상에서 오는 유혹과 시험을 극복하기 위해서 고난을 당하고 극기해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생애를 세상과 구별짓기 위해서 세상을 전적으로 버려야 할 뿐 아니라, 자신을 부인하는 것을 그리스도의 지상 명령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아들의 피로써 베풀어진 은혜가 진정으로 자신에게 은혜가 되도록 해야 한다.

    그렇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인은 은혜를 통하여 세상을 정복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만일 그대가 값싼 은혜를 믿는다면, 그리고 만일 그대가 생명력이 없는 거짓 은혜를 믿는다면, 그대 주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세상이 주는 쾌락을 즐기면서 살되, 세상보다는 조금 높은 표준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도록 가르치라. 하나님의 피묻은 은혜를 위해서 살기 보다는, 세상을 위해서 생애를 바치라고 말하라.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의 구원을 위해서 모든 일을 다하였으므로, 그들이 편안한 마음으로 구원에 대한 감정적 확신 속에서 안주할 수 있도록 만들라.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가려고 애쓰는 대신에, 그분의 은혜가 주는 위로와 위안을 즐기라고 말해라. 바로 그것이 값싼 은혜가 의미하는 바가 아닌가? 죄를 버리고 통회하는 죄인을 의롭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죄 자체를 의롭다고 여기는 은혜를 가리켜서 값싼 은혜라고 부르고 있지 않는가? 진정으로 회개한 죄인을 의롭다고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그대로 품고 있는 죄인에게도 은혜가 구원을 가져다 준다고 가르치는 것이 값싼 은혜라는 가르침의 핵심 논리가 아닌가? 물론, 값싼 은혜도 죄의 용서를 말하고 있지만, 그것은 죄의 올가미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지 못하는 기만이다. 값싼 은혜는 우리의 마음을 경건하고 은혜롭게 변화시킬 수 없으며, 마음 속에 죄와 이기심을 붙잡고 있는 죄인들 위에 흰색 보자기를 뒤집어 씌움으로써, 회개하지 않은 죄인을 의인으로 위조하는 허무한 포장지에 불과하다. 값싼 은혜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에게 스스로 의를 부여하게 하는 자기 기만이다.

    오늘날, 값싼 은혜에 대한 가르침은 기독교회가 당면하고 있는 각종 참상을 만들어 내고 있는 장본인이다. 값싼 은혜는, 참된 회개없이도 용서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으며, 진리에 대한 확신과 행습의 개혁없이도 침례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고, 아무런 고백도 없이 성만찬 예식을 거리낌없이 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았다. 값싼 은혜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도록 요구하지 않는 은혜, 십자가가 없는 은혜, 그리고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죽음의 의미와 가치를 값싼 것으로 만드는 은혜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값비싼 은혜란 무엇인가? 그것은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은 것을 말한다. 그것을 진정으로 사기 원하는 사람은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팔게 된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어진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마태복음 13:44. 은혜의 참된 가치를 깨달은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모든 소유와 나아가서는 자기 자신 마저 버리고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아들이게 된다. 값비싼 은혜란 무엇인가? 그것은 값진 진주와 같은 것이다. 값진 진주의 가치를 올바로 알아보는 그리스도인 역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서 그것을 사게 될 것이다. “또 천국은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 마태복음 13:45-46. 값비싼 은혜란 무엇인가? 그것은, 만일 눈이 그대를 넘어지게 만들면, 그 눈을 뽑아버리라는 그리스도의 명령을 말한다.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리라.” 마태복음 18:9. 값비싼 은혜는 선물로 거저 주어지는 것이지만, 타락한 세상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은 그것을 받기 위해서 희생과 극기의 대가를 지불하게 된다. 값비싼 은혜란 무엇인가? 그것은 베드로에게 그물을 놓고서 자신을 따르라고 명하신 그리스도의 부르심이었다.

    누가 하나님의 아들의 피로 얼룩진 은혜를 헐값으로 팔아넘기려고 하는가? 누가 값으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값비싼 하나님의 은혜를 적당하게 슬쩍 사용하려고 하는가? 값비싼 은혜는 우리로 하여금 계속적으로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라고 호소하는 부르심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값없이 주어지는 선물이지만, 두드리고 도전해야 하는 열리는 문이다. 이와같이 진짜 은혜는 우리에게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길을 따르라는 부르심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값비싼 것이다. 물론, 우리의 극기와 노력과 희생 자체가 우리를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만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지는 않지만, 은혜에는 그것을 구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인생을 대가로 지불하라는 요구가 포함되어 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이 험한 세상에서 오해와 희생의 길을 걷게 되기 때문에, 은혜는 매우 값비싼 것이 되는 것이다.

    이런 은혜만이 그리스도인의 생애를 위선이나 가식이 없는 진실한 것으로 꼴지울 수 있다. 은혜는 죄를 죄라고 정죄하기 때문에 값진 것이며, 또한 죄인으로 하여금 죄를 버리고 의를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주기 때문에 진짜 은혜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을 그 대가로 지불하였기 때문에 값비싼 것이다. “너희는 값으로 산 바 되었으니” 라는 성경 말씀에 나오는 “값”이란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의 생명을 바치면서 치르신 값을 어떻게 우리 인간이 값싼 것으로 취급할 수 있겠는가! 온 우주의 왕인 하나님께서 육체를 취하시고 이 땅에 내려오신 그 은혜를 어찌 값싸다고 말할 수 있는가! 하나님의 값비싼 은혜란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뜻한다.

    하나님의 아들이 치르신 값으로 헤아릴 수 없는 대가를 깊이 명상해 보라. 하나님께서 당신의 값비싼 은혜를 통하여 세우신 그리스도 교회는 마땅히 세속으로부터 보호되어야만 한다. 은혜를 개나 돼지에게 던져주는 자가 누군가?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달리신 이유와 그 목적을 명상하는 자마다, 은혜를 매우 귀하고, 소중한 것으로 여기게 될 것이다. 놀라운 희생을 통하여 이룩된 값비싼 은혜는 우리 모두에게 그리스도를 따르라는 은혜의 초청장을 보내고 있다. 하나님의 값비싼 은혜는 산산히 깨어진 마음으로 죄를 깊이 뉘우치는 영혼에게 용서의 약속을 제공한다. 은혜는 사람의 마음을 겸손하고 가난하게 만듦으로써, 그리스도의 초청을 들을 수 있는 귀를 열어주며, 그리스도의 사랑과 자비를 보면서 회개에 이르도록 도와준다. 그러나 하나님의 값비싼 은혜가 하는 일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은혜는 죄를 회개하고 용서받은 죄인에게 그리스도의 멍에를 메고, 그분을 따르라고 호소한다. 이러한 호소야말로 하나님의 은혜인데, 왜냐하면 예수께서 “나의 멍에는 쉬우며, 나의 짐은 가볍” 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은혜의 초청은 자신이 스스로에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라는 호소는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스스로 내리는 것이 아니다. 그 호소의 주인은 그리스도이시다. 은혜가 베드로로 하여금 모든 것을 버리고 그분을 따르도록 만들었으며, 은혜가 베드로로 하여금“주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내가 믿노니” 라는 고백을 하도록 만들었는데, 그러한 신앙 고백이야말로 그 당시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참람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었다. 베드로에게 있어서 은혜의 역사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은혜는 베드로로 하여금 자신이 세번이나 부인하였던 주님을 위하여 순교자의 길을 마지막 순간까지 걷도록 초청하였다. 그러한 부르심에 그는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과 충성의 마음으로 응하였다. 베드로의 생애에 있어서, 은혜와 제자의 직분(discipleship)은 분리될 수 없는 것이었다. 베드로는 제자가 되는 대가를 기꺼이 지불함으로써 은혜의 초청을 받아들였다.

    누가 감히 그리스도의 은혜를 값싼 것으로 전락시키려고 하는가? 지금,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 모두에게 그리스도의 멍에를 메고 그분의 뒤를 따르라고 부르고 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멍에와 짐이 그대에게 가벼운 것이 될 때까지, 그대를 위하여 치르어진 그분의 희생과 봉사의 생애를 명상하도록 하라.

5부 - 값비싼 은혜를 찾아서


은혜에 대한 사단의 공격 : 사도시대 이후, 그리스도 교회의 성장과 함께, 교회는 점점 더 세속화 되었으며 은혜가 요구하는 대가에 대한 가르침도 점차 빛을 잃어버린 채 희미해져 갔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12제자들에 의해서 세워진 진리는 중세기의 종교 암흑 시대에도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서 여전히 전수되고 있었다. 은혜란 그리스도의 초청을 포함하고 있으며, 그분의 부르심에 응하는 데에는 희생적인 대가가 지불되어야 한다는 진리를 이해하는 사람들이 남아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날마다 그분의 명령을 따르기 위해서 노력하는 생애를 살았다. 비록 수도승 제도가 나중에는 행함으로 말미암는 의의 대표적인 예로 전락하고 말았지만, 초창기의 경건한 수도승들의 동기와 목적은 성경의 가르침에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그리스도 교회에 들어오는 세속적인 정신과 값싼 은혜에 대하여 경종을 울리는 파수꾼의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교회의 행정과 정치를 맡아보던 성직자들과 신부들은 수도승 제도를 교회 조직의 타락한 모습을 가리우는 가면으로 이용하였다.

루터의 부르심

    종교 개혁시대가 되자, 하나님께서는 순수한 복음인 값비싼 은혜에 대한 가르침을 회복시키기 위해서 수도승이었던 마틴 루터를 개혁자로서 선택하셨다. 그는 수도원 생활을 거쳐서 수도승이 되었는데, 이러한 모든 과정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섭리 하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루터는 완전한 순종의 길로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서 모든 것을 버렸던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는 참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생애를 위하여 세상이 주는 장미빛 유혹들을 거절하였다. 그러나 처음에는 마틴 루터 역시 수도원 생활을 통하여 개인적인 성취를 이룩하고자 하였다. 그러한 그에게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의 길이 소수의 제한된 수도승들의 개인적인 성취나 공로로 이용되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보여주셨으며, 그리스도를 따르는 일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해당되는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는 사실을 성경을 통하여 보여주셨다.

    영적 눈이 열린 마틴 루터는 수도승 제도가 제자들의 소박하고 겸손한 봉사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공로를 쌓으며 극단적인 영적 교만으로 빗나가는 현실을 보게 되었다. 세속이 수도승들의 심장부에 찾아들자, 말할 수 없는 혼란이 야기되었다. 세상을 버리려고 하던 수도승들이, 이제는 수도원 안에서 세상을 그리워하는 미묘한 모습으로 바뀌게 되었다. 종교계가 이처럼 바닥까지 타락할 즈음, 루터는 하나님의 은혜를 붙잡게 되었다. 그가 하나님의 은혜를 주장하기 시작하자, 거의 모든 수도승들이 그에 대항하여 일어섰다. 루터는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손을 뻗고 계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바라보았다. 루터는 믿음의 손을 뻗어서,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라는 사도 바울의 말씀을 붙잡았다. 그리하여 그는 “비록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을 지라도, 우리는 믿음으로 선한 생애를 살 수 있다” 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스도께서 그를 위하여 마련하여 주신 은혜는 값으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위대한 은혜라는 사실이 그의 마음을 산산히 깨뜨렸다. 그리하여 그는 다시 한번 더 그물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따르게 되었다. 그가 처음에 수도원에 들어갔을 때, 그는 모든 것을 희생하고 버렸지만 자기 자신을 버리지는 않았었다. 그러나 이제 그는 남아있던 자아마저 버릴 수 있게 되었다. 자아를 버리게 되자, 그때까지 그를 붙잡고 있던 자신에 대한 신앙적인 평판도 하잘 것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스스로 공로를 쌓으려고 애쓰는 대신에, 단순히 하나님의 은혜의 초청에 응하라는 부르심에 순종하였다. 루터는 “그대는 지금까지 죄를 범해 왔다. 그러나 이제 모든 것이 용서되었으니, 그대는 현재의 상태에 만족하여 머물러 있으면서, 용서가 주는 위로를 즐겨라” 라고 속삭이는 사단의 음성을 거절하였다.

    드디어, 그는 수도원을 떠나서 세상으로 돌아갔다. 그가 세상으로 돌아간 것은 세상이 선하고 거룩하기 때문에 돌아간 것이 아니라, 수도원도 세상의 일부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에 돌아갔던 것이다. 루터가 세상으로 돌아간 사건은 세상에게 가장 큰 충격을 안겨 주었다. 그가 수도원에 들어갈 당시에 했던 세상의 포기는, 그가 세상으로 돌아왔을 때에 했던 자아의 포기에 비하면 어린아이의 장난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의 개심은 그 당시 종교계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 루터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은 세상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진리를 깨달았다. 수도원이 안전한 피신처가 될 수 없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일은 날마다의 삶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나를 따르라” 는 그리스도의 명령은 매일의 생활 속에서 완전한 순종의 형태로 나타나야 한다는 진리를 발견하였다. 그리스도인의 삶과 세상 사람들의 삶 사이에는 끊이지 않는 투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배우게 되었다.

오해받고 있는 루터의 믿음

    어떤 사람들은, 마틴 루터가 깨달은 복음은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의무를 제거해 준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치명적인 오해이다. 그들의 오해와는 반대로, 루터는 세상에 살지만 세속에 대하여 결정적인 저항을 하는 그리스도인들만이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거룩함에 이른다고 가르쳤다. 그는 타락한 세상 속에서도 그리스도를 따를 수 있음을 설교하였으며, 세상에서의 삶을 통해서도 거룩한 경험을 지속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루터가 믿었던 신앙은, 하나님께서는 죄를 의로운 것으로 인정해 주신다고 믿는 신앙이 아니라, 죄를 버린 죄인을 의인으로 인정해 주심을 믿는 신앙이었다. 그가 받아들인 은혜는 값비싼 은혜였다.

    그는 자신의 모든 죄에 대해서 용서를 가져오는 것은 자신이 힘들게 쌓아나가는 공로나 희생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자비와 긍휼로 베푸시는 은혜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고달픈 수도승 생활로부터 해방되었지만, 이전보다 더욱 엄숙한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아들였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 베푸신 값비싼 은혜를 깨달음으로써, 그리스도의 제자의 길을 위대한 확신과 믿음을 가지고 걸어갈 수 있게 되었다. 루터는, 하나님의 아들이 치르신 대가가 너무나 크기에 그것은 타락한 인류에게 은혜가 될 수 있으며, 그러한 엄청난 은혜를 바라보고 묵상하는 그리스도인마다 희생적인 대가를 치르면서 그리스도를 끝까지 따라가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루터가 수도원에서 매우 참담한 경험을 하고 있을 때, 그는 믿음을 통하여 모든 죄로부터의 자유와 용서를 붙잡게 되었다. 그는 스스로의 힘으로 결코 없앨 수 없었던 죄를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은혜에 의존하여 사함을 받을 수 있다는 진리를 깨닫게 되자, 그는 그러한 은혜를 베푸시는 그리스도께 이전보다 더욱 큰 헌신과 충성을 바칠 수 있게 되었다. 그러한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서, 루터는 하나님의 은혜는 자신의 생애 전체를 대가로 지불하는 삶을 살도록 요구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루터는 자신이 그리스도의 은혜를 깨닫는 순간, 일생 처음으로 그리스도께 완전하고 순수한 순종을 드릴 수 있었다고 고백하였다. 루터에게 있어서 사랑과 감사의 정신은 그로 하여금 그리스도께 완전한 헌신과 충성을 드릴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은혜는 그에게 그리스도 제자로서의 직분을 면제해 주는 것이 아니라, 더욱 더 열성적인 제자의 길을 걸을 수 있게 해주는 원동력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바로 이것이 마틴 루터가 은혜에 대해서 깨달았던 바이다.

    루터는 오직 은혜만이 사람을 구원할 수 있다고 말하였다. 루터를 따르던 그의 후예들은 루터의 교리를 받아들였지만, 루터의 경험을 이해하는 일에는 실패하였으며, 루터가 했던 말만을 되풀이 하였다. 루터의 경험을 체험하지 못한 그의 후예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그리스도인들이 걷게 되는 제자의 길을 가르치는 일에 실패하였다. 물론, 마틴 루터는 오직 은혜를 통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음을 말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그러한 설교나 가르침을 강조할 수 밖에 없었던 상황과 배경을 이해해야만 한다. 그는 그 당시에 가장 열성적이고, 가장 엄격한 방법으로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결심한 수도승들을 대상으로 설교하였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그러한 사람들의 믿음을 하나님의 은혜를 향하여 돌리고자 했던 루터의 의도를 이해해야 한다. 혹독한 규율과 엄격한 생활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의무나 직분을 강조할 필요가 있었을까? 대답은 분명하다. 그 당시 루터는 수도승들에게 가장 적합한 설교를 하였을 뿐이다.

    루터는 우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선한 생애를 살 수 있다고 말하였다. 또한 어떤 것도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도록 만들 수 없으며, 오직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 만이 우리에게 가능성을 제공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러한 말은 그가 수도원을 나올 때, 즉 두번째로 모든 것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따르라는 부르심에 응하면서 했던 말이라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루터는 엄청난 죄로부터 사함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은혜에 의지하는 것이라는 진리를 깨달았다. 이와 같이 죄에 대한 보다 분명한 깨달음은 루터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더욱 열심히 따르게 만들었다. 그는 언제나 죄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서 은혜를 바라보았지, 방종과 게으름에 대한 핑계로서 은혜를 간구하지 않았다. 그가 얻은 해결책은 인간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에 의해서 마련된 것이었다. 그러나 루터를 따르던 후예들은 루터가 발견한 해결책을 자신들의 경험으로 깨닫지 못하였으며, 은혜를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는 교리나 수단으로 만들어 버렸다. 바로 그것이 오늘날 기독교계에 가장 치명적인 타격을 주고 있는 값싼 은혜에 대한 가르침의 기초가 되었다.

값싼 은혜가 가져온 재앙들

    만일 은혜가 그리스도인 신앙 생활에 있어서 한낱 지식에 불과한 것이 된다면,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모든 곳을 가게 되며, 우리가 원하는 모든 죄를 범하게 되고, 그러면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은혜가 우리의 죄를 덮어준다고 믿게 된다. 본성적으로, 사람은 가장 싼 값을 주고 은혜를 얻을 수 있는 장소를 찾으려고 한다. 본성적으로,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이기적이고 세속적인 마음을 만족시켜 주는 설교를 하는 목사나 교회를 좋아하게 된다. 마틴 루터가 말했던 오직 은혜로만 구원받는다는 말을 잘못 이해한 사람들은 이기적이고 세속적인 신앙을 붙들게 되며,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기 이전의 상태 그대로 남아 있으면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은혜가 자신을 덮어주고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살게 된다. 은혜에 대한 잘못된 가르침으로 인하여, 교회는 깊은 세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교회와 세상 사이에 차이가 없어졌으며, 그리스도인과 세상 사람 사이에도 극적인 대조가 사라지게 되었다. 그리스도인이 세상 사람처럼 이기적이고 위선적이며, 세상 사람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시대가 되었다. 그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가치를 깨닫고 그리스도의 제자의 길을 걷고자 하는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이 교회 안에서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받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오늘날에는 일주일에 한번씩 교회에 가는 것으로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의무를 충분히 수행했으며, 그것으로 자신의 죄를 용서함 받았다고 생각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대량으로 생겨나게 되었다. 바로 이것이 은혜에 대한 잘못된 가르침이 그리스도 교회에 가져온 참상이다.

    이제, 사람들은 더 이상 그리스도를 따르려고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값싼 은혜가 그들을 제자로서의 의무와 직분으로부터 해방시켰으며,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에 나타나는 필연적인 대가를 면제하여 주었기 때문이다. 지식으로만 이해하는 값싼 은혜는 사람들로 하여금 가장 싼 값을 치르고 그리스도를 따라가도록 만들고 있다. 우리는 값싼 은혜의 가르침이 만들어 놓은 결과들을 보면서 엄숙한 두려움을 느껴야 한다. 누가 값싼 은혜의 가르침 때문에 멸망으로 들어가는 영혼들에 대한 책임을 질 것인가?

    매우 미묘하고 혼돈시키는 기만이 여기 있는데, 값싼 은혜를 믿는 사람들과 값비싼 은혜를 믿는 사람들이 공히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 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잘못 이해하거나, 그것을 개인적으로 체험하지 못할 때, 그리스도인의 신앙이 크게 빗나갈 수 있다는 사실을 깊이 이해해야만 한다. 오늘날, 루터의 의도와는 달리 그의 말이 정반대의 의미로 해석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깊은 절망마저 느끼게 된다. 물론, 아직도 루터와 개혁자들이 가르쳤던 값비싼 은혜에 대하여 존경심을 표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값싼 은혜의 가르침에 대항하기 위해서 일어서는 사람들은 극히 드물다. 사람은 자신이 믿는대로 된다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진리이다. 만일 우리가 값싼 은혜의 가르침을 믿는다면, 우리는 그것이 말하는 바대로 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값비싼 은혜를 믿는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감사의 정신으로 대가를 치르면서 응답하게 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은혜를 가장 값싸고 쉬운 것으로 만드는 것이 루터의 후예로서 마땅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는 듯 하다. 그들은 은혜를 어떻게 하면 쉽고 간편하며 값싸게 만들 수 있을까를 위해서 골몰하는 듯 하다. 그래서 오늘날, 루터의 가르침을 지지한다고 공언하는 사람들의 대다수가 그리스도인은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라가야 된다고 믿는 사람들을 율법주의자로 보게 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발자취를 따르기 위해서 희생하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극단 또는 이단으로 정죄받는 세대가 되었다. 이러한 분위기 때문에, 기독교는 가장 인기있는 종교가 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회로 개종할 수 있게 되었다. 비록 기독교계에서 루터를 지지한다고 말하는 목사들이 가장 믿을 수 있는 성직자로 신뢰받고 있지만, 참된 제자의 직분에 대한 가르침은 희생되고 말았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히 지불해야 할 대가가 너무나 싼 값으로 책정되었으며, 값싼 은혜의 가르침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승리자가 되었다.

    그러나 우리들은 값싼 은혜가 가져온 결과가 부매랑처럼 우리 자신들에게 돌아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세속과 부정직으로 붕괴되어 가고 있는 커다란 교단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가? 그리스도인의 위선과 부도덕에 치를 떨면서 교회를 무시하는 세상 사람들의 코웃음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수많은 사람들을 도매값으로 침례주며, 회개하고 진리를 확신하는 일없이 구원받았다고 자위하는 그리스도인들이 교회를 채워가고 있다. 마땅히 책망받아야 할 죄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의 죄를 가리워 줄 것이라고 위로하는 무책임한 성직자들의 숫자가 날로 증가하고 있다. 그치지 않는 은혜의 샘을 퍼붓듯이 나누어 주고 있지만,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서 좁은 길로 들어가라는 설교는 점점 더 듣기 힘들게 되었다. 초기 사도 시대의 교회에서 가르쳐졌던 그러한 진리를 어디서 찾을 수 있단 말인가? 값비싼 은혜에 감격하여 자신의 목숨을 단두대와 화형대 위에 던졌던 선구자들의 모습을 어디서 찾을 수 있는가? 기독교계 전반에 걸쳐서 내리고 있는 값싼 은혜의 재앙이 보이지 않는가? 바로 이것이 소위 복음주의자들이라고 불리우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값싼 은혜를 가르친 결과로 내려진 재앙들이다.

구원을 빼앗아 가는 값싼 은혜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없이 불순종의 생애를 살 수 있도록 교인들을 준비시키는 것이 값싼 은혜의 가르침이다. 값싼 은혜는 그리스도인들을 세상에서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어중간한 사람들로 만들어 버렸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제자로서의 직분을 잃어버렸으며, 그리스도의 헌신적인 도구가 되지 못하게 되었다. 급기야는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구원이 이미 완성되었다는 말을 듣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러한 가르침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지금 당신을 부르고 계신다는 말을 들을 때에 어리둥절하며 당황하게 된다. 왜냐하면 값싼 은혜에 대한 가르침을 붙들고 있는 사람들은 값비싼 은혜에 대한 진리에 대하여 눈이 가리워지게 되기 때문이다. 깊은 기만 속에서, 그들은 값싼 은혜가 자신들을 구원하여 줄 것이라고 확신하면서 살게 된다. 그들의 생애 속에서 제자로서의 의무와 순종의 삶을 이끌어 갈만한 실제적인 능력이 결여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들을 위한 구원이 이미 모두 이루어졌다고 믿는다. 이러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마음 속에서 들려오는 성령의 음성을 정확하게 듣지 못하게 되며, 성령의 능력이 자신의 실제적인 생활 속에서 어떻게 역사하는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오늘날, 그리스도 교회에 있어서 은혜에 대한 오해는 계명의 행함에 대한 오해보다 훨씬 무서운 재앙을 가져오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값비싼 은혜에 대한 가르침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면, 자신을 부르시는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지 못하게 된다. 우리는 정직한 마음으로 대다수의 교인들이 참된 제자의 길을 걷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정통이라고 불리우는 큰 교단에 다니는 교인들로 인정해 줄지라도, 우리가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정직하게 응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참 교회에 속한 진짜 그리스도인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 우리는 제자되는 직분(discipleship)과 은혜 사이에 존재하는 상관 관계를 반드시 이해해야만 한다. 우리는 “무엇이 그리스도 교회를 이토록 참담하게 만들었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서 분명한 대답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값비싼 은혜 - 참 은혜

    하나님의 참 은혜를 발견한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그들은 세상이 줄 수 없는 만족과 평화를 마음에 담고서 살아갈 것이다.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하여 사단의 권세를 이기는 사람은 겸손한 마음으로 그분의 한량없는 은혜를 찬송하게 될 것이다. 은혜를 아는 사람들은 사람들에게 은혜로운 사람이 될 것이며,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감으로서 세상이 흉내낼 수 없는 자유를 만끽하게 될 것이고, 하늘 시민으로서의 확신을 자랑하지는 않지만 분명하게 인식하면서 살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값비싼 은혜를 통하여 가장 가치있는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될 수 있다는 소식이야말로 우리 모두에게 진정한 복음이 아니겠는가?
 

6부 -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그리스도 당시에, 팔레스틴 사람들은 대개 언덕이나 산 위에 위치한 성벽으로 둘린 마을에서 살았다. 일몰 때 닫혀지는 성문이 가파른 바윗길에 붙어 있었기 때문에, 저녁 무렵에 집으로 돌아가는 행인들은 밤이 되기 전에 성문에 도착하기 위하여 힘든 오르막길을 열심히 서둘러 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늑장을 부리는 자는 성문 밖에 남게 되었다.

    예수께서는 가정과 안식처로 이어지는 좁고 비탈진 길을 그리스도인의 노정에 대한 인상적인 상징으로 사용하셨다. 그분께서는 내가 너희 앞에 제시한 길은 좁고 그 문이 들어가기에 어렵다고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주님의 황금률은 모든 교만과 자기 본위의 마음을 제거해 버리는 까닭이다. 물론, 넓은 길도 있다. 그러나 그 종말은 멸망이다. 만일, 영적 생애의 길을 올라가고자 한다면, 그대는 계속해서 올라가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오르막길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적은 무리와 함께 갈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많은 무리가 내리막길을 택할 것이기 때문이다.

    인류 전체가 온갖 세속적 마음과 이기주의와 교만과 부정직과 도덕적 타락을 가지고 사망으로 인도하는 길을 갈 수가 있다. 각 사람은 자신의 의견과 주의에 따라 이기적인 마음이 지시하는 대로 무엇이나 할 소지를 가지고 있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길을 가는 데에는 따로 길을 찾을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 문과 길이 넓어 발이 사망으로 끝나는 길을 향하여 저절로 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은 좁고 그 입구가 험하다.
    만일, 늘 따라다니는 어떤 죄를 가지고 있다면, 그대는 그 길이 들어가기에 너무 좁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만일, 주님의 길을 계속해서 가고자 한다면, 자신의 길과 자신의 뜻과 자신의 악한 습관과 행동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스도를 섬기고자 하는 사람은 세상의 의견을 따르거나 세상의 표준에 맞출 수 없다. 하늘의 길은 높은 지위와 부를 그대로 가지고 들어가기에도 너무 좁고, 자기 중심적인 야망을 불태우기에도 너무 협소하며, 안락을 즐기며 오르기에도 너무 험하고 거칠다. 그리스도의 몫은 고통, 인내, 자아 희생, 비난, 궁핍, 그리고 당신을 대항하는 죄인들의 반박이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낙원에 꼭 들어가고자 한다면, 우리도 이러한 몫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올라가는 길은 힘든 길이며 내려가는 길은 쉬운 길이라고 결론을 내리지 말라. 사망으로 인도하는 길에도 줄곧 고통과 형벌이 있고, 슬픔과 실망이 있으며, 가지 말라는 경고가 있다. 부주의하고 완고한 사람들이 쉽게 자멸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다. 사단의 길이 매력적으로 보이도록 만들어져 있는 것은 사실이나, 그것은 모두 기만이다. 악의 길에는 쓰라린 후회와 점점 깊어지는 고뇌가 있다.

    우리는 교만과 세속적 야망을 좇는 것을 즐겁게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종말은 고통과 슬픔이다. 이기적인 계획은 전도가 유망하게 보이도록 하고 즐거운 희망을 간직하게 해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자아 중심의 소망 때문에 행복이 깨어지고 생애가 비참하게 된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내리막길은 그 입구가 꽃으로 밝게 빛날지 모르나 가시가 있다. 입구에서 빛나던 희망의 빛이 절망의 흑암 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그 길을 따라가는 사람은 끝없는 밤의 어둠 속으로 빠져들어 가게 된다.

    “궤사한 자의 길은 험하니라.” 그러나 지혜의 “길은 즐거운 길이요 그 첩경은 다 평강이니라”(잠언 13장 15절, 3장 17절).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모든 행동, 그분을 위한 모든 극기의 행동, 훌륭하게 견디어 낸 모든 시련, 유혹에서 거둔 모든 승리는 최후 승리의 영광을 향하여 나가는 행진의 발걸음이다. 그리스도를 우리의 인도자로 삼으면, 그분께서 우리를 안전하게 인도해 주실 것이다. 아무리 큰 죄인이라도 길을 잃어버릴 필요가 없다. 떨고 있는 어떤 구도자도 순결하고 거룩한 빛 가운데서 걸어가지 못할 이유가 없다. 비록 길이 너무 좁고 너무 거룩하기 때문에 죄가 용납되지 않을지라도, 누구나 들어갈 수 있다. 그러므로 비록 의심하고 떠는 영혼일지라도 하나님께서 나를 돌보지 않으신다고 말할 필요가 없다.

    길이 험하며 오르막길이 비탈져 있고 우편과 좌편에 함정이 있을지라도, 우리는 여행길에서 겪는 고통을 견디어야 할 것이다. 피곤할 때에도, 안식이 그리울 때에도 계속해서 수고해야 하며, 연약할 때에도 싸워야 하고, 낙심될 때에도 계속 희망을 가져야 한다. 그렇게 하면 우리의 인도자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마침내 소망의 항구에 틀림없이 도착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보다 먼저 그 험한 길을 친히 걸어가셨고, 우리의 발을 위하여 그 길을 평탄하게 하셨다.

    그리고 영생으로 인도하는 길은 비록 가파르지만 하나같이 피곤한 자들에게 생기를 주는 기쁨의 샘이 있다. 지혜의 길을 걸어가는 자들은 환난을 당할지라도 크게 기뻐한다. 왜냐하면 그들을 사랑하시는 그분께서 보이지 않을지라도 그들 곁에서 동행하시기 때문이다. 위로 한 걸음 한 걸음 올라갈 때마다 그들은 그분의 손길을 더욱 분명히 깨닫게 되고, 매 발걸음마다 보이지 않는 분에게서 나오는 더없이 밝은 영광의 빛이 그들의 길을 비추어 준다. 그리고 저들의 찬양의 노래는 더 높은 곡조로,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는 천사들의 노래와 합하기 위하여 상달된다.

    “의인의 길은 돋는 햇볕 같아서 점점 빛나서 원만한 광명에 이르거니와...”(잠언 4장 18절). 해가 지기 전에 성문에 도착하기 위하여 서두르는 저문 길의 나그네는 길가에 있는 그 어떤 매력적인 것에도 한눈을 팔 수가 없었다. 그는 오로지 성문으로 들어가는 한 가지 목적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그리스도인 생애에도 목적에 대한 이와 동일한 열성이 필요하다. 나는 너희에게 나의 나라의 참 영광인 품성의 영광을 보여 주었다. 그것은 세속적 권력에 대해서 너희에게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지만 너희가 최고의 욕망을 가지고 노력을 쏟을 가치가 있는 것이다. 내가 너희를 세상의 대제국의 패권을 쥐기 위하여 싸우도록 부르지 않는다고 해서 싸워야 할 싸움이 없고 쟁취해야 할 승리가 없다고 결론을 내리지 말라. 나는 너희가 나의 영적 왕국에 들어오기 위하여 노력하고 필사적으로 싸우라고 명령하는 바이다.

    그리스도인의 생애는 하나의 싸움이며 진군이다. 그러나 얻어야 할 승리는 인간의 힘으로 얻어지지 않는다. 싸움의 장소는 곧 마음이다. 우리가 싸워야 할 싸움, 인류가 지금껏 싸운 가장 큰 싸움은 자아를 하나님의 뜻에 굴복시키는 것, 곧 마음을 사랑의 주권에 바치는 것이다. 혈통으로나 육정으로 난 옛 본성으로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 유전적 성향 곧 이전 습관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영적 왕국에 들어가려고 하는 사람은 암흑의 왕국의 세력을 등에 업고 있는, 거듭나지 않은 본성에서 나오는 모든 능력과 정욕이 자신을 대항하여 싸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는 지배권을 쟁취하기 위해 애쓰는 악한 욕망과 습관을 스스로의 힘으로 이길 수 없다. 우리는 우리를 속박하고 있는 강력한 원수를 정복할 수 없다. 오직 하나님께서만 우리에게 승리를 주실 수 있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자아와 또 자신의 의지와 습관을 정복하기를 바라신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우리의 동의와 협력이 없으면 우리 속에서 역사하실 수 없다. 성령은 사람에게 주어진 기능과 능력을 통하여 일하신다. 우리의 정력은 하나님과 협력하도록 요구받고 있다.


    매 발걸음마다 열렬히 기도하며 자아를 낮추는 일 없이는 승리를 얻을 수 없다. 우리의 의지가 하나님의 능력에 억지로 협력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자발적으로 복종해야 한다. 하나님의 성령의 감화보다 백 배나 더 큰 강도(强度)로 그대를 강요할 수 있다 할지라도, 그것이 그대를 하늘에 적합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지는 못할 것이다. 사단의 요새는 깨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대는 스스로의 힘으로 그대의 목적과 욕망과 성향을 하나님의 뜻에 굴복시킬 수 없다. 그러나 만일 그렇게 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으면, 하나님이 그대를 위하여 그 일을 이루어 주시되 심지어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고린도후서 10장 5절) 하기까지 하실 것이다. 그렇게 될 때,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 (빌립보서 2장 12, 13절)신다는 말씀이 이루어질 것이다.

내 자신의 상태는?


다음에 소개하는 15가지 질문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 속에 비친 우리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여 봅시다.

1. 나는 직장에서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만큼, 성경이 말하는 진리에 대해서 잘 이해하고 있는가?

2. 나는 내가 텔레비젼, 라디오, 그리고 신문에 소비하는 시간만큼 성경을 읽는데 시간을 바치고 있는가? 나는 거울 앞에 앉아 있거나, 전화로 다른 사람들과 잡담하는 시간보다 정해진 시간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를 더 좋아하는가? 아니면, 너무나 바빠서 무릎을 꿇을 시간도 없는가?

3. 나는 성경을 하나님께서 직접 내게 쓰신 편지서로 읽는가?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믿고 그 사건을 고대하며 준비하면서 살고 있는가? 아니면 너무나 바빠서 잊어버리고 살고 있는가?

4. 나는 주의 날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는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바대로, 나는 엿새 동안은 힘써 일하고, 일곱째 날은 거룩한 날로서 구별하여 지키고 있는가? 나는 주의 날을 이사야 58장 13절에 기록된 바대로 준수하고 있는가?

5. 나는 가정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가? 가정을 불화와 불행으로부터 보호해 주는 가족 예배가 규칙적으로 나의 가정에서 이루어지고 있는가? 나의 가정은 자녀들에게 있어서 가장 사랑받는 장소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내가 믿고 있는 신앙을 자녀들에게 매력적인 것으로 나타내고 있는가? 가정 안에서 텔레비젼과 라디오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수단으로 자녀들에게 사용되고 있는가?

6. 내가 입고 다니는 옷들을 통하여,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내적인 아름다움을 단장하는 것보다 외적인 미모를 단장하는 데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지는 않는가? 나의 의복은 세상의 유행을 쫓고 있는가? 아니면 단정하고 그리스도인다운 옷을 선정하여 입고 있는가?

7. 나는 대화할 때에 하나님의 천사가 곁에서 나의 말을 듣고 있는 것처럼 말하는가? 만일 나를 모르는 사람들이 나의 말을 듣는다면, 그들은 나를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겠는가? 아니면 세상 사람이라고 생각하겠는가?

8. 나는 언제나 정직한가? 나는 모든 금전 문제에 있어서 언제나 엄격한 정직성을 유지하고 있는가?

9. 나는 십일금을 하나님께 신실하게 바치고 있는가? 나는 하나님의 사업에 헌금을 드릴 때에 정기적으로 드릴 뿐만 아니라, 희생적으로 드리고 있는가? 나는 하나님의 사업을 확장하는 일보다 개인적인 쾌락을 누리는 일에 더 많은 돈을 사용하고 있지는 않는가?

10. 나는 내가 알고 있는 빛과 진리에 대해서 가장 정직한 마음으로 순종하는 생애를 살고 있는가?

11. 나는 골로새서 3장 17절에 의거하여 모든 책과 음악과 교제와 오락을 선택하고 있는가?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행동에나 다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극장의 영화와 텔레비젼의 프로그램 중에서 얼마나 많은 것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볼 수 있는 것들인가?

12. 나는 마음 속에서 감정의 쓴뿌리가 내리지 못하도록 힘껏 저지하는가? 나는 내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고 있는가? 나는 그리스도께서 나를 용서해 주신 것처럼 다른 사람을 용서하고 있는가? 나는 악을 선으로 갚고 있는가? 나는 내 자신에 대해서 승리하고 있는가?

13. 나는 죄를 미워하며 증오하고 있는가? 얼마나 많이? 가장 작은 죄에 대해서도 강력한 증오심을 가지고 대처하는가? 나는 죄인은 사랑하지만, 죄를 미워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본을 따르고 있는가?

14. 나는 영혼 구원 사업에 투신하고 있는가? 영혼을 구원하는 사업이 나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큰 관심을 끌고 있는가? 지금까지 그리스도 예수 앞으로 몇명의 영혼을 인도하였는가?

15. 마지막으로, 나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대가로 치르면서 값으로 산 바 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가? 나의 몸과 마음 전체가 그리스도께 속하였다는 사실을 인정하는가?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린도전서 10:31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고린도후서 1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