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주님 한 분만으로


    때때로 어두운 세상에서 눈을 돌려 마음속에 주님의 모습을 그려봅니다.

    쓸쓸한 강변에서 조국의 막연한 미래가 슬퍼 모래알만 세던 에스겔이 주님을 본 후, 온 세상을 두른 당신의 빛으로 즐거워 했듯이, 절망의 어둠 속에서 낙담하던 이사야가 빛나는 주님의 모습을 본 후, 가슴 벅차오르는 희망과 환희로 기뻐했듯이, 오늘 어두운 이 세상에서 눈을 돌려 마음의 눈으로 당신을 봅니다.
    그러면 주님은 늘 맑고 아름다운 눈을 가진 모습으로 다가오십니다. 재판정의 뜰에서 뻔뻔스럽게 당신을 부인하는 제자 베드로를 조용히 바라보시던 온유한 사랑의 눈빛... 분노하거나 정죄하는 대신 부드러운 용서를 담아 쳐다보시던 당신의 무한한 동정의 눈빛은, 완고한 제자의 마음을 완전히 녹이고도 남음이 있었습니다.
누구든지 한번 바라보기만 해도, 가슴에 평안의 물결이 가득 차오르도록 만드는, 그런 깊고 그윽한 눈빛을 가지신 주님이시여!... 오늘도 우리를 응시하고 계시는 그 자애로운 눈빛을, 그리고 우리의 고통에 함께 우시는 자비로운 눈빛을 가지신 당신의 모습을 마음에 그려봅니다.

    때로 세상의 시끄러운 소음에서 귀를 돌려 주님의 아름다운 목소리에 귀 기울여봅니다. 괴로운 지상생활 동안 자주 하늘의 노래를 부르시며, 기도와 노래로 하늘과 교통하셨던 당신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감미로운 멜로디는, 피곤한 사람들에게 원기를 주고, 마치 악한 천사들을 쫓아버리는 향연처럼 주님이 계신 장소를 향기로 채웠습니다.
불쌍한 사람이나 병자를 만날 때, 당신의 입에서 발해지던 친절한 음성은, 영혼을 진정시키는 향유처럼, 회복시키는 구원의 치료제처럼, 고통당하는 영혼의 마음에 발라졌으며, 형편없고, 희망이 없어 보이는 사람들에게 들려 주시던 보증의 말씀은, 치유하는 은혜의 샘물처럼 그들의 가슴을 소망으로 적셔주었습니다.
낙망하고, 병들고, 시험에 빠진 사람들을 보실 때마다 부드러운 동정의 말씀을 하시던 주님... 그들의 무거운 짐을 항상 나눠 지시고,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에 대하여 말씀해 주시던 주님이시여!... 오늘도 우리를 치료하시고, 위로해 주시는 주님의 아름다운 음성을 듣기 위해 귀기울여 봅니다.

    때로 무정한 사람들에게서 마음을 돌려 동정하시는 당신의 귀를 생각해봅니다. 주님의 귀에 들려지는 어떤 얘기도 무시당하는 일이 없고, 어떤 사연도 주님의 관심을 끌지 않는 것이 없으며, 주님의 귀에 털어놓은 어떤 비밀도 결코 누설될 염려가 없습니다. 아무리 산더미 같은 근심이라도 주님의 귀에 쏟아놓으면, 작은 모래알되어 사그라져버리고, 아무리 쓰디 쓴 고통이라도 주님의 귀에 털어놓으면, 마실만한 잔으로 변합니다.
    아무리 보잘것 없는 사람의 간청도 들어주시며, 아무리 먼 곳에서 드리는 작은 아이의 기도 소리도 들으시는, 항상 귀를 크게 열고 계시는 주님이시여!... 오늘도 심령을 압박해오는 슬픔을 주님의 귀에 쏟아 놓으며, 들어도 또 들어주시는 주님의 인내와 사랑에 감사해봅니다.
    때로 외로운 시간을 가로질러 하늘로 시선을 향합니다. 그러면 이루어질 수 없던 소망으로, 어그러진 약속으로 암담하게 느껴지던 세상은 다시 견딜만하게 되고, 당신의 임재는 모든 것을 이기게 합니다. 그리고 사별과 고통과 고난의 생애조차도 당신의 황홀한 임재 앞에서는 환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을 또 다시 배웁니다.
성난 파도를 잔잔케 하시고, 거품이 이는 파도 위를 걸으셨던 주님... 병든 자를 고치시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하셨으며, 죽은 자를 살리셨던 주님... 그처럼 자주 축복하시기 위하여 펴시던 당신의 손, 사랑의 봉사로 피곤할 줄 모르던 당신의 발, 전체가 사랑스러우신 주님... 상처 입은 한 마리의 새를 살리려고 몸을 굽히신, 능력으로 여러 세계들을 붙드시던 사랑의 주님이시여!...
    연로한 사람이나, 슬퍼하는 사람이나, 죄 짐을 진 사람이나, 순진한 기쁨 속에서 즐겨 노는 어린이나, 숲 속의 작은 피조물들이나, 무거운 짐을 실은 참을성 있는 짐승이나를 막론하고, 세상은 모두 당신이 함께 계심으로 행복합니다. 주님 한 분만으로 온 세상은 행복합니다.

    때로 이 땅에 오시기 전의 주님의 모습을 생각해 봅니다. 별세계를 움직이시며, 하늘 세계와 우주를 다스리시는 위대한 하나님이셨던 주님!... 그러나 인간을 위한 당신의 사랑은, 그렇게도 놀라운 신성에 인성의 옷을 입게 만들었습니다.
    주님은 이 땅에 계실 때도 하나님이셨지만, 신의 형상을 벗어버리고 초라한 사람의 형상을 입으신채, 땅위를 걸어 다니셨습니다. 영광과 위엄을 버리시고 궁핍한 가운데 사람들 사이를 다니면서 축복을 뿌리셨던 주님이시여!...
    병든자를 고치시고, 죄인들을 살리시는 당신의 사명을 다하려고 다니실 때, 주님께 축복을 비는 목소리는 별로 없었고, 세상의 위대한 사람들은 당신을 무시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렇게도 위엄있는 하나님이셨건만, 지상에서 주님을 믿거나 인정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습니다. 주님을 두른 분위기는 찬양의 노래 대신 죄와 저주로 오염되어 있었고, 비천함과 궁핍함이 당신의 운명이었습니다.

    때로 이 세상에서 주님께서 가지셨던 초라함과 하늘에서 가지셨던 영광의 풍성함을 대조해 봅니다. 주님을 멸시하던 이 세상의 조롱의 목소리와 하늘의 불멸의 존재들의 입술에서 쏟아져 나오던 풍성한 찬양의 소리를... 주님을 경배하는 찬양에 참여하던 수 많은 하늘 거민의 노래소리와 주님을 정죄하던 죄많은 제사장들의 비웃음을...
그러나 주님은 그 하늘의 아름다움과 영광을 이 땅의 치욕과 수치로 바꾸셨습니다. 초라한 우리 인간들을 하늘 왕의 자녀로 만드시기 위해... 그리고 가난한 우리로 하늘의 부를 누리게 하시기 위해...
    그러나 무엇보다 우리를 놀라게 한 것은 주님께서 죽을 수 밖에 없는 운명을 취하신 것입니다. 그 위대하신 신성으로 죽음이 지배하는 곳에 들어가지 않을 수도 있으셨건만, 우리를 위한 당신의 사랑은 자원해서 생명을 포기하게 만들었고, 세상의 죄를 담당하신 당신의 거룩하신 영혼 위에 밀려온 형벌을 견디게 하였습니다. 인간을 영원히 죽지않게 하시기 위해 귀한 생명을 희생제물로 내놓으신 놀라우신 사랑의 구주시여!...

    때로 당신의 놀라운 겸손을 생각해봅니다. 매 발걸음 마다 수치와 부끄러움이 따를 것을 아셨지만,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계획에 착수하신 것은, 정죄를 받아 신음하는 우리들의 죄를 속하기 위해서는, 당신의 몸을 낮추셔야 한다는 것을 아심으로 하신 일이었습니다. 영원하신 말씀이 육신이 되기를 제안하시고, 하나님이 사람이 되시기를 동의하시다니!...
    그러나 주님은 거기서 더 낮은 자리로 걸어 내려 가셨습니다. 순결하고 거룩하고 흠 없으신 분이 범죄자로 헤아림을 받으셨으며, 지극히 높은 자리에서 숭배받으시던 분이 높은 존귀의 자리에서 걸어내려와 멸시와 천대를 받으셨습니다.
    한걸음 한걸음 자기를 낮추어 모욕과 비난과 참소와 능욕을 지시고, 마침내 죽기까지 하신 놀라운 구세주시여!... 십자가를 참으시고,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시며, 깨어진 율법의 요구를 온전히 충족시키기 위하여 치욕스러운 죽음을 당하게 만든 것... 그것은 우리를 향한 당신의 사랑의 위대한 힘이었습니다.

    때로 교만한 우리들을 돌아 봅니다. 업신여김을 받으면 보복하고 싶어하고, 무시를 당하면 상처받은 자존심으로 분해하는 어쩔 수 없는 인간들인 우리들을... 무슨 일을 당할 때면 마치 아무 수치나 치욕을 당해서는 안될 사람같이 교만하게 머리를 드는 우리들을...
만일 우리들이 주님의 삶과 고난과 치욕을 매일 조금이라도 명상한다면, ‘자기를 조금이나마 높이려는 마음을 가질 수가 있을까, 자기를 낮추시되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지점에까지 자신을 낮추신 당신을 뵙고도 그렇게 교만이 우리 마음속에 머무르도록 내버려둘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해봅니다. 그렇게 자만스런 우리의 모습을 부끄러워하며...

    오늘 놀라운 하늘의 선물을 생각해봅니다. 아낌없이 당신을 쏟아부으신 그 사랑을 생각해봅니다. 죽음보다 더 강했던 그 사랑을...
    오늘도 세상은 당신의 은혜의 바다로부터 밀려오는 사랑과 친절의 조수로 인해 순결해 집니다. 오늘도 암흑과 의심과 낙담의 그늘을 가르며 비치는 당신의 빛으로 세상은 밝아집니다. 더 이상 쏟아 부을 수 없는 하늘의 보화를 인해 세상은 축복을 받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열어 사망의 지평선 넘어 환희와 축복의 바다를 보게 하시고, 우리의 눈을 열어 실망과 실패의 잔재에서 하늘의 섭리와 조화를 보게 하시며, 음울한 죄의 침잠의 늪에서 우리를 건져 올려 하늘의 생기와 찬란한 영광으로 빛나게 하시는 주님이시여!...
    오늘도 주님 때문에 세상은 존재합니다. 오늘도 주님의 죽음 때문에 우리가 존재합니다. 어두운 죄의 심연을 넘어 이 땅에 오신 사랑의 주님이시여!...
주님 한 분만으로 세상은 행복합니다. 주님 한 분만으로 우리는 행복합니다.

 

권두언


강병국 목사

    한 소년이 미술관에서 십자가에 달려 계신 예수님의 그림을 한참 들여다 보고 있더니 아버지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습니다. “아버지 ! 저 사람은 무슨 이유로 저렇게 처참하게 죽어 가야 했나요?”

    아버지에게서 자세한 설명을 듣고 난 이 소년은 그 인상 깊은 그림을 잊을 수가 없게 되었는데, 그가 바로 모라비안 형제 교회를 세워 경건한 신앙 운동을 일으켰던 진센돌프 백작이었습니다.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이 땅에 성육신 하여 오셨고, 또한 우리에게 모본이 되시기 위하여 하늘 아버지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하신 생활을 사셨으며 드디어는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어 중보의 사업을 하시기 위하여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인류의 구속 사업을 끝마치시기 전에 온 우주 앞에서 합당한 심판을 이루신 후에 의인들을 데려 가시기 위하여 이 땅으로 다시 재림하여 오실 구세주 예수님! 우리는 그 분에 대하여 아주 자세하게 알 수 있기 위하여 유심히 바라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인류의 유일한 소망이시며 우리가 가장 익숙하게 잘 알아야 할 대상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번 호는 예수 그리스도의 여러 가지 직분들에 대하여 연구하는 지면들로 할애하였습니다. 예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어떠한 일들을 하셨으며 또한 현재 어떤 일들을 진행하시고 있는지에 대하여 우리는 확실하게 알고 있어야 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잘 알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실상은 확실하게 잘 모르고 있는 그리스도의 직분들에 대한 이번 연구는 여러분의 이해를 증진시켜 줄 뿐만 아니라 새로운 분야에 눈을 뜨게 하는 훌륭한 교재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깨닫게 하시는 은혜가 여러분들과 함께 하시기를 간절하게 기도합니다.

 

결혼을 앞둔 이들에게


봄바람은 추운 겨울을 빠져 나온 씨앗들에게 생명을 불어넣어 싱그러운 색상으로 들판을 수 놓고, 많은 이들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 사람들의 마음은 이미 차가운 눈을 녹인 그 햇살에 가슴을 열어 사랑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며, 모든 예식장들은 부푼 꿈에 결혼하는 젊은 남녀들로 여념이 없다.

이번 호의 가정 주제는, 젊은이들의 왜곡된 사랑관과 결혼관에 대한 그리스도인적 해결방안을 모색해 보았다. 부디 이 글이 주위에 결혼을 앞둔 많은 사람들뿐만 아니라 젊은 청년들에게도 전해져 올바른 결혼관을 갖는데 도움이 되기를 기도하는 바이다. - 편집실 -

제 1 부 ­ 젊은이들의 애정관과 결혼관
(Young people’s outlook on love and marriage)

사랑, 사랑, 사랑

    요즘 젊은이들의 유행가 가사를 들어보면, 대부분의 가사들이 “사랑”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여러 형태로 변화시켜서 멜로디에 넣어 부르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TV에 나오는 드라마나 주말연속극 등의 내용도 온통 사랑을 주제로 한 것들로, 사랑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며, 사랑 때문에 고통 당하거나 행복해 하는 것들이다. 요즈음 젊은이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사랑 때문에 살고, 사랑 때문에 결혼하며, 사랑 때문에 헤어진다”는 말을 하곤 한다. 조금 더 극단적으로는 “사랑 때문에 죽는다.”라고 까지 말한다. 그러면 먼저 현시대의 젊은이들이 그렇게 외쳐대는 사랑과, 결혼관에 대해 잠깐 살펴보자.

신세대의 사랑과 결혼관

    요즘 사람들은 집에서 간단히 할 수 있는 인스턴트(Instant)식품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인스턴트제품은 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바빠진 현대인들이 단시간에 손쉽게 조리할 수 있고, 저장이나 보존도 간단하며, 수송·휴대가 편리한 식품으로서 즉석에서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말한다. 이 인스턴트식품은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지만, 여전히 우리 가정의 식단을 채우고 있다. 만일 이 글을 읽는 독자 여러분이 이어폰을 끼고 흥얼거리면서 공부하고, 밥 대신 라면이나 피자 등을 좋아한다면 여러분도 이미 인스턴트세대와 호흡을 같이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의 공통적인 성격은 참을성 없고, 너무 소심하며 어른이 꾸중하면 노여워하고 반발할뿐더러 쉽게 좌절한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러한 인스턴트란 말을 사랑이라는 단어와 합성해서 만든 “인스턴트 사랑”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의 뜻은, 일회성의 잦은 만남과, 너무 쉽게 사랑에 빠져버리고, 너무 일찍 증오하며, 가볍게 잊어가는 현대 젊은이들의 사랑을 꼬집어 만들어진 말이다. 그들은 너무 쉽게 만나며, 쉽게 빠지고, 쉽게 헤어진다. 우정도 인스턴트 우정이요, 사랑도 인스턴트 사랑을 한다. 냄비처럼 뜨거워졌다가 냄비처럼 쉬 식는다. 끈기와 인내가 이들에게서 사라진 지 오래고, 이들은 이기적이요 자기 중심적 사고를 지닌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이들의 결혼관은 어떠한가?
    근래 들어 TV방송이나 여러 다른 매체들을 통해 우리에게 들려오는 많은 이야기들 가운데 하나가 “혼전 동거”라는 말이다. 이러한 말은 TV드라마나 연속극들을 통해서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결혼하기 전에 살아보자”라는 말이 젊은이들 사이에 빠르게 유행병처럼 퍼지고 있으며, “기성세대들의 결혼에서 오는 불행을 최소한 줄여보자”라는 그들의 생각은, 급기야 “결혼 전 동거”라는 근시안적(近視眼的)인 해결책을 내어 놓고 젊은이들의 동조를 얻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서로 사랑하는가?”라는 질문에 그들은 “물론, 서로 사랑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사랑이 우리를 끝까지 결속시킬지는 아직 모른다.”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사랑하지만 살아보고 결혼한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정욕만을 만족시키며,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아무 책임감 없는 “인스턴트 사랑”의 결과인 “인스턴트 결혼”으로 살고 있는 것이다.

급증하는 이혼율

    요즘 급증하고 있는 한국의 이혼율은 세계에서도 한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가 되고 있는 것을 보면, 우리 사회의 도덕관에 커다란 문제가 있음을 누구나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실정이다. 이혼율이 갈수록 높아지면서 한해 이혼건수가 결혼건수의 절반 수준으로 늘어났다. 통계청이 발표한 2002년 혼인ㆍ이혼통계 결과에 따르면 혼인건수는 30만6,600건, 이혼건수는 14만 5,300건으로 집계됐다. 하루 평균 840쌍이 결혼한 반면 398쌍은 갈라선 셈이다.
    문제는 이중 인스턴트세대인 20,30대 신세대 부부의 합의이혼이 크게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요즘 신세대 부부들은 어차피 헤어지기로 작정했으면 골치 아프게 굳이 누구의 잘잘못을 따지지 않으며, 위자료 등을 대강 결정한 뒤 빨리 헤어지는 것이 서로를 위해 좋다는 속전속결식 사고방식 즉, 인스턴트문화에 길들여져 있다. 그래서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될 때까지 평생을 동고동락하겠다는 결혼서약은 이들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이혼 사실에 대해 눈물을 흘리거나 후회하지도 않으며, 이혼 자체를 충격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 같다. 그래서 헤어질 때도 서로 행복 하라고 간단한 인사말을 나누고 곧 헤어진다. 이들이 그렇게 하는 것은 결혼을 일종의 계약으로, 조건이 맞지 않으면 언제든지 쉽게 파기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인 듯 하다.

    세상이 변해가면서 결혼의 의미도 변질 되고 있다. 결혼이란 단순히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결합 외에도 가족과 사회에 대한 막중한 책임과 의무가 뒤따르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급증하는 이혼율, 신세대의 왜곡된 사랑과 결혼에 대해 어떠한 그리스도인적 해결 방법을 발견 할 수 있을까?

참과 거짓의 차이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 4:7,8).” 우리는 여기서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속성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지구역사이래로 하나님께서 천연계를 통해, 또한 온 지구의 역사를 통해 보여주고 계신 사실이며, 현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로 보여진다. 그렇다면 인내와 의무를 수반하는 참 사랑은 어떻게 왜곡되었는가?

    요즘 통신문명의 발달로 예전에는 수일씩이나 걸리면서까지 주고받았던 편지가, 전화 다이얼만 누르면채 몇 초도 지나지 않아 지구 반대편까지도 순식간에 연결해 주는 시대에 살고 있다. 또한 전화뿐만 아니라 인터넷 E-mail을 통한 정보의 교류로 그 어느때 보다 신속한 연락을 주고 받을 수 있다. 인스턴트세대에게는 더 없이 좋은 환경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문명의 발달은 사람들에게 이익뿐만 아니라 여러 해악들을 같이 겸하고 있다. 특히 수많은 젊은 남녀들은 저마다 일반전화 또는 휴대전화, 인터넷 등을 통해 자기의 이성친구들에게 밤 늦도록 아니, 새벽이 되기까지 통화하며 그들의 사랑을 속삭이고 있다. 어디 이뿐인가? 그들은 E-mail 또는 컴퓨터 채팅을 통해서 수시로 만나며 서로의 은밀한 밀어를 주고 받는다. 또한 그들은 그들의 이야기를 누가 듣지 못하도록 방에 문을 걸거나 또는 아무도 방해할 수 없는 곳에 자신을 두어 그들만의 은밀한 담화를 주고받는다. 그렇다면 이런 일들이 청년들에게 끼치는 영향은 어떤 것인가?

사랑이라는 가면을 쓴 감정

    근래 유행하는 풍조는 청년 남녀들을 이성에게 쉽게 빠지게 하여 모든 일상의 의무를 외면하게 만든다. 그들은 진지하고 중대한 문제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 가치 없고 경박한 것들로 밤늦게까지 불을 밝히며, 마치 마법에 걸린 것처럼 열중한다. 청년들은 이렇게 밤 시간을 낭비 함으로 건강과 존절의 법칙을 범한다. 특히 악한 천사들은, 밤 시간의 대부분을 구애하는데 바치는 사람들을 주시하고 있다. 왜냐하면 밤 시간은 남성뿐 아니라, 여성들의 마음에 감정의 호소력을 가장 손쉽게 넣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요즘 청년들은 나름대로의 철칙과 노하우를 가지고 이성의 감정에 열렬하게 호소하고 있다. 그들은 손짓, 눈짓, 스킨십 등을 통해 더욱더 이성의 마음을, 감정과 충동으로 부채질한다. 심지어 신실하다고 하는 청년들일지라도 이 일에 있어서 만큼은 사단에게 완전히 굴복된 것처럼 보인다.
    젊은 청년 남녀들이 괜찮은(?) 상대들만 보면 유혹하고자 하는 충동을 은밀히 감춘채, 자신의 과거의 일들로부터 우습고 하찮은 얘기까지 그들의 감정을 섞어 말해가며 새벽이 맞도록 시간을 보내는 것을 본다. 이것은 절대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결단코 감정이 아니다. 그들은 “그냥 좋은 친구”라는 어설픈 친구설정을 정해놓고, 낭만적이요 사랑으로 번민하는 감상주의와 신앙을 혼합하여 빛으로 가장한다. 그것은 뱀이 하와에게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라는 말처럼, 마음에 부담을 주지 않도록 교묘히 그물을 짜 놓고 걸려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과 같다. 만일 청년들의 눈이 열릴 수 있다면, 한 천사가 밤중에 그들의 은밀한 말과 행동을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기 때문에 그들은 나중에 그에 대한 결과들을 책임져야 할 것이다.
    또한 사람의 마음을 희롱하는 것은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결코 작은 범죄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젊은청년들은 이성에게 좋아하는 태도를 보여서 그들의 애정을 구한 다음에는 그들의 길을 가고 그들이 한 말이나 끼친 영향을 완전히 잊어버린다. 새 얼굴이 그들을 끌면 그들은 전과 같은 말들을 반복하고 그 같은 정성을 바친다. 이러한 습관은 결혼 생활에도 나타날 것이다. 결혼이라는 굴레가 변심하기 쉬운 마음을 굳게 하고, 흔들려 요동하는 것을 확고하게 하며, 원칙에 진실하게 하지는 않는다. 깨끗하지 못한 생각은 깨끗하지 못한 행동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형태의 환경에 자신을 절대로 두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죄악의 모양을 띈다. 청년들은 이러한 형태의 연애나 구혼에서 단호히 피하며 자신들의 자존심을 잘 지켜야 한다. 여기에서의 자존심은 여러분의 콧대가 아니다. 만일 청년들이 오로지 하나님께 충성하려 한다면, 감정적 연애 같은 것이 눈을 가리워 하나님의 고상한 요구들을 식별하지 못하게 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도적질 하지 말라!”
    십계명 중에 “도적질하지 말지니라”는 말씀은 친히 하나님의 손가락이 돌비에 쓰신 것이다. 하지만 애정에 대한 얼마나 많은 은밀한 도적질이 행하여지고 있으며 또 용인되고 있는가! 이성과 책임질 수 없는 교제를 하며 순수한 그들의 마음을 빼앗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행위가 아니다. 이것은 십계명을 어기는 일이며, 그들의 정신적, 도덕적 순결까지도 범하는 것이 된다. 성경은 온갖 종류의 부정직을 정죄한다. 이러한 인정될 수 없는 방법은 하나님께서만이 그 총량을 아시는 대단히 큰 불행의 원인이 된다. 너무도 많은 이들이 이 암초에 파선을 당하였다. 심지어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며 그의 생애가 성실함과 온갖 다른 문제에서는 총명을 보이는 이들이, 이 문제에 있어서 만큼은 무서운 실수를 범하고 만다. 많은 젊은이들의 생각은 이미 결혼과 애정이라는 마력에 휩싸여 버린 듯 보이며, 온갖 달콤한 감언이설과, 특별하게 대해주는 그들의 태도에 녹아버린 듯 보인다. 이로써 이들은 하나님과 멀어지는 관계를 갖게 된다.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게 하리이까”라는 질문에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시 119:9)라는 대답이 주어진다. 성경을 그의 안내자로 삼는 청년은 의무와 안전의 길을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 말씀은 흐릿하거나 불분명한 빛을 나타내지 않고 있다. 성경의 요구는 미지근하지 않다. 이 말씀은 생각과 말과 행동의 완전한 순결을 지키며, 진실되고, 기만을 행하지 않도록 가르칠 것이다.

요셉처럼 부르짖으라!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하나님의 충고를 받지 아니한다면 매 발걸음마다 안전함이 없다. 우리는 요셉처럼 우리의 마음을 지키여 한다. 만일 젊은 남자나 여자가, 하나님께서 인정하실 수 없는 방법들로 여러분에게 다가오거든,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창 39:9)라는 말로써 대처하라. 아무리 유혹이 강할지라도 죄의 핑계가 될 수 없다. 죄를 범하는 것은 여러분 스스로의 행위이기 때문에 그렇다.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자신의 뜻을 포기하고, 모든 태도에 있어 매우 신중히 한다면, 많은 유혹의 문을 닫을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육체적 순결뿐만 아니라, 정신적, 도덕적 순결까지도 요구하신다는 것을 기억하자! 애정을 이성(理性)의 지배하에 두어 마음의 띠를 잘 동이고 옳지못한 행동을 경계함으로, 사단이 바른길로부터 미혹하지 못하도록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께 늘 기도와 간구로 도와주심을 요청해야 한다. 청년들이여, 사랑을 맹목적으로 하지 말라. 만일 여러분의 생각이 바르다면, 부적당한 대상에 눈독을 들이지 않을 것이다. 한 번 유혹에 진 것은 여러분의 평생에 경향을 잘못된 방향으로 돌려 놓을 수 있으며, 여러분의 평판을 나쁘게 할 것이다. 청년의 시기는 한 번 밖에 누릴 수 없다. 여러분이 한 번 그 점을 지나치면 다시는 그 잘못을 고치기 위해 돌아올 수 없다. 품행을 정숙하고, 고상하고, 순결하게 유지하라!
    청년들은 참된 사랑이 무엇인지 알아야만 한다. 그리고 어떠한 남자와 여자를 선택해야 하며, 무엇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방법인지 면밀하게 살펴보아야 할 과제가 여러분들 앞에 있다.

제 2 부 - 하나님 안에서의 남,여 그리고 사랑

참 사랑(True Love)

    사랑은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귀중한 선물이다. 순결하고 거룩한 사랑은 심한 시련을 만나면 갑자기 시드는 그런 감정과는 전혀 다른, 고상하고 거룩한 하나의 원칙이다. 사랑은 하늘에 근원을 둔 식물이므로 이를 가꾸고 거름을 주어야 한다. 사랑은 강열하고 불꽃과 같은 맹렬한 욕정이 아니다. 정욕은 고집 세고 성급하고 무분별하고, 모든 규제에 대하여 반항하며, 그가 선택한 대상을 우상으로 받들 것이다. 그러나 참된 사랑은 조용하고 깊은 성질의 것이다. 진정한 사랑으로 행동하는 사람들은 모든 행동에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며, 성령의 지도를 따라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고, 우리의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한다. 그리고 겸손과 단순성, 진실과 덕의와 신앙이 혼인의 인연을 맺기까지의 모든 단계의 특색을 이룰 것이다. 이렇게 제어를 받는 청년들은 이성에 너무 열중하여 종교적 열심이나 신앙에 손해를 보는 일이 없을 것이다.

이러한 남성을 선택하라! (장래의 남편들에게 요구되는 자질들)

1. 신앙
    인생 반려자의 선택은 서로의 육체적, 정신적, 영적 복리를 위하여 가장 안전하게 해야 하는데 곧, 이웃 사람을 복되게 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그러한 남성을 선택해야 한다. 불경건하고, 태만하며, 신성한 것들을 비웃는 자를 피하고, 천한 말을 쓰며 단 한 잔이라도 술 마시는 일에 탐닉하는 자들과의 교제를 멀리해야 한다. 우리 젊은 청년들은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책임을 인식하지 못하는 자의 구혼에 귀를 기울이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남성은, 성경의 요구를 최상의 것으로 두어 사랑의 본질인 원칙을 희생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인정하실 수 없는 이기적인 연애와 결혼계획으로 주님을 욕되게 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모든일에 하나님을 그의 고문자로 삼아, 그의 지력과 마음의 애정을 사용함에 있어서 하늘의 지혜를 구할 것이다. 또한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의 발에 등불로 삼아, 그 말씀을 소중히 하고, 그 교훈을 마음에 두어 순종으로 나타낼 것이다. 그는 서로의 행복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기도로써 하늘의 승인을 얻으려 할 것이다.

2. 성품
    순결하고 남성적인 특징의 소유자를 선택하라. 진취적이며 정직한 남자,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남자만을 생애의 반려자로 맞도록 하라. 그 남자는 과연 존경할 만한 사람인지? 과거의 경력은 어떠하였는지? 그의 생애는 깨끗한지? 그의 사랑은 고상하고 품격을 향상하게 하는지, 아니면 단지 감정적으로 귀여워하는 사랑인지? 자기를 행복하게 할 품성의 특성을 가지고 있는지? 그 사람의 애정에서 참된 화평과 기쁨을 찾을 수 있는지? 면밀히 살펴보아야 한다. 또한 여성의 요구를 존중하고, 몸과 심령, 사상과 목적을 순결하고 거룩하게 보존할 수 있는 남자를 선택해야 된다.
    평화스럽고 행복한 결합을 희망하는 여인, 장래의 불행과 슬픔에서 피하기를 원하는 여인은 자신의 애정을 바치기 전에 이렇게 물어 보라. 나의 사랑하는 그이에게는 어머니가 계신가? 그 어머니의 품성의 특징은 어떠한가? 그는 과연 자기 어머니에 대한 책임을 인식하고 있는가? 그는 과연 어머니의 소원과 행복을 염두에 두고 있는가? 만일 그가 자신의 어머니를 소중히 여기지도 공경하지도 않는다면, 과연 그가 자기 아내에 대해서는 존경과 사랑과 친절과 관심을 보여 줄 것인가? 신혼의 기분이 지난 후에라도 그는 나를 여전히 사랑해 줄 것인가? 그는 나의 실수에 대하여 관대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비판적이고 오만하며 독재적이 될 것인가? 참된 애정은 많은 실수들을 간과할 것이다. 사랑은 실수들을 가려내지 않을 것이다.

3. 가사
    장래성이 있는 남편은 검소하고 부지런할 것이며가족을 부양할 수 있는 능력은 물론, 부모로서 자립하는 원칙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런 남성은 모든일에 성실함과 근실함으로 임할 것이며, 끈기와 인내로 앞으로 닥칠 생애의 고난들을 헤쳐나갈 것이다. 그는 연약한 아내에게 도움이 필요로 되면 기꺼이 도와주며, 힘든 가정의 일을 아내 홀로 감당하지 않게 해 줄 것이다. 우리 젊은 청년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가정을 돌보는 방법을 알고, 실천할 수 있는 남성을 선택해야 한다.

이러한 여성을 선택하라! (장래의 아내들에게 요구되는 자질들)

1. 신앙
    성경을 그의 고문자로 삼아 서로의 교제를 하늘로 향하게 하고,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더하게 하는 여인을 선택하라. 이러한 여인은 자신을 이 땅의 어떤 친구에게 주기 전에 먼저 그리스도에게 드려서 이와 충돌되는 것이면 어떠한 관계라도 맺지 않을 것이며, 가장 커다란 사랑의 물줄기가 하나님께로 향하여 하늘의 원칙을 따를 것이다. 그러한 여성은 자신의 개인의 편리와 만족을 위해 원칙들을 희생하지 않을 것이다.

2. 성품
    그대와 생애의 운명을 같이 하겠다고 생각하는 이의 온갖 정서를 저울질 해 보고 모든 성품의 계발을 주목하여 보라. 그대의 결혼 생활이 행복할 것인지 혹은 조화되지 않고 비참하게 될 것인지 신중하게 검토하라. 그 여자는 참을성 있고 근실한 사람이 될 것인가? 혹은 그대의 부모들이 바야흐로 의지할 강한 아들이 필요되는 때에 그대의 부모에 대한 보호를 중지하지는 않을 것인가? 그리하여 자신의 계획과 자신의 쾌락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남편을 그 부모들로부터 멀어지게 하여 그들로 애정 있는 며느리를 얻는 대신에 한 아들을 잃도록 하지는 않을 것인가?
    참된 온유함과 순결의 신성한 분위기가 두르고 있는 여인을 선택해야 한다. 순수하고 깨끗한 애정으로 이웃 사람을 복되게 하고 조물주를 영화롭게 하는 사람은 여자다운 정숙미를 가질 것이다. 고상한 행실의 표준을 견지하는 여인은 바람둥이 여자같이 행동하지 않고, 정숙하고 고상한 도덕적 품격을 보존하여 품위를 지킬 것이며 얌전함과 침착함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모든 일에 친절하고 유순하며 동정적이고 관용하며 겸손한 행동을 보일 것이다.
사랑과 결혼에 대한 생각에 정신이 빠져 버린 남자들은 마치 이런 문제들은 가치가 없는 것처럼 무시해 버리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런 문제들은 충분히 고려해야 할 것인데, 왜냐하면 이런 문제들이 그대의 장래의 생애에 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이다. 남자 청년들은배우자를 선택하는 일에 있어서 그녀의 성품을 신중히 살펴야 한다.

3. 가사
    젊은 남자는 생애의 부담을 나누어 지기에 합당한 여성, 그의 감화로 남편을 고상하게 하고 순화시키며 그의 사랑으로 남편을 행복스럽게 하여 줄 수 있는 내조자를 찾아야 한다. 이러한 사람은 이생에서의 나의 유용성의 영역을 확대시킬 것이다. 또 실제적인 일상생활의 모든 의무에 관한 교육을 받은 여성 이여야 한다. 그는 절약할 줄 아는 사람인가 혹은 결혼하면 허영과 모양내기를 좋아하는 마음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자기가 번 것뿐 아니라, 그대가 번 것까지를 다 써버릴 것이 아닌가? 이 방면에 대한 그의 원칙들은 올바른 것인가? 그 여인에게는 의존할 만한 그 무엇이 있는가? 하는 것들을 살펴 보아야 한다. 결혼을 위하여 준비하는 것은 교육의 중요한 부분이다. 가정의 안녕에 밀접히 관련되는 의무와 그 밖의 무수한 일들을 이해하는 것은 아내의 특별한 권리이므로 이런것을 잘 아는 여성을 선택해야 한다.

** 생애의 결합에 있어서 서로간의 애정은 각각 피차의 행복을 위하여 공헌을 해야 한다. 이것은 결혼을 앞둔 여러분들을 향하여품으신 하나님의 뜻이다. 우리는 하나로 연합해야 하지만 우리들중 어느 하나라도 그의 남성적 혹은 여성적 개성을 상대 속에 상실하지 않도록 해야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자 개성의 소유주가 되시기 때문이다. 결혼 생활의 행복과 성공은 두 편의 연합 여하에 달렸다. 많은 남녀에게 있어서 이생에서의 성공이나 실패, 그리고 오는 세상에서의 희망은 그들이 결혼하는 시각부터 시작된다.

제 3 부 -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결혼
(The marriage God recognizes)

“네 부모를 공경하라”

    다섯째 계명은 약속이 첨가된 유일의 계명이다. 그러나 많은 청년들이 이 계명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으며, 심지어는 애인의 요구에 의해 완전히 무시되는 일이 많이 있다. 어머니의 사랑을 무시하고 아버지께 염려를 끼치는 일이 많은 청년들에게 일어나고 있다. 이 문제와 관련된 한 가지 커다란 잘못은, ‘젊고 경험 없는 자들의 사랑은 방해받지 말아야 하며 그들의 사랑의 경험에 간섭해서도 안 된다는 생각’이다.
    청년들은 그들 자신의 욕망과 성향만을 고집하고 부모들의 조언과 판단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어떤 청년들은 부모의 소원과 희망에 대하여 조금도 생각지 아니하고 그들의 현명한 판단에도 귀 기울이려 하지 않는 듯하다. 매순간 관찰을 받을 필요가 있는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결혼 문제일 것이다. 다른 경험있는 사람들의 도움과 또 쌍방의 신중한 고려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것은 대다수의 청년들이 너무나 가볍게 취급하는 문제이다. 만일 청년들이 그들의 부모와 더욱 친밀했더라면, 만일 그들이 부모를 신뢰하고 기쁨과 슬픔을 터놓고 이야기하였더라면, 그들은 장래에 당할 많은 고민으로부터 구조되었을 것이다. 어느 길이 올바른지 몰라 난처할 때, 청년들은 부모 앞에 그들이 보는 그대로를 내놓고 부모의 충고를 구해야 한다.

경건한 부모와 상의한다면

    결혼문제는 주의 깊게 살피며 연로하고 경험 많은 사람들의 조언을 받아야 하는 중대한 문제이다. 성경을 고문으로 삼고 기도로써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간구해야 할 때가 있다면 그것은 두 사람을 일생 동안 연합시키는 한 발걸음을 내딛기 전이다. 만일 우리 청년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부모를 모시고 사는 축복을 받았다면 경건한 부모들의 충고를 구해야 한다. 희망과 계획을 부모님께 말하고그들의 인생 경험에서 습득한 교훈을 배우는 것은 지혜로운 일이다. 누가 경건한 부모처럼 자녀의 위험을 지적하기에 적당하겠는가? 누가 부모처럼 자녀들의 특이한 기질을 알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인 자녀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부모의 사랑과 시인을 모든 세상의 축복들보다도 귀하게 여겨야 한다.

이삭의 모본을 배우라!

    이삭은 그의 나이 40세 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기의 아내를 택할 때, 경험이 있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기의 종을 임명한 그의 아버지의 판단을 달게 받았다. 또한 성경에 나타난 대로 보아 그 결혼의 결과는 하나의 부드럽고 아름다운 가정의 행복을 말하는 장면으로 묘사되었으니, “이삭이 리브가를 인도하여 모친 사라의 장막으로 들이고 그를 취하여 아내를 삼고 사랑하였으니 이삭이 모친 상사 후에 위로를 얻었더라”하였다.
젊은 청년들이여,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부모를 여러분의 상담자로 모셔라. 결혼 문제를 놓고 기도하라. 모든 감정을 헤아려보라. 그리고 일생의 운명을 같이하려는 사람의 모든 성격의 발달 과정을 주시하라. 여러분이 이제 내디디려고 하는 걸음은 일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이므로 성급해서는 안 된다. 사랑은 하되 맹목적으로 사랑하지는 말라.

실수 없는 진정한 조언자를 모시라!

    혼인 제도는 사람에게 축복이 되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것이다. 그러나 사단에 의해 이것은 무서운 저주가 되는 그런 방법으로 악용되어 왔다. 대부분의 남녀들은 혼인 관계에 들어가는데 있어서 그들이 피차에 사랑하느냐가 그들이 해결해야 할 유일의 문제인 것처럼 생각한다. 너무나 많은 경우에 있어서 감정이 안내자가 되어 그 키를 잡아 청년들을 일종의 파멸로 인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젊은 청년들이 다른 어떤 문제 보다도 총명을 잘 나타내지 못하는 것이 바로 이 문제이다. 그들은 이 문제에 대하여 충고 받기를 거절한다. 결혼 문제는 청년들에게 마력을 발휘하는 것 같다. 젊은이들은 자신을 하나님께 복종시키지 않는다. 그들의 감각은 마비되고 그들의 계획은 마치 다른 어떤 사람의 방해를 받게 될까봐 두려워하는 것처럼 비밀리에 추진된다. 그러나 그들은 혼인 관계에 있어서 이보다 더 막중한 책임이 그들에게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냉철한 이성과 침착한 판단으로 깊이 생각해야 할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결혼 문제이다. 성경을 조언자로 삼을 때가 있다면 그것은 두 사람이 서로 결합하여 삶을 나누기 직전일 것이다.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고문으로 모시라. 기도하는 마음으로 그분의 말씀을 연구하라.

말씀을 온전히 순종함

    하나님께서 우리의 처음 시조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먹지 못하도록 금하셨을 때 그들은 불순종함으로 말미암아 재앙의 수문을 활짝 열었다. 우리의 유일한 안전의 길은 어떠한 희생을 치르고라도 하나님의 모든 요구에 복종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모든 것은 무한한 사랑과 지혜 안에 기초를 두고 있다. 만일 젊은 여자나 젊은 남자 중 하나가 하나님의 요구를 존경하지 않고 그들을 신앙과 연결시키는 모든 요구들을 돌아보지 않는다면, 결혼 후 서로의 요구를 존중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여러분이 선택한 사람과 자주 사귀며 살펴보되, 신앙적 특권과 기도의 시간을 희생하면서까지 교제하는 습관은 위험하다. 만일 그렇게하면감당할 수 없는 손실을 당할 것이다. 성경을 청년 시대의 자기 안내자이자 인생 행로의 등불로 삼는 청년은 모든 일에 있어서 성경의 교훈을 따를 것이다. 그는 설혹 결과적으로 커다란 희생을 치뤄야 할지라도 어떠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하여 율법의 일점 일획도 범하지 않을 것이다.

많이 기도하라!

    남녀가 결혼을 생각하기 전 하루 두 번씩 기도하는 습관을 가졌다면, 결혼을 앞두고는 하루 네 번씩 기도하여야 한다. 결혼은 이 세상과 내세 모두에 있어서 모두 그대들의 생애에 감화를 끼치고 영향을 주는 것이다. 신실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그의 행사를 인정하신다는 확신을 얻기 전에는 결혼에 대한 그의 계획을 추진시키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를 위해 선택하는 것을 원치 않고 하나님께서 그를 위하여 좋은 배우자를 반드시 선택해 주실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기도할 것이다. 허영과 감정적 본성이 마음을 지배하여 멸망으로 인도하게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온전한 마음과 최선의 애정을 요구하신다.

완전한 결합은...(A complete union)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세상에서 먹고 마시고 장사하고, 장가들고, 시집가는 것을 특권으로 주셨다. 그러나 이런 일들은 오직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행해질 때라야 안전하다. 우리는 다가올 영원한 세계를 염두에 두고 이 세상을 살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이 결합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이 될 것인지를 알기 위하여, 결혼 문제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주의 깊이 고려한 후에 비로소 혼인 관계에 들어가야 한다. 그런 후에 그들은 이 혼인 관계의 모든 특권에 대한 결과를 반드시 고려해야 하며, 또 거룩한 원칙이 모든 행위의 기초가 되게 하여야 한다. 혼인의 결연이 완전히 이루어지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하다. 인간의 사랑은 그 가장 긴밀한 결합을 하나님의 사랑에서 받아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지배하시는 곳에만 깊고 참된 무아의 애정이 있을 수 있다. 하늘은 성경에 주어진 지시에 일치하고자 열망하는 마음으로 성립된 결혼을 기쁨으로 주시할 것이다.

 

이럴 때 콜라를 사용하세요!


건강에 좋지 않아서 그렇지 알고 보면 콜라는 상당히 쓸모가 많습니다. 오늘은 콜라의 또다른 활용법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콜라는 화공약품보다 뛰어난 품질을 자랑 합니다. 미국의 여러 주의 고속순찰경관들은 2갤런 정도의 콜라를 차에 싣고 다닙니다. 그 콜라의 사용목적은 교통 사고가 났을때 길에 묻은 핏자국을 지우기 위해서 입니다.

콜라는 무엇이든지 녹여버립니다. 콜라의 주요 성분은 인산인데 그 PH치는 2.8입니다. 그 정도의 PH이면 보통 크기의 못을 4일 내에 녹여 버립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비프스테이크를 콜라로 채워진 대접에 넣어두면 2일동안에 그 고기 덩어리가 다 삭아버립니다.

콜라는 마술도 부립니다. 콜라를 담은 잔에 이빨을 담가 놓으면 48시간 내에 이빨이 없어집니다. 훌륭한 마술 입니다. (단 뚜껑을 닫은 채로 실험을 하셔야 합니다)

콜라는 청소용제로 사용하면 그만입니다. 변기의 때를 없애는 데는 콜라가 좋습니다. 변기에 묻은 때는 콜라에 함유된 시트르산이 말끔히 제거해 줍니다.
콜라는 금속의 녹을 제거하는데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자동차 앞뒤에 달린 녹슨 크롬 범퍼를 깨끗이 하려면 콜라에 적신 종이로 닦으면 녹이 깨끗하게 없어집니다.

자동차의 밧데리에 녹이 슬었으면 밧데리 케이블에 콜라를 부으세요. 거품을 내면서 녹이 없어집니다.

녹이 슬어 빠지지 않는 볼트가 있으면 콜라를 발라주십시요. 수 분 후면 그 볼트가 빠집니다.

콜라는 세탁소에서도 애용되고 있습니다. 기름에 쩔은 옷을 세탁 하려면 기름이 묻어 있는 곳에 콜라를 부은 후에 세제를 가하여 세탁을 하면 말끔히 씻어집니다.

콜라는 자동차 세차장에서도 이용합니다. 자동차의 앞 유리가 흐려졌으면 콜라를 발라 닦으면 깨끗하게 됩니다.

콜라는 엔진 세척제로서도 실력을 발휘합니다. 미국에서 콜라의 농축액을 운반하는 트럭들은 독극물에 적용되는 유해물질 카드를 소지해야 합니다. (이것은 정말 주의를 끌만한 일입니다. 화공약품 보다 뛰어난 독극물 수준이니 말입니다.)

콜라를 배달하는 트럭들은 트럭의 엔진을 깨끗이 씻기 위하여 콜라를 20년간 사용해 왔습니다.

콜라는 마약보다도 훌륭한 효과가 있습니다. 콜라 한 잔에는 약 50mg의 카페인이 들어있죠. 카페인은 몸 안에서 호르몬 계통을 혼란시키고 자극하여 사람을 흥분시킵니다. 또 사람을 산만하고 공격적으로 만들어 주기도 한답니다.

콜라는 살찌게 하는데도 탁월한 효능이 있습니다. 콜라는 설탕이 13%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콜라를 자주 섭취하는 것은 아이들의 지능을 떨어뜨리고 정서를 불안하게 만드는데 특효약 입니다. 설탕을 많이 먹으면 면역력이 떨어지고 뇌 대사가 불안정해지기 때문이죠.

콜라는 사람을 해칩니다. 한가지 예를 들면, 임산부가 콜라를 많이 먹으면 태아가 뼈 없는 아이나 약한 아기가 태어나죠. 지나친 양의 인산이 우리 몸에 있는 칼슘을 빼내기 때문입니다.

이 외에도 콜라의 효능은 많이 있습니다. 콜라를 많이 애용하십시요. 마시지는 말구요!!

1부 - 창주조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성경은 여러 곳에서 우리의 소망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되심을 증거하고 있다. 그리고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성경의 여러 저자들은 그리스도에 대해서 “영원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시라고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제일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에 관하여 말씀하실 때, 하나님과 당신 자신을 동일시하셨다는 것이다.
영원한 시대로부터 주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와 일체이셨다. 그분은 “하나님의 형상” 이요,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위엄하심의 모습이며, “그의 영광의 광채” 이셨다. 그가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이 영광을 나타내시기 위함이었다. 그는 죄로 어두워진 이 세상에 하나님의 사랑의 빛을 드러내시려고, 그리고 사단이 왜곡시킨 하나님의 모습과 품성을 사람들에게 올바로 나타내시려고 이 땅에 “독생하신 하나님”이 되어 오셨다. 또한 그는 하나님의 생각을 들을 수 있도록 한, 하나님의 말씀이기도 하셨다.
    세상은 하나님에 대한 오해로 말미암아 어두워졌다. 사단은 하나님을 마치 폭군이나 무서운 재판장 같은 분으로 생각하도록 사람들을 기만하였다. 세상이 다시 하나님의 올바른 사랑을 깨닫고, 그분께로 돌아가도록 하기 위해서는 사단의 기만적 세력이 깨어져야 했다. 음울한 죄의 그늘이 밝아지고, 하나님에 대한 오해의 구름이 벗겨져야 했다. 이것은 힘으로 할 수 없었다. 폭력을 사용하는 것은 하나님의 정부의 원칙과는 배치된다. 하나님은 사랑의 봉사만을 원하시므로... 사랑은 명령으로 강요될 수 없는 것이며, 또 그것은 힘이나 권위로 얻을 수 없다. 사랑은 오직 사랑으로만 일깨워진다. 사랑의 하나님을 알게 되면 자연히 그를 사랑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가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의 품성을 나타내 보여 주어야 했다. 그래야 타락한 인간들이 하나님을 알 수 있었다. 이 일을 하실 분은 온 우주에 오직 한 분밖에 없었다. 하나님의 사랑의 높이와 깊이를 아시는 분만이 그것을 드러낼 수가 있었다. 그분이 곧 그리스도이셨다. 그분이 바로 “독생하신 하나님” “임마누엘 - 우리와 함께 하신 하나님”이셨다.
    그러면 제일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여러 모습 중에서 그리스도 자신과 성경의 저자들이 언급하고 있는, 하나님 되신 그리스도에 대해 연구해 보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에 대해 하신 언급 

    예수께서 지상에 계실 때 직접적으로 “내가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시지는 않으셨지만, 간접적인 설명을 통하여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드러내셨다. 예를 들어 보자.

1. 요 14:8~9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 이 말씀은 하나님 아버지를 보여달라는 빌립의 요청에 예수께서 놀라시며 하신 대답의 말씀이다. 비록 인간들과 같이 세상에 계셨을 때에라도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셨으므로, 아버지를 보여주시라는 요청을 받으셨을 때에 나를 보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다. 이 대답은 곧 내가 하나님과 같다는 것을 강력히 시사하시는 말씀이었다.

2. 요 10:30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 유대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가르침과 또 그분께서 행하시는 표적과 기사를 보고, 그분이 그렇게 오래 전부터 기다리던 메시야가 아닐까 하고 마음 속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사단의 기만으로 눈이 어두어지고, 스스로의 의로 눈이 어두어진 그들은 진리되신 그리스도를 밝히 깨달을 수 없었고, 그분을 하나님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신이 “아버지와 하나” 라고 선언하셨을 때에, 예수가 참람되다는 이유로 돌을 들어 예수를 치려고 하였다.

3. 요 8:58

“예수께서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
* 이 성경절에 나오는 대로 예수께서 말씀하신 현 시제의 사용은 그리스도께서 계속적으로 존재하셨음을 의미한다. 그 분은 영원전부터 존재하시는 분, 곧 호렙산에서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모세에게 나타나셔서 그의 이름을 “나는 스스로 있는 자” 라고 선언하셨던 그분과 동일한 분이심을 보여주고 있다.

4. 마 26:63~64
“대제사장이 가로되 내가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말하였느니라...”
* 이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에 앞서, 대제사장과 산헤드린 앞에서 심문을 받으실 때, 대제사장의 물음에 답하신 말씀이다. 다른 질문에는 잠잠하셨던 주님께서 당신의 확실한 신분을 밝히셔야 했을 때에는 잠잠히 계시지 않았다. 이 대답이 그분의 죽음을 확실하게 하리라는 사실을 아셨지만, 이 질문은 민족의 공인된 최고의 권위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이름으로 이루어진 것이었고, 하나님 아버지와 자기 자신의 관계에 대한 질문이었기 때문에 잠잠히 계실 수 없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나님과 아들된 관계를 밝히심으로 예수께서는 삼위일체되신 당신의 신성을 증거하셨다.

 

요한이 말하는 그리스도

요한은 예수님의 가장 사랑받는 제자였다. 가장 가까이서 예수님을 보고 듣고 접촉할 수 있었던 요한이 그리스도에 대해서 증거하는 말을 들어보자.

1. 태초부터 존재하신 그리스도 ; 요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 1:1)
(참고; 미 5:2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
* 성경 요1:1 이 말하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에서 “말씀”은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그러면 여기에 언급된 “태초”는 어느 시점의 시간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창 1:1에 나오는 “태초” 보다 훨씬 그 이전의 시간을 의미한다. 헬라어 성경 본문에는 “태초에”(In the beginning) 라는 어구 중에서 the 에 해당하는 정관사가 빠져있다.
만일 헬라어에서 정관사가 사용되어졌다면, 그것은 어떤 특정한 시간의 지점이나 혹은 시작을 의미하는 것이 된다. 정관사가 없이 쓰여진 요 1:1절의 문맥에 들어 있는 “태초에” 라는 어구는 만물이 창조되기 전, 어떤 모든 시작이 있기 전의,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먼 시간, 즉 영원한 과거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세상 만물이 창조되기 이전, 영원한 태초부터 존재하셨던 분이시다.

2. 성부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그리스도 ; 요 1:1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요 1:1)
*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 성부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분이시다.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인격적으로 가장 가까이 아버지와 함께 계셨으며, 아버지 하나님을 가장 잘 아시는 분이요, 아버지를 가장 잘 대표할 수있는 분이시다.

3. 하나님이신 그리스도 ; 요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 1:1)
*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다.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은 본질에 있어서 똑같은 신성을 소유하고 계신다. 개체는 세분이지만, 신성의 본질에 있어서는 동일하시기 때문에 삼위일체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그리스도는 바로 제 2위의 하나님이시다. 그 예수님과 함께 삼년 반을 지낼 특권을 가졌던 요한은 힘있게 그리스도를 하나님이시라고 증거한다.

4. 창조주이신 그리스도 ; 요 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요 1:3)
* 예수 그리스도는 창조주이시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시는 사업에 그리스도께서는 성부 하나님과 함께 참여하셨다. 우주 가운데 그리스도께서 창조하지 않으신 것이 어느 하나도 없다. 그는 하늘과 땅의 모든 만물을 만드셨다.

5. 독생하신 하나님이신 그리스도 ; 요 1: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요 1:18)
*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을 인간에게 보여주시기 위하여 보내지신바 된 아버지 하나님의 독생자되신 분이시다. 그리스도는 성품과 목적에 있어서 하나님을 가장 닮으신 분이시며, 하나님을 가장 잘 나타내 보이실 수 있는 분이시다.

 

바울이 말하는 그리스도

신학적으로 뛰어나고도 정확한 지식과 문체를 가진 위대한 사도 바울은 하나님되신 그리스도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1. 하나님의 본체되신 그리스도 ; 빌 2:6, 히 1:3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빌 2:6)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 (히 1:3)
* 바울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본체이시며,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라고 말하고 있다.

2. 창조주 되신 그리스도 ; 골 1: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 바울은 예수께서 만물의 창조주이심을 말하고 있다. 그분은 보이거나 보이지않는 모든 만물을 지으셨고, 하늘에 있는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세들이나 권세들이 모두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존재하고 있음을 바울은 시사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만물이 존재하기 전부터 계셨고, 또한 만물의 창조주이시며, 현재에도 만물의 존재와 유지가 그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다.

3. 신성이 충만하신 그리스도 ; 골 1:19, 골 2:9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골 1:19)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골 2:9)
* 바울은 이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모든 속성을 타고 나신, 신성을 가지신 하나님이라고 증거하고 있다.

 

이사야가 언급하는 그리스도

1. 전능하신 하나님; 사 9: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사 9:6).
* 그리스도께서 초림하시기 오래 전에, 선지자 이사야는 이 말씀으로 이스라엘을 위로하였다. “전능하신 하나님”, 이 이름은 그리스도에게 알맞는 이름이다. 이 말씀은 단순히 이사야의 말이 아니다. 하나님의 영이 하신 말씀이다. 그리스도는 불가능한 것이 없으신 전능신 하나님이시다.

2. 창조주이신 그리스도 ; 사 40:25~26
“거룩하신 자가 가라사대 그런즉 너희가 나를 누구에게 비기며 나로 그와 동등이 되게 하겠느냐 하시느니라.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사 40:25~26)
* 여기에 이사야가 언급한 창조주가 누구인가는, 같은 장에 있는 다른 구절들의 말씀에서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이분 앞에는 “대로를 평탄케 하라”고 말하는 자가 있다. 또 강한 팔을 가지고 오셔서 상 주시는 분이시며, 목자와 같이 양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품에 안으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이분은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 이 외에도 성경의 여러 다른 저자들, 시편 기자나 또 다른 성경 여러 기자들이 그리스도를 창조주 되신 하나님이라고 증거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을 연구해볼 때, 우리가 믿고 있는 예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며, 모든 것을 이루실 수 있는 능력있는 분이시며, 또 우리를 창조하신 분이시라는 것을 알게 되며, 그 사실은 우리에게 너무나 큰 힘과 용기가 된다. 창조주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인간이 되셨다는 것은 얼마나 큰 희생이며, 경이이며, 사랑인가! 이렇게 창조주 되신 하나님을 구주로 믿고 섬길 수 있는 특권과 또 능력있으신 주님께서 우리를 돌보시고 계신다는 사실에 대해 감사와 찬송을 돌리자!

2부 - 인간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이 인간이 되어 이 땅에 오셨다. 죄로 잃어버린 이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위대하신 창조주께서 인성을 쓰셨다.

    그분께서는 한 팔로는 하나님의 보좌를 붙드시고 한 팔로는 이 타락한 지구를 붙드신다. 야곱이 꿈에 본 사닥다리처럼, 예수께서는 하늘과 죄로 인해 잃어버린 이 땅을 연결시키시는 사다리이시다.
    왜 하나님께서 꼭 이 땅에 오셔야 했는가? 그리고 왜 꼭 인간이 되셨어야만 했는가? 꼭 그래야만 우리 죄인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또 다른 어떤 방법이 없었을까?
    우리는 예수님과 그분의 십자가의 보혈을 믿고, 그분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정말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 하신 진정한 이유와 목적에 대해서 확실히 알고 있는가? 그래서 그것이 정말 우리의 신앙과 믿음을 확고히 하는 넉넉한 이유가 되고 있는가?

성육신의 신비

    하나님의 아들의 성육신은 부정할 수 없는 하나의 신비이다. 이것은 놀라운 신비이며, 우리가 영원히 생각하고 또 생각하여야 할 오묘한 주제이다. 사도 바울은 성육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딤전 3:16).
    사실 이 신비는 단순히 성육신뿐만 아니라 구속의 경륜의 모든 면과 관계된다. 우리가 인성 속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명상할 때에 우리는 인간의 마음이 이해할 수 없는 심오한 신비 앞에서 당황하게 된다. 그렇지만, 이 놀라운 문제가 심오한 신비 안에 있다는 사실이 이것을 이해가 불가능한, 금지된 주제로 만들지는 않는다.
바울은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옴으로 감추었던 것인데...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골 1:26,27)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는 또한 이 경건의 비밀이 “만국에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딤전 3:16) 되었다고 말하였다.
    그리스도의 인성은 우리의 모든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영혼을 그리스도께, 또한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묶는 황금 사슬이다. 우리는 인간이 되신 예수를 통해서만 하나님께 접근할 수가 있고, 또한 우리처럼 인간이 되셔서 사셨던 그리스도를 봄으로써만 진정한 그리스도의 삶이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연구의 주제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주제에 접근할 때에, 그리스도께서 모세에게 하신 말씀처럼 조심히 살펴야 한다.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3:5). 우리는 이 문제를 연구할 때에 배우는 자의 겸손한 마음과, 뉘우치는 마음으로 시작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가 연구하고자 하는 문제는 성육신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졌는가, 즉 그리스도의 신성이 어떻게 인성과 연합할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우리의 이해가 닿을 수 없는 먼 곳에 있는 신비이다. 우리가 연구하여 풀어야 할 문제는 왜 성육신이 이루어졌어야 했는가 하는 것이고, 어떤 종류의 육체 속에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셨는가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 문제의 핵심이다. 이 놀라운 주제에 대하여 함께 연구해 보자.

성육신의 목적

1. 대속의 죽음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대속하여 죽으시기 위해 성육신하셨다.
벧전 2:24 -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갈 1:4 -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을 때, 이 땅에는 완전한 조화와 평화가 있었다. 창조주의 손에서 나온 세상은 지극히 아름다웠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창조의 걸작품인 인류는 완전하고 거룩하며, 아름다웠다. 그런데 죄가 하나님께서 완전하게 지으신 것을 망쳐 놓았다. 인간이 하나님의 법을 불순종하고 사단의 말을 더 신뢰하여 죄를 짓게 되자, 이 세상과 인간에게는 사망의 형벌이 드리워졌다. 법을 어긴 사람은 죽어야 하는데, 그 이유는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법은 하나님의 사랑의 성품과 같으며 온 우주의 기초가 되는 사랑의 율법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계명은 영원할 뿐만 아니라 결코 변경할 수 없는 법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법을 어긴 인간은 영원히 죽을 수 밖에 없었다. 하나님의 깨어진 율법은 죄인의 생명을 요구하였고, 그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는 죄 없는 존재, 그리고 율법과 동등한 위치에 있는 분이 대신 그 죄의 값을 치르어 주는 일이 필요하게 되었다.
    인간이 죄를 지어 영원히 죽게되자, 하나님의 법을 어긴 인간이 살 길은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은 영영한 형벌의 죽음으로 들어가야만 하였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계명을 어긴 사람들을 그냥 그렇게 죽도록 내버려 두실 것이었는가?
    그 때, 영원한 사망을 피할 길이 없게된 죄인을 위하여 예수께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시기 위해 자원하여 나서셨다. 그러나 구속의 경륜은 아담이 타락한 후에 세워진 것이 아니었다. 이 경륜은 “영세 전부터 감취었다가... 알게 하신 그 비밀”(롬 16:25)의 계시였다. 태초부터 하나님과 그리스도는 사단이 반역할 것과, 그 반역자의 기만적인 권세를 통하여 인류가 타락할 것을 아셨다. 하나님께서 죄가 존재하도록 정해 놓지는 않으셨으나 죄가 존재할 것을 내다보시고 그 두려운 비상 사태를 위하여 대비책을 세워 놓으셨던 것이다.
    그리하여 사랑이 많으신 그리스도께서는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주시기로 자원하셨고, 무한히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는 놀라우신 결정, 곧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는 결정을 내리셨다.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영원한 형벌의 죽음을 대속하시려고 예수께서는 성육신 하신 것이다.

2. 우리의 모본이 되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모본이 되시기 위해, 그리고 우리를 어떻게 도와주실지를 알기 위해, 우리와 똑같은 본성을 입으시고 성육신 하셨다.

    거듭난 사람들의 모본이신 예수 그리스도: 예수께서 성육신하셔서 사신 생애는, 모든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의 모본이 되신다.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이는 주께서 진실로 천사의 본성을 입지 않으시고 아브라함의 씨를 입으셨음이라 ; 흠정역 성경)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 (히 2:16~18).
    바울은 앞에서 본 성경절 히 2:16 에 예수께서 우리와 똑같은 본성, 즉 천사의 본성이 아닌 아브라함의 본성을 입으셨다고 말하고 있다. 왜 예수께서는 우리와 똑같은 육체와 본성을 가지고 태어나셨을까? 그 이유는 우리를 더 잘 이해하시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우리와 똑같은 본성을 가지신 채, 죄가 주는 유혹과 시험과 고난을 받으시고, 그 죄를 어떻게 승리할 수 있는지에 대한 모본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그리고 시험받는 우리 인간들을 어떻게 도와주실지를 아시기 위하여 성육신하셨다.
    우리 구주께서는 인성 안에서 인간이 맞아야 하는 모든 시험들을 경험하셨고, 우리가 받는 모든 시험들을 당하셨으므로, 인류의 연약함과 우리의 부족함과 우리가 견디기 어려워 하는 시험들이 무엇인지를 아신다. 그는 인간의 마음의 자연적인 성향이 얼마나 강한지를 아시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시험 당할 때, 어떻게 우리를 도우실 줄을 아신다.
    어떤 이들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지금 우리들이 당하는 모든 시험들을 받지 않으셨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시험받는 것처럼 그도 시험받으셨다고 말씀한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히 4:15)
그리스도께서 받으셔야만 하였던 시험들은 심각한 현실이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만약 그가 실패하는 것이 불가능하였다면, 그는 인류가 경험하는 것처럼, 모든 종류의 시험을 받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시험들과, 그 아래 놓여졌던 고통들은 그의 고귀하고 죄 없는 성품과 대등한 것이었다. 도덕적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처럼 밀려올 때에 그는 피 흘리시기까지 저항하셨다. 그는 겟세마네에서 심한 정신적 고통으로 엎드려지셨으며, 그의 얼굴에서는 핏방울이 떨어져 땅의 풀들을 적시었다. 십자가상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아무도 알지 못하는 사단의 유혹의 엄청난 힘을 느끼셨다.
    이 세상에 태어난 어느 누구도 그리스도처럼 그렇게 무서운 유혹을 받았던 사람은 없을 것이다. 모든 인간 자녀들처럼 그는 사단의 시험을 맞으셨고 또한 저항하셨다. 광야에서 시험 받으실 때에, 그리스도의 인성은 우리들 중 어떠한 사람도 알지 못할 만큼 짓눌려졌다. 예수께서는 사단에게서 심한 유혹과 시험을 당하셨는데, 그것은 단순한 흉내가 아니라 실제였다.
    예수께서 받으셨던 시험의 종류는 우리가 당하는 것들과 같은, 식욕의 방종, 하나님께서 인도하지 않는 곳으로의 가려는 모험적인 시도, 그리고 이생의 환락적인 즐거움을 위하여 영원한 행복을 희생하며 세상의 신을 숭배하고자 하는 욕망 등, 두렵고 압도적인 시험들이었다. 이러한 시험들은, 그의 성품이 우리의 것보다 더 뛰어난 만큼 더 큰 힘으로 주어졌다. 그 위에 지워진 세상의 무거운 모든 죄악들과 함께, 그는 식욕과, 세상을 사랑함과, 옳지 못한 상상으로 이끄는 눈에 보이는 사물에 대한 사랑함에 관한 시험을 받으셨던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시험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죄를 짓지 않으셨다. 예수께서는 “나는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노라”고 하시며, 매사에 아버지 하나님을 의지하셨다. 그는 하나님과 아무도 뗄 수 없는 긴밀한 관계를 매 순간 유지하셨고,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 (히 5:7)다. 이런 기도와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 믿음과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애가 그로 하여금 모든 죄를 이기는 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우리도 예수님이 가지셨던 똑같은 믿음을 소유한다면, 죄를 승리하는 생애가 가능할 것이다.
    우리처럼 모든 면에서 시험을 받으셨으나, 죄가 없으셨다는 사실은 인간에게 하나의 신비로서 남아있기는 하지만, 그러나 확실한 것은, 만일 그가 인간의 본성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그는 우리의 모본이 되실 수 없었을 것이며, 또 만일 그가 우리의 본성에 참가하지 않으셨다면, 그는 우리처럼 시험을 받지 못하셨을 것이다. 그리고 만일 그가 시험에 실패할 가능성이 없었다면, 그는 우리를 도우실 수 없을 것이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시험에 관하여 말할 때에 이것을 확증하고 있다.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 (히브리서 12:4). 우리도 예수께서 보여주신 모본을 따라 죄를 미워하고,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육체의 소욕을 따라 가지 않으며, 주님께 우리의 의지를 굴복하고 순종하는 생애를 살자.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 어떤 사람들은 말하기를 예수께서 가지셨던 인성은 우리와 다른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처럼 죄를 승리할 수 없다고 말한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께서 단순히 인간의 모양만 취하셨다고 한다. 그 사람들은 로마서 8:3 에서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라는 표현을 예로 들며, 예수님은 겉모양만 우리와 같았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여기에 사용된 “모양으로” (likeness) 라는 말이 희랍어의 “homogeneity” (“동일한 종류의, 혹은 같은 절차로 이루어진” 등과 같은 뜻이 있음 - 편집자 주) 라는 단어에서 파생되었다는 것을 안다면, 이 말로 인해 걸려 넘어지는 일이 없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아담의 타락 전 본성과 타락 후 본성을 함께 취하셨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그리스도의 육체적 본성과 정신적, 도덕적 본성을 분리하는 것으로서, 악한 육체와 선한 양심을 구분하는 희랍의 이교도적 개념으로 우리를 이끌어 간다. 성경의 사상은 인간의 본성에 대한 이원론적 개념을 단연코 용납하지 않는다. 그리스도께서 타락한 육신을 취하셨기 때문에 그의 모든 본성 또한 타락한 인간의 본성과 같은 것일 수 밖에 없다. 바울이 이 단어를 사용한 예를 들어 보자.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빌 2:7). 아무도 이 성경절을 그리스도께서 사람과 다르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사용하지 않을 것이다.
    개신교의 유명한 신학자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본성이 우리와 같은 것이었음을 주장했다. 그 중 카알 바트 (Karl Barth), 에밀 부르너(Emil Brunner),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 오스카 쿨만(Oscar Cullmann), J.A.T. 로빈슨(J.A.T. Robinson)과 같은 20세기 후반의 신학자들이 공개적으로, 타락으로 영향을 받은 그리스도의 인성을 후원하고 있음을 우리는 유심히 보아야 한다.

    예수의 인성이 우리와 같은 것이라고 말한 신학자들

* 카알 바트(Karl Barth) ; 1934년 초에 출판된 기사를 통하여 이러한 가르침을 첫 번째로 동조한 사람이다. 그는 “진정한 신 그리고 진정한 인간” 이라는 그의 저서에서, 그리스도께서 “진정한 신”이었음을 확실히 밝힌 후, 히브리서를 비롯한 다른 바울의 편지서들를 이용하여 다음과 덧붙였다: “타락에 관한 사실에서 볼 수 있듯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나타내신 본성이 우리의 본성과 동등한 것이었다는 것은 구원의 진리를 연약하게 만들거나 불분명하게 만들어서는 안될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그리스도께서 정말로 우리처럼 되실 수 있었겠으며, 우리와 그가 어떤 관계를 맺을 수 있겠는가?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타락된 특징을 가지고 서 있다. 하나님의 아들은 우리의 본성을 가지고 있었을 뿐 아니라, 잃어버리신 바 되었고, 저주받은 상태 아래 있는 우리의 본성의 구체적인 형상 속으로 임하셨다. 그는 이 형상을 우리의 것과 다르게 만들거나 세우지 않았으며, 결백한 자로서 죄 지은 것으로 되셨고, 죄 없으셨으나 죄가 되셨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우리를 그가 우리와 연합한 상태에서 떨어지게 해서는 안되며, 이러한 이유로 그를 우리로부터 멀어지게 해서도 안 된다.”

* 에밀 부루너(Emil Brunner) ; 그는 그의 저서에서 이와 같은 결론에 이른다. “그(예수)가 여자로부터 태어나셨다는 사실은 그가 진실로 인간이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라고 말한 후, “그러나 예수께서 정말로 우리와 같은 죗된 인간이었는가? 그 해답은 성경에서 찾을 수 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죗된 육체 안에 보내셨다(로마서 8:3)고 말할 때에 예수의 진정한 인성의 전부를 말하였다.” 고 하였다. 그리고 “모든 일에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히브리서 4:15) 는 말을 인용하며, 부루너는 “그는 우리와 같은 인간이었다”는 사실에 동의하면서도 또한 “그는 우리와 같은 육체로 임하셨으나, 죄에 참여하지 않았음으로 우리와 같은 죗된 인간은 아니었다” 라는 사실을 동시에 인정한다.

* 불트만(Bultmann)과 쿨만(Cullmann) ; 불트만과 쿨만은 같은 주장을 했는데, 쿨만(Cullmann)은 빌립보서 2:5-8절에 관한 그의 주석을 통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종의 형체”를 취하시기 위하여 그는 먼저 인간의 형체, 즉 타락으로 영향을 받은 인간의 형체를 취하셔야만 한다. 이 의미가 바로 ‘사람들과 같이 되셨’ (7절) 다는 말의 뜻이다. 이러한 호모이오마티(homoiomati)적 이해는 완전히 합리적이다. 더욱이 그 다음 구절이 강조하는 것처럼, ‘인간’ 예수께서는 성육신 하심으로 완전한 ‘인간’의 상태를 받으셨다. 본질적으로 오직 하나뿐인 신-인이신 그분께서 그의 속죄사업을 이루시기 위하여, 그의 부르심에 순종하심으로 죗된 육신 안에 성육신 하신 천인(하늘 인간)이 되셨다.”

* J.A.T. Robinson ; 성공회 감독이었던 그는, 그의 바울신학 (Pauline Theology)에 나오는 “몸”의 이해에 대한 연구에서, 예수의 인성에 관하여 어떤 다른 사람들보다 더 확실한 의견을 제시한다. “이러한 말씀들을 강조하는 것은 꼭 필요하다. 그 이유는 기독교 신학이, 바울이 이 문제에 관한 복음의 위력을 소개하기 위하여 사용하고 있는 문구들을 이상하게도 받아들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동방 정교회, 천주교와 개신교 모두는 그리스도께서 타락하지 않은 인성으로 성육신 하셨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만약 이 문제가 성경적인 어휘로 제시되었다면, 우리는 두려워할 이유가 없으며, 모든 타락의 결과와 영향 아래 서 있는 인류를 그리스도께 귀속시킴에 있어서, 이것은 가장 확고한 기반이 될 것이다. 하여튼, 이것은 그리스도의 개성에 관한 바울의 견해이며, 이것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에 관한 그(바울)의 이해의 본질이다.”

* 토마스 F. 토런스(Thomas F. Torrance) ; 1956년 독일 Herrenalb에서 열린 세계 교회주의 운동 협의회 기간 중, 그는 말하기를 “하나님의 말씀은 그리스도가 우리의 타락한 인성(원죄 없이 잉태된 인성이 아닌)을 취하셨고, 이것을 거룩하게 하셨”다고 했으며, 또 “기독교회 안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가장 기초적인 진리는 이것인데, 곧 성육신은 우리의 타락하고 저속한 인성, 즉 가장 사악한 상태에 있는 인성 속에 있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취해진 조치라는 것이다. 성육신이란 뜻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타락한 인성, 곧 죄로 짐 지워진 실제적인 인류의 존재, 그리고 창조주로부터 이간되고 불화된 마음과 영혼 속에 있는 병든 인성을 취하셨다는 것으로 이해되어져야 한다. 이것은 처음 5세기 동안의 모든 초대교회 안에서 발견될 수 있는 교리였다. 그러므로 성육신은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의 죗된 본성의 구체적인 형태를 취하셨다는 것으로, 또한 인류를 육적이고 악한 마음으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가 바로 그 본성 안에서 죄를 심판하신 그 희생으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라고 하였다.

* 그 외, 앞서 열거한 20세기 신학자들 이전에도 이러한 사상을 가지고 있는 신학자들이 많았다. 해리 존슨(Harry Johnson)은 그의 저서에서 한 장 전체에 17세기부터 19세기까지, 그리스도께서 아담이 타락한 후의 인성을 취하셨다고 믿는 열 다섯명 이상이나 되는 선구자들에 대하여 열거하였다.

* 우리와 같은 타락한 인성을 쓰시고, 모든 시험을 이기신 우리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연약함을 아시므로 우리를 어떻게 도와주실 줄을 아시며, 우리를 체휼하시는(동정하시는) 분이시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어 이 땅에 오신 놀라운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더욱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며, 믿음과 신앙을 굳세게 하여 쓰러지지 않도록 하는 강한 활력제가 되고도 남음이 있지 않은가? 이 놀라운 성육신의 신비를 계속 명상하며 감사하자!

3. 우리로 신성에 참여하게 하시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셔서 이 땅에 오신 이유 중 또 하나의 이유는, 우리를 신성에 참여하는 (벧후 1:4 참조) 사람들로 만드시기 위해서였다. 그는 인간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끌어 그들을 죄의 속박으로부터 구출하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하여, 즉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들이 되도록 하시기 위하여 오셨다. 결과적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그의 신성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하여, 타락한 인성에 참여하셔야만 하였다.
    그는 죄 있는 육신의 모양 (롬 8:3) 으로 되셨으며, 죄 없는 삶을 사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사신 삶을 인하여, 모든 남녀들이 그의 힘과 가르침 아래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우리가 사단과 투쟁을 할 때에 그가 가지셨던 모든 도움을 우리도 이용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인성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붙드심으로 죄에 대하여 승리할 수 있었던 것처럼 인간 가족의 모든 구성원들은 이와 똑 같은 일을 행할 특권을 부여받았다.
    그는 인성이 신성에 참여할 때에도 할 수 없는 어떠한 일도 행하지 않으셨다. 그는 우리가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능력 외에는 자신을 위하여 사용하지 않으셨다. 인간들처럼, 그는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만을 사용하여 시험을 받으셨고 승리하셨다. 만약 그리스도께서 인간이 가질 수 없는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으셨다면, 사단은 이것을 중요한 문제점으로 들고나올 것이다.
    그리스도는 인간이 죗된 세상에서도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온 우주에 증명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셔서 우리처럼 모든 면에서 시험을 받으셨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이 어떠한 일을 하실 수 있는가를 보여주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던 것이 아니라, 모든 위험한 때에 인간을 도우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통하여 인간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보여주시기 위함이었다. 사람은 믿음을 통하여 신성에 참여하는 자가 되고, 그가 처한 모든 곤경으로부터 오는 모든 시험들을 승리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신성에 참여하는 자”가 되도록 하시기 위하여 오셨으며, 그의 삶은 신성과 연합된 인성은 죄를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셨다.

인간으로서 또한 신으로서

    성육신 하셨다는 사실이 예수께서 그의 신성을 포기하셨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는 그의 신성 위에 인성으로 옷 입으셨으며, 또는 그는 인성으로 그의 신성을 가리우셨다. 그가 인성을 취하셨지만, 그는 신이셨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그가 우리처럼 모든 면에서 시험을 받으셨고 그가 많은 죄악들로 싸여 있었지만, 그가 이 땅에 처음 오실 때부터 이로 인하여 더럽혀지지 않은 채 세상 앞에 서 있으셨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시험을 당하실 때는, 실제적으로 인간이 사용할 수 있는 그 힘을 통하여 시험을 저항하셨다. 그는 늘 하나님을 붙드셨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이와 똑 같은 도움을 가질 수 없는 남녀는 없다.
    인간의 연약함 속에 있었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서 천사들에게 부여하신, 인성보다 더 높은 능력을 가지고 있던 사단의 시험을 받으셨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인성은 신성과 연합되어 있었으며, 이러한 능력을 가지고 그는 사단의 모든 시험을 감당하실 수 있었던 것이다. 그분께서는 이러한 승리할 수 있는 능력을, 믿음으로 그분의 성품 속에 부여된 의를 받아들이는 모든 아담의 아들과 딸들에게 주실 것이다.

 

3부 - 희생 제물 되신 예수 그리스도

   
     성경에는 여러 곳에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말한 표현이 나온다. 왜 그리스도가 “양”으로 표현되어 나오는걸까? “양” 하면 독자 여러분의 마음에는 어떤 장면이 떠오르는가?

    사실 하나님께서 세우신 구원의 경륜에 있어서 그 근본은 우리의 죄를 해결하시고 용서하시기 위한 그리스도의 희생이다. 희생 제물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과 보혈을 통해서만이 우리의 죄가 속량될 수 있고, 죄로 인하여 생긴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재연합될 수 있게 된다.
    인간이 타락한 그날부터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세우신 그분의 놀라운 계획을 보여 주시려고 하셨다. 그것은 바로 희생 제사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어떻게 해결하시는지를 가르쳐 주시려는 것이었다. 창세기 3장에 보면,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가죽 옷을 만들어 입히신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다음 4장에 나오는 하나님께서 받으신 아벨의 제사 이야기를 미루어 봐서, 우리는 그것이 어린 양의 가죽옷임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인간이 범죄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양을 잡아 제사를 드리는 표상을 통해, 앞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메시야가 되어 이 땅에 와서 그들의 죄를 대신하여 죽음으로 그들의 죄가 용서받고, 그들이 구원을 받을 것을 가르치신 것이었음을 알게 된다.
    어떤 사람들은 성소 제도나 희생 제사에 대해 별로 알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소에서 드려지던 희생제물은, 유혈 희생이나 무혈 제물이나를 막론하고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표상했다. 그 희생 제물들은 어린양 되신 그리스도의 생애와 고난을 보여주고, 어린양이 어떻게 자기 삶으로 죄인들을 속죄하여 주는지를 설명하여 줄 뿐 아니라, 희생제물되신 그리스도의 품성의 특성과 인격의 본성과 그분의 봉사의 범위를 보여주므로, 그 희생 제물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은 영적으로 우리에게 많은 교훈이 될 수 있다.
    그리고 특별히 여기서 언급할 것은, 모든 희생 제물은 거룩하신 예수를 나타내었기 때문에, 그것이 짐승이었든, 새들이었든, 무엇이었든 간에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흠이 없”는 완전한 것이어야 했다. 그러면, 이제부터 희생 제물되신 그리스도를 표상하는 제물들과 그 의미에 대해서 간단하게 살펴보기로 하자.

희생 제물들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특성

*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에 있어서 여호와께서는 여섯가지 종류의 희생제물을 허용하시었는데, 그것들은 세 가지 동물과 세 가지 새들이었다. 곧, 길들여진 유순한 수소, 양과 염소, 산 비둘기와 집 비둘기, 그리고 때때로 산 참새 (레 1:2,4,10,14, 14:4) 들이 희생제물로 드려졌다.

1. 어린 양 ;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요 1:29).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 사 53:7)
온순하고 온유한 어린 양은 벌거벗은 죄인들을 덮도록 자신의 가죽을 주시고(창 3:20 비교), 양털을 의복으로(레 13:47), 육신을 음식으로 주신(삼상 25:18) 예수님, 곧 불평하지 않고 복종하며,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같이 저항하지 않는 예수님의 온유하신 특성을 대표한다.

2. 수 소 ; 때때로 “힘센 소” (시 22:12, 사 34:7)라고 칭하여진 황소는 가장 존중되고 값비싼 제물이었다. 뿔과 굽으로 상징된 이 동물의 힘은 “황소가 힘”을 발휘하여 멍에를 씌어(민 7:3), 밭을 갈거나(신 22:10), 곡식을 추수할 때(신 25:4), 많은 것을 얻어 내도록 한다. 항상 짐을 걸머질 준비를 하고 있고(시144:14), 기쁘게 희생적 봉사를 참을성있게 하는(시 29:6) 황소는 “첫 송아지” 로서, 소가 하루 일을 마칠 때에 항상 자기 목표점인 주인의 구유만을 바라보는(사 1:3) 것처럼, 끝까지 충성스럽게 하나님 아버지께 그리고 인간들을 위하여 충성한 예수 그리스도를 대표한다.

3. 염소 ; 이 동물은 성소 예식에서 인류의 죄짐을 짊어지는 속죄제로서 “위풍 있게“(잠 30:29,31)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 번제단으로의 길을 오시는 예수를 상기시켜 준다.

4. 비둘기 ; 스스로를 방어하지 못하는 비둘기들은 유순한 자(아 1:15), 순전한 자(미 10:16), 혹은 저항하지 않는 자의 모습을 묘사한다. 비둘기는 원래 하나님과의 화평과 화목의 전주자로서 사용되었고, 성령의 상징으로도 사용되었으며, 평생동안 같은 짝하고 살기 때문에 다정다감하고 헌신적인 사랑의 상징이기도 하다. 이 새들은 가난한 자들의 제물이었고, 유순하시고, 사랑이 깊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상징하기에 알맞는 제물이다.

5. 참새 ; 참새는 문둥병자들의 정결 예식에 사용되었다. 보잘것 없이 보이는 참새는 매일 하나님 아버지의 돌보심을 신뢰하며 감사한다. 이것은 하나님이셨지만 보잘것 없는 인간이 되신, “멸시를 받아서... 싫어 버린 바”(사 53:3)된 예수 그리스도를 표상한다.

희생 제물과 십자가

    희생 제사 중에 속죄제라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죄지은 자가 자기의 죄를 용서함 받기 위하여 드리는 가장 중요한 제사였다. 이 제사는 죄없는 어린양의 피가 우리의 죄를 속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실물 교훈을 통하여 죄인에게 실감시키는 제사였다. 이것은 제사장이 희생 제물의 속죄의 피를 성소로 가지고 들어가 휘장 앞에 일곱번 뿌리고 나서 중보 기도를 드림으로 죄인의 죄가 용서받도록 하는 제도였다. 이것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피를 흘리시고 대속의 죽음을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상징했다.

    죄를 한번도 지은 적이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보혈이 되어 우리의 모든 죄를 씻는 샘물이 된다. 법을 만드신 하나님의 죄 없으신 피가 우리 죄를 대신하여 흘려짐으로 우리가 다시 새로운 생명 가운데 살게 되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고후 5:1)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벧전 2:24)

    예수께서는 우리의 죄를 친히 당신의 몸에 지시고 담당하셨다. 그런데 어떻게 예수께서 당신의 몸으로 우리의 죄를 대신 지셨는가? 우리는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의 예수님의 고통에 대해 살펴 봄으로써만이 그것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 그 자체가 되시어 죄인이 자비가 섞이지 않는 심판을 지나가는 경험을 우리 대신 경험하셨다. 인간의 죄를 짐에 따라,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늘 아버지께로부터 분리됨을 느낄 때에 당한 말할 수 없는 고민에 대하여 우리는 희미한 개념밖에 가질 수가 없다. 그분은 타락한 인간을 위하여 죄가 되셨다. 하늘 아버지의 사랑이 그분으로부터 거두어짐을 느낄 때에, 그분의 고민에 찬 심령은 다음과 같은 비통한 말씀을 발하였다.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만일 할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영원히 신비로 남게될 영원한 사랑외에는 어떤 것도 그리스도로 하여금 하늘에서의 그분의 존귀와 위엄을 버리고 죄된 세상에 오셔서 그분이 구하고자 오신 자들에게 무시와 멸시와 배척을 받으시고 마침내 십자가 상에서 돌아가시도록 할 수 없었다. 십자가 상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이 그렇게 신속히 끊어진 것은 육체적 고난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짓누르는 세상 죄악의 무게와 하늘 아버지의 진노 때문이었다. 하늘 아버지의 영광과 유지하시는 임재가 그분을 떠났으며 절망이 그 흑암의 짓누르는 무게로 그분을 눌렀으므로, 그분의 창백하고 떨리는 입술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는 고통의 부르짖음을 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의혹까지도 운명 중에 계신 하나님의 아들을 공격했다. 그분은 무덤의 입구 너머를 보실 수 없었다. 밝은 희망은 그분에게, 그분이 정복자로 무덤을 나설 것과 아버지께서 그분의 희생을 받으실 것을 제시하지 않았다. 세상의 죄가 그 모든 두려움 가운데 하나님의 아들에게 절실히 느껴졌다. 죄에 대한 하늘 아버지의 불쾌와 그 형벌, 즉 죽음이 이 놀라운 흑암을 통하여 그분이 인식할 수 있었던 전부였다. 죄가 하늘 아버지의 목전에 너무 가증하므로 하늘 아버지께서 당신의 아들과 화해할 수 없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의 유혹을 그분은 받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복수가 죄인들에게 내려질 때 죄인들이 느낄 그 절망을 느끼셨다. 마지막 영영한 심판이 회개하지 않은 자들에게 이를 때에는 죽음의 휘장 같은 검은 절망이 그들 죄의식에 시달리는 영혼 주위에 몰려들 것이요, 그들은 그때 비로소 죄의 가증함을 충분히 깨닫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에게 주셨던 당신의 가납하심과 동의에 대한 확신을 이제 제거하셨음으로, 믿음과 희망은 그리스도의 숨이 끊어지는 고통 가운데서 흔들렸다. 그리하여, 그 때 세상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까지 그를 강건하게 하여 온 증거, 즉 하늘 아버지께서 그분의 수고를 가납하셨고 그분의 사업을 기뻐하셨다는 증거와 그분의 사랑의 증거들을 의존하셨다. 숨을 거두는 고통 가운데서 그분의 고귀한 생애를 마치면서, 그분은 오로지 믿음만으로 당신이 항상 즐겨 순종하던 하나님을 의뢰하셨다. 그분은 좌우편 어디에서도 명확하고 밝은 희망의 빛줄기로 격려를 받지 못하셨다. 모든 것이 짓누르는 흑암에 둘러싸여 있었다. 동정하는 천연계에까지 느껴진 그 두려운 흑암 가운데서, 구속주께서는 그 신비의 잔을 마지막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다 마셨다. 밝은 희망, 장래에는 그분의 것이 될 승리에 대한 확신도 얻지 못한 채, 그분은 큰 목소리로 부르짖으셨다.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 있어서 육체적인 고통은 고뇌의 작은 부분에 불과했다. 세상의 죄가 그분을 눌렀으며, 범하여진 율법의 형벌을 당하는 동안 하늘 아버지의 진노에 대한 깨달음이 그분을 눌렀다. 그러나 자신의 속죄로 영원한 삶을 누리게 될 인간 자녀들을 생각하시는 사랑과 기쁨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그 고통을 참으셨다.

    오! 얼마나 위대하고 놀라운 사랑인가!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위하여 영원히 죽어 없어진다고 해도 우리를 구하실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겠다는 죽음보다 더 강한 사랑을 나타내셨다. 그것이 바로 희생 제물되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다. 독자들이시여, 여러분들은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께 여러분의 마음을 모두 바치겠는가? 그리고 모든 죄를 버리고 그분의 발 앞에 엎드리어 다시는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죄를 반복하기 원치 않으니 힘을 주십사고 기도하려는가? 그리고 주님 뜻대로만 살기로 결심하겠는가?

    예수님의 고난의 장면을 예언한 시편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읽게 된다. “무수한 재앙이 나를 둘러싸고 나의 죄악이 내게 미치므로 우러러 볼 수도 없으며 죄가 나의 머리털보다 많음으로 내 마음이 사라졌음이니이다” (시 40:12). 우리의 많은 죄악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죄악이 되어서, 나의 죄악이 머리털보다 많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사라졌음이니이다”, 다시 말해서 심장이 터졌다는 예언의 말씀인 것이다. 우리는 우리를 위하여 희생 제물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생을 늘 생각하며, 회개하고 또 다시 죄를 범해 그리스도 예수를 다시 십자가에 못박지 않도록 늘 경계하며, 그분께 충성하는 사람들이 되자!

4부 - 목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 10:11,14,15)

    예수께서는 자신에 대해서 표현하실 때, 여러 가지 다른 표현으로 말씀하셨다. 그분은 당신 자신을 생명을 주는 신선한 물에 비유하셨으며, 또 생명의 근원이요, 자연과 인류에게 기쁨이 되는 빛이라고 말씀하셨다. 이제 예수께서는 요한복음 10장에서, 아름다운 전원의 장면을 가지고 당신을 믿는 자들에 대한 당신의 관계를 나타내신다.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양무리를 돌보는 목자들을 바라볼 때면 반드시 구주의 교훈을 회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구약 성경에서 선지자 이사야는 이 상징을, 이렇게 위로하는 말 가운데 메시야의 사명에 적용시켰다. “그는 목자같이 양무리를 먹이시며 어린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사 40:11).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23:1)라고 노래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예언들을 자신에게 적용시키시고, 자신의 품성과 그 당시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의 품성을 대조해 보이셨다. 예수께서 바리새인들과 백성들 앞에서 이 말씀을 하셨는데, 진실되지 않은 지도자인 저들과 선한 목자를 대조하시고, 자신을 주의 양무리의 참된 관리인으로 가리키셨다. 그리고 계속하여 말씀하시기를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요 10:9,10).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양우리로 들어가는 문이 되신다. 초기 시대부터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 문을 통하여 들어갔으며, 그를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의 양우리 안으로 인도되었다. 그리스도는 문이요, 목자이시다. 그는 자신을 희생하심으로 양의 목자가 되셨다.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자기 양을 다 내어 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고로 따라오” (요 10:3) 게 된다.
    모든 동물 중에서 양은 가장 겁이 많고 무력한 동물인데, 동방에서 목자들은 그들의 양무리를 끈기 있게 끊임없이 돌본다. 지금처럼 옛날에도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 밖에서는 거의 안전하지 않았다. 배회하는 변경 부족들에서 나온 약탈자들과 맹수들은 바위 틈에 숨어서 양무리를 약탈하려고 기다렸다.
    목자는 자신의 생명이 위험함을 알면서도 그가 돌보는 양무리를 보호한다. 목자가 그의 양떼를 바위 많은 언덕과 숲과 거칠은 계곡을 지나 강변의 풀 많은 외진 곳으로 인도하며, 고독한 밤을 지새우고, 산에서 강도를 막으며, 병들고 연약한 양들을 친절하게 돌볼 때에 그의 생명은 양들의 생명과 하나가 되게 된다. 강하고 부드러운 애착심이 목자를 그의 돌보는 양무리와 연합시킨다. 아무리 양떼가 많을지라도 목자는 모든 양들을 각각 알고 있다. 양마다 다 이름이 있으며 목자가 이름을 부를 때에 그들은 응답한다.

    이 세상 목자들이 자기 양을 아는 것처럼 거룩한 목자도 온 세상에 흩어져 있는 그의 양무리를 아신다. “내 양, 곧 내 초장의 양 너희는 사람이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라고 예수께서는 말씀하신다(겔 34:31; 사 43:1, 49:16).
    예수께서는 우리를 개인적으로 아시며,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신다. 그는 우리를 모두 이름대로 아신다. 그는 우리가 살고 있는 집과 각 거주자의 이름을 아신다. 그는 때때로 그의 종들에게 당신의 한 마리 양을 찾도록 어떤 도시, 어떤 거리, 또 그 어떤 집으로 가도록 지시하신다.
    그리스도에게 자신을 바친 영혼은 그가 보시기에 온 세계보다도 더 귀중하다. 한 사람을 구원하여 그의 왕국으로 인도하기 위해서라도 구주께서는 갈바리의 고통을 당하셨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당신께서 위하여 죽으신 사람은 단 하나도 결단코 버리지 않으실 것이다. 그의 추종자들이 그를 떠나기로 결정하지 않는 한 그는 그들을 꼭 붙잡으실 것이다.
    우리에게는 모든 시련을 통하여 결코 실패하지 않는 조력자가 계신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홀로 유혹과 싸우고 악에 맞서 투쟁하다가 마침내 괴로움과 슬픔에 압도되도록 버려두지 않으신다. 지금은 비록 예수께서 인간의 안목에서는 숨겨져 있을지라도, 믿음의 귀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있느니라”고 말씀하시는 예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계 1:18) 라고 그분은 말씀하신다.
    또한 그분은 “나는 그대의 슬픔을 견디었으며, 그대의 투쟁을 경험하였으며, 그대와 같은 유혹을 당하였다. 나는 그대의 눈물을 안다. 나도 역시 울었다. 인간의 귀로 차마 들을 수 없는 극한 슬픔을 나는 안다. 그대는 고독하고 버림을 받았다고 생각지 말라. 그대의 고통이 세상에 있는 어떤 사람의 심금도 울리지 못할지라도 나를 바라보고 살아라.” 고 하신다. “산들은 떠나며 작은 산들은 옮길지라도 나의 인자는 네게서 떠나지 아니하며 화평케 하는 나의 언약은 옮기지 아니하리라 너를 긍휼히 여기는 여호와의 말이니라”(사 54:10).

    아무리 목자가 자기의 양을 사랑한다 할지라도 실상은 자기 자녀들을 더욱 사랑한다. 예수는 우리의 목자일뿐 아니라 우리의 “영원한 아버지”이시다.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요 10:14, 15)라고 예수께서는 말씀하신다. 이 얼마나 놀라운 말씀인가!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자를 “내 짝 된자”(슥 13:7)라고 하나님께서는 선언하셨다. 즉 그리스도와 영원하신 하나님 사이의 친교는 그리스도와 세상에 있는 그의 자녀 사이의 친교를 묘사하기 위하여 사용되었다.
    우리가 그의 아버지의 선물이요, 그의 하신 일의 보상인 까닭에 예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신다. 예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사랑하신다. 독자여, 예수는 그대를 사랑하신다. 하늘 그 자체도 이보다 더 크고 더 좋은 것을 줄 수 없다. 그러므로 믿으라.
    선한 목자 되신, 아니 우리의 사랑하는 아버지 되시는 주님이 우리를 매일 돌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감사와 평안함 속에서 살아가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특권이다. 부족함이 없으신 우리의 선하신 목자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오늘도 우리를 도우시기 위해 우리 곁에 가까이 계신다.

5부 - 대제사장 되신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경에서 여러 가지 많은 명칭들을 가지고 계신다. 그런데 그에게 부여된 수많은 칭호들 중에서 “하나님의 어린 양”(요 1:29, 36)과 “대제사장”(히 3:1) 보다 더 인간에게 소중한 칭호는 없다.

    왜냐하면, 이 두가지 직분을 통해 그분께서는 타락한 인간들을 구속하시고 높이 세우심으로, 저주받은 이 세상 가운데서라도 우리 인간들을 영광스러운 은혜의 왕국에 동참할 수 있도록 만드시기 때문이다.
    바울은 히브리서 3장 1절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에게 부탁하기를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 성경절에서 그는 그냥 예수가 아닌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하였다. 대제사장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도대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길래, 그는 그렇게 말했을까?
    바울이 기록한 히브리서에는 대제사장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그리고 제사장의 직분에 대해서 여러번 나온다. 예수님과 그의 직분을 좀 더 잘 소개하기 위해 바울이 쓴 대제사장에 대해, 그리고 대제사장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연구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될 것이다. 함께 공부해 보도록 하자.

제사장과 대제사장에 관하여

1. 제사장의 직분은 무엇이었는가?

A. 하나님의 전의 일 ; 제사장들은 예물과 제사를 드리고 (민 18:18), 향을 사르고 (출 30:7, 신 33:10), 등불을 켜고 (출 30:8), 율법을 가르치며 (신 33:10, 말 2:6,7), 공중 예배를 인도하며 (말 2:5~7), 백성을 판단하는 일을 도와야 (레 13:13, 민 5:14,15) 했다.
B. 바깥 일 ; 일반 제사장들의 일은 성소 뜰과 성소에 매일 한정되었는데, 이러한 봉사는 “매일 드리는” (히브리어로 타미드 - tamid) 봉사로 불리워졌다. 성소 봉사 담당이 아닐 때 제사장들은 전 주민들을 위하여 일을 하였는데, 이것은 서기관과 재판장, 선생과 재무의 역할로 “바깥 일”이라고 칭하여졌다(대상 26:20~32).
* 지상 성소에서는 대제사장만이 아니라, 보통 제사장들도 직무를 수행했는데, 그것은 한사람이 그 모든 일을 수행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모든 제사장들이 수행하던 사업은 우리의 대제사장의 사업을 예표한다.

2. 누구만이 제사장이 될 수 있었는가?

A. 제사장의 직분은 아론의 가족에 국한되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아론과 그의 후손들만이 (레위자손들) 여호와 앞에서 봉사하도록 허락되어 있었다.
* “너는 아론과 그 아들들을 세워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라. 외인이 가까이 하면 죽임을 당할 것이니라” (민 3:10).
B. 하나님께서 부르신 자 ; “이 존귀는 아무나 스스로 취하지 못하고 오직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라야 할 것이니라” (히 5:4)

3. 대제사장과 그의 하는 일은 무엇이었는가?

A. 지성소 봉사 사업 ; 대제사장은 한 해 동안 매일의 전반적인 봉사 사업과 함께, 일년에 한 번 있는 대속죄일에 성소를 정결케 하기 위하여 지성소에 들어갔다. 지성소에서 거행된 이 봉사로 성소에서 행해지던 연중 일체의 봉사가 완결되었다. 대속죄일 날 지성소에서는 일년 동안 쌓여졌던 모든 죄의 기록들이 다 지워지고 도말되며, 없어지는 일이 진행되었다. 그러므로 대속죄일을 심판의 날이라고 불렀다.
대제사장은 대속죄일 날에 지성소에 들어가 하나님의 판결, 즉 그 죄인이 정말 진심으로 죄를 회개하고 그 죄를 버렸는지를 살피는 최종 심판의 사업에 죄인들을 대표하여 하나님 앞에 서는 자이다. 대제사장은 죄인들을 대표하여 하나님 앞에 대신 서는 자였고, 동시에 죄인들에게 하나님을 대표하는 중보자였다.
이 대속죄일에 대제사장은 회중을 위한 한 제물을 취하여, 그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 율법이 기록된 돌비 위에 있는 속죄소에 뿌렸다. 이와 같이 하여 죄인의 생명을 요구하는 율법의 요구가 충족되었다.
B. 재판장 ; 대제사장은 이스라엘의 재판장으로서, 이 직무를 행할 때에는 자신의 직무 기장인 “판결 흉패”를 붙였다 (출 28:29). 하나님께서는 이 판결흉패에 있는 우림과 둠밈을 통해 심판과 결정을 내리도록 역사하셨다. 이 대제사장의 기능은 아버지께서 모든 심판을 맡기신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봉사를 가리킨다.
* “대제사장마다 사람 가운데서 취한 자이므로 하나님께 속한 일에 사람을 위하여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게 하나니” (히 5:1)
“오직 둘째 장막은 대제사장이 홀로 일년 일차씩 들어가되 피 없이는 아니하나니 이 피는 자기와 백성의 허물을 위하여 드리는 것이라” (히 9:7).

대제사장 되신 예수 그리스도

1. 봉사를 위하여 예수께서 가지신 자격은 무엇인가?

* 예수 그리스도는 대제사장이시다. 예수께서 승천하셨을 때, 그는 제사장으로서,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지성소 봉사의 실체인 하늘 성소의 첫 장막에서 행하는 그의 봉사로 들어가셨다.
그 후, 지상 성소의 첫째 칸에서 이루어진 그 표상적 사업이 그것의 실체를 완전히 성취했을 때, 그리스도께서는 대제사장으로서 두번째 휘장을 지나서 (히 9:10) 실제적인 지성소의 영광스러운 장막으로 들어 가셨다.
*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히 4:14).
“이제 하는 말의 중요한 것은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라 그가 하늘에서 위엄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니” (히 8:1).
“또한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 되심도 스스로 영광을 취하심이 아니요 오직 말씀하신 이가 저더러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니 내가 오늘날 너를 낳았다 하셨고, 또한 이와 같이 다른데 말씀하시되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 하셨으니” (히 5:4~5).

2. 예수께서 갖추신 대제사장의 자격은 어떤 것인가?

A. 희생 제물이 되셔서 우리의 죄를 지셨다 ; 죄 지은 인간이 하나님께 용서를 받을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 밖에 없는데, 누군가가 대속의 죽음을 죽어야만 하는 것이다. 죄인은 죄 없는 대속물의 피흘림에 의해서만 속죄를 받고 하나님께 돌아갈 수가 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께서는 “세상 죄를 지는 어린 양”, 희생당하는 어린 양이 되셨다. 죽음에서 부활하신 그분은, 하늘 성소에서 대제사장으로서 자신의 피로 우리의 죄를 덮으시며, 속죄를 이루시고 계신다. 우리의 죄를 대속하신 그리스도야말로 진정한 대제사장이 되실 자격이 있으신 것이다.
* “저가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저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니라” (히 7:27).
*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번째 나타나시리라” (히 9:28).

B. 하나님으로서 인간이 되셔서 우리를 어떻게 도우실 줄을 아신다 ; 예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고, 도우시기 위해서는 인간의 처지를 이해하실 수 있어야 한다. 천사는 우리를 동정을 할 수는 있으나, 이해할 수는 없다. 인간이 시험과 유혹을 받을 때, 진정으로 이해하고 도와주실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연약한 인성을 함께 경험하시는 것이었다. 이것이 예수께서 우리와 같은 인성을 입으신 이유이다.
그리스도께서는 타락된 인류의 연약함을 자기 몸에 취하셨다. 그는 그렇게 하심으로써만 가장 깊이 타락해 있는 인류를 구원하실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시험받는 자들을 어떻게 구원하실지 알기 위하여 자신의 죄 없는 본성에다 우리의 죄 있는 본성을 취하셨다. 인간의 연약함을 이해하실 수 있는 그리스도야말로 대제사장의 자격을 갖추신 분이시다.
*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 (히 2:14~18)

C. 죄는 없으셨다 ; 표상인 지상 성소에서 봉사하던 대제사장은, 지성소에 들어가 하나님의 영광 앞에 서기 전, 제물을 드려 자신을 정결하게 하여야 했다. 그러나 대제사장되신 예수 그리스도는 죄가 없으시므로 자신을 정결케 할 필요가 없었다.
    그리스도의 인성에 관한 예민한 문제를 다룰 때마다 우리는 언제나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생각으로나, 말로나, 행위로 죄를 범하지 않으셨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전적인 인간”이었다고 믿으므로, 인간 되신 그리스도에게 타락된 흔적이나, 죄로 기울어지는 경향이 있거나, 또는 그가 어떠한 방법으로도 죄악에 굴복 당하였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려고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생각으로조차도 시험에 굴복하지 않으셨다. 어떤 불순한 말도 그의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한번도 옳지 않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 비록 그가 인간의 형체를 취하셨지만, 죄의 흔적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의 인성 속에서 그는 그의 신성의 순결함을 간직하셨다. 그는 하나님의 법대로 사셨으며, 범죄자들의 세상 속에서 그의 법을 드높이셨다.
    그리스도께서는 불순함 속에서 그의 순결을 유지하셨다. 사단은 그의 순결을 더럽히거나 타락시킬 수 없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의 죄악이라도 발견되어졌다면, 그가 엄청난 고문을 피하기 위하여 한번이라도 사단에게 굴복하였다면, 사단은 승리의 함성을 질렀을 것이다. 하나님과 하나가 되셔서 생활하시고, 성령이 충만한 생애를 사셨으며, 사단의 유혹과 죄를 승리하셔서 우리의 모본이 되신 승리자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대제사장의 자격이 있으신 분이시다.
* “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니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자라” (히 7:26).
*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히 4:15).

D. 영원한 제사장직을 가지셨다 ; 죽을 수 밖에 없는 유한한 인간 제사장은 그의 사망과 더불어 제사장직이 끝나므로 옛날 유대 나라의 제사장직은 항상 갈려야 했다. 그러나 영원히 사시는 그리스도는 갈리지 않는 제사장직을 가지고 계시다.
* “증거하기를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 하였도다” (히 7:17).
*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나니” (히 7:24).

E. 살아계신 중보자이시다 ; 예수께서는 지금도 살아 계셔서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 간구하고 계시다. 대제사장은 죄인들의 회개를 제시하며 하나님 앞에 용서를 간구하는 자이다. 또한 아울러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용서받은 자들에게 전달하여 주는 중보자의 역할을 담당한다. 그러나 중보란 죄의 용서를 위하여 기도하는 일만이 아니라, 죄인이 다시는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지 않을 수 있게 하기 위하여 필요한 때를 따라 돕는 은혜, 곧 성령의 능력을 제공하여 주는 일을 포함하는 것이다.
*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히 7:24)
*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히 4:15)

 

6부 - 중보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예수님의 모습 중에서, 중보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은 우리에게 많은 안위와 위로가 된다. 중보자란 뜻은 “대립 관계에 있는 사이에서 화해와 일치를 얻게 하는 자”라는 뜻이다.

    우리와 같은 인간이 되셔서 우리와 같은 환경에 처하셨으며, 우리와 같이 유혹과 시험을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서서 우리를 위하여 중보하실 수 있는 자격이 있으신 분이시며, 우리를 어떻게 도와주실지를 아시는 분이시다.
    성경 요한일서 2장 1절에는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는 말씀이 나온다. 대언자라는 뜻은 대신하여 간구하고 말해주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 성경절은 당신의 피를 가지시고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 우리의 죄를 위하여 탄원하고 계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는 성경절이다.

대언자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중보자로서 우리들을 위하여 탄원하고자 하나님 앞에 나아가 계신다.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오직 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히 9:24) 셔서 대언하고 계신다고 말하고 있으며, 그분은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히 7:25)고 말하고 있다. 항상 살아서 간구하신다는 뜻이 무엇인가? 그것은 매일 매 순간마다 우리를 돌보시며, 연약하여 쓰러진 범죄한 인간들을 용서하시고 도우시기 위해 대기하고 계시다는 뜻이다. 얼마나 고마우신 주님이신가!
    예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위하여 간구하고 계시는 동안, 사단은 그들을 범죄자로 하나님 앞에 고소한다. 사단은 인간들을 의혹에 빠뜨리고, 하나님을 믿는 확신을 잃어버리게 하고, 하나님의 사랑에서 떠나 그분의 율법을 범하게 하고자 노력해 왔다. 사단은 그들의 생애의 기록을 지적하고, 그들의 품성의 결함과 그들이 그리스도와 같지 아니한 점, 곧 그들이 구세주의 영광을 더럽힌 것과, 바로 그 자신이 그들로 범죄케 한 점들을 지적한다. 그리고 그는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자기 백성이라고 주장한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죄에 대하여 변명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그들의 회개와 믿음을 보여 주시고 그들이 용서받은 것을 주장하신다. 그분께서는 중보자로서 당신의 상한 손을 하나님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 앞에 드시고 “내가 저희 이름을 압니다. 내 손바닥에 저희 이름을 새겼습니다.” “나의 피, 나의 피, 아버지여, 나의 피를 기억하시옵소서!” 라고 탄원하신다. 또한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시 51:17) 라고 말씀 하신다. 그리고 당신의 백성을 고소하는 자를 향하여 “사단아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슥 3:2)고 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죄인들이 당신의 피를 의지해, 회개하고 자복한 것을 보이시며 그들이 용서받은 죄인이라는 것을 증명하신다. 그분은 당신의 아버지께 충성된 백성들을“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는 “영광스러운 교회”로 나타내기 위하여 당신의 의의 옷을 입히실 것이다(엡 5:27).

조력자 예수 그리스도
    성경은 예수께서 우리를 돕는 분이시라고 말하고 있다.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 (히 2:18).
    예수께서는 이 세상에 계실 때 인성을 쓰시고 생활하셨으므로, 인간의 연약성과 인간의 어려움과 슬픔과 시험과 유혹을 너무나 잘 이해하신다. 그분은 인간이 당하셨던 모든 시험과 고난을 당하셨으므로 우리 인간들을 어떻게 도와주실지를 잘 알고 계신다. “나는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노라”고 하시며,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가 되어 늘 아버지의 임재 속에 사셨던 능력의 구세주께서는 우리가 시험을 받을 때 능력을 주셔서 쓰러지지 않도록 도와주신다. 죄를 지으려는 유혹을 받을 때, 사단의 공격을 받아 곤경에 처할 때, 우리는 즉시 하늘에서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기 위해 기다리고 계시는 예수님께 기도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히 4:16)
    예수님은 우리를 도우시는 조력자이시다. 그분은 우리의 확실한 상담자(相談者)이시다. 우리의 슬픔과 고통과 외로움이 아무리 극심할지라도 우리에게는 하늘에 계신 중보자이신 동정깊은 친구가 있다.
    우리가 무지함으로 실족할 때, 구주께서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신다. 우리는 홀로 있다고 결코 생각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의 도성으로 가는 길에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들이 정복할 수 없는 어려움이 없다. 그들이 피할 수 없는 위험들은 없다. 하나님께서 치료의 길을 마련해 주시지 않는 슬픔이 없고, 비애가 없고, 인간적 약점이 없다.
아무도 스스로 자포자기하여 낙심하고 실망할 필요가 없다. 사단은 우리에게 가까이 와서 “너는 절망적인 상태에 놓여 있어, 너는 회복될 가망이 전혀 없어”라고 가혹하게 암시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에게는 희망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힘으로 승리하라고 명령하지 않으신다. 우리가 당하고 있는 어려움이 심령과 육체를 아무리 억압하고 있을지라도,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능력을 주셔서 승리하게 하시고 자유케 하신다.
    인성을 취하신, 중보자되신 그분께서는 인간의 고통을 어떻게 동정하실지 아신다. 그리스도는 각 영혼들과 그 영혼들의 특수한 필요와 시험을 아실 뿐만 아니라, 심령을 괴롭히고 어렵게 만드는 모든 환경을 아신다. 그분께서는 동정어린 친절로써 고통하는 모든 영혼들에게 당신의 손을 뻗고 계신다. 가장 크게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이 그분의 동정과 긍휼을 가장 많이 받는다. 그분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마음 속에 동정을 느끼시며, 우리의 어려움과 난처한 문제들을 가져 와서 당신의 발 앞에 놓기를 바라신다.

기도의 필요성
    중보자 되신 예수께서는 쉬지 않고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고 계신다. 예수께서는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죄의 용서와 때를 따라 얻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매 순간 예수께 나가지 않으면 도움을 얻을 수 없다. 그리스도인이라고 스스로 자처하는 사람들 중에 기도를 등한히 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예수께서는 지상에 계실 때 “심한 통곡과 눈물로” 하나님께 기도하셨고, 사람들 사이에 거하실 때에 자주 기도하셨다. 우리 구주께서는 그의 의무와 시련을 위하여 굳세게 나아갈 수 있도록 그의 아버지께 새로운 능력의 공급을 구한 탄원자와 간구자가 되신 사실은, 그도 역시 우리와 같이 궁핍하고 연약하였던 것을 증거한다. 그는 범사에 우리의 모본이시다. 그는 우리와 같이 연약한 한 형제로서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히 4:15)는 자” 셨으나, 그의 인성(人性)은 그에게 기도가 필요하게 하고 기도가 특권이 되게 하였다.
    그는 당신의 아버지와 교통하는 가운데서 위안과 기쁨을 얻었다. 인류의 구주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도 기도의 필요를 느끼셨다면, 연약하고 죄가 많은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들은 얼마나 더 열심히 기도할 필요를 느껴야 할 것인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신성을 겸하여 가지셨던 예수께서 이 땅에 계셨을 때, “새벽 미명”에 그렇게 열심히 기도하셨다면, 연약한 우리는 얼마나 더 열심히 기도해야 하겠는가?
    기도가 요긴하지 않다는 생각은 영혼을 멸망시키는 사단의 가장 성공적인 계책이다. 기도는 지혜의 샘이요, 힘과 평화와 행복의 원천이신 하나님과의 교통이다.
우리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그의 풍성한 축복을 우리에게 부으시려고 기다리신다. 무한한 사랑의 샘에서 마음껏 마시는 것은 우리의 특권이다.
끊임없는 기도와 늘 깨어있음이 없이는, 우리는 부주의하게 되고 정도에서 탈선할 위험성이 있게 된다. 대적 마귀는, 우리가 열성 있는 간구와 기도로 시험을 이길만한 은혜와 능력을 얻지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로 가는 길을 막으려고 끊임없이 애쓴다.
    우리는 끊임없는 기도로 우리의 심령이 하나님의 보좌에 상달되도록 해야하며, 그리하여 예수께서 우리의 기도에 향을 섞으셔서 하나님께 중보하실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매일 매 순간 기도하며, 주님과 매우 가까이 살므로써 뜻하지 않은 시험을 당할지라도 우리의 생각이 마치 화초가 태양을 향하는 것처럼 자연적으로 하나님을 향하도록 해야 할 것이며, 은혜의 보좌로부터 능력을 받아 모든 시험을 이기도록 해야 한다.

오늘도 우리를 위해 간구하고 계시는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며, 감사와 기도로 우리의 소원을 은혜의 보좌 앞으로 올리자!

7부 - 심판장 되신 예수 그리스도


    성경에 나타나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여러 다른 모습들과 직분 중에는 심판장이신 그리스도의 모습도 포함되어 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그 큰 사랑을 입증하신 희생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과 세상을 심판하시는 심판장되신 그리스도의 모습은 어떻게 보면 잘 조화되지 않는듯 보인다. 그러나 여기에는 우리 그리스도인이 알아야 하는 깊은 의미가 담겨져있다. 함께 연구해 보도록 하자.
    계시록 20장은 중요한 심판의 하나인 흰 보좌 심판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런데 흥미 있는 사실은, 이 심판은 천년기가 끝나고 나서 행해지는 심판이라는 사실이다. 왜 이것이 이상한 일인가라고 반문하는 독자들이 있을 것 같아 간단히 설명하고 넘어가기로 한다.

천년기 후의 심판

천년기는 예수께서 재림 하신 후에 있을 기간이다. 다시 말해서 의인들은 모두 다 하늘로 승천하여 올라간 후이며, 악인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의 영광으로 인하여 다 멸망 당한 이후를 말한다. 그런데, 그 천년기 이후에 다시 예수께서 악인들을 부활시키실 것이라는 예언이 바로 계시록 20장에 기록되어 있다.

    “천 년이 차매 사단이 그 옥에서 놓여 나와서 땅의 사방 백성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하고 모아 싸움을 붙이리니, 그 수가 바다 모래 같으리라. 저희가 지면에 널리 퍼져 성도들의 진과 사랑하시는 성을 두르매,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저희를 소멸하고 또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우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자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데 없더라.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 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 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 (계 20:7-15).

    그들의 운명은 이미 결정지어진 지가 오래다. 그들은 이미 죽고 멸망당하였다. 그런데 왜 또다시 그들을 부활시키어 심판하실 필요가 있다는 말인가?
    그 이유를 간단하게 설명한다면 다음과 같다. 구원에 이르지 못한 악인들을 다시 부활시키어 조사하시는 것은 그들의 운명을 그제서야 결정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 과연 공정하고 의로운 것인지를 온 우주 앞에 드러내시기 위함이다. 그렇지 않다면 악인들의 부활과, 또 다시 그들이 유황 불로 타서 최종적으로 소멸되어 버리는 마지막 집행심판이 있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참조 - 요한 복음 5장은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을 것을 말씀하고 있다).
그러므로 심판의 원래 참 목적은 하나님의 결정을 온 우주가 공개적으로 살펴 보며, 그의 의로우심과 공정하심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절차에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 우주에는 반역과 죄가 다시는 일어 나지 않게 된다. 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들은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신뢰와 사랑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대한 의심과 의문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 이 세상에는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에 이해 할 수 없는, 그리고 불공평하게 보이는 무수한 일들이 있다. 이러한 일들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가!

심판의 개념과 이유

    그러므로 심판을 통하여서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드러나야 하는 것이다. 왜 그러했는지에 대한 이해가 모든 이성적인 존재들 마음 속에 생겨야 한다. 그러므로 심판의 개념 속에는 우리가 이해하는 범위 보다 훨씬 더 큰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그것은 우리 인류의 구원 문제만 다루는 것이 아니라, 온 우주를 포함하는 일인 것이다. 원래 하나님을 고소한 자는 마귀이기 때문에 하늘 법정에서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이 판정을 받아야만 한다.
    하나님은 독재자가 아니시다. 하나님은 온 우주 거민들의 동의를 얻으신 후에야 이 세상의 죄의 문제를 종결짓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의인들을 구원하시기 전에 그들이 구원 받아 영원히 살 자격이 있다는 사실이 심판을 통하여 보여져야만 한다. 그러한 이후에 예수께서 의인들을 데리러 재림 하시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악인들을 영원히 멸망시키시기 전에, 그들이 그렇게 되어야 할 이유를 다 펼쳐 보이시고, 공개적으로 심판을 행하신 이후에야 최종적으로 죄와 사단과 악인들을 소멸하시는 일을 행하시는 것이다.
그    런데 한 두 가지 이해하여야 할 문제들이 있다. 먼저 왜 예수께서 심판장이 되시는가 하는 것이 첫째 문제이고, 두번째로는, 그러면 예수께서 무엇으로 우리를 심판하시는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요한복음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요 5:22).” 왜 하늘 아버지께서 모든 심판을 아들 예수께 다 미루시는 것일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예수께서 인간이 되시어 사시었기 때문에 어떻게 인간을 변호하며 그들을 도와 주실지를 아시기 때문이다. 하늘에서 경험적으로 인간을 이해하고 아시는 분은 예수님 밖에는 없다. 그리고 인간의 형편을 직접 몸소 체험하여 아시는 그리스도처럼 인류를 공정하게 판단하실 분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두 번째로, 그러면 무엇으로 우리를 심판 하실 것인가의 문제이다. 예수께서 이 땅에 계실 때에 당신께서는 심판하려고 온 것이 아니요 구원하려고 오신 것이라고 여러 차례나 말씀하시었다. 그러나 동시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을 발견하게 된다.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저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나의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요 12:47,48).”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 빛, 곧 진리가 우리를 심판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빛을 받아 드렸느냐 받아 드리지 않았느냐에 따라 심판을 받는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이르신 그 말씀들이 우리를 심판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진리에 대하여 취한 우리의 태도에 따라서 심판을 받는다. 빛은 우리를 하나님에 대하여 알려 주는 진리이지마는 동시에 심판의 역할도 하는 것이다.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이 빛으로 나타나나니 나타나지는 것마다 빛이니라(엡 5:13).”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들의 모든 동기들과 행위들을 하늘 기록 책에 기록하여 두신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를 심판하는 것은 우리의 생애의 기록들인 것을 알 수가 있다. 우리가 받은 빛에 대하여 어떻게 반응하였는가 하는 기록 말이다. 빛은 우리의 마음 속에 있는 동기들을 폭로 시킨다. 그래서 우리는 진리에 대하여 취한 우리의 태도에 따라서, 또한 그 태도를 가지고 행한 우리의 생애의 행위들 대로 심판을 받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예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여 주신 진리의 빛이 우리를 심판하는 것이다.

공의로우신 심판장

    예수님은 공의로우시며 또한 자비로우신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다. 요한일서 2:1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예수님은 우리의 중보자이신 동시에 우리의 재판관이시다. 이 얼마나 다행스러우며 감사한 일인가! 그분은 우리를 너무나 잘 아시는 분이시며, 우리를 어떻게 도와줄지를 아시는 분이시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은 우리가 신뢰할 수 있는 심판이다. 그분의 판단은 공평한 심판이다.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하나님의 심판의 과정을 지켜 보면서 다음과 같이 찬양하고 있다고 적고있다. “이 일 후에 내가 들으니 하늘에 허다한 무리의 큰 음성 같은 것이 있어 가로되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 그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운지라... (계 19:1,2).”
    만일 재판장이 불의하거나 올바르게 판단하지 않는 재판장이라면, 법정에 서는 사람이 얼마나 불안하고 걱정되겠는가! 또 만일 재판장이 한 쪽 편만을 드는 편파적인 재판장이라면, 재판을 받는 사람이 얼마나 억울하겠는가! 그러나 우리의 심판장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정확하시고, 공정하시고, 의로우시며, 모든 동기와 상황을 헤아리시는 분이시요, 모든 억울함을 풀어주시는 자비로운 재판장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마음 놓고 그분을 믿을 수 있는 것이다.
    머지 않아 이 세상이 끝나고, 모든 시련과 시험을 이기고 죽기까지 하나님께 충성한 자들을 데리러 예수께서 오실 것이다. 지금은 하늘에서 어떤 사람이 죄없는 하늘에서 주님과 영원히 살 수 있는 사람인지를 결정하고 조사하여 심판하는 시간이다. 우리는 우리와 같은 몸으로 세상에 오셔서 세상을 이기신, 우리의 중보자 되시는 예수님을 우리의 도우시는 분으로 모시고 있다. 또한 우리의 사정을 아시는 예수께서 우리의 심판장되신다. 그러므로 이러한 주님을 우리의 친구로, 맏형님으로, 우리의 인도자로 모시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특권인가!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의로운 심판장이시다. 한치의 오차도, 하나의 불의도 없으신 공의로우신 재판장이시다. 오늘도 우리의 인생을 우리를 돌보시는 자비로우신 재판장께 의뢰하며, 우리의 슬픔과 억울한 사정들을 주님께 기도로 아뢰이며, 힘과 용기를 가지고 살아가도록 하자! 그리고 우리들도 천사들처럼 이렇게 주님을 찬양하도록 하자!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기이하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이까?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매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 하더라” (계 15: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