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처럼


오늘도 저녁 하늘가로 물들어가는 찬란한 노을을 보며, 보이지 않는 예수님의 사랑에 젖어 혼자 즐거워하다 생각에 잠겨 본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기도하며, 보이지 않는 성령의 감동을 느끼며, 보이지 않는 천사의 방문을 받으며, 보이지 않는 하늘을 사모하며, 보이지 않는 것을 믿고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어쩌면 얼마나 이상한 것인가 하고... 그리고 또 이 세상은 얼마나 보이는 것만 믿고, 보이는 것에만 가치를 두고, 보이는 것에만 존재의 이유를 두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는가 하고...

사람들은 보이는 것 때문에 욕심을 갖게 되고, 보이는 것 때문에 집착하게 되고, 보이는 것 때문에 투쟁하게 된다. 그러고 보면 “본다”는 것이 다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한번은 집회에 참석한 맹인 부부에게 이렇게 물었던 기억이 난다. “보지 못하시니까 훨씬 더 욕심이 없으시겠네요!...”
“그렇지도 않아요, 보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 맹인들은 정상인들보다 더 욕심이 있을 수도 있어요!...”
그분들의 대답은 내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었다. 어떤 눈을 가지고 인생을 살아야할지에 대하여...

볼 수 있는 눈

우리에게는 눈이 필요하다. 그냥 보이는 것을 보는 눈 말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눈이...

성경에는 이런 눈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영적인 시력을 가지고 늘 영원한 것들을 바라 보던, 그래서 항상 풍요롭고 충만한 안식의 삶을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처럼 살았던 그들의 삶은 늘 기쁨과 희망에 차 있었고, 그들의 말과 행동은 늘 맑고 순결했으며, 그들의 마음은 언제나 밝은 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한마디 불평 없이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섭리에 순응하며, 주님께 굴복한 자아로 인해 오는 평안함을 만끽하는 행복한 삶을 산 사람들... 그들이 당하는 시련은 더 이상 시련이 아니었고, 그들의 십자가는 더 이상 십자가가 아니었으며, 주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유익을 위해, 또 그들을 가르치시기 위해 최선껏 마련해 주신 것들이라고 믿었기에 늘 행복할 수 있었던 사람들...

그들은 모두 사도 바울처럼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 말할 수 있었다.
정말 그들은 그렇게 말하고, 그렇게 살 수 밖에 없었으리라! 왜냐하면 그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는 것처럼 살았으니까... 그리고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을 볼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또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마련하신 아름다운 하늘 본향을 늘 마음의 눈으로 그리며 살았으니까...

깨달을 수 있는 눈

우리에게는 깨달을 수 있는 눈이 필요하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을 둘러 싸고 있는 환경이 어떠하든지, 그리고 크신 섭리의 길이 아무리 어둡고 신비에 싸여 있다 할지라도, 또 그것의 손실과 고통이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그 모든 것에서 눈을 돌려서 보이지 않는 것, 곧 영원한 것을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 이 모든 것들이 다 우리의 유익을 위해 있는 것이라는 축복된 보증을 믿고 확신하면서...

하늘의 빛으로 눈을 뜬 사도 바울이 새로운 시력을 갖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의 영혼에 하늘의 빛을 비추셔서 그가 영원을 깨달을 수 있는 눈을 갖게 되었을 때, 비로소 그는 그의 마음의 눈으로 보이는 장면과 현재를 비교할 수 있게 되었으며, 그리하여 지금 자신이 당하는 모든 고통과 환난들은 잠시 잠깐이며 가벼운 것이고, 생각할 가치조차 없는 것으로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또 그가 새로운 눈, 영원한 것을 바라보고 깨달을 수 있는 눈으로 현재의 모든 고생과 고난들을 이 세상 싸움이 모두 끝났을 때 그를 기다리고 있을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과 비교해 보았을 때, 자신이 그동안 견디어 온 자기 부정과 시련과 고통, 그리고 가난과 환난과 핍박의 세월들을 “잠깐”이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다.

성경을 보면 사도 바울 뿐 아닌 많은 사람들이 그런 눈을 가지고 살았던 것을 알 수 있다. 모세는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으며”, 느헤미야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는 것처럼 일하고 살았으며, 다윗은 시편에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라고 썼다.

이렇게 그들은 마음의 눈으로 보이지 않는 분을 보았고, 보이지 않는 분을 보는 것처럼 살았고, 그리고 장래에 그분께서 그들에게 주실 아름다운 기업을 손에 잡은 듯 살았기 때문에 그들의 삶이 늘 생기있고, 즐겁고, 행복하고, 의미있을 수 있었다.

두개의 눈

우리는 두개의 눈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현세의 것을 보는 눈 외에 휘장 너머의 영원한 것을 볼 수 있는 눈을... 우리의 마음은 우리가 생각하는 사물의 수준을 넘지 못한다. 만일 우리가 땅의 것들, 땅에 속한 것들, 일시적인 것들만을 오래 생각한다면, 이 세상의 슬픔과 염려와 난처한 일들이 우리의 마음을 빼앗아 땅으로 향하도록 할 것이며, 사소한 세상의 일들이 큰 일처럼 느껴지게 될 것이며, 그런 마음은 하늘에 있는 사물들과 그것들에 대한 생각으로는 별로 큰 감명을 얻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영원한 눈을 열고 십자가의 빛으로 이 세상을 비추어 본다면, 이 세상에 속한 것들은 모두 너무나 헛된 것이며 마치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하늘의 아름다움, 영적으로 통하는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거룩하고 환희로운 교제,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느끼는 지극한 행복등은 믿음의 눈이 아니면 지금은 보이지 않으며 느낄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러나 지금 눈에 보이는 것들, 세상의 명예나 세상의 쾌락, 그리고 세상의 부와 영광은 보이지 않는 세계가 우리 마음 속에 이르러 올 때 그 세계의 뛰어난 영광과 아름다움 때문에 가리워지고 잊혀질 수 있는 세상의 하찮은 것들이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것들은 일시적이고 잠깐있을 것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들은 영원토록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가지고 싶은 눈

우리 모두 아름다운 눈을 가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영적인 시력으로만 볼 수 있는, 보이지 않는 것들과 영원한 것들을 볼 수 있는 눈을 우리 모두 가질 수 있다면... 그래서 늘 보이지 않는 그분을 보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처럼 살 수 있다면...
절망과 고통 중에서 마음의 눈으로 하나님을 본 욥처럼... 낙담과 의혹의 그늘 속에서 하나님을 보고 영광의 소망으로 가득차 외쳤던 이사야처럼...

우리 모두 마음의 눈을 열어 하늘을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가슴 답답한 시간, 모든 것이 힘겹고 숨가쁘게 돌아가는 인생의 수레바퀴 속에서 마음의 눈을 활짝 열어 빛나는 하늘 본향을 바라볼 수 있다면...

영적으로 끝없이 통하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또 무엇보다 가장 사랑하는 예수님과 생명수 한잔을 놓고 한없는 이야기를 나눌 그 하늘 본향을... 이해할 수 없었던 인생의 신비와 섭리와 비밀들에 대한, 그리고 그때는 그 일이 왜 그럴 수 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설명을 예수님께로부터 들을 그 아름다운 하늘 나라를... 마음의 눈을 떠서 매일 바라 볼 수 있다면...

고통과 슬픔이 없고, 이루어지지 못할 꿈이 없는, 영원한 사랑만이 메아리 칠 그 하늘나라...

이제 다시 눈을 크게 뜨고 마음의 창을 열어 본다. 그러면 보이지 않는 분이 눈에 잡힐 듯이 다가오고 영혼 속에 환희의 빛이 가득 차는 것을 느낀다.

권두언


강병국 목사

세계 1,2 차 대전 이후에 냉전 시대가 한참이나 계속되더니 공산주의 세력이 붕괴하는 획기적인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는 그 진공상태를 메우듯 일어난 21세기의 공공의 적인 테러주의자들이 미국과 서구 세계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현격한 이념 전쟁이며 또한 종교 전쟁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해 묵은 유혈 전쟁이 그러하고 9/11 사태 이후에 본격화 된 과격파 이슬람 세력과 미국의 전쟁이 그러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의 관심은 이러한 문제가 성경 예언 속에 포함되어 있는 일이냐는 것이지요. 만일 성경이 이 사실을 예언하고 있는 것이라면 과연 그 결말이 어떻게 이루어질 것이냐는 사실에 우리의 지대한 관심이 쏠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성경의 예언들은 항상 그 사건이 현실화되어 가고있는 시점에서야 그 예언들이 재 조명되고 이해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그 예언이 현실화되지 않았을 경우에는 예언 해석이 아직은 추측으로만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현재 정말로 놀라운 또 하나의 성경 예언의 성취의 역사를 주목하고 있습니다.

성경 예언은 눈을 뜬 자들만 이해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귀 있는 자들은 들을 진저” 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의 안약을 발라 보게되는 경험들이 생겨나야 하겠습니다. 이번 호는 여러분들의 영적인 안목을 뜨게 해 드리는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잘 읽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침묵의 위험


많은 진실된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에 들어온 세속과 타협으로 인해 마음 아파하며 이 문제로 인해 홀로 고민하고 있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교회의 표준을 높이고, 진리를 고수하며 진실되게 살고 싶어하는 신실한 교인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정말 홀로 서서 타협하지 않고 진리를 고수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요? 이 글은 특정한 사람이나 교회를 비난하거나 공격하기 위해서 쓰여진 글이 아닙니다. 다만 주님을 따라 참된 제자의 길을 가기 원하며, 하나님 앞에 충성되고 신실하게 살고 싶어하는 평신도나 목사님들을 위하여 용기와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실은 기사일 뿐입니다. 신앙과 교회에 혁명을 가져올 강한 글일지 모르지만 조용히 기도하는 마음으로 읽으셔서 현대 교회 생활 속에서 믿음을 어떻게 영위해야 할지에 대하여 큰 도움을 받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 편집실 -

교회의 지도자들이 비성서적인 교리나 관습을 지지할 때, 왜 교회 안의 진실된 자들이 죽은 듯이 침묵을 지키고 있는지 아는가? 타협이 일어날 때, 왜 진실한 사람들은 저항하지 못하고 있는 것인가? 나는 교회들이 여러 해에 걸쳐 성서적인 면에서 빗나가며, 또한 교회 안에 죄악의 물결이 거세어지는 것과 성화되지 못한 지도자들의 자기 합리화를 목격하면서, 이 모든 것에 경고의 목소리를 발하는 사람이 왜 이리도 적은가 궁금하였다. 성경 역사에 비추어볼 때 성서에 맞지 않는 것들이 하나님의 백성 안으로 진군해 들어오는 데도,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잠자코 있는다는 것은 영적인 상식에 맞지 않는다.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이토록 침묵을 지키도록 만드는가?

우리는 진리를 잘못 전하든가 교회에서 성서에 맞지 않게 하는 일에 대하여 아무 항거도 하지 않은 채 그냥 귀담아 듣고 앉아 있지 말아야 한다. 만일 우리 주위에 있는 선한 사람들이 용맹스럽게 진리의 깃발을 지킨다면, 사단이 진리에 부합되지 않으면서 성직에 봉사하는 사람들을 통하여 자신의 세력을 교회 안에 심는 것은 어려운 일이 될 것이다.

사단이 끊임없이 교회 안에서 진리를 침식시키려고 고군분투하는 데도 불구하고 신실한 남녀들이 침묵을 지키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다. 그 중 가장 큰 이유는 두려움이다. 두려움에는 많은 면이 있겠지만, 여기에서 그 중 몇 가지에 대해 얘기해 보자.

두려움의 여러 면들

1. 주의 기름부음 받은 자를 반대하는 일 - 많은 진실된 교인들이 교회 지도자들과 충돌하기를 두려워한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 죄 짓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그들은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들을 건드”리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다윗의 말을 잘못 인용하는 것이다. 다윗은 사울에게 신체적인 해를 입히도록 강권받았다. 그렇게 하도록 충동하던 자들은 다윗이 진리와, 이스라엘의 장래의 왕으로서의 그의 소명을 보호하기 위해 율법을 범하는 것은 괜찮다고 정당화하고 있었다. 그들은 다윗이 사울을 죽여도 그 결과는 선한 것이 되므로 괜찮다고 논했다. 다윗은 의롭게 이 제안을 거절하였지만, 그 대신 다음날 아침 그는 사울이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박해하는 것이 의롭지 못함을 사울에게 증거하였다.

교회 지도자들의 말이나 행동이 진리와 직접적으로 배치되어 있을 때, 그들의 의견이나 행동에 반대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만일 시온성의 충성스러운 파수꾼이 되고자 한다면, 또한 거짓 파수꾼에게 임할 주님의 진노를 피하고자 한다면 신실한 성도들은 그렇게 해야만 한다. 그러나 물론 그렇게 하기 전에 많은 기도와 겸손으로 준비해야 함은 필수이다.

2. 평판 - 많은 선한 이들이 잘못된 것들에 대항해 싸우지 않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의 명예를 훼손할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교회 지도자들은 종종 성도들의 진실된 걱정을 잘못 받아들이고는 그들이 비판적이고, 비협조적이고, 분열을 일으킨다고 비난한다. 목사들은 때때로 알게 모르게 이런 비난에 다른 선한 성도들을 끌어들인다. 이러한 비난에 맞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비난하는 자들이야말로 하나님의 신실한 기별자(평신도나 목사이거나 간에)들을 판단하는 자들임을 알아야 한다. 예수께서는 자기를 비우셨다(빌 2:7). 그리고 우리가 받을 모든 고통보다 더 많은 고통을 감내하셨다. 그렇다면 목사와 교인들 사이에 우리의 평판이 더 중요한가, 아니면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평판이 더 중요한가?

3. 같은 부류로부터의 압력 - 많은 선한 이들이 같은 교회의 신자들로부터 압력을 받는 것을 두려워한다. 군중으로부터 나와서 홀로 서는 것보다는 많은 이들의 의견의 물줄기를 따라가는 것이 훨씬 쉽다. 보통의 경우, 우리는 튀기를 원하지 않는다. 하지만 남들과 세상과 다른 것, 이것이 진정한 신앙이다. 우리는 특별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록 부르심을 입었다. (디도서 2:14과 베드로전서 2:9을 보라)

우리의 자연스러운 성향은 점점 커지는 압력에 굴복하기 마련이다. 때로 경건하게 살려는 사람들이 가까운 친구들과 가족들, 또한 교회로부터 압력을 받는다. 진리를 위해 홀로 서기를 원하는 자들에게는 언제나 동료들의 압력이 따를 것이다.

4. 사회적 고립에 대한 두려움 - 진리를 믿는 많은 선한 목사들과 교인들이 목사들과 제직회의로부터 따돌림을 당할까봐 두려워한다. 총 협회에서 하는 어떤 일이 잘못되었다고 믿는 목사들은 만일 그들이 그 일을 반대하면, 당회장이나 합회장 같은 지도자들이 그들을 그다지 지지적이지 않다고 생각하여 다른 곳으로 보내거나, 안수를 받지 못하게 하거나, 혹은 그것보다 더 심한 - 목사직을 박탈당한다거나 쫓겨나는 등 - 일을 당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교인들은 그들이 교회에서 제명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갖는다.

물론 이런 일들이 일어날 수도 있고,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잘못을 보고도 잠잠히 있어야 할까? 과거의 많은 항변자들이 항상 홀로였고, 또한 제적당하였다. 예레미야나 이사야를 보자. 둘 다 곧바른 증언으로 인해 자신들의 직분을 잃었다. 엘리야는 광야로 도망해야만 했다. 그는 자신이, 기근이 있었던 삼년 동안이나 사회적으로 고립되었던 것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충성스러운 그는 갈멜산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지대한 영향력을 끼쳤다. 사회적으로 매장을 당하기는 커녕, 하나님께서는 그를 당시에 가장 중요하고 능력있는 일꾼으로 쓰셨다. 하나님께서 항상 이렇게 하지 않으실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결과를 하나님께 맡기고 항상 진리에 충실해야 한다.

5. 신용을 잃을까 하는 두려움 - 많은 선한 이들이 신용을 잃을까봐 두려워한다. 어떤 이들은 다른 사람들처럼 매끄러운 말솜씨를 갖고 있지 못하다. 또한 반대나 질문을 받았을 때 즉각 대처하는 능력이 없을 수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도전 받을 때 거기에 따르는 질문들에 잘 대답하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 때문에 진리와 잘못된 문제 사이에 접근하기를 두려워한다.

진리를 사랑하는 자들은 그에 관한 즉각적인 대답을 갖고 있지 않을지 모르지만, 도전에 대한 답을 언제나 성경에서 발견할 수 있음을 기억하라. 성경으로 가면, 또한 진리를 사랑하는 이들에게 가면 조언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와 같은 예의바른 태도를 가지되 “고등 교육”을 받은 목사들 때문에 침묵을 지키지 말라. 그들 역시 대답을 모를 수 있는데, 왜냐하면 그들도 성경의 참 가르침을 받지 못했을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인간의 논리가 아닌 영감의 말씀에 의존하라.
두려움을 넘어

선한 이들이 침묵을 지키는 데는 두려움 말고 다른 이유들이 있다.

1. 살금살금 들어온 타협 - 진리가 아닌 것은 교묘하게 들어오기 때문에 단단히 뿌리를 박은 후에나 식별할 수 있다. 처음에는 모든 일들이 잘 풀려져 나간다. 교회 안에는 소위 “연합”이 있다. 그러다 갑자기 교회가 진리로부터 떠나가는 것을 느끼고 성도는 걱정스러운 그의 목소리를 발한다. 논쟁이 시작되고 그 성도는 ‘비난’이니, ‘불일치’니, ‘분열주의자’니 하는 소리를 듣게 된다. 연합을 위해 협력해야 하지 않냐고, 남을 그렇게 비판하지 말라는 소리 말이다.
어떤 사람들은 결론을 내리기에 너무 빨라서, 교회를 위해 걱정하는 사람들이 왜 그런 생각을 갖게 되었는지 성경으로 가서 연구하는 대신, 이들을 바리새인 같은 율법주의자, 광신도, 19세기 사람, 옹고집, 편협한 사람들이라고 부른다. 이런 상황 아래서 진실된 신자들은 오류에 대항하기를 주저하는데 그렇게 하면 문제를 더 심각하게 만들 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상황이 더 심각해질 때도 있다. 그러나 영혼들이 위험에 처해 있을 때, 진리와 정의를 양보함으로써만 얻을 수 있는 연합이라면 차라리 불화와 투쟁의 편을 택하자! 이처럼 굳센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고무시킨 원칙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공언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되살아날 수만 있다면, 교회와 세상을 위하여 얼마나 좋을까!

2. 연구를 등한히 함 - 여기에 더 심각한 이유가 있다. 진실된 사람들이 종종 침묵을 지키는 이유는, 사람들이 성경이 그 주제에 대해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연구하지 않았으므로 그 문제에 대해 거론할 자질을 못 갖추었기 때문이다. 나아가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규칙적으로 연구하는 일에 시간을 바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들은 무엇이 어떻게 되는지 알지 못한다. 이 얼마나 비극적인 일인가!
교회에 오랫동안 출석한 신실한 성도들도 성경 연구의 묘미를 잃어버렸다. 우리는 성경을 읽을지는 모르나 보석을 캐듯이 성경을 연구하지는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무엇이 진리인지 조차도 확실히 구별할 수 없으므로 교회에 대한 자신들의 염려가 성경에 근거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확신이 없다. 이것은 아주 위험한 상태이다. 신실한 신자들은 신실한 학생들이 되어야 한다. 학업은 학교를 졸업했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일생이 배움의 장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것이 되었을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학교에 입학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왜 믿는지에 대해 알도록 우리 자신을 훈련시키고 연구해야 한다.

3. 신학적 열등감 - 많은 경우 진실한 사람들이 성경 연구를 충실히 했음에도 불구하고 신학자들에게 열등감을 느낀다.
부지런한 성경 학도들은 신학자들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제 아무리 박학다식한 신학자라 해도, 루터, 칼빈, 후스와 같은 위대한 종교 개혁자들처럼 자신들을 겸손히 낮추고 성경을 연구하지 않았다면, 오히려 학위가 없지만 겸손한 성경 학도가 진리를 훨씬 더 깊이 있게 이해하고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목사가 석사나 박사 학위가 있다고 해서, 이것이 진리를 갖고 있다는 증거가 될 수 없다.
다른 무엇보다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께서 그리하셨던 것처럼, 신학자들이 우리에 대해서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 하니” (요 7:15) 라고 말할 수 있도록 진리를 알아야 한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신학원에 가지 않으셨다. 그분은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였다.

4. 조용한 증거 - 많은 진실한 이들이 침묵을 지키는데 그들은 자신들의 선한 모본으로써 잠잠히 오류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증거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매우 위험하다. 왜냐하면 많은 경우, 잘못된 오류에 빠진 사람들은 누군가 자신들의 주의를 환기 시키기 전까지는 그것을 스스로 깨닫는 경우가 없기 때문이다. 강력하게 잘못된 것을 주장하든지, 아니면 수동적으로 그것을 받아들이든지 간에 그들은 그들의 계몽되지 않은 마음에 경고를 받을 필요가 있다. 오류는 반드시 폭로되어야 한다.

5. 진리의 비평 - 많은 선한 이들이 진리에 대한 비평을 듣는데 그들은 여기에 어떻게 답해야 할지 모른다. “옛날의 가르침은 구식이고, 지루하다” 든지, 혹은 “이것은 우리의 필요에 맞지 않는다” 는 소리가 들린다. 이런 가치 없는 오류의 합리화는 더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온다. 바른 진리를 믿는다고 공언하는 사람들이 그대로 살지 않고 그리하여 진리를 잘못 나타내는 것이다.

6. 충돌하기 싫어함 - 또 다른 이유는 많은 이들이 투쟁의 결과로 이르러 오는 소요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오류와 정면 대결을 하도록 하늘의 부르심을 받을 것이고 다른 사람들은 일대일로 거짓된 것에 빠진 사람들을 돕도록 부 르심을 받는다.
하나님께서 그대를 부르신 방법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대는 잘못된 가르침에 빠진 사람들을 위해 동정과 친절로 그대가 맡은 책임을 성실히 이행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깊은 사랑으로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때때로, 거기에는 압력과 숨막히는 긴장이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그 때를 위해 힘을 주실 것이며, 달콤한 그리스도인의 사랑의 정신은 이 모든 것을 초월할 것이다.

7. 위선 - 마지막 비극은 침묵을 지키고 앉아있는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죄 가운데 앉아 있으므로 오류가 일어날 때 그것을 분별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반대의 목소리를 낼 수가 없다. 나아가 만일 그들이 그렇게 한다 해도, 그들은 위선자가 되는 괴로움에 빠지는 것이다.

형제 자매들이여,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더 높은 도덕적 기준으로 올라가야 한다. 우리 자신이 하나님께서 나타내신 뜻을 거스려 싸우면서 어떻게 교회 안에 있는 잘못과 오류에 대항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도록 기도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들로부터 떠난 우리의 발걸음을 먼저 해결하도록 해야 한다.

위험

그대는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 거짓된 오류와 타협이 난무하는 이 때, 왜 많은 사람들이 침묵을 지키는지 생각해 보았을 것이다. 침묵의 위험은 오류와 타협에 빠진 자들이 - 목사나 평신도나 간에 - 사람들에 대한 영적인 책임감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데 있다. 하나님께서는 영적인 책임감을 요구하신다. 그러나 너무도 자주 하나님의 교회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책임감을 활용하기를 주저한다.

오늘날 우리의 교회들은 큰 문제에 빠져 있다. 많은 교회와 교인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들을 따르지 않는다. 이제 곧 세상과,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처했으나 신실하지 않았던 자들, 진리를 알면서도 경고의 음성을 발하기를 거절한 자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내릴 것이다.

“인자야 내가 너로 이스라엘 족속의 파숫군을 삼음이 이와 같으니라. 그런즉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에게 경고 할 지어다. 가령 내가 악인에게 이르기를 악인아 너는 정녕 죽으리라 하였다 하자 네가 그 악인에게 말로 경고하여 그 길에서 떠나게 아니하면 그 악인은 자기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 피를 네 손에서 찾으리라 그러나 너는 악인에게 경고하여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라고 하되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지 아니하면 그는 자기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너는 네 생명을 보전하리라” (겔33:7~9).

하나님께서 우리를 신실한 파수꾼 되게 해주시기를 기도드린다.

 

자가면역성 질병


자가면역성 질병에 대해 아시나요?

1. 자가면역성 질병이란 무엇인가?

과거에 영화나 소설에는 고치기 힘든 소위 불치의 병이라고 불리우는 이상한 질병이 많이 등장하곤 했다.

그러나 이제는 드라마에서 뿐 아니라 현시대에 사는 많은 사람들에게 이름조차 낯설고 원인을 도무지 알 수 없는 이상한 질병들이 난무하고 있다. 그 중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병이 자가면역성 질병이다.
자가면역성 질병이란 우리 몸에서 방어기전을 수행하는 T-임파구가 어떤 원인으로 인해 거꾸로 내 몸을 공격하게 되어 생기는 질병이다. 원래 T-임파구는 암세포나 에이즈 병균, 간염 바이러스 등 변질된 세포나 외부에서 들어오는 해로운 병균을 죽여 우리 몸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는 중요한 면역체계인데, 이 면역체계가 망가져서 내 T-임파구가 스스로 내 몸을 공격해서 이 질병이 생기는 것이고, 이런 계통의 질병을 통틀어 자가면역성 질병, 또는 자가면역병이라고 부른다.

2. 자가면역성 질병의 종류

인간에게 발생하는 질병 중 상당히 많은 종류가 바로 이 자가면역성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T-임파구가 잘못돼 자가면역성을 띠게 되면 어느 부위든 공격해 각종 질병을 일으킬 수 있음이 과학자들에 의해 속속 밝혀지고 있다. 이 자가면역성 질병의 종류를 살펴 보자.

* 루프스 : 자가면역성혈관염, 빨간 반점(홍반)이 피부와 간, 뇌, 콩
팥 등 혈관이 퍼져있는 모든 부위에 생기면서 염증을 동반하는 병으로서 전신성홍반성낭창증(루프스)이라 부른다.

* 자가면역성 다발성신경염 : T-임파구가 신경을 공격해 발병한다고 알려진 병. (드물게는 몸 속에 쌓인 독소가 원인이 되거나 당뇨병 합병증이 원인이 될 수도 있다.)

* 치매증 : 치매증도 T-임파구가 뇌신경세포를 공격해서 생긴다는 학설이 있다.
* 파킨슨씨병 : 이 병도 뇌신경세포 중 특수한 세포가 공격을 받아 발병한다는 사실이 최근의 연구결과로 밝혀졌다.

* 원형탈모증 : 이것도 T-임파구가 모근세포를 공격해서 생기는 자가면역병이다.

* 그 외 간염이나 소아 당뇨병도 자가면역성 질병이고, 에이즈도 에이즈 바이러스가 T-임파구를 공격해 후천성 면역결핍증을 일으키는 것으로 자가면역성 질환의 일종이다. 또 T-임파구가 갑상선을 공격하면 갑상선염, 콩팥을 공격하면 만성신부전증, 폐를 공격하면 자가면역성 폐렴이 발병했다가 폐경화증으로 진행된다. T-임파구가 관절을 공격하면 류머티즘성 관절염이 되기도 한다.


자가면역성 질병은 왜 생길까?

1. 자가면역성 질병이 생기는 이유

사실 T-임파구가 자가면역성을 띠고 내 몸을 공격한다는 것은 아주 무서운 일이다. 몸을 지켜줄 막강한 보호세력이 반란을 일으킨 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T-임파구의 자가면역성이 사라지지 않는 한 언제 어느 부위를 공격당해 병에 걸릴지 알 수 없는 채로 불안한 나날을 보내야 한다. 그러면 내 몸을 보호해야 할 T-임파구가 왜 나를 공격하게 되었을까?

이상한 것은 자가면역성 질병은 통계적으로 남성보다는 여성에게 발병률이 높다는 사실이다. 그동안 이 질병은 여성들에게 많이 생긴다는 것이 알려져 있기는 하나 그 이유에 대해서는 밝혀진 것이 없다. 지금까지 과학적으로 규명된 원인도 T-임파구가 변질되어 문제가 발생한다는 사실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자가면역성 질병을 앓고 있는 환자들을 보면 뚜렷한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하거나 탓하는 사람, 화가 나도 잘 참는 사람, 자기표현을 잘 하지 못하는 사람, 피해의식이 강한 사람들이 이 병에 잘 걸린다는 점이다. 환자들 중 남성보다는 여성이 많은 것은 이런 성향이 여성들에게 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정신적인 갈등이나 스트레스, 고통 등이 T-임파구에 어떤 영향을 미친다는 가설이 가능하다. 실제로 그럴까?

2. T-임파구와 정신과의 관계

T-임파구와 정신계통과의 관계를 밝히기 위해 미국 뉴욕주 와처스타 의과대학의 의사가 했던 실험을 예로 보자. 그는 쥐에게 사이클로스포린(T-임파구를 죽이는 약으로 곰팡이에서 추출한 독소)을 주사하면서 주사를 놓을 때마다 설탕물을 먹였다. 쥐는 사이클로스포린이 무엇인지 모르는 채 다만 설탕물을 먹었을 뿐이지만 쥐의 T-임파구는 서서히 죽어갔다. 일주일이 지나자 쥐의 T-임파구 중 90%가 죽어버렸고 그대로 두면 쥐는 면역력이 떨어져 사소한 병균에도 생명이 위험해질 수 있는 상태가 된다. 그럼에도 쥐는 아무것도 의식하지 못한다
.
모든 실험을 중단한 의사가 이번에는 같은 쥐에게 좋은 먹이를 먹여가며 사랑으로 보살펴 주었더니 놀랍게도 골수 속에서 새로운 T-임파구들이 생산되어 일주일만에 완전히 재생되었다. 그런데 본격적으로 T-임파구와 정신계통과의 관계를 밝히는 실험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쥐에게 사이클로스포린은 주사하지 않은 채 설탕물만 먹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더욱 놀랍게도 쥐의 T-임파구가 죽어버리기 시작했다. 이것은 설탕물이 갖는 상징에 T-임파구가 반응한 것이다. 쥐는 사이클로스포린이 무엇인지 몰라도 쥐의 뇌는 그 약물의 의미를 알고 있기 때문에 사이클로스포린을 상징하는 설탕물만 먹어도 ‘아 이것이 내 T-임파구들을 죽이는구나’ 하고 느꼈던 것이다. 이런 뇌의 생각에 T-임파구는 아주 민감하게 반응한다.

이 실험을 통해 우리는 T-임파구와 정신계통이 밀접하게 연관돼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물리화학적인 조건 없이 심리적 고통만으로도 질병에 걸릴 수 있음이 증명된 것이다.

현대의학의 자가면역성 질병 치료

자가면역성 질병은 이처럼 뇌세포의 생각, 심리적 요인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 물리화학적인 지식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그래서 의학적으로는 자가면역성 질병을 제대로 진단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면 현대의학은 자가면역성 질병을 어떻게 치료할까? 의미에 반응하는 질병이라는 사실을 전혀 인정하려고 들지 않기 때문에 치료법도 물리화학적인 처치수준에 그치는 것이 의학의 수준이다.

의학적으로 자가면역성 질병을 치료하는 방법은 참으로 단순하다. 이유는 모르지만 어쨌든 T-임파구가 몸 속의 세포들을 공격하고 있으니 먼저 T-임파구를 파괴하는 것이다. 그래서 쥐의 T-임파구를 죽였던 것과 같은 물질인 사이클로스포린을 이용해 T-임파구를 죽이는 방법이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된다.

T-임파구가 췌장을 공격해 인슐린 생산세포를 파괴함으로써 인슐린이 분비되지 않아 생기는 소아 당뇨병의 경우를 보자. 소아 당뇨병의 원인은 T-임파구가 변질되어 자가면역성을 띠게 된 것이므로 T-임파구를 건강하게 만들어 자가면역성이 사라지도록 만드는 것이 진정한 원인치료다. 그런데 현대의학에서는 T-임파구를 정상으로 돌리려는 노력은 시도조차 하지 않고 그저 췌장을 공격하는 T-임파구를 죽여 혈당수치를 조절하면서 지속적으로 인슐린을 투여하는 것만을 최선의 치료법으로 친다.

자가면역성 질병에 대처하는 의학의 모든 치료법이 이런 식이다. T-임파구를 완전히 죽여버리면 면역기능에 문제가 생기므로 T-임파구의 공격력을 떨어뜨리는 수준에서 투약을 멈추었다가 다시 T-임파구가 살아나면 약으로 죽여버리는 과정을 반복하는 것이다. 이런 방법으로는 T-임파구가 잘못된 원인을 찾아낼 수도, T-임파구를 정상으로 되돌릴 수도 없기 때문에 평생 증세를 관리하며 사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다.

엄밀한 의미에서 자가면역성 질병은 아니지만 T-임파구가 일시적으로 자가면역성을 띠는 경우가 있다. 바로 장기 이식수술을 받았을 때다. 간이나 콩팥 등을 이식받으면 T-임파구가 새로 들어온 장기를 외부에서 침입한 이물질로 판단해 공격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식수술 후에는 이식된 장기가 거부반응 없이 안착할 때까지 보호하기 위해 면역억제제를 복용하도록 돼 있다. 이 약 역시 T-임파구를 죽이는 사이클로스포린이다. 그런데 이식수술을 받은 환자 중 이 약을 복용하지 않고도 수술에 성공하는 사람이 있다. 그 이유는 그 사람의 T-임파구가 의미에 반응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이물질로 판단해 외부에서 이식된 장기를 공격하지만 곧 뇌세포의 명령에 따라 공격을 중단하게 되는데, 뇌세포가 이식된 장기를 받아들여야 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면 T-임파구도 그에 따르는 것이다.

이처럼 자가면역성 질병이든, 이식수술이든 T-임파구가 원인이 아닌데도 현대의학은 여전히 T-임파구를 파괴하는 치료법을 고수하고 있다. 그리고는 면역력이 떨어져 다른 질병이 생기면 또 그에 맞춰 새로운 치료법을 적용하는 것이다. T-임파구가 의미에 반응한다는 사실만 인정하면 간단하게 고칠 수 있는 질병에 어렵게 맞서고 있는 셈이다.

자가면역성 질병 정복의 길

1. 면역체계의 회복

T-임파구를 파괴해서 공격력을 떨어뜨리는 의학적 처치로는 자가면역성 질병을 관리하는데 그칠 뿐 완치는 불가능하다. 완치방법은 오직 하나, T-임파구의 공격적인 성격을 바꿔 본래의 사명인 면역체계로서의 역할에 충실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것은 T-임파구의 성질을 잘 이해해야만 가능한 일이다. 물론 여기에는 면역체계를 높여주는 음식물의 개혁이 수반되어야 함을 독자들은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2. 임파구와 사고방식

사실 원래의병균이나 변질된 세포를 공격해 죽이도록 되어 있는 T-임파구가 자가면역성을 띠는 것은 뇌세포의 생각, 즉 의미에 반응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부정적인 사고방식 속에서 생활할 때가 많다. 그리고 쉽게 부정적인 말을 내뱉을 때가 많다. 쉬운 예로 ‘속상하다’ ‘죽고싶다’는 말을 뜻없이 반복하면 자신의 뇌세포가 그렇게 느끼게 되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 T-임파구가 그 말에 반응한다. 그럴 때 T-임파구가 몸의 장기 중 가장 약한 부위를 공격해 정말 속이 상하도록 하고 유전자를 죽이는 것이다. 이것은 자해행위나 다름없다.

따라서 자가면역성 질병을 예방하거나 치유하려면 스스로를 미워하는 마음부터 버려야 한다. 불필요할 정도로 심한 죄책감을 갖거나, 다른 사람을 배려하기 위해 지나치게 자신의 고통을 참거나 (기쁘고 우러 나오는 감정으로 하면 괜찮지만), 지나치게 걱정을 많이 하여 건강을 상하게 하는 것 등등은 모두 스스로를 미워하는 마음이다. 내가 나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 미워하면 내 대신 내 몸 속의 T-임파구가 내 몸을 벌을 주는 것이 자가면역성 질병의 진짜 원인이기 때문이다.

남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용서하려면 나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누군가를 미워하면 결국 괴로운 것은 누굴까? 오직 나만 괴롭고 속상할 뿐이다. 결국 내 유전자만 상하고 내 T-임파구만 죽어간다. 남을 사랑하고 용서하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의 정신건강을 위해, 더 나아가 내 생명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이다.

3. 놀라운 정복의 길이 여기에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미워하고 싶지 않지만, 걱정하고 싶지 않지만, 사랑하고 싶지만, 그런데 그것이 어디 마음 먹은 대로 되야 말이죠!” 말하기는 쉬워도 진정한 용서나 사랑을 실천하기란 정말 쉽지 않다. 우리는 이 불가능한 일을 스스로는 할 수 없다. 무의식 속에서는 도저히 안되는데 의식적으로만 스스로에게 강요하는 것은 자신을 괴롭히는 일밖에 안된다.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사실을 인정한 후에 조금씩 노력해가면서 의식과 무의식을 일치시키는 것이 진정으로 생명을 위한 길이다. 자가면역성 질병을 치유하는 방법은 이렇게 스스로의 정신건강을 지킴으로써 뇌세포가 T-임파구에게 잘못된 명령을 내리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만이 T-임파구도 파괴하지 않으면서 T-임파구의 자가면역성도 없앨 수 있는 근본적인 치유법이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특별히 이런 질병을 정복할 수 있는 아주 놀라운 길이 있다. 그것은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우리가 믿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는 없지만, 우리의 모든 문제를 숨기지 않고 하나님께 가지고 나갈 수는 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로 가지고 나아가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을 용서할 수 없으면 용서할 수 없다고, 사랑할 수 없으면 사랑하게 되지 않는다고 인정하며 하나님께 알리라!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고 알리며 이야기하라! 미워하는 마음이 있으면 그런 마음이 있다고, 할 수 없으면 할 수 없다는 것까지 이야기하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것, 생각까지라도 아시며 하나님께 말씀드리기 전에도 우리의 마음을 아신다.

우리가 하나님께 모든 것을 인정하고 숨김 없이 말씀드린 그 다음에는 그것이 어떻게 되는가? 인정하고 있는 그대로 가지고 나가 하나님께 말씀드리는 그 일은 단순해 보이기는 하지만 놀라운 치료의 효과를 가지고 온다. 어떻게 그렇게 되는가?

첫째로, 자신의 문제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은 우리 자신을 억누르고 있던 죄책감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준다. 그리고 무의식중에 자신을 벌하며 자신을 미워함으로 자신의 건강과 생명을 해하고 있던 상태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준다.
두번째로, 그 문제를 자신이 혼자 숨기며 가지고 있지 않고 하나님께로 드렸기 때문에 그 문제는 더 이상 자신의 것이 아니므로 얻게 되는 안식과 평안이 있다. 그러므로 그 기쁨으로 인해 임파구가 회복되고 건강이 찾아 오게 되는 것이다.
세번째로, 그 문제를 해결하시는 분은 주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모든 것을 숨기지 않고 그대로 인정하고 가지고 나갈 때, 하나님의 가장 좋으신 뜻대로 이 문제를 해결해 주신다.

사랑하는 마음이 필요하면 사랑하는 마음을 주시고, 용서하는 마음이 필요하면 용서할 능력도 주신다.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께 가지고 나가지 않는 데에 있다.

그런데 결론적으로 알아야 할 것은, 이 일 - 하나님께 있는 그대로 가지고 나아가 이야기하는 일 - 은 한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부정적인 생각, 어려운 일, 해결할 수 없는 생각, 자책감 등등이 떠오를 때마다 이 일을 계속해야 한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문제를 가지고 가시고, 우리의 몸의 문제를 가지고 가시며, 그 대신 건강과 행복과 평안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다! 매 생활 모든 일에 한번 이 방법을 실천해 보자. 실천하는 사람에게는 항상 축복이 따르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이 축복이 모든 독자들의 것이 되기를 바란다.

1부 - 일곱 나팔 예언에 나타난 세상 역사 (계시록 8, 9장)


메뚜기들이 끝없는 구덩이(무저갱)로부터 물밀듯 쏟아져 나온다. 독수리가 공중에서 큰 소리로 외친다. 불 붙는 큰 산이 바다에 던지워 바다가 소리를 내며 끓는다. 큰 별이 하늘에서 강물과 물샘으로 떨어져 물이 쓰게 되고 사람들이 죽는다.

도대체 이런 표현들은 무엇을 뜻하는 것이며, 이 속에 담긴 의미들은 무엇일까? 어떻게 보면 요한 계시록에는 전혀 이해하기 어려운 표현들이 난해하게 펼쳐져 있는것 같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이런 표현들 속에 담긴 의미와 뜻을 연구하여 알게 된다면, 그 속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의 기별과 경고의 말씀이 들어 있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예언을 연구하는 것은 흥미있는 일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신앙에 매우 유익한 일이다. 왜냐하면 예언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영적으로 깨우시고 부흥시키시기 위하여 마련해 두신 방편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과거에 이루어진 예언들을 연구하므로 우리가 믿고 있는 하나님께서 얼마나 정확하게 이 세상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시며, 그리고 미리 예언해 두신 일들을 얼마나 정확하게 이루시는가를 알므로 우리의 믿음과 확신이 더욱 강하게 될 수 있다.

아울러 예언은 우리에게 앞으로 이루어질 사건들을 알려주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깨어나 준비할 수 있게 만들어 준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예언을 연구하기를 원하신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그 예언 속에 담겨진 경고의 메세지를 깨닫고 영적으로 깨어나 마지막 세상 역사에 이르러 올 사건을 위해 준비되기를 원하신다.

이번 71호 “살아남는 이들”에는 요한 계시록 8장과 9장에 나오는 아주 흥미있고 신비로운 “일곱나팔”의 예언에 대해 집중적으로 다루어 보았다. 언뜻 보면 난해하고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예언으로 여겨지지만, 차근 차근 그 비밀과 신비를 함께 연구하다 보면 지금 우리가 살고 시대가 얼마나 심각한 때이며,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렇게 장래의 일까지 아시고 우리를 위하여 예언해 놓으셨을까하고 놀라게 될 것이다.
이 놀라운 예언을 연구함으로 독자들에게 큰 영적 부흥이 이르러 오게 되기를 바란다. - 편집실

예언 연구를 시작하면서

1. 때때로 사랑은 우리에게 고함을 지르게도 하고 매를 들게도 한다.

“철이야! 길거리에서 나와! 지금 당장!” 어린 아이가 복잡한 길거리에서 공놀이를 하고 있을 때, 조용한 목소리로 주의를 주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걸음마를 겨우 하는 어린 아기가 끓는 물 주전자를 뒤집으려는 찰라라면 보통 목소리로는 안 될 것이다. 모든 부모들이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때로는 사랑하기 때문에 소리를 치게 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조용히 타이르고 말씀하시는것을 더 좋아하신다. 그러나 때때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관심과 주의를 돌이키시기 위하여 강한 경고를 발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회개하고 우리의 죄의 길에서 돌이키게 하신다.
일곱 나팔의 예언은 언뜻 보면 엄청나게 무섭기만한 이상한 예언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예언을 연구해 보면 강한 듯해 보이는 그 고함소리 속에 사랑의 메아리가 어울어져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2. 도입부로서의 성소의 장면

“나팔”은 성경 예언에서 “심판과 경고”, 그리고 “전쟁”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일곱 나팔”은 “세상 왕국”(계 11:15)들간에 일어나는 일곱 전쟁을 가리키는데,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계속적으로 거절하고 진노의 잔을 채운 타락한 교회와 교황권, 그리고 교황권을 도와 주고 옹호하는 세력을 어떻게 심판하시는지에 대해 말하여 주고 있다. 그러나 또한 나팔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들을 구원하시겠다는 놀라운 섭리와 소망의 약속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천사들이 일곱 번의 경고 나팔을 불기 전에 이 일곱 나팔의 예언인 도입부로서 계 8:2~5에는 성소의 장면을 보여 주고 있다. 그 이유는 왜일까?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와 일곱 인에는 모두 성소와 관련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나온다.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들이 소개되기 직전에는 대제사장의 옷을 입으시고 일곱 금촛대 사이를 다니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나오고, 일곱 인을 떼시기 전에는 예수님을 상징하는 유월절 어린 양이 하나님의 보좌 곁에 서 있는 모습도 보인다. 지금 이 구절(계 8:2~4)에도 한 천사가 금향단에서 향을 받들고 있는 모습이 나타나 있는데, 이 모든 장면들은 모두 성소에서나 볼 수 있는 장면들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를 돌보시며, 우리의 기도를 상징하는 “향이 가득한 금대접”을 드시고 항상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의 모습과 “천사가 향로를 가지고 단 위의 불을 담아다가 땅에 쏟으매 뇌성과 음성과 번개와 지진이 나”(계 8:7)고 그로 인해 땅과 나무가 타는 엄청난 일이 일어나게 되는 장면을 어떻게 연결시키며 설명할 수 있을까?

3. 경고는 사랑의 또 다른 표현

사랑은 때때로 고함을 지르기도 하고 처벌을 내리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처벌은 우리로 회개하게 하고 나쁜 길에서 돌이키게 하려고 하시는 것이며, 둘째로 우리들을 원수들의 핍박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우리의 원수들을 처벌하는 것이다. 또한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어떤 국가나 개인을 처벌하실 때는 그냥 처벌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분께서는 먼저 처벌하시는 대상으로 하여금 충분히 회개할 기회와 은혜의 시간을 주시며 기다리신다. 그러나 끝까지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거절한 대상에게는 할 수 없이 하나님의 간섭과 보호를 거두심으로 당연한 결과를 거두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향로를 이 땅에 쏟는 것은 그 대상이 되는 나라들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의 시간이 끝나고 심판이 시작되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이 일곱 나팔의 예언은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과 오래 참으시는 인내를 끝내 거절한 이 세상의 타락한 나라들과 교회에 앞으로 임할 심판을 가리키고 있다.

일곱 나팔 서론부

1. 요한 계시록 8:2~4

“내가 보매 하나님 앞에 시위한 일곱 천사가 있어 일곱 나팔을 받았더라. 또 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 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들과 합하여 보좌 앞 금단에 드리고자 함이라. 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지라”.
비록 세상을 뒤흔들 무서운 일곱 전쟁에 관한 예언이지만, 일곱 나팔에 관한 예언은 격려와 희망의 메시지로 시작된다. “일곱 천사”가 세상의 전쟁들과 투쟁들에 대하여 관여하고 있을 때에 “또 다른 천사”(3절) 가 다른 명령을 받게 된다. 이 천사는 하늘 성소 안에 서있는데, 하나님의 백성들의 필요와 간구를 “성도의 기도들과 합하여 보좌 앞 금단에” 드리는 임무를 받았다. 그 이유는 성도들이 두 손 모아 비는 모든 기도들을 하나님 보좌 앞에 올림으로써, 하나님의 백성들의 필요를 채우고 안전을 지키기 위해서이다.

“향”(3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향기를 상징한다. 우리가 기도를 드릴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죄로 말미암아 무가치하게 된 죄인으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그분께서는 우리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를 본다. 우리의 기도는 우리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의 소원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예수께서는 기도하는 영혼들을 대신하여 그 간구가 마치 자기 자신의 소망인 것처럼 겸손한 탄원자의 기도를 드리신다. 비록 기도가 유창하게 표현되지 않았을지라도 그것이 마음에서 우러나왔다면 이것은 예수께서 봉사하시는 지성소에 올라갈 것이며, 예수께서는 귀찮게 여기시거나 더듬으시는 말씀은 한마디도 없이 완전하신 자신의 아름답고 향기로운 향과 함께 이것을 하나님 앞에 바치실 것이다.
이렇게 우리의 기도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소원이 담겨져 있으면, 우리의 기도는 그리스도의 의와 소원이 담겨져 있는 감미로운 향기가 되어 하늘 아버지께 올려진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는 의미이다. 예수께서는 이 고통과 격정의 세상에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고민을 아신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아오는 모든 죄인들을 돕기 원하신다. 그대가 어떠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나아가 간구함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2. 요한계시록 8:5~6

“천사가 향로를 가지고 단 위의 불을 담아다가 땅에 쏟으매 뇌성과 음성과 번개와 지진이 나더라. 일곱 나팔을 가진 일곱 천사가 나팔 불기를 예비하더라.”

앞 2~4절에서 향로는 향을 담아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기도를 하나님께 올리는 데 사용되었다. 그런데 여기서는 이 향로에 단 위의 불을 담아다가 땅에 쏟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로 인하여 땅에서는 뇌성과 음성과 번개와 지진이 일어난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을 보호하기 위하여 사용되던 향로에 제단 위의 불이 담겨질 때에는 땅을 심판하는 일이 시작된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다. 뇌성과 번개와 지진은 그 다음에 나타날 첫번째 천사의 나팔로 인하여 내려질 불과 연결되어 일곱 나팔의 시작을 알린다.
하늘 성소의 향로에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상징하는 향이 담아졌을 때에는 죄인을 보호하시고 감싸시는 사랑이 나타났으나, 그 사랑을 계속적으로 끝까지 거역하는 자들에게는 동일한 향로를 통하여 심판이 실행된다. 이 말씀을 통하여 죄인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끝까지 거절하는 악인들에 대한 심판은 모두 의롭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죄인에 대한 사랑과 악인에 대한 심판이 같은 향로를 통하여 일어나기 때문이다. 악인들도 그들이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아 들인다면 바로 이 향로를 통하여 용서함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일곱 나팔의 개요

1. 일곱 나팔은 모두 넷과 셋으로 묶어서 처리되고 있다. 즉, 앞 부분의 네 나팔과 뒷 부분의 세 나팔인 다섯째 나팔과 여섯째, 그리고 일곱째 나팔이다. 그런데 계시록 8:13절은 앞 부분의 네 나팔보다 그 뒤를 따라오는 세 나팔(다섯째, 여섯째, 일곱째 나팔)이 더 무서운 세개의 “화”를 가지고 온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다섯째 나팔은 “첫째 화”이고, 여섯째 나팔은 “둘째 화”이고, 일곱째 나팔은 “세째 화”이다.
2. 1~4째 나팔은 타락하고 배도한 교회와 그 배후 세력인 로마제국, 즉 서 로마 제국의 멸망을 다루고 있다.
3. 5~7째 나팔들은 세 가지 “화”들로서 6,7째 나팔들은 특히 이슬람 세력이 동 로마와 교황권을 침공하여 괴롭히고 심판하는 모습을 예언하고 있으며, 7째 나팔도 현재 이슬람의 미국을 향한 공격과 관련되어 있다.
이제부터 어려운 듯 하지만 연구해 보면 아주 흥미진진한 일곱 나팔에 대하여 함께 공부해 보도록 하자.

 

2부 - 첫째 나팔과 둘째 나팔


첫째 나팔 : 고트족의 침입을 받는 서 로마제국

A.D. 395년, 알라릭이 이끄는 고트족이 로마제국을 침입함

요한계시록 8:7 “첫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피 섞인 우박과 불이 나서 땅에 쏟아지매 땅의 삼분의 일이 타서 사위고 수목의 삼분의 일도 타서 사위고 각종 푸른 풀도 타서 사위더라.”

성경 구절 공부

1. “첫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성경의 여러 곳에서 나팔은 전쟁과 심판에 연관되어 있다. 고대에는 전쟁을 위해 병사들을 소집할 때, 그리고 전투 중에 기별을 전할 때 나팔을 사용했다. 이 일곱 나팔의 예언에는 전쟁과 심판이 결합되어 있다. 특히 성경 요엘서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가까왔음을 알리면서 백성들을 경고하고 회개하라고 촉구하기 위해 나팔을 불라는 표현이 나온다.

2. “피 섞인 우박과 불이 나서”
“우박”과 “불”은 전투에 대한 고대의 시적 묘사에서 비롯한 것이다. 우박과 불은 “피”와 함께 전쟁의 특성을 나타내고 있다. 첫 번째 나팔에 나온 “우박”은 추운 북쪽 나라의 침입자들을 가리키며, “불”은 농가들과 도시들이 불타는 모습을 나타내고, “피”는 이 침입자들에 의해 주민들이 학살 당하는 것을 상징한다. 쓸만한 푸른 풀의 삼분의 일이 불타서 없어지는 표현도 세계 전체에 걸친 대 살륙은 아니라 할지라도 대단히 심각한 수준의 군사 행위에 대한 묘사이다.

3. “수목의 삼분의 일도 타서”
“나무”는 성경에서 지도적 계층에 있는 사람들을 가리킬 때 쓰는 말이다. 사사기 9:8,9에 보면 “하루는 나무들이 나가서 기름을 부어 왕을 삼으려 하여 감람나무에게 이르되 너는 우리 왕이 되라 하매 감람나무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의 기름은 하나님과 사람을 영화롭게 하나니 내가 어찌 그것을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요동하리요”라고 하였다. 또한 예수께서 자신과 제자들을 가리키시는 상징으로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눅 23:31) 라는 표현, 즉 사람을 나무로 표현하시는 말씀을 하셨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나무”는 백성을 상징하며, 이 성경절 사사기 9:8,9 의 표현을 보면 나무들이 지도자를 뽑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특별히 지도적 계층에 있는 많은 사람들도 죽임을 당할 것을 예언하고 있는 것이다.

4. “각종 풀도 타서 사위더라”
이사야 44:3,4절에는 “대저 내가 갈한 자에게 물을 주며... 나의 신을 네 자손에게, 나의 복을 네 후손에게 내리리니 그들이 풀 가운데서 솟아나기를 시냇가의 버들 같이 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들이 풀 가운데서 솟아”날 것이라고 하였으므로 “풀”도 사람들을 가리킨다. 또한 풀은 아무 곳에서도 잘 자라기 때문에 “각종 풀도 타서 사위더라”는 뜻은 많은 평민들이 죽임을 당할 것을 가리킨다.

예언 해석

1 첫째 나팔의 시작점 : 일곱 교회와 일곱 인의 예언은 그리스도교 역사의 전 기간을 망라하는데, 일곱 교회와 일곱 인의 시대처럼 일곱 나팔의 시작점도 초기 기독교 시대, 즉 로마 제국으로부터 시작된다. 첫 번째 “나팔”은 한 때 천하무적이었던 로마, 특히 타락한 교회인 교황권과 그를 후원하던 배후의 세력인 서 로마가 정복 전쟁에 시달리기 시작하면서 점점 퇴화되어 가는 역사의 시작점으로부터 시작되고 있다.

2. 서 로마 제국의 멸망 : 로마제국은 다른 어떤 나라들보다 진리의 빛을 받을 기회를 많이 가졌던 나라였다. 인류의 구주이신 그리스도께서도 로마에 속한 유대 국가의 국민으로 탄생하셨다. 또한 사도들이 복음을 전파한 주요 지역 중의 하나도 로마 제국이었다. 그러나 로마는 그 빛과 특권을 무시하고 배척하였으며,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거절하였다.
로마 나라는 사도 바울이 순교당한 당시의 로마의 네로 황제의 박해를 비롯하여 순결하고 진실되고 진리를 고수하며 타협하지 않는 하나님의 참 백성들을 박해하고 핍박하고 죽였으며, 그 나라에서 하나님의 진리를 믿고 간직하며 이교와의 타협과 교회의 타락을 저지하고 순수한 신앙을 지키던 수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피가 흘려졌다. 그리고 이교도였던 콘스탄틴 황제의 개종과 더불어 이교와 그리스도교를 혼합시키는 일이 일어났으며, 한 국가로서 그 당시 태양신을 섬기는 이교의 휴일이었던 일요일을 강제로 지키게 하는 법을 만들어 진실된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 일을 하였으며, 이 로마에서 불법의 사람(살후 2:3,4) 교황과 교황권의 세력을 확립하고 그를 지지하는 세력이 구축되었다. 그리하여 그 당시 하나님의 자비의 초청을 거절하고 은혜의 시간을 채워버린 서 로마는 첫째 나팔이 불려지면서 참혹한 전쟁의 화를 당하게 되었다.
게르만족의 이동과 침략에 따라 그렇게 튼튼하던 로마제국, 특별히 서 로마가 어떻게 서서히 붕괴해 가게 되었는지, 또한 진리를 믿는 하나님의 참 백성들을 핍박하는 타락한 교회를 지원하던 서 로마가 어떻게 하나님의 자비의 잔을 채워 심판을 받게 되었는지 역사는 증명해주고 있으며, 우리는 그 역사와 예언을 통해 그 역사의 뒤에서 세상을 주관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는 것이다.

역사적 성취

다니엘서는 “무섭고 놀라우며 또 극히 강하며 또 큰 철 이가 있어서 먹고 부숴뜨리고 그 나머지를 발로 밟았”(다니엘 8:7)던 로마 제국이 차츰 멸망당할 것인데, 다른 나라에 완전히 정복되어지지는 않고 단지 독립적인 열 개의 부족국가로 나뉘어질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다(단 2:40, 42; 7:23, 24 참고). 로마 제국이 번영함에 따라 하나님의 참 교회를 더욱 핍박하여 순교자들의 피를 흘리며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타락하자, 시민들은 극히 부하게는 되었으나 그들의 도덕적 타락상은 불운한 운명을 자초하게 되었다.
국가적으로 하나님의 진리의 초청을 거절한 서 로마제국에 하나님의 심판의 채찍이 내려지게 되었다. 로마제국 북쪽에 살고 있었던 야만적인 부족들은 연약하여지고 타락된 로마제국의 부와 안락한 생활을 탐내고 있었다. 마침내 A.D. 395년 알라릭이 이끄는 고트족의 군대는 동북 쪽에서부터 로마제국으로 침범해 들어왔다. 그리고 A.D. 410년에는 알프스를 넘어 로마 시까지 침입하여 공격하여 제국의 3분의 1을 침략 정복하였다. 고트 사람들은 역사가 증명하는 것처럼 3~5세기에 로마 제국에 침입하여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에 왕국을 건설한 “튜튼” 족의 한 파로서 난폭한 야만족으로 알려져 있었으며, 그들의 침략으로 인한 전쟁은 정말 “땅과 수목의 3분의 1”이 파괴될 만큼 무섭고 치열한 것이 되었다.



둘째 나팔 : 반달의 침입을 받는 서 로마제국
A.D. 428~468년 동안에 가이세릭이 이끄는 반달족이 지중해 연안의 로마제국의 영토를 침입하여 생긴 전쟁들

요한계시록 8:8,9 “둘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불붙는 큰 산과 같은 것이 바다에 던지우매 바다의 삼분의 일이 피가 되고 바다 가운데 생명 가진 피조물들의 삼분의 일이 죽고 배들의 삼분의 일이 깨어지더라.”

성경 구절 공부

1. “큰 산과 같은 것”
예레미야 51장 25절에 보면 고대 바벨론 제국을 “멸망의 산”이라고 불렀다. 그것처럼 성경에서 “큰 산과 같은 것”은 어떤 나라를 가리킨다.

2. “바다와 배”
이 예언은 반달족이 지중해를 배경으로 해전을 통해 로마를 침공하고 괴롭힌 전쟁의 사건들을 다룬 것인데, 해전을 바다와 배의 상징 언어로 표현한 것은 정말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예언 해석

북부 아프리카에 위치한 반달족이 서 로마를 침공하여 오랫동안 지중해를 배경으로 큰 해전들이 치르어 졌다. A.D. 455년에 반달족 (로마 문화의 파괴자라고 불리는 게르만의 한 종족)이 로마를 두 번째로 침입하였을 때에 그들은 두 주일 동안 로마의 예술, 문화, 공공시설 등을 무자비로 파괴하였다. 그들은 값이 나가는 모든 귀중품들을 파괴하였으며, A.D.70년대에 로마의 장군 타이터스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로마로 빼앗아간, 일곱 금 촛대도 그들의 본부가 있었던 카르타고(아프리카 북안의 고대 도시 국가)로 가져갔다.
반달의 우두머리였던 겐세릭은 무서운 약탈자였다. 그의 해군 부대가 있었던 북아프리카에서부터 그는 정규적으로 로마제국의 해안 도시들을 약탈하였다. 그리하여 지중해를 배경으로 큰 해전들이 치르어졌다(그 중 칼타고 전쟁이 가장 유명한 전쟁이었음). 그 때에 큰 배들이 바다에 빠졌으며, 해상에서 치열한 전쟁들이 치르어졌다. 역사에 보면 겐세릭의 한 부하가 “이제 어디로 갈까요?”라고 물었다고 한다. 그러자 그 때 겐세릭이 대답하기를 “신이 분노하시는 자들을 치러가자”라고 하였다. 이 말은 로마가 하나님의 백성들을 괴롭힌 그 대가를 받고 있다는 의미가 숨겨져 있는 것이다.

역사적 성취

A.D. 428~468년까지 계속된 반달족의 침입은 “불 붙는 큰 산과 같은 것이 바다에 던지”운 것 같았다. 북아프리카에 기지를 둔 반달족은 지중해 연안의 서 로마제국의 영역이었던 이태리와 그리스 지역을 침범하여 그들의 배들을 불태웠다. 로마제국의 황제는 이들을 대항하기 위하여 300척이 넘는 군함을 준비하여 카르타게나에서의 전면전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반달의 겐세릭은 로마의 계획을 미리 포착하고 몰래 항구로 침입하여 로마의 군함들을 모두 파괴하였다.
A.D. 468년, 로마의 황제는 반달족에 대항하기 위하여 또 한번 시도를 한다. 10만 군인들이 1113척의 배를 타고 반달족과 싸우기 위해 반달족의 본부가 있는 북 아프리카의 카르타고로 진격하였다. 그러나 이번에도 반달족의 우두머리는 불이 붙은 배를 로마의 함대 가운데로 보내어 로마의 함대가 큰 혼란에 빠지게 하였고, 이로 인해 로마는 또 다시 참패를 당하였다. 큰 배들이 바다에 빠지는 광경들이 연출되었다. 반달족의 우두머리였던 겐세릭은 그가 죽기 전, 서 로마 제국이 멸망당하는 것을 보았다.
이렇듯이 참 하나님의 백성들을 핍박하고 죽이고 하나님의 진리를 대항하여 괴롭히던 타락하고 배도한(진리에서 떠나 인간의 유전을 가르치던) 교회인 교황권을 지지하고 힘을 주던 배후 세력 서 로마제국이 어떤 심판과 일을 당할지에 대하여 성경에는 오래 전부터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의 안목에는 모든 세상 역사가 그림처럼 펼쳐져 있다는 것을 안다면, 그리고 세상의 역사를 손바닥에 올려 놓듯이 보고 계시는 것을 안다면, 그리고 그런 위대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하나 하나를 눈동자처럼 돌보고 계신다는 것을 믿는다면 우리의 생애는 얼마나 더 행복하고 평안한 것이 될 수 있을까? 그러면 계속해서 셋째 나팔과 네째 나팔은 어떤 것인지 연구하여 보자.

3부 - 셋째 나팔과 넷째 나팔


셋째 나팔 : 훈족의 침입을 받는 서로마
A.D. 450년경, “신의 재앙”이라고 불리는 훈족의 아틸라가 로마를 공격함.

요한계시록 8:10-11 “셋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횃불 같이 타는 큰 별이 하늘에서 떨어져 강들의 삼분의 일과 여러 물 샘에 떨어지니 이 별 이름은 쑥이라 물들의 삼분의 일이 쑥이 되매 그 물들이 쓰게 됨을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더라.”

성경 구절 공부

“큰 별이 하늘에서 떨어져” : 셋째 천사의 나팔로 인하여 펼쳐진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별의 반짝임처럼 나타나서 물 속에서 그 불이 꺼진 사람이 누구인지를 밝혀야 한다. “강물”은 “바닷물”과 다른 기능을 가지고 있다. 강물은 직접적으로 사람들에게 식수와 농경 수를 제공한다. 그러므로 “강물”은 사람의 생명에 직접 관련되어 있으며, 강물이 쓰게 되어 마시지 못할 것으로 되었다는 것은 이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죽을 것이라는 뜻이다. 또한 “물 샘”은 강물이 만들어지는 곳이다. 물 샘에서 시내가 흐르게 되고 시내는 강으로 모여들어 바다의 생물들을 살리며, 사람들에게 식수를 제공하게 된다. “물 샘”이 독물로 변한다는 것은 더 이상 그곳이 사람이 살 수 없을 만큼 완전히 파괴되어진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예언 해석

하나님의 진리를 말살하고 성경의 진리대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던 로마제국의 황폐는 반달족의 침입으로 끝나지 않았다. 얼마 후 더 심각한 상황이 닥치고 말았다. 그것은 새로운 장군이 일어나 로마를 공격한 것이었는데, 그 장군의 이름은 ‘아틸라’였다. 그는 야만적이고 잔인하기로 이름난 훈(Huns-오늘날 헝가리의 이름을 따온 유목민)족을 이끌고 있었다. 어떤 역사가가 말하기를 “그(아틸라)의 나타남은 마치 빛나는 별이 하늘에서 번쩍임과 같았다. 그는 동쪽에서 와서, 그의 훈족을 모았고, 그들을 별빛이 빛나듯 짧은 시간 안에 남쪽 제국으로 몰아갔다.”

역사적 성취

아틸라는 유럽일대를 휩쓸었다. “물 샘”에 떨어진 독처럼 “그의 말이 밟은 자리는 풀이 다시 자라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신의 재앙’이라고 일컬었으며, 신의 심판자라고 자칭하였다. 그는 전쟁시 화려하고 빛나는 옷을 입고 싸웠으며, 전쟁의 신인 화성의 대리자라고 불리우기도 했다... 그의 잔인함과 파괴가 심하여 그를 ‘쑥’이라고 별명하였다. 서 로마 제국의 원로원들과 백성들은 아틸라 앞에 무릎을 꿇었다” (Alexander Keith, Signs of the Times, V.1, P.267).
그런데 아틸라가 죽은 A.D. 453년, 훈족의 군대들도 역사 속에서 갑자기 자취를 감추었다. 그들은 정말로 반짝이고 급히 사라지는 유성과도 같이 역사 속에 갑자기 나타났다가 짧은 시간 내에 사라져 버린 것이다.

 

넷째 나팔 ; 서 로마제국의 멸망과 분열
A.D. 493~526, 동 고트의 데오도릭 왕권이 로마 황제의 자리를 대신함. A.D. 541, 서 로마의 집정관 제도가 동 로마의 저스티니안 황제에 의하여 사라짐.

요한계시록 8:12,13 “넷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해 삼분의 일과 달 삼분의 일과 별들의 삼분의 일이 침을 받아 그 삼분의 일이 어두워지니 낮 삼분의 일은 비췸이 없고 밤도 그러하더라. 내가 또 보고 들으니 공중에 날아가는 독수리가 큰 소리로 이르되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화, 화, 화가 있으리로다 이 외에도 세 천사의 불 나팔소리를 인함이로다 하더라.”

성경 구절 공부

“해, 달, 별”의 의미 ; 해, 달, 별은 성경에서 문맥에 따라서 서로 다른 것을 상징하였다. 여섯째 인(요한계시록 6:12-17)에 나오는 “해가 총담 같이 검어지고 온 달이 피 같이 되며 하늘의 별들이... 떨어지”는 일은 역사적으로 1780년 5월 19일 암흑일과, 1833년 11월 13일의 낙성일에 이루어졌다. 일곱 재앙에 나오는 해, 달, 별도, 출애굽 때에 내렸던 일곱 재앙처럼 상징이 아니고 실제를 가리켰다. 그러나 요한계시록 12장에 나오는 해를 입고 달을 밟고 별의 면류관을 쓴 여인에서 나오는 해, 달, 별은 빛 즉 그리스도의 의를 상징하였다. 또한 요셉의 꿈에 나온 해, 달, 별은 요셉의 아버지, 어머니, 형제들을 상징하였다. 그러므로 해, 달, 별이 상징하는 의미가 언제나 일정한 것이 아니고 문장에 따라서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넷째 나팔에 나오는 해, 달, 별에 대한 예언은 서 로마 제국의 멸망을 상징하는 것이므로, 해는 황제, 달은 상원의원들, 별들은 각 지방의 장관들을 상징하는 것이다. 천하를 호령하던 로마황제들과 상원의원들과 지방장관들은 동고트의 데오도릭 장군의 침략으로 많이 죽임을 당하여 그 빛을 잃어버리고 어두어지게 된 것이다.

우리는 일곱 천사의 나팔들이 일곱 인과, 일곱 재앙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땅을 심판하시는 모습을 그리고 있음을 확신할 수 있다. 요한계시록 8:5절에서 “천사가 향로를 가지고 단 위의 불을 담아다가 땅에 쏟으매 뇌성과 음성과 번개와 지진이” 났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넷째 천사의 나팔에 나오는 “침”의 근원이 하늘임을 알 수 있다. 또한 하나님께서 관여하시는 전쟁은 단순한 정복 전쟁이 아님을 구약 성서를 통하여 알 수 있다. 아브라함이 계시 가운데 자기의 후손 이스라엘 자손이 이방 나라에서 4백년 동안 나그네가 되리라는 것을 보았을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은 사대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창세기 15:16)고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아모리 족속에게 400년 동안 은혜의 기간을 허락하셨으나 그들은 하나님을 계속 배반하였으며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만 하였다.

소돔의 멸망과 바벨론의 멸망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각 나라마다 은혜의 기간을 주시고 그 기간이 차도록 그들이 하나님을 배반하면 결국 심판이 내리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벨론이 멸망당할 때에 “하나님이 이미 왕의 나라의 시대를 세어서 그것을 끝나게 하셨다 함”이라고 하였다. 일곱째 천사가 팔을 불었을 때에 “...죽은 자를 심판하시며 종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또 무론 대소하고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상주시며 또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실 때”(요한계시록 11:18)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일곱 나팔은 단순한 침략 전쟁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를 끝내 거절한 타락한 교회에 전쟁들을 통하여 내리는 하나님의 심판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예언 해석

1~3째 나팔의 심판을 통하여 로마 제국이 치명타를 당한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 그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한 나라가 완전히 분열되기 위해서는 그 정부가 완전히 바뀌어져야 한다. 3째 나팔까지 아직 로마는 그 정부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둘째 나팔에 나온 “횃불 같이 타는 큰 별”은 로마를 공격하는 장군 아틸라를 상징하였다. 또한 지금까지 나온 우박, 나무, 풀, 산, 바다, 강들이 실제가 아니라 상징으로 사용되었고, 넷째 나팔에 나온 “별”도 어떤 인물을 가리켰기 때문에, 해, 달도 실제가 아니라 상징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요셉이 꿈에 본 해, 달, 별이 아버지, 어머니, 형제들을 상징한 것처럼, 셋째 나팔에 나온 해, 달, 별도 로마의 황제, 원로원, 집정관의 삼권제를 표상 한다.

네째 나팔은 훈 족의 후예 Odoacer이 서 로마를 침략, 정복하여 로마의 판도를 다스린 첫 야만인이며 이방족 왕이 된 사실을 상징한다. 이것은 서 로마의 심각한 쇠퇴를 가져 오게 되었다. 로마의 마지막 황제는, ‘아구스투러스’라고 불렸던 ‘로물러스’였다. 그는 원로원에 사임의 의사를 전달했으며, 원로원은 그 때 당시 비잔티움 제국(동로마 제국)의 황제였던 ‘제노’에게 서신을 띄워 이제부터 서 로마 제국에는 더 이상 황제가 필요 없으며, 수도를 로마에서 콘스탄티노플로 이주해야 할 것을 알렸다. 결국 서 로마는 A.D. 476년에 무너지고 말았다.

역사적 성취

그 후 이태리는 새 정복자 동 고트족의 데오도릭이 다스리게 되었다. 데오도릭의 왕권은, 로마와 라베나에서 헬루라이를 정복함으로, A.D. 493년 3월 5일에 세워져 526년까지 계속 되었으며, 로마나 콘스탄티노플의 로마 황제의 권위는 이태리에서 인정받지 못하였다. 해 삼분의 일이 침을 받아 어두워져서 더 이상 빛을 발휘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씨저가 세웠던 로마 황제의 권위는 없어졌으나, 서 로마 제국의 달과 별들은 고트족의 어두움 아래서도 조금 더 그 빛을 비출 수 있었다. 데오도릭은 로마의 원로원과 집정관들을 이태리의 가장 높은 정치권으로서 계속 인정하여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언에 나타난 대로 로마의 달과 별도 그 빛을 잃었다. 원로원과 집정관 제도는 반달족이나 고트족의 손에 사라진 것이 아니라 동 로마 제국의 저스티니안 황제의 소속 장군이었던 벨리사리우스가 이태리에서 일으킨 반란으로 말미암았다. 로마의 집정관 제도는 A.D. 541년 저스티니안 황제에 의하여 사라졌다. 그렇게도 맹렬하고 많은 참된 그리스도인들과 하나님의 백성들을 핍박하던 로마제국의 권세는 이렇듯 어이없이 끝이 나고 말았다.

4부 - 다섯째 나팔과 여섯째 나팔


다섯째 나팔 : 첫째 화
*
이슬람 세력이 올라와 동 로마제국을 침략하여 로마제국의 종말이 옴. 모하메드가 죽은 후, 아부바커가 로마를 향하여 정복전쟁을 시작.

* 다섯달: 1299년 7월 27일 (오토만이 터키 왕조를 세움)부터 1449년 7월 27일 (로마제국이 터키에 무릎을 꿇음)까지의 150년 기간

요한 계시록 8:13 “내가 또 보고 들으니 공중에 날아가는 독수리가 큰 소리로 이르되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화, 화, 화가 있으리로다. 이 외에도 세 천사의 불 나팔소리를 인함이로다 하더라.”

화, 화, 화
다섯째 나팔(계 9:1~4)이 시작되기 전에 한가지 주의를 기울여야 할 구절이 나오는데, 그것은 8장 마지막 절에 나오는 “화, 화, 화”에 대한 구절이다. 앞의 네 나팔도 적잖이 공포를 일으키는 무서운 것이었는데, 다섯째 나팔 바로 전에는 앞으로 올, 세 천사의 불어 댈 나팔소리로 인한 사건에 첨가하여 “화”가 있으리라는 경고가 나옴으로 앞으로 불어질 나머지 세 나팔이 얼마나 더 심각하게 무서운 것임을 알 수 있게 만든다.

요한계시록 9:1-4 “다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내가 보니 하늘에서 땅에 떨어진 별 하나가 있는데 저가 무저갱의 열쇠를 받았더라. 저가 무저갱을 여니 그 구멍에서 큰 풀무의 연기 같은 연기가 올라오매, 해와 공기가 그 구멍의 연기로 인하여 어두워지며 또 황충이 연기 가운데로부터 땅 위에 나오매 저희가 땅에 있는 전갈의 권세와 같은 권세를 받았더라. 저희에게 이르시되 땅의 풀이나 푸른 것이나 각종 수목은 해하지 말고 오직 이마에 하나님의 인 맞지 아니한 사람들만 해하라 하시더라.”

성경 구절 공부

1. “하늘에서 떨어진 별” ; 셋째 천사의 나팔에 나오는 “횃불 같이 타는 큰 별”이 어떤 세력의 지도자를 상징했듯이, “하늘에서 떨어진 별”도 새로운 세력의 지도자를 상징한다.

2. “무저갱” ; “무저갱”은 “측량할 수 없는”, 또는 “바닥이 없는” 의 의미를 갖고 있는 헬라어 “아부소스(abussos)” 에서 번역한 것인데, 그것은 마치 무덤같기도 하고 “황야처럼 광막한 곳”을 의미하며, 상징적으로는 악의 세력을 가리킨다. 어떤 학자들은 이 “하늘에서 떨어진 별”을 사단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에서 사단이 무저갱의 열쇠를 받았다는 기록은 나오지 않는다. 무저갱의 열쇠를 받은 기록은 오직 요한계시록 20:1절에 하나님의 천사가 사단을 잡기 위하여 무저갱의 열쇠를 가지고 하늘로서 내려온다는 기록뿐이다. 그러므로 이 무저갱의 열쇠를 받아 가지고 일으키는 나라는 사단이 하나님의 백성을 공격하기 위하여 일으키는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배교한 나라들을 치시려고 모으시는 세력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각종 수목은 해하지 말고 오직 이마에 하나님의 인 맞지 아니한 사람들만 해하라”고 하신 말씀으로 더 확실해 질 수 있다.
무저갱에 대한 기록은 요한계시록에 일곱 번 나타난다. 요한계시록 11:7절에 보면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성경 말씀과 싸우는 장면이 나오며, 17장 8절에는 “짐승”이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장면이 나온다. 다니엘서에 의하면 짐승은 ‘나라’를 상징한다. 바벨론은 사자로, 메데 페르시아는 곰으로, 그리이스는 표범으로 표상 되었다(다니엘 7장 참고). 그러므로 짐승은 나라를 상징하고, 이 나라들은 이 땅에 실제로 있었던 나라들이므로 무저갱은 넓은 의미로 이 지구를 상징하고, 좁게는 지구에서 황폐되고 광막한 곳을 가리킨다. 그런데 “저가 무저갱의 열쇠를 받았”다는 뜻은 세상에서 새로운 국가나 세력을 일으킬 것을 의미하고, 이 새롭게 부각되는 국가는 지구에서 특별히 황폐된 지역을 중심으로 일어날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3. “황충”과 “전갈” ; 황충”(메뚜기)과 “전갈”은 특히 광야, 사막에서 서식한다. 그러므로 무저갱의 열쇠를 가지고 있다고 상징된 어떤 지도자가 광야지역을 중심으로 한 나라를 일으킬 것이며, 이 나라가 1-4째 나팔의 중심이었던 로마 제국 시대 이후로 연결되는 유럽에서 막강한 세력을 떨치게 될 것을 가리킨다.

4. “연기로 인하여 어두워지며” ; 또한 그 메뚜기(황충)들은 “무저갱”에서 올라오는 검은 연기에서 나왔다. 여기에 나오는 어두움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진리를 가리거나 거부하는 잘못된 교훈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성경은 하나님의 진리를 나타내는 밝은 빛으로 표상된다. 그러나 “연기로 인하여 어두워”진다는 뜻은 밝은 빛과는 대조적으로 거짓 기만과 잘못된 교리, 그리고 왜곡된 신앙으로 가득찬 상태를 가리킨다.

예언 해석

1. 이슬람의 등장
다섯째 나팔은 어떤 사나운 군대의 침략을 그리고 있다. 그렇다면 여기에 그려진 특성들에 적용될 수 있는 무서운 세력을 가진 국가는 무슨 국가일까? 시대적으로, 지역적으로 또한 이 나라의 출범 성격적으로, 이 세력은 이슬람을 상징한다. 이슬람 세력은 처음에 배교적 우상숭배를 하였던 기독교 교회를 치기 위하여 일어났다. 그들은 유일신 하나님을 섬기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가지고 있던 오류적 믿음과, 배교한 기독교 교회 국가들을 치기 위하여 벌린 전쟁은 세상에 “연기”를 뿌리게 되었다. “무저갱”이라는 단어가 좁게는 “‘황폐한 광야”를 의미하듯이, 이슬람 세력은 아라비아 사막을 중심으로 일어났고, 메뚜기 떼처럼 그들의 세력은 확장되었다. 헬라어로 “무저갱”은 “Abyssos”로서 현대 영어의 “Abyss - 심연 또는 지옥”이라는 말의 어원이 되었다. 현대 모슬렘 작가들은 바로 ‘아라비아 -어둠의 지옥’이라는 말로 모하메드가 일으켜 놓은 아라비아 사회를 묘사한다.
저 유명한 말틴 루터나 조셉 미드, 아이삭 뉴톤 같은 성경 주석가들이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메뚜기들을 모하메드가 일어선 이후에 여러 세기에 걸쳐 거듭하여 서방 그리스도 세계를 괴롭힌 모슬렘 군대로 해석하였다.

2. 이슬람의 팽창
A. 이슬람교는 남을 개종시키려는 의지가 강력한 선교적 종교이다. 처음에는 가족적인 종교로 출발했으나, 모하메드가 사망할 시기에 이르러서는 전체 아랍인들이 그의 신봉자가 되었다. 늘 부족끼리 싸움을 일삼아 왔던 아랍인들은 모하메드가 내걸은 성전의 대열에 하나로 뭉쳤다. 선지자의 이름으로 모여 로마제국(비잔틴제국)의 그리스도인들에 대항하여 뭉쳐 싸운다면 엄청난 부를 약탈할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B. 페르시아의 왕 코스로즈 2세는 메카로부터 발신자가 불분명한 한 서신을 받았다. 이 편지는 왕이 와서 모하메드를 예언자로서 인정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왕은 그 편지를 찢어버렸고, 그 선지자의 요청을 거절하였다. 코스로즈는 자신이 거절한 이 사람이 얼마 안 있어서 자신의 나라를 짓밟고 세계를 지배하게 될 것을 알지 못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코스로즈의 패망이 무저갱의 열쇠라고 설명한다. 그 이유는 페르시아의 세력이 완전히 꺾이지 않는 한 모하메드가 일어설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페르시아의 패망에 이어서 아라비아의 사라센에게 권력이 돌아갔으며, 그들은 메뚜기와 같이 그 수를 늘려 갔다.

C. 모하메드가 죽은 후 A.D. 636년부터는 ‘아부바커’(Abubaker) 가 아라비아를 통치하기 시작하였고, 첫 후계자 곧 “칼리프(Caliph)”의 위에 올랐다. 그는 아라비안 족속들을 모아서 정복 전쟁을 시작하였고, 군사적인 팽창을 위한 침략 활동을 개시하였다. 아랍 연합군은 모하메드와 알라 신의 이름으로 진격을 계속하여 651년까지 시리아, 이라크, 메소포타미아, 이란, 이집트를 석권하였다. 아부바커는 그의 추종자들에게 가르치기를, 하나님의 법을 믿음으로 지키는 자들을 존경하고, 우상 숭배하는 자들만 죽이라 하였다. 그는 그의 군사들에게 “너희의 승리가 어린이와 여자의 피로 이루어지지 않게 하라. 종려나무를 자르지 말고, 옥수수 밭에 불을 놓지 말며, 과수들을 자르지 말고, 먹으려고 하는 것 외에 가축들을 죽이지 말라. 너희가 나아갈 때에 산중과 수도원에 은거하며 이것이 자신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만나거든 그들을 건드리지 말고 죽이지 말며 그들의 수도원도 파괴하지 말라. 그러나 너희는 머리를 민 사단의 회에 속한 사람들을 만나게 될 것인데 그들이 모하메드교로 개종하거나 조공을 바치기 전에는 절대로 살려두지 말라”고 하였다. (Edward Gibbon, The Decline and Fall of the Roman Empire, V.5, Chapter 51)

성경은 황충의 성질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황충은 임금이 없으되 다 떼를 지어 나간다”(잠언 30:27). 회교도들은 처음에 왕도 없고 별다른 조직도 없었으나 그 애매하고도 몽롱한 연기에 미혹되어 마치 성난 벌떼가 벌집에서 밀려나오듯이 아라비아 전역으로 모여들었다. 그들은 무기를 들고 사방으로 나아가 사람들에게 회교도가 될 것을 강요하였다. 이들은 전갈과 같이 잔학하여 사라센 제국과의 전쟁에서 패전한 나라의 백성들은 심한 고통을 당하였다.

“풀”과 “수목”은 첫째 나팔에서 나온 것처럼 백성들을 상징한다. “땅의 풀이나 푸른 것이나 각종 수목들은 해하지 말”라고 한 것은 어린이와 여자와 산중과 수도원에 은거하며 자신의 종교생활에 충실한 사람들을 죽이지 말라고 아부바커가 그의 군사들에게 명령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요한계시록 9:5-11 “그러나 그들을 죽이지는 못하게 하시고 다섯 달 동안 괴롭게만 하게 하시는데 그 괴롭게 함은 전갈이 사람을 쏠 때에 괴롭게 함과 같더라. 그 날에는 사람들이 죽기를 구하여도 얻지 못하고 죽고 싶으나 죽음이 저희를 피하리로다. 황충들의 모양은 전쟁을 위하여 예비한 말들 같고 그 머리에 금 같은 면류관 비슷한 것을 썼으며, 그 얼굴은 사람의 얼굴 같고 또 여자의 머리털 같은 머리털이 있고, 그 이는 사자의 이 같으며 또 철 흉갑이 있고 그 날개들의 소리는 병거와 많은 말들이 전장으로 달려들어가는 소리 같으며 또 전갈과 같은 꼬리와 쏘는 살이 있어 그 꼬리에는 다섯 달 동안 사람들을 해하는 권세가 있더라. 저희에게 임금이 있으니 무저갱의 사자라. 히브리 음으로 이름은 아바돈이요 헬라 음으로 이름은 아볼루온이더라.”

* 성경 예언에서 상징적 하루는 일년을 가리킨다 (에스겔 4장 참고). 또한 창세기 7:11, 8:4, 7:24절, 요한계시록 11:2절의 42달, 11:3, 12:6의 1260일을 비교함으로서 한 달을 30일로 계산함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5달은 150일이고, 150일은 150년이 된다.

역사적 성취

1. 하나님의 채찍으로 쓰인 이슬람
모하메드가 죽은 후 몇 백년동안 그의 추종자들은 왕이나 정부 없이 여러 조직으로 분리되어 있었으나, 13세기 말, 오토만 장군이 처음으로 단합된 정부를 구성하였고 ‘오토만 제국’이라고 알려진 터키 왕국을 설립하였다. 이슬람 군대가 백성을 괴롭힌 “다섯 달”(150일=150년)은 서기 1299년 7월 27일 이슬람교도의 지도자인 오토만이 터키 왕조를 세우고 난 후 타락한 기독교국인 동 로마 제국을 침입한 때부터 시작하여 1449년 7월 27일까지를 가리킨다. 이 기간동안 터키는 그리스 민족과 라틴 민족과 전 기독교군과 거의 끊임없이 전쟁을 계속하여 괴롭혔다. 그러나 성경 예언대로 “괴롭게만 하고... 죽이지는 못하”였다. 즉 전쟁한 나라들을 정복하지는 못하였다.
150년이 지난 후 큰 변화가 일어났다. 동 로마 황제의 세력은 급격히 쇠약하여 졌으며, 1448년 10월 31일 동 로마의 황제 요한이 죽은 후, 그의 형제들은 터키 이슬람 왕국의 수상이었던 무라드(Murad II) 2세에게 그들의 맏형이 황제가 될 수 있도록 요청하여 1449년 새 황제가 임명되었다. 이렇게 동 로마 제국은 자진해서 터키에게 무릎을 꿇으므로 독립국가로서의 맥이 끊이게 되었고, 터키 이슬람 왕국은 하나님의 진리와 그리스도의 자녀들을 괴롭히던 로마제국을 괴롭히는 심판의 채찍이 되었다.

“황충의 모양”은 이슬람 군대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들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아라비아 말들을 타고, 머리에는 누런 황색 두건을 두르고 있었기 때문에 마치 금 면류관을 쓴 것 같이 보였다. 그들은 남자들도 머리를 길렀으며, 그들의 창은 사자의 어금니 같이 생겼고, 가슴에는 철갑 옷을 입고 전쟁에 나갔다. 11절에 나온 “무저갱의 사자”는 이 오토만 제국의 지도자를 가리킨다. 히브리 음으로 아바돈, 헬라 음으로 아볼루온의 뜻은 “멸망 또는 파괴자”라는 의미이다. 그들의 전쟁하는 모습과 공격성은 잔인하고 무서운 것이었으며, 그 뜻처럼 파괴적이었다.

2. 첫째 “화”와 종교 개혁
한가지 특기할 만한 중요한 사실은 나팔이 불리고 “화”가 임할 때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아주 중요한 사건들이 하나씩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다섯째 나팔이 불리고 첫째 “화”가 이르러 왔을 때 종교적으로 아주 의미심장한 사건이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다름이 아닌 하나님의 진리의 횃불이 다시 한번 밝게 비춰지는 종교 개혁이 일어난 사건이었다. 로마 천주교의 세력은 온 세상에 종교암흑시대가 초래하도록 만들었으며, 승려들과 신부의 저지로 그 당시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접할 수도, 읽을 수도 없었다. 오류와 미신과 인간이 만들어낸 유전이 하나님의 진리를 대신했으며, 이 세상은 하나님에 대한 오해로 어두어졌고, 백성들은 교황을 하나님을 대신하여 믿고 섬기도록 세뇌되어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와 자비로 인해 진리에 대한 무지와 어두움을 벗어버릴 때가 왔으니, 그것은 바로 말틴 루터에 의해 이루어진 종교개혁이었다. 그런데 로마나라 당국이 그 종교개혁으로 인한 여파를 진압하고 제압하려고 시도할 때마다 이슬람 세력이 나타나 로마를 괴롭히고 침략함으로 인해 로마는 그들의 힘을 적군을 방어하는 데 다 소모하므로 말미암아 종교개혁 운동을 제대로 진압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종교개혁의 영향은 널리 퍼져갈 수 있었으며,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였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배도하고 타락한 교회와 그를 지지하던 세력인 로마를 심판하신 그 사실은 하나님의 참 백성들에게는 축복이 되었다.

 

여섯째 나팔 : 둘째 화
* 터키 제국이 로마제국을 굴복시킨 후부터 391년 동안 세력을 떨침 1449년 7월 27일 (로마제국의 굴복)부터 1840년 8월 11일 (터키가 주권을 잃음)까지

요한계시록 9:12-15 “첫째 화는 지나갔으나 보라 아직도 이후에 화 둘이 이르리로다. 여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내가 들으니 하나님 앞 금단 네 뿔에서 한 음성이 나서 나팔 가진 여섯째 천사에게 말하기를 큰 강 유브라데에 결박한 네 천사를 놓아 주라 하매 네 천사가 놓였으니 그들은 그 년 월 일 시에 이르러 사람 삼분의 일을 죽이기로 예비한 자들이더라.”

첫 번째 화는 모슬렘 세력이 등장하여 그 세력을 확장하면서 일어나는 전쟁으로 인한 것이었다. 이제 두 번째 화가 이르러 전 유럽을 또다시 큰 혼란의 도가니로 몰아가게 되었는데, 그것은 A.D. 1449년, 여섯째 천사가 그 동안 회교국 세력이 동유럽의 부와 영화를 완전히 정복하지 못하도록 막고 있던 억제를 풀게 되는 것이었다. 이슬람 세력은 터키, 소 아시아까지 신장되어 강하게 커져 갔으며, 결국 그 세력에 의해 교황권과 교황의 세력 및, 타락한 기독교를 지지하던 세력이었던 동 로마 제국이 멸망하게 되었다.

성경 구절 공부

1. “네 천사” : 네 천사는 타락하고 배교한 나라들을 징계하고 처벌하는 임무를 받은 사자를 가리키며, 이 천사들은 세상의 어떤 인물이나 세력을 통하여 그들의 의무를 실행한다. 이들은 유프라데 강 유역에 위치하여 있던 네 이슬람 족장들을 의미했다.

2. “유브라데”의 뜻 ; “유브라데”는 이 네 천사가 억제하고 있던 세력들이 어느 지역을 가리키는지 보여 준다. 13세기경 회교국 세력들은 유브라데 강을 중심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여기 나타난 네 지역은 모슬렘 세력의 네 관할 구역이었던 알렙포(Aleppo), 이코니움(Iconium), 다마스커스(Damascus), 바그다드(Baghdad)를 가리킨다.

예언 해석

“년, 월, 일,시에 이르러”
“년 월 일 시에 이르러”의 의미는 “그 때에”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 기간 동안”이라는 의미이다. ‘그 때에 이르러... 죽이기로’ 한 것이 아니라 ‘그 기간 동안... 죽이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년 월 일 시”가 문맥적으로 어떤 역사적 시점을 형성할 수 없고, 다니엘서의 “한 때 두 때 반 때”와 요한계시록의 “마흔 두 달”과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두 번째 화는 첫 번째 화부터 연결되는 것이므로 “년 월 일 시”의 시작점은 첫 번째 화, 즉 다섯째 나팔에 나온 150년이 끝나는 해가 되어야 한다. A.D. 1299년 7월 27일 이슬람교도의 지도자인 오토만이 왕조를 세운 다음 동로마 제국을 침입한 때로부터 시작하여 5개월 즉, 150년의 기간은 1449년 7월 27일에 마쳐진다.

에스겔 4장에 의하여 성경 예언 속에 나타난 상징적인 하루는 일년을 의미한다. 일년은 360일로 계산한다. 그 이유는 성경에서 한 달을 30일로 평균화하여 계산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일년을 평균 365.25일로 잡고 다니엘서의 “한 때 두 때 반 때”의 3년 반이 1260일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365.25 계산법은 각 달간의 오차를 평균화 할 수 없기 때문에 기간 계산에 혼란을 주게 된다. 또한 요한계시록 12:2절에 나온 42달은 다니엘서 7:25절과 요한계시록 12:14절에서 “한 때 두 때 반 때”로 설명하였고, 또한 요한계시록 11:3절에서는 1260일로 설명되어졌다. “한 때”는 일년임을 모든 학자들이 동의한다. 그러므로 한 때 두 때 반 때 = 3년 반 = 42달 = 1260일이 되므로 결과적으로 성경에서는 한 달을 30일로, 일년을 360일로 평균 분할하여 계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지구의 공전 주기를 달별 오차를 없애기 위하여 360일로 균등 분할 하였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년을 360일로 계산한다고 360일로 계산된 일년이 실제 일년보다 짧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정분할을 하나 평균 분할을 하나 원래 기간이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년 월 일 시”는 다음과 같이 계산되어진다. 상징적 1년=실제 360년이며, 상징적 1달=실제 30년이고, 상징적 1일=실제 1년이다. 그러므로 상징적 1시간=실제 15일(360을 24로 나눈 것)이 된다. 이 공식에 의하여 “년 월 일 시”는 실제로 391년 15일을 의미하게 된다. 이 기간은 다섯째 나팔의 150년 기간이 마쳐진 1449년 7월 27일에 시작되어져서 여기에 391년 15일을 더하면 1840년 8월 11일이 된다.

역사적 성취

1. 동 로마 제국의 멸망
실제로 터키 제국이 1840년 8월 11일에 무너졌을까? 1833년에 미국의 한 성경학자 죠수아 릿치 박사가 요한계시록 9장을 연구한 후에 “그리스도의 재림”이라는 책자를 발행하면서 1840년 8월 11일에 터키 제국이 그 주권을 잃어버릴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그 예언이 발표되었을 당시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조롱을 받았다. 그러나 터키는 실제로 1840년에 그 주권을 박탈 당하였다.
1838년 터키와 이집트가 전쟁을 벌였을 때, 이집트는 터키를 정복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게 되었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이슬람 세력인 터키가 사라지려고 하는데 이집트, 곧 또 다른 이슬람 세력이 올라옴으로 인해 이슬람 세력이 더 커질 것을 염려한 유럽 연맹은 이집트에게 터키를 치지말 것을 경고하기 시작하였고, 터키는 자발적으로 유럽 연맹에 굴복하고 주권을 포기하였다. 이 때 유럼연맹의 대표자가 편지를 가지고 이집트에 보내졌으며, 이집트 정부에 유럽 4대 열강(Britain, Austria, Prussia, Russia)의 메시지, 곧 이제 터키의 운명이 자기들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리었다. 그리고 애굽에게 터키에게서 손을 뗄 것을 종용하였다. 그 때 터키는 완전히 유럽 연맹에 무릎을 꿇었고, 이 사실과 함께 유럽 연맹의 사절이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한 날이 바로 1840년 8월 11일이었다.

요한계시록 9:16-19 “마병대 수는 이만 만이니 내가 그들의 수를 들었노라. 이같이 이상한 가운데 그 말들과 그 탄 자들을 보니 불빛과 자주 빛과 유황 빛 흉갑이 있고, 또 말들의 머리는 사자머리 같고 그 입에서는 불과 연기와 유황이 나오더라. 이 세 재앙 곧 저희 입에서 나오는 불과 연기와 유황을 인하여 사람 삼분의 일이 죽임을 당하니라. 이 말들의 힘은 그 입과 그 꼬리에 있으니 그 꼬리는 뱀 같고 또 꼬리에 머리가 있어 이것으로 해하더라. 이 재앙에 죽지 않고 남은 사람들은 그 손으로 행하는 일을 회개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여러 귀신과 또는 보거나 듣거나 다니거나 하지 못하는 금 은 동과 목석의 우상에게 절하고 또 그 살인과 복술과 음행과 도적질을 회개하지 아니하더라.”

A. 최초의 폭탄 사용 : 오토만 터키의 국세가 한창 강성했을 때, 그 나라에서 화약과 총포가 처음으로 발명되어져서 전쟁에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터키 군인들이 말을 타고 총과 대포들을 쏘면서 전쟁하는 모습은 불과 연기와 유황이 말의 입에서 나오는 것처럼 보였다. 불빛과 자주 빛과 유황은 전쟁 중에 터키 군사들이 입었던 군복의 색깔을 나타낸 것이다. 또한 그들은 처음으로 전쟁에서 대포들을 사용하였는데 그 대포 쏘는 모양이 말의 입에서 연기가 나오는 것처럼 표현되어진 것이다. 이슬람 군대의 공격 특징은 갑자기 시작되는 것, 그리고 매우 폭력적인 것이었다.
A.D. 1453년까지 로마의 콘스탄티노플의 성벽은 많은 적군을 성공적으로 저항하였다. 그래서 동로마 제국은 한동안 버틸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오토만 터키는 새로 개발된 거대한 대포와 화약을 사용하여 성벽을 공격하였고 콘스탄티노플은 곧 함락을 당하였다 성경에서 꼬리는 선지자를 상징하고 머리는 정부 지도자를 상징한다. 그러므로 이슬람 세력은 그 정부 지도자와 선지자 모하메드의 종교를 동시에 가지고 전쟁을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B. 머리와 꼬리와 입의 영적인 상징 : 성경에서 “머리”는 지도자를 상징하고, 입은 거짓 선지자의 입을 상징한다. 또한 꼬리는 거짓 선지자를 상징한다(사 9:15, 출 4:15,16). 이것은 이슬람이 오류를 가르치는 거짓 선지자와 거짓 교리를 가지고 있는 것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성경 진리에서 떠나 타락한 사람들을 징계하기 위하여 터키 군대를 채찍으로 사용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잘못을 고치지 않고 오히려 배교하는 일을 계속하였다. 그들은 교회 안에 우상 숭배를 들여왔으며, “살인과 음행과 복술과 도적질”을 계속하였다.

2. 둘째 “화”와 재림운동
앞에서도 언급했던 사실이지만 하나님의 심판의 나팔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의미심장한 구원과 축복의 계기가 되는 것을 알 수 있따. 여섯째 나팔 즉, 둘째 화가 지나자, 이 세상 전역에 굉장한 재림운동들이 생기기 시작하여 교회들에 큰 부흥이 일어나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바로 둘째 “화”인 터키의 침략으로 인해 동 로마가 멸망한 후 세력을 떨치던 터키가 1840년 8월11일에 무너지리라는 죠수아 릿치의 예언의 해석이 들어 맞음으로, 둘째 “화”의 예언인 년월일시, 곧 391년 15일의 예언이 정확하게 성취되는 것을 보게된 그리스도인들이 1일을 1년으로 해석하는 성경 예언이 옳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다니엘서의 2300일 예언을 2300년으로 해석하고 있던 교회들이 2300년의 예언이 마치는 마지막 때가 1844년이라는 것을 깨달음으로 예수재림이 가까왔다는 확신을 가지게으며, 이 사건은 교회들에 큰 부흥을 일으키게 하였다.
이 재림운동은 미국 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일어났는데, 예수님의 재림과 세상의 마지막 사건을 연구하던 신실한 사람들이 주축이 되어 일어났다. 그 때의 기독교의 상황을 보면, 종교 개혁 이후로 개신교 안에는 깊은 영적인 침체와 타락상이 나타나 있던 때였다. 이 운동에는 전세계에 있는 각 종파, 곧 성결교회, 침례교회, 성공회, 감리교회 등등 여러 다른 교파에서 예수재림이 가까웠음을 깨달은 목사들과 성직자들과 평신도들이 함께 참여하였는데, 미국에서는 윌리암 밀러를 위시하여 많은 사람들이 마지막이 왔으니 재림을 위해 준비하자고 외쳤으며, 그에 호응하여 많은 사람들이 이 재림운동에 참여하였다. 수만명의 개신교 교인들과 수백명의 개신교 목사들이 이 운동에 가담하였으며, 특별히 웨스트 버지니아주에서는 90% 이상의 목사들이 이 운동에 참여하였다.
비록 그들이 2300주야 예언에서 “성소가 정결함을 입”는다는 의미를 하늘 성소가 아닌 이 세상으로 잘못 해석하는 우를 범하여 예수 재림의 날짜를 잘못 정하는 실수를 범하였기는 하였으나, 그 사건을 계기로 큰 영적인 부흥과 깨달음과 하나님의 섭리가 기독교 안에 있게 되었다. 그 사건을 계기로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이 정말로 말세에 접어든 것을 확신하게 되었고, 예수 재림 전에 성도들이 어떻게 정결하게 되어야 하는지 그리고 마지막 남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준비될 지를 깨닫는 굉장한 계기와 기회가 되었다.

이렇듯이 성경 요한 계시록에 에언되었던 첫째와 둘째 화의 예언은 성취되었고, 그 나팔의 경고와 심판의 사건이 성취될 때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아주 중요한 일들이 일어난 것을 우리는 역사를 통하여 알 수 있다. 우리에게 알리지 않으시고는 일하지 않으시는 신실하고 미쁘신 하나님을 우리가 믿고 있다는 사실은 얼마나 고무적인가! 예언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리자!   

* 모하메드와 이슬람교의 신조에 대하여

1. 성경에 예언되어 있는 이스마엘의 자손 이슬람
창16:11~12 ;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네가...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그가 사람 중에 들나귀 같이 되리니 그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찌며 그가 모든 형제의 동방에서 살리라 하니라.”
성경에는 이스마엘의 자손인 이슬람교도들이 모든 사람들과 함께 싸우며 전쟁을 할 것에 대한 예언이 나와 있다. 그리고 그들이 모든 다른 인종들과 싸울 때 다른 인종들은 그들을 대적하기 위해 서로 더욱 결속하게 되어 이스마엘(아랍) 족들을 대항하여 일어서게 되는 것이다. 그 예언이 오늘날에도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우리는 눈으로 보고 있다.

2. 모하메드
모하메드의 추종자들의 종교 이슬람은 기원 612년 경에 발생하였다. 모하메드는 아라비아의 한 도시인 메카에서 상업에 종사하고 있었는데, 이 때부터 그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계시를 주셨다고 믿기 시작하였다.
모하메드의 기본적 신념은 하나님은 오직 한분이시라는 것이었다. 그는 하나님을 아랍식으로 알라(Allah)라고 불렀으며, 노아, 아브라함, 예수 등 많은 선지자들이 있었으나 자신이 알라신의 최후의 선지자라고 하였다. 모하메드는 그를 따르는 무리들을 위하여 여러 규칙들을 제정하였다. 그의 사후에 이 규칙들을 모아 하나의 책으로 정리한 것이 이른바 “코란”으로서 이슬람교의 성경이다. 코란에도 마지막 때에 대한 예언들이 많이 있는데, 그것에 의하면 마지막 때가 얼마 남지 않았고, 최후의 심판에서 알라 신은 악한 자들을 지옥에 가두어 피와 끓는 물을 마시게 하고 영원한 불에 타면서 고통을 치르게 한다고 한다. 그러나 알라 신은 의로운 사람들에게는 대단히 동정적이기 때문에 그들을 하늘의 화려한 연회에 초대하여 영양처럼 부드러운 눈을 가진 처녀들과 연회를 즐기게 할 것이라고 하였다.
코란은 지하드(Jihad)라고 하는 성전(Holly War - 거룩한 전쟁)을 찬양하고 있다. 코란은 말하기를 모든 신자들이 하늘에서 쾌락을 누리면서 살 것이지만, 성전에서 목숨을 버리는 자들은 하늘에서 더 큰 쾌락을 누릴 것이라고 하였다. 그들은 성전으로 새로운 영토를 점령하여 노략한 부를 분배하였는데, 점령지의 백성들에게 모하메드는 “알라 신이냐, 칼이냐, 하나를 택하라!”고 강요했으며, 코란에는 모슬렘들이 자기 종족 중 그리스도교로 개종하는 자는 처형하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한가지 특기할 만한 사실은 그들은 그들의 신조와 비슷하게 신실히 믿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너무 잔인하게 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들은 로마 천주교가 아닌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을 보면 그들을 건드려 괴롭히지 않았으며, 포교를 하거나 개종을 하지 않았다.

5부 - 일곱째 나팔, 세 번째 화


일곱 나팔 성경 예언의 내용 자체가 마지막 세 나팔들(5,6,7째 나팔들) 즉, 첫째 화와, 둘째 화와, 셋째 화를 처음 네 나팔들과 분리시키고 있는 것을 우리는 볼 수가 있다.

그 이유는 처음 네 나팔들은 서부 로마 제국의 몰락을 다루고 있는 예언들인 반면에, 5번째부터 7번째까지의 세 나팔들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배도한 기독교회와 그 배도한 교회를 받들어 주고 있는 동로마 제국을 심판하시는가를 설명해 주고 있는 예언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세가지 화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다루고 있다.

우리는 이 성경 예언 자체가 마지막 세 나팔들을 “세가지 화”라고 설명하고 있는 사실에 주목하도록 하여야 한다. 이 세가지 나팔들의 사건들은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하고 있다. 즉 괴롭게 하는 일들이 진행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들을 “세가지 화”들이라고 표현하였다. 첫번째 화, 즉 다섯번째 나팔은 로마제국을 멸망시키지는 말고 괴롭게만 하라고 말씀하고 있고, 두번째 화인 여섯번째 나팔은 로마 제국을 쳐서 멸망 시키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전체를 멸망시키는 것이 아니라 3분의 1만 죽이라고 예언하고 있다. 그러나 세번째 화, 즉 일곱번째 나팔은 온 세상 전체를 심판하며 멸망시키는 사실을 담고 있다. 특히 세상을 파괴하는 자들 곧, 원어의 뜻에 의해서, 세상을 부패케 하는 자들을 멸망시키라는 예언이 이 세번째 화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면 먼저 계시록 11장에 있는 셋째 화, 일곱째 나팔에 대한 본문을 읽어 보도록 하자.

마지막 심판과 셋째 “화”

“둘째 화는 지나갔으나 보라 셋째 화가 속히 이르는도다.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가로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 하니, 하나님 앞에 자기 보좌에 앉은 이십사 장로들이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가로되, 감사 하옵나니 옛적에도 계셨고 시방도 계신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친히 큰 권능을 잡으시고 왕 노릇 하시도다. 이방들이 분노하매 주의 진노가 임하여 죽은 자를 심판하시며 종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또 무론 대소하고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상주시며 또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실 때로소이다 하더라. 이에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니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이며 또 번개와 음성들과 뇌성과 지진과 큰 우박이 있더라” (계 11:14-19)

일곱째 나팔 즉, 세번째 화는 하나님의 심판의 그 결론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이 심판은 온 세상 나라들에 대한, 다시 말해서 온 세상 전체에 대한 심판이라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다. 이제는 이 세상이 드디어 그리스도께 그 주권이 돌아간다고 선포하는 것이다. 여기에 보면 심판의 끝에 가서 하늘에 있는 24장로들이 하나님께 경배하며 영광을 돌리고 있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드디어 심판의 마지막 국면이 이르러 오고 하나님께서 마귀와 악한자들을 심판하시고 성도들과 의인들은 변호하시며 옹호하시는 일을 하시자, 감사와 찬송이 온 하늘과 우주를 가득 채우는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이 의롭고 정당하며 이 지구의 죄의 역사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심판이 너무나 합당하고 의롭다고 말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심판이 그 마지막 국면에 접어들자 세상의 이방들이, 다시 말하자면 이 세상의 나라들이(영어 성경에는 “나라들이” 라고 번역되었음) 크게 분노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가 임하는 것을 반대하여 전쟁을 일으키는 것이다. 나라들이 분노한다는 표현은 시편 2장 1절에서 그 근원을 찾을 수가 있다. 시편 기자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며.” 다시 말하자면, 그리스도의 왕국을 대적하여 이 세상의 온 나라들이 분노하여 모인다는 의미이다. 사도 베드로는 유대나라 지도자들이 분노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반대하고 사도들을 불러서 때리며 핍박할 때에 바로 이 시편 2:1절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하신 이로소이다”(행 4:24,25) 라고 말하였다.

계시록 16장에 나타나는 여섯째 재앙인 아마겟돈 전쟁에 대한 예언에서 성경은 마귀가 세가지 종류의 귀신의 영들을 구사하며 온 세상의 왕들과 백성들을 미혹하여서 하나님의 큰 전쟁의 날에 하나님을 대적하여 싸우도록 모아오고 있다고 말씀하고 있다. 이렇게 온 세상의 나라들이 연합하여 하나님의 진리와 그리스도의 재림을 대항하여 싸우는 일을 하게 될 때에 하나님께서는 드디어 이 땅을 부패케 하고 망하게 하는 세력인 바벨론을 심판하시고 멸망시키실 것이라는 것이다. 이 심판은 하늘 지성소에서 예수께서 책들을 펴시고 바벨론 세력이 저지른 모든 일들을 다 펼쳐서 공의롭게 심의 하시고 판단하실 때에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이 일곱째 나팔은 하늘 지성소의 문이 열리고 그 안에 있는 언약궤(십계명이 들어 있는)가 보여진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하늘의 지성소가 열리는 시기는 대속죄일 날이었다. 그날은 일년동안 쌓인 모든 죄들을 최종적으로 심판하시고 끝내시는 날이었다. 그러므로 일곱째 나팔의 언어는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최종적인 심판이 이루어지고 악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부어지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세 번째 “화”

그런데 에언은 이 일곱째 나팔의 사건을 “세번째 화”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예언 가운데서 첫번째와 두번째의 화가 누구에게 어떠한 일을 했는지에 대하여 살펴 볼 때에 하나님께서 이 마지막 시대에 어떻게 세상을 심판하실지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첫째와 둘째 화들에서 이슬람 세력을 일으키셔서 배도한 교회와 그 교회를 지지해 주고 있는 이 세상의 나라의 세력을 심판하시었다. 그 당시 중세기의 타락하고 배도한 교회는 바로 로마 교황권의 교회였다. 로마교회는 이교의 가르침을 교회 안으로 들여와 진리와 섞어 놓았으며 하나님의 백성들을, 아니 더 나아가서 온 세상을 부패시킨 그 장본인이다. 성경에 보면 이 세력은 세상의 왕들과 백성들을 진노의 포도주로 취하게 한 세력이다. 그리고 그 세력을 지지해 주고 있던 나라가 바로 이교 로마 제국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슬람 세력을 통하여서 바로 이 교황권과 로마제국을 괴롭게 하시고 치시는 일을 하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첫번째와 두번째 화에서 일어난 사건들이었다. 그러므로 그 세번째 화에 있어서도 하나님께서 이슬람 세력을 통하여서 배도한 교회와 그 세력을 지지하는 나라를 심판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이 마지막 시대에 와서 배도한 기독교회는 바로 미국 안에 있다. 미국의 기독교회는 개신교회가 되기를 그쳤다.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당시에 미국은 바티칸에 대사를 보내면서 교황과 손을 잡았다. 그리고 미국의 교회들은 교황권의 활동을 크게 환영하며 같이 협력하는 세력으로 탈바꿈하였다. 개신교회(Protestant)의 뜻은 교황을 향하여 항거한다는 뜻이다(Protest Against the Pope). 그러므로 미국의 개신교회는 더 이상 개신교 국가가 아니다. 오히려 교황권을 지지하는 배도한 교회로 전락해 버리고 만 것이다. 또한 동시에 이 미국이 바로 교황권의 세력을 온 세상의 지도자의 권위로 세워 주는 일에 그 앞장을 서서 일하고 있으니 배도한 교회를 지지하는 정치적인 세력이 된 셈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슬람 세력을 통하여 배도한 교회요 동시에 배도한 나라인 이 미국을 이전처럼 이슬람 세력을 통하여서 심판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이 세번째 화가 예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현재 일어나는 미국에 대한 이슬람의 공격은 그 시작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예언의 성취 상 이제 곧 세계 전체 나라들의 연합인 UN의 활동이 진리를 대적하고 참된 하나님의 백성들을 공격하는 양상으로 급진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영적으로만 분별할 수 있는 일이다. 옛날 중세기의 순교자들의 충성심도 진리를 사랑하는 자들에 의해서만 알아 볼 수 있었듯이... 앞으로 나라들이 분노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나라를 대적하여서 분노할 것이다. 그리고 온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인 일곱 재앙이 쏟아지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참 백성들을 핍박하는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 위에...

이슬람 세력과 마지막 심판과의 관계

요즈음 이슬람 세력이 갑자기 새로 등장하면서 미국과 기독교 세력을 치기 시작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이러한 세계적인 형세는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이것은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의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다. 2001년 9월 11일의 사태는 성경의 예언상으로 의미심장한 사건이 아닐 수가 없다. 이슬람 세력은 하나님의 채찍이 되어 미국의 경제의 상징인 뉴욕의 쌍둥이 빌딩과 무력의 상징인 와싱턴의 펜타곤 빌딩을 공격하였다. 미국이 이락을 공격하자 온 세상에 있는 과격파 이슬람들은 결속하여 미국을 향하여 “지하드”(성전)를 부르짖으며 자살 테러들을 감행하고 있다. 우리는 이제 미국이 점점 더 이슬람 세력의 수렁에 빠져 들어 가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이러한 일들은 세상의 나라들이, 다시 말하자면, 유엔이 더욱 더 강력하게 결속하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 지금 나라들이 이슬람의 공격으로 인해 서로 결속하고 있는데, 이슬람의 공격에 연합전산을 펴서 방어하기 위한 수단으로 세상 나라들이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할 수 없이 결속하고 있다. 이러한 나라들의 연합은 결국에 가서 이 세상 나라들의 연합의 도덕적인 대표자로 교황을 내 세울 수 밖에 없는 상황을 연출하게 될 것이다. 이 세상에서 미국에 대한 신뢰는 점점 땅에 떨어지고 있는 터라 미국이 세상 나라들의 연맹의 대표자로 군림하기에는 역부족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교황권은 드디어 과거 중세기에 누렸던 권력 즉, 교회들과 나라들 위에 군림하는 새로운 왕의 자리에 앉게 되는 것이다. 그 때에 과거에 있었던 핍박이 이 세상에 재현되게 될 것이다.

예언에 말하고 있는 대로 교황권의 세력은 자기의 핍박을 피하여 미국으로 도망한 하나님의 성도들, 곧 진리를 믿으며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의로운 자들을 붙잡아 죽이려 하는 일을 감행하려 할 것이다. 타협하고 타락한 청교도들의 후예들의 도움을 통해서 말이다. 왜냐하면 그 후예들은 자기 선조들이 어떻게 이 나라를 세웠으며 어떻게 성경의 진리를 높이며, 교황권의 기만에서 이 나라를 보호하려 했는지에 대한 고난의 역사를 까마득하게 잊어 버렸기 때문이다.

한가지 지나칠 수 없는 흥미 있는 성경 예언이 있다. 그것은 이슬람 세력에 대한 예언이다. 창세기 16장 11,12절은 다음과 같이 예언하였다.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네가 잉태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그가 사람 중에 들나귀같이 되리니 그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지며 그가 모든 형제의 동방에서 살리라 하니라.” 다시 말하자면 팔레스타인 동방에 사는 아랍국가들은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의 자손들이며, 그들은 광야의 들나귀처럼 지낼 것이고, 그들이 다른 모든 민족들을 치게 되면 다른 모든 민족들이 연합하여 이슬람 족속들을 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이슬람의 공격은 다른 모든 민족들이 연합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바로 우리의 눈 앞에서 이 예언의 성취를 보고 있다. 온 세상의 나라들이 할 수 없이 연합하여 이슬람의 세력과 싸우고 있는 것을 보게 되지 않는가!

첫째 화가 지나간 후에 종교 개혁 운동이 일어났었다. 이슬람 세력이 로마제국을 치는 동안 교황권은 종교개혁자들을 소탕하기 위한 군대를 되돌려서 이슬람의 공격을 막을 수 밖에 없었고, 그러는 동안 하나님의 종들은 기회를 얻어 진리를 개혁하여 로마교회의 압제에서 개혁하여 나오는 일에 성공할 수 가 있었다. 그리고 두번째 화가 지나가자 이 세상에서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강조하며 경건한 삶을 촉구하는 재림운동이 온 세상에서 불일 듯 일어났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 재림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성경을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많은 교회 안에 큰 부흥의 역사가 일어 났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그 셋째 화가 일어 나고 있는 것을 주목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이슬람의 공격을 사용하시어 배도한 교회와 세상 나라들을 치시고 계신 것을 보게 된다. 옛날 이스라엘이 배도했을 때에 바벨론을 통하여 심판하셨던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이 셋째 화가 지나가면서 과연 어떠한 영적인 큰 사건이 일어나게 될 것인가? 그것은 다름이 아닌 참 하나님의 교회가 하나님의 성령의 큰 역사를 받게 되는 일일 것이다. 그리고 바벨론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나오라고 불러 내는 놀라운 역사가 곧 생기게 되는 것이다.

“이 일 후에 다른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권세를 가졌는데 그의 영광으로 땅이 환하여지더라. 힘센 음성으로 외쳐 가로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그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를 인하여 만국이 무너졌으며 또 땅의 왕들이 그로 더불어 음행하였으며 땅의 상고들도 그 사치의 세력을 인하여 치부하였도다 하더라.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서 다른 음성이 나서 가로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요한 계시록 18:1-4)
이 부르심은 더 이상의 짐승의 세력에 속지 말고 그 기만의 세력에서 나오라는 것이다. 성경의 진리로 돌아오라는 것이다. 가짜 복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는 열매를 맺는 참된 구원의 복음으로 돌아 오라는 것이다.
이러한 놀라운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게 되는 마지막 교회, 여자의 남은 자손에 대하여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요한 계시록 14:12)

지금 우리 눈 앞에서 일곱 나팔의 예언 중의 그 마지막 부분인 셋째 화가 진행 중에 있다. 우리는 과연 세상의 마지막 환란들을 통과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반가이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이것이 우리가 지금 생각해 보아야 할 가장 심각한 질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