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아직도 배우는 하나님의 사랑


어느새 새로운 한 해가 우리 곁에 다가옵니다. 많은 것들을 보듬어 안은 채, 많은 것들을 떠나 보낸 채, 많은 것들을 속으로 잠재운 채, 멈추지 않는 시간은 흘러갔고, 이제 우리 앞에 더 많이 깨닫고 체험해야 할 새로운 삶의 신비들이 다가옵니다.

이 해에는 우리 모두가 마음의 눈을 열어 더 밝아진 시야를 가지고 지난 해에 미쳐 깨닫지 못한, 그리고 미쳐 보지 못한 것들을 깨닫고 보는 한 해가 되기를 기원해 봅니다.

마음의 눈을 떠서 보면, 우리 주위에는 하나님의 사랑을 배우게 하는 많은 것들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그것은 항상 아름다운 감동이나 눈물겨운 감격으로 다가오는 것만은 아닙니다. 때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고통으로, 절망으로, 아니면 시련으로, 그것도 아니면 철저한 좌절과 갈등으로 배웁니다.

올 한 해도 지난 해처럼 우리 곁을 싸고 맴도실 하나님의 사랑은 아직도 어렴풋이 밖에는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그분의 사랑을 우리들이 빨리 배우도록 하기 위해 좋은 선물을 마련해 놓고 계십니다. 고통, 그것은 우리를 위해 마련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선물일지도 모릅니다.

떠남은 믿음의 시작

묵은 해를 떠나 새로운 해를 맞이하듯이,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에게 있는 모든 것들을 버리고 떠나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더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해서, 더 좋은 것을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 때때로 우리에게 있는 것들을 버리라고 하십니다. 붙잡고 있는 것을 놓으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떠나라고 하십니다. “신앙”은 “떠남”에서 시작합니다. 마치 아브라함이 그렇게 여러 번 떠나고 버렸던 것처럼... 그가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바로 “떠났다”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떠난다는 것은 고통입니다. 버린다는 것은 아픔입니다. 그 동안 우리를 형성시켜왔던 우리의 틀, 규정, 분석, 사고방식, 삶의 형식을 떠나 새롭게 시작한다는 것은, 가지고 있던 정답고 손 때 묻은 묵은 것들을 다 버려야 하는 뼈아픈 이별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을 완전히 벗어야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생각, 하나님의 느낌, 하나님의 감정을 새롭게 덧입을 수 있기 때문에, 떠나는 아픔과 버리는 고통은 우리에게 필수적입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손을 펴라고 하십니다. 욕심스럽게 손에 꽉 쥐고 있는 것들을 펴서 흘려 보내라고 하십니다. 우리를 그렇게 불행하게 만드는 쓸데없는 것들을... 그리고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자유로운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조용히 쉬는 자유를 만끽하는 사람이 되라고...

그리고 놓아야 할 것을 놓지 못하고, 버려야 할 것을 버리지 못하고, 포기해야 할 것을 포기하지 못하고 안간힘을 쓰는 우리를 위해 좋은 선물을 마련해 놓으셨습니다. 놓지 않으면 안되도록 만드는, 포기하지 않으면 안되도록 만드는 아주 적절한 사랑의 선물을... 그 사랑의 선물은 바로 고통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시험하는 연단의 불이며, 우리를 배려하시는 하나님의 태우는 불꽃입니다. 우리를 시련하시는 고통의 과정, 그것은 하나님께서 손수 마련하신 우리를 어루만지시는 다정한 사랑의 손길입니다.

고통은 사랑의 묘약

하나님께서는 매일 우리들의 마음을 살피고 계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들이 우리 자신들을 아는 것보다 더 깊이, 그리고 더 자세하게 우리들의 속마음과 생각을 아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잘 모릅니다. 우리는 스스로 우리 자신을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많은 경우에 우리는 우리 자신들을 우리가 만든 틀 안에, 혹은 우리가 머리 속에서 그려놓은 액자 안에 넣고 자신들을 봅니다. 그것이 진정한 자신의 모습인 줄로 착각하면서... 그것은 한갓 우리의 생각이 만들어낸 하나의 인위적인 인물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 채...

진정한 자신을 알아야, 그리고 형편없는 그 모습으로는 안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진실로 새로운 삶을 원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의 진정한 자아를 알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시험과 고통의 불을 허락하십니다. 그래도 이만하면 괜찮다고, 이 정도만 버리면 된다고, 아직도 자신에 대해서 완전히 알지 못한 채, 자기의 뜻과 생각을 고집하며 쓸데 없이 안간힘을 쓰는 우리가 빨리 얌전해 지도록, 그래서 하나님 앞에 속절 없는 상태 그대로 나와 납작하게 엎드려 굴복하도록, 그래서 치료하시고 빚으시는 하나님의 손놀림이 더 쉽고 유연하고 빨라지실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의 묘약인 시련과 고통을 처방해 주십니다.

시험하는 과정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잘 훈련만 받으면 그분의 영광을 위해 아름답게 사용될 수 있을 것을 아십니다. 그래서 그분은 지혜로운 섭리로 우리들을 각기 다른 처지와 다양한 환경 아래 처하게 하셔서,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것들을 드러나게 하시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우리의 품성의 약점들이 드러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하늘의 정신에 조화되고 자신을 이겨 승리하는 사람이 될 때까지 압력을 증가시키시고, 우리들을 거듭거듭 바닥으로 끌어내리십니다.

우리들의 숨겨진 결함을 드러내시고, 우리들이 자신들의 마음을 성찰하며, 복잡한 정서와 자신의 마음의 동향을 세밀하게 검토하여 잘못된 점을 찾아내도록 하시는 것은 그분의 자비입니다. 우리들의 도덕적 능력을 시험하실 수 있고 우리들의 행위의 동기를 나타낼 수 있는 환경에 이르게 하셔서, 우리 안에 있는 바른 것은 계발시키고 잘못된 것은 버릴 수 있도록 하시는 것은 그분의 섭리입니다. 이런 일을 성취하기 위해서, 우리들이 순결하게 될 수 있도록, 그래서 아주 겸손하게 엎드려 굴복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는 종종 우리를 공격하는 시련의 불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깨끗하게 하는 일은 고통 없이는 성취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불순물을 태우기 위해, 가치 있는 것으로부터 무가치한 것들을 분리시키기 위해 시련의 불을 허락하십니다. 그리하여 우리 마음의 모든 비밀이 완전히 드러나면 우리는 놀라 소리칩니다. “주님, 이것이 진정한 나의 모습이었나요? “ 하며...

하나님께서는 철저하게 시험하는 시련을 통해 우리들의 연약함을 보게 하시며, 하나님만을 우리의 유일한 도움과 방패로 의지하도록 가르치십니다. 하나님의 정결하게 하고 깨끗하게 하시는 일은, 우리들이 겸손해지고, 자아에 대해 완전히 죽고, 자신이 무엇인가 할 수 있다는 조그만 자신감마저도 다 버린 채 오로지 그분만을 바라볼 때까지 계속됩니다. 그럴 때에 우리들은 더 이상 충동에 의해 경솔하게 움직이지 않을 것이며, 시험과 열정의 노예가 되거나, 사단에 의해 불 붙여진 육욕적인 마음을 따르는 자가 됨으로, 무모하게 주님을 슬프게 하는 사람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아빠 가시고기의 사랑 민물에 사는 “가시고기”에 대한 이야기는, 아직도 우리를 위해 힘쓰고 계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암컷 가시고기는 알을 낳은 후 어디론가 떠나버린답니다. 그러면 수컷인 아빠 가시고기가 혼자서 알을 돌보지요. 그런데 그 알들은 신선한 물이 계속 공급되어야 죽지 않고 살아 부화할 수 있습니다. 아빠 가시고기는 먹지도 않고 잠도 자지 않은 채 알을 먹으려고 달려드는 다른 물고기들로부터 알을 보호하기 위해, 그리고 알들 주위에 신선한 물을 공급해 주기 위해 계속 지느러미를 움직인답니다. 아빠 가시고기로부터 신선한 물을 공급받은 알들은 드디어 알에서 깨어나와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지요. 그러나 먹지도 못하면서 자기의 새끼들이 알에서 깨어 나오게 하기 위해 계속 지느러미짓을 하던 아빠 가시고기는 힘이 빠져서 물에 떠내려 가든지, 돌 틈에 머리를 박고 쓸쓸히 죽어갑니다.

우리가 알에서 깨어나와 새로운 삶을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 주님은 목숨을 버리셨으며, 아직도 깨닫지 못하는 것들을 온전히 깨닫게 하기 위해, 그리고 우리가 추구하던 헛된 것들을 빨리 포기하도록 하기 위해 고통을 허락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그리고 그 고통을 우리와 함께 나누시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작은 물고기의 얘기는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고통은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처방약입니다. 고통을 경험한 사람만이, 고통을 통해 새로운 삶을 시작한 사람만이, 그것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보내주셨던 사랑의 선물이었던 것을, 그래야만 다 버리고 떠날 수 있었음을, 그래야만 단단한 자신의 껍질을 깨고 나와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었음을 알 것입니다.

고통조차도 하나님의 사랑의 선물임을, 그리고 그런 고통들을 통해 우리는 아직도 하나님의 사랑을 배운다는 것을 깨닫는 한 해가 되기를 기원해 봅니다.

권두언


강병국 목사

술취한 운전사가 실수하여 학교에서 귀가하는 어린아이를 받고는 뒤집혔습니다. 그런데 죄 없는 어린아이는 죽고 그 운전사는 살아났습니다. 이 얼마나 불공평한 일입니까?

기아 선상에서 굶주려 가는 아이들이 많이 있는가 하면, 반면에 호의호식하며 먹을 것을 버리면서 사는 부자들도 많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마음씨가 좋은 사람들도 고통을 당하고 어려움을 겪기는 매 일반입니다. 홍수와 지진, 전쟁과 질병, 슬픔과 죽음, 마음을 아프게 하는 사건들... 재난과 불행들 때문에 고통 중에 눈물을 흘리고 있는 사람들의 애처로운 모습들... 이러한 현실 앞에서 우리의 마음을 항상 괴롭히고 있는 질문이 있는데 그것은 다름이 아닌 바로 고통의 문제입니다. 이 세상에 왜 고통이 있을까요? 그것은 누구의 책임입니까?

보험회사에서 만들어 내는 설명서 가운데 “Act of God”(하나님의 행위)라는 난이 있는데, 그것은 천연 재해를 당했을 때에 보험 가입자가 사전에 특별히 명시해 놓기 전에는 보험료를 지불하지 않는다는 조항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세상의 불행들이 과연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원망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를 더 난처하게 만드는 질문은 왜 하나님을 잘 믿는 그리스도인들도 고통을 당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당신을 신뢰하는 자들을 보호해 주시지 않느냐는 질문입니다. 이 고통의 문제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당혹케 만들고 있는 질문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이 점점 더 악해지며 재난이 더해만 가고 있는 요즈음, 고통에 대한 질문의 중요성은 날로 더해 가고 있습니다. 이번 호에서는 이 중요한 문제에 대한 성서적이고도 합리적인 답변을 독자들에게 드리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이번 호는 여러분들에게 큰 축복이 될 것입니다.

고통 중에 있는 사람을 위한 약속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이 세상은 겨울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사단과 악의 세력이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쉬임없이 싸우며 살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때때로, 아니 자주 고통과 근심이 우리를 둘러싸며, 우리의 어깨 위에 삶은 힘겨운 짐으로 다가올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때를 위하여 우리에게 위로가 되는 말씀들을 성경에 가득 적어 놓으셨습니다. 우리는 성경에 쓰여진 약속의 말씀들을 읽고 외우므로 마음 속에 위로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 아름다운 위로와 격려의 말씀들을 살펴 보면서 우리는 용기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 약속의 말씀들을 찬찬히 읽어 내려가다 보면 힘들고 무겁던 우리의 마음이 눈물겹도록 따뜻한 위로의 약속들 때문에 훈훈해짐을 느낄 것입니다.

* 마음이 상하고 통회하는 사람을 위한 약속

시편 34:18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이사야 57:15 “지존무상하며 영원히 거하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자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성케 하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케 하려 함이라”
시편 51:17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마음이 상하여 쓰라리고 낙망될 때, 유혹이 당신을 엄습하고 근심과 걱정과 어두움이 당신의 심령을 둘러싸는 것처럼 보일 때, 죄가 마음을 지배하고자 싸울 때, 죄책감이 심령을 억압하고 양심을 억누를 때, 불신이 마음을 가리울 때, 당신이 마지막으로 빛을 본 그 곳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은혜는 죄를 정복하고 어두움을 몰아내기에 충분하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또 그분께서 돌봐 주시는 보호 아래서 안식을 얻으십시오. 그리고 또 바로 그 때가 당신이 주님과 교통함으로 화평의 영역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당신은 죄를 회개하고 통회하기 위하여 골방에 들어갈 필요가 없으며, 하나님의 은총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하면서 당신 자신의 죄악을 속죄하기 위해 고행을 치를 필요가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묻곤 합니다.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를 인하여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미가 6:7). 그러나 성경의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시 51:17)라고 말하였습니다.

사도 요한은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요일 1:9)신다고 말하였습니다. 당신이 죄의 사유하심을 받지 못하고 죄책감이나 괴로움으로 밤을 지새는 오직 한 가지 이유는 당신의 범죄 때문에 상함을 받으시고, 당신의 허물 때문에 찔림을 받으신 주님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며, 당신에게 죄가 있다는 것과 주님의 자비를 필요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영혼의 깊은 심령 속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자복은 하나님의 무한하신 동정심에 이르는 길을 찾게 될 것이며, 그렇게 할 때 주님께서는 상한 마음을 가진 당신에게 가까이 하시고 통회하는 당신의 영혼을 구원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매우 동정적이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연약함과 우리의 시험을 이해하십니다. 당신이 상한 마음과 애통하는 심령으로 하나님 앞에 나갈 때 그분은 당신의 회개를 받아 주시며, 또한 당신이 그분과 더불어 평화를 누리기 위해 그분의 능력을 붙잡을 때,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릴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아, 당신은 하나님께서 자비로우신 분이라는 사실에 대해 크나큰 감사와 기쁨을 느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말 못할 슬픔과 아프고 상한 마음으로 짓눌려 있도록 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으로 하여금 눈을 들어 그분의 자애스러운 모습을 바라보게 하십니다. 거룩하신 구주께서는 눈물로 앞이 가리워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 곁에 서 계십니다. 그분은 당신의 손을 꽉 붙잡길 원하십니다. 그리고 또, 그대가 단순한 믿음으로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께서 그대를 인도하시도록 했으면 하고 원하고 계시지요. 그분의 마음은 당신의 슬픔과 비애와 시련을 향하여 열려 있습니다. 그분은 영원한 사랑으로 당신을 사랑하시며, 자애로운 손길로 당신을 감싸 주십니다. 당신은 마음을 주님께 바치고 온종일 그분의 자애를 명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그분께서는 당신의 영혼이 매일 당하는 슬픔과 어려움에서 벗어나 평화 가운데서 살게 해주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은혜로 그대를 위하여 간구하고 계시는 동안, 사단은 종종 당신을 범죄자로 하나님 앞에 고소합니다. 사단은 당신을 의혹에 빠뜨리고, 하나님을 믿는 확신을 잃어버리게 하고, 하나님의 사랑에서 떠나 그분의 율법을 범하게 하고자 전력을 다해왔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는 당신의 생애의 기록을 지적하고, 당신의 품성의 결함과 당신이 그리스도와 같지 아니한 점, 곧 당신이 구세주의 영광을 더럽힌 것과, 바로 사단 자신이 당신으로 범죄하게 한 점들을 지적하지요. 그리고 그는, 그렇기 때문에 그대를 자기 백성이라고 하나님 앞에 주장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대의 죄에 대하여 변명하지 않으십니다. 그대신 그분은 그대의 회개와 믿음을 보여 주시고 그대가 용서받은 것을 주장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자신의 상한 손을 하나님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 앞에 드시고 “내가 그의 이름을 압니다. 내 손바닥에 그의 이름을 새겼습니다!”라고 호소하십니다. 그리고 자기의 백성을 고소하는 자를 향하여 “사단아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슥 3:2)고 말씀하십니다.

마음에 통회하고 하나님을 굳게 붙잡는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의 은혜를 받을 것이며, 하늘의 화평이 선물로 주어질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통회하고 주님께 나오는 사람들을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 는 “영광스러운 교회” 로 나타내기 위하여 자신의 의의 옷을 입혀 주실 것입니다(엡 5:27). 그 사람들의 이름은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으며, “흰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계 3:4) 는 용서와 구원의 확신의 약속이 선물로 그들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 시련과 고통을 당하는 사람을 위하여

야고보서 1:2~4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히브리서 12:6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베드로전서 4:12,13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주님께서는 그대가 당하는 모든 시련과 어려움에 놀라도록 당신을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주님께서는 이 모든 것들에 대하여 이미 당신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시련이 다가와도 낙담하거나 불안해하지 말도록... 그럴 때 당신의 구세주 예수님을 바라보고 기뻐하고 즐거워하십시오. 예수님은 요셉의 새 무덤에 누워 계시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부활하셔서 하늘로 승천하셨고, 거기서 그대를 위하여 중보하고 계십니다. 당신에게는 당신을 사랑하시고 위해 돌아가신 구주가 계십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그분을 통하여 소망과 힘과 용기와, 그리고 그분의 보좌에 그분과 함께 할 자리를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당신이 주님을 부를 때에는 그분께서는 언제든지 당신을 도우실 수 있고 또한 즐겨 도와주십니다.

마음이 상하고 시련과 슬픔 가운데서 우는 사람들에게 주님은 위로가 되십니다. 어찌보면 슬픔과 굴욕으로 말미암아 괴로워하는 것이 죄 가운데서 방종하는 것보다 나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고난을 통하여 당신의 마음 속에 악의 뿌리를 송두리째 흔들고 드러내시는 것은 당신이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자신의 결함을 극복하도록 하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시련에 부닥쳤을 때에 초조히 행하거나 불평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반항하거나 주님의 손에서 떠나게 될까봐 걱정해서도 안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심령을 겸비하게 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슬퍼하는 자들에게 “내가 그 일을 보았은즉 그를 고쳐줄 것이라. 그로 인하여 그와 그의 슬퍼하는 자에게 위로를 다시 얻게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사 57:18).

당신은 날마다 그리스도를 따라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내일을 위한 도움을 주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자녀들에게 인생 행로에 대한 모든 지시를 한꺼번에 주지 않으시지요. 그 까닭은 그들이 혼란하게 되지 않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그들이 기억하고 실행할 수 있을 만큼만 말씀해 주십니다. 주어진 능력과 지혜는 현재의 위기를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혼란한 세상을 초월하여 좌정해 계십니다. 모든 것이 그분의 신령한 안계(眼界)에 펼쳐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영원이라는 위대하고 장구한 관점에서 당신의 섭리로 최선의 것이라고 생각되는 대로 이루어지도록 명령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극진한 사랑으로 당신 안에 성령의 귀한 은혜가 나타나도록 하고자 애쓰고 계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에게 장애와 핍박과 난관을 허락하시되 저주로서가 아니라 당신의 생애의 가장 큰 축복으로 허락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영으로 젖어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그에게 다가오는 것은 무엇이든지 언제나 그의 곁에 계시는 구주로부터 옵니다. 주님의 허락이 없으면 어떤 것도 그에게 접촉될 수 없지요. 우리의 모든 고생과 슬픔, 우리의 모든 시험과 시련, 우리의 모든 핍박과 궁핍, 이런 모든 것이 합동하여 선을 이루게 됩니다. 온갖 경험과 환경은 우리에게 유익한 것을 전달해 주는 하나님의 사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때때로 당신의 마음은 고통으로 구름이 낄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는 그 고통스런 것을 생각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당신은 단순히 주님의 품 안에서 쉼으로 그분의 뜻을 행할 수 있습니다. 우리 중 누구라도 아직 시련의 경험을 하지 않은 사람들은 멀지않아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신앙을 격렬하게 시험하는 과정을 통과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홍해에 다다르는 경험을 할 것인데, 앞에는 홍해요, 뒤에는 군대가 그들을 뒤쫓아오는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앞으로 나가라!”고 명하실 것이며, 그렇게 하심으로 우리들의 믿음을 시험하실 것입니다. 이러한 경험이 당신에게 닥칠 때 그리스도를 신뢰하면서 앞으로 앞으로 나가십시오! 그분께서 보여주시는 대로 한 걸음씩 한 걸음씩 나아가십시오! 이러한 경험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당신의 믿음을 강하게 하는 것이 될 것이며, 참된 봉사에 적합한 사람이 되도록 당신을 훈련시킬 것입니다.

이제 당신에게 이르러 오는 시련을 인해 온전히 기뻐하십시오. 주님과 함께 고난을 당하는 사람은 주님과 함께 면류관을 쓰리라는 것을 기억하면서...

* 마음이 답답한 사람을 위하여

시편 62:8 “백성들아 시시로 저를 의지하고 그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셀라).”

시편 55:22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영히 허락지 아니하시리로다.”
인생을 사는 동안 당신은 마음이 답답하고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는 듯한 경우를 만날 것입니다. 누구에게 하소연할 수 없을 정도로 슬프고 마음이 답답하고 지칠 때에는 당신의 심정을 주님의 앞에 토로(吐露)하십시오. 그래야만 당신은 영적 생명과 힘을 얻어 다시 이 세상에서 살 용기를 얻게 될 것입니다. 당신이 만일 당신의 무거운 짐을 홀로 지려고 하면 그 짐에 눌리고 말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그대가 그분을 떠나지만 않는다면, 그리고 그대의 짐을 주님께 맡기기만 한다면, 그분께서는 당신의 짐을 기꺼이 져주실 것이며 당신을 홀로 버려두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대가 미쁘신 창조주께 그대의 영혼을 지켜 주시도록 맡길 때 그분께서는 기뻐하십니다.

그대는 매일 하늘 아버지와 실제적 교제를 가져야 합니다. 때로는 당신의 마음이 그분을 사모하기도 하고 그분의 업적(業績)과 그분의 자비와 그분의 축복에 대하여 묵상하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은 아닙니다. 당신이 하나님과 교통하려면 당신의 실생활에 대하여 무엇이든지 기도로 그분께 말해야 합니다. 그리고 당신의 모든 짐을 그분께 맡겨야 합니다.

기도는 마치 친구에게 하는 것처럼 하나님께 그 심정을 펴놓는 것입니다. 기도는 당신이 지금 어떠하다는 것을 하나님께 알리기 위함이 아니고, 당신으로 하여금 주님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우리에게로 내려오시게 함이 아니요, 우리로 하여금 그에게로 올라가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도 사람들 사이에 거하실 때에 자주 기도하셨습니다. 우리 구주께서 그의 의무와 시련을 위하여 굳세게 나아갈 수 있도록 그의 아버지께 새로운 능력의 공급을 구한 탄원자와 간구자가 되셨습니다. 인류의 구주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도 기도의 필요를 느끼셨는데, 하물며 연약하고 죄가 많은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 인생들은 얼마나 열심히 기도해야 할까요?

당신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그의 풍성한 축복을 부어 주시려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무한한 사랑의 샘에서 마음껏 마시는 것은 우리의 특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갈한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사 44:3)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당신이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같이 하나님을 앙망하며 찾고 당신의 사정을 그분께 이야기할 때, 당신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목마르던 갈증은 시원하게 축여지고, 가슴을 억누르던 근심과 고통은 사라지고, 당신의 어깨를 누르던 짐은 없어져 버리고 마치 새털같이 가볍고 즐거운 마음이 되어 주님께 찬양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당신의 소원과 기쁨과 슬픔과 염려와 두려움을 하나님 앞에 내어 놓으십시오. 당신은 주님을 괴롭게 하거나 피곤케 할 수 없습니다. 그대들의 머리털까지 세시는 그는 그분의 자녀들의 요구에 대해서 무관심하시지 않으십니다. 그의 사랑의 마음은 우리의 슬픈 일을 보거나 그 슬픈 일에 대한 말만 들어도 민망히 여기십니다. 우리의 마음을 번뇌케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의 마음을 흔듭니다. 주님께서 감당하시기에 너무 과대(過大)한 것은 없습니다. 아무리 복잡한 문제라도 그분께서 풀기에 너무 어려운 것은 없습니다. 세계들을 붙드시고 우주의 모든 사건을 관리하시는 분이신 그분께는...

주님의 자녀 중에 지극히 작은 자가 당하는 어떤 재난이나 그들의 심령을 괴롭게 하는 어떤 근심이나 기분을 좋게 하는 어떤 기쁨이나 입술에서 새어 나오는 어떠한 진정한 기도라도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못본체 하시거나 거기에 직접으로 관심을 두시지 않으시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분께서는 “상심한 자를 고치시며 저희 상처를 싸매시는”(시 147:3)분이십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우리가 주님을 신뢰할 때만 우리의 짐을 져 주시기로 동의하십니다. 그분은 오늘도 무거운 짐을 진 슬픈 당신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고... 그분을 신뢰하십시오! 걱정은 눈을 멀게 하여 미래를 분별할 수 없게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처음부터 끝을 보십니다. 그러므로 모든 어려움 속에서 주님은 해결을 해주기 위해 마련된 그분의 길을 갖고 계십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함으로써 우리는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당신은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답답할 때, 곤란을 당할 때, 치열한 유혹의 공격을 받을 때, 당신은 기도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진토와 한줌의 재같은 유한한 존재가 그리스도의 중보를 통해서 지존자의 알현실에 들어가 시험을 이기기 위한 힘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귀한 특권입니까! 하나님의 보좌로 가는 길은 항상 열려있습니다. 당신이 언제나 기도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을 수는 없으나, 하나님에게서 힘과 지도를 받기 위해 조용한 묵상을 하나님께 계속 올릴 수는 있지요. 당신은 언제든지 지극히 높은 곳에 계시는 하나님의 은밀한 곳으로 피할 수 있습니다. 마치 둥지에 편히 잠든 아기 새 같이 모든 짐을 기도로 주님께 맡기고 기쁜 마음으로 편히 쉴 수 있는 것은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축복일 것입니다!

긍정적인 사고방식과 건강


“두 사람이 감옥에서 창 밖을 바라보았다. 한 사람은 진흙탕을, 다른 한 사람은 별을 보았다.”

“내가 보아온 성공한 사람들은 모두가 늘 명랑하고 희망에 가득 차 있는 사람들이었다. 늘 웃으며 일을 해 나가고 생활 속의 변화가 즐거운 것이든 슬픈 것이든 당당히 맞이하는 사람들이었다.” - 카네기 어록 중에서 -

요즈음처럼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많이 강조하는 때는 없었던 것 같다. 각 유명회사에서, 아니면 성공적인 비즈네스를 원하는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강조하며 배우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왜냐하면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갖는 것은 자신이 바라는 것을 성취하기 위해, 또한 성공적인 삶을 이끌어 내기 위해 아주 필수적이고도 중요한 사고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긍정적인 사고방식은 건강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 속속히 과학적으로 밝혀지고 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인이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가져야 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고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긍정적인 태도와 사고방식을 가져야 올바른 신앙과 믿음을 소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참된 신앙을 갖기 원하지만, 그들이 가지고 태어난, 아니면 후천적인 환경의 영향으로 인해 형성된 부정적인 사고방식 때문에 하나님을 단순하게 믿고 받아들이며, 하나님의 사랑을 진정으로 느끼고 체험하는 일이 쉽지 않은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다. 그리고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은 부정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그리스도인들보다 하나님의 존재를 알고 사랑하며 느끼는 것, 또한 성경의 약속들을 믿는 것, 또한 단순한 믿음으로 기도하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축복들을 주장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소화하는 것을 훨씬 쉽게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엄밀히 따져서 말하자면 부정적인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세상에 존재하지 말아야 할 것인데, 그 이유는 그리스도인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번 호 건강면에서는 우리의 육체의 건강과 영적인 건강을 위해 필요되는 긍정적인 사고방식과 그것이 우리 몸에 끼치는 영향들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기로 한다.

긍정적인 생각이 육체에 미치는 영향

1. 긍정적인 생각 - 사랑과 감사 ; 스텐포드 대학의 재료과학 교수인 윌리엄 틸러 박사는 그의 연구 보고서에서 사랑이란 감정의 생체 분자는 육체의 건강과 밀접한 주파수를 발생시킨다는 사실을 발표했다. 틸러 박사는 “사람들이 사랑과 감사의 감정에 집중할 때 심장 박동은 질서정연하고 일관성 있는 완전한 싸인 곡선이 되었다”고 말했다.

또한 의학진보저널의 한 보고서는 “단 5분 동안 사랑과 감사에 집중한 사람들이 6시간 동안 면역 체계의 한 요소인 면역글로블린 A 분비가 증가 되었다. 반면에 5분 동안 분노에 집중한 사람들에게서는 심장박동이 헝클어지고 1시간 내지 5시간 동안 면역글로블린 A 분비물 생산을 방해 받았다”고 발표했다.

하트메스 연구소장인 롤린 메크레티는 또 다른 연구 보고서에서 “긍정적 감정에 집중한 30명의 성인은 항노화(antiaging) 호르몬인 DHEA의 수준이 100% 증대되었으며, 싸우거나 도망가는 방위 반응을 자극하는 코디솔 호르몬이 23% 감소되는 사실을 발견했다”고 하며 말하기를 “우리가 긍정적인 생각을 하고 사랑을 하고 느낄 때, 측정할 수 있을 정도로 확연한 변화가 우리 몸에 일어난다”라고 하였다.

2. 감정과 심장박동 ; 과학자들의 여러 연구 결과에서 심장의 정상적 박동은 감정들에 의해 달라짐을 밝혀냈다. 어떤 사람이 부정적인 감정인 분노, 불안감, 슬픔, 근심을 느낄 때, 그 사람의 심장 박동이 불규칙하게 뛰고 예기치 않았던 육체적 현상들이 나타나는 것이 실험을 통해 증명되었으며, 긍정적인 감정들, 즉 기쁨, 감사, 사랑은 정상적인 심장박동을 유지시켜 준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런데 이런 심장 박동수들은 단 몇 초만에 바꿔진다는 것이다.

시애틀의 연구진들은 비정상적인 심장박동 때문에 병원을 찾은 9살 짜리 아이 셀레스트에 대해 연구했는데, 그 아이가 심장박동에 이상이 나타난 이유는 전학을 가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심각한 고민에 빠진 후부터 였다. 그 아이는 개학 몇 주전부터 손톱을 물어뜯기 시작하더니 동생하고 잘 놀려고 하지 않고 한밤중에 일어나 몸을 씻기도 했다. 가장 손톱을 물어뜯고 싶은 때가 언제냐고 물었더니 서슴지 않고 “새 학교를 생각할 때마다”라고 대답했다. 이것을 보면 우리의 감정이 우리 인체에 상당한 영향을 끼치는 것을 알 수 있다.

긍정적인 사고방식과 믿음

이상한 말 같지만 사람은 태초부터 자기 미래를 자기가 결정할 수있도록 하나님께서 허락하셨다. 왜냐하면 과학자들이 이즈음 밝혀낸 사실에 의하면, 인간의 세포들은 인간이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유전자의 `배치’를 시작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두려워하면 두려워하던 일이 전개되기 시작하고, 감사하면 감사하던 일들이 생기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유전자를 연구하던 세포학자들은 최근에 다음과 같은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그들은 인간의 하나의 유전자에는 12개의 점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데, 그 12점들은 인간의 의지에 따라 위치를 바꾼다는 사실을 최첨단 현미경으로 사진을 찍어 냈다. 이 사실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중요한 사실을 말해주는데, 그것은 “우리의 기도하기 전의 생각”을 미리 아시는 하나님께서 인간이 원하는 “그 먼저의 생각”을 들어주신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유전자를 만드신 이유에는 “네 원대로, 즉 네 믿음대로 되리라”라는 하나님의 바램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늘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좋은 것에 우리의 의지를 두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소소한 생각들이 유전자에 각인이 된다는 것을 기억하고 늘 좋은 생각, 늘 희망적인 생각, 늘 감사한 생각을 하는 습관을 기르기 위해 노력해야 하며,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이 더 크게 자라도록 해야 할 것이다.

뇌의 기전과 긍정적 사고방식

뇌의 전전두엽의 비대칭성에 관한 논문을 쓴 데이비슨 박사는 행동이 활발한 사람들은 왼쪽 뇌파가 더 활성화되는 것으로 나타나고, 행동을 억제하는 부류의 사람들은 오른쪽 뇌파가 더 활성화되는 것으로 나타난다고 발표했다.

한국표준 과학연구원의 김원식 박사는 그의 실험보고서에서 똑같은 일이 주어져도 “보상에 민감한 사람(상을 준다고 하자 일을 잘한 사람)”은 행동 활성화 체계가 강하고, “처벌에 민감한 사람(벌을 줄 것이라고 하자 잘한 사람)”은 행동억제 체계가 강하다는 것을 뇌파실험을 통해 확인했다.

이것을 신앙 생활로 예를 들어 설명해 보면, “보상에 민감한 사람”, 즉 긍정적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감사하며, 하나님 안에서 그리고 신앙 안에서 자기가 할 수 있는 것들을 기쁨으로 찾고 받아들이며, 기뻐하며 실천한다. 즉 “천국이 저희 것이니라”라는 축복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며, 열심히 실천할 뿐 아니라 현실에서도 그 실천을 통해 항상 행복한 천국을 맛보며 살아갈 수 있다. 그런 사람들이 알고 섬기고 있는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시고 너그럽고 마음이 넓으신 분이시다.

그런데 “처벌에 민감한 사람”, 즉 부정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은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서도 “무엇을 하지 말라”라든가, “그렇게 하면 어떻게 되리라”는 면만을 부정적으로 너무 깊이 받아들여 마음을 항상 조리며 “아이구 또!” 하며 전전긍긍하게 될 뿐만 아니라, 신앙생활에도 기쁨이 없고, 율법주의가 되기 쉬우며, 또 그들이 알고 섬기는 하나님은 두렵고 무섭고 벌을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은 신앙생활도 기쁨으로 하고,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도 자연스럽고 기쁘게 받아들임으로 늘 자유롭고 기쁘고 행복한 생활을 살 수 있지만, 부정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이나 용서나 축복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 자책하기를 잘하고 모든 것을 너무 억제하는 가운데 신앙생활이 자연스럽지 못하고 기쁘지도 못하게 된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가 아무리 성경에 많이 쓰여 있고 아름다운 하늘나라의 보상이 아무리 많이 쓰여있다 할지라도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찾지 못한다. 그러므로 올바른 신앙을 갖기 위해서는 올바른 정신, 즉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갖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고 하겠다.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기르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가지려고 누구보다도 열심히 노력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신앙이 없는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신앙생활과 태도를 보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또 신앙이 어떤 것인지를 판단하게 되기 때문이다.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기 위한 방법들을 함께 생각해 보자.

1. 긍정적인 말을 연습한다.

매일 반복적으로 긍정적인 말을 연습하자. 잠재의식이란 우리의 몸 깊숙한 곳에 있는 마음, 감성, 능력의 집합체이다. 그것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파워인 동시에 에너지이다. 말에는 위력이 있다. 사람은 자신이 한 말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불평이나 변명은 하면 할수록 점점 많아지는 속성이 있다. 그것들은 마음을 부정적인 방향으로 몰고 간다. 따라서 “할 수 없다”라는 부정적인 생각과 말의 노예가 되지 말자.

긍정적인 말은 개인을 받쳐주는 힘이고 에너지이다. 다음의 세가지 말은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기 위해 연습하는 세가지 열쇠가 되는 말이다.

* 항상 기뻐하라!
* 쉬지 말고 하나님과 대화(기도)하라!
* 모든 일에 감사하라.

잠재의식적으로 “나는 정말 감사해!”라든가, “정말 좋고 기뻐!”라든가, “나는 반드시 할 수 있어!”라든가 하는 행복하고 긍정적인 말로 스스로에게 말해 보자. 긍정적인 말의 연습으로 자신이 스스로 영향을 받음과 동시에 모든 일이 자신의 말대로 잘 되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말과 의지에 따라 우리의 유전자가 배치되고 우리의 사상이 형성되며, 또 우리의 사상을 인해 우리의 태도가 형성되며, 또 우리의 태도에 의해 우리의 삶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2. 효율적인 생각의 방법을 가지자.

더 좋은 방향으로 삶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좀더 효율적으로 생각하는 방법을 배울 필요가 있다. 효율적으로 생각하는 습관을 가질 수 있다면 삶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인생에서 성공을 거두는 반면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즉 성공하는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과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생각한다. 그러므로 현재 내가 성공적이든 아니든 관계없이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습관을 가지고 이를 계속 실행에 옮길 수만 있다면 스스로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며, 모든 근심과 걱정에서 해방되는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걱정보다 좋아질 수 있는 이유를 찾아내면 새로운 아이디어가 생겨난다.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환경이 달라져도 문제는 다시 생기기 마련이고, 찾아냈다고 믿었던 보금자리가 시간이 지나면 또다시 스트레스가 되어 돌아온다. 행복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자세를 통해 “발견”하는 것이다. 긍정적으로 살다 보면 행복은 저절로 찾아 오는 것이다. 모든 일에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연습을 하자. 그리고 사람을 대할 때나, 생활을 해나갈 때 항상 밝고 좋은 면만을 바라보려고 노력하자.

3. 부정적인 생각을 떨쳐버리는 연습을 하자.

성경은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성을 쳐서 빼앗는 것보다 낫다고 말한다. 마음을 다스리는 일에는 부정적인 생각을 버리는 일이 포함되어 있다. 이 세상의 모든 일은 한번에 되는 것이 없다. 모든 것에는 연습이 필요하다. 부정적이고 어둡고 쓸데없는 생각을 떨쳐버리고 감사하고 긍정적인 생각을 하는 것도 연습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마음을 단련하여 별로 유익하지 않은 생각들은 과감히 떨쳐버리고, 우리의 마음을 늘 하나님께 두는 연습을 하며 그분의 자비하심과 사랑에 대하여 감사하며 밝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연습을 하도록 하자.

카네기는 이렇게 말했다. “이상은 우리 마음속에 있다. 동시에 이상의 달성을 가로막는 여러 가지 장애 또한 우리 마음속에 있다.” , “부정적인 요소란 바로 욕구불만, 공격성, 불안, 우유부단, 원한, 공허감 등등의 실패기제들을 말한다. 이것들이 한데 모여 성공과 행복으로 가는 우리를 세뇌하고 가로막고 공격한다.” 마음을 다스리고 좋은 선택을 하는 것은 우리의 책임이다.

4. 하나님과 쉬지말고 대화하라.

기쁜 생각이나 일을 하나님과 나누는 대화를 연습하자. 기뻐할 수 있는 이유를 찾아 하나님께 얘기하자. 하나님께 쉬지 않고 자꾸 감사함을 표시하며 이야기 하는 습관을 들이는 것이 바로 “쉬지말고 기도 하라”는 성경의 명령을 실천하는 것이다.

5. 심장 리듬을 조절하는 호흡법

정상적인 심장박동을 유지하고 조절하는 호흡법을 배우자. 여러가지 유형의 스트레스들은 우리를 병들게 하고 에너지를 고갈시킨다.
이럴 때 우리들은 흔히들 외부 환경을 탓한다. 불행히도 이런 식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어지지 않는다. 끊임없이 이상적 외부환경을 얻으려 노력하기보다는 자신의 정신적, 생리적 환경을 조절하는 것, 즉 “안정된 호흡 연습”을 하는 것이 일도 건강도 좋아지게 만드는 것이다.
심장 리듬을 조절하고 안정을 주는 호흡법, 긍정적인 생각을 할 수 있는 여유를 만드는 호흡법은 복식호흡이다.

* 효과적인 숨쉬기

1. 먼저 숨을 후 내쉬면서 마음을 안정시킨다.
2. 잠깐 (1,2초 정도) 숨을 멈추었다가 아랫배가 불룩 나오도록 숨을 들이마신다.
3. 숨을 들여마신 상태에서 잠깐 멈추고 온 몸을 생각한다. (특히 아픈 부위나 가지고 있는 부정적인 느낌을 생각한다)
4. 그런 다음 시원한 생각이 들도록 숨을 길게 내뿜는다. (이 때 부정적인 느낌도 내뿜는다)
5. 1번으로 다시 돌아간다. (이것을 몇번씩 반복할 것)
* 산소가 우리 몸에 공급되면 혈액이 맑아지고 수분과 혈액을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는 뇌부분이 활성화된다.

6. 기쁨의 웃음을 웃자.

자신이 얼마나 기쁜 사람인지 생각하라. 근심 걱정이 아무리 많은 사람이라도 기뻐할 이유가 한가지씩은 있다. 누구에게나 기쁠 이유가 있다. 기쁨을 찾아내어 배가 울리도록 기쁘게 큰 소리로 웃자. 최근 미국의 의학자들은 배에 우리의 감정이 모인다는 것을 밝혀내었다. 기쁜 일을 생각하고 감사하며 배가 흔들리도록 즐겁게 웃을 때 우리는 긍적적인 사람으로 쉽게 복귀될 수 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이것은 예수님의 부탁이자, 명령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일에든지 근심하지 말고 긍정적인 마음가짐으로 생활하기를 바라신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밝고 즐거운 모습으로 신앙을 할 때만이 하나님을 모르는 외롭고 슬프고 불행한 영혼들이 하나님과 신앙을 배우기 위해 우리 곁으로 몰려올 것이다. 우리는 긍정적인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오늘 당신은 긍정적인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

 

서론 - 고통은 왜 존재하는가?


우주선을 타고 바라보는 지구의 모습은 참으로 아름답기 짝이 없다. 마치 파란 구슬처럼 평화롭게 공중에 떠 있는 우리의 지구는 보는 이들로 하여금 감탄케 하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실제로 지구의 구석 구석을 살펴보면 그 구석 구석마다 말할 수 없는 많은 문제들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보게된다. 죽음과 뜻하지 않은 재난들, 그리고 슬픔과 고통들로 가득 차 있는 우리의 지구. 전쟁과 테러, 홍수와 기근, 범죄들과 굶주림들로 얼룩져 있는 우리의 지구. 이러한 우리의 지구에는 오늘도 죄없는 자들이 희생당하고 있으며 고통이 그칠 날이 없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왜 이 세상에 고통이 있는 것일까?

흔히들 이렇게 묻는다. 하나님이 정말 사랑이시라면 왜 이 지구에 이렇게 고난과 슬픔과 죽음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는가? 더 나아가서 우리를 곤궁에 빠뜨리는 질문은 “왜 하나님께서는 믿는 그리스도인들도 고통을 당하게 하시는가?”, 그리고 “왜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자들을 어려움과 고통에서 보호해 주시지 않으시는가?”라는 질문이다. 가끔 필자는 이러한 도전들을 받는다. “하나님을 잘 믿던 내 남편이 왜 직장을 잃어야 합니까?” “그렇게 믿음이 좋던 사람이 왜 암에 걸려야 합니까?” “왜 내 아내가 나를 두고 떠났습니까?” “하나님은 낮잠을 주무시고 계신 건가요?” 등등. 이 세상에는 대조적인 문제들이 많이 있다. 아름다운 꽃밭과 황량한 사막, 풍요로운 논밭과 굶주려 뼈만 앙상한 인간들... 세상은 선과 악이 어우러져 있다. 우리는 건강과 질병, 생명과 죽음, 기쁨과 슬픔이 함께 존재하는 대조를 보게 된다. 아름다운 장미 밑에 가시가 있듯이 말이다. 과연 고통과 불행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우리는 그 이유를 하나님의 말씀에서만 찾을 수가 있다.

불행과 고통은 어디에서 오는가?

불행과 고통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의 고통들은 하나님께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다. 출애굽기 34:6은 하나님의 성품을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다”라고 선포하고 있다. 하나님은 무한하신 자비와 사랑이 충만하신 분이시다. 그러면 고통이 어디에서 왔을까? 마태복음 13:24~34을 읽어보면 예수께서 말씀하신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를 배우게 되는데, 종들이 밭에서 가라지를 발견하고는 좋은 씨만 뿌렸는데 가라지가 왜 생겼느냐고 묻는 장면이 나온다. 그 때 주인은 밤에 잘 때에 원수가 뿌리고 간 것이라고 설명을 하였고, 종들이 그 가라지들을 뽑자고 제의하자 추수 때까지 놓아두라고 명령하였다. 그런데 그 비유를 예수께서 설명하시는 과정에서 “밭은 세상이요”(마 13:38)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원래 이 세상을 죄와 고통이 없는 곳으로 창조하셨다. 푸른 풀밭에 꽃들이 만발하고 새들이 기쁘게 노래하며 슬픔과 질병이 전혀 없고 건강과 행복만 가득 찬 곳으로 창조하셨다. 그러나 원수인 마귀가 거기에 죄와 사망과 고통의 씨를 뿌린 것이다.

누가복음 13장을 보면 예수께서 18년 동안 온 몸이 꼬부라져 있던 한 여인을 고치신 이야기가 등장하는데, 누가복음 13:16은 예수께서 그 여인을 “십팔년 동안 사단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이라고 부른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이 세상의 모든 고통과 슬픔의 책임은 사단에게 있는 것이다. 그가 바로 이 세상에 재난과 파괴를 초래한 장본인이다. 그러나 그는 항상 하나님의 좋으신 성품을 곡해시켜서 마치 이러한 고통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처럼 오해케 만들어 인간들을 자기의 손아귀에 넣으려고 애쓰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단을 창조하셨는가?

그런데 여기에 몇가지 질문이 생긴다. 사단이 과연 어디에서 왔는가? 하나님께서 그를 창조하셨는가? 라는 질문들이 그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를 창조하셨다면 결국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책임지셔야 하는 일이 아닌가? 사람들은 흔히 사단을 불타는 지옥에서부터 올라오는 무시무시하게 생긴 존재로 상상을 한다. 그러나 성경은 그가 원래는 천사였었으며 하늘에서부터 내어 쫓김을 받은 자라고 설명하고 있다. 성경은 마귀가 원래 하늘에 있었으며 하늘에서 하나님을 반역하여 전쟁을 일으켰고 또한 이 전쟁은 이 지구상에서 지금도 진행중이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다(계 12:7~12 참조). 그는 하나님을 억울하게 고소하던 전쟁을 일으켰다가 자기를 지지하던 타락한 천사들인 자기의 부하들과 함께 내어 쫓김을 당한 것이다(살아남는 이들 제 59호 참조).

여기에서 한가지 짚고 지나가야 할 사실이 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마귀를 창조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천사 루스벨을 창조하셨는데, 그가 반역하여 스스로 악한 사단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는 천사들 중에 가장 찬란하고 재주가 있던 자였었다. 에스겔 28장은 그를 “아침 계명성”으로 불렸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그 뜻은 “Light Bearer” 즉, “빛을 가진 자”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그가 교만하고 이기적인 마음을 품게 되었고 드디어 자기도 하나님의 보좌에 올라 하나님과 비기려고 꾀하게 된 것이다(겔 28:13~17; 사14:12-17 참조). 그는 하나님을 공격하며 하나님의 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도전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하와에게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명하신 선악과를 따먹어도 괜찮다고 말하면서 하나님을 이기적인 분이라고 제시한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보좌를 전복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성품과 뜻을 곡해시키고 거짓으로 고소하여 천사들과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하여 오해하도록 은근히 조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사랑의 교제를 원하시는 하나님

그런데, 루스벨이 반역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께서 천사들과 인류들에게 스스로 선택 할 수 있는 자유 의지를 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자유의지를 주시어 타락할 가능성을 주셨는가?” 라는 질문이 등장하게 된다. 그렇게 하지 않으셨더라면 이 세상에 고통이 생기지 않았을 것이 아니냐는 질문이다. 우리는 한가지 중요한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된다. 하나님께서 피조물들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이 바로 선택 할 수 있는 자유 의지의 힘이었다. 자유 의지의 선택력이 우리에게 없다면 우리는 사랑을 할 수가 없는 존재가 된다. 마치 로보트처럼 말이다. 로보트는 인격이 없다. 그저 프로그램된대로 행동하는 기계일 뿐이다. 우리를 인간되게 하며 개인적인 인격체로 만들어 주는 것이 바로 이 자유의지의 힘인 것이다. 로보트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도 없고 예배하며 찬송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로보트로 만드신 것이 아니라 사랑을 주고 받을 수 있는 인격체로 창조하신 것이다.

만일 우리의 자녀들이 로보트라고 가정하여 보자. 상당히 편리하긴 할 것이다. 청소도 잘하고 빨래도 잘 도와주고 공부도 잘하며 전혀 말썽을 부리지 않는 아이들로 살아갈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과연 부모들과 진실된 사랑의 관계를 맺는 아이들이 될 수 있을까? 결코 될 수 없다. 그런 아이들은 그저 프로그램된 기계들에 불과한 것이다. 차라리 가끔 실수를 범하고 청소를 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천진스럽게 부모의 뺨에다 대고 “아이 러브유”라고 말할 수 있는 자식의 사랑이 훨씬 낫지 아니한가? 사랑은 프로그램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사랑은 강요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천사들과 인간들에게 선택 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주신 것이다. 진정한 사랑의 관계만이 참된 행복을 가져 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루스벨은 교만하여져서 그 자유의지를 하나님을 반역하는데 사용하게 되었고 그 결과로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게 된 것이다. 그는 자기가 더 지혜롭다고 생각하였고, 자기가 우주를 더 잘 다스릴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하나님의 법칙과 율법에서 벗어나면 진정한 자유가 있다고 주장하는 사단의 말은 천사들과 인간들을 속이기 위한 거짓말이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왕국에 문제가 생겼고 반역자 때문에 하늘에 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그러자 드디어 마귀와 마귀를 선택한 악한 천사들이 쫓겨나게 되었고 그들이 바로 악령들이 된 것이다.

이 선악간의 전쟁은 이제 곧 끝나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모든 죄와 고통의 이유를 밝히시고 죄와 죄의 장본인인 사단을 없애심으로써, 이 세상, 아니 이 우주를 다시 원래의 아름다움으로 회복하시기 위하여 우리에게로 다시 오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인류들에게 자유의지를 주실 때에 그것 때문에 반역과 타락의 가능성을 생길 것도 아셨다. 그러므로 그러한 위급한 상황이 생길 때에 어떻게 대처하실 것이라는 계획도 영원 전부터 세워 두신 것이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범죄한 죄인들을 대신하여 십자가로 가시어 우리들의 반역의 죄값을 대신 지불해 주시고 우리에게 다시 살 기회를 주시는 위대한 희생적 사랑의 계획이었다.

마귀와 악한 천사들은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살면서 하나님의 성품과 사랑을 너무나도 잘 알면서도 범죄하였지만, 인류들은 마귀에게 속임을 당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쓰라린 고통의 역사를 지나고 나면 이 세상에 다시는 반역이나 죄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될 것이다. 죄와 불순종의 결과가 어떠하다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너무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에 말이다. 우리는 잠깐 동안 괴로움과 슬픔이 많은 이 세상을 지나고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다시 죄와 고통이 없는 원래의 에덴 동산으로 회복시켜 주시려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계시며 또한 그 구속의 사업을 날마다 신실하게 진행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1부 - 시냇물이 마르는 이유를 아시나요?


엘리야와 가뭄

성경에 기록된 엘리야의 이야기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중요한 교훈을 준다.

길르앗 지방의 험한 산 중에 살고 있던 엘리야는 어느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당시에 배도가 가장 극심하였던 아합왕의 왕궁으로 들어가게 된다. 거기서 그는 의분을 가지고 악한 이스라엘의 왕 아합에게 “내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우로가 있지 아니하리라”는 심판의 기별을 선언하였다(왕상 17:1).

하나님께서는 왕궁을 신속히 빠져 나온 엘리야를 그릿 시냇가의 동편 광야로 인도하셨다. 그 곳에서 엘리야는 하나님의 기적의 손길인 까마귀를 통하여 먹을 것을 공급받았다. 선지자 엘리야의 말대로 맹렬한 태양열 아래에서 땅은 메말라 갔으며, 모든 식물들이 죽어갔다. 그러나 엘리야는 까마귀의 기적적인 식량 공급으로 인하여 기아를 면했으며, 그릿 시냇물에서 충분한 물을 얻을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종의 육체적 필요를 채워 주시는 이 장면이야말로 주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에게 용기와 안위가 된다. 모든 이스라엘 지역은 가뭄으로 인하여 심한 어려움을 당하고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순종하는 종 엘리야에게 까마귀를 통하여 날마다 일용한 양식을 공급하여 주셨다. “까마귀들이 아침에도 떡과 고기를, 저녁에도 떡과 고기를 가져왔고 저가 시내를 마셨더니” (왕상 17:6).

그런데 어느날 엘리야에게도 가뭄의 피해가 찾아왔다. “땅에 비가 내리지 아니하므로 얼마 후에 그 시내가 마르더라” (왕상 17:7). 어느날 아침 마실 물을 뜨기 위해서 시냇가에 나갔을 때, 그릿 시내의 바닥에 깔려 있는 갈색 돌들을 보면서 그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방울의 물도 남아 있지 않았다. 온 땅을 휩쓸고 있던 무서운 가뭄이 그에게도 닥쳐온 것이다. 완전히 말라버린 시냇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얼마 동안이나 엘리야를 시험하셨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엘리야는 믿음을 가지고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모든 약속이 한순간에 허물어 지는 것 같았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가뭄으로 황량해진 광야에서 비참한 죽음을 당하도록 내버려 두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가 믿음을 가지고 기다리고 있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다음과 같은 기별을 주셨다.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유하라. 내가 그 곳 과부에게 명하여 너를 공궤하게 하였느니라” (왕상 17:9).

한 문을 닫고, 다른 문을 여는 이유

아합 왕궁에서 이스라엘의 왕에게 하늘을 찌를듯한 용기와 믿음을 가지고 재난의 기별을 전하게 하셨던 하나님, 엘리야를 조용한 그릿 시냇가로 인도하여 한적한 곳에서 날마다 까마귀의 기적을 경험하도록 인도하셨던 하나님, 바로 그 하나님이 이제는 시냇물을 말리시는 고난을 주신 것이다. 그러나 시냇물이 말랐던 순간은 고난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한 문을 닫으심으로써, 또 다른 문으로 그를 인도하고 계시는 순간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신실한 종인 엘리야에게 또 다른 경험을 주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시냇물을 주셨고, 또한 시냇물을 말리심으로써, 그를 보다 높고 새로운 경험으로 인도하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생애는 전진하는 생애이어야 한다. 만일 시냇물이 마르지 않았다면, 엘리야는 그 곳에 편안하게 계속해서 머물러 있기를 원했을 것이다. 자신이 누리는 축복에 만족하며 안일하게 살았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타고난 이기적 본성을 누구보다도 잘 아시는 분이다. 사람은 누구나 육신이 편하면 안주하려고 한다. 그러나 엘리야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은 엘리야가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것이었다. 만일 그가 원하는 바대로 시냇가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면, 갈멜산의 놀라운 기적과 사르밧 과부의 기적, 그리고 엘리사와의 만남 같은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경험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종종 시냇물을 말리우신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언제나 같은 장소에 머무르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우리는 한 장소에 머무르면서 안일한 생활을 하기를 원한다. 우리는 편안한 시냇가에서, 모든 것이 풍족한 평화로운 곳에서 인생을 즐기기를 원한다. 바로 이러한 우리 인간들의 자기 중심적인 속성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시냇물을 마르게 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하늘보다 높은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의존하고 있던 시냇물이 마를 때마다, 고통으로 인하여 울면서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시냇물을 마르게 하셨을 때, 엘리야의 믿음과 신앙은 퇴보하였는가? 아니다. 그는 시냇물이 마르는 시련 속에서도 굳건하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다리는 믿음을 배우게 되었다. 그는 영적으로 더욱 높은 경지로 성장하게 되었다. 또한 그릿 시냇가에서 보다도 놀라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사르밧 과부의 기적을 보여주시기 위해서는, 먼저 시냇물을 마르게 해야만 하셨다. 그것이 인간 엘리야의 눈에는 고통과 시련처럼 보일지라도 그것은 필요한 것이었다.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가 이루어질 때, 인간의 믿음은 시험을 받게 된다. 모든 것이 절망적인 것처럼 보일 때일지라도,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섭리를 신뢰하는 믿음을 배워야만 한다. 엘리야에게 일어났던 절망의 경험이 우리에게도 일어날 것이고 일어나야만 한다.

왜 나에게 이런 고통이?

매우 견디기 어려운 시련을 당한 사람들로부터 받게 되는 질문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왜?”라는 질문이다. “왜 내 아이가 죽어야 합니까?” “왜 나는 직장을 잃어 버려야 합니까?” “왜 우리 아이들은 영적인 것에 관심이 없습니까?” “왜 나의 남편(아내)은 나를 버리고 떠나갔습니까?” 우리가 받게 되는 감정적 스트레스를, 우리는 흔히 하나님의 잘못으로 돌려 버리는 경우가 너무나 많이 있다. 마치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을 인도하시는 면에 있어서 매우 중대한 잘못을 범한 것처럼 그분을 원망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잠시, 성경에 나오는 요셉의 이야기를 살펴 보도록 하자. 요셉은 무척 행복하고 근심 걱정이 없는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어느날 갑자기 그의 “시냇물”이 말라 버렸다. 평소에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 해온 요셉은 시기 질투하던 형들에 의해서 상인들에게 팔려서 애굽 사람의 종으로 전락되고 말았던 것이다. 어린 아들을 잃어버린 아버지 야곱의 심정은 어떠했겠는가? 야곱은 그의 노년에 또 다시 사랑하는 두 아들(시므온과 베냐민)과 헤어지게 되는 쓰라린 시련을 당하게 된다. 늙은 야곱의 다음과 같은 말은 그의 심정을 잘 표현해 준다. “요셉도 없어졌고 시므온도 없어졌거늘 베냐민을 또 빼앗아 가고자 하니 이는 다 나를 해롭게 함이로다”(창세기 42:36).

얼마나 귀에 익은 소리인가? 야곱의 생애를 흐르던 시냇물이 말라버린 것이다. 그러나 불과 며칠 후에 기쁨으로 터질 듯한 마음을 가지고 애굽을 향해 가는 야곱의 모습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잃어 버린 것으로 생각했던 세 아들을 한꺼번에 되찾게 된 것이다. 그의 생애에 또 다른 시냇물이 터져 흐른 것이다. 며칠 전에 시냇물이 마르는 모습을 보면서 원망하던 야곱이 이제는 다른 곳에서 흘러 들어오는 시냇물의 소리를 듣고서 기뻐하는 모습에서, 우리 모두의 연약함을 보게 된다.

애굽의 총리대신으로 변모한 요셉이 자기를 찾아온 형들에게 한 말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을 보게 된다. “당신들은 나에 대하여 악을 계획했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선으로 계획하시어...” (창세기 50:20 - 한글 킹제임스 성경). 어쩌면 요셉이 형들에게 말했던 것처럼, 이미 지나간 과거를 회상하면서 “과거에 자신이 겪었던 그 절망과 시련은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였었다”라고 고백하기란 쉬울지 모른다. 그러나 왜 우리는 지금 말라버린 시냇가에 서서 그러한 믿음의 말을 할 수 없는가? 슬픔과 절망으로 인하여 가슴이 메어져버릴 것만 같은 좌절감 속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굳건한 신앙을 나타내는 그리스도인들의 숫자가 너무나 적다. 시냇물이 소리를 내면서 흐를 때에는 하나님의 축복을 찬양하면서 믿음을 발휘하지만, 시냇물이 말라가기 시작하면 금방 조급해져서 안절부절하며 원망과 불평을 쏟아내는 그리스도인들이 너무나 많이 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로마서 8:28). 완전히 말라버린 시냇물 가에서도 하나님의 이 약속을 붙들고 서서 하나님의 선을 기다리는 그리스도인들이야말로 하나님을 진정한 자신의 “아버지”로 삼고 사는 자들이다.

알곡과 가라지가 분리되는 과정

성경에는 고통이 궁극적으로는 영적인 유익을 가져올 수 있다는 성경절들로 가득차 있다. 베드로는 “시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라고 말했으며(벧전 4:12), 바울은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고 기록하였다(딤후 3:12). 또한 야고보는 다음과 같이 믿기 어려운 말을 기록하여 놓았다. “여러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야고보서 1:2, 3).

이러한 말씀 외에도 이와 비슷한 말씀들이 성경에 많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서, 고난과 고통은 그리스도인에게 신비스러운 축복을 가져다 준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야고보는 시련이야말로 그리스도인들이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성품을 준비시켜 주는 하나님의 도구라고 말하고 있다. 요한은 마지막 시대의 성도들의 특징을 말하면서,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라고 말하고 있다(요한계시록 14:12). 구원받을 자들의 특성 중에서 인내야말로 매우 긴요한 것인데, 야고보는 말하기를 인내는 시험과 시련을 통하여 형성된다고 하였다. 고난은 그리스도인들을 하늘을 위하여 준비시키는데 필요한 훈련 과정이다. 고난을 수없이 많이 당했던 다윗은 다음과 같은 놀라운 결론에 도달하였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시편 119:67,71).

이 단순한 하늘의 원칙을 체험적으로 깨닫게 될 때까지, 사람들은 고난과 시련을 당할 때마다 의심과 불신의 안개 속을 헤메면서,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사랑에 대한 의문의 미로를 방황하게 될 것이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분께서는 절대로 자신에게 시련과 고통을 허락하지 않으실 것이라는 어린아이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므로 불가운데로 지나가는 고통과 시험을 허락하신다고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러한 불 시험들을 통해서 우리의 모난 성격들과 이기심이 제거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자신들의 품성과 생애를 정결하게 해달라는 그리스도인의 기도에 항상 응답해 주신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애에서 죄와 이기심과 무정한 마음을 제거해 달라는 기도를 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서 그러한 것들을 제거해 내는 수술인 고난과 시련을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 고난과 시련은 죄와 이기심을 제거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유일한 방법이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사람들은 계속되는 고난과 시련 속에서 성화의 길을 걷게 된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하나님을 믿고 신뢰한다고 말하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고난과 시련으로 인하여 오히려 그들의 믿음을 잃어버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실, 고난과 시련에서 오는 슬픔과 충격을 막을 수는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것들로 인한 감정적 스트레스 때문에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신뢰와 믿음을 저버려서야 되겠는가? 고난과 시련을 믿음으로 통과하는 비결이 여기에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꼭 필요하거나 최선의 것이라고 여겨지는 것이 아니면, 어떤 일도 일어나도록 결코 허용하지 않으신다는 확신 안에서 쉬는 것이다. 이것은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요구하지만, 우리의 영생을 위해서 돌아가신 그분의 사랑을 생각해 보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나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께서 허락하신 일이 내게 일어났다고 생각한다면, 평안한 확신을 가지고 내 앞에 놓인 고난과 시련의 길을 걸어간다는 것이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때때로 우리가 얼핏 보기에는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되는 비극들이 우리의 생애 가운데로 찾아오게 될 것이다. 그러나 비극 저편에서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라. 비극 저편에서 우리가 믿음으로 전진할 것을 애타게 기다리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그리스도인과 그렇지 못한 그리스도인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생기게 된다. 바로 이러한 차이 때문에, 한 사람은 똑 같은 시련과 환난을 통과하면서 잘익은 알곡으로 익어가는 반면에, 다른 한 사람은 같은 시련과 환난을 통과하면서 그것에 압도되어 불평과 원망을 토해내는 가라지로 변모해 가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나타난 약속만을 붙들면서 전진해 나가는 거룩한 습관을 익혀야 한다. 바로 여기에 진짜 그리스도인과 가짜 그리스도인의 차이가 있다. 어려움은 우리를 예수께 더욱 가까이 인도한다. 고난과 시련이 아니었으면, 하나님을 잊어버렸을 사람들이 고난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찾고 진리를 붙잡게 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가?

우리의 성품과 신앙의 실체는 평안한 때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위기의 순간에 드러나게 된다. 그러므로 위기의 순간에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평안한 때에 하나님과 긴밀한 개인적 관계를 맺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가장 유익하고 선한 것이 아니면 어떠한 고난도 허락하지 않으신다는 원칙을 깨달은 사람들만이, 고난과 슬픔의 순간들을 올바른 자세로 맞이하게 된다.

2부 - 정확하게 계산된 고통과 시련


그대는 외과 의사를 신뢰하는가?

제1부에서 우리는, 믿음을 통하여 충격적인 시험과 환난을 이기게 된다는 교훈을 배웠다. 하나님의 개인적인 사랑과 관심을 체험한 그리스도인이라면, 고난과 고통 속에서도 자신에 대한 그분의 사랑과 관심을 확신하게 될 것이다.

비록 자신 앞에 닥친 상황을 잘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과거에 보여주셨던 그분의 변함없는 약속과 사랑을 위기의 순간에도 기억하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믿음 하에, 우리는 욥과 같은 말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 분이 나를 죽이실지라도, 나는 그 분을 신뢰하리라” (욥기 13:15 - 한글 킹제임스 성경).

부모들이 자녀를 외과 의사의 손에 맡기는 절대적인 신뢰의 태도로부터, 우리는 매우 중요한 교훈을 배울 수 있다. 어떻게 사랑하는 자녀의 몸에 외과 의사의 날카로운 수술칼을 대도록 허락할 수 있는가? 또한 수술 후의 심한 통증을 겪게 되는 자녀의 모습을 보는 부모의 심정은 어떠할까? 부모가 자녀의 몸에 칼을 대는 의사를 신뢰할 수 있는 데에는 두가지 이유가 있다. 첫번째, 수술을 성공적으로 할 수 있는 의사의 기술과 능력을 신뢰하기 때문이다. 두번째, 자녀에게 완전한 치료를 가져오기 위해서는, 적당한 시간에 적당한 치료법을 행하는 의사의 지혜를 믿기 때문이다. 또한 순간적인 고통이 지나가면, 자녀가 이전보다 훨씬 더 건강한 아이로 회복될 것을 알기 때문이다.

가끔 실수를 하는 인간 의사에게 자녀를 맡기는 믿음을 행사한다면, 단 한번도 실수하지 않는 하늘 의사를 믿는 것이 왜 그렇게 어려운 일이 되겠는가? 어린 아이는 아무리 자신이 위급한 상황에 놓여있다고 할지라도, 스스로 자원해서 수술을 받기로 선택하지 않는다. 부모가 자녀의 상태를 자녀 자신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자녀를 외과 의사에게 데리고 가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에게 필요한 시험과 고난을 우리가 스스로 선택해서 받을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의 상태를 완전히 이해하시며, 어떤 종류의 시험과 고통을 어떤 정도로 받아야만 우리에게 유익이 될 것인지를 아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한가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비록 수술을 받는 당사자가 부모가 아니라 자녀일지라도, 부모는 자녀의 곁에서 손을 잡은 채 안스러운 마음으로 긴긴 밤을 지새우는 것처럼, 우리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고통을 통과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면서 애타는 마음으로, 우리가 승리하는 순간을 기다리고 계신다. 고통과 절망감으로 인하여 우리의 눈에서 눈물이 나올 때,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러 내린다. 우리들이 고통으로 인하여 울면서 하나님을 원망할 때마다, 하늘 아버지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기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시련을 당하게 되는 이유를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설명해 주실 수 없기에, 하나님의 마음은 더욱 더 답답함과 안타까움으로 메어질 것이다. 자녀들이 자신을 병원으로 데리고 가는 부모의 심정을 이해할 수 없듯이, 우리도 우리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고통과 시련의 수술실로 데리고 가는 하나님의 결정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용하시는 모든 고통과 시련의 이유들을 정확하게 보여 주신다면, 우리는 그 놀라운 목적과 결과들을 지켜보면서,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에 대하여 경탄하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 재강림하셔서 우리를 하늘 우주선에 태우시면서, 우리의 인생에 슬픔과 고통과 절망과 좌절을 가져다 준 사건들에 대하여 우리에게 설명해 주실 때에야 비로소 우리가 당했던 시련들에 대해서 감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다시 한번 인생을 산다고 할지라도, 동일한 슬픔과 절망과 시련의 경험들이 자신에게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나는 지난 날에 가졌던 외로움과 절망과 낙담의 경험들이 나의 전 인생의 방향을 바꾸어 놓았다는 사실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한 경험들만이 나를 의의 길로 인도하는 유일한 방법이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나의 이기심을 만족시키는 안일한 생활이 계속되었다면, 아마 지금과 같은 나의 신앙과 믿음은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내게 쓰디쓴 고통의 잔을 마시는 경험을 허락하심으로써, 하나님께서 내 자신의 모습과 형편을 정확하게 볼 수 있는 기회를 주시지 않았더라면, 과연 지금쯤 나는 어떻게 되었으며, 어떤 길을 걸어가고 있을까? 정말 생각만해도 끔직한 일이다.

영원 전부터 세워 놓으신 계획

고통과 시련의 골짜기가 우리를 하늘로 인도하는 준비 과정이라면, 우리는 그러한 일들을 우리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의 일부라고 보아야 한다. “보라 내가 너를 연단하였으나 은처럼 하지 않고 너를 고난의 풀무에서 택하였노라” (이사야 48:10). 우리에게 다가오는 고난과 시련을 우리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최선의 선택으로 볼 수 있다면, 고난의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의 태도가 얼마나 달라지겠는가? 바울의 말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우리를 택하셔서 우리를 거룩하게 변화시키기 위한 구원의 계획을 세워 놓으셨다.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에베소서 1:4).

바울이 말한 이 진리를 정말 이해할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영원 전부터 우리를 개인적으로 눈여겨 보아 오셨다. 그 무수한 세월을 통하여, 지혜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는 그대를 성화시켜서 결국에는 구원에 이르도록 하기 위하여 세밀한 계획을 세워 놓으셨다. 그대가 그분의 계획에 복종하는 마음으로 따른다면, 그분께서는 당신의 완전한 구원의 계획을 그대의 생애 가운데서 성취시키실 것이다. 하나님의 계획은 종종 그대에게 아픔과 재난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대가 감당할 수 있는 이상은 결코 허용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언제나 그대의 구원을 위하여 최선의 유익을 가져올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우리 곁에 계셔서 우리의 필요와 능력에 따라서 우리가 통과하는 시련의 용광로의 온도를 재고 조절하고 계신다.

이러한 설명이 고통과 고난의 문제를 미화시키기 위하여 꾸며낸 이야기처럼 들리는가? 하나님의 존재와 그분의 사랑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들릴 것이다. 사랑의 하나님께서 당신을 따르는 자들을 끝까지 인도하시며, 모든 어려움과 고난에서 건져 주시기 위하여 간섭하신다는 진리를 인정하지 않는 자들이야말로, 이 세상을 불평과 원망과 혼돈 속에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전지전능하심에 따라서 각 사람을 최선의 길로 인도하신다.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과 섭리에 따라서 각 사람을 인도하시는 동안, 그 이유와 목적을 일일이 개별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분을 믿는 것이 어려운 일인가? 만일 하나님께서 당신의 독생자를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이 땅에 보내 주시지 않으셨고, 그 아들 되신 예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지 않으셨다면, 하나님의 섭리와 목적에 대한 불신의 말들이 설득력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분의 사랑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분께서 항상 우리를 최선의 길로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믿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바로 이러한 설명만이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믿음과 확신을 가져다 줄 수 있다. 왜 하나님께서 그러한 고통과 시련을 그들에게 일어나도록 허용하셨는지를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가장 좋은 것이 아닌 어떤 것을 허락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께서 보실 수 있는 대로 미래를 볼 수 있다면, 그들 자신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택하신 그 길을 선택하였을 것이라고 믿는 것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자세이다.

고난과 성장의 관계

어려움을 통하여 성숙한 그리스도인 되었던 사람들이 있는가? 그렇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이스라엘 백성들의 구원자로 삼으시기 전에, 먼저 그가 40년 동안 어려운 광야 생활을 하도록 섭리하셨다. 또한 사도 요한은 요한계시록을 기록하기 전에, 먼저 밧모섬에서 수많은 세월 동안 어려운 유배 생활을 하도록 섭리하셨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만족할 줄 아는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라는 영감의 글을 기록하기 전에, 먼저 무수한 고문과 옥중 생활을 경험해야만 하였다(디모데전서 6:6, 한글 킹제임스 성경). 바울은 여러번의 옥중 생활을 통하여 하늘 나라에 갈 수 있는 원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바울과 요한에게 있어서, 옥중 생활과 유배 생활이 그 당시에는 고난과 시련으로 생각되었을지 모르지만, 그들은 그곳에서 하나님의 진리를 세상 끝까지 전파할 수 있는 위대한 성경 말씀을 기록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왜 사람들은 고통을 받아야만 모든 관심을 한 곳에 집중시킬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오직 하나님께서만 아신다. 우리를 궁극적으로 당신께 인도하시기 위하여 시련과 고난이라는 도구들을 사용하신다고 해서 그분을 원망할 수 있는가? 고통과 시련을 통하여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인도되는 것이 신비한 것처럼, 많은 경우에 있어서 부귀와 건강, 그리고 평탄한 인생길이 사람들을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도 신비로운 일이다.

옛날에 어떤 사람이 높은 탑에 갇혀 있었는데, 그는 자신의 어려운 처지를 탑 아래로 지나가가는 사람들에게 알려서 도움을 받고자 하였다. 그가 소리를 크게 질렀지만, 탑 아래의 분주한 사람들의 주의를 끌지 못했다. 그래서 주머니에 가지고 있던 순금 동전을 떨어뜨렸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금 동전을 줍기 위해서 몰려 들었지만, 금동전에 온 정신이 팔려서 아무도 탑에 갇힌 사람의 상황을 알아 보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무너진 벽으로부터 굳은 회반죽 한 덩어리를 떼어 내어서 구멍 밖으로 던졌다. 그런데 그것이 지나가던 어떤 사람의 머리를 쳐서 부상을 당하게 하였다. 그 때, 머리를 다친 사람은 고개를 들어서 위를 쳐다보았고, 탑 안에 갇힌 사람의 처지를 알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우리는 이 예화에서 중요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사람들은 축복은 자신의 지혜와 노력의 결과로 생기는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면서 더 많은 것들을 거두어 들이기 위하여 몰두하지만, 불행과 고난이 닥치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전하고자 하는 기별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이유를 찾아서

시련이 지나간 후, 언젠가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애에 나타난 “말라버린 시냇물”에 대한 이유와 목적을 설명해 주시는가? 결국에는 설명해 주실 것이다. 그러나 그 설명이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에 오지 않을 경우도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대면하여 그 때에 왜 그러한 시련이 필요했었는지에 대한 설명을 들을 때까지, 우리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과 신뢰를 가지고 전진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시험을 당할 때에 그 이유를 찾아보아야 한다. 한 시냇물이 말라 버리면, 대개는 다른 새로운 샘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몇년이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시련에 대한 만족할만한 대답을 발견하지 못하는 경우에도,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잃어버리지 말아야 한다. 언젠가는 그분께서 속시원하게 설명해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 때까지 우리는 우리의 비통함과 슬픔을 이해하시며 동정하시는 그분의 위로를 기도를 통하여 받음으로써 견디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고통의 근원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오늘날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고통의 근원은 죄이다. 너무나 많은 경우에 있어서, 마귀가 벌여놓은 비극 때문에 하나님께서 원망을 받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암이라는 질병을 만들어 놓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다만 시련과 고통을 허락하실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단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들을 시험하도록 허용하시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그리스도인들이 항상 죄에 대하여 경계하는 마음을 갖기 원하시기 때문이다. 안일함과 평안함만이 계속되는 인생이라면, 슬픔과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위로하심을 찾는 일이 없게 될 것이다. 사단이 주는 고통과 시험에 대하여 항상 깨어있는 양심을 가지고 경계하면서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단의 공격과 시험을 허락하심으로서,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항상 깨어서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간구하게 되기를 원하신다.

일부를 보고 오해하지 말라

라디오와 전신기가 발명되기 전인, 나폴레옹 시대에는 수기 신호를 통하여 서로 연락을 취했다. 비록 멀리 떨어져 있다고 할지라도, 깃발을 사용해서 천천히 신호를 전달하면, 그 의미를 전달할 수 있다. 불란서의 나폴레옹 장군과 영국의 웰링턴 장군이 워털루 전쟁을 벌이고 있던 때였다. 모든 영국 국민들이 워털루 전쟁의 승패 여부에 대한 소식을 듣기 위해서 손에 땀을 쥐고, 수기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수년 동안 나폴레옹은 온 유럽을 정복하기 위하여 애를 써왔다. 이제 영국만 굴복시키면, 그의 천하통일 목적은 성취되는 순간이었다. 전쟁의 승패 소식을 전하는 수기 신호를 보기 위해서, 수많은 런던 시민들이 도버 해협의 해안선에 모여들었다. 갑자기 해협 저편에서 수기 신호가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서서히 신호가 전달되기 시작하였다. 제일 먼저 “웰링턴 패배”(Wellington defeated) 라는 뜻을 가진 신호가 전달되었는데, 갑자기 짙은 안개가 내려서 그 다음 소식은 읽을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러나 해협에 모여든 사람들은 영국의 웰링턴 장군이 패배한 것으로 단정짓고 말았다. 이제 사람들은 런던 시내에서 최후의 일전을 치르기 위한 준비를 갖추기 위해서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런던의 시민들은 반쯤 자포자기한 상태에서 이틀을 보냈다. 그 때에 안개가 걷히기 시작했으며, 망대에서 수기 신호를 기다리던 사람이 계속되는 수기 신호를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수기신호에 의한 전체 기별은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웰링턴이 워털루 전쟁에서 나폴레옹을 패배시켰다.” (Wellington defeated Napoleon at Waterloo) 영국 국민들의 오해와는 반대로 웰링턴 장군의 승리로 전쟁이 종결되었던 것이다.

인간의 제한된 능력과 편견으로 인하여, 우리는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슬픔과 고난에 대한 정확한 이유와 내용을 알 수 없다. 기별의 일부를 보고서 절망했던 런던의 시민들처럼, 하나님께서 고난과 시련이라는 수기 신호를 통해서 보내 주시는 기별의 일부만을 보고서 쉽게 실망하고 좌절해 버리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있다. 불신의 안개가 걷히고, 베일이 완전히 거두어질 때에야 비로소 우리가 받은 고난과 시련 속에서 시종일관 우리와 함께 계셨던 하나님의 임재를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계획과 인도하심 속에 있었지만, 전체의 기별을 볼 수 없었기 때문에 그 의미를 오해하고 실망하게 되는 것이다. 예수께서 재강림하셔서 성도들에게 영광스러운 몸을 주시고, 그분께서 고난과 시련이라는 수기 신호를 통해서 주셨던 전체 기별을 말씀해 주실 때까지 믿음과 신뢰를 가지고 기다리도록 하자.

고통과 시련 중에 있는 인간의 마음을 위로할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해결책이 무엇인가? 아직까지 한번도 실패한 적이 없는 하나님의 약속을 단순히 믿는 것이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로마서 8:28).

3부 - 성경이 말하는 고통의 이유 6가지


1. 고통은 사단의 도전 때문에 온다!

구약 성경에 나오는 욥은 사단의 도전 때문에 고통을 당하게 된 대표적인 경우이다. 욥기 1장에는 사단이 하늘 총회에 참석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 회의에서 사단은 자신이 이 지구를 두루 다녀 보았는데, 하나님을 진심으로 경외하는 사람들을 이 세상에서 찾을 수 없었다고 주장한다.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섰고 사단도 그들 가운데 왔는지라.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서 왔느냐? 사단이 대답하여 가로되 땅에 두루 돌아 여기저기 다녀 왔나이다.” (욥 1:6,7). 이 때 하나님께서는 사단에게 욥에 대해서 아느냐고 물으시면서, 욥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하셨다.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욥 1:8)

그러나 사단은 욥이 하나님을 섬기는 이유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에게 많은 재물을 축복하셨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 다시 말해서 욥이 하나님을 섬기는 이유는 자신의 이기적인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섬긴다는 것이 사단의 고소였다. “주께서 그와 그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산울로 두르심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 소유물로 땅에 널리게 하셨음이니라”(욥 1:10). 순수한 동기와 양심적인 확신에 의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욥을 번영케 하셨으므로, 욥이 그에 대한 답례로서 하나님을 섬기고 경외하는 것이라고 사단은 주장하였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축복을 욥에게서 거두시면, 그 즉시로 욥은 하나님을 섬기지 않게 될 것이라는 것이 욥에 대한 사단의 고소 내용이었다.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 (욥 1:11).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명예를 걸고서 사단의 이러한 도전을 받아들이셨다. 하나님께서는 사단에게 욥의 몸을 건드리지 않는 선에서 욥을 시험하도록 허락하셨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욥 1:12). 그리하여 즉시로 사단은 욥을 시험하기 위해서 욥에게로 내려갔다.

재난이 연속적으로 욥에게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갑자기 외적들이 쳐들어 와서 소와 나귀를 다 빼앗고 종들을 죽이는 사건이 일어났으며,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서 양과 종들을 불살라 버렸다는 종들의 말이 마치기도 전에, “또 한사람이 와서 고하되 주인의 자녀들이 그 맏형의 집에서 식물을 먹으며 포도주를 마시더니 거친 들에서 대풍이 불어와서 집 네 모퉁이를 치매 그 소년들 위에 무너지므로 그들이 죽었나이다 나만 홀로 피한고로 주인께 고하러 왔나이다”(욥 1:18,19). 엄청난 재난의 소식을 연속적으로 전달하는 종들의 말을 듣고 서있는 욥의 심정이 어떠했겠는가?

사단은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했다. 그는 욥의 재산뿐만 아니라 자녀들을 빼앗아 갔다. 사단은 욥의 입에서 하나님께 대한 저주가 나오길 기대하였다. 그러나 욥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 대신에 욥은 “일어나서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니라”(욥 1:20~22). 사단은 완전히 실패했으며, 욥에 대한 하나님의 신뢰는 증명되었으며, 욥을 의인이라고 선언하셨던 하나님의 명예는 옹호되었다. 욥은 하나님께로부터 무엇을 받기 위해서, 또는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욥의 신앙은 순결한 것이었다.

그러나 사단은 포기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욥이 순결한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사단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나를 격동하여 까닭없이 그를 치게 하였어도 그가 오히려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켰느니라” (욥 2:3).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사단은 욥이 하나님을 저주하지 않은 이유는 하나님께서 욥의 몸을 건드리지 못하도록 제한하셨기 때문이라고 대꾸하였다. “가죽으로 가죽을 바꾸오니 사람이 이 모든 소유물로 자기의 생명을 바꾸올지라 이제 손을 펴서 그의 뼈와 살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 (욥 2:4,5). 하나님께서는 다시 한번 사단의 이러한 도전을 받아 들이셨다. “내가 그를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생명은 해하지 말지니라” (욥 2:6). 다시 한번 사단은 욥의 몸에 온갖 고통을 주기 위해서 지구로 달려 내려갔다. 인간은 이기적 목적을 위하여 하나님을 경배한다는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는 것이 사단의 목적이었다.

사단은 욥에게 고문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사단이 이에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서 욥을 쳐서 그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악창이 나게 한지라” (욥 2:7). 욥이 “재 가운데에 앉아서 기와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던 욥의 아내는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저주하였다(욥 2:9). 친구들도 욥을 찾아와서 욥에게 절망적인 말을 남기고 떠나갔다. “생각하여 보라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 내가 보건대 악을 밭갈고 독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나니” (욥 4:7,8). 친구들이 욥에게 던졌던 조롱과 비웃음은 그를 정말 참기 어려운 고통 속으로 몰아갔다.

욥의 고결한 성품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부인에게 다음과 같은 말로 부인에게 권면하였다. “그대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치 아니하니라” (욥 2:10). 욥의 입에서 나온 이 한마디의 말에 의해서, 사단은 완전히 패배하였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사단은 더 이상 욥기에 등장하지 않는다. 사단은 하나님께 죄를 범하기 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택했던 욥을 이길 수가 없었다. “그가 나를 죽이실지라도 나는 그를 신뢰하리라... 나의 구속자가 살아계시고 훗날 그가 땅에 서실 것임을 내가 앎이라” (욥 13:15; 19:25 - 영어 킹제임스 성경역).

욥은 하늘에서 사단이 하나님께 도전했던 사실을 몰랐다. 그는 시련과 고통을 대하는 자신의 태도 여하에 따라서 하나님 또는 사단이 승리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또한 하늘에서 하나님과 사단 사이에 오고 간 대화를 들은 모든 천사들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던 사실도 몰랐다. 그가 알았던 것은 아무런 이유없이 재난이 자신에게 닥쳤다는 사실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양심에 비추어서 최선이라고 생각되는 태도를 나타내었다. 그의 주변에서 일어난 상황이 전혀 이해되지 않았지만, 자신이 알고 있는 진리의 빛에 따라서 행동하였다.

고통을 당하고 있는 형제자매들이여, 욥의 모본을 따르라. 욥은 자신에게 어떤 죄가 있길래 이러한 재난이 이르러 왔는지를 깊이 생각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당한 재난의 이유와 원인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그대 역시 고통의 이유가 그대 자신의 죄나 부족함에 있는지를 깊이 살피라. 만일 어떤 특별한 이유없이 고통이나 재난이 닥쳐왔다고 생각되면, 그대도 욥처럼 “그가 나를 죽이실지라도 나는 그를 신뢰하리라”고 말함으로써, 그대를 향한 사단의 도전을 물리치라.

2. 고통은 회개하지 않기 때문에 온다!

고통이나 심판이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임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예수님께서 빌라도에 의해서 죽임을 당했던 갈릴리 사람들에 대해서 말씀하셨던 것을 상기해 보자. “그 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고하고” (눅 13:1).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을 보면, 그 당시 빌라도가 수많은 사람들을 성전에서 살해했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들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던 도중에 성전에서 죽임을 당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런 일이 그들에게 일어난 것을 보면, 그들은 틀림없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악한 죄인일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말씀하시길, “가라사대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받음으로써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같이 망하리라” (눅 13:2,3). 계속되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 보라.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하는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눅 13:4,5). 갈릴리 사람들의 죽음과 실로암 망대에 치어 죽은 사람들은 죄를 범했기 때문에 형벌을 받았다기 보다는,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형벌을 받고 죽었다는 것이 그들의 죽음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설명이다.

우리는 어떤 죄로 인하여 갈릴리 사람들이 형벌을 받았는지 모른다. 이 이야기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치 않는 자들은 모두 그와 같이 멸망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말씀은 갈릴리 사람들이 회개치 아니하여 멸망당한 것을 지적하시면서, 만일 우리도 회개치 않으면 그들처럼 멸망당할 것을 경고하시기 위하여 주신 것이다. 그들은 우리보다 더 악한 죄인들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은 형벌을 받았다. 만일 우리가 회개치 아니하면 똑같은 일이 우리에게도 임할 수 있다. 형벌이 우리의 생애 동안에 임하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가 그들보다 선하다고 착각하지 말라. 최후의 심판날에는 반드시 회개하지 않은 죄에 대하여 보응받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이다.

동일한 교훈이 실로암 망대에 치어 죽은 사람들의 이야기에도 적용된다. 성전에서 종교적인 행위인 제사를 드리고 있었던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 별다른 차이가 없어 보인다. 종교를 가지고 있던, 가지고 있지 않던 간에 회개치 않는 자들은 모두 이와 같이 멸망당한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
그대에게 시련과 고통이 있는가? 혹시 회개하지 않은 죄가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라. 그대가 그리스도인이든지 아니든지를 막론하고 회개치 않는 죄에 대해서 그대는 언젠가 그 대가를 지불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3. 고통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온다!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의 이야기는 고통의 이유에 대한 또 다른 면을 우리에게 말해준다. 이 일화가 주는 교훈은 죄의 문제나 회개가 아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에 의해서 고통이 올 수 있으며, 고통을 당하고 있는 당사자는 믿음을 통하여 그 고통에서 해방되고 치유될 수 있다는 놀라운 교훈이 담겨져 있다.

제자들은 그 사람이 소경이 된 이유를 죄의 문제와 결부시켰다.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그 사람은 자신이나 부모의 죄로 인하여 소경이 된 것이 아니었다. 예수께서는 “이 사람이나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고 대답하셨다(요 9:3). 그 사람은 하나님께서 병든 자에게 어떤 치유의 기적을 베풀 수 있는지를 보여주기시 위해서 소경된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에 대하여 영광을 돌리도록 하기 위해서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봉사사업을 시작하실 때, 그 소경이 믿음을 가지고 예수께 나오기를 기다리고 계셨다. 드디어 그 사람은 믿음을 가지고 예수께 나왔으며, 치유함을 받았다. 하나님의 영광을 이 땅에서 드러내기 위하여 소경이나 앉은뱅이가 되는 특권(고통)을 받은 불구자들이나 환자는 믿음을 가지고 주님께 나올 때 즉시로 치유받을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소경이나 절름발이, 그리고 앉은뱅이들에게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되면, 치유함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해서는 안된다. 그러한 사람들에게 “당신이 치유함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믿음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어떤 사람이 불구자로 평생을 살다가 죽었다고 해서 “그는 믿음이 없는 사람이다” 라고 말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들이 불구자가 된 진정한 이유를 모르며, 왜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에 응답해 주시지 않은지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느 누구도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시간이 이르기 전에 서두르지 말아야 한다. 잘못된 희망을 가지고 서두르면, 실망하게 될 것이다. 조용히, 그리고 신뢰하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섭리를 기다리는 것이야말로 하나님께 대한 가장 강력한 믿음의 행사이다.

4. 고통은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온다!

바울의 경우는 때때로 우리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고통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바울은 신실한 종이었다. 하나님의 사업을 위하여 훌륭하게 쓰임을 받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 역시 연약한 인간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이 이룩한 놀라운 사업과 희생에 대하여 스스로 교만해질 수 있는 위험을 보셨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이 스스로 자신을 높일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높여질 위험을 아셨던 것이다. 그래서 바울에게 육체의 가시를 허락하셨다. 우리는 그 가시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그것이 매우 바울의 육체를 매우 괴롭혔었다는 사실은 알 수 있다.

가시를 몸에 가지고 다녀 보았는가? 얼마나 불편하고 고통스러운가? 바울은 세번이나 그 육체의 가시를 제거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바울의 육체에 그대로 남겨 두는 것이 최선이라고 결론지으셨다. 하나님께서는 단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라고만 말씀하셨다. 그래서 그 가시는 바울의 육체 속에 일평생 동안 남아서 고통을 주었다. 바울이 “사단의 사자”라고 불렀던 그 육체의 가시는 하나님의 신실한 종의 구원을 위하여 남겨진 바 되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은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내가 세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고후 12:7~9).

바울은 많은 계시를 받았던 사도이다. 그로 인하여 사도 바울이 자고하게 되고 다른 사람들도 그가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할 위험이 있었다. 이러한 위험을 방지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그에게 육체의 가시를 주셨다. 슬픈 일은 위대하다는 평가를 받는 사람일수록 교만에 빠지기 쉽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경우들을 다루시는 법을 아신다.

가장 많은 신약 성경을 기록하였고, 제자들과 사도들 중에서 가장 많은 전도 여행을 하였던 위대한 사도 바울의 기도도 응답되지 않았는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기도가 응답되지 못하는 것은 믿음의 부족이라고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병을 낫게 해달라는 기도를 드려도 치유를 얻지 못하는 이유는 믿음이 부족하거나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몰아부치는 것은 매우 비성경적이다. 왜냐하면 아무도 그 병자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정확하게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대가 정말 순수한 믿음이 있다면, 그리고 그대가 진정 하나님의 성품을 신뢰한다면, 온 마음을 다하여 그분의 섭리와 계획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

바울이 자신의 육체 속에 박혀 있는 가시에 대해서 성경에 기록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왜 고통을 허락하시는 지에 관한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겸손하게 낮추기 위한 경험이 어떤 것이며, 또한 언제 그러한 경험들이 필요한지를 아신다. 그러한 경험들이 우리에게 찾아올 때, 우리는 바울을 생각하면서 “하물며 바울과 같은 사람도 육체의 가시가 필요했는데, 나처럼 연약하고 쉽게 교만해질 수 있는 사람에게는 육체의 가시가 더욱 필요하지 않겠는가?” 라고 말하도록 하자. 바울과 같은 위대한 그리스도인에게도 육체의 가시가 필요했다면, 과연 어떤 사람이 육체의 가시에 대해서 불평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고통은 우리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찾아온다. 교만은 우리의 영혼에 깊은 상처를 준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교만을 치료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자주 사용하시는 치료책은 우리의 육체에 가시를 허락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에게 유익이 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결과는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다. 왜냐하면 가시를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을 모른 채 불평과 불만의 세월을 보낼 수도 있고, 그분의 뜻에 감사하면서 보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결과가 어떠하든지 간에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당신께서 우리의 몸에 가시를 허락하심으로써, 우리를 위하여 하실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하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시험을 당할 때에 그 이유를 찾아보아야 한다. 그러나 몇년이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시련에 대한 만족할만한 대답을 발견하지 못하는 경우에도,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잃어버리지 말아야 한다. 바울은 그가 살아있는 동안에 육체의 가시가 제거되지 않는 이유를 발견하였지만, 어쩌면 우리는 예수께서 재림하시는 그 날까지 우리가 당하고 있는 고통의 이유를 알 수 없을 수도 있다. 그 때까지 우리는 기도를 통하여 우리의 비통함과 슬픔을 이해하시며 동정하시는 그분의 위로를 받음으로써 견디어야 한다. 예수께서는 우리와 같은 육체를 취하시고 이 땅에 사시는 동안 우리와 동일한 시험과 고통을 경험하셨기 때문에 우리를 위한 중보자가 되실 수 있었다. 시험을 겪었던 사람만이 시험받는 자를 진정으로 위로할 수 있다.

그대는 지금 고통의 터널을 통과하고 있는가? 어쩌면 그대는 지금보다 더 겸손하고 온유한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되기 위하여 고통의 훈련학교에 입학한지도 모른다. 마음을 낮추고 왜 그대에게 이러한 고통이 제거되지 않는지를 기도해 보라.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시편 119:67,71).

5. 고통은 더 나은 봉사를 위해서 온다!

대리 고통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그대가 고통과 질병을 가질 수도 있다. 그것은 고통 중에서 가장 거룩하고 가치있는 고통인데, 우리는 그러한 고통을 “대리 고통”(vicarious suffering)이라고 부른다.

바울은 모든 면에 있어서,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른 종이었다. 그는 다른 제자들보다도 고통에 관하여 더 높고 많은 교훈을 배운 사도이었던 것 같다. 다른 제자들은 어려움과 고통을 인내하라고 권면하였지만, 바울은 한걸음 더 나가서 고통의 시간을 즐기라고 말하였다(롬 12:12; 골 1:24). 이러한 면에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와 매우 유사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마 5:11).

예수님의 고통은 대리적인 고통이었다. 그분의 고통은 자신의 유익이나 죄로 인한 것이 아니고, 전적으로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이었다. 십자가에서 인내하시고 모욕을 당한 것도 전적으로 우리를 위한 것이었다. 그분의 전 생애가 다른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다. 그리스도인은 바로 그러한 분의 발자취를 따르는 자들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서 고통을 받을 수 있는가? 다른 사람을 위해서 고통을 받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그렇다. 바울은 복음을 설명하면서 바로 이 점을 강조하였다.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노라.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은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웠노라. 내가 교회 일꾼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경륜을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옴으로 감취었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골 1:23~29).

24절에서 “너희를 위하여 받은 괴로움”을 기뻐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라고 말한 바울의 간증을 주목해 보자. 바울은 타인을 위하여 고통을 받았으며, 또한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고난을 육체에 채웠다. 그의 이러한 소원은 “내가 그리스도와 그의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빌 3:10,11). 바울은 “고난에 참예함과 그의 죽으심을 본받”기를 열망하였다. 이것이야말로 생애의 최고의 목표이다.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고난받다가 죽는 것. 물론, 바울은 고난을 통과하는 자신의 희생이나 공로를 통해서 자신이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사랑하는 구세주께서 주신 진리와 함께 고통당하기를 원했으며, “고난에 참예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기 원했다. 그리스도처럼 자신도 대리적인 고난과 죽음의 길을 걸음으로써, 그리스도의 경험을 진정으로 이해하기 원했던 것이다.

고통을 기뻐해야 할 이유

고린도 교인들에게 보냈던 두번째 편지에서 바울은 자신의 신앙이 고난을 통하여 어떻게 승화되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바울의 경험은 고난 속에서 하나님께 받은 위로를 다른 사람에게도 나누어 주고자 하는 열망으로 가득찰 정도로 발전되었다. 이러한 경험은 바울의 봉사에 있어서 새로운 장을 열어 주었다. 그는 자신이 고통을 많이 받을수록 시련과 슬픔 중에 있는 사람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준비되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예수께서 고난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돕고 어떻게 동정하실 줄을 배우셨던 것처럼, 바울 역시 고난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되었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은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 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우리가 환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를 위함이니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예하는 자가 된 것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고후 1:3~7).

여기에서 바울은 고통을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받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바울은 다른 사람의 위로와 구원을 위해서 고통을 받았다. 그는 자신이 받는 고통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을 보다 효과적으로 도울 수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된다는 것을 알았기에, 고통 중에서도 즐거워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이 받고 있는 고통에 마음을 쓰기보다는, 고통을 통하여 자신이 좀더 동정적이고 자비로운 사람으로 변화된다는 사실로 인하여 감사하였다. 바울은 고통을 통하여 고통받는 자들의 심정을 좀더 정확하게 헤아릴 수 있게 되었으며, 더욱 유능한 전도자가 될 수 있었다.

고통은 봉사를 위한 준비 과정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도 고통을 받으셨던 것이다.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 (히 2:18). 예수 그리스도께서 연약한 육체를 쓰시고 이 땅에 오신 것은 인류를 위한 봉사를 위함이었다. “저가 무식하고 미혹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함에 싸여 있음이니라” (히 5:2).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한 대제사장과 중보자가 되실 수 있었던 것이다.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히 5:8,9).

사람은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한계 내에서 다른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다. 투병 생활을 해보지 않은 사람은 병자들의 느낌과 절망을 이해할 수 없다. 예수께서는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셨는데, 왜냐하면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이다(히 2:18). 예수께서는 가장 많은 고통을 당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다른 어떤 사람보다도 우리를 가장 효과적으로 위로해 주실 수 있는 분이시다. 그분은 고난의 왕이시며, 또한 위로의 왕이시다.

바울이 그토록 선망했던 것이 바로 이 경험이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경험하셨던 그 방법 외에는 자신이 다른 사람들을 자비롭고 은혜스럽게 도와줄 수 있는 사람으로 변화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또한 그는 고난의 경험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경험을 알게 되기를 소원하였다.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빌 3:10).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바울은 고통 중에서도 즐거워할 수 있었으며, 남겨진 육체의 가시에 대하여 만족한 마음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고통은 특권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에 참예하는 것을 부담스럽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만일 그렇다면 사도 바울의 다음과 같은 말을 들어 보아야 한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너희에게도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빌 1:29,30). 바울은 여기서 고난을 특권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믿어서 구원을 얻는 특권도 받지만, 그분과 그분의 진리를 위하여 고통을 받는 특권도 동시에 받는 것이다. 고통을 이러한 관점에서 보는 그리스도인들이 너무나 적다. 만일 그대가 고통을 이러한 관점에서 볼 수 있다면, 그대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으로 인하여 당하게 되는 모든 고통 속에서 오히려 즐거워하게 될 것이다.

고통을 모르는 사람은 아직 인생을 모르는 사람이다. 고통을 모르는 사람은 쉽게 낙심하게 되며, 고난 중에 있는 사람의 마음을 이해할 수도 없고, 위로해 줄 수도 없다. 깎아지른 듯한 벼랑의 끝에서 아래를 내려다 본 경험이 있는 사람만이, 그와 비슷한 경험을 통과하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고, 또한 도와줄 수 있다. 그대는 지금 고통 중에 있는가? 그렇다면, 혹시 지금 하나님께서 그대를 더 나은 봉사를 위해서 준비시키고 있는지도 모른다. 마음을 겸손히 낮추고, 그대를 향한 하나님의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명상해 보라.

6. 고통은 법을 범한 결과 때문에 온다!

지금까지 우리는 고통과 질병이 일어나는 다섯가지 이유에 대해서 살펴 보았다. 지금까지 살펴본 이러한 이유들은 특별한 경우들이며, 대개, 고통이나 질병은 직접적으로 또는 간접적으로 하나님의 율법이나 자연법칙들을 범하는 결과로서 온다. 고통이나 질병이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오는 경우는 흔치 않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인간 스스로가 그들의 고통에 대한 원인을 제공한다. 노아 홍수나 소돔과 고모라 성의 멸망, 그리고 바로의 군사들이 홍해에서 수장당한 사건처럼 하나님께서 직접 관여하실 때에는 분명한 목적과 공의 하에서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진노의 잔이 넘칠 때, 멸망이 이르러 온 경우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만, 그러한 경우는 매우 드물며 대개의 경우 고통의 원인은 인간 스스로에게 있다.

그러므로 질병이 발생하면 먼저 자신이 율법과 자연 법칙 중에서 어떤 것을 범했는지를 신중하게 살핀 다음에 잘못된 것들을 회개하거나 개혁해야 한다. 이러한 태도야말로 건전한 상식이자 올바른 신앙 자세이다. 여기서 자연 법칙이란 생명의 법칙을 말하는 것으로서, 복종하면 살고, 범하면 죽게 되는 철칙을 의미한다.

율법이란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사랑의 도덕률을 말하며, 자연 법칙이란, 물고기가 물에서 살면 살고, 물 밖으로 뛰어 나오면 죽는 것과 같은 법칙을 말한다. 고압선을 만지면 죽는다는 법칙을 알고 있는 사람이 고의적으로 전깃줄을 만져서 죽었을 경우에, 우리는 그 사람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하나님께 돌려서는 안된다. 만약 어떤 사람이 독버섯을 먹는다면, 그는 자신의 어리석은 행동의 대가를 지불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생명의 법칙은 우리가 그것을 무시할 경우에 반드시 그 대가를 지불할 것을 요구한다. 우리가 법칙을 지키면, 그것은 우리를 지켜주는 충실한 종이 되지만, 그것을 어겼을 경우에는 무서운 주인이 된다.

불변하는 자연 법칙

자연 법칙을 어겼다고 해서 항상 즉각적인 대가를 지불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때때로 몇 년 후에 그 결과를 받게 되는 경우도 종종 있지만, 전혀 그 결과가 없이 사라지는 경우는 단 한번도 없다. 우리가 그것을 어긴 결과를 느끼든지 느끼지 못하든지 간에 그것은 항상 결과를 남긴다. 그러므로 자연 법칙은 그것을 어겼을 경우, 그 결과가 지연될 수는 있어도 피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어떤 사람이 20대에 무엇을 뿌렸다면, 40대 혹은 50대에 가서는 그 결실을 거두게 된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뿌려 놓고서, 그 결과가 생기지 않기를 희망하지만 그러한 희망은 헛된 것이다. 세상이 존재하는 한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세워 놓으신 자연 법칙 또한 존재하게 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 자연 법칙은 하나님의 섭리와 목적에 따라서 변경될 수 있는 것으로 말하면서, 하나님께서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홍해를 갈라놓는 기적을 행사하심으로써, 자연 법칙을 파괴하셨다고 주장한다. 정말 그런가? 하나님께서는 당신께서 세워놓으신 법칙은 결코 파괴하는 분이 아니다. 공기보다 가벼운 물체는 중력에 의해서 공중에 뜰 수 없다는 자연 법칙이 존재한다. 그러나 공기보다 훨씬 무거운 보잉 747 점보 제트기가 하늘을 날지 않는가? 비록 공기보다 무거운 쇠덩어리일지라도 그것에 적당한 크기의 날개를 부착하고 빠른 속력으로 활주로를 달려가면 양력을 받아서, 공중에 날 수 있다는 또 다른 자연 법칙이 존재한다. 쇠덩어리는 바다 속으로 가라앉는다는 자연 법칙이 존재하지만, 엄청난 무게의 유조선을 조선공학적으로 잘 설계하면 부력을 받아서 바다 위에 뜰 수 있다는 또 다른 자연 법칙이 존재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자연 법칙 안에서 모든 현상을 해석하려고 하는 어리석음을 범치 말라.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인간의 어리석은 꾀 안에 가두어 놓으려고 하지 말라. 하나님께서는 영원 전에 당신께서 이 우주에 세워 놓으신 자연 법칙 안에서 자유롭게 기적을 행사하실 수 있는 전지전능한 신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

불변하는 율법

하나님의 율법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의 율법인 십계명도 결코 변경되거나 폐하여질 수 없는 우주의 법칙이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봉사를 가리키면서, 이제는 율법이 폐하여졌으므로 더 이상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말하지만, 예수께서는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고 지금도 선언하고 계신다(마 5:17,18). 자연 법칙을 범하였을 경우에 고통을 당하거나 생명을 잃어버리는 것처럼, 율법을 범하였을 경우에는 그에 대한 대가를 반드시 지불해야 하는데, 성경은 그 대가를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율법을 범하는 삶을 살아가는 자들은 결국에는 지옥의 형벌을 받게 되지만,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도 그 결과를 받을 수 있다. 예를 들면,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다섯째 계명을 범하는 사람의 마음 속에서는 용서의 정신이 사라지게 된다. 미움과 원통함이 온 마음과 정신을 지배하게 된다. 그 결과, 혈압이 올라가고, 심장에 무리가 가며, 갑상선에 이상이 생기고, 몸과 마음이 오랜 기간 동안 스트레스를 받게 되어서, 결국에는 각종 질병과 고통이 그대를 찾아오게 된다.

하나님께서 불쾌히 여기시는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도 한동안 아무런 형벌이나 문제가 생기지 않을 수 있다. 그러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먹고, 마시고, 시집 장가간 다음, 그 결과로 인하여 치명적인 문제가 발생할 때까지 자신의 길을 걸어가게 된다. 노아의 시대에 하나님께서 불쾌히 여기시는 아무런 징조도 없이 120년을 지낸 후에 갑자기 홍수가 이르러 왔던 것처럼, 쾌락과 자기 중심의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지금 현재는 어떤 특별한 징계가 없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죄악의 잔이 차는 순간, 그들은 스스로 헤어나오기 어려운 고통과 고뇌의 경험을 갖게 된다.

비록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율법과 자연 법칙에 불순종할 때에는 그에 해당하는 결과를 받게 된다. 예를 들면, 열심히 일하는 자만이 수확을 거두게 된다는 것은 자연 법칙이다. 그러므로 열심히 일하지 않고 기도만 하면서, 좋은 열매와 결과를 기대해서는 안된다. 또한 그리스도인들도 불신자들과 마찬가지로 유전법칙에 의거하여 병약한 유전인자를 부모로부터 물려 받을 수 있다. 그들도 사고를 당하고, 불신자들이 걸리는 똑같은 질병에 들어 죽게 된다. 그렇다면, 육체적인 면에서 볼 때, 그리스도인들이 당하는 고통과 불신자들이 당하는 고통에 어떤 차이가 있는가? 이 질문은 매우 신중하게 다루어져야 한다. 위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류에게 동일한 자연 법칙을 주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고통과 불신자의 고통 사이에 눈에 보이는 어떤 차이가 있다면, 각자가 어떤 반응과 태도를 나타내는가에 있지, 결코 하나님께서 그들 각자에게 적용시키는 자연 법칙에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 세상에 있는 어느 누구도 그의 생애에 다가오는 재난과 고통으로부터 면제될 수는 없지만, 그러한 사건들을 받아들이는 태도와 그것이 가져오는 결과는 사람에 따라서 크게 다를 수 있다.

조건적인 영적 원칙

진실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에 복종함으로 고난을 이겨내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일이라면 어떤 일에서도 유익을 얻을 수 있다는 절대적인 신뢰와 믿음을 통하여 고난 속에서도 안정된 마음으로 고난의 끝을 기다릴 수 있으며, 그러한 깊은 영적 체험을 통하여 더욱 더 고결한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된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을 활용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하나님의 편애를 받는다거나 자연 법칙에 따라서 받게 되는 고통을 경감받게 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자연 법칙을 적용시키지만, 하나님을 신실하게 신뢰하는 당신의 백성들에게는 눈에 보이지 않는 또 다른 영적인 원칙을 적용시키고 계신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당신께 나아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영적인 법칙에 따라서 그들의 마음에 용기를 주고 견딜 수 있는 힘을 공급하여 주신다.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사람들에게 아무런 조건없이 베풀어져 있지만, 그분의 치유하시는 능력은 신뢰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분께 나오기로 선택하는 사람에게만 조건적으로 제공된다.

그러므로 고통이나 질병을 가지고 있는가? 먼저, 그대의 양심과 생활 가운데서 어떤 법칙이 범하여지고 있는가를 살펴 보라. 하나님께서 당신의 성령을 통하여 그대의 죄와 잘못을 지적해 주실 때, 즉시로 회개하고 잘못된 것들을 개혁하라. 그리고 모든 결과에 대해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으로 그분께 맡겨라. 바로 이것이 그대가 어두운 고통의 터널을 통과하는 비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