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영혼의 등잔의 심지를 돋우며


지나간 일들을 반추해보다 문득 생각에 잠겨 본다. 그동안 살아온 삶의 시간들 속에 도사리고 있던 힘든 시련과 고통들을 참게하고 견디게 하고 우리를 지금 이 순간까지 이르게 한 힘은 무엇이었을까, 거의 실패할 것 같았지만 쓰러지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걸어 갈 수 있도록 우리를 지탱해 준 힘은 어디에 있었을까 하고...

쌩떽쥐베리가 지은 “인간의 대지”라는 책에 나오는 한 이야기는 우리에게 그 대답을 해주는 것 같다. 조종사 앙리 기요메가 비행을 하다 안데스 산맥에 추락을 했을 때는 눈이 무릎까지 쌓인 추운 겨울이었다. 그는 추락한 비행기를 탈출하여 삼일 동안 흰 눈 밖에 보이지 않는 대지를 살을 에이는 추위 속에서 앞만 보고 걸었다. 그러다 그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눈 속에 쓰러졌다. 잠시 갑작스럽게 얻은 그 짧은 휴식의 시간 동안 그는 만약 바로 그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으면 다시는 일어서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하지만 뼛속 깊이까지 지쳐버린 그는 더 이상 걷고 싶지 않았다. 그는 조용하게 고통 없이 그대로 편안하게 죽고 싶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머리속에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을 떠올렸다. 가슴속 깊이 앙리 기요메는 그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느꼈다.

그런데 갑자기 이런 생각이 났다. 만약 그가 죽은 뒤 그의 시체를 찾지 못한다면, 아내가 보험금을 타서 생활하려면 4년을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아내와 아이들을 향한 사랑의 마음은 다시 그로 의식을 되찾게 해주었고, 간신히 눈을 뜬 그는 100미터쯤 떨어진 눈더미 위에 바위가 솟아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거기까지만 갈 수 있다면 아마 사람들이 쉽게 자신의 시체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다시는 멈추지 않았고 마침내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가 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충분한 동기를 찾았을 때, 가족에 대한 배려와 사랑이 그의 마음 속을 가득 채웠을 때, 그것은 그를 계속 앞으로 걸을 수 있는 힘을 갖게 했던 것이다.

사랑은 힘

사랑은 힘이며, 능력이다. 사랑은 걸어 갈 수 있게 하고, 견디게 하고, 성취할 수 있게 하는 힘과 동기를 부여한다. 마음의 눈을 떠서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를 지금 이 시점까지 걸어올 수 있도록 만든 것은, 여기까지 다다를 수 있도록 만든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심령에 심어진 하나님의 사랑은 마치 태양이 쉬지 않고 타듯 쉴 새 없이 타올라 우리 영혼의 등잔의 심지에 불꽃을 돋우어 준다. 신앙의 불꽃이, 또 소망의 불꽃이 꺼지지 않고 오래 오래 타도록 금기름을 우리 영혼의 등잔에 부어 준다. 그리하여 지치지 않고 타는 우리의 등잔의 불빛으로 다른 영혼의 등잔의 불꽃도 타도록...

많은 사람들이 좁고 가파른 믿음의 길을 간다. 처음에는 마차에다 짐을 가득 싣고 떠났지만, 갈수록 좁고 험해지는 길 때문에 다 버리고 나중에는 신까지 벗고 맨발로 가야 하는 좁고 가파른 신앙의 길을... 의롭게 살고 싶은 열심으로, 진리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리는 열정으로, 말씀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는 욕망으로 단단히 무장을 한 채... 그러나 마음속에 하나님의 사랑을,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가지지 못하고 그 험한 여정길을 떠난 사람들은 시간이 흐르고 처음 떠날 때 가졌던 열정이 다 식어지면 그 여정을 계속 할 힘을 잃고 만다.

하늘의 왕이셨던 예수님을 그 아름다운 하늘에서 어두운 이 땅으로 오시게 한 것은 사랑이었다. 우리를 대속하시기 위해 당하셔야 했던 고난을 그렇게 아무 불평없이 기쁨으로 당하게 한 것은 우리를 향한 그의 사랑이었다.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그분의 살이 채찍에 맞아 찢어졌을 때, 자주 축복하시기 위하여 펴시던 손이 잔인하게 나무 기둥에 못 박히셨을 때, 사랑의 봉사로 피곤할 줄 모르던 발이 나무 기둥에 못 박히셨을 때, 그분으로 그 모든 고통과 아픔을 참게 한 것은 우리에 대한 그분의 사랑이었다. 그분이 참으신 모든 것, 곧 그분의 머리와 손과 발에서 흘러내린 핏방울과 그분의 몸을 괴롭힌 고통과, 아버지께서 얼굴을 숨기심으로 그분의 영혼을 가득 채웠던 말할 수 없는 고민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렇게 죄의 짐을 지기로 동의하신 것은 다 그대를 사랑하기 때문이었다고... 거룩한 공의의 진노를 견디시고 죄를 짊어지고 죄 그 자체가 되신 것은 그대를 사랑하신 그 사랑 때문이었다고...

사랑은 위대하다. 모든 것을 참게 하고 견디게 하고 이루게 하는 사랑은 고귀하다. 우리 마음 속에 이런 고귀한 하나님의 사랑이 들어와 꽃피어야 한다. 그리고 이런 사랑이 우리의 신앙의, 아니 모든 것의 동기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이 사랑의 힘으로 마지막까지 가야 한다. 인간의 열정도 식고, 의를 향한 인간의 열심도 사그라지지만, 마지막 목숨을 내어 놓기까지 하나님과 진리에 충성하도록 만드는 것은 사랑이다. 이런 사랑을 가진 사람만이 끝까지 길을 마칠 수 있다. 이런 사랑을 가진 사람의 영혼의 등잔의 불꽃만이 꺼지지 않고 계속 탈 수 있다.

하나님의 눈을 가지고 영혼의 등잔의 불꽃 심지가 꺼지지 않고 타도록 하는, 그래서 지치지 않는 불꽃으로 주위의 많은 영혼들을 살릴 수 있는 사랑을 우리는 어떻게 소유할 수 있을까? 그 사랑을 가지려면 먼저 우리는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랑을 우리를 향해 가지고 계시며, 또 우리를 어떻게 취급하시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어떤 눈을 가지고 우리를 보고 계시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도 하나님의 눈을 가지게 됨으로 다른 영혼을 살릴 수 있는 사랑을 소유하게 되도록...

하나님은 어떤 눈을 가지고 계실까? 아니, 하나님의 눈은 어떠하실까? 하나님의 눈에는 분석도 없고, 정죄도 없고, 틀도 없다. 하나님의 눈에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선입관이나, 고정관념이 없다. 하나님의 눈에는 사랑만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놀라운 창조의 걸작품으로 보시며, 무한히 소중한 존재로 보신다. 하나님께서는 그냥 우리를 영원히 사랑스러운 존재로 보신다. 죄는 미워하시지만 죄인은 무한히 사랑하시며... 그분께서는 갈보리 산에서 우리를 드시며 온 우주와 세상을 향하여 이렇게 외치셨다. “너는 지극히 사랑하는 내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선물로 받을 만큼 소중한 존재야!”라고... 만일 우리의 가격표를 붙인다면 우리의 가격표는 “$ 예수님”일 것이다! 얼마나 귀중한 존재인가! 우리는, 하나님의 눈에...

자신이 하나님의 눈에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알지 못하고 피부로 하나님의 사랑을 느껴보지 못한 사람은,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보시는 똑같은 눈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은 자신을 사랑할 줄 모를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고 그 영혼을 있는 그대로 사랑할 수 없다. 또 하나님의 사랑의 눈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볼 줄 모르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소중히 여길 줄도 모르며, 다른 사람의 영혼의 불꽃을 살릴 수 있는 사랑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오히려 다른 영혼의 힘없이 타고 있던 희미한 불꽃마저도 호로록 불어 꺼버릴 뿐... 그런 사람이 걸어가는 신앙의 길은 사랑이 부여하는 동기의 부족으로 항상 힘겹고 피곤한 길이 된다. 삭막하고 기쁨이 없는... 누가 보아도 매력이 느껴지지 않는...

영혼의 등잔의 심지를 돋우며 우리 영혼의 등잔에 늘 활활 신앙의 불꽃이 타오르도록 만드는 것은 사랑이다. 시련이 와도, 고통이 와도, 시간의 지연으로 오랜 기다림의 연속이 늘어가도 그것을 인내로 기쁘게 견디게 하는 것은 사랑의 힘이다. 사랑은 우리 신앙의 동기에 밑거름이 된다. 오랜 세월이 가도 여전히 그리스도를 사랑하므로 변함없는 애정을 하나님께 드리게 하고, 뜨겁던 인간적인 열정이 식어 빛을 잃을 때도 여전히 하나님께 열렬히 충성하게 하는, 그리고 주님을 한 순간도 놓치기 싫어 늘 함께 이야기하고 동행하게 만드는...

그런 사랑을 가진 사람의 영혼은 다른 사람의 영혼의 등잔의 심지를 돋우어 준다. 꺼져가던 신앙의 불꽃을 다시 불살라 주고, 자아상실감으로 흐려진 마음 속에 소망의 빛을 켜주고, 차가운 세상에서 외로움으로 언 마음의 상처를 따뜻한 불꽃으로 녹여준다.

그리고 마음 속에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가진 사람의 영혼의 등잔의 불빛은 늘 찬란하고 아름답다! 그래서 누구나 가까이 다가가서 보고 싶게 만들고, 누구나 감탄하며 끌려가도록 만든다. 마치 예수님의 마음 속에 켜진 빛의 불꽃이 온 세상을 비추고 모든 사람을 그에게로 이끌었듯이...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으로 돋우어진 우리 영혼의 등잔의 심지가 오늘도 아름다운 빛으로 타오르기를... 그래서 그 불빛으로 많은 어두운 영혼들이 우리 곁으로 모여 오기를...

권두언


강병국 목사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공평하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또한 너무나 합당하게 일을 처리하시며 또한 너무나도 겸손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께는 겸손하다고 하는 말 자체가 적용이 될 수가 없는 단어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주에 있는 모든 피조물들의 동의를 얻어내시기 위하여 그들을 심판의 과정에 참여 시키십니다. 그리고 그들의 동의를 얻어 내시려고 공개적인 하늘법정을 운영하고 계십니다. 적어도 죄의 문제가 종결될 때까지 말입니다. 얼마나 겸비하신 분이십니까! 우리가 영원토록 신뢰하며 우리의 경배를 드릴 수 있는 은혜와 자비가 충만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심지어는 사단도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의의를 제기하며 고소할 수 있도록 어느 정도까지 허용하시고 계십니다. 결국에는 마귀도 더 이상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과 구원의 방법에 대하여 항의 할 수 없을 정도까지 하나님 당신 자신의 공의성과 의로운 판단을 온 우주 앞에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의롭다고 하시는 과정에서 당신 자신도 의로우시다는 판정을 받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타협하거나 불의한 판사의 결정은 오히려 사람들의 마음 속에 의혹만 더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참 하나님은 자비로우시지만 동시에 의로우신 분이십니다.

그 사실을 잘 보여주는 한가지 성경 계시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구약 스가랴서에 있는 대 제사장 여호수아에 대한 계시입니다. 이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속하시는 공평하신 방법과 그 은혜에 대하여 말해 주고 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의 율법의 공의와 또한 죄인들을 향한 자비가 동시에 충족된 것처럼 말입니다.

이번호에 게재된 스가랴서의 기사들이 여러분들께 큰 축복이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유혹을 이기는 비결


사단의 공격 목표

그리스도를 신실하게 믿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유혹에 대해서 두려워하고 염려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예수께서 이 땅에 재림하시는 순간까지 계속적으로 유혹을 받으면서 살게 된다.

유혹은 각 사람에게 각기 다른 모습으로 접근하는데, 우리가 썩어 없어질 타락한 육체를 가지고 있는 한, 우리는 항상 유혹을 느끼면서 살 수 밖에 없다.

어렸을 때에 나는 과수원이 있는 조그만 마을에서 살았는데, 과수원의 과일이 잘 익을 때가 되면, 동네 아이들이 나무에 열린 과일을 보면서 “자, 이제 다시 열매를 따먹을 시간이 됐다” 라고 말하곤 하였다. 사단은 그 동네 아이들보다 훨씬 머리가 좋은 존재이다. 그리스도인의 생애와 성품에 맺히는 영적 열매가 너무 시어서 먹을 수 없거나 쓰디 쓴 맛을 낼 때에, 사단은 그러한 그리스도인들을 그대로 내버려 둠으로써, 그들을 깊은 잠에 취하게 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의 영적 열매가 충만하게 익어 가는 기미가 보이기만 하면, 사단은 그 열매를 제거하기 위해서 혼신의 힘을 다한다.

이 말은, 가장 영적으로 깨어 있는 그리스도인이 가장 극심한 유혹과 시험을 받게 된다는 의미이다. 그리스도께 마음을 바치면서 그분의 십자가로 가까이 나아가려고 하는 영혼이야말로, 사단의 가장 집중적인 공격 목표가 된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전적인 믿음을 가지고 순종하는 생애를 살아가는 참 그리스도인들은 사단이 가하는 계속적인 공격을 받게 되지만, 그리스도 교회의 신앙을 형식과 의무감에서 지키는 거짓 그리스도인들은 사단과의 전쟁에 있어서, 아무런 영적 투쟁도 느끼지 못한 채 안락함과 안일함 속에서 살아가게 되는데, 그 이유는 사단은 그러한 거짓 그리스도인들에게 시험과 시련을 줌으로써 그들을 깊은 잠에서 깨우기를 원치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일 그대가 사단으로부터 시험과 시련을 받고 있다면, 그것은 축하받을 만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대가 영적으로 올바른 길을 걷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단이 던지는 극심한 유혹을 받고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온 마음을 다하여 따라가고 있다는 증거이며, 동시에 그것은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갖게 되는 특별한 명예이기도 하다. 도둑이나 강도가 우리가 사는 집에 침입하여 들어 왔다는 사실은, 적어도 우리가 많은 돈과 재물을 소유하고 있다는 평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만일 우리가 영적으로 귀한 열매를 맺고 있다면, 사단은 우리 앞에 온갖 시험과 유혹을 던져 놓음으로써, 우리에게 맺힌 영적 열매를 파괴하고 빼앗아 가려고 노력할 것이다.

자, 여기서 성경에서 가장 이상한 성경절 중의 하나를 읽어보자.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야고보서 1:2). 분명, 이 성경절은 시험을 좋은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시험을 당하는 사람은 매우 어려운 고난의 터널을 통과하게 된다. 시험과 유혹을 만나는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즐거워할 수 있는가? 유혹이 하나님의 구속 사업에 있어서, 어떤 역할을 하는가에 대하여 분명한 이해를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인만이 유혹과 시험을 “온전히 기쁘게 여”길 수 있다. 유혹은 우리가 어떤 신앙을 가지고 있으며, 도덕적으로 어떤 입장에 서있는가를 드러내 준다. 유혹을 당하는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의지가 담겨진 선택과 결정을 하게 된다. 옳고 그른 것에 대한 분명한 결정과 선택이 이루어져야 한다. 죄와 유혹의 문제, 그리고 진리와 오류의 문제에 접하는 경우에, 불투명하고 회색적인 선택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을 중심으로 펼쳐지고 있는 선악 간의 대쟁투를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모든 사람들은 선과 악의 투쟁을 싸워 나가는 일에 있어서, 예민한 양심적 자각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사람과 같은 양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단과 그리스도 사이에서 벌어지는 대쟁투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다. 위대한 종교 개혁자인 마틴 루터는 글을 쓰던 중에 사단의 시험을 너무나 실제적으로 느끼고 직면하였기 때문에, 사단을 향하여 잉크병을 던졌을 정도이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치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린도전서 10:13). 이 말씀은, 유혹과 싸우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놀라운 위로와 격려가 된다. 어떤 사람도 이 말씀이 주는 약속으로부터 제외되지 않는다. 자신이 받고 있는 시험이 다른 사람이 받는 시험보다 무겁고 큰 것으로 느끼기 쉽지만, 하나님께서는 “감당치 못할 시험”을 누구에게도 허락치 않으시며,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열어 주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자신이 당하는 시험이 다른 사람보다 어렵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유혹과의 전쟁에서 패배하였을 경우, 쉽게 자신의 패배를 합리화하게 된다. 사실상, 거의 모든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말로 자신의 죄를 합리화 한다; “나는 예외이다.”

유혹이 가져오는 유익

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고통을 안겨다 주는 시험들을 허락하시는가? 왜 우리들에게 모든 시험을 제해 주시지 않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야고보서 1:2~4 에 나온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시험과 유혹은 영적인 승리와 성장을 위한 기회를 제공한다. 그러므로 유혹을 받는 것은 불명예나 창피한 일이 아니다. 투쟁이 없다면, 거기에는 강력한 결정을 통한 승리 또한 없을 것이며, 성품이 고상하게 변화되는 일도 없을 것이다. 성품은 시련을 통하여 다듬어진다. 시련이 없는 상태에서의 선이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다른 사람과의 접촉을 피하기 위하여 동굴에서 일주일 동안 고독하게 은거함으로써, 외형적으로는 단 하나의 죄도 범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그 한 주일 동안 선하게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게 말할 수 없다. 참된 그리스도인 신앙은 단순히 잘못된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을 의미하는데, 그것은 적극적으로 선을 실천하는 것을 포함한다. 동굴 안에서 있었던 일주일 동안, 남에게 해를 가하지도 받지도 않았지만, 그것은 아무 의미도 없는 선한 삶이었다.

그렇다면,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라는 말씀은 무슨 뜻인가? 그 말씀의 의미는, 우리의 도덕과 신앙을 시험하는 모든 시련의 과정 속에서 우리에게 대책을 마련해 주시겠다는 의미이다. 시험과 유혹을 당할 때마다, 우리는 두 길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하나는 악으로 향한 매력적인 길이고, 다른 하나는 선을 선택할 것을 호소하는 좁은 길이다. 우리는 유혹을 받을 때마다 두가지 방향으로 뻗어 있는 두 길이 우리 앞에 놓인 것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가 화를 내면서 소리를 지르라는 사단의 목소리를 들을 때, 우리는 자신을 제어하라는 성령의 음성도 함께 듣게 된다. 부도덕하고 불명예스러운 죄를 범하라는 악한 유혹을 받을 때, 동시에 우리는 고결하고 순결한 삶을 선택하라는 선한 유혹을 받게 된다.

한번은, 한 소년이 가게에서 침을 삼키면서 사탕을 만지고 있었는데,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가게 주인이 그에게 다가와서 “얘야, 너 혹시 사탕을 훔치려고 생각하고 있니?” 라고 물었다. 그 소년은 깜짝 놀라서 “아니요, 나는 훔치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는 중 입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우리는 그 소년의 정직하고 순진한 대답을 통해서, 그 소년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우리 모두는 두 음성과 두 선택의 갈림길에서 투쟁하고 있다. 비록 우리가 그러한 현실을 정확하게 분석하며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지 몰라도, 우리는 악의 세력에 의해서 유혹받고 있는 것만큼 선의 세력에 의해서도 강력한 이끌림을 당하고 있다.

물건을 훔치라는 충동을 받고 있던 소년이 정직하고 선한 대답을 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주목하라. 간음을 범하려는 죗된 욕구에 시달리는 사람도 순결하고 도덕적인 선택을 통하여 간음에 대한 유혹을 물리칠 수 있다. 이러한 원칙을 매일의 삶 속에 적용시키는 것이 복음의 비밀인데, 이 복음의 비밀을 이해하면 우리는 더 이상 유혹을 두려워하거나, 그것에 압도되어서 살아가는 삶을 살지 않을 수 있다. 거듭난 마음을 가지고 있으며, 성령에 사로 잡힌 사람은 두가지 음성 사이에서 항상 선하고 순결한 것을 선택하는 삶을 살게 될 뿐만 아니라, 마음 속에서 들리는 선한 음성의 호소에 훨씬 더 강력한 매력을 느끼게 된다. 그리하여 사단의 유혹은 그에게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하고 자취를 감추게 된다.

자, 이제 사단의 유혹과 성령의 호소에 대한 결론을 맺도록 하자. 시험과 유혹을 통과하면서, 어떤 결정과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성품은 순결하게 형성될 수도 있고, 비열하고 부도덕한 성격으로 꼴 지어질 수도 있다. 인간의 성품을 형성하는 불변의 원칙이 있는데, 그것은, 사람은 시험과 유혹을 통과하는 경험을 통하여 반드시 선하거나 악하게 변화된다는 것이다. 사단의 시험에 굴복하고, 성령의 호소를 거절할 경우,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상처가 우리의 영혼과 성품에 깊이 남는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우리는 유혹에 대하여 승리를 쟁취함으로써, 다음에 다가오는 시험과 유혹에 대해서 더욱 더 강력한 도덕적 힘을 얻을 수도 있고, 그와 반대로 시험과 유혹에 굴복하는 삶을 살 경우, 우리의 의지력은 점점 더 약화된다. 우리의 성품은 우리가 하는 선택과 결정에 따라서 거룩한 방향으로 성장해 갈 수도 있고, 악하고 이기적인 방향으로 뒤틀릴 수도 있다. 계속적인 선한 선택은 선한 습관을 형성시키며, 선한 습관은 선한 성품을 형성시킨다.

그렇다면 스스로 유혹과 시험을 받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가?

여기서, 어떤 사람들은 이런 의문이 마음에 떠오를 수 있다. “유혹과 시련을 통하여, 우리의 성품이 계발되고 향상된다면, 우리는 더 많은 유혹과 시련을 받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는가?” 이 질문은 매우 중요한 교훈을 우리에게 일깨워 주는 논리적 질문이다. 유혹에 대한 승리가 우리의 신앙에 선한 유익을 가져오므로, 사단과 접전하게 되는 기회인 유혹을 찾아 나서야 하는가?

만일 유혹이 성품의 도덕적 스테미너를 향상시킬 수 있는 기회라면, 왜 예수께서는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며” 라고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는가?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치 아니” 한다는 말씀을 기억하라. 오직 하나님께서만이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유혹의 정도를 아신다. 우리 스스로 시험을 자초할 경우, 우리는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시험과 유혹에 의해서 압도될 수 밖에 없다. 불이 난로 속에서 제어당할 때에는 유익한 것이지만, 그것이 집 기둥에 옮겨 붙어서 제멋대로 탈 경우에는 무서운 결과를 만들어 내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도덕적 힘과 연약한 육체의 본성에 대해서 잘 이해해야만 한다. 또한 우리를 시험에서 건져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도 올바른 이해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시고” (벧전 2:9).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계 3:10). 하나님께서는 시험에 든 모든 사람들을 구하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 지시하는 대로 경건한 선택과 결정을 하는 사람만이 시험과 유혹으로부터 건짐을 받을 수 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가 시험받는 상태와 환경을 결정해 주실 수 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지혜와 섭리에 따라서, 우리가 감당할 수 있으며, 또한 우리에게 가장 최선의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시험과 유혹을 허락하신다. 각 사람은 각기 다른 성품의 약점을 가지고 있다. 사단은 우리의 약점을 잘 알고 있으며, 우리가 연약해져 있는 순간을 잘 포착한다. 사단이 가장 자주 사용하는 전략은 우리가 가장 연약해 있을 때에 성품의 약점을 찌르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사단의 교묘하고도 무서운 전략을 진정으로 잘 안다면, 우리는 더 이상 자신의 힘과 꾀를 의지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 우리 모두가 반드시 이해해야 하는 진리가 있는데, 그것은 우리 자신의 연약함을 진정으로 깊이 깨달아야만, 유혹에서 승리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는 것이다. 자신의 부족과 연약함에 대해서 깊이 절감하는 사람만이 자신을 시험에서 구해 줄 구세주의 필요성을 인식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자의 도덕적 힘과 영적인 필요에 따라서, 우리에게 유익을 가져다 줄 시험과 유혹의 정도를 측정하신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믿음과 인내를 시험할 수 있는 환경을 당신의 목적과 시간에 맞추어서 조성해 주신다. 그러므로 사도 야고보는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를 신뢰하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말씀을 기록하였던 것이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야고보서 1:2).

유혹이 죄로 변하는 순간

유혹과 시험은 항상 마음을 공격한다. 거의 모든 죄는 그것이 행동으로 나타나기 오래 전에 이미 마음과 생각에서 시작된다. 죄를 겉으로 드러난 죗된 행위로만 오해하였던 바리새인들과 율법주의자들에게, 예수께서는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 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죄의 원천지를 그들에게 분명하게 가르치셨다(막 7:21~22). 그러므로 죄는 마음에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죄가 마음에서 일어난다면, 우리의 마음 속에 있는 모든 욕망(desires)이 죄란 말인가? 여기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개념을 이해해야만 하는데, 그것은 욕망 그 자체는 결코 죄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본성 안에 식욕과 여러 가지 경향들을 넣어 주셨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것을 추구하고 바라면서 살게 되어 있다. 그러한 욕망들이 올바른 방향으로 제재되고 인도되는 한, 욕망이나 욕구 자체는 잘못된 것이 아니다. 사도 바울은 욕망을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이라고 구체적으로 설명하였다(엡 2:3). 욕망이 하나님께서 그어 놓으신 경계선 밖으로 벗어나서 탐욕으로 변질될 때, 그것은 죗되고 정욕적인 죄가 된다.

좀더 실제적으로 이 문제를 살펴보자. 날마다 우리는 여러 가지 그림, 책, 글들을 보면서 살게 되는데, 그러한 것들은 우리의 마음에 각기 다른 자극을 가져다 준다. 그러한 감정적 자극들을 통하여 우리의 마음에는 거룩하지 않은 욕망이 일어나게 된다. 그러한 욕망들로 인하여 유혹을 느끼게 되지만, 아직 그것은 죄가 아니다. 그것은 유혹일 뿐이다. 다시 말해서, 어떤 잘못된 것을 느끼거나 인식하는 것 자체는 죄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나 더럽고 추한 욕망을 느끼는 순간, 모든 사람은 그것에 대해서 분명한 반응과 선택을 하게 되는데, 바로 여기가 유혹이 죄로 변하는 순간이다.

그러므로 야고보는 유혹을 받아서 죄를 범하는 과정을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설명하였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야고보서 1:14,15). 여기서, 야고보는 유혹이 죄로 변하는 과정을 다음과 같이 3단계로 분석하였다;

1. “시험을 받음”
2.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
3. “욕심이 잉태되어 죄를 낳음.”

이 3단계를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A: 각 사람은 거룩하지 않은 사물을 보았을 때에 마음과 생각이 유혹을 받게 된다.
B: 바로 그 순간, 육체 속에 숨어 있던 욕심(본성)은 꿈틀거리면서 발동하게 되고 죗된 요구를 하기 시작한다.
C: 그 육체의 요구에 굴복하여 더러운 생각과 더러운 욕망을 마음속에 품기로 결정하면, 바로 그 순간 죄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유혹을 거절하고 물리치기로 선택하면, 사단이 던진 유혹을 이기고 승리하는 것이다. 종교 개혁자인 마틴 루터는 유혹과 죄에 대한 승리의 문제를 다음과 같이 명확하게 표현하였다. “새가 머리 위를 날아가는 것은 막을 수 없지만, 머리 위에 둥지를 트는 것은 막을 수 있다.” 사단이 점령한 이 세상에 살고 있는 한, 그가 시시때때로 던지는 유혹을 느끼지 않을 수는 없지만, 그 유혹을 마음에 받아들여서 간직하지 않기로 선택할 수는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유일한 안전은 유혹이 마음으로 들어오는 문을 어떻게 잘 지키는가에 달려 있다. 유혹이 들어오는 대로 마음문을 활짝 열고 허용하는 사람은 결국에는 유혹에 굴복하여 죗된 욕망에 사로잡히게 되며, 반면에 자신에게 접근해오는 유혹을 마음의 문에서부터 거절하고 물리치는 사람은 승리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유혹이 우리의 마음을 향하여 접근해 올 때마다, 우리의 양심과 지성을 통하여 조용한 경고의 음성을 들려 주심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의로운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

타락한 육체를 가지고 있는 인간이 더럽고 불순한 욕망을 품도록 유도하는 유혹을 물리치고 정복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해서, 성경은 “그렇다” 라고 대답한다. “우리가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고후 10:4,5).

가장 강한 유혹일지라도 죄에 대한 핑계가 될 수 없다. 아무리 그 세력이 크게 압도한다고 해도, 죄는 우리 스스로의 선택의 결과이다. 지상이나 지옥의 어떤 세력도 인간에게 짓도록 강요할 수 없다. 우리의 의지가 먼저 동의되고, 마음이 그 유혹을 받아들이기로 선택해야만 죄를 범할 수 있는 것이다.

마음의 문을 지키라

유혹에 대항하여 싸우는 문제에 대해서 조금 더 생각해 보자. 죄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자세와 정신으로 유혹에 대처해야 하는가? 예수님의 대답을 들어보자.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마 5:29,30).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적용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상식적으로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잘못을 범한 신체의 일부분을 잘라 버린다고 할지라도, 그 사람의 마음이 여전히 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말씀에서, 예수께서는 손이나 눈 자체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손이 하는 일과 눈이 보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어떤 일을 하거나 무엇을 볼 경우, 그것이 마음 속에 유혹을 불러들이는 창문 역할을 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잘라 버려야” 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직장이나 일터가 죄를 범하기 쉬운 장소나 환경이라면, 우리는 그곳을 떠나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유혹의 문턱 위에서 고의적으로 서성거리는 사람의 기도에 응답하실 수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예수께서는, 영혼을 파멸로 이끄는 죄에 의해서 압도당할 수 있는 환경을 피하기 위해서는, 매우 결정적인 조치가 취해져야 한다는 사실을 말씀하신 것이다. 만일 우리가 죗된 생각과 행동을 하기 쉬운 장면을 보고 있다면, 예수께서는 우리가 그 장면으로부터 돌아서거나 눈을 가려야 한다는 사실을 말씀하신 것이다. “눈을 빼어 내버리라”는 표현은 그만큼 확실하고 강력하게 유혹에 대처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매일 밤마다, 흥분과 관능으로 가득 찬 텔레비젼 광고와 프로그램들을 보는 사람이 유혹에 대항하여 승리할 수 있을까? 그 대답은 너무나 분명하다. 만일 텔레비젼이 우리에게 도무지 극복할 수 없는 유혹과 시험거리가 된다면, 우리는 그것을 “던져 버려야” 한다. 자신의 영혼을 파멸로 이끌기 보다는 차라리 세상 지식과 정보를 포기하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런 말을 할지 모른다; “그것은 지나치게 편협한 생각이 아닙니까?” 영혼을 잃어버리기 보다는, 차라리 주변 사람들에게 “편협하고 좁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는 별명을 들으면서 영생을 지키는 것이 지혜가 아니겠는가? 만일 그대가 텔레비젼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텔레비젼이 그대를 지배하기 때문에 온갖 더러운 장면들이 그대의 영혼을 더럽힌다면, 그대는 텔레비젼을 버려야 한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눅 9:23).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그분의 제자가 되기 위한 대가를 치르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 본인을 죄로 인도하는 시험과 유혹거리가 된다면, 그것을 버리는 것이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마땅히 지불해야 하는 대가라는 의미이다.

진정, 우리가 죄에 대한 승리를 얻기 원한다면, 보지 말아야 할 장면, 읽지 말아야 할 글, 듣지 말아야 할 음악, 가지 말아야 할 장소가 있다는 사실에 동의하게 될 것이다. 만일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진리와 그분의 영이 거하신다면,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구별해 주는 매우 분명한 음성을 듣게 될 것이다. 오늘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믿기만 하면 된다”고 말하면서, 마음의 문을 세속적인 것들에 대하여 활짝 열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유혹과 시험에 대하여 승리를 경험하지 못한 채 죄의 종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기만 하면 구원 얻는다”는 가르침으로 인하여, 그들의 마음은 거짓된 안정감 속에서 만족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사단은 세속적이고 정욕적인 것들을 온 세상에 뿌려 놓음으로써, 사람들의 마음을 강력하게 유혹하고 있으며, 동시에 구원에 대한 거짓된 가르침을 교회 안에 뿌려 놓음으로써,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죄와 유혹에 대하여 무방비 상태로 살아가도록 기만하고 있다.

동물의 광우병, 백혈병, 에이즈가 사람에게 오고 있다!


이번 호의 건강 기사에는 근년에 들어와 우리의 생존을 위협하는 동물성 질병이 사람에게 전이되고 있으며, 육식을 통해 그 질병들이 사람에게 전이된다는 사실에 대하여 다루어 보았다. 진정한 건강에 대한 깊은 자각을 주는 기사가 되기를 바란다. - 편집실-

21세기에 들어와 인류의 생명을 위협하는 질병과 오염의 수위가 급격하게 높아져 가고 있다. 특별히 사람이 식용으로 사용하는 동물들 안에 나타나는 수많은 질병들이 사람에게도 거의 그대로 감염되고 있는 사실들을 안다면 우리는 놀라움을 금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성경은 말세를 알리는 하나의 징조이자, 인간의 생명을 위협하는 현저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온역에 관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예수님은 세상 끝에 “처처에... 온역”(눅 21:11)이 있을 것을 예언하셨다. 성경에 온역은 유행병이나 악질적인 병, 혹은 불치병을 말하는데, 이러한 불치 수위의 질병들이 동물과 사람에게서 함께 나타난다고 하는 것이다. 특별히 짐승들의 질병이 사람에게 그대로 전이되는 형태로 나타나는데, 이러한 현상은 한 시대의 종언을 고하는 예언의 성취라고 볼 수 있다.

1. 출애굽 당시 가축에게 내렸던 질병이 사람에게도 나타났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올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을 포로에서 돌리시고자 모세를 바로에게 보내어 그들을 포로에서 놓을 것을 명하였으나 바로의 마음이 강퍅하여 그 권고를 거절하였다. 거듭된 거절로 말미암아 저들이 섬기던 곤충신들과 자연신들로 말미암아 재앙 가운데 놓이게 되었는데, 가축들에게 심한“악질”(출 9:3)이 내림으로 죽어갔으나 회개하지 않자 애굽 온 땅에 사람과 짐승에게 같은 “독종”(출 9:9)이 발하여 멸망이 사람과 짐승에게 똑같이 엄습했다.

2. 남방유다가 멸망할 당시 짐승과 사람의 질병이 함께 나타났다
이러한 역사의 반복을 남방유다가 언약을 배반하고 도덕적으로 쇠패하여 갈 때 그들에게 임할 재앙을 경고한 예레미야나 에스겔서의 기별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사나운 짐승과 온역을... 함께 내려”(겔 14:21), 많은 사람들이 온역으로 죽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문자적으로 성취되었다. 이것들은 세상 끝에 있을 사건들을 예시하고 있다.

3. 예수님은 말세에 유행병을 예고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사건들이 일어날 것을 말세를 만난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는데, 한 시대의 끝이면 반복적으로 있었던 온역이“저희에게 당한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가 되라고, 또한 마지막 시대에 “처처에 ...온역이 있으리라”(눅 22:11)고 말씀하심으로 우리의 주위를 환기시키셨다. 말세에는 더욱 많은 사람들이 질병으로 죽게 될 것이다. 이러한 일은 점점 더 빈번하고 비참해져 갈 것인데, 그것은 사람과 짐승에게 똑같이 엄습할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온역은 유행병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광우병, 조류독감, 에이즈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세상에 온역이 편만하겠지만 그러나 주의 말씀을 숙고하는 자들은 피할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은 육식을 하는가?

만일 당신이 육식을 계속한다면 아래와 같은 심각한 질병에 노출될 위험이 있다.

1. 광우병 (Mad Cow Disease)

광우병이 온 세상에 신속히 번져나가고 있다. 광우병은 1996년 3월 영국에서 발견된 이래, 프랑스와 이탈리아 등지에서 나타났으며, 광우병 발병으로 인하여 유럽연합을 비롯한 여러 나라들, 약 23개국이 영국산 쇠고기 수입을 금하였다. 광우병은 말없이 서서히 번져오는 인류의 생명을 위협하는 치명적인 질병임에도 불구하고 이 병의 경각심이 서서히 사라져 가고 있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A. 광우병의 원인
광우병의 전이 물질은 프리온(prions)이라고 부르는 단백질로 이루어졌고, 서서히 뇌와 신경계를 공격하여 ‘스펀지형 뇌’(Bovine Spongiform Encephalopathy)를 만들지만 인체의 면역계가 이것을 공격하지 않는다. 이것은 아직까지 특별한 치료약이 발견되지 않는 불치병이다. 현대 의학으로는 병에 걸린 짐승이나 사람에게서 프리온을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한 프리온(prions)은 요리를 하거나 삶아도 병원균이 죽지 않는다. 360℃에서 한 시간 고온처리 후에도 감염력을 갖는다. 이것은 또한 잠복기에는 서서히 진행되지만 일단 드러나면 급속하게 광기와 죽음을 가져오는 섬뜩한 질병이다.

B. 광우병의 역사
이 질병의 역사를 살펴보면 1920년대 크로이트펠트와 야콥(Creutzfeldt and jakob)박사에 의해 발견된 이래 1950년대 뉴기니 서부 파푸아(Papua) 근처 한 부족인 쿠루족에게서 유행되던 병이다. 그러므로 쿠루병이라고도 부른다. 이들은 오랜 전통의식으로 부모나 선조의 시체를 먹었다. 그들이 살아있을 때에 정신적이고 육적인 스테미나를 얻는다고 믿었으며 특별히 여인들에게는 다산을 가져온다고 믿었다. 그러나 쿠루병으로 인해 그 부족의 여인 80%가 사망하였다. 그런데 이 질병이 1970년대에는 미국의 양들에게 나타났고, 80년대에는 소들에게 나타났으며, 80년대 후반에는 인간에게도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1970년에 미 농무성과 국제건강연구소(NIH)는 수 천마리의 감염된 양을 뉴욕에서 먼 곳으로 격리시키는 일을 조심스럽게 수행하였다. 동물 보호 협회의 종사자였던 리먼(Howard F, Lyman)씨의 증언에 의하면 국제건강연구소(NIH)는 병든 양들을 싼값에 농부들에게 사료로 팔아 소, 양, 돼지, 닭 등의 사료로 사용하도록 하였는데 이것은 미국내 고기 산업의 죽음을 알리는 종소리가 되었다. (International Meat Crisis, p22)

C. 광우병의 여파
이러한 유형의 질병들이 한 생명체에서 다른 생명체로 전이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음은 여러 연구결과 밝혀지고 있다. 광우병에 걸린 소의 육질, 뼈를 주었을 때 소, 양, 염소, 돼지, 원숭이 양, 타조, 밍크, 등에 감염을 일으킨다. 광우병에 걸린 소를 사료로 줄 경우 심각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 광우병이 동물과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형태는 조금씩 다르지만 병의 형태는 비슷하다.

소에게서 나타나면 ‘소 스펀지형 뇌질환’(BSE)
양에게서 나타나면 ‘스크레피’(Scrape)
사람에게서 나타나면 ‘크로이트펠트-야곱병’(Creutzfeldt-jakob disease)과 같은 것이 된다.
최근에는 돼지에게도 양의 스크레피 질환과 같은 질병이 나타나고 있다.

알츠하이머병(Alzheimer’s disease)과 유사한 병

a. 크로이트펠트-야곱병 (Creutzfeldt-jakob disease)
중년 이후에 나타나며 6개월 내에 죽음을 유발한다

b. 거스트만 스트라울러 증후군 (Gerstmann - Strussler syndrome)

c. 쿠루병 (Kuru)
그 외 프리온으로 인한 질병 중 파젯(Paget)씨 병이라는 질병이 있는데 프리온으로 인해 전염되며 미국인의 40세 이상 3%가 이 질병에 걸려 있다.

D. 광우병과 치매
하버드대 의학보고에 의하면 약 400만명의 미국인이 알츠하이머 병에 걸려 있으며 2050년까지 약 1,000만명의 미국인이 이 병에 걸릴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다. 사람이 광우병에 걸린 고기를 먹을 경우 알츠하이머병 종류의 유사한 질병에 걸린다.

광우병의 잠복기는 2~8년이다. 발병되기 전에 사람이 그 고기를 먹으면 감염된다. 영국의 경우 광우병에 감염된 사료를 갈아먹임으로 그 병이 확산 되었으며, 미국 내에서도 유통되는 사료 중에 15%는 가공한 동물성 육질이므로 사료를 통해 병이 전이되고 있다. 1988년 영국에서는 광우병에 걸린 소에서 나온 우유 판매를 금지시켰다. 또한 송아지의 먹이인 인공 우유는 동물성 혈장과 동물성 단백질 등이 함유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유, 아이스크림, 유제품, 젤라틴 등을 먹지 않는 것이 좋다. 광우병에 걸린 소의 규모를 우리는 헤아릴 수 없고 수백만 마리의 소가 이미 식탁의 메뉴로 소비되었을 것이다.

딜러박사와 캔트박사는 2001년까지 감염된 상태로 소비된 소의 숫자가 180만 마리에 달할 것으로 보고 있다. BBC 영국 의학연구위원회 프리온 연구팀장 존 콜린지 박사는 지금까지 드러난 변종 크로이트펠트-야곱병을 감염시키는 단백질 프리온의 잠복 기간이 짧아질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하고 앞으로 수십년 내에 걸쳐 인간 광우병이 창궐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경고했다.

2. 조류독감

인간에게 치명적인 질병이 조류에게서 감염되고 있다. 1997년에는 조류 독감이 인간에게 감염된다는 사실이 처음으로 밝혀졌으며 2004년 1월 23일 베트남에서 숨진 23세의 여자가 조류독감으로 숨진 오빠(31)로부터 전염된 것으로 추정된 보고가 세계보건 기구에 의해 발표되었다.

조류 독감을 일으키는 주범은 ‘인플루엔자 A형 바이러스’인데 야생 조류의 장내에서 기생할 때는 별 문제를 일으키지 않지만 야생 동물의 변을 통해 닭, 오리 등에 감염되면 심각한 호흡기 질병을 일으키며, 특히 조류독감 중 홍콩 H5N1형 바이러스는 사람에게 감염을 유발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세계보건기구(WHO) 발표에 의하면 “조류독감 바이러스가 최악의 경우로 나타나면 전 세계 인구의 20~30%가 감염될 우려가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3. 소의 에이즈 바이러스(BIV)

에이즈는 원숭이에게서 사람에게 전이되었으며 이제 소에게까지 에이즈가 나타나 인간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 이제 육식을 하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 되고 있다.
2000년까지 수천만명의 사람들이 에이즈에 감염되었고, 2000만명이 에이즈로 사망하였으며, 미국 내에서만도 35만명이 사망하였다. 아프리카에서 사망 원인 가운데 5명중 1명은 에이즈로 사망하고 있다.

영국 국립의학연구소(NMR)는 “현대 생물학”에 관한 연구 보고서를 발표하면서 인간과 원숭이가 모두 트림-5 알파(trim-5 alpha)라는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데, 원숭이의 유전자는 HIV(인체면역결핍 바이러스)유전자를 차단하지만 사람은 이 유전자를 차단치 못하는데, 그것은 이 유전자가 만드는 단백질의 구조 하나가 다르기 때문이라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것은 인류의 최대의 불치병의 한 종류의 에이즈가 원숭이에서 발병되었다는 강력한 단서가 되고 있다.
1991년 5월 31일 월스트리트 저널은 에이즈와 유사한 질병이 소들을 감염시킨 사실을 기사화한 바 있다. 스위스에서는 면역 결핍 바이러스에 감염된 소를 격리 폐기시키며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제한하고 있는 점으로 미뤄볼 때 소에게 나타나는 소의 에이즈(BIV)의 위험성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당신이 무심코 먹는 소고기 속에 에이즈 바이러스(HIV)가 당신을 감염시킬 수 있음을 기억하라.

4. 소의 백혈병 바이러스(BLV)

소고기를 먹는 것은 백혈병 바이러스를 먹는 것이다. 이 백혈병(leukemia) 바이러스는 골수와 림프계 일부 (림프선, 비장, 간)에서 백혈구가 악성으로 증식하여 림프 조직 암으로 발전하게 한다. 과잉으로 늘어난 혈구가 축적되고, 혈류를 통해 전이되어 다른 조직에까지 영양을 끼친다. 미국 내 대다수의 소가 백혈병 바이러스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과 미국 내 2~5세의 어린이에게서 급성 백혈병이 많이 나타나며 아동기 암 사망원인 1위라는 사실을 볼 때 이것은 어떤 상관관계가 있지 않을까?

미국 내 소의 70%정도가 백혈병 바이러스를 가지고 있으며 이중 약 20%는 백혈병에 감염되어있다. 백혈병 바이러스에 감염된 젖소에서 공급되는 우유의 대부분에서 백혈병 바이러스와 감염된 임파구가 발견된다. 또한 소의 백혈병 바이러스(BLV)가 사람의 T-세포 바이러스 1(HTLV-1)와 유형이 아주 비슷하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것이다. 소의 백혈병 바이러스가 사람의 체내의 세포를 감염시키고 수년 간의 잠복기를 거쳐 질병으로 들어날 가능성이 있다. 왜냐면 소의 백혈병 바이러스에 감염된 우유를 침팬지에게 먹인 결과 백혈병에 감염되었으며 양들에게서는 임파 육종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 우유는 살균 후에도 백혈병 바이러스를 가지고 있다.

비록 모든 우유가 저온 살균과정을 거칠 지라도 안전하지 못하다. 왜냐면 살균 후에도 많은 바이러스와 세균들이 우유 속에 포함되어 있으며 지속적으로 우유를 섭취한다면 그것은 어떤 형태로든 위험요인이 될 것이다. 또한 우유는 유아 사망률이 모유에 비해 약 56배나 높았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또한 우유는 관상동맥질환, 암, 알레르기 질환, 감염성 질환, 소아 당뇨, 치아 부식, 만성 피로, 두통 등에 영향을 미친다.
그러므로 지금은 짐승들 사이에 질병이 증가하고 있기 때문에 계란, 우유, 크림이나 버터의 사용이 안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우리는 숙고해야 할 것이다.

5. 짐승의 병이 전염되는 경로들

많은 불쌍한 짐승들은 외양간과 마구간에 남아 있는 더러운 독소가 섞인 공기를 호흡하게 된다. 그런 짐승의 폐는 불순물들을 홉입(吸入)함으로 건강을 오랫동안 유지하지 못하게 된다. 질병이 간 부위(肝部位)로 옮겨지게 되고 그 짐승의 전 체내가 병들게 된다.

동물의 고기를 많이 먹고 사는 사람들은 중한 병이든 경한 병이든 어쨌든 병든 동물의 고기를 먹는 일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동물들은 도살 처리장에 도착하기 전에 그들을 몰고 가는 과정을 통해 홍분하게 되고 질병에 걸리게 된다. 이 병든 동물의 체액과 고기는 혈액 속에 직접 받아들여지며, 사람의 몸 속을 순환하여 동일한 체액과 살을 이룬다. 이렇게 하여, 동물의 체액이 사람의 몸에 들어온다. 흔히 장거리에서 도살장까지 운송된 짐승들이 도살된다. 그 짐승들은 장거리를 운송될 때에 혈액의 열도가 상승되고 피가 살 속에 가득히 퍼져 운동을 전혀 하지 못하고 진력이나 기진맥진한 그런 상태에서 도살당하게 된다. 그래서 몸에 가득히 퍼진 피가 염증을 일으키게 되며 그런 고기를 먹으면 그 독소가 사람에게 들어 오게 된다. 이러한 동물의 고기를 먹음으로 인하여 사람의 혈액은 더러워 진다. 육식을 하면 질병에 걸릴 위험은 십 배나 증가한다.

6. 최근 20년 동안 일어난 유행병들

최근 20년 동안 세상에는 신종 또는 변종 RNA 바이러스가 등장하여 세계를 두려움의 도가니로 몰아 놓았는데 이 질병은 인류의 생존의 터전을 흔들고 있다. 이것은 천재지변이라기보다는 동물의 서식지와 생태계를 파괴한 대가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몰인정한 가축의 사육 방법, 가금류의 집단사육 등은 지속적으로 문제를 양산하고 있다.

1984년 에이즈 바이러스가 발견된 이래 20여 년간 2000만명이 사망했고, 1997년에는 닭과 조류를 감염시키는 독감이 인간에게 감염된 사실을 처음으로 찾아내게 되었다. 2003년에는 폐렴을 가져오는 사스 전염병이 중국, 홍콩, 싱가포르, 캐나다 지역을 휩쓸었다. 1993년에는 미국 뉴멕시코의 포코너스에서 수십명이 유행성출혈열을 일으키는 바이러스로 인해 수십명이 사망했다.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의 공통점은 RNA가 복사되는 과정에서 불량품을 만들어 낸 결과이다. 오존층과 생태계의 파괴로 인한 급속한 환경변화와 사회 문화 풍조로 인해 변종 바이러스는 더욱 양산될 것이다.

또한 프리온(단백질)을 통해 소의 광우병, 양의 스크래피, 밍크, 돼지등에게서 발견되는 유사한 질병이 사람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알츠하이머병 종류의 병을 양산하고 있다는 것이다. 더욱이 대부분의 소에서 발견되는 백혈병 바이러스가 고기를 통해서든 우유를 통해서든 사람의 체내로 들어와 감염시킨다는 것과 최근에는 이제 소에게까지 에이즈 질환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외에도 육질에는 암과 종양, 언제든 문제를 가져오는 대장균성 질병, 각종 세균과 박테리아, 피에 독성 물질 등이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 육식은 인간의 정신과 영성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데, 다음과 같은 현상을 일으킬 수 있다.

1. 애정과 동정심이 박탈됨
2. 본성을 동물화시킴
3. 혈액을 중독시킴
4. 격정을 불 붙게함
5. 영적 지각을 마비시킴
6. 참지 못하고 성급하게 만듬
7. 식욕을 왜곡시킴

* 이제는 건강과 영성을 위해 현명한 선택을 할 때가 되었다.
*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식물이 되리라”(창1:29).
* “인자한 자는 자기의 영혼을 이롭게 하고 잔인한 자는 자기의 몸을 해롭게 하느니라”(잠 11:17).
*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고전 11:29).
* “자기 몸을 구별하는 모든 날 동안 그는 여호와께 거룩한 자니라”(민 6:8).
* “여호와께서 또 모든 질병을 네게서 멀리하사 너희가 아는바 그 애굽의 악질이 네게 임하지 않게 하시”(신 7:15)기를...

1부 -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


스가랴서는 우리들이 자주 읽거나 연구하게 되지 않는 구약 성경전서 중에 하나이다. 그러나 자세히 연구해보면 그 안에는 놀라운 기별들과 교훈들이 들어 있다.

특별히 스가랴 3장에 나타나 있는 “여호수아와 사자”에 나오는 이야기는 마치 드라마에 쓰여진 한편의 이야기처럼 우리에게 생생하게 영적인 세계의 장면과 선과 악의 대쟁투를 묘사해주고 있으며, 우리에게 감동적인 교훈과 깨달음을 준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회개와 용서받음, 사단의 고소와 예수 그리스도의 변호, 그리고 하나님의 회복시키시는 사랑의 역사와 구원의 인치심에 대한 전체적인 계획이 기록되어 있다. 이번 호 신앙기사에는 스가랴서 3장에 있는 예언을 다루어 보았다. 사단의 역사와 하나님의 백성의 비난자를 정복할 수 있는 우리의 중보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에 대한 가장 강력하고 감동적인 예증이 기록되어 있는, 전에 연구해보지 못했던 스가랴서 3장의 예언을 함께 연구하면서 유익한 교훈을 얻기를 바란다. - 편집실 ­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사자 앞에 섰고 사단은 그의 우편에 서서 그를 대적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시니라.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하실 때에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섰는지라”(스가랴 3:1~3).

만일 볼 수 있는 세계와 볼 수 없는 세계를 분리시키는 휘장이 거두어져서, 우리들이 그리스도와 그의 거룩한 천사들과 사단과 그의 악한 사자들 사이에서 우리 구원에 관하여 전개되고 있는 대쟁투를 볼 수 있다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훨씬 더 열렬하고 신실하게 될 것이다. 또 만일 우리들이 죄의 속박에서 영혼들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놀라운 사업과 사단의 적의에서 우리들을 보호하기 위한 끊임없는 그분의 능력의 발휘를 이해한다면, 우리들은 사단의 계략을 저항하기 위하여 훨씬 더 잘 준비될 수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마음은 구속의 계획의 넓은 범위와 중요성, 그리고 그리스도의 동역자가 된 우리들 앞에 놓인 큰 사업을 보고 엄숙해질 것이며, 또한 우리들은 겸손해지고, 온 하늘이 우리들의 구원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용기를 갖게 될 것이다. 또한 스가랴서 3장에 나오는 여호수아처럼 더욱 더 간절한 심령으로 회개의 기도와 간구를 하나님께 올릴 것이다.

* 하나님의 백성 고대 이스라엘의 회개

거룩한 이상(異像)을 보는 중에 선지자 스가랴는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슥 3:3), 여호와의 사자 앞에 서서 큰 고통 중에 처한 그의 백성을 위하여 하나님의 자비를 간구하고 있는 것을 본다. 그런데 사단은 그를 대항하기 위하여 그의 오른편에 서 있는 것을 성경절 1절을 보아 알 수 있다. 이 영감의 말씀을 기록할 당시 스가랴 선지자가 처했던 환경을 먼저 살펴보자. 이것은 스가랴서를 연구하는 우리의 이해를 도울 것이다. 스가랴는 학개 선지자와 같은 시대의 사람이었다(슥 1:1, 학 1:1). 하나님의 은혜의 섭리대로 메데 페르시아 왕으로부터 성전을 다시 건축하라는 영을 받은 유대인들은 대적들의 반대 때문에 성전 재건이라는 그들의 소망을 포기해야 하는 “암담하고 고통스러운 때”에 처해 있었다. 이 때, 하나님의 사업과 회복에 대한 신령한 계획을 알려주는 선지자의 기별은 의기소침해 있는 유대인들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준비되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지상에서 하나님의 진리를 보존하기 위하여 택함을 받았기 때문에, 그들이 한 민족으로 존재할 시초부터 사단의 적의의 특별한 대상이 되어 왔다. 사단은 결단코 그들을 파멸시키고자 작정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께 순종하고 있는 동안 그는 그들을 해칠 수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그들을 죄 가운데로 유혹해 들이기 위하여 그의 모든 힘과 교활한 술책을 다했다. 이스라엘은 그의 유혹에 걸려들어서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고, 그들의 능력의 근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분리되고, 그들의 이방 원수들에게 포로가 되도록 버려졌다. 그들은 바벨론으로 포로가 되어 가서 여러 해 동안 그곳에 머물렀다. 그럴지라도 그들은 여호와께 버림을 받지는 않았다. 그분의 선지자들은 책망과 경고를 가지고 그들에게 보내졌다. 백성들은 각성되어 그들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 앞에서 그들 스스로를 낮추고, 참된 회개로 그분께로 돌아왔다. 그러자 그분께서는 용기를 주는 기별을 그들에게 보내주시고, 그들을 포로의 상태에서 건져내고 그분의 은총을 그들에게 회복시켜 주시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회개하고 힘을 합하여 다시 성전을 건축하였다.

* 현대 이스라엘 백성인 우리들의 회개

1. 하늘법정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심판

스가랴서 3장을 읽어보면, 머리 속에 떠오르는 장면이 있을 것이다. 우리 한번 다같이 이 장면을 조용히 머리 속에 그려보자! 어떤 장면이 떠오르는가? 만일 독자가 지식이 있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장면은 심판이 벌어지고 있는 재판정의 모습인 것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여호수아가 여호와의 사자 앞에 서있고, 그의 옆에서는 사단이 그를 대적하고 있는 장면이 연출되고 있기 때문이다. 곧, 피고, 원고, 재판장이 다 나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어떤 상황에 있는가? 여호수아는 그 크신 천사께 간구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무엇을 간구하고 있는가? 그는 바로 그의 자신의 죄뿐만 아니라, 온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며 간절하게 용서를 간구하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그 상황을 가만히 보면 그는 지금 사단의 대적(고소)을 받으며,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은총을 간구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상황은 비록 지금 우리의 육안에는 숨겨져 있지만, 영적인 눈을 열어서 보면 현재 우리 주위에서 한창 진행되고 있는 상황인 것을 알 수 있다. 여호수아의 모습에 우리 자신들의 모습을 대입해 넣고 생각해 보자.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스가랴서에 이런 예언을 그려 넣어 주셨고, 또 우리에게 무엇을 깨닫게 하시려고 하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참고로, 계속 읽어내려 가면 알게 되겠지만, 여기에 나오는 여호와의 사자, 곧 천사로 표현된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알 수 있다.

우리의 매일 매일의 생활은 참으로 엄숙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선과 악의 대쟁투가 벌어지고 있는 이 지구에 살고 있기 때문이며, 우리의 매일의 생활의 기록들, 곧 죄의 기록들과 악한 행실에 대한 기록, 또 선에 대한 행실들이 하늘 기록책에 빠짐없이 기록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뿐이 아니고 지금 하늘법정에서 조사심판이 진행되고 있는데, 그 심판의 진행과정에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성령의 감화로 감동시키시고 교육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역사가 있는가 하면, 우리를 유혹하여 우리로 쓰러지고 죄짓게 하였음으로 우리의 죄를 낱낱이 알고 있는 사단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고소하고 있는 악한 역사도 있기 때문이다.

2. 진정한 회개의 필요성

마지막 심판이 가까운 시점에 사는 현대의 영적 이스라엘 백성들인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여호수아처럼 매일 하나님 앞에 나아가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며, 용서를 받기 위해 열렬히 간구하여야 한다. 매일 밤 잠이 들기 전, 또는 연약하여 쓰러져 죄를 지었을 때, 혹은 고의적으로 하나님께 범죄했을 때, 우리는 즉시로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고 회개하며 깨끗하게 하심을 받아야 한다. 지금 하늘 법정에서는 우리들 각 개인의 경우와 상태에 대한 예수님의 중보와 사단의 고소가 계속 진행되고 있다. 참된 회개만이 우리를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의 효력을 얻게 하며 사단의 고소를 침묵시킬 수 있다. 그러므로 진정한 회개의 경험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되고 있다.
회개란 무엇인가? 회개라는 것은 죄를 슬퍼하고 죄에서 떠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자기의 죄를 진정으로 미워하며 버리는 것이다.

A. 다윗의 회개
성경에는 진정한 회개를 한 사람들의 예가 나온다. 한 예는 다윗의 회개이다. 다윗은 범죄한 후에 그의 죄에 대하여 참으로 슬퍼하며 하나님의 용서와 사유하심, 그리고 그의 심령의 순결을 구하여 간절히 기도하였다. 그의 회개는 진실되고 마음 속 깊은 데서 나온 것이었다. 죄를 변명하려는 노력도 없었고, 형벌을 피하려는 욕망도 그의 기도의 동기가 되지 않았다. 다윗은 자기의 범죄가 얼마나 흉악함을 깨달았고, 또 자기의 심령이 얼마나 더러워졌으며, 그의 죄가 하나님을 얼마나 슬프게 했는지를 깨닫고 자신이 지은 죄를 진정으로 슬퍼하며 자기 죄를 미워하였다. 그는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 51장) 라고 간절히 간구하였다. 그는 죄를 미워했을 뿐만 아니라 죄로부터 완전히 회복된 새로운 마음을 창조해주시기를 기도하였다.

B. 세리의 회개
또 다른 회개의 예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비유 중에 나오는 세리의 기도에서 볼 수 있다. 세리는 다른 예배자들과 같이 성전에 올라갔으나 즉시 자기 자신이 그들과 함께 예배드릴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그들로부터 좀 떨어져서 예배를 드렸다. 세리는 멀리 서서 극심한 고민과 자책을 느끼면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기도하였다. 그는 자기가 하나님 앞에 범죄했고, 자기 자신이 죄 많고 누추한 인간임을 깊이 느꼈다. 그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그를 멸시의 눈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에 그들로부터 어떠한 동정도 기대할 수 없었다. 그는 하나님 앞에 내어놓을 만한 아무런 공로도 없음을 알고 절망 가운데서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하고 외쳤다. 그는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도 않았다. 그는 자기의 죄에 대한 자각에 압도되어 홀로 하나님 앞에 섰다. 그의 유일한 소원은 죄사함을 받고 마음에 화평을 얻는 것이었다. 이를 위한 그의 유일한 간구는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축복을 받았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사람이 저(바리새인)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고 말씀하셨다.

C. 베드로의 회개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가 실패한 것은 자부심 때문이었고 그의 발이 다시 굳게 설 수 있었던 것은 회개와 겸비를 통해서였다. 그의 회개의 경험 속에서 회개하는 모든 죄인이 용기를 얻을 수 있다. 비록 베드로가 큰 죄를 범했을지라도 버림을 받지는 않았다. 그가 예수님을 부인하고 욕하는 죄를 저질렀을 때, 그는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눅 22:32)라고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을 생각하였다. 그가 심히 애통하고 뉘우칠 때에 그는 이 기도의 말씀과 사랑과 동정이 섞인 그리스도의 얼굴을 기억하고 희망을 갖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죄를 심히 미워하였고, 진심으로 회개하여 용서하심을 받았다.

D. 우리의 회개
우리는 오늘날, 아직 은혜받을 만한 때에 우리의 죄를 진정으로 회개하여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죄를 하나님 앞에 내어 놓고 통회하여야 한다. 그런데 한가지 중요한 사실은 회개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우리 자신을 알아야 하고, 자기 자신에 대한 온전한 자각이 우리로 통회하게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자만을 구원하실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진정한 상태를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회개하지 않을 것이며, 그리스도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위험을 깨달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피난처로 달려가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상처의 아픔을 느끼지 못하면 치료를 받고 싶어하지 않을 것이다. 아무도 자기의 허물을 스스로 깨달을 수 없다. 자신에 대한 진정한 상태를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리스도를 쳐다보는 것이다. 사람들이 자기의 의를 그처럼 높이는 까닭은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분의 순결하심과 탁월하심을 깊이 생각할 때에 우리 자신의 연약함과 가난함과 결점들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될 것이며, 그 때에 우리는 우리 자신이 다른 모든 죄인들과 마찬가지로 스스로 의롭다는 두루마기를 입고 있는 아무 소망도 없이 잃어버린 바 된 자임을 보게 될 것이다. 그 때에 우리는, 우리가 만일 구원을 얻게 된다면 그것은 우리 자신의 선행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혜로 말미암아 되는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세리의 기도가 응답을 받은 것은 그 기도가 전능하신 자를 붙잡으려는 의뢰심을 보여 준 까닭이다. 세리의 생각에는 자기 자신은 하나님 앞에 아무것도 아니요 오직 수치스러운 존재일 뿐이었다. 하나님을 찾는 모든 사람들도 이러한 자세를 가져야 한다. 믿음, 곧 자신을 의지하는 마음을 버리는 믿음으로 주님께 간구하는 궁핍한 자들은 무한하신 능력을 붙잡아야 한다. 우리는 항상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을 찾는 일과 끊임없이 간절한 마음으로 죄를 통회하고 자복하는 일과 하나님 앞에서 심령을 낮추는 일이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경험 가운데서 전진하는 매 발걸음마다 우리의 회개는 더욱 깊어지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요 12:32)고 하셨다. 우리가 갈바리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의 어린양을 바라볼 때에 구원의 오묘한 이치가 우리의 마음을 깨우치기 시작하고,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우리를 회개로 이끄신다.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하여 죽으심으로써 측량할 수 없는 사랑을 나타내신 것을 죄인이 보고, 또 그 사랑을 주목할 때에, 그 사랑은 마음을 부드럽게 하고 마음에 감명을 주며 심령에 통회하는 생각을 일으키게 되며 우리는 그때에 회개하게 된다. 독자는 진정한 회개를 경험했는가? 진정한 회개만이 우리를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를 효력있게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참된 회개의 경험을 매일 하는 사람들이 되자!

당신은 불에 그슬린 나무입니다!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스가랴 3:2).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이 말은 사단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하여 참소하기를 계속할 때, 여호화께서 우리를 변호하시며 사단을 향하여 하시는 말씀입니다. “불에 그슬린 나무”라는 뜻이 과연 무엇일까요? 사단이 즐겨 하는 일은 흑암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덮어서 그들을 멸망시키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낙망할 때까지 그들을 고소하고 참소하고 괴롭혀 그들로 구원에 대한 소망을 포기하게 만들려고 힘씁니다. 또한 사단은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멸망시키고 파멸로 이끌기 위하여 온갖 고난과 시험과 유혹들을 던집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사단의 공격으로 이리 저리 끌려다니며 시련과 고난 속에서 고민하고 고뇌하고 괴로움을 당하지만 절대로 하나님의 손을 놓지 않습니다. 비록 활활 타는 불 속에 던져진다 할지라도 그들은 자신들의 유일한 도움이 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주님의 도우심을 잠잠히 바라며 간절히 간구합니다.

그 때에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위하여 개입하십니다. 비록 그들이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 죄를 범했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그들의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불에서 나무 조각을 끄집어내는 것처럼 인류를 끄집어내셨습니다. 그분은 당신의 인성(人性)으로서 사람과 연결되셨고, 당신의 신성(神性)으로써 무한하신 하나님과 일체가 되셨습니다. 그분은 죽어가는 영혼들의 손이 미치는 곳에 도움을 가져다 놓으시기 위해 손수 우리 곁에 가까이 오셨습니다. 그리고 시험과 고난의 불을, 하나님의 온전한 자녀가 되기 위해 필요한 연단의 과정인 유익한 풀무불로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이제 대적 사단은 책망을 받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단아! 네가 아직도 내 백성을 괴롭히느냐? 그렇게 많은 시험과 괴로움을 주어 공격하고 고소하고도 아직 더 그들을 괴롭힐 것이 남아있느냐? 이제 그만 그들을 내버려두어라! 내가 그들을 구하여 꺼내리라. 그들은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라고...

하나님의 백성들은 오랫동안 고난의 풀무 속에 남아 있었습니다. 죄 때문에 그들은 사단과 그의 사자들이 그들의 파멸을 위하여 붙인 불꽃 속에서 거의 사르어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끌어내기 위하여 손을 쓰십니다. 회개하고 겸비해진 그들을 자비하신 구주께서는 버려두지 않으실 것입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 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사 42:3)시는 구주께서는...

주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 많고 타락한 사람들을 초청하시고자 온 종일 당신의 손을 뻗고 계십니다. 그분께서는 모든 사람을 영접해 주실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모든 사람을 환영하십니다. 죄인들의 괴수를 용서해 주는 것이 그분의 영광이 됩니다. 그분께서는 사로잡힌 자를 강한 자에게서 빼앗으시고, 포로된 자를 건져내시고, 나무토막을 붙는 불에서 꺼내실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가장 깊은 인간의 불행의 심연(深淵)까지 당신의 자비의 황금 사슬을 내려서 죄로 병든 타락한 영혼을 끌어올리실 것입니다.

고통으로, 죄책감으로, 시험과 시련으로 고난을 당하고 계십니까? 당신은 하나님의 자비의 손에 의하여 꺼내짐을 받는 “불에 그슬린 나무”입니다! 아무리 불꽃이 뜨겁고 거세더라도 아주 타서 스러지지 않도록, 그 다음 잘 연단을 받아 소기의 목적이 달성되면 하나님의 사랑스런 손길에 의하여 꺼내짐을 받을 당신은 “불에 그슬린 나무”입니다!

2부 - 사단의 고소


“...사단은 그의 우편에 서서 그를 대적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시니라”(스가랴 3:1 하단).

스가랴 선지자는 그의 이상 속에서 사단이 하나님의 백성인 여호수아를 대적하고 그의 죄과를 들추어내며 고소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사단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큰 죄인으로 나타내며, 그가 그들의 평생을 통해 유혹하여 범죄하게 한 죄의 목록을 하나님 앞에 제시한다. 사단은 그들이 범죄했기 때문에 자기 손아귀에 넘겨져 멸망당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그들이 악의 동맹체에 맞서 싸우는 섬기는 천사들에 의해 보호받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는 하나님의 백성을 세상과 한다발로 묶어 자기에게 충성을 바치도록 할 수 없기 때문에 분노로 가득 차 있다. 사단은 그들을 유혹하여 범죄하게 한 죄들을 정확하게 알고 있다. 그는 그 죄들을 가장 크게 과장하여 제시하고 있는데, 인류의 시조인 아담과 하와가 처음 범죄를 한 후부터 사단은 늘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자녀들에 대하여 이렇게 고소하고 있다.

“이 사람은 범죄하였으므로 나와 같이 멸망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어떻게 이런 죄를 지은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입니까? 하나님께서 나와 나의 사자들을 하늘에서 추방하시면서 동일한 죄를 범해 온 이 사람들에게는 상급을 주실 것입니까? 오, 주님, 당신은 공의에 의하여 이렇게 할 수 없습니다. 당신의 보좌는 의와 공의로 설 수 없을 것입니다. 공의는 그들을 대적하는 선고가 내리기를 요구합니다.”

사단의 계책

사람들로 죄를 범하게 하고 그들로 절망과 공포 속에 빠져 용서받기를 두려워하게 만드는 것이 사단의 특별한 계책이다. 사단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해 증오로 불타고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계실 때 그분께 나타냈던 동일한 정신을 그들을 향해 나타낸다. 사단이 여호와의 사자의 바른편에 서서, 더러운 옷을 입은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비난하며 여호와의 사자가 그를 위하여 하고자 하는 일을 방해하고 있는 이 장면은 그리스도께서 당신께로 이끌기를 원하시는 모든 영혼에 대한 사단의 태도를 나타낸다. 그는 우리를 죄 가운데 빠지게 한 후 하늘 우주 앞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에 합당치 못하다고 비난한다.

사단은 언제나 하나님의 자녀들을 참소하고 그들의 죄상을 할 수 있는 대로 과장해서 그들이 구원받을 가망이 전혀 없다고 주장한다. 그는 여호와 앞에 그들의 악행과 결점을 낱낱이 고발한다. 그는 그들의 허물과 실패를 일일이 열거해서 그들에게 도움이 몹시 필요할 때에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도와줄 수 없다고 생각될 만큼 그들의 죄상이 흉악스럽게 보이도록 노력한다. 하나님의 백성을 대표하는 여호수아는 누추한 옷을 입은 정죄받은 죄인으로 서 있다. 그의 백성의 죄를 잘 아는 여호수아는 낙담하고 있다. 사단은 그를 거의 절망에 빠뜨리기 위하여 죄에 대한 가책을 절실히 느끼도록 그의 심령을 짓눌렀다. 그럴지라도 여호수아는 자기를 대적하는 사단이 서 있는 곳에서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었다.

사단은 참소하는 일을 하늘에서 시작했다. 그 일은 사람이 타락한 이래로 사단이 땅에서 해 온 일이었고, 이 세상 역사의 종말이 가까울수록 그는 더욱 더 열심히 이 일을 행할 것이다. 사단은 그의 때가 얼마 남지 않은 것을 보고 속이고 멸망시키는 일에 더욱 열성을 내게 될 것이다. 특히 그는 지상에 있는 한 백성, 곧 비록 연약하고 죄가 많을지라도 여호와의 계명을 존중하고 있는 무리들을 볼 때에 몹시 분노하게 된다. 사단은 그들이 하나님을 순종하지 못하도록 하겠다는 굳은 결심을 하게 된다. 그는 그들의 무가치함을 기뻐하면서 모든 사람을 유혹해서 그들로 하나님께로부터 끊어지게 하기 위하여 매 사람에게 적절한 간계(奸計)를 준비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을 참소하고 정죄하는 동시에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과 긍휼과 용서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업을 성취하기 위하여 애쓰는 사람들을 참소하고 공박하려고 한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위하여 능력을 나타내실 때마다 사단은 몹시 증오한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역사하실 때마다 사단은 자기의 부하들과 같이 하나님의 백성을 멸망시키기 위하여 그들의 세력을 가다듬어 활동한다. 사단은 그리스도를 그들의 힘으로 삼는 모든 사람을 질투한다. 그의 목적은 악을 선동하는 일이며 그가 그 일에 성공하게 되면 그에 대한 온갖 비난을 시험받은 자들에게 퍼붓는다.

그는 또 사람들에게 회의심을 품게 하고, 그들이 하나님을 믿는 확신을 잃어버리고 그분의 사랑에서 떠나가게 한다. 그는 그들을 유혹하여 그분의 율법을 범하게 하고, 그들을 그의 포로로 주장하고 그들을 그에게서 빼앗아 가는 그리스도의 권리를 논박한다. 그는 하나님께 용서와 은혜를 열렬하게 구하는 자들이 그것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그는 그들을 좌절시키기 위하여 그들의 죄를 그들 앞에 제시한다.

또한 사단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더러운 옷과 결점 많은 품성을 지적한다. 그는 그들의 구주를 욕되게 한 그들의 약점과 어리석음과 배은망덕의 죄와 그리스도와 같지 않은 성품 등을 제시한다. 그는 이 모든 것을 들어 자기에게 그들을 멸망시킬 권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그들의 경우는 전혀 소망이 없으며 저희의 더러운 얼룩을 도무지 씻어버릴 수 없다는 생각을 갖게 해서 그들의 심령을 위협하려고 애쓴다. 그는 그들의 믿음을 파괴해서 그들로 자기의 시험에 완전히 굴복하도록 하고 또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충절을 버리도록 한다.

사단의 고소와 하나님의 백성들의 태도

주의 백성은 그들 스스로 사단의 비난에 대해 답변할 수 없다. 그들이 흠 없는 그리스도의 품성을 더욱 세밀하게 보면 볼수록 그분의 형상을 닮고자 하는 그들의 욕망은 더욱 강해질 것이며, 또한 그들 자신에게서는 순결과 거룩함을 더욱 적게 보게 될 것이다. 그들이 자신들의 죄 많은 상태를 깨닫는 동안, 그들은 더욱 그리스도를 그들의 의와 거룩함과 그들의 구속으로 신뢰하게 된다. 그들이 자신을 바라볼 때 낙망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그들은 하늘의 중보자께 탄원하고 구주의 공로를 의지하여 간구한다. 하나님께서는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롬 3:26)하실 수 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주께서 사단의 참소를 침묵시키고 그의 계책이 수포로 돌아가게 하시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주께 부르짖는다. 그들이 나를 용서하시고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라고 기도할 때에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의 크신 공로를 내세우셔서 대담한 참소자(사단)를 침묵시키신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두려워하는 당신의 백성들을 향하여 “나의 힘을 의지하고 나와 화친하며 나로 더불어 화친할 것이니라”(사 27:5)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우리들의 연약함을 굳세게 하기 위한 모든 방편이 준비 되어 있고 그분께 오라는 온갖 격려와 초청이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사단이 여호수아와 그의 백성을 비난한 것처럼, 그는 각 시대를 통하여 하나님의 자비와 은총을 구하고 있는 자들을 비난한다. 요한계시록에 의하면 그는,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계 12:10)로 언급되고 있다. 대쟁투는 악의 세력에서 구원받은 각 영혼들과 이름이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을 놓고 반복되고 있다. 어떤 사람도 악한 자의 저항을 결정적으로 받지 않고 사단의 가족으로부터 하나님의 가족으로 받아들여지지는 않는다. 주님을 찾는 자들에 대한 사단의 비난은 그들의 죄를 불쾌히 여기므로 생기는 것이 아니다. 그는 그들의 결함있는 품성을 좋아한다. 그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범함으로써만 그는 그들을 지배하는 힘을 얻을 수 있다. 그의 비난은 순전히 그리스도에 대한 적의 때문에 생긴다. 구원의 계획을 통하여 예수님은 인간 가족을 붙들고 있는 사단의 지배권을 깨뜨리고 영혼들을 그의 세력에서 구출해 내고 계신다. 사단은 그리스도의 절대권의 증거를 바라볼 때 모든 증오와 적의를 일으킨다. 그리하여 악랄한 간계와 힘으로 그는 그리스도의 구원을 받아들인 남은 자손들을 그분에게서 빼앗고자 활동한다.

사단은 그가 찬탈한 권세가 곧 영원히 끝장 날 것을 알고 있다. 세상을 지배하려는 그의 마지막 기회가 지금 그 앞에 놓여져 있으며, 그는 지상의 거민들을 멸망시키는 일을 성취하기 위해서 지극히 결정적인 노력을 기울일 것이다. 이런 때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매일 나아가 그의 용서하심과 사단을 이기기 위한 능력을 받아야 한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한 사단의 적의는 그의 마지막 반역 사업에 자기의 군대를 활동시킴에 따라 더욱 많이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 전적으로 굴복하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에 의하여 보호받지 못하는 모든 영혼은 결국 마지막에 하늘을 대적하는 일에 사단과 연합할 것이며, 우주의 통치자를 대적하는 무리에 가담하게 될 것이다.

3부 -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와 변호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하실 때에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섰는지라.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과를 제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 내가 말하되 정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소서 하매

곧 정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며 옷을 입히고 여호와의 사자는 곁에 섰더라”(스가랴 3:2~5).

스가랴 3장에 나타나 있는 장면처럼 비록 사단이 오른편에 서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고소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위해 중보하신다. 예수께서는 하늘에 계시는 우리의 크신 대제사장이시다. 그분은 하늘에서 지금 무엇을 하시는가? 그분은 자기를 믿는 그분의 백성들을 위해 중보하시며 속죄하고 계신다. 그분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기도와 회개와 고백을 들으시고 받으셔서 용서하시고 속죄하는 일을 하신다. 사단이 옆에 서서 하나님 백성들의 죄들을 제시할 때 주님께서는 어떻게 대답하시는가?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슥 3:2).

사단은 하나님의 선택된 충성스런 백성들을 더러움과 죄가 가득한 것처럼 제시해 왔었다. 그는 그들이 범한 죄들을 구체적으로 묘사할 수 있다. 그는 그의 악한 천사들을 총동원시키고 기만술을 발휘하여 그들을 바로 이 죄들 속으로 끌어들이지 않았던가? 그러나 그들은 회개했고, 그리스도의 의를 받아들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고 하나님 앞에 서있다.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과를 제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 그들이 범한 모든 죄는 용서되었으며, 그들은 전혀 죄를 짓지 않은 자처럼, 그리고 선택함을 입은 진실된 자요, 무죄하고 온전한 자로 하나님 앞에 섰다.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와 사랑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기업인 당신의 백성을 다시 사시고 그들에게 한번 더 기회를 갖도록 하기 위하여 당신의 찔린 몸을 바치셨다.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히 7:25).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흠 없는 생애와 순종과 갈바리의 십자가 상에서의 죽으심을 통해서 잃어버린 인류를 위하여 간구하셨다. 그리고 지금 우리의 구원의 주께서는 단지 탄원자로써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승리를 주장하시는 승리자로써 간구하신다. 그가 드린 제물은 완전했다. 우리의 중보자로서 그는 당신 자신이 정하신 사업을 수행하고 계신다. 즉 당신의 백성들의 기도와, 고백과, 감사의 향연(香煙)에 당신의 흠 없는 공로를 섞어서 하나님 앞에 올리신다. 이것들은 그분의 의로 말미암아 좋은 향기가 되어 하나님 앞에 올라가게 된다. 이 제물은 하나님께서 온전히 받으실 만한 것이 되어 그분의 용서가 모든 범죄를 덮어주게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대속자와 보증인이 되시겠다고 약속하셨으며 어느 누구도 소홀히 여기지 않으신다. 그분은 인류가 영원한 멸망을 당하게 된 것을 보시고 그냥 계실 수가 없어서 그들을 위하여 당신의 생명을 버리셨으며,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모든 사람들을 동정과 측은한 눈으로 바라보고 계신다. 그분은 떨면서 간구하는 자들을 일으켜 세우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신다. 그분은 자신의 속죄를 통하여 선을 행할 수 있는 무한한 능력을 사람을 위해 예비하셨으므로 그 능력을 우리를 위해 사용하지 않으실 이유가 없다.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모든 죄와 슬픔을 그분의 발 앞에 놓을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먼저 그분을 사랑하였기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 아니고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며 돌아가셨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당연히 받아야 할 죄값을 따라 우리를 취급하지 않으신다. 비록 우리의 죄는 정죄받기에 합당하지마는, 그분께서는 우리를 정죄하지 않으신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연약함과 무지, 우리의 냉담과 고집을 여러 해 동안 참으셨다. 우리가 방황하고, 심령이 완악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고 있을지라도 그분의 팔은 여전히 우리를 향하여 뻗쳐 있다. 이 사랑의 모습이 은혜받기에 합당치 못한 인간에게 나타내신 하나님의 태도이다. 우리가 은혜를 찾는 것이 아니고 은혜가 우리를 찾아왔다. 우리가 은혜를 받을 가치가 있기 때문에서가 아니고 전혀 가치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은혜를 우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신다.

그리스도의 변호

스가랴 3장의 장면에서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위하여 겸손하게 탄원할 때, 사단은 그를 대적하기 위하여 담대하게 일어서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서는 안 될 이유로서 그들의 범죄를 지적한다. 그는 그들을 그의 포로로 주장하고 그들이 죽임을 당하도록 그의 손에 맡겨지기를 요구한다. 사단은 그들을 범죄자로 하나님 앞에 고소하는데, 일찍이 그는 그들을 의혹에 빠뜨리고, 하나님을 믿는 확신을 잃어버리게 하고, 하나님의 사랑에서 떠나 그분의 율법을 범하게 하고자 저력을 다해온 장본인이다. 사단은 그들의 생애의 기록을 지적하고, 바로 그 자신이 그들로 범죄하게 한 점들을 지적한다. 그리고 그는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자기 백성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지금도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들을 대적할 기회를 끊임없이 찾고 있다. 심지어 그들의 가장 훌륭하고 가장 가납될 만한 봉사까지도 그는 타락한 것처럼 보이게 하고자 애쓴다. 가장 간교하고 가장 잔인한 셀 수 없는 계책들을 통하여 그는 그들을 정죄하고자 노력한다.

여호수아는 사단의 비난에서 그 자신이나 그의 백성을 방어할 수 없다. 그는 이스라엘이 허물에서 벗어나 있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는 자기가 대표하는 백성의 죄를 상징하는 더러운 옷을 입고 사자 앞에 서서 그들의 죄를 고백한다. 그는 그들의 회개와 겸비를 지적하고, 죄를 용서하는 구속주의 자비를 의지하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주장한다. 이처럼 우리들도 사단이 하는 비난들을 스스로 대항할 수 없다. 우리는 죄로 더러워진 옷을 입고, 하나님 앞에 서서 우리들의 죄를 고백할 뿐이다.

그럴 때에 우리의 중보자이신 예수님은, 회개와 믿음으로 그들의 영혼을 그분께 바친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효과적으로 탄원하신다. 그분은 그들을 변호하시고, 갈바리의 강한 논증에 의하여 그들의 비난자를 물리치신다.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히 순종하심으로써 그분께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권세가 주어졌다. 그러므로 그분은 범죄한 인류를 위하여 자비와 화해를 그분의 아버지께 주장하신다. 그분은 우리의 공로에 근거된 것이 아닌 그분 자신의 공로에 근거된 논증을 가지고 비난자를 침묵케 하실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죄에 대하여 변명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그들의 회개와 믿음을 보여 주시고 그들이 용서받은 것을 주장하신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상한 손을 하나님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 앞에 드시고 “내가 저희 이름을 압니다. 내 손바닥에 저희 이름을 새겼습니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시 51:17). 그리고 당신의 백성을 고소하는 자를 향하여 “사단아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슥 3:2)고 말씀하신다.

그리스도의 중보와 변호를 받고 의의 옷을 입은 모든 사람은 택함받은 성실하고 진실한 자로 그분 앞에 서게 될 것이다. 사단은 그리스도의 손에서 그들을 빼앗을 힘이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회개와 믿음으로 그분의 보호를 요청한 사람은 한 사람도 사단의 세력 아래 들어가도록 허락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분의 말씀은, “나의 힘을 의지하고 나와 화친하며 나로 더불어 화친할 것이니라”(사 27:5)고 보증한다. “네가 만일… 내 율례를 지키면 … 내가 또 너로 여기 섰는 자들 중에 왕래케 하리라”(슥 3:7). 여호수아에게 한 이 약속은 모든 사람에게 한 것이다. 비록 이 세상에서도 하나님의 천사들은 그들의 좌우에서 동행할 것이고, 그들은 마침내 하나님의 보좌를 둘러 있는 천사들 사이에 설 것이다.

이스라엘의 회복

여호수아에 대한 중보가 수락되자,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슥 3:4)는 명령이 내린다. 그리고 사자는 여호수아에게, “내가 네 죄과를 제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슥 3:4)고 말한다. “곧 정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며 옷을 입히고”(슥 3:5), 그 자신의 죄와 그의 백성의 죄는 용서되었다. 이스라엘은 “아름다운 옷”으로 입혀졌다. 곧 그리스도의 의가 그들에게 입혀졌다. 여호수아의 머리에 씌어진 관은 제사장이 쓴 관이었고, 비록 그의 이전의 범죄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제는 하나님의 성소에서 그분 앞에 봉사할 자격이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뜻으로 “여호와께 성결”(출 39:30) 이라는 글귀가 새겨진 그런 관이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와 변호를 통해 용서를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선고되는 말을 들어보자. 제사장 직분의 권위를 엄숙하게 그에게 허여해 준 후 사자는 선언했다.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네가 만일 내 도를 준행하며 내 율례를 지키면 네가 내 집을 다스릴 것이요 내 뜰을 지킬 것이며 내가 또 너로 여기 섰는 자들 중에 왕래케 하리라”(슥 3:7). 용서받은 그들은 성전과 그 모든 의식을 주관하는 자요 관할하는 자로 높임을 받을 것이었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도 수종하는 천사들 사이에 왕래할 것이며, 마침내는 하나님의 보좌 주변에 있는 영광스러운 무리에 들 것이다. “대제사장 여호수아야 너와 네 앞에 앉은 네 동료들은 내 말을 들을 것이니라 이들은 예표의 사람이라 내가 내 종 순을 나게 하리라”(슥 3:8). 여기에 이스라엘의 희망이 밝혀져 있다. 비유된 예언에 나오는 것처럼 여호수아와 그의 백성이 용서를 받은 것은 장차 올 구주를 믿는 믿음에 의한 것이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그들은 하나님의 은총을 받도록 회복되었다. 만일 그들이 그분의 도를 준행하고 그분의 율례를 지키면 그분의 공로에 의하여 그들은 “예표의 사람”이 되고, 세상의 나라들 가운데서 하늘의 택한 자로 높임을 받을 것이었다.

구원의 상급

그것처럼 현대의 영적 이스라엘 백성인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큰 희망이 있다. 사단의 유혹과 죄를 이기고 회개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능력으로 죄를 극복한 사람들에게는 큰 약속이 주어져 있는데, 그것은 곧 스가랴 3장 7절과 10절에 말씀하신 다음과 같은 약속이다.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네가 만일 내 도를 준행하며 내 율례를 지키면 네가 내 집을 다스릴 것이요 내 뜰을 지킬 것이며 내가 또 너로 여기 섰는 자들 중에 왕래케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너희가 각각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로 서로 초대하리라 하셨느니라.”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죄를 이기고 매일 그분께 회개하고 그분과 동행하며 성령 충만한 생애를 산 구원 받을 성도들이 하늘 본향에서 누릴 영광과 상급을 묘사한다. 모든 죄를 회개하고 성령의 새롭게 하심을 입고 거듭난 생애를 계속 유지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뜻과 계명에 목숨을 바쳐 충성한 성도들이 하늘 본향에 가서 누릴 영광에 대하여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하늘은 정말 아름다운 곳일 것이다. 그곳에는 아무도 병들었다고 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고, 장례행렬도 없을 것이며, 다시는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고통 중에 슬퍼하는 일도 없을 것이며, 지켜지지 않은 약속을 인해 실망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거듭나고 죄를 미워하여 이긴 거룩하고 변화된 성도들이 함께 영원히 조화를 이루며 살 것이다. 영원히 지속될 사랑의 관계 속에서 서로 사랑하고 이해하고 나누며 하나님을 아는 영광스러운 지식 가운데 계속 자라갈 것이다. 천사들이 우리의 친구가 될 것이며, 우리를 지켜주던 수호천사도 만나게 될 것이다.

구원 받은 성도들은 영원히 우주를 향하여 하나님이 자신을 어떻게 구속하여 주셨는지, 자신을 어떻게 불 가운데서 꺼내어 구원해 주셨는 지에 대하여 간증할 것이다. 성도들은 영원한 기쁨 속에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우리에게 가장 큰 기쁨은 우리를 구원하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과 우리를 사랑하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해 내어 주신 사랑하는 하나님 아버지의 얼굴을 영원히 대면하여 사는 것이 될 것이다!
“당신은 더러운 옷을 입고 계신가요?”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과를 제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스가랴 3:4).

당신은 더러운 옷을 입고 계신가요? 늘 당신의 곁에서, 당신의 마음 속에서 당신을 참소하는 사단의 목소리가 당신을 괴롭히고 있지는 않는지요! 당신이 섬기는 하나님께서는 그대에게 결점이 있다 할지라도 그대를 버려 두시지 않으십니다. 그분께는 당신의 옷을 갈아 입히실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더러운 옷을 벗기시고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와 능력을 믿고 회개하는 당신에게 그리스도의 의의 두루마기를 입히시며 하늘책에 적힌 그대의 이름 아래 “용서하였다”고 기록하십니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온 하늘 앞에서 당신을 하나님의 소유라고 선포하십니다.

사단이 그대의 더러운 옷(품성)을 가리키며 참소할 때,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요 6:37)는 예수의 약속을 암송하십시오! 그리고 당신의 원수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모든 죄를 깨끗이 씻어 버릴 수 있다고 말하십시오! 그리고 다윗의 기도가 당신의 기도가 되게 하십시오.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당신이 회개하고 일어나 하늘 아버지께로 돌아갈 때, 그분은 멀리까지 나와서 당신을 영접하십니다. 만일 당신이 회개하고 그분을 향해 한 걸음만 내 디딘다해도 그분은 재빨리 무한하신 사랑의 팔로 당신을 안아 영접하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천부께서는 죄로 더럽혀진 옷을 그대에게서 벗기십니다. 스가랴서의 비유적 예언 속에서 죄인을 대표하는 누추한 옷을 입은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옷을 벗기신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옷“ (사 61:10)으로 당신을 입히실 것이고, 의의 겉옷으로 입히실 것입니다. “너희가 양우리에 누울 때에는 그 날개를 은으로 입히고 그 깃을 황금으로 입힌 비둘기 같도다”(시 68:13).

또한 하나님께서는 “네가 만일 내 도를 준행하”(슥 3:7)면, “내가 또 너로 여기 섰는 자들(주의 보좌를 호위하고 있는 거룩한 천사들) 중에 왕래케 하리라”고 약속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같이” 당신을 “기뻐하시”(사 62:5)며, “너(당신)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당신)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당신)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습 3:17)실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과 땅은 “죽었던 내 아들이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고 하는 아버지의 기쁨의 노래에 맞추어 합창하게 될 것입니다.

4부 - 하나님의 인


스가랴서 3장에서 우리가 지나치지 않고 배워야 할 교훈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인”에 관한 교훈이다. 스가랴 3장 4절과 5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다.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과를 제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 내가 말하되 정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소서 하매 곧 정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며 옷을 입히고 여호와의 사자는 곁에 섰더라.”

이 말씀이 어떻게 하나님의 인과 연관이 있는가? 함께 연구하여 보자.

정한 관

스가랴 3장 5절에 언급된 “정한 관”은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의 성소제도에서 찾을 수 있는 의미의 단어인데,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대제사장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 입던 제사장의 예복 중, 제사장이 머리에 쓰던 관을 가리킨다. 출애굽기 39장 30절에 보면 “그들이 또 정금으로 거룩한 패를 만들고 인을 새김같이 그 위에 여호와께 성결이라 새기고”라는 말씀이 나온다. 옛날 이스라엘의 대제사장이 쓰는 관은 흰 세마포 두건으로 만들었으며 거기에 “여호와께 성결”이라고 새긴 금관이 청색 끈으로 매어져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성결을 뜻했는데, 특별히 모든 죄로부터 정결함을 받았을 뿐 아니라, 모든 죄를 승리한 것을 의미했다.

스가랴 3장 9절 하단에 보면 “...내가 새길 것을 새기며 이 땅의 죄악을 하루에 제하리라”는 말씀이 나온다. 이 구절은 대속제일의 의미를 나타내는 것으로서 죄를 승리하고 죄의 용서와 도말함을 받는 것을 말한다. 곧, 하나님의 백성을 대표하는 여호수아가 죄의 용서함을 받고 또한 죄를 승리한 것을 나타내는 말이다. 이것은 마지막 환란을 통과하고 짐승의 표의 핍박을 이기고 죄를 승리한 마지막 하나님의 백성, 곧 하나님의 증인들에게 구현되어야 할 “승리”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마에 받는 하나님의 인

요한 계시록 7장에는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인을 받는 것에 대한 예언이 묘사되어 있다. 7장 3절에는 “가로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 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나 해하지 말라 하더라”는 말씀이 나온다. 이것은 네 천사가 이 땅에 임할 재앙의 바람을 놓으려고 할 때 다른 천사가 나타나 외치는 소리이다. 그런데 그 천사는 외치기를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 치기까지...”라고 하고 있다.

앞이마와 우리의 의지

위에 언급된 성경절처럼 요한 계시록은 마지막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인”을 이마에 받는다고 말하고 있다. 왜 이마에 받는 것일까? 그것은 마치 옛날 이스라엘의 대제사장이 머리에 쓴 관에 “여호와께 성결”이라고 써 있었던 것처럼, 앞이마가 성결하고 정결한 사람이 하나님의 인을 받는다는 뜻이다. 앞이마가 정결하다는 뜻이 무엇일까? 우리의 뇌는 특유의 기능을 가진 여러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그런데 우리의 앞이마 뒷부분에는 전두엽이 자리잡고 있다. 전두엽에서는 이성, 판단, 결정, 의지를 통제 관할한다. 이곳에서는 우리의 존재, 즉 자아를 제어하는 기능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전두엽에서 이루어지는 중요한 기능은 영성, 도덕성, 그리고 의지이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전두엽을 통해서 역사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다. 죄의 유혹이 올 때, 그리고 사단이 우리가 죄를 짓도록 유혹할 때, 사단의 말을 듣고 사단의 편을 택하여 죄를 짓든지, 아니면 성령의 음성을 듣고 성령께 굴복하여 죄의 유혹을 물리치든지 선택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의지에 달려있다. 요한 계시록은 하나님을 아는 데에 있어 앞이마(전두엽)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음을 언급하고 있다. 요한 계시록 22장 4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다.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 성경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그분의 성품을 의미한다. (출 33:18~23 참조). 계시록 22장 4절은 하나님의 이름, 곧 성품이 우리의 성품 안에 재현되는데, 그것은 우리의 앞이마(전두엽)에 재생된다고 말하고 있다. 이 뜻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성령께 지속적으로 굴복된 의지를 갖는 것을 뜻한다. 곧 거듭난 마음을 계속 유지하고 매 순간 성령과 교통하므로 죄를 이기며 사단의 유혹이 올 때 매번 올바른 편(성령의 음성을 듣는 편)을 지속적으로 선택하므로 영성과 도덕성과 의지력이 온전하게 꼴 지어져 하나님의 성품을 이루게 된다는 뜻이다. 그것이 앞이마가 정결하다는 뜻이고, 그런 사람의 앞이마에는 하나님의 인이 쳐 질 것이다.

마지막 성도들이 받아야 할 하나님의 인

마지막 환란의 때가 시작되기 바로 전 하나님의 자녀들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인을 받을 것이다. 그 다음에 네 천사가 바람을 놓을 것이다. 그 표는 인간의 눈으로 읽을 수 없는 것이지만, 멸망의 천사는 그 표를 읽을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구원받을 성도들에게 있는 갈바리의 십자가의 표이기 때문이다. 이 표를 읽은 멸망시키는 천사는 그들을 넘어갈 것이다. 특별히 이 표는 그들이 하나님의 소유임을 보여줄 것인데, 왜냐하면 그들의 성품이 하나님과 똑같이 닮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을 받기 위해 힘을 다해 노력해야 한다. 우리는 죄악적 생애에 결코 만족해서는 안된다. 품성의 모든 결함과 우리들이 하나님의 표준에 이르지 못하게 되는 모든 점 때문에 사단이 우리들을 정복하고 파멸시키기 위하여 들어올 수 있는 문이 열린다는 것과, 더욱이 우리의 모든 실패와 결함이 유혹자와 그의 대리자들에게 그리스도를 비난할 기회를 준다는 것은 악을 정복하는 일에 더 큰 열성과 열심을 갖도록 그리스도인들을 분기시켜야 할 사상이다. 우리는 죄를 극복하는 일에 영혼의 모든 힘을 기울여야 하고, 우리 스스로 할 수 없는 일을 하기 위한 힘을 얻고자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흰옷을 입고 예수님과 함께 걸어갈 자들에게는 아무런 죄도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 더러운 옷은 제거되어야 하고, 그리스도의 의의 옷은 우리에게 입혀져야 한다. 회개와 믿음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준수할 수 있고, 그분 앞에 흠 없이 나타날 수 있다. 하나님의 인을 받을 자들은 오늘날 그들의 심령을 괴롭게 하고, 그들의 죄를 고백하고, 그들의 중보자이신 예수님을 통한 용서를 열렬히 간구하고 있다. 그들은 그분을 주목하고, 그들의 소망과 그들의 믿음은 그분께 집중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 더러운 옷을 벗기고 아름다운 옷을 입히며, 정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라는 명령이 내릴 때, 그들은 그들의 구원에 대한 모든 영광을 그분께 돌릴 준비가 이루어져 있을 것이다.

5부 - 하나님의 인을 받는 사람들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요한 계시록 14:1,4,5).

요한계시록 14장에는 하나님의 인을 받는 사람들에 대한 묘사가 나온다. 그런데 이 성경절은 마지막에 하나님의 인을 받고 어린 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시온산에 설 사람들의 이마에는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고 말한다. 이 말의 뜻이 무엇일까? 앞서도 언급했지만, 이마에 어린 양과 아버지의 이름이 있다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과 똑같이 닮은 성품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곧 “신의 성품”에 참여한 자들이라는 것이다. 마지막 하나님의 인을 받을 사람들은 어떤 자들인가 함께 생각해보자.

인을 받는 자들의 태도

스갸랴 3장에서 여호수아가 사자 앞에서 탄원하고 있었던 것처럼, 하나님의 남은 무리는 마음의 통회와 열렬한 기도로써 그들의 중보자 예수님을 통한 용서와 구원을 위하여 탄원할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생애의 죄악을 충분히 깨닫고 있으며, 그들의 연약함과 무가치함을 안다. 그들이 자신들을 바라볼 때 그들은 절망할 수밖에 없다. 그들의 유일한 희망은 하나님의 자비에 있고, 그들의 유일한 방어는 기도이다.

시험하는 자(사단)는 마치 여호수아를 대적하기 위하여 곁에 서 있던 것처럼 그들을 비난하기 위하여 곁에 서 있다. 그는 그들의 더러운 옷, 그들의 결점 많은 품성을 지적한다. 그(사단)는 그들의 구속주의 이름을 더럽혀 온 그들의 약점과 어리석음, 그들의 배은망덕의 죄, 그리스도를 닮지 않은 그들의 모습을 제시한다. 그는, 그들의 상황이 절망적이며, 더러워진 그들의 오점은 결코 정결해질 수 없다는 생각으로 영혼을 위협하고자 노력한다. 그는 그들의 믿음을 파괴해 버림으로 그들이 그의 유혹에 굴복하고 하나님께 대한 충성을 버리고 짐승의 표를 받게 하고자 희망한다. 사단은, 그들에 대한 비난을 하나님 앞에 강력하게 제시하고, 그들이 죄 때문에 하나님의 보호를 잃어버렸다고 역설하고, 그들을 범법자로 죽일 수 있는 권리를 주장한다. 그는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은총에서 제외된 것과 꼭 마찬가지로 그들이 그렇게 되기에 합당하다고 선언한다. 그는 말한다. “이 사람들이 하늘에서 나의 위치와 나와 연합했던 천사들의 위치를 차지할 자들인가? 그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노라고 공언하고 있는 동안, 그 계명의 조항들을 지켜왔는가? 그들은 하나님보다 자아를 더 사랑해 오지 않았는가? 그들은 그분을 섬기는 것보다 그들 자신의 유익에 더 큰 비중을 두어 오지 않았는가? 그들은 세상에 속한 것들을 사랑해 오지 않았는가? 그들의 생애를 특징지어 온 죄들을 바라보라. 그들의 어리석음, 그들의 악의, 피차간의 증오를 쳐다보라.”

사실 하나님의 백성은 많은 점에서 매우 결함이 많았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죄를 지었을지라도 그들 스스로를 악의 지배에 맡기지는 않았다. 그들은 그들의 죄를 슬퍼하고 버리며, 겸손하고 통회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찾았다. 거룩한 중보자께서는 그런 사람들을 위하여 탄원하신다. 그들의 배은망덕 때문에 가장 크게 모욕을 받아 오신 분, 그들의 죄와 그들의 회개까지도 아시는 분께서는, “사단아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내가 이 영혼들을 위하여 나의 생명을 버렸다! 그들은 죄를 슬퍼하고 회개하여 죄를 버렸으며 나의 피로 그들의 모든 죄는 정결하게 함을 받았다. 나는 그들을 나의 손바닥에 새겼다!”고 말씀하신다.

사단의 공격은 강하며 그의 기만은 무섭다. 그러나 주님의 눈은 그분의 백성을 주시한다. 그들의 고통은 크며, 풀무의 불꽃은 바야흐로 그들을 태워 버릴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불 속에서 연단한 금처럼 나오게 하실 것이다. 그리스도의 형상을 완전하게 반사하기 위하여 그들의 세속적 마음은 제거되어야 한다. 불신은 극복되고, 믿음과 소망과 인내가 계발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백성이 그분 앞에서 그들의 심령을 괴롭게 하고 마음의 순결을 위하여 탄원하고 있을 때, 그들에게서 “더러운 옷을 벗기라”는 명령이 내리고, “내가 네 죄과를 제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슥 3:4)고 용기를 주는 말이 발하여 진다. 흠 없는 그리스도의 의의 옷은 시험과 유혹을 받으면서도 성실한 하나님의 백성에게 입혀진다. 사단의 고소를 받고 세상에서 멸시를 받은 남은 자들은 세상의 부패에 의하여 더 이상 결코 더럽혀지지 않을 영광스러운 옷을 입게 된다. 그들의 이름은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되어, 각 시대의 충성된 자들과 함께 그것에 보존된다. 그들은 기만자의 간계를 저항해 왔고, 마지막 용의 포효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충성을 버리지 않았다. 이제 그들은 유혹자의 간계에서 영원히 안전해진다. 그들의 죄는 죄의 창시자에게로 옮겨진다. 그리고 남은 자들은 용서받고 가납되었을 뿐 아니라 영광스럽게 된다. “정한 관”이 그들의 머리에 씌워진다. 그들은 왕들과 같이 되고 하나님께 대하여 제사장이 된다. 사단이 그의 비난을 강요하고 이 무리를 파멸시키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는 동안 보이지 않는 거룩한 천사들은 이곳 저곳으로 왕래하면서 그들에게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인을 치고 있다. 그리하여 그들의 이마에 아버지의 이름이 쓰여진(하나님의 인을 받은) 이 사람들은 어린 양과 함께 시온산 위에 서는 자들이 된다.

짐승의 표를 받는 자와 하나님의 표를 받는 자

A. 짐승의 표 :

“저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빈궁한 자나 자유한 자나 자유한 자나 종들로 그 오른 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요한 계시록 13장 16절).

계시록 13장에는 짐승과 짐승의 표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특별히 16절에는 짐승의 표를 받는 것에 대한 묘사가 나오는데, 짐승의 표도 이마에 받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인을 앞이마에 받듯이 사단의 백성의 표인 짐승의 표도 이마에 받는다. 짐승의 표를 이마에 받는다는 뜻이 무엇일까? 짐승의 표를 받는 사람들은 그들의 의지를 지속적으로 사단의 충동에 맡겨왔고, 뇌의 전두엽을 통해서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음성을 계속 거절해옴으로 말미암아 양심이 화인을 맞을 정도까지 굳어져 사단의 성격을 그대로 닮게 되었기 때문에 짐승의 표를 받게 된다. 그들은 너무나 오래 하나님의 성령을 거절하고 하나님께 반역하였으므로 하나님의 뜻과 진리에 대하여 눈이 멀게 되어 자신의 죄된 행위에 대한 자각이 거의 없어졌다. 그리하여 그들은 나중에 하나님의 인을 받은 백성들을 핍박하는 자들이 된다. 또한 짐승의 표에 대하여 한가지 더 언급하자면, 짐승의 표와 그것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의 표가 되는, 하나님의 인이 밝혀져 있는 하나님의 계명 대신 사단이 창안해 낸 사단의 법을 지키고 따르는 것을 말한다. 모든 면에서 자신의 의지를 하나님의 성령께 굴복하고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 동행하는 생활을 살지 않은 사람, 자신의 성향과 자신의 욕구와 욕망에 따라 마음대로 살은 사람, 성령의 음성을 거절하고 작은 일일지라도 매번 자신의 의지와 마음을 따라 행동한 사람, 마음 속에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우상을 가지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사람, 이런 습관들을 계속하는 사람들은 마지막에 자연히 사단의 표인 짐승의 표를 받게 될 것이다.

B. 하나님의 표 :

“이르시되 너는 예루살렘 성읍 중에 순행하여 그 가운데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인하여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하라 하시고...”(에스겔 9장 4절).

“하나님의 인”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의 인이란 하나님의 인정의 표로서 사단의 모든 공격과 시험을 통과하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모든 것을 이기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긴 마지막 하나님의 증인들에게 쳐지는 표이다. 에스겔 9장에는 백성들의 이마에 표, 즉 하나님의 인을 치는 일에 대한 상징적인 묘사가 나온다. 특히 에스겔 9장 1절로부터 연구해 보면, 인치는 천사가 하나님의 백성들의 이마에 표를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어떤 사람들에게 인을 치는가(표를 하는가)를 자세히 읽어보면, 그것은 바로 예루살렘 중에 행하여지는 가증한 일을 인하여 탄식하는 사람들의 이마에 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예루살렘에서 행하여지는 가증한 일로 인하여 운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 그것은 자신의 죄악과 자신의 부족과 허물을 인하여 울 뿐 아니라, 이 땅에 가득한 죄악상과 특히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공언하며 말하는 그리스도인들과 교회에조차 가득 차 있는 죄악을 보고 안타까워 하며 탄식하며 슬퍼 운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인을 받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땅에서 자행되는 가증한 일 때문에 탄식하며 주께 부르짖는다. 그들은 눈물로써 악한 자들에게 하나님의 계명을 짓밟고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위험에 대하여 경고한다. 또한 말할 수 없는 슬픔으로 그들 자신의 범죄 때문에 주님 앞에 스스로를 낮춘다. 악인들은 그들의 슬픔을 조롱하고, 그들의 호소를 비웃고, 그들이 그들의 약점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하여 냉소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의 번민과 굴욕은 그들이 죄의 결과로 잃어버린 힘과 품성의 고결함을 다시 찾고 있다는 분명한 증거이다. 그들이 죄의 심히 죄스러움을 그처럼 분명하게 깨닫는 것은 그들이 그리스도께 더욱 가까이 이끌려 가고 있고, 그들의 눈이 그분의 완전한 순결을 주목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통회와 겸손은, 슬피 탄식할 이유를 깨닫지 못하고, 그리스도의 겸손을 비웃고,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범하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부족을 모르고 자신이 완전한 듯이 생각하는 자들의 자부심이 강하고 거만한 정신보다 하나님 보시기에는 훨씬 더 가납될 만한 일이다. 마음의 온유와 겸손은 힘과 승리를 얻는 조건들이다. 영광의 면류관은 십자가의 발 아래 엎드리는 자들을 기다리고 있다. “애통하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성실한 자들, 기도하고 있는 자들은 하나님 안에 감싸여 있다. 그들 스스로는 그들이 얼마나 안전하게 보호받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마지막 하나님의 백성들을 핍박하는 환란이 올 때 사단의 충동을 받은 이 세상의 통치자들은 그들을 파멸시키기 위하여 애를 쓸 것이다. 그러나 도단에 있던 엘리사의 종의 눈이 열렸던 것처럼 그들의 눈이 열릴 수만 있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천사들이 그들 주위에 진을 치고, 그들의 광채와 영광으로 흑암의 군대를 저지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자신의 부족을 인하여 하나님을 슬프시게 한 죄를 깨달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죄를 미워하여 버리고, 어떻게 하면 아버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 하는 것이 그들의 삶의 목적이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랑을 이웃과 형제들에게 나누어 주며 하나님의 뜻과 진리를 전하는 일에 온 힘을 다하게 된다. 그들은 그들의 소망을 이 세상에 두지 않고 저 영원한 본향인 하늘에 두며, 그들의 세속적인 모든 욕망을 포기하고, 감사하는 가운데 하나님과 매일 동행하는 경험을 하는 사람들이다. 그리하여 그들의 이마에는 사람이 식별할 수 없는 “하나님의 표”가 쳐지고 그들은 “하나님의 인”을 받은 사람들이 되는 것이다. 성경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마지막에 나타날 14만 4천이 곧 이런 사람들이다. 그들은 앞으로 하늘에서 땅에서 구속받은 14만 4천명 외에는 아무도 배울 수 없는 노래를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부를 것이다. 그 노래는 자신들을 기이한 섭리로 인도하신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에 대한 간증과 경험의 노래이므로 모세와 어린 양의 노래가 되는 것이다. “이 사람들은 …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계 14:4, 5).

이제 스가랴서 3장에 나오는 사자의 말들은 완전히 성취된다. “대제사장 여호수아야 너와 네 앞에 앉은 네 동료들은 내 말을 들을 것이니라 이들은 예표의 사람이라 내가 내 종 순을 나게 하리라”(슥 3:8).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백성의 구속주요 구원자로 계시된다. 이제 진실로 남은 자는 “예표의 사람”이다. 그들의 순례의 눈물과 굴욕이 하나님과 어린 양 앞에서 기쁨과 영광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날에 여호와의 싹이 아름답고 영화로울 것이요 그 땅의 소산은 이스라엘의 피난한 자를 위하여 영화롭고 아름다울 것이며 시온에 남아 있는 자,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는 자 곧 예루살렘에 있어 생존한 자 중 녹명된 모든 사람은 거룩하다 칭함을 얻으리니”(사 4:2, 3).

** 예수께서는 중보자와 옹호자로서 오늘도 당신의 백성들을 향해 호소하시며 의의 태양이 환하게 빛을 비추는 위를 향하여 한걸음 한걸음씩 나를 따라 오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기꺼이 인도함을 받으려는 모든 이들을 인도하신다. 우리는 “오늘”이라고 부르는 이 날에 마음을 강팍하게 하지 말고 성령의 음성과 감화에 굴복해야 한다. 우리가 아무리 부족할 지라도 우리의 죄를 회개하기만 하면, 그리고 성령께 굴복하기만 하면, 그리고 성령의 생명의 법을 따라 순종의 길을 계속 걸어간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어여삐 보시며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를 통한 속죄를 가납하시고 우리에게 의의 옷을 입혀주시며 우리의 이마에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인을 쳐주실 것이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귀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하여 보내주신 하나님과 우리를 위하여 귀한 몸을 속죄제물로 드리시고 오늘도 우리를 위하여 중보하시는 예수님께 감사의 찬양을 드리며, 우리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위하여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간구하고 역사하시는 성령님께 우리는 매일 감사를 드리자! 앞이마에 하나님의 인을 받는 모든 독자들이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