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마음의 창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시 139:1~2).

때때로 우리의 마음 속은 물결이 일어나 넘실거리듯이, 파도가 휘몰아치며 밀려오듯이, 아니면 많은 색깔의 실타래가 엉켜 있듯이 여러 가지 감정과 생각들로 엉킬 때가 있다. 우리 스스로도 어떻게 할 수 없는, 또 우리 스스로 다스릴 수도 없는, 그리고 또 우리 스스로 해결할 수 조차 없는 생각과 상념과 감정과 사고들로 가득 찰 때가... 그럴 때에 우리는 엇갈리는 감정과 정서 속에서, 혹은 갈등과 고뇌 속에서, 또는 비껴가는 상념과 우리를 휩싸는 외로움과 허전함 속에서 마음으로 혼자 뇌까릴 때가 있다. 누가 나의 마음을 알까, 누가 나의 마음을 알아줄 것인가, 아니, 누가 나를 이런 회오리바람 같은 생각의 소용돌이 속에서 건져내어 줄 것인가 하고...

그런데 우리 인생들에게는 큰 소망이 되는 사실이 하나 있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한 존재, 어떤 한 분이 우리를 알고 계시다는 사실이다. 아니, 알고 계실 뿐만 아니라 우리 각 개인들의 모든 감정과 고뇌와 갈등을 해결하실 수 있다는 것이다. 세상에서 누군가가 나를, 나의 마음을 잘 알고 있다는 생각은, 아니, 헤어나올 수 없는 미로 같은 복잡한 감정과 고뇌 속에서 나를 구원해 내실 수 있다는 사실은 우리를 감격하고도 남음이 있게 한다.

마음의 네 가지 창

인간의 다양한 관점들을 이해하기 위해 의사소통 과정 설명에 자주 쓰이는 “조하리의 창”(window of johari)은 인간의 마음의 창을 4가지로 구분하고 있다(“조하리”란 고안자인 Joe Luft와 Hary Ingham의 이름을 결합한 것으로, 심리학에서 일명 “마음의 4가지 창”, 또는 “조하리의 창”이라고 불리어 지고 있는 용어이다).

이 마음의 네 가지 창 중, 첫 번째 창은 “공개된 자아”(open self)라고 불리는데, 이것은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이 다같이 볼 수 있는 부분으로, 외모, 이름, 그 사람의 전반적인 배경, 피상적인 정보 등을 말한다. 두 번째 창은 “숨겨진 자아”(hidden self)로, 자신은 보지만 다른 사람들은 보지 못하거나 볼 수 없는 부분을 말한다. 이것은 오직 자신만이 알고 있는 사적 세계로, 은밀한 생각이나 야망 또는 욕구 같은 것들이 여기에 해당된다. 세 번째 창은 “눈먼 자아”(blind self)로, 다른 사람들은 보지만 우리 자신은 보지 못하는 부분이다. 이것은 다른 사람들이 우리 안에서 볼 수 있는 것들을 우리에게 얼마만큼 알려주느냐에 따라 우리 스스로가 자신에 대해 모르고 있던 부분들을 조금씩 알아가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마지막 네 번째 창은 “미지의 자아”(unknown self)로, 우리는 물론, 다른 누구도 볼 수 없는 부분을 말한다. 예를 들어, 우리 자신들이 그런 행동을 하게끔 만드는 잊혀진 경험들이라든가, 가슴 속 깊이 묻혀있는 동기들, 잠재적으로 어떤 것을 두려워하고 자꾸 피하게 만드는 이전에 받은 깊은 상처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그런데 네 번 째 창인 이 미지의 자아를 조정하는 것이 가장 어렵다고 한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들도, 또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도 쉽게 볼 수 없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우리 스스로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모를 때가 많다. 아니,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려고 하지도 않거나 생각할 여유조차 없이 살아가고 있다. 그뿐 아니라 우리는 어떻게 우리 자신들을 다스려야 하는지도 몰라 당황하게 될 때가 많다. 그리고 우리는 겉으로 드러난 모습만이 우리의 진정한 자아인줄 안다. 그러나 인간은 때로 자기 스스로도 알 수 없는 여러 가지 자아를 가진 복잡한 존재가 되기도 한다.

이렇게 단순하지 않은 마음을 가진 우리 인간들의 생각을, 그리고 우리 스스로도 모르는 깊은 내면의 세계까지도 알고 계시며, 헤아리시며, 사랑하시고 치료하시는 한 분이 우리에게 계시다는 것, “이 사람은 거기서 났다”(시 87:6)하시며 우리가 어떤 배경에서 태어났는지조차 알고 이해해주시는 한 분이 계시다는 것은 우리를 흥분하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우리의 마음이 힘들고 헤어나오기 힘든 어떤 감정들로 휘저어 질 때에도 우리 마음 속에 역사하셔서 우리의 마음을 평정하게 하시는 한 분이 계시다는 것은...

의지의 힘

인간의 육체도 그러하지만 인간의 마음은 참으로 미묘하다. 그래서 시인은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하심이라”(시 139:14)고 부르짖었나 보다. 우리의 마음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속에는 때로 여러 가지 감정들이 들끓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랑, 미움, 환희, 슬픔, 동정, 원망, 그리고 희망, 실망, 욕심, 섭섭함 등... 이런 모든 것들은 한데 엉기어 있다가 어떤 상황이 되면 서로 먼저 튀어나오려고 애를 쓰는 것 같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늘 마음과 감정을 잘 다스려야 한다. 신앙과 믿음의 힘으로, 아니 하늘에서 오는 기적과 같은 능력으로... 그런데 때때로 신앙이 모자라거나 인격이나 교양이 없는 사람들이 그만 엉망이 된 감정들을 마구 드러내어 주위를 어둡고 슬프게 한다. 마음을 다스린다는 것은 마치 카드를 뽑아내듯이 우리의 의지로 알맞은 감정을 잘 골라내어 상황에 맞게 골고루 분배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적당하고 올바른 의지를 갖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생활과 믿음의 승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인간의 의지는 타락하고 왜곡되어 있어 웬만큼의 조용한 시간을 내어 영혼의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한 올바른 결정을 내리고 올바르게 사용될 수가 없다. 아니, 늘 겸손하고 잠잠한 심령을 유지함으로 성령의 세미한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상태에 자신을 두지 않는 한, 또 무엇을 어떻게 말씀하시든지 따르기도 하고 포기하기도 하려는 온전히 굴복된 마음 상태를 가지지 않는 한, 우리는 올바른 의지를 가지기 어렵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마음의 힘”, 곧 “의지”를 하나님께 바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께 의지를 바치는 것은 희생이 요구된다. 그러나 그것은 더욱 고상한 것을 위하여 저속한 것을, 신령한 것을 위하여 세속적인 것을, 영원한 것을 위하여 사라져 없어질 것을 버리는 희생이다. 우리는 우리의 의지를, 순결하고 깨끗하게 된 상태로 다시 돌려 받기 위하여 그것을 하나님께 바쳐야 하며, 또 그분께서 우리를 통하여 당신의 사랑과 능력을 아낌없이 쏟아 부으실 수 있도록 그것을 그분과 연결시켜 놓아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의 감정에 의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자신이 잘하고 있다는 도취감 속에서, 또는 이상한 신앙의 황홀경 속에 빠져서는 진정한 자아를 보지 못하고 마음 속 깊이 조용히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성령의 목소리를 따라가기보다는 자신의 감정을 따라 신앙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나님과 올바른 채널을 유지하지 않은 채... 우리는 언제나 우리의 뜻이, 우리의 의지가 하나님의 뜻과 같은 편에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채널과 우리의 채널이 항상 함께 맞아야, 우리 마음의 통로가 항상 하나님께 올바르게 연결되어 있어야 하늘에서 오는 힘을 받아 진정으로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 한 분만이

어떤 종교 저술가는 말했다. 매일의 생활에서 마음을 다스린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 순교하는 것보다 어렵다고... 우리는 스스로 우리 마음을 다스릴 수 없다. 우리 스스로 마음에 일어나는 격정을 다스릴 수 없다. 우리의 마음을 아시고 우리에게 힘을 주시는 어떤 한 분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이 일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아무도 볼 수 없는 네 가지 마음의 창을 동시에 볼 수 있는 어떤 분, 우리의 모습 전체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누군가의 도움이 없이는... 그는 우리의 모습 그대로를 용납해 줄 만큼 사랑이 많아야 하며, 우리 스스로가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하고, 바꿀 수 없는 것을 바꿀 수 있도록 도와줄 만큼 능력이 있어야 한다. 그분은 바로 하나님이시다. 하나님만이 우리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계시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유일한 분이시다. 그분만이 과거에 우리가 어떤 사람이었으며, 현재 어떤 사람이고, 미래에는 또 어떤 사람이 될지 모두 다 알고 계신다.

이런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너의 마음을 나에게 달라고, 너의 마음의 모든 창을 내게로 열어 놓으라고... 그리고 너의 마음의 힘, 의지를 나에게 달라고... 그러면 내가 너의 마음의 물결을 평안히 재워놓겠다고... 그러면 너의 마음이 언제나 평온하고 잔잔할 것이라고...

권두언


강병국 목사

인생은 도장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도장을 치신다는 것은 심판하여 갈라 내시는 일을 의미한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소유들을 내 것이라고 인을 치신다는 의미이지요.

왜 이런 말을 하느냐구요? 성경 말씀이 인에 대하여 많은 말씀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인을 받은 자들만 구원 얻게 될 것이라고 성경이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 인치는 일에 대한 말씀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일일까요? 그렇고 말고요!

그래서 저희는 지난 월간지들에서 인침을 받는 경험이 과연 어떠한 경험을 말하는 것인지에 대하여 여러 번 설명하여 온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 호에서는 조금 다른 면에서의 인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요한 계시록이 제시하고 있는 일곱 인에 관한 예언입니다. 이 일곱 인의 예언은 예수께서 승천하신 이후부터 전개되고 있는 일곱 시대의 교회들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의 국면을 다루고 있는 예언입니다. 그래서 인으로 치시고 당신의 소유로 선택하시는 하나님의 사업을 표현하기 위하여 일곱 인이라는 예언을 기록해 주신 것입니다. 흘러가는 각 시대의 교회 속에서 하나님의 참 백성들을 각각 골라내어 인치시는 사업 말입니다.

이 일곱 인에 대한 기록들을 이해하게 되면 우리가 현재 어느 시점에 와 있는지 그 좌표를 알아 보게 됩니다. 우리가 지금 하나님의 심판의 국면에서 어느 지점까지 와 있는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실재적으로 세상 역사 속에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을 따라 가면서 우리가 지금 어디에 와 있는지를 실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깨어 나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그들이 가는 길을 정확하게 비추어 주시기 위하여 예언을 주신 것입니다.

이번 호에 게재된 가정, 건강의 기사들, 특히 신앙의 기사인 일곱 인에 대한 예언들을 함께 연구하시면서 하나님의 크신 축복과 은혜를 나누어 받게 되시기를 간절하게 바랍니다.

1부 - 군중 속에서 홀로 서는 신앙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립보서 2:5).

 

새우에게서 배우는 교훈

최근에 나는 성경적인 서열로 따지면 최 하위급에 속한 한 작은 바다 생물에 대해서 아주 흥미 있는 사실 몇 가지를 알게 되었다. 구약성경에서 부정한 생물로 취급되는 새우는 아주 기막힌 방법으로 파충류들이 껍질을 벗는 탈피(脫皮) 과정을 통해 일년에 6-8번 정도 껍질을 간다고 한다. 그 과정을 살펴보면 오래된 껍질아래서 점차적으로 새 옷이 생겨나기 시작하다가 때가 되면 바위에 몸을 문질러 겉에 입고 있는 오래된 껍질을 느슨하게 하여 완전히 벗겨내고 그 아래 있는 새롭게 빛나는 옷을 들어내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탈피하는 매 과정마다 또 다른 한가지 재미있는 현상이 일어난다. 모든 새우들은 그들에게 부여된 어떤 타고난 원초적 본능에 따라, 자기들 머리의 특정한 부분에 작은 모래 알갱이 하나씩을 조심성 있게 붙여 놓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매 번의 탈피과정마다 이 작은 모래 알갱이가 없어지므로 새로운 모래 알갱이를 그 자리에 조심스럽게 가져다 놓는 것이다. 그런데 이 작은 모래 알갱이는 아주 특별한 기능을 담당하기 때문에, 과학자들은 이것을 가리켜 “위치석” (status stones) 으로 호칭하고 있다. 이 작은 돌맹이는 내구력이 강한 이 바다 생물의 생존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인데, 왜냐하면 그 머리 위에 붙여 놓여진 작은 모래 알갱이 없이는 이 새우들이 물속에서 항상 방향감각을 잃고 갈팡질팡하게 되기 때문이다. 불어나는 바닷 물결과 파도로 인해 새우들이 거꾸로 뒤집어지는데, 그들의 머리 위에 붙어있는 모래 알갱이에 작용되는 중력의 느낌에 의지해서만 이 새우들이 자기들이 거꾸로 되 있는지 바로 되 있는지 분간할 수 있는 것이다.

정말이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위대하신 사랑과 지혜로, 이 천한 새우로 하여금 그들의 거친 거주 환경 속에서도 품위 있는 균형을 유지하도록 해주는 이러한 장치를 제공해 주신 것이다.

어떤 실험

새우들이 이러한 사실을 나에게 직접 알려준 것이 아닌데 어떻게 그런 기막힌 정보를 알게 되었는지 여러분들이 궁금해 할지 모르겠다. 사실 몇 년 전에 한 해양 생물학자가 새우들 여러 마리를 큰 어항에 풀어 넣고 실험을 했다. 이 과학자가 그 어항 아래 바닥에 모래 대신에 잔잔한 쇠가루들을 놓아 두었는데, 탈피(脫皮) 시기가 왔을 때, 모든 새우들이 자기들의 껍질을 벗은 후 머리 위에다 모래 알갱이 대신 잔잔한 쇠 알갱이를 붙였다.

그 후 이 생물학자가 어항 위에 아주 강도가 센 전자 자석을 설치했을 때, 즉시로 이 새우들이 거꾸로 뒤집어진 체로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유유자적하게 수영하게 되었다. 새우들의 머리에 붙어 있는 쇠가루 알갱이에 가해진 자석의 힘이 중력의 힘보다 강해서 이 새우들이 거꾸로 뒤집어 진 것을 바로 된 것으로 믿은 것이다. 그리고 좀더 극적인 실험을 위해, 이 과학자는 바다에 있는 다른 새우 한 마리를 이 어항으로 가져 왔는데, 당연히 이 신참 새우는 다른 새우들과는 달리 올바르게 똑바로 자세를 유지하고 휘저으며 수영하고 있었다.

어항 속으로 주입된 이 괴짜 새우 한 마리의 출현 때문에 새우들간에 생긴 경악감을 한번 상상해 보라! 분명히 그 뒤숭숭해진 물속에서 이 신참내기 새우에 대한 심술궂은 속삭임들이 여기 저기서 많이 있었을 가능성이 많다. “이 멍청이 녀석, 도대체 자기가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우리 새우들로부터 관심 끌려고 별 짓 다하네! 이 별난 녀석이 자기가 우리에게 더 나은 방법으로 수영하는 것을 보여준다고 상상하는 모양인데... 이 친구 어쩌자고 거꾸로 수영하고 있는 거지?” 라는 속삭임들이 분분했을 것이다.

여기서 분명한 사실은, 쇠가루 알갱이를 머리에 붙힌, 뒤집어진 채로 헤엄치는 이 새우 무리들이, 새로 들어온 신참내기가 사실은 바른 자세를 유지하며 수영하고 있는 유일한 새우라는 사실을 전혀 감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새우들은 그들의 몸의 바른 위치를 감지하기 위해 두 가지 것들 (위치석에 가해지는 중력의 느낌과 그들 주위에 있는 다수의 무리들이 어떻게 하고 있는지) 에 의존하고 있었던 것인데, 지금 그들의 위치석 (status stones)이 조작되었기 때문에 이 두 가지 기준에 의해 잘못된 거짓을 믿도록 현혹당하고 만 것이다.

감정이나 다수에 의존하는 사람들

위의 실험의 이야기를 생각하면 할 수록, 나는 세상의 인생길을 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어항에 있는 새우들과 같은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강력한 유혹의 자석들이 우리들 주위에 산재해 있어 우리로 하여금 거꾸로 뒤집어지도록 하여 영적인 균형을 상실하도록 방해하고 있음을 본다. 자신의 감정이나 다수의 의견에 의존하는 사람들이 외부로부터 가해지는 영향력들에 끌려 아주 쉽게 뒤집혀 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 주위에 있는 다른 많은 사람들이 똑같이 행하고 있다는 것에 안전감을 느끼며, 그들은 곧 모든 것들을 자신의 왜곡된 안목으로 보기 시작한다. 그래서 주위의 모든 표시판들을 더 쉽게 인식하기 위해 자신의 눈에 맞게 거꾸로 바꾸어 달기 시작하며, 자기 자신들이 올바르고 균형이 잡힌 안목을 가지고 있다고 굳게 확신하고, 자기들과 다른 의견을 가진 이는 무조건 잘못된 것으로 여기게 된다. 결국 그들은 오류를 정도로, 정도를 오류로 보게 되며, 그들의 지각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 누구도 즉시 광신자요 비판적인 말썽장이로 그들에 의해 낙인 찍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한 중요한 진리로 우리를 인도하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는 우리의 감정이나 다수의 행동에 기준하여 매사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진리가 어디에 있는지 우리에게 말해줄 우리 밖에 있는 그 무엇이 필요하다. 우리의 충동적인 욕구들은 어항 위에 놓여졌던 자석의 자력만큼이나 사실적이며, 그것들은 우리를 종종 잘못된 방향으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의 많은 친구들이 아주 덕망이 있고 종교적일지 모르지만, 그들의 “위치석”이 우리 인간의 원수에 의해 교묘한 방법으로 교란된 부정확한 지도체계와 결부된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오직 한가지의 진실하고 확실한 “위치석”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성경 말씀이다. 그 성경 말씀이 우리의 마음 중심에 자리잡고 있을 때, 그것은 항상 신뢰 할수 있는 진리의 표준을 우리에게 제공해 준다. 모든 감정의 충동적 욕구들이 그 하나님 말씀에 의해 검사되어져야 하며, 말과 행동과 생각들을 포함한 총체적인 생활 양식이 그 중요한 방향설정 통제 센터의 관리하에 늘 놓여 져야 하는 것이다. 오늘날 하나님의 뜻으로부터 벗어난 대부분의 탈선들이 바로 인간들이 생각 없이 감정이나 다수의 행습을 따르는 것에서 기인했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다.

원수의 전략

우리는 우리의 원수 마귀가 극도의 전문성을 가지고 이용하는 두 가지 위력적인 무기에 대해 고찰해보는 것이 중요하다. 이 두 가지는 다 우리 인간의 아주 깊은 정신적 필요성에서 기인한다. 우리가 쉽게 간과하는 있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우리의 영적 원수인 마귀는 (오늘날 개업하고 있는 가장 실력있는 그 어떤 정신 의학자보다 훨씬 오래인) 6000년 가까이 인간의 본성을 연구해 왔다는 사실이다. 마귀는 또한 우리 인간의 정서적인 약점들을 발견하기 위해 실험을 해 왔으며, 우리가 가장 취약한 순간들에 처해 있을 때 이러한 것들을 이용해 우리를 공격해 왔던 것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마귀의 조작적인 방책들에 희생되어 왔는가? 우리가 살고 있는 육적으로 치우친 사회를 편견없이 주시해보면 이에 대한 해답은 자명하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현 세대가 있기 오래 전에 이것을 벌써 보시고 그의 제자들과 우리들에게 이러한 마귀의 공격의 강도에 대해 경고하셨음을 알게 된다. 그는 말씀하시기를,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마태 7:14) 고 하셨다. 그리고 또한 주님은 다음과 같은 중대한 질문을 하셨다.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눅 18:8) 그리고 계속하여 그분은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눅 17:26) 라고 선언하셨던 것이다.

이 말씀을 상고할 때, 이 세상에 거하는 오직 소수의 무리만이 마지막 시대에 횡행할 기만들로부터 벗어나 구원을 받을 것이 분명하다. 소수의 남은 무리만이 항상 그러했듯이, 자기 자신을 즐겁게 하는 것이나 다수나 그 어떤 개인에 의존하기 보다 올바른 편에 서는 것에 더 관심을 가질 것이라는 말씀이다. 인간 역사의 기록은 일관적으로 다수의 무리에 속하는 안락함의 매력을 과감하게 뿌리치는 소수의 반체제 인사들에 대해 수록하고 있다. 다수의 무리는 결코 진리를 추구하지 않았고, 그들이 원하는 대로 살도록 허용하는 평탄하고 안락하며 편의주의적인 종교만을 구해왔음을 우리는 역사의 장에서 보는 것이다. 이 다수의 무리들에겐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수양된 삶의 양식을 요구하는 교리는 그 어떤 것이든지 모두 나쁜 소식으로 취급되었던 것이다.

2부 - 군중 속에서 홀로 서는 신앙


진리를 선포하는 것이 쉬운 일인가?

앞의 기사에서 말한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오늘날 많은 교회들에서 한쪽으로 치우친 복음만이 선포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에 의해 잘 받아들여지고 고맙게 여겨지는 것들에 대해 말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오직 믿음과 수용만을 요구하는 값싼 은혜와 칭의에 대한 편안한 진리를 선포하기를 주저할 하나님의 사자들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이 복음에는 또 다른 측면이 있다. 그것은 믿음의 열매와 착한 행실을 요구하는 측면인데, 이것이 바로 성화인 것이다. 이 성화는 순종과 모든 삶 가운데 그리스도와 같은 행실이 있어야 함을 말하고 있다. 이 성화가 행함과 순종을 강조하고 있기에, 오늘날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그다지 인기를 얻지 못하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한 측면이 되고 있는 것이다.

만일 이러한 복음을 진리 그대로 꾸미지 않고 설교하면 조소와 거부 반응의 대상이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곧바르게 설교하기를 겁내는 목사들이 있지 않는가? 그 목사들은 다른 충실한 주의 파수꾼들이 이러한 설교를 함으로써 율법주의적이고 정죄적이라는 공격을 당하는 것을 보고 위축되지 않았는가? 당신 자신의 관찰에 근거해서 이러한 질문에 당신은 답할 수 있으리라. 선지자 요나의 예는 있는 사실을 그대로 이야기해 주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극적으로 증거해 주고 있다. 요나에게 할당된 임무는 그 누구도 환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온갖 색깔의 종류의 죄를 범하고 있는 죄인들 앞에 서서 예수님께서 하신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는 최후 통첩을 전하는 것이 어떻게 쉬운 일일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대변자인 한 목사로서 나는 말할 때, 마약하는 이들과 술 중독자들과 매춘부들에게 연민의 정을 느끼면서, 그들에게 죄지음을 당장 중단하라는 요구를 완화시키고 싶은 유혹을 아주 심하게 받을 때가 많다. 우리는 그런 경우에 그들로 하여금 마음 편안하게 해주고 싶고, 그들이 유지하고 있는 생활 방식을 즉시 바꾸어야 한다는 부담으로 낙담시키고 싶지 않아진다. 그리고 어떻게 해서든지 이러한 육적인 본성을 계속 조금만이라도 용납하여 그들에게 좀더 편안함을 주는 종교로 만들고자 노력하기 쉽다.

두 가지 선택

이렇게 인간적인 생각이 들 때, 우리는 한가지 질문을 해 볼 필요가 있다. 그 어떤 정도로든 계속 죄를 범하는 것을 승인하는 참된 종교가 세상에 어디 있는가? 성경 말씀 전체를 통해 우리가 짓는 죄의 양만을 줄이면 된다는 사상이 어디에 있는가? 용서하고 개심시키는 그리스도의 은혜가 우리가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짓는 죄까지 덮어 주실 수 있는가? 바울 사도는 다음과 같이 선포하고 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갈라디아 5:17).

만일 죄지음에 대해 이 성경 귀절이 충분하게 말하고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로마서 8:13에 나와 있는 바울의 말을 더 상고해 보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바로 그것이다! 우리가 이 중 한가지만을 할 수 있는 것이지 둘 다를 동시에 할 수 없다. 육신대로 살든지 아니면 성령을 따라 사는 것이다. 바울이 말했듯이, “이 둘이 서로 대적하고 있음” 이 자명하고, 이 두가지 세력사이에 권위의 공유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육체의 소욕을 억제하든지 아니면 그것을 용납하든지 해야 한다. 그 중 어느 것을 선택할 것인가? 둘을 동시에 할 수는 없다.

그러면 이제 사람들이 다수를 따르는 경향에 대해 내린 우리의 논지로 돌아가 보자. 우리는 역사 중 다수의 무리가 통상적으로 그릇된 쪽에 서 있었음을 보았다. 그리고 그들이 그들의 죄에 대해서 경고받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경향도 보았다. 우리는 또한 이 다수의 무리에게 그들이 얼마나 잘못되 있는지 말해주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고려해 보았다. 이러한 사실들을 돌아볼 때, 예수님의 다음 말씀을 읽게되는 것이 참으로 적절하게 생각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 (눅 16:15).

높임을 받는 위험

위에 인용한 누가 복음의 마지막 귀절은 오늘날의 우리 모두를 위한 매우 귀중한 원리를 담고 있다. 예수님 당시, 통상적으로 받아들여 지던 규례라는 명목으로 불의한 행습들을 뻔뻔스럽게 정당화하려던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셨다. 거의 모든 쟁점들에 있어서 다수의 의견이 진리에서 빗나간 쪽에 있음을 예수님은 명백히 지적하고 계신 것이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넓은 길로 들어가는 자가 많음을 그분은 이미 선언하셨는데, 이들의 견해와 관례들이 결국 멸망당하고마는 오류의 편에 서있는 사람들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좁은 길을 가는 소수의 무리와는 대조적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오류적인 견해에 집착해 있는가! 그리고 대다수의 사람 중에서 높임을 받는 그것이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라는 사실이 얼마나 충격적인 말씀인가!

하지만 인간 사회를 움직이고 있는 원리들을 우리가 고찰해 볼 때, 이 예수님의 말씀이 진리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사람들의 의복, 음식물, 유흥 혹은 교육 표준들을 볼 때, 이 세상의 방식과 하나님의 이상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된다. 때때로 우리는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주위에 있는 이방나라들과 같이 될 수 없음에 짜증을 내곤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삶의 보다 훌륭하고 높은 표준을 주셨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많은 이들이 성경 전반을 통해 기술되어 있는, 세상으로부터 분리함으로 영적 순결을 유지하는 거의 금욕주의적인 교리에 대해 경악감을 표시해 왔다. 어찌하여 하나님은 당신의 고대 백성들로 하여금 주위에 있는 이교도 민족들과 섞이고 결혼하는 것을 금하셨는가? 신약의 기자들 역시 영적인 이스라엘로 하여금 세상이라고 불리는 체계로부터 분리하여 거기서 나오라고 반복하여 명하고 있으며, 이렇게 나온 무리들은 “세상”과 반대된 “교회”로 인정되었다. 그래서 “교회”의 원래 희랍어는 “밖으로” 라는 의미의 “ek” 와 “부른다” 라는 의미의 “kalleo” 가 합쳐진 “eklesia” 인데, 이 단어는 “밖으로 불려내어 진 사람들”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소수의 무리들이 넓은 길에 있는 다수의 무리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시는가? 그리고 왜 다수의 무리가 멸망 당함을 선택하는가? 도대체 마귀는 어떠한 방법으로 그러한 다수의 군중으로 하여금 자기의 계획에 동참하도록 끌어 모으는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해답이 바로 다수로부터 분리해 나오라고 외쳐온 복음 기자들과 선지자들의 지속적인 부름에 대한 설명을 제공해 줄 것이다.

민감성의 둔화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이 사악한 마귀의 올무에 넘어간 이유가 여기에 있다. 친교에 관한 마귀의 책략은 바로, 교제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점차적으로 우리가 순응된다는 인정된 심리 법칙에 근거하여 있기 때문이다. 세속적인 생활방식과 말들을 보고 듣는 것이 가져오는 무의식적인 영향은 처음에 거부감을 느꼈던 것들을 우리가 점차적으로 수용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한 노출의 꼴 짓는 영향은 우리의 비축된 도덕력을 무너뜨리고 결국 죄에 대해 융화적인 태도를 가지도록 우리를 이끈다.

이러한 총체적인 책략이 치명적인 이유는 이것이 누룩이 빵 속에서 발효하는 것과 같은 은밀한 과정을 밟기 때문이다. 이런 과정을 거치는 사람은 무감각 중에 주위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자신이 조작 당하고 있음을 한 순간도 감지하지 못한다. 위험신호의 경보가 울리지 않는 가운데, 양심은 죄에 대해 용인하는 방향으로 서서히 굴절되어 가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으로 우리 인간의 영적인 “위치석”이 변질되어 왔다. 성서적인 원칙에서 떠나 다수 의견에 의존하게 되는 점차적인 전환은 서서히 변하는 변화의 완만함으로 인해 아주 미미한 정도의 영적 저항만을 받으며 달성된 것이다.

많은 연구 조사들은 도덕적 민감성을 둔화시키는 환경적인 요소들의 영향아래 우리의 도덕적 표준들이 낮아져 왔음을 드러내고 있다. 신성하지 않은 것들과 가까이 어울리면서 우리가 결코 신성해 질 수 없다. 생각을 계속적으로 가증한 것들에 노출시키면 그 결과를 필히 감수하게 된다. 하나님의 영께서 우리로 하여금 세상의 육적인 것들로부터 분리하도록 촉구한 것은 실수가 아니다. 타락케 하는 말과 음악들을 듣고 미혹하는 죄스러운 장면들을 보고자 하는 건방진 선택들을 고의적으로 계속 한다면, 기도나 성경공부조차도 우리를 그 결과로부터 계속 지켜줄 수 없는 것이다.

느낌을 따르는 잘못된 생각

이 새우의 실험이 보여주는 교훈을 우리가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제 의심할 여지가 없다. 대중을 따르는 것이 결코 안전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이제 결함이 있는 위치석이 불러오는 두 번째의 위험한 결과에 대해서 한번 고찰해 보자. 이 새우들은 그들의 위치석에 작용하는 강력한 외부의 힘으로 인해 생성된 그들의 느낌을 신뢰했다. 하지만 새우들의 머리 위에 놓인 위치석이 변질되었기 때문에, 분명히 이러한 그들의 느낌은 정확하지 못했으며 믿을 수 없는 것이었다.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느낌을 따르는 것이 군중을 따르는 것 이상으로 안전하지 않다. 새우가 자석이 끌어당기는 힘을 확실히 느꼈지만, 그것은 새우로 하여금 틀리게 행동하게 했고 바보스럽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처럼 사단은 우리 모두를 그와 똑같은 상태로 몰고 가기를 즐겨 한다. 그는 이미 대다수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그 어떤 다른 “위치석”을 믿도록 유도해서 이 새우들과 똑같은 지경에 처하도록 했다. 매혹적이고 현란한 이 세상의 강력한 자석을 이용해서 사단은 그 어떤 쾌락적이고 현혹적인 느낌들을 창출했다. 수백 만 명의 사람들이 이러한 기만적인 안전감을 주는 올가미에 빠져있으며, 그 속에서 터무니없는 자만심과 안전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최면에 걸려 자신들의 주관보다는 그 어떤 다른 존재의 뜻에 따라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지경이다.

세상의 대부분이 정말 사단의 최면력에 의해 유도된 최면 상태 아래 움직이고 있는가? 우리는 심리 조작 전문가들은 그들을 상대하여 보고 듣는 사람들에게 이러한 최면적인 상태를 유도하는 수완이 있음을 의심할 수 없다. 피실험자를 최면 상태에 놓기 위해서는 항상 그 어떤 접촉점이 이용되는데, 피실험자의 주의가 들리는 말과 더불어 빛이든지 아니면 어떤 다른 물체로 집중되어야 이것이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의도적인 주의 집중의 과정 없이는 아무도 최면술사의 지배 아래로 끌려들어가지 않는다.

사단도 인간을 자기의 지배 아래로 끌어오기 위해서는 이와 유사한 주의 집중을 인간으로부터 획득해야 한다. 이를 위해 사단은 한 접촉점을 사용하고 있는데, 그것은 인간의 절제하지 못하는 단점이거나, 육적인 것에 끌리는 성향, 아니면 그 어떤 다른 유혹에 약한 부분일 수도 있다. 이러한 사단의 책략으로부터 우리를 안전하게 지키는 유일한 방도는 그의 주의를 끄는 매체들을 애초에 보거나 들으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감정이 척도가 됨

감정이 진리를 분별하는 척도가 될 때, 인간은 자신이 견지하고 있는 입장과 다른 이견들에 대해 아주 비이성적으로 배타적인 태도를 가지기 쉽다. 이런 상태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옳고 다른 모든 이들이 전적으로 틀렸다고 의문의 여지없이 확신하곤 한다. 그러면서 자기들의 주관적인 감정이 가져다 주는 편안한 안전감속에서, 그들 밖에 존재하는 객관적인 진리에 기반을 둔 모든 논리와 이성을 거부하는 것이다.

이러한 느낌과 심리상태가 그리스도인에게 해로운 것인가? 그렇다. 분별있게 행동하는 우리의 능력을 파괴하기 위해 사단은 이러한 심리상태를 이용하고 있다. 공기가 통하지 않는 한 조그만 밀실에 당신이 앉아 있다고 가정해 보자. 기름을 태워 난방하는 난로가 그 방 속의 산소를 얼마 동안 소비해 오고 있었다면, 당신은 점차적으로 나른해져서 당신의 두뇌가 제대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능력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당신은 앉아 있는 의자로부터 일어나 움직이고 싶지 않을 것이다. 특히 의자에서 일어나 방의 창이나 문을 열고 싶은 의도는 더욱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순간, 움직이고 싶지 않아 하는 당신의 이러한 느낌이 바로, 일어나서 방을 환기시켜야지 그렇지 않으면 다시는 결코 움직이지 못할 것이라고 당신에게 알려주는 위험 신호인 것이다.

혹시 당신에게 기도하고 싶지 않은, 아니면 성경 말씀을 읽고 싶지 않은 기분이 들 때가 있었는가? 물론 그런 경우가 있었을 것이다. 필자에게도 그런 경우가 있었다. 하지만 우리가 그러한 느낌에 굴복해야 하겠는가? 생각해 보자. 산소가 우리의 몸에 필요한 생기인 것 처럼 기도는 영혼에 필수적인 생기인 것이다. 따라서 기도와 성경 공부를 하고 싶지 않은 우리의 기분이 바로, 우리의 영적 생명이 위협받고 있다는 증거이며, 우리 의지를 독촉하여 속히 그렇게 하도록 해야 한다는 신호임에 틀림 없다. 바로 이러한 때에 우리는 골방으로 들어가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려야 하며, 그렇게 기도의 시간을 가질 때 비로소 신령한 소망이 우리 마음속에 점차적으로 생겨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곧 기도는 즐겁고 만족스러운 우리의 한 특권으로 재확인 된다.

하지만 만일 우리가 사단이 사용하는 접촉점에 가담하기를 거부하지 않고 그가 놓은 감정의 올가미인 최면적 마술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면, 아주 심각한 영적 위험에 우리는 놓여질 수 밖에 없다. 사실 인간은 능동적인 행함의 주체가 아니면 주위 환경에 수동적으로 반응만 하게 되는 조건 반사적인 존재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3부 - 군중 속에서 홀로 서는 신앙


능동적인 행함과 수동적인 반응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이런 관찰은 우리에게 굉장한 깨달음을 가져다 주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 각자들이 주위의 환경에 구애받음 없이 능동적으로 대처하며 살든지, 아니면 그 환경에 수동적으로 반응하든지 하는 두 가지 중 하나의 자세로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우리 자신이 어떠한 삶을 영위하겠다고 독자적인 결정들을 내리며 생활하든지, 아니면 단순히 주위의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대하는가에 따라 반응하며 생활하든지 둘 중에 하나라는 것이다. 우리의 자세가 후자의 경우에 속한다면, 그것은 우리 삶의 진로 설정에 대한 결정권을 타인에게 넘겨주어, 그로 하여금 우리가 어떠한 사람이 될지를 결정하도록 허용하는 것이다.

나는 아직도 우리의 감정에 대한 사단의 조작에 대해서 논하고 있는데, 단지 이 경우에 있어서 사단은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 우리의 감정을 조작한다는 점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다른 사람들의 행동에 의해 조금이라도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세상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실 그들 주변에서 벌어지는 상황에 따라 움직이는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그들은 가장 중요한 결정들을 심사숙고하는 이성과 기도에 의존해 내리는 대신, 타인들에 의해 선동된 그들의 감정에 따라 충동적으로 줏대없는 결정들을 내리고 있음을 본다.

헌터 박사는 영국인 심장 외과의사였는데 그 자신이 심장질환을 앓고 있었다. 그는 어느 날 자기 동료에게, “내 생명은 내 성질을 건드리는 놈들의 손에 달려있어” 라고 말했는데, 그렇게 말한 자기 자신에 관한 그의 예언이 실현되고 말았다. 어느 날 어떤 사람이 이 의사의 비위를 건드려 격노한 나머지 심장마비로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만 것이다. 교육과 높은 지식 수준도 타락된 인간 본성의 미련함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주지 못한다는 이 얼마나 자명한 실례인가! 그 모든 고등 학위들도 이 헌터 박사로 하여금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능력을 주지 못한 것이다. 그는 문자 그대로 타인들로 하여금 자기 자신의 생사여부를 결정하도록 허용하고 말았다.

하지만 이 의사의 실수는 타인들로 하여금 자신의 영생의 유무를 실제적으로 결정하도록 한 이들의 실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거의 매일 우리 주위에서 불필요한 감정적인 삶의 드라마들이 연출되고 있으며,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교인들 조차도 그에 가담하고 있음을 목격하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부당한 대우를 받은 것에 복수하기 위해 자신들의 격한 감정을 가누지 못하고 폭발하며, 아주 사악한 죄들이 하늘 책에 있는 그들의 이름 아래 기록되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자신들의 행위에 대한 책임을 회피함으로 그들의 영혼을 상실하고 있는데, 사실 이들은 행하기보다는 주위의 충동에 대해 반응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우리가 확신하는 바,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하여 규율적이고 절제된 삶을 유지하지 않는 이들은 직간접적으로 종국에는 마귀에 의해 지배를 받을 것이다. 이 세상의 그 누구도 그 자신 속에 이러한 삶을 살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친구와 적들로부터 오는 모든 도발성 자극들을 물리치며, 우리의 삶을 자제하는 능력은 우리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

능동적 행함의 원동력

주위에서 오는 충동들에 수동적으로 반응하지 않게 되는 비결은 빌립보서에 기록된 사도 바울의 권면에 잘 나타나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립보서 2:5). 예수님의 마음을 상기한다면 어느 누구도 복수심을 가지고 반격할 수가 없다. 십자가위에 달린 그리스도께서는 복수심이나, 앙심이나, 짜증을 전혀 보이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 분의 기도는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였다.

이러한 마음의 상태가 타락한 육신을 가진 인간에게 가능한 것인가? 물론이다. 예수님께서는 부모들로부터 모든 자녀들이 물려받는 타락한 인간의 본성을 똑같이 소유하고 계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분은 자신을 찌르는 단 한가지의 공박이나 모욕에도 결코 죄악적으로 반응하지 않으셨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이러한 종류의 평온이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약속 되어졌다. 고린도후서 10장 5절에서 바울 사도는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라고 선언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그리스도가 가진 생각과 마음과의 연합이 우리 자신의 자복과 노력 없이는 가능하지 않다. 우리의 성품이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데는 우리 인간의 의지와 행동이 성령의 감동에 협력함으로서 만이 가능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두 가지 측면을 강제로 우리를 위해 대신해 주시지 않는다. 우리 각자가 죄로부터 돌아서는 결정을 해야만 하며, 그리고 나서 또한 그 죄를 물리치며 거부하는 일을 해나가야 한다. 물론 우리에게 권능을 부여하는 성령의 역사 없이는 이러한 과업은 불가능하다. 아무도 자신이 부당하게 취급당한 데 대해 분노하며 반응하는 것을 멈출 능력이 없다. 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우리는 그 어떤 반응도 전혀 하지 않기로 선택할 수는 있다. 그리고 반응하려는 충동감을 억제할 수 있는 능력을 우리는 가지고 있다. 이러한 두 가지 단계의 선택이 우리에게 승리를 가져다 줄 수 있는가? 물론이다. 우리에게 약속된 구원을 믿음으로 받아들인 후 이러한 선택을 이행했을 때, 그것은 진정한 믿음의 극적인 증거를 보여주는 것이 된다. 그리고 그러한 믿음은 다시 하나님의 전능하신 팔을 움직여 어떠한 죄의 행습도 깨뜨리는 힘으로 개입하시도록 역사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해를 가하는 사람들을 대하는 방법

이러한 믿음과 더불어 또 한가지 중요한 것은 우리의 기분을 상하게 하며 해를 주는 이들을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 자세를 고양하는 것이다. 많은 문제들이 바로 왜 이들이 그렇게 올바르지 못하게 행동하는지 한번 생각해 보려고 하지 않거나 그렇게 할 수 없을 때 발생하곤 한다.

가해자를 향한 우리의 태도가 그가 한 행동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반응할 지를 대부분 결정하게 한다는 것은 실증적인 사실이다. 불행하게도, 신체적으로나 말로 공격을 받고 있는 상황 중에 사려깊거나 이성적인 자세를 유지할 경향이 우리에게 많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그럴 때, 종종 충동적인 분노가 우리 마음을 장악하여 자기 방어를 위해 무모하게 되받아치게 하곤 한다. 만일 우리가 이렇게 지나치게 예민한 감정들을 초월할 수 있다면, 우리는 상대방의 동기에 대해 몇 가지 질문들을 스스로 제기하고 답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단 얼마간의 이성적인 사고의 과정을 통해 우리는 가해자가 그 어떤 오해로 인해 그런 행동을 하게 되었으며, 자기가 하고 있는 행동이 정당하다고 진실로 믿고 있을 가능성도 감지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럴 때 그 가해자를 향한 우리의 반응은 좀 더 개선적인 방향으로 발출될 수 있을 것은 틀림없다.

오래 전에 접하게 된 한 이야기는 참으로 감명적이어서 내 목회 기간 중 자주 이 이야기를 회중들과 나누곤 했다. 그리고 특히 개인적으로 견디기 힘든 어려운 몇몇 기간 중에 나 자신에게도 이 이야기를 상기시킬 필요가 여러 번 있었다. 이 이야기는 어느 날 자기 친구와 함께 길가를 걸어가고 있던 필립이라는 한 희랍 철학자에 관한 이야기다. 그 때 이 철학자의 적이 자기 창문 밑을 향해 걸어오고 있는 이 두 사람을 보았으며, 그들이 자기의 창문 아래로 지날 때 한 양동이의 물을 이 철학자의 머리 위에 부어 버렸다. 하지만 이 현명한 철학자는 아무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자기 친구와 담소를 나누며 계속 걸어갔다. 이 때 필립의 친구가 멈추어 서서 이 철학자에게 무례하게 물을 퍼 부운 그 자를 잡아 혼을 내 주겠다고 자청했는데, 그 때 필립은 아무도 자기에게 잘못한 일이 없다고 조용히 이 친구에게 대꾸했다. 그러자 친구는 놀라서, “하지만 저 사람이 자네에게 물 벼락을 내렸지 않았는가? 지금 자네는 흠뻑 젖어 있어.” 라고 말하였다. 이에 대해 필립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아니야, 자네가 잘못 판단했네. 저 사람이 나에게 물을 퍼부은 것이 아닐세. 그가 생각하기에 나라고 여긴 그 어떤 사람에게 물을 퍼부은 것일세.”

이 얼마나 훌륭한 자세인가! 타인들의 감정에 대해 이와 같이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 정신을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다면 지금 이 세상은 얼마나 달라질 것인가? 모든 사람들이 이 필립 철학자의 자세를 실행에 옮긴다면, 대부분의 개인적인 불화들과 인종적인 문제들, 그리고 국가들간의 분쟁들이 순식간에 해결되고 말 것이다.

변화된 이해를 가지고

얼마 전 나는 한 젊은 여성에게 침례를 준비시키고 있었는데, 그 당시 이 여성에게 교회의 교리를 마지막으로 재검토시키기 위해 그녀의 집을 방문했었다. 그 때 이 여성은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며, “저는 침례를 받을 자격이 없어요” 라고 말했다. 계속 그녀가 말하기를, “지난밤 제 어머니가 저를 방문하여 저의 오빠를 제가 아직도 그토록 미워하기 때문에 제가 침례를 받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상기시켜 주었어요” 라고 울며 말하는 것이었다. 나의 조심스러운 문의에, 이 캐롤이라는 여성은 자기의 단 하나뿐인 이 오빠를 왜 그 동안 증오해왔는지 처음으로 고백하기 시작했는데, 이 여성의 어머니조차 모르고 있었던 내용이었다. 그녀가 일곱 살 때 부터 십대 소년이었던 이 오빠는 이 여성을 성적으로 희롱했고 이 사실을 누구에게도 말하면 큰 해를 가한다고 위협했으며, 이 여성은 그 후 8년 동안 이 잔혹한 오빠에 의해 상상하기도 힘든 고통을 당했던 것이다.

이 사실에 접한 나는 캐롤이 느끼고 있는 자기 오빠에 대한 끈질긴 분노와 증오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이러한 비인간적이고 모욕적인 경험으로 인해 그녀가 가지고 있는 지당한 감정에 나는 무어라 할 말이 없을 지경이었다. 도대체 무슨 말로 이렇게 깊게 파여진 심리적 고통과 상처에 대한 이 여성의 느낌을 위로하며 바꿀 수 있을까라고 고민하던 중, 나는 이 고령의 희랍 철학자에 관한 이야기를 상기하고 그것을 이 여성과 나누게 되었다. 그런 후, 나는 이 혐오의 대상이 되고 있는 오빠에 대해 몇 가지 더 문의 하였다. “그 오빠가 그리스도인이었나요?” “아니요.” 라고 캐롤은 대답하였다. “그는 그리스도인과는 정반대형의 사람이었어요. 항상 마귀들의 영향 아래 그들의 지배를 받고 있는 듯이 보였고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이에 나는 다음과 같이 캐롤에게 권면했다. “캐롤, 당신의 오빠가 이때까지 그 생애 중에서 하나님 은혜의 능력을 결코 알지 못했다는 것을 비극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는 진정으로 그의 모든 행위에 있어서 마귀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이 틀림없어요. 그의 생애 중 하나님의 임재함 없이는 그를 통해 역사하는 마귀의 작태들을 저항할 가능성이 그에게는 전무합니다. 그는 마귀에 의해 조작되고 이용되어 왔어요. 그가 주 예수님을 진실로 알기만 했더라면, 결코 그는 그런 상태에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동생인 당신을 분명히 사랑과 귀중하게 여기는 마음으로 대했을 것입니다. 지금 캐롤 당신이 말했듯이 그 오빠는 아직도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래서 아직도 사악한 짓들을 할 수 밖에 없고 그러한 죄악들에 대항할 능력이 전혀 없는 사람입니다. 만일 이러한 그가 예수님에 대해 알게 되고 그 분을 자신의 구세주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얼마나 큰 변화가 있을까요! 그리스도안에서 캐롤이 발견한 그 기쁨을 그 오빠가 똑같이 경험할 수 있지 않겠어요? 캐롤, 그를 이용해 온 이 사악한 세력들의 영향으로부터 그가 빠져나올 수 있도록 우리 당신의 오빠를 위해 기도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이렇게 내가 권면하였을 때, 그녀의 얼굴엔 다시 눈물이 흐르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이번의 눈물은 더 이상 증오의 대상이 아닌, 동정과 기도의 대상이 된 파멸되고 있는 오빠에 대한 연민과 슬픔의 눈물이었다. 캐롤은 그 날 무릎을 꿇고 마귀의 세력에 포로된 자기 오빠를 구해달라고 간절하게 하나님께 기도하게 되었다. 동시에 그녀가 가지고 있던 오빠에 대한 증오심도 그 눈물과 함께 깨끗이 사라져 버렸고, 다음날 나는 옛사람 캐롤이 물 무덤에 잠겨버림을 보게 되는 기쁨을 누리게 되었다. 오빠가 진정으로 자기를 알지 못했다는 사실을 캐롤이 감지했을 때 그녀의 생애는 변화된 것이다. 그 오빠가 그녀를 한 귀중한 인격체로 느꼈다면 그가 그녀를 그처럼 노리개감으로 취급하지 않았을 것이었는데, 그의 이해는 죄에 의해 일그러져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우리도 우리의 생애 중에서 우리를 냉대하는 이들에 대해 같은 이해를 가질 수 있지 않을까? 만일 그들이 자기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면, 그와 같이 계속 행했을까? 그들이 우리에 대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느낌에 대해, 그리고 우리가 진정으로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충분히 알고 있지 못하다고 한번 가정해 볼 수 있지 않은가? 만일 우리가 그들의 입장을 유리하게 해석하여 “그들이 이러한 불의를 진짜 나에게 범하지 않았어. 그들이 나라고 추정한 사람에게 그런 짓을 했을 뿐이야” 라고 말할 수 있다면, 또 그들이 범하고 있는 일들을 그들 스스로가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그들을 측은히 여기게 될 수 있다. 그러면서 우리는 그들을 위해 기도까지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작은 돌멩이를 이마 위에 붙여 놓는 새우들이 가르쳐 주는 중요한 두 가지 교훈을 다시 한번 상기해 보자. 먼저, 우리는 우리의 감정과 다수의 행동에 기준하여 매사의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분명한 우리의 “위치석”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군중의 성향에 관계없이, 우리의 기분과 감정에 상관없이, 그리고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취급하든지 상관없이 하나님의 원칙 위에 우리 삶을 영위해 나가기로 선택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우리도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라디아서 2:20) 고 주장하여야 한다.

지방은 뇌세포의 모양을 바꾼다


“청하오니 당신의 종들을 열흘 동안 시험하여 채식을 주어 먹게 하고 물을 주어 마시게 한 후에 당신 앞에서 우리의 얼굴과 왕의 진미를 먹는 소년들의 얼굴을 비교하여 보아서 보이는 대로 종들에게 처분하소서 하매... 왕이 그들에게 모든 일을 묻는 중에 그 지혜와 총명이 온 나라 박수와 술객보다 십 배나 나은 줄을 아니라”(단 1:8-20).

어머니가 차린 잘못된 식탁이 명석한 우리 아이들의 뇌세포를 파괴시키고 뇌의 성장을 방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당신이 무심코 드는 패스트푸드, 비스켓, 포화지방이 당신의 지능을 떨어뜨리고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동물성 고지방 식품은 아이들의 학습능력을 저하시키고 성인의 기억력 감퇴를 유도합니다. 현대 의학은 두뇌의 회전에 가장 악 영향을 끼치는 것은 트랜스지방과 포화지방이라는 사실을 발표하고 있습니다. 캐럴 그린우드 박사는 지방이 뇌에 가장 광범위한 영향을 줄 뿐만 아니라, 사람의 인지 행동에 영향을 주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포화지방을 많이 섭취할수록 뇌의 기억력 장애가 더욱 심하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또한 지방의 유형에 관계없이 과도한 지방의 섭취는 뇌세포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쳐 학습능력이 떨어진다는 사실을 동물실험이 입증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필수지방의 섭취는 뇌세포의 성장과 발육을 촉진시키고 마음에 평안과 행복을 더해주며 더 나아가 영적인 신앙생활과 품성에 영향을 주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번 호 건강기사에서는 지방이 우리 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포화 지방은 뇌의 모양과 무게에 변화를 가져온다

미국 컬럼비아 대학의 리처드 메이요 박사는 동물성 지방이 노인성 파킨스씨 병에 미치는 결과에 대해 연구한 결과, 육식을 하는 사람이 채식위주의 식사를 하는 사람에 비해 5배나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웨인라이트 박사는 포화지방을 많이 섭취한 생후 8개월 된 동물의 뇌를 부검해본 결과, 신경계의 발육이 멈춰 있었으며, 신경세포의 수지상 돌기의 수가 적으며 길이도 짧은 것을 보게 되었다. 또한 포화지방을 섭취한 쥐의 경우 몸집도 작고 뇌의 무게도 일반 쥐에 비해 가벼운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포화지방은 뇌세포 뿐만 아니라 모양이나 무게까지도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포화지방은 뇌 세포막의 바깥 부분을 단단하게 만들거나 줄어들게 만들어, 뇌신경세포(뉴런)와 인접한 세포의 수지상 돌기(dendrite)에 신경전달물질인 정보를 전달하는 과정에서 수용기 역할을 하는 수지상 돌기의 발육을 저해 하므로, 신경세포에서 신경세포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기능이 떨어지거나 전달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는 것이다.

* 참고로 뇌세포의 정보전달 과정을 잠깐 언급하자면, 뇌신경세포(뉴런)의 수상돌기와 축색돌기는 이웃 세포와의 교신을 위한 통신안테나 역할을 하는데, 전기적신호로 통신되는 정보가 수상돌기에서 축색돌기로 흘러오면 축색돌기 말단의 소포체에서 화학신호(뇌신경전달물질)로 바뀌어져 인접한 세포의 수지상 돌기에 정보를 준다. 세포와 세포 사이는 미세한 간격을 두고 있는데 이것을 시냅스라고 하며, 이 사이에서 뇌신경전달물질이 정보를 다음 신경세포의 수상돌기의 수용체에 전달해준다.

 

포화지방은 두뇌 에너지(포도당) 공급을 방해한다

뇌는 신체의 대사 속도에 비해 7.5배나 빠른 대사 속도를 가지고 있으며 순간순간 민활하게 공급되는 포도당에 의지하고 있다. 그러므로 건강한 뇌를 위해서는 포도당의 원활한 공급이 필수적이다. 이것을 방해하는 가장 큰 요인인 과도한 포화지방의 섭취는 혈당을 낮추는 인슐린의 기능을 떨어트려 세포가 포도당을 효과적으로 연소하지 못하게 하여 인슐린 저항을 일으킨다. 말하자면 인슐린이 정상적으로 있어도 세포가 혈당을 제대로 사용 못하는 것을 말한다. 뇌의 무게는 약 2%에 불과하지만 전체 에너지의 20~30%를 소모한다. 만일 뇌 신경세포에 포도당을 충분히 공급해 주지 못하면 기억력, 주의력, 성격과민 등 뇌기능에 이상이 올 수 있다.

과도한 지방의 섭취는 인슐린 저항뿐 아니라 뇌기능에 있어서 당뇨병 환자와 유사한 반응을 보인다. 당뇨병 환자의 대부분은 기억력의 감퇴나 인식능력의 장애를 가지고 있는데, 이는 혈액에 포도당이 높을지라도 세포가 이것을 이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즐겨먹는 트랜스지방(trans fat)이 우리 뇌에 가장 무서운 침입자이다

트랜스지방이란 패스트푸드, 마가린, 비스켓, 쿠키, 도넛, 케이크, 빵 등에 들어가는 각종 쇼트닝이라는 고체상태로 존재하는 기름을 말한다. 사우스 캐롤라이나 대학 로타 그랜홀름(Lotta Granholm) 박사는 실험용 쥐를 두 그룹으로 나눈 뒤, 한 그룹에는 트랜스 지방이 10% 들어 있는 야자유를 배합한 사료와 대두유를 배합한 사료를 6주 동안 먹이고 트랜스지방을 섭취하지 않는 쥐와 미로를 찾는 게임을 한 결과, 트랜스지방을 먹인 쥐가 학습능력, 길을 찾는 능력, 기억하는 능력에 있어서 현저히 낮은 점수를 받았다. 결과적으로 트랜스 지방을 먹은 쥐는 아둔하고 바보스런 존재가 되었다. 또한 미 국립노화연구소(National institute on Aging:NIA)의 신경학자들의 실험에 의하면 트랜스 지방과 포화지방이 많이 들어있는 음식을 실험용 쥐에게 각각 먹인 결과, 길을 찾는 능력과 학습능력이 현저히 떨어진다는 사실을 발견해냈다.

최근에 할라가파(Veerendra Kumer Media Halagappa) 연구원들은 트랜스지방과 포화지방이 뇌 신경세포(뉴런)에 스핑고미엘린(sphingomyelin)이라는 지방의 양을 증폭시켜 신경세포를 보호하고 영양을 공급하여 주어 학습능력과 기억력을 증진시키는 뇌유래 신경영양성 인자(Brainderived neurotrophic facter)의 양을 감소시키는 작용을 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러므로 덴마크에 이어 캐나다에서는 식료품 중에 트랜스 지방 첨가를 금지하는 법률적인 방안을 연구 중에 있다. 최근 캐나다 연방의회는 혈관 내 콜레스테롤을 증가시키고 심장병과도 연관이 높은 것으로 알려진 트랜스 지방의 전면 사용금지, 또는 함량을 최소화 시키는 것을 향후 일년 내 새로운 규정 또는 법규로 수립할 것으로 보인다. 또한 하버드대 공공보건연구소의 보고서에 따르면, 트랜스지방을 줄이면 미국 내에서만 연간 3000~10만 명의 생명을 구할 수 있다고 본다. 이것의 위험성은 70년대부터 제기되어 왔지만 약 5조 달러 규모의 미국 식품가공업체들은 최근까지 이같은 학계의 경고를 사실상 무시해왔다. 그러므로 동물성기름과 트랜스지방은 우리의 두뇌발달에 어떤 카페인이나 니코틴 못지않은 치명적인 피해를 끼치고 있다는 것을 생각보라. 부모들이여 나와 나의 가족, 사랑스러운 자녀들을 위해 어떤 음식을 제공해야 할지 행각해보라.

 

지방은 학습능력과 기억력에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뇌의 신경세포가 얼마나 제 기능을 발휘하는가에 따라 기억력, 사고력, 지적 능력, 학습능력, 주의력, 집중력 등을 좌우되는데 이러한 기능들이 향상되고 최상의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좋은 지방을 섭취해야 한다. 이는 뇌의 60%가 지방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지방의 질은 뇌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필수지방의 섭취는 뇌의 능력과 품성을 최고로 증대시킨다

필수지방의 섭취는 기억력을 포함한 뇌세포의 기능을 증진시킨다. 뇌신경세포와 또 다른 신경세포 사이를 시냅스라고 하는데, 이 시냅스에서 축색돌기를 통과한 전기적 메시지를 화학물질로 바꾸어 다른 세포의 수상돌기에 정보를 전달한다. 뇌에서 신경전달 물질이 수용체에 올바로 전달되려면 수용체가 신축성(유동성)이 있어서 신경전달 물질과 완벽하게 들어맞도록 그 모양을 바꾸어야 한다. 그런데 필수지방의 부족으로 세포막이 딱딱하게 굳어있으면, 정보전달이 차단되거나 왜곡되거나 늦어지고 또는 순간적으로 차단되어 뇌기능을 저하시키는 일을 한다. 세라토닌이나 도파민같은 신경전달 물질은 수용체에 정확하게 들어맞아야 정보가 전달되는 독특한 모양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DHA(좋은 콜레스테롤)가 높으면 뇌 속에 많은 세라토닌을 분비하게 함으로 인지력, 기억력, 지각력을 증진시키고 우울증, 자폐, 정서적 불안 등을 예방해 준다. 또한 세라토닌은 뇌에 가장 흔한 베타파를 알파파로 바꾸어 마음에 평안을 주고, 파안대소를 할 때 나오는 기쁨과 즐거움을 주는 씨타파로 바꾸어 준다. 또한 세라토닌은 스트레스를 잊게해 주고, 노여움과 미움을 사랑으로 바꾸어준다. 뿐만 아니라 이웃을 사랑하게 한다. 그러므로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워”(잠 10:12)준다는 성경의 말이 맞는 것이다. 또한 세라토닌 호로몬은 밤에는 멜라토닌으로 변형되어 세포가 잠을 자게 하며, 또한 체온과 혈관압력을 조절해 주어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시 127:2)것이다.

포화지방은 “신체 조직의 질서를 깨뜨리고 지력을 둔화시키며 도덕적 감각을 흐리게“하는 반면에 식물성으로부터 섭취한 좋은 지방은 주님 안에서 안식과 평안을 줌으로 성화된 생애와 품성의 온전함을 이루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이다.

** 뉴론의 축색분지 말단에서 세라토닌이 분출되는 모습
신경세포의 축색분지 말단의 소포체에서 전기적 신호를 받아 세라토닌 호로몬을 시냅스 공간에 방출하면 인접한 세포의 세라토닌 수용체(seratonin recepter)가 이것을 받아들인다. 즉 전기적 신호와 화학적 신호를 통해 정보가 전달되는 것이다. 컴퓨터엔 전기적 신호밖에 없다. 사람만이 뇌신경물질을 만들어내는 영적인 존재이다. 그리스도께서 말씀이(전기적 신호) 육신이(화학적 신호) 되셨다는 것과 지금도 그분의 말씀은 창조력을 가지고 있음을 생각하게 한다.

 

식물성 기름 가운데 오메가-3의 섭취량을 늘리고 오메가-6의 섭취량을 줄이라

건강한 오메가-3와 오메가-6의 균형이 중요한데 오늘날 미국인들은 오메가-6를 15~20배 가량 많이 먹고 있다. 과다한 오메가-6의 섭취는 각종 질병의 원인이 되고 있다. 특별히 과학문명이 발달할수록 식물성 지방의 섭취가 오메가-3에서 오메가-6로 옮겨가면서 더욱 각종 질병을 가중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동물성 지방을 피하는 것 못지않게 비록 식물성 지방이지만 오메가-6계열의 과도한 지방 섭취를 피하고 오메가-3지방 섭취를 늘리는 것이 건강한 삶을 위하여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 여러 임상적 실험에서 밝혀지고 있다.

우리 몸은 오메가-3 지방산이 결핍됨으로 인해 오메가-6지방산이 우리 몸을 지배하게 되면 지방산이 분해 될 때 대뇌혈관과 뇌세포를 손상시키며 신경세포막을 굳게 하거나 위축시켜 뇌졸증, 노인성 치매, 각종 퇴행성 뇌 질환을 유발시킨다. 1999년 한 연구 결과에 의하면 고질적인 염증이 혈전색증을 일으킬 확률이 거의 500%나 많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염증은 뇌졸중, 심장병, 우울증 등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는 것이다.

우리 몸에 오메가-3 지방산이 결핍되면 오메가-6 지방산이 모든 아이코사노이드 호르몬을 독점생산하고 세포의 생화학 작용을 좌우하게 된다. 이때 일어나는 임상적 징후는 혈액 속에 플레이트렛(Platelet)이란 혈구의 점도를 높여 혈액이 죽처럼 걸쭉해져 동맥경화를 일으키고, 세포에 염증을 일으키며, 심장질환 및 혈압상승의 주요 요인이 되고, 림파구 분열을 촉진하여 면역기능을 떨어트리고 암세포 증식을 촉발하며 몸의 항상성을 깨어지게 한다. 그리고 신경세포의 기능저하로 기억력 감퇴 및 치매현상을 촉진하고 LDL수치를 높이고 HDL을 줄어들게 한다. 그러므로 지독한 성인병의 원인이 되고 있다.

또한 오메가-6 지방이 분해되는 과정에서 프로스타글란딘(프로스타글라딘은 혈압, 혈당치, 혈중 콜레스테롤 농도 등을 조절) 이라는 물질을 내놓는데, 과다하면 혈관조직의 혈관수축을 일으키고 염증을 유발하게 한다. 또한 미국의 콜로라도 대학의 K.N 프래사드 박사는 프로스타글라딘이 뇌 세포를 죽인다고 해서 이것을 ‘신경독소’라고 명명하였다.

뿐만 아니라 오메가-6가 분해되면서 아이코사노이드(호르몬 시스템을 조정하는 지배자 호르몬)이라는 물질과 유리기를 내놓는데 이것이 각종 질병을 유발시키는 원인이 된다. 참고로 화학물질 중에 독한 아라키드산이라는 화학물질이 있는데 이것은 글루탄산염의 생성을 자극하여 신경세포를 죽이는 주범이 되고 있다. 이물질은 과다한 신경세포의 흥분을 일으켜 가능장애를 가져오고 결국에는 세포를 파괴시키는 ‘흥분성 독소’이다. 오메가-6와 오메가-3가 균형지게 섭취될 때 이러한 질병이 예방될 수 있다. 서구화된 식생활로 인하여 각종 식용유와 쇼트닝, 패스트푸드 등을 많이 먹게 되었는데 이러한 것들이 오메가-6의 섭취량을 과도하게 늘리고 말았다. 그러므로 오메가-3의 지방을 섭취하기 위해서는 단불포화 지방으로 불리는 아보카도와 견과류를 많이 먹고 식용기름대신 올리브유나 아마씨유를 사용할 것을 권장한다. 한 연구 보고서에 의하면 올리브유를 많이 먹은 사람은 노인성 치매를 1/3로 줄일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올리브유와 아마씨유, 아보카도는 오메가-3를 보충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단불포화지방이다. 또한 올리브유에는 뇌세포를 파괴시키는 유리기를 무력하게 하는 항산화제가 많이 들어있어 세포를 보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뇌에 염증을 일으키며 신경세포의 정보전달을 방해하는 프로스타글라딘을 억제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자들은 실험에서 쥐에게 위의 식단과 비슷한, 오메가-3보다 오메가-6지방산이 많이든 식물을 먹인 결과 모든 실험동물이 고통을 당했다. 마음껏 음식을 먹은 쥐들은 ‘인슐린 내성’이 생기게 되었고. 심리 및 지능 테스트를 위한 미로 찾기 에서도 길을 찾지 못하고 당황해 했으며 되는대로 행동하거나 자해도 서슴지 않았고, 열린 공간으로 나가려는 의지를 별로 보이지 않았다.

 

뇌의 기능을 향상시키는 5가지 지방섭취 방법

1. 홍화기름, 해바라기기름, 옥수수기름, 콩기름을 사용하지 말라
이것들은 식물성 식용유이지만 오메가-6로 분류되는 것들로 뇌세포와 조직에 염증을 유발하고 나아가 세포를 파괴시키며, 뇌의 혈관에 혈전을 만들며 뇌졸중을 유발하고 신경 세포막을 위축시켜 신경계의 통신수단인 신경전달물질(Neurotransmitter)을 수용하지 못함으로 뇌기능을 망가뜨린다.

2. 식용으로 만든 마가린, 샐러드 드레싱, 마요네즈, 유제품,
각종 트랜스 지방을 사용하지 말라

3. 특별히 채식하는 분들은 아마씨기름과 올리브유, 아보카도와 견과류를 이용하라
채식을 하고 적당한 지방섭취를 하지 못할 경우, 뇌세포의 주요 영양공급원인 지방이 부족함으로 세포의 기능이 위축되어 기억력에 심각한 장애를 불러올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유전자와 일치하고 식물성 고단백질을 공급하는 견과류와 콩류를 많이 섭취해야 한다. 아마씨기름과 올리브유는 오메가-3로 분류되는 기름으로 기억력 감퇴를 예방하고 뇌세포를 파괴하는 유리기와 싸우는 항산화제가 가장 많이 들어있어 혈관계질병을 예방한다.
이탈리아 바리 대학의 안소니 카포르소 박사는 남부 이탈리아의 노인 278명을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 올리브유를 섭취한 사람은 기억력 감퇴 확률을 1/3로 줄일 수 있다고 했다.

4. 과다한 지방섭취 대신 탄수화물을 늘리는 것은 위험하다
포화지방(육류) 대신 탄수화물의 섭취를 늘릴 경우(밥을 많이 먹을 경우) 인체에 중성지방을 증가시켜 심장병, 고혈압의 원인이 된다. 그러므로 식단에 육식이나 다른 지방 섭취를 줄인다 할지라도 탄수화물을 과다하게 섭취하면 몸에 중성지방을 증가시켜 혈중 콜레스테롤 수치를 증가시키게 된다. 그러므로 채식 애호가들 일지라도 과식을 하면 종종 혈압이 높게 나타나는 것이다.

5. 과일, 야채, 해초류나 식물성 엽채류를 많이 섭취하라
우리는 과학적이고 임상적인 실례들을 통해서 동물성 지방(포화지방)이나, 현대 서구화된 식생활로 인한 트랜스 지방이나, 오메가-6의 과도한 섭취가 우리의 뇌의 기능을 위축시켜 기억력, 사고력, 분별력, 인지력 등을 위축시키고 더 나아가 뇌 신경전달물질에 영향을 미쳐, 마음의 평안을 누리고 이웃을 사랑하게 하며 사랑하며 하나님과 교제하는 모든 영적인 활동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보게 되었다. 또한 우리의 뇌세포에 ‘신경독소’와 ‘염증성 화학물질’을 만들어 내어 수많은 질병에 우리를 노출시킴도 보았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원래의 음식물인 곡류, 채소류, 견과류가 우리 몸에 알맞은 유전자를 가지게 하는 것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마시는 진미와 포도주를 거절하고 오히려 채소를 선택한 결과 그의 지혜는 온 나라 박수와 술객, 모사들 보다 10배나 뛰어난 지혜를 얻었을 뿐만 아니라, 예언(이상과 몽조)을 깨달아 아는 사람이 되었다(단 1장). 이것은 오늘날 과학이 성경의 진리를 실증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또한 어떤 영감의 저서에는 “육식은 성질을 변화시키고 야수성을 조장한다. 우리 몸은 우리가 먹는 식물로 말미암아 구성되므로 고기를 많이 먹으면 지적 활동을 감퇴시킬 것이다. 학생들이 만일 고기를 전혀 먹지 아니한다면 저희 공부에 훨씬 능률을 올릴 것이다. 인간의 능력의 동물적인 부분이 육식을 함으로써 조장될 때에 지적능력은 그와 정비례하여 감소 된다” 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연구를 통해 성경과 진리로 우리의 마음이 향하게 되길 바란다.

서론 - 일곱 인에 나타나 있는 비밀 "우리는 과연 어느 시대에 살고 있는가?"


우리가 성경에 나오는 예언을 연구해 보면 하나님께서 그분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위해 미래에 이루어질 사건들을 미리 알려주신 것을 알게 됨으로 매우 감격하고 흥분하게 된다.

그 중에서도 우리가 지금 어느 시대에 살고 있는지를 알려주는 예언에 대한 연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을 북돋아주고 용기를 주어 가까워 온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준비하게 한다.

요한 계시록에는 여러 가지 의미심장한 에언들이 많이 나온다. 이번 호에는 특별히 요한 계시록 5~8장에 기록되어 있는 일곱 인에 대하여 다루어 보았다. 언뜻 보면 이해하기 힘든 주제같이 느껴지지만, 그 의미를 하나 하나 짚어가며 연구해 보면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며,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어떤 시대인지를 깨닫게 됨으로 말미암아 크게 경성함을 얻을 뿐 아니라, 참으로 놀라운 은혜를 받을 수 있는 흥미있는 연구가 될 것이다. 독자들의 숙독을 권한다. - 편집실

일곱 인의 연구를 시작하면서

요한계시록에는 일곱 교회와 일곱 인과 일곱 나팔에 대한 예언이 나온다. 이 일곱 교회와 일곱 인과 일곱 나팔은 평행선상으로 함께 흘러 가는 일곱 시대에 걸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 대한 예언이다. 일곱 인을 연구하기 전에 먼저 일곱 교회와 일곱 나팔에 대해 살펴보자.

* 일곱 교회
일곱 교회는 일곱 시대에 걸쳐 세상에 있는 하나님의 거룩한 교회를 말한다. 그리고 사도 요한이 일곱 교회에게 보낸 편지는 각 시대마다 교회의 영적 상태와 도덕적 수준이 어떻게 변천하여 나갈지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의 형편은 사도 요한이 계시를 통하여 보았던 교회의 변천 역사를 묘사하기에 가장 적당하다. 일곱 교회는 각 나라와 민족 사이에 펼쳐져 있는 그리스도 교회를 대표하는 것으로써, 세상 마지막까지 교회의 역사와 상태가 어떻게 변화될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일곱 교회는 그리스도의 초림부터 재림까지의 모든 교회들을 대표할 뿐 아니라, 그 사이의 시간을 일곱 부분으로 나누어서 그리스도 교회의 역사적 변천을 설명해 주고 있으며, 일곱 교회에게 보내는 서신의 내용은 각 시대마다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교회의 상태를 설명하고 있다.

* 일곱 나팔
일곱 나팔은 이 세상에 있을 배도한 교회와 그 교회를 지지하는 세상에 대한 심판을 뜻한다. “나팔”은 성경 예언에서 “심판과 경고”를 상징한다. 그러므로 “일곱 나팔”은 “세상 왕국”(계 11:15)들간에 일어나는 일곱 전쟁을 통해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계속적으로 거절하고 진노의 잔을 채운 타락한 교회 교황권, 그리고 교황권을 도와 주고 옹호하는 세력을 어떻게 심판하시는 지에 대하여 말해 주고 있다. 그러나 또한 나팔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들을 구원하시겠다는 놀라운 섭리와 소망의 약속이 되기도 한다.

일곱 인이란 무엇인가?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책이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 또 보매 힘 있는 천사가 큰 음성으로 외치기를 누가 책을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 하니,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에 능히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할 이가 없더라. 이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하기에 합당한 자가 보이지 않기로 내가 크게 울었더니, 장로 중에 하나가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 (계 5:1~5).

사도 요한이 죄수의 몸으로 밧모섬이라는 곳에 유배되어 가 있을 때에 그는 사랑하는 주님으로 계시를 보게 되었는데, 요한은 계시에서 보좌에 앉아계신 하나님의 오른 손에 일곱 인으로 봉함된 책이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책은 아주 중요한 책 같아 보였고 누군가가 빨리 봉해진 인을 떼고 그 책을 펴야 할 것 같이 생각되었다. 그러나 그 인을 뗄 사람이 없자 그는 안타까워서 울었다. 그 때, 어린 양이 등장하여 인을 떼시는 장면을 보았다. 그런데 하나씩 인을 뗄 때마다 이상한 장면이 보이는 것이었다. 그것은 하늘로부터 네 말 탄 자가 달려 오는 광경이었다. 자, 과연 요한이 본 계시에 나타난 일곱 인과 인을 떼는 것과 첫째부터 일곱 인에 나타난 상징들과 사건들은 무엇인가? 함께 연구하여 보기로 하자.

1. 일곱 인
일곱 인이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 이후 시작된 초대 교회부터 재림까지의 교회들을 심판하시는 것을 뜻한다.

2. 인이란?
고대의 여러 가지 중요한 문서들은 권한이 없는 사람이 펴서 읽는 것을 막기 위해 그 문서에 봉인을 하는 일이 많았다. 이것을 가리켜 “인”이라고 했다. 두루마리인 경우에는 그 둘레에 상하로 끈을 감고 축축한 진흙 덩어리를 끈 위에 덮어씌운 다음, 인으로서 음각된 소인이나 인장을 그 진흙 무더기 위에 찍었다. 진흙 대신에 밀납을 사용하는 일도 많았다. 개인은 물론 정부 관리들과 사업 단체들도 인으로 도장을 사용했는데, 도장에는 주인의 이름이 음각되어 있었고 때로는 이교 신들이나 이상한 짐승들의 모양을 새기기도 했다. 특히 증서(권리증), 계약서, 서약서, 유언서 같은 문서들은 날인을 일곱 개나 했다.

인을 뗀다는 의미란?

“내가 보매 어린 양이 일곱 인 중에 하나를 떼시는 그 때에...”(계 6:1).
여기에 보면 “인을 뗀다”는 표현이 나온다. 이것은 유대인들의 관습을 알면 이해하기 쉬운 표현이다. 유대인들이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아 가지고 있던 땅을 사정이 여의치 않아 팔게 되는 경우, 그들은 일곱 증인들을 불러 그 땅문서를 인봉하여 그것과 함께 팔았다. 만일 그 땅을 본래의 주인에게 돌리려면 돈을 갚고 그 땅문서를 인봉할 때 있던 증인들을 불러 그 앞에서 인을 떼어야 했다. 그래야 그 땅을 다시 소유할 수 있게 되었다. 증인들은 그 마을의 장로들이었다.

실례 1. 예레미아의 이야기:
예레미아 32장에 보면 예레미아가 유대 사람들이 지금은 바벨론의 침입으로 포로로 잡혀가지만 하나님께서 유대나라와 그들의 땅을 회복시켜주실 약속을 믿는 예증으로 조카를 시켜 장래를 위하여 땅을 사고 그 문서에 인봉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실례 2. 룻의 이야기:
룻기에 보면 기업을 무르는 이야기가 나온다. 룻과 그녀의 시어머니인 나오미가 다시 유대 땅으로 돌아오자, 그들의 땅(기업)을 물러줄 사람이 필요하게 되었다. 유대인의 풍습에는 가장 가까운 친척이 기업을 물어주게 되어 있었다. 마침 자비로운 보아스는 그들을 불쌍히 여겨 그들의 기업을 물어준다. 이 이야기는 하나의 비유로 상징된 것으로써, 우리의 친족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해주신 구속의 이야기에 대한 비유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손에 있는 책에서 인을 뗀다는 의미는 지구의 땅을 물려준다는 의미이다.

누가 인을 떼는가?

어린 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을 떼신다. “어린 양이 나아와서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서 책을 취하시니라. 책을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 사 장로들이 어린 양 앞에 엎드려... 새 노래를 노래하여 가로되 책을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계 5:7~9).

위의 성경 구절을 보면 네 생물과 이십 사 장로들이 새 노래로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을 떼시기에 합당하심을 찬양하는 장면이 나온다. 오직 어린 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인을 떼기에 합당하시다.

왜 어린 양만이 일곱 인들을 떼실 수 있는가?

인간이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이 지구는 사단에게 빼앗겼다. 아담은 창조될 때에 지구를 통치할 지위에 세워졌으나, 유혹에 굴복함으로 그는 사단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벧후 2:19) 된다. 사람이 사단의 포로가 되었을 때 그가 가졌던 통치권은 그의 정복자에게 넘어갔다. 그는 원래 아담에게 주어진바 되었던 지상의 통치권을 찬탈하였다. 아담과 하와는 사단의 말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보다 그를 신뢰하고 섬기기로 선택하므로 이 지구의 통치권을 사단에게 빼앗긴 것이었다.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여 죽게 된 인류를 구하고 잃어버린 이 지구를 되찾기 위해 누군가가 그 값을 지불하여야 했다. 사람뿐만 아니라 지구도 죄로 말미암아 악한 자의 권세 밑으로 들어갔었다. 그리하여 이 지구와 그 안에 속한 사람들을 구속하시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죄의 형벌의 값을 치르시고 그의 피로 이 지구를 사심으로 말미암아 사람을 구속하실 뿐만 아니라 사람이 잃었던 통치권도 되찾으셨다.

계시록에 나타난 하나님의 손에 들린 책에 인봉되었던 일곱 인을 다 떼시고 모든 구속의 역사가 끝나면, 예수께서 재림하실 것이며, 이 땅의 주인행세를 하던 사단은 영영한 죽임을 당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땅이 새롭게 되고, 죄와 슬픔에서 해방되어 그것이 구속 받은 자들의 영원한 거처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 구속의 역사를 이루시기 위해 일찍이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만이 인을 떼기에 합당하시다.

인을 떼는 일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익히 잘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심판하실 때 아무도 모르게 슬쩍하지 않으시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인을 떼는 일, 즉 각 시대의 교회의 죄악과 타락을 심판하시는 일도 하나님 혼자 심판하시는 것이 아니고 조사심판을 통해 그 심판이 공의롭고 적합한 것인지를 온 우주에 드러내신다. 그렇기 때문에 인을 하나씩 뗄 때마다 그 시대의 교회의 형편과 모습들이 적나라하게 펼쳐지는 것이다. 아울러 그런 일들이 드러날 때, 각 시대의 교회에 있던 당신의 순결한 백성, 곧 하나님의 참 자녀들과 성도들을 인치시는 것이다.

이제부터 일곱 인을 하나씩 떼실 때마다 각 시대의 교회에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지 함께 연구해 보기로 하자.

1부 - 네 말 탄 자 (첫째, 둘째, 셋째, 넷째 인)


제1부에서는 요한 계시록 6장에 묘사된, 첫째 인으로부터 넷째 인을 뗄 때 차례로 나오는 네 말과 그 말 탄 자에 대하여 연구하기로 한다.

첫째 인; 흰 말 시대 (승리의 시대)

“내가 보매 어린 양이 일곱 인 중에 하나를 떼시는 그 때에 내가 들으니 네 생물 중에 하나가 우레소리 같이 말하되 오라 하기로 내가 이에 보니 흰 말이 있는데, 그 탄 자가 활을 가졌고 면류관을 받고 나가서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하더라” (계 6:1~2).

요한 계시록 6장의 예언에서 예수께서는 장래의 사건들을 사도 요한에게 보여 주시기 위하여 닫혀진 인들을 떼기 시작하시는 장면을 보여주시는데, 예수께서 그 첫째 인을 떼시자 흰말이 달려 나오는 것을 보게 되었다. 흰색은 순결을 상징한다. 이 교회는 순결한 시대인 초대 교회, 즉 사도교회를 상징하며, 면류관을 쓰고 말을 탄 자는 교회를 주장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그 분은 나아가서 교회를 통하여 복음으로 세상을 정복하여 이기고 또 이기었다. 로마 시대에는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이 개선 할 때에 흰 말을 타고 오는 것이 전통이었다. 그러므로 흰 말은 순결한 사도 교회뿐만 아니라 승리하는 교회를 상징한 것이었다. 제 1세기에 하나님의 교회는 오류가 아무것도 섞이지 않은 순수한 진리,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그대로 보존된 진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 교회는 오순절 성령의 충만하심을 경험했으며, 성령의 능력으로 악을 정복하며 복음으로 세상을 쳐서 이기는 능력의 교회로 존재하였었다.

둘째 인; 붉은 말 시대 (핍박 시대)

“둘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들으니 둘째 생물이 말하되 오라 하더니 이에 붉은 다른 말이 나오더라. 그 탄 자가 허락을 받아 땅에서 화평을 제하여 버리며 서로 죽이게 하고 또 큰 칼을 받았더라” (계 6: 3~4).

요한은 장면이 바뀌는 것을 보게 되었다. 두 번째 달려오는 말의 색깔은 붉은 색이었고 이 말을 탄 자는 칼을 받아 쥐고 있었으며, 서로 죽이는 일을 감행하고 있었다. 둘째 인에서의 붉은 말은 주후 2,3세기 및 4세기 초반, 곧 서머나 교회와 같은 기간에 하나님의 백성들을 핍박한 로마정부의 피비린내 나는 박해를 묘사한다. 하나님은 붉은 색을 이용하여 전쟁과 살육과 피 흘림을 묘사하신다 (계 32:6,11, 겔 46:10, 나 2:3). 이 붉은 말은 핍박 시대를 상징하였다. 그 시대는 사단이 교회를 무섭게 공격하는 시대였다. 교회는 순교자들의 피로 붉게 물들이게 되었다. 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콜로세움의 원형 극장에서 야수들의 밥으로 또는 화형대의 이슬로 사라져 갔다. 유럽과 북부 아프리카 지방에서 무자비한 핍박과 죽음을 당하였는데, 그 기간은 역사가들에 의하여 A.D. 100 - A.D. 323으로 추정하고 있다.

셋째 인; 검은 말 시대 (타협의 시대)

“셋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들으니 셋째 생물이 말하되 오라 하기로 내가 보니 검은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가 손에 저울을 가졌더라. 내가 네 생물 사이로서 나는듯하는 음성을 들으니 가로되 한 데나리온에 밀 한 되요 한 데나리온에 보리 석 되로다 또 감람유와 포도주는 해치 말라 하더라” (계 6:5~6).

그 다음으로 요한은 검은 말을 보게 되는데, 그 말 탄 자는 손에 저울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이었을까? 핍박이 그치자 기독교회는 갑자기 로마 제국의 공식적인 종교가 되었다. 그러더니 기독교인들과 이교도들의 융화정책의 일환으로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로 개종하면서 황제의 추천에 따라 수 많은 이교도인들이 기독교로 개종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콘스탄틴 황제의 융화정책에 의하여 기독교의 교리는 타협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교적인 풍습과 전통들이 교회 안에 가득 들어 오게 된 것이다. 슬픈 사실은 교회 자체가 이교도들을 수용한다는 명제 아래 이교적인 풍습들을 수용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렇게 교회에 들어 온 이교의 풍습들 중의 하나가 우상숭배였다. 십계명에 금지되어 있는 우상들을 들여 오면서 그 이름들과 모습들을 바꾸어 가지고 성경적인 냄새가 풍기게 하기 위하여 베드로, 요한, 바울과 같은 형상들로 만들어 교회 안에 들여와 세우기 시작한 것이었다. 주피터 신의 이름은 베드로로 바꾸고 다산 신을 상징한 여신은 그 이름을 예수의 어머니인 마리아로 바꾸었을 뿐이었다.

또 다른 하나의 타협은 성경의 안식일 문제였다. 창세기에는 하나님께서 창조의 기념일로 안식일을 제정하시어 복 주시고 거룩하게 하시며 쉬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을 십계명 속에 포함시키시고 친히 당신의 손가락으로 돌비 위에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고 기록하여 두셨다 (출애굽기 20:8).

예수께서도 안식일에 교회에 참석하심으로 하나님의 안식일 준수에 대한 모본을 남기어 두셨고, 주님의 제자들과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 이후에도 여전히 안식일을 준수해 온 사실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누가복음 4:16; 사도행전 17:1-3; 18:1-4 참조).

성경 다니엘 서에는 앞으로 교회가 정부의 힘과 연합하여 하나님의 율법을 바꾸려고 할 것이라는 놀라운 예언이 이미 기록되어 있었다. “지극히 높으신 자를 대적하며”,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를 핍박하며”, 또한 “때와 법을 변개코자 할 것”이라는 놀라운 예언을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통하여 다니엘 7장 25절에 기록하여 두셨다.

태양 신 숭배는 로마 제국에서 인기 있는 종교였었다. 그래서 교회와 국가는 이교도인들을 수용하고 비위를 맞추기 위하여 예배일을 태양 신을 섬기는 일요일로 변경하기에 이른 것이다. 일요일에 예배를 드리면, 그 당시 미움을 받고 있었던 유대인들과 거리를 두게 되고, 또한 이교도인들이 기독교로 개종 할 때에 훨씬 편안하게 느끼게 만들 수 있었기 때문에 일석 이조의 효과를 가져 올 수가 있었다. 그러나 한가지 문제가 있다. 성경의 계명은 여전히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검은 말 시대의 교회는 참으로 타협의 시대였다. 진리가 저울에 달려서 부족함으로 드러난 시대였다. 그 시대는 복음의 빛 대신 어두움이 교회를 뒤 덮어 이교적인 미신적 풍습들이 교회 안으로 밀려 들어 온 그러한 시대였다. 영적 암흑은 복음의 밝은 빛과 정 반대가 되는 죄요, 배도요, 오류이다. 이렇게 교회가 정치와 손잡게 되었을 때, 세속적인 길을 걷다가 종국적으로는 심한 어두움과 부패에 빠지게 되었다. 이 검은 말은 수백만의 이방인이 그 거짓 교리와 행습을 교회 안으로 도입한 버가모 교회와 동일한 기간을 대표한다.

넷째 인; 청황색 말 시대 (영적 죽음의 시대)

“넷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넷째 생물의 음성을 들으니 가로되 오라 하기로 내가 보매 청황색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의 이름은 사망이니 음부가 그 뒤를 따르더라 저희가 땅 사분 일의 권세를 얻어 검과 흉년과 사망과 땅의 짐승으로써 죽이더라” (계 6:7~8).

끝으로 요한은 청황색 말이 달려 오는 것을 보게 되었다. 청황색은 시체의 색깔이다. 그래서 그 말 탄 자의 이름이 “사망”이었다. 그 뒤에는 음부(무덤)가 뒤를 따르고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일까?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일어 난 것이다. 교회가 영적으로 죽은 것이다. 더 이상 하나님의 교회가 예전과 같은 교회가 아니었다. 한 때 흰색으로 상징되었던 순결하였던 교회가 이제는 죽음의 사신이 뒤를 따르는, 영적으로 완전히 죽어버린 교회가 된 것이다.

이 시대는 교회가 1260년간이라는 긴 종교 암흑시대에 처했던 시기였다. 이 시기 동안 하나님의 진리는 교황권에 의하여 짓밟혀지고 인간의 유전과 인간이 만든 교리가 교회를 가득 채웠다. 성경의 순수한 진리를 믿고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의 방법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믿는 신실한 성도들은 종교재판소에 끌려가 죽임을 당했으며, 로마의 교황권이 파는 면죄부를 사지 않으면 죄를 용서 받을 수 없는 영적으로 참담한 시기였다. 하나님의 참 자녀들인 수많은 순교자들이 이단자라는 죄목으로 화형 당하였고, 하나님의 진리를 고수하기 위하여 신실한 사람들은 생명과 재산과 그들의 안일한 삶을 포기해야 하는 시대였다.

이 네 말 탄 자의 계시는 교회 역사에 대한 생생하고 적나라한 묘사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교회에 어떠한 일들이 일어 날 것에 대하여 미리 아시고 이렇게 예언하여 두신 것이었다. 교회는 인을 차례로 하나 하나 뗄 때마다 그들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다 드러내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교회에 대한 심판을 내리시고, 또한 그 교회 안에 존재한 당신의 신실한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소유라는 인을 치셨다. 이렇게 넷째 인까지 연구해 보았다. 다음에는 다섯째 인과 특별히 현 시대에 아주 의미심장하게 이루어지는 여섯째 인, 그리고 일곱째 인에 대해 연구해 보자.

2부 - 다섯째 인 (순교자들의 울부짖음)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 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하니, 각각 저희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쉬되 저희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받아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 (계 6:9~11).

다섯째 인에는 이상한 장면이 나오는데, 그것은 제단 아래서 하나님을 위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부르짖는 장면이다. 이렇게 울부짖고 있는 이 영혼들은 과연 누구들인가? 그것은 혼인가? 아니면 진짜 사람들인가? 함께 공부해 보기로 하자.

이 영혼들은 누구인가?

이 성경구절을 보면 제단 앞의 영혼들은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들의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하며 부르짖고 있다. 이것은 중세기 때에 진리로 인하여 순교를 당한 자들의 울부짖음이 상징적으로 기록된 것이다. 이 영혼들은 종교 암흑시대에 죽임을 당한 수 많은 순교자들과 종교 개혁자들을 가리키며, 진리를 지키고 진리를 위하여 싸우다가 죽은 자들을 상징한다.

제단 아래 있는 영혼들은 실지로 살아있는가?

여기 나오는 예수님의 진리를 위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부르짖고 있는 것은 상징이라고 보아야 한다. 창세기 4:10에 보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였느니라”고 가인에게 하신 말씀이 나온다. 이것은 진짜로 아벨의 피가 하나님께 말한 것이 아니라 상징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전도서 9:5에는 “무릇 산 자는 죽을 줄을 알되 죽은 자는 아무 것도 모르며...” 라고 되어 있으며, 시편 6:5에는 “사망 중에는 주를 기억함이 없사오니...” 또 시편 146:4에는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 라고 쓰여있다.

감리교회의 주석가인 Adam Clarke 박사의 저서인 “다니엘과 요한 계시록의 예언들” 433쪽에 보면, “요한은 상징적인 계시 가운데서 제단을 보았다. 그 아래 있는 영혼들은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순교를 당한 그리스도인들로서 우상숭배와 미신적인 오류의 가르침들 때문에 금방, 바로 얼마 전에 새롭게 희생당한 자들을 표상하고 있다. 이 제단은 지구, 이 땅에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하늘에 있는 제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쓰여있다.

또한 장로교회의 주석가인 Albert Barnes 목사의 저서인 “신약 성경 해석 9권(계시록 주석), 171쪽에는 “우리는 이 제단 밑의 영혼들에 대하여 실재 문자적 그대로 일어난 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요한은 제단 밑에 있는 순교 당한 자들을 본 것으로서 이 모습은 상징으로 기록된 것이다. 우리는 하늘에 있는 자들이 실제로 자기들을 해한 자들을 심판해 달라고, 혹은 보복하여 달라고 기도하고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될 것이다.” 라고 쓰여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장면의 계시가 넷째인 시대, 곧 종교암흑 시대 당시에 핍박으로 죽은 자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흰 두루마기란 무엇을 상징하는가?

여기에 나오는 장면을 보면 하나님께서 부르짖는 영혼들에게 “각각 저희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아직 잠시 동안 쉬되 저희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받아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는 말씀이 나온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 순교자들에게 주님의 의를 상징하는 흰옷을 주시는 것을 가리킨다. 흰 옷은 이 순교자들을 위한 승리를 암시한다 (계 19:8, 3:5). 그들은 억울하게 누명을 뒤집어 쓰고 죽임을 당하였다. 성경의 진리와 순수한 신앙을 지켰으나, 이단자로 몰리어 잔인한 죽임을 당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하늘에서 큰 상급을 받을 것이다. 이 땅에서 그들은 마치 범죄자처럼 취급 당했으나 하늘에서는 가장 순결한 의의 상징인 흰 옷을 입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의미 승리를 획득했지만 아직도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서 당신의 모든 성도들에게 상을 주실 때까지 잠시 무덤에서 쉴(잠잘) 것이었다 (히 11:39,40).

계 7:13,14에 보면 “장로 중에 하나가 응답하여 내게 이르되 이 흰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어디서 왔느뇨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란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라는 말씀이 나오며, 또 계 3:5에는 “이기는 자들은 이와 같이 흰옷을 입을 것이요” 라고 쓰여있다.

다섯째 인은 16세기부터 18세기 중반에 걸친 다섯째 교회, 곧 사데 교회와 같다. 넷째 인의 무서운 박해는 다섯째 인 기간에도 계속되었다.

영국의 크롬웰 장군이 Samuel Morland경에게 교황권이 십자군을 보내어 왈덴스인들을 학살한 사실을 조사해 오라고 부탁했을 때 그는 끔찍한 사실들을 보고 너무나 놀랜 나머지 하나님께 그 영혼들을 위해 기도 드렸으며, 실락원을 저술한 것으로 유명한 시인 쟌 밀턴(John Milton) 은 이렇게 그의 저서에 이렇게 적었다. “하나님이시여 그들을 보복하여 주시옵소서. 알프스 산에 차디찬 뼈들이 되어 버린 이 불쌍한 성도들, 학살 당한 당신의 자녀들을 신원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조상들이 나무와 돌들을 섬길 때에 이들은 하나님의 순결한 진리를 믿었지 아니하였나이까? 알프스 산 피드몬 골짜기에 있는 그들의 신음소리를 당신의 기록책에 기록하소서 주여!”

머지않아 예수께서 오실 것이다. 그리하여 진리를 위하여 멸시와 천대와 박해와 고문을 당하고 죽은 수많은 순교자들에게 영생과 함께 흰 옷과 빛나는 면류관을 상급으로 주실 것이다.

3부 - 여섯째 인 (우리는 현재 여섯째 인 끝 부분에 살고 있다!)


계시록에는 “일곱” 이라는 숫자를 가진 다섯 개의 예언들이 나온다. 그것은 일곱 교회,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우뢰, 그리고 일곱 재앙들이다.

일곱 우뢰는 하나님께서 기록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그 예언은 여섯 번째 나팔의 사건들과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서 벌써 지나간 세대에 관한 일들에 대한 예언으로 해석되고 있다. 또한 일곱 재앙도 이 세상에 은혜의 시간이 끝난 이후에 생길 하나님의 마지막 자비가 섞이지 않은 심판의 장면을 묘사하고 있는데 그 예언도 미래에 관한 일이다. 우리는 지금 일곱 번째 교회인 라오디게아 교회 시대에 살고 있다. 또한 나팔의 시대로서는 그 일곱 번째 나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나 유독 일곱 인에 관한 한, 우리는 그 여섯 번째 인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므로 이 일곱이라는 숫자의 예언들 가운데서 현재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가장 관심을 갖게 하는 예언은 여섯 번째 인이라 할 수 있겠다. 왜냐하면 여섯 번째 인의 사건들을 연구하면 우리가 지금 어느 시점에 와 있는지 그 현주소를 정확하게 감지 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뒤에 설명하겠지만 일곱째 인은 예수님의 재림 바로 전후로 일어 나는 짧은 사건이므로 여섯째 인에 대한 이해가 더욱 중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일곱 교회에 대한 설명은 이미 살아남는 이들 본 월간지에서 다루었고 일곱 나팔에 관한 것도 최근 호에서 설명 한 바 있다. 그러나 이번 호에서 설명하는 일곱 인에 관한 내용들은 많은 분들에게 있어서 꽤나 새로운 내용들로 다가 가고 있을 것이다.

여섯째 인의 시대

위에서 한 말을 다시 반복 강조하고 지나가도록 하자! 그것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일곱 번째 교회인 라오디게아 교회 시대이며, 또한 나팔들 중에서는 심판의 때로 상징된 일곱 번째 나팔 시대이다. 그러나 일곱 인의 시대들 중에서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여섯 번째 인의 시대라는 사실이다. 그것도 이 여섯 번째 인 중에서 그 끝 부분을 살고 있는 것이다. 왜 그러한가? 앞으로 할 설명에서 독자들은 그 사실을 실감하게 될 것이다. 일곱째 인 시대는 바로 예수님의 재림 사건의 전후에 일어 날 최종 사건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서 이 세상에 은혜의 시간이 끝난 이후의 일이므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여섯째 인 사건에 대한 이해이며 그것이 현재 우리에게는 더 절실한 사건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현재 여섯째 인 그 끝 부분에 살고 있다는 사실은 이 세상의 끝이 거의 다 다가 왔다는 심각한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먼저, 여섯 번째 인에 대한 본문을 읽어 보도록 하자!
“내가 보니 여섯째 인을 떼실 때에 큰 지진이 나며 해가 총담같이 검어지고 온 달이 피같이 되며,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선 과실이 떨어지는 것같이 땅에 떨어지며, 하늘은 종이 축이 말리는 것같이 떠나가고 각 산과 섬이 제 자리에서 옮기 우매,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각 종과 자주자가 굴과 산 바위 틈에 숨어 산과 바위에게 이르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계 6:12-17).

여섯째 인은 일련의 천연계 가운데서 일어나는 사건들로 이루어져 있다. 다시 말하자면 줄지어 일어나는 하늘과 땅의 범상치 아니한 사건들이 인류가 과연 어느 시점에 와 있는지에 대하여 말해 주고 있으며, 또한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이 진행 중에 있고 이 지구가 곧 옛 모습으로 회복되어 하나님의 손으로 되돌아 가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힘 있게 증거해 주고 있는 것이다. 곧, 마귀에게 빼앗겼던 지구를 그 값을 치르시고 구속하시어 원래의 주인인 의인들에게 되돌려 주실 때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려 주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일곱 인은 하나님의 심판을 통하여 이 지구라는 땅을 도로 물려 주시는 하나님의 역사의 과정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각도에서 관찰한다면 여섯 째 인은 우리가 이 지구의 회복의 국면에서 어디쯤 와 있는지를 알려주는 예언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여섯째 인에 들어있는 징조의 순서

여섯째 인에서 일어나는 천연계의 징조들의 순서는 다음과 같다. 대 지진, 해가 어두워 지는 일, 달이 핏빛처럼 변하는 일, 무수한 별들이 떨어지는 일, 하늘이 종이 축처럼 떠나 가는 일, 산과 섬이 제 자리에서 옮기우는 일, 그 후에는 주의 재림을 위하여 준비되지 아니한 악인들이 두려워 떨며 차라리 천연 재해들을 통하여 죽어 버리는 일이 더 나았을 것이라고 소리치는 일이다.

자, 그러면 여섯째 인에 나타난 일련의 천연계의 사건들을 그 일어나는 순서대로 관찰하여 보도록 하자! 여섯째 인의 국면은 다섯째 인인 중세기 핍박 시대, 곧 중세기의 암흑기인 환란시대를 지나면서 큰 지진의 사건으로 그 시작을 알리고 있다. 중세기의 환란시대는 다름이 아닌 AD 538부터 AD 1798년인 1260년 동안의 핍박 시기를 말하는 것이다. 이 핍박시대가 끝나고 로마 교황권의 독재가 종식될 즈음에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 들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듯이 이 세상은 큰 지진의 흔들림으로 눈을 뜨게 된 사실을 우리는 역사에서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사건들은 상징적이라기 보다는 실재적인 천연계의 사건들이라는 사실을 그 내용 자체가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1.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일어 났던 최대의 대지진

근대 역사상 가장 큰 지진은 1755년 11월 1일, 당시까지 있었던 지진 중 최악의 기록을 남겼던 “리스본 대지진”으로, 암흑일과 낙성일과 함께 말세의 시작을 알리는 경고가 되었다. 이 지진은 600만 평방 킬로미터에 걸쳐 일어났으며,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흔들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그린랜드와 미국의 동부에서도 그 흔들림을 감지할만한 초 대형 지진이었다. 그런데 이 지진은 중세시의 환란이 끝마치려는 지점에서 일어 났기 때문에 바로 여섯째 인의 기간을 알리는 전초적인 예언 성취의 사건이 된 것이다. 리스본의 대 지진은 5분간 지구의 반을 흔들었으며 즉각적으로 6만 명이 사망한 놀라운 지진이었다. 또한 여러 도시들이 큰 해일에 덮여 큰 고통을 당하였다.

2. 역사적인 암흑일

마 24:29 에서 예수님께서는 환란 이후에 생길 여섯째 인에 일어 날 사건들을 미리 예언해 주신 것을 찾아 볼 수가 있다. “그 날 환란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눅 21:25), “일월 성신에는 징조가 있겠고...” 아울러 우리는 구약에서도 같은 사건을 미리 예언해 놓으신 사실도 볼 수가 있다. 요엘 2:31,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 지고 달이 핏빛같이 변하려니와.” 사도행전 2:20도 같은 말씀을 하고 있다.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재림 전에 현저한 하늘의 징조들이 있을 것인데, 바로 중세기 환란 후에 그러한 징조들이 보일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중세기의 환란이란 종교 암흑 시대 동안 5천만 내지 일억의 그리스도인들이 순교 당한 엄청난 핍박 기간을 의미한다. 이 큰 환란 후에, 정말 대 지진이 일어 났다. 그리고 이 대지진 이후인 약 25년 후 그 예언된 순서대로 1780년 5월 19일에 갑자기 대 낮에 해가 어두워 지는 사건이 미국 동북부 주들을 중심으로 일어난 것이다. 그것은 미국이 독립을 선언한지 약 4년도 채 되지 않은 때였다. 그런데 하필이면 왜 미국에서만 이 사건이 일어 났을까? 그 이유는 성경의 예언을 알고 기다리고 있는 기독교인들이 핍박을 피해 미국으로 도망 온 이후에 이 미국이 복음의 중심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을 깨우려면 미국을 깨워야 하였기 때문이었다.

1780년 5월 19일 아침은 여전히 태양이 밝게 떠 올랐다. 그런데 갑자기 아침 10시부터 어두움이 드리우기 시작 했는데 사람들이 자기 손바닥도 볼 수 없을 정도의 칠흑 같은 어두움이 엄습한 것이었다. 닭과 새들이 자기 둥우리로 돌아가고 소도 자기 외양간으로 돌아갔으며 어두움이 그 다음날 아침까지 계속되었다. R.M. Devens 씨는 그의 책 “우리나라 미국의 첫 세기”란 책에서 “1780년 5월 19일의 흑암일은 오래도록 기억될 가장 놀라운 자연 현상이었으며 설명할 수 없는 신비로운 이 어두움은 아침부터 대낮에 미 동북부 뉴 잉글랜드 주들을 뒤 덮었다” 고 하였다. Connecticut Historical Collection p.403에서 예일 대학 총장이었던 Timothy Dwight 박사는 그 날의 경험을 설명하면서 커네틱컷의 국회의원들이 회의를 연기하고 심판 날이 이르렀다고 가슴을 치며 촛불을 켜 들고 집으로 돌아 갔다고 기록하였다. 이 사건은 아직도 설명 할 수 없는 천연계의 신비의 현상으로 손꼽혀지고 있는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다.

3. 달이 핏빛처럼 변하는 일

해가 갑자기 깜깜하게 어두워 졌던 바로 같은 날 밤에 떠오른 달은 핏빛같이 붉은 달이었다. 마치 지구의 마지막이 가까웠다고 통곡하는 것처럼 하늘은 붉은 빛으로 드리워 지고 있었다. 성경의 예언 그대로 달 자체가 피의 빛깔인 붉은 빛 그 자체를 띄우고 있었다. 이를 본 많은 사람들은 계시록 6장에 있는 여섯째 인의 예언대로 마지막을 알려 주는 실재 천연계의 사건들이 그 일련의 순서를 따라 일어 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되었다.

4. 별들이 떨어지는 유성 소나기

해가 어두워진 예언의 성취 후 50여 년이 흘러간 1833년도 11월 어느 날 밤 이 세상은 또 하나의 놀라운 예언 성취를 보게 되었다. 정확하게 그 날은 1833년 11월 12일 밤이었다. Agnes M. Clarke 씨가 저술한 “19세기의 천문학의 역사” p. 328 에서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1833년 11월 12일 밤에 이 지구에 별들이 쏟아져 내려왔다. 멕시코 만에서부터 카나다 핼리팩스 에서 까지 볼 수 있었던 이 기현상은 새벽 동이 틀 때까지 계속되었는데, 마치 별들이 사방 팔방으로 쏘아대는 것처럼 온 하늘을 불꽃 놀이로 수를 놓았다.”

C.A. Young 씨가 쓴 “Mannual of Astronomy” p.469 에는 “유성들이 떨어지는 현상 가운데 가장 놀라운 현상은 1833년도 11월 12일에 일어났던 것으로서 5~6시간 동안 한 시간에 약 20만개씩 이상의 별들이 떨어졌다” 기록하고 있다. 그 당시 신문들은 별들이 마치 선 과실이 대풍에 흔들려 떨어지는 것 같았다고 성경의 표현 자체를 빌려 대서특필함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다시 성경 예언으로 집중시키었다. 이 경이로운 현상은 그 전날 저녁 9시쯤부터 시작되었으며 새벽 4시에 그 절정을 이루게 되었다. 그 밤은 아예 유성들로 빽빽히 가득 찬 하늘이었다고 사람들은 말할 정도였다. 마치 수천 개의 유성들이 하늘 중간에 모였다가 터져 나오는 것 같았고, 별들의 폭풍우 같았다. 떨어지는 유성들의 크기는 보통 별들과 같았고 어떤 것들은 달의 크기처럼 크게 보이는 것들도 있었다. 이 현상은 성경의 예언 성취의 면에서뿐만 아니라 천문적으로도 괄목 할 만한 놀라운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마지막 때가 된 것이었다.

5. 하늘이 종이 축처럼 말려가는 일

1833년 11월의 유성 소나기 사건 이후부터 우리는 이 세상이 산업 혁명에 휩싸이게 된 사실을 역사를 통하여 잘 알고 있다. 증기기관이 발명되고 자동차가 생겨 났으며 석유를 태우는 산업들이 농경사회를 대치하기 시작하게 된 것이다. 그러자 인류의 역사에서 없었던 새로운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다름이 아닌 공해의 문제인 것이다. 석유를 태워서 발생하는 탄산가스들이 대기권을 채우더니 하늘로 계속 상승하여 올라가게 된 것이다. 우리가 바라보는 노란 매연들이 바로 그것이 아닌가!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탄산가스들이 하늘에 있는 오존(OZONE) 층이라는 얇은 막을 파괴 시키기 시작한 것이다. 오존(OZONE) 층은 우리 이 지구의 환경을 보호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신 특별한 하늘의 층이다. 이 층은 우주에서 날아오는 해로운 광선들을 막아주는 역할을 해 주고 있고 아울러서 지구의 기류를 보호하며 그 균형을 잡아주고 있는 중요한 막인 것이다.

그런데 인류가 발명한 기계들을 굴리기 위하여 연료들을 태우면서 발생시키는 가스 때문에 이 중요한 층에 구멍이 뚫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한 결과로 해로운 우주의 광선들이 지구 환경을 꿰뚫고 들어와 피부 암들을 유발시키는가 하면 지구의 기후와 기류의 흐름에 있어서 막대한 악영향을 끼치게 된 것이다. 이 오존(OZONE) 층은 얇은 막으로서 마치 옛날 종이 축, 즉 종이 두루마리 같은 것으로 묘사 될 수 있는 것이다. 이 층이, 다시 말해서 이 하늘이 종이 축처럼 말려가는 현상이 대기권 안에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한가지 강조하고 지나 갈 것이 있다. 물론 하늘이 떠나가고 각 산들과 섬들이 움직이는 최종적인 예언의 성취는 예수께서 이 땅에 임하실 때에 일어 난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우리는 그 사건을 베드로 후서 3장과 계시록 16장 에서 찾아 보게 된다.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벧후 3:12,13). “번개와 음성들과 뇌성이 있고 또 큰 지진이 있어 어찌 큰지 사람이 땅에 있어 옴으로 이같이 큰 지진이 없었더라 큰 성이 세 갈래로 갈라지고 만국의 성들도 무너지니 큰 성 바벨론이 하나님 앞에 기억하신 바 되어 그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잔을 받으매 각 섬도 없어지고 산악도 간데없더라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 보도다”(계 16:18-20).

그러나 여섯째 인에서 말씀하고 있는 하늘이 말려가고 산과 섬들이 제 자리에서 옮기우는 사건들은 마지막 최종적인 일곱 재앙 사건들이 일어 나기 이전에 벌써 그리고 미리 이루어지기 시작하는 천연계의 재난들을 포함하는 예언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이 종이 축처럼 말려가는 현상은 공해로 인하여 하늘의 오존(OZONE) 층이 걷히어져 가버리는 현상을 포함한 것으로, 보는 것이 예언된 사건들의 흐름과 시간적인 순서들을 감안 할 때에 합당한 것일 것이다. 필자가 요즈음 여러 나라들을 여행하며 관찰한 바에 의하면 오존 층에 뚫려가는 구멍들 때문에, 그리고 태평양의 엘리뇨 현상 때문에, 지구의 온난화 현상과 이상 기류 현상들이 모든 나라들에 골고루 심각하게 일어 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살기 좋고 아름다운 기후를 자랑하던 뉴질랜드도 이상한 기후의 변화에 놀라고 있는 실정이다. 이 오존(OZONE) 층의 구멍들은 유럽과 아시아 그리고 오세아니아, 또한 북 남미 지역에서 생겨나는 이상한 날씨와 기류들의 변화를 초래시키고 있으며 지구의 환경을 파괴하는 가장 큰 요인 중에 하나로 꼽히고 있다. 그렇다! 성경 여섯째 인의 예언대로 하늘이 마치 종이 축처럼 말려 가고 있다.

6. 산과 섬이 제자리에서 옮기우는 일

이러할 즈음에 이 지구는 정말로 깜짝 놀랄 만한 재난을 당하게 되었다. 그것은 다름아닌 2004년도 12월 26일에 일어났던 남 아시아의 Tsunami(쑤나미­지진 해일)였다. 이것은 온 세계를 경악시켰던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온 세상 사람들의 시선이 이 사건에 집중되었으며 특히 성경 예언을 연구하던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이 성경 예언 상 어떠한 의미를 갖고 있는지를 살피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 일어나는 큰 사건들로 우리의 시선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돌리도록 인도하시어 우리가 어떠한 때에 살고 있는지를 깨닫고 영적으로 깨어나기를 바라고 계신다.

남 아시아의 쑤나미(Tsunami)는 인도양의 수마트라 섬 근처에 있는 바다 속에서 일어난 약 9.0 릭터 스케일의 큰 지진으로 야기된 해일이었다. 이번 해일은 인류 역사상 그 전래가 없던 놀라운 것이었으며, 신문들의 표현 그대로 The Killer Wave(살인적 파도) 혹은 The Wave of Destruction(파괴적인 파도) 그 자체였다. 약 30만 명 이상의 인명 피해를 내었고 수백만 명의 이재민을 발생시켰으며 그 재산 피해 또한 가공할 만한 일이었다. 특히 인도네시아의 피해는 극심했는데, 반다 아체 지방의 몇 마을들은 아예 그 자취가 없어졌으며 온 마을과 도시들에 살던 사람들이 한꺼번에 파도에 삼켜 버림을 당하였다. 그 피해는 인도네시아, 태국, 인도, 스리랑카 등등 기타 지역과 아프리카 지역까지 확대되며 엄청난 재난을 일으키었다. 이 일은 너무나 엄청난 사건이었으므로 더 이상 자세하게 설명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모든 사람들에게 상세히 알려진 사건이었다.

그런데 성경 예언을 연구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괄목할만한 대목은 이 해일이 그곳 지역에 있던 작은 섬들을 움직여서 그 위치를 바꾸어 놓았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실재로 섬들이 제자리에서 옮기어지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바다 속에서 일어난 갑작스러운 지진은 지축을 어긋나게 하여 한쪽 방향으로 내어 밀었으며 바닷물은 시속 약 600마일의 속도로 내 달리기 시작하였다. 시속 600마일이란 비행기의 속도를 말하는 것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속도인가! 바다물의 파도가 비행기의 속도로 달리다니! 그래서 생겨난 일이 바로 섬들이 제 자리에서 옮기우게 된 일이다. 과거 역사 중 어느 지진이 과연 섬들을 제 자리에서 옮겨 그 위치를 바꾸게 하였는가? 그러므로 이번 남 아시아 해일이 초래한 일은 성경 예언상으로 그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 또한 이 일은 계시록의 여섯째 인이 묘사하고 있는 천연재해들의 순서에 맞추어 일어난 일이기에 우리에게 예언 성취의 실감을 더욱 더 느끼게 하는 것이다.
위에서 본 것처럼, 환란 이후에, 리스본의 대지진을 시작으로 해가 어두워 지는 일, 달이 핏빛처럼 변하는 일, 별들이 무화과 나무의 선 과실이 대풍에 떨어지는 것처럼 떨어지는 일, 그 다음 순서로 하늘이 마치 종이 축처럼 말려가는 현상이 생겨나게 되었고, 또한 그 순서에 따라 바다의 섬들이 움직이는 일이 일어 난 것이다. 이러한 현상들을 어떻게 우연의 일치라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다가온 마지막 때

우리는 여섯째 인의 그 마지막 부분에 와 있는 것이 틀림이 없다. 이제 앞으로 일어날 일은 그 순서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시에 일어 날 악인들의 부르짖음이다.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각 종과 자주자가 굴과 산 바위 틈에 숨어 산과 바위에게 이르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 (계시록 6:15-17). 하나님을 믿지 않거나 복음을 순종치 아니한 자들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심판은 가장 두려운 사건일 것이다. 그들은 차라리 천연재해 때에 죽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부르짖게 될 것이다. “어린양의 진노의 날”이 이르렀다고 그들은 부르짖는다. 예수께서 이 땅에 초림하신 것은 죄인들을 불러 구원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 두번째 나타나실 때에는 의인들을 구원하시고 악인들을 멸망시키시기 위하여 오시는 것이다. 이 날은 준비되지 아니한 자들에게, 오랫동안 진리를 거절하거나 등한시 해 온 자들에게 참으로 두려운 날이 될 것이다. 진실로 우리는 성경 예언의 놀라운 성취를 눈 앞에 보고 있다!

한 가지 알고 지나가야 할 것이 있다. 계시록 7장은 여섯째 인의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기록되어 있다. “과연 누가 어린 양의 진노 앞에 설 수 있을 것인가?”라는 질문이다. 계시록 7장의 대답은 “14만 4천이다”라고 답변하고 있다. 14만 4천은 하나님 앞에서 흠이 없는 자들이라고 계시록 14장에서 그 특징을 설명하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자들이란 말이다. 더 부연하여 설명하자면,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더 이상 어기지 않는 자들이란 뜻이다. 그러므로 마지막 짐승의 표의 환란을 이기고 승리하는 자들을 성경은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계 14:12).

4부 - 일곱째 인


일곱째 인은 하늘에서 일어나는 최종 사건을 간략하게 기록하고 있는 예언이다. 본문은 이렇게 묘사한다. “일곱째 인을 떼실 때에 하늘이 반시 동안쯤 고요하더니” (계 8:1). 왜 하늘이 반시 동안쯤 고요하다고 하였을까?

그것은 두 가지 해석을 가능케 하는 말씀이다. 한가지는 일곱째 인의 모든 사건들이 다 이루어진 다음에 이르러 오는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사건 밖에는 없기 때문에, 예수님의 재림 시에 하늘이 텅 비게 된다는 묘사일지 모른다는 것이다. 하늘의 모든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께서 이 지구로 오시기 때문이다. 구속 받은 의인들을 하늘로 데려가기 위하여 하늘의 군대들이 이 땅으로 오는 것이다. 그래서 하늘의 중심인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곳이 갑자기 잠시 동안(반시 동안) 아무도 없는 조용한 곳이 된다는 것이다.

또 하나의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 그것은 이 땅 위에서 마지막으로 일어 나고 있는 최종 사건을 온 하늘이 숨을 죽이고 내려다 보고 있기 때문에 하늘이 조용하다고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늘의 모든 천사들이 거문고를 내려 놓고 찬양하기를 그치며 그들의 주의를 기울이고 있기 때문에 하늘이 고요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무엇이 그토록 그들을 조용하게 만드는 것일까?

예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인류의 죄의 짐을 지시고 신음하셨을 때에 하늘은 조용하였었다. 왜냐하면 그 예수님의 고통에 온 인류의 구원이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죄의 짐을 지시는 고통을 견디시고 마귀의 시험을 승리하셔야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가 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중요한 순간에 온 하늘의 천사들은 노래하기를 그친 채 조용히 지켜 보고 있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마지막 성도들이 이 세상의 그 마지막 환란을 통과하면서 고통 당하고 있을 때에 온 하늘은 잠시 동안 고요하게 지켜 볼 것이다. 그들이 과연 하나님과 그 진리에 충성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 줄 것인가? 과연 마귀의 마지막 공격에 담대히 서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순종하는 증인들의 모습을 보여 주게 될 것인가? 온 하늘은 노래하기를 그친 채 잠시 동안 고요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마귀는 인간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수가 없으며 또한 지킬 필요가 없다고 고소하여 오고 있다. 그러므로 마지막 주자인 여자의 남은 교회는 참으로 중요한 증인의 입장에 서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옳으신가? 아니면 마귀의 고소가 옳은 것인가를 보여 주는 마지막 증인의 출두가 생기는 것이다.

여하튼 일곱째 인은 마지막에 생길 짧은 시간의 일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므로 현재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우리가 여섯째 인의 그 마지막 부분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일이다.

예수께서 곧 오신다! 온 세상은 그 앞에서 두 무리로 갈라져서 서게 될 것이다. 양과 염소의 무리로 분리되어 서게 될 것이다. 의인과 악인의 무리로 갈라져서 서게 될 것이다. 알곡과 가라지로 분리되어 서게 될 것이다. 여러분은 과연 어느 무리에 속하게 될 것인가?

일곱 인에 대한 연구는 우리에게 심각한 결정을 촉구하고 있다. 과연 어린 양의 진노의 날에 우리는 어느 편에 서 있게 될 것인가? 이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질문이 아닐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하자!